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681
개
1,250
욕망 앞에서: 스러져가는 문화재들을 위하여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잖아요?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잖아요?”
“자본주의 시대에 알맞는 선택이죠.”
우리는 일상에서도 자본주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실제 사용되는 예를 가지고 자본주의가 무슨 의미인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돈이면 다 되는 세상, 돈이 가장 중요한 세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도 그냥 많은 돈이라는 의미 정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는 말 그대로 자본이 중심인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자본은 뭘까요? 자본은 그냥 돈을 뜻하는 말은 아닐 겁니다. 돈이란 어떤 물건의 가치를 알기 쉽게 표현해주는 수치이기도 하고, 물건을 교환을 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고, 물건을 언제든지 바꾸기 위해 저장해두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돈이 자본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그 양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통해서 불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게 돈과 자본의 차이고, 이를 한자 단어로 표현하자면 증식(增植)되는 돈이야말로 자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본주의란 돈의 증식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 구성 방식, 돈의 증식을 위해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는 생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노동을 통하지 않고, 돈이 저절로 불어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주식 투자를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부동산 매매를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중요한 건 결국 사람들이 특정 물건을 실제 가치보다 더 높이 판단하면 돈이 돈을 버는 현상이 생겨납니다. 과거에는 물물교환이 중심이었겠지만, 대부분의 아시아-유럽의 국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한 가지 물건을 기준으로 놓고 거래를 하였습니다. 조선 땅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쌀이 그 기준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금, 은, 구리, 철 같은 금속이 거래의 기준으로 쓰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화폐의 형태는 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이죠.
금속으로 만든 화폐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금속 화폐를 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기 시작했고, 화폐가 곧 부(富)의 실체이고 가치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가치와 가격을 마구 섞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격과 가치가 구분되지 않고 섞이기 시작하면서 자본이 등장했습니다. 자본이라는 것이 어느날 갑자기 ‘나는 자본이다’라고 말하고 등장한 것은 아니고, 자본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꽤 최근의 일이지만, 인간들은 이미 기원년 전후가 되면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본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신분이냐, 계급이냐, 계층이냐’의 차이는 있지만서도, 개인이 어떤 형태로든 자본을 소유하고, 노동 혹은 노동력의 대가를 화폐로 지불하는 체제 하에서, 자본의 증식을 가장 핵심적인 동기로 삼는 사고방식, 혹은 그러한 사회구조를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노동에 기생하는 형태를 띌 수 밖에 없습니다(착취라고 말하면 거품 물고 뒤집어지는 분들이 계실까봐 기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노동 혹은 노동력을 주고 받은 화폐를 끌어모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이 증식될 도리가 없거든요!
왕릉뷰 아파트와 DDP
이야기를 잠시 조선왕릉으로 돌려볼까 합니다. 서울, 경기 지역에 두루 분포되어 있는 조선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조선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단순히 왕의 무덤이라서가 아닙니다. 전문용어로는 천인상관(天人相關)이라고도 합니다만, 천지(天地) 질서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우주,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유교적 자연 이념에 기반하여, 무덤의 구조는 물론, 무덤의 위치까지 매우 세밀하게 구성해, 산과 강으로 대표되는 자연과 마을, 도시로 대표되는 인간 사회, 죽음과 조상, 뿌리라는 경건함과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싸고 섹스하다가 죽는 세속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그 배치 방식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사상의 표현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네스코에서 조선 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할 때에는 그 완전성과 진정성에도 매우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도시개발이 몇몇 유적의 경관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대체로는 엄격한 법률로 개발을 제한하고 있으며, 모든 유적이 본래의 기능과 경건함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완전성과 진정성을 평가받은 것입니다. 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문화재보호법> 등의 실정법으로 이러한 유산을 광범위하게 보호하고 있으며, 효율적으로 보존 계획을 세우고 관리하고 있다는 점, 일관성 있게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매우 큰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네스코-조선왕릉)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도 자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인조의 부친 원종(元宗. 추존왕으로,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이라고도 함)과 인조의 모친 인헌왕후(仁獻王后)의 구씨(具氏) 능인 장릉(章陵) 앞에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불법으로 지어진 것이라면 그것도 문제지만, 이것이 법에 합당하다고 하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한국 정부의 문화재 정책이나, 한국의 문화재 관련 법률, 혹은 문화재 담당 기관이 문화재를 지키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파트 건축이 합법이건 불법이건, 아파트 시공으로 인해 세계적인 문화재가 훼손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주택 보급률은 103.6%였습니다. 한국의 전체 가구수를 100으로 치면, 주택이 103채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주택 문제는 주택 보급의 불공정에 있는 것이지, 주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아파트에 목을 매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자본의 요술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또,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DDP)라는 대표적인 사례도 하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DDP가 있던 자리에 원래는 동대문 운동장 있었습니다. 1925년 건설되어 한국 스포츠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유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2006년 서울특별시장으로 당선된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노후를 이유로 동대문 운동장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DDP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에도 한국 근현대 스포츠의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는 동대문 운동장을 이렇게 헐어 버리는 것이 역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겠냐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런 말을 전부 무시하고 2007년 드디어 동대문운동장을 싹 밀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을 밀고 났더니 거기에서 조선시대 유적이 발견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최대의 군사 훈련 시설이었던 하도감과 민가, 수로, 가마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된 것입니다. 에초에 일제가 동대문 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한양도성을 밀어버리고 지은 탓에 수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동대문 운동장을 철거하면서 이 때 파묻어 버렸던 과거의 유적이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자신의 치적을 반드시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 하나를 가지고, 그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적을 그대로 떠서 여기저기 나누어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유적은 원래 자리에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골에 있는 집을 헐어서 그걸 서울에 지으면 우리는 그것을 시골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런 이치입니다.
1998년 경춘선 가평역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역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고조선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을 만들고, 고조선 시대의 움집과 움무덤터를 그대로 놔두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보존 하였습니다. 또 2005년 부산광역시 4호선 수안역을 공사 할 때에는 임진왜란의 두번째 전투인 동래성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래성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원역을 공사할 때 동래읍성 전시관을 만들어 유물과 유적을 보존하였습니다.
자신의 임기 내에 눈에 보이는 치적을 남기기 위해 DDP를 짓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유적을 싹 밀어버린 오세훈 서울시장의 결단!
그건 실용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어떤 분들은 옛날 무덤, 옛날 집터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넌 지금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사느냐고 되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이나 명동성당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제 삶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면 제 일상에는 큰 지장이 생깁니다. 당장 노트북이 고장나면 제 삶에는 큰 지장이 생깁니다.
실용이라는 것도 분명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실용 속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열차 속에서, 평범한 빌라나 아파트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오히려 가끔은 존중하고 싶은 순간도 있습니다. 여자들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 성대하고 아름답게 차린 전통 제사상보다, 모두가 함께 차린 단촐한 식사가 더 위대할 수 있습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진솔하고 담백한 한 마디가 더 많은 감동을 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의 양식을 따라 만든 드레스나 턱시도, 궁중의 예복을 입고 전통 예법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땀에 젖은 노동자의 모습이 도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장릉을 가리며 건설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는지, 조선의 유적을 여기저기 옮겨놓고 지을만큼 DDP가 중요한 건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프랑스나 영국의 박물관은 여기저기에서 훔쳐온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미국과 일본 여기저기에도 한국의 유물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이 장물들을 돌려주지 않겠겠다면서,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곤 합니다. 낯짝이 두껍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이제 한국의 유물은 돌려받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문화재를 환수하겠다고 할 때, 외국에서 장릉 앞 아파트와 DDP를 거론하면서, 너희는 너희 문화재를 지킬 역량이 없는 나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오히려 장릉 앞 아파트와 DDP가 실용을 해치는 것은 아닐까요? 외국인들이, 혹은 후대의 사람들이 굳이 장릉 앞에 아파트를 건설해야만 하는 당위, 디자인 플라자를 유적지를 옮겨가면서까지 반드시 동대문에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답을 해야할까요? ‘너희 대한민국은 부동산이라는 거대한 욕망,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자본의 증식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지켜야 한다면서 나머지는 깔아뭉개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국민들, 자기 치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환경도 전통도 자기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치인을 가진 나라가 아니냐’고 말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요?
3
·
6,703
'심심한 사과/위로'의 의미를 아시나요?
몇 시간 전 하나의 뉴스를 봤습니다.
"심심한 사과?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해!"...사과문이 쏘아올린 '문맹' 논란"
사건은 웹툰 작가의 사인회 예약이 마감되어 관계자가 마감 공지를 올리면서 '사인회 예약이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예약 과정 중 불편끼쳐 드린 점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라고 적은 SNS에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SNS에서 이 글을 본 사람들이 '심심한 사과'라는 말에 대해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한데,' '심심한 사과라는 것이 어디있냐'라며 항의를 했다고 해요. 이 용어가 논란이 된 이유는 '심심한'이라는 단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뉴스를 보고 처음에는 '왜 논란이 되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사람들이 용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뒤이어 스쳐지나갔습니다. 결국 관계자는 사과문을 다시 발표했죠.
<혹시 몰라 한번 더 '심심하다'를 검색해본>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흘'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한참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었죠. 3일인데 왜 4흘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SNS에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했었어요.
처음에 공유드린 기사에서도 내용이 있지만 '실질 문맹률'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알지만 뜻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의 문맹률은 매우 낮지만 실질 문맹률이 75%일만큼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요.
계속해서 어휘력에 관련된 논란이 많아지고 있어서 걱정도 되면서도, 우리나라만의 이슈일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다른 분들은 심심한, 사흘, 금일 등의 뜻을 알고 있으신가요?! 혹은 이런 뉴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글을 적으면서 뉴스를 다시 찾아보니 몇 분 전에도 뉴스가 나오고 그렇네요...‘심심한 사과’는 심심해서?…또 불거진 어휘력 논란)
6
·
2,184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사회를 바랍니다.
“행복한 새해 되세요~” 라는 신년 인사, 모두 한번씩 들어보셨죠? 행복한 하루가 되라는 작별인사도 자주 듣구요. 행복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이 쓰고 있는 단어라 생각해요. 그런데 슬프게도 '행복하세요?'라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쉽지 않기도 하구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누구도 정의하기 어려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혹은 왜 자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정의하지 못하는 것일까오?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정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행복한 순간’이 있습니다. 또한 그 순간에서 우리는 편안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죠. 이 묘한 감정을, 혹은 고통스럽지 않기를 원하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행복을 정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행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다다르는 것에 방법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물론 이것이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개인이 추구하는 바를 우리가 함부로 짐작할 수 없기에 이를 감히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구요.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있습니다. 순간적인 쾌락과 행복은 다르다는 것이죠. 행복은 결국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현되기 때문이에요. 시험 성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시험을 보았을 때 시험을 잘 보았다는 기준을 어디에 삼고 있으신가요? 만약 내가 공부한 것을 확인하고, 부족한 부분을 알기 위해서 시험점수를 확인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몇 점이 높은지를 비교하는 사람은 똑같은 점수로 똑같은 행복을 느끼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차이가 발생합니다. 점수가 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전자의 경우 어느 부분에서 이번에는 부족했는지를 생각하고, 앞으로의 공부 방향을 설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나의 등수에 집착을 하게 되고, 공부를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결과가 좋더라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자는 앞으로의 방향성과 스스로의 성취감을 느끼겠지만 후자는 높은 등수를 좋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등수를 유지하기 위한 부담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순간적인 쾌락과 행복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례는 나의 목표를 외부(특히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아 쾌락은 얻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주위에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원동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따라간다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따라간다는 것은 그들의 모습 중 닮고 싶은 것을 내가 배우겠다는 의지를 표출한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한 결정적 힘이 감각적인 즐거움이 아닌 삶의 의미, 더 정확하게는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였다.”
굉장히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나네요...) 이를 통해 우리는 행복을 명확히 규정짓지는 못하고 있지만 행복에 조금씩 다다를 수 있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원동력이 생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탐구하고, 나만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기에 이상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죠. 그렇기에 사람들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쾌락만을 쫓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상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를 전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 걸음 다가가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겠지만 다가가는 순간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성취감을 맛보게 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더욱 나은 존재로 발전해갑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왜 매년 부각되고, 소확행과 YOLO 등 사람들에게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어는 매년 생겨나는 것일까요? 이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을 찾고, 더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어하는 거죠.
그렇기에 저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사회를 꿈꿉니다. 모두가 스스로 탐구하고, 나를 위한 목표를 세워서 모든 과정을 그냥 삶으로 받아들였으면 해요. 고통이 없는 것과 행복은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 길 속에서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 길의 끝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웃게 됩니다. 모두가 나만의 길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희망하면서 웃을 수 있기를,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신은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이 삶이 제 삶인걸요?’라면서 모두가 행복하냐는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 그러한 사회를 꿈꿉니다.
4
·
2,082
약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것은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약자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붙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 흔히 소수자로도 사용되는 이 단어는 사회에서 비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주로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슬프게도 비정상과 정상을 나누게 되는 기준은 인원수에 따라 정해집니다.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은 정상이라고 인식되고, 다수와 다른 소수들은 비정상이라고 낙인이 찍히죠. 낙인이 찍힌 소수들은 다수가 있는 범위에서 쫓겨나 외곽으로 점점 밀려나게 되어 그렇게 그들은 사회적 약자가 됩니다. 그들의 잘못과는 별개로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죠.
사마천은 하늘이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착한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례가 많기 때문이죠. 한나라 시기 덕치를 강조하던 군주가 조조에게 진 경우가 있고, 권력층이 아닌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편 사람들이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 장면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항상 실리를 추구한 사람들이 승리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위를 정도를 걷는 사람으로 바라보고, 실리는 자신만의 이익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사마천은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것이지만 정도가 아닌 방법을 통해 이익을 얻게 된다면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역사에서는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 실리를 취하는 경우를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사마천의 주장이 옳을 수 있죠. 하지만 개인이 아닌 집단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역사는 약자의 편에 있었습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제국주의 지배에 있던 식민지는 사라졌으며, 여성의 참정권이 생겼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이루어낸 것들이기에 희생의 당사자들은 그들을 하늘이 돕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들이 말했던 것들은 이루어졌습니다. 약자들은 조금씩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죠.
천도가 공평무사한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항상 강자가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약자의 편을 사람들이 항상 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항상 동일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고 풍년을 보장해주지도 않고, 길거리에 먹을 것이 없어 쓰러져가는 동물들도 존재합니다. 자연을 천도라고 생각하면 결국 모든 것이 공명정대하다는 것은 없고, 설사 있더라도 우리의 관점에서 이를 공명정대하다고 바라볼 것인가도 의문이 듭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에, 세상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 편에 선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옆에 서 있어 준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편에 선다는 말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수도 있겠네요. 사실 선악의 구도는 함부로 정의하기 힘들기에 누군가의 편에 선다는 것은 마치 다른 쪽을 대립한다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 권리가 지켜질 수 있도록 우리도도 함께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단지, 목소리를 함께 내는 것이 이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고작 이조차도 시도하지 못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변화를 바라지도 않고, 약자들이 하루아침에 다수의 동심원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냥,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아니, 들어주자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네요. '듣자'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것조차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이니까요.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