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6411의 목소리] 마봉춘씨, 전화 한통으로 10년 인연을 정리하자고요?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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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은 6411 버스 속의 사람들처럼, 지치고 힘들 때 함께 비를 맞고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겠습니다.

[6411의 목소리] 마봉춘씨, 전화 한통으로 10년 인연을 정리하자고요?  (2022-06-01)

리리(필명) | 방송작가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2017년 11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작가도 노동자임을 강조하는 큐시트를 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신을 만나러 가던 어느 봄밤, 터널을 빠져나오던 내 차가 빗길에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어요.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에 눈을 질끈 감았고, 사방에서 터진 에어백이 가차 없이 내 몸을 강타했죠.

4차선 도로 양쪽 가드레일을 여러차례 들이받던 그때, ‘방송사 보도국 작가로 매일 여러 사건·사고를 접하던 내가 오늘은 직접 뉴스에 나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연거푸 부딪혀 소생 불가한 차에 의미 없이 시동을 걸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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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를 목격한 다른 차량 운전자가 내게 다가오고, 다음엔 경찰이, 그다음엔 소방관이 다가왔어요.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마봉춘씨,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럴 수 없다고 했어요. 그 전 여름 정규직도 아닌데 휴가를 간다니까 ‘네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가면 어떡하냐’고, ‘네가 돌아왔을 때 책상이 없어졌으면 어떡하냐’고 되묻던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에요.

새벽 방송을 하면서부터 나는 매 순간 요일과 시간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5분을 포기하면 단신 기사 하나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고, 1분이면 원고를 들고 100m쯤 떨어진 스튜디오까지 뛰어갈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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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가운데 일요일 하루만큼은 알람을 꺼놓고 잘 수 있지만, ‘혹시라도 요일을 착각해 당신에게 가지 않는다면?’ 하는 상상은 너무나 두려웠어요. 언젠가 일요일을 월요일로 착각하고 당신에게 달려간 적이 있어요. 새벽에도 늘 깨어 있는 보도국에 아무도 없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요일임을 확인하자 난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어요. 그런데 마봉춘씨, 그거 알아요? 바보 같은 그런 행동은 나만 한 게 아니더라고요. 나와 한 팀이었던 ㄱ씨는 쉬는 날인지도 모르고 새벽 3시에 자다 말고 택시를 탔고, 리포터 ㅈ씨는 대낮에 새벽인 줄 알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대요. 나도, 그들도 마봉춘씨와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가끔은 제시간에 기사를 송고하지 못하는 악몽을 꿔 괴롭기도 했어요.

그렇게 나의 30대 전부를 마봉춘씨 당신과 함께했어요. ‘정규직보다 더 정규직 같다’는 당신의 뼈 있는 농담에 웃어넘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고, 성과금은 없어도 시청률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나의 노력이 보상받은 것 같아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죠. 그사이 수많은 동료가 마봉춘씨를 떠나갔어요. 누군가는 계약이 끝나서, 누군가는 개편으로 자리가 없어져서, 때때로 시청률 부진을 이유로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는 경우도 있었죠. 그때마다 마봉춘씨는 참 냉정했고 떠나는 사람은 담담했어요. 5년이나 일했지만 일주일 전에야 해고를 통보받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리포터를 지켜보며, 난 처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어요. 언젠가 해맑게 웃으며 그녀를 부탁하던 그녀의 어머니가 떠올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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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이번엔 내 차례가 됐어요. 수화기 너머로 당신은 말했죠.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생각지 못한 상황에 난 그저 당신의 말을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선심 쓰듯 ‘한달이나 유예기간을 줬으니 할 만큼 한 것’이라는 말, 10년 동안 쌓아온 인연이 끝나는 순간치고는 너무나 허탈했어요. 우리의 마지막 날, 마봉춘씨 당신은 내게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차마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2년이 지났네요. 난 여전히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고, 당신이 돌아오라고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여전히 날 아프게 하지만, 우리에게 좋았던 날도 난 기억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마봉춘씨, 사람들은 당신을 ‘만나면 좋은 친구’라고 하던데, 이제는 내게도 좋은 친구가 돼줄 순 없나요?

*필자는 입사 10년차인 2020년 여름 <문화방송>(MBC) 쪽의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고 부당함을 호소하다가 이듬해 3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방송사 작가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방송은 중노위 결정을 따르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오는 7월14일 1심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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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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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건이 벌써 2년이 되어가는 군요. 정부가 바뀌고 공영방송 사장이 바뀌면서 문제가 달라질까 싶었지만 당시에 바뀐 MBC 사장조차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는 걸 보면서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느꼈습니다. 지금도 방송국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서 답답한 마음이 들지만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연대하다 보면 조금씩 바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화 한 통으로 10년 인연을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서로를 위해 인연을 정리하는 것은 때로는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서로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서로에게 솔직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서로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