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통일교, 혐한(嫌韓) -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
2022년 7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일본 나라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지역(大和西大寺駅) 근처에서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를 하던 아베 신조오(安倍晋三, 1954~2022)가 총으로 암살을 당했습니다. 이 뉴스가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총을 쏜 사람은 1980년생 야마카미 테츠야(山上徹也). 야마카미는 왜 아베 전 총리를 죽였을까요? 통일교는 또 무슨 이야기일까요?
야마카미 테츠야
야마카미 테츠야는 1980년생으로 부친과 모친, 형과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고 유년기에는 꽤 유복한 집안의 자식이었다고 합니다. 테츠야가 네 살이던 1984년, 건설회사의 임원이던 부친이 투신자살을 한 후, 테츠야의 삼남매는 모친의 친정이 있던 나라시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모친이 건설회사의 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테츠야는 성적도 우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MBS.2022.07.11.).
이 집안의 불운은 테츠야의 부친이 자살한 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테츠야의 모친은 이후 불운한 일이 계속되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라고 불리던 종교단체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단체의 약칭이 바로 통일교입니다.
통일교
통일교는 문선명(文鮮明, 1920~2012)이라는 사람이 1954년에 만든 개신교계 신종교입니다. 한국의 컬트 기독교계는 나름대로 계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만들어진 종교에서 교주가 신통력을 보이지 못하거나 교주의 사망, 싸움 등으로 교단 안에서 갈등이 벌어지면 그 종교에서 교리를 살짝 바꿔가면서 새로운 종교가 생겨나는 식입니다. 통일교도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계 이단 종파는 19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이야기를 여기에서 다 할 수는 없고, 여기에서는 김성도(1882~1944)라는 여인부터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김성도는 1923년 자신이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주장하며 종교를 창시했는데, 이는 한국 이단 기독교계에서 지금도 이야기하는 직통계시의 시작입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죄의 존재로 보고 그 시작을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잡는데, 김성도는 선악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음란이 문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음란 때문에 신에게 죄를 짓게 되었고,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피를 물려받았는데, 이 타락한 피를 씻어내려면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피를 가진 사람의 피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교리를 피갈음(피가름)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한국 컬트 기독교를 이루는 상당히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하여튼 이 김성도라는 사람은 한국 컬트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의 중요한 축인 음란의 강조와 직통계시, 피가름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원산예수교회를 만든 유명화(劉明化)라는 여인도 예수가 자기 몸에 친히 임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한국 컬트 기독교계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인 재림예수도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김성도와 유명화를 이어받은 사람이 원산신학산의 백남주(白南柱, 1901~1949)라는 사람인데 백남주는 구약, 신약 이후에 성약이라는 새 시대가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약, 신약 이후에 교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시대 구분 또한 한국의 기독교계 컬트 종교에서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인데, 이것은 백남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남주의 생각은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金百文, 1917~1990)과 삼각산수도원의 정득은으로 이어집니다. 정득은은 자신의 피가 구원의 피라고 주장하며 김백문에게는 자기 손을 잘라 피를 먹이려 하였다고도 하고, 말년에는 피갈음을 실천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과 성관계를 하였는데, 그녀의 친딸이 1957년 세계일보에 이 사실을 폭로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독교포털뉴스.2018.12.26.).
김백문과 정득은의 영향을 받았고 잠시 이들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과 전도관의 교주 박태선(1917~1990)입니다. 이들의 성경해석에는 음란의 강조, 피갈음, 직통계시, 재림예수, 신약 이후의 새 시대 같은 주장이 모두 섞여 있는데 이것도 나름대로 역사를 가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도관이나 박태선이라고 하면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만, 신앙촌상회라는 이름은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통일교는 한국에서 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교세를 넓혀갔고, 일본에서도 상당히 큰 교세를 가진 종교였습니다. 통일교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신도들이 교주가 지정해주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992년에는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에서 3만 쌍이 참가한 국제 합동 결혼식을 열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교주에 의한 한일 국제 결혼도 상당히 화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제 여동생은 통일교 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 뺑뺑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통일교 신자인 한일 커플의 자녀들이 교환유학 형식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했던 것이나 혼전순결을 지켜야한다며 학교에서 순결캔디를 나눠주었던 것 등을 이야기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일본에 있을 때 저와 함께 중국 명나라 사상가인 이탁오의 저술을 읽었던 이시다 교수님이라는 분도 1980~90년대에 대학 안에 생긴 통일교 서클이 사람 수도 많고 매우 강력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이들이 종교 활동 때문에 단체로 수업을 들어오지 않는 일이 종종 있어 곤란했다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통일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고 했던 일본 여성분도 기억이 납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 모리 마사코(森昌子)와 함께 “꽃의 중3 트리오(花の中三トリオ)”라 불리던 1세대 아이돌 사쿠라다 쥰코(桜田淳子, 1958~)가 통일교 신자로 유명합니다. 사쿠라다 쥰코는 서울에서 열린 합동결혼식에 참가하여 결혼을 하기도 했고, 문선명 사후 추모행사에 참여하여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 통일교는 항아리나 특이한 장식품을 신도들에게 비싼 값에 강매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를 영감상법(霊感商法)이라고 합니다. 간혹 일본 만화나 드라마에서 사이비 종교에 빠져 비싼 항아리나 쓸모 없는 장식품을 사들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이는 모두 과거 통일교에서 했던 방식을 따온 것이고, 실제 통일교 전파 이후의 일본 컬트 종교들(대표적으로 옴진리교 등)도 이런 방식으로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야마카미의 모친이 통일교에 빠져 재산을 헌납했다는 것도 구체적으로는 이런 방법을 통한 것이었을 겁니다.
종교 2세
다시 야마카미 집안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테츠야의 모친은 테츠야의 형이 소아암을 앓은 것에 연이어서 남동생과 어머니가 사망한 것 때문에 상당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테츠야의 친척은 테츠야의 모친이 1991년경부터 통일교에 입교했다고 합니다. (スポニチ.2022.07.16.)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1990년대는 전세계가 세기말이라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한국 교회의 휴거소동, 지구 종말, Y2K 같은 것들 말이죠. 개인의 불행도 있었겠지만, 사회적인 공포 분위기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야마카미 테츠야의 모친은 야마카미가 성인이 되고 얼마 안 된 2002년, 통일교에 바친 1억 엔이 넘는 헌금 때문에 결국 파산을 하고 맙니다(読売新聞.2022.07.13.). 테츠야는 이런 이유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자위대(自衛隊)에 들어가 군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자살 미수 사건도 있었다고 하는데, 모친의 헌금으로 가세가 심하게 기울자 자신의 사망보험금이라도 타서 형과 여동생에게 생활비로 줄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KYODO.2022.07.15.).
테츠야는 2005년부터 자취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의 경제가 침체되어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던 시기였습니다. 실업률이 높았던 이 시기에 야마카미 테츠야라고 해서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아르바이트와 파견근로 같은 비정규직 노동을 전전하면서 인간관계도 점점 끊어져가던 중, 2015년에는 오랜 시간 투병을 해오던 형이 자살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読売新聞.2022.07.14.). 남자는 이런 일련의 불운이 모두 통일교와 통일교에 빠진 모친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살아온 인생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부모의 종교 때문에 인생에 영향을 받는 자녀들을 종교2세(宗教2世)라고 합니다. 2세 신자(2世信者)라고 하기도 하고, 특히나 컬트 종교인 경우에는 컬트2세(カルト2世)라고 하기도 합니다. 테츠야의 모친은 장남의 사망 이후에도 활동에 부침은 있지만 통일교 활동을 지속해왔다고 하고, 테츠야는 이런 모친과 10년 넘게 연락을 끊었다고도 합니다.
테츠야는 이 과정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통일교를 만든 초대 교주 문선명과 그의 부인이자 2대 교주, 대모님이라 불린 한학자(韓鶴子, 1943~) 때문이다.”
야마카미 테츠야는 실제로 문선명이 이미 죽었으니, 한국에 가서 한학자를 살해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2019년부터 코로나 펜데믹이 터져 한국에 건너가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테츠야는 혼자 자료를 조사하며 생각의 나래를 펼쳐가던 중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문선명과 한학자를 일본에 데리고 온 것은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56, 57대 총리)다. 그렇다면 키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오도 다 한통속이다!”
(テレ朝.2022.07.12.)
키시 노부스케는 한국에서 2차대전 A급 전범 출신인 총리로 유명합니다. 통일교회 일본 본부는 키시 노부스케의 자택 근처에 만들어졌다고도 알려져 있으며, 키시 노부스케가 총리가 된 이후에는 수상관저였던 건물을 통일교회가 사용했다고도 합니다. 통일교회와 통일교회가 만든 국제승공연합의 초대회장이었던 쿠보키 오사미(久保木修己, 1931~1998)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키시 선생은 자주 통일교회나 승공연합 본부에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선생과 우리들에게는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 연대가 있었습니다.”
岸先生は、しばしば統一教会や勝共連合の本部に脚を運んで下さいました。先生と私たちには共有できる精神的連帯がありました
“키시 선생께서 간절한 뜻을 내비쳐 주신 것이 승공(반공의 통일교 용어) 운동을 비약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岸先生に懇意にしていただいたことが、勝共運動を飛躍させる大きなきっかけになった
(이상 毎日新聞.2022.09.15.)
2021년 9월 12일, 통일교에서 만든 NGO단체인 우주평화연합(UPF)이 한국에서 연 희망전진대회라는 집회에서 아베 신조오 당시 총리가 영상 축전을 보낸 사실이 있습니다.
(NEWSポストセブン.2021.09.29.)
이 행사에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도 영상축전을 보낸 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베 당시 총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UPF와 함께 세계 각지의 분쟁 해결, 그 중에서도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향해 노력해 오신 한학자 총재를 비롯한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今日に至るまでUPFとともに世界各地の紛争の解決、とりわけ朝鮮半島の平和的統一に向けて努力されてきた韓鶴子総裁をはじめ、皆さまに敬意を表します
야마카미 테츠야는 온라인으로 공개된 이 영상을 보고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준비한 끝(?)에 2022년 7월 8일, 결국 살해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국장(國葬)
일본은 정치인에 대한 살해, 암살이 잊을만하면 일어나곤 합니다. 최근 3~40년의 일 중에서 제가 생각나는 것만 이야기해봐도 우선은 1988년, 나가사키시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1922~2014)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이야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1990년 1월 18일, 우익단체 활동가 와카지마 카즈미(若島和美, 1949~)에게 총격을 당했다가 살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국회의원이었던 니와 효오스케(丹羽兵助, 1911~1990)가 나고야의 육상자위대 주둔지에 방문했을 때 목에 칼을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자유민주당(자민당) 의원이면서도 한국,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카네마루 신(金丸信, 1914~1996)이 우익 단체 활동가에게 총을 맞는 일이 있었습니다.
2002년에는 사이비 종교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민주당 의원 이시이 코오키(石井紘基, 1940~2002)가 우익단체 활동가에게 칼을 맞고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2006년에는 민주당 의원 카토오 코오이치(加藤紘一, 1939~2016)가 코이즈미 쥰이치로 당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자, 우익단체가 카토오 의원의 자택에 방화를 저지르기도 했고, 2007년에는 나가사키 시장 이토오 잇쵸오(伊藤一長, 1945~2009)가 불명확한 이유로 조직폭력배의 총을 맞고 숨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이후로 전현직 총리가 살해되는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본에서 전현직 총리에 대하여 국장을 치르는 것은 1967년, (어떤 의미로든) 전후 일본의 복구자로 평가받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가 마지막이었는데, 아베 신조오의 사망 이후 일본 정치권에서는 아베 전 총리에 대해 국장을 치러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등장하였습니다. 사건 직후인 7월 14일, 키시다 후미오(岸田文雄) 현 총리가 국장 이야기를 처음 꺼냈고, 7월 22일에는 정부가 도쿄 부도칸(武道館)에서 고 아베 신조오 국장의(故安倍晋三国葬儀)라는 이름으로 9월 27일에 장례 의례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JiJiCom.2022.07.22.).
국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며칠 후, NHK가 7월 16일부터 3일간 아베 전 총리의 국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설문을 실시했습니다. 이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9%가 긍정적인 답변을, 38%는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NHK.2022.07.19.). 그런데 범인의 입에서 통일교라는 이름이 나온 후, 교도통신이 7월 30일부터 3일간 실시한 설문에서는 국장에 찬성한다고 하는 사람은 17.9%, 반대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29.8%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와 더불어 국회와 통일교의 연관성에 대해 국회가 해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도 함께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여기에서 80.6%는 해명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東京新聞.2022.08.02.).
국장이 끝난 지금도 일본에서는 국장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설전이 오가고 있습니다. 10월 2일에는 무려 세 곳에서 아베 전 총리의 국장에 대한 설문조사를 발표했는데요, 결과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아베 전 총리의 장례를 국가 의례로 행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JNN의 조사
(TBS.2022.10.02.)
아사히신문의 조사
(朝日新聞.2022.10.02.)
요미우리, NNN 공동조사
(読売新聞.2022.10.02.)
매우 긍정적 12%
굳이 말하자면 긍정적 30%
굳이 말하자면 부정적 29%
매우 부정적 25%
긍정적 35%
부정적 59%
긍정 평가 41%
부정 평가 54%
아베 전 총리와 통일교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면 밝혀질 수록 국장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국장이 끝난 지금도 아베 전 총리의 장례를 국장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언론에서는 인기 없는 국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통일교와 상관 없이, 국장이라는 행사 자체에 대한 반감 때문에 국장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장례 의식을 주관하고 이를 공휴일이나 임시 휴일로 삼는 것은 사상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변호사 모임이나 종교단체들, 아베 전 총리의 정책에 대해 반대해 왔거나 반감을 가지고 있는 노동조합, LGBT 단체, 여성단체, 반전주의자 모임 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장 뜨거운 주제는 역시 통일교(일본에서는 통일교회統一教会)입니다. 아베 전 총리가 죽고 두 달이 넘어 세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아베 전 총리와 통일교의 관계에 대한 기사, 그리고 통일교라는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사는 매일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 때 유병언이라는 개인에게 집중했던 것처럼, 컬트 종교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좋은 주제인 것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반한/반중 기조(일부에서는 주체적인 일본 을 만들고자 하는 태도라고도 표현)를 이끌어온 일본의 여당 자유민주당이 오랜 기간 한국의 컬트 종교와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특히 극우/우익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아주 이전부터 기독교의 교세가 강하지 않은 일본에서 통일교가 이렇게까지 빠르고 넓게 교세를 넓히는 데에는 정치의 도움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일부에서는 한국 로비라고도 불렀는데요, 실제로 종교 피해자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싸워온 한 변호사는 90년대에 자민당 의원의 비서 중 대부분(이 사람의 말에 따르면 100명 가까운 사람)이 통일교 신자였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日刊ゲンダイ.2022.07.13.). 종교관련 저널리스트 스즈키 에이토(鈴木エイト)는 구체적인 숫자와 리스트까지 제시했는데, 자민당 의원중 중의원 78명, 참의원 20명이 통일교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으며, 입헌민주당에도 6명, 일본유신의 회(日本維新の会)에도 5명, 국민민주당에도 2명의 의원이 통일교와 관련이 있는데, 이 중 34명은 내각에 참여하거나 당의 고위 간부였던 사람이라고도 밝혔습니다 (日刊ゲンダイ.2022.07.16.).
잠시나마 외국에 살았던 사람의 우려
제가 공부를 위해 잠시 일본에 거처할 때의 일입니다. 전세계 어딜 가나 게이들은 데이팅 어플을 통해 연애 상대나 친구를 찾는 일이 흔한 풍경이므로, 저도 일본에서 사람 구경이나 할까 하고 데이팅 어플을 켜면 1~2주에 한번 정도는 꼭 “독도는 누구 땅이라고 생각하냐?”라던가, “문재인에 대한 너의 생각을 듣고 싶다”라는 식의 메시지가 안녕이라는 인사도 없이 날아오고는 했습니다. 마침 그 때는 북한의 핵 발사도 계속 되고 있었고, 남한도 탄핵정국이 막 끝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초기의 일이라, 일본의 뉴스나 와이드쇼에서는 매일 한반도 때리기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서 “나는 김정은은 싫어합니다!”라고 말하고 간다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는 한반도의 두 지도자 때문에 일본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일도 많았더랬지요.
처음 한두 달은 그런 사람들과 열심히 토론도 하고 싸움도 했었습니다만, 나중에는 그것도 지쳐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도 없이 “나는 평창올림픽을 안 볼 겁니다”라고 말하고 홱 돌아 사라진 같은 과의 선배나, 미군기지도 없는 후쿠오카에서 북핵 대피 훈련 사이렌을 요란스레 울리며 공습 대피 훈련을 하던 날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에서 무슨 이슈가 터지거나 한일관계에 관한 뉴스가 인터넷 기사에 뜨는 날에는 “아 오늘은 또 누가 무슨 일을 벌어질까” 하고 걱정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 그리고 대형 서점에 가면 혐한/혐중 코너가 있었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대놓고 ‘혐한/혐중’이라고 표시된 곳이 있지만,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혐한/혐중 서가를 만들어 둔 곳들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지금도 일본에 사시는 분들 중에 일부는 통일교나 아베에 대한 평가를 듣겠다고 다가오는 사람들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하고 야마카미 테츠야가 잡히기 전까지 몇 시간 동안, NHK에서는 범죄자가 한국인이나 재일조선인, 중국인일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야마카미가 잡힌 후 이 기사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마카미 테츠야를 일부 한국인들이 ‘제2의 안중근’ 등으로 영웅시하고 있다는 인터넷 언론 기사. FlatPlat.2022.07.09.)
(중국에서 야마카미 테츠야의 피규어가 팔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본 인터넷 언론 기사. 東京スポーツ.2022.07.15.)
야마카미 테츠야의 신원이 밝혀진 후에도 많은 인터넷 황색 언론들은 한동안 야마카미 테츠야가 일본국적이지만 한국, 중국과 혈연적인 관계가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라던가 한국과 중국에서 그가 영웅시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적어도 메이저 언론사에서는 야마카미 테츠야가 한국계나 중국계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한국의 컬트 종교 통일교’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같은 이야기가 재편집되어가면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아베의 국장이 끝난 이후, 한국이나 통일교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많이 사그러들었다는 느낌은 들고 있지만, 지금은 한국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그저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과 한국, 중국계 거주민들에 대한 안녕을 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혹시 한국은?
한국의 언론과 방송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외국인 차별에 기생하면서 반 외국인 정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몇몇 기사, 제주도 대부분이 중국인 손에 넘어갔다거나, 가짜 난민이다, 난민을 받지 말자 운운하며 시위까지 불사하던 어떤 사람들, 자기 동네에 이슬람 사원이 생기는 것을 막겠다며 혐오 발언을 내뱉던 어떤 동네,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꼭 그 나라의 일반인을 데려와 앉혀놓고 의견을 묻는 역사 프로그램들… 지금 한국 안에 사는 외국인들이, 제가 외국에 살 때 느꼈던 불안감이나 우려를 한국에서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