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삶의 현장이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현장을 바탕으로 자기 몸에 맞는 주장을 찾아간다. 그렇게 나의 주장에 집중하다 보면, 남이 애써 찾은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다른 것에 동의하거나 비동의하기 이전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동의'는 가끔 어불성설이다. 나의 주장이 있으나 타인의 주장에 대한 입장은 없을 때, 가끔은 자신이 남의 것에 비동의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섣불리 입장을 확정짓기 전 남의 주장을 일단 이해하려면 내 것만큼이나 무거운 그 사람의 현장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대화는 어느 정도 필요한 방법이다.
지난 9월 23일,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에서 한겨레가 주최하고 사회적협동조합 빠띠가 주관한 “한국의 대화” 행사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주장이 다른 사람과 적대감을 벗고 서로를 이해해보는 1:1 대화 프로그램이었다. 나와 대화파트너는 “동성 간의 혼인 또는 친구와의 가족구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구성자유를 보장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정 반대의 주장을 다뤘다. 세 아이를 둔 그는 ‘정상적인’ 가족을 이뤄 살아가는 삶을 ‘수준 높은 행복’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매일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약간은 지루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서로 동의했다. 다만 그 사람은 가족적인 중년의 삶을 살며 내게 없는 지혜를 터득한 사람 같았다.
나는 대화파트너에게 지금 가족과 안정적이고 즐거운지 물었다. 그는 모든 날이 즐겁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러하다고 답했다. 물어보지 않은 가족 간에 소소한 일화와 걱정, 그리고 뿌듯함을 생생한 표정으로 설명해주기도 했다. 격식과 예의를 갖추던 그가 툭 건드리면 팡 터져나오는 웃음처럼 잠깐은 영락없이 서글서글해졌다.
반면에 나와 젊은 친구들은, 한 이불을 펴고 누워서 우리 가족이 되자고, 서로 돌보며 살아가자고 유별난 꿈을 꾼다. 비록 구체적인 결심은 아닐지라도 우린 가끔 제3의 가족이 되기를 상상한다. 각자의 집에서 복합적인 고통 때문에 밤에 소리 없이 울지만, 아침엔 퉁퉁 부은 눈으로 부모님께 시치미를 뚝 뗀다. 그러고서 도피처를 찾기 위해 끼리끼리 모여서 또 우리 가족이 되자고, 우리 가족이 되자고 한다.
1:1 대화에서 그와 나는 서로 세상을 감각하는 피부가 왜 이렇게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체로 ‘수준 높은 행복’ 속에 사는 그에게, 나는 하루가 다르게 전쟁과 재난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안정적인 삶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래를 설계해도 세상이 당연하고 단순하게 망할 것 같다고. 이 느리고 익숙한 절망 속에서 사느라고, 규범적인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나와 친구들은 점점 불안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되어가서, 아무렇게나 다양한 가족을 만드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건 동의하거나 비동의할 화두조차도 되지 않아요."
대화파트너는 올곧게 “다양한 가족구성은 사회분위기상 알맞지 않고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쩌면 모든 실험적인 생각이 가능한 아수라같은 현장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수긍하곤 했다. 나 또한 평범한 가정을 책임지는 기혼 중년의 삶에는 그만의 지키고 싶은 견고한 현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회통념을 여전히 믿고 지키는 그의 단단한 세계관은, 한이 흘러넘치지만 마지막엔 세상을 낙관하는 서민적인 영화와 같은 모습일까? 한 번의 대화는커녕 천 번의 대화에서도 우리 서로를 아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단 중요한 것은 타인의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이해의 태도라 여기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주장의 경합에서 더 옳은 주장을 지지하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있는 한편, 처음 주장을 제기하는 시민 공론장의 역할은 수용력과 환대를 갖추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주장을 지닌 남을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환대하는 공론장이 유행하면 누구나 낯선 사람을 공공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공간에서 길거리를 걷고, 소개팅을 하고, 길을 알려주며, 술집에서 합석을 한다고 생각해본다. 낯선 이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세상보다, 사람이 사람에게 작은 믿음과 작은 호의를, 작은 괜찮음을 느끼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그래서 다시, 남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환대의 공론장을 꿈꾸어 본다.
👉 관련 기사
[한겨레] 68살·32살 대화 실험…생각 바꾸진 못해도 이해는 되네
[한겨레] 생각 다른 23쌍의 1대1 대화…세상 바꿀 실마리 될 수 있을까
<한국의대화>의 상세한 내용과 결과는 오는 10월 11일 제 14회 아시아미래포럼 분과세션2 한국의대화 Korea Talk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코멘트
4깊게 공감되는, 인상깊은 문장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주저없이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건 어쩌면 용기보다 이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후기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