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함께 기억] “내 생일 4월 16일,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202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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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입니다

4월 16일을 기억하는 캠페이너들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로 바뀐 결말

벌써 10년 전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직장인이 됐다. 벌서 선임, 대리, 과장을 단 사람도 있다. ‘무명(가명)’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학생은 불합리한 사회를 바꿔보겠다며 기자가 됐다.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한 글로 뾰족한 세상, 둥글게 깍아 보겠다 다짐했다. 그 다짐을 계속 다듬으며 어느새 선배 소리를 듣는 기자가 됐다.

소설을 좋아했던 무명은 자신이 읽은 소설을 각색해 자신만의 작품으로 만들곤 했다. 같은 배경의 주인공이 다른 사건을 마주치며 다른 결말을 맞게 했다. 이유를 묻자 “작가의 결말이 너무 후져보였다.”라며 “작품 주인공에겐 내가 생각한 사건과 결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무명의 노트는 단편소설로 채워졌다. 자연스레 소설가를 꿈꿨고, 국문학을 전공했다. 한글로 쓰인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명의 말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소설가를 꿈꿨던 대학생이, 세월호 참사 후 기자가 된 이야기다. 인생도 소설이라면, 무명에게 세월호는 예정된 결말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책 안 팔려서 전전긍긍하고, 이야기가 안 풀려 머리 뜯다가 탈모로 울 줄 알았다.”던 무명은 전혀 다른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내 주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질문하는 즐거움은 기자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월호 참사로 삶의 경로를 바꾼, 무명과의 인터뷰다.

Q. 본명을 말할 수 있을지

못 한다. (웃음). 나 기자다. 외부에 이름 내놓고 글 쓰는 사람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름보다 매체를 보겠지만. 내 이름 넣었다가, 혹시라도 선/후배가 보면 어쩌냐. 나인 거 알면 “이거 선배 아니예요? 이거 너 아니냐?”라고 물어볼텐데. 창피하다. 안 된다. 참아달라. (웃음)

Q. 알겠다. 그럼 사진은 가능할지?

이름을 가리는데, 얼굴을 까라고? (웃음) 유재석이 유두래곤으로 나온다고, 유두래곤인 게 아니다. 비가 비룡으로 나온다고 비가 아닌 게 아니다. 이효리가 린다G로 나온다고 이효리가 아닌 게 아니다. 이름 바꿔도 가수 후배들은 뛰어와서 90도로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인사할 것이다. (웃음). 얼굴 나오면 난 진짜 끝장이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초등학교 동창도 알아볼 거다. “어? 걔다.” 이러면서.

Q. 인터뷰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 아닌지?

그건 모르는 거다. 어느 매체에 올라가든 글은 확산된다. 인터넷 커뮤니티 글도 공유되지 않냐. 설령 그 커뮤니티 안에서 돌고 돈다고 해도, 공개된 글은 공유된다. 그 수가 많냐 적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게 발목을 안 잡으려면 좋은 글을 써야 하는 거고, 정신차리고 써야한다. 

요즘 정치 뉴스를 봐라, 정치인들 공천하는데 10년 전에 SNS에 쓴 글 때문에 잘리지 않나. 과거 발언으로 잘리기도 하고. 이 인터뷰도 무시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름이랑 얼굴 안 내보내는 거다. (웃음). 그냥 무명이라고 하자. 이름없고, 얼굴없는 기자.

Ⓒ한량

Q. 기자로서 요즘 가장 중대한 사안은 뭔가. 기자면 세상사에 궁금증이 기본 아닌가. 궁금해야 질문도 할 수 있는 거고.

그게 기본이면 난 기본이 안 됐다. (웃음). 일적으로는 출입처 사안이 가장 중요하다. 재미없는 사안들이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건, 요즘 기업들 주주총회 시즌이다. 관심있는 기업이 몇 군데 있어서 주총 결과를 보고 있다. 정부에서 벨류업 프로그램 내놓는다고 하는데, 실효성이 있을지도 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누가 후보가 되는지와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 등이다. 그런데 서로 비방하는 모습밖에 없어서 보기가 싫다. 기사 쓰는 사람은 신났을 거다. 제목 달기 좋은 말을 정치인들이 쏟아 내니까. 의대 증원도 중요한 이슈고.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다가오는 내 생일이다.

Q. 생일은 공개할 수 있는 정보인가?

그렇다. (웃음). 사실 제일 중요한 내용아닌가? 오늘 인터뷰에서? (웃음). 4월 16일, 내 생일이다. 그리고 세월호 10주기다. 벌써 10년이다. 시간이 빠르다.

출처 : 위키백과 2014년 3월 인천항에 있던 세월호 모습

Q. 10년 전 생일에 뭘 했는지 기억하는지.

기억한다. 생일이라 신났었다. 학교도 안갔다. (웃음). 생일을 학교에서 보내기 싫었다. 저녁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그걸 기다리며 집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채널을 무심코 넘기는데, 채널마다 배가 누워있었다. 원래 뉴스를 잘 안봤는데, 유독 그날은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예능이 재미없어서 그랬을 거다. 넷플릭스도 없고, 유튜브도 활성화되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본 뉴스 자막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월호, 진도 팽목항 앞 바다에서 침몰 중'

무슨 말인가 싶어 뉴스를 계속 봤다.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배가 침몰하고 있다. 앞선 전원 구조는 오보다. 배 안에 사람들이 있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대다수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가다가 사고가 났다. 내 기억에 그날 모든 뉴스는 세월호로 도배됐다. 

일면식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안산, 처음 들어본 단원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친구들에게 연락해 약속을 취소했다.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출처 : 인터넷 ‘세월호 참사 방송 중단' 검색 화면 캡쳐

Q.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모든 프로그램이 세월호 참사 고통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었다. 예능에서는 검은 옷에 노란 리본을 달며 무사 귀환을 바란다고 하기도 했고, 일부 예능은 정규 편성을 취소했었다.

생일의 연장선으로 답하면 “내가 즐거워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생일 약속도 취소 했었다. 친구들한테 들어보니 학교 교수님들도 수업 시간에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혹시나 ‘모르는 학생들이 있을까봐 알려준다’ 라면서.

또 질문처럼 예능 방송도 결방했었다. 당시 대학교 축제도 모두 취소하는 분위기였고, 기업들도 행사를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도 참사가 많았지만, 세월호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당시 이런 사회 분위기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Q.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 활동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참사 이후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런 목소리에 내 힘을 보태고 싶었다.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 운동에 서명해 달라고 해서 해주고, 노란 리본 제작이랑 나눔 봉사 활동을 하고, 기부하기도 했다. 대학교에서도 노란 리본을 만들어서 나눠주기도 하고, 직접 서명을 받기도 했다. 힘 없는 대학생이지만, 없는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출처 : Pixabay

Q.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당시 세월호 진실규명 활동에 후원 요청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자발적이었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부할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다. 진실규명 활동 후원 요청 글을 쓰고 학교 선/후배에게 돌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성과가 있었나?

큰 성과는 없었다. 여기서 성과란 실제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줄어들고, 유족의 외침과 바람이 이루어졌는가다. 이루어졌다면 내 활동도 성과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슬픔이 줄지도, 유족의 외침과 바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 활동이라도 있었기에, 이정도까지 온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효과 자체는 미미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 자신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소설가를 접고, 기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Q. 기자가 돼야겠다 생각한 이유는

소설을 계속 쓰는데 상복이 없었다. 지원하는 문학상마다 떨어졌다. (웃음) 그때부터 “아, 내 글이 소설용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책 안 팔려서 전전긍긍하고, 이야기가 안 풀려 머리 뜯다가 탈모로 울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조차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웃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세월호 활동이 겹쳤다. 앞서 말한 후원 요청 글을 쓴 것이다. 소설을 쓰면 매번 보여드리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때도 글을 보여드렸다. 피드백 좀 달라고. 그걸 보고 교수님이 “기자를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를 물으니, “넌 인간 감정 묘사로 설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실에 기반해 행간에 힘을 주고, 짧게 치고 가는 스타일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악필은 누구나 읽기 싫어 한다. 쓰는 사람도 읽기 싫어 한다. 명필이 읽기도 좋다. 명필을 쓸 줄 아는데, 왜 악필을 고집하냐. 손에 안 맞는 글 쓰지 말고, 손에 맞는 글을 써라.”라고 하셨다.

Q. 갑자기 혼난 것 같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

애정이야 있었겠지만, 난 당시 기분 나빴다. “내 글이 그정도로 쓰레기라고?”. 그 말 듣고 화장실 가서 울었다. (웃음). 난 정말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네가 쓰면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거니까 쓰지 말라는 거 아니냐. (웃음). 진짜 분해서 울었다. 입상이라도 했으면, 반박이라도 하지.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말 분했다.

기자를 하라는 말과 함께, 세월호 글에도 피드백 주셨다. 글을 수정해서 선후배들에게 나눠줬다. 버려도 되는데, 읽어만 달라면서 줬다. 성과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 글을 보고 기부했다는 선후배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내 글이 성과를 낸 순간이었다. 내 글 때문인지, 내가 아는 사람이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바라던 일을 내 글로 할 수 있던 게 기뻤다.

그때부터 더 열심히 써서 나눠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자에 대한 생각이 피어난 것 같다. 내 글로 정말, 세상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슬픔을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내 글로 누군가가 슬퍼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불합리한 사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기자가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정에 없던 사건과 변화였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내가 후원 요청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교수에게 찾아가서 피드백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수가 기자를 하라고도 안 했을 거고. 무엇보다 내 글로 무언가 변화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못 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내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고, 내가 예정했던 삶을 바꿨다.

Q. 기자가 돼서 그때 뜻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지

쉽지 않다. (웃음). 원래 세상에 쉬운 건 없다. 쓰고 싶은 것만 쓰려면 블로거를 해야 한다. 기자는 지면에 쓴다. 지면은 언론사 공간이지, 내 공간이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걸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수습 기자 때의 다짐은 늘 기억하고 있다.

Q. 다짐이 뭐였는지?

“모진 세상 연필깍이 삼아서, 뾰족한 글을 쓰겠다.”였다. 그렇게 글로 모진 부분을 하나씩 깍으며 둥글게 만들고 싶었다. 물론 연필은 늘 부러진다. 아마 계속 부러질거다. 그래도 부러지면 깎으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잘 못지 킬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일이 다가오면, 그때 다짐을 더욱 기억하자고 생각한다.

Q. 생일이어서 물어보지만, 세월호 이후 생일을 맞이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나?

몇 년간은 생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생일보다는 세월호가 더 컸다. 생일보다는 누군가의 기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누군가의 생일은 항상 누군가의 기일이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상을 떠난 건, 세월호에 있던 사람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병원에서, 가정에서 사고로, 병으로, 혹은 스스로 눈을 감는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지금도 누군가는 병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언론에 나오지 않는 사고가 많다. 그 안에 다친 사람과 장애를 입는 사람도 많다. 그 모든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식이 태어나는 날 부모는 세상을 가진 것 같다고 느낀다고 한다. 그런 소중한 날이 죄책감으로 물들어선 안 된다. 유족도 그걸 바라진 않을 거다. 기뻐할 건 기뻐하고, 기억할 건 기억하면 된다.

출처 : 위키백과

Q.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한다. 어떻게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사고 자체만 기억해선 안 된다. 우리에게 참사가 있었다, 그 참사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304명이다, 구조 과정에서도 순직한 분들이 있다, 참사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했다, 진도 팽목항에서 배가 좌초됐다, 이건 기억이 아니다. 사건 기록이지. 

이걸 기억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머리에 있다고해서 기억이 되는 건 아니다. 참사로 기억해야 하는 건,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고, 왜 그런 감정이 들었고, 또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뀐다. 10주기에는 10년 전 내가 세월호 참사에서 느낀 게 무엇이고,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 돌아보고 그 감정과 다짐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세월호를 통해 기억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 질문으로 이번 생일은 뭘 할 건지

아직 계획은 없다. 파티를 하진 않을 거다. (웃음) 그래도 즐기면서 보낼 거다. 내 생일 4월 16일이 누군가에겐 슬픈 날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날이다. 내가 태어난 날이자, 지금의 내 모습이 있게 해 준 날이다. 아까 답변한 대로 기뻐할 건 기뻐해야 한다. 내 생일 4월 16일을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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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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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콘텐츠들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회적 참사를 제대로 짚으려면 참사가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는 게 필요하다는 걸 읽으면서 많이 떠올렸네요. 세월호 참사가 직업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개인의 삶을 바꾼 경우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사고 자체만 기억하는 것은 사건에 대한 기록을 기억하는 것일 뿐이며,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단순 사건 기록이 아닌 ‘힘께 기억’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걸 짚어주셨네요. 생일인 4월16일을 어떤 마음으로 지나오셨을지 상상해봅니다. 4월16일이 ‘참사가 일어난 날’로만 멈춰있지 않도록 시민들이 함께 더 안전한사회를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이걸 기억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머리로만 .. 숫자로만 이 아닌 그날의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 같아서 ... 옮겨 봅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