토론

​[6411의 목소리] 한해 두 번의 대출로 넘긴 가전제품 청소노동

202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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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은 6411 버스 속의 사람들처럼, 지치고 힘들 때 함께 비를 맞고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겠습니다.

[6411의 목소리] 한해 두 번의 대출로 넘긴 가전제품 청소노동 (2024-03-04)

조수형ㅣ가전제품 분해 청소노동자

필자가 드럼세탁기를 분해해 청소하고 있다. 필자 제공


나는 가전제품을 분해해서 청소하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한 지 15년이 됐지만 여전히 이 직업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가전제품들이 의외로 많은 세균과 바이러스 등에 오염돼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 직업이 생겼다.

이 일은 청소업에서도 좀 더 특화된 영역이다.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분해 청소하는 일은 단순히 장비와 기술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문성과 현장 경험이 필요하다. 모델마다 분해·조립 방법이 달라 새 제품이 나올 때마다 계속 연구하고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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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인터넷이나 유튜브로 분해·조립 방법을 배우고 창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점점 늘고 있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가장 큰 이유는 비수기가 길어 안정된 수입 보장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겨울이 끝나가지만 계속되는 불경기 여파인지 주문이 급격히 줄었다. 나 역시 사업의 존폐를 염려할 상황이다. 올해 들어 문을 닫은 업체들도 상당수 보인다. 아주 큰 힘을 쓰는 일이 아니기에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시작했는데 녹록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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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제품 분해 청소에 걸리는 시간은, 대개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서너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통돌이 세탁기는 수조를 들어내고 고객과 함께 오염도를 확인한 뒤 고압세척기와 곰팡이 제거제로 세척을 한다. 에어컨은 열교환기까지 분해해서 약품세척, 고압세척, 스팀세척을 하고 열교환기 탈취 후 다시 제품을 조립하고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한다. 냉장고는 내용물을 전부 비운 다음 청소를 해야 한다. 트레이를 분리하고 내부는 세척액을 묻혀 닦아준다.

가전제품 분해 청소 일은 고객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계절과 경기가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봄부터 여름까지가 가장 많고 겨울은 완전한 비수기다. 세균과 바이러스, 곰팡이 등은 계절과 상관없이 번창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육안이나 냄새 등으로 청소 시기를 판단하는 탓에 날씨가 선선해지거나 추워지면 위생에 대한 경각심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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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작업 가격은 업체마다 다르지만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등은 적게는 6만~7만원에서 많게는 19만~20만원에 이른다. 냉장고는 내부 음식물을 버려 달라거나 수납정리까지 맡길 경우 가격은 더 오른다. 작업 시간과 노동 강도에 비춰보면 싼 편이라 할 만하다.

한철 벌어서 1년을 먹고사는 직업들은 대개 단가가 높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전제품 청소를 하는 지인에 따르면, 제품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우리보다 평균 3배 이상 높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노동이 천시되어서인지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요즘엔 생활서비스 앱이 생기며 가격 인하 경쟁을 부추긴다. 이런 앱들의 수익 창출 시스템이 작업자에겐 가혹하다. 고객 문의가 들어와 견적서를 보내면 계약이 성사되지 않아도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견적서를 수십장 보냈지만 한 건도 일을 못 하게 돼도 수수료를 내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직업의 마지막 어려움은 고객 대면이다. 고객과 장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부담감, 정신적 압박감은 스트레스로 연결되기도 한다.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고객을 만나면 비위를 맞추는 것 또한 쉬운 일만은 아니다. 더운 날 여섯 시간 이상을 작업하면서 물 한잔 얻어먹지 못한 적도 있고, 냉장고 청소 후 집 안에 음식물 냄새가 난다고 냄새를 지우고 가라고 했던 일도 있다.

불량한 제품인데 작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있다. 작업 전에 제품이 잘 작동되는지, 소음은 없는지, 버튼은 잘 눌러지는지 등 철저한 사전 점검을 하는 이유다. 한번은 오래된 세탁기를 분해 청소하고 조립을 마친 뒤 재작동을 하는데 전원 버튼 작동이 오락가락했다. 세탁기 조립을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전원 기판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얘길 해도 고객은 수긍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도리가 없다. 6만원 벌러 갔다가 15만원짜리 중고 세탁기를 사 주고 와야 했다. 모든 고객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작업자를 믿어주고 배려하는 고객도 많다. 그럴 땐 일에 보람도 느끼고 내심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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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대출로 견딘 2023년. 겨울을 지나 봄을 맞지만 불경기인 요즘이 가전청소업의 현 모습이며 내 모습이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 선택인지 의심도 해본다. 하지만 앞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모든 게 나빠도 전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일터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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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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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화되는 경제위기가 여러 노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안전당치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두 번의 대출은 사실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몫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우리가 접하는 모든 노동을 차별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모든 노동이 안전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가 더 정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 해를 '버텨'내기 위해 두 번의 대출이 필요하고, 일하러 갔다가 돈을 물어주거나 좋지 않은 태도의 고객의 부당한 대우를 겪어내야 하고, 일을 하지 않아도 플랫폼 업체에 수수료를 내야한다니... 내 손과 기술로 열심히 일을 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니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어떤 노동은 다른 노동보다 너무 저평가될까,, 생각이 깊어집니다.

노동자들을 위한 나라가 생기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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