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열었다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화염병이 촛불로, 촛불이 응원봉으로 변하기까지 40년이 지났다. 격렬한 저항의 시대를 지나 평화로운 시위가 자리 잡았고, 이는 다양한 시민 참여로 발전했다. 이 모두가 시민이 만들어낸 성과이자 역사이다. 6공화국의 과제와 한계 :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면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시민이 광장에서 계엄군을 설득하고 탄핵을 이뤄내는 광경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시민이 서로 따뜻한 커피와 식사를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온 이들을 위해 버스를 대절하며, K-팝 음악에 맞춰 춤추고 구호를 외치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광경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내재화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한 지도자들이 오랜 준비 끝에 추진한 계엄조차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만을 경험한 젊은 세대는 계엄 자체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공화국의 성적표는 실망스럽다. 6공화국의 대통령들 가운데 3명이 탄핵 소추를 당했고, 이 중 2명은 탄핵이 인용되었으며, 2명은 감옥에 갔다. 가족이 감옥에 간 사례도 2건이나 된다. 군인, 정치인, 기업인, 변호사, 검사라는 대통령의 출신을 보면 우리 사회가 여전히 4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87년 이전을 살아온 정치, 경제, 관료 엘리트 집단 간 갈등은 진보와 보수라는 구도로 포장되어 국민을 갈라치지만, 이는 국민의 일상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제왕적 대통령의 자의적 권력 행사는 사회, 경제, 안보,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요인으로까지 증명되었다. 시민 중심 민주주의로의 전환 : 시민의회 민주주의의 여정에서 1987년에 독재자의 권력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게 넘어간 것은 커다란 변화이자 성취였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주의를 내재화한 국민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한 단계 더 발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2016년 첫 번째 탄핵의 상징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었다면, 2024년 두 번째 탄핵의 상징은 다채로운 응원봉이었다.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여러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힘을 믿고 다양성을 포용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제 국민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도화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행정과 의회의 권력은 시민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8년 전 촛불 시위 이후 잠시 열렸던 시민 참여와 협력의 공간을 다시 확대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정권 교체로 중단되었던 정부, 지자체, 마을, 시민사회 등 사회 곳곳에서 시민 공론장과 공론화, 시민 참여 플랫폼과 민관 협치의 장을 다시 열고 더욱 성숙시켜야 한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대화하는 단계를 넘어, 이를 정책과 사업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론화 사업과 같은 프로그램의 높은 비용과 형식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역 및 의제별로 상시 운영되는 시민의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구 구성을 반영해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 주요 현안과 미래 과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숙의하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시민의회는 다양한 방식과 기간으로 운영되며, 행정과 의회를 견제하고 협력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며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시민의회를 통해 공개하는 정보와 숙의를 통해 발견한 다양한 관점은 우리 사회를 더욱 성숙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더불어 계엄과 탄핵의 순간에 국민이 가졌던 의문을 해소해야 한다. 군인들이 국회의 창을 깨고 본회의장으로 난입한 순간 어떤 국민은 "왜 국민이 스스로 계엄을 해제할 수 없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본회의장에서 탄핵을 의결하려던 때 나타나지 않는 국민의힘 의원을 보며 "왜 국민은 저들에게만 의결을 맡겨야 하는가? 그리고 왜 국민의 뜻에 반하는 국회의원을 지켜만 봐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국회의 순간이 끝나고 헌재의 시간이 왔다고 모두가 이야기하던 순간에 "왜 헌재의 결정을 다시 기다려야 하며 국민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가?"라는 의문도 생긴다. 이 의문의 답도 우리는 다시 찾아야 한다. 다채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과제 또한, 사회를 분열시키는 플랫폼과 알고리즘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시민이 계엄을 막아내고 탄핵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을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인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첫 국가로 만들었다. 허위 정보와 혐오 발언을 확산하는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미얀마에서 소수민족의 대학살을 초래하기도 했다. 혐오와 여론 조작에 취약한 플랫폼이 분노를 증폭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상황을 막으면서도, 시민이 서로 연결되어 협력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사회 현안에 대해 시민의 목소리를 모으고, 대화의 장을 여는 공간, 시민이 이슈를 모으고 팩트체크를 하며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안전한 대화가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는 안전하고 믿을 수 있고 영향력 있는 시민 광장으로서의 플랫폼이 절실하다. 사회 통합을 위한 노력도 필수적이다. '국민'과 '비국민'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갈라치는 세력을 단호히 처단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대화하고 협력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가 직면한 사회, 경제, 국제, 기후 위기와 같은 거대한 문제는 시민의 참여와 협력 없이는 극복할 수 없다. 혐오와 갈등, 무관심과 각자도생을 극복하고, 신뢰와 협력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시민의 힘으로 우리 사회에 축적해야 한다. 시민이 만드는 민주주의의 미래 촛불이 흑백이라면, 응원봉은 다채롭다. 민주주의를 내재화하고 미래를 살아가는 시민의 열망 속에서, 우리는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기회를 맞이했다. 한편, 지금은 비인간과 결합한 신인류를 상상하는 기술 엘리트들의 세상을 막고, 존중과 포용, 신뢰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판가름하는 문명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이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응원봉을 든 시민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며, 동시에 시민 스스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 기회는 발전한 자본주의, 제도화된 민주주의, 자의적인 법치주의의 한계를 경험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시민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다. 연결하고 협력하는 시민이 나서서 멋진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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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페인즈를 통한 디지털 시민 광장의 복원
새로운 기술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기술이 미디어에 변화를 일으킬때는 사회의 권력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불과 20년 가량 전에 대중에게 보급된 인터넷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고 분석하는 인터넷과 정보 기술은 연결과 축적의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대할 가능성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이 기술은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유롭고 평등하고 서로 협력하는 사회, 즉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비결로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 가능성을 믿고 특히 미디어 플랫폼 분야에서 일을 해 왔다. 그렇게 약 20년 가량 여러 미디어 플랫폼을 만들면서 깨달은 점 세가지가 있다. 첫째, 기술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다만 그 가능성은 누군가의 손에서 구현이 되어야만 실현되고 그 누군가의 가치관이 반드시 반영된다. 종이에 잉크를 묻혀 읽던 신문 기사가, 온라인으로 옮겨오는데는 뉴스 서비스를 기획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기사 아래에 사람들의 댓글을 달도록 결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댓글이 아닌 본격적인 글을 쓰는 별도의 서비스를 만들자고 결정한 사람들이나, 블로그에 올라오는 컨텐츠도 기사처럼 다루자고 결정한 사람들이 있어서 시민 저널리즘이란 영역이 생겼다. 이 결정들은 사람들의 행동과 사고를 확장하기도 하고 제약하기도 하는데, 결코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좋아요만 제공하기로 설계자가 결정한 서비스는 다른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렵고, 실명 인증을 할지 말지 판단도 설계자가 결정한다. 더 많은 어그로를 끌어서라도 트래픽을 늘리기로 설계자가 결정한 서비스는 개인정보나 혐오, 허위조작정보를 지키는데 우선순위를 두기가 어렵다.  둘째, 기술은 계속해서 개선의 여지를 보여주며 발전한다, 다만 개선도 누군가가 구현을 해야 실현된다. 지금 기술로 인해 생겨난 많은 문제들을 기술을 통해서만 모두 해결해야 하지는 않지만, 상당 부분 기술 스스로 개선을 해나가야 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갈등과 혐오로부터나 통제와 실질적인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인터넷 미디어 환경을 만드는 길은 더 사회적 논의와 합의와 함께 실질적인 기술의 개선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도 역시나 누군가가 그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투자해야 실현된다.  안타깝게도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할 기술을 구현하고 개선하고 싶었던 시도들은 2023년 현재는 많이 위축된 것 같다. 그리고 인터넷 공간은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자극과 소비로 점철된 공간이 되어 가는 듯 하다.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고라와 블로거뉴스 같은 시민 공론장과 시민 저널리즘을 표방하던 서비스는 문을 닫았고, 지난 정부에서 호황을 누리던 국민청원이나 민주주의서울, 광화문1번가 등의 시민참여플랫폼도 사라졌다. 트위터는 소유주가 바뀌면서 한 사람의 결정에 휘둘리는 종잡을수 없는 서비스가 되었다. 밤늦게 물건을 주문해도 순식간에 받아 볼 수 있는 시대, 스마트폰으로 주식을 거래하고 노동을 거래하는 시대에, 시민이 목소리를 낼 공간, 그 목소리가 잘 모여서 새로운 합의와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플랫폼이 없다는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일을 20년간 해 온 입장에서는 안타깝고 아쉽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인터넷 기술을 활용해 바라던 세상은 어떤 곳일까?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거나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고, 개인과 개인이 모여 이룬 집단이 함께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을 거쳐 새로운 결정을 함께 만들어내는 사회. 어쩌면 우리는 인터넷 이전의 시대에 비해서는 분명 이 이상에 가까워졌을수는 있다. 연결과 축적은 분명 늘어났으니까. 다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연대를 전제로 한 연결과 축적은 많이 신경쓰지는 못했다. 사회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결과가 안타깝고 아쉽더라도 더 나은 연결과 축적의 기술과 문화와 제도를 만듦으로써 누구나 권리와 안전을 보장받고, 집단으로써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하는 미디어 플랫폼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물건을 사고, 일꺼리를 찾고, 투자를 하고, 흥미로운 영상을 즐기는 것만큼, 개인들이 사회의 이슈를 파악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고, 다른 구성원과 대화하고, 때론 힘을 모으고 때론 공론을 만들고 결정에 이르기까지 하는 플랫폼은 어떤 사회든 꼭 필요하다. 빠띠가 캠페인즈를 통해 시민의 공익 활동을 증진하고, 시민들이 토론을 펼치는 공론장으로서의 시민 광장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 까닭이다. 플랫폼을 만들면서 느낀 세 번째는, 결국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플랫폼이 성공한다. 우리는 늘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만, 때론 시대가 변해 사람들의 필요가 무르익으면 그에 맞는 기술들이 생겨난다. 딱 맞는 기술이 없으면 기존의 기술을 변형해서라도 사람들은 필요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딱 맞는 기술을 제공하는 플랫폼들이 나타난다. 지금 시대는 중요한 의사결정에 더 많은 사람들, 혹은 개개인, 혹은 나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시민들이 믿기 시작한 시대다. 정부든 정당이든 기업이든 혹은 비영리기관이든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해관계자나 대중의 공감과 신뢰, 적어도 이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시대다. 물론 당장에는 다중의 기대와 비판을 무시하거나 기만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남아 있겠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 일반은 개인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에 돌입했다. 개인의 의견이 집단의 합의로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과 그 과정에 대한 훈련과 경험은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이지만, 민주주의 서울을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만난 많은 시민들과 기관은 확실히 달라진 세상에 맞추어 의견을 내고 이슈를 만들고 공론에 참여하며 다수 시민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요약하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세상은 달라졌고 시민들의 기대는 무르익었다. 이제 더 나은 민주주의와 공론장, 미디어 기술이 사회와 시민을 따라가야 할 차례다. 혹은 이제야 더 나은 연결과 축적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내고 모두가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는 기술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빠띠는 이 시대 변화에 맞추어 “디지털 시민 광장”으로서의 플랫폼을 다시 복원하는 비영리 플랫폼 협동조합을 목표로 한다. 누군가가 나서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미디어 플랫폼을 실현해야 한다면, 그 누군가 중의 하나가 우리였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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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공론장을 만드는 집단지성과 인공지능
초거대인공지능 시대의 초입, ‘인공지능은 앞으로 무엇을 대체할까?’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쏟아낸다. 기회로 여기든, 위기로 여기든 변화가 일어난다는 전망에 누구나 동의한다. 당장은 인간의 노동 중 대체되거나 사라질 것들을 각자 예측하지만, 한켠에선 기존에 사회를 운영하면서 사용한 여러 과정을 인공지능으로 대입해 보기도 한다. 정치권에서 챗GPT에 정책에 대한 평가나, 상대 진영의 정치인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는 일화가 들린다. 해외에서는 의회의 연설문을 챗GPT로부터 생성해서 발표하기도 했단다. 챗GPT를 이용해 신과 대화해 보라는 서비스가 주는 인상은 흥미롭지만, 어떤 정책이 나은지 평가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초거대인공지능이 내어놓는 답을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활용해도 되는지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보다는 염려가 앞선다. 집단적 의사 결정에서 인공지능은 공론장의 대안일 수 있을까? 특히나 지난 몇년간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벌어진 결과를 부정적으로 경험했다. 상대 진영에 대한 악마화, 서로에게 귀기울이기는 커녕 스스로의 생각을 더욱 강화시키는 필터 버블, 출처를 알 수 없는 허위조작정보와 국가 기관마저도 나선 영향 공작(influence operations),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는 이들의 자살 등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경험한 혐오와 차별, 갈등은 사회가 맞닥뜨리는 여러 복합 위기와 맞물리며, 각자도생의 전략이 더욱 타당하게 느껴지게 만들었고, 우린 집단지성의 실현이라는 인터넷 초창기의 희망 섞인 기대는 어느 순간 잃어버린채 집단이나 공동체에 대한 믿음까지도 잃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이 내어놓는 답은 다양한 의견이 경쟁하고 협력하고, 조정과 합의를 거쳐야 하는 (그 과정에서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서로 혐오하고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우리는 많이 보았기에) 인간들의 의사결정보다는 누군가에게는 나아 보이기도 한다. 인공지능은 편파적이지도 않고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인간이 만든 문서를 인공지능이 모두(?) 이해(?)해서 요약했다는 답변은 루소가 상상했던 사회의 일반의지처럼도 보이기도 한다. 인공지능이 바꿀 공론장의 미래 하지만 우리가 인간과 인간으로서 구성된 사회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집단 지성의 발전과 인공 지능의 도입을 결코 앞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긍정하는 발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선 초거대인공지능이 인간이 집단적으로 축적한 데이터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클라우드, 소셜 플랫폼과 빅데이터는 집단지성과 인공지능이 서로 의존하며 상호 발전해 온 기술임을 보여 주는 용어들이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시공간을 가로질러 수많은 연결을 창출해냈고, 이 연결을 통해 생산되는 데이터를 클라우드에 축적했다. 소셜 플랫폼에 모인 수많은 컨텐츠와 사용자 행위 데이터를 빅데이터로 모아, 네트워크로 연결한 거대한 서버 자원을 통한 후 지금의 초거대인공지능이 답변을 구성하도록 만들어내는데 활용했다.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인공지능은 오히려 인간 집단지성의 한 유형이자 결과인 것 같고, 블록체인 기술보다 웹3.0이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린다. 또한 인공지능이 기본적으로나 제대로든 작동하기 위해서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을 논의에서 빼 두더라도) 사람이 할 일은 앞으로도 많다. 지금의 챗GPT로서는 피할 수 없는 환각(Hallucination)을 완화하기 위해 인간의 피드백(RLHF, Reinforcement Learning from Human Feedback)을 거친다. 더 정확한 답변을 위해서는 빅데이터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스몰데이터도 필요하다. 아마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공개된 빅데이터 외에 스몰데이터를 독점 확보함으로써 품질을 높이는 위한 경쟁이 초거대인공지능 기업들간에 치열하게 벌어질지도 모른다. 위키 방식의 집단 편집의 결과물이나 키워드에 기반한 검색 서비스나 커뮤니티 서비스의 활용은 이미 줄어들고 있지만, 거꾸로 초거대인공지능이 제공하는 답변에 들어가기 위한 노하우를 활용하는 컨텐츠 생태계는 활성화될 것이다. 시민사회를 비롯해 스스로의 독창적인 이야기와 경험, 서비스를 발신할 미디어(owned media)는 앞으로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된다.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측면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본래 민주적인 공론장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되 소수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더 많은 참여와 더 나은 숙의는 비록 충분히 실현되기는 어렵지만 사회가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인정하는 가치다. 인공지능이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문서로부터 사회 다수의 입장을 요약해낼때 우리는 앞서 언급한 가치가 얼마나 지켜졌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광범위하게 제시된 의견을 효과적으로 요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소셜 플랫폼이 활성화될때 시민들의 단순 직접 투표로 의견을 효과적이고 빠르게 결정하는 것이 민주적이라고 주장했던 블록체인 기반의 자동화된 분산 조직이 간과하는 바와 같다. 공론장은 참여와 함께 숙의를 통해 경쟁과 갈등, 이해와 조정의 과정을 거치는 사회적인 과정이다. 이 과정을 생략해서는 이해는커녕 동의를 구하기란 어렵고, 소수의견은 묵살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시민들의 투표, 의견을 데이터로 분석해내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공론장은 최종 결론만을 목표로 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미 활용되고 있는 기술인 혐오 표현 필터링도 마찬가지다. 어떤 표현을 기술적으로 감지할 것인가 혹은 근본적으로 방지할 것인가는 기술 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보다 적극적인 혐오 표현 방지를 옹호하지만, 사실 혐오 표현에 대한 논쟁은 헌법에도 명시한 인간의 기본 권리인 표현의 자유의 보장과 함께 맞물리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다. 더 발전한 기술을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 사회가 혐오 표현, 혹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어느 정도 허용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사회적 경험(혹은 논쟁)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으로 가짜뉴스를 잡겠다는 도전 역시 그러하다. 많이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가짜뉴스보다는 허위조작정보(dis/mis/mal-information)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는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거나, 실수이거나 조작이거나 등등 정보가 다양한 이유와 의도, 취약한 상태로 전달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허위조작정보의 의도와 상태에 따라 여러가지 사람의 해석이 경쟁하고 의도가 맞물려 돌아감을, 따라서 단순히 더하기 빼기가 틀린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도 한다. 허위조작정보의 검증은 사회적인 과정으로 만들어내야 하고, 이 과정에 다양한 검증 도구를 활용하는 식이어야 한다. 조작된 영상 정보, 조작된 데이터의 검출 등 인간의 역량을 벗어난 검증 과정에 기술은 충분히 도구로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공지능이란 최신 기술을 활용해 스스로의 의도를 은폐한채 또 다른 조작정보를 인공지능을 통해 발신하는 상황을 목도하게 될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여전히 사람과 사람이 협력하는 공론장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기술 개발, 사용자 협력, 리터러시와 투명성의 확보 등을 위해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아나갈 필요가 있다. 1) 이해와 합의가 일어나는 다양성을 갖춘 공론장의 운영 2) 다양한 자동화 기술의 개발과 활용 3) 사용자 참여에 기반한 적응을 통한 기술 발전 4) 적용한 기술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한 조치들 사회와 기술의 발전을 위한 시민과 공동체의 성장 아직까지는 무엇이 바람직한지, 우리가 합의한대로 작동하는지를 평가하거나 의사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자, 공동체의 몫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거나 결정이어도 사회의 운영에 활용하려면, 그 과정과 결과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는 기술이나 체계는 유지되지 못한다. 거꾸로 이해와 판단의 책임을 진 인간에게는 무엇이 윤리적인지, 무엇이 공동체의 가치에 맞는지를 판단하는 시민성의 문제와 시민 역량을 갖추어야 할 책임이 부여된다.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를 앞으로도 유지하겠다면 말이다. 우리는 같은 단어임에도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은 지성으로,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은 지능으로 번역했다. 부지불식간에 인공 지능은 지식에 관한 도구로, 집단 지성은 인간만이 가지는 통찰과 지혜를 기대했던 것일까? 무엇이 가치있는지, 정의로운지, 서로 다른 처지를 이해하고 포용해야 하는지를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아직까지는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 같다. 다만 한국 사회가 사회의 공공성과 민주주의를 긴 시간 동안 경쟁하고 조율하고 논쟁하며 만들어오지 못했다는 점이 염려스럽다. 정치인들이 쉽게 국민들을 갈라칠 수 있는 까닭 역시 누구의,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지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경험이 아직은 충분하지 않아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술을 활용한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사회적 배제라는 역효과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끼는 환경에 놓여 있다. 이 환경 속에서 우리는 사회와 기술을 동시에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도전임이 분명하지만, 시민과 공동체를 위해서 사회의 필수 인프라로서 좋은 공론장을 더욱 발전시키고, 우리의 집단적 의사 결정을 돕는 인공 지능 역시 함께 발전시켜 나가는 사회를 만들 기회도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둘러싼 논쟁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식의 발전 과정을 되돌아볼 때, 이 것만큼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 또 있을까?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 한 주제임에도, 이 문제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여전히 심각한 낙후 상태를 벗 어나지 못하고 있다. — 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서병훈. AICE포럼 후, 랩2050에 기고한 글입니다.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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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술을 활용한 사회 혁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던 사례가 있습니다. 공적 마스크 배포 과정에서 정부, 기업, 시민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만든 앱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부는 약사들이 입력한 마스크 판매 이력을 모아 마스크 재고 현황을 공공 데이터로 공개했습니다. 네이버, 카카오, KT 등 기업은 현황 데이터를 원활하게 공개할 수 있도록 서버를 제공했고요. 시빅해커(시민개발자)들과 관련 기업들은 마스크 재고 API를 활용해 약국의 마스크 수량을 확인하는 앱을 개발했습니다. 약사들이 손으로 입력한 데이터가 시민의 손에 닿는 과정을 정부와 기업, 시빅해커가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함께 만들어낸 것이죠. 이런 일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이루어졌을까요?  중요한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이 이롭다는 정부의 방침과 재난 극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빅해커들의 열정이 상호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민주주의 혁신의 수단으로 기대받고 있습니다. 동시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슬로건은 기술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공재나 공유재로서 다수가 기술을 함께 소유합니다. 누구나 쉽게 사용 가능한 기술을 만듭니다. 기술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기술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합니다. 기술을 활용해 더 안전하고 풍요로우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갑니다.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전망에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기술을 함께 소유하고,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며, 기술 활용으로 창출되는 부가 가치가 모두를 위해 쓰이도록 민주적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민주적 구성이 중요한 이유는 기술 활용의 낙관적인 전망의 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가능성 때문입니다. 로봇으로 대표되는 생산 수단을 일부가 독점하여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생기는 사회나, 과도한 환경 파괴와 자원 남획으로 인류 및 생태계가 멸종 위기에 처하고 기후 변화가 일어나는 사회도 우리는 예상합니다. 현대문명 기술로 서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이 때문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세계로 퍼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전망할 때 과학 기술을 원인이자 해결책으로 지목하곤 합니다. 대전염병이 인류를 멸망시키거나, 지금보다 퇴보한 사회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기술 발달로 인해 초-연결된 사회 때문이라고 분석하죠. 한편 물리적 거리두기에도 사회적 연대를 유지하는 데 화상회의, 온라인 강의 등 초-연결 기술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기술이 원인이자 해결책으로 지목되고, 그 기술의 판단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다수가 기술에 접근하고 기술을 만들고 소비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기술에 접근하는 순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최첨단 기술이 펼쳐질 미래를 상상할 때, 기술의 활용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제는 기술이 다수를 위해 활용되도록, 기술을 함께 소유하고 기술에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와 함께 지속해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음 원칙들에 대한 지속적인 합의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기술이 발전하기 위한 6가지 원칙  1.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기술 개발 2. 정부 및 기업 데이터를 모두가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공유 3. 특별한 소수가 아닌 평범한 다수를 위한 플랫폼 서비스 제작 4. 플랫폼에 가치를 더하는 사람들을 플랫폼 운영 및 소유에 참여 유도 5.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술의 작동 원리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요 정책을 시민과 함께 결정 6. 코딩 등의 교육을 넘어 시민 누구나 기술을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교육 모두를 위한 기술을 기대한다면 이 6가지 원칙에 따른, 모두에 의한, 모두의(가 함께 소유하는) 기술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이때 가능한 선택지는 다양하게 열려있는데요. 선택지를 살펴보려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다음은 유명한 SF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솔라리아'라는 행성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대화할 필요가 생기면 화상으로만 이야기를 나눕니다. 고도로 발달한 로봇이 필요한 모든 물품을 생산하고, 시설을 관리하기에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집단을 이루면 갈등이 생겨 내 의지를 꺾거나 상대의 의지를 꺾어야 하는 일이 생기니, 자원과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거리를 두고 행성 전체의 인구도 섬세하게 관리합니다." 코로나19로 물리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서로에게 혐오와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원격 근무를 실험하며 안락함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가는 지금, 우리 사회는 '솔라리아'를 닮아가게 될까요? 그러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세계에서 '솔라리아'는 인류가 우주로 나가면서 개척한 행성 중 마지막 50번째였고, 나머지 행성들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갔습니다. 우리의 미래에도 가능한 선택지가 다양하게 열려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잠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신과 후손들이 살아가게 될 미래를 선택하는 과학과 기술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나요?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장치와 제도, 토론과 논쟁이 충분히 가능한 환경인가요? 앞서 얘기했던 시빅해커들의 모습을 떠올려봅시다. 마스크 재고 앱 개발에 참여한 시민은 중학생부터 대학생, 스타트업 개발자 등 다양했습니다. 다양한 오픈소스와 간편한 기술 인프라에 더해 공공 데이터가 적극적으로 제공되어 누구나 마스크 재고 앱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빅해커들은 자신들의 기술로 사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고, 정부의 적극적인 데이터 공개와 누구나 참여 가능한 기반 제공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시민의 디지털 역량이 커지고, 공공의 디지털 자원이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할 때 사회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달라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커진 것이죠. <노동 없는 미래>를 쓴 팀 던럽은 기술 발전으로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제시하면서도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만일 소수가 원하는 것들보다는 다수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응하는 정부를 재창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새로운 로봇 지배자들을 환영하고,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의 삶을 살 기회가 싹 사라져 버린 세상, 그리고 그들과 우리로 갈라져 대립해야 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불행한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기술을 둘러싼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공공과 사회가 공유하는 기술을 늘려나가야 합니다. 다수를 위한 디지털 기술 기반의 사회 혁신이 작동하도록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기술을 만들고 그에 필요한 환경 구축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캠페이너100에 참여하며 2020년 5월 7일에 썼던 글을 다시 끄집어 내봅니다. 인구 소멸과 노동 소멸이 맞물리면서 아시모프가 그린 솔라리아를 닮아가는 세상으로 우린 점점 더 다가서는 것 같습니다. 결국 누구의 손에 기술이 놓이느냐에 따라 그 기술이 누굴 위해 활용될지를 결정할 텐데요. 기술 공공성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더 많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기술 비판을 넘어 공동체의 공공재로 만드는 운동으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기술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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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는 우리의 노동을 줄여줄까요? 줄인다면 얼마나 줄여줄까요?
챗GPT 광풍이 부네요. 저는 가입만 하고 아직 써 보진 않았습니다. 쓰지 않은 까닭은 아직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광범위한 정보를 압축해서 잘 정리한다는데, 지금 저는 요약된 정보보다는. 다양한 이슈별로 어떤 주장이나 대안들이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직접 자신의 이야길 하는 사람들이 알고 싶거든요. 찾아보는 맛이랄까, 또 내가 원전을 찾아 내 식으로 이해하면서 느끼는 맛이랄까가 지금은 중요하다 보니 아직 챗GPT를 쓸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챗GPT는 사람이 던진 질문과 가까운 패턴의 문장들을 다시 생성해서 그럴싸하게 배열하는 기술이라고 들었습니다. 한국어로 된 문장들을 어디서 가져왔을까를 생각했을때 내 질문에 매칭해서 돌려주는 값이 어떤 선입견과 잘못된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하기에 아직 사용을 꺼리게 됩니다. 무튼 그럼에도 극찬의 메시지들이 끊임없이 들립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단연 "생산성의 눈부신 향상"입니다. 몇일이 걸렸던 일을 몇분만에 해 냈다는 식인데요. 확실히 보조하는 인공지능(assistive ai)로 중요한 역할을 하겠단 기대감이 저도 듭니다. 하지만 몇가지 질문이 따라 생깁니다. 챗GPT를 통해 정말로 우리의 노동시간이 줄어들까요? 벌써부터 어떻게 써야 잘 쓸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글과 강의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돌이켜봐도 생산성을 높여준다는 기술들은 대체로 내가 모르던 기술을 하나 더 배우기위해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고, 결국 그 기술이 현장에서 쓰이는 경우는 대체로 드문데다가, 전반적으로 노동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본 요건이 늘어나게 만드는 후에, 더욱 더 최신기술을 능숙하게 다루는 노동자가 되어야만 전반적으론 줄어들지 않은 노동시간에 종사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SNS, 뉴스레터, 톡방, 디지털 마케팅, 디자인, 영상 등등. 챗GPT는 기존에 쏟아져나왔던 기술과 달리 정말로 우리 노동시간을 줄여줄까요? 더 무서운 것은, 지금 내가 요구받던 일, 즉 내 업무 범위에 속하는 일의 본질이 지금 내가 챗GPT를 통해 간단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면. 나에게 이 일을 준 사람이나 조직이 앞으로도 나에게 이 일을 요구하게 될까요? 나같은 사람 10명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의 일꺼리조차 되지 않게 되는 것이 지금 이 일을 하는 나에게 좋은 일인가 싶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생산성이 올라가겠지만요. 결국 생산성이 높아졌을때 그 이익을 누리기 위해선 그 생산성이 높아지는 수단을 스스로 보유해야 합니다. "내 일을 이만큼이나 단축시켜줬어"라고 열광하는 분들 중에 앞으로 일자리 걱정을 해야 할 분들이 많아질 것 같은데요. 챗GPT를 비롯한 신기술은 우리의 노동을 정말 줄여줄까요? 아니, 결국 아예 없애버리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기술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려면 잘 쓰는 것 이상의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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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 국민참여를 확대하라 - 1기 탄소중립위원회 국민참여분과 활동 회고
2030년까지 우리는 탄소배출을 얼마나 줄여야 할까? “국민참여분과는 NDC 목표를 50% 이상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총괄위원회에 제출하겠습니다.” 2021년 10월 12일, 탄소중립위원회 국민참여분과는 “NDC 50% 이상 상향 필요"로 결론을 내렸다. 몇달간에 걸친 위원회 내에서의 검토, 교육계, 종교계, 청년, 시민사회를 비롯한 다양한 단위의 의견 수렴, 그리고 탄소중립위원회를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의 목소리와 보다 강력한 감축 정책을 요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퇴한 종교분과위원들의 호소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이후 탄소중립위원회 총괄위원회는 NDC 안을 “40%"로 결정하고, 2021년 11월 2일 최종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40% 이상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누군가는 “40% 이상 감축 목표"가 비현실적인 목표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50% 이상 감축도 부족하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탄소중립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50% 이상 감축"으로 의견을 내기까지 고민이 적지 않았다. 모두의 생존을 결정지을지도 모를 NDC 감축 목표를 위원회는, 위원 개개인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면밀히 검토해서 정확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다양한 국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동시에 있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국민참여분과의 위원인 나는 국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으로 설치한 위원회는 법률로도 청년, 여성, 노동자, 농어민, 중소상공인, 시민사회단체 등 다양한 사회계층의 대표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50명 이상 100명 이내의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도 법률로 명시하고, 기후환경위원회를 통폐합한 까닭도 사회 각계각층의 대표성을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민간위원 70여명을 구성한 후에도 특별히 국민참여분과를 만든 까닭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정책에 다양한 사회 각계각층의 목소리와 아직 집단으로 형성되지 않은 국민의 목소리까지도 더욱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함이었다(고 나는 기대했다). 하지만 시민사회협의체를 구성하려 했던 노력은 대다수의 시민사회단체들로부터 거절당했다. 협의체 구성에 참여하는게 아님을 확인받은 후에야 몇몇 시민사회단체들과 겨우 간담회를 열수 있었다. 위원회 바깥에서 위원회 해체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단체의 토론회에 참석해서 귀동냥을 했고, 보다 절박하고 과감한 정책을 호소하는 종교 지도자 분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해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위원회에 함께 했던 목사님, 신부님, 스님은 강력한 감축 목표안을 촉구하며 사퇴하셨지만, 사퇴하신 분들이든 짧은 기간동안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던 분들이든 모두 “보다 획기적인 감축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분명하게 하고 있었다. 국민참여분과는 우리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은 목소리들도 전체 의사 결정에 반영하거나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NDC 40% 목표가 비과학적이라거나 산업계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거꾸로 반문하고 싶다. 과학자가 아닌 시민들이 적절하고 가능한 목표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거나, 데이터를 제공했냐고. 또한 산업계를 비롯한 정부 거버넌스에 익숙한 단위들은 충분하진 않을수 있어도 함께 대화하고 의견서를 제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보통의 국민들이 참여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도. 정책 결정은 과학적이기 이전에 민주적이어야 하고, 민주적이기 위해서도 과학적이어야 한다. 또한 다양한 계층의 주장과 이해관계를 조율하려는 전제가 우리 모두의 공동의 이익을 향해 있어야 한다. 참여분과 위원으로서 나는 내가 접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더 나아가 NDC와 탄소중립시나리오안 확정은 끝이 아니라, 좋은 대화와 논의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탄소중립정책 논의에 국민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까? 수많은 숫자와 난해한 기술들, 여러 이해관계가 갈리는 입장 차이까지 탄소중립 논의는 무척 어렵다. 그렇기에 과학과 기술, 산업의 전문가들이 모여 옳고 그른 것을 엄밀하게 찾아내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모두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기후위기와 이에 대응하는 정책은 당연하게도 국민들이 이해관계자로서도 참여해야 하고, 실질적으로도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이해와 공감에 기반한 공동 실천이 필수적이다.  위원회는 중요한 권한을 위임받은 위원회의 책무성과 함께 국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도 회의록을 모두 공개하기로 결정한다. 모든 이들의 실명을 명시하는 수준까지는 못 갔지만, 대부분의 위원들은 회의록 결정을 당연하게 공감했고, 지금도 탄소중립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회의록을 볼 수 있다. 대통령직속위원회로서는 흔치 않은 공개 결정이었지만, 한편으론 강력한 권한을 가진 위원회일수록 회의록을 더욱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든 누구나 그들의 미래를 결정지은 중요한 논의와 결정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위원회가 소중하게 모으고 공개하려고 했던 또 다른 자료는 위원회에 취합된 다양한 입장과 주장, 제안을 담은 의견서들이었다. 위원회는 협의체를 구성하거나 간담회를 통해서 탄소중립시나리오와 NDC 초안을 전달하고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 과정에 94개 단체가 의견서를 만들어 전달했다. 이 의견서를 위원들이 꼼꼼히 읽고 최종안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위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 게시함으로써 다양한 입장을 드러내고 더 나은 논의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NDC 상향안 초안을 공개하며,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 온라인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위원들과 단체들 뿐만 아니라, 가능한한 국민들이 협의와 논의 과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추진하였던 토론회였다. 아쉽게도 2차례밖에 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정책 논의 과정이 더 많이 기록되고 더 많이 국민들에게 공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민들을 대표하는 국민들, 탄소중립시민회의 국민들을 대표하는 국민들인 ‘탄소중립시민회의’도 국민참여의 일환으로 진행하였다. 인구 비율을 고려해 구성한 533명은, 특히 2030년과 2050년을 정면으로 살아갈 10대들을 23명 포함함으로써 미래세대의 대표성을 강화하였고, 100세 시대를 감안하여 보통 60대 이상으로 모집하는 고령층 그룹도 60대와 70대 이상으로 세분화하였다는 특징을 가진다. 10년, 30년 후의 세대 구성을 고려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미래세대와 청년세대에 가중치를 높이는 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의 논의를 통해 시민들은 탄소중립정책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다양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각자의 판단을 숙성시켜 나갔다. 시민들의 판단은 4차례에 걸친 설문조사로 반복해서 확인하였는데, “탄소중립은 2050년보다는 빨라야 한다”는 의견을 55.2%가 내었고, “노후 석탄발전소의 폐쇄 시기”는 1차 설문조사에서는 2030년이 바람직하다고 35.2%가 의견을 내었으나 4차 설문조사에서는 2050년이 바람직하다고 30.8%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는 탄소중립 추진 과정에서 기대/우려하는 점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꼽았던 시민이 2차에 1.9%였던데 비해 4차에는 14.3%로 증가한 것과 함께 관찰되는 지점으로 일자리 문제와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가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탄소중립시민회의는 위상과 권한 등 여러 과제들이 남아 있지만, 앞으로 맞닥뜨릴 다양한 쟁점을 대표성을 가진 시민들이 숙의를 통해 때론 당사자로서, 때론 중재자로서 역할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국민들에게 충분한 자료와 설명이 제공된다면, 탄소중립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참여, 제대로 더 잘 이어나가야 돌이켜보면 이 과정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시민회의는 기본적으로 2년은 운영해야 하고, NDC안과 탄소중립시나리오는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듣는 것을 넘어,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부딪히는 토론회와 공론장을 충분히 열면서 천천히 만들어야 했다. 더 나아가 탄소중립시나리오라는 말처럼 다양한 상상을 담은 시나리오를 사회 각계각층이 만드는 장을 위원회가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2년을 약속했던 위원회조차 정권이 바뀌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했고, NDC와 탄소중립시나리오를 확정한 후에 더 충실하게 국민과 함께 논의하며 내용을 채우겠다던 약속은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와 지켜야 할 시점을 맞추기 위해서도, 여러 의미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도 위원회에 참여한 민간위원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노력했다. 국민 참여도 짧은 시간 동안 여러가지 형식을 갖추며 할 수 있는 시도를 하려고 노력했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크지만, 국민참여를 확대하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연속적으로 이어나가야 한다. 그럴때 다음 사안들을 꼭 고려하길 바란다. 우선 거버넌스다. 많은 비판에 직면했지만 위원회는 여러 노력의 결과다. 기존의 기후환경 관련 위원회를 통폐합해서 대표성과 실효성을 부여했고, 각계각층에서 위원을 선정하도록 법률로도 명시하였다. 협의체와 시민회의 등 국민과의 협력 및 참여 모델도 실행했다. 하지만 커진 규모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구체적인 거버넌스 운영 체계는 미흡했다. 책무성을 확보하기 위해 회의록을 공개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의결과 심의를 담당하는 법률로 규정한 위원회였지만, 위원회 내에서도 논의와 의사 결정 체계, 권한의 범위, 추진 체계를 아쉬워하는 위원들이 적지 않았다. 이는 곧바로 협의체 구성에서도 문제로 이어졌고, 시민회의로까지도 이어진다. 권한과 책임의 범위, 기대하는 역할, 논의와 의사 결정 체계, 추진 체계는 참여하려는 단위가 어디든 누구나 먼저 확인하게 되는 내용들임에도 이를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위원회에 없었다. 시민의회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로 본인들의 역할과 권한의 범위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민간위원, 협의체, 시민회의, 공론장 등 다양한 층위로 국민으로 초대해 거버넌스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커다란 바구니 하나에 좋은 것들을 일단 담아둔 셈이었기에 아쉽다. 다양한 국민 참여의 체계들의 역할을 어떻게 나누고 실행할지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두번째는 공론장의 확대다. 시민회의에서 많은 시민들이 석탄발전소의 문제를 깊게 생각한 까닭은 정의로운 전환, 즉 일자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올해 초부터 시민들이 피부로 실감하는 전기세와 난방비 문제 역시 탄소중립 정책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다. 정책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이해와 공감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만큼, 국민들이 직접 겪게 될 여러 어려움들이나 이웃들이 겪게 될 어려움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해결에 나서야만 탄소중립은 실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보다 긴 시간을 들여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국민들이 이야기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이야기하고, 미래세대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나누는 공론장을 지역별로, 주제별로 다양하게 진행해 나가야 한다.  탄소중립은 무겁고 어려운 주제이지만, 국민 참여를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탄소 배출을 줄이고 배출한 탄소를 흡수하는 일련의 계획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함께 다양한 시각으로 상상하는 계획으로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는 과학 기술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모색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일자리 소멸의 충격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가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 기후 약자를 돌보는 것을 넘어 생태 전반을 함께 되살리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도 있다. 여기에 산업과 경제의 역할을 재구성하고 더욱 더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가는 방향을 누군가가 제시할수도 있다. 다양한 상상과 각자의 전문성이, 집단의 지성과 협력으로 발휘되도록 장을 만들어야 하는 책임을 위원회가 가지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데이터’ 를 충분히 만들고 공개해야 한다. 누군가가 면밀하게 검토해서 최적의 감축안을 만들어내기에도 현재의 데이터는 충분하지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탄소중립정책은 다른 정책에 비해 데이터로 모니터링이 가능하고 데이터로 달성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정책이기에, 데이터 기반 행정을 도입하기에 적합하다. 더 나아가 국민들이 다양한 기후위기 극복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제시하기 위해서 국가는 국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기후 관련 공공 데이터를 민간과 함께 더 적극적으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데이터가 충분히 존재해야 NDC가 35%냐, 40%냐, 50% 이상이어야 하냐의 논쟁이 과학적이면서도 민주적인 대화와 설득, 경쟁과 합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국민참여 없는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탄소중립 정책 수립 과정에 각계각층의 다양한 국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던 국민참여분과는 그러나 지금 정부의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3월에 나올 기본계획은 국민들이 논의에 참여하기커녕 내용조차 제대로 공유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국민참여는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어서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1기의 위원회가 국민참여를 충분히 잘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일까? 그 역시 아닐테다. 복합적이고 절박한 위기의 시대는 우리 모두가 함께 대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보다 더 민주적인 탄소중립 정책 추진 체계를 마련할 의무가 있고, 국민들 역시 정부가 국민의 참여, 국민과의 협력, 즉 민주성을 확대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위기인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글 : 시스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이사장 / ohyeon@parti.coop 이 글은 오마이뉴스, 빠띠 홈페이지, 빠띠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탄소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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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
대한민국이 열린정부파트너십 의장국이어서 한국에서 열린 OGP 글로벌 서밋에 시민사회대표로 테이블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대부분의 나라에서 온 패널들이 포퓰리즘이든, 권위주의 때문이든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불과 2년 전의 나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입장이었기에 코드포코리아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은 코로나19 상황을 시민과 정부가 협력해서 해결한 경험을 해 왔다"고, "중학생들부터 갓 개발을 배운 대학생들, 지방정부나 기업이 정부가 공개한 데이터를 활용해 각자의 마스크앱을 만든 사례"를 예로 들며 "정말 짧은 3일 동안 몇백명의 사람들이 신이 나서 함께 작업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 경험을 통해 위기의 시대에 정부와 사회, 공동체에 대한 신뢰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과 효능감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축적할 수 있는지를 맛본 것 같다고, 어린 학생들부터 전문가들까지 마음껏 활동할 공간을 사회(특히 정부)가 성심껏 펼쳐놓는게 중요한 열린정부의 방향인 것 같단 취지의 이야길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나는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사회 시스템(특히 정부)에 대한 불신의 증가, 일반 시민과 비 시민(혹은 불량한 시민)의 갈라치기, 사회적 약자 혹은 이웃에 대한 공감의 부재와 공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미디어 환경까지. 개인적으로는 버터나이프크루, 탄소중립위원회, 팩트체크넷 등에서 직접 겪기도 하고, 이태원참사, 장애인이동권,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을 바라보는 시선 등에서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다. 여러 정치 세력이 들고 나는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지만,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모두가 시민이고, 가능한 모든 시민들이 함께 하며, 모든 시민들을 위해야 한다란 기본 가치와 약속과 책임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시민과 비시민을 가르고, 선택적으로 시민을 호명하며,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구성원들을 포용하기는 커녕 혐오하고 조롱하는 지금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우리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우리 스스로 침식시키는 것으로 보여 안타깝고 씁쓸하다. 아니, 어쩌면 우리 스스로 지금이라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고민하고 토론해야 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바깥에서 주어진 민주주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누가, 어떻게,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를 만들지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 생각의 차이가 드러날때 모든 공동체를 위한 정치인지, 좁은 범위의 자칭 시민을 위한 정치인지 구분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에 대해 형식을 넘어 더 깊게 본질을 고민하고 내재화해야 할 때가 온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들이 하듯이, 해외에서 온 이주자들에게 시민권을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제대로 논의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그래야 이웃을 비국민으로 낙인찍고 학살한 아직 100년도 안 된 우리의 슬픈 과거사를 극복하고 진정한 동포가 될 수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