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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내 생일 4월 16일,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로 바뀐 결말
벌써 10년 전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직장인이 됐다. 벌서 선임, 대리, 과장을 단 사람도 있다. ‘무명(가명)’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학생은 불합리한 사회를 바꿔보겠다며 기자가 됐다.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한 글로 뾰족한 세상, 둥글게 깍아 보겠다 다짐했다. 그 다짐을 계속 다듬으며 어느새 선배 소리를 듣는 기자가 됐다.
소설을 좋아했던 무명은 자신이 읽은 소설을 각색해 자신만의 작품으로 만들곤 했다. 같은 배경의 주인공이 다른 사건을 마주치며 다른 결말을 맞게 했다. 이유를 묻자 “작가의 결말이 너무 후져보였다.”라며 “작품 주인공에겐 내가 생각한 사건과 결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무명의 노트는 단편소설로 채워졌다. 자연스레 소설가를 꿈꿨고, 국문학을 전공했다. 한글로 쓰인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명의 말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소설가를 꿈꿨던 대학생이, 세월호 참사 후 기자가 된 이야기다. 인생도 소설이라면, 무명에게 세월호는 예정된 결말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책 안 팔려서 전전긍긍하고, 이야기가 안 풀려 머리 뜯다가 탈모로 울 줄 알았다.”던 무명은 전혀 다른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내 주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질문하는 즐거움은 기자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월호 참사로 삶의 경로를 바꾼, 무명과의 인터뷰다.
Q. 본명을 말할 수 있을지
못 한다. (웃음). 나 기자다. 외부에 이름 내놓고 글 쓰는 사람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름보다 매체를 보겠지만. 내 이름 넣었다가, 혹시라도 선/후배가 보면 어쩌냐. 나인 거 알면 “이거 선배 아니예요? 이거 너 아니냐?”라고 물어볼텐데. 창피하다. 안 된다. 참아달라. (웃음)
Q. 알겠다. 그럼 사진은 가능할지?
이름을 가리는데, 얼굴을 까라고? (웃음) 유재석이 유두래곤으로 나온다고, 유두래곤인 게 아니다. 비가 비룡으로 나온다고 비가 아닌 게 아니다. 이효리가 린다G로 나온다고 이효리가 아닌 게 아니다. 이름 바꿔도 가수 후배들은 뛰어와서 90도로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인사할 것이다. (웃음). 얼굴 나오면 난 진짜 끝장이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초등학교 동창도 알아볼 거다. “어? 걔다.” 이러면서.
Q. 인터뷰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 아닌지?
그건 모르는 거다. 어느 매체에 올라가든 글은 확산된다. 인터넷 커뮤니티 글도 공유되지 않냐. 설령 그 커뮤니티 안에서 돌고 돈다고 해도, 공개된 글은 공유된다. 그 수가 많냐 적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게 발목을 안 잡으려면 좋은 글을 써야 하는 거고, 정신차리고 써야한다.
요즘 정치 뉴스를 봐라, 정치인들 공천하는데 10년 전에 SNS에 쓴 글 때문에 잘리지 않나. 과거 발언으로 잘리기도 하고. 이 인터뷰도 무시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름이랑 얼굴 안 내보내는 거다. (웃음). 그냥 무명이라고 하자. 이름없고, 얼굴없는 기자.
Ⓒ한량
Q. 기자로서 요즘 가장 중대한 사안은 뭔가. 기자면 세상사에 궁금증이 기본 아닌가. 궁금해야 질문도 할 수 있는 거고.
그게 기본이면 난 기본이 안 됐다. (웃음). 일적으로는 출입처 사안이 가장 중요하다. 재미없는 사안들이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건, 요즘 기업들 주주총회 시즌이다. 관심있는 기업이 몇 군데 있어서 주총 결과를 보고 있다. 정부에서 벨류업 프로그램 내놓는다고 하는데, 실효성이 있을지도 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누가 후보가 되는지와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 등이다. 그런데 서로 비방하는 모습밖에 없어서 보기가 싫다. 기사 쓰는 사람은 신났을 거다. 제목 달기 좋은 말을 정치인들이 쏟아 내니까. 의대 증원도 중요한 이슈고.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다가오는 내 생일이다.
Q. 생일은 공개할 수 있는 정보인가?
그렇다. (웃음). 사실 제일 중요한 내용아닌가? 오늘 인터뷰에서? (웃음). 4월 16일, 내 생일이다. 그리고 세월호 10주기다. 벌써 10년이다. 시간이 빠르다.
Q. 10년 전 생일에 뭘 했는지 기억하는지.
기억한다. 생일이라 신났었다. 학교도 안갔다. (웃음). 생일을 학교에서 보내기 싫었다. 저녁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그걸 기다리며 집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채널을 무심코 넘기는데, 채널마다 배가 누워있었다. 원래 뉴스를 잘 안봤는데, 유독 그날은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예능이 재미없어서 그랬을 거다. 넷플릭스도 없고, 유튜브도 활성화되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본 뉴스 자막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월호, 진도 팽목항 앞 바다에서 침몰 중'
무슨 말인가 싶어 뉴스를 계속 봤다.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배가 침몰하고 있다. 앞선 전원 구조는 오보다. 배 안에 사람들이 있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대다수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가다가 사고가 났다. 내 기억에 그날 모든 뉴스는 세월호로 도배됐다.
일면식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안산, 처음 들어본 단원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친구들에게 연락해 약속을 취소했다.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Q.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모든 프로그램이 세월호 참사 고통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었다. 예능에서는 검은 옷에 노란 리본을 달며 무사 귀환을 바란다고 하기도 했고, 일부 예능은 정규 편성을 취소했었다.
생일의 연장선으로 답하면 “내가 즐거워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생일 약속도 취소 했었다. 친구들한테 들어보니 학교 교수님들도 수업 시간에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혹시나 ‘모르는 학생들이 있을까봐 알려준다’ 라면서.
또 질문처럼 예능 방송도 결방했었다. 당시 대학교 축제도 모두 취소하는 분위기였고, 기업들도 행사를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도 참사가 많았지만, 세월호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당시 이런 사회 분위기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Q.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 활동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참사 이후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런 목소리에 내 힘을 보태고 싶었다.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 운동에 서명해 달라고 해서 해주고, 노란 리본 제작이랑 나눔 봉사 활동을 하고, 기부하기도 했다. 대학교에서도 노란 리본을 만들어서 나눠주기도 하고, 직접 서명을 받기도 했다. 힘 없는 대학생이지만, 없는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당시 세월호 진실규명 활동에 후원 요청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자발적이었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부할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다. 진실규명 활동 후원 요청 글을 쓰고 학교 선/후배에게 돌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성과가 있었나?
큰 성과는 없었다. 여기서 성과란 실제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줄어들고, 유족의 외침과 바람이 이루어졌는가다. 이루어졌다면 내 활동도 성과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슬픔이 줄지도, 유족의 외침과 바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 활동이라도 있었기에, 이정도까지 온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효과 자체는 미미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 자신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소설가를 접고, 기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Q. 기자가 돼야겠다 생각한 이유는
소설을 계속 쓰는데 상복이 없었다. 지원하는 문학상마다 떨어졌다. (웃음) 그때부터 “아, 내 글이 소설용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책 안 팔려서 전전긍긍하고, 이야기가 안 풀려 머리 뜯다가 탈모로 울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조차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웃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세월호 활동이 겹쳤다. 앞서 말한 후원 요청 글을 쓴 것이다. 소설을 쓰면 매번 보여드리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때도 글을 보여드렸다. 피드백 좀 달라고. 그걸 보고 교수님이 “기자를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를 물으니, “넌 인간 감정 묘사로 설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실에 기반해 행간에 힘을 주고, 짧게 치고 가는 스타일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악필은 누구나 읽기 싫어 한다. 쓰는 사람도 읽기 싫어 한다. 명필이 읽기도 좋다. 명필을 쓸 줄 아는데, 왜 악필을 고집하냐. 손에 안 맞는 글 쓰지 말고, 손에 맞는 글을 써라.”라고 하셨다.
Q. 갑자기 혼난 것 같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
애정이야 있었겠지만, 난 당시 기분 나빴다. “내 글이 그정도로 쓰레기라고?”. 그 말 듣고 화장실 가서 울었다. (웃음). 난 정말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네가 쓰면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거니까 쓰지 말라는 거 아니냐. (웃음). 진짜 분해서 울었다. 입상이라도 했으면, 반박이라도 하지.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말 분했다.
기자를 하라는 말과 함께, 세월호 글에도 피드백 주셨다. 글을 수정해서 선후배들에게 나눠줬다. 버려도 되는데, 읽어만 달라면서 줬다. 성과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 글을 보고 기부했다는 선후배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내 글이 성과를 낸 순간이었다. 내 글 때문인지, 내가 아는 사람이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바라던 일을 내 글로 할 수 있던 게 기뻤다.
그때부터 더 열심히 써서 나눠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자에 대한 생각이 피어난 것 같다. 내 글로 정말, 세상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슬픔을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내 글로 누군가가 슬퍼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불합리한 사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기자가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정에 없던 사건과 변화였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내가 후원 요청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교수에게 찾아가서 피드백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수가 기자를 하라고도 안 했을 거고. 무엇보다 내 글로 무언가 변화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못 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내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고, 내가 예정했던 삶을 바꿨다.
Q. 기자가 돼서 그때 뜻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지
쉽지 않다. (웃음). 원래 세상에 쉬운 건 없다. 쓰고 싶은 것만 쓰려면 블로거를 해야 한다. 기자는 지면에 쓴다. 지면은 언론사 공간이지, 내 공간이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걸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수습 기자 때의 다짐은 늘 기억하고 있다.
Q. 다짐이 뭐였는지?
“모진 세상 연필깍이 삼아서, 뾰족한 글을 쓰겠다.”였다. 그렇게 글로 모진 부분을 하나씩 깍으며 둥글게 만들고 싶었다. 물론 연필은 늘 부러진다. 아마 계속 부러질거다. 그래도 부러지면 깎으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잘 못지 킬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일이 다가오면, 그때 다짐을 더욱 기억하자고 생각한다.
Q. 생일이어서 물어보지만, 세월호 이후 생일을 맞이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나?
몇 년간은 생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생일보다는 세월호가 더 컸다. 생일보다는 누군가의 기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누군가의 생일은 항상 누군가의 기일이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상을 떠난 건, 세월호에 있던 사람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병원에서, 가정에서 사고로, 병으로, 혹은 스스로 눈을 감는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지금도 누군가는 병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언론에 나오지 않는 사고가 많다. 그 안에 다친 사람과 장애를 입는 사람도 많다. 그 모든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식이 태어나는 날 부모는 세상을 가진 것 같다고 느낀다고 한다. 그런 소중한 날이 죄책감으로 물들어선 안 된다. 유족도 그걸 바라진 않을 거다. 기뻐할 건 기뻐하고, 기억할 건 기억하면 된다.
Q.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한다. 어떻게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사고 자체만 기억해선 안 된다. 우리에게 참사가 있었다, 그 참사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304명이다, 구조 과정에서도 순직한 분들이 있다, 참사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했다, 진도 팽목항에서 배가 좌초됐다, 이건 기억이 아니다. 사건 기록이지.
이걸 기억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머리에 있다고해서 기억이 되는 건 아니다. 참사로 기억해야 하는 건,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고, 왜 그런 감정이 들었고, 또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뀐다. 10주기에는 10년 전 내가 세월호 참사에서 느낀 게 무엇이고,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 돌아보고 그 감정과 다짐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세월호를 통해 기억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 질문으로 이번 생일은 뭘 할 건지
아직 계획은 없다. 파티를 하진 않을 거다. (웃음) 그래도 즐기면서 보낼 거다. 내 생일 4월 16일이 누군가에겐 슬픈 날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날이다. 내가 태어난 날이자, 지금의 내 모습이 있게 해 준 날이다. 아까 답변한 대로 기뻐할 건 기뻐해야 한다. 내 생일 4월 16일을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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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하나의 작은 기억이 큰 기적을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큰 흔적을 남겼다. 2014년 4월 15일 인천을 출발하여,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안전하고 질서있게 나갈 수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고 잠자코 기다리던 사람들, 특히 고등학생들. 반면 자신들만 살겠다고 무책임하게 배를 빠져나간 선장. 부모들과 가족들은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 배는 기울어지고, 304명이 조용히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언론은 모두 구조되었다고 했다가, 실종자가 많다고 했다가, 눈길 끌기 식의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은 사고 관련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진 10시 15분부터 중대본을 방문한 오후 5시15분까지 약 7시간 반동안 행적이 불문했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수학여행을 떠나던 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라 그 충격이 더 컸다. 세계적으로 SNS를 통해 비통함과 안타까움을 전하고, 사람들은 합동 분향소를 찾아가 분향하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국가는 어디 있는가?
세월호 참사가 내게 던진 질문은 ‘국가’였다. ‘국가’가 뭐지? 단순한 경제공동체? 이념공동체? 이날부터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단체’로 여겨졌다. 과거 경찰국가니, 복지국가니를 떠나,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내던지거나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 게 국가가 아닐까. 이 추상적인 ‘국가’란 개념이 머릿속에서 부서지고 붙여지고 다시 분쇄되길 반복했다. ‘국가’란 세월호 참사에 뒤늦게 등장한 무심한 ‘대통령’ 일까.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고 저들끼리 빠져나간 선장과 선원 들이 ‘국가’였을까. 멀거니 바라만 보던 해경들이었을까.
우리는 더이상 책임자가 말하는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가만히 있다가 가만히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국가나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은 채, 제 목숨만 제 이익만 챙길 수 있다는 걸 겪은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은 액자 속의 아이들
내 기억 속에 한국은 집단 우울증 상태였다. 전체적 무기력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승객보다 제 목숨이 더 중요했던 무책임한 선장에 대한 허탈감, 바라만 보던 해경들과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을까 싶은 대통령 명령만 기다리던 머저리들. 그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합동 분향소에라도 가서 그 무력감을 서로 위로하는 일 뿐.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먼저 임시로 합동 분향소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을 가 중앙역에서 내렸다. 안산은 내게 제 2의 고향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약 10년간 지냈던 곳.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이 아직 살고 있었고, 사람 한 두 명만 건너면, 모두 희생자들과 연결되었다.
안산 중앙역에 내려서 ‘서울예대’의 마크가 그려진 빨간 대형버스를 탔던 기억이 난다. 학생 등하교를 하던 버스가 지금 분향소를 오가는 버스로 쓰이고 있다는 게 묘한 상징처럼 두통이 났다. 사람들은 침울한 얼굴로 검은 옷을 입고 국화를 들고 줄지어 버스에 올랐다. 죽음을 향해 가는 듯했다.
당도한 임시 합동분향소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 넓은 벽 가득 검은 액자들이 빽빽히 걸려 있었다. 모두 교복을 입은, 한결같이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숨이 턱 막혔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우리가 잃은 건 무엇이지? 단순한 목숨이 아니라, 이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였다.
그만해, 라는 폭력
우리가 충분히 희생자들을 위해 뭔가를 했던가. 수습도 제대로 안 되고, 업계 유착과 비리, 제대로 교육되지 않은 후진국형 사고. 밝혀지지 않은 대통령의 7시간. 기어코 생사가 확인되지도 유해가 수습되지도 못한 사람들. 학생들 뿐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 애쓰던 선생님들과 다른 사람들. 유족들의 통곡과 비통함.
그런 가운데, 어떤 이들은 유족들을 비웃고, 그만 좀 하라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진실 규명을 위해 단식을 하자, 그 옆에서 그들을 조롱하며 짜장면을 먹던 기이한 사람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기억은, 진실에 대한 요구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기억은 없앨 수 없고, 특히 끔찍한 기억은, 해결책이, 수습이 완결되지 않는 한 잊혀질 수 없다. 아니, 잊혀져서도 안 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되새겨야 한다.
10년이 흘렀다. 10년 전 사진첩에서 발견한 노란 리본 이미지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그때 우리는 기적이 누구보다도 필요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 마음 아픈 이를 함께 위로하는 마음. 어쩌면 그때 이미 우리는 기적을 만날 수도 있었다. 10년 후에 우리가 찾는 것은 세월호에 대한 기억, 희생자들의 이야기 뿐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가져오는 “기적”을 아직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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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에 붙은 대자보 2개
AI 윤리 뉴스 브리프
2024년 3월 둘째 주
by. 🤔어쪈
1. AI가에 붙은 대자보 2개
AI 윤리 레터에 언급된, 아니 웬만한 글로벌 AI 기업 모두가 모처럼 중지를 모았습니다. 유명 벤처투자자 론 콘웨이(Ron Conway)가 이끄는 SV Angel에서 발표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AI 만들기’라는 성명서에 오픈AI, 메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수많은 회사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AI는 좋다, 필요하다, 그러니 잘 만들자는 공염불로만 읽히는 건 저뿐만이 아닌가 봅니다. 이전에 AI 하이프 뉴스 체크리스트를 통해 소개한 적 있는 에밀리 벤더(Emily M. Bender) 교수는 참여 기업들이 AI를 계속 개발해서 더 부자가 되겠다는 내용으로 패러디하기도 했죠.
한편, 학계에선 기업들이 정말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AI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다면 ‘독립적인 AI 평가에 대한 면책 조항 (A Safe Harbor for Independent AI Evaluation)’을 둬야한다는 주장을 담은 성명서가 나왔습니다. AI의 위험성과 취약점을 찾으려는 연구자나 이용자를 막거나, 더 나아가 법적 책임을 묻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요청인데요. 앞선 성명서에 참여한 AI 기업들이 어떻게 응답할지 궁금해집니다.
2. MS: (문제 있어도) ‘진행시켜!’
오픈AI가 개발한 GPT, DALL-E 등의 AI 모델에 대한 독점사업권을 가진 마이크로소프트(MS)는 코파일럿(Copilot)이라는 이름으로 그 누구보다 공격적으로 AI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동시에 ‘책임있는 AI (Responsible AI)’를 강조하며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MS의 AI 개발자 셰인 존스(Shane Jones)는 코파일럿의 이미지 생성 기능이 가진 위험성을 수차례 제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이를 인지하고도 묵살한 채 서비스를 출시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는 최소한 코파일럿이 유해 콘텐츠를 생성하거나 저작권을 침해할 수 있음을 고지하고, 이용연령을 제한하거나 별도 보호 장치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존스가 MS 경영진과 FTC에 서한을 보냄과 동시에 관련 기사가 보도되자 MS는 유해 콘텐츠 생성에 쓰이는 프롬프트를 차단하는 등의 조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빅테크 내부고발 시나리오로 시작한 셈이죠. 전에도 적지 않은 내부고발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회사가 홍보하는 것에 비해 안전성과 같은 가치를 사업 기회 대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왔습니다. 그렇다면 AI 기업들이 부르짖는 자율규제는 답이 아닐 수도 있겠죠.
3. 학교 숙제를 넘어 연구 논문까지 AI가?
챗GPT가 등장했을 때, 어른들은 학생들이 학교 숙제를 AI에게 대신 맡긴 후 제출하여 결국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물론 우려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범위는 교실과 강의실을 넘어 실험실의 교수와 연구자들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AI가 생성한 말도 안되는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은 논문이 소셜미디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끝내 철회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동료평가(peer review) 방식으로 이뤄지는 논문의 게재 여부 결정 과정에 대한 불신이 커지던 참인데요. 논문 심사조차 AI에게 맡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황우석 덕분에 우리는 논문 이미지 조작 문제가 예전부터 있었던 문제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다양한 AI 도구가 과학 연구 현장에 도입되면서 연구자들이 갈수록 AI를 예언자, 대리인, 분석가, 심판자로 여기면서까지 거리낌없이 사용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연구실에 AI를 들여 보다 효율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생산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건 아닐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4. 결국 돈싸움이었던 일론 머스크 VS (닫힌) 오픈AI
지난주 소개한 일론 머스크의 오픈AI 고소로 시작된 소송전이 점입가경입니다. 머스크는 늘 그래왔듯 X를 통해 공격을 이어가고 있고, 오픈AI 역시 공식 블로그에 창립 이래 머스크와 나눈 일부 이메일 전문 공개까지도 불사하며 맞서는 형국입니다.
‘비영리 연구소에 투자했는데 이윤 추구 기업으로 변질됐다’는 머스크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오픈AI는 머스크야말로 영리 법인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수차례 관련 제안을 건넸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오픈AI의 사명이 오픈소스화를 염두에 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한 AI를 의미하며 머스크 역시 이에 동의했다고 강조했죠.
보통 논쟁은 입장차에 주목하게 되지만, 오픈AI의 응답은 이들의 생각이 얼마나 일치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전 인류에 기여할 인공일반지능(AGI)을 만들겠다는 사명과 관련 수사로 둘러쌌지만, 머스크와 오픈AI 모두 결국 구글 딥마인드에 대항할 회사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돈을 끌어올 것인지, 또 그에 따른 지분을 두고 다툰 것이죠. 그 결과는요? 오픈AI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등에 올라탐과 동시에 닫혔고, AI의 미래는 빅테크 기업의 손에 달린 모습입니다.
오늘 이야기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유머와 용기, 따뜻함이 담긴 생각을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남겨주신 의견은 추려내어 다음 AI 윤리 레터에서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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