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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 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1. 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고  스티그마 효과에 대해 알고 있는가.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행위, 모습으로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속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낙인이라는 키워드는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과 같은 미디어매체에서 거론되지는 않아도 하나의 클리셰처럼 사용되는 요소다. 한 아이의 행실과 평판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고, 그 아이가 사회구성원으로 함께하지 못하고 겉돌게 되다가, 실제로는 나쁜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탈선을 하게 되는 이야기, 혹은 탈선을 하려는 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금 사회구성원이 되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쁜 낙인만 존재하는가. 착한 낙인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착한 낙인이라고 표현하니까 말이 조금 이상해져서 단어를 풀어보겠다. 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묶은 좋은 말이 오히려 거북한 시선을 만들거나, 집단 내부에서도 그 표현을 거부하는 경우가 생기지는 않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에 ‘A와 같이 노는 학생들은 전부 착해.’라는 말을 듣는 걸 정말 싫어했다. 나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속여보자고 복도 중앙에 돈이랑 유사하게 생긴 상품권을 뿌려놓고 구석에 숨어서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었고 학교 뒤뜰에 있는 벌집에 신발주머니를 던지는 학생이었는데. 학원을 몰래 빠져나와 PC방에 가던 아이였고, 새벽에 기숙사 담벼락을 타고 나와 당구 치러 가던 학생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싫어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착한 무리의 착한 학생’이라는 꼬리표는 끊임없이 따라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개처럼 살고 개처럼 행동한다고, 입이 꽤 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말조심하는 편이라고. 나는 내게 찍힌 좋은(사실은 좋아 보이는) 낙인을 부정하기 위해 오히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과연 모두가 그럴 수 있을까.  이태원에는 뿌리 깊은 낙인이 박혀있다. 문란한 이들이 모이는 장소, 질 나쁜 외국인들이나 모이는 장소, 마약의 근원지, 한국 에이즈 발원지. 사실 이는 이태원이라는 지역의 문화 특성을 나쁘게 재해석한 이야기다. 이태원은 서울시 관광특구 1호였다. 다양한 외국인들이 모일 수 있도록 국가단위로 유도를 했던 관광지였고, 실제로 이를 기반으로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발전했다. 다양한 이들이 모이는 만큼 밤문화도 발전했고 클럽, 술, 음식 문화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같이 섞이면서 다문화 사회, 성소수자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국가 단위, 언론 단위의 낙인이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로 heterosexism(이성애적 차별주의)이 심화되는데 국가, 언론이 박차를 가했다는 이야기다. 한국 에이즈 문제의 중심지는 이태원이며 성소수자들이 이태원에 모이게 되면서 사회에 문제가 될법한 물건들을 가져오고 범죄를 조장한다. 개신교 기반의 단체는 이런 불분명한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기사를 꾸준히 올리며 지역을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태원에 가서 논다는 사실 자체를 타인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사회가 되었다.  내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태원을 향한 사회의 시선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지리멸렬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이와 접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장애, 차별부터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 피해자들의 이야기라는 진주를 ‘낙인’이라는 실로 꿰어내고 공감이 아닌 대답을 찾는 응답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방식은 근래에 보이는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는 책 치고는 특별한 전개 방식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책에서는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대전제를 세우며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공감한다는 말은 이제 인터넷 냉소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표현이 되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고통을 안다고 감히 네가 고통을 아는 체하냐. 이제는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학자로서 이성으로 접근한다. 고통 받는 이들과 고통 주는 사회 문화, 그리고 미래를 향한 고민.  세월호 사건 당시 자신을 ‘인터넷 냉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던진 돌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그 학생들은 놀러가다 사고가 나서 죽은 건데 어째서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지원해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형태를 한 돌이었다.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이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도 큰 지탄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륜적으로 아이들에게 던질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지났고 피해자의 집단이 바뀌었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발생했을 때 이번에는 많은 이들이, 과거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지탄하던 사람들까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냉소주의가 2010년도 중반에 비해 크게 심화된 점도 있었고 사회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서는 과거부터 뿌리 깊게 박힌 낙인이 있었다.  이태원에 놀러간 이들은 문란한 이들, 인터넷문화를 대표하는 베타메일과는 다른 알파메일들,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성소수자들과 다문화 가정들, 모든 혐오가 과거부터 쌓여온 낙인의 한 획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돌은 많았다. 그들을 향한 추모탑이 세워질 때 옆에 혐오로 돌탑을 세워도 될 만큼 많았다. 그리고 이런 혐오를 막기 위해 무분별하게 던져진 긍정의 키워드는 그들의 투석 행위를 가속시켰다. ‘그들은 문란하지 않고 문화를 즐기는 착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었다.’ 이 착한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는 사건 당시 구급차 인근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이들의 영상과 더불어 큰 파급력을 일으켰고 인터넷 냉소주의자들은 피해자를, 더 나아가 잠재적 피해자를 모두 비웃었다. 놀러가서 죽은 게 뭐가 자랑이냐고, 이제는 놀러가서 죽어놓고, 사건이 난 이후 다른 곳에서 춤추다가 집에 가놓고서는 보상금까지 타려고 하냐고.  국가, 언론이 찍은 나쁜 낙인과 피해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고통에 잘못 공감한 –혹은 척한- 이들의 착한 낙인 덕분에 피해자들은 입을 열기를 포기했다. 수년간 반복해서 찍어온 이 깊은 낙인을 피해자 한 명의 입으로는 지워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이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이 낙인을 계속 찍고 있을까. 선한 낙인과 나쁜 낙인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잠재적 피해자, 2차, 3차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사회로 나올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확실한 것은 지금은 저자의 방식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점이다. 고통을 향한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올해 초, 오랜만에 중학교 시절 후배를 만났다. 성년이 된 이후로 쭉 군 생활을 했다보니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전역하면서 다시 경기도로 오게 되었으니 예전처럼 자주 보고 지내자는 의미에서의 연락이었다. 오랜만에 본 후배는 예전보다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다. 조금의 고민이 있고, 조금의 압박감이 있고, 조금의 불안함이 있는 그런 얼굴. 그 후로 우리는 두어 번 더 커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고, 후배는 긴 고민 끝에 내게 커밍아웃했다. 그때 나는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반응했고(그렇게 했다고 믿고 싶다), 이 몇 번 내가 먼저 연락했으니 다음에는 언제든 네 쪽에서 먼저 연락하라는 말을 꺼냈다. 상관없으니 다음에 또 놀자고.  이후로 후배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누나와 다시 연락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그를 향한 집안의 분위기를 어렴풋하게 느끼고는 있다. 나와 연락을 한 이후에 집을 나가 자취하고 있다던가, 집안에서 붕 떠버린 위치에 있다던가.  나는 아직도 그가 내게 연락을 먼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커피나 한잔 하자고 부르기를 바라고 있다. 안타깝지만 내가 그를 기다려도 사회는 그를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그들을 향한 시선도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으니까.  참사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어떤 사회가 만들어져야 할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장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일단 내 후배를 위한 시선이 둥글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 후배를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축제 문화에 대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둥글어지고….  첫 책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라는 책을 가져와봤다. 다음 서평으로 계획 중인 도서는 <<인싸를 죽여라>>다. 2010년도 중반 온라인 극우주의와 혐오, 조롱, 인터넷 냉소주의에 대한 이야기. 최대한 좌, 우 정치적인 이야기는 배제하고 돌을 던지는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들에 대해 풀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사진은 참사 당시 SNS 상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을 찍어봤다.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혹은 이 자리의 바깥 거리에 있었던 피해자들 중 목소리를 내고 싶음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지금 이 황량한 골목은 얼마나 변해있을까. 사진을 찍으며 상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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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지난 2년의 시간, 당신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나는 평소에 서울시청 앞 광장을 자주 지나다닌다. 서점을 갈 때나 청계천을 걸을 때, 성당에 갈 때도 산책할 겸 탁 트여있는 광장을 한 바퀴 빙 둘러서 가곤 한다. 지난 시간, 그곳에 참사 합동 분향소가 마련돼 있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인터뷰를 이유로 참사 유가족 분들과 생존자 분들을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그래서 분향소 앞을 지날 때면 언젠가 만났던 분들이 계신지, 그들이 나의 얼굴을 잘 기억 못하실지언정 인사라도 드릴까하여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보라색 옷을 입은 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는 건 버릇이 됐었다.  그런데, 하나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그렇게나 많이 분향소 앞을 지나갔는데, 단 한 번도 분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영정이 마련되지 않은 분향소에서 분향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많은 영정 사진들이 놓여있는 분향소는 똑바로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그 앞을 지날 때면 고개가 자동적으로 푹 숙여졌고 땅만 보면서 걸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몇 발자국만 가면 바로 분향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힘들었다. 마주하기 힘들면 길을 돌아갔으면 될 것인데, 그건 또 싫었다.   영정 앞에 꽃 한 송이를 못 올리고 향로에 향을 한번 못 피웠지만. 나는 그 앞을 지나고 싶었다. 대신 그때마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추모를 하곤 했다. 영정들 앞을 지날 땐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위한 기도를 했다. 형식을 제대로 못 갖추었지만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직도 이런 나의 행동과 감정을 세분화해서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다. 그저 그 앞에선 자꾸 눈물이 나곤 했고,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이태원 참사, 우리는 잊지 않았다  지난 5월 초,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순간, 내 입에선 “드디어...” 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머릿속에선 유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참사 이후 약 1년 6개월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들은 지금 어떤 마음이실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참사가 발생한 날부터 내가 언론을 통해 보았거나 직, 간접적으로 보고 느낀 것을 다시 떠올려봤다. 참사 당일의 그 충격적인 장면, 수많은 희생자들,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눈물, 울분과 분노, 고통, 기나긴 투쟁의 시간. 정부 기관과 정치권에서 벌어진 공방까지. 이 기억들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참사에 대한 감정을 한번쯤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참사를 주제로 글을 하나 썼었다. 그리고 글벗 친구들에게 공유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 자리에 모인 날, 우리는 참사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누군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 날의 기억이 나는 바람에 눈물이 나서 힘들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남 일 같지 않고 아직까지 가슴이 먹힌다고 했다. 누군가는 생각에 잠겨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년 반 가량 지난 시점이었지만, 모두가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참사가 벌어진 뒤 처음 뉴스를 보았던 그 순간을. 잠 못 들고 밤새 TV만 지켜본 그 순간을. 그때 자신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도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잠시 희미해져 있었을 뿐이지, 다들 잊지 않고 있었다. 바로 내 곁에 있는 가족, 친구, 지인의 일이 아니었을지라도. 우리가 가진 슬픔의 무게가 그때나 지금이나 동등하게 무거움을 확인했다.  우리 뿐 일까. 다른 이들은 어떨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동안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슬픔을 달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혹여 사는 것이 바빠서,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레 기억이 희미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도 어쩌면 우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사회의 시선에 대하여   나는 일 때문에 뉴스 기사를 많이 읽는다. 그리고 기사를 읽고 나서 항상 밑에 달린 댓글을 훑어본다. 이것을 보면 여론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기도 하니까.  처음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을 즈음, 기사마다 애도, 추모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렸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매섭고 차가운 비난과 혐오가 섞인 악성 댓글의 비중만 더 높아져갔다.  ‘남의 나라 귀신놀이가 뭐가 좋다고..’ ‘놀다 죽었는데 왜’ (댓글들을 다들 많이 접해보았을 테니, 이 정도까지만 적겠다. 댓글을 굳이 그대로 다 옮겨 적고 싶지 않다.) 희생자와 생존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조롱과 희롱 섞인 말들은 읽는 나조차 괴롭게 했다. 청춘들이 핼로윈을 즐기러 간 것이 나쁜 것인가. 나도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핼로윈 파티를 즐긴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발생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땐 괜찮았는데 이 날은 왜 그랬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문제가 뭐였는지에 대해서 악플 쓰기 전에 생각은 해 보았을까.  유족을 향한 악성댓글도 마찬가지였다. 아픈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말이 너무 많았다. 이들의 움직임을 정치적 행동이라 단정 지으며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족들이 왜 국회에 가고,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렇게 긴 시간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알까. 그들의 눈을 마주 보고 심정을 이해하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우리 사회 일부가 너무 냉담하고 매정하다고 느낀다. 아픈 가슴에 자꾸 비수를 꽂는 것. ‘남의 일이고 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참사나 대형사고가 발생했을 때마다 항상 유족들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슬픔과 울분, 고통이 담긴 목소리. 외면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외쳐왔던 목소리들. 이 목소리들은 우리 사회가 좀 더 안전할 수 있게, 나와 당신이 좀 더 안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목소리와 우리가 전혀 관계없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내 일이 아니다, 내가 알 바 아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모두 같지 않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부디 이들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들은 거두어주시면 좋겠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좋겠다. 첫발 뗀 특조위에게 바란다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9월 23일 출범했다. 글을 쓰는 바로 오늘이다. ‘지각 출범’이라는 딱지 붙어 버린 늦고도 아주 늦은 출범이다. 지난 5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공포된 지 30일 째인 6월 20일까지 특조위 구성이 끝났어야 했는데, 넉 달이란 시간을 넘겼다. 이것도 유족의 간곡한 호소문이 전달된 후에야 진행되었다. 왜 항상 그들을 끝까지 내몰고 나서야 일이 추진되는 것일까. 국가의 의무가 무엇인지, 이들에게 갖추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특조위원들과 유가족들의 만남이 있었다고 한다. 기사를 통해 전해진 이야기를 보니, 일부 유족들은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눈물에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 담겨있었겠나.  1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특조위가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라는 숙제를 잘 해내주기를 바란다. “희생자와 유족들의 원이 풀릴 수 있도록 하겠다.” 고 송기춘 위원장이 말했다. 그 약속이 반드시 지켜지기를 바란다. 글을 마무리하며  시간이라는 것은 참 빠르게 지나간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2년 가까이 됐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참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잊혀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억은 잠시 희미해졌을 뿐이지 지워지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이 글을 쓰면서 유족들의 모습이 많이 생각났다. 고립되고 외면당하면서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힘겨웠을지, 어떤 마음으로 버티어 왔을지 생각해 보니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났다. 그들에게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다.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곁에서 많이 이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사실이니까.  또, 나는 처음에 자기 고백을 했는데, 글을 써 내려가면서 계속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조만간 ‘별들의 집’을 찾을 예정이다. 그곳에서 빚진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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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10.29 이태원 참사에 어떻게 연대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10.29 이태원 참사에 어떻게 연대하고 계신가요?    근 몇 년간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노동자의 이야기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다는 소식 그리고 높아져만 가는 2030 청년세대의 자살률 등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부고 소식에 뉴스를 보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던 시간이 늘었다. 기득권 정치는 권력을 취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과 삶을 거부했다. 이렇게 우리는 희망이 사치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간이 지속 될수록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는 나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고 벅찬지에 대해 이해하기도 어려운 순간이 늘어난다. 그렇게 내 일상이 지속적으로 어려워지는 순간이 쌓이면 사람과 사람사이 끈끈한 연대가 줄어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찾기보다 내 안으로만 파고들기 쉬운 환경과 일상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 2년간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해 녹사평역, 시청역을 거쳐 현재 부림빌딩의 별들의 집으로 가기까지 연대의 시간을 보내며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갈수록 세상살이가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것들이 늘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더불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연대하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1) 첫 만남   참사가 발생한 2022년 10월 29일 하루 뒤인 30일부터 일주일간 국가 애도기간이 선포되었다. 영정 없는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가 설치 되었다. 그 일주일동안 국가는 유가족이 모이는 것을 방해했고, 그에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모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입에 참사가 아닌 사고로,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로 오르내리게 만들어 사회적 참사의 본질을 흐리고 의미를 압축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국가가 나서서 자행한 일주일이었다. 이렇게는 둘 수 없어서 2022년 12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모이고 녹사평역에 영정이 있는 '진짜' 분향소를 함께 만들었다.   분향소 설치 이전에 필요했던 과정은 희생자들의 영정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영정 만들기는 분향소 설치 전날 매우 늦은 밤에 진행되었는데, 그때 영정 속 10.29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과 처음 마주했다. 액자에 희생자의 사진을, 사진이 없는 희생자의 액자에는 국화꽃 사진을 넣었다. 나는 주로 검은 리본을 둘러 고정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영정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의 일이었다. 영정 안에 들어가는 사진 밑단에는 희생자의 생년월일이 있다. 영정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리본을 두르면서 희생자 대부분이 나와 또래라는 것과 희생자 대부분의 시간이 2022년 10월 29일-31일 사이에 멈춰져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액자 속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와 슬픔, 미안함을 삭히면서 영정을 완성했다.   바로 다음날이 되어 분향소 설치를 시작했다. 손이 찢어지게 시린 날이었는데 나무토막 하나, 영정이 올라가는 단 하나, 하다못해 주변에 쓰레기 청소까지 우리같은 시민들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는 분향소였다. 꽤 긴 시간 추위를 이겨가며 분향소가 완성되었고 영정을 올려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정은 이미 분향소를 만들기 전에 녹사평역 인근 실내 장소에 도착해있었다. 유가족분들이 희생자의 영정을 분향소에 올리기 전에 영정 정리가 다시 필요해서 일을 돕고 있었는데, 처음 뵙는 한 분이 장소로 들어오셨다. 희생자들의 영정이 모여있던 곳이라 처음보는 사람을 경계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여서 짧은 침묵이 있었다. 처음 뵙는 그 분은 '제가 유가족인데요. 사진을 바꿔야 해서 왔어요.'라고 말씀해주셨고 그때 10.29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분들을 처음 만났다. '생각해보니 영정이 여기 모여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텐데. 자신을 유가족이라고 소개하는 그 순간에 그 분의 마음은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짧았던 경계심이 풀리며 뒤늦게 진한 죄송스러움과 함께 밀려왔다.   그날 저녁, 해가 저물고 녹사평역 분향소에 영정이 올라갔다. 유가족분들은 영정 속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분향소에 내려놓고 울음을 토하시며 외치셨다. 성역없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하라고, 우리 가족들 대통령 당신에게 한 표 던졌다고, 그러니 국민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라고 외치셨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하다. 그 순간에 영정 정리 때부터 참아온 눈물이 뒤늦게 몰려와서 나도 같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한겨레 '49재를 앞두고 영정사진이 놓였다, 이제야...[만리재사진첩]'(2022.12.14.)   2) 홍삼캔디 두알 오마이뉴스 '시민분향소... 159명 얼굴과 마주하니 "마음 더 흔들려"'(2023.02.04.)   녹사평역 분향소에서 시청역 분향소로 이전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천막처럼 보이는 것'만 봐도 경찰이 따라 붙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고, 뉴스에서는 기습설치라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국가가 책임져 추모 공간을 마련하고 성역없이 진상규명을 진행하면 되었을 텐데. 무튼 어렵게 시청역으로 이전해 자리를 잡고 시청역 분향소에서 지킴이로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10.29 이태원 참사의 본질을 흐리려는 방해 세력과 화면에서만 보던 유명 정치인도 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사람들은 혼자 분향소를 찾아오신 이름 모를 시민분들이었다. 어떤 사연이 있으신지 한참을 울고 계셨던 분, 1시간이 넘도록 분향소에 머물러 기도하시는 분, 보태 쓰라며 지폐를 쥐어주고 가시는 분들(이렇게 받은 돈은 전부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후원금으로 송금됩니다), 주변에서 뛰어 놀다가 분향소로 와서 여기가 어떤 곳이냐고 물었던 어린 아이들까지. 분향소에서 1-2시간만 있다 보면 분향소가 단순히 추모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분향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회적 참사를 알려내고 추모하고, 서로에게 위로와 안부를 전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기억에 남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어 그 분의 이야기를 전해보려고 한다.   시청역 분향소에서 노란 조끼를 입고 분향소 지킴이를 하고 있었다. 분향소 바닥에 떨어져있던 국화 이파리들, 자잘한 쓰레기를 줍고 향이 있던 곳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청소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뒤에 할아버지가 오신 기척도 못 느꼈다. 향 가루를 쓸고 뒤를 돌아보니 계시는 할아버지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할아버지께서 추모의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분향소의 가장자리로 가있었다. 할아버지는 가만히 자리에서 영정을 천천히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큰 절을 두 번 하셨다. 다리가 불편하신 것 같아 도와드릴까도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추모하려는 시간과 방식을 굳이 나서서 방해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애써 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절을 하시고 일어나 모자를 벗어 나에게도 인사를 해주셨고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로 답변 드렸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한참 뒤적거리셨다. 그러고는 오셔서 홍삼캔디 두알을 손에 쥐어주며 '춥지?' 한마디 묻고는 사라지셨다. 날이 흐렸지만 추운 날씨는 아니었는데. 할아버지가 떠나시고 분향소에 서있으면서 할아버지가 춥냐고 물어봐주셨던 질문을 여러 번 곱씹었다. 그냥 지나가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춥지?'하고 물어보셨던 질문이 외롭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질문 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여기 있어서 고맙다는 말처럼 느껴져서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홍삼캔디를 좋아하지 않아서 먹지는 못했지만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 안쪽 주머니에 행운의 부적처럼 항상 넣어두고 지금도 가지고 다닌다. 받았던 홍삼캔디 두알을 보면서 '오늘도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함께하는 사람들이 어디든 있겠구나.'하고 마음 따뜻해지는 순간이 일상에 자리 잡게 되었다.   3) 낮은 곳으로   '연대 :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책임짐.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윤이형 작가의 소설 [붕대 감기]에서 연대는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상처받을 준비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의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보는 것,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내 안으로 옮겨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요즘 가방에 귀여운 키링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람들의 가방에 달린 키링을 보는 재미가 있는데 그 안에서 노란색 리본과 보라색 리본을 만나면 정말 반갑다. 가방에 리본을 달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이름 모를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순간에 리본을 달고 있는 사람과 은밀히 연대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낮은 곳으로'는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구절이 유명한 이정하 시인의 시다. 읽다보니 내가 나를 비워내 당신의 무엇이든 담길 수 있도록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우리가 서있을 더 낮은 곳은 어딜까. 국가가 책임지지 않고 되려 거부하면서 유가족분들이 삭발을 하던 순간일까? 아니면 길가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오체투지와 천막 농성, 단식을 하던 그 순간일까? 생각해보니 더 낮은 곳은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유가족분들과 시민들은 국가의 부재를 서로의 존재로, 두터운 연대로 채워왔으니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이곳이 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2년간 서로를 위해 마음을 비워내고 가방에 리본을 달아보고 분향소로 향했던 발걸음이 쌓이고 쌓여 함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달려왔다. 더 넓고 넓게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고자 노력해왔던 시간이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연대 하고 있는지 묻고 싶고,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는 말과 어떤 형태의 연대도 괜찮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오늘 하루는 안녕한지, 긴긴 시간 춥지는 않았는지 안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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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0. 어쩌면 우리는 너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0. 어쩌면 우리는 너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10월 25일 밤, 속칭 대구패밀리라 부르는 글쓰기 모임 지인들과 동성로에서 만났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할로윈 같은 행사가 있으면 다들 어렴풋하게 알고 준비를 할 법도 한데 모두 이쪽으로는 연이 없는지 아무 생각 없이 현대백화점 앞에 모였고, 예상치 못한 엄청난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동성로 말고 안지랑에서 곱창에 소주나 먹자. 지나가는 간호사 좀비와 정장 드라큘라를 본 형님은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구석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선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눈치를 보였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랑에서 곱창에, 평화시장서 치킨에, 거리를 걸으면서 맥주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 숙취에 괴로워하고…. 출근한 월요일, 후배 여럿이 지난밤 축제 거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붐비는 클럽과 아리따운 여성들, 그리고 사람으로 가득한 위험한 거리. 지난밤 그들의 추억과 별개로 과도한 인파에 위험했다는 뉴스가 잠깐 올라왔다 내려가고는 했다. 우린 그때도 사고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2022년 10월 28일, 부대에서 할로윈 행사 참여의 위험성에 대한 공문을 내렸고 젊은 간부들의 과도한 행사 참여를 금하기 위해 위수지역을 철저히 지키라는 추가 공문이 내려왔다. 내 근무지는 대구에서 서산으로 바뀌었고, 서산 부대는 서울의 접경지라 그런지 이런 이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우리 부대는 코로나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고. 이미 이십 대의 끝자락, 스무 살 초반에도 즐기지 않았던 축제를 이 나이가 돼서 즐길 이유도 없었고 당시 비상대기도 공교롭게 나였다. 사고 전일, 그리고 당일까지도 나는 부대를 지키고 있었고 이 축제를 즐기는 이전 부대의 후배들, 그리고 새 부대의 후배들과 간간히 연락을 하며 축제의 열기를 대신 느꼈다. 29일, 사고가 발생했고 어제까지 우스갯소리로 연락하던 후배들은 이제 살아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그 장소에 있었는지 찾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가끔 저널리즘에 관련된 책을 읽는다. 한때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리고 뉴스와 정치, 한 사람의 발언이 무겁게 소비되는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제는 알아야 하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 인용저널리즘에 대한 레포트를 써서 대학에 제출한 적이 있었다. 한참 대선으로 국가가 뜨거웠던 시절, 유튜브의 아무개 씨, 정치평론가 아무개 씨의 목소리를 “ ”(따옴표)로 대신해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따옴표 저널리즘’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말도 다소 올드한 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는 따옴표 저널리즘보다도, 아마 ‘릴스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사회가 되었기에. 이태원 참사는 사실상 릴스 저널리즘의 대표 격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사건이었다. 뉴스에서는 부족한 현장 상황 정보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고, 이런 정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릴스, 유튜브에 있는 영상을 끌어다가 TV에서 생중계를 했다. 그리고 SNS 익명의 목소리라는 거대한 방패 아래에 무분별한 혐오와 공격의 메시지는 덤으로 내보냈고. 영상에선 참사 사고의 사망자들, 부상자들의 모습이 모자이크 없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TV 앞의 많은 시청자들이 이 사고의 정신적 피해자가 되었다. 그 후에 있던 ‘누군가 밀었다’, ‘누군가가 범인이다’와 같은 정제되지 않은 메시지의 남발부터 사건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이를 정치의 더러운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자칭 사회평론가들의 발언까지. 과연 언론은 참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과연 이게 21세기의 저널리즘일까. 그날 언론의 현실에 대한 참담함을 느꼈다. 언론이 무분별한 메시지를 보내는 당시 부대에서는 사고자가 있지는 않은지, 다른 부대 후배 중 사고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조사를 해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의 SNS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용산에서 놀고 있음, 동성로에서 술 마시는 중, 여기는 서울 어디 클럽. 후배들의 소식은 속속들이 발견되었고 한숨을 돌린 우리는 릴스를 우연히 넘기다 다른 영상들을 보게 되었다. 사고 현장에서 CPR을 하면서 제발 찍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소방관, 인근에서 춤추는 주취객, 사람들을 빨리 대피시키기 위해 차 위에서 인원을 인솔하는 어떤 젊은 사람, 그리고 번쩍이는 인근 클럽과 술집…. 나는 이 사고를 떠올릴 때마다 대구 부대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 후배를 떠올린다. 이성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때로는 과음, 지각으로 개인적인 행실에 대해서는 지적을 받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 좋고 일에 몰두하는 후배.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싶어 하면서 선배들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연차가 차면서 책임감도 보이는 후배. 그 후배는 할로윈이면 거리로 나가 이 문화를 즐기고는 했다. 그리고 그 주 주말이 끝난 월요일이면 전날의 열기를 하나의 무용담처럼 풀어내기도 했다. 나는 그 후배가 처음에는 싫었다. 너무 가벼워 보이는 남자여서, 책임감이 부족해 보이는 남자여서, 언제라도 일을 대충 할 것만 같은 인상의 남자여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그는 멋진 남자였고 멋진 군인이었다. 유쾌한 사람이었고 친절한 후배였다. 나는 그의 당당함을 부러워했고 그와 같이 퍽 즐거운 군 생활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이 참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가 너를 잃었을지도 몰라. 이런 행사는 문란한 행사고 평소 행실이 나쁜 사람들이 가서 당한 일인데 무슨 문제냐? 이런 이야기를 SNS에 거리낌 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린 멋진 후배이자 유쾌한 동생, 그리고 진짜 군인 하나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사라진다면 인간적인 슬픔, 비통함, 그리고 대단한 인재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타까웠을 거라고. 그 후배와는 이제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대구를 떠난 지 벌써 3년이 흘렀고 그 친구도 내가 전역한다고 말한 전후로 전역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전역하고 사회인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디서든 그 후배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후배가 앞으로도 이런 축제에 계속 참여할 거라는 점도 알고 있고. 그렇기에 앞으로는 이런 축제에 안전을, 모두에게 행복한 장소가 되기를 빌며 살뿐이다. 2025년의 나는 할로윈 축제 기간에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때는 새로운 일을 시작한 후라고 생각한다. 군대도, 코로나도, 행사에서 논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는 나는 늦은 나이여도 거리에 몸을 던질까. 아니, 아마도 집에서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그때는 슬픈 이야기보다는 기쁜 이야기를, 할로윈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를, 거리의 행복한 이야기를 쓰며 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해당 글은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정리를 시작하는 글이다. 평소 서평을 꾸준히 써왔기에 이번에도 서평 3편을 통해 이태원 참사의 기억을 되짚고 간단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 되짚기, 서평을 통해 나아가기, 또다른 내일을 보낼 나, 모든 일들을 시작하기 위해 최근 이태원에 다녀왔다.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보이는 표지판, 여기가 사실 모든 기억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다녀온 이태원은 조금 쓸쓸한 곳이었다. 서평과 모든 글이 끝날 때면 아마 2주기가 돌아오지 않을까. 그때는 이 쓸쓸함에 방점을 찍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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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2)
기억 담기 모임 참여 (23.10.07.) - 듣는 자리 이태원역 1번 출구. 우측으로 돌면, 좁고 경사진 골목이 나온다. 한쪽 벽면에는 시민들의 마음이 담긴 포스트잇이 한창 붙어 있었고, 문화연대에서는 매번 현장을 정비하며 포스트잇을 수거해 분류 보관했다. 일 년 전, 나는 자원 봉사자로 참여해 그 작업을 함께했다. 연휴 전후로 단장한 추모 공간에는 오색빛 메시지가 가득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실, 포스트잇에 쓰인 내용을 잘 읽지 못했다. 어쩐지 남의 일기장을 들추어 보는 것만 같아 그 마음이 편치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신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 주목했다. 이미 현장이 익숙한 활동가는 바로 앞 편의점부터 방문했다. 따로 챙겨주기 전에 음료를 계산했지만, 사장님은 아랑곳 않고 몇 병을 덤으로 얹어 주었다. 오래된 포스트잇을 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자칫 귀퉁이가 찢어지면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뗀 것은 빈자리로 옮겨졌다. 점성이 낮은 테이프가 비치되어 있었고, 무언가 훼손되지 않도록 애쓰는 마음이 거기 살아 숨쉬었다. 고개만 돌려도 구석에 적힌 혐오를 지우려 물티슈를 박박 문지르는 고생이 눈에 띄었다. 새로 추모 공간이 조성될 때까지 그런 작업이 이어져 왔다. 사무실로 이동해 참사 초기의 포스트잇을 정리했다. 유가족 혹은 지인의 메시지, 생존자 혹은 구조자의 메시지, 번역이 필요한 메시지, 그 외 메시지 등의 기준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판단이 어려운 경우뿐만 아니라 인상 깊은 이야기가 보이면 서로 나눴다. 나는 역시나 그걸 잘 읽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몇 개 아로새겼다. 일 년이 지난 지금, 기억 담기 모임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분향소 지킴이 연대 (22.12. ~ 23.6.) - 분향소 단상  참사 이후, 한동안 시민 분향소를 찾아 지킴이 활동을 자원했다. 매주 일요일 두 시간 남짓, 그 근방을 지나는 시민들을 맞이하며 국화를 전하거나 서명을 받는 게 주된 역할이었다. 앉을 수 있는 의자가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서 있는 게 편했다. 때 맞춰 교대하는 봉사자와 유가족을 지켜보고 있자니, 몸도 마음도 겸손해졌다. 또한, 그곳을 방문하는 모두에게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 발길을 옮기지 못해 머뭇대는 모습이 흔했는데, 전해 듣기로는 비교적 인적이 드문 새벽 홀로 오열하다 떠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영정 속에 잠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슬픔에 잠긴 누군가를 위해 예를 다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분향소에서는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면전에 대고 훼방을 놓는 사람들은 꾸준히 많았다. 가령,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고는 "돈 때문에 그러는 거지?"라고 뱉는 식의 무례함들. 하지만 그보다는 헌화하는 행렬이 길었다. 언젠가 다국어로 적힌 홍보물이 설치되자 외국인의 관심 또한 늘었다. 거기 적힌 내용을 읽는 표정은 어찌나 진중하던지. 물론 너무 인접해 희생자 사진을 찍는다면, 정중한 몸짓으로 난색을 표해야 했다. 그럼 대부분 "okay"하며 카메라를 내린 채 뒤로 물러섰는데, 한 번은 "he is my cousin"이라며 양해를 구하는 일도 있어 아차 싶기도 했다. 회화에 능하지 못한 나는 그 순간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그 이상의 위로를 건네지 못한 게 여전히 아쉽게 남아 있다. 어린이들은 왕성한 호기심으로 보호자를 잡아끌었다. "여기 뭐하는 데야?" 궁금해하거나 "한 번 가 볼래!" 내지르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보호자들은 쉽게 당황했지만, 사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오히려 안타까웠던 건, 그 야단법석이 제지 당할 때. 이곳은 배움의 장이 될 수도 있는데, 황급히 자리를 뜨고 마는 게 조금은 미웠다. 그래서인지, 분향소에 시선이 꽂힌 어린이에게 조심스레 흰 꽃을 쥐어 주는 보호자를 목격하면 기분이 들떴다. 동시에 고민하기를, 그토록 순진무구한 눈빛 앞에서 과연 나는 이 참사에 대해 무어라 설명해야 했을까. 곳곳에 쓰인 '기억', '애도', '안전' 같은 단어를 두고도 금세 머릿속이 하얘졌다. 밑도 끝도 없이 파고들수록 내가 외워 온 뜻은 백지장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분향소가 서울 시청 앞 광장으로 이동한 뒤로는, 전국 각지에서 추모객이 들렀다. 하루는 시설 보수를 위해 운영을 잠시 멈췄는데,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쉬워하는 어르신을 응대하기도 했다. "일부러 기차 타고 왔는데…" 그는 나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고, 내일부터 재개할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만하는 줄 알았잖아!" 이어지는 호탕한 웃음에 나도 따라 미소 지을 수밖에. 어쩌면 그런 일화를 쌓는 재미로 지킴이 활동을 이어 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꼭 외딴섬 같은 공간에 연대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했다. 혹은 지금 참사에 관해 확인하고 학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나에게는 그게 참 어려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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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0에서 1로, 망설임에서 연대로
2022년 어느 날의 카페, 내가 앉은 자리에서 멀찍이 세 명이 앉아있었다. 이태원 참사 후 몇 주가 지난 때였다. 그들의 대화가 의도치 않게 들렸다. '세월호처럼 장사를 하려고 한다'는 말. 나는 2015년경부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했고 세월호를 취재하던 피디님과 일하게 되면서 세월호와 관련된 띄엄띄엄 서로 연결되지 않는 현장들에 계속해서 찾아갔다. 단원고에서 목포에서 광화문에서 유가족을 만났다. 세월호 인양선 바로 앞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인양선에 타지 못한 유가족들과 인근을 맴돌기도 했다. 배를 집어삼킨 바다는 새카맣고 거칠었다. 나는 그 시절을 떳떳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유가족들과 자주 만나면서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들을 위로가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나는 내 위로의 방법이 어설플 거라 걱정했다. 작은 실수라도 할까봐 잔뜩 몸을 사렸다. 영상에 필요한 질문만 하고, 카메라를 켜지 않을 때면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관찰했다. 가끔 유가족들이 주는 음식과 관심에는 가능한 큰 미소와 함께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손님의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카메라는 항상 그들과 멀었다. 목포에서 세월호 인양이 진행될 때가 기억난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나의 마지막 세월호 관련 촬영이었다. 목포신항, 철조망이 처져있는 구역에서 파란색 컨테이너를 두 개 놓고 유가족들이 모여 인양선에서 들려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유가족들과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었다. 날씨가 쌀쌀했고 바닷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유가족 아버지 한 분이 나를 보며 말했다. - 이쪽으로 와. 그렇게 하지 말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따뜻한 곳으로 다가와 가까이 앉으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엉덩이를 들어 조금 더 다가갔으나 끝내 섞여 앉지는 못했다. 이런 마음으로. 이런 몸으로는 무엇도 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자. 그렇게 결심하고 세월호와 점점 멀어졌고, 2017년 말에는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세월호 현장에 더는 가지 않게 되었다. 다시 2022년 카페에서 나는 생각했다. 저들은 저렇게 쉽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왜 참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이 나에게 질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일을 했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을 뿐 애도를 한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불현듯 떠오른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포로 내려갔다. 세월호가 인양되어 지상에 놓여지고는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 네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 세월호의 위치를 찾아 헤매다가 파란색 컨테이너 두 개를 발견했다. 위치가 반대쪽으로 옮겨졌을 뿐 과거에 보았던 그때의 컨테이너였다. 철조망에는 여전히 노란색 리본들이 매달려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세월호 선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이 들끓었다. 저렇게 큰 배였구나. 바닥에 쓰러져 있던 붉은 영역과 불법 중축된 객실, 큰 프로펠러, 세월이라고 쓰여있는 낡은 글씨. 많은 게 지난 것 같아도 그리 변한 것 같지 않기도 했다. 세월호에 비하면 이태원 참사는 나에게서 거리가 더 멀었다. 이태원을 평소에 잘 찾지 않았고, 할로윈이라는 문화도 낯설었다. 참사 당시 나는 집에 있었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같이 게임을 하는 익명의 상대방들이 채팅으로 말했다. 지금 이태원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눈으로 담아두고 계속 게임을 했다. 게임을 끝내고 나서야 웹에 접속해 뉴스를 봤고,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어디에 있냐고. 그러나 2014년부터 이어진 마음들, 세월호부터 이태원까지, 그간 떠돌던 마음들은 조금씩 연결되었다. 나는 이제 조금이나마 애도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애도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 모든 위로의 시도는 실패할 거라는 것. 내 위로는 정확한 위로와는 분명한 격차가 존재하리라. 중요한 건 정확함 그 자체가 아니라 정확함의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차를 인정하며 좁혀나가려는 시도, 그렇게 가닿으려는 노력,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기였다. 나는 그렇게 불확실한 애도를 다시 시도한다. 재난을 기억하자는 말이 어느덧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세월호 참사는 10주기를 지났고 이태원 참사도 2주기를 앞두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죽음이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새롭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 또한 또 다른 되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인간의 뇌는 가혹하리만치 지루한 것을 금방 잊는다. 정말 중요하고, 아름답고, 새로웠던 것들도 잊혀진다. 지고지순한 연인관계도 지루해지면 끝이 난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루해지고 잊혀지는 것들에 맞서며 무언가를 기억하고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수차례, 수백번 혹은 수천년동안 반복되었던 것일지라도 그렇게 다시 이야기하고, 쓰고, 말하고, 중얼거리고, 건네는 동안 지루한 것이 새로운 것이 된다. 다시 기억이 된다. 304낭독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한 작가 분이 오랜만에 유가족을 만나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 저희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그분은 이렇게 답했다. - 저희가 뭘 하고 있는지 지켜봐 주세요. 내가 해야할 일은 단지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태도로. 0에서 1로. 침묵에서 발화로. 무에서 유로. 정확한 위로에 다가가기.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나아가기. 그럼 다짐을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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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타인과 나,나와 타인
누군가 그녀에게 가장 좋았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등학교 시절이라 답할 것이다. 종종 그녀는 그런 상상의 질문을 떠올리고 답을 내보았는데 그것은 고등학교 시절 이후부터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고등학교 시절을 어떠했는가.  그녀는 용산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교실 창문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지금은 한강이 보이는 위치에 급식실이 들어와 더는 보이지 않지만- 사실상 너무도 낭만적인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학교가 끝나고는 친구들과 가까운 이태원으로 달려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당시 이태원은 가장 최신의 패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고, 나이키와 뉴발란스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고, 매장에 안 나오는 라인도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었다. 한때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입을 옷이 맘에 안 들면 집에 다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을 정도 였으니 그런 친구가 이태원을 얼마나 수없이 갔을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옷을 사기 위해, 운동화를 구경하기 위해, 토요일이기 때문에, 심심해서 그렇게 이태원을 갔다. 그녀는 커서 이태원에서 꽤 오랜 시간 일을 했다. 매일 이태원을 출근하고, 그 길을 걸어다니고, 퇴근 후 친구도 만나서 맥주도 한 잔하고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때도 종종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것은 그녀 스스로에게 값진 행복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녀에게 힘이 되었다. 의도치 않게 문득 떠오르는 어떤 기억에서 그녀는 행복했고, 그래서 고마웠고, 그래서 웃었다. 그렇게 웃으며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출근길의 고단함도 조금은 줄어드는 거 같았다.  ‘이태원에서 심정지 00명’ 그것은 참으로 거짓말 같았고 그래서 실감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당시 그녀는 집에서 그녀가 좋아하던 프로그램에 심취해 있었고 그래서 그 글자를 보았을 때, 실은 ‘심정지 00명’이라는 글자보다 ‘이태원’이라는 글자에 눈길이 더 갔을지 모른다고 후에 생각했다. 그녀 마음 속 깊은 추억의 근거지인 그곳이 왜 뉴스 속보에 나오는지, 지금 그녀가 그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가려했던 것도 아니고, 그녀가 아는 누군가가 그곳에 갔을 가능성도 낮다고 생각했지만 눈길이 오래 머물렀던 것은 그곳이 그녀에게 그저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심정지라고 방송에 나올 정도라면 모두가 당연하게 구조되고 당연하게 치료를 받고 회복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내 보던 프로그램으로 다시 마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날 아침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몇 년 전에는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모두가 그곳을 찍고 있고, 뉴스에 나오고 있고 우리가 그 배를 보고 있으니 당연히 모두가 구조될 거라 믿었지만 그 누구도 구조되지 못했던 몇 년 전처럼 그 이태원의 거리에서도 구조될 수 있었던 이들은 너무도 적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거기엔 가까운 곳에 경찰서가 있는데, 뛰어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소방서가 있었는데, 차로 조금만 가면 큰 병원도 있는데 왜 이런 일은 반복되는가. 전혀 실감할 수 없는 그날을 아무리 생각하고, 정보를 뒤져보고, 읽고 보아도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이상하다 느껴질 만큼 그날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빛나는 기억의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랜 시간이었다. 그녀는 뭔가 해야 했는데 그래서 그들을 ‘기억’하기로 했다. 거기에 있던, 그곳에서 쓰러진 이들은 기억해보기로 했다. 그들과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음에 써가며 읽고 또 읽었다. 그곳에서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는 유가족, 친구, 연인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그 글들을 읽다보니 처음에 그들은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녀이기도 하고, 그녀의 언니이기도 하고, 그녀의 친구이자 그녀의 가족이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앞날을 위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응원하며 하루하루를 채우던 그들의 모든 모습이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깨닫고 그제 서야 그곳에 있던 이들을 위해, 소중한 이를 그곳에서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울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겨우 그들을 ‘애도’하는 한 걸음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이태원’만큼이나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뭔가 하고 싶었고,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이렇게 흘러 보내지 않고 무언가를 해야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 믿기로 한 것이다. 몇 년 전 바다에 가라앉던 배를 바라보기만 하고 안타까워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버린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이 시간들 속에서 그녀가 느끼고 고민하고 생각한 것들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 혼자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지만, 그렇게 더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으로 무언가를 해낸다면 분명 다음은 조금 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 글을 쓰며, 또 다음 글을 준비하고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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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24년 이태원 2주기, 잘 지내고 계신가요?
    1.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란    22년 10월 30일 일요일 새벽 4시 30분. 평소와 다르게 알람 없이 1시간 일찍 눈이 떠졌다. 이날은 아침 6시 출근이었다. 그래서 전날 9시에 평소보다 일찍 취침했다. 일어난 김에 눈을 비비고 산책이나 갈까하며 폰을 봤는데 웬 부재중 전화가 30통이나 와있었다. 마지막 전화는 엄마로부터 1시간 전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큰일이 났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엄마는 흥분된 목소리로 ‘야! 너 어디야! 이태원 간거 아니지? 정말 다행이다!’하며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별일 없는데..’라고 말하며 부모님을 안심시킨 후 전화를 끊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이태원’, ‘압사사고’ 등의 이야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흥분된 목소리에서 뭔가 큰일이 난 것임은 분명했다.  그날 새벽의 인터넷은 온통 이태원 참사 이야기뿐이었다. 많은 사건 사고를 봐왔지만 ‘압사사고’라는 건 태어나 처음봤다. 무려 159명이 사망한 너무나 큰 대형 참사였다. 사진으로 본 이태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태원의 엄청난 인파와 압사사고로 인한 심정지 환자들을 심폐소생술하는 의료진과 시민들의 모습이 너무나 참혹하고 안타까웠다. 이후 사망자들의 부모들이 속속 이태원에 도착하여 울부짖는 모습을 봤다. 한순간에 이 세상의 전부였던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할까. 놀러간다는 아들, 딸의 목소리가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그제야 부모님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통화해보니 엄마는 통화가 계속 안 되자 고향인 창원에서 차를 타고 올라오려고 하셨다고 한다. 혹시나 이태원에 갔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30통의 전화를 걸며,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과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웠을 부모님께 죄송스러웠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집을 나서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 뒤로 부모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 헌신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젊은 20~30대라고 한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청춘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부모들의 마음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참사 피해자의 부모라면, 과연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식을 둔 부모님의 마음을 처음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출근하는 내내 정신이 없었고 마음이 아팠다. 또한 지금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유가족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하며 직장에 도착했다. ‘힘들겠지만, 부디 잘 견뎌주기를’라고.                                        <  이태원 합동 분향소, 사진 출처 - 23.02.05 네이버포토 뉴스 > 2. 살아서도 죽어서도 마음 편할일 없는    이태원 참사 사건이 발생하고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사망자들을 향한 여러 말들이었다. ‘놀러가서 죽었는데 왜 추모를 해?’, '세월호 때랑 마찬가지로 장사하는거 아니냐?', ‘놀러간 애들 왜 보상해줘야 되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도 아닌데, 왜 희생자로 표현해야 되나?’ 등의 비난이 난무했다. 모든 국민이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애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잃은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다. 위로는 못해 줄 망정 비난은 삼가해야 되는 게 아닌가. 2차 가해를 가하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차올랐다. 만약에 내가 저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었다면 참을 수 있을까? 지금 마음은 결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까지 우리 사회가 양극화된 사고와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부가 해주는 보상이든 경제적 지원이든 뭐가 됐든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가족들의 아픔을 감싸주고 위로하며, 생존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치료와 사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정부는 사고 직후 바로 다음날 바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어떠한 질문도 요구도 받지 않겠다는 자세로 보였다. 이후 장례식비(천오백만원)와 위로금(천만원) 등을 지원한다고 구체적으로 발표했다. 그 후 국민들의 비난과 오해는 더 거세졌고 ‘죽은 자식들을 핑계로 돈 뜯어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은 더 강하게 증폭됐다. 사망자들과 유가족, 생존자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제대로 된 애도와 위로, 치료와 보상을 받기도 전에 많은 비난과 질책을 받아야 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 했길래?그로 인해 더욱더 고립과 단절되는 생존자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누구 하나 진심어린 위로와 도움 없이 그들은 결국 스스로 정부와 세상을 상대로 진상규명과 대처를 위한 긴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3.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정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사회    이태원 사건에 관한 뉴스와 다큐를 면밀히 살펴보니 이 사건은 분명한 고위공직자들의 실수로 인해 일어난 사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로나로 2년 만에 열리는 이태원 거리에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경고가 3~5일부터 계속 나왔다. 그러나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와 용산구청장, 경찰청장 등의 고위공직자들은 ‘사람이 좀 더 많이 모일 뿐, 언제나 안전했다’라는 말로 방관 했다. 22년 10월 29일 당일 6시부터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오후 6시 30분부터 밤 10시 11분까지 총 11건의 압사를 언급한 112 신고가 접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질서 정리 및 통제를 위한 경찰기동대 파견은 없었다.  저녁 10시 15분. 압사사고가 터저자 정부와 경찰은 그때부터 부랴부랴 기동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대통령부터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서장, 용산구청장 등 고위공직자들은 모두 사건이 터진 뒤에 심각성을 인지하고 11시 넘어 현장에 도착했다. 무방비, 무능력 대응의 정부에 젊고 젊은 청춘 159명이 사망했다. 많은 인력이 필요 없이 일방통행만 했어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 이렇게 좁은 골목에 많은 사람이 모일 거라고 언론, 뉴스 등에서 수차례 경고했지만, 왜 미리 경찰을 배치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정부와 경찰들은 사전에 뭘 했고 왜 대비책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는가.  이태원 참사 이후 다음날 그들은 언론 브리핑에서 미리 인력을 배치했고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대통령, 행정안전부, 경찰청장, 용산구청장 등 어느 누구도 진심어린 사과를 한 사람은 없었다. 위로금과 장례비 등의 금전적인 보상만 있을 뿐, 그들은 이후 현장 방문도, 유가족도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국민을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돌봐야 할 대통령은 이태원 사망자 49제에도 참석하지 않고 크리스마스 행사에 갔다고 한다. 유가족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대통령의 진심어린 사과와 정부의 책임있는 자세가 아닐까. 그러나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재난 상황 속에서 고위층들의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정책과 대비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입는 사례들이 앞으로 더욱더 많아질 것 같아 두렵다. 국민으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안전한 사회는 더 이상 오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더 나아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국민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나가야 할까?     4. 참사 2주년, 부디 잘 지내시기를  다가오는 24년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 2주년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이태원 참사의 문제가 뚜렷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력 끝에 특별법은 만들어졌지만 책임자의 사퇴는 물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정부의 무관심과 사람들의 비난속에서 생존자들은 점점 더 세상밖으로 나오기를 꺼려하고 있다. 유가족은 한 생명이 떠난 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이 나라의 잘못된 대응과 책임회피가 그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이태원 참사를 돌이켜보며 나의 삶에서 중요한게 무엇인지, 또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걸어갈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본다. 또한 그동안의 여러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것도 반성했다. 나는 언제 약자의 편에 한 번이라도 서준적이 있었던가. 아니, 조그만 위로라도 건낸적이 있었던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크다. 또한 당장에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는 것에 무기력함이 들기도 한다.  이태원 2주기, 그때의 참사를 떠올리며 유가족들이 겪었을 아픔을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고통. 제대로된 사과와 위로받지 못한 아픔과 서러움. 온갖 비난과 욕설을 들어야 했던 비통함과 억울함. 아직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실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부디 이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셨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두컴컴한 새벽이 가고 아침이 오듯, 유가족에게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과 마음 한편에 안정과 평화와 오는 동시에 떠난 청춘들이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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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1)
집담회 기획 (22.12.22.) - 말 걸기, 물꼬 트기 "얘들아 이태원 뭐냐..." 그날 저녁, 친구에게 메시지를 받은 나는 무심코 'ㅋ'을 연타하며 답장을 보냈다. 늘상 일이 바빴던 친구이기에, 오래간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 친구가 놀러가서 아주 신이 났구나.'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그 행간이 다르게 읽혀 혹시나 하는 마음에 SNS에 접속하니 충격적인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도무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싶어 오밤중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내 생각을 멈추고자 쫓기듯 잠을 청했고, 다시 깰 때쯤에는 사상자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 있었다. 한동안 얼이 빠진 채로 방 안 곳곳을 서성였다.Q1) 이튿날 아침, 친구들은 서로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괜찮냐고 물었고, 또한 괜찮다고 답했다. 물론 그래서 정말 괜찮았던 건 아니다. 이미 참사를 둘러싼 반응들에 기진한 상태였다. 한 지인은 현장 사진을 공유하며 "내가 이래서 핼러윈을 싫어하는 거야"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또 다른 지인은 전화로 "너는 저런 데 안 다녀서 다행이다" 걱정스레 덧붙였다. 아직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지 않냐고, 그런 항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다들 혼란한 와중이라 그러겠거니 이해를 우선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주변 피해가 없다며 쉽게 한시름 놓던 자신이 부끄러운 탓도 있었다.Q2) 참사 직후 내가 겪었던 것들이란 그렇다. 슬픔과 분노보다 무력감과 소외감이 훨씬 깊었다. 먼저, '왜'라는 의문을 가질수록 무력감에 휩싸였다. 우리 사회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망가졌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그 해결도 요원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속절없이 흐르는 일상에 소외감이 들었다. 모두 이 정도 비극쯤은 금세 잊고 지내는 건지 지나치게 조용한 풍경이 이상스러울 때가 많았다. 정치권과 시민 사회는 기민하게 대응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은 여전했다. 정권의 책임을 묻는 것 이상의 고민과 국가가 가로막은 애도를 나누기엔, 어쩐지 전부 아쉽게 다가왔다.Q3) 그해 겨울, 수시로 이태원역을 찾았다. 하루는 피켓을 들고 "프리허그"를 외치는 외국인 모녀를 보았는데, 내가 그런 캠페인에 더 이상 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몹시 당황했다. 동시에 방문객들에게 일일이 국화꽃을 쥐여 주는 상인의 모습을 숭고하게 바라보았다. 그만큼 복잡한 심정이 뒤따랐고, 어쩌면 꼭 복잡하게 참사를 해석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초등학교 동창을 잃은 친구와의 동행이었다. 골목 주위를 걷다 정류장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몇 대의 버스를 떠나보냈다. 아무래도 소화하지 못한 말뿐이라 두서는 없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Q4) 흔히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연결이 어떻게 가능한지 몰라 곧잘 헤맨다. 그 무렵, 나는 갈피를 잡고 싶어 일정이 되는 대로 관련 행사에 참석했다. 대개는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반복되는 여성들의 죽음을 연상했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염려된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해외에서 소식을 접하고 추모 공간을 꾸렸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유가족과 생존자의 회복을 돕고 싶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혼자 하던 속앓이를 털어놓으며 치유될 수 있음을,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을 수 있음을 실감했던 것 같다.Q5) 집담회를 직접 기획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데서 출발하고 싶었다. 다만, 전문가의 조언도 유념했다. 허심탄회한 모임은 위험할 수 있다고. 저마다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기 마련이기에, 그런 바람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상처가 덧난다고. 때문에 얼마간 주제를 좁힐 필요가 있어 참석자들과 공유할 몇 가지 질문을 미리 정했다. 또한 그에 대해 내가 먼저 대답해 보았다.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로 말을 걸고 물꼬를 트고 싶었는데, 사실 이 글이 그 당시 그렇게 쓰인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데 여전히 유효하지 않나 싶어 조금 고쳐 남겨 본다.Q6) 질문들 Q1) 어디서 어떻게 참사 소식을 접했나요?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들었나요?Q2)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위로 혹은 상처가 되었던 순간이 있었나요?Q3)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느꼈나요? 무엇이 고민되었나요?Q4) 어떻게 추모하고 애도했나요? 그 방식을 어떻게 이어 가면 좋을까요?Q5) 어떤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어떤 이야기까지 들어 보았나요?Q6) 지금 당장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혹은 어떤 실천을 해 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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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특별법 거부권 행사에 대해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끝내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기사 1 정부는 '참사의 진상 규명이 이미 이뤄졌고, 조사위원회 권한이 너무 크다. 따라서 특별법은 필요하지도 않고, 시행돼서도 안 된다'고 밝혔습니다.대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과 보상을 확대하는 등 지원책을 내놓았습니다. 거부권 행사 이유:  1. 서울경찰청장을 포함해 관련자 23명을 재판에 넘기는 등, 특별법의 목적인 참사 진상 규명이 이미 이뤄졌다고 밝혔습니다. 2. 조사위원회의 권한이 너무 커서 국민 기본권과 사법·행정부 기능 등이 침해 3. 조사위 구성에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움  4. 국가 예산 낭비가 우려 국민의 힘은 입법 폭주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유가족들과 야당은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이에 대해 인터넷에서 반응이 나누어지고 있는 것이 목격되어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특별법 거부권은 부당합니다. 1. 꼬리 자르기 식 처벌은 절대로 진상규명으로 볼 수 없습니다.  2.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이지, 보상금 및 돈이 아닙니다. 특히, 유가족들이 보상금을 받을 경우, 정부가 '돈으로 유가족들을 입막음'할 우려가 높습니다.  3. 외국 언론들도 정부의 책임을 조명했으며, 특히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는 외국인들도 사망했습니다. 특히, 이번 참사로 가장 많은 자국민을 잃은 이란 (5명)은 '한국 정부가 관리 방법을 알았다면, (핼러윈) 행사 관리를 했어야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뉴스타파는 유일하게 이란 유가족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이란 유가족들은 한국 정부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비탄에 빠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4. 특별법을 반대한다면 처음부터 진상규명을 하는 태도와 자세를 보였어야합니다.  특별법 거부권은 정당합니다.  1. 국가유공자들과 군필들도 제대로 된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유가족'이라고 지나친 특혜를 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2. 정부는 모든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저는 특별법 통과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국가유공자, 군필 생계 문제는 이번 참사와는 별개라고 반박하고 싶습니다.  또한, 이미 국민의 힘이 현실적으로 특별법을 막는 이유는 입법 폭주가 이유가 아니라, '대통령과 관계자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유가족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관련 기사 시사IN의 기자는 특별권에 거부권을 행사할 이유가 없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1. ‘국론을 분열’시키고 ‘재난을 정쟁화’시켰던 것은 특별법이 아니다. 그 특별법에 반대했던 정부·여당 쪽이었다.' 2.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헌법에 반하거나 현저히 불합리하여 공익에 반한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대통령 거부권은 법안이 자신의 국정철학에 맞지 않는다고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3. '국민의 생명권과 안전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한 사건에 대해 국가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광범위한 책임을 규명하고 진상규명을 하고자 하는 것은 헌법상 국가의 책무에 비춰 너무나 당연하다. 법률안을 거부하여 진상규명을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것, 참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함에도 그 교훈을 역행하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책임을 면하고자 재난을 정쟁화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위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 함부로 거부권 행사를 주장하고 있다.'  추가 관련 기사 이언주 전 국민의힘 의원은 2022년, 국민의 힘 측에서 실언이 계속 나오자,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도리의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게 국민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정치의 세태인데 지나치게 극렬지지층한테 어필을 하면서 그렇게 어필을 해야 살아남는 구조'라며 국민의 힘이 유족들에 대한 배려보다 지지층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더 신경쓴다고 우려했습니다.  또한, 이언주 전 국민의힘 의원이 기사 마지막에서 한 말은 끝까지 국민의 힘이 버티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밀리면 끝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유가족들하고의 어떤 관계도 일종의 권력투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굉장히 방어적이고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은 느낌."  특별법 거부권은 정당합니다.  1. 국가유공자들과 군필들도 제대로 된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유가족'이라고 지나친 특혜를 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2. 정부는 모든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여기서 특별법에 저는 모두가 찬성한다고 생각하기에,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나오는 반대 의견 및 '유가족들이 떼를 쓴다', '목소리만 크면 다 되는 줄 아냐'라는 의견에 어떻게 반박하시겠습니까?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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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참사특별법’에 마저 거부권 행사할 것인가?
바늘구멍 통과하듯.. 국회 문턱 넘은 특별법 지난 1월 9일, 국회에서 ‘10.29 이태원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국민의 힘 의원들은 퇴장한 채 야당 의원들만 남아 표결한 결과로 말이죠. 국민의 힘 의원들은 밖에서 규탄대회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여야 합의 없이 야당만 참여한 국회에 ‘유감’이라는 입장을 냈고요.  🗣 임오경 민주당 원내대변인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특별법안이 통과된 데 대해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국민 여러분께 송구한 말씀을 드린다.” 🗣 국민의힘은 윤재옥 원내대표 “대한민국의 안전이 아니라 정쟁과 갈등을 선택한 것” 참사 1년 3개월 만에…쪼그라든 ‘이태원 특별법’ 통과 거부권, 특별법 앞길 막을 것인가 수정된 특별법은 국회에서 정부로 이송, 대통령이 공포하면 오는 4월 10일부터 그 효력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법안이 정부로 이송되기 하루 전인 1월 18일, 국민의 힘은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국민의힘, '이태원참사 특별법' 거부권 건의‥야당엔 '재협상' 요구 여당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는 소식은 1년 넘게 마음 졸이던 유가족들에게 절대 위로는 되지 못했을 겁니다. 유가족들은 머리칼을 내려놓으며 온몸으로 규탄했습니다. 600여 곳의 시민단체는 기자회견을 열고 특별법 특별법 공포를 촉구했습니다. 야당은 여당의 거부권 건의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의견을 내며 소란스럽습니다. 과연 유가족의 숙원이자, 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한 이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까요?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국정을 책임져야 할 정부, 여당이 오히려 거부에 힘을 쏟고 있다. 대체 거부 말고 정부가 한 게 뭔가" 🗣 박정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이태원 참사 진상 밝히고 책임 묻는 게 왜 총선용 정쟁인가", "국민의힘은 더는 국민 눈물이, 분노가 되지 말고 특별법의 즉시 공포를 건의해야 한다." 野 `이태원 특별법 거부권 행사 건의 결정한 與, 비정한 정당` 재난의 정쟁화? 재난은 재난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다녀올게”라고 말하고 나간 가족의 시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동안 마음은 이미 여러 번 부서졌을지 모릅니다. 여러 번 압사 사고가 우려된다는 신고에도 불구하고 경찰력은 동원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 159명의 사람이 서울 한복판 길 위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누군가는 “놀러 가서 죽은 것이니 국가 책임이 아니”라고 하지만, 놀러 가서 죽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놀러 갔다가 죽을 수도 있는 나라가 안전한 나라일까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안전한 나라’입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배가 가라앉는 참사를 목격하면서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항상 안전에 대비하지 않으면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진상규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디에서 물이 새는지 알아야 누수를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윤재옥 국민의 힘 원내대표는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재난을 정쟁화한다고 했지만, 재난은 재난입니다. 뭐든 정쟁의 구실로 삼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서 만큼은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랍니다. 이번 특별법 시행이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를 끊어낼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10문 10답 기자간담회>  ❓여러분은 이 이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의견을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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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잘 지내고 있다고
안방에서 뉴스를 보던 엄마가 알려줬다. “이태원에서 사고 났대” 작년 10월 29일 밤,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로부터 사고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뉴스를 찾아보았다. 아마 처음 접한 피해자의 수는 한 자릿수였던 것 같다. 사람이 정말 많이 모였구나 하고는 뉴스를 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를 다시 틀었을 때 피해자의 수는 두 자릿수로 바뀌어 있었다. 경악스럽다기보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제야 실시간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실내도 아닌 도로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괜한 걱정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자 주변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무사한지 확인했다. 다음날 아침, 사망자 수만 세 자리였다. 1년이 지난 지금. 이태원에서의 일을 나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너무 큰 충격이었던 탓인 걸까, 사실 작년 10월 29일을 잘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이태원에서의 일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잘 와닿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지치고 무기력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약 10년 전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의 기괴함을 슬픔과 분노로 마음 어딘가에 두고 있다면 이태원 참사는 기괴함만 남아있다. 그 기괴함이 나는 아직 얼떨떨하다. 기괴함과 얼떨떨함 사이 어딘가에서 보라색 리본은 어색하기까지 하다. 나에게 1년 전 이태원 참사는 기괴하고 얼떨떨하며 어색한 지금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인한 문제 회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노력 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참사’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의식하지 못하는 절망감 아닐까. 대체 우리는 이 절망감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우리는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1년 전 이태원 참사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기괴한 일을 마주할 용기, 얼떨떨함에서 벗어날 용기, 어색해하지 않을 용기 모두. 그리고 얼떨떨함으로만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슬픔과 분노의 과정을 거쳐, 떠난 이들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안전한 사회가 되길 바라는 이들과 함께이길 바란다. 나는 이 용기를 가지겠다는 다짐부터 시작해야 된다. 1주기 전날, 참사로 친구를 떠나보낸 지인이 유가족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고 알려줬다. "잘 지내시나요?" 잘 지내냐고 묻는 말. 내가 가늠할 수 없는 1년이 담긴 안부였다. 어떤 안부는 정말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에게 그런 안부가 온다면 잘 지낸다고 답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었을 때도 잘 지낸다고 했으면 좋겠다.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잘 지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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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삭제된 공간의 기억- 왜 우리는 다시 묻고 있는가
사람들이 모이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였다. IT 강국답게 소셜 네트워크로 이태원에 모여서 할로윈을 즐기는 것은 한국 전체를 들뜨게 했다. 다중(多衆)이 주는 광장의 에너지를 우린 무려 3년이나 누리지 못했었다. 코로나19가 준 공포, 환자가 죄인처럼 취급되는 두려움 속에서 밖으로 한 발짝 나가기가 어려웠다. 개인정보를 다 포기하면서까지 국가가 국민 안전을 위해 일해 주기를, 동시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그 속에서 손님이 현저히 줄어든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출근 대신 재택근무로 방에서 화상회의를 했다. 2022년 후반 정부 규제가 차차 풀리기 시작했다. 백신을 서너 차례 맞았고, 한 번쯤은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 자가격리되는 경험도 생겨났다. 신종코로나에 의해 사망할 거란 공포를 인간의 지적 연구가 정복했다는 자신감과 함께, 코로나19가 감기 정도로 가벼운 병이 되었다. 암흑기가 끝나가는 시점. 전환점이 될 날이 바로 10월 29일, 30일 할로윈데이였다. 할로윈은 일반적인 날이면서 일반적인 날이 아니었다. 본래 켈트족에 연원을 둔 할로윈은 아시아권에서는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알려진 명절이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할로윈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젊은 층은 달랐다. 유치원 때부터 코스튬 분장을 했고, 영어조기교육으로 할로윈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할로윈은 10월 31일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의 문이 열리는 날, 유령이나 귀신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좋은 유령도 있지만 악령도 있기에 유령처럼 분장을 하고 뒤섞여 악령은 쫓아낸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그날은 기성세대가 터치하지 않는 젊은 층만이 즐기는 코스프레 축제의 의미였다. 광장으로 모일 찬스. 이태원의 서구적 분위기, 자유롭게 코스프레를 해도 자유롭게 술을 마셔도 같이 즐기는 축제의 느낌. 좁은 경사로에서의 질식 그러나 모든 것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29일 토요일에서 30일 일요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해밀튼 호텔 옆 좁은 골목길, 올라가려는 이와 내려오려는 이의 장난스런 대결이 몸대결로 번졌다. 1번 출구로 빠져나와 이태원 세계음식거리로 가려던 사람과,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1번 출구 쪽으로 내려오던 사람들. 순식간에 몇백 명의 인파가 몰린 5.5평 공간, 앞 사람 얼굴이나 뒤통수도 확인하기 어렵게 비좁은 틈에 끼어 있었다.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경사로를 따라 축제는 광란으로 변했고, 환호는 비명으로, 이태원 사거리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교차로가 되었다. 질식이, 깔린 사람들의 장기 파손이, 복부 팽창과 기절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15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경찰들은 늦었고, 예상하지 못했고,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다. 외부로 나가는 목구멍에 걸린 사람들. 심정지 상태를 언론과 소셜 네트워크가 가감 없이 열어젖혔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이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침몰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코로나19로부터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긍심에서, 축제에 통제 인력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참담함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쉬쉬했다. 어떤 이는 그저 압사 사고라 했고, 어떤 이는 참사라고 했고, 어떤 이는 젊은이들이 “놀다가 죽었다”며 씁쓸해 했고, 어떤 이는 나와는 무관한 먼 세계의 일처럼 받아들였다. 어떤 이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까 저어했다. 이태원 도로를 중심으로 해서 해밀턴 호텔 쪽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고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있었고, 그 건너편은 일상이 일어나는 한가하고 북적한 삶의 냄새를 끓이며 죽음의 냄새를 가까스로 닦아내고 있었다.   국가 애도 삭제 기간 정부는 서둘러 합동 분향소를 만들고, 국가 애도 기간을 정했다. 그 기간이 폭력적이란 생각은 못했다. 다만 세월호 사건에서 비롯된 것인지, 서둘러 사람들은 그 시간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적어도 괴로움을 축소 시키고 싶어했다. 정부는 이태원에서 죽은 젊은이들의 시체를 옮기고 거리를 삭제했다. 일반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에 올린 그 날의 사진과 동영상들을 삭제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고통스러움 탓이었다. 누르고 누른 감정들을 쏟아낼 길이 없는 사람들이 이태원역 1번 출구로 모여들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정말 150여명이나 사망에 이를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다 들어차기도 빠듯한 공간에. 심각한 얼굴의 사람들과 카메라를 높이 쳐든 기자들. 아직 장식이 채 지워지지 않은 할로윈 호박들. 상점에서는 청소하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도 각자 재빠르게 청소하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의 고통을 방관으로 닦아내려 했고, 사망자인 피해자들은 단지 빗나간 청춘들처럼 긁어내려 했다. 가장 큰 청소는 침묵이었다. 고통스러운 일이라서, 젊은 층들만의 일이라서, 도대체 이해가 안 가서, 침묵했다. 정부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유가족들이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침묵했다. 누구도 이 일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태원에 대한 언어가 사라지면서 기억도 금세 사라지는 듯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사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는 그 좁은 골목에서 아직 이렇다 할 반응도 대응도 없이, 연기처럼 소실되었다. ‘이태원’ ‘할로윈’은 금기가 된 듯하다. 다만 언어가 삭제된 것으로, 그 공간이 삭제되고, 그 사건이 삭제되었다. 결국 기억이 삭제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어디서부터 이 이야기를 다시 다루어야 할까.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죽은 이들은 자신의 영정 사진을 올리는 것조차 저어하고, 그곳에 있었던 것조차 숨기려 하고, 옆에서 죽어간 친구 때문에 자살자도 생겨나는데, 우리는 유령들의 행진이므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왜 이태원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가. 왜 그들은 이태원에 모일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왜 이태원을 모른 척하고 있는가. 아직 마음 아픈 곡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삭제된 공간은 재생되기 어려운 기억일까, 생각해 본다. 1주년이 된 참사, 왜 아직도 물을 수가 없나 이제 10.29 참사로 명명된 이 사건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지나간 기억의 편린으로 흩어지길 기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잊은 듯하다. 우리는 이것이 자연재해도 우연히 일어난 사고도 아니라는 걸 이제 안다. 더 많은 경찰인력을 동원했어야 하는 그때, 단지 마약이 아니라 질서 통제를 위해 힘쓰고, 신고가 들어왔을 때 단순한 불평으로 듣지 않았어야 하는 그때,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세월호, 코로나19로 우리에겐 국가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국가는 단지 경제공동체만이 아니라 자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질 줄 아는 공동체여야 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한국은 선진국보다 더 나은 안전 체제와 의료체제를 갖춘 나라로 평가되었고, 국민들은 기꺼이 개인정보를 희생하면서 국가의 지시에 따랐다. 한국은 선진국이라는 의식도 차차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10.29 참사로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질문조차 미궁의 구덩이 속에 질식사시켜버렸다. 국가는 이 문제가 마치 없는 문제처럼, 국가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치부해버렸다. 우리가 10.29 참사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 자, 그럼 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또다시 책임자도 매뉴얼도 없는 사회에 노출되어야 하는가. 세월호보다 더 통제가 가능했던 10.29 참사조차 그 피해자의 잘못 정도로 지나쳐가는 국가에서 우리가 안전을 바라는 것은 어폐가 아닌가. 진상규명은 단지 책임자 논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유사한 일이 일어났을 때 두 번 다시 동일한 문제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책임자도 그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제 3의, 제 4의 참사에 우리가 무방비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다시 묻고 있다. “국가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는 달리 묻자면, “국가는 과연 어떻게 했어야 했나”, 의 질문이고, “유사한 사태에 대한 대책을 지금 당장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10.29 참사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진상규명이야말로 이 참사의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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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이태원을 가지 않는 게 해결 방법은 아닐 겁니다.
잊고 살았던 이태원 참사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달력을 보니 작년 10월 29일은 토요일이었더라고요. 주변인들 사이에 알아주는 집순이인 저는 그날도 집에서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른 저녁잠을 한숨 자고 늦은 밤 느지막이 깨어 핸드폰을 켜보니, 속보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압사. 사람들이 서로에게 깔려 죽는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는 걸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습니다. 어릴 적 위기 탈출 넘버원에서나 봤던 경우가 실제로 일어나다니. 너무 당황스러운 내용에 현실 감각이 없어졌다가, 회사 메신저 방에서 다들 괜찮은지 묻는 국장님의 메시지와 혹시나 하는 걱정에 연락한 친구들의 카톡, 그리고 실제 이태원에 있었던 지인들의 실시간 스토리 공유를 동시에 겪고 나서야 실제 상황이라는 감각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끔찍했던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암묵적으로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놀러 가기 껄끄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친구의 전시를 축하하러 오랜만에 들른 이태원은 이전과는 다른 조용하고 허전한 분위기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2023년 10월 29일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누구도 할로윈을 기념해 즐겼다는 내용의 소식을 올리지 않았어요. 그저 지나가는 주말인 것처럼 소소한 본인들의 일상을 공유할 뿐, 그 어디서도 ‘할로윈’과 ‘이태원’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영화 속 캐릭터 분장이나 파티룸을 예약해 친구들과 만난다는 내용조차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할로윈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하더라도, 끔찍한 참사가 연상되는 장소와 이벤트를 굳이 다시 입 밖에 꺼낼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조용하게 할로윈을 보내는 것이 예의고 미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요, 그것이 곧 해결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작년의 사고는 사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당장 오늘 출퇴근 길만 생각해도 지하철 인파에 양팔만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으로 수십 분을 버텼으니 말입니다. 이태원 참사는 이태원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할로윈 데이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태원을 가지 않는 것이 해결 방법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그 일을 계속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잊지 않았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는 것. 그리고 지금도 아슬아슬한 상황이 어딘가에서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리는 것. 안타깝지만 세상엔 이태원 참사만큼이나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야속하게도 계속해서 말하지 않으면 금방 다른 것들에 밀려나기 쉬우니까요. 세상에서도, 우리 기억에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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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참사로 탄생한 이름
제목 : [함께 기억] 참사로 탄생한 이름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대학생이던 나는 대학교 강당에서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단에선 교수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설교는 12시 30분에 끝났다. 다음 수업이 1시 15분인 터라, 내 점심시간은 45분 밖에 되지 않았다. 설교가 끝나면 제일 먼저 강당을 나가 점심을 먹고, 도서관 소파에 누워서 어제 못 잔 잠을 자려고 했다. 설교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고, 교수가 한 말에 눈을 떴다. “지금,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학생들이 갇혀 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핸드폰을 잘 확인하지 않는 나는 그제서야 핸드폰을 꺼내 뉴스를 확인했다. 진도 앞 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기사였다. 다행히 안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구조됐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다행이다 생각하고 핸드폰을 덮었다. 불과 몇 시간 뒤, 앞선 전원 구조 소식이 오보라는 기사를 접했다. 수 백명의 학생들이 배 안에 갇혀 있으며, 구조가 시급하다는 기사가 연신 올라왔다. 구조하고 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는 기사만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도 구조하고 있다는 소식은 나오지 않았다. 상식이란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지식’을 말한다. 가장 먼저 도망친 세월호 선장, 수 백 명의 죽음을 오보하는 언론, 7시간 만에 등장하는 대통령,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던데, 라는 말. 내게 이 모든 게 상식 밖의 일이었다. 선원들을 우선 해야 되는 게 선장 아닌가? 언론은 도대체 뭘 보고 기사를 쓰길래 수 백 명의 목숨을 구조했다는 오보를 냈을까?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 보고를 받지 않았나? 보고가 되지 않은 건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 발언이 아니라, 어떻게든 구해라 라는 말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상황에 대비하고 대응하라고 정부가 있고, 부처가 있고, 시스템이 있는 거 아닌가? 이 모든 상황에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은 “세상이 이상하다"였다. 그 순간 언론에서 비추는 모습이 과연 진짜일까 의심이 들었고, 나는 내 눈으로 직접 그 상황을 봐야겠다 싶었다. 다음 주가 중간고사였지만, 아랑 곳 않고 진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한량없다' 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식 잃은, 아니 정확히 당시에는 아직 자식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부모들을 보면서 뼈에 새겨지게 느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이유는, 유족들의 모습을 담을 적절한 단어가 뭔지 알 수 없어서였고, 비통해 하는 그 분들의 모습을 어줍잖은 단어로 품을 수도, 그 마음을 모두 헤아리고 이해할 수도 없어서 였다. 당장 서울로 올라가면 가족이 있고, 침대가 있는 방에 누울 수 있는 내가 무슨 말과 마음으로 그들의 비통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비통함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그 분들의 모습과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물 흐르는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까지. 세상 만물의 소리를 담을 수 있고, 가장 과학적인 언어가 ‘훈민정음' 한글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로, 억울한 것이 있으면 직접 한글로 써서 임금인 자신에게 항소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라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어떤 억울함도 표현하고 품을 수 있는 한글이지만, 한 가지 없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식 잃은 부모'다. 부모 잃은 자식을 일컬어 ‘고아孤兒’라고 하고, 남편 잃은 아내를 ‘과부寡婦’, 아내 잃은 남편을 ‘환부鰥夫’라고 한다. 하지만 자식 잃은 부모를 칭하는 단어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잃은 것은 세상을 잃은 것이고, 자기 자신을 잃은 것과 같다. 자신 보다 귀한 자식을 잃은 사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 비통함은 감히 말할 수 없다. 그 어떤 억울함도 호소하면 들어준다고 말한 세종대왕이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만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애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고, 그 단어를 만들지 않은 게 아닐까. 연극 <먼데서 오는 여자>에 이런 대사가 있다고 한다. “추모하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추모하고 애도하고 기억하게 해달라고 싸우다가 10년이 흘렀습니다." 세월호 침몰이 있은 후, 유족들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처럼 그들의 억울함을 들어주는 정부는 없었다. 못 들어준 것이 아니라 안 들어줬다. 오히려 그 슬픔이 사회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듯이 외면했다. 유족들은 계속해서 진상 규명을 외쳤고, 함께 기억하자고, 기억해 달라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를 만들자고 싸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억울함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를 또다시 마주했다. 이번에도 정부의 시스템은 발휘되지 않았고, 책임 없다는 말과, 참사가 아닌 사고이며, 경찰 더 투입됐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정부를 보고 있다. 2014년 4월 16일의 부모님들처럼, 2022년 10월 29일의 부모님과 형제, 자매, 남매. 친구들과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들은 또다시는 ‘한량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참사가 있는 곳에 가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을 지언정,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은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참사를 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라도 참사 현장에 가서 현장을 본다. 그리고 ‘나’라는 작은 사람에게라도 그 ‘햔량없는' 고통이 분담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량'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참사로 탄생한 이름이다. ‘나’라는 사람의 한계와 그릇은 명확하지만, 이 작은 한계와 그릇으로 고통과 억울함이 나눠질 수 있다면, 또 그 사람들이 모이고 모이면 유족들의 고통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참사를 통해 있어선 안 될 이름들이 생겨났다. 세월호 아이들, 세월호 세대, 세월호 유족, 이태원 참사 유족, 이태원 참사 피해자 등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외에도 국내에는 크고 작은 참사들이 발생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조금 잊혀진 성수대교 붕괴 참사와 삼풍 백화점 참사 등이 있다. 참사를 통해, 세상에 있지 말았어야 할 이 이름들이 생겨났다. 우리가 그 이름을 잊어버리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 이름을 잊는 날은 참사의 원인이 된 시스템의 부재와 정비, 책임자들의 사과가 있을 때가 그들의 이름이 잊힐 수 있을 때가 될 것 같다. 그때까지는 우리에게 그 참사가 있었다는 걸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내가 갈 수 있다면, 참사의 현장을 언제고 마주하고 싶다. 글을 쓰고 있는 10월 29일, 사고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골목과 추모식이 있다는 서울광장을 다녀왔다. 불과 30초면 다 걸을 수 있는 그 골목에서 수백명이 압사했다는 게 다시금 믿기지 않았고, 수 많은 사람이 모인 광장에 책임자들이 나오지 않은 게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세월호 이후 8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한게 없어 보이고 오히려 퇴보한 듯한 상황이 안타까웠다. 나는 여전히 유족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조차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인故人’을 추모하고, 글을 쓰는 것 뿐이라는 점이 부끄럽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 분들의 고통과 억울함, 비참함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유족들의 이야기를 책임자가 듣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유족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책임을 물어주면 된다고 믿는다. 부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억울함이 조속히 풀어졌으면 좋겠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간절히 바란다. 참사로 희생된 분들과 그 유족분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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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우리의 무게감
최근에 동료 활동가로부터,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간담회에 참여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진행자였던 중년의 활동가가 참여자들에게, 윤석열 대통령, 이상민 행안부장관 등 보기를 몇 개 던지며 제일 잘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선택해서 손을 들어달라고 했다. 책임져야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누가 제일 문제였는지를 분명히하는 작업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선 질문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래서 대통령이 제일 문제가 많다고 선택되면 대통령을 탄핵하면 되고, 장관이 제일 문제였다고 뽑히면 장관을 탄핵하면 되는 것인지, 사회적 참사를 온전히 잘 다뤄보고자 모인 자리에 썩 맞는 질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폭우로 인해 반지하주택과 지하차도에서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며 재난, 특히 기후위기에 얼마나 우리 사회가 취약한지가 드러났다. 신림역과 서현역에의 묻지마 칼부림 소식, 관악구의 등산로 성폭행 살인 뉴스의 충격이 잊혀지지 않는다. 국가 정책과 보증 아래 대출을 받고 입주한 전세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해서 연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정치와 행정 시스템의 붕괴 속에 이태원 거리에서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다. 이 모든 일들이 1년 남짓 사이에 벌이진 일이다. 연거푸 이어지는 비극 속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국가도 사회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채워지고 만다. 각자도생의 생존방법만을 고민하고 만다. 이태원 참사를 이태원 참사만 떼어내서 생각하지 않게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의 무력함을 실감하며, 희생자 및 피해자의 규모가 크든 작든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반지하에 거주하든, 전세집을 계약하든, 비가 오는 날 운전을 하든, 축제 때 거리를 걸어다니든, 누구도 특별할 것 없고 잘못도 잘 한 것도 없고, 죽어야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하루 빨리 특별법의 통과와 함께 진상규명이 적절히 이뤄져서 책임자가 응당 잘못한 지점을 처벌받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사회적 참사를 개별적으로 뜯어내 장관 한 명 탄핵하며 끝내지 말고,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생명과 안전의 사안 중 하나로 계속 다뤄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회적 참사는 사회적 참사로 기억하며 무겁게 다루고, 이태원은 우리에게 그간 그랬던 것처럼 신나게 노는 공간으로 두고 싶다. 작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놀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지하철 타기 번거로워서 을지로에서 멈춰 살 수 있었던 나를 떠올리며.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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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이 사고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재작년 할로윈 때 이태원에 있었습니다.작년까지 사고 현장을 오고 가며 출퇴근을 했었고혹시 사고의 현장에 전 직장 동료들이나 아는 사람이 있었을 까봐 조마조마하며 연락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사고의 당사자가 우연히 출퇴근을 하는 제가 되었거나저의 가까운 지인들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할로윈은 젊은 세대 축제의 상징이죠.할로윈 하면 이태원이 수식어로 따라올 만큼유명한 장소이기도 하고요. 사고가 난 이래로는할로윈은 왜 하필 그 좁은 이태원에서 모이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작년 사고에 무엇을 했나 일기장과 sns를 뒤져보았어요. 압사 사고가 난 날은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고다음날 주일 아침 중고등부 선생님을 통해 카톡으로 뉴스를 공유받았어요.교회에서 확인하면서 이게 실화인가? 만우절 거짓말 같은 줄 알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설마 하던 일이 진짜 라는 걸 인식하게 되었어요. 압사라는 단어도 저에겐 생소하고이런 사고에 대한 경험이 없었으니까이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인가 멍해졌어요.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압사를 당한 고인과 부상자들에게 송구스럽지만저는 이 이슈가 나올 때여러 부분을 비관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이 압사사고가 과연 세월호처럼 삼풍백화점의 붕괴처럼 성수대교의 붕괴처럼 바라봐야할 사고인가한동안 생각했습니다.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저는 학부모들과 대화를 나누며추모의 물결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언론매체에 언제까지 화두가 될 것인가 라는 의견을 나누었어요. 조심스럽게 쓰는 이 글은무조건적인 비난 이후 저를 되돌아보고자그리고 이 사고를 어떻게 인식해야할까1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사건을 다양한 시각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다양한 분들의 의견을 통해저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정리한 지금까지의 생각은사고를 통해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경찰과 공무원 등 관련 조직 내부 일처리 과정의 폐해,미흡한 안전교육 시스템 입니다. 안타깝지만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참사는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하지만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며하나 하나 개선해 나가며 사고가 재발되지 않기를, 후대에 물려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흡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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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토록 참혹한 날들 속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구호 앞에 서면 왠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하나의 소리가 크게 들릴 때 그 밖의 작은 소리는 소거되기 쉬우므로. 물론 그날의 일이 왜 발생했는지 아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그러니까, 왜 대비도 대응도 못했는지 밝혀야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누군가 의무를 내던진 이유를 추궁할 때 그 책임에 무게가 실리기 마련이고, 죽음의 과정을 이해하는 건 망자를 그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참사를 해결하는 전부일까. 말 그대로 ‘참혹한 일’이 ‘참사’의 정의라면, 나에게는 그날 이후 펼쳐진 모든 날들이 참혹했다. 때문에 두 가지 구호로만 소화하기에 참사는 훨씬 거대한 것이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 보자.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단톡방 알림이 울렸다. “얘들아 이태원 뭐냐...” 항상 업무가 바빴던 친구가 핼러윈을 즐기는 줄 착각하고, 나는 ‘ㅋ’을 연발하며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금세 그 행간이 다르게 읽혀 SNS에 접속하니, 충격적인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도무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싶어 오밤중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쫓기듯 잠을 청했는데, 다시 일어날 때쯤에는 사상자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 있었다. 그 아득한 현실에 얼이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주변의 반응에 더욱 기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래서 핼러윈을 싫어하는 거야.” “너는 저런 데 안 다녀서 다행이다.” 일상은 속절없이 흐른다. 먼저, 그날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른거렸다. 그 다음에는 현장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혹은 나처럼 멀리서 소식을 접했을 사람들이. 가슴팍에서 많은 게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한 모습들이 못내 기이하게 다가왔다. 과연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이 필요 없는 사회도, 말하지 못하는 사회도 끔찍하기 매한가지인데. 국가애도기간을 거치는 동안에는 숱한 행사와 공연이 중단되었다. 그런가 하면, 온라인에서는 “놀러 가서 죽은 것”이라며 참사의 사회적 해결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만연했다. 그리고 그 사이, 159번째 희생자 이재현씨가 친구들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참사로서 편견과 혐오의 문제 그날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긴 사람들에 대한 혐오는 여전하다. 누군가의 고통은 그렇게 가중된다는 점에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때, 그 혐오는 핼러윈과 이태원을 향한 편견에서 기인한다. 핼러윈을 모르는 사람에게 핼러윈은 ‘외국 귀신 놀이’에 불과하다. 이태원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태원은 ‘미군기지가 위치한 위험한 지역’, ‘젊은 애들 노는 문란한 지역’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크게 강화된 시선 역시 작용한다. 언론에서는 코로나 확산 진원지로 이태원의 성소수자를 선정적으로 지목한 바 있고, 사람들은 밀집 경험을 민폐로서 감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게, 거길 왜 갔냐” 같은 비난은 그런 토양에서 자란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1차 추모제의 제목은 그랬다. 그러고 보면, 분향소를 방문해 희생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기사를 통해 유가족의 사연을 새길 수도,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에 동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거기서 그치는 걸까. 나는 저마다 기억하는 전부를 증언해야 한다고 여긴다. 언젠가 참여했던 집담회에서 그런 고백을 들은 적 있다. “저에게 이태원은 마치 외국 어딘가처럼 와닿지 않는 측면이 있어요.” 용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날의 현장은 직관적이었지만, 사실 누군가에게는 상상조차 어렵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렇다면, 핼러윈과 이태원이 베일에 싸이지 않도록 기억의 파편을 잘 모아야 한다. 나아가 앞으로 어떤 기억을 만들지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날 이후 나는 일부러 이태원에 자주 들른다. 다가오는 핼러윈에도 놀러갈 작정이다. 더는 들을 수 없는 증언을 미지로 남기는 대신 그에 근접한 기억을 새로 쌓기 위해서. 그렇게나마 그날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긴 사람들과 연결된 기억 속에 묶이고 싶다. 그런데 일주기를 앞두고, 곳곳에서 핼러윈 지우기에 여념이 없다. 놀이공원은 핼러윈을 벌써 다른 테마로 대체했고, 유통업계는 핼러윈을 건너뛰고 크리스마스를 준비 중이다. 심지어 마포구는 ‘핼러윈 금지’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그 외침이 무색하게, 일각에서는 기억에 대해 아주 완강히 거부한다.  ‘죄책감’과 ‘답답함’을 넘어 나는 지난 5월부터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 기록단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활동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세운 취지는 명확하다. 무엇보다 이태원을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이태원은 어떤 의미인지, 그날 이후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듣고 싶었다. 본격적인 인터뷰 진행에 앞서 7명의 기록단을 모집했다. 특징적인 건 대부분 동네 버스 정류장에 붙은 포스터를 확인하고 신청했다는 것. 녹사평, 이태원, 해방촌 일대를 지나고 있었고, 이미 그 근처에서 거주하거나 노동하고 있었다. 주로 이태원에 관한 개인적인 인연을 간직했을 뿐 관련 활동 경험도 거의 없었다. 종사하는 분야도 천차만별이다. 그렇게 모인 마음들을 통해 참사에 관한 커다란 갈증을 실감했다. 특히 두 가지 감정이 도드라졌다. 먼저, 살아남은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매년 붐비던 골목을 알던 사람은 그 위험을 인지하고도 예방하지 않은 자신을 탓한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줄도 모른 채 축제를 즐기던 사람은 그날 무심히 웃고 떠들던 자신을 탓한다. 현장을 목격한 뒤 겨우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구조에 망설이던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죄책감을 적절히 해소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개인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감정을 덜어내지 못한 채 심화되거나 끝내 그 원인이 되는 참사를 외면하고 만다. 공동체 회복에 기여할 방법이 없으므로. 한편, 답답함도 가득하다. 그날 각자가 잃어버린 세계란 희생자들의 총합을 한참 넘어선다. 하지만 그 상실이 낳은 공포와 슬픔, 혼란, 분노 등을 나눌만한 장이 현재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고 보면, 기록단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서로를 발견하는 것만으로 치유 받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다들 좀처럼 말을 꺼내기 힘든 여건에 놓여 있다. 그 기이한 침묵 속에서 개인의 상처만 곪는다. 모든 게 조심스러워 입을 열기를 주저하게 되고, 그 어떤 표현도 와닿지 않은 탓에 고립에 처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불충분한 구호에 다양한 마음을 우겨넣는 사회,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타인의 이야기를 함부로 재단하는 사회가 벽처럼 서 있다. 그날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 기록단은 9명의 인터뷰이를 만나 증언처럼 이야기를 들었다. 가령, 이태원의 핼러윈은 온 가족이 기다리는 온 동네 축제다. 핼러윈이면 집집마다 사탕 바구니가 걸린다. 지역 주민인 부부 민희씨와 원기씨는 매년 아이들 손을 잡고 이태원 일대를 구경하는 재미에 빠진다. 무엇보다 삼대 째 이태원에 거주하는 원기씨의 경우, 그날 이후 행여 유년의 추억이 사라질까 염려가 가득하다. 그 다음, 상인 범조씨는 매출이 돌아오더라도 가게를 정리할 참이다. 코로나에 이어 연달아 침체된 상권 속에서 생계의 불안정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태원을 찾는 사람들이 한때 자신이 경험했던 즐거움을 계속 누릴 수 있길 바라는 그의 마음도 위태롭다. 일찍이 이태원을 선망했던 샤인씨는 어쩐지 악착같다. 마치 당위처럼 “괜찮아야 했다”라고 강조한다. 퀴어 아티스트로서, 이곳이 아니면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고 위기의식을 느낀다. 샤인씨는 자유와 환대의 광장 이태원을 아끼는데, 동시에 그런 자유와 환대가 가능하기까지 필요했던 배움 역시 강조한다. 상대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하는 만큼 나도 상대를 그렇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태원을 즐겨 찾던 승연씨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낯을 많이 가리는 승연씨는 이태원을 통해 변해 가는 자신을 보았다. 특히 난생처음 핼러윈 코스튬을 시도하며 한결 자유로워진 자신을. 그날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의 일부가 이렇다. 한편, 클럽 DJ들은 그날 이후 고민에 빠졌다. 예정된 파티를 진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대신 추모의 뜻을 담아 ‘이태원 스트롱’이라는 슬로건을 떠올렸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노래로, 춤을 추는 사람은 춤으로, 디제잉을 하는 사람은 디제잉으로 그날을 기억할 수 있다고.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일상과 애도는 분리되어 있고, 그만큼 사람들은 자칫 피로감에 빠진다. H씨는 아프리카 장례를 예시로, 보영씨는 애니메이션 <코코>를 예시로, 솔아씨는 퀴어퍼레이드를 예시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경계를 허물고 함께 어울리는 풍경을 상상했다. 나는 참사란 걸 그렇게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까, 묻고 싶다. 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다뤄지는 참사의 범위가 너무 좁게 느껴진다. 그날 이후 나의 친구들은 저마다 다른 청년들의 죽음을 떠올리기도 했다. 신당역에서 살해된 여성, 구의역에서 사망한 노동자, 연쇄적으로 사라진 성소수자 지인들, 그리고 언젠가 생의 끝자락에 서 있던 자신까지. 어쩌면 두서없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횡설수설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들은 꼭 그렇게 그날 이후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듣지 않고자 하는 힘이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침묵, 편견과 혐오, 죄책감과 답답함, 상실, 일상과 애도 등 전부 참사의 영향권 아래 있다. 해결 역시 그만큼 거대해야 하지 않을까.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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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우리의 이야기임을 인정해야 할 때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설마, 다 구조될거야”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10년 전 4월 16일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간 학교 앞 식당에서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설마, 타박상 입은 사람이 몇십명이겠지” 작년 10월 29일 친구들과 단풍놀이를 다녀오는 길에 늦은 뉴스를 보고 든 생각이었다. 설마라는 말은 ‘그럴리는 없겠지만, 부정적인 추측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상식적이라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들을 접해서였을까 ‘설마’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에 즐거웠어서 죄스러웠다. 그해 12월에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이태원 참사와 사회적참사를 기억하고 곱씹고 싶어하는 동료 시민들을 초대했다. 한 사람이 개인이 다치더라도 원인과 치료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것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상적으로 살다가. 사회적 참사는 우리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더욱이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싶었다.  그 다음해인 올해 2월, 참사 100일 시민추모대회에 봉사자로 참여했다. 대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특별법 서명을 받고, 시민들이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 했다. 이태원에서 옮겨오는 유가족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렸는데,시청 앞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대치했다. 대회 이후엔 이태원에서 옮겨온 분향소를 지켰는데, 이 날 경찰의 집회 해산 명령을 처음 들었다. 이곳을 지키는 유가족과 시민들은 이런 억압과 곧 이어질 조롱을 매 순간 들어야된다는 것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으로라도 괴로움을 때우듯 내가 한번이라도 더 가면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지, 특별한 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이 참사를 기억하는 시민이 있다는 것이 티가나지 않을지 일말의 기대를 품고 그렇게 이태원과 서울광장을 오갔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 다시 분향소를 지켰다. 고난 받은 예수가 지금 이 땅에 계신다면 아마 이 자리에서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지 않을까 싶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사람들은 아무도 오지 않던 날.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다가도, 일찍 잃어버린 자식과 비슷한 나이의 청년을 보며 춥지 않냐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손잡아주시던 유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설마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까? 5년 후 나는 또 다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길거리에 나돌아다니지 않아도 될까? 우리는 이 뼈아프고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바탕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야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숨겨야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회적인 아픔이자,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매 참사마다 반복되는 유가족에 대한 혐오와 2차 가해, 이정도면 해결된거 아니냐는 짜증 섞인 물음, 이슈를 세력화하고 구분짓기만 하는 정치에서 벗어나야한다.  참사가 발생했을 때 먼저 생각났던 ‘설마’는 안전한 사회에 대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아야한다는 당연함의 바람이고, 이를 책임질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당연함이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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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악플, 그리고 국가
‘핼러윈데이’가 다가오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코스튬을 입은 시민들, 이태원 거리의 파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2022년 10월 29일 이후, 한국의 ‘핼러윈데이’는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아픈 상처가 되었다.  올해 10월 29일이면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다. 서울 한복판의 골목에서 ‘압사’로 158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참사로 친구를 잃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마지막 희생자까지 159명의 시민은 생명을 잃고, 목숨을 건진 수 백여 명의 시민은 ‘생존자’가 되었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여전히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을 위해 거리에 서있다.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하지 않는 정부를 대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런 상황 속에서 참사를 둘러싼 왜곡과 2차 가해, 혐오와 맞서는 이들이 있다. 참사 피해자에게 부정적 프레임을 씌우는 언론, 이들을 조롱하고 힐난하는 악플, ‘혐오해도’ 된다고 신호를 보내는 정치인. 참사를 마주한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청년참여연대는 지난 10월 23일,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대한 악플, 2차 가해를 저지른 인물, 언론을 대상으로 대응하는 유가족 A씨와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개인이 감당하기엔 힘든 과정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대응을 시작했다고 밝힌  A씨.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이태원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쏟아진 2차 가해 이야기를 드러내고자 한다.   “2차 가해하고도 죄책감 안 느껴… 처벌 선례 만들고 싶었다” 10.29 이태원 참사가 곧 1주기를 맞는다. A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정신과 치료받으면서 가족들과 지낸다. (이태원 참사 관련) 활동이 있을 때 가끔 나간다.”  –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관련하여 유튜브, 언론 기사의 댓글, 정치인들이 막말을 쏟아냈다. 피해자분들과 유가족분들의 입장에서 무척 고통이 클 거 같다. 이와 관련하여 언론, 악플에 대응 중인데, 현재 어떤 상황인가? “초반에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비교적 젊은 형재·자매들이 언론 대응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공식 메일 주소를 만들어서 언론사 연락을 받고, 인터뷰할 사람을 섭외하기도 했다. 일반 시민분들도 연락을 주셨는데, 2차 가해 기사나 악플 댓글도 제보해 주셨다. (초반에는) 일반인들 상대로 대응을 하기에는 악플이나 2차 가해 댓글 양이 많기도 하고, 다른 일들이 더 많았어서 취합 위주로 했다.  그러다 희생자분들 사연이 소개되면서, 신상이 공개된 몇몇 희생자분들이 있었다. 처음에 인터뷰를 할 때 댓글을 안 받고 올린다고 해서 응했던 것인데, 나중에 보니 댓글 창이 열려있었다. 거기서도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 걸 보고 무척 화가 났다.  그 사람들은 본인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정작 모른다. (가해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정치인들이 언론에 나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2차 가해성 발언을 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처벌하는 판례를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희생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대해 11월 초, 중반부터 대응했다.  주로 일베 사이트(일간 베스트)에 글을 쓴 악플러들을 고소했는데, 직접 찾아보고 취합했다. 그리고 변호사분이랑 같이 대리인 고소를 진행했다.”  –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한 인물들에 대한 적절한 처벌 조치가 이루어졌나? “현재는 고소한 사람 중, 7~8명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어떤 사건은 벌금 200만 원으로 최종 판결 나기도 하고, 어떤 건은 벌금 300만 원 형을 받았는데 피고가 항소를 했다.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람에 대한 형벌은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한 건이 1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받았는데, 검찰이 항소하기도 했다. 벌금 500만 원보다 더 높은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검찰이 항소한 거 같다. 현재 그 사건은 2심을 앞두고 있고, 다른 것들은 아직도 조사 진행 중이다. 어떤 분들은 반성문을 쓴다거나 합의를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합의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서 합의는 안 하고 있다.” – 일반인이 ‘악플 고소’를 하는 과정은 까다롭고 어려웠을 거 같다. 이 과정이 힘들지는 않았나.  “사자명예훼손 같은 경우가 굉장히 까다롭다. 알아보니까 정말 까다로운 게, 친고죄 (사자명예훼손죄, 모욕죄)는 고인의 가족만 고소할 수 있다. 허위의 사실을 고의성을 가지고 제3자가 보는 곳에서 적시했을 때 처벌이 가능하다. 그래서 처벌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고소했는데 어떤 건이 1심에서는 최고로 높은 형벌을 받았다. 아직 진행 중이지만 높은 형벌을 받은 판례를 남겼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막말을 하고 2차 가해를 저지른 김미나 의원은 선고유예를 받았다. 정치인이면 본인의 말에 더 책임을 져야 하고, 잘못을 했을 때 더 중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면죄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직접 느꼈다. 이를 보며 국가, 정부, 법원이 가해자들에게, 정치인들이 하는 말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더욱 화가 난다.   악플을 취합하고 고소하는 과정은 (감정적으로도) 아주 어려웠다. 처음에는 악플 대응을 조용히 하고 싶었다. 글(악플)을 읽으면서 손이 떨리고 가슴도 뛰고 화가 났지만, 그것보다 희생자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를 욕하면 상관이 없는데, 아무런 대응을 하지도 못하는 고인을 욕하니까. 잘못을 일깨우고, 악플 고소에 대한 판례를 남기면 참사에 대한 2차 가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국가가 2차 가해자다”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2차 가해, 악플 공격이 왜 이렇게까지 심각할까.  “언론이 기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인권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다른 유가족 분의 장례식장에 찾아와서 한 마디만 해달라고 하는 기자들이 많았다. 그들한테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기사를 쓰는 경우도 있었고,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유가족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끔 기사를 쓰는 것도 느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언론과 국가가 이태원 참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주도했다고 생각한다. 악플러들을 고소해서 재판을 진행 중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론과 정부가 그들에게 색안경을 씌워서 그렇게 된 건 아닐까 싶다.  법원도 2차 가해 해결을 막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법원이 사실상 한덕수 국무총리나 김미나 의원에게  2차 가해에 대한 면죄부를 줬다고 생각한다. 또, 참사 이후 분향소가 녹사평에 있었을 때, 분향소 옆에 신자유연대 단체가 노골적으로 2차 가해를 했다. 그런데 집회를 철수시키는 것에 대해 법원은 집회의 자유를 우선시했다. 유가족과 고인을 대놓고 모욕을 하는 집회를, 권리와 자유라고 존중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대놓고 국가가 2차 가해자들을 보호하니까.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국가가 2차 가해자다.” – 참사를 왜곡하고 피해자, 유가족에게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혐오 표현 문제를 개선해나가기 위해 시민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 있을까?  “처음에는 ‘놀러 가서 죽었는데 왜 난리냐’는 댓글들에 차분히 반박 댓글도 남겨보고 설득시키려고 해봤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대응을 하다가 점점 포기하게 됐다. 아무리 댓글뿐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상처받고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이 어떤 일을 실천해야 할까 생각하면 어렵다.  작은 실천으로는, 악플이나 혐오 댓글에 ‘싫어요’를 눌러서 반대 의견을 표하는 것도 있다. 혐오 댓글에 ‘이런 욕은 잘못된 거다’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다수가 생각하는게 맞겠지’라고 수동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묵살되고, 또 다른 욕들이 달리는 거 같다. 그래서 기사의 ‘좋아요’나 댓글만 읽는 것보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이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 10.29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진정한 애도와 추모를 위해 시민으로서 함께 연대하고 싶다. 더 많은 연대를 위해 남길 이야기는?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는 젊은 분들이 잘 안 온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 때문에 젊은 분들이 지금 다 숨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있던 게 잘못된 건가’하는 생각으로 부모님에게도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 못 했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사실, 이태원에 있는 거나 핼러윈 축제가 잘못된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유가족)한테는 이번 핼러윈이 슬픈 날이겟지만, 당시 희생자분들에게는 1년에 한 번 뿐인 일상이었다. 핼러윈을 너무 슬프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즐기거나 안 즐기거나 본인의 마음이지만, 즐기더라도 죄책감 갖지 않고 몸과 마음이 안전했으면 좋겠다.  덧붙여, 언론에서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가 거리에서 이야기하면 ‘다 해결됐는데 왜 아직도 저래’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국가, 정부에서 수사를 끌어서 하나도 해결된 게 없다.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되지 않았으니 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우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이번 사례를 통해 보여준 언론의 태도는 플랫폼 기업의 ‘혐오산업’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자극적인 보도로 조회 수, 트래픽을 높여 기업 매출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언론의 패턴이다. 유가족 인터뷰 댓글창에 악플이 많이 달리자 댓글창을 폐쇄하길 요청했지만, 담당 기자는 주저했다고 한다. 당사자에게는 칼이 되어 꽂히는 악플이지만, 결국 기사의 성과와 직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구조적 혐오와 2차 가해 속에서 악플러 개인을 처벌하는 방식이 과연 유효할까. 어떻게 우리 사회가 혐오와 차별, 폭력에 대해 구조적, 기업적 책임을 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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