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당신 곁의 성소수자 노동자가 (2022-06-15)
지아(필명)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2022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들머리에서 2022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기념대회 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벌써 10년 전이네요. 면접을 보러 병원에 방문했던 날이 기억나요. 그때 저는 무릎을 덮는 단정한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었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원래 저는 치마나 하이힐과는 거리가 멀어요. 당시에도 바지 정장을 입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바지 정장을 보여달라는 나의 말에, 옷가게 점원이 다리에 흉터가 있냐고 묻더라고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바지 정장을 입은 여성 지원자는 강한 이미지라 면접관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었어요. 간호사가 되고 싶어 대학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했기에, 눈 꾹 감고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면접을 봤던 거죠.
한동안 그때 저의 모습이 부끄러웠어요. 제가 병원에서 선호하는 이미지를 수용했기에 최종 면접에 합격했다는 생각 때문에요. 성소수자 친구 중에는 이력서 사진이 여성(남성)답지 않아서, 면접에서 눈으로 보이는 성별과 서류에 적힌 성별이 달라서 번번이 취업 문턱에서 미끄러진 경우가 많거든요. 물론 회사에선 서류나 면접 탈락 사유를 알려주지 않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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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입사하고 폭풍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아직 근무복도 익숙하지 않은데 환자가 쏟아지듯 배정됐거든요. 너무도 버거운데 환자 생각하라는 말만 하더군요. 조금이라도 힘들다는 티를 내면 저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는 반응이 돌아왔어요. 이에 여러 동료들이 ‘응사’ 하더라고요. 사직서도 내지 않고 도망치듯 퇴사하는 ‘응급 사직’이요. 저는 잠을 줄이고 밥을 먹지 않으면서까지 버텨냈어요.
그런데 회식은 힘들었어요. 회식에서 누가 저에게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어요. 남자친구는 없지만, 여자친구는 있는 저는 긴장해서 “있다”고 대답해버렸어요. 얼마나 만났는지, 남자친구 직업은 무엇인지, 질문이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지더군요. 대충 둘러대는데 머리가 아팠어요. 왜냐하면 한국은 이십대 여성과 남성의 인생주기가 살짝 다르거든요. 대부분 남성은 군대에 가잖아요. 급조한 내 연애 이야기가 누군가의 계산에 안 맞았어요. 급기야 남자친구 군대 어디 다녀왔냐는 질문까지 듣는데, 등에 땀이 줄줄 흘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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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죠.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이제 눈을 낮추고 남자친구 사귈 노력을 하라는 말을 듣고, 회식마다 여자친구 없는 남성 직원과 엮어주더군요. 나를 보고 엄지를 척 들면서 집적거리는 남자 직원도 있었죠. 그래서 얼마 전부턴 다시 “애인 있어요”라고 대답해요. 물론 당신에게 내 애인이 여자라고 말하고픈 마음은 없어요.
예전 한 동료가 재미있는 거 알려주겠다며 영상을 보여줬어요. 게이 커플이 자신들의 일상을 촬영한 영상일기였는데, 게이 커플 중 한명이 우리가 아는 지인이었어요. 동료는 영상 속 지인을 가리키며 “게이”라고 웃으면서 말하더라고요. 그때 표정과 말투가 잊히지 않아요. 묘하게 경멸하는 뉘앙스였거든요. 그나마 직접적인 욕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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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변희수 하사의 기사를 읽었다고 말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그동안 성소수자의 투쟁은 우리만의 투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거든요. 뉴스를 잘 보지 않는 당신마저 변희수 하사를 안다는 사실에 이번 투쟁은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똑같았어요. 트랜스젠더 변희수라는 이유로 노동자 변희수는 모든 것이 부정당했고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다시 군대에 돌아가기 위해 싸우던 그녀는 자신이 군대에 존재하면 안 되는 이유가 적힌 54쪽 분량 보고서까지 받아야 했어요. 최근에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변희수 하사가 군대에서 쫓겨난 것은 옳지 않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녀가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수많은 고민 끝에 나와 나의 노동을 지키기로 선택했어요. 그래서 여전히 나의 옆자리에 앉은 당신조차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가까운 가족이 갑자기 상을 당했는데 관리자가 퇴근을 시켜주지 않아서 울면서 노동했던 동료와 임신 막달까지 아무도 업무량을 조절해주지 않아서 무리하다 결국 하혈해서 병원에 입원했던 동료의 얼굴이 떠올라요. 눈 밖에 나면 일이 험난해진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주는 일터에서 많은 노동자는 입을 열기보다 그냥 일터를 떠나는 게 쉽게 느껴져요. 오늘도 많은 동료가 침묵을 선택하거나 병원을 떠나고 있죠.
저는 성소수자를 위한 일터가 모두를 위한 일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두를 위한 병원을 만들겠다는 작은 다짐으로 민주노조에 가입했어요. 요즘 저는 모두가 10년 뒤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가만히 앉아서 일터가 바뀌기만을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늘 그랬듯 지금 나의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려고요. 그 변화에 당신도 함께하길 기원하며 이만 글 줄일게요. 우리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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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코멘트
3동료들과 일하다보면 그 개인에 대해 궁금해질 때가 생는건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궁금함에도 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게 오히려 상대에게 무관심한게 아니라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회식자리의 이야기를 읽는데 저도 진땀이 나네요ㅠ
누구나 나다운 모습으로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바랍니다.
저도 제가 있는 곳과 제 주변부터 그런 일터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힘을 보태보려합니다.
다양성은 존중하되, 강요를 할 수 없게 뭔가 조치가 취해져야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