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당신 곁의 성소수자 노동자가
[6411의 목소리] 당신 곁의 성소수자 노동자가 (2022-06-15) 지아(필명)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2022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회원들이 지난달 14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들머리에서 2022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기념대회 행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벌써 10년 전이네요. 면접을 보러 병원에 방문했던 날이 기억나요. 그때 저는 무릎을 덮는 단정한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었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원래 저는 치마나 하이힐과는 거리가 멀어요. 당시에도 바지 정장을 입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바지 정장을 보여달라는 나의 말에, 옷가게 점원이 다리에 흉터가 있냐고 묻더라고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바지 정장을 입은 여성 지원자는 강한 이미지라 면접관이 선호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었어요. 간호사가 되고 싶어 대학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했기에, 눈 꾹 감고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면접을 봤던 거죠. 한동안 그때 저의 모습이 부끄러웠어요. 제가 병원에서 선호하는 이미지를 수용했기에 최종 면접에 합격했다는 생각 때문에요. 성소수자 친구 중에는 이력서 사진이 여성(남성)답지 않아서, 면접에서 눈으로 보이는 성별과 서류에 적힌 성별이 달라서 번번이 취업 문턱에서 미끄러진 경우가 많거든요. 물론 회사에선 서류나 면접 탈락 사유를 알려주지 않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죠. 광고 병원에 입사하고 폭풍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아직 근무복도 익숙하지 않은데 환자가 쏟아지듯 배정됐거든요. 너무도 버거운데 환자 생각하라는 말만 하더군요. 조금이라도 힘들다는 티를 내면 저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는 반응이 돌아왔어요. 이에 여러 동료들이 ‘응사’ 하더라고요. 사직서도 내지 않고 도망치듯 퇴사하는 ‘응급 사직’이요. 저는 잠을 줄이고 밥을 먹지 않으면서까지 버텨냈어요. 그런데 회식은 힘들었어요. 회식에서 누가 저에게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어요. 남자친구는 없지만, 여자친구는 있는 저는 긴장해서 “있다”고 대답해버렸어요. 얼마나 만났는지, 남자친구 직업은 무엇인지, 질문이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지더군요. 대충 둘러대는데 머리가 아팠어요. 왜냐하면 한국은 이십대 여성과 남성의 인생주기가 살짝 다르거든요. 대부분 남성은 군대에 가잖아요. 급조한 내 연애 이야기가 누군가의 계산에 안 맞았어요. 급기야 남자친구 군대 어디 다녀왔냐는 질문까지 듣는데, 등에 땀이 줄줄 흘렀어요. 광고 광고 그때부터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죠.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이제 눈을 낮추고 남자친구 사귈 노력을 하라는 말을 듣고, 회식마다 여자친구 없는 남성 직원과 엮어주더군요. 나를 보고 엄지를 척 들면서 집적거리는 남자 직원도 있었죠. 그래서 얼마 전부턴 다시 “애인 있어요”라고 대답해요. 물론 당신에게 내 애인이 여자라고 말하고픈 마음은 없어요. 예전 한 동료가 재미있는 거 알려주겠다며 영상을 보여줬어요. 게이 커플이 자신들의 일상을 촬영한 영상일기였는데, 게이 커플 중 한명이 우리가 아는 지인이었어요. 동료는 영상 속 지인을 가리키며 “게이”라고 웃으면서 말하더라고요. 그때 표정과 말투가 잊히지 않아요. 묘하게 경멸하는 뉘앙스였거든요. 그나마 직접적인 욕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광고 당신이 변희수 하사의 기사를 읽었다고 말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그동안 성소수자의 투쟁은 우리만의 투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거든요. 뉴스를 잘 보지 않는 당신마저 변희수 하사를 안다는 사실에 이번 투쟁은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똑같았어요. 트랜스젠더 변희수라는 이유로 노동자 변희수는 모든 것이 부정당했고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다시 군대에 돌아가기 위해 싸우던 그녀는 자신이 군대에 존재하면 안 되는 이유가 적힌 54쪽 분량 보고서까지 받아야 했어요. 최근에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변희수 하사가 군대에서 쫓겨난 것은 옳지 않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녀가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수많은 고민 끝에 나와 나의 노동을 지키기로 선택했어요. 그래서 여전히 나의 옆자리에 앉은 당신조차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가까운 가족이 갑자기 상을 당했는데 관리자가 퇴근을 시켜주지 않아서 울면서 노동했던 동료와 임신 막달까지 아무도 업무량을 조절해주지 않아서 무리하다 결국 하혈해서 병원에 입원했던 동료의 얼굴이 떠올라요. 눈 밖에 나면 일이 험난해진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주는 일터에서 많은 노동자는 입을 열기보다 그냥 일터를 떠나는 게 쉽게 느껴져요. 오늘도 많은 동료가 침묵을 선택하거나 병원을 떠나고 있죠. 저는 성소수자를 위한 일터가 모두를 위한 일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두를 위한 병원을 만들겠다는 작은 다짐으로 민주노조에 가입했어요. 요즘 저는 모두가 10년 뒤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가만히 앉아서 일터가 바뀌기만을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늘 그랬듯 지금 나의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려고요. 그 변화에 당신도 함께하길 기원하며 이만 글 줄일게요. 우리 함께해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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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바다가 이추룩 됐는데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6411의 목소리] 바다가 이추룩 됐는데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2023-11-26) 박영추 | 제주 해녀 제주에서 난 박영추씨는 열아홉살에 물질을 시작해 육십년 이상 해녀로 살고 있다. ♣️필자 제공 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서 나고 자랐수다. 태어난 해는 1941년이고. 물질은 조금 늦게 시작했수다. 열아홉살에. 보통 열다섯살 정도면 시작하는데 우리 집은 (바닷가에서 떨어진) 윗동네라 늦게 된 거우다. 그때는 지금같이 큰 거 아니고 조그만 물안경을 썼수다. 물안경을 쓰고 물 아래를 보면은 물이 막 깊어 보이고, 손도 이만하게 크게 보이고 그랬주마씀. 적삼이랑 물소중이(무명천으로 만든 물옷) 입고 처음으로 미역 따러 가니까 미역이 가득 깔려 있는데도 물속에 들어가지질 않는 겁니다. 그래도 막 억지로 들어가서 미역을 붙잡으려고 하면 물살에 이리 착 눕고 저리 착 누워 그게 잘 안되는 거라. 어떻게 어떻게 확 잡았다 싶어 나와보니까 미역 꼬랑댕이만 쪼꼼. 하하하. 그렇게 차차 배운 거우다. 광고 첫날에는 아무것도 못 잡았는데 다른 해녀들이 망사리(채취물을 넣어두는 그물주머니)에 미역이랑 소라 몇개 넣어줬주게. 해녀들은 지금도 그래요. 만약에 깊은 데 못 들어가서 몇개 못 잡은 사람이 있으면, 깊은 데서 대여섯개쯤 해가지고 올라와서 망사리에 넣어주고, 막 추운 날 해삼 잡으러 갔다가 하나도 못하고 오돌오돌 떠는 사람 있으면 하나쯤 놔주고, 경(그렇게) 헙니다. 7~8미터 이상 깊이 들어가는 해녀는 상군, 5미터쯤 들어가는 해녀는 중군, 얕은 데밖에 못 가는 해녀는 하군, 그렇게 됩니다만 상군이 하군을 돕는 겁주(거지요). 어릴 때는 다 하군, 한창때는 중군도 되고 상군도 되지만, 늙어지면 다시 하군이 될 거니, 서로 도와사주마씀(도와야지요). 그게 해녀우다. 광고 광고 또 해녀는 바다에 갈 때 혼자 가는 법이 어수다(없습니다). 혼자 가면 안 됩니다. 잠수가 서툰 때는 물길을 잘 몰라서 물살에 휩쓸릴 수도 있고, 하나 더 하겠다고 욕심을 내다가 숨이 모자라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까, 위험할 때 도울 수 있도록 같이 어울려 가는 겁니다. 그래서 해녀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사람이라고 허는 말도 있는 거주마씀(것입니다). 해녀들한테 바다는 무서우면서도 고마운 곳입니다. 바닷속은 땅 위나 똑같수다. 농사지으면 땅 갈고 씨 심어서 싹이 나서 자라면 수확하고 그거지요. 바다도 철 따라 싹이 나고 자라고 수확하고. 옛날에 오염 안 됐을 때는 그랬지요. 몸(모자반)이 막 자라면 몇미터씩 자라서 물속이 꽉 차주마씀(찹니다). 땅 위에 수풀이 우거지는 거같이. 그 속이 왁왁해요(깜깜해요). 그걸 헤치며 헤엄쳐가면 그 소곱(속)에 소라가 있수다. 그때는 몸도 막 돌마다 많이 나고, 톨(톳)도 많이 나고, 감태도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많이 깔렸고, 그거 먹고 소라도, 전복도, 문어도, 오분자기도 그렇게나 많아났수다(많았었습니다). 그때는 바다가 그렇게 좋아서 물질로 밭도 사고, 집도 사고, 아기들 공부시키며 먹고살았수다. 밭에 갔다가 물에 갔다가 종일 일하느라 고달파도 막 힘이 나는 거지요. 광고 경헌디(그랬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어수다(없습니다). 한 15년 전부터 이렇게 된 거 달마예(같아요). 돌을 잡으면 돌이 바삭바삭 부서져. 바다가 얼마나 오염되었으면 경 되시코(그렇게 되었을까). 돌이 단단하고 깨끗해야 미역도, 톨도 붙을 건데, 그게 붙어서 자라야 고기들 의지도 되고 소라도 자라고 그러는 거주게(거지요). 풀이 못 자라니까 다른 거도 자랄 수 없어요. 물속이 사막이나 마찬가지라…. 성게가 먹을 거 없으니까 막 댕기다가 그냥 죽어버려요. 바다가 이추룩(이처럼) 됐는데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산에 소나무가 충이 들어 죽어가는 거 보니까 그거랑 같으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자연이 죽으면 사람도 죽어. 살 수 없잖아요. 바다에 해초가 없으면 고기도 못 살듯이 산에도 마찬가지라. 자연이 없으면 사람도 없어. 작은 거부터 죽어가다 차차 큰 것들까지…. 앞으로 질병만 남지 뭐 남을 게 있을까. 우리는 다 살았지만, 낼모레 죽을 거지만, 앞으로 후손들이 이 오염을 다 겪을 거난(거니까) 걱정입니다. ※정리 이혜영 ‘세대를 잇는 기록’ 대표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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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고공농성 한 달, 노동자 고용에 대한 책임을 묻다
[6411의 목소리] 고공농성 한 달, 노동자 고용에 대한 책임을 묻다 (2024-02-19) 박정혜│금속노조 구미지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 소현숙 조직2부장과 필자(오른쪽)가 공장 철거를 막기 위해 고공농성하는 모습. ♣️필자 제공 내 나이 27살이던 2011년 2월28일, 친구 추천으로 처음으로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일본 기업 닛토덴코의 100% 자회사로 엘시디(LCD) 핵심 부품인 편광판을 만드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란 회사였다. 구미국가산업단지 안 공장에서 방진복, 방진화에 후드까지 쓰고 캄캄한 암막에서 형광등 하나에 의지해 얇은 필름을 검사해 불량을 찾는 검사원으로 열심히 일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점심과 휴게시간 제외하고 10시간씩 일했다. 시간당 900매를 못 채우면 쉬는 시간까지 쪼개 수량을 맞춰야 했다. 3조 2교대로 4일 일하고 2일 쉬어야 했지만, 바쁘다 보니 대부분 5일 근무하고 하루 쉬는 구조였다. 팔다리, 어깨,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었고, 연차도 마음껏 쓸 수 없었다. 그래도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안정적인 삶을 원했던 내게 힘들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광고 고객사 엘지(LG)디스플레이 구조조정으로 우리 회사도 같이 힘들어졌다. 2019년과 2020년 두번 희망퇴직으로 500여명이었던 직원은 57명으로 줄었다. 그렇게 57명이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2년을 열심히 일했다. 회사는 흑자를 냈고 성과금까지 들어왔다. 2022년 회사는 희망퇴직했던 사원들까지 다시 불러들이며 100명이 넘는 사원을 채용했다. 희망퇴직했던 사람 중에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숙련된 사람들이니 회사는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함께 힘을 모아 몇개월 만에 이뤄낸 일이었다. 그런데 2022년 10월 공장에 불이 나 공장동이 전소됐다. 기다려달라던 회사는 한달 만에 문자로 공장 청산을 통보했다. 그 한달 동안 일본 본사는 또 다른 100% 국내 자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평택)에서 대체 생산할 수 있도록 준비했고, 이후 신규 인력도 30명 채용했다. 두 회사(사업장)는 납품처만 다를 뿐 동일한 설비, 원재료로 같은 제품을 생산한다. 광고 광고 달랑 문자 한통으로 청산을 통보하고 희망퇴직을 받는 태도에 너무 화가 났다. ‘그냥 불났으니까 위로금 줄게, 나가. 우리 지금 너희에게 최대한 인심 쓰는 거야. 이거라도 받고 떨어져.’ 회사의 소모품 같은 대우에 투쟁이 시작됐다. 1년 넘게 투쟁하면서 많은 사실을 알았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외국투자기업으로 2003년 구미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하면서 토지 50년 무상임대와 법인세, 취득세 감면 등 온갖 혜택을 누렸고, 18년간 7조7천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가운데 원재료와 상품 매입비 등으로 6조원 넘게 본사로 흘러갔고, 이와 별도로 로열티와 배당으로 2천억원가량이 본사에 지급됐다. 그런 회사가 공장 철거를 방해한다면서 전셋집에 가압류를 걸고, 공장에 단전·단수를 자행하며 철거하겠다고 매일같이 찾아와서 위협한다. 광고 고용에 관해 열어두고 대화로 해결하자고 수차례 요청했지만 회사는 일방적인 청산 통보 뒤 지금까지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다른 곳 책임은 없을까. 구미시는 고공농성에 들어가자마자 공장 철거를 승인했고, 고용노동부는 교섭을 통해 사태 해결에 나서도록 하기는커녕 방관적인 태도만 보인다. 법원은 2023년 8월 회사가 제기한 가압류를 충분한 입증도 없이 곧바로 받아들였고, 공장철거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노조 사무실 철거까지 허용했다.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원까지 다 챙겨 도망치려 하는데 그 누구도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노동자는 권리도 없고 존중받을 가치도 없는 걸까? 1월8일 소현숙 지회 조직2부장과 함께 공장 철거를 막기 위해 옥상에 올라왔다. 공장 재건, 고용승계 쟁취를 외쳤다. 재건이 어려우면 평택공장에서 고용을 승계하라는 게 우리의 요구다. 온몸으로 공장 철거를 거부하고 고용승계가 되는 날 내려가겠다고 다짐했다. 정부는 특혜만 누리다 도망치는 외투기업 먹튀 문제를 모르는 척하고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외투기업의 노동자 고용 등의 책임 문제를 물어야 한다.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한달이 넘었다. 2월16일 법원이 예고한 강제집행을 막기 위해 전국에서 1천여명의 노동자가 모였다. 우리의 목소리는 구미시를 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강제집행은 막았지만, 그들은 또다시 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범한 노동자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장을 지키고, 우리도 지킬 것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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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눈 가리고 아웅’ 통학차량 안전, 이대로는 안 됩니다
[6411의 목소리] ‘눈 가리고 아웅’ 통학차량 안전, 이대로는 안 됩니다  (2023-12-04) 홍수인│전국셔틀버스노동조합 총무국장 오전에 우리 아이들 등원 운행을 마친 18인승 전기통학차량들이 차량 전기충전을 하고 미래세대 하원 운행을 위해 주차장을 나서고 있다. 필자 제공 통학셔틀 노동자들은 어린이집, 유치원, 각급 학교, 학원, 체육시설 등 교육시설에서 미래세대의 안전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학생·교육생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 일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은 불안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60대 박영철(가명) 셔틀버스노동조합 조합원은 제빵 사업을 하다 한·일월드컵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던 2002년 셔틀버스 일을 시작했다. 당시 1300만원가량 하던 15인승 차량은 할부로 샀다. 목돈이 있을 리 없었기에 캐피탈사에 이자를 내야 했다. 일자리를 소개해준 브로커에게는 소개비 50만원을 줬다. 불법이지만 도리 없었다. 한달치 운행료를 줘야 하는 경우도 많다는데, 싸게 구한 셈으로 여겼다. 새로운 곳과 계약을 하려면 여전히 소개비를 줘야 하는데, 요즘은 70만원이다. 광고 20년 남짓 흐른 지금은 유치원과 초등학생이 다니는 학원, 두곳에서 차량을 운행한다. 한곳당 받는 돈은 한달 150만원 정도이고, 연료비에 보험료와 차량 유지비 등을 제하면 실제 수입은 100만원 남짓이다. 자기 차량을 이용해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고 최저임금 정도를 버는 셈이다. 이 돈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 박 조합원은 이른바 ‘쪽타임’을 뛴다. 새벽시간 중·고등학생을 등교시키고, 밤늦게는 학원에서 집으로 실어 나른다. 현행법으로는 셔틀버스 기사와 교육시설이 공동소유한 차량만 유상운송이 가능하다. ‘쪽타임’은 그렇지 않은 일이다. 광고 광고 2015년 통학차량 안전사고가 연이어 터지자 정부에서는 사설 셔틀버스를 양성화한다며 차량 공동소유제를 도입했다. 교육시설을 운영하는 원장에게 셔틀버스 소유 지분 1%를 의무적으로 갖도록 해 안전운행 책임을 부과한 것인데, 그 1%로 책임을 지운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며 그 1%를 실제 원장이 지불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운행하는 학원을 옮길 경우엔 이전 학원 원장으로부터 1% 지분을 넘겨받아야 하는데, 관련 서류 절차가 제때 진행되지 않기도 한다. 시간이 중요한 셔틀기사들이 몇번이나 찾아가 독촉을 해야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폐업한 학원주가 잠적해 법원까지 가서 공동소유제를 풀었다는 조합원도 있다. 결국 있으나 마나 한 차량공동소유제로 불법의 굴레를 씌워 놓으니, 현장에서 일하는 우리 조합원들은 ‘외줄타기’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우리 노조는 공동소유제가 아니라 통학차량 등록제를 요구하고 있다. ‘어린이·학생 통학 전용차량’으로 등록하고 차량과 함께 운전자를 등록해 법률이 정한 교통안전교육 등을 이수하고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규칙 104조에 따른 유상운송 허가를 받아 운행하자는 것이다. 1천만 미래세대의 안전한 이동권 보장과 30만 셔틀버스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보장 등 사회 공공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광고 최근에는 전기차 문제로도 혼란스럽다. 국회는 2019년 4월 대기관리권역의 대기환경 개선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4년 뒤인 2023년 4월3일부터 어린이 통학버스 경유차량 사용을 제한했다. 그런데 2021년, 유예기간을 2024년 1월로 연장하는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올해 8월에는 박찬대 민주당 의원 등이 유예기간을 5년 더 연장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러다 특별법이 없어질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단위체중당 호흡량이 2배 이상 많아 미세먼지에 취약하다. 미래세대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통학용 전기차량을 확대하려면 제대로 된 대안이 나와야 한다. 경유차량을 소유한 셔틀버스 노동자들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다 할 만한 지원책도 보이지 않는데, 경유차량을 제한하는 특별법마저 없어진다는 설까지 있으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통학차량은 어린이의 안전만이 아니라 셔틀버스 노동자의 안전과도 직결된다. 유럽은 어린이 통학차량은 강화된 안전기준에 따라 제작 단계에서부터 별도로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전장치를 개조하는 것에 그치는데, 비용은 셔틀버스 노동자의 몫이고 불량 개조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노조는 정부가 차제에 미래세대 건강권, 조합원의 안전과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를 미루기만 할 게 아니라 전기차 전환지원 정책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바란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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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땀의 가치에 국적이 있나요
[6411의 목소리] 땀의 가치에 국적이 있나요 (2023-12-10) 이태현 |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선전편집실장 선박 건조 공정 가운데 하나인 (블록)대조립 작업장에서 용접하는 노동자. 필자 제공 우리나라 조선사들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건조 기술력은 워낙 뛰어나 전세계 발주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다. 환경 규제에 맞춰 친환경 연료 추진선으로 교체하는 추세인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엘엔지 해상운송 수요가 늘면서 전세계 엘엔지 운반선 발주량이 크게 늘었다. ‘신조선 발주 붐’에 웃음꽃을 피울 것 같지만, 현장 상황은 그렇지 않다. 조선업종은 노동강도에 견줘 임금이 형편없이 낮기에 일감은 가득 찼지만 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 들어와도 노 저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가 되니, 조선소들은 타이, 중국,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등에서 E-7(일반기능인력) 비자를 받은 이주노동자를 대거 받아들였다. 노동조합에서는 갑작스레 늘어난 이주노동자들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함께 활동해 나갈지 당혹스러웠지만, 차츰 이주노동자 보호를 위한 활동을 늘려가고 있다. 광고 지난해 10월 어느 저녁 퇴근 무렵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가 보니,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주노동자가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중 오토바이와 접촉 사고가 났는데, 이주노동자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사고 조사와 후속처리를 할 수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조선소라는 위험한 공간에서 어떻게 일을 하라는 것인가. 이런 비슷한 일이 몇 차례 있고 나서야, 회사는 외국인지원센터를 신설하고 외국어대 졸업생을 인턴으로 채용해 통역 업무를 맡겼다. 이제 생산 현장에서 교육 등 소통이 필요할 때면 지원센터에 요청해 통역사를 부른다. 지난 7월에는 타이 출신 한 이주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방문했다. 번역기를 써가며 그가 한 말은 “여권을 찾아달라”였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현지 송출업체와 계약할 때 ‘고용주가 여권을 보관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주노동자의 이탈을 막으려고 여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인권침해이자 출입국관리법 위반이다. 노동조합은 조합 소식지에 이를 알리면서 이주노동자 인권침해를 멈추라고 이주노동자들의 법적 고용주인 하청업체 업주들에게 경고했다. 광고 광고 올해 조선업에 취업한 이주노동자는 5470명으로 지난해(1017명)보다 5배 이상 늘었다. 이들이 받는 월급은 300만원가량(세금 공제 전)이다. 전문기능을 가진 이주노동자에게 발급하는 E-7 비자는 임금 하한선이 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의 80%(월 280만원) 아래로 급여를 줘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정부는 이 기준을 중소·중견기업에 한해 70%로 낮췄다. 올해 최저시급(9620원)으로 월 소정근로시간(209시간)을 일하면 200만원 언저리인데, 별도 수당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초과근무 수당으로 100만원가량을 채운다. 금속노조가 실태조사에 나서 이주노동자 410명을 설문조사하고 22명을 심층인터뷰했다. 타이에서 온 용접공에게 근무시간표를 적어달라고 하니, 평일 절반은 밤 10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오전 8시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일하고 있었다. 주 77시간 노동에, 한달에 쉬는 날은 3~4일에 불과했다. 이렇게 번 돈으로 브로커에게 준 수수료 빚을 갚고 가족들에게 송금한다. 광고 조선소 일거리는 내년이 더 많다. 근속기간이 길어지면 이주노동자들은 최저시급과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활동가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현장에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은 없다. 1년 단위로 계약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불성실하거나, 노동조합 활동 움직임을 보이면 언제든 계약을 거절당할 수 있다. 부당한 현실을, 노동법 조항을 알아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노동청에 법정 근로시간 초과 등을 신고해볼까. 하청업체 사장은 벌금을 내고서라도 이주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겠다고 한다. 원청으로부터 도급받은 물량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벌금 납부보다 더 곤란한 일이 생긴단다. 금속노조와 조선업종노조연대는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조선산업 종사자 차별 처우 금지, 표준계약서 사용 의무화 등 법과 제도를 통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조선산업 기본법’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기업이 불법을 저지르고 정부가 눈감아주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해서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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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본업과 부업 사이 경계인, 프리랜서
[6411의 목소리] 본업과 부업 사이 경계인, 프리랜서 (2024-02-05) 안나(가명)|교통방송 리포터 2023년 설날 경부고속도로에 고향을 찾는 차량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연합뉴스 새벽 5시30분 알람이 울린다. 씻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방송국으로 출근한다. 나는 지방의 한 교통방송 리포터다. 이른 아침 방송국으로 가는 나에게 택시기사님이 넌지시 묻는다. “방송국에서 근무하세요? 멋진 일 하시네요. 저도 애청자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답하며 웃어 보인다. 아침 7시 방송국 도착. 7시15분 방송을 시작으로 15분·30분·45분. 매시간 15분 간격으로 교통정보와 기상정보를 전달한다. 낮 1시를 전후해 저녁 근무자와 교대하고 퇴근한다. 매달 새롭게 작성되는 근무표에 따라 휴무를 제외하고 한달에 20일을 출근해 꼬박 6시간가량을 근무한다. 휴무는 주말과 휴일 상관없이 근무표에 따른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방송국 지침도 늘 체크해야 한다. 이를테면, 업무 교대에 관한 지침과 기상정보에 추가할 내용, 방송 마무리 멘트 관련 지시사항 같은 것들이다. 광고 이렇게 한달 일해서 손에 쥐는 급여는 13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 최저임금 수준이다. 2013년 입사 때나 문화체육관광부가 특수고용노동자를 보호하겠다며 계약서를 쓰도록 한 2017년이나 그리고 2024년 지금이나 금액 수준은 큰 변함이 없다. 교통방송 리포터가 프리랜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더 있다. 입사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정보 방송 말고 다른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맡아 진행할 기회가 생겼다. 즐거운 마음으로 방송했지만 출연료는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어차피 근무시간 중 추가로 방송하는 것이니 별도 출연료가 지급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는 회사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한번은 리포터 근무 기준과 방송 출연료 기준이 알고 싶어 요청했다. ‘등급별로 큰 차이가 없으니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후 문체부가 마련한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면서 추가로 방송할 경우 출연료를 따로 받게 되었지만, 교통 리포터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임금 총액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광고 광고 1년에 두차례 방송 개편을 앞두고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러나 임금 협상은 없다. 방송 경력이 반영되지도 않는다. 방송 1개월차도, 20년차도 출연료는 동일하다. 열심히 해서 경력을 쌓아 더 나은 방송인이 되어도 처우가 더 나아지지 않는 현실은 2~3년차 리포터들의 퇴사율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교통방송 리포터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래서 결혼과 임신은 권고 퇴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10년 남짓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결혼 뒤 출산하고 방송국에 복귀한 리포터는 단 한명뿐이다. 당시 출산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게 될 리포터의 업무를 다른 리포터 10명이 대신하겠다고 회사를 설득해, 겨우 퇴사 아닌 한달 출산휴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후로 그런 요청이 다시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고, 결혼하고 임신한 리포터는 퇴사 권고에 울면서 방송국을 떠났다. 그렇게 결혼과 임신 뒤 퇴사는 자연스러운 수순이 됐다. 광고 방송국 정규직 직원들은 말한다. 잠깐 와서 방송하고 돈 벌 수 있어 좋겠다고. 하지만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동일한 출연료를 받고, 결혼하고 출산하면 퇴사 권유가 이어지고, 퇴직금도 정년 보장도 없는 하루살이 인생임을 안다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실시간 교통정보 방송 덕분에 지·정체 구간을 피해 목적지에 도착했다거나, 일하기 수월하다는 각종 업무 차량 기사님들의 피드백을 받을 때면 보람도 느끼고 기쁘다. 하지만, 교통방송의 핵심 업무인 교통정보 전달을 담당하는 리포터로서의 존중도, 최소한의 권리도, 정당한 대가도 없는 프리랜서로서의 만족은 또 다른 문제다. 좋아하는 ‘일’과 ‘생계’ 사이의 고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리포터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해 다른 일을 병행한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랜서는 경계인이다. 본업과 부업의 경계, 소속과 독립의 경계, 자유와 계약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한다. 경계인으로서가 아닌 직업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나의 ‘직업’을 진정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나의 ‘일’은 사랑하지만, 나의 ‘직업’을 사랑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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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재일동포는 ‘투명인간’이 아닙니다
[6411의 목소리] 재일동포는 ‘투명인간’이 아닙니다 (2022-06-08) 공경순 | 재일동포 3세 한국·일본·미국에서 펼쳐지는 재일동포 4대의 가족사를 다룬 드라마 파친코. 애플티브이플러스 제공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동포 3세입니다. 일본에서 나서 자랐지만 민족교육을 받아 제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제 성격의 일부를 만든 것은 민족교육에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민족학교에서는 차별을 별로 못 느끼고 컸습니다. 제가 일본 사회에서 크게 차별을 느꼈던 때는 다 커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되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벌써 20년도 지난 이야기여서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소한 걸림돌이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 건데, 사회 초년생 때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집 계약을 할 수 없어 회사에서 빌려줬습니다. 그때 저는 “그래, 안 빌려준다면 빌려주는 길을 꼭 찾아올 거야”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낙담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되게 하는 길을 찾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빌린 건 아니니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네요. 그렇지만 굴하는 모습만은 보여주기 싫었던 그 시절이 기억납니다. 광고 제가 한국에 온 지 11년이 흘렀습니다. 한국에 오면 차별이 없을 거라는 기대를 살짝 했지요. 저는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니깐요.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제가 한국에 넘어온 11년 전에는 아직은 거소신고증을 갖고 생활을 해야 하는 등 여러 면에서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그 흔한 네이버 아이디 등록도 힘들었고, 핸드폰도 남편 명의로 개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몇년이 흘러 거소신고증이 ‘주민등록증’으로 바뀐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생성되면 이제 나는 이 나라에서 내국인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일부 편해진 면도 있었으나 외국인 취급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외국인이 나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습니다. 요새 대포통장 때문에 법이 강화된 건 이해하는데 은행에 가면 저희는 늘 외국인으로 분류가 됩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줘도 전산에 외국인으로 뜹니다.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외국인인 셈입니다. 그런데 다문화가정 혜택에서는 제외됩니다. 어린이집 대기를 걸 때도 다문화가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국인으로 대기 줄을 섭니다. 왜냐고요? 그냥 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답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외국인도 내국인도 아닌 법의 중간에 낀 ‘투명인간’이 된 것입니다. 광고 광고 작년에 제 명의 집을 매도할 일이 있었는데 내국인이 필요한 서류를 다 준비했으나 매도하는 날이 되니 세무서에서 세무 관련 서류를 떼오라고 하더군요. 부동산 계약용 인감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세무 관련 서류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세무서에 달려갔는데 그 서류를 떼는 데 2~3일 걸린다고 했습니다. 계약이 엎어질 수도 있는 큰 문제였습니다. 세무서 직원에게 빌고 빌었더니 다행히 빨리 대처해줘 그날 매도를 무사히 할 수 있었으나,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재일동포는 법 사이에 낀 투명인간이구나’라고 다시금 느꼈습니다. 재일동포 사회는 커뮤니티 사회입니다. 힘든 일이 많은 속에서도 작은 동네 안에서 서로 돕고 살았지요. 저는 그런 환경이 그리워설까요, 김포지역 한 봉사 모임에서 2018년부터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캘리그라피 작가로 활동 중인데요, 소외계층 분들에게 힘이 되는 글귀를 써드린 액자를 드리거나 사랑의 글귀를 담은 머그컵을 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경기도지사 표창도 받아보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이런 큰 상을 받게 될 줄 생각도 못 했지요. 광고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은 지금 이제는 외롭지도 않고 내 편이 많아서 든든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법 안에서는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일본에서 조선사람으로서 꿋꿋이 살아왔는데, 한국에 와보니 ‘내 나라는 어디일까?’ 헤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평생 외국인도 아닌, 내국인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려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나라를 가든 늘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슬프기도 합니다. ‘재일동포’라는 존재가 좀 더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에 오래 살았지만 한국 국적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 왜 그들은 국적을 바꾸지 않을까요? 재일동포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일제강점기의 아픔입니다. 제가 캘리그라피를 열심히 하고 인정받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재일동포 공경순’이라는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캘리그라피 글귀에도 재일동포에 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자주 담습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조국을 잊지 않고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재일동포를 더 알리고 싶고 한국 사회에서 더불어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그런 ‘끼인’ 존재가 아닌, 저희 재일동포를 알아주세요. 저희도 같은 민족입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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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저 옥천으로 가요”…괜찮은 귀촌 일자리까지, 운이 좋았다
[6411의 목소리] “저 옥천으로 가요”…괜찮은 귀촌 일자리까지, 운이 좋았다  (2022-12-18) 이다현 | 옥천군 마을공동체지원센터 팀장 충북 옥천군 이원면 장화리 손모내기 축제에 나온 어르신들. 필자 제공 “저 옥천으로 이주해요.” 이 말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6년 전 서울에 직장을 잡을 때부터 지역살이를 생각했다. 평생을 대도시에서 살았으니 한적한 곳에서도 살아보겠다는 정도였다. 그러다 지역에서 이런저런 활력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설렜다. 그래, 지역소멸시대라는데 나 하나라도 지역으로 가자. 그렇게 나의 지역 이주 프로젝트에 시동이 걸렸다. 광고 전국 모든 지역을 후보지로 놓고 물색을 시작했다. 기준은 내가 참여할 만한 청년정책이 있는지와 교통, 접근성, 환경 등이었다. 그렇게 여러 단계를 거쳐 충북 옥천을 최종 점찍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오래 살았던 대전과 가까워 안정감이 있었다. 게다가 시민사회 활동이 활발한 곳이라니 나 같은 초짜 외지인도 슬쩍 끼어 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일자리였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일자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채용공고를 뒤지다 곧 좌절했다. 내가 해왔던 일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기술, 운전, 제조업 쪽으로 최저임금 수준의 단기계약직이 대부분이었다. 요즘 여성들도 굴삭기나 지게차 자격증 딴다는데 지금이라도 도전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기술 배워야 먹고산다던 어른들 말씀이 갑자기 사무쳤다. 광고 광고 약 석달을 그렇게 지내고 현재 나의 직장을 발견했다. 마을공동체지원센터라고, 행정이 지원하는 공동체 사업에 주민이 참여하도록 돕는 중간지원조직이었다. 마을공동체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이고, 주민 활동을 지원하면서 지역을 두루 살피는 데도 도움 될 것 같았다. 그동안의 자괴감을 얼른 추스르고 진심을 담아 이력서를 썼다. 면접 뒤 약 2주 만에 나는 드디어 옥천군민이 되었다. 이곳 중간지원조직 업무는 도시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중간’은 행정과 민간의 사이라는 의미다. 옥천군 마을공동체 사업에 주민들이 참여하도록 돕고, 주민 활동을 지원한다. 이 ‘지원’에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포함되어 있다. 공동체 활동을 계획하고, 관련한 서류 준비를 돕는다. 행사가 있으면 홍보물도 만들어 참여자를 모으고 손뼉 치며 흥을 돋운다. 갑자기 행사 진행자(MC)가 되기도 한다. 모든 어르신을 어머님, 아버님으로 부르며 우리 사업에 재미와 보람을 느끼시도록 응원해드리는 것도 역할 중 하나다. 광고 문제는 컴퓨터다. 대부분 70~80대 이장님들이 마을 사업을 이끄는데, 관련한 컴퓨터 작업이 내가 봐도 보통 일이 아니다. 첨부해야 할 서류는 어찌나 많은지, 서류 때문에 일 못 하겠다는 협박(?)도 이따금 터져 나온다. 커피 타드리며 불만도 들어주고, 조금만 더 해보자고 설득한다. 정 안 되면 노트북 들고 옆에 앉아서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다. 영수증을 붙이고 정리하는 게 우리 같은 중간지원조직의 연말 풍경 중 하나이다. 이렇게 일하다 보니, 어르신들은 종종 나를 공무원으로 아신다. 중간지원조직 직원이라고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도 고개를 갸웃하신다. 이제는 나름 방법을 써서 ‘준공무원’이라 소개한다. 그러면 젊은 처자가 좋은 직장 다닌다고 대견스러워하신다. 진짜 공무원은 아니지만 어르신 말씀대로 좋은 일자리라 생각한다. 대체로 업무시간이 정해져 있고, 육체적인 노동강도도 세지 않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월급은 웬만한 도시 수준인데, 생활비는 그만큼 들지 않는다. 현재 사는 볕 좋은 18평형 아파트 월세가 45만원인데, 군에서 청년 월세지원금으로 월 10만원을 지원해준다. 확실히 서울에서 살 때보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여유를 느낀다. 지역살이에서 가장 기대한 바이기도 하다. 나는 운 좋게도 괜찮은 일자리를 잡아 고민하던 지역이주를 실현할 수 있었다. 여기 직원 가운데 나처럼 일을 계기로 옥천에 온 분이 5명, 도시로 나갔다가 유턴한 청년이 2명이다. 지역소멸 위기에서 일자리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자리는 매우 한정적이다. 갑자기 조직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 결국, 처음 마주했던 일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이제 생계를 위한 일뿐 아니라 재밌게 살기 위한 활동도 계획 중이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일과 활동의 중간에서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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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코로나 대처 영웅”이라 부르더니 지금은
[6411의 목소리] “코로나 대처 영웅”이라 부르더니 지금은 (2024-01-29) 김경운 | 간호사·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성남시의료원지부 마취회복파트 간호사로 코로나 환자 수술에 참여해 환자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필자. 필자 제공 2020년 1월 성남시의료원 개원을 앞두고 마취회복파트 간호사로 입사했다. 마취의를 도와 수술할 환자를 마취하고, 수술 뒤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의 회복을 돕는 일을 주로 했다. 처음 간호사 일을 시작한 2013년에는 사람들이 “남자 간호사”라고들 했지만, 지금은 그냥 간호사로 여긴다. 하지만 제약도 많다. 젊은 여성 환자를 간호하거나 시술에 참여할 때가 특히 어렵다. 병원 개원을 앞두고 코로나19가 시작됐다. 정부 지침에 따라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의료원은 정식 개원을 미뤘다. 숨 돌릴 틈 없이 업무가 밀려들었다. 방호복을 입고 환자의 기본적인 바이털(혈압, 맥박, 호흡, 산소포화도) 확인, 의사의 오더(지시)를 확인하며 투약, 침상 정리, 식사 제공까지 담당했다. 여기에 기저귀 갈기, 체위 변경, 욕창 처치, 시트 변경, 석션(가래나 혈액 제거), 심폐소생(CPR) 상황 환자 관찰, 환자 정보 조사와 고압산소요법 치료, 치매·정신질환 환자들 낙상이나 위험 행동으로부터의 보호, 화장실 동행, 각종 약물 처치, 코로나 치료제 처치와 부작용으로부터의 관찰과 대처, 청소와 방역, 의료폐기물 박스 만들기와 관리, 택배 수령…. 선별진료소를 설치하고 주출입구를 관리하면서 여름에는 땡볕과, 겨울에는 추위와 싸웠다. 광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이런 일들을 하려니 숨쉬기가 힘들어 어지럽고 구토를 하기도 했다. 생활치료센터에서 일할 때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선제검사소, 백신 예방접종, 생활치료센터, 재택 격리자 관리까지 업무들이 수시로 바뀌고 추가되었다.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환자 임종을 지키고 사체까지 관리했다. 일부 환자들의 폭언, 폭행, 성희롱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업상 계약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야 한다던 50대 남성이 기억난다. 음성 결과가 나오지 않자, 자신은 상태가 괜찮다며 여러 욕설과 과격한 행동을 했다. 나를 비롯한 남성 의료진이 주로 간호해야 했다. 나중에 미안하다고 하셨는데, 초창기 엄격했던 규정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당시는 힘들었다. 광고 광고 정부와 언론, 국민들은 우리더러 “영웅”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영웅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적자 누적을 이유로 지방의료원 운영을 위탁하고 민영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부인하지만) 그 첫번째 타깃이 성남시의료원이다. 이미 성남시는 보건복지부에 위탁 승인을 신청했고 병원장은 15개월째 공석이다. 뒤숭숭한 위탁 논란 속에서 많은 의사가 병원을 떠나 정원(99명) 대비 충원율이 50%대에 불과하다. 지난해 연말엔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나순자 위원장과 전국 지방의료원 지부 간부들 28명은 18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2024년 감염병전담병원 회복기 지원 예산이 0원에 가까운 수준으로 깎였기 때문이다. 강바람 거센 국회 앞 농성장은 유독 추웠고, 단식 3일차부터 지부장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목숨 걸고 막아내야 한다는 각오로 물과 소금만으로 하루 24시간을 계속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요구했던 2900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약 1천억원 예산이 편성됐다. 광고 하지만 끝이 아닌 시작이다. 각자 병원으로 돌아가 내부 현안 및 지방자치단체와 각종 사안을 협의해야 한다. 나 역시 의료원 정상화와 위탁 반대 투쟁을 해야 한다. 공공병원 적자를 얘기한다. 그런데 그게 직원들 잘못인가? 코로나 때문에 원래 병원을 떠나 3년간 다른 병원에 다닌 환자들에게 이제 다시 오라고 하면 올까? 그런데도 재정적 손해는 오롯이 지방의료원들 몫이 되었다. 신상진 성남시장은 병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은 뒤로한 채 법무부(한동훈 전 법무장관)와 ‘중증정신질환 수용자 법무병상’을 성남시의료원에 들이겠다는 협약도 체결했다. 의료원이 있는 수정구는 취약계층이 많은 지역으로, 같은 성남이지만 분당구와 의료 격차가 크다. 분당에 의료원이 있었더래도 중증정신질환 수용자 병상을 들여오겠다고 했을까? 또 다른 신종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공공병원을 살려야 한다. 의료진들을 영웅이라 불렀던 그때를 기억하면서.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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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마봉춘씨, 전화 한통으로 10년 인연을 정리하자고요?
[6411의 목소리] 마봉춘씨, 전화 한통으로 10년 인연을 정리하자고요?  (2022-06-01) 리리(필명) | 방송작가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2017년 11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작가도 노동자임을 강조하는 큐시트를 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신을 만나러 가던 어느 봄밤, 터널을 빠져나오던 내 차가 빗길에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어요.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에 눈을 질끈 감았고, 사방에서 터진 에어백이 가차 없이 내 몸을 강타했죠. 4차선 도로 양쪽 가드레일을 여러차례 들이받던 그때, ‘방송사 보도국 작가로 매일 여러 사건·사고를 접하던 내가 오늘은 직접 뉴스에 나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연거푸 부딪혀 소생 불가한 차에 의미 없이 시동을 걸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광고 사고를 목격한 다른 차량 운전자가 내게 다가오고, 다음엔 경찰이, 그다음엔 소방관이 다가왔어요.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마봉춘씨,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럴 수 없다고 했어요. 그 전 여름 정규직도 아닌데 휴가를 간다니까 ‘네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가면 어떡하냐’고, ‘네가 돌아왔을 때 책상이 없어졌으면 어떡하냐’고 되묻던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에요. 새벽 방송을 하면서부터 나는 매 순간 요일과 시간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5분을 포기하면 단신 기사 하나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고, 1분이면 원고를 들고 100m쯤 떨어진 스튜디오까지 뛰어갈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광고 광고 일주일 가운데 일요일 하루만큼은 알람을 꺼놓고 잘 수 있지만, ‘혹시라도 요일을 착각해 당신에게 가지 않는다면?’ 하는 상상은 너무나 두려웠어요. 언젠가 일요일을 월요일로 착각하고 당신에게 달려간 적이 있어요. 새벽에도 늘 깨어 있는 보도국에 아무도 없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요일임을 확인하자 난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어요. 그런데 마봉춘씨, 그거 알아요? 바보 같은 그런 행동은 나만 한 게 아니더라고요. 나와 한 팀이었던 ㄱ씨는 쉬는 날인지도 모르고 새벽 3시에 자다 말고 택시를 탔고, 리포터 ㅈ씨는 대낮에 새벽인 줄 알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대요. 나도, 그들도 마봉춘씨와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가끔은 제시간에 기사를 송고하지 못하는 악몽을 꿔 괴롭기도 했어요. 그렇게 나의 30대 전부를 마봉춘씨 당신과 함께했어요. ‘정규직보다 더 정규직 같다’는 당신의 뼈 있는 농담에 웃어넘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고, 성과금은 없어도 시청률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나의 노력이 보상받은 것 같아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죠. 그사이 수많은 동료가 마봉춘씨를 떠나갔어요. 누군가는 계약이 끝나서, 누군가는 개편으로 자리가 없어져서, 때때로 시청률 부진을 이유로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는 경우도 있었죠. 그때마다 마봉춘씨는 참 냉정했고 떠나는 사람은 담담했어요. 5년이나 일했지만 일주일 전에야 해고를 통보받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리포터를 지켜보며, 난 처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어요. 언젠가 해맑게 웃으며 그녀를 부탁하던 그녀의 어머니가 떠올랐거든요. 광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이번엔 내 차례가 됐어요. 수화기 너머로 당신은 말했죠.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생각지 못한 상황에 난 그저 당신의 말을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선심 쓰듯 ‘한달이나 유예기간을 줬으니 할 만큼 한 것’이라는 말, 10년 동안 쌓아온 인연이 끝나는 순간치고는 너무나 허탈했어요. 우리의 마지막 날, 마봉춘씨 당신은 내게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차마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2년이 지났네요. 난 여전히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고, 당신이 돌아오라고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여전히 날 아프게 하지만, 우리에게 좋았던 날도 난 기억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마봉춘씨, 사람들은 당신을 ‘만나면 좋은 친구’라고 하던데, 이제는 내게도 좋은 친구가 돼줄 순 없나요? *필자는 입사 10년차인 2020년 여름 <문화방송>(MBC) 쪽의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고 부당함을 호소하다가 이듬해 3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방송사 작가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방송은 중노위 결정을 따르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오는 7월14일 1심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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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세탁·수선도 최선을 다하니 알아주는 이들이
[6411의 목소리] 세탁·수선도 최선을 다하니 알아주는 이들이  (2023-12-25) 이정숙 | 세탁소 운영 드라이클리닝 한 바지를 스팀다리미로 다리고 있는 필자. 필자 제공 17살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50년이 되었네요. 충남 보령시 대천에서 6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이모가 계신 전북 군산에서 중학교에 다니기 위해 혼자서 고향을 떠났어요. 야간 중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양재학원에 다녔는데, 3개월쯤 뒤 이종사촌 오빠가 일류 재단사로 일하던 군산에서 가장 큰 의상실에 취직했어요. 미싱사 선생님 밑에서 단을 꿰매고 끝마무리하는 하급 일부터 시작해 주머니와 옷깃에 싱(빳빳하게 만들기 위해 넣는 재료)을 붙이는 중급 일을 거쳐 모든 재료를 준비해서 미싱사를 돕는 상급 일까지, 4년 동안 일 배우고 중학교를 졸업했어요. 그 뒤 몸이 아파 일 그만두고 고향집에서 3개월 정도 요양하고 겨우 나았습니다. 광고 배운 게 의상 일이라, 다시 이종사촌 오빠가 군산에 차린 의상실에서 일하며 재단까지 배웠어요. 장사가 되지 않아 의상실이 문을 닫게 되자, 고모가 계신 서울로 올라와 다닐 만한 양장점을 물색했어요. 처음 다닌 양장점은 일이 너무 많아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새도 없었어요. 다시 병이 생겨 잠시 쉬다가 다른 양장점을 다녔는데, 재단만 할 줄 아는 주인 밑에 일하는 사람은 나뿐이라 여기서도 거의 모든 일을 해야 했지요. 그렇게 여러 의상실을 전전하다가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서 의상실을 열게 됐습니다. 그때가 22~23살 정도 됐을 거예요. 10년 넘게 의상실을 하면서 고향 부모님께 돈도 보내드리고, 동생들도 서울로 데려와 학교에 다니게 하면서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의상실을 접었어요. 하지만 몇년 뒤 다시 일을 시작했지요. 아이들 학비와 학원비를 벌어야 했거든요. 그렇게 수선을 겸한 세탁소 일을 시작해 20년 넘게 하고 있네요. 광고 광고 요즘 같은 겨울에는 패딩과 코트, 양복이 가장 많이 들어옵니다. 먼저 오염이 된 부분을 전처리하죠. 오염물질에 따라 각기 다른 약품을 이용해서요. 그 뒤에 물빨래할 것은 고급 세제로 손빨래를, 드라이클리닝 할 것은 클리닝용 기름을 써서 기계에 넣고 세탁해요. 와이셔츠와 바지는 4천원부터, 코트나 패딩, 이불은 1만5천원부터 세탁비가 매겨져요. 성수기는 겨울옷을 정리하는 봄입니다. 비성수기에 하루 5~10벌 들어오던 게 이때는 20벌 정도 들어옵니다. 보통 오전 10시 반 정도 출근해 저녁 8시까지 가게에 있어요. 이렇게 일해서 어느 정도 생활은 가능하지만, 돈을 모으는 건 불가능해요.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하는 거지요. 나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월세로 전체 수입의 50%가 나가고, 각종 약품, 세제, 옷걸이, 비닐 커버와 같은 재료비가 10~20%예요. 광고 한동네에서 20년 넘게 세탁소를 해왔으니 단골손님이 많지요. 하지만 주택재정비 공사로 이사한 사람이 많고, 코로나에 셀프빨래방까지 생기며 운영이 쉽지 않아요. 정장 대신 편한 옷을 입고 출근하는 이들이 많아져 세탁소에 옷 맡길 일은 더욱 줄어들었지요. 대신 맞벌이 가정은 시간이 없어 세탁소에 옷과 이불을 맡기는 경우는 많더군요. 옷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손님이 많은 게 제일 힘듭니다. 찾아가지 않은 옷으로 세탁소가 가득 차,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길만 겨우 남겨졌을 정도예요. 그런 분들은 유독 선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크고, 길에서 만나면 찾으러 오겠다고 말해놓고도 안 오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길게는 7년 만에 찾아간 경우도 있어요. 예전에는 무조건 기다렸는데, 요즘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일부는 버리고 쓸 만한 것은 기부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좋은 일도 많았어요. 다른 세탁소에서 빼지 못한 청바지의 페인트 자국을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빼 드렸더니 손님이 무척 기뻐하는데, 아주 뿌듯했어요. 다른 세탁소에선 제거하지 못한 흰옷 얼룩을 빼 드렸더니, 고맙다며 수고비를 더 주고 가시는 분도 있었지요. 좋아하시는 손님을 보니 저도 너무 즐겁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 손님은 나중에 따님도 저희 세탁소에 옷을 맡기게 하셨어요. 성심성의껏 일하면 알아주시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면 인정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리: 강명효 ‘6411의 목소리’ 편집자문위원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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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글쓰기는 봉사가 아니라 어문 노동입니다​
[6411의 목소리] 글쓰기는 봉사가 아니라 어문 노동입니다 (2024-01-22) 서찬휘 | 만화 칼럼니스트 차 한잔과 만화책, 그리고 군데군데 이 나간 지 오래인 13년 지기 노트북. 일면 평온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사실은 시간 내에 화면에 문장을 밀어넣기 위해 필사적으로 환경을 맞춘 결과물이다. 필자 제공 나는 1998년부터 만화를 중심으로 글을 써온 칼럼니스트다. 한겨레 ‘서찬휘의 만화 숲 산책’, 일요신문 ‘서찬휘의 만화 살롱’, 인천일보 ‘덕질인생’, 국방일보 ‘만화로 문화 읽기’, 여행스케치 ‘만화 속 배경 여행’…. 그간 매체에 연재해온 코너명들이다. 물론 단발성 청탁은 셀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만화를 칼럼이라는 틀로 다루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지만, 나를 비롯해 글 쓰는 직업을 둘러싼 환경은 참으로 열악하다. 매체 입장에서 외부 필자는 소모품이다. 지면 구색을 갖추기 위해 기용했다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쳐내는 대상이다. 그래서 나 같은 외부 필자들은 언제고 “여기까지입니다”라는 연락을 받을 수 있다는 체념을 안고 산다. 내가 겪은 사례를 소개하자면, 한 언론에서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 “사정이 어려워 상부에서 외부 오피니언 지면 자체를 줄이라 했다”고 들은 게 대표적이다. 코로나19 당시 중소규모 매체들은 외고 분량을 반토막 내거나, 고료를 몇달씩 주지 않기도 했다. 근래에도 한 전문지 담당자에게 밀린 고료를 요구했다가 “아무래도 다른 곳을 알아보셔야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 다른 전문분야 매체 칼럼니스트 모집에 응했다가, 차를 대접받으며 “우린 작고 사정도 안 좋아 이 정도 경력자분의 고료를 감당할 순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받기도 했다. 광고 이런 상황은 갈수록 외부 필진을 기용하지 않거나, 무임금을 감내할 이들만 쓰는 쪽으로 몰고 가고 있다. 출판사와 연계를 빌미로 글을 모으는 ‘브런치’나 작가 멘토링을 붙여준다는 ‘창작의날씨’도 결국 그런 발상의 연장선에 있는 오픈마켓이다.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부류의 표어는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콘텐츠의 원천으로서 갈수록 그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읽을거리들을 고료 한 푼 안 받고 제공하게끔 독려한다. 게다가 누구는 개인출판을 하라고, 누구는 글을 써서 목소리로 읊으라고, 누구는 하드 속에 쟁여둔 글을 전자책으로 내서 투잡하라고 한다. 실제 원고를 검토해 함께해보자던 한 오디오북 업체가 있었는데, 녹음에 후가공까지 다 해주는 만큼 초기 비용인 원고료는 줄 수 없다고 했다. 아예 못 준다는 곳은 그렇다 치고, 주는 곳은 어떨까. 원고료는 내가 활동을 시작했던 26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원고지 장당 1만원 안팎을 벗어나지 못한다. 연감이나 사보 등 극히 일부의 경우가 아니곤, 언론사도 웹진도 모두 외부 원고료는 1만원 안팎이었다. “죄송하지만…”이라며 장당 5천원, 8천원에 원고를 청탁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앞서 언급한 “이 정도 경력자분의 고료”란 게 이렇게나 알량하다. 광고 광고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글이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 작성된다는 점이다. 무계약 용역이다 보니 표준계약서 체결이 조건인 예술인복지재단 산재보험 지원 대상이 될 수도 없고, 주 52시간 노동제나 최저시급 대상에서도 비켜나 있다. 매체 대부분이 칼럼이든 평론이든, 연재든 단발이든, 글쓴이의 위치를 법률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직업인으로서 나의 경력을 확인시킬 방법은 매체들에 별도로 경력증명서를 떼 달라 ‘부탁’하는 것뿐이다. 결국 나 같은 사람들은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는 법의 보호를 받을 길이 없다는 얘기다. 계약서 없이 글을 의뢰하는 건 관례다. 원고지 장당 1만원 또한 관례다. 관례가 가리키는 건 명확하다. “네가 하는 건 ‘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니다”라는 것. 나는 글쓰기에 얽힌 관례가 암묵적인 법칙으로 작동하지 않길 바란다. 얼마 전 나의 일을 어문 노동, 집필 노동으로 인지하고 작가노조 준비위원회에 참여하게 된 이유다. 광고 물론 당장은 이런 사례를 언급하는 것이 내게 역효과가 될 공산이 크다. 매체들로서는 귀찮은 이야기이고, 지면이 궁한 건 언제나 나니까. 그럼에도 말한다. 단 한 편의 글을 청탁하는 데에도 계약서가 제시될 수 있기를, 그리고 최소한 물가상승률이 반영된 적정 수준의 글값이 책정되기를. 이건 매체들이 필자들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전문성을 바란다면 보장돼야 하는 사항들이다. 성장은 이를 감당한 상태에서 꾀해야 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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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게 이득이라는 그들
[6411의 목소리]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게 이득이라는 그들 (2022-05-25) 유미(필명) | 금속노조 주얼리분회 주얼리회사 노조원 2018년 9월28일 찾은 서울 종로구의 한 귀금속 세공수리업소 책상 위에 각종 작업 도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현아! 잘 지냈어? 내 걱정 많이 했지? 처음부터 노조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현장 점거해서 밤새 회사를 지킨다고 하니 많이 놀랐지? 정말 이런 방법밖에 없냐고? 뉴스에나 나올 법한 집회에, 이제는 현장 점거까지…. 사실 나도 실감이 안 나. 광고 코로나19로 회사가 힘들다며 지난해(2021년) 3월 갑자기 무급휴직 하라고 할 땐 한달만 쉬는 줄 알았지. 그래서 무급휴직동의서에 사인한 건데, 회사에선 4월부터 고용유지보조금 신청을 위해서라며 몇몇에게 4~5월 월급의 70%를 받는 유급휴직을 하게 했고, 내 의사와 무관하게 나도 그 대상이 됐어. 6월에야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다시 출근했지만, 일이 없어서 휴직한 게 아니니 유급휴직 기간에도 회사는 수시로 부르더라. 대신 고용유지보조금 신청 요건에 맞게 출퇴근 기록을 남기지 말라더라고. 줄어든 수입을 메꾸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대기 상태에 있어야 했으니 구할 수가 없었지. 고용유지보조금 지원기간 연장으로 회사는 거짓 휴직을 강요하고, 갑자기 줄어든 수입으로 힘들었던 난 너도 알다시피 사직서를 들고 출근했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로 정부는 회사에 고용유지지원금을 줬는데, 그 지원금이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휴직과 고용 불안으로 이어진 거지. 광고 광고 이런 상태로 일할 수 없어서 그만두려는데 회사는 조금만 참아달라고, 실업급여도 받게 해주겠다고, 나라에서 주는 급여를 자기들이 주는 것처럼 말하더라. 베트남에서 엄청난 피해를 보고 돌아온 사장은 그동안 부서별로 몇몇에게만 폭탄 돌리기 식으로 건넸던 동의서를 모든 직원에게 건네고 유급휴직동의서와 단축근무동의서를 쓰도록 했어. 휴직과 임금 삭감이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 거지. 노조를 만들기 전 직원들과 한 면담에서 사장은 그동안 베트남에 머무느라 부사장이 무·유급 휴직으로 임금을 삭감한 것을 몰랐다며 ‘회사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 이해를 바란다’고, 제발 노조는 만들지 말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직원 과반수가 가입한 노조가 생기니, 유급휴직 임금삭감률이 30%에서 10%로 쉽게 바뀌더라고. 광고 노조가 만들어지고 단체협약을 맺는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참 어려웠어. 점심시간을 40분에서 60분으로 바꾸는 데만 5개월이나 걸렸단다. 처음 노동조합에 관해 들었을 땐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을 것으로 생각지 못했어. 같은 일을 하는 지인이 코로나19로 피해를 많이 본 종로 주얼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어. 혼자서 회사와 싸우는 것보다 노동조합에 가입해 하는 건 어떠냐며 종로 귀금속 거리에서 받은 노조가입안내서를 내게 줬지. 거기에 빼곡하게 적힌 종로 주얼리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하더라. 환기구도 없는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청산가리, 질산, 황산 등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화공약품을 사용해 귀금속을 세공하는 수작업은 힘들었어. 하지만 기계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고와 관련해 그 어떤 보호장비 지급도 없었고, 사전 안전교육도 없이 위험하고 미숙하게 현장에 적응해나가야 했지. 위험한 환경에서 매일 작업하는데 건강검진조차 받은 적 없을뿐더러, 독한 화공약품들로 인해 호흡기에 문제가 생겨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했어. 또 수작업과 기계작업을 하다 자칫 손가락이라도 잃게 돼도 산재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거야. 회사 사정이 안 좋아 감원이라도 하면 누구든 속수무책으로 회사를 나가야 해.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오직 노동자들에게만 희생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던 1970~80년대 노동 현장 모습 같지 않아? 종로 주얼리 사용주는 근로기준법 적용에 예외가 많은 작은 사업장을 운영해. 그래야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도 되거든. 처음에는 수습사원이라며 4대 보험 가입을 미루고, 차감될 보험료를 현금으로 주겠다며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게 이득인 것처럼 말하지.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금융거래 때 편의 제공이나 건강검진, 연차, 실업급여 등 혜택이 없어진다는 건 경험하기 전까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더라고. 입사할 때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잘못된 관행이 계속 유지되는 곳이 이 주얼리 업계란다. 누구는 “청년통장, 청년우대형 주택청약통장에 가입하고 싶었는데 4대 보험이 없어서 불가능”했다고 한숨을 쉬더라고. 광고 누구는 유급휴직 하며 쉬면 좋은 것 아니냐고 하겠지. 그런데 원래 적은 월급으로 한달 살기도 빠듯한 사람들이 월급 30%가 삭감됐는데,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 대기 상태가 되니 정말 힘들더라. 아직 할 말이 많은데 일단 이만 줄일게. 네게 다음 안부를 전할 땐 모든 일이 해결되어 있기를 바라며, 너의 친구가. 서울 종로 ‘귀금속 거리’ 등에서 일하는 세공노동자들이 2018년 9월4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제공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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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을지로 ‘분업의 골목’에서 따로 또 같이
[6411의 목소리] 을지로 ‘분업의 골목’에서 따로 또 같이 (2024-01-01) 이진훈 | 금속노조 서울지부 동부지회 인쇄업종분과 준비위원장 2023년 11월23일 서울 을지로 인쇄인 호프데이 행사장에서 필자가 행사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필자 제공 2023년 11월23일 서울 을지로에서 인쇄인 호프데이를 열기로 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감이 커졌다. 한해 조직농사 결산이다. 당일 몇시간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몇시부터 하느냐? 참가비는 없느냐?’ 포스터를 보고 전화했단다. 광고 행사장은 명보극장 사거리 치킨집이었다. 을지로 인쇄인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였고, 금속노조 사업비로 치르는 행사라 따로 참가비는 받지 않았다. 모자라는 금액은 행사장에 후원함을 두어 충당할 거였다. “오늘 몇명이나 올까?” 인쇄밥 먹는 친구에게 물었다. “한 100명? 자리가 모자라면 어쩌냐?” 친구의 넉살에 웃음이 나왔다. 편집디자인 일을 했다. 20여년 전 스물여덟에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작은 인쇄기획사였다. 을지로 인쇄골목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서울특별시 한복판에 삼발이(세바퀴 오토바이)가 돌아다니는 골목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인쇄소 옆 재단집, 그 옆 제본집, 그 반대편 톰슨(특정한 모양으로 종이를 따내는 작업)집, 또, 또…. 인쇄골목이 놀라움에서 친숙함으로 변할 즈음, 나는 몇군데 회사를 거쳐 2003년 가을 소위 ‘합판집’이라는 인쇄업체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 평생 단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투쟁이란 것을 시작했다. 광고 광고 그 합판집은 직원 수가 60~70명 되는 꽤 큰 규모의 인쇄업체였다. 방문이나 인터넷으로 인쇄물을 주문받고 제작해 출고하는 회사였다. 합판집에서는 주문받은 여러 인쇄물을 하나의 인쇄판에 모아 찍는다. 주로 명함이나 전단을 인쇄한다. 전국에서 일감이 넘쳤고, 합판집들끼리 가격 경쟁이 점점 심해지는 시기였다. 합판집은 주문이 밀리면 작은 인쇄소에 맡겼다. 합판집이 을지로의 ‘갑’이었다. 우리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사장 아들의 윽박이 두려웠고 “노예근성에 빠진 놈들”이란 모욕을 더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요구는 간단했다. 사장 아들 김 과장의 퇴진이었다. 광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나서야 알았다. 직원 60명이 넘는 인쇄업체가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연장수당, 노동시간, 유급휴일…. 뭐 하나 법대로 하는 게 없던 사장은 당연히 노동조합을 인정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2년에 걸친 ‘투쟁’ 끝에 우리는 단체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사이에 조합원은 7명으로 줄었다. 사장은 전문경영인을 고용한 뒤 차근차근 구조조정을 준비했다. 우리에게는 더는 싸울 힘이 없었다. 이제 그 합판집에 노동조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육신은 피곤하고 정신은 허탈했다. 다시는 인쇄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인쇄와 동떨어진 일을 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을지로 인쇄바닥에도 뿌리내리고,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도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 것, 그 다짐을 부여잡고 나는 돌아왔다. 대형 인쇄업체와 달리 작은 인쇄업체는 사장이나 노동자나 처지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돈벌이나 노동시간에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을지로 인쇄골목은 분업의 골목이다. 다양한 공정을 소규모 인쇄업체들이 하나씩 맡아 처리한다. 서로 다른 공정들을 이어주는 끈은 예의 삼발이다. 따로 떨어져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인쇄골목의 영세업체들이다. 골목 전체가 하나의 큰 공동체라는 점에서, 어쩌면 협업의 골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돕고 사는 공동체라 해도 권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돈 앞에서는 이웃사촌 간에도 인정사정없는 게 우리 사회다. 재개발 이슈로 일터를 잃지 않을 권리, 일하면서 생활이 가능한 임금을 받을 권리, 노동법을 제대로 적용받을 권리를 중구와 서울시와 대한민국이 함께 돌봐야 하는데, 과연 자동으로 될까. 자고로 권리는 누릴 사람이 지켜내야 한다. 노동자가 목소리를 높여야 하고, 이를 대표해 누군가 전달하고 교섭해야 한다.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다. 광고 “이야, 너 어떻게 한 거야?” 친구에게 감탄사를 날렸다. 그의 말대로 “한 100명”이 오지는 않았지만, 지난해보다 훨씬 많은 50명 넘는 인쇄인이 모였다. 가게에 앉을 자리가 모자랄 만큼 꽉 찼다. 이 친구는 20년 전 그날 힘을 합쳤던 동지다. 함께 하고 힘이 되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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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택배 노동시간 단축은 헛된 꿈일까?
[6411의 목소리] 택배 노동시간 단축은 헛된 꿈일까? (2024-01-15) 서정수(가명)|택배노동자 설 연휴를 1주일가량 앞둔 지난해 1월13일 밤 서울 시내의 한 아파트에서 택배기사가 물품을 배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1월4일 서울 강남구에서 30대 용차 기사가 미끄러지던 택배차를 멈추려다 택배차와 승용차 사이에 끼여 숨졌다. 아내와 뱃속 아기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그를 기억한다. 2021년 가을 일하던 터미널에서 택배를 분류하고 차에 싣는 일을 하며 한달 동안 봤었기 때문이다. 곧 결혼할 예정이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지역으로 갔는데, 옮겨간 곳에서 화를 당했다. 차 사고가 잦은 겨울철이면 나도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아닌지 두렵다. 용차는 택배기사가 다치거나 아플 때 빈자리를 긴급하게 메우는 택배차와 택배기사를 아우르는 말이다. 기사들이 용차를 구하는 일은 드물고, 주로 원청이나 영업소에서 용차를 구하곤 한다. 택배기사들은 아프거나 다쳐서 일을 못 하면 배송하지 못한 만큼 수수료(임금)를 못 받고, 용차 비용도 물어야 한다. 그러니 아주 큰 병 아니면 쉴 수가 없다. 한 동료는 지난해 11월 말 절임배추를 배송하다 넘어져 아킬레스건 손상 진단을 받았는데 깁스한 채 나와 일했다. 척추분리증이 악화돼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도 구부정한 자세로 계속 일하는 동료도 둘이나 있다. 광고 분류인력 투입으로 노동강도가 낮아지긴 했다. 앞서 2021년 1월과 6월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1·2차 합의 때 중요한 내용은 “택배 분류작업이 택배기사의 작업 범위가 아니며, 주당 최대 노동시간은 60시간 이내로 한다”였다. 내가 일하는 터미널에는 조합원이 없어서 그런지 2022년 5월께부터서야 분류인력이 본격적으로 투입됐는데 어쨌든 이를 계기로 ‘까대기’라 부르는 분류작업이 덜 힘들어졌다. 일부 기사들은 분류인력 투입으로 이직 빈도도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인 노동시간 단축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물량이 많은 화요일, 수요일 단체카톡방에서는 심야배송 제한시간을 해제해 달라는 기사들의 글이 빗발친다. 2020년 택배기사 22명이 과로사로 숨지자 택배사들은 심야배송 시간을 오후 9시까지로 제한했다. 오후 9시 이후에는 배송완료 문자를 보낼 수 없게 되자, 8시55분쯤 미리 배송 문자를 보내놓고 마저 배송을 마무리한다. 물건이 오지 않았는데 배송완료 문자를 받은 고객은 기사에게 항의 전화를 한다. 원청은 명절 연휴 같은 때엔 심야배송 제한시간을 1시간 늦춰주는데, 평상시에도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1시간이라도 배송시간을 더 확보해야 항의 전화를 덜 받기 때문이다. 원청은 “우린 오후 9시까지로 배송시간을 제한했는데 기사들이 스스로 더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억울할 뿐이다. 수수료 인상, 인력 충원, 노동조건 개선 같은 근본적인 대책은 세우지 않으면서 우리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지. 광고 광고 택배사와 구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택배 건당 수수료는 대부분 700~850원 사이다. 서울지역에서 건당 900원 이상 받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1~2년 사이 모든 택배사가 택배비를 올렸지만 기사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없다. 24년 동안 택배기사로 일해온 한 동료는 “처음 4년 동안 월급제로 일했고 그 뒤로 건당 1300원을 받았다. 계속 깎여 지금은 1천원도 안 되는데 물가 오른 거 생각해 봐라. 아무리 물량이 많이 늘었다 해도 이건 아니다. 거기다 보험료, 대리점 소장에게 줘야 하는 수수료, 세금까지 생각하면 무조건 많이 싣고 오래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일배송 압박도 장시간 노동 이유 중 하나다. 원청은 매일 전략 고객사 물품 당일배송 지표나 미배송 과다 보유 집배점 현황을 공개하면서 기사들을 압박한다. 심지어 전략 고객사 물품을 당일배송 하지 않으면 건당 천원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하거나, 기사들이 물건을 수거해 올 수 있는 거래처를 회수하겠다고 한다. 광고 2020년 정부 조사 결과, 택배기사들의 1일 평균 노동시간은 12.1시간이었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주 52시간에 맞추는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얘기했다. 이미 주 70시간 이상 일하는 택배기사가 많은데 노동시간 단축도 아니고 유연화라니.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2차 합의 때 주요 의제 중 하나는 ‘택배기사의 주5일제 실시’였지만, 시범실시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 주5일제가 도입된 지 20년이 흘렀는데 택배기사들은 언제까지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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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홈쇼핑 콜센터가 믹서기라면 플렛폼업체는 초고속 블렌더였다
[6411의 목소리] 홈쇼핑 콜센터가 믹서기라면 플렛폼업체는 초고속 블렌더였다 (2022-05-18) 데비(필명) | 고객센터 상담노동자 지난해 4월 서울의 한 고객센터에서 상담노동자들이 업무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 글은 이상적인 노동 환경에서 상담노동자로 근무하고 있는 상상 속 인물 ‘리나’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독일에 사는 행복한 상담사 리나는 고양이도 키우는데, 고양이의 이름은 무려 세계 최대 규모의 서비스 노조 이름과 같아요. 잘 있었나요? 당신의 고양이 베르디에게 제 안부를 전해 주세요. 한국은 베를린보다 봄이 먼저 왔다가 벌써 가버린 것 같아요. 이제 낮에는 좀 더워요. 저는 아직 배달의민족 콜센터에 다니고 있어요. 여전히 노조도 없고, 고양이도 없고, 일에 대한 자부심도 없어요. 광고 리나, 고백하자면 저는 처음 플랫폼 콜센터에 취업했을 때 하도 유니콘기업 어쩌고, 혁신 어쩌고 하길래 ‘설마 악명 높은 홈쇼핑 콜센터처럼 하청에 하청을 두고 화장실도 못 가게 상담사 갈아 넣어서 운영하지는 않겠지?’ ‘시대가 달라졌고 콜센터도 많이 바뀌었을 거야’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하지만 하필이면 처음 들어간 회사가 야놀자랑 쿠팡이츠였어요 그동안 다녔던 홈쇼핑 콜센터가 일반 믹서기라면, 이들 플랫폼업체 콜센터는 초고속 블렌더였어요. 진짜 형태도 없이 갈려서 3개월도 못 다니고 도망 나왔어요. 홈쇼핑 콜센터가 일반 믹서기라면, 플랫폼업체 콜센터는 초고속 블렌더였어요. 형태도 없이 갈려 3개월 못 다니고 도망 나왔어요. 야놀자 콜센터는 충격적으로 더럽고 냄새나는 환경에, 에어컨도 잘 안 돌아가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사장님들은 갈수록 심해지는 쿠팡이츠의 횡포에 화내고, 애원하고, 이러다 자기 죽는다며 울부짖으셨죠. 꿈에서도 민원인이 나와서 그만둔 첫 회사였어요. 야놀자 콜센터는 충격적으로 더럽고 냄새나는 환경에, 에어컨도 잘 안 돌아가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밀려 있는 대기 고객이 너무 많아서 전화 연결되자마자 고객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냐’고 소리를 질러대고, 관리자들은 2분 간격으로 ‘계속 콜 받아라’라고 소리 질러요. 팀장 자리에는 퇴사 서류가 쌓여 있고, 한쪽에서는 그럴싸한 구인광고에 낚인 신입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죠. 모든 사람이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대서 그런지 어느 날부터 이명이 들려서 그만뒀어요. 퇴사하고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야놀자 본사는 정말 근사하던데, 자기들 대신 욕먹는 콜센터 화장실이나 한칸 더 지어 주지, 싶더라고요. 광고 광고 쿠팡이츠에서는 가게 사장님들 전화를 받는 재택근무를 했어요. 통화가 6분이 넘어가면 여기저기서 사유서를 보내라고 미친 듯이 메시지가 와요. 왜 6분인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일하는 내내 감시와 통제를 받지만, 정작 화가 난 식당 사장님이 전화로 악다구니를 쏟아내는 상황에서는 ‘그냥 잘 들어주라’며 미뤄요. 그때 이 회사는 상담사를 욕받이로만 생각하는구나 싶더라고요. 식당 사장님들 당장 생계가 걸린 문제라 하나하나 너무 절실하고 처절한데, 회사는 민원 해결에는 관심이 없고, 이유 설명 없이 그저 콜 수만 늘리라는 식이라 점점 강성 민원인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어요. 사장님들은 갈수록 심해지는 쿠팡이츠의 횡포에 화내고, 애원하고, 이러다 자기 죽는다며 울부짖으셨죠. 꿈에서도 민원인이 나와서 그만둔 첫 회사였어요. 근데 리나, 더 무서운 걸 말해 줄까요? 퇴사하고 얼마 뒤에, 쿠팡이츠 상담사와 통화하던 사장님이 숨졌다는 소식이 뉴스에 나왔어요. 사람 쓰러졌다는데도 세상 메마른 목소리로 “그래도 고객이 요청하시니까 사과 부탁드립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아! 저게 나일 수도 있었겠구나’ 싶어서 소름 끼쳤어요. 그 상담사는 회사에서 치료 지원이라도 받았을까요? 이제 쿠팡 로고만 봐도 소름이 끼쳐서 로켓배송은 꿈도 못 꿔요. 광고 리나, 어제 콜 평가 점수 85점 받았다고 피드백 왔어요. 무슨 평가냐고요? 매달 서너번씩 랜덤으로 상담 내용을 듣고 점수를 주는 거죠. 점수를 잘 받으려면 어떤 콜이든 “아, 그러세요?”가 두번 들어가야 해요. “아~네. 그러세요?”라고 하면 빵점이에요. 또 고객이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면 빵점이에요. 고객이 감사하다면, 상담사는 그보다 더 감사함을 표현해야 한다는 거죠. 고객이 불만을 말하는데 그냥 “죄송합니다”라고 답해도 빵점이에요. 이게 뭔 소리냐고요? 배달의민족에서 하청 준 콜센터 업체들끼리 경쟁하다 상담사 말려 죽이는 소리예요. 2018년도에 배달의민족 본사 근처에 대규모 콜센터를 오픈한다는 기사가 났는데, 그 기사 말미에 배민 최고운영담당자라는 분이 “상담사의 행복과 만족도가 자연스럽게 고객서비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배달의민족 고객센터가 이번 통합 확장 오픈을 계기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모범 사례이자 기준점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럴듯하죠?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제로는 부산과 광주에서 지자체 보조 받아서 간접고용만 대규모로 늘리고 있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배민이 아직 ‘세계적으로 우수한 모범 사례’가 되려고 노~오~력 중이라고 굳게 믿고 있답니다. 배달의민족은 계속 노력할 거고, 저도 최저시급 받으며 버티다 보면 언젠가 리나처럼 안정적인 직장에서 장기근무도 해보고, 내가 하는 일에 애정과 자부심도 느껴보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며 귀여운 고양이랑 깨 볶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닌가요? 그냥 노조나 만들까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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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타투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
[6411의 목소리] 타투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 (2022-05-11) 김도윤 │ 타투유니온 지회장 지난해 9월13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린 타투이스트 인권침해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기자회견에서 김도윤 타투유니온 지회장(오른쪽)이 진정 및 긴급구제신청서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제니야! 오랜만이다. 얼굴 맞대고 앉아본 건 고등학교 졸업하고 23년 만인가? 사법시험 준비한다는 얘기까지는 들었는데, 중년의 판사가 되었네. 잘 어울려. 진심이야. 나? 난 디자인 그만뒀어. 이제 17년차 타투이스트야. 까만 옷 입은 네 동료들은 나보고 불법의료시술자라고 말하지만. 지난달 헌법재판소에서 선고가 있다고 연락이 오더라. 급한 일을 미루고 가봤는데, 까만 옷 입은 이들이 나란히 앉아 판결문을 읽더니 휘리릭 들어가더라. 그럴 거면 그냥 인터넷에 공지하지 왜 시간 낭비 하는지 모르겠어. 하여튼 타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타투는 의료행위라고 하더라. 폭력적인 코스프레 같았어. 결론은 자기들한테 묻지 말고, 국회의원 졸라서 입법을 하라는 거야. 매듭을 잘못 묶은 건 사법부인데, 엉망인 매듭은 입법부한테 풀라는 거지. 광고 삼권분립? 그렇지, 케이(K)-삼권분립 최고지. 들어봐봐. 지난해부터 갑자기 국세청 직원들이 타투 스튜디오를 찾아왔어. 문신업으로 사업자등록을 내라는 거야. 몰랐어? 우리 정식 사업자등록 가능해. 2015년에는 고용노동부의 미래유망신직업 17개에 타투이스트도 포함됐어. 물론 직업코드도 있고. 정말이야. 웃기지? 물론 우리도 정식으로 등록하고 세금 내면서 떳떳하게 하고 싶지. 그런데 국세청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단속당하면, ‘영리를 목적으로 불법의료행위를 했다’며 최저 형량 징역 2년을 선고받아야 해. 이게 말이 되니? 그림 그리고 징역 2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 내 동료들은 종종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해. 성실한 동료들이 그렇게 떠나가는 걸 보면서도 우린 할 수 있는 게 없어. 결국 우리는 투명인간이 되는 것을 선택해. 사업자등록 없이 일하면 단속돼도 보통 벌금형으로 끝나거든. 이게 케이-삼권분립이야. 삼권분립이 너무 잘돼서, 입법·사법·행정, 서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전혀 몰라. 웃으면서 말하지만 난 진짜 슬퍼. 타투가 의료라는 법원 판례는 1992년에 만들어졌거든.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 판례를 그대로 베껴왔어. 그런데 그 일본마저도 2020년에 이 판례 폐기했어. 이제 진짜 한국만 불법이야. 물론 일본이나 한국이나 그 시절엔 모든 국민이 타투를 싫어했지. 우리 어렸을 때는 문신을 한 사람은 조폭 아니면 조폭 흉내 내고 싶은 양아치라고 했으니까. 광고 그런데 이 궤변이 30년이나 연명하다 보니 이제는 의사들이 타투로 돈을 벌어. 지금 네이버에서 ‘눈썹타투’라고 검색해봐. 유료광고하는 업체 100%가 의원들이거든. 이제 밥그릇이야, 큰 밥그릇. 궤변 위에 쌓아올린 겁나게 큰 밥그릇. 의사협회는 국민의 안전을 핑계대며 타투 법제화를 막아. 지지난달에는 의사협회가 타투합법화 저지 티에프(TF)도 만들었더라. 부끄러운 줄을 몰라. 정작 병·의원에서도 타투를 하는 건 의사가 아니야. 당연히 우리 같은 비의료인이지. 그러니 병·의원이 타투를 하면 더 큰 범죄가 돼. 의사면허 대여, 불법의료시술 지시 및 알선 그리고 홍보, 불법계약 등등. 이런 게 적발돼 의사면허가 정지되는 사례도 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나 보더라. 1조원 규모의 어마어마한 시장이니까. 더 웃긴 건 타투는 의사가 직접 해도 불법이라는 거야. 왜냐하면 전세계에서 의료기기 인증을 받고 생산되는 타투 용품은 없거든. 세계에서 타투를 의료행위로 분류한 곳이 한국밖에 없는데, 누가 한국만을 위해 의료기기 인증을 받겠냐고. 의사도 비의료기기로 타투를 할 수밖에 없는, 불법을 저질러야 하는 상황인 거지. 결국 한반도에서 이뤄지는 모든 타투는 불법이야. 제니야, 이것 봐. 네 동료들이 망쳐놓은 건 나랑 내 동료의 삶뿐만이 아니야. 양심 없는 의사들도 돈벌이에 혈안이 돼서 의료의 존엄함마저 버렸어. 광고 그리고 보니 너 눈썹 타투 했네? 아! 받는 건 불법이 아니고, 타투를 하는 것만 불법이라고? 물론 알지. 작업을 청탁한 손님이 갑자기 돌변해서 신고하겠다며, 되레 돈을 요구하는 사례도 많거든. 제니야, 같이 웃으면 어떻게 해? 내가 웃으면서 말한 건 진짜 웃겨서가 아니잖아. 갑자기 불안하네. 내가 연예인한테 타투를 해줬는데, 어떤 한가한 녀석이 신고를 했어. 곧 2심 재판이 시작돼. 판사들이 문화적 소양은 부족해도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웃음의 맥락도 파악 못 하는 너를 보니까 갑자기 불안해진다. 광고 그냥 우리 10년쯤 지나거든 다시 보자. 그때는 나도 투명인간이 아닐 테니, 맥락을 파악하지 않아도 되는 웃음을 지니고 있을 거야. 널 위해 기도할게. 내 아내가 목사거든.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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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가습기 살균제 피해 29년, 아직도 탄원서를 씁니다
[6411의 목소리] 가습기 살균제 피해 29년, 아직도 탄원서를 씁니다 (2024.01.08) 허정자 │ 가습기 살균제 피해 유가족 숨진 딸 의영이보다 두 살 많은 93년생 오빠와 엄마 뒤엔 당시 사용했던 가습기 통이 놓여 있다. 필자 제공제 딸 의영이는 1995년 10월5일 서울 은평구 응암동 한 산부인과에서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아기와 함께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는데, 며칠 뒤 의영이가 감기 증세를 보였습니다. 동네 소아과에 갔더니 건조하면 안 좋다며 가습기를 잘 틀어주라고 했습니다. 1993년 5월생 아들도 감기에 자주 걸려 집에서 가습기를 계속 사용했었는데, 때마침 티브이에서 방송인 김연주씨가 “세균과 물때를 다 없애준다”며 유공(현 에스케이) ‘가습기메이트’를 선전하는 광고에 혹해 남편에게 사 오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바로 동네 마트에서 ‘가습기메이트’를 사 왔습니다. 저는 매일 가습기를 틀었고, 아기 코밑에도 바로 대주며 쐬게 했습니다. 하지만 증세는 좀처럼 낫지 않고 더 심해지는 것 같아, 더 큰 병원을 찾아 서울서부역 건너편 소화아동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영아실에 입원시키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오후 5시쯤 위급하다는 연락이 와 병원에 도착하니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기 좀 살려달라고 수없이 외쳤습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우리 딸 의영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태어난 지 50일 만인 11월23일, 의영이의 짧은 삶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렇게 내 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참 힘들고 마음 아프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흘러 티브이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독성 화학약품이라는 뉴스를 봤습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엄마가 아기를 죽인 셈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프지 말라고 살균제를 넣었던 가습기가 아기를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게 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광고 아직도 아기가 쌕쌕거리며 입술이 파랗게 되어 힘들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리 딸을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었으니 저도 딸아이 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참 많이 했습니다.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고 있으니까요. 한동안은 우울증이 심하게 찾아와 아기를 죽인 죄인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남편도 제가 힘들어할까 봐 표현은 안 하지만 너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29년이 지난 지금도 딸아이 또래 애들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 때면 의영이 생각이 납니다. 너무나도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현재 환경부 산하 환경산업기술원에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고자는 7891명, 사망 피해자는 1843명에 이릅니다. 이 보이지 않는 ‘공기 살인’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제 딸 의영이가 첫번째 사망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제 딸은 아직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아니라네요. 너무나도 기가 막힌 일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우리 딸 의영이는 “모세기관지염과 흡입성 폐렴”이 사망 원인이라는 사망진단서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환경관련성 평가서, 환경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 환경평가서가 있지만 입원한 지 하루 만에 사망하였고, 시간이 많이 지나 의무 진료 기록이 없어서 아직도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2019년 개정 시행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에 의해 ‘가습기 살균제 노출 확인자에 해당한다’는 환경부 통보만 받았을 뿐 개별 심사도 대기 중입니다. 흡입성 폐렴도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연구 결과도 나왔는데, 정작 의영이는 피해자가 아니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균제의 특정 성분이 폐질환을 일으킨다는 것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1심에서 전원 무죄 선고를 받은 에스케이케미칼(유공), 애경, 이마트 관계자들과 2023년 10월26일 재판에서도 서로 변명만 하는 변호인들을 보면서 분노한 남편은 탄원서를 썼습니다. 2024년 1월11일 이들 기업 관계자들의 과실치사 혐의 형사재판 항소심 선고가 예정돼 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가 에어로졸 형태로 분무되어 폐에 도달할 뿐만 아니라 염증을 일으킨다는 실험 결과도 나와 있는데, 가습기 살균제 피해 소멸시효는 30년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숨쉬기 힘들어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어간 사람들이 있는데, 도대체 제 딸 의영이가 살아보지 못한 29년은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재해·위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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