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을 맥락적으로 공감하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넓은 범주에 있다. 이해는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감각하고 어떤 외로움 안에 사는지 통틀어 삶의 체계를 밝혀내는 일이다. 공감, 다정함, 친절함 같은 기술로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피상적으로 '긍정적인' 교감은 온기를 나눌 수 있을지언정 누군갈 이해하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이 가능한데, 이건 정성을 쏟아야만 가능한 게 아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정 전이가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연스러운 공감보다 더 깊숙한, 이해를 하려거든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엔 귀찮게 집중하지 않아도, 속절없이 노력하게 만드는 열망이 있을 것이다. 그걸 난 사랑이라고 안다. 사랑해서 이해를 하고 싶어지면, 그 사람의 언어는 얼마나 고립되어 외로운지, 그 사람은 어떨 때 나랑 있어도 혼자인 것 같은지, 슬픈 얘기를 웃으면서 하는 그가 무얼 기만하고 있는지, 모든 걸 말하지 않는 그의 속셈은 무엇인지, 밝은 눈으로 찾게 된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 사람이 궁금해"
그 사람이 궁금하다는 말은 낡고 떼가 타서 진부함으로 훼손됐지만, 사실은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서로 다른 독특함이 있다. 단 하나뿐인 삶을 단 하나뿐인 그와의 관계 속에서, 알고 싶다는 거니까. 정확한 언어를 찾지 못한 이들이 이 특별한 노력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렇게 에둘러 말을 한다.
나도 사람을 사랑하면, 그의 도서관에 쌓인 백만스물한가지의 책을 계속 계속 읽고 싶다. 조금 과해지면 내가 이해한 저 이의 세계관이 마침내 나의 세계관을 이해하여 접점을 만들기를 소망하게 된다. 혼자만의 기대에 타인을 끌어들이는 이 소망을 경계하며, 다만 오직 내가 그를 이해하고자 한다. 우정과 구분되는 내 깊숙한 사랑은 이런 것이다. 사랑이 깨지면,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어진다. 그땐 그저 우정이 된다. 내가 하는 사랑이, 잘 언어화되지 않아서 감히 "친구들을 사랑한다", "애인을 사랑한다"라고 쉽게 말해왔었다.
이제는 특별한 소수에게만 써온 내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다.
코멘트
6깊은 통찰력이십니다. 사랑과 우정이라는 단어로 확정적으로 구분 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반대는 아닌..), 그의 도서관에 쌓인 책들을 읽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의 구분에는 동감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책들을 읽고 싶어졌고 시도 했는데, 이제는 왜 그런 마음이 잘 들지 않는지..ㅎㅎ 주어진 삶에 치이고 있는 것일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