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이야기] 청소년인권 관점의 교사가 되지 못했어요
청소년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십대 시절, 어린 건 이용해볼만한 소재였다. 나이주의와 청소년혐오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서도 그걸 이용하려고 했으니 어찌 보면 영악한 편이었다. 열일곱 살이니까, 뒤로 물러서도 괜찮겠지. 이럴 땐 하고 싶은 걸 내세워도 괜찮겠지. 좀 시무룩해지면 내 말 들어주겠지? 아방하게 굴면 뭐라고 못하겠지. 적어도 스물 셋 넘은 어른들은 아이에게 약해서 난 좀 더 무책임할 수 있었다. 나이주의를 공부한 반골 십대가 자기 편하자고 나이주의를 역이용한 셈이었다. 정작 청소년 인권 활동가 동료들 사이에선 누굴 어리다고 특별대우 해주는 건 없었다. 걔넨 나이주의에 찬성하지 않았고, 열넷이고 스물셋이고 우린 모두 대등한 "야"였으니까. 그땐 또 소심하고 여성적인 내 특징을 내세워 뒤로 숨었던 적 많았다. 그래도 어린 게 무기일 순 없었으니 조금 덜 바보인 척 했다. 그러더니 엉겁결에 20대가 되었다. 또 덜컥 2년 전엔 중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어버렸다. 십대를 '아이'라거나 계도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한 형편 없는 교사 말이다. 지금도 친구들과 부모님, 스승들, 그리고 청소년이 연령에 따라서 달리 보이지 않는다. 뭔가 다르다면, 경험의 축적이 다를 것이다. 그들은 나처럼 능수능란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못하겠지만 단순 경험의 차이일 뿐. 다 같은 사람인지라. 결국 나이가 아니라 상황과 경험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당위적으로는 '아이'나 '어른'의 딱지를 떼고 서로 사람 취급하는 게 존중일 것이다. 난 열아홉 살 때까지도 서너 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린 걸로 묻어가겠다는 게으른 심보였다. 이런 날 너무 매정하고 대등하게 대해준 어느 연장자 덕분에, 무안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후론 예전처럼 나이빨로 설렁설렁 지낼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제대로 존중받았고, 온전한 사람으로서 엄격하게 평가당했다. 자기가 미숙하다는 통념을 지닌 십대들이 교사인 나에게 어리광을 부릴 때가 잦았다. 그들은 사람으로 구실하는 대신 청소년의 역할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상대역인 내가 더 큰 '어른'으로 굴어줘야 짝이 맞아보였다. 상황이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형성해온 것이다. '애들'은 스스로 지혜로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돌봄을 받기만 하며 미래를 유예하는 위치에 머물게 되어 있었다. 뻔히 있는 길을 편하게 갈 수 없는 난 당시에도 사잇길을 찾아서 고생을 자처했다. 이들이 '교사-아이'의 역할에 의문을 품는 과정에 동행해보자고. 갇힌 틀에서 나오는 건 그들 자신의 의무이겠지만, 교사인 내가 망치질 정도는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배움을 위한 타인의 역할은 조력과 촉진일 것이라며. 난 그럴싸한 교사로서 이렇게나 실격이었다. 넓고 무거운 등으로 필요한 권위를 짊어질 수도 있었는데, 그건 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난 교사 대 학생이 아닌 새로운 관계양식을 함께 맺어나가는 가르침만을 지향하고 있었다. 예전에 만난 연장자가 그랬던 것처럼, 대등하게 존중하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이 가르침은 어느 정도 실패했다. 관계는 상호 맺는 건데 나 혼자 선구자처럼 새로운 관계양식을 보여준다는 건 일방적이고 모순적이었으니까. 더구나 학교는 교사의 권위와 학생의 수동성으로 굴러가기에 그로부터 벗어나는 건 근본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상대에게 의아함만 선사한 듯했고, 그들은 틀을 깨고자 하는 의지와 당위가 없었다. 모범생같은 두 눈, 교사의 말을 들으면 좋은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과 행동들... 그런 반응은 어느 정도 무력감을 불러일으켰다. 내 권위와 명령을 기다리는 어느 청소년들의 태도 앞에서 슬기로운 제3의 제안같은 걸 떠올리지 못했다. 내가 조각해온 존중의 형태를 낙관적으로 확산하고 싶었지만 교사로 지낸 기간 동안 희망을 다소 접었다. 그래도 존중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다. 단지 나의 영향력은 좁은 곳에서 내밀하게 이뤄질 때야 온전할 수 있다고 다시금 확인했을 뿐이다. 이것은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내 뜻이, 여러 곳에서 자꾸만 접히는 것을 또 목격했던 실패 이야기다. 그래도 난...난, 다시 한번 내밀하고 찌릿한 소통을 찾으려고 한다. 내일도 나이가 많고 적은 이들의 눈을 보고 대화를 청하려고 한다.
교육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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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할 때 단정하는 말에 얽힌 고민과 책임감
각각의 주장들은 어느 정도 옳은 경향이 있고 나름대로 그럴싸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전제로 주장을 다툰다.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단 하나만이 완벽한 진리가 아니고, 오직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을 뿐이라는 전제야말로 가장 낮은 층위에서 동의받는다. 공론장에는 오직 무엇이 좀 더 나은 주장인가를 다투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정답이 아닌 나은 답을 위해 설득하고, 정치하고, 때때로 강하고 확실한 표현도 등장한다. 간혹 사려깊기 위해서 서로 상충하는 주장들에 각각의 사정을 살피는 발언도 나온다. 그것은 사려깊고, 그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핵심에서 빗겨나가며 책임감이 있지는 않다고 본다. 사실은 공론장의 많은 사람들이 주장을 망설이고 있고, 확언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길을 찾으려 노력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알면서도 자기 주장을 명확한 표현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책임감이다. 두려움을 무릅쓰는 용기이고, 골치 아픈 고민의 흔적이다. 반대로, 다른 주장을 사려깊게 이해하고 특히 '맥락을 보살피는' 식의 태도는, 모든 진실을 포섭하고 싶은 부적절한 욕심일 수도 있다. 다른 주장이 더 정교하게 형성되고 이해받는 것은 그 다른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다. 자신은 다른 것을 이해하는 일보다는, 자기의 주장을 더 구체적으로 밀어붙이는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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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의'하기 전에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 "한국의 대화" 참여 후기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삶의 현장이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현장을 바탕으로 자기 몸에 맞는 주장을 찾아간다. 그렇게 나의 주장에 집중하다 보면, 남이 애써 찾은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다른 것에 동의하거나 비동의하기 이전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동의'는 가끔 어불성설이다. 나의 주장이 있으나 타인의 주장에 대한 입장은 없을 때, 가끔은 자신이 남의 것에 비동의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섣불리 입장을 확정짓기 전 남의 주장을 일단 이해하려면 내 것만큼이나 무거운 그 사람의 현장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대화는 어느 정도 필요한 방법이다. 지난 9월 23일,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에서 한겨레가 주최하고 사회적협동조합 빠띠가 주관한 “한국의 대화” 행사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주장이 다른 사람과 적대감을 벗고 서로를 이해해보는 1:1 대화 프로그램이었다. 나와 대화파트너는 “동성 간의 혼인 또는 친구와의 가족구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구성자유를 보장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정 반대의 주장을 다뤘다. 세 아이를 둔 그는 ‘정상적인’ 가족을 이뤄 살아가는 삶을 ‘수준 높은 행복’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매일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약간은 지루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서로 동의했다. 다만 그 사람은 가족적인 중년의 삶을 살며 내게 없는 지혜를 터득한 사람 같았다. 나는 대화파트너에게 지금 가족과 안정적이고 즐거운지 물었다. 그는 모든 날이 즐겁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러하다고 답했다. 물어보지 않은 가족 간에 소소한 일화와 걱정, 그리고 뿌듯함을 생생한 표정으로 설명해주기도 했다. 격식과 예의를 갖추던 그가 툭 건드리면 팡 터져나오는 웃음처럼 잠깐은 영락없이 서글서글해졌다. 반면에 나와 젊은 친구들은, 한 이불을 펴고 누워서 우리 가족이 되자고, 서로 돌보며 살아가자고 유별난 꿈을 꾼다. 비록 구체적인 결심은 아닐지라도 우린 가끔 제3의 가족이 되기를 상상한다. 각자의 집에서 복합적인 고통 때문에 밤에 소리 없이 울지만, 아침엔 퉁퉁 부은 눈으로 부모님께 시치미를 뚝 뗀다. 그러고서 도피처를 찾기 위해 끼리끼리 모여서 또 우리 가족이 되자고, 우리 가족이 되자고 한다. 1:1 대화에서 그와 나는 서로 세상을 감각하는 피부가 왜 이렇게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체로 ‘수준 높은 행복’ 속에 사는 그에게, 나는 하루가 다르게 전쟁과 재난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안정적인 삶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래를 설계해도 세상이 당연하고 단순하게 망할 것 같다고. 이 느리고 익숙한 절망 속에서 사느라고, 규범적인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나와 친구들은 점점 불안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되어가서, 아무렇게나 다양한 가족을 만드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건 동의하거나 비동의할 화두조차도 되지 않아요." 대화파트너는 올곧게 “다양한 가족구성은 사회분위기상 알맞지 않고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쩌면 모든 실험적인 생각이 가능한 아수라같은 현장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수긍하곤 했다. 나 또한 평범한 가정을 책임지는 기혼 중년의 삶에는 그만의 지키고 싶은 견고한 현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회통념을 여전히 믿고 지키는 그의 단단한 세계관은, 한이 흘러넘치지만 마지막엔 세상을 낙관하는 서민적인 영화와 같은 모습일까? 한 번의 대화는커녕 천 번의 대화에서도 우리 서로를 아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단 중요한 것은 타인의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이해의 태도라 여기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주장의 경합에서 더 옳은 주장을 지지하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있는 한편, 처음 주장을 제기하는 시민 공론장의 역할은 수용력과 환대를 갖추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주장을 지닌 남을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환대하는 공론장이 유행하면 누구나 낯선 사람을 공공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공간에서 길거리를 걷고, 소개팅을 하고, 길을 알려주며, 술집에서 합석을 한다고 생각해본다. 낯선 이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세상보다, 사람이 사람에게 작은 믿음과 작은 호의를, 작은 괜찮음을 느끼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그래서 다시, 남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환대의 공론장을 꿈꾸어 본다. 👉 <한국의대화>행사 안내  👉 관련 기사  [한겨레] 68살·32살 대화 실험…생각 바꾸진 못해도 이해는 되네  [한겨레] 생각 다른 23쌍의 1대1 대화…세상 바꿀 실마리 될 수 있을까 <한국의대화>의 상세한 내용과 결과는 오는 10월 11일 제 14회 아시아미래포럼 분과세션2 한국의대화 Korea Talk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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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궁금해"라는 상투적인 말에 대하여
이해는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을 맥락적으로 공감하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넓은 범주에 있다. 이해는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감각하고 어떤 외로움 안에 사는지 통틀어 삶의 체계를 밝혀내는 일이다. 공감, 다정함, 친절함 같은 기술로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피상적으로 '긍정적인' 교감은 온기를 나눌 수 있을지언정 누군갈 이해하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이 가능한데, 이건 정성을 쏟아야만 가능한 게 아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정 전이가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연스러운 공감보다 더 깊숙한, 이해를 하려거든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엔 귀찮게 집중하지 않아도, 속절없이 노력하게 만드는 열망이 있을 것이다. 그걸 난 사랑이라고 안다. 사랑해서 이해를 하고 싶어지면, 그 사람의 언어는 얼마나 고립되어 외로운지, 그 사람은 어떨 때 나랑 있어도 혼자인 것 같은지, 슬픈 얘기를 웃으면서 하는 그가 무얼 기만하고 있는지, 모든 걸 말하지 않는 그의 속셈은 무엇인지, 밝은 눈으로 찾게 된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 사람이 궁금해" 그 사람이 궁금하다는 말은 낡고 떼가 타서 진부함으로 훼손됐지만, 사실은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서로 다른 독특함이 있다. 단 하나뿐인 삶을 단 하나뿐인 그와의 관계 속에서, 알고 싶다는 거니까. 정확한 언어를 찾지 못한 이들이 이 특별한 노력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렇게 에둘러 말을 한다. 나도 사람을 사랑하면, 그의 도서관에 쌓인 백만스물한가지의 책을 계속 계속 읽고 싶다. 조금 과해지면 내가 이해한 저 이의 세계관이 마침내 나의 세계관을 이해하여 접점을 만들기를 소망하게 된다. 혼자만의 기대에 타인을 끌어들이는 이 소망을 경계하며, 다만 오직 내가 그를 이해하고자 한다. 우정과 구분되는 내 깊숙한 사랑은 이런 것이다. 사랑이 깨지면,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어진다. 그땐 그저 우정이 된다. 내가 하는 사랑이, 잘 언어화되지 않아서 감히 "친구들을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라고 쉽게 말해왔었다.  이제는 특별한 소수에게만 써온 내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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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No만 정답인가요? - 섹스의 진부화된 의사소통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다시 구성하기
으레 페미니즘은 당위적인 성평등으로 쉽게 일컬어진다. 그럴싸하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달라야 한다. 그것은 이 얘기의 첫 문장을 확장하는 데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 여성이 마땅히 존중받는 조짐이나 분위기를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페미니즘 학문에 박식한지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말 수가 적고 비교적 덜 마초적인 남성이 페미니즘의 감수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습득한 페미니즘적인 배움은 천대받던 '여성적' 공감과 이해 능력을 재해석하고, 감정의 중요함을 밝혀내는 일이며, 이러한 공감능력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일컬어 덕목으로 부르기였다. 감정은 의외로 개인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다. 전희경, 마사 누스바움,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감정이 지니는 정치적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약자가 억압이나 차별에 직면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무능력일 뿐이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139쪽 "문학(적 상상력에 깃든 공감과 연민 등의 감정)은 삶의 부박함과 인간의 비속함에 맞서 어떻게 생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는지, 비통하고 억울한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를 되돌려 줄 수 있는지 등을 묻는다. 문학은 본디 시대의 총체에 관여하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우리는 어떤 변화도 꿈꾸기 어렵다. 문학은 폐허가 된 이 세계에서 인간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아 탐사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과 현상들 너머엔 복잡하고 신비로운 삶의 진실이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실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진을 치고서 구체적 삶의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입체적으로 탐색하고, 생명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66-67쪽 "감정의 부재는 합리성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조장하지도 않는다.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상'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감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101쪽 구체적 삶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탐색하면, 마침내 단일한 상황에서 인간 감정의 정동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섹스의 조짐을 마주친 여성들은 마음 속으로 각자의 혼돈을 겪는다. 그럼에도 자기와 불화하는 '단순한 (부)동의'를 명확하게 결정할 것을 강요당한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예스 means 예스", "노 means 노"라는 명료한 정치적 구호로 가시화될 수 있었지만, 진실은 이 결정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순탄히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적자기결정권 담론이 띄워진 이후 많은 여성들이 사뭇 찜찜한 채 명확한 (부)동의 표현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내몰렸다. 정확한 의사표현만이 자신의 주체성과 권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혼동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함에 "예"를 던져놓고 왠지 불안한 섹스를 한 여성들이 있다. 막연히 급한 것 같은 예감에 "아니오"를 말하고 내심 아쉬워하는 여자들이 있고, 이들은 자기모순에 혼란스러워도 한다. 결정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기 이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결정의 지난한 과정이 보호받을 권리였을 것이다. 언제나 변화하는 마음가짐과 속도에 따라서, 결정과정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갈 기회가 여성에게 구조적으로 주어졌어야 했다. 섹스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순간에 사람은 명확하고 단순한 "예"와 "아니오"를 발설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유부단한 마음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이다. 주저하는 건 한낱 회피일 뿐이고 모든 것에 명확한 답을 내리는 자세만이 정정당당하다는, 기존의 남성적 도덕으로는 페미니즘의 감수성에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예"와 "아니오"라는 최종적인 대답을 듣고 반응하는 것을 상호간 좋은 소통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침묵과 더듬대는 말씨, 떨리는 눈동자와 시선의 외면과 두루뭉술한 문장을 포함한 모든 반응에 상호작용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감수성을 갖춘 더 효과적이고 나은 소통이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 그 불확실하고 지지부진한 과정 속에서, 섹스를 하고 싶으면서 하고 싶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섹스가 아닌 대안적인 애무로 이 사이를 초대하고 싶은 욕망도 성실히 검토한다. 때로는 마주보는 것만으로 멈추고 싶어하며, 어떤 이는 BDSM적인 사이를 원하지만 스스로 비밀스러워 어떤 대답도 주저한다는 가능성도 훤히 열어젖힌다. 그 은밀한 언어적, 비언어적인 조짐을, 우리는 기다리고 눈치챔으로써 성적으로 자기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더욱 더 밀접해진다. 그리고 다른 어느 관계의 도식이 아닌 우리 서로의 관계에서, 가장 알맞은 속도와 방식으로 상호 동의된 섹스를 향하여 수렴한다. 결국 모든 것은, 남성적으로 부패하여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과정이다. 상대의 진짜 의사를 살피다보면, 상투적이고 강압적이고 무책임한 도덕주의적 언어로부터 멀리 떠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그렇게 우리는 감각을 활짝 열고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만난다. 차츰 더 정직한 성적 이해를 꿰어나가게 된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섹스를 하지 않을 때에도 관계의 조짐이 달라지는 수많은 경우들을 본다. 이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섹스는 사실상 인간관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관계를 위한 실천에 더 좋은 섹스를 위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고, 그것은 진부화된 언어와 멀어지는 것과 상통한다. 예컨대 누군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특정한 비주류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를 마주한 상대방으로서 그의 비주류성에 관해 소통할 때에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상대의 궁극적인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비법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비주류성을 지닌 자에게 진부한 언어는 익숙한 절망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페미니즘과 퀴어성, 우울을 고루 아는 사람들이라면, “우울”과 “퀴어성”을 호명하는 오염된 언어 때문에 자길 설명할 길을 잃고 고독해진다. 쉽고 진부하고 얄팍해진 언어는 그들 앞에서 힘이 없거니와, 오히려 인간을 고독 속으로 넣는 뜻밖의 힘을 낸다. 이에 그의 단일한 맥락과 외로움에 좀 더 뾰족하게 접근하는 언어를 써야지,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공감이 가능하다. 페미니즘의 감수성은, ‘언어-느낌-인식’으로 이루어진 고루한 패턴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고유한 감정을 설명하지 못해 머리 찧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평범하고 보편적인 언어에 대항하는 이해방식이다. 그렇게 보통의 억압적인 섹스가 아닌 주체적인 섹스를 설계해나갈 수 있다. 그동안 "예"와 "아니오" 또는 어떤 도식화된 말로는 풀어낼 수 없었던 여성의 정동을 페미니즘의 감수성으로 들춰내면 된다. 요지는 상대의 동의와 거부를 최종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과정을 함께 밟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여성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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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대 여돌, 알맹이 없는 새로움과 주체성
온갖 군데 아이돌이다. 굳이 찾아야 보일까. 검색하지 않아도 여러 앱에서 유저들이 옮겨 오는 아이돌 영상 때문에 머리가 시끄럽다. 하루는 릴스를 넘기다가 생각했다. 뉴진스와 르세라핌이 매체를 점령한 세상에서, 여자들이 자신을 긍정할 수가 있겠느냐고. 그들의 어림과 아름다움, 'fearless'라는 당당함까지 평범한 사람들과 가까운 건 없다. 아이돌 즉 우상이라는 의미답게 그들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보여준다. 너무 완벽한 아이돌이 사방 천지인 세상이라, 모자란 나 자신도 사랑해주기는 더욱 팍팍하지 않겠는가. 유료로 팬덤에 가입한 팬들에겐 아이돌의 더 내밀하고 자연스러운 면을 보여준다. 가까워지고 싶고, 닮고 싶고, 그러나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애타는 팬들의 관심이 아이돌을 밝힌다. 감질맛이 날 따름이다. 여자 아이돌에게 여성 팬(일명 여덕)이 많다는 건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4세대 걸그룹 아이브의 싱글 3집 ‘After LIKE’ 앨범 구매자의 73.6%가 여성이다. 뉴진스의 ‘New Jeans’ 앨범 구매자 중 여성 비율은 82%가 넘는다. 20대 여성(29.3%)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10대 여성(27.5%)이 그 뒤를 잇는다. (시사저널, 2022.10.08.) 이렇게 많은 여덕들이 여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데, 나라고 싫을 리 있겠는가. 필자는 르세라핌의 데뷔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The World Is My Oyster'를 보고, 이 다섯멤버가 멋있어서 호감이 생겼다. 하지만 동시에, 4세대 여돌들이 내세우는 새로움, 주체성이란 메세지가 공허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여러분도 공감할 수 있을까? 1. 새로움? 개성 강한 걸그룹들이 여성들의 워너비로 자리매김 했다. 범람하는 4세대 여돌이 각자의 생존전략을 찾았는지,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다. 대세 걸그룹들이 각자 다른 '멋쁨'으로 덕후몰이를 하는 중이다. 뉴진스는 데뷔곡 "Attention"과 "Hype Boy"로 인기를 끌었다. 서양, 백인, 상류층, 10대 소녀가 연상되는 뮤직비디오로, 서구에 대한 동경을 유발하는 전략이 다소 진하게 묻어난다. 데뷔곡 세 번째 타이틀 "Cookie"는, 좀 다사다난한 사연이 있다. 가사 중에 미성년자 멤버들을 성적대상화했다는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소속사 어도어는 반박입장문을 내어 "건강함"과 "새로움"을 보여주려 했다며 호소했다. 입장문 말미엔 비판하는 팬들에게 "억지 주장"이라며, "미성년자에 대한 보호를 방패로 자신들의 목적을 포장한다"고 매섭게 겨냥했다. (엑스포츠뉴스, 2022.08.27.) 다음 컴백 타이틀곡인 "OMG"의 뮤직비디오는, 트위터의 비판적인 돌덕을 정신질환자로 묘사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또 한 번 논란이 일었다. 필자는 "Cookie"의 미성년자 성적 대상화 논란에, 결론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소속사를 비판하기에 앞서, 따져볼 논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입장문에 따르면 음악적 방향성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곡이라고 하지만, 나는 설령 그것에 성적대상화 의도가 있었더라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소녀들은 성적인 폭력에 가장 취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맥락을 따지길 바란다. 미성년자는 무성적 존재가 아니고, 보호주의적 잣대에 반대하여 성적 표현을 할 수 있다. 갑을관계에 있는 소속사와 소속 아티스트가 성적인 컨셉트를 평등하게 합의했는지가 중요하다(이 역시 첨예한 문제다). 그러니 소속사가 미성년자를 이용해 성적대상화를 의도했다는 주장은 너무 거칠다. 개별 주체로서의 아이돌 멤버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기에, 섣부르다.) 그러나 논란이 억울할지라도, 팬들을 뮤직비디오에서 정신질환자로 낙인한 건 시대에서 굉장히 퇴보한 선택이었다. 사실, 뉴진스에 대한 그동안의 비판은 여덕의 페미니즘에서 기인한 것이다. 소속사는 커진 비판들을 어느 지점에서 수용해야 하고 때로는 반려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대신 비판하는 덕후들을 '프로불편러'로 무시해버리는 간편한 태도를 취했다. 페미니즘이면 불손한 '목적'이 있고 '억지 주장'이라는 식은, 새로움을 밀고 나가던 뉴진스의 행보와는 상반되게 김 새는 꼴이다. 뉴진스가 4세대 여자 아이돌의 대표주자라는 점에서 더욱 실망스럽다. 2. 주체성? 여덕을 사로잡기 위한 색다른 콘셉트가 잇다르면서, 걸그룹 선정성 논란은 근 5년간 꽤 줄었다. 요즘에서야 섹시 콘셉트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럼에도 매 컴백마다 여돌들을 괴롭히는 구설수가 있다면, 몸매다. 걸그룹에 대한 몸매평가(몸평)가 끊이지 않는다. (몸평을 재확산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는 들지 않겠다.) 어떤 소비층이 몸평 여론을 형성하는지 구체적인 통계는 없으나 분명한 해로움은 있다. 걸그룹을 몸평할수록, 여돌을 좋아하는 여덕들에게도 몸평의 압박을 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매체를 통해 여돌을 향한 비난을 읽으면, 가슴 한켠에서 분노하는 한편, 위기의식을 느끼며 다시 꾸미도록 내몰린 여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제 외모코르셋은 언급하기도 입 아픈 단어가 되어버렸는데, 탈코(탈코르셋)가 발전하긴커녕 그것을 과거의 산물로 만들고 시대는 역행한다. 여돌의 젠더수행과 관음하는 이들의 몸평이, 주체적인 여성의 가면을 쓰고 아닌 척 은밀하게 백래시를 공모한다. 4세대 걸그룹이 자부하는 여성성이란 예전처럼 애교있고, 수동적이고, 섹시한 모습인 건 아니다. 오히려 여성의 주체성을 내세웠다는 마케팅이 지천을 도사린다. 하지만 여전히 걸그룹을 통해 여성은 더 아름답고 보기 좋은 상품으로서 가치있어진다. 계속해 마르고 예뻐야 하는 젊은 여자들이, 잠깐 인터넷을 켜면 블랙핑크의 광고베너를 본다. 어딜 가나 블핑이 보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나는 아이돌 산업에 약간은 회의적인 편이다. 아이돌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존재라 그닥 달갑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행보가 적어도 덜 해롭게 계속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아이돌로부터 실제로 위로받고, 힘을 내고, 살아갈 동력을 갖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여돌은 가끔 여자들을 개인적으로 구원해준다. 나는 아이돌 산업이 초래하거나 악화시키는 구조적인 문제와 별개로 이런 개인적인 구원을 소중히 하고 싶다. 아이돌이 스타로서 여전히 존재하되, 점점 '덜' 유독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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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민생’이 다치고 아프니까 : 민생입법과제에 장애인국가책임제법
이미지 출처 : @pixabay 꽃동네를 아시나요 ‘건장한’ 몸으로 기독교 미션스쿨을 다닌 사람이라면, 아마 찾아간 적 있을 것이다, 장애인시설 ‘꽃동네’. 나는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 전교생과 버스를 타고 꽃동네에 갔다. 아무렴 ‘봉사’는 너무 ‘착한’ 말이었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학생으로서 너무 ‘나대는’ 짓인 것 같아 어떤 섬짓함을 속으로 삭였다. 비장애인인 내가 봉사자로서 장애인과 ‘대화’하고 식사를 돕고 잡일을 ‘체험’하도록 기획된 이 활동에 감사하기보단 오히려 죄스러워 고개가 숙여지는 마음이었다. 일과가 끝난 저녁엔 강당에 모여서 꽃동네의 철학과 정신에 대해 들었다. 이곳에서 평생 살다 돌아가신 어느 장애인의 나눔과 섬김을 수녀님의 입을 통해 강의받았다. 그러나 다양한 몸을 가진 꽃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들을 수 없었다. 오직 꽃동네를 운영하는 수녀님들께서 우리를 강당에 모아 이곳의 좋음을 알려주셨으니, 내가 가진 정보는 꽤 불균등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꽃동네에 관하여 기억하는 어렴풋한 내용이다. 소화하지 못한 찜찜함을 남기고 꽃동네 ‘봉사’활동을 마쳤다. 그땐 시혜적인 만남이 배움은 아니란 생각뿐이어서 우리 학교의 방향성에만 툴툴대었다. 그런데 지난 8월 31일, 더불어민주당이 ‘정기국회 22대 민생입법과제’ 중 하나로 선정한 ‘장애인국가책임제법’을 살펴보다 장애계가 꽃동네를 비판하는 더 넓고 정확한 입장을 알게 됐다. “꽃동네는, 장애인수용시설로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위배된다.”   장애인국가책임제법에 포함된 세부 법안은 6가지이다. (더인디고 2022.9.1.) ▲(장애인 평생교육기관 설치, 장애인평생교육사 양성 등) 장애인평생교육법 ▲(장애인고등교육센터 설치 등)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청각장애인 정보 접근 확보 등) 장애인복지법 ▲(교통약자 서비스에 대한 운전자 교육 등)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 ▲(장애인전용주차구역 의무화 등) 공간정보의 구축 및 관리법 ▲(탈시설지원기관 설치 및 운영 등)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에서는 제안 이유로 "장애인에 대한 시설보호는 장애인을 지역사회로부터 분리된 채 획일화되고 집단적인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서도, 탈시설-자립생활 권리를 장애인의 기본적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아무리 따뜻하고 '착한' 시설에 거주한다한들 장애인이 선택하여 탈시설하고 자립할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협약 제19조는 “이 협약의 당사국은 모든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선택을 통하여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협약 일반논평 5는 “백 명 이상이 거주하는 대규모 시설도, 5~8명이 사는 작은 그룹홈도, 심지어는 혼자 사는 집도 시설 또는 시설화의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면 자립적 주거 형태로 볼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비마이너 2022.8.16.) 그런데 꽃동네를 비롯한 장애인수용시설은 거주자가 밖에 나갈 수 없는 시설 속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다양한 선택과 개성의 주체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여 지역사회와 분리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니 현실적인 대책과 지원체계를 마련한 탈시설을 정치의 중요한 과제로 삼을 필요 있다.   인간이 원래 다치고 아프니까 현재 필자의 시간은 새벽 4시 24분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무엇으로 보내고 있을까. 누군가는 피곤한 단잠에 빠져서 고생할 내일을 까맣게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어깨가 들쑤셔 잠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고 있을지도, 그리고 누군가는 미친 우울감에 포효하며 이불을 쥐어뜯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뼈저린 신체의 고통으로 이젠 하루를 그만 나고 싶다고 신에게 애원할 것이다. 나이 든 가족을 둔 사람이라면 아마 지켜봐왔을 장면들이다.   다치고, 미치고, 아픈 우리는 각자의 몸에 맞는 ‘하자’를 갖고 산다. 신체적인 지병이 아니더라도 상시적인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시민이 더러 있다. 먹거리로, 수면부족으로, 성장에 대한 압박으로 병을 주는 시대에 무언가 앓고 있지 않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픈 것이다. 내 눈엔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은 건강함이야말로 기이한 ‘증상’이 되어버리는 독한 세상이다. 이처럼 다들 각자의 몸에 맞는 '비정상성'과 아픔을 갖고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장애와 시설의 감각을 모른 채, 자신을 비정상성으로부터 분리하고 '하자 없는' 몸인 듯이 살아간다. 나이가 들고 병이 깊어져 요양병원에 맡겨질 날이 찾아와서야, 간신히 아픈 몸의 감각과 시설에 갇히는 불안함을 떠올린다. 사실은 누구나 항시 병들 가질 가능성이 있는 개체다. 그 가능성을 지금의 나로부터 분리하고 탈시설과 장애의 문제를 멀리하는 것보다는, 모두를 위한 시의적인 과제로 다루는 것이 더 공익적일 것이다. 인간의 신체로는 살면서 여러 번 장애와의 교차점을 지난다. 온 평생 장애의 길을 달리는 사람과, 장애와의 교차점만을 스치는 사람은 분명 다른 감각에서 살겠지만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모든 인간이 이해하는 아픈 몸과 장애와 시설이 만나는 교차점만이, 장애와 비장애의 극명한 경계를 흐리고 장애를 사회 안으로 들여 이해해 나가는 열쇠가 된다. ‘장애인국가책임제’는 ‘민생’입법과제에 포함된 것이다. 이제 장애인의 권리 향상이 보편적인 서민들의 더 나은 삶(즉 민생)과 연결된다는 감수성에 이르렀다. 아픔은 우리가 함께하는 재료로 쓰이고, 이 감수성으로 옳음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장애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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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겁’, 따분해진 전쟁… 다시 겁먹기를 바라며
“무서워”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침략당했을 때, 뉴스를 보고 “무서워”라고 했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친언니가 그랬고, 카톡을 하던 친구가 그랬다. 적어도 그 직후에는, “안타까워”라는 표현은 듣지 못했다. 현장 사람들의 절박함과 거리를 두는 ‘안타까움’보다는 당장의 ‘무서움’이 앞섰던 것이다. 러시아 씩이나 되는 강대국이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건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줄만큼 두려운 사안이었으니.   지금까지도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는 온라인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책방이음) 민간 단위의 반전 운동이 미처 나의 정보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도 형형히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침공당한지 반 년이 넘은 현재의 소식이다. 한편,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지는 어느덧 일 년 반이 됐다. 홍콩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폭력을 우리는 공중파 뉴스에서 목격해왔다. 헤드라인 위에 ‘전쟁’과 ‘인권침해’, ‘민간인 학살’… 이라 적힌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제는 좀 태연해 보인다. 전반적으로 ‘무심해진’ 분위기가 퍼져있다. 관심이 미비해진 건 이 소식에 ‘질려’있기 때문이다. 홍콩도, 미얀마도, 물리고 식상해진 소식이 되어버렸다.   고립은 비밀리에 벌어지지 않았다. 온 세상이 알고 있는 비극이 고립된다는 것, 이런 '앎'은 때로는 몰랐을 시절만큼도 못한 비관을 발 딛게 한다. 아무도 모를 때는, 적어도 누군가 알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으나 앎 속에서 고립되면 희망의 경로를 뚫기 어렵다. 이미 알았고, 따분해졌으므로, 절망적인 걸까? 나는 여기에 앎의 일각이 아닌 전체를 재구성하자는 생각을 던져본다. 지금은 대상과 거리를 전제하고 상황을 ‘관조’하는 앎이 전체인 양 퍼져있다. 그러나 얼음은 만져야 차갑고, 송곳엔 찔려야 아프다. 즉 거리를 좁혀 대상과 닿을수록 기존에 관조하던 ‘앎’의 일부는 소용이 없어진다. 피부로 깨달은 두꺼운 ‘앎’으로 대체될 뿐이다. 이에 반년 전 내 귀에 “무서워”라 들렸던 사람들의 진심을 다시 꺼낸다. “쯧쯧. 어떡해.”가 아니고, “불쌍하다.”가 아니고, “안타까워”도 아닌 “무서워”라는 실감 나는 겁을. 겁 먹던 자들은 전쟁을 하는 수 없이 멈춰야 한단 걸 피부로 알았다.   우리가 다시 겁먹기를 바란다 겁은 나약하다. 겁은 수동적이고 공격하지 않는다. 겁은 오히려 울고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리하여 당한 쪽이 ‘이기길’ 바란다거나 정권을 혁명적으로 갈아엎기를 응원하자고 제안하지는 않겠다. 그것도 승리의 한 방식이지만, 여기서는 겁과 슬픔과 공감으로 이뤄진 해방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전쟁 현장에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자국의 승패와 무관하게 자주 패배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다쳐서 돌아오고, 터전이 훼손되고, 이웃공동체가 망가진다. 승전국의 승리는 수많은 시민의 승리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를 위해 용맹하게 희생하는 ‘위인’보다, 무서워서 줄행랑치는 보통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죽고 죽이는 게 무섭고 우리 동네가 무너져서 슬픈 이들의 나약함이 바로 전쟁 없는 다음 사회의 가능성을 쥐고 있다.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저 보통의 두려움을 환기해보자. 비극의 식상함에서 벗어나자. 겁을 먹음으로써 당신도, 나도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자.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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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간 논쟁을 해요. 여성가족부 '전환'에 대해서-
윤석열 정부가 취임한지 네 달 째, 100일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동안 윤 정부가 해온 정책들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았는데요. 이번엔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여가부 폐지는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쭉 밀고 온 핵심 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국민들을 갈라세운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숙 장관에게 여가부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문하는 등 공약 이행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장관 본인 또한 그 목표를 긍정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입니다. 이 정책은 꾸준히 제기됐던 우려와 같이 국민을 갈라세우는 듯 보입니다. 지난 1월 7일 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일곱 글자의 공약 발표가 그 시발점이었죠. 해당 포스팅이 업로드된 날부터, 사람들은 '아! 남/녀가 또 싸우겠구나.'라고 벌써부터 예측가능한 근미래를 그렸을 것입니다. 윤 대통령의 '여가부 폐지' 공약은 실제로 시민을 갈라치기할 뿐더러,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사회에 대한 사고력마저 제약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다른 발전적인 논의는 제쳐둔 채 겨우 '남녀갈등'이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걸 밈으로 띄워 화젯거리로 만들었으니 모두 그 함정에서 벗어난 다른 사회상을 그려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여가부 수호 대 여가부 폐지', 그러니까 '페미니즘 대 반페미니즘' - 나아가 '이대남 대 이대녀'의 양단 중 택일하는 것만이 마치 정치적인 시민의 전부인 양 보입니다. 그 시야 안에서는 다른 생각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여가부 폐지 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원회 시절인 2008년에 공식화된 전적이 있습니다. 당시 존치하자는 결정이 내려지긴 했지만, 이처럼 여가부 폐지에 대한 논쟁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이에 페미니스트들은 구조적인 성차별을 해소하고 더 나은 성문화를 정착하기 위한 여성가족부의 존치를 십수년간 주장해왔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화두인 '남녀갈등'도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던 2015년부터 거론된 바 있습니다. 이 담론엔 페미니즘을 습득한 사람들이 불평등에 저항한 것마저 양성간 '갈등'으로 오도해버린다는 오류가 있지요. 7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오류는 되풀이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고 계속 여가부 폐지로 논쟁하며 '남녀갈등' 담론에 참여해야 할까요? 이 오래된 이슈를 점화하는 정부의 정치적 노림수에 하는 수 없이 휘둘리는 수밖에 없을까요? 그러기에는, 더 나아간 논쟁을 해야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진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페미니즘적인 위기 앞에 더 나아간 논쟁거리를 꾹 눌러두고 여성가족부를 존치하고자 노력하는 활동가들의 절실한 행동을 지지합니다. 이에 누가 될까 필자는 고양이 걸음처럼 조심스러운 심정이지만, 양단의 줄다리기에서 이겨야하는 당위성이 있는만큼 바깥에서 새로운 지대를 말해보는 움직임도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웅덩이에 돌을 던져봅니다. 윤석열 정부의 갈라치기에서 벗어나 봅니다. "여가부 '폐지 vs 존치'가 아닌 '전환'을 논해봅시다." 2001년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여성부가 출범했을 당시의 소임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멈추자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에는 여성가족부로 개편되면서, 여성과 가족이 함께 묶여 전통적인 성역할과 가족의 규범을 강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여가부는 정부부처 중 유일하게 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 소년소녀가장 등 사각지대에 있는 가족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왔고 각종 페미니즘 사업을 담당해왔습니다. 정권에 따라 적극성이 달라져 올해는 후퇴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지만, 한계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가족과 여성을 위해 기여해왔다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여성가족부의 또 다른 공식명칭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입니다. 여기서 괴리가 발생합니다. 'Gender(젠더)'와 'Equality(평등)'라는 두 용어는 단순히 '여성'과 '양성평등'이라는 말로 바꿔본다고 하여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젠더는 성별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아니고, 오히려 성별이분법으로 인해 나타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분석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양성'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폭력을 경험하지 않기를 도모하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도록 돕습니다. 이러니 '양성'을 이야기하는 여가부의 방침은 오히려 '젠더'에 반하기까지하는 처사입니다. 'Gender Equality'라 하였습니다. 여가부가 정권에 따라 '양성평등'과 '성평등' 표기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고(경향신문, 2022.05.23.)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젠더적인 관점으로 목표설정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2008년 처음으로 여가부 폐지가 정부에서 논해졌을 때, 이명박 전대통령은 "여성(가족)부는 여성 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부서"(한겨례, 2008.01.18.)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여가부 존치론자들이 "차별받는 여성의 권리를 되찾는 부서"라 반론하려 했다면, 이제는 한발짝 '전환'하면 좋겠습니다. 여가부란 모든 성차별적인 구조를 드러내고 '남성'이 아닌 '젠더'를 중심에 두는 부서여야 할 것입니다. 성평등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그동안 여가부와 젠더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쌓아왔습니다. 오늘날의 정치적 술수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여가부 폐지 반대'라는 단순한 주장으로 무너져내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여가부의 폐지도, 존치도 아닌, '전환'을 위한 더 많은 의견을 기대합니다.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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