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개천에서 용 안 나는 ‘부자’ 올림픽
2024 파리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진행되는 경기와 선수들의 서사, 메달 순위에 주목하게 된다. 여자 양궁이 단체전 10연패 신화를 세우는 걸 보며 역시 한국은 활의 민족이구나 으쓱하기도 하고, 예능에서 ‘탁구 신동’ 소리를 듣던 신유빈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에 감화되기도 하고, 높은 메달 순위를 보며 소위 ‘국뽕’이 차오르는 걸 대중은 쉽게 경험한다. 하지만, 이런 행복하고 멋진 올림픽의 이면에는, 경제력이 높은 국가가 대부분 올림픽 메달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에어컨 없는 대표팀 숙소 vs 따로 빌린 200억 호텔 파리 올림픽은 ‘친환경 올림픽’을 표방하며 여러 시도를 하였는데, 이로 인해 선수단 숙소에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것은 유명하다. 종합적으로 열악한 숙소 환경으로 인해 오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한국 올림픽 대표 선수단은 따로 객실용 냉풍기를 설치하거나, 따로 경기장 인근 호텔로 숙소를 옮기기도 했다. 수많은 슈퍼스타가 모여있는 걸로 유명한 미국 농구 대표팀의 경우, 따로 200억 호텔을 통째로 빌린 사실이 뉴스로 다뤄지기도 했다. 올림픽에서 기후 위기에 주목하고, 여러 환경적인 대안을 실행하려는 노력 자체는 좋다. 하지만 참여 국가의 경제력에 따라 선수단에 더 좋은 컨디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건, 국가의 경제력 차이에 따라 선수들의 컨디션 차이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기후’를 강조하다 스포츠에서 지켜져야 할 ‘페어 플레이’ 정신에서는 멀어진 셈이다. 만약 숙소 차이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좋은 스포츠 퍼포먼스를 내기 위해선 고가의 장비 및 시설을 갖추거나 전문가를 다수 영입할 수 있는, 경제력이 좋은 국가가 올림픽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기 유리하다. 한국의 역대 하계올림픽 성적, GDP 순위에 대체로 비례 그렇다면 한국의 올림픽 성적도 경제력에 비례했을까? GDP 순위 자료가 명확한 1960년부터 2021년 동안 치뤄진 하계올림픽 메달 순위(금메달 갯수 우선 집계 기준)와 명목 GDP 순위를 비교해 그래프로 나타내보았다. 조사 결과, 대체로 한국의 하계올림픽 메달 순위는 GDP 순위에 비례함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이 처음으로 하계 올림픽 메달 순위 10위 이내에 진입한 해는 1984년으로, 당시 명목GDP순위는 세계은행(World Bank) 데이터 기준 21위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하계올림픽에서 항상 메달 순위 20위 이내에 들었으며, 두 번을 제외하고는 10위 이내에 들었다. 다른 국가, 다른 올림픽 성적에서도 나타나는 ‘머니 파워’ GDP 순위와 올림픽 성적이 비례하는 건 한국 뿐만이 아니다. 2021년에 치러진 2020 도쿄올림픽 기준, 메달 순위 상위 10개 국가와 GDP 순위 상위 10개 국가를 종합해 표로 그려본 결과, GDP 순위가 높은 국가들이 메달 순위도 높은 모습을 보여줬다. GDP 순위가 10위 이내인데도 올림픽 메달 상위 20위 이내에 들지 못한 국가는 인도 뿐이었다. 국가 올림픽 순위와 GDP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들 역시 앞선 분석을 뒷받침한다. 살펴본 모든 연구에서, GDP는 국제 스포츠 성적에 직ㆍ간접적으로 비례했다[1][2][3]. 우선, GDP가 국가 스포츠 국제대회 성적에 강한 연관성을 보였으며[2], GDP가 국가 올림픽 메달 순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1]. 한 국가가 올림픽에 파견한 선수단 규모 역시 메달 순위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GDP가 많은 국가일수록 선수단을 많이 파견하기 때문으로 나타났다[1][3]. 종합해 보면, 올림픽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국가 간 빈부격차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대회다. 스포츠를 직업으로 할 수 있게 하고, 시청하는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올림픽의 순기능을 부정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앞으로 올림픽에 어떻게 하면 GDP가 메달 획득에 영향을 덜 미치게 할지, 전 세계 스포츠 팬들과 올림픽 운영위원회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Aaron Daniel Snowberger, Choong Ho Lee. (2021). An Investigation into the Correlation between a Country’s total Olympic Medal Count, GDP, and Freedom Index Through History. 한국정보통신학회 종합학술대회 논문집, 전북. [2]Nassif, N., & Raspaud, M. (2023). National Success in Elite Sport: Exploring the Factors that Lead to Success. Springer. https://doi.org/10.1007/978-3-031-38997-9 [3]이장영, 강효민. (2013). 국가의 인구규모, 경제수준이 선수규모 및 동ㆍ하계 올림픽 성적에 미치는 영향. 한국체육정책학회지 제11권 제2호, pp. 97~109 [데이터 출처] - 국제스포츠정보센터 국제종합경기대회 하계 올림픽 안내 페이지 - 위키피디아 대한민국 하계 올림픽 메달 집계 - KOSIS(국가통계포털) GDP 데이터 - WorldBank GDP Data *이 글은Libertine 캠페이너의 '올림픽, 꼭 해야 하는 걸까요?'글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작성하였습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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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극우화 방지 특강 👩‍🏫 한국 필수 시청
폴라리스 항해도 vol. 117 요즘 들어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인권과 다양성의 시초 같던 유럽에서 극우 정당이 약진했고, 하루아침에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이 높아졌어요. 먹고 살기 팍팍할 때마다 극우가 새로운 대안처럼 떠올랐지만 이번에는 달라요.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무섭게 세를 넓혀가는 중입니다. 오늘은 극우 막는 처방전을 찾아 세계여행을 떠나려 해요. 떠들썩하게 선거를 치른 나라로 갑니다! 여권은 넣어두고 호기심만 챙겨 주세요. 각국 선거 결과 브리핑을 듣고 유럽에서 극우가 약진한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극우화 특징도 준비되어 있으니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북부 지역에 살면서 이민자들을 실은 버스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봐야 했어요. 치안이 불안정해서 무서웠죠. 그래서 지역에서 활동하며 보안 정책을 펼치는 국민연합 의원들을 지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프랑스 국민연합(극우 정당) 선거캠프에 참여한 아나엘 씨 #1 2024 세계 선거의 해, 키워드는? 무려 42억 명. 2024년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투표소로 향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느 국가 하나 빠짐없이 내외 정세 긴장을 겪는 지금, 그 상황을 집약하여 보여줄 주요 선거들이 올해 대거 포진해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입니다. 4.10 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강화됐고, 민주당 주도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특검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보수 여당과 이준석의 개혁신당이 예상보다 약진했고, 제3당이자 좌파 정당인 정의당이 원내 진입에 실패했습니다. 우경화된 선거 결과라 할 수 있죠. 대형 분쟁국들에서도 선거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나란히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푸틴은 무려 5선째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한 이란도 조기 대선을 치릅니다. 라이시 전 대통령이 급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히잡 시위로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에 반기를 든 국민들의 선택은 온건 정책을 약속한 마수드 페제스키안이었습니다. 자국은 물론, 타국의 선거 결과에 따라 앞으로 두 분쟁의 향방이 어찌 흘러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더 서쪽으로 이동해보겠습니다.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선 뚜렷한 극우화 추세가 확인됐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주요국 극우 정당들이 눈에 띄게 많은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특히 지난 대선에도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르펜이 이끄는 RN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EU에 쌓인 회원국들의 불만이 드러난 결과인데요. 현재 유럽 전역은 경제난과 이주자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공동체 EU가 요구하는 명분과 협력에서 벗어나 자국의 독자적인 이익을 우선시하고자 하는 거죠. 브렉시트로 그 첫발을 당긴 영국도 올해 조기 총선을 치렀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통과된 ‘르완다 정책’은 주변 국가들의 반이주 정서를 들쑤시기도 했죠. 영국은 14년 만에 노동당이 정권교체를 이뤘습니다. 노동당은 친기업적 행보, 불법 이주자 대응 강화 등 기존의 좌파 색깔을 지운 ‘우클릭 공약’으로 민심을 얻었습니다. 영국판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정치인 나이젤 패라지도 선전했습니다. 영국이 상당히 극우화되고 있음을 실감하시겠죠. 대서양을 건너면 11월 대선을 치르는 미국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극적인 총격 사건을 겪으며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는데요. 바이든 현 대통령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후보 퇴진 요구가 나올 정도로 지지율이 저조합니다. 바이든 임기 동안 경제가 회복됐다곤 하나 민생이 실감할 정도는 아니며, 그에 따라 이주자에 대한 불만과 경계는 강화됐습니다. 바이든은 젊은 진보 유권자들의 민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비인륜적일 정도의 이스라엘 지원과 흑인, 성소수자 등 전에 비해 나아지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주요한 원인입니다. 바이든은 극우화된 유권자의 마음도 돌리지 못했고, 지지층이 기대한 극우화 방지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선거 소개에 극우화란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온 것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극우화의 원인, 유럽과 우리나라의 극우화, 극우화를 방지하는 선거제도에 대해 차례로 논해보겠습니다. 🧭글 보러가기 #2 극우는 ‘이것’을 먹고 자랐다 ‘유럽이 우경화된다’는 말, 익숙하게 들으셨을 겁니다. 시리아발 난민 위기, 브렉시트를 지나며 꾸준히 언급된 주제이지요. 민주주의와 선진성의 표상이었던 유럽의 변화가 심상치 않은 건 확실해 보입니다. 이번 꼭지에서는 ‘유럽의 우경화’라는 현상이 나타난 배경과 국제 사회에 가져올 영향을 함께 보겠습니다. 극우가 약진하는 원인은 대개 세 가지로 꼽힙니다. 고물가, 경제난, 그리고 이민 정책입니다. 유럽과 중동으로 이어지는 두 개의 전쟁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에너지난을 가져왔죠. 여기에 강력한 환경 규제 정책까지 더해지면서 농가 부채는 증가했고, 농민들은 트랙터 시위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두드러진 갈등은 ‘난민’입니다. 소도시와 지방을 중심으로 난민이 수용되면서 주민들의 반감은 커졌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우호적이었지만, 경제난이 길어지자 난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여론이 우세했습니다. 물론 외부의 변화가 전부는 아닙니다. 기존 집권 세력이 추진해 온 ‘정치적 목표’에 더 집착한 나머지 국민을 설득하거나 민생을 수습하는 일에 소홀했고, 극우는 이런 빈틈을 파고든 것이죠. 프랑스ㆍ영국ㆍ이란에서 잇따라 치러진 선거에서도 “민생을 실패한 정부는 필패한다”는 메시지가 증명됐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극우 정당은 이민과 국경 통제와 생필품 부가가치세 폐지 등의 정책으로 민심을 달랬고 유권자는 응답했습니다. 극우는 혼란한 세상에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극우는 단순히 우파 가장자리가 아닙니다. 인류가 오랜 시간 발전시킨 인권·자유·평화의 가치를 경시하는 세력입니다. 이에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주의가 강화되면서 각자도생이 거세질 거라는 우려가 큽니다. 함께 해결해야 하는 기후, 전쟁과 난민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겠죠. 여성 인권 후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프랑스에선 만 명이 넘는 여성은 극우 집권으로 임신 중지권이 타격받는 것을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섰답니다. 자유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공간인 유럽에서 고립주의를 지지한다면, 서구를 비롯해 한국에 가져올 악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 보러가기 #3 한국의 ‘뿌리 깊은’ 극우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볼까요. 올해 총선에서는 범야권이 192석을 차지하며 보수당이 참패했지만, 윤석열 정부와 2030 남성 유권자들의 우경화는 확연히 두드러집니다. 대통령은 공적 발언에서 “종북 주사파와는 협치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며 정치적 반대자와 반국가 세력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극우 성향 인물을 공공기관장이나 중앙부처 장관으로 임명하기도 했죠. ‘외부’ 요소가 침범해 ’내부‘를 위협한다. 극우가 사람들의 분노를 동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프레임입니다. 사회적 긴장에서 비롯된 불안을 이권을 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거죠. 여기서 외부 요소는 극우 세력이 규정한 표준 시민을 벗어나는 존재라면 모두 포함됩니다. 동성애, 페미니스트 등에 대한 혐오 행동과 담론이 크게 퍼진 이유입니다. 앞서 보았듯 유럽의 극우는 이민자를 외부의 존재로 낙인찍었는데요. 한국 극우의 뿌리엔 반공이 있습니다. 이념 전쟁이 남긴 분단 체제에서 정부가 수립된 만큼 반북·반공의 뿌리가 깊죠. 한국 극우의 특징은 또 있습니다. 보수와 극우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보수 정부가 극우 성향을 드러낸 건 이번 정부만이 아닙니다. 보수 정치의 구조적 문제가 있어요. 민주화 백래시로 등장한 극우 단체가 ‘빨갱이 척결’ ‘동성애는 악마‘와 같은 슬로건을 내세울 때, 보수는 이들과 구분되면서 진보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만한 정치적 의제를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보수 엘리트들은 극우 정치를 간혹 우려하고 때론 거리를 유지하지만, 결국은 용인하고 엄호하죠. 충성심 높은 유권자를 확보해 보수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으니까요. 특히 최근 극우의 새로운 지지층인 2030 남성은 안티페미니즘을 축으로 강하게 결집합니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모은 건 새로 등장한 극우 정당이 아닌 보수정당이었습니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여성가족부 폐지를 간판 공약으로 제시하고 구조적인 성차별을 부정하는 등 극우 남성들에게 적극 어필했죠.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많은 국가의 젊은 세대에서 정치적인 성별 격차가 나타나고 있지만, 한국만큼 격차가 뚜렷한 곳은 없다고 짚었는데요. 대통령은 한국의 성평등 수준이 대부분의 선진국 중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은 묻어둔 채, ‘급격한’ 성평등 추진에 불만을 품은 젊은 남성들을 공략했다고 설명합니다. 극우가 한국 사회에 내린 깊은 뿌리, 그리고 극우와 보수가 하나 되어 자연스럽게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현 상황을 진단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마도 ‘극우에게 동의하지 않는 다수의 분명한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겠죠.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희망은 있습니다. 다음 글을 읽으며 그 실마리를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글 보러가기 #4 “어떻게 극우를 막을 것인가” 우리를 포함한 민주주의 국가에 던져진 질문일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좌나 우가 아닌 ‘극단’입니다. 일부 극단적인 세력이 결집하여 만든 후보, 정당을 국민의 대표로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민의를 반영한다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극단적인 정당, 정치, 이념, 인물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앞서 언급한 유럽 의회 선거, 기억하시나요? 프랑스의 극우 정당인 RN이 대승을 거뒀는데요. 하지만 프랑스의 총선 결과는 180도 달랐습니다. RN이 유럽 의회 선거에서 대승하고 나서, 마크롱 대통령이 프랑스 조기 총선을 선언했죠. 이 총선에서 좌파연합이 RN을 크게 밀어냈습니다. 마크롱의 일방적인 연금개혁과 우경화된 난민법으로 민심을 크게 잃은 집권당과 극우 정당의 대안으로 떠오른 좌파연합은 프랑스 유권자들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프랑스 헌법은 가장 뻔하지만, 가장 명확한 해법인 ‘선거 제도’에 민주주의를 맡겼습니다. 일종의 안전장치를 걸어둔 셈인데요. 물론 이번 조기 총선은 프랑스 국민들의 시민의식, 극단을 막겠다는 정치권의 의지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중심에는 ‘제도’가 있습니다. 선거 제도의 힘과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한 선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프랑스 결선투표제, 조금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요. A 후보가 당선되려면 우선 1차 투표에서 과반의 표를 얻어야 합니다. 1차에서 이미 당선이 확실시되는 경우도 있지만, 다양한 후보가 출마하는 1차 투표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겠죠. 이후에는 1차 때 12.5% 이상 득표한 후보들끼리 결선, 즉 2차 투표를 진행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흔히 ‘소신’ 투표라고 부르는, 나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투표가 프랑스에선 가능합니다. 결선투표제의 가장 큰 효용은 극단주의의 집권을 막는다는 데 있습니다. 극단적인 소수의견의 과대 대표를 방지하는 것이죠. 유권자들이 광범위하게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될 수 있는, 결선투표의 장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좌파연합인 NFP(신인민전선)에서 134명, 범여권에서 82명이 사퇴한 덕분에 RN과 맞붙은 280여 선거구 중 200개 이상에서 1대1 구도가 형성됐습니다. 결선에서 RN 후보들이 대거 낙선한 이유입니다. 극단을 막기 위한 차악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시민들은 투표장에 나서 선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원 배지를 사수하는 것보다 극단을 막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정치인들의 의지도 인상 깊습니다. 전통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가까운 정치 세력이 극우 차단이라는 명분으로 뜻을 모았으니까요. 대의민주주의의 존속은, 생각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것이어서 우리의 선거제도도 다시금 정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프랑스 총선으로 배웠습니다. 🧭글 보러가기 에디터가 남긴 편지 정치가 실패했기에 사회가 붕괴한 걸까요, 사회가 실패했기에 정치가 붕괴한 걸까요? 이번 호 딥다이브를 준비한 에디터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사실 전 개인적으론 제도로 수습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단 생각이 들 만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희망을 크게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더 이상 간극을 좁힐 수 없을 것만 같은 여성혐오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의 연속, 인면수심의 범죄, 약자에 대한 동정 대신 조롱과 착취, 부패… 겨우 제도로 이런 인간들을 중화할 수 있을까?건강한 생각은 아니죠.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에디터로서 갖춰야 할 균형 있는 견해도 아닙니다. 그래서 버나드 크릭의 『정치를 옹호함』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크릭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란 다양한 집단의 이해와 이익을 적절히 조정·합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정치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한 측의 승리만을 위한 지저분한 알력 다툼도, 선전전도 아니란 겁니다. 우리는 정치 없는 정치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합의와 조정보다는 내 몫이, 내 어떤 지위나 주장도 훼손되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는 풍경. 현재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이며, 이번 호 레터 주제 ‘극우화’의 가장 문제적인 측면입니다. 극우화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보수적 사상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정치 없음’입니다. 인내, 타협, 양보, 사고의 전환,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의 합의, 그리고 전진. 지금의 정치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정치의 정수…제도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정치를 되찾아오기 위해서겠지요. 사실 에디터 레터 초반에 언급한 저의 절망의 원인들도 사법적 좌절, 정치적 효능감의 상실, 어긋나는 행정이란 제도적 측면에 걸쳐 있으니까요. 저는 제도가 곧 한 사회의 정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라 생각합니다. 여성과 경제적, 정치적 약자들이 동등한 정치 주체가 아니니까, 내가 소속된 집단을 완벽히 이해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대표자가 선출되지 않으니까.기능하지 못하는 제도를, 동등하게 정치하지 못하게 하는 이 제도를 어떻게 손볼 것인가. 어떤 제도로 어떻게 정치를 되찾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모두가 내 몫을 조금도 빼앗기지 않으려 아등바등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에, 합의와 조정을 염두에 둘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할 수 있을까?폴라리스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엔 어떤 답이 준비돼 있나요? 2024. 07. 22 에디터 푸릇🌿 드림  만든 사람들: 푸릇🌿, 해안🌊, 모래🏖️, 반달🌙 답장하기 폴라리스 구독하기 지난 폴라리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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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에 연대를! 가자지구에도 꽃은 핀다
아랍권 전통춤 답케(Dabke)를 알게 된 건 긴급행동 집회에서였다. 춤 선생은 팔레스타인계 여성 활동가였는데, 그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은 둥그렇게 서서 손을 맞잡은 채 발을 앞뒤로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빠른 아랍풍 리듬에 맞춰 양발을 현란하게 움직이는 답케를 따라 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 스텝은 꼬이기 시작했고 다른 참여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함께 춤을 추던 팔레스타인계 여성 활동가의 어머니가 두팔을 옆으로 쭉 펼치고 곡선을 그리며 몸을 흔들었다. 서안지구 난민으로 이주해 살아왔다는 한 노년 여성의 몸짓에서 부드러움과 함께 강인함이 느껴졌다. 연대의 마음을 담아 리듬에 몸을 맡기면서도 실시간으로 폭격이 진행되는 가자지구의 현실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언론을 통해 본 무너진 잔해, 난민촌 텐트에서 심각한 기아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떠올리며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라던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곱씹었다. 실상 춤은커녕 굶주림에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형편이겠지만 존재함으로서 저항해 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용기를 떠올리며, 답케 스텝을 한 발 한 발 떼었다.  공습으로 파괴된 땅,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생각하면 많은 이들이 ‘지옥’, ‘폐허’, ‘비극’과 같은 부정어를 떠올릴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를 향한 집단학살이 어느덧 8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고, 현지의 참상은 어떠한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니까. 6월 10일(현지시간) 기준 가자지구에서 최소 3만 7천 명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고 8만 4천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전역에 지상, 해상, 공중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폭격을 퍼붓고 있으며 국제사법재판소(ICJ)의 라파 공격 중단 명령에도 난민촌을 공습하는 등 학살을 가속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6월 6일(현지시간)기준, 인질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누세이라트 난민촌과 인근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 학교에 포격과 공습을 가했다. 사망자만 274명, 부상자는 700여 명에 이르고 건물 잔해에 깔린 실종자를 추가 집계한다면 희생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스라엘군이 ‘하마스 전투원’ 희생자 명단이라고 주장하는 명단에는 8살 어린이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 점에서 우리는 ‘하마스 제거’를 핑계로 한 이스라엘의 모든 공격이 실상 가자지구 민간인을 향한 집단학살이자 전쟁범죄임을 알 수 있다.   기아와 난민으로 얼룩지고 있는 가자지구 ⓒ스튜디오R  가자지구 주민들을 위협하는 건 이스라엘의 공습뿐 아니라 심각한 굶주림과 질병 등이다. 6월 12일(현지시간) 세계보건기구(WHO)는 가자지구 주민들이 현재 “재앙적인 기아와 유사 기근 상황”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가자지구 어린이 10명 중 9명이 심각한 기아에 직면해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군은 지속적으로 가자지구 인도적 지원 물품을 통제하여, 구호 물품이 검문소 인근에서 발 묶인 채 부패하고 있다는 증언도 전해졌다. 이스라엘 정부가 기아를 ‘무기’처럼 전투 수단으로써 사용하며 인종청소를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군에 의해 유일한 구호 물품 반입 통로인 라파 국경 검문소가 장악됐고, 구호 트럭 반입 수는 지난 5월 기준 하루 평균 97대로 집계되었다. 심각한 기아 상황인 가자 북부에서는 굶주림에 참다못한 주민들이 동물 사료를 먹는 일도 있었고, 해상으로 투하되는 구호 물품을 잡으러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한 사건도 발생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는 “7월 중순이 되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인구 절반에 달하는 약 1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늘만 뚫린 감옥’ 가자지구는 현재 극심한 인도적 위기를 맞고 있다. 가자지구 출신 한 난민은 인터뷰를 통해 봉쇄와 폭격 속에서의 삶을 “사람이 아니라 새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때라고 회고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난민촌 및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 시설 공격은 중대한 국제법 위반행위이다. 지난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 인구 75%이상에 해당하는 170만 명 넘는 주민이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라파 난민촌 피란민은 지난 공습 당시 화염에 휩싸였던 상황을 전하며 “죽을 순서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피란민들은 난민촌 텐트에서 식량 부족 등을 겪으며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다. ‘생지옥’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참혹한 상황에서마저,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만류를 묵살한 채 가자지구 전역에 무차별적 공습을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라파에 머물던 100만 명 이상의 가자 피란민들은 공습을 피해 남부로 이동했고, 현재 라파에 머무는 이들은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폐허 속에서도 재스민꽃은 싹 틔운다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타전되는 가자지구 폭격 소식, 비현실적인 사망자 수 등 비참한 현실에 한 명의 연대자로서 막막함을 느낄 때도 있다.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세계 시민들이 이 집단학살을 막을 수 있을까. 연대운동 흐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더는 없을까 끊임없이 고민한다. 긴급행동 집회가 16차까지 거듭될수록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은 더 격화되고 휴전 협상은 어렵기만 하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뒷배가 되어 학살을 지원하고 국제사회도, 그 누구도 학살을 멈추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무력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집단학살 중단하라!”, “팔레스타인에 해방을!” 이 간절한 외침이 닿을 수 있을까. ⓒunsplash 팔레스타인 작가 모하메드 엘-쿠르드는 가자지구 북부에 핀 재스민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허락이나 휴전이 없어도 싹을 틔우는” 재스민이 존재하는 이유는 끝나지 않은 나크바(대재앙)에서도 살아왔던 팔레스타인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늘 투쟁과 함께했기 때문이라고. ‘지옥’에서도 새싹은 틀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에 그늘이 질 때마다 폐허 속에 핀 재스민꽃을 상상해 본다. 집회 단골 참여자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을 때, 행진 참여자에 음료수를 나누어주거나 그저 멀리서 행렬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며 눈물을 훔치는 아랍계 이주여성들을 마주하는 등 팔레스타인을 매개로 다양한 이들과 연결되는 경험은 연대자로서 역할을 돌아보게 된다. 쉴 새 없는 공습 속에 살아가는 가자 주민들을 떠올리며 세계 시민으로서 집단학살을 끝내기 위한 책임을 공유하고, 연대의 목소리를 내어본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시민들의 마음을 잇고 모으는 활동이 무력함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혹자의 말처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외침으로 집단학살을 끝낼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학살을 중단하고 즉각 휴전하라는 시민들의 여러 외침이 함성으로 모일 때, 우리의 연대가 연결되어 강해질 때 폭력의 악순환은 끊어낼 수 있다. 팔레스타인은 혼자가 아니라는 절실한 외침, 폭력을 멈추라고 촉구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세계난민의날을 앞둔 6월 15일(토) 오후 3시, SK서린빌딩 뒤편에서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17차 집회가 열린다.텐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자 주민의 삶,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에 고향을 떠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삶을 매 순간 잊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고 연대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이 하루빨리 평화와 존엄을 되찾기를 촉구하며 오늘도 광장에 모인다.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끝내기 위해 함께 외치자. 피켓을 높이 들고 거리를 누비자. FREE FREE PALESTINE!  🇵🇸   📌참고 모하메드 엘-쿠르드, “비가 오고 있다-진행형인 나크바와 현재의 혁명에 관해”,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 노션 페이지 *집회 등 관련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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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정] <연구동향 보고서> 해저케이블 공격 관련 연구지도
I. 해저케이블 관련 국제법적 체제 (조약 및 국제문서) 1. 조약 (1) 1884 해저전신케이블의 보호를 위한 협약 해저케이블의 보호를 주제로 다룬 최초의 다자조약 시적 범위는 평시(peacetime)이며, 물적 범위는 당사국 영해 밖에 부설된 협약 당사국의 해저케이블임. 협약의 성안과정에서 조약의 당사국 간 해저케이블 중립화에 대한 입장차 확인 (영국과 같은 해상강국은 중립화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해저케이블 보호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였음) 다만, 동 협약은 협약의 당사국에게만 적용되며 당사국 수도 제한적이라 일반적인 의무를 부과한다고 보기는 어려움. (2) 1907 육전의 법규 및 관습에 관한 제 4협약과 그에 부속된 육전의 법규 및 관습에 관한 규칙 시적 범위는 전시(wartime)이며, 물적 범위는 육상에서의 적대행위임. 따라서, 데이터 센터와 같은 육상에 있는 육양점을 점유하거나 파괴하는 경우만 포섭함. 제 54조에서 "점령지와 중립국 영역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파괴될 수 없으며,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복구 및 배상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해저케이블을 대상으로 한 적대행위에 높은 수준의 한계를 설정함. 국제법상 "전시"는 제한적이고 특정한 상황이며, 이를 평시 또는 회색지대에 일반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음. 또한 점령지와 중립국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로 적용 대상을 한정짓는데, 오늘날 복수의 육양점을 가지고 다수의 국가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의 특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음. (3) UN해양법협약 (TBU) 2. 국제문서 (1) 1879 IDI 결의안 및 1902 IDI 규칙 국제법학회(Institut de Droit International, 이하 IDI)에서 채택한 결의안과 규칙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음.  평시와 전시의 해저케이블 보호를 다루고 있음. 해저케이블에 대한 공격이 허용되는 상황을 교전국만을 연결하는 케이블이 중립국과는 무관한 지역에서 파괴되는 경우로 한정하고 효과적인 봉쇄라는 조건을 제시함. "효과적인 봉쇄"는 사실상 해당 문건에서만 확인되는 기준으로 당시 일관되게 또는 광범위하게 인정되었던 국가실행이라고 보기는 어려움.  (2) 1913 해전법에 관한 옥스포드 매뉴얼 제2차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서 논의된 이래 IDI에서 채택된 문서. 앞선 (1)과 유사한 구조를 활용하여, 케이블이 연결된 국가의 참전 여부와 적대행위가 발생한 위치를 기준으로 해저케이블 공격의 적법성을 판단함. 다만 "절대적 필요성"을 언급하여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공격을 허용하는, 즉 공격의 임계점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앞선 문서와 차이가 있음. (3) 1994 해상무력분쟁에 적용될 국제법에 관한 산레모 매뉴얼 1913 옥스포드 매뉴얼을 현대화한 문서로, 당시 관습국제법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음. 해저케이블 절단을 적대행위의 예시로 제시하여 교전국에 대한 공격임을 분명히 하였고,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전국을 위해 전적으로 기능하는 해저케이블은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함. (4) 2017 탈린매뉴얼 2.0 NATO 산하 사이버 방위센터에서 국제전문가그룹의 주도 하에 작성된 학술서로, 사이버 공간을 규율하는 국제법을 확인하는데 있어 권위있는 문서로 인정됨.  규칙129에서 1907 헤이그 육전규칙 제54조를 재확인하여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하지 못함. (5) 2020 무력분쟁의 엄선된 주제에 관한 오슬로 매뉴얼 기술의 발전과 기존의 법규 사이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시행된 연구의 결과물 해저케이블의 유형을 기능에 따라 분류하여 해저전력케이블과 해저통신케이블로 나누고, 적용 규칙을 구분함. 해저통신케이블의 중요성과 상호연결성을 강조하며, 변화된 물자의 성질을 수용하여 해저케이블 공격을 일반적으로 금지함. II. 해저케이블 공격 관련 학술자료  James Karska (2020), "Submarine Cables in the Law of Naval Warfare" 국제법상 해저케이블 공격을 금지하는 규범을 찾지 못했다고 설명하며 전시 해저케이블의 군사목표물 지위, 즉 합법적인 공격의 대상임을 인정함. Douglas R. Burnett (2021), "Submarine Cable Security and International Law" 과거 국가실행이 해저케이블에 대한 교전국의 자유를 확고하게 지지한다는 점, 그리고 해저케이블이 다용도로 활용됨을 고려하였을 때 교전국 통신에 관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들어 합법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인정함. Michael N. Schmitt (2022),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 and the Conduct of Cyber Hostilities: Quo Vadis?" 아무리 경미하다 하더라도 군용으로 사용되는 물자는 합법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해저케이블이 군사목표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역설함. Sophie Ryan (2023), "Submarine Communication Cables and Belligerent Rights under I--International Law"   민간물자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해저케이블이 합법적인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함. (기존 논의의 다수설과는 배치되는 주장임) III. 회색지대전략 관련 학술자료 MJ Mazarr (2015), "Mastering the Gray Zone: Understanding a Changing Era of Conflict" 회색지대 전략이란, 전쟁 발발이라는 임계점을 넘지 않는 선에서 전면전보다는 낮은 강도의 다양한 수단을 통해 안보 목표를 달성하는 전략.  준군사활동이나 비국가 행위자의 활용과 같은 수단을 활용하여 직접적이고 상당한 규모의 적대행위 수준에 이르지 않는 행위들을 자국의 목표를 위해 행하는 것을 뜻함. Morris L. et al (2019), "Gaining Competitive Advantage in the Gray Zone"  기본적으로 회색지대전략은 모호성을 띠는데, 타방 당사국으로 문제의 행위가 국제법 위반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는 의미임. 이로써 상대국이 회색지대 전략을 활용한 국가행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게 만듦.  또한 전략적 점진주의를 통하여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위를 단계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음. 수위나 강도가 낮은 행위를 먼저 감행하여 타방 당사국(들)의 대응 전략을 시험하기도 함.  IV. 비국가 행위자에 관한 학술자료 도경옥 (2010), "무력사용과 비국가행위자" <박사학위논문> (TBU) 기존의 무력사용에 관한 국제법은 국가를 적용대상으로 하나, 저자는 테러조직과 같은 비국가행위자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함. 국가 중심의 국제법 패러다임으로 인해 발생하는 법적 공백 상태가 예상하지 못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함.  테러행위에 관한 합의된 일반적 정의는 찾기 어려우나, 반테러 협약에 관한 합의에서 "그 성질 또는 맥락상 주민을 위협하거나 정부 또는 국제기구로 하여금 어떠한 행위를 하도록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에 대한 사망 또는 중대한 신체적 상해, 국가 또는 정부 시설을 포함하는 공적 및 사적 재산에 대한 중대한 피해, 중대한 경제적 손실을 일으킬 수 있는 그 밖의 피해를 불법적이고 고의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음. 물론 해당 정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하나, 무엇이 테러행위인지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는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됨.  해당 논문에서 비국가행위자와 무력사용에 관한 국제법을 상세히 다루는데, 특히 "테러행위로 인한 국가책임(State Responsibility)", "자위권 행사(Use of Force)", "국제인도법(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를 중심으로 비국가행위자의 행위와 관련된 법적 쟁점을 논증함.  V. 소결  기존의 규범은 전시/평시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규율하고 있으며, 국가행위자(정부기관, 군인, 경찰 등)를 행위주체로 상정하였으며 해저케이블의 양자적 성격을 전제로 하였음.  전시/평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상황, 즉 회색지대의 상황에서, 국가행위자와의 연관성을 밝히기 어려운 비국가행위자 (Non-state actors)의 해저케이블에 대한 적대행위를 포섭하고 있지 못함. 사실상 규범의 공백상태이기에 연구의 실익이 있다고 판단함.  기존의 연구들은 해저케이블에 대한 공격을 주제로 논의함에 있어, 1) 평시를 전제로 한다면 UN해양법협약을 근거로 국가책임을 묻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고, 2) 전시를 전제로 한 경우, 해저케이블이 합법적인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음. 그러나 전시와 평시의 사이에 존재하는 시점 상의 회색지대에서 발생한 공격이나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비국가행위자의 해저케이블 공격행위를 다룬 연구가 상당히 부족하며 시의성에 비해 연구가 덜 되어 있는 분야라고 판단됨. 회색지대 전략으로서 비국가행위자의 해저케이블 공격은, 해저케이블에 대한 일종의 테러행위로 간주하여 테러행위를 규율하는 국제법으로 포섭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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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정] <나의 선행연구 이야기> 디지털 기반시설(해저통신케이블)에 대한 위협 - 기존의 국제규범으로 충분한가?
I. 들어가며 위성을 통하여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통념과는 달리, 오늘날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99%는 해저통신케이블(submarine communication cable; 이하 해저케이블)이 담당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소셜미디어와 이메일, 매일 10조 달러 이상의 금융거래 뿐만 아니라, 의료정보 및 군사기밀과 같은 민감한 데이터의 송수신도 해저케이블 덕분에 가능하다. 이에 더하여, 디지털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데이터 트래픽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안정적인 인터넷 공급과 원활한 데이터의 이동은 더욱 중요해졌다. 오늘날 해저케이블은 '사이버 기반시설'로 기능하며 세계경제와 국가안보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 이하 UN)은 해저케이블을 "중요한 통신기반시설"이자 "세계경제와 모든 국가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II. 자료 리딩 결과 및 시사점 1. 해저케이블의 중요도가 높아질수록 이를 둘러싼 긴장과 위협도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래 발트해에서 노드스트림 해저파이프라인이 폭파되고 이후 해저케이블이 훼손되면서 해저기반시설 공격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급증하였다. 영국 정부는 "해저케이블을 파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전쟁행위(act of war)로 간주한다"는 경고를 통하여 해저케이블에 대한 공격을 무력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또한 2015년 9월 러시아의 정찰선박 얀타르(Yantar)호와 2019년 7월 해저잠수함 로샤리크(Losharik)의 해저기반시설에 대한 정보수집활동이 확인되면서, 해저케이블을 둘러싼 "전에 없던 러시아의 활동"을 경고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해저케이블 공격은 전시에 적을 무력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어왔기에 이를 둘러싼 국가간의 긴장과 위협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8년 미 재무부는 해저케이블에 대한 위협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는 러시아 기업 다섯 곳과 러시아인 세 명에게 제재를 가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적용 가능한 국제규범은 법규의 적용대상을 모두 "국가"로 상정하나, 실제에서 해저케이블 절단은 반드시 국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군인이 절단을 한 경우 국가행위로 어렵지 않게 귀속이 가능하나, (국가의 사주를 받은) 민간인이 절단을 할 경우 일반적으로 국제법상 주체가 되기 어렵기 때문에 현재의 법규를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실제로, 2023년 2월, 대만 마조도에 연결된 해저케이블이 한 주에 연달아 2개가 절단된 사건이 있었고 절단의 주체는 중국의 어선과 화물선이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통신 절단에 대한 대응을 지켜보는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일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2. 기존의 전통적인 국제법은 해저케이블 공격에 대한 충분한 보호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규범적 한계는 다층적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데, 먼저 해저케이블 공격을 규율할 수 있는 국제 규범 자체의 부족을 지적할 수 있다. 해저케이블을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조약은 1884해저전신케이블보호에 관한 협약이 유일하고,해저케이블의 부설 및 사용에 관한 UN해양법협약의 일부 조항에서도 해저케이블에 관한 내용을 다루기는 하나, 두 협약 모두 평시에 당사국에게만 적용되기에 공격을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1907년 헤이그 '육전' 규칙은 해저케이블 공격을 다루기는 하나, 규범의 적용 한계에 따라 육양점(landing station)에만 적용될 수 있어 매우 제한적인 보호만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기존의 규범이 해저케이블의 변화된 성질 (즉, 현재 해저케이블의 전신인 해저전신케이블은 양자적(bilateral) 구조를 가지나, 현재는 다자적(multilateral)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기존의 국제 규범이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국제법은 여전히 두 국가를 잇는 점대점 방식의 해저케이블을 규범의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해저케이블 (또는 해저케이블 공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따른다. 국제법협회(International Law Association, 이하 ILA)는 현재 국제법상 해저케이블과 파이프라인(Submarine Cables and Pipelines under International Law)을 주제로 연구보고서를 작성 중이며, 해저케이블과 무력분쟁법 및 사이버 공격에 관한 국제법도 향후 작업이 필요한 분야로 선정한 바 있다. 3. 해저케이블의 내재된 특징이 공격에 관한 국제법적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해저케이블은 초국경성을 전제로 하여 내수, 영해, 배타적 경제수역, 공해 등에 걸쳐 부설되어 있으므로 해저케이블의 절단 또는 파괴행위가 발생한 위치에 따라 권리의무의 주체가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해저케이블이라는 동일한 대상에 가해진 공격이라고 하더라도 공격이 발생한 위치에 따라 법적 의미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더불어, 공격의 발생지와 효과의 발생지가 다르기 때문에 공격 자체의 타당성과 대응을 위한 국제법적 주체를 판단하기 까다롭다. 예를 들어, 천연가스나 석유를 수송하는 해저파이프라인의 경우, 공격의 발생지에 가스누출과 같은 효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이는 공격자의 목적과도 일치한다. 반면, 해저케이블의 경우, 공격 지점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케이블 선의 물리적 훼손이나, 공격자가 원하는 효과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연결국의 국가 시스템의 마비나 통신의 혼란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해저케이블의 소유 형태와 목적이 다각화되면서 논의의 복잡성이 심화된다. 만일 민간 소유의 상업용 해저케이블이 공격을 받아 국가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면, 법적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III. 앞으로의 방향 및 과제 국제법은 전시와 평시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관련 규범을 적용하도록 하는데, 전시도 평시도 아닌 "회색지대"에 적용할 수 있는 규범에 대한 공부가 필요함을 느꼈다. 더불어, 국가행위자가 아닌 민간인(개인)의 공격 행위를 국제법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공부가 필요하다. 특히, 해당 행위가 전쟁범죄에 해당되지도 않고, 국가행위로의 귀속도 어려울 경우에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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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이야기(2) 대만의 지금과 이번 선거 이야기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狗去豬來)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공산당을 피해 조금씩 대만으로 상륙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대만 사람들에 대한 약탈,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이 이전부터 대만에 살던 사람을 본성인(本省人), 국민당을 따라 대만에 건너온 사람을 외성인(外省人)이라고 부르는데, 본성인들은 국민당의 모습을 보고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狗去豬來)고 탄식했다. -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대만 통치가 훌륭했다는 증거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 그러던 중, 1947년 본성인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정치, 경제, 군사, 사법 등 중요한 요직을 외성인들끼리 차지하는 정치적 문제, 국민당군과 외성인에 의한 약탈, 강간 등의 범죄 문제 등으로 인해 본성인들의 불만 등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차별과 그에 대한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던 때의 일이다. 1947년 2월 27일, 남편 없이 혼자 자식 둘을 키우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이 밀수 담배를 팔다가 적발되었다. 공무원들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했고, 이를 구경하며 공무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공무원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이 총격으로 스무 살 학생 천원씨(陳文溪)가 사망하면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민당은 3월부터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약 3만 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부천대(國府遷臺) 1949년, 국공내전에서 완전히 패배한 대만은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옮기고 강력한 계엄령을 실시했다. 장졔스(蔣介石)를 중심으로 하는 개발독재가 시작되었고, 10대 건설 등 다양한 경제 발전 정책을 통해 경공업에서 중공업 중심의 국가로 변화해 갔다. (이 모습도 한국과 똑같다) 이 와중에도 중국과 대만은 무력 충돌을 이어나갔다. 1981년까지 거의 한달에 한번 중국과 대만은 포격을 주고 받았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군수기지 역할로 대만이 경제 성장을 이룬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계엄령에 반대하며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1975년 장졔스가 죽고 그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대만 총통 자리를 물려받자 민주화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1979년 2월에는 『메이리따오(美麗島)』라는 잡지에서 주최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이 시위 주최자들을 잡아가면서 대만의 언론 탄압이 크게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이를 메이리따오 사건이라고 부르고 이 때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사람이 바로 훗날 총통이 되는 천수이비옌(陳水扁, 1950~)이다. 이 시기 민주화 세력을 비롯해 국민당 비판 세력 등을 모두 묶어 국민당 1당 독재에 바깥이라는 의미에서 당외세력이라 불렀다. 1987년, 장징궈는 민주화 여론을 받아들여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외세력들도 정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대표가 바로 민주진보당, 줄여서 민진당이라 불리는 세력이다. 대만의 정치 지형 대만의 정치는 양안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범람연맹과 범록연맹으로 나눈다. 범람연맹은 국민당 로고가 남색인 데에서 유래하는 보수파 연합이다. 이들은 중화민국을 중심으로 중국을 재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안에서 중화민국 단독 통일을 주장하는가, 일국양제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중국 대륙의 민주화가 가능한가 등의 이견은 있지만 하여튼 이들은 반-공산주의 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기 때문에 친중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미국의 원조 아래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친미성향을 띄고 있기도 하다. 범람연맹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복지, 분배를 강조하는 보수파인 친민당, 민국당 등은 로고 색깔이 오렌지색인 데에서 유래해 범귤연맹이라 불리기도 한다. 범록연맹은 민진당 로고가 녹색인 데에서 유래하는 반중-진보파 연합이다. 이들은 대만 정부가 중국을 점령한다거나, 일국양제로 중국과 통일을 한다거나 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중 일부는 중화민국이라는 여권에 대만국이라는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중화라고 엮이고 싶지도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꺼려 양안관계에 있어서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장 으로 중국과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는 국민당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대체로 민진당을 지지하고, 과거 계엄령 하에 있었던 독재정치에 대해서도 반감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이들은 양안의 교류 확대는 중국의 경제 체제에 대만이 잠식되는 것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것이 2014년 해바라기 운동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봉열전을 참조) 대만 정치는 중국과의 관계라는 큰 틀에서 둘로 나눠지지만 그 안에서도 과거 독재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 경제 정책 문제, 대만 내 소수민족 문제, 세대/성별/성적지향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슈가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칭더(賴淸德)의 당선과 그 이후 라이칭더는 1959년 신뻬이시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3개월이 되던 해에 부친이 탄광 사고로 죽고 모친이 석탄을 주워 팔며 자식들을 길렀다고 한다(天下雜誌.2017.09.04.). 내과의사가 되었다가 1994년 정치 무대에 뛰어든 그는 여러 자리를 거쳐 2020년에 부총통이 되었거, 2022년에는 민진당 주석이 되었다.  2019년, 그는 민진당의 정책은 반공불반중反共不反中이라고 표현했다(ETtoday.2019.12.23.). 공산당에 반대하는 것이지 중국이 싫은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트와이스 쯔위의 깃발을 놓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 - 대만에서는 쩌우쯔위 국기사건이라 부른다 - 이후에는 대만을 주권국가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이야기를 강하게, 자주 하고 있으며 상당히 강성한 대만 독립 주의자로 보인다. 台獨份子有自己的國旗,拿青天白日滿地紅的旗子,不是台獨份子。 대독분자(대만독립분자)에겐 자기의 국기가 있다.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든 자는 대독분자가 아니다. (ETtoday.2016.01.16.) 我們已是主權獨立國家,不需另行宣布獨立。 우리는 이미 주권독립국가이고, 따로 독립을 선포할 필요가 없다. (自由時報.2017.09.26.) 希望任何國家都應該要正視中華民國存在的事實。 어떤 국가든 모두 중화민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Newtalk新聞.2017.09.27.) 台灣不屬於中華人民共和國的一部分。台灣斬釘截鐵地就不是中華人民共和國一部分。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에 속하지 않는다. 대만은 명백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아니다. (中央通迅社.2023.08.07.) 台灣是一個民主國家。中華民國國名不必改。 대만은 민주국가다. 중화민국의 국명은 바꿀 필요가 없다. (上報.2023.08.15.) 대만에게 있어서 중국과의 관계는 단순히 안보 문제가 아니다. 2023년 대만의 전체 수출 수지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5.4%이고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18조 3천 억 원 가량인데 이것이 21년만의 최저치다. (한국무역협회.2023.12.16.) 최저치가 35%라는 것은 대만과 중국 사이의 경제 교류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로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2023년에 19.7%, 대미국 수출 비중은 18.3%였다. (지표누리) 이런 상황에서 마치 대만이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 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상황을 진짜 모르는 것이다. 물론 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대만에 무역 제재를 행하는 썩 좋지 못한 수를 두었고 이 때문에 대만에서도 새로운 수출길을 모색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중국 경제가 코로나 이후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 2014년, 대만 젊은이들의 시위인 해바라기 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중국과 대만이 서로 노동시장을 개방하는 협의를 진행하려 한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만 안에도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대륙 중국인들이 꽤 많이 들어와 살고 있고, 대만 연예인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꽤 많다.  대만인들에게 중국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너무 멀어져도 안 되지만 가까워져도 안 된다. 이미 홍콩을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홍콩의 우산혁명만을 기억하지만 홍콩에도 계급이 있고 정치 지형이 있다. 홍콩의 집값은 살인적이다. 그래서 홍콩 부자들 중에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홍콩에서 다닥다닥 붙어 사느니 대륙으로 가서 넓은 집에서 살겠다고 홍콩을 떠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굳이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느니 홍콩 사람들을 대륙으로 가게 하고 대륙 사람들을 홍콩으로 가게 해서 서로 섞이게 하면 그만이다. (물론 지금 시진핑의 중국 정부가 이 정도로 세련되지 않아서 문제다.) 대만에도 한국 농촌에서 외국인 신부를 맞이하는 것과 마찬가지 모습으로 대만 농촌의 노총각에게 시집 간 중국 여성들이 꽤 있다. 냉전 이후 양안관계는 정치적 현안에 따라 부침은 있으나 남북한에 비하면 서로 분리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가능성도 낮다. 대만의 군사력이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결코 약하지도 않기 때문에 중국도 엄청난 피해를 봐야함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중국과 대만의 전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물론 최근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사태가 불러온 전쟁 공포도 있지만 미국의 태도와 중국의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보통의 국가는 매년 연초나 새해가 되기 전에 새해의 경제 성장률을 추정하고, 중간에 수정을 하기도 하며 연말에는 그 추정이 어느 정도 맞았는지 발표를 한다. 하지만 중국은 연초에 발표한 경제성장률을 수정하지 않고 무조건 연말에 맞춰놓는다. 이래저래 해봤는데 경제 성장률이 예상에 못 미치면 부동산에 거액을 풀어서 경기를 끌어올리는 식으로. 하지만 23년부터는 이게 안 먹히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동산 살 돈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코로나 기간 동안 돈을 풀지 않았다. 그래서 코로나가 끝나도 도무지 경기가 좋아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시진핑은 거의 매년 국가의 부패를 잡겠다면서 우리로 치면 장관급부터 거의 모든 공무원을 숙청하고 있다. 하지만 부패는 이런 식으로 잡히지도 않거니와 결국 다음 세대의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 결과만 초래되었다. 시진핑 다음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오는 이유는 시진핑의 장기 집권 때문도 있지만 이런 이유가 크다. 그래서 이런 방식 저런 방식을 다 썼는 데에도 경제가 안 살거나 정치적인 인기를 얻기 어렵다고 여겨지면 독재자들은 결국 극단적인 수를 쓰게 되지 않겠냐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진핑과 중국이 자원의 부족, 특히 식량의 부족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다 대비해야 겠지만 전문가들의 중국 예측에는 객관적인 예측 이전에 사적인 감정이 많이 담겨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만 입장에서도 미국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도, 이스라엘에도 직접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전쟁을 바라는 대만인이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만 믿고 중국과 각을 세울 수 만도 없다. 입법원(국회)에서 민진당보다 국민당이 우세한 결과를 얻은 것도 어쩌면 혹시 모를 민진당의 급발진에 대해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바라는 대만 국민들의 민심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추신: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전쟁 시나리오를 예측하자면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남한과 북한은 파병을 하기보다는 서로를 노리며 힘의 균형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병력이 아니더라도 돈이나 무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미 미국 정치권에서는 한국을 향해 본인들이 강대국인 것을 좀 인정하라는 이야기가 나온지 오래되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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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이야기(1) 대만의 옛날
2024년은 선거의 해이고, 그 포문을 연 첫 선거가 바로 대만 총통 선거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대만의 역사 대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기 이후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오지(吳志) 오주전(吳主傳)」에 보면 오나라 왕 손권이 황룡 2년(230) 정월에 장군 위온(衛溫)과 제갈직(諸葛直)을 시켜 바다 건너의 섬 이주(夷洲)와 단주(亶洲)에 가게 했는데 이 두 사람이 이주에 살던 사람 수천 명을 강제로 끌고 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온 이주와 단주가 대만이라고 하기도 한다. 대만이 본격적으로 중국 역사 안에 서술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 때다. 이때는 지금의 펑후제도(澎湖諸島)와 대만 일대를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보았다. 본격적으로 대만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명나라 때의 일이다. 왜구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만이 왜구의 근거지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에 터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또 이 즈음은 유럽의 대항해시대에 해당한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거쳐 동남아시아까지 들어왔다가 대만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포르투갈 사람들이 대만에 붙인 별명이 바로 아름다운 섬, 포르모사(Formosa)다. 아름다운 섬 16세기 말, 17세기 초가 되면 일본은 전국시대를 마무리짓는 시기였고 중국도 대제국 명나라가 쇠약해지는 시기였다. 그 사이에서 조선은 소위 양란이라 불리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역시 이 틈을 타 명나라가 갖고 있던 펑후제도를 점령하고 1624년부터는 대만 따위엔(大員)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고, 2년뒤에는 스페인도 지롱(基隆)에 요새를 쌓기 시작했다. 두 세력이 대만에서 각축을 벌이다가 1642년이 되면 네덜란드가 스페인 세력을 대만에서 완전히 추방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중국 복건성, 광동성 연안의 중국인들을 모집해 대만으로 데리고 가 농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기 대만 원주민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뜻에서 타요우안(Tayouan)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지금 타이완의 어원이라는 설도 있다. 정성공(鄭成功) 네덜란드가 대만에 요새를 쌓기 시작한 1624년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 하나 태어났다. 중국인 무역상이자 무장집단의 수장이었던 정지룡(鄭芝龍)이 지금의 나가사키 근처인 히라도(平戸)번의 무사 타가와 시치자에몽(田川七左衛門)의 딸 마츠(まつ)와 하룻밤 정을 쌓고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정성공(鄭成功)이다. (중국역사박물관 소장 정성공화상) 타가와 마츠는 정성공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중국 복건성으로 길을 떠났다. 머리가 좋았던 정성공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해 생원이 되었고, 당시 이름난 유학자였던 전겸익(錢謙益)의 제자가 되었다. 전겸익은 동림당(東林黨) 소속이었다. 당시 명나라 황실과 정치를 비판하던 재야인사들이 동림서원에 모여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며 하나의 학파이자 정파인 동림학파/동림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양명학을 비판했다.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주자학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 쉽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행을 하여 사사로운 욕망을 줄여나가야 하고(존천리거인욕) 이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천하라는 공적인 영역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양명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곧 하늘의 이치라고 주장하면서(심즉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림당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 그룹은 양명학의 ‘자유에 대한 강조’가 천하를 그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림당은 주자학 중에서도 살짝 특이한 그룹이었는데, 그들은 학문적 목적이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사회적 욕망과 도덕적 수양, 정치적 활동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 속에서 천하의 이치(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유럽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고 농업, 공업 기술의 발전과 경영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는 군주제가 아니라 지방 분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성공은 이 그룹에서 지식인/개인의 강렬한 사회적 의무에 대한 마음가짐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1644년, 농민봉기군의 수장인 이자성(李自成)이 궁궐에 난입해 명나라가 멸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리장성을 지키던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이 소식을 듣고 성문을 그냥 열어버렸고 이로 인해 만주족이 장성을 타고 내려와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때 명나라 지식인들 중 일부는 청나라에 대항하는 군대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정지룡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황족인 주율건(朱聿鍵)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주율건은 정성공의 외모가 수려한 것을 보고 매우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겠다, 명나라 황실의 성인 주씨를 하사하겠다 운운했는데 정성공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서 정성공에게는 ‘나라의 성씨를 받은 나으리’라는 뜻의 국성야(國姓爺)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정성공의 영어 별명 중 하나인 콕싱야의 어원이다. 청나라와의 싸움 와중에 아버지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더이상의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정성공은 자신의 부친과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며 청나라와 싸웠다. 각각의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청나라의 강력함을 이길 수는 없었던 정성공은 결국 대만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것이 1661년의 일이다. 1661년, 펑후제도를 점령한 정성공은 같은해 3월에 네덜란드가 쌓았던 강력한 요새 질란디아(Zeelandia)를 포위, 1년 남짓 공격한 끝에 네덜란드 세력을 대만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다.  정씨왕조 네덜란드 세력을 타이완에서 완전히 몰아낸 정성공은 대만을 동도(東都)로 개명하고 정씨 왕국을 세웠다.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낸 1662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81년에 사망했고, 그 다음은 정경의 아들 정극상(鄭克塽)이 뒤를 이었는데 정극상은 1683년에 청나라에 항복해버린다. 이를 통해 정씨왕조의 대만통치도 끝이 난다. 정성공 일족의 대만 통치는 20년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대만 독자적인 정권을 세우고 대만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만의 시조이자 개국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화외지지(化外之地) 정씨왕조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는 대만에 대만부, 대남현(타이난), 고웅현(까오슝), 가의현(쟈이)를 설치하고 복건성 아래에 편입했다. 하지만 대만은 어디까지나 변방이었다. 청나라 황실에게 있어서 대만은 황제의 교화 바깥의 땅(화외지지化外之地)였고, 대만에 정착한 중국인과 대만 원주민도 교화 바깥의 백성(화외지민化外之民)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중국인들은 끊임없이 대만으로 건너갔고, 19세기가 되면 그 이전에는 사실상 대만섬 전역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이전에는 대만섬 남쪽에 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들과 대만 원주민들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만인이라 불리는 한족 그룹이 만들어졌다. 원주민들도 이렇게 한화된 대만 원주민을 평보족(平埔族), 평지에 사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1839년, 아편전쟁이 시작되면서 청나라 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이후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여러 열강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대만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청나라 측에서도 대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뒤늦게 인식하고 1885년, 대만을 복건성에서 분리해 대만성을 만들고 대만을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진다. 여러 신료들은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하건 협상을 벌이건 우리끼리 알아서 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고종이 강력하게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톈진조약의 조선에 청나라가 출병할 경우 일본도 자동출병해야 한다는 조항에 따라 일본군도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청일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결과 역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결국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이 대만 통치를 시작한다. 대만총독부 1895년, 대만에 살던 사람들은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대만민주국을 건립했다. 이때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전쟁을 을미전쟁(乙未戰爭)이라 부른다. 하지만 대만민주국은 우리가 예상하듯이 패배하고 말았고, 1896년이 되면 일본이 완전히 대만을 장악하고 통치하기 시작한다. 일본에 대한 대만 내부의 여러 활동은 조선과 꼭 닮아 있다. 친일파도 있고 독립세력도 있으며 이들이 좌우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것도 똑 닮았고, 식민지 후기에 황국신민화 정책이 벌어진 것도 똑같다. 한가지 다른 점은 일본이 싫으면 언제든지 대륙으로 넘어가 생활을 하거나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는 한족의 입장과 일본이 싫어도 이 땅을 떠날 수 없는 원주민의 입장, 이 두 가지 입장이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기억했으면 하는 두 가지 무장 투쟁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15년에 벌어진 시라이안(西来庵事件)이다. 이 사건에서 대만인 1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 하나는 1930년 원주민 세디크족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인 우서 사건(霧社事件)이다. 한국에는 막연하게 대만이 친일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마치 독립 운동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인터넷 검색만 좀 해봐도 다 알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소위 전문가 딱지를 붙이고 나온 사람들이 너무 성의 없이 떠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시라이얀 사건을 주도한 위칭팡余淸芳의 사진. 일본인들과의 경제적 차별로 인해 벌어진 무장봉기였다.) (다음 화에 계속)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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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이목이 쏠린 2024 대만 선거
2024년 첫 선거이자 대만을 너머 중미전으로도 다뤄지던, 대만 제16대 총통 선거가 1월 13일 치뤄졌다. 중앙선거위원회에 따르면 각 후보 득표수(득표율)는 다음과 같다. 라이칭더(頼清徳): 558만 6019표(40.05%), 허요우이(侯友宜) : 467만 1021표(33.49%), 커원저(柯文哲)  : 367만 466표(26.46%).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 라이칭더(頼清徳, 64)가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중국, 미국, 한국 등 주변 나라가 오히려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한국 역시 대만 선거결과가  한국에 끼칠 경제적 정치적 영향 등을 분석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대만에게 이번 선거는 어떤 의미였을까  대만에서 직접선거가 치뤄진 역사는 30년 정도밖에 안 된 최근의 일이다.  4년 중임제에 8년 주기로,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8년간 대만 첫 여성 총통으로 활동한 뒤, 또 다시 민진당의 라이칭더가 16대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8년 주기로 번갈아 집권하던 당교체는 희석되었다.  1. '친중이냐 친미냐’,라기 보다 ‘민주주의를 지킬 것인가 잃을 것인가’의 문제  대부분 친중의 국민당, 친미의 민진당의 대결 구도에, 새로 등장한 중도 성향의 대만민중당, 세 당의 승부로 보았다.  국민당은 중국과 협력하여 평화를 지킬 것을 표방했고, 민진당은 독립국가로서의 중국과의 분리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또 대만민중당은 현재 체제(양안)를 유지하는 것을 주장했다. 핵심이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대만인들에게 더 중요한 사안은 ‘민주주의를 지켜갈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대만에서 중국에 대한 반감이 거세진 것은, 중국 정부의 경제적 정치적 압박 탓이 크다. 우선 홍콩 사태와 관련해서 중국 정부의 폭력적 대응을 본 대만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생겨났다. 중국 정부의 한층 강화된 통제 검열과 시진핑 주석의 일당 독재체제는 과거 역사로 회기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곧 대만 민중들이 힘들게 얻어낸 자유민주주의를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을 낳았다.    2. 민중당 커원저 후보로 간 제 3의 표심, 선거를 판가름하다  대만인들은 왜 민진당의 라이칭더 총통 당선을 선택했을까. 앞선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이 타이완 정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한 점, 또 코로나19에 대한 적절한 대응 등도 대만인들이 언급하는 주요한 요인들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번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 것으로 꼽히는 부분이, 대만민중당(이하 민중당)으로 분산된 표심이란 사실이다. 국민당과 민중당의 야권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국민당을 지지하거나 민진당을 지지하던 표심 중 적잖은 수가 민중당으로 향했다. 이들은 대부분 젊은 층으로, TV나 현수막, 집회연설 등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국민당과 민진당보다, 인터넷 SNS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운 커원저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또한 크게 변화하지 않는 현상 유지에 좀더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젊은층은 커원저 후보가 총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민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에 의의를 뒀다고 말한다.  특히 선거 막판에 중국 정부의 전쟁 도발 위협과 국민당 총통이었던 마잉지오우(馬英九)의 “나는 시진핑 주석을 믿는다.”는 발언은 민중의 표심이 민진당으로 향하게 역효과를 냈다.  3. 입법의원 의석수로 드러난 표심 - 여러 당이 공존하는 민주주의를 원하다    대만 선거는 총통 부총통 선거 뿐 아니라 입법의원 선거도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민진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수를 점하지 못했다는 것, 근소한 차이로 국민당이 앞서고 소수 정당들이 늘어나, 여소야대의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민진당 지지자들로서는 아쉬움을 표하긴 하지만, 국민당이나 민중당 지지자들은 국가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데에 안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입법의원 선거 결과 역시 대만 민중들이 바란 것은, 급진적인 독립이나 중국으로의 치우침이 아닌 현상 유지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민주주의 자체였다.  한국에게 대만 선거는 왜 중요했나 경제적인 부분에서 대만 선거가 중요했던 것은.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과 경쟁하고 있는 TSMC가 대만 주력 반도체 사업이기 때문이다. 생성형 인공지능 시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반도체 경쟁은, 4차 산업의 주요 격전지다. 한국에서는 삼성의 반사이익을 계산하기도 했지만,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의 당선과 여소야대 국면은 대만을 둘러싼 반도체 경쟁에 큰 변화를 끌어당길지는 의문이다. 다만 대만의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은 확실히 더 부각되었고, TSMC 등 대만 경제와 AI시장과의 관계가 전 세계 AI 시장과 연관되어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의 특이점이 있다.  정치적 부분에서는 역시나 중국과 미국간의 갈등이 대만 선거에, 또한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염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라이칭더의 당선으로 한국, 미국, 대만, 일본이 협력구도를 유지하는 현재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앞으로 중국정부가 대만을 상대로 어떤 정치적 경제적 제재나 압박을 가할지가 주목된다. 이미 중국정부는 이번 선거로 대만 민심이 중국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으로 파악하고 내부 진단에 나섰다.  그럼에도 대만인들은 의연하다. 대만이 민주주의를 잘 구현하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이번 선거를 통해 더 확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가 폭력을 내세운 방식으로는 대만 민심을 되돌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대만이 급진적으로 중국과 척을 지고 독립국가로 가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긴장과 묘한 협력관계와 더불어, 국제 사회 역시 대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정부에 대한 눈치 보기로 적당한 거리두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한국의 총선이다. 한국 총선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지가 2024년 새로운 국제적 이슈로 부상할 것이고,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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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함께 평화’ 집담회 : 함께 상상한 평화의 미래
캠페이너들이 같은 기간동안 동일한 주제로 사회 이슈에 대한 토론을 만드는 ‘함께 프로젝트’ 지난 11월에는 ‘함께 평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정리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한 캠페이너와 평화에 관심 있는 시민들이 집담회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먼저, 함께 평화에 참여한 캠페이너들이 본인의 글을 직접 소개했습니다.  “나 하나 목소리낸다고 변하는 게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 평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일상생활에서부터 평화를 자꾸 이야기하고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평화의 분위기에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작은 실천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팔레스타인이라고 명명되는 사태들에 너무 많은 왜곡, 뒤틀림이 섞여있는 듯 하다. 그런데 그 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모두가 나름의 판단의 근거가 있겠고 그로 인해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팔레스타인 내부인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함께 평화 페이지’에서 확인해보세요! 🧊아이스브레이킹 하나의 주제로 모였다 할지라도 각자의 배경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마련인데요. 먼저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을만한 질문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캠페인즈 시즌이슈 시리즈인 ‘국제 분쟁,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에 답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평화를 상상하는 질문들 더 진솔하고 다른 곳에서는 편하게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위해 질문을 기반으로 집담회가 진행되었는데요. 그 중 몇 가지 질문과 참가자들의 발언을 공개합니다.  1) 미디어가 국제 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팔레스타인 입장에서의 보도는 얼마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디어는 좀 더 부추기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의 인권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미디어 뒤에 있는 원동력은 현장에서 70여 년동안 이어진 사건 그 자체라고 봐야 합니다.”  “미디어의 폭력성에 우리가 우려를 많이 하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알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거든요.” 2) 평화는 왜 중요할까요?  “먼저 ‘평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합니다. 누군가 ‘하마스가 테러를 하지 않았다면 평화로웠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데 이스라엘이 평화롭지 않게 되니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온 상황이죠.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은 그동안 본인들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요? 말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듣지 않은 우리 탓인 거죠. 우리도 방치하는 데 일조했기에 하마스가 테러를 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평화가 뭘까?'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화, 중요하지', '평화 필요한 거야'라고 생각은 해도 평화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동의를 하는데, 평화가 뭔지에 대해 정의하고 합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권도 그렇고 평화도 그렇고 그 개념이 뭔지를 아는 것도 필요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언제 이야기하는지, 어떤 사람이 얘기하고 있는지, 누구에게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의 평화이냐'가 중요합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던 것을 빼앗겼을 때 그리고 결핍이 생겼을 때에 비로소 평화에 대해 고민하게 되거든요.” “평화가 모두의 평화라면 나는 어떤 윤리적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남의 나라 일에 대해 가장 실감하는 방법은 그 나라 친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지순례도 많이 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팔레스타인 친구는 얼마나 되나요? 이런 것들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결국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힘을 위임한 정부가 역할입니다. 한국 정부는 교묘하게 계속 결의안에서 기권을 해왔는데요. 이스라엘의 잘못된 점령 정책에서 적극적으로 플레이를 해온 게 미국과 한국입니다. 국가는 가만히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를 이어내는 힘은 실감에서 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믿는 인권과 존엄과 평화를 옳다고 믿는 힘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부를 압박하고 밀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고 “중,고등학교 때 팔레스타인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는 20년 가까이 지나면서 최근까지 이 주제에 대해 돌아보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누구의 평화인가?' '누구의 인권인가?' 이야기를 나눌 때 결핍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화나 생각을 나누는 게 필요했다는 생각을 해왔는데요. 잘 온 것 같아요.” 대화의 장이 끊이지 않고,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는 행동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캠페인즈는 디지털 시민광장으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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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 2023년 11월 29일, 헨리 키신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2 헨리 알프레드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는 1923년 5월 27일에 독일에서 태어나 1938년에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3년에 완전히 미국으로 귀화한 그는 군인이 되어 독일어 통역 업무를 맡기도 했다. 뉴욕시립대학 시티 칼리지 경영-행정관리학부에 입학했다가 2차대전을 맞아 군대에 간 키신저는 1946년에 다시 하버드에 입학, 1950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얜델 엘리엇(William Yandell Elliott, 1896~1979)이었고, 윌리엄 교수의 지도 하에 1952년에 19세기 유럽 외교사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54년에는 빈 체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빈 체제란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었다가 완전히 패배한 후, 메테르니히 등을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이 국경, 국제질서 등을 전부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리기로 한 것을 말한다. 그는 박사 논문에서 나폴레옹 이후 백년 동안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대해 다른 유럽 국가들이 징벌을 내리지 않고, 힘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에 중점을 주었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한국의 많은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빈 체제에 대해 서술할 때 나폴레옹이 퍼트린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저버리고 메트리니히 등이 중심이 되어 나폴레옹 이전의 군주제로 돌아가려고 했다고 서술하며 그 보수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키신저를 빈 체제를 균형의 회복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박사 과정을 졸업한 후에는 하버드 대학 정치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외교 정책에 대해 다양한 발언을 쏟아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핵’에 대한 이야기다. 키신저는 아이젠하워 정권의 핵전략은 ‘대량 보복 전략’을 비판하면서 핵무기와 기존의 무기를 단계적으로 운용하면서 무슨 전쟁이든 일단 최대한 안 일어나게 하되,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는 제한전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케네디 정권의 고문이 되어 외교 정책에 잠시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확실히 정치인이 된 것은 닉슨 대통령 시절이다. 3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 대통령후보 예비선거에 입후보한 넬슨 록펠러(Nelson Aldrich Rockefeller, 1908~1979)의 외교정책 고문이 되었다. 1964년, 1968년 대선에서도 그를 지원하면서 록펠러 가문과 연을 맺게 되었다. 록펠러가 선거에서 완전히 패한 후에는 1968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차드 닉슨에게 직접 스카우트되어 국가안보문제 담당 보좌관이 되어 정권의 핵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전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은 국무장관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으나, 닉슨 정권 때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쥐게 되었다. 키신저는 이에 앞서 「관료와 정책입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데, 미국 외교의 기능 강화를 위해서는 유명무실한 존재인 NSC가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키신저는 젊은 외교관, 장교, 국제정치학자들을 스카웃해 NSC 특별 보좌관에 임명해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국무성 등과 권력투쟁을 벌여 닉슨 정권 하에서 외교정책의 결정권을 완전히 독점하게 되었는데, 국무장관을 중요한 정책 결정에서 배제시킬 정도였다. 이 시기 미국의 대사, 주재 군인, CIA 지국장 등은 NSC, 어떻게 보면 키신저의 수족들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훗날 그가 이룬 최대 업적인 미중교류 개시 역시도 키신저가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주재군인, CIA 지국장들을 활용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을 했으며 그 모든 과정에서 국무장관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고 한다. 4 1971년,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의 밀사 자격으로 중국에 극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도 회담을 진행하며 중국과의 화해와 외교 관계 수립을 도모했고, 이와 동시에 중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교섭 카드로 삼아 북베트남을 만나 베트남 전쟁 종전 교섭을 하고, 소련과도 제1차 전략무기제한조약(SALT1)을 체결했다. 이런 일련의 정책을 데탕트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을 하고 있었다(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키신저는 소련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중국과 함께 파키스탄을 지원하였다. 파키스탄은 중국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를 중개하는 역할을 맡았고, 키신저는 이에 대한 대가로 동 파키스탄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과 강간을 외교적으로 엄호해 주었다. 동 파키스탄은 훗날 독립해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973년에는 마오쩌똥(毛澤東) 주석을 만나 미국, 일본, 중국, 파키스탄, 이란, 튀르키예, 서유럽이 함께 소련을 포위하는 포위망을 구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키신저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중국, 소련과 관계를 맺으며 또 해결한 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 종전이다. 키신저는 중국,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베트남이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고 압박을 했고, 동시에 대규모 폭격과 봉쇄라는 군사적 압박을 진행해 결국 베트남과 평화적인(?) 종전을 타협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보급선 역할을 하던 라오스, 캄보디아에도 비밀리에 폭격을 지시해 최대 수십 만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제4처 중동전쟁 후에는 중동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슬람권 국가들과 이스라엘을 조정하기 위한 셔틀 외교를했다. 1974년에는 아랍의 맹주였던 이집트의 사다트 정권을 소련과 분리시키고 미국편으로 만들기 위해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했고, 사우디 아라비아와는 원유를 달러로 결제하기로 약속해 미국의 자원 공급을 원활히 하면서 사우디 아라비아에는 안전 보장을 제공했다(워싱턴-리야드 밀약). 1973년. 키신저는 국무장관이 되어 포드 정권이 퇴진할 때까지 미국의 외교를 장악했다. 이 시기, 키신저의 지휘 하에 있던 NSC에서는 [국가안전보장과제각서 200(National Security Study Memorandum 200)]이라는 것을 작성했는데 이를 흔히 키신저 리포트라고도 부른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인구가 증가하는 나라의 정권의 기반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이는 미국의 불안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개발도상국에 대해 인구를 억제하는 의학적, 정치적 개발원조를 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는 1989년에 기밀이 해제되었다. 5 1977년,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콜롬비아 대학 교수 자리를 제의 받았지만 학생들의 격한 반대로 취임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조지타운대학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 가서 자신이 공직에 있었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1982년, 키신저 어소시에이트라는 국제 컨설팅 회사를 설립해 주로 중국 대상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자문을 해주는 일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큰 부를 얻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수많은 기업은 물론 트럼프 정권에 이르기까지 외교/무역 관련 자문을 계속했다. 2007년에는 「핵무기 없는 세계(A World Free of Nuclear Weapons)」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내용은 핵무기는 더 이상 전쟁 억제가 불가능하니 미국 정부는 핵무기를 없애는 게 낫다는 이야기였다. 이란, 북한의 핵실험이 화제가 되던 당시, 이 논문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19년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식을 초월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며, 전쟁이나 분쟁에서 인공지능을 이용해 전쟁을 하는 게임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코로나로 인한 건강 문제는 금방 해결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국제 장벽이 생겨날 우려가 있으며 이런 장벽이 세워지면 앞으로 몇 세대 동안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6 그의 외교정책을 흔히 현실주의라 평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로지 미국의 이익과 미국이 맹주가 된 상태에서의 국제 안정을 꾀했기 때문이다. 그가 박사논문에서 빈 체제를 높이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현실주의는 강대국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뿐이었다. 말로는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실상을 잔혹한 독재자들을 지원해주고 있었던 미국 외교의 한 측면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결정은 닉슨이 한 것이고 키신저는 ‘사신’에 불과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공산국가인 중국을 제3세계라 부르며 마치 미-소-중 삼국이 강대국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적중했다. 중화민국의 UN 탈퇴와 중화인민공화국이 UN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에도 그의 활약이 있었다. 현재 중국을 만드는데에 어느 정도 키신저의 공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는 미국을 위해 캄보디아 폭격을 감행해 수십 만을 죽였고, 1973년에는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인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리기 위해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해 대통령궁을 폭격하게 만들었다. 칠레 사람들은 피노체트 정권의 폭력적 정치 하에서 고통을 받았는데 1989년에 미국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피노체트를 바로 버렸다. 1975년에는 동티모르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는데 동티모르 해방전선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하는 걸 묵인했다. 인도네시아에 의한 동티모르인 학살을 묵인한 것도 그였다. 7 키신저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고, 그의 현실주의적 정책을 배워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 그의 전쟁범죄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강약약강처럼 보이는 것은 나 뿐일까? 이렇게 또 한 시대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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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에서 한국시민들이 잊지 말아야할 국제인권기준
국제분쟁에서 한국시민들이 잊지 말아야 할  국제인권기준 국제민주연대 나현필     분쟁과 평화, 그리고 한국 한반도에서 전쟁이 멈춘 지 70년이 지났습니다. 북한과의 무력충돌과 갈등도 계속되고 있지만, 적어도 한국전쟁의 기억은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북한이 발사한 비행발사체에 대해 서울시가 경보문자를 보냈을 때도,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놀라 우리만큼 침착함을 유지했습니다. 외국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상 섬나라나 다름없는 한국에게 이웃국가의 분쟁은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한국 군대가 파견되어 본격 전투에 참여한 것도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분쟁 뉴스들이 남의 일로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오랜 기간 한국에선 국제민주연대와 같은 일부 시민단체들이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 대사관 앞 등에서 항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활동의 전부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한국사회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이 나서서 연대와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과의 교류도 늘어나면서 국제사회의 분쟁문제에 직접 참여하고 행동하는 시민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국제민주연대가 2022년 6월부터 12월까지 미얀마 군부와 협력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정부를 규탄하기 진행한 러시아 대사관 앞 1인시위) 홍콩, 미얀마, 우크라니아, 팔레스타인 2019년에 있었던 홍콩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홍콩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국에서도 시민사회 뿐만 아니라 대학생들과 일반시민들도 홍콩 시위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다른 국가의 문제에 특정 시민단체들이 아닌 광범위한 한국 시민들의 행동이 있었던 것은 2019년 홍콩시위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문제는 한국에 있던 중국유학생들이 대학내에 있던 홍콩지지 대자보를 훼손하고, 중국 영사관이 홍콩 관련 행사에 압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나타난 것입니다. 즉, 그 전까지는 두드러지지 않던 국제분쟁의 갈등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비해 2021년 2월, 미얀마 군부쿠데타가 일어난 후에 한국에서는 당시 코로나19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시민사회는 물론, 국회와 일반시민들도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그 열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홍콩과 마찬가지로 미얀마에 대해서도 한국에서는 이념과 지역을 넘어선 광범위한 지지가 이뤄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홍콩과 미얀마 시민들과 한국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많은 행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우크라이나는 조금 양상이 다릅니다. 2022년 3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한국 시민사회는 러시아 침공을 비판하고 있지만,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러시아이 부당한 침공에 맞서 싸울 무기를 한국이 제공해 주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즉각적인 휴전보다 러시아가 현재 침공 후 점령한 영토를 반환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한국 시민들의 실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물가가 올랐고 이로 인해 우리의 삶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한국시민들의 관심을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워낙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과 인권침해는 계속되어왔지만, 이번처럼 단기간에 만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된 예는 드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가 광범위하게 이뤄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국제인권기준준수를 위해 노력할 이유 사실, 왜 어떤 분쟁에는 많은 한국시민들이 지지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어떤 분쟁에는 그렇지 못한지는 큰 고민입니다.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은 존재하지만 한국에선 고통 받는 이들보다 누구의 편인가가 더 관심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국이 가해자인지, 중국과 러시아가 가해자인지는 중요한 문제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가해자를 찾는 동안 피해자들의 고통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실 누가 가해자인지도 우리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러한 국제사화에서 발생하는 분쟁들이 결국 우리의 안전도 위협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급망 문제가 아니더라도 최근 국제사회 분쟁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평화를 보장하는 체제로서의 UN이 제 역할 못하는 것과 함께 반인도적 전쟁범죄가 횡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핵무기 사용까지 거론되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분쟁의 확산과 심화는 한반도의 전쟁위협도 동시에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전쟁위협을 넘어 기후위기를 포함하여 지구촌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이 시대에 각자 도생의 아비규환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한국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금에 참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을 위해 한국시민사회는 긴급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미얀마 난민을 위해 식량생산 사업을 하는 해외주민운동연대라는 한국 단체도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오랜 기간 팔레스타인과 미얀마를 위해 활동해왔던 단체가 주축이 되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시민들의 소중한 후원이 직접 현지의 피해자들과 주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경험과 현지에서의 신뢰가 쌓여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이러한 한국 시민단체들의 역량이 이런 분쟁상황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 곳 말고도 세계 곳곳에서 분쟁지역의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많은 시민단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지원하는 것에 여전히 부족합니다. 하지만 꼭 한국 시민단체들을 지원해 달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주민들을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능력하다고 비판 받는 UN이지만 앞서 언급했던 여러 분쟁상황에서 UN의 인권전문가들이 내놓는 입장은 명확합니다. 우리에겐 오랜 기간 인류가 함께 고민하고 논의한 국제인권기준이 있고 그것을 위반한다면 그 누구도 비판 받고 처벌 받아야 합니다. 한국의 이주민들과 한국시민사회가 요구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국제인권기준을 준수하라! 국제인권기준을 위반한 국가와 집단을 국제사회가 단죄하라! 한국시민들이 국제인권기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정부와 기업들이 이 기준을 지키도록 더 많은 목소리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우리 시민들의 목소리가 법과 제도로 실현될 때, 우리는 더 많은 일들을 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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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죽음의 불꽃놀이로 낭비하는 골든타임
얼마 전 DX KOREA 2022 (대한민국 방위산업전 2022) 저항 평화행동으로 재판을 받은 평화 활동가 8명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전시된 탱크 위에서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한 그들에게 사법당국은 총 1,7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주변인들에게 그들의 탄원을 애원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의 이 부정의하고 기울어진 판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긴 한 걸까?' 이런 생각을 매일같이 하며 점점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나는 언젠가부터 "불꽃놀이"를 직접 보거나 그 단어를 듣게 되면 묘한 기분을 느낀다. 아마도 불꽃놀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알게 된 후, 불꽃놀이가 환경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일 것이다. 사람들은 불꽃놀이를 낭만적인 이벤트라고 여기는 것 같다. 서울 여의도에서 매년 열리는 서울세계불꽃축제를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 친구들과 함께 '명당'에서 보기 위해 일찍이 자리 경쟁을 시작하기도 하니까. 불꽃놀이를 그저 낭만적인 "놀이"로 여기는 비약을 저지르기 전에 짚어야 할 사실이 있을 것이다. 폭죽과 폭약의 차이점은 그저 사람을 향하느냐 공중을 향하느냐의 차이다. 불꽃놀이는 화약 제조법을 연구하던 과정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시작되었다. 군사용 화약이 정교해짐에 따라 불꽃놀이 기술도 발달되었던 것이다. 서울세계불꽃축제는 대기업 한화에서 주최한다. 시민들의 일상을 위한다는, 겉보기에 언제나 좋은 대의명분을 앞세운다. 전쟁에서 대의명분이 없었던 적 없듯이. 서울세계불꽃축제는 한화가 주력하는 정교한 화약 제조기술을 홍보하는 박람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꽃놀이를 보며 의식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비윤리성을 이야기하자면 아마 시민들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외치며 한국이 무기 수출 및 군사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감투가 다 씐다. 빨갱이, 종북좌파 등 흔히 포털 댓글 창만 봐도 나오는 그런 단어들 말이다. 그들의 논리는 더 많은 무기 확보와 군사 훈련 및 동맹 즉 "힘"만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주는 평화의 전제조건이라 한다. 정말 그럴까?  탄소중립을 외치는 시대에 군대는 그야말로 숨은 기후 악당이다. 글로벌 책임을 위한 과학자(SGR)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군사활동에서 비롯된 탄소 배출량은 전체의 약 5.5%를 차지한다. 군사 부문이 항공·해운·철도 부문 배출량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또한 전략폭격기 연비는 승용차의 100분의 1 수준이고, 소비하는 연료도 엄청나다. 전략폭격기의 1시간 소비 연료량이 자동차 1대의 7년 사용량에 맞먹는다고 한다.  하나 이 수치는 매우 보수적이고 비공식적인 추정치일 것이다. 군사 부문의 탄소 배출량 보고 의무는 모든 국가가 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일부 선진국에서 공개가 되더라도 "일부"만을 공개할 뿐이다. 1997년 체결된 교토의정서에는 미국의 반대로 인해 탄소 배출량 보고 의무 중 군사 부문이 제외되었고, 2015년이 돼서야 선진국만 배출량 보고 의무를 가진 상태다. 또 배출량 보고 의무만 질 뿐 탄소 배출량 절감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국가 안보, 국방과 직결된다는 이유로 매우 축소 보고되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숨은 기후 악당임을 직관적으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 위기가 우리 평화를 위협한다는 것은 이제 보편적이고 자명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지는데, 왜 그 기후 위기를 부추기는 군비 경쟁과 전쟁을 하기 위한 군사 훈련은 우리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한치의 의심도 보태지 않는가? 물가 상승이 연쇄적으로 이뤄지듯이 하나의 국가가 때아닌 이념 전쟁을 자초하며 안보를 강조하고 군사력을 강화할수록 주변국의 군비 경쟁은 심화되고 군사적 긴장감은 고조된다. 누군가가 나를 언제 찌를지 몰라 무장하고 다니는 상태를 우리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거대한 농담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의심의 미덕을 지녀야 한다. 힘의 논리에 의해 쓰인 수많은 글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떠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죽음의 불꽃놀이가 터지고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우리의 통각은 점점 마비되며 그렇게 골든타임은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의식해야만 한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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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모여
영화 ‘잇다,팔레스타인(Stitching Palestine)’은 전통 자수를 놓는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여성 12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점령에 의해 삶터를 떠날 수밖에 없고, 팔레스타인에 정주할 수 없는 이들의 삶이 천에 수를 놓듯 영화에 새겨진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며 전통의상인 토부와 쿠피예를 입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행위는 팔레스타인 문화를 기억하기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국내에서도 팔레스타인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연대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참여연대 황수영 활동가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은 학살을 멈춰라. 팔레스타인에 자유와 평화를! : 모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신발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팔레스타인에 연대하기 위한 크고 작은 움직임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팔레스타인에서 1달 동안 1만 개 넘는 우주가 사라졌다 지난 11월 17일(금), 광화문 보신각 광장에 신발 2천 켤레가 놓였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이하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은 가자와 서안 지구에서 한 달간 희생된 1만 명 넘는 이들을 애도하고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중단을 촉구하고자 <모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를 개최했다. 광장에 배치된 어린이 및 유아 신발부터 운동화, 장화, 구두 등 다양한 신발은 약 일주일 동안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바라며 시민들이 기증해 준 것들이다. 애초에 목표로 했던 1천 켤레를 넘어 3천 켤레의 신발이 사무실에 도착했고, 사람들의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모여 신발 시위는 시작되었다.  신발 2천 켤레는 단순히 팔레스타인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을 넘어, 공습으로 희생된 사람 한 명 한 명을 조명하고자 했다. 매일 전 세계로 타전되는 비현실적인 사망자 통계가 아닌, 이스라엘의 공습이 없었다면 누군가의 가족이나 지인, 친근한 이웃으로 살아갔을 사람들을 호명하는 비폭력 시위였다. 신발 시위가 있던 날 광장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애도와 평화의 마음을 나눠주었다. 매서운 추위에도 아침 일찍부터 신발 설치를 함께한 활동가들, 신발 시위를 찬찬히 둘러보다 사진을 찍거나 꽃다발을 신발 위에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참여한 시민들이 적은 애도와 연대의 메시지가 쌓여갔고 금세 보신각 광장을 팔레스타인에서 사라진 1만 개의 우주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으로 가득 메웠다. 신발 시위가 저물어 가는 ‘추모의 밤’ 시간에는 "태어난 국가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 있는지 나뉘는 것이 부당하다"는 청소년과 희생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떠올리며 시를 낭독하는 시인의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추모의 밤’에 참여한 시민들은 실제 팔레스타인의 희생자 수는 신발 2천 켤레가 상징하는 2천 명의 약 7배에 달한다는 현실을 떠올리며 큰 목소리로 집단학살 중단과 즉각 휴전을 촉구했다. 전 세계의 평화를 향한 외침이 전달되었을까,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이 나흘간의 임시 휴전에 합의했다. 공습이 시작된 이후 46일 만에 이루어진 이 조치를 통해 양측은 인질과 수감자를 풀어주고 가자 지구에 연료, 물 등 인도주의적 지원을 허용하기로 했다. 국제사회의 잇따른 환영 성명에도 이스라엘은 ‘일시적인 공습 중단’으로 단정 짓고, 향후 계속 공습을 진행할 예정이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인질 석방을 위한 ‘임시 휴전’ 상태임을 감안할 때 아직은 상황을 주시해야할 때다.  사라진 우주를 기억하기 위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 신발 시위를 제안한 황수영 활동가는 “팔레스타인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어서,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어서” 기획서를 순식간에 써 내려갔다고 한다. 매일 언론으로 타전되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공습 소식, 병원 바닥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주민과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 사진을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몫이 없는 이들의 곁에 서서 연대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대안을 찾는 게 직업인 활동가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던 터라 동료의 제안이 반가웠고 감사했다.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에서 신발 기증을 위한 웹 포스터 홍보를 시작한 뒤, 참여연대 사무실로 택배 박스가 ‘쏟아졌다’. 신발이 가득 든 큰 상자부터 한 켤레가 든 작은 쇼핑백까지 매일 같이 사무실로 신발이 든 상자가 배송되었다. 많은 물량에 택배 노동자분께서 사무실로 전화를 주시기도 하고 (“1층으로 내려와 주세요. 택배 20박스가 왔어요.”), 토요일 아침을 ‘택배 40박스를 사무실 2층에 두었다’는 문자로 시작하기도 했다. (참여연대 사무실이 위치한 동네를 담당하는 택배 노동자분과의 새로운 인연!) 뿐만 아니라 하루 평균 10명 이상이 사무실을 방문해서 신발을 기증했다. 친구들과 신발을 들고 방문한 청소년부터 아이 신발을 들고 찾아온 가족, 신발을 기증하며 당일 시위 현장을 촬영하고 싶다는 청년, 신발이 가득 든 가방을 내려두면서 “도움이 더 필요하면 이야기하라”고 음료수를 건네던 수녀님 등 신발을 매개로 많은 시민과 만날 수 있었다. 매일 저녁, 사무실 지하에서 신발이 담긴 택배 박스를 정리하는 일이 익숙해질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다들 뭐라도 하고 싶었구나. 팔레스타인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고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상처 난 마음이 모여 만드는 변화 세계 저편에서 일어나는 집단학살의 현장을 보며 ‘뭐라도 해야겠다’ 결심하는 그 마음은 힘이 세다. 전화를 걸어 신발 기증에 관해 조심스레 묻고, 사무실 입구에서 쭈뼛쭈뼛 어색한 얼굴로 서성이던, 두 손 모아 신발을 건네며 꼭 감사 인사를 덧붙이는 사람들. 신발을 부치는 택배에 편지와 작은 선물을 담아 보내던 이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파커J.파머는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지 강조하며 마음은 감정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음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매개”이고, “오로지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고 마음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경험”이야말로 우리를 생각하는 대로 살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고 설파한다. 그 마음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흩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깨지고 열리는 과정에서 모순을 끌어안고 다양성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했다.   자칫 추상적일 수 있는 이 이야기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떠올려 본다. 전 세계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현장을 목도하며 인간성 상실의 위기를 느끼는 현재, ‘뭐라도 해야겠다’는 소박하고 단단한 마음이야말로 세계시민으로서 함께 살고자 하는 ‘열려있는 마음’이라고 확신한다.   신발 시위 때 사용할 신발 2천 켤레를 짝 맞춰 포장 이사 박스에 정리하는 이 단순한 일은 시민들의 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신발 시위가 정말 전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 않냐며 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혹자에게는 시위를 통해 외치는 “학살을 멈춰라”, “즉각 휴전하라” 같은 촉구하는 언어가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역만리에서 우리가 요구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냐는 냉소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 매 순간 이어지는 공습에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희생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마음을 모으고 ‘폭력을 멈춰라!’ 큰 소리로 외치는 일이다. 세상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못 참겠어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깨지고 상처 난 마음이 모여 변화시킬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자유와 존엄을 되찾는 날까지 함께 걸어주시라. * 이 글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이지원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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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군사주의를 넘어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 실천으로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시리아, 수단… 세계 각지에서 수일, 수개월, 수년째 무력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몇줄의 기사와 숫자로 나열되는 피해 규모, 사상자 기록을 읽다보면 가늠조차 어려운 현실이 아찔하고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피스모모가 번역출판한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23 연감: 군비, 군축, 국제안보>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무력분쟁을 경험한 국가는 총 56개국으로 2021년보다 5개 증가”했으며 “이 무력분쟁 중 세 개(우크라이나, 미얀마, 나이지리아)는 확실히 10,000명 이상의 분쟁 관련 사망자가 포함된 주요 무력분쟁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합니다.  무력 충돌과 전쟁 뒤에는 항상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해 관계와 지난한 역사적 맥락이 놓여 있습니다. 지역마다, 국가마다 발발 원인과 개별 사건은 다를 수 있지만 폭력의 굴레는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어린이들은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고, 여성과 노인, 무고한 사람들이 공습 두려움에 떨다 목숨을 잃습니다. 그렇게 다치고 아픈 이들을 어렵게 돌보던 마지막 병원조차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폭격 앞에 잿더미가 됩니다. 이런 현실 앞에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는 매해 전 세계의 군사비 지출을 추적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8년 연속 증가하여 2022년 약 2조 2400억 달러에 달하며 지난 몇년 중 최고치를 갱신했습니다. 2조 2,400억 달러는 한화 약 2,900조 원이 넘는 돈입니다. 어느 정도 금액인지 대한민국 정부 예산과 비교해보았습니다. 한국 정부의 2023년 총 예산은 638조원 가량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4년 반 동안 한국과 같은 나라가 전국 국가 사업을 운영할 정도의 비용이 전 세계에서 1년 동안 군사비로 쓰였다는 의미입니다. 군비 경쟁은 많은 인명과 자원을 소모하며 반인류적인 피해와 낭비를 초래합니다.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보는 무기 거래상, 패권 국가, 정치 세력, 자극적이거나 무관심한 일부 언론의 극단성을 지켜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에게 질문을 건넵니다. 수십 수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이득과 이념이 정말 존재할 수 있나요? 국제사회가 동시에 모든 무력 분쟁을 멈추고 군사비 지출을 피해 복구, 갈등 중재, 국제협력을 위한 방향으로 새롭게 쓸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마주하게 될까요. 너무 비약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상상인가요? 지구 곳곳에서 매일 폭격과 테러가 발생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야말로 얼마나 비약적이고 비현실적인지 잠시 멈추어 함께 떠올려보기를 제안합니다.  국제관계와 평화 연구 분야의 이론가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1960년대부터 평화와 폭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간접적 혹은 구조적 폭력을 넘어서려면 단지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부재한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가 아니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쟁의 종식뿐만 아니라, 적극적 평화를 추구함으로써 사회 정의, 평등, 포용적 문화 교류 등 긍정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평화적 협력이 아닌 긴장과 불신을 조성하는 군비 경쟁과 대립에 반대하며, 국제 사회와 개개인이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모색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함께 읽을 거리 [캠페인즈] 이 전쟁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당신에게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팔레스타인 : 모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 [전쟁없는세상 이로운넷 기고] 전쟁과 무기산업에 저항하라 - 군사적 이분법을 넘어 [피스모모] 2023 시프리 보고서 (SIPRI 연감) 한국어 요약본 피스모모는 매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연감요약(Yearbook Summary) 자료를 번역 출판합니다. '2023년 SIPRI 연감: 군비, 군축, 국제안보'에서 전 세계 군사비 지출, 국제무기 이전, 무기생산, 핵전력, 무력분쟁 및 다자간 평화활동 분야의 독자적인 데이터 및 군비 통제, 평화, 국제 안보 분야의 주요 부문의 최신 분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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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자극적인 것은 틀렸다?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을 통한 재현이 가진 정치적 한계에 대해서는 수잔 손택의 논의가 유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 논의가 짚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종종 생각해 보곤 했다. 그 시작은 서경식이 헨미 요의 소설을 두고 ’육박주의‘라고 규정한 대목을 읽으면서였다. 아무리 말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말하기란, 잔인한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며 눈앞에 들이미는 것외에 다른 방도가 있는가? 당신이 외면하는 현실은 이러하다고, 가감없이 노골적인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재현의 한 방식일 수는 없는가? 일전에 발표한 원고에 이런 문제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태원 참사 직후부터 했던 얘기이지만 자세히 상술해서 공적 자리에서 언급한 건 처음이다. 이태원 참사 당시 업로드된 수많은 영상과 사진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비난을 가했다. 자극적인 장면을 아무런 검열없이 버젓이 올리고, 또 그걸 그대로 받아 내보내는 언론의 보도들, 수익을 올리려고 그 영상들을 활용하는 유튜버들… 하지만 그걸 비판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까?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사진과 영상을 내려야 한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참사는 혐오와 부정에 둘러싸여 포위되어 있었고, 그렇다면 오히려, 당신들이 ‘놀다가 죽었다’며 남 일처럼 여기는 장면이 바로 이것이라고, 이 모습을 보고도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아가, 사진과 영상을 비난할수록 참사 현장을 지켜본 이들에게서 목소리를 박탈하는 것 아니었을까. 나는 당시 거의 모든 영상을 다 찾아봤다. 그런 내게도 참사의 장면들은 비현실적이고 불가해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고 묻기 이전에, 이게 대채 무슨 일이지? 싶은 장면들. 사람들이 뒤엉켜 있고, 사람들을 운반해 아스팔트 이곳저곳에서 CPR을 하고 있고, 그런 와중에 클럽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노랫소리들, 참사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들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 역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겪는 상황을 설명할 언어가 없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언어라곤 그저 카메라를 들어 참사의 순간을 담아 SNS에 업로드하는 것밖에 없지 않았을까. 사실 그 영상과 사진들은 말을 잃은 사람들의 절박한 언어 아니었을까.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보를 찾아 헤매다 보니 지금 내 인스타 계정에는 들여다 보는 게 무서울 정도로 온갖 쇼츠와 사진들이 가득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SNS는 심리전이 벌어지는 뜨거운 전장이 되었던 바있다. 현대의 심리전의 주체는 국가와 군대이며, 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심리전 전술이 수행된다. 지금 심리전 역량에서조차도 이스라엘이 압도적이다. 애초에 팔레스타인은 ‘국가’조차 아닌 상태이고, 정규군과 게릴라군 사이에서 심리전 역량의 격차는 명백하다. 이스라엘은 외신 기자들을 전장에 동행시키며 옆에서 늘상 인터뷰를 하고, 자신들의 관점을 마치 ‘현장의 이야기’인 것처럼 주조해내고 있다. 한국 언론은 이스라엘 대변인의 브리핑을 장면을 담은 영상을 수도 없이 내보내지만, 하마스든 파타든 팔레스타인 측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 몸으로 겪고 있는 끔찍한 상황을 영상과 사진으로 담는 것 이외에 과연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근대의 국민국가 체제와 국제법 체계 하에서, 전쟁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치르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근대 전쟁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로 시민들의 열정과 지지를 지목한 바있다. 근대 전쟁의 성격은 총력전이고, 총력전은 전 국민적 역량과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니만큼 시민들의 여론과 정서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핵심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류 최대의 총력전이었던 세계 2차대전에서 본격적인 심리전이 등장해, 적의 사기를 빼앗는 동시에 아군과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고자 했다. 이스라엘은 정확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국가기구도 아니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민간인들의 목소리를 심리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재현의 권력’을 박탈당한 존재들의 비명소리일 뿐이다. 극단적인 대항폭력은 보통 재현 권력의 비대칭성에서 온다. 일상적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질러온 테러와 학살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아무리 말해도 아무도 듣지 않는 현실. 역설적으로 하마스의 ‘충격적인 공격’만이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는 목소리였다. (왜 전태일을 비롯해 열사들이 분신을 하고,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방화를 했겠나?) 그렇다면 과연 근본적으로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사람들 수백명이 죽어야 그제서야 관심을 기울이는, 바로 나와 당신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간 가해자들 아닌가. 사람들이 죽고 있다. 이것만큼 명백한 문제가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과연 지금 당신에게는 들리고 있는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목소리가 미약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당신이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가. 사진과 영상이 아무리 잔인하고 자극적인들 지금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준들 과연 바뀔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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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연결'은 평화의 단서가 될 수 있을까
가자지구의 저널리스트가 공습 현장을 영상으로 기록한 모습 2023.10.11. BBC  미국 보수단체가 트럭 전광판에 팔레스타인 지지성명에 참여한 하버드대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을 띄우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모습 <2023.10.15 연합뉴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3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 제노사이드.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명목으로 학살이 일어나고 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발생한 전쟁 사태를 지켜보며 나는 참담함과 무기력을 느낀다. 두 전쟁으로 수 만명의 민간인이 죽어가고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죽음이 조명되고 있다. 한국으로부터 머나먼 땅, 현장을 직접 볼 순 없지만 온갖 미디어와 매체를 통해 ‘생지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며 지옥을 ‘목격하는’ 사람으로서 나를 둘러싼 새로운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연결이자 단절이다.  폭력을 멈추라는 목소리와 그것을 막는 권력 거대한 생명 파괴와 학살의 현장을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개인들은 분열된다. 가자지구의 시민들이 틱톡,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가자지구 폭격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곳곳이 부서지고 불이 꺼진 건물 속, 바깥은 폭격으로 먼지가 자욱하고 건물 파편이 날아다닌다. 사람들이 무너진 건물에 깔려있고 전기도, 수도도 없는 지상 최대 규모의 감옥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세계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의 대학생들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이스라엘 민간인 학살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하버드 학생연합단체에서 반이스라엘 공동성명을 발표하자, 미국의 보수단체에서 독싱트럭 전광판에 ‘하버드 학부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 구성원들의 얼굴과 이름을 싣고 캠퍼스를 배회했다. 보수단체는 ‘X(옛 트위터)’에 온라인에 매시간 새로운 이름을 등록하고 있다며 연대 위원회를 탈퇴한 학생 이름은 삭제하겠다고 올렸다. 미국 자본 권력의 핵심 중 하나인 빌 애크먼은 이스라엘을 비판한 대학생들을 채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자본을 움켜진 거대 권력의 횡포와 보수단체의 폭력적 위협에 공포를 느낀 학생들은 성명을 철회했다고 한다.  폭력에 대한 저항이 자본과 위력에 좌절당하는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 모습으로부터 나는 연결과 단절의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다. 나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간인과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약자들에게 더 강하게 연결된다. 동시에 어떤 목소리도 듣지 않고 움켜진 무기를 힘껏 사용하는 권력을 바라보며 더욱 무력해진다. 연결, 그다음이 필요하다. 어떻게 우리는 나아갈 수 있을까. 단절을 딛고 더 큰 목소리로 전쟁을 지켜보며 참담함, 무기력을 느끼는 이들과 전쟁을 정무적 관점으로 보는 이들의 단절이 비극을 심화시키고 있다. 고통은 고통끼리, 권력은 권력끼리 서로를 연결하고 강화한다. 약자는 서로의 고통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이 판을 쥐고 있는 권력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나같이 고통과 연결된 힘없는 개인은 무력함에 힘이 부쳐 결국 무감각 해 질것이다.  고통으로부터의 무감각과 흐린 눈이 결국 권력이 생존하는 방식임을 안다. 그래서 더욱 연결됨, 그다음의 감각이 절실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인질을 일부 석방하고 4일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네타냐후는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마스 붕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가 앞으로 더 암담한 폭력의 세기가 펼쳐질 것임을 암시한다.  국제사회의 지성은 시험에 들었다. ‘우리’의 연결은 무거운 과제를 지니게 되었다. 폭력을 목격하고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우리의 노력이 부디 나아감의 과정이길 바란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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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애석하게도 오늘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군대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최대한 적게 쓰려고 했으니까 조금만 참아주시길 부탁드린다) 올해 8월 말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TMI이지만 예비군 훈련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월요일에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다. 코로나19 확진 후 훈련에 참여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내가 받아야 하는 훈련 이름이 더 당황스러웠다. 살아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저격수 훈련’이라니. 도대체 저격수 훈련은 어떤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봤더니 현역 시절에 ‘특급사수’ 이력이 있으면 차출당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커뮤니티 글이 검색됐다. 불현듯 8년 전 여름이 떠올랐다. 논산훈련소 사격장은 너무 더웠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여름에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외부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힘들다. 그때의 나도 그랬고, 빨리 쉬고 싶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단 한 번에(!) 20발 중 18발을 맞췄다. 사격 훈련이 끝날 때까지의 휴식은 물론이고, 어쩌다 보니 중대 1등을 기록해서 특급사수 표창까지 받았다. 그게 내 인생 마지막 특급사수였다. 물론 2년 가까운 군 생활에서 사격 훈련은 한참 더 있었다. 하지만 멋모르던 훈련병 시절 이후 나는 사격을 좋아하지 않게 됐다. 나름의 계기가 있었다. 내가 생활했던 부대 안에는 동원훈련을 위한 사격장이 있었다. 사격장 뒤로는 순찰로가 있었고, 사격이 진행되는 동안엔 안전을 위해서 순찰을 하지 않았다. 군 생활 절반이 채 안 되었던 시기로 기억하는데, 영점 사격을 한창 하던 중 순찰로에서 병사 두 명이 내려오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총기의 조준선 너머로 보이는 표적이 단순한 종이, 플라스틱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총 쏘시는 거 좋아들하시니까 마지막 훈련 열심히 받고 가세요” 마지막 예비군 훈련은 운이 좋게도 3시간이나 일찍 끝났다. 어떻게든 집에 일찍 가고야 말겠다는 예비군들의 집념이 만들어 낸 사격 우수 성과 덕분이었다. 그런데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마냥 유쾌하진 않았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들었던 교관의 말이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뭘 위해서 오늘 총을 40발이나 쏜 걸까? 사격을 즐거워해도 되는 걸까?’ 전투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내 손에 있던 총기가 향했던 곳엔 종이 표적지가 있었지만 세계 곳곳에 있는 누군가의 손에 있는 총기는 살아있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 분쟁, 갈등, 투쟁의 역사에 적혀있는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2023년의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과거의 한반도를 비롯해 수많은 곳에서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누군가에겐 투쟁이었고, 누군가는 분쟁 혹은 전쟁이라 표현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분쟁과 전쟁은 비단 사람의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한국 전쟁이 시작된 지 70년이 넘은 지금도 한반도에선 ‘빨갱이’, ‘종북좌파’ 같은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념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시계가 느린 분들이 참 많다. 자기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철 지난 이념을 악용하는 사람도 참 많다. 없는 간첩도 만들어 내던 시대보다야 덜 하겠지만 여전히 북한에 대한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쟁과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도 만들어 냈다. 사람이 죽지 않아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명제다. 평화가 필요하고,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답은 사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갈등을 보며 한 가지 확실한 건 ‘힘에 의한 평화’와 같은 거짓말은 하지도, 믿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내 무장조직 하마스의 군사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였다. 그 큰 차이가 평화를 만들어줬을까? 오히려 평화를 위한 노력 대신 큰 힘의 차이를 만들어 상대를 억압한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 아닐까? 너무 뻔한 말 같지만 그래서 진짜 평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배경엔 분쟁과 전쟁 속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대한 공감과 지속적인 관심이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총구를 들이밀면 총구가 돌아올 것이다. 반대로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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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당신에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요즘은 많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요즘은 안부를 묻는다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밤새 모니터를 통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습과 의료시스템 붕괴, 난민 상황들을 모니터링하고, 그 곳의 활동가들과 간신히 연결을 이어나가면서 지내고 있는 동료들에게, “잘 지내요?”라는 인사가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마음일 것 같아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또 다시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죽음을 마주해야 하니까요.  저는 2018년부터 병역거부운동과 무기거래반대운동을 하는 평화활동가로 지내오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악플과 비난을 경험했어요. 이를테면 ‘군대도 안갔다온 게 어디서 큰 소리냐’, ‘무기가 있어야 우리를 지키는 거다’, ‘빨갱이다. 쳐서 죽여야 된다’ 이런 말들을 들어왔어요. 근데 저를 정말로 상처입게 만드는 말은 그런 말들이 아니더라고요. 전쟁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거나, 정치적으로 필요악이라는 말, 어차피 내 일은 아니라는 말들을 들으면서 저항 없이 쭈그러드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자포자기와 자조가 섞인 말들이 가져다 주는 절망은 생각보다 큰 것이더군요. 불과 한 달 만에 1만 개의 찬란한 우주가 사라졌는데요 (각주1).  우리 곁에  숨쉬던 그 많은 이웃들을 한꺼번에 잃었는데요.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니요. 정말 그럴까요? 가끔은 그 말에 맞서 싸우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사흘 전 신촌역 부근이었습니다. 약속시간에 늦어서 바쁘게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어요. 어디선가 퍽 퍽 퍽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횟집이었습니다. 사람들로 꽉 찬 횟집 앞이었어요. 제 몸통의 반 만한 물살이, 소위 ‘생선’이라고 하죠. 그 물살이가 뜰채에 잡힌 채 아스팔트 위에 마구 내동댕이 쳐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물살이를 회로 뜨기 전에 죽이거나 기절 시키는 과정이었겠지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팔딱거림이 멈출 때까지 몇 번이고 퍽, 퍽, 퍽, 차갑고 단단한 아스팔트 위로 내동댕이 쳐지고 있었습니다. 제 몸통 반만한 물살이가 피를 흘리면서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어요. 물살이가 고통스럽게 죽임당하고 있었고, 그 장면이 너무 끔찍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가던 길을 서둘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순간이 계속 떠올랐어요.  ‘왜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을까.’ 전쟁이 남의 일이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어쩌면 질끈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믿기지 않는 잔혹한 대량학살을 매일같이 뉴스로 보고 있는데, 그게 너무 끔찍하잖아요. 사상자를 가리키는 어마어마한 숫자들 뒤로, 방금까지 살아 숨쉬던 삶들이 있다는 걸 차라리 믿어버리지 않고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저들의' 죽음과 ‘나의’ 삶을 분리시켜버리는 게 아닐까요?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았을테지만,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에게는 책임이 부여된다고 믿습니다. 길을 걷다 옆 사람이 갑자기 쓰러진다면 누구든 119에 전화를 걸테니까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그 장면들을 우리는 지난 한달 간 계속해서 목격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더 오랜시간 지속되어온 점령과 억압을 애써 외면해왔지요. 저는 그 학살을 목격한 이상, 우리 모두에게 이미 책임이 생겨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해요. 폭력을 승인하지도, 폭력에 익숙해지지도 않을 책임, 그리고 이 전쟁을 끝내라고 말할 책임 말입니다.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다른 이유 그리고 그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이 세계 9위의 무기수출국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이스라엘 무기수출액은 3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2014년 가자분쟁으로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던 수천 명 팔레스타인인이 희생된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꾸준히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수출을 허가했고, 한국의 무기기업들은 배를 불려온 것이죠.  바로 지난 달 있었던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무기박람회 아덱스 (ADEX) (각주 2)에서는 이스라엘관을 운영하며 이스라엘 국방부와 무기 회사들이 비즈니스를 펼쳤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정당화하며 ‘전장에서 증명된’ 이스라엘의 무기들을 홍보하고 있었어요. 그 무기들의 성능을 증명하는 ‘전장’은 그간 이스라엘 점령군으로부터 셀 수 없는 폭격과 전쟁범죄를 겪은 팔레스타인이지요. 이 전쟁으로 방산업계는 또 한 번 절호의 찬스가 왔다며 무기 판매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크게 웃는 정치 카르텔과 부패한 권력자, 그리고 무기상인들을 곁에 둔 이상, 이 전쟁은 남의 일일 수도, 남의 일이어서도 안됩니다. 전쟁은 우리 일상 속에 켜켜이 쌓인 차별과 착취, 암묵적 동의, 승인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지속됩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기 판매 중단을 요구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지원하는 기업들을 보이콧하고,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현지의 상황과 목소리를 알리는 글과 영상을 공유하고, 시위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런 행동들이 있을 때에만 전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무력감에 젖을 이유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으니까요.  전쟁을 끝내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어제 (11/17), 서울 보신각 앞에서는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가 하루 종일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위는 시민들의 신발 기부로 이루어졌어요. 신발들의 수신처였던 참여연대 사무실에는 수십개의 택배 박스가 쌓였습니다. 애초에 2천 켤레를 목표로 시작했던 신발 기부는, 3천 켤레의 신발이 도착하며 마감되었습니다. 그 신발들을 하나 하나 옮기며 많은 얼굴들을 떠올렸습니다. 저마다의 사랑과 희망과 꿈, 그리고 절망과 분노 역시 품었을 삶들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뉴스로, 인터넷으로 들려오는 가자지구의 소식에 눈물 지으며 신발을 모아 보내준 수많은 시민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 시민들의 마음과 호소가 하루 동안 보신각 앞을 채웠습니다. 그 호소는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강력한 메세지가 되어 국내외에 전달되었고요. 전쟁을 끝낼 힘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더더욱 발휘할 때, 우리는 마침내 전쟁을 끝내게 되겠지요. 너무 끔찍해서 때로는 눈을 질끈 감고 싶어지지만, 그래도 끝까지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바라보자고 용기내어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의 목격자가 된 책임을 함께 지자고요. 그 책임이 때론 버겁고 힘들지 몰라도, 도망가는 것 보다는 덜 버겁지 않을까요. 다음 시위는 11월 26일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인근에서 진행됩니다. 함께해주세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피해주민 긴급구호를 위한 모금에 참여해주세요. (클릭) (각주 1) 지난 10월 7일 이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약 1만 2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각주 2) 한국에서는 한 해에도 여러 차례 무기박람회가 열린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인 서울 아덱스가 매 홀수년 10월에 개최된다. 올해 서울 아덱스는 10월 17일부터 22일까지, 성남 서울공항에서 진행됐다. 피스모모를 비롯한 국내 평화/인권/기후 단체들이 아덱스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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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평화를 위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중
국제 분쟁이 일어나고 일상 속 변화를 실감한 순간이 있나요? 어떤 순간인가요? 나는 생일을 맞이해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서 깼다. 애타게 생일을 기다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일은 내가 태어난 날인만큼 소중하고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22년 나의 생일을 나는 차마 즐겁게 보낼 수 없었다. 생일 전날 새벽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뒤부터였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나의 생일날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정도가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쓸모없어 보였고, 점점 무기력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충격도 한순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혼자 걱정만 한다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로, 내 일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로서, 나의 활동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2주 동안 기숙사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제는 집보다 학교가 더 익숙하고 친밀하다. 그렇지만, 또 그만큼 외부 활동을 많이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안에서 나름대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갈 길을 만들어 갔다. 전쟁이 일어난 후, 학교 내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앉아서만 지켜볼 수 없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학생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깊이 엉켜있는 역사를 공부했고, 서방권 나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이 다루었다. 그 뒤, 다른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전쟁으로 인해 나타나는 참혹함과 불행함을 벽보에 붙여 알렸다. 외부 활동을 꾸준히 하기는 어려웠지만, 해바라기와 촛불을 들고 반전시위에 학생들과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 일상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갔다. 그렇게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어느덧 학교 내 반전 NGO에서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저희 NGO 소식이 궁금하시면! 관심이 있으시면! 🥰 인스타그램 : lets__peace / 이메일 : lets_peace@naver.com) 지금 평화가 가장 필요한 국제 분쟁 지역은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세계지도를 보면 조각 케이크처럼 아주 반듯하게 잘린 지역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이 그러하다. 하지만 아프리카가 처음부터 반듯한 국경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항해시대를 시작으로 수많은 서방권 국가가 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들은 금과 은을 얻기 위해 광산을 캤고, 끝이 보이질 않는 플랜테이션을 만들었으며, 아프리카 부족민들을 짐승 취급했다.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서방권 국가들의 무분별한 약탈과 만행을 저지른 시대가 대항해시대다. 그 당시 국부의 가치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보유하는지에 있었다. 그렇기에 유럽 열강들은 금과 은을 더 많이 얻기 위한 땅따먹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이 국부를 늘리는 땅따먹기에 불과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갈라진 땅처럼 조각조각 부서졌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부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열강들은 그들의 편의로 그은 국경선 안에 서로 다른 부족들을 강제로 거주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이 가지고 온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이념은 더 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켰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대륙은 분쟁 속에 있다. 외부의 세력에 의해 갈라진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할까. 부족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과 싸움은 계속 일어날 것이고, 갑작스러운 해방은 나라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조각난 땅 위의 삶은 굉장히 불안하고 무서울 수밖에 없다. 몇백 년간의 지배가 현재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이다. 너무나도 슬픈 건, 이러한 분쟁을 만든 나라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꼬여버린 실타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게 참 슬프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들은 다른 외부 세력으로 인해 땅이 갈라진 채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중 하나다. 그러한 나라들에 평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국제분쟁을 멈추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국제 분쟁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갈등이 전쟁을 낳는다.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과정이 존재한다. 가족 간의 갈등이, 마을의 갈등으로 번지고, 그것은 나라 안의 갈등으로, 결국 나라 간 혹은 나라 안의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과정이 빨리 일어나기도 하지만, 몇백 년간의 길고 긴 싸움 끝에 터지는 것이 전쟁이다. 그러한 전쟁을 우리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며,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처음에 나는 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좌절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전쟁이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켜도 막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어떤 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내 고민을 수업 때 털어놓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평화 시에 서로 간의 교류와 외교를 잘해야지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교류하려고 하고, 외교를 하려고 하니 해결이 되지 않는 거지.” 너무 와닿는 말이었다. 왜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만, 극한의 상황까지 가야지만, 그제야 행동하는 걸까.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민간인 차원에서도. 그렇기에 작은 실천도, 매우 소중하다. 우리 안의 평화를, 내 주변의 평화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쟁은 거대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작은 눈덩이가 커지고, 커져서 괴물이 된 것이 전쟁일 뿐이다. 작은 눈덩이가 산에서 굴러가는 걸 막는다면, 우리는 전쟁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당연히 시위 한 번이, 발언 한 번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모이고 모이면,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굵직한 사건들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굵직한 사건이 될 수 있는 건, 역사로 남을 수 있는 건 그전에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은 실천이 무의미하지 않다는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걸 계속 명심해야 한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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