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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네를 아시나요
‘건장한’ 몸으로 기독교 미션스쿨을 다닌 사람이라면, 아마 찾아간 적 있을 것이다, 장애인시설 ‘꽃동네’. 나는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 전교생과 버스를 타고 꽃동네에 갔다. 아무렴 ‘봉사’는 너무 ‘착한’ 말이었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학생으로서 너무 ‘나대는’ 짓인 것 같아 어떤 섬짓함을 속으로 삭였다. 비장애인인 내가 봉사자로서 장애인과 ‘대화’하고 식사를 돕고 잡일을 ‘체험’하도록 기획된 이 활동에 감사하기보단 오히려 죄스러워 고개가 숙여지는 마음이었다. 일과가 끝난 저녁엔 강당에 모여서 꽃동네의 철학과 정신에 대해 들었다. 이곳에서 평생 살다 돌아가신 어느 장애인의 나눔과 섬김을 수녀님의 입을 통해 강의받았다. 그러나 다양한 몸을 가진 꽃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들을 수 없었다. 오직 꽃동네를 운영하는 수녀님들께서 우리를 강당에 모아 이곳의 좋음을 알려주셨으니, 내가 가진 정보는 꽤 불균등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꽃동네에 관하여 기억하는 어렴풋한 내용이다.
소화하지 못한 찜찜함을 남기고 꽃동네 ‘봉사’활동을 마쳤다. 그땐 시혜적인 만남이 배움은 아니란 생각뿐이어서 우리 학교의 방향성에만 툴툴대었다. 그런데 지난 8월 31일, 더불어민주당이 ‘정기국회 22대 민생입법과제’ 중 하나로 선정한 ‘장애인국가책임제법’을 살펴보다 장애계가 꽃동네를 비판하는 더 넓고 정확한 입장을 알게 됐다. “꽃동네는, 장애인수용시설로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위배된다.”
장애인국가책임제법에 포함된 세부 법안은 6가지이다. (더인디고 2022.9.1.)
▲(장애인 평생교육기관 설치, 장애인평생교육사 양성 등) 장애인평생교육법
▲(장애인고등교육센터 설치 등)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교통약자 서비스에 대한 운전자 교육 등)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
▲(장애인전용주차구역 의무화 등) 공간정보의 구축 및 관리법
▲(탈시설지원기관 설치 및 운영 등)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에서는 제안 이유로 "장애인에 대한 시설보호는 장애인을 지역사회로부터 분리된 채 획일화되고 집단적인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서도, 탈시설-자립생활 권리를 장애인의 기본적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아무리 따뜻하고 '착한' 시설에 거주한다한들 장애인이 선택하여 탈시설하고 자립할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협약 제19조는 “이 협약의 당사국은 모든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선택을 통하여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협약 일반논평 5는 “백 명 이상이 거주하는 대규모 시설도, 5~8명이 사는 작은 그룹홈도, 심지어는 혼자 사는 집도 시설 또는 시설화의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면 자립적 주거 형태로 볼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비마이너 2022.8.16.) 그런데 꽃동네를 비롯한 장애인수용시설은 거주자가 밖에 나갈 수 없는 시설 속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다양한 선택과 개성의 주체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여 지역사회와 분리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니 현실적인 대책과 지원체계를 마련한 탈시설을 정치의 중요한 과제로 삼을 필요 있다.
인간이 원래 다치고 아프니까
현재 필자의 시간은 새벽 4시 24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무엇으로 보내고 있을까. 누군가는 피곤한 단잠에 빠져서 고생할 내일을 까맣게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어깨가 들쑤셔 잠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고 있을지도, 그리고 누군가는 미친 우울감에 포효하며 이불을 쥐어뜯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뼈저린 신체의 고통으로 이젠 하루를 그만 나고 싶다고 신에게 애원할 것이다. 나이 든 가족을 둔 사람이라면 아마 지켜봐왔을 장면들이다.
다치고, 미치고, 아픈 우리는 각자의 몸에 맞는 ‘하자’를 갖고 산다. 신체적인 지병이 아니더라도 상시적인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시민이 더러 있다. 먹거리로, 수면부족으로, 성장에 대한 압박으로 병을 주는 시대에 무언가 앓고 있지 않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픈 것이다. 내 눈엔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은 건강함이야말로 기이한 ‘증상’이 되어버리는 독한 세상이다. 이처럼 다들 각자의 몸에 맞는 '비정상성'과 아픔을 갖고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장애와 시설의 감각을 모른 채, 자신을 비정상성으로부터 분리하고 '하자 없는' 몸인 듯이 살아간다. 나이가 들고 병이 깊어져 요양병원에 맡겨질 날이 찾아와서야, 간신히 아픈 몸의 감각과 시설에 갇히는 불안함을 떠올린다.
사실은 누구나 항시 병들 가질 가능성이 있는 개체다. 그 가능성을 지금의 나로부터 분리하고 탈시설과 장애의 문제를 멀리하는 것보다는, 모두를 위한 시의적인 과제로 다루는 것이 더 공익적일 것이다. 인간의 신체로는 살면서 여러 번 장애와의 교차점을 지난다. 온 평생 장애의 길을 달리는 사람과, 장애와의 교차점만을 스치는 사람은 분명 다른 감각에서 살겠지만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모든 인간이 이해하는 아픈 몸과 장애와 시설이 만나는 교차점만이, 장애와 비장애의 극명한 경계를 흐리고 장애를 사회 안으로 들여 이해해 나가는 열쇠가 된다.
‘장애인국가책임제’는 ‘민생’입법과제에 포함된 것이다. 이제 장애인의 권리 향상이 보편적인 서민들의 더 나은 삶(즉 민생)과 연결된다는 감수성에 이르렀다. 아픔은 우리가 함께하는 재료로 쓰이고, 이 감수성으로 옳음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코멘트
3민생이 무엇인가, 고민해보게 됩니다.
정말 어렵고 또 중요한 문제인데, 자신의 문제가 아니면 외면하게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장애인국가책임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시설에 대해 생각하면서 꽃동네는 떠올리지도 못했던 것에 대해 반성합니다. 이 글을 읽고 탈시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탈시설이 올바른 방향이겠지만, 장애인 가족들 중 중증장애인과 함께 사는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