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나는 대리기사 노동자다
나는 대리기사 노동자다 (2022-07-13) 한기석 |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경기지부장 지난 5월12일 오전 서울 중구 동반성장위원회 앞에서 ‘대리운전기사 권익과 시민 안전을 보장하는 사회적 대책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벌써 13년이 지났다. 조그만 사업을 하다가 문 닫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친구가 매일같이 찾아와 운전면허증이 있으니 대리운전이라도 하라고 얘기한 게 그 시작이었다. 대개 그렇듯, 새로운 직업을 찾을 때까지 6개월 정도만 하리라 마음먹었다. 친구가 소개해준 업체를 찾아 “수중에 만원도 없으니 대리운전 보험료와 콜 수수료 충전금을 먼저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하니, 업체 사장님이 웃으면서 그러자고 말해 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첫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업체에서 알려준 식당으로 찾아가 “대리운전 부르신 분 계세요?”라고 외칠 때 심장이 쿵쾅거렸고, 식당 안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짧은 거리를 운전하면서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집으로 가는 길을 설명해주는 고객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장거리, 그러니까 타 지역으로도 나가기 시작했다. 자주 다니는 지역이 아닌데다 한밤중이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경우가 잦았다. 혼자 고립됐다는 생각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슬퍼지기도 했다. 낮과 밤을 바꿔 살면서 세상일에 점점 무덤덤해지고 이웃이나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져 가니 더욱 외로워졌고 나 자신이 외계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광고 대리운전 기사들은 밤에 혼자 일하기에, 본인이 얘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각자의 사정이나 어려움을 알 수 없었다. 매일같이 마주치던 동료가 갑자기 사라진 뒤 2~3개월 만에 나타나 “그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말한 경우도 있었다. 또 동료 결혼식이나 상갓집에 찾아가면 자신이 대리기사라는 말을 주변에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오기도 했다. 안타까웠고 속상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열심히 사는데 왜 당당하게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못해야 하는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됐고, 대리기사의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며 계속 나를 설득해왔던 민승 형을 찾게 됐다. 형은 나를 서울 강남 교보사거리 현장에서 진행된 첫번째 공식 회합에 데리고 갔다. 2015년의 일이다. 회합에 모인 기사들은 업체들의 갑질을 개선하고 기사들을 모으기 위한 방안에 관해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업체들의 대표적인 갑질 중 하나는 콜을 받는 프로그램을 서울, 인천, 경기 세개로 쪼개 사용료를 세배로 받는 것이었다. 장거리 콜을 받기 위해 기사들은 지역별로 쪼갠 같은 프로그램 두세개를 핸드폰에 깔고, 두세배 사용료를 낼 수밖에 없었다. 프로그램당 사용료가 한달에 1만5천원이고, 수도권 대리기사가 10만명 정도임을 고려하면 대리운전 업체들은 대략 매달 20억~30억원의 부당이익을 얻어 프로그램 개발사와 4 대 6으로 나눠 가졌다. 광고 광고 대리운전 업체들은 대리기사들을 단체보험에 가입하도록 묶어두고 보험사와 손잡고 월 7만~8만원 하던 보험료를 12만~15만원 수준으로 올리기도 했다. 물론 업체는 보험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았다. 또 업체들은 매달 관리금 명목으로 3만원을 고정적으로 빼갔지만 뭘 관리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업체의 갑질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콜을 잘못 수락해 미안하다며 빼달라고 요청하면 온갖 쌍욕을 들어야 했다. 이런 상황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회합에 합류하게 됐다. 함께 고민해 끌어낸 결론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를 통해 대리기사 개개인의 의식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저녁과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고, 새벽에는 홍보 활동과 업체 갑질 철폐투쟁에 나섰다. 물론 순탄치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짓밟혀도 또 다른 새싹이 피어나는 세상의 이치처럼, 다시 모이기를 반복하면서 차츰 동료 기사들을 설득해나갔다. “우리는 한 가정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다. 왜 패배의식에 젖어 있어야 하는가?” “일하다 다쳐도 보상은커녕 휴무수당도 받지 못하는데, 함께하면 4대 보험 가입을 쟁취해낼 수 있다”고 가는 곳마다 호소하고, 기사들과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론사 인터뷰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응해 대리운전 기사들의 현실을 국민에게 최대한 알리려 했다. 광고 그런 끝에 2019년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경기지부가 설립됐고, 지부장을 맡게 됐다. 이후 3년 동안 참 많이 변했다. 조합원 수는 100명 남짓에서 500여명으로 늘었고, 몇몇 시·군에는 풀뿌리 지회도 생겼다. 하지만 업체들의 갑질은 여전하고, 개선해야 할 노동조건은 수두룩하다. “나는 대리기사 노동자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며 동료 기사들과 함께 계속 전진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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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자활근로자의 노동은 노동이 아닌가요
자활근로자의 노동은 노동이 아닌가요 (2023-10-22) 이종천 | 자활노동자 삼색 볼펜심을 보디에 하나씩 꽂고 각각 스프링을 끼운 뒤 디바이더를 삽입해 볼펜심들을 나눈다. 그 뒤에 선축을 조립하고 마지막으로 볼펜을 쥐면 손에 닿는 라바라는 고무를 끼운다. 이렇게 볼펜 한자루가 조립된다. 필자 제공 오늘도 오전 9시에 출근해 작업 책상에 앉는다. 옆자리 동료와는 눈인사나 대화도 없이 바로 볼펜 조립을 시작한다. 내가 하는 일은 검정, 파랑, 빨강 볼펜심에 스프링을 끼우고 볼펜 본체에 끼워 넣어 조립한 뒤 제대로 조립이 되었는지 딸깍딸깍 작동해보고 바구니에 담는 일이다. 이렇게 온종일 작업해서 한 사람당 하루 볼펜 400~500개가량을 만든다. 단순 작업이라 일은 쉬워 보이지만, 일하는 환경까지 수월하지는 않다. 50분 작업에 10분 휴식 주기로 돌아가는 근무시간. 화장실도 가고, 담배도 한대 태우고, 작업시간 중이라 받지 못했던 전화 통화라도 할라치면 휴식시간 10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특히 10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올 초에는 대장, 소장 협착으로 절개 수술을 받았던 나는 물이나, 커피 같은 걸 조금만 잘못 마셔도 바로 설사를 하는데, 작업시간 50분을 참다가 휴식시간 10분 안에 해결하려면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그렇게 철저히 시간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휴식시간 10분에서 1분이라도 늦으면 ‘지시 불이행’이라며 징계를 받기 때문이다. 물론, 징계라고 해서 무슨 큰 제재를 가하는 건 아니지만, 감독관의 눈이 늘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광고 나는 2년차 자활노동자다. 정확한 사업 명칭은 ‘자활 근로 참여자’. 노동자(근로자)가 아니란 얘기다. 그러나 자활 근로 참여자도 엄연히 법정 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 일한다. 그렇게 한달을 일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120만원 남짓. 자활 근로 참여자는 노동자가 아닌 참여자이기에 근로기준법에 따른 최저임금이나 4대 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저소득 취약계층의 자활과 자립을 위해 마련된 자활센터 사업장은 만기 5년짜리 한시적 일자리다. 5년을 채우면, 더 일하고 싶어도 떠나야 한다. 5년간 일한 데 대한 퇴직금은 물론 없다. 퇴직이 아닌 참여 종료이기 때문에. 내 나이 60이다. 1989년부터 알루미늄 업계에서 30년간 일했다. 품질관리 기사로 시작해 관리팀장, 공장장을 거쳐 개인사업까지 그야말로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그 결과 완성차 대기업에도 내가 생산한 제품을 여럿 납품했다. 그러나 내리막은 한순간이었다. 한번 삐끗한 사업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가진 것이라곤 몸뚱어리 하나 딱 남게 된 나는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여름에 가로등 세우는 현장 일은 물론 아파트 경비, 지하주차장 관리원 등으로 열심히 일했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고된 노동으로 건강이 나빠지며 그마저도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깨 골절 수술까지 받게 되면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지 거주지 행정복지센터에 신청해 일정 정도 생활비를 지원받고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광고 광고 3개월이 지난 뒤 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수급자 신분이 유지되려면 자활센터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나 또한 일하고 싶었기에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나처럼 자립 의지는 있으나 여러 상황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자로서 일할 기회를 준다니 너무도 감사한 일이었다. 누구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쓸모와 노동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채울 기회라니, 그것을 또 공적으로 지원해주다니, 참으로 좋은 제도 아닌가. 그러나 한달, 두달 일을 해나갔지만 나는 자존감을 얻지 못했다. 자립과 자활을 돕기 위한 것이라던 나의 일이 정작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 되고 싶어 참여한 자활사업이지만, 정작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또 한번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현실이 서럽다. 정부가 취약계층에 ‘희망’을 준다며 일자리 늘리기에 열을 올리면서 정작 보호받아야 할 이들의 권리는 왜 보호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다가오는 2026년이면 나도 참여 기간이 종료돼 더는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때까지 나는 이곳에서 노동 아닌 노동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과연 나는 이 사회의 일원인 노동자로서 내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고 있는지, 값싸게 빼앗기고 있는 것인지 헷갈려 하면서.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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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는 네번의 전쟁을 겪은 27살 팔레스타인 난민입니다
나는 네번의 전쟁을 겪은 27살 팔레스타인 난민입니다 (2024-04-01) 살레 알란티시 | 팔레스타인 난민 지난 3월2일 협동조합 쩜오책방에서 열린 ‘파주 팔레스타인 평화’ 행사에 필자가 발표자로 참여해 가자지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H6s김지하 제공 폭발의 굉음이 시작된 2008년 여름, 나는 영어시험을 치르려고 교실에 앉아 있었다. 학교의 온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이스라엘 점령군이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틀었다. 사람이 죽어가고 건물이 파괴되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가자에서 내가 목격한 첫번째 전쟁이 시작됐다. 내 이름은 살레 알란티시, 1997년 가자시티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나온 첫날 이래 지금까지 난민으로 살고 있다. 1948년 야브나로부터 강제 이주한 내 부모님과 가족은 칸유니스, 마가지, 마지막으로 샤티까지 여러 난민 캠프를 전전해야 했다. 2022년 12월, 한국에 유학생으로 입국한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상태다. 생계를 위해 중고차 매매업에 종사하며 팔레스타인의 인권 상황을 알리는 활동가로 살아간다. 광고 광고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살아가는 가혹한 현실을 깨닫게 한 그날 이후, 가자에서 나고 자란 팔레스타인인으로 고통은 점점 커졌다. 지구의 어떤 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옥과 같은 상황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75년이 넘도록 초법적인 살인과 자의적 체포와 구금에 시달려왔다. 내가 처음으로 폭격에 노출된 건 2001년, 네살 때였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나는 시장에서 산 조그만 병아리의 집을 짓고 음식과 물을 주면서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해 질 무렵, 폭격이 시작되고 집이 마구 흔들렸다. 어머니가 달려와 덜 위험한 아래층 할아버지 집으로 피하라고 했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고, 미처 데려오지 못한 병아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첫번째 폭격의 기억은 불행히도 마지막이 아니었다. 광고 살아오며 네번의 전쟁(2008, 2012, 2014, 2021년)을 겪은 나는 현재 스물일곱살의 난민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지붕 없는 감옥’으로 불리는 가자에서 19년 동안 가혹한 봉쇄 속에서 살아왔다. 사람이 아니고 새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는가? 한국에 오기 전에 내가 그랬다. 벽을 넘어, 어떤 곳이든 여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새와 달리, 나는 장벽과 가시철조망에 둘러싸인 새장에 갇혀 있었다. 가자를 벗어날 수 없는 나와 200만 주민들의 고통은 이스라엘 점령군이 이집트로 통하는 육로를 차단하고, 물건의 이동을 가로막으며, 유일한 공항을 파괴하고, 지상과 해상 봉쇄를 시작한 2006년 시작됐다. 가자지구는 기본적인 생필품마저 바닥난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16시간이 넘게 전기가 차단되어 봉쇄가 시작된 직후엔 완전한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작은 손전등에 의지하다 배터리가 다 되면 촛불을 켜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가자의 다른 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동차 배터리로 등을 밝히는 것을 생각해냈다. 부엌 가스가 바닥나 나무나 종이로 불을 지펴 요리했고, 유일한 이동 수단인 자동차의 연료가 없어 주민들은 요리용 오일을 이용했다. 담수화를 위한 연료 부족으로 물을 얻기도 쉽지 않았다. 이것이 가자에서 매일 겪어야 했던 일이고, 나는 그 세세한 장면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나는 심각한 파괴와 참혹한 전쟁을 피해 안전하고 더 나은 삶을 찾으려 한국으로 왔다. 2022년 12월에 새로운 삶이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지 1년이 채 안 돼, 잔혹한 전쟁이 다시 가자에서 벌어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전쟁은 120일 넘게 지속되고 있다.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인 3만명에 가까운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으며, 70%가 넘는 주택과 시설이 파괴되었다. 할아버지, 삼촌, 외숙모, 사촌 그리고 많은 내 친구들이 죽임을 당한 이후,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버지 차에 떨어진 폭탄, 여동생 집을 파괴한 포탄에도 불구하고, 기적처럼 내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살아남았다. 전쟁은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천명이 고향을 잃고 난민이 되어 극한의 추위에도 텐트에서 살고 있고, 먹을 것이 없어 나뭇잎과 동물 사료를 먹으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나의 민족이 겪는 고통이 끝나기를, 전쟁이 종식되기를, 내 나라가 해방되어 모두가 평화와 안전 속에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광고 번역 유유리 ‘한옥커즈’ 공동대표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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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는 배달라이더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
나는 배달라이더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 (2022-07-06) 위대한 | 라이더유니온 조합원 라이더유니온 조합원들이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배달의민족(배민)의 실거리요금제 분석 결과를 발표하고, 배민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에 대한 검증과 안전배달료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배달을 시작하고 벌써 3년이 흘렀다. 27살에 시작해 지금은 계란 한판 나이다. 시작은 너무나 쉬웠다. 동네배달대행사에서 면허증 확인하고 보증금 10만원을 내고 리스 오토바이를 받아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할 때 보통 오토바이는 렌트와 리스 가운데 선택하는데, 하루 사용료가 더 저렴한데다 1년 계약기간을 채우면 내 오토바이로 가져올 수 있는 리스를 선택했다. 광고 그렇게 1년2개월을 배달대행사에서 일하다 팬데믹이 오면서, 배달의민족(배민)이나 쿠팡이츠 등에서 배달하는 이른바 플랫폼 노동자가 되었다. 당시는 너도나도 일반배달대행에서 더 높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던 배민, 쿠팡으로 갈아타던 때였다. 배민과 쿠팡은 기사 모집을 위해 돈을 엄청나게 쏟아붓고 있었다. 여러곳이 아닌 한곳만 배송하는 단건배달이라는 것도 장점이었다. ‘생각대로’라는 일반배달대행업체에선 평균 3~6개를 모아 배달을 했는데 쿠팡이츠와 배민은 한번에 한건 배달이니 여유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착오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실시간 배달수수료와 피크시간의 높은 수수료를 받기 위해선 정말 위험을 감수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납득이 안 되는 상황도 여럿 있었다. 라이더들은 최초 배달수수료 단가를 보고 콜을 수락하는데, 안내받은 수수료와 배달 완료 뒤 수수료가 달랐다. 고객센터에 항의하니 (서로 다른 액수가 나온) 스크린샷을 찍어 보여달라는데, 구글 정책상 앱 내 캡처가 안 돼 입증할 수가 없었다. 고객센터 상담사는 정해진 가이드로만 안내할 뿐, 결국 손해를 보고 말아야 했다. 광고 광고 개인이 아무리 불합리하다고 외치고 싸워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생각에 2020년 12월께 라이더유니온이라는 배달노조를 찾아갔다. 이때부터 플랫폼 회사들이 혁신적이라고 말하는 인공지능(AI) 알고리즘에 대항하면서 내 인생 첫 노조활동이 시작됐다. 사실 말이 좋아 인공지능이고 알고리즘이지, 어차피 사람이 하던 일을 사람이 프로그래밍해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일하다 보면 ‘이게 과연 인공지능이 계산해낸 최적의 일감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상황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치동에 있는데 잠실 롯데타워 또는 잠실새내까지 가서 픽업해서 다시 대치동 아파트로 배달하라는 콜을 받은 적이 있다. 4㎞ 이상 이동해 음식물을 픽업한 뒤 다시 4㎞ 이상 되돌아와 배달하란 것인데, 저녁시간에 편도 15~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왕복 운행하라니 이게 말이 되나? 보통 콜은 내가 있는 지역 근방에서 픽업해 근방으로 배달하는 것들인데, 인공지능은 되레 이렇게 꽤 먼 거리를 오가도록 지시를 내린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인공지능 배차 방식을 지금도 하루에 몇번씩 받곤 한다. 광고 인공지능은 그냥 플랫폼 회사의 좋은 방패막이이자 우산 아닐까? 우리가 이런 문제를 제기해도 플랫폼 회사는 인공지능 뒤에 숨기 바쁘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점을 개선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공지능을 내세우며 더 갑질을 한다. 영화에서나 그려지는 인공지능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를 사는 것 아닌가 느낄 때도 잦다. ‘생각대로’나 ‘바로고’ ‘부릉’ 같은 일반배달대행업체 라이더들은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일반 직장인처럼 출퇴근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한다. 근로기준법상 이렇게 일하면 근로자로 봐야지만, 라이더들은 아직도 프리랜서, 개인사업자일 뿐이다. 이런 문제들이 산적한데 관계 부처와 정치권 움직임은 거북이보다 느리다. 두곳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라이더의 경우 한 사업장에서 월 소득 115만원 이상을 벌거나 93시간 이상을 일해야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전속성 기준 폐지에도 2년이 걸렸고,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은 투쟁을 해야 했다. 선진국들은 다르다고 한다. 스페인만 보더라도 배달라이더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알고리즘을 공개하도록 한 ‘라이더법’이 지난해부터 시행되고 있다. 배달라이더는 플랫폼 노동자의 문제점을 몸으로 받아내는 직업군이다. 사회적으로 이슈화가 되면서 많은 점이 개선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자기가 일을 하는 수수료 결정권도 없을뿐더러 평점제도에 묶여 결국엔 회사가 원하는 대로 일을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일하지만, 우리는 플랫폼 노동자이자 개인사업자고 프리랜서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도로 위에 있을 것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며, 여러분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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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의 퇴직공제금은 누가 가로채 갔나?
 나의 퇴직공제금은 누가 가로채 갔나? (2023-10-29) 최우영 | 권리찾기유니온 마루지부장 ‘전국 아파트 마루시공 불법하도급 명단발표 및 폐지투쟁 돌입 기자회견’이 지난 4월11일 오후 정의당과 권리찾기유니온 주최로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실내에 마룻바닥을 시공하는 노동자다. 7년 전 일을 시작할 때는 열심히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기에 죽어라 일만 했다. 하루 평균 14시간 마루를 시공하느라 온몸 관절이 골병들어 신음하는데, 받는 돈은 일하는 시간으로 환산하니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일당이 아닌 시공하는 만큼 돈을 받는 평단가 구조에서 전국 각지를 돌며 일하느라 식비, 숙박비까지 부담해야 하니 주 80시간, 90시간 노동할 수밖에 없다. 주 52시간을 지키면 최저임금도 안 되기에 장시간 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공 전 바닥 기초작업, 청소, 짐 치우기 등 무보수 노동시간도 많았다. 왜 이 일을 시작했나, 자괴감 속에 하루하루 버티던 중 일본에서 일했던 작업자를 만났다. 일본은 하루 일당 30만원에,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하루 시공 평수를 8평으로 제한한다고 했다. 미국, 유럽에서도 마루 시공자가 전문기술자로 존중받는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왜 존중받지 못할까. 마루 현장의 실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부터 부산에서 파주까지 5개월 동안 현장을 돌며 많은 시공자와 대화하며 하나씩 문제를 알게 됐다. 광고 건설 현장에서 마루 회사는 실내건축 면허가 없는 불법 하도급업체 ‘오야지’로 불리는 중간관리자에게 노무관리를 맡기고, 오야지는 노동자를 고용해서 마루를 시공한다. 임금 지급은 세가지 방식이 있다. 먼저, 마루 회사에서 4대 보험을 공제하고 마루 노동자에게 임금을 정상적으로 지급하는 경우다. 두번째는 마루 회사와 불법 하도급업체가 6 대 4 비율로 임금을 나누어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때 마루 회사 지급분은 정상적인 근로소득으로 신고하지만, 나머지는 3.3% 세율이 적용되는 사업소득으로 신고한다. 세번째는 불법 하도급업체가 전액 지급하는 방식인데, 이때 임금 전부를 사업소득으로 신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루 회사가 직접 고용할 때 지켜야 하는 근로기준법, 4대 보험 가입 등을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 광고 광고 임금은 20년째 ‘1평 시공 1만원’이다. 건설노동자에게 퇴직금을 주기 위한 퇴직공제금 제도가 마련돼 있지만(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건설사나 마루 회사는 공사를 시작하면 퇴직공제금으로 노동자 1인당 하루 3000~6500원을 건설공제회에 적립해야 하는데, 한달을 일했는데 한두주만 적립해주거나 아예 하루도 적립해주지 않는 현장도 있었다. 공사비에 포함된 나의 퇴직공제금은 누가 가로챈 것일까? 부당한 마루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해 2022년 6월 대구에서 뜻 맞는 동료들과 만나 회의하고 규약을 만들어 한국마루노동조합 설립 신고필증까지 받았다. 기자회견, 간담회, 국회 방문, 노동청 고발, 국토교통부 고발 등 정신없이 달렸다. 일과 노동운동을 병행하니 가정생활은 엉망이 되었고 생계 때문에 떠나는 동료들이 생겨 2명만 남았다. 광고 그러던 중 올해 3월 같은 현장에서 일하던 동료가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금요일에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먼저 숙소로 들어간 뒤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뉴스로만 보던 과로사가 내 옆에서 일어나다니. 결혼도 안 하고 부산에 노부모를 모시고 일만 하던 49살 동료는 산재 인정도, 어떤 사과도 못 받고 떠나갔다. 알려지지 않은 동료들의 죽음이 소문처럼 들려왔다.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지난 9월 체불 임금 사건 조사 때 마루 회사 대표는 노동청 근로감독관 앞에서 대놓고 노조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조합원들에게 백지 근로계약서를 사진 찍게 하고 일한 일수를 기록하게 한다. 그리고 퇴직금이 적립되고 있는지 건설공제회에 확인하고 만약 누락돼 있으면 전국 노동청에 진정을 넣는다. 하지만 건설공제회는 강제수사권이 없다며 공제금 적립 감시에 손을 놓고 있고, 불법 하도급을 없애겠다던 국토교통부는 검찰에 가보라고 한다. 그 결과 지금도 마루 공사 현장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임금 체불이 여전하고, 불법 하도급과 백지 근로계약서 관행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 투쟁을 보면서 같은 처지의 타일 노동자들도 노조를 만들겠다고 한다. 우린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기도한다. 다시 현장에서 마루를 시공할 그날이 오기를.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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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예술과 밥벌이 노동 그 사이 어디쯤
예술과 밥벌이 노동 그 사이 어디쯤 (2024-03-25) 제소라 | 읽고 쓰고 그리는 예술노동자 2016년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에 여성 작가로 초대를 받은 이후 내가 사는 서울에서도 차차 여러 예술활동을 하게 됐다.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하는 예술활동은 내 작업의 동기이자 영감이 된다. 필자 제공 매해 연말과 연초가 되면 마음이 다급해진다. 예술 관련 공공기관의 창작 지원 마감일이 모두 이때 몰려 있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활동비를 얻기 위해 주변 예술인들은 다들 ‘영혼을 갈아가며’ 지원서를 작성한다. 지원서엔 작가로서의 예술관, 그동안의 작업과 예술 활동에서의 성취, 이번 지원금으로 하게 될 작업의 예술적·사회적 기대효과를 작성해야 한다. 거기에 공공기관의 예술 지원 사업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애정 어린 관점을 더하면 더 좋다. 마흔 중반에서 쉰이 되는 동안 예술 관련 사업에 지원하여 활동하고 작업했지만, 사실 예술 작업과 관련 활동이 생계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그러나 이런 활동과 작업마저 없다면 예술가라는 명함, 작가라는 존재 증명을 사회 시스템에, 더 정확히는 문화예술 공공기관에 하지 못한다. 나는 예술 장르마저 애매하다. 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했지만 전시 그룹에 속한 것도 아니고, 전시로 작업을 발표하는 화가는 아니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증명을 오래전 출간한 그림책으로 받았으니, 일러스트레이터인지 아니면 순수 미술 작가인지, 요즘은 글과 그림을 잡지에 연재하고 있으니 글도 되고 그림도 되는 작가인지, 내 정체성을 나도 잘 모르겠다. 작년엔 그림 작업이 아닌 어린이 교구 설명서에 들어가는 동시를 쓰고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옛이야기를 다시 써서 고료를 받았다. 광고 그래서인지 최근 몇년은 창작 지원과 예술 활동 지원 사업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의기소침하지만 언제까지 예술 지원 사업에 기댈 수 없는 노릇이다. 삼사십대의 작가들 틈에서 심의를 받을 땐, 젊은 작가에게 갈 지원금에 늙수그레한 선배가 주책없게 끼어들어 욕심을 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로 작가를 위한 창작 지원도 있지만, 그건 십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어중간하게 늙은 나는 올해 모든 예술 활동과 창작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방안이나 생계 수단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나의 가장 오랜 생계 수단은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가자 사설학원에서는 더는 나를 쓰지 않았다. 강사로 일하기엔 나이가 많다고 학원장들이 말했다. 그렇다고 생판 다른 일은 구할 수 없어서, 알음알음 알아본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 평생교육원에서 미술 강사로 일하기도 하고, 지금은 어른을 위한 드로잉 강좌를 열고 있다. 부정기적으로 하는 강습 역시 생계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작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려고 몇년 전에는 꽤 긴 시간과 돈을 들여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땄다. 젠더폭력 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시민단체 활동가인 친구는 나에게 정말 단체에서 일할 수 있냐고, 그럼 작업은 어떻게 하냐고 했다. 나는 몇년 작업 좀 못 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작업은 세상의 여러 경험에서 나오는 거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단체에서 일하진 못했지만 이 생각에는 변함없다. 광고 광고 나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 작품을 팔아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다. 나처럼 강좌를 열거나 편의점 알바, 카페와 식당 서빙을 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하기도 한다. 나와 동갑인 한 작가는 청소 노동을 했다. 가끔 생각한다. 계속 벌이가 시원찮다면 나도 청소 노동이든 요양보호사든 일을 찾아야 할까? 절대 그 일이 쉬워서가 아니라 중년 여성에게 열린 일자리는 청소 노동이거나, 식당 서빙, 장애인이나 노인을 돌보는 노동 등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 그리고 글을 쓰며 예술과 관련한 일, 관련 없는 일을 오가며 일하는 노동자이고, 제도 밖 문화예술 강사이다. 나에게 밥이 되어준 노동은 연차를 더해가지만 시장에서의 가치는 높아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예술가라고 아름답고 귀한 재능이 부럽다고 하는데, 귀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어떻게 먹고사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중간중간 쉬어가는 틈이 있긴 했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예술 작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이렇게 저렇게 메뚜기처럼 밥벌이를 찾아 뛰어다닌다. 광고 예술은 작업실에 은둔한다고 나오지 않는다. 예술 작업이든 밥벌이를 위한 생계 노동이든 삶을 꾸리는 모든 행위가 내 예술의 근원이 된다. 단 한번도 내 미래가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불안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건 적더라도 돈을 버는 일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만약 나의 예술이 세상과 맞닿아 생기롭다면,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예술가, 창작자라면 그건 밥 버는 노동의 경험 때문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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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인디음악인들은 버리고 가는 대상인가
인디음악인들은 버리고 가는 대상인가 (2022-06-29) 안악희 | 뮤지션유니온 조합원·인디밴드 ‘리셋터즈’ 베이시스트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소규모 인원만 입장시키던 지난해 4월 서울 마포구 ‘생기스튜디오’ 공연장이 텅 비어 있다. 사진 안악희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의 일터가 폐쇄된다면 어떨까? 한참 영상편집 작업 중인데 누군가 들이닥쳐 컴퓨터 전원을 내린다면? 공장에서 일하는 도중 누군가 컨베이어를 멈추며 나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일이 팬데믹 기간 공연음악(라이브음악) 업계에서 벌어졌다. 지난 2년간 인디 공연은 방역수칙 변동에 따라 전면적 금지와 절반의 허용 사이를 오갔다. 음악인들은 방역수칙에 따라 환호성도 못 지르는 관객들 앞에서 간헐적으로 공연을 이어왔다. 대체로 6개월 단위로 공연을 기획하고 계획을 짜던 음악인들은 순식간에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광고 그러던 중 지난해 2월 말, 서울 마포구청 직원들이 라이브음악 클럽에 들이닥쳐 진행 중이던 공연을 중단시켰다. 식품위생법상 일반음식점으로 분류된 곳이었고, 구청 담당자들은 공연장으로 분류된 곳이 아니면 공연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항의하자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이 공연장이고, 일반음식점에서 칠순잔치 정도는 그냥 넘어갔지만 코로나19 이후에는 이것도 안 된다”는 반박이 돌아왔다. 인디음악가들의 ‘일’인 공연이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1990년대까지 식품위생법 시행령 7, 8조에 의해 음악인들은 ‘유흥접객원’으로 분류됐고, 일반음식점에는 2인 이상 유흥종사자를 둘 수 없었다. 그러나 1999년 ‘라이브클럽 합법화 운동’으로 규제가 폐지됐다. 당시에는 이것도 큰 성과였으나, 불완전한 승리였다. 일반음식점에서 공연을 하면 ‘안 된다’는 규제를 삭제했을 뿐, 소규모 클럽의 법적인 권리를 명확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공연을 위한 ‘정식’ 공간은 공연장과 나이트클럽이 전부다. 하지만 라이브클럽은 나이트클럽과 성격이 다르고, 영세한 소규모 라이브클럽이 법적 지위를 얻자고 유흥업소로 등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나이트클럽에서 인디음악을 올리는 일 또한 없다. 시대는 변했는데, 법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광고 광고 한국은 유독 음악공연에 엄격하다. 카페에서 미술 전시는 괜찮고, 심지어 식당에서 연극공연도 가능하지만, 이런 장소들에서 음악공연을 하면 따져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다른 장르들은 ‘예술’이지만 음악공연은 ‘유흥’ 내지는 ‘행사’다. 방역규제가 강화되면서 음악공연이 금지된 이유다. 거리두기 업종 분류표에도 ‘공연장’과 ‘일반음식점’만 존재할 뿐 ‘공연을 하는 일반음식점’은 고려 대상에서 배제됐다. 결국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기에 관료들은 이들의 외침에 대답할 의무도 없었다. 군대에서는 전쟁 중 후퇴하게 될 때 싣고 갈 물건과 방치할 물건을 분류해두라고 가르친다. 팬데믹 상황을 이에 비유한다면, 공연음악인들은 버려두고 가는 대상인 셈이다. 광고 공연음악은 대중음악의 풀뿌리다. 많은 음악인은 작은 베뉴(공연을 볼 수 있는 카페나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베뉴는 새 음악인들이 수급되는 장이기도 하다. 여러 베뉴를 오가며 서로 교류하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체계를 전문용어로 신(scene)이라고 한다. 지난 2년 정부는 비대면 공연 육성에만 집중했고 이미 존재하는 소규모 라이브클럽에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결국 음악인들 사이 소통은 끊어졌고 신은 무너졌다. 이 와중에 치러진 선거 유세에 수백, 수천명이 운집했을 때 ‘이게 다 뭔가’라고 생각한 이는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온라인이 아무리 발달해도 오프라인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음악인들은 관객의 반응을 통해 자신과 곡에 대한 평가를 가늠할 수 있고, 관객들은 신곡의 ‘베타테스터’(시험 사용자)가 된다. 그리고 양질의 온라인 공연을 위해서는 오프라인에 필요하지 않던 장비와 인력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많은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음악인들과 스태프들은 “당분간 공연은 없겠구나”라고 직감했다. 대중에게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연음악은 창조적인 한편 상당히 노동집약적인 분야다. 공연과 창작을 위해 적지 않은 숙련 기간과 오랜 학습이 병행돼야 하는데, 팬데믹은 이들의 일을 빼앗아갔다. 학교, 도서관, 카페, 박물관도 문을 닫아야 했다. 심지어 공원의 벤치에도 접근금지 표시가 붙었다. 그러나 소위 ‘핵심 생산부문’이나 큰 기업들은 팬데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을 지속했다. 모두가 강제당한 것이라 생각했던 거리두기에서 누군가는 ‘예외’였다. 이름난 대기업 중 팬데믹으로 도산에 가까운 위기를 맞이한 곳이 있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음악인들도 팬데믹을 함께 이겨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공연장과 음악인들은 사실상 2년간 셧다운 상태였다. 우리의 존재와 활동은 ‘삭제’됐다. 누구를 버리고 가자고 정한 이는 누구일까? 모두가 함께 견딜 줄 알았는데 버려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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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계약기간은 절대 12개월을 넘지 않아요
계약기간은 절대 12개월을 넘지 않아요 (2023-11-06) 문세경 | 사회복지사·‘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 에너지 서울 동행단’ 사업에 참여한 문세경씨가 취약계층 집을 방문해 현관문에 방풍재를 붙이는 창호 시공을 하고 있다. 필자 제공 “이 일이 연장되면 또 하실 생각 있으세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내게 물었다. 지금 하는 일은 서울시 공공일자리인 ‘에너지 서울 동행단’ 사업이다. 여름철에는 에너지 절약을 위한 홍보와 캠페인을 하고 가을과 겨울철에는 취약계층의 노후 주택에 창호 시공을 해주는 일로, 6월1일 시작해 12월20일 끝난다. 내년에도 이어서 할 모양이다. 전문 기술이 필요한 시공 일이라 힘들다. 계속할지는 생각해 봐야겠다. 광고 연말이 다가오면 우울하다. 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 한다면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했지만, 경증의 청각장애가 있어서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다. 초등학교 5년 때 갑자기 청력이 나빠졌다. 보청기를 끼려 해도 나의 청력에 맞는 보청기를 찾지 못해 안 하고 있다. 학부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차별받는 장애인이 너무 많았다. 차별은 구조적이고, 삶을 지속하기 어렵게 한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법을 만들고, 건물 구조를 바꾸고, 장애인을 가두는 시설을 없애야 했다. 장애인운동판에 뛰어들었다. 활동가로 살다가 장애인 문제를 더 공부하고 싶어 석사과정을 밟았다. 공부 마치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광고 광고 생계를 위해 사회복지 쪽 직업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잘 듣지 못하는 나를 써주는 곳은 ‘장애인 우대’라는 조건을 단 곳이다. 주로 공공기관에서 이런 단서를 단다. 공공기관은 장애인 의무고용을 지켜야 하니까. 서울시 일자리 포털에서 채용공고를 본다. 이력서를 백번도 넘게 넣었다. 서류 100% 합격, 면접 100% 불합격이다. 2009년 1월, 지인이 만든 쪽방촌 공동체인 ‘동자동사랑방’에서 사회복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2년간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직책은 사무국장이지만 그냥 활동가였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활동비를 받고 일했기에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부족한 생활비를 메꿨다. 그 일도 오래 하지 못했다. 서비스를 받는 어르신이 내가 말을 잘 못 듣는다며 교체를 원했다. 요양보호센터장은 어르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잘렸다. 광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생계를 위한 일을 찾았다. 서울시 뉴딜일자리 사업에 참여했다. 지역아동센터에 파견돼 아이들 독서를 지도했다. 근로계약서에 적힌 계약 종료일은 12월31일이다. 연말이면 계약이 종료되고 연초엔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불안한 노동자로 산 지 십년이 돼 간다. 2015년에는 뉴딜일자리 아동독서멘토링 지도(10개월)를 시작으로 2016년부터 2018년까지는 단기 아르바이트로, 2019년에는 수도사업소 수질검사원으로(8개월), 2020년엔 여성인력개발센터 홍보마케터로(10개월), 2022년엔 50플러스센터 중장년 인턴으로(6개월), 국립공원공단사무소 직원 식당 조리원으로(3개월) 일했다. 2023년 현재 7개월짜리 공공일자리는 계약 종료까지 한달 반 남았다. 수도사업소와 국립공원공단을 빼고 나머지는 계약자(서울시)와 실제 일하는 곳이 다른 파견직이었다. 계약기간은 평균 8개월이다. 12개월은 절대 넘지 않았다. 12개월 이상 근무하면 퇴직금을 줘야 하니까. “2023년 10월20일 오전 8시, 삼각지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 및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 촉구 기자회견이 있습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광고 며칠 전 아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온 문자다. 30년 전 함께 활동했던 장애인 동지들은 아직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출근길이 지체된다는 시민들의 온갖 비난을 받으며 말이다. 2007년 3월, 지난한 투쟁 끝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법을 만들기 위해 싸워 온 수많은 동지에게 경의를 표한다. 법이 제정된 지 16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게 냉혹하다. 20년째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목숨 건 투쟁을 해도 완전한 이동의 자유는 오지 않았다. 그런 사회에 청각장애인의 일자리, 그것도 전공 관련 일자리 내놓으라는 나의 요구는 공허한 메아리 같다. 고령화 사회니 정년이 65살이라고 치자, 나에게 남은 노동 가능 기한은 십이년이다. 십이년 동안 근로 시작과 근로 종료를 몇번이나 반복해야 할까? 내년에도 내가 일할 곳은 있을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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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지역아동센터, 빛없이 머무는 이들
지역아동센터, 빛없이 머무는 이들 (2024-03-18) 김용희 | 하늘샘 지역아동센터장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학습을 지도하고 있다. 필자 제공 나는 인구 4만명 남짓한 폐광지역 군 소재지 지역아동센터에서 17년째 일하고 있다. 센터를 이용하는 35명의 아이는 읍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5개 학교와 집에서 센터 차량으로 등하원을 한다. 학기 중에는 학교가 마친 뒤부터, 방학 때는 아침부터 아이들을 돌보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방학 때는 아침 9시에 문을 열지만 늦어도 30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아이들 몇 명은 이미 40~50분 전부터 센터 앞이나 복도에서 서성인다. 일찍 일 나가는 부모들이 서둘러 다녀가서다.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난방을 가동한다. 9시가 되면 대학생인 근로장학생과 조리사,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출근한다. 센터에서는 모두 7명이 일한다. 많아 보이지만 사회복지사 3명을 제외하면 모두 2시간, 3시간, 5시간, 7시간씩 일하는 시간제 근무자들이다. 차량 운전을 하는 선생님은 오후 3시에 출근해 3시간 근무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노동 유연화는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아침 시간, 근로장학생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동안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은 그날 프로그램에 대해 상의하고 전날 했던 프로그램 일지를 쓴다. 아이들은 레고나 할리갈리 게임, 그림 그리기를 하다가 11시 무렵부터 한자와 영어 공부를 한다. 점심은 12시부터다. 대개 아침을 먹지 않은 아이들이라 넉넉하게 준비한다. 급식관리지원센터에서 제공해 준 식단표에 사과나 귤 같은 제철 과일을 곁들인다. 광고 오후 1시, 학습지도 전담 교사, 특수목적 교사들이 출근한다. 장애아동이나 느린 학습자들을 집중적으로 보살피는 특수목적 교사는 하루 2시간 근무한다. 해마다 예산이 줄어 근무시간도 4시간에서 3시간, 2.5시간, 2시간으로 짧아졌다. 운전 선생님은 오후 3시에 출근해 차로 왕복 1시간 이상 거리에 사는 아이의 귀가를 위해 차량 운행을 시작한다. 9인승 승합차 1대뿐이라 이 차가 돌아온 뒤 저녁 식사를 마친 다른 아이들 귀가가 시작된다. 차량 운행을 마치면 정각 오후 6시. 운전 선생님은 꼬박 3시간 동안 일하다 퇴근한다. 40평 남짓한 센터 안에 아이들이 종일 북적거리며 머무는 동안 사회복지사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프로그램일지, 상담일지를 작성한다. 아이들은 수시로 달려와 문제를 호소한다. 재미있게 놀다가도 툭하면 다툼이 벌어진다. 별것 아닌 다툼도 소홀히 하면 큰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한다. 광고 광고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려면 모든 선생님이 종일 센터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느린 학습자들을 보살피는 특수목적 선생님은 아이들 활동을 지켜본 후 교육을 해야겠지만 하루 2시간으로 정해진 근무시간은 숨 고르기에도 부족하다. 학습 전담 교사도 마찬가지다. 하루 5시간을 가르치려면 연구하고 준비하는 데만 3시간 이상이 필요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아이들 앞에 앉아야 한다. 패스트푸드나 패스트패션처럼 아이들마저 패스트 케어의 대상이 된 것 같아 안타깝다. 아이들도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고 스스로의 존엄을 키우며 성장하려면 ‘적절한 돌봄’이 요구되는데 현실은 여의치 않다. 오후 3시부터 2시간, 3시간, 5시간씩 근무하는 선생님들이 차례로 퇴근한다. 최저시급을 받고 짧은 시간 일하는 선생님들 급여는 노동에 대한 적정한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이 든다. 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고는 매일 하는 학습을 제외하면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독서 프로그램과 방송 댄스뿐이다. 요리나 영화관람, 1박2일 캠프라도 데려가고 싶지만 꿈일 뿐이다.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는 날에는 선생님들이 가진 재능을 살려 놀이활동이나 미술활동을 한다. 저출산으로 국가 소멸을 염려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을 품어줄 지역아동센터의 현실은 늘 빠듯하다. 광고 아이들이 귀가한 6시부터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은 관찰일지와 상담일지, 운영일지를 작성한다. 아이들의 성장을 관찰하고 보살피는 데 꼭 필요한 일이지만 7시를 넘기기 일쑤다. 중학생들이 영어를 하는 날은 8시까지 이어진다. ‘래디컬 헬프’를 쓴 힐러리 코텀은 ‘돌봄은 인간적인 연결, 우리 모두의 발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안녕과 존엄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돌봄은 선의를 가진 사람의 일방적인 보살핌이 아니다. 서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함께 노력할 때 더 건강하다. 그렇게 될 때 지역아동센터는 가장자리 환하게 밝히는 봄맞이꽃처럼 따뜻한 공간이 될 터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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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열악한 봉제 노동 환경’ 함께 개선을!
‘열악한 봉제 노동 환경’ 함께 개선을! (2022-06-22) 박만복 | 봉제노동자 서울 성북구 인촌로 한 주택가 건물 지하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노동자가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나는 열일곱살에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왔다. 누나들을 따라서 봉제공장에 취직한 뒤 지난 36년 동안 봉제 일을 해왔다. 지금은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조그만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공장에 들어가서 막내 시다(보조원)로 일했다. 조금 숙련된 시다를 거쳐 보조 미싱사가 되고, 오야(팀장) 미싱사가 될 때까지 죽어라 일을 배웠다. 입사해서 받은 첫 월급이 13만5천원인데, 5천원은 오야가 내게 일 잘했다고 얹어준 거였다. 내가 일한 만큼 받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공장에서 만난 아내와 밤낮으로 일하면 둘이서 한달에 500만~600만원을 벌었다. 마냥 이렇게 벌릴 줄 알았다. 광고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지면서 봉제공장에도 예외 없이 일거리가 줄었다. 단가도 내려가 미싱을 해서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을 그만두고 8개월 택시운전을 했는데 그것도 힘에 부쳐 다시 양복공장으로 돌아왔다. 공장으로 돌아와서 미싱을 그만두고 옷감의 치수를 재고 자르는 재단을 배웠다. 맨날 좁은 자리에 앉아 미싱 발판을 밟는 것보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칼질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봉제공장에서 마무리 단계에 쓰이는 지그재그 미싱 등 여러 기계들을 익혀나갔다. 이런 노력으로 공장장이 됐다. 광고 광고 그러다 봉제공장에서 옷의 마무리 공정인 시아게(다림질)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1년 정도 배운 뒤에는 작업 성과에 따라 보수를 받는 객공 시아게사로 일했다. 오전 8시에서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일이 많을 때는 자정을 넘기기도 했다. 돈을 버는 재미가 있었지만 온종일 서서 다림질을 하다 보니 다리, 발바닥, 어깨 등이 아파왔다. 시아게를 하면서 내가 공장을 운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품 팔아 이곳저곳 공장을 알아보러 다녔다. 드디어 신당동에 있는 공장을 운영할 기회가 생겼다. 계약하는 순간 ‘이제 나도 사장이 되는구나!’ 싶어 기뻤다. 포부도 있었다. 완성도 높은 옷을 만들어 홍보도 하고 내가 직접 영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주문이 들어오면 납품기일 맞추기에 정신이 없었다. 영업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도 알음알음 소개로 온 사람들 덕에 일감이 조금씩 늘어났다. 광고 하지만 성수기인 봄가을에는 일감이 많아도 미싱사들을 구하지 못해 일감을 놓칠 때도 있다. 미싱사들은 일감이 많을 때는 하루 15시간 넘게 일한다. 하지만 비수기에는 미싱 한번 돌리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러면 미싱사들이 다른 곳으로 일감을 찾아 떠난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됐다. 요즘 봉제노동자 평균 나이가 55~60살이다. 수십년을 일한 숙련된 봉제노동자들이 처한 노동환경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일하는 환경, 노동시간, 공임 등 처우가 나쁘니 청년들은 봉제 일을 하지 않는다. 30년 전 처음 미싱사가 됐을 때 난 내가 일한 만큼 돈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객공 시아게사로 일할 때는 새벽까지 일해도 벌이가 괜찮아 좋았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공임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중국, 베트남 등에서 싸게 들어오는 옷이 많아 단가 인하 경쟁을 하는 의류업체들 탓에 공임이 낮게 책정되기도 한다. 옷마다 다르지만 한장에 500원짜리도, 2천원짜리도 있다. 20년 전 재킷 한벌에 7천~8천원 하던 공임이 지금은 겨우 1천~2천원 정도 올랐다. 일당 노동자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한다. 미싱은 12만~13만원, 마무리는 17만원, 재단은 20만원 정도를 일당으로 받는다. 일이 많을 때는 400만~500만원도 벌지만 일이 없을 때는 50만원도 못 벌 때가 있다. 광고 지금 영세공장을 운영하는 처지에서 봤을 때, 봉제업의 객공 시스템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객공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기 어렵고 보너스도 퇴직금도 없다. 4대 보험도 가입되지 않는다. 서울 도심 제조업 중 가장 큰 게 봉제산업이다. 신당동에만 봉제공장이 수백~1천개 가까이 된다. 그중 노동자에게 4대 보험을 가입시킬 형편이 되지 않는 영세사업장이 열에 아홉이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서울만 봉제노동자가 9만명이 넘고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않는 사업장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제는 좀 바뀌면 좋겠다. 봉제노동자들의 공정임금, 공정단가 그리고 기본적으로 12시간 이상 일하는 작업시간을 바꿔나가고 싶다. 봉제노동자 주 5일 근무, 4대 보험 등 여러 가지를 바꾸고 싶은데 혼자서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영세한 봉제사업주가 노동자들을 4대 보험에 가입시킬 수 있게 독려하고 비용을 일부 보조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사업장 단가, 임금, 노동환경 개선에 나서주면 좋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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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수선한 옷 만족해하는 손님 보면 뿌듯해요
수선한 옷 만족해하는 손님 보면 뿌듯해요 (2023-11-13) 유미애 | 수선집 운영·서울 성북구 패딩점퍼 소매를 수선하고 있다. 필자 제공 올해로 수선집을 시작한 지 4년이다. 이젠 잘한다는 소문도 나고 자리가 잡혔다. 사실 내가 수선일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결혼 전부터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금세 배웠고 그 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살림하며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특히 일곱살부터 운동을 시작해 선수의 길을 걸은 작은아이 챙기느라 하루하루가 바빴다. 아이 뒷바라지가 끝나면 취미생활 겸 공방을 운영하면서 중년을 보내고 싶었다. 광고 인생은 내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작은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했다. 아이들에게도 위기가 왔다. 특히 작은아이가 10년 동안 해온 운동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안일만 해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된 식당 알바를 하며 생활비와 작은아이 레슨비를 보탰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서 꿈꿔오던 공방 대신 돈벌이가 되는 수선일을 택했다. 아이와 함께 운동하던 누나의 어머니가 수선집을 운영하셨는데 일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주말마다 경기 고양시에서 서울로 와 수선 기술을 배웠다. 그런 와중에 사장님 제안을 수락해 아예 수선집을 맡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광고 광고 실전은 쉽지 않았다. 예전 사장님 단골들을 다시 내 손님으로 만들려면 실력도 있고 친절해야 했다. 처음엔 전 사장님과 비교하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가장 기본적인 바지 기장 줄임부터 소매 기장 줄임, 품 줄임, 지퍼 교환, 누빔, 고무줄 교체, 허리 줄임과 늘림 등 다양하게 수선을 의뢰받는데 그때까지 배운 것으로는 부족했다. 해보지 않은 수선이 들어오면 유튜브에서 영상을 찾아보며 배웠다. 그렇게 세월이 쌓이며 안 될 것 같은 수선을 통해 옷이 바뀌는 게 신기했고, 좋아진 내 실력에 스스로 감탄을 하기도 했다. 수선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옷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요즘은 옷 제도와 재봉을 공부하며 틈틈이 실제 옷도 제작한다. 평일에는 오전 9시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토요일은 오후 6시까지 일하고 일요일은 쉰다. 보통 하루에 20~30벌 정도 작업한다. 간절기에는 수선하는 양이 두배 정도 늘어 매일 밤 10시가 넘도록 일하고 휴일에도 일할 때가 많다. 광고 처음엔 너무 오래 입어 해진 옷을 굳이 수선해 계속 입으려는 손님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의외로 그런 분들이 많아 놀랐다. 더 신경 써서 오래도록 입을 수 있게 도와드리려 한다. 수선협회에서 정한 가격을 기준으로 수선비를 책정하고 어떤 수선이든 손님이 만족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하려 노력한다. 수선 실력만이 아니라 손님을 상대하는 일도 중요하다. 다양한 손님을 만나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힘들 때도 잦다. 보통 바지 기장 수선에 4천원을 받는데 손님들 반응도 제각각이다. 1만원 주고 산 바지인데 수선비 4천원은 너무 비싼 거 아니냐고 항의하던 손님이 기억난다. 원하는 대로 수선했는데도 트집 잡고 수선비도 내지 않고 가는 손님도 있었다. 한번은 자기 바지 대신 남의 비싼 바지를 가져간 손님이 있어, 옷이 없어진 다른 손님에게 바지값을 드리기도 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수선표를 만들어 손님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재해 손님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했다. 고생했다고 커피나 과일 같은 간식을 주시는 손님도 있다. 몸에 딱 맞게 옷 입는 걸 좋아하시는 한 손님은 수선하러 자주 오시니 내가 그 손님 취향을 잘 알게 되고 그에 맞춰 수선해 드리면 항상 만족해하신다. 손님이 만족할 때면 나 역시도 수선집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분들이 훨씬 많으니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도 잊게 된다. 남편도 다시 일을 시작하고 수선집 운영도 안정적이어서 아이들 뒷바라지나 생활에 어려움은 많이 줄었다. 나도 어느새 오십대 초반이지만 아직 젊으니 배울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가게에 오시는 손님이 만족해서 다시 오실 수 있도록, 발전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어려울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주고 도와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내가 받은 도움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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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일본 사람이죠?…그래서요?
[6411의 목소리] 일본 사람이죠?…그래서요? (2024-03-11) 니카미 유리에ㅣ협동조합 쩜오책방 조합원 아시타청’ 프로그램을 함께 생각한 마을 사람들. 지난봄에 우리가 마을공동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위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 제공 ‘여기서 나는 외국인이 아니구나, 마을 사람이구나.’ 한국에 온 지 8년. 마을살이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주민이라고 하면 ‘외국인’이나 ‘불편함’ 같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가.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그런 단어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파주시 교하에서 ‘나다움’을 찾으며 성장하고 있다. 광고 그동안 일본 사람이라서 받은 상처들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아이를 안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내가 일본 사람인 것을 안 행인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일본 사람이죠? 나 같으면 결혼 반대할 것 같아요.” 광고 광고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상처의 말보다 마을 사람의 따듯한 말이다. 2016년, 남편 직장 때문에 교하로 이사하게 됐다.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채 도서관에 갔다. 책을 좋아했고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그림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도서관은 내게 쉼터가 되어줬고 아이에게는 놀이터가 되어줬다. 사서 선생님들은 나를 외국인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아이 엄마로 따듯하게 대해줬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과 만났다. 일본 소설을 원서로 읽는 모임 사람들, 육아하는 엄마들,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분들…. 그 인연으로 일본 그림책 읽기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도서관이라는 공간,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을 만났고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마을에 있는 책방에서 일본어 수업도 하게 됐다. 주말이면 서울에 가 일본어 강사로 일했던 나는 생활 공간인 마을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광고 마을 사람들과의 인연 덕분에 마을 책방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었고 ‘디어 교하’라는 마을 잡지의 기자단으로 활동하게 됐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좋아하는 것과 몰두하는 무언가가 있다. 육아를 하거나 일에 매진하다 보면 ‘나’를 잊을 때가 많다. 이 마을에서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나는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의 친구이고 옆집 사람이자 이웃이다. ‘외국인’이라는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 함께 고민해주며 적당한 거리에서 신경 써주는 분들이 많다. 어른이 되어도 다른 사람의 단점을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좋은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 서로 노력한다. 가끔 다른 지역에 여행 가면 “일본 사람이세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일본 사람이었지’ 하고 자각하게 된다. 사실 이제는 낯선 질문이라서 그 질문을 들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 물음이 싫을 때도 있다. 마음속으로 ‘그래서?’ 하고 대답해 본다.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 질문하는 사람은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내겐 차별의 말로 들린다. 그만큼 나는 이곳에서 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 같다. 지난해, 마을 사람들과 ‘교하 시청각 클럽’을 결성했다. 공동체 실험 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이 사업을 통해 나는 이주민이 아니라 마을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공동체 생활은 소통과 이해를 통해 풍성해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아시타청’(我視他聴)이라는 프로그램은 나를 잘 바라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뜻이다. 여섯명의 팀원이 각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기반으로 여러 활동을 기획했다. 나는 ‘마음 스트레칭’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책을 통해 나와 대화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여러번 가졌다. 광고 ‘외국인’이라는 낙인 때문에 주저한 일이 많다. 몇년 동안 공부한 그림책 심리학 또한 단순히 나를 위해 공부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주민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응원과 참여자들의 반응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주민으로 살며 때때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조용히 상처받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용기를 얻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이주민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통하는 이야기이다. 그 사실을 한 사회의 소수자가 되어서야 알게 됐다. 모르는 사람의 차가운 말보다 이웃의 따듯한 말이 몇 배의 힘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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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장미] "야간근무와 성희롱에 시달리는 여성 대리기사에게 장미꽃을…"
[프레시안-노회찬재단 공동기획] 3.8 여성의날 노회찬의 장미 나눔 캠페인 ④ 여성 대리기사에게 이명선 기자 "상시적인 야간근무에다가 여성이라는 힘듦이 있지만, 누구보다 당당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고혜진 씨에게 장미꽃을 전합니다." 부산에서 대리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는 고혜진 씨에게 장미를 보내고 싶다는 신청이 '3.8 여성의 날, 노회찬의 장미 나눔 캠페인'을 통해 접수됐다. 신청자는 역시 부산에서 대리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철곤 카부기상호공제회(카 드라이버 부산·울산·경남 대리운전기사 상호공제회) 공동대표. 김 공동대표는 지난 달 27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고 씨 부부가 같이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 매일 밤 딸 두 명(중학생과 고등학생)을 집에 둔 채 나와 대리운전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당당하게 또 굉장히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며 신청 이유를 밝혔다.  이어 "고 씨는 카부기공제회에서 총무를 맡는 등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며 "다른 대리기사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내 '경호'하던 남편도 대리기사 됐다  고 씨는 남편과 함께 대리기사로 일하고 있다. '부부 대리기사' 이야기’는 지난 2월 KBS창원 지역국의 한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방송에 따르면, 아내가 대리기사 일을 시작하자 걱정이 된 남편은 아내가 대리운전하는 차를 따라다니며 '경호원'을 자처했고, 한 이틀 남편의 '경호'를 받던 아내가 남편에게 "돈 벌러 나왔더니 (기름값 등) 돈 쓰고 다니면 어떻게 하느냐. 걱정되면 같이 하자"고 권유해 남편도 대리기사가 됐다.  그렇게 고 씨 부부는 부부 대리기사로,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고 응원하며 3년 6개월째 대리기사 일하고 있다. 여성 대리기사 위한 '보디캠'과 '화장실 앱' 야간에 취객을 주로 상대하는 대리기사의 특성상, 여성 대리기사들은 특히 안전에 취약하다. 김 공동대표는 "옛날보다는 일하는 환경이 좋아졌지만, 여성 대리기사에 대한 성차별이나 성희롱이 왕왕 발생한다"고 했다. 이에 카부기공제회는 노회찬재단의 도움을 받아 여성 대리기사 전용 보디캠을 마련, 보디캠으로 찍은 다큐멘터리 <밤의 유령>을 제작했다. 약 1시간 분량의 다큐는 오는 8일 여성의 날 공개 상영을 앞두고 있다. 추후 유튜브를 통해서도 공개될 예정이다.  <밤의 유령>은 '깜박깜박' 하는 방향지시등 소리와 함께 잔잔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밤의 유령, 대리운전 기사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노회찬 의원이 말했듯이 존재하되 그 존재를 평소에는 거의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작업장은 밤의 거리입니다."(다큐멘터리 <밤의 유령> 중)  여성 대리기사의 고충은 성희롱뿐만이 아니다. 근무 중 화장실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 중에는 생리대를 교체하지 못해 일을 포기한 채 귀가하는 경우도 있다고….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부기공제회는 심야 개방 화장실 애플리케이션, '한밤의해우소'를 직접 만들었다. '한밤의해우소' 앱은 부산뿐 아니라 전국의 심야 개방 화장실 정보를 알려준다. 물론 '한밤의해우소'는 남성 대리기사들에게도 유용하다.  김 공동대표는 "대리기사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혼자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힘든 일이 생겨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이 고독사(孤獨死)하는 사람도 있다"며 "보다 많은 대리기사가 카부기공동체와 함께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노회찬의 장미> 후원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노회찬의 장미나눔 캠페인>은 프레시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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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장미] "너는 너만의 길을 만들렴, 엄마도 나름의 길을 만들어갈게."
[프레시안-노회찬재단 공동기획] 3.8 여성의날 노회찬의 장미 나눔 캠페인 ③ 발달장애인 노동자들에게 이명선 기자  "여성 발달장애인 노동자들에게 장미꽃을 전하고 싶습니다. 능력에 맞는 직업생활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 지역사회에서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여성 발달장애인의 발걸음을 따뜻한 미소와 함께 향기로운 꽃으로 응원하고 싶습니다." 이은자 강서퍼스트잡지원센터장이 딸 지현이와 지현이 친구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3.8 여성의 날, 노회찬의 장미 나눔(대리전달) 캠페인'에 꽃 배달을 신청했다. 이 센터장은 발달장애 딸을 둔 엄마로, 발달장애인들의 취업을 돕고 있다. 이 센터장은 지난 달 27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딸 지현이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마다 나가는 모습이 대견하다"며 "지현이와 지현이 친구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일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지현 씨는 최중증 발달장애인이지만, 하루 4시간씩 주 5일을 출근하는 어엿한 직장인이다. 이 센터장은 "발달장애인들은 일정한 '루틴(rutin)'을 좋아한다. 지현이는 최중증이지만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쉰다는 루틴이 있다는 걸 안다"며 "아침에 깨우면 평범한 직장인의 표정이 나온다. '나 일해요'라는 말은 못 하지만 학교나 복지시설에 다닐 때와는 다른 표정이다. 일에 대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학교나 복지시설에 다녔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는 데 대한 자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발달장애인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까지  이 센터장은 딸 지현 씨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 일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장애인 노동을 공부하며 기획서를 들고 관공서를 찾아다닌 끝에 지금의 '강서퍼스트잡지원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장은 "장애인들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이 같은 사회화를 위해 제일 필요한 게 직업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설립 초기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만 장애인 중에서도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발달장애인 특성에 맞는 지원이 틀이 잡히고 난 뒤로는 좋은 결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설립 6년째인 강서퍼스트잡지원센터는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이뤄진 2인 1조 팀을 구성해 서울 강서구 인근 학교의 교실 청소 업무 지원을 주력으로 하고 있다.  이 센터장은 교실 청소와 관련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며, 발달장애인 한 사람이 사회 구성원이 되면서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전했다. 자폐가 있는 친구가 파트너(비장애인)와 한 초등학교 교실을 청소하면서 계속 소리를 내자 파트너가 "소리 내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그런데 이를 보고 있던 교사가 파트너에게 "저 분은 저게 다예요. 자신의 말을 하는 거예요. 그냥 두셔도 돼요"라며 "소리를 낸다고 주변에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맡은 일을 잘하는 분이에요"라고 했다는 것. 이 센터장은 "발달장애인 취업 지원에 적극 나서지 않았을 때에는 스스로도 '장애인이니까 당연히 못 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며 "장애인들도 직장 생활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 '사회화'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지현아, 너의 길을 만들어가렴"  이 센터장은 취업을 희망하는 장애인과 채용할 학교 간 조율을 해야 하는 지금이 제일 바쁠 때라고 했다. 그럼에도 가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너 참 보람 있겠다"라고 칭찬해 준다고 했다. 친정어머니도 이 센터장에게 "지현이 덕분에 달라졌다"며 "지현이 아니었으면 네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나겠느냐"는 말을 한다고….  이 센터장은 당당한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는 지현이와 그 친구들에게 장미를 전하면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지현이가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어. 지현아, 너는 너만의 길을 만들어가렴.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엄마의 길을 만들어갈게." <노회찬의 장미> 후원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노회찬의 장미나눔 캠페인>은 프레시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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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장미] "핑거푸드로 배 채우며 하루 12시간 일하는 네게 꽃을 보낸다"
[프레시안-노회찬재단 공동기획] 3.8 여성의날 노회찬의 장미 나눔 캠페인 ② 웹툰 작가들에게 이명선 기자 "오늘도 작업실에서 홀로 마감 전쟁을 치르고 있을 정연아! 어느 유명한 영화의 한 대목이 있지. "밥은 먹고 다니냐?" 오늘도 핑거푸드로 배를 채운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여성으로 중년의 나이에 매주 웹툰 마감을 하는 네가 참 대견하고, 또 대견해. '저녁 식사를 여유롭게 하고 주말마다 놀러도 간다'는 네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너에게 꽃을 보낸다. 아프지 말고 100세까지 건강하자, 우리." 웹툰 작가 노이정 씨가 동생이자 동료인 정연 씨에게 '노회찬의 장미'를 대신 전달해 달라며 올린 사연이다. 노 씨와 동생은 출판만화 전성기 순정만화를 시작으로 학습만화를 거쳐 웹툰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한 길을 걸어왔다.  노 씨는 지난 달 28일 <프레시안>과 통화에서 "정연이는 아주 늦게, 웹툰 시장에서는 드물게 중년의 나이에 일을 시작했지만 '매주 마감'이라는 엄청난 노동강도를 견디며 일하고 있다"며 "매일 12시간씩 일하면서 밥 한 끼 편히 먹지 못하는 현 상태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이어 "비록 꽃 한 송이지만, 정연이가 장미를 건네받는 순간만큼은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루 12시간 주 5~6일 노동…우리는 다 '을'이다"  "플랫폼 기업이 웹툰 시장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작가들은) 다 '을'이다." 노 씨는 고강도·장시간 노동의 대표 직군이 된 웹툰 작가의 근본적인 문제는 플랫폼 기업의 과도한 수수료에 있다고 봤다.  웹툰 산업의 급격한 성장에도 플랫폼 기업과 작가의 관계가 '갑을'로 심화되는 구조 속에 플랫폼 기업에서 50%에 가까운 수수료를 떼어가도 작가들이 이의 제기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 이에 더해 작가와 플랫폼 기업 간 직접 계약보다 콘텐츠유통사(CP사)를 거쳐 계약이 이루어지다 보니, 작가 입장에서는 또다시 수수료를 떼인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작가 1인이 스토리 기획 또는 각색부터 그림 그리기, 색깔 칠하기(일반적으로 '컬러'라고 표현한다) 등 전 과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플랫폼 기업의 요구대로 매주 마감을 하려면 주인공의 손목시계 하나 제대로 그릴 여유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결국 마감에 쫓긴 작가들은 관련 아카이브에서 손목시계와 의상, 배경 등을 구매해 사용한다고….  또 웹 시장이 커지면 커질수록 컬러 등에 높은 퀄리티가 요구돼 컬러 작업을 위한 전문가를 별도로 고용하기도 하지만, 이 비용마저 작가가 직접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은 전 과정을 작가 혼자 떠맡게 된다고 했다. "플랫폼 기업과 콘텐츠유통사가 떼어가는 이중 수수료를 뺀 웹툰 작가의 월 평균 수입은 200~400만 원 정도다. 여기에서 작업실 임대료, 보조 작가 임금 및 작업에 필요한 비용 등을 빼면 정작 작가 손에 쥐어지는 건 200만 원도 채 안 된다. 이것이 하루 12시간 주 5~6일 노동한 대가다."  지난해 3월 발표된 '웹툰 작가들의 정신 건강 및 신체 건강과 불안전 노동 수준 실태조사'에 따르면, 웹툰 작가들은 하루 평균 9.9시간, 마감 전날의 경우 하루 평균 11.8시간 노동을 한다. 주당 평균 근무 일수는 5.7일이며 주당 평균 근무 시간은 51시간이다.  응답자의 64.4%는 '근무 시간이 적당하지 않다'고 답했다. 29.4%는 육체적 지침이, 31.6%는 정신적 지침이 '항상 있다'고 호소했다. 또 40.7%가 '건강 문제가 있지만 참고 일한 경험이 있다'거나 우울증(28.7%)과 불면증(28.2%)을 경험했다는 응답도 10명 중 3명꼴이었다.  특히 17.3%는 '극단적 선택'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며 8.5%는 '계획을 세워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실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비율도 4%에 달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  노 씨는 "주변에 우울증 약을 먹어가며 일하는 작가들이 있긴 해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며 "이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에, 오히려 현업 작가들이 더 놀랐다"고 전했다.  현재 '웹툰작가노동조합(웹툰노조)'과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디콘지회)' 등이 웹툰 작가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애쓰고 있다. 이들 노조 역시 웹툰 작가의 열악한 노동 환경의 주 원인으로 플랫폼 기업의 과도한 수수료를 꼽고 있다.  노 씨는 "조사에도 나타났듯 어린 나이부터 고강도 노동에 시달린 웹툰 작가의 수명은 30대"라며 "40대가 넘어가면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라도 더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료와 후배 작가들에게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라는 말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노회찬의 장미> 후원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노회찬의 장미나눔 캠페인>은 프레시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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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장미] "나의 애인이자 동지에게 노회찬의 장미꽃을 선물합니다"
[프레시안-노회찬재단 공동기획] 3.8 여성의날 노회찬의 장미 나눔 캠페인 ① 이명선 기자 "10여 년간 출판노동자로 일하며 각종 부조리를 겪었음에도 꿋꿋이 일한 나의 애인. 출판은 사양 산업이라는 자조에도 출판노동자의 권리와 보호를 주장해야 한다며 출판노조에 가입한 사람. 이제 곧 결혼을 앞둔 나의 애인이자 출판노동자 동지에게 노회찬의 장미꽃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오○○ 씨가 경기 파주의 원○○ 씨에게 장미를 대신 전달해 달라며 '3.8 여성의 날, 노회찬의 장미 나눔(대리전달) 캠페인'에 올린 사연입니다. 짐작컨대, 출판업에 종사하는 두 분은 동지에서 이제 곧 부부가 되나 봅니다. 축하드립니다. 출판노동은 '열정노동' 중 하나로 평가 받습니다. 책이 좋아서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았지만, 출판사 10곳 중 7곳 이상은 5인 미만의 소규모 출판사로 임금과 노동시간 등 고용조건은 열악하기만 합니다. 성차별뿐 아니라 성희롱에 노출되는 일도 종종 발생합니다.  출판사 내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창비, 사계절, 돌베개, 한겨레출판, 보리, 고래가그랬어, 작은책, 좋은책신사고 등이며 출판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곳은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서울경기지역출판), 출판노동유니온, 출판노동조합협의회가 있습니다.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고, 4월 23일은 '책의 날'입니다. 이번 '책의 날'에는 출판노동자들이 조금 더 활짝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니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3.8절을 어떻게 기념하는가를 보면, 그 나라의 여성 운동과 민중 운동의 여성관을 알 수 있다."(노회찬 국회의원) 고(故) 노회찬 의원은 2005년 초선 국회의원일 때부터 매년 3월 8일 여성의 날이면 각계각층의 여성들에게 장미꽃을 전달했습니다. 2019년부터는 '노회찬재단'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노회찬의 장미 정신'을 담은 장미를 대신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3.8 여성의 날, 노회찬의 장미나눔 캠페인)  이번 장미 나눔 신청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허○○ 씨는 "오늘의 주인공은 어르신들의 케어에 당신의 삶을 다 쏟아 근로해주는 마음이 아름다운 이 시대의 언니"라며 전남 순천의 허○○ 씨에게 장미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신청하셨습니다. 허 씨는 언니에게 "노인의 케어는 우리 사회 누가 해도 해야 하는 일"이라며 "모든 걸 내어주는 여성의 품과 같은 당신의 노동을 사랑해 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이어 "직장 동료들과 함께 3.8 여성의 날을 맞아 당신의 의미 있는 그 일에 한 번 더 박수 보냅니다. 당신이 계신 그곳도 근로환경이 나아지는 그날을 소망해 봅니다"라며 "이 사연이 행복하게 전달되어 함께 더불어 사는 우리 사회가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며 성평등한 변화를 기도해 봅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노○○ 씨는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동이 트지 않아 어둑한 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는 내 친구야"라며 부산 동구의 신○○ 씨에게 장미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신청하셨습니다. 노 씨는 친구에게 "허리 구부려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며 얼마나 고되고 힘드니. 그래도 힘들다 투정 부리지 않고 묵묵하고 담대하게 역할을 해내는 네가 자랑스럽다"며 "언제나 응원하고 있어. 사랑해~♡♡"라는 말도….  릴레이 장미 나눔을 신청한 분들도 있습니다. 김○○ 씨는 경기 고양의 권○○ 씨에게, 권○○ 씨는 각각 경기 수원과 파주에 사는 서○○ 씨와 이○○ 씨에게 장미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했습니다.  "권○○ 사서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기쁨! 노회찬의 장미로 뜻깊은 하루가 되시길!"  "서○○ 선생님의 열정을 응원합니다^^"  "이○○ 분과장님, 파이팅♡"  또 오○○ 씨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장미를 전달해 달라고 신청했는데요. 어머니의 이름 석자를 강조한 사연이 눈에 띄었습니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서복래 여사, 그 이름 석자를 노회찬의 장미와 함께 불러드리고 싶어 사연을 보냅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평생을 부지런하게 살아오시며 자식 둘을 키우셨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씩 작은 도서관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시며 열심히 살고 계십니다. 서복래 여사의 삶은 당당하고 멋진 삶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 엄마를 닮은 딸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청년 여성 노동자인 정이립 디자이너에게, "청년 여성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마음으로 해마다 근사한 보고서를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라며 장미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김철회 KT새노조 조합원은 김미영 KT새노조위원장에게 "우리 새노조를 이끌면서 노동자로서 본질적 목소리를 내는 위원장을 응원하고자 신청한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통신노동자로 부끄럽게 살지 말자"라는 외침, 함께합니다. <노회찬의 장미> 후원하기 https://together.kakao.com/fun...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노회찬의 장미나눔 캠페인>은 프레시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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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맞는비 포럼] 여전한 피곤한 '투명인간들', 그들에게 정치란 아직도 '구경거리'일뿐
[함께맞는비 포럼]'시민정치지성'으로 '마지노선 민주주의'넘어야 박창규 노회찬비전포럼 운영위원장 노회찬의원은 노동 존중, 민생 살리기, 부정부패척결, 재벌개혁, 사법개혁, 검찰개혁, 정치개혁 등 수많은 정치·사회·경제 의제를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정치의제로 만들었다. 그 과정은 통렬하기도 했고 유쾌하기도 했으며, 많은 이들로부터 "노회찬의 정치가 사회경제 약자들을 대변하는 정치 공론장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바라봤던 세상은 '노동이 존중받는 선진복지국가'였고, 그가 발 딛고 있길 원했던 정치 현장은 '6411번 버스 첫차를 타고 일터로 출근하는 투명인간들의 손에 닿는 정치'였다. 노회찬재단은 그러한 '노회찬정치'의 정신을 '6411정신'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것을 잇는 노회찬정치가 계속되길 기대한다. 노회찬재단 주최로 매월 열리는 '함께맞는비 포럼'은 6411정신을 통해 한국정치의 주요한 사회개혁 의제를 다루는 공론장으로서 기획되었다. '함께맞는비 포럼'이 국민들에게 노회찬정치의 실천동기가 되길 기대한다. 필자 지난 2월 20일 저녁 올해 첫 '함께맞는비 포럼'이 '6411정신과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노회찬재단에서 열렸다. 2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노회찬의원의 6411정신을 통해 한국정치의 현실을 깊이 있게 다시 성찰해보자'는 의도로 주제를 정했다. 4월 10일 총선을 앞둔 2월은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공천과 출마선언, 공약발표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기이다. 노회찬의원도 2016년 4월 총선을 두 달여 앞둔 2월 1일에 새벽기차를 타고 창원으로 가서 창원성산구 출마선언 기자회견을 한 후 두 번의 예선을 거쳐 본선을 치르는 대장정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때일수록 '내가 왜 정치를 하는지', '왜 출마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40년 가까이 경과하며 형성된 한국정치의 양당체제가 '불평등 심화'와 '기후 위기' 대응에 무기력한 낡은 체제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을 비도덕적이고 비정치적으로 사사롭게 행사하는 정권과 관료집단을 견제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보니 거대양당의 정치적 갈등은 주권자인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과 거리가 멀고 극성팬들을 앞세운 정치적 소란만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 결과 정치는 국민들에게 그저 예능 프로그램이나 스포츠 경기와 같은 '구경거리'일뿐 관여하거나 참여해야 할 '삶의 일부분'이 아닌 것이 되었다. ▲ 6411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프레시안 다가올 총선에 뛰어든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런 '양당체제의 철창'을 부수고, 국민의 삶의 일부가 되는 정치를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때에 노회찬재단의 '함께맞는비 포럼'이 '6411정신과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논의의 장을 연 것이다. 노회찬의원은 양당체제의 정치에서 배제되어온 사회경제적 현안과 정치적 개혁과제들을 정치의 장(場)으로 가져와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과 여론을 모으고, 또 양당의 정치적 갈등에 개입해 제3의 시선에서 문제 해결을 촉진했다. "만 명에게만 평등한 사법부"의 개혁을 촉구했고, '삼성X파일 떡값검사 명단'을 공개해 정-경-언이 유착된 부정부패의 척결을 온몸으로 외쳤다. 무소불위한 검찰권을 개혁하고자 앞장섰고, 신용카드사들과의 전쟁을 선포해 중소자영업자들 '가맹점 수수료' 인하를 이끌어냈으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주도했다. 또,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을 촉진했다. 이런 노회찬정치는 샤츠슈나이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갈등의 사회화' 정치이고, 노회찬 자신이 남긴 말대로 "투명인간들의 손에 닿는 정치"이자 '6411정신'이 담긴 정치였다. 이번 '함께맞는비 포럼'에서 '6411정신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발표한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노회찬정치와 6411정신을 상기시키며 '정치의 인문성'을 강조했다. 김윤철 교수는 "정치란 '문명' 공동체(polis)의 유지와 재생산을 통해 '나와 우리'의 삶과 해방을 위한 '실천'"이라고 정의했으며,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적 의미는 "주권자 지위의 훼손과 약화"인데 그 원인은 "정치의 왜곡과 실종에 의한 주권자들 '삶'의 방치, 갈등의 사유화에 따른 강자독식"이며, 그 결과 "주권자들이 '과잉주체'가 되어 숨 쉬며 자신의 마음으로 살 수 없는 처지, 反 해방의 현실/(자기) 억압의 현실"에 놓이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또한, 김윤철 교수는 "민주주의의 핵심 본질인 '민'의 물질적 자원배분 결정권 신장의 문제는 방치하고, 형식과 절차 지키기에만 열을 올리다가 결국 민주주의의 파탄을 겪게 된다는 의미"로 한국 정치는 '마지노선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즉, 김윤철 교수가 강조한 '정치의 인문성'은 정치가 주권자인 국민들의 삶을 돌보는 가운데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서사(narrative)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인문성'은 정치의 본질이자 정치인들이 체화해야 할 기본 소양이다. 한국사회의 경제불평등은 갈수록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20년 넘게 반복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뿐만 아니라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같이 충격적인 일이 발생할 때마다 빈곤층의 절대적 어려움과 사회보장의 허술함이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사회적 갈등 현안에 대한 정치의 효능감은 발휘되지 않고 있다. 세계적 차원에서 기후 위기의 심각성이 이야기되지만 정작 그것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정치는 경제성장과 기업부담을 운운하며 대응책 마련에 주저주저하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다. 왜 한국정치는 이런 모습일까? 답을 찾기 위해 '정치의 인문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정당과 정치인이 평소에 '말로만' 존경한다고 말하는 주권자들의 정치참여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이날 '함께맞는비 포럼'의 토론자로 참석한 이동익 민주노총 인천본부 조직국장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노동운동세력이 '6411 정신'이 호명하고 있는 계급 이하의 존재들과 소외된 노동의 보호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며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대표성'을 강화해야 하고 여성, 청년, 성소수자, 장애인, 불평등, 돌봄, 공공성, 직장 내 민주주의, 성차별, 노동안전과 건강 등 사업장 범위를 넘어선 문제를 노동조합 내부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샤츠슈나이더가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 이념들뿐만 아니라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극성팬들의 정치적 소란을 넘어 노동계급이 '정치의 인문성'을 강화시키고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윤민섭 춘천시의원이 "주민들의 삶의 공간인 지역에서 6411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책과 실천을 통해 정치경쟁력을 강화하는 전략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정치의 인문성’을 실현하는 주민들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를 더 잘 촉진할 수 있음을 예감케 해준다. 한편, 이영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선임연구원이 '정치의 인문성'을 담보할 진보정치의 역할에 대해서 "'6411 정신'은 진보정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며 "누구나 공감하고 지지받을 수 있는 진보정치,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누구와 함께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지지를 쌓아가는 '탄탄한 기본기'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4월 총선을 앞둔 정당과 정치인들이 앞으로의 정치에서 한국정치를 '마지노선 민주주의'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는 '정치의 인문성' 실천을 통해 주권자들인 국민들의 정치참여를 노동 부문과 지역에서 촉진해야 한다. 진보정치를 자처하는 정당일수록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한다. 이날 포럼의 발표자였던 김윤철 교수는 한국정치가 마지노선 민주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민정치지성의 발현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시민정치지성'의 핵심은 "첫째, 기성 정치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압력과 도전이 없으면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둘째, 그 압력과 도전이 제 정치세력의 혁신 경쟁을 촉발하도록 작용해야 한다. 셋째, 그 혁신경쟁의 결과는 특정 정치세력의 선거 승패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시민주권의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 넷째, 시민주권은 투표권 행사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자원의 배분에 관한 정책결정권의 행사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체적으로 "△특정 개인과 집단의 행태에 속지 않고 '구조'를 읽기! △삶의 현실, 특히 (교섭)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다수 보통사람들의 현실을 읽기! △옳음의 강변이 아닌, 좋음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지 살펴보기!"를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회찬 의원의 2012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을 소개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내일 새벽에도 6411번 버스는 정해진 시각에 출발합니다. 수많은 투명인간들이 여전히 피곤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아직 우리는 없었습니다…." * 노회찬재단 주최로 매월 열리는 ‘함께맞는비 포럼’은 모든 국민들에게 열려있는 공론의 장입니다. 상반기에 준비된 △ 자영업과 경제불평등(3월) △ 청년노동과 산업재해(4월) △ 농업·농촌·농민과 기후위기(5월) 주제의 사회현안 논의에 많은 분들의 참여와 토론을 기대합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함께맞는 비 포럼' 원고는 프레시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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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한해 두 번의 대출로 넘긴 가전제품 청소노동
[6411의 목소리] 한해 두 번의 대출로 넘긴 가전제품 청소노동 (2024-03-04) 조수형ㅣ가전제품 분해 청소노동자 필자가 드럼세탁기를 분해해 청소하고 있다. 필자 제공 나는 가전제품을 분해해서 청소하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한 지 15년이 됐지만 여전히 이 직업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가전제품들이 의외로 많은 세균과 바이러스 등에 오염돼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 직업이 생겼다. 이 일은 청소업에서도 좀 더 특화된 영역이다.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분해 청소하는 일은 단순히 장비와 기술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문성과 현장 경험이 필요하다. 모델마다 분해·조립 방법이 달라 새 제품이 나올 때마다 계속 연구하고 익혀야 한다. 광고 요즘은 인터넷이나 유튜브로 분해·조립 방법을 배우고 창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점점 늘고 있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가장 큰 이유는 비수기가 길어 안정된 수입 보장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겨울이 끝나가지만 계속되는 불경기 여파인지 주문이 급격히 줄었다. 나 역시 사업의 존폐를 염려할 상황이다. 올해 들어 문을 닫은 업체들도 상당수 보인다. 아주 큰 힘을 쓰는 일이 아니기에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시작했는데 녹록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광고 광고 가전제품 분해 청소에 걸리는 시간은, 대개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서너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통돌이 세탁기는 수조를 들어내고 고객과 함께 오염도를 확인한 뒤 고압세척기와 곰팡이 제거제로 세척을 한다. 에어컨은 열교환기까지 분해해서 약품세척, 고압세척, 스팀세척을 하고 열교환기 탈취 후 다시 제품을 조립하고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한다. 냉장고는 내용물을 전부 비운 다음 청소를 해야 한다. 트레이를 분리하고 내부는 세척액을 묻혀 닦아준다. 가전제품 분해 청소 일은 고객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계절과 경기가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봄부터 여름까지가 가장 많고 겨울은 완전한 비수기다. 세균과 바이러스, 곰팡이 등은 계절과 상관없이 번창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육안이나 냄새 등으로 청소 시기를 판단하는 탓에 날씨가 선선해지거나 추워지면 위생에 대한 경각심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광고 청소 작업 가격은 업체마다 다르지만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등은 적게는 6만~7만원에서 많게는 19만~20만원에 이른다. 냉장고는 내부 음식물을 버려 달라거나 수납정리까지 맡길 경우 가격은 더 오른다. 작업 시간과 노동 강도에 비춰보면 싼 편이라 할 만하다. 한철 벌어서 1년을 먹고사는 직업들은 대개 단가가 높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전제품 청소를 하는 지인에 따르면, 제품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우리보다 평균 3배 이상 높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노동이 천시되어서인지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요즘엔 생활서비스 앱이 생기며 가격 인하 경쟁을 부추긴다. 이런 앱들의 수익 창출 시스템이 작업자에겐 가혹하다. 고객 문의가 들어와 견적서를 보내면 계약이 성사되지 않아도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견적서를 수십장 보냈지만 한 건도 일을 못 하게 돼도 수수료를 내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직업의 마지막 어려움은 고객 대면이다. 고객과 장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부담감, 정신적 압박감은 스트레스로 연결되기도 한다. 노동자를 업신여기는 고객을 만나면 비위를 맞추는 것 또한 쉬운 일만은 아니다. 더운 날 여섯 시간 이상을 작업하면서 물 한잔 얻어먹지 못한 적도 있고, 냉장고 청소 후 집 안에 음식물 냄새가 난다고 냄새를 지우고 가라고 했던 일도 있다. 불량한 제품인데 작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있다. 작업 전에 제품이 잘 작동되는지, 소음은 없는지, 버튼은 잘 눌러지는지 등 철저한 사전 점검을 하는 이유다. 한번은 오래된 세탁기를 분해 청소하고 조립을 마친 뒤 재작동을 하는데 전원 버튼 작동이 오락가락했다. 세탁기 조립을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전원 기판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얘길 해도 고객은 수긍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도리가 없다. 6만원 벌러 갔다가 15만원짜리 중고 세탁기를 사 주고 와야 했다. 모든 고객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작업자를 믿어주고 배려하는 고객도 많다. 그럴 땐 일에 보람도 느끼고 내심 뿌듯하다. 광고 두번의 대출로 견딘 2023년. 겨울을 지나 봄을 맞지만 불경기인 요즘이 가전청소업의 현 모습이며 내 모습이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 선택인지 의심도 해본다. 하지만 앞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모든 게 나빠도 전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일터에 나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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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엄마를 위한 회사는 없다
[6411의 목소리] 엄마를 위한 회사는 없다 (2023-11-19) 박정민 | IT개발자 결혼과 육아로 정규직을 포기해야 했던 필자가 프리랜서 개발자로서 업무를 보는 모습. 필자 제공 나는 아이티(IT) 개발자다. 이 이름이 아직도 나는 너무 좋다. 2005년 7월, 대학을 졸업하기 전 만 21살 때 취업에 성공했다.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감히 너 따위 어린애가 뭘 안다고’ 하는 시선 때문이다. 그래도 실제로 어렸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런 어려움쯤은 견딜 수 있었다. 일이 재밌었다. 광고 그 시절 아이티 개발자는 야근은 필수요, 주말 출근은 필수 권장 덕목이었다. 그래서 한달에 하루 이틀 빼고 내내, 또는 밤새워 일하기도 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아이티 개발자로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뿌듯함과 선배들의 잘한다는 칭찬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야근도, 선배들과 술 마시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어렸고, 젊었고, 체력도 좋았고, 의지도 강했다. 힘든 것과 별개로 직업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던 게 결혼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칭찬해주던 사람들이 결혼하고 나자 “그럼 언제까지 일해? 곧 관두겠네?”라고 했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내가 곧 그만둘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임신까지 하게 되자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주 “언제까지 일해?”라고 물어왔다.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일했다. 광고 광고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내 자리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만삭 때까지 일했다. 출산 2주 전에야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육아휴직을 쓰다가 출산 9개월 만에 복직 권유를 받았고, 아직 어린아이가 걱정됐지만 회사 권유에 두말 안 하고 복직했다. 복귀에는 다소 적응 과정이 필요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여전히 개발자로서 인정받고 있는 듯했고,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그러던 중 차세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이티 업계에서 차세대 프로젝트는 힘들기로 손에 꼽히는 업무다. 야근은 기본, 주말 출근도 불사해야 한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한 파트를 맡았는데, 주요 업무가 아닌 그나마 혼자 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육아하는 여성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약간의 착잡함을 느꼈다. 광고 그렇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뒤 어느 날 사장님이 불러서 말했다. ‘다른 회사에 자리가 하나 났는데, 거기는 아이를 키우며 일하기에 더 수월할 거다. (워킹맘에 대한) 지원제도도 잘돼 있다니 면접을 한번 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평소 직원 사정을 잘 살피는 사장님은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내가 걱정돼 더 나은 일자리를 추천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 제안이 그저 불안하게만 다가왔다. 돌려 말하는 해고인 듯해서였다. 이러다 진짜 잘리는 건 아닌가, 싶어 사장님이 권고한 회사 말고도 몇몇 다른 회사에도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그곳들에서 결혼 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을 들었다. “야근할 수 있어요?”, “우린 애 엄마는 안 써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데도 그럴 거예요.” 결국 나는 어디로도 이직하지 못했고 기존에 다니던 회사 사장님의 배려 아래 이직 권고는 없던 일로 마무리됐다. 이후 몇번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나는 프리랜서라는 신분으로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아이를 키우며 일해야 하는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더는 다른 곳으로 떠밀리듯 이직을 권유받지 않아도 되었고, 사실상 관두라는 말과 다름없는 먼 거리 파견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 정규직에게 주어지는 4대 보험 혜택은 받을 수 없게 됐지만, 이제 회사 소속 개발자가 아니라 업무 책임을 혼자 지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저 어쩌다 들려오는 ‘이 사람 개발 잘해요’라는 사람들의 평가가 내가 한때 개발자였음을 상기시켜준다. 생각해 보면, 결혼한 여자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나는 결혼과 임신을 하면서 좋아하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었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정규직을 포기해야 했다. 누군가는 승진을 포기하고, 누군가는 경력을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좋아하던 개발자의 마음을 포기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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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그래도 소신껏 살아보니 좋다​
[6411의 목소리] 그래도 소신껏 살아보니 좋다 (2024-02-26) 이창열 | 제화노동자·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성수분회장 신발 만드는 공정 중 가죽작업 모습입니다. 저희는 ‘가피’라고 하지요. 신발 윗부분 가죽을 재봉질로 조립하는 과정으로 여기에 밑창을 붙이면 신발이 됩니다. 필자 제공 벌써 4년이나 됐다. 딸이 결혼하는데 새하얀 웨딩슈즈를 만들었다. 나는 재단된 가죽을 재봉질하는 갑피 기술자라 다른 작업은 동료들이 했다. 딸이 좋아했다. 그렇다고 구두장이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안 든다. 봉제 일을 했으면 옷을 선물했을 거고, 보석 가게를 했으면 다이아를 줬겠지. 내가 만들 줄 아는 게 구두라 당연한 거였다. 부모님은 기술을 배우면 굶지는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다그쳤다. 서울 정동에 살았는데, 동네 선배가 구두 일을 했다. 1980년대 초 10대 후반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이 무지 힘들었다.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게 싫어 몇번 도망치기도 했다. 광고 사우디 가겠다고 중장비 자격증을 땄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못 갔다. 용접 자격증도 있는데 썩혔다. 서점 일도 했고, 막노동도 뛰었다. 엑스트라도 해봤다. 엠비시(MBC)가 정동에 있던 시절, 6·25 특집극에 총살당한 시체나 기차역 앞에서 종일 군가 부르는 병사로 출연했다. 재미는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했어도 구두장이 선배가 불러 술 사주고 용돈 주면 그 맛에 빠져 또 돌아갔다. 결국 구두를 만들게 됐다. ‘구두장이가 되자’ 마음을 잡고 나서는 이왕이면 빨리 기술을 배우기로 작정했다. 어떤 기술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1년6개월 만에 한 사람 몫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5천원짜리 공임이면 딱 그만큼 하는 중간 정도 기술로 시작했는데, 세월 낭비하지 않고 나만의 비법을 차곡차곡 쌓았다. 광고 광고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린 1986년, 그땐 일감이 넘쳐났다. 어지간한 월급쟁이의 두배는 벌었는데, 나중에야 깨달았다. 공장에서 가죽 깔고 자면서 하루 20시간씩 일한 근로시간을 따지지 않았다는 걸. 구두 일은 월급제가 아니고 개수임금제다. 만드는 만큼 돈을 받으니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교장’이라고 불리는 관리자가 일감을 배분하는데, 말을 안 듣고 덤비면 일감을 적게 또 어려운 걸 준다. 이렇게 길들인다. 노동조합은 아니다 싶었다. 애들 엄마가 스티커 만드는 조그만 공장에 다녔다. 사장이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려고 30~40명을 자르려고 해서 노조에 가입해 싸웠다고 했다. 나한테는 철저히 숨겼다. 내 성향을 아니까. 집에서 전기장판, 이불을 들고 나가 안 가져오는 건 알았다. 나중에 금속노조에서 만든 투쟁 영상을 보니 애들 엄마가 나오는데, 세상에 그 사장 아들이 한 행동을 보니 돌아버리겠더라. 광고 2018년부터 탠디 하청업체 제화노동자들이 공임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하고 본사를 점거해 농성했다. 이겼다. 구두 만드는 사람들이 아는 게 없으니까 도움을 받으려고 노조에 가입했다. 불이 붙었다. 거긴 사당동인데 노조가 성수동에 와서 홍보하고 그러길래 어영부영 가봤다. 얘기 들어보니 필요하다 싶었다. 2019년 반신반의하면서 노조 가입원서를 썼다. 노조가 생기자 사장이나 관리자들이 조심했다. 퇴직금 얘기도 나왔다. 이런 대접은 못 받아 봤다. 나서면 된다는 성취감 같은 걸 느꼈다. 그때는 분위기에 휩쓸린 면도 있지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열성적으로 빠져들었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나 학교 비정규직들이 집회하면 우리 제화지부에서 도와주러 달려갔다. 일이 안 끝나면 할 수 없지만 좀 빨리 끝낼 수 있으면 막 쫓아갔다. 우리가 힘들 땐 그들이 도와주러 달려온다. 남을 위한다는 거, 내가 이런 걸 언제 또 해보겠냐 싶어서 뿌듯했다. 한 40년 구두 만들면서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백화점에 납품할 정도 수준의 구두를 값은 3분의 1만 받고 파는 거였다. 일하는 사람도 개수임금제가 아니라 월급쟁이로 하고. 협동조합식으로 공동투자하자며 동료들을 꽤 포섭했다. 하지만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다. 내 뒷심이 부족해서였다. 안타깝다. 광고 그래도 소신껏 살아보니 좋다. 결혼하고 애들 태어나고 학교 보내고 돈 들어갈 때부터는 공장 돌아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도 내 일이 아니려니 했다. 그만두고 다른 공장으로 옮기면 됐다. 애들이 학교 졸업하고 직장 들어가고 나니 홀가분해졌던지,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사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원칙이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잘못하고 있다 싶으면 나도 덤비고 싸운다. 후배들이 일할 환경을 선배들이 일찌감치 다져놓지 못한 거, 이게 늘 마음에 걸린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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