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핵발전소 비정규직으로 15년
핵발전소 비정규직으로 15년 (2024-12-16) 경북 경주의 월성 원자력발전소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김월성(가명) | 핵발전소 노동자 저는 올해 월성원전에서 15년째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하지만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직원은 아니에요. 많은 분이 원전 하면 한수원을 떠올리지만 저처럼 한수원 직원이 아닌 노동자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곧 40대 중반이 되는데 이곳이 사실상 제 첫 직장입니다. 15년 전 이곳에 오기 전까지 원자력발전소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아르바이트 겸 경주의 월성원전에서 일하게 된 게 지금까지 왔습니다.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여기서 일하면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돌봐야 할 아이까지 있는 가장이 됐습니다. 소중한 직장이죠.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제가 일하는 월성원전은 ‘가’급 국가보안시설입니다. 출입이 까다롭고 엄격해요. 그렇지만 비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어려운 곳은 아니었어요. 여기서 일하기 전까지 변변한 경력이 없었고, 기계도 만져본 적이 없는데 15년째 일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정규직들 일하는 거 눈치껏 보고 거들면서 기술을 익혔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경상정비 보조 업무입니다. 한전케이피에스(KPS)의 정규직 직원이 원전 내 여러 기계설비를 정비할 때 보조하는 게 제 일이죠. 취직해서 처음 6년 반은 원자력팀에 소속돼 공조기의 팬 관리를 맡았고, 지금은 설비 진단팀에서 윤활유 주유 일을 합니다. 기기에 들어가는 유류와 그리스 등을 교체하고 보충하는 일이죠. 제 정확한 소속은 한전케이피에스의 하청업체인 지(G)플랜트입니다. 1년에 한번씩 소속 업체가 바뀌어서 지금껏 15개 업체를 거쳐 왔습니다. 1년마다 업체가 바뀌다 보니 고용 불안이 매우 심합니다. 광고 아마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않았다면 원전에서 장기 근무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2012년에 노동조합이 생기고 활동하면서 비정규직을 한번 바꿔보자는 마음으로 쭉 눌러앉게 됐습니다. 노동조합이 2012년도부터 준비해서 2013년도에 불법 파견 투쟁을 했고 2014년도 1월쯤에 승소 판결을 받고 합의를 했어요. 그 후 한전케이피에스의 입찰 문서에 고용 승계 확약서를 넣었거든요. 그전에는 매년 회사가 바뀔 때마다 고용 승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노동조합 활동 이후 고용 안정과 더불어 급여가 많이 올랐습니다. 2009년도, 2010년도 때에 비해 세배 정도 오른 셈이에요. 비록 하청 비정규직 신분이지만, 고용이 안정되고 급여가 많이 인상되어 월성원전을 평생 직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임금이 많이 인상되었으나 한전케이피에스 정규직에 견주면 60% 정도에 불과해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을 제외하면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합니다. 기기가 있으면 정규직이 볼트A를 풀 때 우리가 볼트B를 풀거든요. 정규직, 비정규직 똑같아요. 우리가 한전케이피에스 정규직을 가르칠 때도 있어요. 신입사원이 들어오거나 담당자가 바뀌면 우리가 경험자로서 좀 가르치죠. 그래도 우리 급여는 정규직의 60%에 묶여 있습니다. 급여 외에도 비정규직 신분 때문에 속상한 일이 많습니다. 특히 신용대출을 못 받아요. 목돈이 필요할 때 가계에 어려움이 많아요. 원전은 설비 안전을 위해서 18개월 주기로 ‘계획예방정비’라는 대규모 수리 정비를 약 2개월간 합니다. 그때 정규직들은 간식이나 떡이 준비돼 있는데 우리는 없어요. 현장에서 같이 나눠 먹지만 얻어먹는 기분이죠. 우리는 구내식당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도시락이나 라면, 김밥 등으로 점심을 때우죠. 주차난이 심각한데 원청 직원들은 주차면이 따로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원전 일이 위험하지 않냐고 걱정을 많이 해요. 안전하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어요. 방사선 피폭을 많이 걱정하는데 피폭으로 발생하는 산재는 거의 없습니다. 방사선 계측기를 다 차고 일하고, 한수원에서 피폭 관리를 합니다. 높은 선량에 피폭되면 바로 경보음이 뜹니다. 그럼 현장에서 배제되고요.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월성 1호기를 폐쇄했을 때도 경상정비 보조 업무 절반이 날아갔습니다. 정규직은 사업소를 옮길 수도 있지만, 우리 같은 비정규직은 쳐내면 그만이죠. 제가 맡아온 월성 3·4호기는 2027년, 2029년 설계수명이 끝납니다. 에너지 전환이 어쩔 수 없다면, 우리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을 우선 보장하는 정책 대안도 제시해야 해요. 우리 노동조합에 이 점을 꼭 부탁하고 싶어요. 광고 광고 정리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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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중년 비정규직 ‘여사님’, 이름을 잃다
중년 비정규직 ‘여사님’, 이름을 잃다(2024-12-09) 호텔 룸메이드 모습. 사진은 글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클립아트코리아 원상혜(가명) | 호텔 룸메이드 화려한 호텔 현관을 지나 건물 모퉁이를 돌면 지하로 들어가는 검품장 입구가 나온다. 호텔에 물건을 납품하는 트럭들이 들고 나는 경고음이 수시로 울리는 통로 한쪽에 차단봉을 세워 만든 좁은 길이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출퇴근길이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출근카드를 찍고 나면 트럭에서 내리는 식자재들, 품목을 확인하고, 옮기는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검품장을 지나고, 세탁물을 담은 커다란 철제 카트들이 덜컹거리며 오가는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더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 탈의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정받은 층으로 올라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객실에서 사용할 침구류와 각종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준비실로 간다. 준비실에 있는 객실 현황판을 확인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청소용 철제 카트에 싣고서 호텔 복도로 향하는 문을 열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나는 서울 시내 중심가에 있는 특급호텔에서 룸메이드로 일하고 있다. 흔히 ‘하우스키핑’이라 불리는 룸메이드는 호텔의 객실을 청소하고 정리하며, 손님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가장 근접해서 제공한다. 호텔 소속이 아니라 외부 인력 업체에 고용된 비정규직 파견 직원으로 1년 단위로 회사와 계약한다. 내가 일하는 호텔에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포함해서 약 100여명의 룸메이드가 일하고 있는데, 대부분 나와 비슷한 50~60대 여성이다. 광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고, 휴게시간 1시간이 포함되어 있지만 늘 시간에 쫓기는 터라 점심도 건너뛰기 일쑤다. 불규칙한 식사 시간 때문에 룸메이드들은 관절염과 함께 위염을 달고 산다. 청소는 하루에 기본으로 10유닛을 할당받는데, 방의 크기에 따라 7~10개의 방을 배정받게 된다. 임금은 숙련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기초시급과 직무수당으로 이루어진 기본급에, 매달 달라지는 중점 정비, 추가 베드 설치 등 몇가지 업무 추가에 따른 수당이 더해지면 최저임금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야간 근무는 담당자가 따로 있고, 휴일 특근은 명절 휴일에만 적용된다. 손님이 정비를 거절하거나, 시간이 부족해서 유닛을 다 채우지 못하면 그만큼 임금에서 차감된다. 정비 관련해서 고객이 불만을 제기해도 깎인다. 방 하나를 청소하는 데 드는 시간은 체크아웃 객실은 1시간, 재실 객실은 30분 정도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바빠지는 시간인 오전 11시에서 오후 3시 사이에 방이 몰려서 열리면 마치 단거리 경주를 하듯이 잠시도 쉴 틈 없이 숨 가쁘게 뛰어다녀야 겨우 기본 유닛을 채울 수 있다. 올여름 같은 때에는 온종일 에어컨이 나오는 곳에서 일하는데도 땀이 주룩주룩 흘러서 저녁이면 유니폼 옷깃과 등에 허옇게 소금꽃이 피어나기 일쑤였다. 서두르다 보면 사고가 일어난다. 청소 카트에 부딪히고, 객실 가구에 걸려서 넘어지고, 출입문에 손가락이 끼여서 골절이 되거나, 열어 놓은 서랍이나 문에 부딪혀 머리가 찢어지고, 화장실 청소하다 미끄러져서 고관절 손상을 입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회사는 사고가 나도 산재 처리를 꺼려한다. 개인 비용으로 치료를 받고 치료가 끝나면 정산해주겠다는 게 회사 입장이다. 이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 강도, 낮은 임금, 유닛 삭감에 대한 불합리함, 이런 것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여사님’이라는 호칭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비정규직 중년 여성 노동자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숙련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중년 여성 노동자들은 언제까지 이모나, 고모나, 여사님으로 불려야 할까. 어릴 적, 바둑이와 놀던 철수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철수지만, 영희는 비정규직이 되어 직함을 잃는 순간 아주 불합리하게 이름도 잃는다. 이모나 고모나 여사님이 되고, 그 노동은 엄마의 손맛, 여사님의 손길이 된다. 존중이 들어가지 않은 ‘존칭’을 받는 우리 중 누구도 반기지 않는 이 호칭이 비정규직 중년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을 주변부 노동 혹은 노동 밖의 노동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반성을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시작했으면 한다. ○○씨, ○○님, 혹은 ○○메이드, 비정규직 중년 여성 노동자인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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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2천명 급식 일에 온갖 수술...그래도 내게 ‘밥 냄새’ 났으면
2천명 급식 일에 온갖 수술...그래도 내게 ‘밥 냄새’ 났으면 (2024-12-02) 조혜영 | 학교급식노동자 불과 두어달 전 긴 여름에 나는 이런 시구를 적었다. “조리실의 45도는 덥지 않은 신비로움과 착시다/ 불가사의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올해로 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사로 일한 지 29년이 되었다. 첫째 아이가 네살에 시작한 일이 정년퇴직을 1년 반 정도 남겨두었으니 긴 세월을 학교급식 일을 한 셈이다. 한 노동자가 긴 세월 그 노동을 지속하면 일반적으로 경력이 쌓이고 일도 좀 편해지고 업무 부담도 줄어들고 승진도 하고 그러는데 학교급식 일은 그렇지 않다. 출근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식자재 운반과 세척과 조리, 반복되는 칼질이 끝나면 끓이고 데치고 볶고 튀기고 지지고 무치고…. 기계가 돌아가듯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맡은 일을 정신없이 한다. 점심시간에 맞춰 밥을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한치의 오차가 생기면 안 되는 일이 학교 급식실 일이다. 적게는 500명에서 많게는 2천명의 밥을 한다. 광고 모든 단체급식에는 한명의 조리사가 감당해야 하는 ‘배치기준’이라는 제도가 있다. 쉽게 말하면 한 사람이 몇명의 밥을 할 수 있느냐를 기준치로 삼아서 각각의 식당 규모에 맞게 조리사를 배치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반 대학교나 공공기관의 배치기준은 70명 정도인데, 학교급식은 그 두배가 넘는 150명이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 급식 인원이 1천명이면 공공기관에선 조리사 14~15명이 일하는데, 학교에선 겨우 6~7명이 일하는 것이다. 학교급식에 과중하게 책정한 배치기준으로 인해 많은 급식노동자가 강도 높은 노동에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으로 어깨, 팔, 허리, 다리에 저마다 수술의 흔적을 두세개씩은 안고 일한다. 최근에는 조리 시 발생하는 ‘조리 흄’(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발암 미세입자)으로 인해 폐 질환 환자와 폐암 환자가 급증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나도 무릎, 손목, 팔꿈치, 손가락 수술을 하였고 몇년 전에는 음식물을 들고 나르다 넘어져 발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또 다른 동료는 바닥에서 미끄러져 쇠붙이 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히면서 응급실로 실려 간 뒤 뇌출혈 진단을 받고 아직도 출근을 못 하고 있다. 절단기에 손가락이 잘리고 끓는 기름과 물에 화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 간 사례도 부지기수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말을 한다. 그까짓 밥 한끼 하는 데 뭐가 힘이 드냐고? 밥하는 데 무슨 기술이 필요하냐고? 밥하고 설거지하는 일은 주부들은 다 하는 일 아니냐고? 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수시로 실시하는 위생점검과 안전한 급식을 위한 수십가지의 위생 지침을 지키면서 일해야 하므로 그냥 쉽게 밥이나 하는 일이 아님은 틀림없다. 높은 노동강도와 단시간에 조리해야 하는 급식실의 구조상 늘 직업병과 사고에 노출되어 있다. 거기에다 학생들과 학부모, 교직원들의 민원까지 감당하며 일을 한다. 힘들고 위험에 노출되는 일은 누구나 하기 싫어하고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학교급식 조리사로 취업했다가 한달도 못 버티고 그만두는 사례가 많다는 보도가 최근 자주 나오곤 한다. 10명이 하던 일을 4~5명이 하게 되는 상황에서 급식이 중단되거나 부실한 상태로 밥이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일이 힘들고 높은 노동강도와 단시간에 해야 하는 조리업무,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와 청소 등으로 같이 일하는 조리사끼리도 많이 다투고 화내고 소리 지르며 일을 한다. 적당한 휴식과 여유가 있어야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보살피고 위로할 수 있을진대 급식실은 그럴 틈 없이 멈추지 않는 기계처럼 돌아갈 뿐이다. 골병들지 않고 안전하게 서로를 위하며 일할 방법은 없을까? 누군가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이는 일은 그 자체로 행복하고 보람된 일이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고 맛있다는 말을 들으면 그날 하루의 모든 긴장과 고단함은 스르르 녹는다.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그러나 새벽이면 알람시계보다 먼저 눈을 뜨고 어제처럼 서둘러 출근을 한다. 어느 작가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거다. 뭘 해 먹고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사람들 눈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몸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좋은 음식 냄새가 날까?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냥 밥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나를 보면 밥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묵은지 같은 음식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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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행복한 연결’…대안학교 교사로 살기
‘행복한 연결’…대안학교 교사로 살기 (2024-11-25) 김수빈 | 대안학교 교사 나는 충남 금산에 있는 한 대안학교의 교사로, 이제 9개월째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안학교 특성상 다양한 활동이 많아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곤 한다. 그러나 이곳은 내가 간절히 원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선택한 환경이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물 흐르듯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며, 대안학교 교사로서 성장하고 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스무살 무렵, ‘대안학교’라는 존재가 책을 통해 강렬하게 내 안에 들어왔다. 10대 시절, 대학 입시만을 목표로 성실히 살아왔던 나에게 ‘대한민국에 이런 학교가 있었어?’(한문화, 2018)라는 책은 가슴속에 불꽃을 피워냈다. 서점 한구석에서 책을 단숨에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의 10대 시절에 나를 찾는 여행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명문대를 목표로 문제풀이에 매진했던 내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시간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수많은 질문과 아쉬움, 부러움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그 불꽃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됐다. ‘나부터 이 교육의 장을 알리자!’ 그리고 ‘나부터 이런 대안적인 환경을 경험해보자!’ 그렇게 나는 20대 초중반을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았다. 주변에서 “너는 이걸 원해야 해”라고 하는 말에는 귀를 닫았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이전에는 몰랐던 나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면에 귀 기울이며 사는 삶은 생생한 축복이었다. 무엇보다 온전히 살아 있는 감각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광고 나는 내면의 목소리와 세상의 우연을 따라 다양한 공동체를 경험했다. 대안학교의 교사가 된 뒤 내 삶을 돌아보니, 나는 오랫동안 이런 환경을 꿈꿨고, 관련된 책들을 읽었으며, 삶 속의 우연한 기회들로 이 길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왔다. 나에게는 자유를 향한 갈망이 컸다. 획일화된 교육과 서열화된 사회, 입시 경쟁 속에서 힘들었던 청소년 시절, ‘나’로부터 시작하는 대안적인 삶의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했던 건, 이렇게 ‘나’를 위해 살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명문대에 가야 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하고, 안정적인 보수를 받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시선이 중요했다. 이를 얻는 길은 다양했다. 지금 나는 대안학교의 교사이자, 김수빈이라는 개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참 행복하다. “삶을 공유하는 게 교육”이라는 내 멘토의 가르침 아래, 나를 살리는 것들을 학생들과 나눈다. 아침에는 학교 옆 보석사 길을 산책하며 햇볕을 만끽하고, 점심에는 춤동아리에서 학생들과 온전히 자신의 리듬에 집중하는 춤을 춘다. 또 내가 좋아하는 달리기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자신에게 편안한 속도로 달리는 법을 알려주고, 영어 수업을 통해 영어가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경험을 선사한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누다 보니, 때로 학교의 다른 업무에 지치더라도 나를 다시 살리고 끌어올릴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보며 끊임없이 배운다. 학생들을 자연 속에 풀어놓으면 그들은 알아서 마음껏 탐험하고 모험한다. 발표 시간에는 너도나도 손을 들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며, 어떤 점이 좋았고 왜 좋았는지를 이야기한다. 쉬는 시간을 이용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거나 방황하는 학생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이곳에 오기 전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연결감을 느끼고 주는 사람이 되어 살아갈 때,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것이 내 삶을 진정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나를 만나는 학생들 또한 삶을 풍요롭다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미 학교생활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 학생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제 막 탐색을 시작한 생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저 너로 존재해도 괜찮아, 충분해. 이곳에서 무엇이든 해봐, 늘 지지할게.’ 대안학교에서 나는 교사이자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평생을 배우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교사와 학생으로 만난 이 시절이 서로의 삶을 나누고 배울 소중한 기회임을 느낀다. 이 만남에 감사하며, 오늘도 나의 길을 걸어간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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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제3 외국어로 수어는 어떠세요
제3 외국어로 수어는 어떠세요 (2024-11-18) 구본순 | 농·난청문화예술활동 강사 농·난청문화예술활동 강사들이 공공수어도서관에서 농·난청인들과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 제공 강의실 문을 열고 농인이 들어온다. 나는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가슴 앞에서 아래쪽으로 살짝 내린다. ‘안녕하세요’라는 수어(手語)다. 바로 이어 두 손을 약간 구부려 손끝이 양쪽 가슴에 향하도록 하고 상하로 엇갈리게 두어번 움직인다. ‘반갑다’는 인사다. 오늘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나만의 동화 쓰기’ 워크숍이 있는 날이다. 나는 농·청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청각장애인은 수어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청력에 손실이 있는 모든 사람을 일컫고, 농인(聾人)은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여 의사소통하는 사람을 말한다. 2016년 2월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수어는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로 인정되었다. 농인들도 모든 생활영역에서 자신의 모국어인 수어로 삶을 영위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예술교육이나 강의가 청인(聽人)에 의해 진행된다. 수어나 문자(속기록) 통역도 찾아보기 힘들고, 담당 기관에 통역을 요청해도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산도 책정되지 않았고, 전문 인력도 부족하다. 게다가 수어통역사가 투입된다 해도 해당 분야 전문가는 아니기에 강의의 내용과 뉘앙스를 온전히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한 요즘, 음성을 인식해 실시간 문자 자막으로 보여주는 서비스도 있지만, 수어에 익숙한 농인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한국어 자막을 다 이해하기 힘들다. 수어와 한국어는 언어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에게 한국어는 제2 외국어와 같다. 광고 나는 학창 시절부터 수어가 좋았다. 이미지로 그려지는 언어에 매력을 느꼈고 농인과 결혼했다. 농인들을 만나면서 치유의 에너지가 있는 예술을 나누고 싶었고, ‘풍경놀이터’라는 장애문화예술교육단체를 만들었다. 내가 경험한 예술을 농인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서 나는 음성 언어와 수어를 동시에 사용하여 강의를 진행한다. 입술 모양이나 불빛도 누군가에겐 언어가 될 수 있다. 나는 “여러분 수업 시작할게요. 저를 봐주세요” 말과 함께 강의실을 밝히고 있는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켠다. 소리가 아닌 눈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농인들에게 빛을 깜박여 수업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와 ‘수업’과 ‘시작’이란 수어 표현을 조합해 말을 건다. 강의할 때는 한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를 사용하고, 장문이 아닌 쉽고 명료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핵심 내용을 전할 때는 위아래 입술을 꾹 다물고 손과 팔에 힘을 주어 수어로 말한다. 사례를 제시할 때는 마치 동화구연을 하는 사람 같다.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수어 동작을 크게 한다. 비언어적 표현인 ‘비수지 기호’(非手指記號, non-manual signals)는 의미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컨대 ‘무섭다’를 말할 때는 양쪽 어깨를 구부린다. 의문문의 ‘물음표’는 눈썹을 올리고 눈을 크게 하고 턱을 당겨야 한다. 무표정으로 ‘즐겁다’를 할 때와 치아를 보이며 입꼬리를 위로 올려 ‘즐겁다’를 표현할 때, 감정의 정도는 다르게 표현된다. 수어는 온몸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투명한 언어다. 워크숍을 진행할 때면 사소한 활동 하나에도 강의실은 복작복작한다. 강사가 음성언어와 수어로 방법을 설명하고도, 수어통역사와 자원봉사자들은 부지런히 움직여 ‘지역방송’에 대응한다. 수강생별 맞춤형 수업이랄까. 글을 모르는 농인에게는 수어를 종이에 적어서 소통하고, 수어를 모르는 난청 어른에게는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다시 반복하여 말한다. 청각인지장애가 있는 이에게는 눈높이를 맞추어 쭈그리고 앉아 대화한다. 단일하지 않은 접근 과정이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내뱉지 않는다.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고 서로 기다려줄 뿐이다. 이런 수업 풍경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얼른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이 광경을 찍어둔다. 서로를 존중하며 예술을 나누는 장면이 우리가 사는 일상 곳곳으로 스미면 좋겠다. 소리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다름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제2, 제3 외국어로 청인들이 ‘수어’를 배워나가서, 수어를 가늘고 얇게 아는 사람들이 가득했으면 한다. 더 커지고 더 깊어지는 예술의 ‘품’을 꿈꾼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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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한국에서 받은 사랑을, 온기를 전하고 싶어요
한국에서 받은 사랑을, 온기를 전하고 싶어요 (2024-11-11) 간가혜 | 상호문화교육강 “저는 이런 어른이 되고 싶어요.” 저는 결혼 이주민이에요. 한국에 온 지 거의 13년이 됐지요. 제 인생의 3분의 1보다 긴 시간이에요. 모든 여성이 그렇듯 결혼은 제 인생의 제일 크고 중요한 결정이었어요. 한국과 대만은 비슷한 부분도 많지만, 다른 부분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래서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이어도 생활하다 보면 오해가 생기곤 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모든 게 익숙하지 않아 매일 대만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큰일이 생기지 않으면 대만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한국 생활에 적응된 거겠죠. 이렇게 변한 것은 마법 같은 여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광고 인연이란 참 신기해요. 저와 제 남편은 여행 중에 만났어요. 그때는 제가 대학생이었고 남편은 저와 인터넷을 통해 영어 공부를 함께 하는 사이였죠. 어느 날 남편이 대만에 여행하러 왔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만나기 시작했어요. 대학 졸업을 반년 앞두었을 때 친정아버지가 남편 생일에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어요. 대만 문화에 따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석달 안에 결혼하지 않으면 3년을 기다렸다가 결혼해야 했어요. 남편은 당시 서른살이었어요. 우리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간단히 혼인 신고만 했지요. 저는 미신을 믿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때는 제게 닥친 일들이 다 운명처럼 밀려왔어요. 남편의 존재는 아버지를 대신해 제 인생을 채워줄 것 같았어요. 결혼 후 한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어요. 제 인생도 다르게 펼쳐졌죠. 한국에서 인생 2막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족들을 만났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했어요. 시댁은 부산 동래에 있어요. 동래는 참 아름다워요. 특히 시댁 옆에 공원이 있어서 봄에는 공원 길 양쪽에 벚꽃이 활짝 피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세상 모든 고민을 새하얗게 물들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육아는 간단한 게 아니에요. 특히 외국어는 영어만 할 수 있었던 내가 모국에서 숨쉬기처럼 간단한 일들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어요. 신생아처럼 뭐든지 다 도움이 필요했지요. 그런데 저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남편은 출근해야 했어요. 다행히 시부모님이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처음엔 한국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시어머님이 저를 대신해 애를 봐주고 제가 대학에 있는 어학원에 등록해 공부할 수 있게 시간을 만들어 주셨어요.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따듯한 밥이 늘 차려져 있었죠. 광고 광고 시아버지는 한국 생활에 어려워하는 저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항상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으셨죠. 제가 외출한다고 하면 혼자서 길을 찾을 수 있겠냐고 용돈이 부족하지 않으냐고 걱정하셨죠. 힘든 일은 제가 하지 못하게 하고 무얼 하더라도 진심으로 저를 칭찬하고 인정해주셨어요. 부산에서 5년 동안 살았어요. 좋은 친구도 많이 만났죠. 저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에서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많은 분이 시부모님과 같이 생활하기 싫다고 해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시부모님과 생활했던 5년은 제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죠. 새로운 신분, 새로운 문화, 새로운 언어, 심지어 종종 외국인이라 오해받는 일이 생겨 슬플 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시부모님은 제 상처들을 치유해줬어요. 깊고 오래된 상처들도 말이에요. 결혼은 삶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에요. 저한테도 마찬가지죠. 저는 한국에 와서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저도 따듯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세상의 따듯함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한국 사람들이 이주민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면 오해도 줄어들겠죠? 그러면 이 세상도 좋아지겠죠? 7년 전 남편 직장 때문에 파주로 이사했어요. 대만 친구의 권유로 파주시 무지개작은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엄마와 책 놀이’라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죠. 파주시 가족센터에서 교육받아 지금은 다문화 강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 출판사의 도움으로 ‘누가 산을 베어 먹었니?’라는 대만 전래동화를 소재로 한 그림책을 내기도 했죠. 그동안의 모든 것을 감사하며 열심히 살고 있어요. 만약에 누군가 지금 나한테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하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답할 거예요. 빛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듯한 온기를 전하고 싶어요.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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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의 노동은 ‘렌털’이 아닙니다
나의 노동은 ‘렌털’이 아닙니다 (2024-11-04) 전경선 | 코웨이코디코닥지부 본부장 사다리 위에 위태롭게 선 코디가 높은 곳에 설치된 공기청정기를 점검하고 있다. ♣️H6s필자 제공 나는 렌털가전제품 방문점검원(이하 코디)이다. 정수기나 공기청정기와 같은 가전제품을 대여 판매하고 관리까지 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나의 주 업무는 회사와 계약한 계정(각 가정마다 관리하는 제품 하나를 계정 한개로 구분한다)에 대해 2, 4, 6개월 주기에 따라 고객 가정에 직접 방문해 필터 교체를 하는 등 관리 점검하는 일이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내가 코디로 일을 하게 된 것은 둘째 아이가 두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돼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코디는 근무 시간이 자유롭다”는 말을 듣고 일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그 자유는 나의 자유가 아닌 고객의 자유에 더 가까웠다.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고객도 있지만, 방문 약속을 잊어버려 헛걸음하거나 고객이 늦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업무가 익숙해질 때쯤이면 곧이어 관절 질환이 찾아온다. 필터 교체와 노즐 교체 등 업무 특성상 손가락과 손목을 많이 쓰는 탓에 장기 근무자들은 손가락 관절염이나 손가락 변형, 손목터널증후군 하나씩은 앓고 있고, 매일 무거운 업무 장비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쪼그려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일하다 보니 무릎 관절 통증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직업병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매일같이 각 가정에 방문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여러가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도 있다. 개물림 사고는 3년 이상 일한 사람들은 모두 당해본 일이라고 할 만큼 흔한 일이고, 점검 중인 코디를 뒤에서 껴안고,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내 주변에도 업무 중 갑자기 돌변해 다가오는 고객을 가까스로 밀치고 뛰쳐나와 심적 트라우마로 아직 업무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동료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달 전 경기도 지역에서는 코디가 고독사 현장을 발견한 일이 있었는데, 신고 후 경찰이 출동해 상황을 정리했지만, 해당 코디는 그날의 충격으로 지금까지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생각해보시라. 방문 가정의 문을 열 때마다 누가 어떤 모습으로 날 맞을지, 또 어떤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이런 모든 상황에도 회사는 ‘30분 이상 휴식 후 업무 할 것’, ‘법적 문제에 대한 서류 발급은 가능’하며, ‘트라우마는 지역 근로자건강보호센터에서 상담받을 수 있다’는 식의 지침만 주었을 뿐 별다른 조치는 해주지 않았다. 광고 나는 지난 17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의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장비가 든 가방을 메고 출근했다. 대부분 업무가 가정을 방문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용모가 단정하도록 늘 신경을 쓰고, 매주 소속된 사무실에서 회사의 업무 방침과 매뉴얼에 대해 교육받고, 매일 단체 채팅방에서 실적 관리와 업무 관리 감독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 그사이 회사는 내로라하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나 또한 회사의 성장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보람과 보상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내가 일을 시작하고 단 한번도 오르지 않았던 관리 점검 수당은 12년 만인 2021년 겨우 한번의 인상이 있었을 뿐이다. “코디는 회사의 얼굴”이라며 수시로 교육하고 업무 하나하나까지 간섭하며 관리하고, 회사 교육과 출근을 강요하면서도 업무상 발생하는 주유비와 교통비, 업무 중 상해 비용이나 식대 등은 전혀 지급하지 않고 있고, 업무 시 필수인 유니폼도 개인 비용으로 구입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방문점검원은 직원이 아닌 특수고용직 노동자이므로 회사가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회사가 자가관리 제품을 출시하면서 점검 업무를 줄이는 바람에 코디들은 생계를 위해서 영업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는데도, 회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영업에만 혈안이 되어 계속해서 새 코디 충원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 코디들은 노동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기 위한 소송 신청을 준비했고 지난 8월 법원에 소장 접수를 마쳤다. 상식이 통하지 않아 법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야말로 웃기면서도 슬프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단언컨대 우리, 방문점검원의 노동은 ‘렌털’이 아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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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뒤틀린 몸’…나는 의료파업 생존자다
‘뒤틀린 몸’…나는 의료파업 생존자다 (2024-10-28) 문진영 | 대전여성장애인연대 활동가 수술 전후를 비교하기 위해 파킨슨센터 복도에서 영상을 찍는 모습. ♣️H6s필자 제공 나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몸을 가졌다. 서류상 지체장애인이며, 지체장애 중에서도 하지장애인이다. 뇌병변장애인이기도 하다. 언어장애가 있으며, 온몸이 자연스럽게 이완되지 않고, 걷는 것도 위태로워 보인다. 머리가 왼쪽으로 쏠린 탓에 척추측만증이 진행 중이고 목디스크와 허리디스크도 진행 중이다. 심각한 두통으로 얻은 불면증을 해소하려 지역 대형병원 신경과를 찾게 된 이후로는 근긴장이상증 환자가 되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한의원,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신경과, 신경외과 등 각종 병원을 돌아다녔다. ‘뒤틀린 몸’, 흔히 말하는 ‘정상적이지 않은 몸’을 이끌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려 할 때면 의사들이 불편해했다. 제멋대로 움직이며 뒤틀리는 몸을 보며, “움직이면 검사가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같은 반응을 보였고, 진료를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열살 때 처음으로 수술 제안을 받았으나 두개골을 열어 신경을 잘라내는 수술이라 당시 기술로서는 위험성이 컸다.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2년 전 지역의 대형병원을 찾았다. 머리를 감싼 근육에 문제가 생겨 더 이상의 통증을 견딜 수 없었다. 신경과 의사는 몸이 이렇게 된 원인을 찾아보자 제안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몸 검사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검사가 가능한 몸’, ‘유전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는 몸’으로 인정받아, 서울의 빅5 병원 중 한곳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똑같은 검사를 받았고, 다행히 목의 신경과 근육이 고착되지 않아 ‘수술을 시도해볼 만한 몸’이라는 것을 확인받았다. 의사는 나와 같은 사례가 처음이라 예후를 장담할 수 없지만, 환자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 말했다. 통증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나는 무조건 수술을 원한다고 대답했다. 광고 지난 2월26일에 뇌심부자극술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40년 만에 찾은 수술 기회였다. 가족들은 지금보다 몸이 더 나빠질까 불안해했다. 재활·간호 기간을 걱정하며 서로의 마음에 비수를 꽂기도 했지만, 가족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일도 수술의 일부였다. 수술 한달 전 가족여행을 다녀오며 온 가족이 나를 위해 애써주는 마음을 확인했다. 모두 수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수술 열흘 전, 빅5 병원이 의료파업을 실시한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수술이 예정되어 있었던 병원에서 온 것이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 인생은 왜 이러나 싶었다. 혼란스럽고, 원망스러웠다. 지인들은 수술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라며 위로인지 악담인지 알 수 없는 말로 나를 다독였다. 처음엔 의료파업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학창 시절 버스 파업으로 임시버스를 타고 등교한 적이 있었지만, 버스 파업은 오후가 되면 원상복귀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고 있었다. 혼란의 시기가 끝나고 빨리 병원에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한동안 내 시각과 청각은 언론사 속보에 고정되었다. 이전에는 관심도 없던 대한의사협회 사람들의 에스엔에스(SNS)까지 염탐하며 병원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실망감과 우울감, 무력감을 피하려고 더욱 열의 있게 일상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며칠째 이완이 되지 않는 머리, 목, 어깨, 허리의 불쾌함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해 탈이 나버렸다. 현재는 지역 병원에서 신경을 마비시키는 약물을 맞으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의사는 머리가 지난번보다 많이 기울었다며, 너무 힘들면 보톡스 주입 용량을 늘리겠다 한다. 익숙하게 하던 동작이 갑자기 되지 않을까 봐 일상생활을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언제까지 이런 방식을 견디며 생존할 수 있을까 겁이 난다. 얼마 전 나와 비슷한 장애와 증상을 가진 분이 내가 받게 될 수술을 다른 병원에서 받고 예후가 좋아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약도 없는 기다림에 지쳐 수술이 예정돼 있던 빅5 병원의 담당 교수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다른 병원에서 진료와 수술 상담을 받아볼 생각이니 내 데이터를 줄 수 있는지 문의했다. 가능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도 좋겠다는 회신이 왔다. 나는 과연 수술을 받을 수 있을까? 취약해서 더욱 하염없이 기다린 통증의 시간을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약자들의 시간은 도둑맞아도 되는 것인가.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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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월간 함:비] 산업재해 특성과 중대재해처벌법 개혁과제 토론회
산업재해 특성과 중대재해처벌법 개혁과제 토론회 노회찬의원은 2017년 4월 14일 ‘한국형 기업살인법’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대표발의하면서, “재해사고는 성과를 위해 사람의 안전을 소홀히 하는 기업의 조직문화와 제도가 낳은 결과”라고 강조했습니다. 이후 산재 유가족과 민주노총, 시민사회단체, 정의당 등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2021년 1월 26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고, 2022년 1월 27일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현장과 시민생활에서 중대재해가 줄어들고 있는가?’ ‘중대재해처벌법이 노동자와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제도로서 제대로 기능하는가?’하는 의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회찬비전포럼은 정의정책연구소와 공동으로 ▲중대재해 발생 실태와 특성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실태와 제도개혁 과제에 대한 토론장을 마련했습니다. 모쪼록 이번 토론회가 중대재해처벌법 개정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참가신청 바로가기 * 원활한 행사 준비를 위해 미리 참석 여부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행사 개요  일시 : 2024년 10월 31일(목) 오후 2시  장소 : 전태일기념관 2층 울림터 & 유튜브 생중계  주최 : 노회찬비전포럼, 정의정책연구소  진행 순서  사회 : 박창규 노회찬재단 노회찬비전포럼 운영위원장 인사 : 조돈문 정의정책연구소 이사장  발표 : 손익찬 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 공동대표변호사  토론 : 류현철 (재)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 손우목 전국삼성전자노조 위원장  ※ 전태일기념관 찾아오시는 길 ※ 온라인 참가 링크는 당일 오전까지 문자로 발송 예정입니다.  ※ 발표문, 토론문은 당일 오전까지 노회찬재단 홈페이지에 첨부파일로 게시하겠습니다. 문의 : 02-71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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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검열과 싸우는 도서관
검열과 싸우는 도서관 (2024-10-21) 김주영 | 성북문화재단 도서관사업부장 지난 3월 한 도서관 로비에서 진행된 ‘어쩌다 사과는 한개에 1만원이 되었을까?’ 전시 모습. ♣️H6s필자 제공 “어쩌다 사과는 한개에 1만원이 되었을까?” 이 질문은 지난 3월 한 도서관 로비에서 진행된 주제 전시의 제목이다. 큰 부담 없이 사서 먹을 수 있었던 사과의 가격 상승 요인이 무엇인지 기후, 노동, 경제 등 다양한 관점에서 알아보자는 취지로 기획된 전시다. 그런데 민원이 제기됐다. 이 전시가 ‘정치적’이라 불편한 마음이 든다며 이용자가 사서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 시기, 사과 가격 상승과 관련한 논쟁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최근 공공도서관 현장에서는 특정 정치인, 세월호, 성교육, 성평등, 젠더, 페미니즘, ‘위안부’ 등을 소재로 한 도서에 관해 특정 단체가 도서관을 대상으로 금서 목록을 만들어 열람 제한이나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도서관 책임자나 책을 사들이는 담당 사서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등 압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또한 이러한 일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공론화되면서 개인 이용자들조차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도서관 현장의 사서들은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지적 자유 수호’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모든 이념적, 종교적, 정치적 갈등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도서관 및 사서직의 권리선언’에 입각해 자료를 수집하고 이용자들에게 제공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발생하는 여러 일들로 사서들은 자료 선정과 관련한 전문가적 자존감 상실과 함께 법적 소송, 지속적인 민원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광고 최근 발표된 김신영의 논문 ‘도서관 지적 자유 침해 양상과 대처 방안’에서도 도서관·사서의 자료 선정권 침해와 자기검열에 대한 압박, 자료 대출·열람 서비스 위축, 도서관 일상 업무 방해, 법적 소송에 대한 정신적 불안감 등이 도서관 현장의 애로사항으로 꼽혔다. 이러한 현장의 애로사항들로 인해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지적 자유 수호’를 위한 도서관과 사서의 역할이 축소될까 도서관계에서는 우려가 크다. 많은 도서관 현장의 사서들은 외부 압력으로 인해 자신들이 소극적인 태도로 업무에 임하는 것을 경계하여 함께 서로 격려하며 지적 자유 수호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장서 선정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검열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2021년 서울 성북구립도서관은 ‘아동 성추행’으로 실형을 받은 아무개 작가의 어린이책을 연구자와 성인에게만 열람할 수 있게 하는 열람 제한을 결정했다. 이 사건 이후 사서들은 검열과 관련하여 전문가와의 워크숍, 도서관 이용객과의 토론회를 통해 우리의 결정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어떤 과정을 더 수반해야 하는지 등을 논의했다. 사서들과 구민들은 연대와 학문적 논의를 바탕으로 지적 자유와 검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장서 개발 정책의 보완과, 관련 문제 발생 시 위원회 개최 등 실질적인 방안들을 함께 정했다. 이 과정은 구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도서관협회는 지난 8월 도서관의 지적 자유 보장을 위한 ‘도서관 지적 자유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한국도서관협회가 ‘도서관에 대한 일체의 검열 반대와 지적 자유 수호를 위한 성명서’를 발표한 이후 도서관 현장에서 지적 자유를 침범하는 행위에 대해 실제적인 대응 방법을 담은 가이드라인이다. 그러나 지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국내외 성명서나 윤리 선언 등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알권리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임에도 이를 수호하기 위해 애쓰는 현장과 사서들은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지적 자유를 지키기 위한 사서들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다양한 가치, 입장 등을 교류하고 표현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갈등이 고조되는 요즘, 지적 자유를 수호하는 공공도서관은 갈등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공론의 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사서들이 안심하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보호 장치가 시급히 마련되기를 바란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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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파행적 문화행정과 ‘미인도’ 지키기
파행적 문화행정과 ‘미인도’ 지키기 (2024-10-14) 이채원 | 협동조합 ‘고개엔마을’ 사무국장 복합문화예술 공간 ‘미인도’를 둘러싸고 성북문화재단이 파행적 행정을 하는 데 대해 지난 6월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사진 곽병국 서울시 성북구 미아리고개 하부에 있는 공간 ‘미인도’는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제안하고 가꿔온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흩어진 삶을 모아 입체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안에서 피어난 ‘시민’이다. 나는 활동가이자, 문화기획자이고, 예술가이다. 나는 발로 뛰어 시민의 권리를 외치기도 하고, 시민이 발붙일 터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시민이기를 노래하고 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2016년 나는 미인도 인근 성신여대를 다니던 신입생이었다. 극회에서 연극을 기획하며 성북문화재단과의 연결을 시도하다가 재단 담당자의 소개로 ‘아름다운 미아리고개 친구들’(아미고·2016년 미아리고개예술마을만들기 워킹그룹 활동의 일환으로 꾸려진 주민 커뮤니티)과 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아미고는 미인도 활성화를 목표로 활동하다가 2017년 ‘협동조합 고개엔마을’로 조직화하며 성북문화재단과 미인도 공동운영 협약도 맺었다. 그렇게 나는 미인도를 무대로 내가 하고 싶은 예술 활동을 시작하며 이곳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7년간 나름 평안하고 즐거운 미인도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나는 올해 투쟁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 오랜 기간 생태계를 함께 일궈온 성북문화재단이, 서노원 대표의 취임 이후 모든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협동조합 고개엔마을과 성북문화재단은 함께 ‘미인도 공동기획전 동네예술광부전’을 준비 중이었으나, 2024년 5월8일, 성북문화재단 대표는 법적, 행정적 근거가 없는 자의적 판단으로 참여 작가 2명을 배제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이에 대해 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가 모여 문제제기를 하자 조합과 맺고 있던 미인도 공동운영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이 권위주의적 행정은 미인도가 어떤 의미를 가진 공간인지 알고나 이뤄졌을까. 광고 수년간 미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미인도에 대한 나의 시각은 네 단계로 변화해왔다. 이 변화는 예술가이자, 문화기획자, 활동가로 나 자신이 변모하고 진화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첫번째 단계, 활동 초기 나에게 미인도는 하드웨어 차원에서의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관리하기 까다롭지만, 활동의 터가 되어주는 하드웨어였다. 두번째 단계는 미인도에 모이는 사람들에게서 생성되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담론 생성의 터로서의 역할이었다. 세번째는 미인도를 두고 논의되는 제도, 정치, 정책, 도시권, 커먼스, 시민력 등 미인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상징이 중요해졌다. 네번째 단계에선 미인도와 미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고 있다. 미인도는 요즘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미인도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미인도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고 모여 있는 이 순간을, 미인도는 반기고 있는 것 같다. 성북문화재단이 빼앗으려는 미인도를 시민의 것으로 지키려는 우리의 투쟁은 우리를 어디로 나아가게 할까? 나는 지금 미인도가 주는 양분을 먹으며 예술가에서 기획자로 또 활동가로 변모하며 그 사이 언저리에서 시민이 되기를 외치고 있다. 미인도는 시민을 만들고 연결한다. 연결된 시민의 힘은 다시 미인도를 지켜내고, 새로운 차원의 공간이 된다. 내 일의 전부는 그런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이 땅에 시민으로 발붙이고 서기 위한 활동이자 기획이자 예술이다. “우리는 시민이고, 이 도시의 주인이다.”(2024.07.22. ‘성북문화재단의 파행적인 문화행정 규탄 및 예술인 권리 침해에 대한 예술인권리보장위원회 신고 기자회견문’) 미인도를 둘러싼 투쟁은 공간을 독점하려는 이익집단의 투쟁이 아니다. 우리는 미인도의 목소리를 빌려 시민이기를 외치고 있다. 미인도, 그리고 미인도의 투쟁에는 그간 쌓아온 생태계, 거버넌스, 시민 되기라는 다층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미인도는 진짜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권위주의는 우리를 깨뜨리기 위해 돌을 던졌지만, 우리는 깨지지 않고 물결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모이고 성찰하며 그 물결을 퍼뜨리고 있다. 미인도와 함께 우리는 생동하는 도시를 만들고 있다. 그러기에 미인도를 지키는 투쟁은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투쟁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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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아파트 경비의 3개월짜리 계약서
아파트 경비의 3개월짜리 계약서 (2024-10-07) 박영길(가명) | 아파트 경비노동자 현행 파견법은 수위·경비원의 업무를 포함해 32개 업종의 파견근로를 허용하고 있다. 사진은 칼럼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내가 경비 일을 기쁘고 즐겁게 하려면 어찌 됐든 민원이 발생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누가 엘리베이터 안에 오물이 있다며 빨리 치우라고 성화를 낸다고 쳐요. 그러면, 사과부터 해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제가 빨리 대처를 못 해 죄송합니다.” 내가 24시간 1분1초 간격으로 엘리베이터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지만, 입주민의 다그침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따지게 되면 잡음이 생겨요.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하기야 아무리 ‘평화롭게(?)’ 넘기려 해도 도가 지나친 ‘갑질’도 있어요. 이런 경우는 0.01%도 안 됩니다. 0.01%. 이런 사람들을 나는 속으로 ‘또라이’라고 여기는데, 내가 무슨 생활지도 교사도 아닌 터에 이런 경우는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경비 일을 14년째 하는 내 노하우입니다. 경비 나오는 사람들이 나처럼 뭔가를 실패한 경우가 많아요. 젊어서는 큰 기업에서 중장비 정비를 하면서 외국 가서 일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번 돈으로 아파트도 샀어요. 보험 영업도 좀 했고요. 그러다 부동산중개업 한다고 아파트 팔고 사무실 열어 촐싹대다 망했어요. 지금은 그 아파트 값 엄청나게 올랐대요. 딸 결혼하는 데 좀 보태주고 남은 게 뭐 있나요. 벌어야 사는 나 같은 생계형이 경비의 80%고, 나머지는 연금이 나와도 직업을 가져야 몸이 풀린다는 사람들입니다. 다들 한 자락씩 한 사람들이고, 똑똑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살이라는 게 말단으로, 밑으로 갈수록 힘이 없는 처지가 되잖아요. 광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 곧 잘리게 됐습니다. 3개월짜리 단기 계약이니까 “1주일 뒤에 계약이 끝납니다” 이러면 방법이 없는 겁니다. 이래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얼굴 붉히게 되는 상황도 일어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동료를 갈구기도 합니다.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관리소장에게 ‘갈굼을 당하면서도 나는 열심히 하고 있으며 무슨 일이라도 성심껏 하겠다’는 처절한 편지도 쓰고 그런다니까요. 이런 비슷한 상황은 나도 한두번 당한 적이 있어요. 한 10년 전에 민주노총에 있었다는 분이 전단지를 들고 내가 일하는 아파트로 찾아왔거든요. 경비들 권리를 찾자는 이야기에 동조해 나섰어요. 실태조사를 한다고 해서 경비들 설득하고, 모임 한다고 하면 전화 돌려서 오라고 하고 그랬어요. 젊어서부터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좀 있긴 있었어요. 그런데 이러다 보니 나도 피해를 조금 봤어요. 그때 내가 들어가려던 아파트에서 노동조합 한다고 겁을 먹고 나를 안 받았어요. 사실 그런 모임을 해도 나한테 경제적으로는 도움 되는 건 없잖아요. 하다못해 전화비도 들고. 그래도 한때는 한 30명까지 모였습니다. 노동자센터에서 밥도 사고 지원을 좀 했어요. 요새는 지원을 안 하니까 10명도 모이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공제를 좀 하자고 제안했어요. 한달에 1만원씩 내면 추석 때 선물도 나오고 급하면 소액 대출도 되고. 자기가 다 찾아가는 것인데도 안 하려고 해요. 내일모레면 경비 그만둘 수 있다고 안 한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서로 도움이 됐으면 하는 차원에서 조직하자는 것인데 안타깝습니다. 도움이라는 게 딴거 아닙니다. 우리 경비들이 초단기 계약이라 이직이 많은 직종이거든요. 직장 구할 때 소개해주고 그러면 좋잖아요. 나는 20명 정도 알선했어요. 그런데 뒷맛이 좋지 않을 때도 있어요. 모임에 나오라고 전화하면 잘 안 받고 협조를 좀 해주면 좋은데 인간관계가 참 그렇더라고요. 이전에 파견법이 없을 때는 한 아파트에서 오래 일을 했습니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3개월짜리 계약서는 없었습니다. 이거 때문에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자르고 동료들 간에 갈수록 안 좋아집니다. 모임에 함께 힘을 모아주면 좋을 텐데, 그것도 잘 안되고 그래요. 그래도 아침에 눈뜨면 좋습니다. 잠자고 일어나는 게 기적이잖아요. 아침 6시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 6시 퇴근하는 24시간 맞교대로 250만원을 손에 쥐지만,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지 일해서 돈 버는 세상은 아닙니다. 건강해서 일하니까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잖아요. 입주민도 동료도 이렇게 만나는 것 자체가 즐겁고 기쁩니다. 잘 지내십시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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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계절의 실종, 미래를 보다
계절의 실종, 미래를 보다 (2024-09-30) 김백산 | 기후소송 원고 2022년 8월 서울 강남역 일대 침수 당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더는 차로 갈 수 없다고 해서 같이 탔던 승객들과 내려서 걸어가고 있다. 사진 촬영 직후에 배수구에 빠져서 팔과 손을 크게 다쳤다. 필자 제공 2년 전 여름 서울에 하루 만에 400㎜ 가까이 폭우가 내렸을 때 강남역 일대는 허리 높이까지 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나는 그 부근을 지나다 도로 침수를 막기 위해 열어둔 배수구 구멍에 빠졌다. 몸에 상처가 많이 났고, 휴대폰도 망가졌다. 폭우에 뚜껑이 열린 맨홀 때문에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은 분도 계셨다. 기후위기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재난으로 닥칠 수 있고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은 기후변화로 수십년 내에 전세계의 식량 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5% 남짓이고 사료용 곡물을 포함한 곡물 자급률은 20% 이하로,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순위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이다. 한국은 밀, 옥수수, 콩으로 만든 가공식품 소비가 급증하면서 세계 7위의 곡물 수입국이 됐다. 더군다나 육류 소비가 늘어나 사료용 곡물 수입도 확대되고 있다. 조천호 박사는 한반도의 기후위기는 식량위기로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며칠 전 식당에 갔더니 뜨거워진 바닷물 때문에 ‘가을 전어’를 들여놓을 수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커피 원두의 재배 환경이 점점 악화하여 커피 가격이 오르고 있고, 심지어 2080년에는 원두 자체가 멸종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체 원두를 개발하고 있는데, 미래의 커피에는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번 추석에 배추 한포기에 2만원, 시금치 한단에 만원에 파는 곳도 있었다. 광고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미래일까? 기후재난과 식량 안보 위기 등 기후위기와 우리 청년세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돌아보게 된다. 지금 겪고 있는 기후위기는 이미 수십년 동안 내뿜은 온실가스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성장하면서 알게 모르게 기후변화에 기여했다. 편하자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텀블러를 외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개인이 아무리 탄소 저감을 위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거대 기업이나 국가 단위의 탄소배출을 상쇄할 만큼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8월 헌법재판소에서 탄소중립기본법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30년 이후 감축 목표를 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탄소배출 저감 정책이 미비하다는 것을 최고 사법기관 중 하나인 헌법재판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헌재 결정이 내려졌다고 기후위기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정부의 탄소 저감 정책이 미비하다는 것을 인정했으니 국회는 더욱 강력한 탄소중립기본법을 제정해야 하고, 제1차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도 개선해야 한다. “어른들은 투표를 통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수 있지만 어린이들은 그럴 기회가 없습니다. 이 소송에 참여한 것이 미래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또 해야만 하는 유일한 행동이었습니다.” 위헌소송 청구인인 한제아님은 헌법재판소 공개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추석 폭염에 모두 놀라고 있지만 나중에 내 아이가 태어난다면 아열대기후 속 한국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 계절의 실종은 잦은 재난과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삶이 훨씬 더 가혹해질 수 있다. 오염을 제거하는 데는 비용이 따른다. 바다에는 인류가 버린 쓰레기와 미세플라스틱이 가득하고, 우리가 먹는 모든 해산물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되고 있다. 탄소배출도 마찬가지다. 탄소배출은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것을 넘어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당장에 즉각적인 성과가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어렵다. 이 보장되지 않는 노력을 오랜 기간 지속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결정에 나오듯이 “현재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 불충분하면 그만큼 미래의 부담이 가중된다. 이것은 기후위기라는 위험 상황의 중요한 특성이다.” 과거 무분별하게 배출된 온실가스로 현재 이미 심각한 기후변화를 겪고 있는 것에 대하여, 청년으로서 미래를 바라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하고 싶다. 기후대응을 위한 법과 정책의 개선을 위하여 나도 이번 기후소송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족함을 느끼며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크게는 제도 개선에서, 작게는 일상생활의 실천까지.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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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는 10년차 베테랑 환경미화원이다
나는 10년차 베테랑 환경미화원이다 (2024-09-23) 이형진 | 환경미화원 환경미화원들이 새벽에 폐기물을 수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014년, 경북 경주에 있는 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했다. 꽤 규모가 큰 주유소라 거래처들이 많았고, 그중에 경주시 산하 용역업체인 쓰레기 수거 사업장도 있었다. 하루는 기름을 넣고 있는데, 기사 한 분이 내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옆에 타고만 있어도 200만원을 줄 테니 같이 일하자는 거다. 당시 최저시급은 5210원, 8시간 기준 일급은 4만1680원, 월급은 209시간 기준 108만8890원이었던 내게 200만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일단 면접 날짜를 잡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이야기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몹시 부정적이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형님, 그 일 사람이 할 일이 못 됩니다. 허리도 아프고 냄새도 심하게 나고 위험하고 더러우니 절대 그 일 하지 마세요.” 나보다 먼저 같은 제안을 받았고, 그 일을 하다가 단 며칠 만에 그만둔 친구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쓰레기 수거업체의 기사들은 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러 명에게 같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 친구가 적극적으로 말리는 바람에 오히려 더 흥미가 생겨 면접을 봤다. 광고 그렇게 쓰레기차 뒤에 매달리는 미화원 생활을 시작했다. 일하는 첫날, 2리터짜리 플라스틱 통이 담긴 쓰레기 봉지를 수거했다. 어두운 새벽이라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었다. 쓰레기차의 회전판에 플라스틱 통이 걸려 터졌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유를 뒤집어썼다. 놀라고 화가 난 내게 함께 일하는 71살 기사 어르신이 수건을 건네주며 한 말씀 하셨다.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약자야. 이군 어쩔 수 없네! 앞으로 이런 일이 종종 있을 테지만, 경험이 쌓이면 그나마 나아질 걸세.” 수건으로 닦아도 상한 우유 비린내가 계속 올라와서 일하는 내내 힘든 하루였다.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화원 한 분이 쓰레기를 수거하는 도중에 시민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술에 취한 시민이 “쓰레기 치우는 주제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도 이렇게 무시당하거나 불쾌한 일을 겪을 때 상대에게 똑같이 욕을 해 주고 싶지만, 민원인과는 절대로 다툼이나 싸움의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회사의 지시 사항이 있어서 꾹 참는다. 기사 어르신의 말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약자이니 어쩔 수가 없다. 쓰레기 용역업체는 해당 구청이나 군청, 또는 시에서 용역을 받아서 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민원인과의 관계다. 민원 점수가 좋지 않으면 다음 입찰에서 떨어질 수가 있다. 코로나 당시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했던 나는 원치 않은 혜택(?)을 입었다. 영업시간 단축으로 음식물 쓰레기양이 평소 절반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친분 있는 식당 사장님들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면 배달업을 주로 하는 가게는 매출이 많이 올랐는데, 그 때문에 늘어난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미화원들은 더 힘이 들었다. 2024년 현재, 난 아직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다. 벌써 10년차 베테랑 미화원이 되었다. 이제는 식당에서 버린 쓰레기양과 상태만 보고도 그 지역 경기를 알 수 있다. 그동안 미화원의 3종 세트라는 종량제 쓰레기봉투 수거, 음식물 쓰레기 수거, 재활용품 수거를 두루두루 경험했다. 몇년 전 개인 사정으로 경주에서 울산으로 직장을 옮겼고, 월급도 올랐다. 요즘은 자정부터 아침 8시까지 주 5일 40시간 일한다. 10년 전과 비교해서 일터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쓰레기는 치워도 치워도 끝도 없이 매일 나온다. 치우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버리는 날카로운 물건, 유리 조각, 분리배출이 엉망인 수많은 재활용품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수거한다. 우리 일은 여전히 위험하고 힘들다. 작업하던 미화원이 음주운전 차량에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뉴스가 잊을 만하면 나온다. 얼마 전에도 결혼을 앞둔 30대 미화원이 작업 중 음주운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회사에서는 매달 안전교육을 하지만, 갑자기 달려오는 차에는 당해낼 수가 없다. 우리 회사 직원도 음주운전 차량이 뒤에서 달려와 부딪친 일이 있는데, 다행히 큰 사고는 피했다. 개인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쓰레기 파편에 맞는 일이 거의 없다. 경주에서 함께 일했던 기사 어르신의 말처럼 일이 경험이 쌓이니 요령도 생기고 쓰레기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매일 작업하기 전에 기도한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안전히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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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25년 경력단절을 넘어서
25년 경력단절을 넘어서 (2024-09-09) 서윤경 | 약국 파트타임 직원 약장에는 일반 약들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는데, 빠진 약들을 파트타임 직원이 중간중간 채워두어 판매를 원활하게 돕는다. 필자 제공 결혼하고 2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았던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며 호시탐탐 사회로 나갈 궁리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런저런 일로 사회에 나갈 방도는 생기지 않았고 어느덧 쉰을 넘긴 나이가 됐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온 25년이었다. 이제부터는 내 이름으로 활동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20대 때의 회사 경력이 단절된 나는 사회에 다시 나가는 게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내 성격과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싶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일하고 싶었던 약국에 아르바이트 지원을 했다. 감사하게도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고 면접이 끝나갈 무렵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냐는 말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일을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집안일과 달리 약국에서의 일은 또 다른 즐거움과 보람이 있었다. 집안일을 어느 정도 해놓고 오후에 파트타임으로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좋았다. 나는 주 5회 하루 네시간 정도 약국에서 일한다. 약국에는 약을 짓고 복약 지도하는 약사님들, 약이 떨어지지 않게 물량을 주문하고 재고를 관리하며 약국 살림을 담당하는 풀타임 직원분들, 그리고 약사님들의 일을 보조하는 파트타임 직원분들이 있다. 파트타임 일을 흔히 약국 알바라고 말한다. 광고 내게 처음 맡겨진 일은 시럽이었다. 처방 스티커가 나오면 투약 병에 스티커를 붙이고 해당 시럽을 용량에 맞게 따르는 일이었다. 이제는 시럽뿐만 아니라 처방전 입력, 일반 약 판매와 결제, 약장 채우기, 약 포장지 준비 등 내가 하는 일이 늘었다. 일이 익숙해진 덕분인지 눈앞에 일이 보이면 바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잘 몰랐던 많은 약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약이 들어오면 약 이름과 기본 효능 정도는 알아두려고 한다. 약은 처방전에 나온 대로 정확하게 나가는 게 중요하다. 다양한 약들을 챙겨야 하므로 꼼꼼하게 약의 위치나 이름 등을 미리미리 암기해놓으면 좋다. 재밌는 점은 약의 이름이 지어지는 방식이었다. 쓰임에 맞춰, 기억하게 좋게 약의 이름이 지어졌다. 약 이름을 잘 모를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손님이 ‘작감정’을 달라고 하셨는데, “네? 닭강정이요?”라고 되물어서 약국이 웃음바다가 됐다. 50여년 동안 소비자로서 약국을 드나들며 느꼈던 약국의 느낌은 평온하고 친절하며 물 흐르듯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약국 보조로 일하며 조제실 안이 이렇게 바쁘고 할 일이 많은 곳이었는지 처음 알게 됐다. 힘든 점이라고 하면 역시나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처방전들이다. 바쁠 때는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물 마실 시간도 없이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한건 한건 처리해 나간다. 약국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손님들이 모두 약을 처방받아 가고 한두분 남았을 때가 돼야 겨우 숨을 돌린다. 우리 약국에는 총 아홉명이 일한다. 서로 돌아가며 출근 시간을 달리해 일하는데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일하고 있다. 50대인 나는 젊은 분들과 함께 일하는 즐거움이 크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아기 손님들이다. 요새는 길을 가다가 유아차에 탄 아기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 같은 건물에 소아과 병원이 있는 약국이다 보니 아기 손님들이 많이 온다. 손을 흔들며 약국 안으로 들어오는 아기들을 보면 천연 비타민이 따로 없다. 약국에 있으면서 약국이란 곳이 생로병사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곳이라는 걸 느꼈다. 오랫동안 근무한 약사님들은 오랜 단골손님 중에 어릴 적부터 다니던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거나 군대에 가고, 어르신들은 하루가 다르게 나이 드심이 보이고 가끔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손님 가족들에게서 듣게 된다고 했다. 우리 약국은 참 바쁘지만, 친절하다. 약도 정말 빠르게 나온다. 근무자가 여유 있게 배치돼서이기도 하겠지만, 약국 분위기가 쾌활하고 태도는 친절하며 응대 또한 빠르다. 약국도 하나의 작은 사회다. 약을 준비하는 손이 정신없이 바쁜 날도 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존중과 배려, 협동이 있어 바쁜 날도 웃으며 일할 수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하되 자기 일이 아니어도 서로 도와가며 정확하고 신속하게 약이 나갈 수 있게 하는 흐름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손발이 맞으면 바쁜 날도 순조롭게 일이 진행된다. 이처럼 작은 이해가 큰 차이를 만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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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인간에 대한 예의를 내던진 아리셀의 자본가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내던진 아리셀의 자본가들 (2024-09-02) 최현주 | 고 김병철씨 아내 아리셀 화재 참사 희생자 유가족과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7월27일 오후 희생자의 영정을 품에 안은 채 폭우를 맞으며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중구 서울역으로 행진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6월24일 오전 10시31분, 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로 스물세사람의 생명이 하늘로 떠났다. 이주민이 열여덟명이었고, 한국인이 다섯명이었다. 그 다섯명 중에 나의 남편이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 아리셀 연구소장 김병철(얼굴사진 오른쪽)씨가 세상을 떠났다. 참사가 일어난 날부터 나에게 지난 두달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남편의 죽음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고, 나에게 닥친 일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목숨보다 더 소중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 인간성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린 자본가의 잔인함을 나는 두 눈으로 봐야만 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나를 힘들고 아프게 할 것 같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남편이 눈을 감고 나서 참사의 책임자인 박순관 아리셀 대표와 그 아들 박중언 본부장이 이렇게 달라질 줄 몰랐다. 회사는 남편에게 연구개발 담당자로 스카우트 제의를 했고, 남편은 1년 반을 고사한 끝에 입사를 결정했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나는 남편과 아리셀 회사의 관계가 단순히 경영자와 노동자 관계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생전의 남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불이 나자 어떤 관리자보다 먼저 남편이 공장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누구도 들어가지 않은 처참한 현장에 뛰어들어간 남편은 나오지 못했다. 작별 인사도 남기지 못했다. 남편의 사망 이후 회사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 전에 우리나라 최고의 로펌을 선임해 자신의 살 궁리를 먼저 마련했다. 나에게는 변호사를 선임한 이후 연구소 부하 직원을 시켜 전화를 걸어왔다. 물론 함께 사망한 이주민 노동자들에게는 이마저도 없었으니 그나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광고 참사의 책임자들은 일주일 동안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고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사고 직후 내가 아닌 기자들에게 사과했다. 사람이라면 기자가 아닌 가족들에게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자기 잇속 계산하기 전에 함께 울었어야 했다. 남편과 함께 생을 달리한 이들은 이주노동자들이고 여성들이다. 아리셀 회사는 재빠르게 이주노동자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돌려 합의하라고, 빨리 합의하면 조금이라도 웃돈을 얹어 주겠다고 회유했다. 아리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불법파견을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는데도 가족들에게 어떠한 미안함도 책임감도 없었다. 아리셀 회사 쪽은 ‘도급계약서’라고 쓰인 종이 한장을 들고 ‘도급’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셀 경영자들이 구속되기까지 꼬박 두달이 걸렸는데, 고용노동부는 사고 조사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유가족들에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왜 내 가족이 죽어야 했는지 알고 싶다고, 수사를 똑바로 하라고, 수사 과정을 알려달라고, 회사 대표를 구속하라고, 유가족들은 거리를 돌고 기자회견을 하고 행진을 했다. 지금 나는 아리셀 회사가 생각하는 남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한다. 퇴근 뒤에도, 주말에도 회사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후배들을 다독였던 남편을 회사는 ‘부품’쯤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내가 아리셀 유가족들과 함께 대책위원회에 참여하는 이유는 사람의 진심을 짓밟은 그들의 죗값을 묻기 위해서다. 누군가는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회사의 경영이 사람의 목숨보다, 인간이라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보다 우선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나이 오십이 넘었지만 이 사회에 영원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줄 말이 없다. 아리셀 참사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나와 같이하는 아리셀 유가족들, 중국동포들을 대신해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라도 참사의 책임자 중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더라면, 같이 살아남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광고 광고 (8월23일에야 고용노동부와 경찰은 아리셀의 박순관 대표와 다른 3명에 대해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파견법 위반 등 저마다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28일 박 대표 등 2명의 영장을 발부했다. 지난 두달 동안 얼마나 증거를 없앴는지, 조작했는지 알 수 없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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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이 들어 아이들 돕는 보람…‘학교보안관’ 만한 일이 있을까
나이 들어 아이들 돕는 보람…‘학교보안관’ 만한 일이 있을까 (2024-08-26) 이상인 | 서울 원광초등학교 학교보안관 보안관실 안에서 지나가는 학생들과 대화하는 이상인 학교보안관. 필자 제공 나는 초등학교 학교보안관이다. 아침 7시30분이면 보안관 복장에 멋진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교문에서 교통정리를 하면서 학생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우리 학교는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학교로 등교 시간은 오전 8시50분까지지만 맞벌이 부부를 위한 돌봄 교실이 있어서 이른 시간부터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다. 나머지 학생들은 대개 지척의 학교를 걸어서 8시30분부터 50분 사이에 집중적으로 등교를 한다. 이때 나는 인사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안녕”, “안녕하세요”, “○○ 왔구나”, 이름을 아는 아이는 가능하면 이름을 붙여서 인사를 하고, 모르는 아이도 아이가 인사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라고 소리 내어 인사를 한다. 광고 아이들과 늘 밝게 인사를 하다 보니 전직 경찰관인 내가 보안관이 된 뒤 달라진 게 있다. 얼굴에서 근엄한 표정이 사라지고 아이들처럼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면 입에서도 인사말이 저절로 나온다. 그동안 고개만 끄덕하던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에게도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아침 등교 맞이가 끝난 9시부터는 차 한잔을 할 여유가 생긴다. 그러나 잠시도 방심은 금물이다. 차를 마시거나 전화 통화를 할 때도 눈은 연신 정문·후문·모니터 이 세 방향을 교차하며 주시해야 한다. 외부 방문자가 오면 방문록을 작성하고 방문증을 패용시켜 교내로 들여보내고, 학생들도 조퇴를 하면 담임이 작성한 조퇴증을 확인하고 내보낸다. 보안관의 확인 없이는 누구도 학교를 들어가거나 나갈 수 없다. 얼마 전에는 2교시가 막 시작된 10시쯤 4학년 한 학생이 보안관실 앞을 ‘쓱’ 지나 정문 쪽으로 성큼성큼 가고 있었다. 그 학생은 발달장애가 있어서 특별히 잘 돌봐야 하는 친구다. 급히 뛰어가서 막무가내로 집에 가겠다는 아이를 달래놓고 담임선생님께 전화했더니 바로 뛰어 내려오셨다. 1교시 수학 시간에 산만하여 꾸지람을 좀 했더니 2교시 때 화장실을 가겠다 하고는 집으로 내뺀 모양이란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혼자 집으로 간다며 거리를 헤맸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선생님도 나도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교 시간이 되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든 학급이 교실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을 따라 보안관실 앞 공터까지 온다. 거기서 선생님은 간단한 알림 전달도 하시고 저학년은 손을 맞잡거나 안아주기로 인사를 하시고, 고학년은 하이파이브나 목례로 작별인사를 한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운동장과 교문 주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보안관에게도 중요한 시간이다. 학교보안관의 임무 중 하나가 학교폭력 예방이기 때문이다. 매일 작성하는 학교보안관 근무일지에도 폭력예방, 상담활동 등의 관련 항목이 있다. 경찰에서 스쿨폴리스를 해본 내가 보기에 우리 학교는 아이들끼리 심한 폭력은 눈에 띄지 않지만, 장난이 심하여 친구에게 불편감을 주는 경우는 가끔 본다. 그래서 내 나름의 방식대로 예방책을 시행 중이다. 우선, 유난히 날뛰거나 장난이 심한 아이는 이름을 외운 뒤 눈에 뜨일 때마다 불러서 알은체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미할 때 미리 개입하기다. 광고 광고 6학년의 한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몇번 권투 흉내를 내며 빈주먹을 날리거나 툭툭 치는 모습을 보고 “○○야, 상대가 싫다고 하면 폭력이 되는 거야”라고 하는 식이다. 녀석이 요즘은 내 눈치를 은근히 본다. 성공하고 있다는 징조다. 초등학교의 학교보안관 제도는 서울과 강원도만 있는 제도로 학교별로 2~3명이 근무한다. 비슷한 제도로 중·고등학교의 배움터지킴이와 경찰의 아동안전지킴이가 있지만, 처우 면에서 4대 보험에 가입되고, 주 40시간 근무와 5년간 또는 70살까지의 근로가 보장되는 등으로 학교보안관이 좀 낫다. 특히 시니어 일자리 중에서 어린아이들과 대화하고 웃고 직접 도와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보람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당신은 1학년 꼬마들이 선생님을 따라서 병아리 떼처럼 재잘대며 졸졸 줄지어 걸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정겨운지. 손자·손녀 같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소리 지르며 신나게 공을 차는 모습은 또 어떤가? 물이라도 갖다주고 싶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학교보안관이면 매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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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우리가 안마사를 독차지한다고요?
우리가 안마사를 독차지한다고요? (2024-08-19) 허상욱 | 시각장애인 안마사 개인상담뿐 아니라 집단상담, 교육, 워크숍 등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필자 제공 선생님, 편지는 처음이네요. 창밖으로 굵은 비가 묵직하게 내리꽂히는 깊은 여름밤이에요. 상담은 다 끝났는데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지 않아 펜을 들어봅니다. 이런 날이 가끔 있어요. 내담자의 이야기가 잘 소화되지 않는 날이요. 이런 날은 괜스레 딴청으로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실에서 내담자를 맞이하는 일은 설레는 일이에요. 내담자에게 이 시간이 환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일이고요. 하지만 방음 처리가 된 사각형의 밀폐된 상담실에서 내담자와 단둘이 마주 앉아, 그분이 풀어놓는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은 온전히 제가 홀로 감당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우리는 직업윤리상 비밀보장의 의무가 있으니 어딘가에 마구 털어놓을 수도 없고요. 물론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제게는 저를 가르쳐주신 많은 선생님과 제 상담자이신 당신과 함께 수련하고 있는 동료들이 있지요. 무엇보다 제게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내담자가 제 앞에 있고요. 하지만 가끔 제가 무대 위에서 듀엣 춤을 추고 있는 댄서처럼 느껴지곤 해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무대 뒤에 있어요. 제겐 해내야 하는 저만의 몫이 있잖아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그 순간 제가 해내야만 하는 그런 역할이요. 제가 삐끗하는 순간 제 파트너인 내담자가 다칠 수도 있으니, 50분이라는 시간 동안 피하지 않고 집중해서 감당해내야 하는 일이요. 나는 20년 경력의 시각장애인 안마사다. 아홉살에 홍역을, 열아홉살에 폐렴과 결핵을 앓았다. 심한 고열이 있었고, 연속해서 시력 저하가 왔다. 스물아홉살에 초자체 혼탁 제거 수술을 했고, 2회의 망막박리 수술과 염증 제거 수술을 받았다. 수차례의 레이저 시술을 거듭했으나 1999년 말, 최종적으로 실명 판정을 받았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눈이 보이지 않는 게 어떤 미래를 의미하는지 처음에는 온전히 자각하지 못했다. 약시 시절에는 불편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비장애인들과 발맞추어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부터 다녔던 잼과 젤리를 만드는 식품회사에서는 저시력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장장이라는 직위까지 올랐으니 나름 불편함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시력이 전혀 없는 ‘전맹’이 되고 나서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성남에서 대학가 근처의 당구장을 하나 인수하여 운영했다. 서비스가 좋다는 소문 속에 하루 기십만원의 매출이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다. 그러나 실제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턱없이 적었고, 매번 금전 출납에 펑크가 났다. 종업원들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시력의 부재는 큰 장벽이었다. 광고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당구장을 매각했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점자를 배우고 보행을 배웠다. 컴퓨터 초·중급 과정을 연이어서 한입에 쓸어 넣듯 해치웠다. 그러는 도중 아들이 태어났고, 부랴부랴 2001년 대전맹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안마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였다. 이 일 외에는 직업적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 묵묵히 안마사 수료 과정을 감당하였다. 실습할 때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기 일쑤였다. 고된 실습 뒤 점심시간에 밥을 먹을 때면 손이 후들후들 떨려서 국물조차 떠먹을 힘이 없었다. 그렇게 3년의 실습 과정을 마치고 나니, 손에는 힘겹게 취득한 눈물의 자격증이 한 장 들려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안마사는 허울이 좋다. 유니폼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손님들의 아픈 곳을 해결해 주니 거반 의사라 여겨지기도 한다. 손님들도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러주니 기분도 나쁘지 않다. 언젠가는 안마 덕분에 산삼을 먹고도 해결되지 않던 발바닥 냉통이 깔끔히 해결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누군가는 하루 7, 8알의 두통약을 먹어야 하루 업무를 마칠 수 있었는데 이제 그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하였다. 호전되고 있다는 크고 작은 반응들은 안마 일을 지속하게 하는 큰 힘이 된다. 안마 일은 타인의 몸을 돌보는 일이지만, 내 몸은 등한시하는 육체노동이다. 동료 안마사가 “아이고! 오늘 삭신이 쑤시는 걸 보니 손님 많이 들겄네” 말하는 날은 여지없이 손님이 많이 든다. 날씨가 우중충하고 습도가 높은 날은 손님의 몸뿐 아니라 안마사의 근·골격계에도 여기저기 통증이 발생한다. 안마사의 급여는 시간을 얼마만큼 투여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므로, 몸이 쓰러지게 힘든 날에도 웬만해선 안마 일을 쉴 수가 없다. 손님이 규칙적으로 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님이 없을 때는 하루 한 건도 못 하고 퇴근하는 날도 있다. 그러나 손님이 사정없이 밀어닥칠 때는 쉼 없이 하루 열여섯명의 손님을 받은 적도 있다. 언제 손님이 끊길지 모르는 형편에, 한 시간 일하고 몇 분 휴식시간을 갖는 노동 법규를 지키기는 쉽지 않다. 업주는 업주대로 안마사는 안마사대로 불법을 저지르며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안마사들의 평균 재직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요즘 달갑지 않은 소식들이 언론 매체를 타고 들려올 때가 있다. 각종 마사지 협회에서 시각장애인 안마사 제도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직업 평등권에 위헌의 여지가 있다고 수시로 대법원에 소송을 걸어오는 것이다. 직업 평등권보다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법이 상위법에 들어 있는 것을 무시한 터무니없는 소송이라 생각한다. 몇 년 전엔가 대전 홍명상가 지하도 입구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의 바구니를 행인이 걷어찬 사건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나 같은 전맹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리에서의 구걸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손님이 많으면 손가락이 아프고 손님이 없으면 배가 고플지라도, 안마사 일은 시각장애인이 일상에서 영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다. 불가피한 선택이자, 꼭 필요한 생존 수단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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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상담, ‘넓은 우주’를 알아가는 일 그리고 나의 밥줄
상담, ‘넓은 우주’를 알아가는 일 그리고 나의 밥줄 (2024-08-12) 안주현 | 상담사 개인상담뿐 아니라 집단상담, 교육, 워크숍 등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필자 제공 선생님, 편지는 처음이네요. 창밖으로 굵은 비가 묵직하게 내리꽂히는 깊은 여름밤이에요. 상담은 다 끝났는데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지 않아 펜을 들어봅니다. 이런 날이 가끔 있어요. 내담자의 이야기가 잘 소화되지 않는 날이요. 이런 날은 괜스레 딴청으로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더라고요.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실에서 내담자를 맞이하는 일은 설레는 일이에요. 내담자에게 이 시간이 환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일이고요. 하지만 방음 처리가 된 사각형의 밀폐된 상담실에서 내담자와 단둘이 마주 앉아, 그분이 풀어놓는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은 온전히 제가 홀로 감당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우리는 직업윤리상 비밀보장의 의무가 있으니 어딘가에 마구 털어놓을 수도 없고요. 물론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제게는 저를 가르쳐주신 많은 선생님과 제 상담자이신 당신과 함께 수련하고 있는 동료들이 있지요. 무엇보다 제게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내담자가 제 앞에 있고요. 하지만 가끔 제가 무대 위에서 듀엣 춤을 추고 있는 댄서처럼 느껴지곤 해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무대 뒤에 있어요. 제겐 해내야 하는 저만의 몫이 있잖아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그 순간 제가 해내야만 하는 그런 역할이요. 제가 삐끗하는 순간 제 파트너인 내담자가 다칠 수도 있으니, 50분이라는 시간 동안 피하지 않고 집중해서 감당해내야 하는 일이요. 중견 상담자인 저는 아직도 동료들끼리 모이면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섰을까? 하고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여기가 이런 곳인 줄 알았더라도 우리가 이 일을 시작했을까? 하는 질문도 하고요. 이 일의 가장 괴로운 점은 하면 할수록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어떤 일들은 경력이 쌓이면 좀 더 수월해지고, 능숙해지잖아요. 하지만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넓은 우주를 마주하는 일처럼 느껴져요. 선생님들께서는 말씀하시죠. 잘할 수 없는 일이니 잘하려고 하지 말아라… 이런 선문답과 같은 말씀들이요. 광고 그러니 우리는 계속 공부를 해야 하죠. 온갖 교육, 강의, 워크숍, 교육분석, 슈퍼비전, 관련 서적 읽기 등등. 실제 상담하는 시간뿐 아니라 거의 그에 상응할 만큼 공부와 수련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돈을 쓰게 되지요. 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초심 상담자들이 가장 크게 충격받는 부분이잖아요. 많은 상담자가 영리적인 목적만을 가지고 상담을 시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열정페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태도로 좋은 상담자의 자질을 판가름하려고 할 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요. 내담자의 복지를 위해 애쓰는 것이 상담자 자신의 복지를 무시하고 희생시켜야 한다는 말은 아닐 텐데도요. 여전히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많은 상담자가 계약직의 지위에 연봉 3천만원의 수입이라도 보장되는 자리를 찾아 헤맨다는 건 서글픈 일이에요. 지금은 상담사라는 직업이 많이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이 우리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죠. 하지만 실상은 우리를 하나로 대표할 수 있는 국가 자격증도 아직 없어요. 법적 지위가 없으니 그에 따른 법적 의무나 권한도 한계도 없고, 우리 자신을 보호할 법적 근거도 부족하고요. 상담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비상 상황 대응 시스템을 갖춰보려고 해도 법적 근거가 없으니 지자체에서 거부하면 그만이고요. 내담자가 중요한 만큼 상담자인 저희도 중요하잖아요. 상담은 내담자의 복지와 안녕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상담자에겐 생계를 이어 나가게 해주는 밥줄이기도 해요. 안전한 근무 환경에서 안정되게 내 할 일을 이어갈 수 있고, 상담의 유일한 도구인 나를 더 좋은 상담사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돈이 없어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저는 지금까지도 이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고, 다른 일보다 이 일이 더 좋아요. 사람을 알아가는 일, 존재와 존재로 내담자와 만나는 일. 가끔은 이 일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제 돌이킬 수는 없겠다 싶어요. 선생님, 하소연 같은 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내일은 하늘이 아주 맑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삶은 다채롭고 다층적이네요. 조만간 찾아뵐게요. 건강하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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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간호사에게 존엄한 돌봄을 기대하려면
간호사에게 존엄한 돌봄을 기대하려면 (2024-08-05) 신이령(가명) | 간호사 지난 2월27일 오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연합뉴스 나의 간호사 인생은 10년 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첫 직장은 서울 대형 병원으로 산부인과에 지원했다.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암 환자가 대부분인 부인과 여성 암 병동에 배치돼 수많은 임종을 함께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1년간 생리가 나오지 않았다. 동기들도 비슷한 증상이 있었다. 신규 간호사가 겪는 일종의 증후군이었다. 시간이 지나 생리를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화장실을 갈 짬이 없어서 때로는 바지에 피를 흘려가며 일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10년이 지난 현재 지방 공공병원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 나와 내 동료는 세계보건기구(WHO)가 발암물질로 지정한 교대근무를 하면서, 수많은 감염병에 노출되어 있지만 여전히 휴식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자주 끼니를 거르며 일한다. 너무 오래 서 있어서 생기는 하지정맥류나 화장실을 가지 못해 생기는 방광염, 불규칙적 생활로 생기는 위염이나 불면증, 환자를 옮기다 생기는 근골격계 질환은 흔한 직업병이다. 환자의 치매나 섬망 증상으로 인해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 우리는 폭행, 폭언, 성희롱에 너무 쉽게 노출된다. 하지만 아파도 선뜻 쉬기가 어렵다. 간호사는 여유 인력이 없어서 누군가 병가에 들어가면 다른 간호사가 쉬는 날을 반납하고 나와야 한다. 우리 간호사들은 서로서로 대체해 가며 일한다. 현 의료보험 시스템은 일부 질병군의 포괄수가제(미리 정해진 일정액의 진료비를 지불)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의료행위에 대해 행위별 수가제(의료 서비스별로 수가를 정하여 진료비를 지불)를 채택하고 있다. 나도 근무마다 환자에게 사용한 재료대나 의료행위에 대한 수가를 전산에 입력하는 작업을 한다. 간호 행위에 대한 수가는 거의 산정되지 않아 수익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병원 입장에서는 간호사의 노동보다는 자판기 커피가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지도 모른다. 간호사는 많을수록 적자가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최소 인력이 있는 것이 당연시된다. 간호대학의 증원으로 매년 간호사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아프고 소진된 간호사는 언제든지 소모품처럼 대체된다. 베테랑 간호사가 신규 간호사로 대체된다면 병원 입장에서는 인력 비용을 줄일 수 있어서 이득이다. 그래서 현장은 바뀌지 않고 연차가 있는 간호사는 병원을 떠난다. 광고 대형 병원은 비용 문제로 정규직 의사 또한 충분히 뽑지 않기에, 정규직 의사의 업무가 비정규직 의사인 전공의(인턴과 레지던트)에게 온다. 과로에 시달리는 인턴과 레지던트의 업무는 다시 간호사에게 온다. 임상병리사의 일도, 방사선사의 일도 인력 부족을 이유로 때로는 간호사에게 온다. 간호사는 병동에서 환자를 돌봐야 하지만 약물 운반이나 검체 이송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간호사의 일이 넘치면 간호사의 일은 다시 간병인이나 보호자에게로 간다. 나는 매일 환자와 보호자에게 “저희 같은 일반 병동 간호사는 많으면 20명 넘는 환자를 담당하고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도와드릴 순 없어요. 환자분 같은 경우는 간병인이나 보호자가 꼭 상주하셔야 해요”라며 양해를 구한다. 나는 여유가 있다면 한번이라도 더 환자에게 다가가 ‘직접 간호’ 시간을 늘린다. 직접 간호란 환자와 직접 접촉하며 이루어지는 간호를 말한다. 간접 간호는 환자와 직접 접촉하지 않지만, 투약 준비, 처방 확인, 기록 등 전산 업무로 근무시간 내에 해야 하는 일들이다. 직접 간호 시간이 늘어나면 환자를 가까이서 자세히 볼 수 있기에 환자 상태 변화를 빠르게 알 수 있고, 보호자나 간병인에게 위임했던 업무를 직접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환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쉽게 말할 수 있다. 치료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가능하다. 나는 병원에서 가장 약자인 환자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순간은 의료인이 따뜻하게 설명하고 반응하며 눈을 맞춰주는 때라고 믿는다. 인간 대 인간으로 나누는 따뜻한 접촉이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면 간호사는 미래에도 사라지지 않을 직업이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게 태어나 일시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가 최후에는 다시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당신은 언젠가 간호사와 만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브이아이피(VIP) 병동이나 1인실에 있지 않더라도 존엄한 돌봄을 받았으면 좋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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