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회적참사를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한 아홉 캠페이너의 기억을 소개합니다.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설마, 다 구조될거야”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10년 전 4월 16일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간 학교 앞 식당에서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설마, 타박상 입은 사람이 몇십명이겠지” 작년 10월 29일 친구들과 단풍놀이를 다녀오는 길에 늦은 뉴스를 보고 든 생각이었다. 설마라는 말은 ‘그럴리는 없겠지만, 부정적인 추측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상식적이라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건들을 접해서였을까 ‘설마’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에 즐거웠어서 죄스러웠다.
그해 12월에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이태원 참사와 사회적참사를 기억하고 곱씹고 싶어하는 동료 시민들을 초대했다. 한 사람이 개인이 다치더라도 원인과 치료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것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상적으로 살다가. 사회적 참사는 우리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에 더욱이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싶었다.
그 다음해인 올해 2월, 참사 100일 시민추모대회에 봉사자로 참여했다. 대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특별법 서명을 받고, 시민들이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 했다. 이태원에서 옮겨오는 유가족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렸는데,시청 앞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대치했다. 대회 이후엔 이태원에서 옮겨온 분향소를 지켰는데, 이 날 경찰의 집회 해산 명령을 처음 들었다. 이곳을 지키는 유가족과 시민들은 이런 억압과 곧 이어질 조롱을 매 순간 들어야된다는 것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으로라도 괴로움을 때우듯 내가 한번이라도 더 가면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지, 특별한 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이 참사를 기억하는 시민이 있다는 것이 티가나지 않을지 일말의 기대를 품고 그렇게 이태원과 서울광장을 오갔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 다시 분향소를 지켰다. 고난 받은 예수가 지금 이 땅에 계신다면 아마 이 자리에서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지 않을까 싶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사람들은 아무도 오지 않던 날.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다가도, 일찍 잃어버린 자식과 비슷한 나이의 청년을 보며 춥지 않냐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손잡아주시던 유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설마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까? 5년 후 나는 또 다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길거리에 나돌아다니지 않아도 될까? 우리는 이 뼈아프고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바탕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야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숨겨야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회적인 아픔이자,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매 참사마다 반복되는 유가족에 대한 혐오와 2차 가해, 이정도면 해결된거 아니냐는 짜증 섞인 물음, 이슈를 세력화하고 구분짓기만 하는 정치에서 벗어나야한다.
참사가 발생했을 때 먼저 생각났던 ‘설마’는 안전한 사회에 대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아야한다는 당연함의 바람이고, 이를 책임질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당연함이었다.
코멘트
8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마지막 줄에 크게 공감합니다..
안타까운 사건이네요..
기억하는 일이 모든 걸 바꿀 순 없어도 모든 변화의 시작엔 기억하는 일이 있다고 믿어요. 그 순간, 그 공간, 그 장소에 있던 게 내가 아니었을 뿐 지금과 같은 사회라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