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자책하고 망설이고 번뇌하는 친구들에게 _첫 직장 체험기

20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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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하고 위로해요 :)



2개월에서 6개월 짧은 인턴만 반복하다 마침내 2년 8개월, 가장 길게 다닌 직장을 퇴사한 뒤 2달반 가량이 흘렀다. 어떻게 잘 살고 있나?! 

첫 달은 계속 아팠다. 쌓인 피로를 게워 내듯,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둘째 달에 접어들 무렵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직장생활동안 나를 가장 괴롭혔던 일이 조금도 괴로워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존감 도둑

나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 그런데 칠칠 맞다. 칠칠 맞은 사람이 완벽을 추구하면 자존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기대보다 못하는 자신에게 계속 실망하기 때문이다. ‘왜 이것밖에 못해’, ‘이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오늘도 못했네’, 본인에 대한 좌절이 반복되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찍게 된다.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거나, 스스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더욱 심해진다. 잘하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하고 좀먹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비영리법인(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경제지역네트워크법인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일을 하면 할수록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사진: Unsplash의 Matthew Henry


무엇이, 왜, 힘들었나

사무국장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행정회계사무다. 그런데 나는 행정회계사무업무를 싫어한다…  일단 꼼꼼히 따지는 성격이 아니고, 더 근본적으로는 이미 갖춰진 툴이나 규정에 따라서 이것저것 그냥 맞춰 줘야하는 일을 싫어한다. 뭐든 왜를 묻고 원리를 묻고 이해해서 이런 의미가 있구나 스스로 납득해야 한다. 이런 사람과 행정사무업이 만나면 고구마 백 개 먹는 현장이 그려진다.

사무직원이 단순 제출하는 보고서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제출하는 프로세스를 왜 갖는건지 고민하고, ‘왜 이렇게 하는 걸까’, ‘이렇게 제출하기보다는 이런 프로세스가 좋을 거 같은데’를 넘어서 행정의 비대화 문제까지 건드리며 사회 비판을 하고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냥 해! 그런 일은 그냥 쳐내는 거야 바보야!” “그럴 시간 줄여서 다른 걸 해! 회사 입장에서는 네가 그러고 있는게 손해라고!” 나 같아도 답답해서 한마디 해줄 것 같다.

나도 안다. 그런데 나는, 그냥 하는게 안된다. 결과보고서를 쓸 때도, 공시용 엑셀파일을 만들 때도, 그 일을 하고 있는 내가 그 일이 의미 있다고 느껴야 한다. 이걸 내려놓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지기 시작하면서, 하고싶은 활동을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해서 포기하고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기계적으로 내려놓는 내가 무서워졌다.

숨쉬듯 당연하게 가져온 시각, ‘왜’를 묻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않아도 그냥 처리하는 내가 낯설었다. 일에 따라 다르게 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런 일을 할 때의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사무국장은 예상했던 것보다 그런 일을 할 때가 많았다. 일을 하고 있으면 지인들이 말했다. “너 지금 죽어있는 것 같아.” “눈빛이 죽어 있어.” 일을 할 때도 나로 있고 싶어서 이쪽 일을 택한 건데, 나 지금 여기 왜 있나, 현타가 왔다.

하기 싫어하는데 당연히 잘 할리 없다. 게다가 본인 사업과 지역활동을 병행하시는 분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이런 쪽의 만렙들과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행정회계사무증빙을 쉽게 쳐내고 분담하고 최소화해서 하고자 하는 활동까지 멋지게 해내시는 분들, 일당백으로 다 해본 만렙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 속에서 나는 ‘왜 이것밖에, 이렇게밖에 못할까’,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 끊임없이 자책하며 말라비틀어져 갔다. 자괴감이 극한을 찍었을 때 사무국장을 그만두고 나왔다.

 


내가 못하는게 아니었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나서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행정회계사무 업무능력이 또래친구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이다..!!

특히 나는 사수가 없어서 모든 업무를 네이버에 검색하고 공공기관과 은행에 전화문의를 해가며 처리했는데, 가르쳐주지 않은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모습에 일반회사에서 사무 업무를 맡고 있는 친구들이 문화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급기야는 내가 행정회계사무증빙을 알려주고 대신 처리해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내가, 행정회계사무를, 가르쳐주고 있다니...

가장 놀랐던 점은 업무 속도였다. 나는 항상 내 업무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해왔다. 순식간에 쉽게 쳐내고 다른 일을 하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기 때문이다. 큰 콤플렉스였고 자존감을 앗아가는 주범이었다. 그러나 일반회사에서 사무업무 하나만 담당하던 사람과, 2년 8개월간 이걸 어떻게 좀 빠르게 쳐내고 다른 활동을 해볼지를 연마해온 사람의 속도차이는 컸다. 나오고 보니 왠걸,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정회계사무업무를 매우 잘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걸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자괴감이 들고 힘들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걸까? 잘하고 있었는데, 남들보다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뭣이 중헌디

상대적인 기준에 나를 두면 잘해도, 못해도, 항상 조마조마하다. 

잘하고 못하고, 뛰어나고 열등하고, 앞서가고 뒤쳐지고…상대적인 기준으로 스스로를 비교하고 평가하며 상처 주고 상처입지말자.

자신만의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돌아보자.

나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가. 어떤 사람이고 싶나.

나 내가 진짜 원하는 거 하고 있나.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나. 그 방향으로 가고 있나.

바라는 방향대로 가고 있다면 속도나 숙련도는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가져가면 된다.

누가 뭐라하든 내 페이스대로. 서두르면 넘어진다. 쉼도 필요하다.

계속 생각하고 있고 바라는 방향을 향해서 노력하고 있다면 언젠가,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되어 있을 것이다.


 사진: Unsplash의 Emma Simpson


내 길이 아니어도 남는다. 


청년이 청년답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겁없이 시도하고, 열정적으로 끈덕지게 해보고. 

망설여지는 이유가 뭘까? 금방 그만두는 이유가 뭘까?

한국은 다양한 삶의 모습과 속도와 노고가 존중되지 않는다. 성공한 삶의 상과 가치, 시기별 과업이 정해져 있고 그에 맞춰 비교하고 평가하는 일상이 난무한다. 수군대는 말, 냉소적인 눈초리, 동일한 기준에 따라 어떤 이는 동경과 자랑의 대상이 되고, 어떤 이는 한심한 인사가 되는 장면을 목격하며 저마다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안고 산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항상 시간이 없다. ‘몇 세까지 이정도는 해야하는데’, ‘시간낭비하는 게 아닐까’ 재고 따지게 된다. 실패로 배울 여유도 없다. 찍먹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빨리 갈아타야 한다. ‘이게 맞을까’, ‘빨리 다른 길을 알아봐야하지 않을까’, 계속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맞지 않는 일을 장기간 꾸역꾸역해본 결과 갖게 된 마음가짐은 설령 내 길이 아니더라도 남는게 있다는 확신이다.

나는 여전히 행정회계사무가 싫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의 어떤 점을 내가 싫어하는지, 왜 나랑 맞지 않는지를 알게 되었다. 덕분에 그런 성향을 건드리지 않는 다음을 모색하게 되었다.

나는 정부지원사업을 하는 것이 싫다. 정부 돈을 받아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지리하고 자질구레한 행정처리를 수반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면서 안하는 것과 몰라서 못하는 것은 다르다. 덕분에 내게는 언제든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자금이 필요해지면 어디에 어떻게 뛰어들어 지원을 받아야겠다는 전략이 생겼다.

사업제안서를 쓰고, 발표자료를 만들어서 발표하고, 사업비를 받아 행사, 교육, 회의를 열고, 정산증빙하고, 창업지원기관도 되었다가 창업팀대표도 되었다가, 비영리법인 연간 행정회계사무도 두어 번 돌려 보고, 이것 저것 다 하느라 힘들었지만 덕분에 어떤 파트든 필요하면 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업무와 프로세스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여러 사업과 사업체 전반을 살필 줄 아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그런 내가 남았고, 그런 경험이 남았다. 그리고 사람이 남았다

일을 그만두고도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평생 크고 작게 도움을 주고 받고 진심으로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해줄 사람들이 생겼다. 사람이 만사다. 삶에 있어 가장 귀중한 자산을 얻었다.

 


진짜 배워야 하는 것

그러니 궁금하다면, 심사숙고했다면 망설이느라 힘 빼지 말고 일단 해보자. 예상했던 것과 다를 것이다. 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남을 것이다.

찍먹으로는 부족하다, 조금만 더 해보자. 이게 어떤 일인지 파악해서 나의 어떤 성향과 맞지 않는 건지, 그래서 다음은 어떤 쪽으로 찾아보면 될지 스스로 답을 얻을 때까지는 다녀보자.

어떤 경험이든 경험을 통해서 진짜 배워야할 것은 나다. 내가 어떤 점을 힘들어하는지, 좋아하는지,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성향을 지켜갈지를 충분히 느껴, 나를 배우게 될 만큼은 경험해보자.

성공이든, 실패든, 후회든, 미련이든 수많은 과정을 엮어 나를, 내 인생을 자아내자.


사진: Unsplash의 Mathieu Stern


당신의 첫 직장은 어떠했는가? 무엇을 배웠는가? 댓글을 통해 경험과 격려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번뇌와 용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오늘도,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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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다양한 삶의 모습과 속도와 노고가 존중되지 않는다.“ ”내 길이 아니어도 경험은 남는다.“에 무척 공감됩니다. 저도 다섯 가지 업계와 직무를 경험했는데요. 매번 다른 업계, 다른 직무로 점프하면서 늘 새로운 일을 배우느라 애썼던 것 같아요. 연결되는 지점이 영 없어보이던 그 일들도 돌아보니 모두 지금의 제 자산이 되어 남아있더라구요.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해요!

딸기 비회원

업무는 다르지만 참 많이 공감됩니다. 저는 일을 쉬기 시작한지 채 한달이 되지않아서 지금 엄청 아픈데^^;(퇴사 후 수순인가봐요ㅎㅎ) 아프면서 깨달아가는 일들도 있으니 충분히 제게 시간을 주려고요. 저도 쉬는 동안 몰랐던 제 모습을 응원하길 바라면서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최근 사회초년생으로써 왜 일이 빨리 늘지 않는지, 알에 갇혀서 성장이 멈춘 것 같은 스스로에 대해서 답답함과 분이 가득했었는데..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모를 위로를 얻었습니다. 솔직한 나눔에 감사합니다.

조재학 비회원

걸어온 과정의 경험에 성찰이 더해져 더 단단하게 현실을 걷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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