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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악플, 그리고 국가
‘핼러윈데이’가 다가오고 있다. 여느 때 같으면 코스튬을 입은 시민들, 이태원 거리의 파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2022년 10월 29일 이후, 한국의 ‘핼러윈데이’는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아픈 상처가 되었다.  올해 10월 29일이면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다. 서울 한복판의 골목에서 ‘압사’로 158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참사로 친구를 잃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마지막 희생자까지 159명의 시민은 생명을 잃고, 목숨을 건진 수 백여 명의 시민은 ‘생존자’가 되었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여전히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을 위해 거리에 서있다.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하지 않는 정부를 대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런 상황 속에서 참사를 둘러싼 왜곡과 2차 가해, 혐오와 맞서는 이들이 있다. 참사 피해자에게 부정적 프레임을 씌우는 언론, 이들을 조롱하고 힐난하는 악플, ‘혐오해도’ 된다고 신호를 보내는 정치인. 참사를 마주한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청년참여연대는 지난 10월 23일,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 대한 악플, 2차 가해를 저지른 인물, 언론을 대상으로 대응하는 유가족 A씨와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개인이 감당하기엔 힘든 과정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대응을 시작했다고 밝힌  A씨.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이태원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쏟아진 2차 가해 이야기를 드러내고자 한다.   “2차 가해하고도 죄책감 안 느껴… 처벌 선례 만들고 싶었다” 10.29 이태원 참사가 곧 1주기를 맞는다. A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정신과 치료받으면서 가족들과 지낸다. (이태원 참사 관련) 활동이 있을 때 가끔 나간다.”  –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관련하여 유튜브, 언론 기사의 댓글, 정치인들이 막말을 쏟아냈다. 피해자분들과 유가족분들의 입장에서 무척 고통이 클 거 같다. 이와 관련하여 언론, 악플에 대응 중인데, 현재 어떤 상황인가? “초반에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 비교적 젊은 형재·자매들이 언론 대응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공식 메일 주소를 만들어서 언론사 연락을 받고, 인터뷰할 사람을 섭외하기도 했다. 일반 시민분들도 연락을 주셨는데, 2차 가해 기사나 악플 댓글도 제보해 주셨다. (초반에는) 일반인들 상대로 대응을 하기에는 악플이나 2차 가해 댓글 양이 많기도 하고, 다른 일들이 더 많았어서 취합 위주로 했다.  그러다 희생자분들 사연이 소개되면서, 신상이 공개된 몇몇 희생자분들이 있었다. 처음에 인터뷰를 할 때 댓글을 안 받고 올린다고 해서 응했던 것인데, 나중에 보니 댓글 창이 열려있었다. 거기서도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 걸 보고 무척 화가 났다.  그 사람들은 본인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정작 모른다. (가해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정치인들이 언론에 나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2차 가해성 발언을 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처벌하는 판례를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희생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대해 11월 초, 중반부터 대응했다.  주로 일베 사이트(일간 베스트)에 글을 쓴 악플러들을 고소했는데, 직접 찾아보고 취합했다. 그리고 변호사분이랑 같이 대리인 고소를 진행했다.”  –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한 인물들에 대한 적절한 처벌 조치가 이루어졌나? “현재는 고소한 사람 중, 7~8명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어떤 사건은 벌금 200만 원으로 최종 판결 나기도 하고, 어떤 건은 벌금 300만 원 형을 받았는데 피고가 항소를 했다.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람에 대한 형벌은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한 건이 1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받았는데, 검찰이 항소하기도 했다. 벌금 500만 원보다 더 높은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검찰이 항소한 거 같다. 현재 그 사건은 2심을 앞두고 있고, 다른 것들은 아직도 조사 진행 중이다. 어떤 분들은 반성문을 쓴다거나 합의를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합의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서 합의는 안 하고 있다.” – 일반인이 ‘악플 고소’를 하는 과정은 까다롭고 어려웠을 거 같다. 이 과정이 힘들지는 않았나.  “사자명예훼손 같은 경우가 굉장히 까다롭다. 알아보니까 정말 까다로운 게, 친고죄 (사자명예훼손죄, 모욕죄)는 고인의 가족만 고소할 수 있다. 허위의 사실을 고의성을 가지고 제3자가 보는 곳에서 적시했을 때 처벌이 가능하다. 그래서 처벌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고소했는데 어떤 건이 1심에서는 최고로 높은 형벌을 받았다. 아직 진행 중이지만 높은 형벌을 받은 판례를 남겼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막말을 하고 2차 가해를 저지른 김미나 의원은 선고유예를 받았다. 정치인이면 본인의 말에 더 책임을 져야 하고, 잘못을 했을 때 더 중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면죄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직접 느꼈다. 이를 보며 국가, 정부, 법원이 가해자들에게, 정치인들이 하는 말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더욱 화가 난다.   악플을 취합하고 고소하는 과정은 (감정적으로도) 아주 어려웠다. 처음에는 악플 대응을 조용히 하고 싶었다. 글(악플)을 읽으면서 손이 떨리고 가슴도 뛰고 화가 났지만, 그것보다 희생자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를 욕하면 상관이 없는데, 아무런 대응을 하지도 못하는 고인을 욕하니까. 잘못을 일깨우고, 악플 고소에 대한 판례를 남기면 참사에 대한 2차 가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국가가 2차 가해자다”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2차 가해, 악플 공격이 왜 이렇게까지 심각할까.  “언론이 기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인권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다른 유가족 분의 장례식장에 찾아와서 한 마디만 해달라고 하는 기자들이 많았다. 그들한테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기사를 쓰는 경우도 있었고,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유가족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끔 기사를 쓰는 것도 느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언론과 국가가 이태원 참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주도했다고 생각한다. 악플러들을 고소해서 재판을 진행 중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론과 정부가 그들에게 색안경을 씌워서 그렇게 된 건 아닐까 싶다.  법원도 2차 가해 해결을 막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법원이 사실상 한덕수 국무총리나 김미나 의원에게  2차 가해에 대한 면죄부를 줬다고 생각한다. 또, 참사 이후 분향소가 녹사평에 있었을 때, 분향소 옆에 신자유연대 단체가 노골적으로 2차 가해를 했다. 그런데 집회를 철수시키는 것에 대해 법원은 집회의 자유를 우선시했다. 유가족과 고인을 대놓고 모욕을 하는 집회를, 권리와 자유라고 존중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대놓고 국가가 2차 가해자들을 보호하니까.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국가가 2차 가해자다.” – 참사를 왜곡하고 피해자, 유가족에게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혐오 표현 문제를 개선해나가기 위해 시민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 있을까?  “처음에는 ‘놀러 가서 죽었는데 왜 난리냐’는 댓글들에 차분히 반박 댓글도 남겨보고 설득시키려고 해봤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대응을 하다가 점점 포기하게 됐다. 아무리 댓글뿐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상처받고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이 어떤 일을 실천해야 할까 생각하면 어렵다.  작은 실천으로는, 악플이나 혐오 댓글에 ‘싫어요’를 눌러서 반대 의견을 표하는 것도 있다. 혐오 댓글에 ‘이런 욕은 잘못된 거다’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다수가 생각하는게 맞겠지’라고 수동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묵살되고, 또 다른 욕들이 달리는 거 같다. 그래서 기사의 ‘좋아요’나 댓글만 읽는 것보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이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 10.29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진정한 애도와 추모를 위해 시민으로서 함께 연대하고 싶다. 더 많은 연대를 위해 남길 이야기는?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는 젊은 분들이 잘 안 온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 때문에 젊은 분들이 지금 다 숨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있던 게 잘못된 건가’하는 생각으로 부모님에게도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 못 했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사실, 이태원에 있는 거나 핼러윈 축제가 잘못된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유가족)한테는 이번 핼러윈이 슬픈 날이겟지만, 당시 희생자분들에게는 1년에 한 번 뿐인 일상이었다. 핼러윈을 너무 슬프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즐기거나 안 즐기거나 본인의 마음이지만, 즐기더라도 죄책감 갖지 않고 몸과 마음이 안전했으면 좋겠다.  덧붙여, 언론에서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가 거리에서 이야기하면 ‘다 해결됐는데 왜 아직도 저래’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국가, 정부에서 수사를 끌어서 하나도 해결된 게 없다.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되지 않았으니 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우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이번 사례를 통해 보여준 언론의 태도는 플랫폼 기업의 ‘혐오산업’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자극적인 보도로 조회 수, 트래픽을 높여 기업 매출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언론의 패턴이다. 유가족 인터뷰 댓글창에 악플이 많이 달리자 댓글창을 폐쇄하길 요청했지만, 담당 기자는 주저했다고 한다. 당사자에게는 칼이 되어 꽂히는 악플이지만, 결국 기사의 성과와 직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구조적 혐오와 2차 가해 속에서 악플러 개인을 처벌하는 방식이 과연 유효할까. 어떻게 우리 사회가 혐오와 차별, 폭력에 대해 구조적, 기업적 책임을 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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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장막을 걷어, 그 너머로
<연애의 장막을 걷어, 그 너머로> by 남함페 연웅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우리,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어느 날, 어떤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저무는 연애 앞에서 무엇도 하지 못한 채 가장 초라하고 몹쓸 사람이 돼 있을 뿐이었다. 연애가 내게 남긴 감상은 늘 ‘너무 어렵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연애란, 정답지는 당연히 없을 뿐더러, 한 사람의 성숙이 그 관계의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 극한의 팀플이었다. 성숙한 한 사람이 나였을 때도 상대방이었을 때도 혹은 둘 다라고 믿었을 때도, 팀플의 난이도는 낮아지지 않았다. 연애의 끝에선 늘 실패만 돋보일 뿐이었다. 연애는 늘 맑은 거울처럼 나를 비췄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뾰루지와 생채기가 왜 이렇게 눈에 띄는 걸까. 거울 앞에선 자꾸 지난 상처에 손이 가곤 한다. 만지다 덧날 걸 알면서도 그런다. 상처 위에 뽀로로밴드를 붙여도 상처는 티가 나기 마련이다. 때로 연애는 내가 알고 싶지 않던, 보고 싶지 않던 내 모습들을 자꾸 무대 위에 올려 놓는다. 무대가 익숙한 사람도 아닌데, 기획부터 연출에 연기까지 꼼꼼히 재고 있다. 어떤 대사는 날 간지럽게 하고, 어떤 배역은 내 깊숙한 심연을 자꾸 건드린다. 시나리오는 내 몫이 아니라 손 댈 수도 없다. 괜찮다. 어쨌든 무대만 잘 만들면 된다. 하지만 자만은 가끔 실망스런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생각보다 적은 박수나 예상치 못한 비평에 난 하염없이 무너진다. 자존심은 비틀거리고 서운함이라는 불청객은 어느새 안방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겨우 무대를 내려오며 할 말을 참는 날이 하나 둘 늘다 보면 어느새 지쳐 그만 둘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애정은 망한 극장처럼 알게 모르게 자리를 뜨고, 금새 이별이다. 다시 한 번 무대에 장막이 드리운다. 밀린 숙제처럼 지난 연애의 장면 장면을 곱씹다 보면, 자주 ‘사람’과 ‘관계’를 외면하고 ‘연애’ 그 자체에 집중하고 몰입하던 내가 보인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연애는 그 시작부터 엔딩까지 특별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이어지다 연인이 되는 과정 중 아련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연애만 왜 특별한가. 다른 관계들에 비해 ‘특별 대우'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연애는 ‘특별해야만 한다'는 그 생각이 우리가 이걸 늘 망치는 근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을 놓칠 수 없어"“이번이 아니면, 다신 없을 것 같아"“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절대 헤어질 수 없어”“우린 특별하니까" 나도 그랬다. 언제나 사랑은 새로 발견한 불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어느 날 가랑비에 젖어 식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날 다치고 아프게 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전에도 데였으면서 이번엔 오래 따뜻하기만 할 거라고, 내가 그렇게 되게끔 만들 거라고 쉽게 자만했다. 단순히 근거 없는 자만은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 헌신하고, 사소한 것까지 잘 돌보고, 근사한 데이트를 기획하는 일을 ‘잘 해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반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한 명의 헌신은 다른 이의 부담이 되었고, 돌봄은 늘 상황 의존적이었다. 성실한 데이트 기획은 부담에 부담을 덧대는 꼴이 될 뿐이었다. 어느새 소원해진 관계를 돌아보며, 뭔가 바꿔보려고 할 때는 이미 역부족이거나 역효과라는 걸 깨닫게 된 후였다. 우린 보통 친구 관계를 비롯한 인간 관계의 친밀함을 측정할 때 ‘편하다'는 감각을 그 지표로 많이 애용한다. 편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가 쌓였다는 방증이고, 그 관계가 부담스럽거나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관계가 ‘연애’로 가게 되면, ‘편하다'는 감각은 오히려 ‘이별'의 징후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 관계가 편해졌다는 것이 곧 그 사람에게 질린다거나 지루해졌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다. 왜 우리는 같은 ‘편함’의 감각을 연애에만 다른 잣대를 두고 보는 걸까. 계속 팽팽하기만 한 고무줄은 끊어지기 마련인데, 왜 유독 연애만 끊어질 것을 어떤 관계보다 두려워 하면서 끊어질 때까지 몰아 붙이는 걸까. 나도 여기에서 함정에 빠졌다. 나도 ‘연애'를 ‘일상적 관계'로 보지 않았던 게 아닐까. 고독과 고통으로 점철된 생으로부터 나를 구해 줄 ‘백마 탄 구원자' 정도로 ‘연애'를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러면서 그 특별함과 소중함에 잔뜩 취해 ‘연애’가 늘 ‘연애’답길 바란 게 아닐까. ‘연애 다운 연애’가 수많은 ‘연애’를 망친다. 연인과 친구가 무엇이 다를까. ‘섹스'를 한다는 것? 그건 개인 간에 취사 선택할 영역이다. ‘섹스 없는 연애'도 분명 있을 수 있다. 아니 있어 마땅하다. ‘이별’이 존재한다는 것? 친구 사이에도 이별이 없지 않다. 때론 연인 사이보다 드라마틱한 이별의 순간이 친구 사이에도 있질 않나. 누군가와 친해지지 않고 연인이 되려는 것, 가능하지 않거나 폭력적인 일이다. 연애는 일상이고 관계다. 관계는 그들만의 스펙트럼과도 같아서, 당사자들이 쌓아 온 시간과 애정의 역사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고백 같은 선언이나 일방적인 발버둥으로 연애를 얻으려 한다면, 필시 외롭고 쓸쓸하게 남을 것이다. 결국, ‘구분 짓기'가 만들어 낸 촌극이다. ‘친구'와 ‘연인'을 억지로 구분하려 하니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남녀 사이엔 친구가 없다는 말'로 ‘이성 간 친구'라는 관계를 세상에서 지우고, 동성애 차별로 ‘동성 간 연인’을 삭제하는 것도 ‘구분 짓기'가 만들어 낸 비극이다. 심지어 굳이 ‘연애’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솔로'라는 이름을 붙여 조롱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연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지 않고,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드는 것. 즉, 구분 짓고 이름 붙이는 것에 급급한 사회가 각종 차별과 배제를 만들어 내고, 우리 관계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우리 관계가 더 편해지고 좋아지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갑자기 웬 정치냐고? 이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 ‘관계'의 문제보다 우리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 또 있을까. 우리의 행복한 ‘관계 맺기’를 ‘구분 짓기'로 방해하는 사회에 제발 그만하라고 외치는 것이 넓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고 대체 무엇이겠는가. 모두가 편하게 연애 하거나, 편하게 연애 안 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 나는 이것도 ‘페미니즘'이라 부르고 싶다. 여기 A가 있다. 그는 평범함을 미덕으로 여기며 한국 사회가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 성실하게 달려온 학생이다.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은 ‘대학 가면 연애한다’고 말씀하셨다. 연애를 하고 있든 한 적 없든 모두 캠퍼스를 거니는 커플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A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선생님의 말대로 지금은 연애하거나 놀기보다도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생각했다. 대학을 간 다음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이었다. “대학만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연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 경험의 유예를 권장할 뿐이었다. 모두가 대학에 갈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게 된 A는 그간 인질로 잡혀 있던 연애가 풀려나 자신에게 반갑게 올 줄 믿었다. 근데 웬 걸? 대학은 고등학교보다 더 했다. 그야말로 자유경쟁시장이었다. ‘누가 더 많이 실수하나’의 각축장을 방불케 했다. 대학을 간다고 연애를 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졌다. A는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생 때 연애할 걸. 억울한 마음을 풀고자 하는 의미였을까. 단순히 연애가 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A는 적극적으로 미팅과 소개팅에 나가고, 주변에 조언을 구하며 연애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A의 일방적인 고백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고, 동기들은 공지해 줄 과대표를 잃었다. A는 군대 갈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 군대를 다녀 온 A는 이번엔 ‘복학생’ 신분으로 ‘연애’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그간 인터넷 커뮤니티를 드나들며 배운 토막 연애 상식들로 단련된 A는 각종 동아리와 학회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열심히 ‘노력’했다. 심지어 관에서 하는 ‘솔로대첩’과 같은 행사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고립되고 배제될 뿐이었다. 그는 억울했다. 화가 나기도 했다. 자신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고 자신이 사회로부터 차별받는다고 느꼈다.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뭐가 문제였을까. 그는 한 번도 연애를 관계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연애는 성취, 목표, 도전과 같은 것이었을 테다. 매력적인 여성을 ‘여자친구’로 만드는 일을 ‘성공'하기 위해 최대한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하였으나 처참히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자신을 성취의 ‘대상’으로 보고, 물건마냥 얻고자 ‘노력’하는 그와 같이 있고 싶은 여성은 단언컨대 없다. 물론 A는 억울할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억압이 큰 영향을 미쳤을 거고, 연애를 성취로 취급한 주변 어른들의 영향도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성과 ‘동료 되기’보다 ‘공격 하기’를 선택한다면 난 기꺼이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를 위해서라도. 나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A였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처참히 반성하고 조금이라도 나아갔다. 어느 시절 나의 ‘고백’은 ‘폭력’이었을지도 모르고, 어느 시절 나의 ‘연애’는 애인에게 ‘감당’해야 할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페미니즘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페미니즘 활동을 공개적으로 하기 시작하고, 성평등을 지향한다는 것을 주변에 공유하기 시작했을 때, 친구나 지인 혹은 모르는 사람(주로 인터넷 악플)에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라 쓰고 공격이라 읽는 것)이 하나 있다. “너, 여자 만나려고 하는 거지?” 이 질문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어딜 가나 쫓아다니며 날 괴롭혔다. 이 질문이 악질인 것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소수자가 받는 성차별에 대해 저항하며 시작한 나의 페미니즘 활동을 폄하할 뿐 아니라, 나의 소중한 ‘동료’들을 납작한 질문 속에 가두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면, 오히려 ‘맞다’고 대답해주고 싶다. 맞다. 난 페미니즘 활동을 하며 정말 다양한 여성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내 가족, 애인, 친구, 동료, 상사이며 함께 공동체를 구성해 살아가는 동지다. 나는 이들을 만난다. 나는 이들과 대화한다. 나는 이들과 공감하며 소통한다. 나는 이들과 함께 자주 웃고, 때로는 울고, 어느 날은 아파한다. 내 곁의 여성 동료는 내가 주눅 들지 않고 계속 페미니즘을 외쳐야 할 더 진한 이유가 되어, 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게 만든다. 이들이 있어 나는 치열하게 살아가며, 또 행복하게 죽어간다. “페미니즘에 분명 답이 있다.” 나는 A를 사석에서 만나게 된다면, 꼭 이 얘길 해주고 싶다. 뭔가 생각했던대로 풀리지 않아서,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연애와 관계의 첫 발을 떼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이젠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할 그에게 ‘이 길'을 알려주고 싶다. 부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익명의 안티-페미니스트에게 같잖은 위안을 받으며 여성과 소수자를 조롱하는 길로 빠지지 않길 정말 절실하게 기도한다. 그 길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방향이다. 나는 당신이 다시 우리의 공동체로 돌아오길 희망한다. 그가 생을 살아오며 만든 ‘업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손과 함께 페미니즘을 건네겠다. 여성과 관계 맺기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연애를 할 수 있겠나. 여성과 연애를 하고 싶다면, 먼저 여성과 동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여성과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곱셈도 못하면서 미적분 한다고 나서는 사람에게 코웃음 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현실을 알고, 여성의 아픔에 공감하고, 여성의 문제에 함께 나서는 것이 여성과 동료가 되는 일의 충분히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분명 답이 있다는 것이다. ”좋고 나쁜 그런 걸 떠나 그냥 나 자신일 수 있어야 해요.”“그러니 결국 내가 나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거예요.”“오직 나약한 남자들만이 강한 여자를 못 견디죠.”“강한 여자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강한 남자예요.”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10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q1tlawV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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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기꺼이 걸려 멈춰 설 수 있는 기억
*대체텍스트 있음 내 오른쪽 발등에는 ‘0416’이 새겨져 있다. 재작년 발등뼈 골절로 병원을 찾았다. 물리치료사가 치료기를 연결하다가 내 발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남겼다. “제가 안산에서 왔거든요.” 목정원 작가는 동시대인의 가장 적합한 정의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죽음에 대한 기억을 설명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물리치료사는 4개의 숫자만 보고도 ‘세월호’를 떠올렸고, 나 또한 안산을 듣고 동일한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다. 그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침몰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무도 배에 남은 304명의 안부는 알려주지 않았다. TV 속 세월호는 선박이 아닌 생명이었다. 생명이 물 속에 잠기고 있는 순간을 등교하면서 밥 먹으면서 잠에 들면서까지 목격했다. 시시각각 나오는 오보와 거짓정보에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울부짖는 유족의 곁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잔잔한 일상 속에서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소극적인 목격자, 딱 그만큼만 되고 싶었다. 진도로 가서 유족을 위로하고, 영정사진 앞에 좋아하던 간식을 건네며 함께 목격한 시민들에게 애도를 제안하는 그런 동시대인이 되고자 했을 뿐이었다. 팽목항의 매서운 파도에도 온기를 느끼던 몸은 광화문에 도착하자마자 매캐한 물에 젖어버렸다. 국화꽃은 경찰버스 바퀴에 짓밟혔다. 시민을 향한 편지는 내 손을 떠나자마자 거친 욕설과 함께 갈기갈기 찢겼다.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시절의 나는, 그저 사람들과 각자의 고통을 서로 수무하고 싶었다. 같이 기억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회는 괴상하리만큼 적극적으로 추모를 막아섰다.  2022년 10월 29일, 나는 평화로운 강릉 바다 앞이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밤바다를 마주한 채로 이태원 소식을 들었다. 정신없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정을 넘겨서까지 전부의 목소리를 확인한 후 복잡하고도 괴로운 안도를 느꼈다. 그제서야 내 앞의 바다가 다시 보였다.  곧바로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이는 지워진 기억을 의미했다. 잊혀지도록 강요받은 기억이 떠오르자 시간은 그 4월 16일로 되돌아갔다. 길 한복판에서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생명,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을 의심받는 남은 사람들, 치유하려는 움직임을 의심하는 사회, 감히 평화를 느낀 내게 몰려오는 자책감.  여전히 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늘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향으로 걷겠다며 '0416'을 새긴 내 발은 안산에 이어 이태원으로 향했다. 10.29 참사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쪽지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수없이 적혀있다. 참사가 늘어날 때마다 '우연히' 생존한 스스로에게 죄의 무게를 실어야만 했던 것이다.  충분한 애도를 망각하고 있었다. 사회는 추모의 방법이 최대한 간결하고 일상에 거슬리지 않게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사회적 참사의 추모란, 갑작스러운 상실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는 시선과 이 죽음들로부터 사회구조를 재해석하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서로의 동시대인이자 비극의 목격자인 우리는 '이 슬픔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 필수 교과목이 된 생존수영과 환승역마다 배치된 질서유지 전담 인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멈춤이 필요하다. 왜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되새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시 죄 없는 사과만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존경하는 친구가 내게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 프로젝트'에 대해 알려주었다. 슈톨퍼슈타인은 걸림돌을 뜻한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군터 뎀니히는 작은 황동판에 나치 희생자의 이름과 사망일을 새기고, 희생자들이 생활하던 유럽 길거리 곳곳에 설치했다. 이 걸림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바쁜 걸음을 방해하고, 평온한 일상에서 비극의 기억을 되살린다. 우리에게는 잠시 멈춰 서서 지난 참사를 되돌아 보는 충분한 추모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기꺼이 걸림돌에 걸릴 준비가 되었다.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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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서면 돌려차기 강간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의 절규와 비질란테
부산 서면 돌려차기 강간 살인미수 사건 사건 정보 부산 서면 돌려차기 강간 살인미수 사건은 부산에서 일어난 '묻지마 범죄'로, 범인 이현우는 이미 전과가 많은 범죄자였고, 나가면 배로 때려주겠다고 협박을 한 것은 물론이고... 피고인의 사이코패스 지수 죄의식이 없는 반성문 '피해자분은 회복이 되고 있으며,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것을 봤다. 피해자라는 이유로 진단서, 소견서, 탄원서를 다 들어주는 것인가'라며 피해자가 입은 고통과 충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현우는 법정에서 징역 20년에 신상공개 10년, 아동·청소년·장애인 관련기관 취업제한, 2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명령을 받았지만, 피해자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범죄 가해자는 앞으로 20년을 어떻게 살아야지 생각하겠지만, 범죄 피해자는 20년 뒤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평생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 굉장히 슬프다."라고 씁쓸해 했으며, 국회에서 열린 전국 법원을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장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재판과 아무 관련도 없는 반성과 임금과 가난한 불우환경이 그 재판의 양형기준이 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판사가 마음대로 용서하나"고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피해자에게 직접 말씀드리기는 죄송해서, 여기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습니다.  "비질란테를 원하는 것입니까?"  사법불신의 원인 비질란테 비질란테는 웹툰이 원작으로, 이 웹툰은 엄청난 인기를 끌어 디즈니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습니다.  주인공 김지용은 주로 야간에 비질란테 활동을 하면서 범죄자들을 처단합니다. 물론, 범죄자라고 무조건 처단하는 것이 아니며, 2가지 규칙으로 범죄자를 처단합니다:  1. 저지른 범죄에 비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난 자  2. 그렇게 풀려나서도 계속 범죄를 저지르거나, 보복범죄를 하는 자 사실 주인공 김지용도, 솜방망이 처벌의 피해자였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건달에게 폭행당해 사망했고, 범인은 3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에 김지용은 '무슨 법이 이렇냐'고 원망하고 그 건달 (전과 18범)은 자신의 첫번째 목표물이 되었죠.  그렇게 김지용은 비질란테 활동을 하면서 사회의 주목을 받게되고, 기자 '최미려'의 관심, 그리고 경찰 '조헌'의 추격을 받게됩니다.  비질란테에 나오는 범죄자들은 주로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더더욱 인기를 끌었습니다.  '법은 구멍 나 있다. 선처를 받으면 안 되는 사람에게 선처를 남발한다.' '널 풀어준 법을 원망해! 그 구멍은 내가 메우겠다.' '법이 뭔데 나 대신 용서한다는 거야.' '사법체계를 지키려는 그 열정의 반의 반만이라도 피해자를 위해 썼었다면 나 같은 흉악범이 안 생겼을 텐데.' '법을 누구보다도 어기는 놈이 누구보다도 법의 보호를 받고 아무런 법도 어기지 않은 사람이 아무런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해. 불공평하지 않아?그래서 이건 내 생각인데, 어떤 범죄는 범죄로 다스려도 된다고 봐.선처를 구하고 있지? 판사님께 잘 말씀드려.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법정 최고형을 달라고. 그렇지 않고 풀려나면, 날 만나게 될 거야.'  '쾌락이다. 법으로 어쩌지 못하는 인간들이 없어지는 걸 보기 위한 쾌락.'  '때로는 법의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잘 생각해볼 사항이 있습니다.  일단 비질란테 웹툰에서는 토론 장면이 나옵니다. 비질란테를 영웅취급하는 쪽과 범죄자 취급하는 쪽이 토론을 합니다.  1. 비질란테는 영웅 -비질란테는 우리나라의 사법체계가 실패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모두가 사법체계가 왜 국민의 신뢰를 잃었는지, 왜 비질란테에게 사회가 열광하는 지를 생각해야한다.  실제 기자 '최미려'의 대사 중:  '범죄 피해자야말로 진짜 연좌제의 피해자입니다. 범죄는 당사자의 피해로 끝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가족은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특히 피해자가 가장이라면, 부양가족까지 빈곤의 늪에 빠지게 되거나 어린 나이에 보호자를 잃은 자녀들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망가집니다. 그가 선량하고,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했을수록 범죄가 앗아간 피해자의 빈자리는 더욱 커집니다. 의원님, 이게 진짜 연좌제입니다. 그리고 범죄 피해의 연좌죄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진짜 2차 충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법원의 솜방망이 판결! 이제는 자판기입니다. 흉악범죄를 저지른 자는 이제 자동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들이 잡히기만 하면 꺼내는 전가의 보도는 미성년자, 심신미약, 우발적 실수 3종세트!' '누가 범죄자의 인권을 짓밟자고 했습니까? 다만, 범죄자와, 피해자, 선량한 국민 중 누구의 인권을 우선시해야 하느냐의 상황에서 피해자의 편을 들어주자는 메시지는 애써 무시한 채 비질란테는 이하불문 범죄! 불순분자! 사회악! 범죄 피해를 입고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가 세상 풍파에 가랑잎처럼 휩쓸려 가라앉으며 선처받은 가해자가 아무렇지 않게 활개치는 걸 보는 심정은!' 2. 비질란테는 범죄자  -비질란테는 우리나라의 법치주의를 흔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며, 우리나라는 법치국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또한... 1. 헛지목 2. 버스 사건 그리고... '무조건 엄벌만을 외치는 사회' 부산 서면 돌려차기 강간 살인미수 사건의 댓글들을 보면:  -왜 판사가 용서하는가? 피해자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판사의 지나친 자비가 피의자를 지켜주고 있다.  -대한민국 법은 피의자를 보호한다.  주로 판사와 법정을 비난하면서, 법이 피의자를 보호한다고 비난하는 글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범인들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으며,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공정하고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양형에는 피고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피해자와의 관계,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 범행 수단과 결과, 범행 후의 정황, 반성의 정도, 동종전과 유무 등 고려할 사항이 많으므로 일부 사실만 취사선택된, 언론의 단편적 보도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비질란테에서 '조헌':  '칼에는 손잡이가, 총에는 방아쇠가 있지. 아무리 훌륭해도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흉기야. 없는 게 나은.'  '넌 모른다. 공권력이, 질서가 무너진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애송이의 정의로 날뛰지만 그런 개똥철학을 추종하는 인간들이 결국 세상을 어떻게 망치는지. 불법으로 불법을 잡는다? 그게 얼마나 가소로운 말인지도 모르는 게! 조헌은 결말부에서 김지용을 남미로 데리고 가면서 한마디 합니다.  '감옥에 앉아서는 그 빚을 갚을 수 없다. 배우고 깨달아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말로 설명하지 않겠다. 보고 겪어서 깨달아라. 자유와 안녕이 얼마나 소중한지.당연한 듯 누리는 이 안전이 사실 바닷가 모래밭에 세운 소금기둥처럼 얼마나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는지.'  아무래도 이런 메세지인듯 합니다:  '법이 불공평하고, 피의자를 지켜주는, 부당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만약 법이 없다면? 자경단, 비질란테가 대신 그 역할을 한다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피해자들이 억울한 사건들은 많지만, 때로는 그 부당한 법을 해결하겠다고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것이 꼭 해결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법불신 중에서는 법에 대한 무지로 인해 상식적인 판결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시민들의 문제도 상당히 크다. 판결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고 분개하면서도, 막상 어떤 법리와 과정으로 진행되어 이런 판결을 도출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이에 대해 제가 답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판사입니다 직접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려보시고, 우리나라의 법과 거기서 오는 대중들의 반응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총 10개의 사건이 준비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합니다:  1. 사건개요를 읽고 사건의 내용 파악  2. 재판전 자신이 생각하는 형량을 선택  3. 배우들의 재연영상으로 사건을 더 자세하게 파악  4. 사건에 해당되는 법률과 양형조건을 파악  5. 법정영상으로 검사 (피해자), 변호사 (피고인), 검사 및 변호사의 최종의견, 마지막으로 피고인의 최후진술을 듣습니다.  6. 피해자측(피해자의 가족, 관계자 등)의 탄원서, 피고인측(피고인의 가족, 관계자 등)의 탄원서를 읽습니다. 피해자측은 엄벌을 촉구하고 있으며, 피고인측은 선처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7.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이때 잘 고려해야 될 사항들은:  -피고인의 전과  -피고인의 범행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가? (피해자측의 탄원서 확인하기)  -피고인의 갱생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가?  -피고인의 범행동기는? (변호사 진술)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자신의 범행에 대한 사과 및 배상 등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을 제대로 했는가? (변호사 진술 및 피고인측 탄원서 확인) -피고인의 최후진술은 피고인이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고 반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감형을 받기 위한 '악어의 눈물'로 보이는가?  8. 판사가 실제로 내린 판결을 봅니다.  9. 체험통계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판결을 했는지 비교합니다. 
재해·위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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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참사 재발방지와 생명안전기본법
(사)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처장(단원고2-9 진윤희엄마)김순길 나는 왜 생명안전기본법을 제안했나? 우리는 10년 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반복되는 참사가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고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전국 곳곳에서 소중한 생명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국가만을 믿고 평범하게 살고 있던 나에게 세월호 참사로 우리 가족의 행복이었던딸 아이를 보낸 후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수학여행 잘 다녀오겠다고 웃으며 문 밖을 나섰던 아이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음이 되어 내 품에 안겨야만 했는지..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세월호 부모들은 분노와 울분에 몸부림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거리에 나섰고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활동해오면서 우리 피해 가족들은 수많은 혐오와 모독하는 발언들로 또 다시 2차 가해를 입었습니다. 특혜논란, 자식팔아먹는, 세금도둑, 정치집단, 가난한동네, 종북몰이 등으로 피해자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했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말들로 피해자 인권을 침해당해왔습니다. 정부는 생명존중의 가치를 우선으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고 피해자들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통 받은 피해자들이 더 이상 거리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하여 구조적인 원인을 들여다보고 참사에 대한 대응이 적절했는지를 조사해야 합니다. 또한, 그에 맞는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이 만든 ‘사단법인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가족협의회’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설립했고 가족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10여년 간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사회로 향하는 길은 아직 멀기만 한 것 같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그리고 길을 가다가 일상 생활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사회가 안전한 사회가 되는 길은 무엇이 있을까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고민했습니다. 또한, 죄를 짓고도 생명에 대한 무게만큼의 처벌이 아닌 법이 제대로 없다는 이유로 처벌에서 빠져나가는 자들을 무겁게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자고 많은 시간 노력했습니다. 우리 세월호 피해 가족들도 생명과 가치가 존중되는 법,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는 법인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해 시민동행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위험사회라는 것을 온 국민이 인식한 참사가 세월호 참사라는 것이 생명안전 기본법을 만드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정부의 대처 방안만 담고 있을 뿐 생명안전의 가치는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합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이 되어 우리가 겪은 참사를 누군가는 겪지 않기를 바라고 시민의 안전권과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며 재발방지를 위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누구나 안전한 일상에서 생활하고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안전기본법은 왜 필요한가? 생명안전 기본법은 시민 모두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재난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 사고가 나지 않도록 예방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 하고 수습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며 사고 원인과 대응의 문제점을 조사 개선하여 유사문제의 재발방지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태원참사 159명, 세월호참사 304명, 가습기살균제참사 1825명이 목숨을 잃었고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붕괴참사, 대구지하철화재참사,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등 대형재난도 계속 발생합니다. 이런 참사가 지속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안전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부와 공무원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참사는 운 나쁜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참사를 겪은 우리 모두가 확인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 이유로 지속되는 재난참사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한 법, 생명안전 기본법에는 안전권, 피해자의권리보장, 안전 약자 보호,독립적 조사 기구, 위험에 대해 알권리, 안전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권, 안전 영향 평가제도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저에게 생명안전기본법은 내 아이, 내 가족, 내 이웃, 우리 모두입니다. 너, 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이 반드시 국회를 통과해서 국민의 생명과안전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가 생명안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는 참혹한 현장을 온 국민은 목격했고, 국가의 부재를 확인한 유가족과 시민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를 향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쳤습니다. 우리 유가족과 시민들은 수많은 경찰병력에 에워싸이고 차벽에 막히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맞으며 싸워야 했습니다. 선량한 시민들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말도 안 되는 살인행위들이었고, 결국엔 물대포에 맞은 한분이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 했습니다. 이후의 정권이 바뀌면서 집회현장들에서 물대포와 캡사이신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국가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월호참사와 이태원참사, 오송지하차도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언제 어느 때든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전사고는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기후위기등 위험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 사회에서 안전한 사회,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기위한 노력들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하는대로 재난 참사들을 지워버리고 참사들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방해하는 행위들을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재난참사를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재난 참사로 인한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위험과 안전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과 누구의 잘못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구조적인 원인에 주목하고 안전의 주체에 피해자와 시민들이 참여를 확장하는 노력들을 해야 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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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악순환을 끝내려면?
해당 대담한 대화를 캠페인즈팀 미디어 영상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정보는 언론에서 다뤄지는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피해가 전부일까?  대화가 힘을 갖는 합리적 소통의 자리를 만드는 '대담한 대화' 프로젝트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와 협업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상대에 대한 절멸의 관점을 넘어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주제로 대담을 진행했다.  대담은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김연수 이사의 사회로 역사 속에서 잊혀진 존재들에 대해 연구 중인 이선우 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인권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이사, 사회연구자인 최성용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가 참여했다. 세 사람이 바라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야기의 전문을 싣는다. ■ 대화 일시: 2023.10.17.(화) 오전 9시 30분■ 참여자: 이선우(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최성용(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 진행·기록 및 정리·영상: 김연수(빠띠), 임동준(빠띠), 정옥다예(빠띠)   - 지난 10월 7일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있는 이슬람 무장 정부 하마스가 이스라엘 유대 명절 초막절이 끝난 안식일 새벽에 하마스 주장으로는 로켓 5천여 발을 발사했고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장벽을 폭파하고 이제 불도저를 동원해서 이제 돌파를 하고 이제 오토바이나 트럭 그리고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에 침투했다라고 알려져 있다. 소위 알 아크사의 홍수 작전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의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에 대한 절멸의 관점에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상황을 좀 봤으면 좋겠다라는 문제의식에 따라 오늘 대담을 준비했다. 본격적인 대담에 앞서서 오늘 모신 분들의 좀 소개를 부탁드린다.   =최성용(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현재 박사 수료 상태에서 공부하고 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고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도 하면서 왔기도 했고 또 오히려 전문가분들이 오신다고 하셔서 들으러 왔다.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 학교에서 평화 관련된 강의나 이런 것도 진행하고 있어서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 함께 나눠보면 좋을 것 같다.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사단법인 아디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아시아 분쟁 지역에서 인권 옹호 활동, 기록 활동 그리고 인도적 지원 활동을 하는, 약 7년 차 신생 중견 단체다. 이번 팔레스타인 사건으로 얘기를 해야 될지, 하마스 가자 전쟁으로 봐야 될지 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최근에도 팔레스타인의 어떤 연이 있어서 하필이면 또 갔었을 때 시작을 현지에서 맞기도 했다. 그동안 들었던 얘기들을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선우(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원래 전공은 중국 철학사다. 지금은 역사 속에서 잊혀져 있는 존재들, 민족이라든가 종교, 소수자 혹은 범죄 혹은 범죄로 치부되었던 것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성용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상임이사, 이선우 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많은 분들이 예전의 역사적 사건보다는 현재 최근 며칠간, 10여 일간 벌어진 사건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하마스의 알 아크사 홍수 작전에 대해서 혹시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이선우(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이번에 이렇게 일어나는 걸 보면서 진짜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다 무시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사실 좀 많이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었을 때 불과 전날인가 일주일 전에 미국이 우크라이나한테 러시아가 침범할지도 모른다라는 경고를 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젤렌스키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젤렌스키가 이 경고를 무시하고 ‘설마 러시아가 들어오겠냐’라고 하다가 결국에 이 꼴이 났다”라고 주장한다.  이번 팔레스타인 사태에 대해서, 물론 하마스가 굉장히 비밀리에 준비한 것도 맞겠지만 모사드는 물론이고, 모사드 외 이스라엘 정보 조직들뿐만 아니라 미국도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너무 좀 방관하지 않았나, 무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최근 5~6년 전부터 조금 느끼고 있는 거는 흔히 우리가 정치학 쪽에서 1945년 이후로 ‘긴 평화’라는 말을 쓴다, 이것도 좀 기만적인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끝날 수도 있겠다’, ‘이제 진짜 1945년 이전으로 전 세계가 다 돌아갈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물론 지금 이 사태가 ‘세계 대전으로 벌어질까?’라는 데에서는 조금 의구심이 들지만 최근에 이런 여러 가지 동아시아부터 중동 유럽 이런 데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하마스가 먼저 공격했으니까 하마스가 나쁘다’ 이거 말고는 사실 국내 언론이 하는 얘기가 없는 것 같다. 물론 그 방식이 ‘과격하다’, ‘잔인하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좀 긴 맥락을 좀 볼 필요가 있고, 맥락 속에서 보면 약자의 투쟁이다. 버니 샌더스 같은 사람들도 그런 소리를 트위터에 했다. 그래서 ‘참 속편하게 말한다’, ‘온실 속의 화초, 도련님, 아가씨들이 할 소리 아닌가’ 그런 생각도 솔직히 좀 많이 들었다. 유대인 문제를 보다 보면 느끼는 게 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유례 없이 체계적인 대량 학살이긴 했지만 솔직히 좀 백인 중심주의적인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과거에 독일이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수만 명을 학살했다. 그런데도 1990년대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2천년대 들어와서 처음으로 사과했지만 지금도 ‘돈 줄 테니까 된 거 아니냐’라는 식이다.  독일 총리(빌리 브란트)가 홀로코스트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사진 그것만 보면서 ‘참 독일 훌륭하다’, ‘일본은 왜 저러냐’ 하는데요. 우리가 너무 좀 백인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좀 벗어날 필요가 있겠다라는 생각도 많이 든다.   =최성용(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저도 선우님 하신 얘기에 동의한다. 이 작전은 누군가는 테러라고도 이야기할 테고 누군가는 공격이라고 얘기할 텐데 이것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하게 됐을 때의 함정이라는 게 너무 명확한 것 같다. 사실 모두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얼마나 잔인했나’, ‘누가 잘못했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모르겠다. 왜냐면 맥락을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드러난 것만으로 본다면은 잘못했다라고 충분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면 2천년대 한 초중반까지는 팔레스타인의 담론이나 논의나 이런 것들이 좀 계속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한국 사회에 되게 훅 사라졌다. 그래서 여러 연구자들과 ‘10년 이상 나도 업데이트가 안 됐다는 걸 좀 요즘 깨닫는다’, ‘다시 한 번 봐야 되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저는 팔레스타인에 제 친구가 있다. 같이 공부했던 활동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생각도 먼저 났다. ‘어디 다치지는 않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더라. 그런 의미에서 남의 일일 수만은 없었다.  이스라엘 외교부 장관 쯤 되는 분이 ‘한국에겐 이스라엘이 미국 다음으로 가장 친한 우방이다’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왜냐면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성지순례 개념으로 이스라엘을 많이 방문한다. 굉장히 많은 교류가 있다고 하더라. 물론 따져보면 유대교와 기독교로 다른 종교인데 이게 맞냐 이런 질문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기독교 교회의 교류가 굉장히 많은 곳이라고 한다. 근데 반면에 ‘우리에게 이스라엘 친구는 많은데 팔레스타인 친구는 있을까?’ 질문을 좀 해보고 싶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올 게 왔다’고 느꼈다. 하마스가 어떤 종류의 잘못을 해서 그것대로 비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사태의 근본 원인이 이스라엘에 있다는 게 명백하다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는 1945년 이후에 이른바 이상주의적이고 자율적인 국제질서의 가장 큰 어떤 허점이고 가장 부도덕한 위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터질 게 다시 한 번 터졌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이렇게 공격하면 그다음에 뒷감당 어떻게 하나’, ‘사람들이 얼마나 죽게 될까’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앞선 얘기를 듣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초점을 갖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지금의 논의 양상들을 한 발짝 떨어져 보면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태’고 ‘하마스 전쟁’이라 불린다. 이스라엘은 왠지 원인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느낌이 있다. 물론 10월 7일 하마스 육해공 작전은 나중에 기관이나 유엔 차원의 조사를 하더라도 전쟁 범죄 혐의를 벗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 상황을 참작하면 하마스가 전쟁 범죄를 한 게 맞다. 그런데 왜 이것만 얘기가 될까. 2021년에도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점령하고 있다는 가자를 공격했다. 제 기억 속으로 2008년, 2012년, 2014년, 2021년 그 외에도 셀 수가 없이 많은 폭격과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왜 이것들은 한 선상에서 논의 되지 않는 걸까? 저는 10월 7일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에 있었다. 아침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동차에서 깃발을 흔들고, 아이들이 환호했다. 그때 뉴스를 못 봐서 무슨 일인지 몰랐다. 사무실에 가서 알아보니 ‘우리가 드디어 이스라엘을 넘었다’라는 얘기를 했다. ‘하마스가 누군가를 죽였다’에 포커스를 맞춘 게 아닌 거다.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에 이스라엘이 서안과 가자를 점령하고, 2007년에 가자가 완전히 막히면서 가자 사람들은 단 한 번도 그 장벽을 넘어본 적이 없다. 지금 팔레스타인의 젊은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이스라엘 점령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근데 그걸 눈으로 본 거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 벌어졌고, 세상이 변해버린 거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보는 시각들은 그 이후에 있었던 ‘하마스의 만행’뿐이다.  근데 그것도 큰 현상의 한 모습이고, 사실이다. 분명히 지탄받고 비난받아야 한다. 하지만 왜 그렇게만 볼까? 그것도 비정한 현실이다. 균형 잡힌 정보와 지식들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사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그날 제가 거기서 올리브를 따고 있었다. 너무 걱정이 돼서 농부들에게 이야기 했더니 괜찮다고 답하더라. ‘뭐가 괜찮냐’ 물었는데 ‘나중에 천천히 죽으나 지금 죽으나 본인들 입장에서는 매 한 가지’라고 답했다. 이런 사건이 있었던 건 그렇게 개의치 않았다. 누구한테나 죽음은 공포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자 지구에서 폭탄을 맞아 죽거나 서안지구에서 전쟁통에 총탄을 맞아 죽는 사람들에겐 달랐다. 이제 죽음이 눈앞에 있거나 아니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시선과 생각들은 많이 달랐다. 저의 시선과 생각은 동일하진 않다. 그리고 되게 좀 화도 많이 났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분명히 달랐다. -전쟁이 나면 하마스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거의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현상의 차원을 넘어 국제정치의 차원, 역사적 차원 등 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최성용(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이야기 하기 전에 최근에 찾아본 궁금증이 2개가 있다. 연관이 있을지 몰라서 여쭤보면서 얘기를 좀 듣고 싶다. 첫 번째는 가자 지역 주변에 정착촌들을 주로 타격한 공격이었다라고 알고 있다. 정착촌이라는 게 말하자면 파시스트라고 스스로를 명백하게 자임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거주하고 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서 일상적으로 모욕이나 폭력, 공격까지 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민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정착촌들을 대상으로 한 공격들이 꽤 있다고 알고 있다. 물론 ‘그게 얼마나 정당할 수 있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이미 일상적으로 당해왔던 실제 범죄 수준의 공격에 대한 대항 폭력의 의미도 있지 않을까라는 게 첫 번째 질문이다. 두 번째 질문은 대규모는 아니지만 기존에도 이스라엘이 워낙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10대부터 나이 든 노인까지도 지금까지 구금해 왔었다. 구금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석방하기 위해서 하마스나 이런 집단들이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납치해서 그들과 교환하는 게 관행이 있었다고 하더라. 이 두 가지를 여쭤보고 싶다.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대담을 풍부하게 하는 좋은 질문인 것 같다. 정착촌은 가자지구 외부에 있다. 가자지구 내에 있는 정착촌 2005년도에 다 소멸을 했다. 장벽 너머에 있는 마을들을 정착촌이라고 하는데, 인권 활동가들이 얘기하고 있는 illegal settlements, 불법 정착촌은 서안지구나 예루살렘에 등 점령지 내에 있는 정착촌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 아주 인근이나 아니면 인접한 지역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한다. 가자지구 외부에 있는 정착촌도 ‘정착민 아니냐, 어느 정도는 그들이 우리한테 했던 범죄가 있다’, ‘그래서 그들을 민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현지 사람이 얘기를 하더라. 그건 설득력이 높았다. 물론 이제 서안지구나 동예루살렘에서 정착촌의 폭력은 너무나 잔혹하다. 10월 7일에 올리브를 따고 있었는데 서안지구 나블루스 외곽에 있는 올리브 농장이었다. 그 근처에 이지아르라는 정착촌이 있다. 악명 높은 곳이다. 눈으로 보는 앞에서 바로 불을 질렀다. 저쪽 마을 너머에서 연기가 확 올라오더라. 그런 식으로 불법 정착민에 대한 폭력들은 너무 만연화 되고 그들의 만행들은 팔레스타인 입장에서 보면 대항 폭력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 입장에서 보면 48년 전 가자지구 점령 전부터 장벽 너머에 있었던 소위 이스라엘 집단 거주지를 정착촌이라고 붙일 수는 있다. 하지만 서안지구의 정착촌만큼 상시적 악행이나 범죄가 있었다고 보는 건 저는 좀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고 하마스가 대부분 군인 인질을 많이 납치했다. 2014년 혹은 2004년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지금 이스라엘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하마스뿐만 아니고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이 너무 많다. 아무런 영장 없이 검찰이나 군인이 잡아가더라도 행정부를 통해서 6개월간 구금 연장이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정치범과 양심수들을 석방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을 교전 와중이나 아니면 침투 과정에서 생포에서 협상도 많이 했고 성공한 적도 많다. 한 명을 석방 해서 거의 천 명 가까운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을 석방한 사례도 있어서 관행처럼 있어왔다. 하지만 이번처럼 민간인들을 너무나 많이 인질로 삼는 건 국제연대 활동가들에게도 전례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라는 이성적 판단도 어렵게 되더라. 하마스가 승리를 자신하거나 정말 치밀하게 물밑적인 판단을 끝내고 갔다고 보지는 않는다. 2023년 10월 7일을 끊어서 분절적으로 보면 유례없기도 하고 충격적이지만 이 사람들한테는 연속선상에 있는 삶이었다. 그리고 왜 10월 7일이냐고 했을 때 여러 분석가나 교수들의 말도 일리도 있다고 생각을 한다. 다만 사단법인 아디에서 팔레스타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언제 터져도 모를 가득 찬 풍선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올해만 해도 7월에 이스라엘 군인 2천 명이 항공 드론, 헬리콥터 동원해서 제닌이라는 정말 조그만한 난민 캠프에 지상 작전을 했다. 그리고 2021년에도 너무 많이 발생해서 그 사람들한테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조금만 자극이 되면 터졌었고 그런 게 반복이 됐다.  종교를 가진 사람한테는 ‘알 아크사 모스크’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성지라는 특별한 장소다. 2002년에 샤론 총리가 알 아크사 모스크를 무장 경찰을 대동하고 방문해서 2차 인티파다라는 민중 봉기가 발생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성적 공간이다. 그런 알 아크사 모스크를 장악한 것을 넘어 이스라엘의 장관이 방문을 했고 그리고 무장 경찰들을 대동했고 거기에 있는 무슬림들의 예배를 중단을 시켰다. 이게 그 사람들애갠 너무 컸다. 2021년에 셰이크 자라도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쫓겨나는 사건을 통해서 전쟁이 발발했다. 그것도 사실 성지 문제였다. 정말 솔직히 얘기하면 하마스도 이 사태를 예상 못 했을 거다. 하마스는 준비를 했고 여러 작전들을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넘어 가고 보니 너무 무주공산이었던 거다.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니 하마스가 넘어가면서 했던 최대 목표치는 인질 정도였나 보더라. ‘저항이 없다면 이스라엘 군인을 잡아서 우리가 나중에 협상용으로 쓰자’까지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판단의 한계치였는데 넘어가보니까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거의 손을 놓을 정도로 공격이 없었다.  하마스가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저항을 하면서 승리를 다짐해서 결정하기보다는 모든 순간이 절박했고, 어찌 보면 최악의 전술인 목숨을 담보로 저항을 했던 거라고 본다.   =이선우(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팔레스타인이라는 존재가 중동 정치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가장 약한데 가장 뜨거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중동의 여러 국가들이 이스라엘이나 미국하고 뭔가를 할 때 늘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한다. ‘팔레스타인을 정식으로 이스라엘이 국가가 승인해 주면 우리가 뭘 하겠다’ 항상 늘 이런 걸 이야기했다. 근데 오바마 정부 들어서 셰일가스, 셰일이 개발되면서 중동 석유 의존도가 떨어지게 됐다. 또 중국이 갑자기 급부상하면서 미국 입장에서는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에 있던 군대를 빼서 중국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그냥 보내면 또 뭔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어떻게든 화해를 시켜보자’ 해서 이것저것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2004년 혹은 2006년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미국이 ‘이스라엘하고 사우디와 좀 정상화를 하시오’라고 했을 때 사우디가 ‘팔레스타인 국가로 인정하면 하겠다’라고 해서 이스라엘이 거부한 적이 있었다. 반면 오바마 정부 이후로는 팔레스타인 얘기가 거의 안 들렸다. 미국하고 중동 여러 국가들이 협상을 할 때 팔레스타인 얘기가 잠깐 나오거나 아니면 버린 카드처럼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상황이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공포스러웠을 수도 있다. 한국이나 북한 같은 나라면 그런 피해가 와도 ‘우리끼리 살면 돼’라고 하겠지만 팔레스타인은 그런 입장이 아니지 않나. 그리고 이스라엘 내부,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나름대로 협상을 생각 했던 것 같다. 반면에 오슬로 협정 있었을 때 이스라엘 극우 청년이 협정을 반대하면서 이스라엘 총리를 쏴죽였다. 이런 맥락도 좀 있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네타냐후의 등장, 초강경 모드 등이 결국 팔레스타인한테 ‘이제는 우리가 진짜 사라질 수도 있겠다’라는 생존의 문제와 ‘이제 지구 혹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겠다’라는 공포심을 주었던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보는 느낌도 많이 있었다.   =최성용(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좀 얘기를 해보고 싶다. 첫 번째로 많은 전문가가 지금도 정치적인 권한을 많이 가진 합리적 행위자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해서 결과를 만들어냈나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사우디는 이스라엘과 관계 개선을 하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사우디가 미중 관계 속에 어떻게 처신을 하고 있고’라든지 ‘이란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고’, ‘이란과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개선하게 되면 이란이 어떻게 불리해지고 하마스는 더 고립되고 그 과정에서 이런 어떤 국제정세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서 타개하기 위해서 하마스가 일을 저질렀다’ 이런 식의 분석들을 많이 한다. 틀린 분석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너무 모두를 합리적인 행위자로 보고 있다.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지는 않던데’라는 생각이 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건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너무 안 나온다. 예를 들면 동화 님 얘기하신 것처럼 ‘봉쇄된 땅을 넘어서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갔더니 무주공산이더라’, ‘우리가 생각했던 최대치의 목표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더라’, ‘이럴지 몰랐다’라는 게 오히려 더 현실 가능성 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폭력이라는 걸 되게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폭력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은 폭력은 합리적이지 않다. 처음에는 합리적으로 ‘작은 목적에 대해서 작은 폭력을 사용해야지’이지만 폭력은 늘 에스컬레이팅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국제법상으로 제네바 협약이니, 전쟁법이니 이런 얘기를 하더라도 전쟁 범죄가 없는 전쟁은 없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는 더 구체적인 걸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는 그만큼 몰려 있었던 것 같다. 팔레스타인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자라는 게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가고 있다라는 얘기를 하더라. 물이라든지 환경이 오염되고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물이나 전기 등을 다 수입하고 있다. 가자 자체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땅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 땅이 생존 불가능하게 변하고 있고 우리는 이 땅에서 나갈 수 없게 됐다’인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때문인 거다. 그렇다면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폭력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해서 공격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게 이번이 되었을 뿐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롭 닉슨이라는 학자가 ‘느린 폭력’이라는 얘기를 했다. 우리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고, 처음부터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천천히 진행돼서 모두를 갉아먹는, 모두를 습격한 재난에 대한 이야기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점령하고 봉쇄했던 게 느린 폭력인 것 같다. 우리 눈에 폭력의 과정들이 가시적으로 잘 보이지 않고 느린 폭력에 저항하는 하마스의 폭력적인 목소리, 공격만이 우리 눈에 가시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균형 있게 보려면 사실 둘 다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많은 언론들이 ‘왜?’라는 궁금증을 갖고 있다. 하마스하고 파타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정당 또는 세력이라고 하는데 사실 둘 다 팔레스타인에서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다. 워낙 오랫동안 독재하고 있고, 2005년 선거 이후로 정치가 바뀌지 않는다. 가자지구 내에서 하마스에 대한 불만들이 너무 높은데 이걸 잠재우기 위해서 언론인들 죽이고 시위하면 죽이기도 한다. 문제는 이제 2020년도부터 서안 지구나 제닌을 중심으로 해서 이게 라이온스 덴, 제니 여단이라고 하는 젊은 무장조직이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잡으려고 집중했다. 하마스나 가자 쪽은 막아본 곳이기 때문에 병력이 좀 얕았고 나블루스하고 제닌을 3년 동안 주로 공격했다. 그만큼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신흥 무정파 무장 세력들의 지지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눈에 보일 만큼 완벽했다. 그런 와중에 파타는 그냥 살아가고 있었던 거고, 하마스는 본인의 건재함 또는 폭력성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더불어서 지지를 얻기 위한 하나의 부가적인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이선우, 이동화, 최성용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시위,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시위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각각의 지지자에 대한 탄압이나 공격도 이뤄지고 있다. 동시에 ‘하마스가 아기의 목을 참수했다’와 같은 허위조작 정보가 퍼지기도 했다. 허위조작 정보 포함해서 현재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하마스에 대한 관점과 시민들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주시면 좋겠다.   =이선우(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지금 한국 언론들은 대체로 미국 언론을 그냥 받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다못해 ‘가장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언론이라도 한번 참고를 해봤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일본 언론은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났을 때 일본 물가는 어떻게 될까’ 이 생각만 하고 있다. 중국은 얼마 전 뉴스에는 ‘중재를 하겠다’ 얘기했는데 오늘 아침 뉴스를 확인하니 이스라엘에 대해서 ‘너무 도를 넘었다’, ‘중국이 왕이 외교부장을 파견해서 이스라엘을 가겠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 남의 나라 돈으로 먹고 사는 나라 치고는 진짜 남의 나라에 대한 정말 관심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스라엘 정부에서 만드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주는 허위 정보, 가짜 뉴스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걸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타임즈 같은 데서 받아 쓰고 그걸 또 베껴오는 한국 언론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지적을 해야 되지 않나싶다. ‘세계가 무조건 이스라엘 편만은 아닐 수도 있다’라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다.   =최성용(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최근에 국내에 한국전쟁 연구의 주 테마 중 하나가 심리전이다. 학자들은  ‘미국이 심리전 체계와 심리전 기구와 심리전 기술들을 성립하고 완성시킨 게 한국전쟁이었다’라는 평가들을 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주된 매체가 사진과 삐라였다. 근데 지금도 ‘우리 24시간 후에 처들어갈 테니까 그전에 민간인 다 대피하세요’ 같은 삐라 100만 장 넘게 뿌리는 사진들이 배포가 되기도 했다. 단순히 종군 기자만이 아니라 군에서 사진과 영상을 찍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을 데리고 전장을 다닌다.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장벽 바로 앞까지 가는데 부대와 함께 한국 기자를 포함한 기자들이 동행했다. 폐허나 참상들을 촬영하고, 바로 옆에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인터뷰했다. 여기서 ‘아기를 참수했다’라는 허위 정보도 장교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당시 부대 부사령관을이 이야기한 내용이다.  심리전이라는 게 여러 언론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이 계속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과 기술들이 있기 때문에 사실 가능하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하마스가 심리전을 벌인다’라고 한다. 납치를 하는 등의 과정 자체가 ‘우리가 아직 건재하고 여기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알려달라’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심리전인 거다. 그런데 그 심리전 역량에 비해서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역량이 훨씬 더 강력하다. 굉장히 비대칭적이다. 한국 언론들도 그 영향 속에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구체적인 맥락들을 보도해 주는 합리적인 외신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만큼 언론이나 목소리들이 이스라엘의 심리전과 프로파간다에 훨씬 더 집중돼 있다. 다른 하나는 대항 폭력의 구도를 넘어야 된다. 하마스의 대항 폭력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항 폭력이라고 해서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이번엔 하마스가 확실히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선을 넘었기 때문에 하마스가 문제다’ 혹은 ‘대항 폭력이니까 이스라엘이 문제다’ 이 구조에서 사실 넘어가야 된다. 우리가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는 당사자가 아닌 만큼 목격자로서 더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여러 맥락들을 살피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되게 단편적으로 ‘너는 어느 편이야?’라고 묻는 그 구조 속에서 ‘나 이쪽 편이야’를 계속 택하려고 하는데 그걸 넘어설 필요가 있다. 하마스가 저렇게 했던 근본 원인 중에 하나는 우리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만큼 무관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어떤 관심이나 여론도 보태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일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연루되어 있다. 우리의 무관심도 저 폭력의 원인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되고 그 관심이라고 하는 건 즉각적으로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좀 더 합리적으로 보면서 ‘누가 잘못했고, 누가 못했고’라는 그 구도를 넘어서서 근본 원리를 봐야한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죽거나 다치지 않게끔 하는 내 입장을 만들어가야 된다.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팔레스타인 현장에 있을 때는 사람들하고 얘기를 통해서 사태를 확인을 하고 내용들을 습득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언론을 통해서 현실을 파악하게 됐다. 언론을 잘 보시면 그 기자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몇몇 주요 언론들은 현장 가기도 한다. 어디에 있는지 보면 이스라엘 쪽에 있다. 이스라엘 국방부의 대변인 말을 듣고, 이스라엘 군인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들의 의견들을 기사화한다. 그래서 참수 사건이나 강간 사건과 같은 대표적 오보가 나왔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편향된 의견들이 기사화될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상대편에 있는 가해자라고 얘기하고 또 피해자이기도 한 가자지구에 서 있는 기자는 몇 명이나 될까? 있긴 있다. 적지만 지역 언론이라든지 아니면 중동 지역 언론들이 계속 본인이 본 얘기를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양쪽의 의견을 듣고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언론은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위치하고 있는 땅 옆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를 보면 너무 안타까울 정도로 편향되어 있다. 그리고 그 편향된 시선과 기사들이 사람들한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약 기자가 가자 지구에 서 있었으면 장벽을 봤을 거다. 그리고 그 답답한 현실을 보고 피해 받는 사람들의 일상을 들었을 거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그 답답한 감옥에서,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장벽이 세워지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꿈꿨다. 그래서 ‘왜 하마스가 공격했냐’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가자지구에서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마스가 이 사람을 공격했다’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한다. 언론이 모든 것들을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에 돌아와서 언론을 보면서 열받아 죽는 줄 알았다. 이스라엘 대변인이 따로 없더라. 정제되지도 않았고 일방적이고 확인도 안 된 것들이 출처 표기도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이스라엘 국방 대변인에 따르면’ 이렇게 달리더라. ‘너무 편향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구나’ 그리고 ‘그 편향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1,400명의 이스라엘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다면 그 바로 뒤에 역사적으로 수배에서 수백 배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희생자가 있다. 가장 처음 우려했던 것들은 2008년 첫 번째 가자 전쟁 때 이스라엘측 사망도 있었다. 8명인가 10명 이내일 거다.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100명 단위다. 항상 100배다. 그리고 2021년, 2014년도 사망자만 비교하면 제일 컸던 경우 25배쯤 된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도대체 누가 들어줄까? 불균형적인 언론의 현실 그리고 세상의 여론들은 그게 불가능할 거다. 예전에는 정보가 정말 없었다. 현장에 가야지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자들도 조금만 성실하고 노력하면 적어도 ‘한편 하마스에 의하면’, ‘한편 팔레스타인에 의하면’ 같이 쓸 수 있다. 언론이 사회적 공기 역할을 좀 해주면 좋겠다. 이제는 시민들이 일방적인 언론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상에서의 댓글을 보면 너무 극단적으로 가서 많이 암담하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가는 게 양쪽의 사회를 대변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물론 이스라엘도 극우 세력이 있고, 팔레스타인도 극우 세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들은 되게 많은 과대 대표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훨씬 더 많은 일반 시민들은 반대하고 있다. 죽음의 공포를 두려워하고 지금도 폭탄들을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극우 정치인이나 아니면 무장 세력들이 지금 표출하고 있는 공격성에 사실은 인식들이 쫓아가면 더 위험해질 것 같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 같고 세상은 조금 더 극우적으로, 극단적으로 갈 것 같다. -복잡하게 꼬인 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할 필요가 있을지?   =이선우(큐슈대학 중국철학사 석사): 두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탄핵 촛불 집회 이후로 좀 강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때부턴가 한국 사람들 사이에 ‘과격하고 공격적인 방식의 시위나 투쟁은 다 잘못이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퍼져 있는 것 같다. 전장연 시위에 대한 사람들의 대응도 마찬가지고, 이것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맥락을 알아도 ‘그래도 잘못했다’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반성도 있어야 한다. 모든 시위도, 투쟁도 다 상호작용이고, 대화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그동안 대화를 거부해왔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한국 사람들도 반성을 했으면 좋겠다.  다른 하나는 정부나 언론에 대한 요구다. 진영 논리에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에 보니 바이든 대통령도 간다 그러고 러시아도 이스라엘과 통화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불과 며칠 전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보면 미국 언론에서 이란이 배후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 미국 정부에서 ‘도와줄 건 있겠지만 지원까지는 아니다’, ‘배후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확전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한국 언론은 ‘하마스가 북한제 무기를 쓰고 있다’, ‘북한 무기가 발견됐다’, ‘소식통이 전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이 곧 중동 순방을 한다. 저번처럼 ‘이란은 주적’ 이런 소리 하면 진짜 큰일 난다. 정치적인 면에서 제발 이럴 때는 원칙적인,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고 우리도 역사적인 경험이 있는 민족이라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핍박받아 왔는지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이제 와서 그런 원칙, 가치를 이야기하는 게 좀 부끄럽거나 오글거리면 입장 표명이라도 천천히 하면 좋겠다. 하마스가 공격하자마자 한국 외교부에서 하마스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북한제 무기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윤석열 대통령이 사우디에 가는데 거기서 무슨 얘기를 할까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그래서 진영 논리 차원의 얘기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한국 정치인들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없으면 말이라도 아꼈으면 좋겠다.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사단법인 아디는 인권단체이고, 인도주의 활동을 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당장 행동을 해야 하고, 할 예정이다. 가장 시급한 건 종전이다. 지상군 투입은 절대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사태의 모든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의 점령에 있다. 점령을 하고, 차별을 하고 심지어는 ‘인종 청소’라는 용어까지 쓰는 정책들이 없어져야 된다. 그게 되지 않고서는 공격과 학살과 종전과 반복되는 순환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2년 단위, 4년 단위로 반복하고 있다. 지상군 투입이 돼서는 안 되고, 전쟁은 종료하고 협상을 해야 한다. 국제적으로 많은 협상과 결과들을 냈다. 그게 ‘1국가 1체제’ 아니면 ‘1국가 2체제’든지 간에 서로가 살 수 있는 공간들이, 그들의 인권이 존엄성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그리고 각자의 정치 체제를 통해서 존재하면 된다. 그래서 가장 큰 난제는 ‘점령을 의식한다’는 거다. 사실 3차 중동 전쟁 이후 국제법 통해서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빠져나가면 된다. 그리고 가자지구 봉쇄 풀면 된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정치 투쟁을 통해서 어떤 형태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건 팔레스타인 몫일 거다. 최소한 그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남들과 똑같은 수준에서 권리가 보호되는, 우리한테는 정말 극히 평범한 자유와 인권들이 보장되는 정도만 가면 된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이스라엘 편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경제적 이유나 석유가 있다거나 아니면 뭐라도 있으면 좋겠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한국 집회에서 국기가 있다는 걸 보고 너무 궁금해한다. ‘왜 팔레스타인 국기가 나쁘냐’ 그러니까 저도 설명이 잘 안 됐다. 왜일까?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무관심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스라엘 편애가 있는 것 같다. 한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느낌이냐면, 처음에 가면 항상 남한이냐 북한이냐 묻는다. 하도 많이 들어서 ‘너 북한 사람 만난 적 있어?’ 했더니 ‘남한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라더라. ‘근데 왜 남북한 물어?’ 그러면 팔레스타인 입장에서 보면 미국하고 가장 친한 국가가 한국이고 이스라엘과 가장 친한 친구가 미국이다. 팔레스타인에서 보면 다 적이었다. 분명히 외교부 내에서도 정보 취합을 할 거다. 전쟁의 피해 결과는 어마어마하게 비대칭하다. 비례가 안 맞다. 사망자 숫자, 부상자 숫자, 가옥 파괴, 재산 피해, 경제적 피해 등 너무 압도적인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이 중동의 유일한 선진국가이고, 하마스는 테러리스트라’는 너무 단순하고 현상과 맞지 않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한국이 또 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알고 있는데 창피하지 않게끔 노력을 좀 해 줬으면 한다. 물론 기대는 높게 하지는 않는다.   =최성용(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이스라엘 친구는 많지만 팔레스타인 친구가 없다’. ‘크리스찬 시오니즘’이 이 얘기에 이어진다. 웃기게도 기독교이지만 유대교와 친하고 이스라엘을 성지로 생각하는 게 미국이나 한국의 보수 기독교 계열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굉장히 가까운 관계다. 그런 맥락들이 있기 때문에 언론들이 아무 생각이 없어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만 받아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문화적 토대들이 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누가 잘못했냐’도 중요할 수 있지만 ‘일단 사람을 살려야 된다’가 더 중요하단 거다.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고 있고 앞으로 이 상태면 더 죽어나갈 거다. 아까 ‘폭력이 에스컬레이팅 된다’라고 얘기한 것처럼 제노사이드가 갑자기 생기는게 아니라 가는 과정이 있다. 일상적으로 갈등이 발생하면 그것이 더 증폭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결국은 ‘쟤들은 다 죽여야 돼, 절멸시켜야 돼’로 간다. 느린 폭력을 얘기한 것처럼 느린 홀로코스트의 과정이 팔레스타인의 일상이었다. 제노사이드라는 게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한 인간 집단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빼앗고 물이든 올리브 나무든 전기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근거들을 다 박탈하면서 사람을 죽여나가고 느리게 진행돼 왔던 것들이 이번 하마스의 공격으로 인해서 가시적이고, 더 눈에 드러나게 디자인되고 있을 뿐이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정말 제노사이드로 간다. 제노사이드로 가지 않는다고 하면 이번에는 가자 북부를 다시 한 번 점령하고 남부로 가자 주민들을 다 몰아넣는 게 될 것이다. 그건 제노사이드라는 최종 단계를 다음으로 미루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살려야 된다.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평화학적 관점에서 보면은 갈등은 나쁜 게 아니다. 갈등이 드러났을 때 ‘이게 문제가 있고, 누군가는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권력을 적게 가지고 있어서 뭔가 부정하거나 잘못된 일이 생기네’라는 게 갈등으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학에서 ‘갈등을 통해서 사회를 혹은 국제사회를 더 낫게 만들고 사람들이 좀 더 평등하게, 정의롭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된다’라는 얘기를 한다. 하마스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지금 부정의하고, 고통스럽고, 통증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했는데 국제사회가 듣지 않았다. 듣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극단적인 갈등 형태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지금이라도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면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은 또다시 문제가 발생할 거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설령 이번에 제노사이드로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음번에는 제노사이드로 갈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기회 근본 원인을 해결해 가는 방향으로 이 갈등을 전환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보태고 싶은 말이 있을지?   =이동화(사단법인 아디 이사): 첫 번째는 가자 지구의 피해만 집중되고 있는데 서안 지구에서 많은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격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상 당하고 있고, 50명이 넘는 시위자들이 현장에서 발포를 통해서 사망하고 있다. 가자 지구가 지금 가장 피해가 극심한 하지만 팔레스타인 전체로 피해가 지금 나눠지고 있다. 그 피해는 역사적으로도 반복되어 있어서 팔레스타인 전체를 봐야 될 것 같다. 가자지구를 떨쳐서 보거나 서안 지구로 떨쳐서 보는 것들은 선명하지도 않고 객관적지도 않다. 현지 친구가 이 사건이 나고 저랑 논쟁을 많이 했다. 하필이면 하마스였다. 어쨌든 제3자 입장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근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은 ‘세상에 누가 우리 얘기를 들어줬냐’였다. 그들 입장에서 세상은 자기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하마스가 자기를 대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마스는 얘기를 전달할 수 있는 통로는 된다. 그런 게 너무 슬픈 현실이다. 몇년 동안 통계를 추산해본 결과 이스라엘 방문자 중 한국인이 굉장히 높은 순위권에 있다. 아시아에서는 3위고 이스라엘 통틀어서 7위다. 2만에서 3만 명이 이스라엘을 간다. 그 한국 사람들 어디 가는지 알고 있나? 팔레스타인에 간다. 베들레헴. 동예루살렘 다 팔레스타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갔음에도 이스라엘에 간 줄 알고있다. 존재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 팔레스타인은 오랫동안 잊혀졌고 우리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번에 하마스가 정말 많은 누군가를 죽임으로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보고 있다. ‘갈등에 순기능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우리가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이 상황을 같이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같이 보는 입장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반드시 귀 기울어야 된다. 아디는 활동을 할 것이고 그 중심에는 진영 논리가 될 수 있음에도 최선을 다해서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피해를 오랫동안 봐왔던 사람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게 누군가한테는 ‘테러리스트, 무슬림의 추동자’라고 욕을 먹을지언정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서 그들의 의견을 좀 더 전하는 것들이 우리가 가져야 되는 최소한의 태도이고, 이 사태의 악화를 멈출 수 있는 국제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전문은  대담한 대화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압축하여 재구성한 글은 오마이뉴스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악순환을 끝내려면? [오마이뉴스 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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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정원 확대, ‘어떻게’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22일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 등에 따르면 정부는 2006년 이후 3천58명으로 묶여 있는 의대 입학정원을 2025년도 대학입시부터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정원 확대 폭 등 세부 방안을 지난 19일 발표할 계획이었지만, 의사단체들이 반발하자 발표를 잠정 연기한 상태인데요.(연합뉴스,231022) 그에대한 이해 관계자들의 반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의료시스템 붕괴를 막기위해 의대 정원 확대는 필수 현재 대학민국의 의료시스템은 불안정한 상황입니다. 대도시에서는 응급환자들이 치료받을 병원이 없어서 거리를 떠돌다 사망하고,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의 경우 더 이상 병원을 운영하기 어렵습니다. 뿐만아니라 지방에서는 의사들이 부족해 10억의 고액 연봉을 내걸지만 공석인 병원이 많습니다. (이데일리, 231023) 남우동 강원대병원장은 17일 경북대에서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의료인력 확충은 100% 필요합니다. 지금 확대해도 늦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필수의료 부족현상이 심화되고 있는데, 지금 의대 정원을 확대해도 현장에 배출되는 시기는 10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한국경제,231018)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는 긴급 인터뷰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과 관련, “의대 증원을 시작으로 비합리적인 의료시스템 개선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의사 수입은 평균적으로 우리나라가 OECD 중 가장 높지만,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의 필수 진료과 의사들은 근무 강도에 비해 처우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원을 하려는 의사들로 인해 필수 진료과 의사들의 유출이 많고, 지방에도 의사가 부족하게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동네 병원에서 비급여 진료가 남용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김윤 교수는 “의대 증원 확대 반대 이유는 의사들의 기득권이 근본 원인인 것으로 보이지만, 증원 협의 과정에서 의사들의 법적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필요해 보이며 비급여와 실손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데일리, 231023)   의대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같이하는 여야 이전부터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해서 여야는 한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윤석렬 정부의 방안에 야당이 찬성하는 이유는 문재인 정부 때 정부 때 추진하려던 정책이었으나 의협의 강력한 반발과 감염병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실시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파이낸셜뉴스, 231020) 그러나 각자의 방향성은 조금 다릅니다.  야당은 공공의대, 지역의사제 도입에 대하여 의견을 내고 있는데 이는 문재인 정부 때 추진하려던 방향과 동일하고, 특히 지역의사제 도입은 특정지역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는 의사를 양성하는 제도로 이재명 대표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당은 갈등 최소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공공의대 설립, 지역의사제 도입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못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의료계의 반발을 의식하고 최소화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는데요. 집단 반발에 막혀 무산되는 일이 없도록 의료계와 간담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중에 있습니다.  (한국경제, 231018)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의대 정원 확대에 파업 경고를 하며 반발하는 의협 의사단체는 정부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내용에 대하여 불편한 기색을 비추며 강력 투쟁에 들어갈 것을 예고했는데요.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은 “의사들과는 상의 없이 정원 확대를 결정했다”라며 조규홍 복지부 장관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의협은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서는 의대 정원확대가 아닌 건강보험 진료비 인상 등의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 231018)   익명을 요구한 서울 한 대학병원의 A교수는 “필수 인력을 유도하는 여러 장치 없이 숫자만 늘려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단순 숫자로만 증원한다면 늘어나는 것은 결국 피부과”라고 강조했습니다. 덧붙여서 “의료인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사회의료가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면 의사들도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올해 초부터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해 의대 정원 문제를 논의해 왔지만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증원 규모와 방식 등이 논의된 바 없다는 것이 의협의 입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이연 의협 홍보이사는 지난 10월 18일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14차례의 의료현안협의체를 진행하면서 현장에서 ‘응급실 뺑뺑이’ 등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나 정책적 제안을 논의해왔지 의대 정원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한 적은 없다”고 지적하면서 “정부에서 결정하고 통보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정원 확대 발표가 현실화한다면 총파업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말했습니다. (주간조선, 231023) 공대 교수들의 늘어나는 근심, 기회를 잡기 위한 직장인·학생의 의대 준비 열풍 의대 정원 확대는 대입에도 큰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데요. 벌써부터 학원가는 들썩이고 있습니다. 정부가 초고난도 킬러 문항을 배제하겠다고 밝힌 데다 의대 정원까지 늘리겠다고 하니 의대 진학 열풍이 더 거세졌는데요. 초등학생 때부터 의대를 준비하고, 대학생은 물론 직장인까지 의대 입시 학원에 등록하고 있습니다. (MBN, 231023)  다음 달 16일 실시되는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 응시하는 반수생이 역대 최고치인 9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반수생 규모가 역대 최고치를 찍은 원인은 최근 의대 열풍으로 입시에 재도전을 하는 학생이 증가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대학의 정상적인 운영은 어려울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올 수능을 치는 반수생이 좋은 성적을 거둬 타 대학으로 가게되면 올해 발생한 중도이탈자는 약 10만 명이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 231023) 반수생, 수능 입시생, 편입생, 직장인 등의 의대 준비 열풍으로 인해 이공계 인재가 대거 유출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요. 반면 의대 정원 확대를 기회로 삼아 의과학·공학 분야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나오고 있습니다. 의과학대학 설립을 추진 중인 대학을 중심으로 의대 증원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주장인데요. 최근 항공과대학(포스텍)은 의과학대학 및 부속 병원을,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은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방사선 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을 추진 중인 부경대의 손동운 교수(방사선 의과학대학 설립 실무위원장)는 “의료의 패러다임이 정밀·맞춤 의료로 바뀌고 있다”며 “새로운 진단기기를 연구·개발하기 위해서는 의학적 소양을 가진 공학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늘어난 의대생을 임상이 아닌 연구 분야로 진출시킬 대책도 동시에 나와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김하일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학과장은 “학생 선발 과정에서부터 과학에 관심 있고 공학과 결합한 교육과정을 완주할 수 있는 학생을 잘 가려내야 이탈 현상이 덜할 것”이라고 말했다.(중앙일보,231019) — 의대 정원 확대는 필요하긴 하지만, ‘얼마나’보다는 ‘어떻게’가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의견을 자유롭게 나눠주세요. 
의료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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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를 기억하는 법
조금은 잊혀진 참사 1994년 10월 21일. 이 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현재 굳건이 강남과 강북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한 날이다. 오전 7시 느닷없이 서울시 성동구외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조금 이른 아침이었지만, 출근과 등교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총 49명이 한강으로 추락, 32명이 사망했다. 건설사의 부실공사, 감리담당 공무원의 부실 감사, 정부의 안전검사 미흡으로 벌어진 참사다.  참사는 또다시 이어졌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지상 5층, 지하 4층 짜리 건물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이로 인해 502명의 사망자, 937명의 부상자, 6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해당 인명 피해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원인은 성수대교와 비슷하다. 이 역시 건설사의 부실 공사, 안전 불감증, 공무원 비리가 엮여서 발생한 사고였다. 완공 이후 무리한 증축이 이루어졌고, 백화점은 벽면 균열과 천장 내려앉음 등 붕괴 조짐을 알고 서도 영업을 중단하지 않고, 응급 조치로만 대응했다.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아 발생한 참사였다. 참사를 통해 무엇을 배웠나 30년 가까이 된 참사 이외에도 생생히 기억나는 참사도 있다.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 참사다. 이태원 참사 당시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이태원 할로윈 참사, 1995년 삼풍 붕괴 유령을 소환하다”라는 기사를 썼다. 기사는 우리나라가 삼풍 백화점 붕괴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지적, 붕괴 원인, 이태원 참사 상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기사는 삼풍 백화점 붕괴를 “현대화 열망 속에 건설업자, 공무원이 안전조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안전불감증과 공무원 무책임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이태원 참사가 참사 조짐이 보이고 알았음에도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삼풍 백화점 붕괴와 같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인명 피해를 낸 참사에서 전혀 배운 게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실제 이태원 참사의 경우, 참사 이전에 사람들이 압사할 것 같다고 말하는 신고전화가 11건 이상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이 올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코로나로 외부활동이 제한됐던 것을 감안하면, 코로나 제한 조치가 풀렸을 때 어느정도 폭발력을 가질지 분명 예측하고 판단하고 대비했었어야 한다. 참사가 발생한 이후,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같은 문제는 또다시 발생한다.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선,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단순 희생자를 기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당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었고, 왜 그 문제를 보지 못했는지 혹은 알고도 외면했는지, 그 문제가 다시금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계속해서 상기해야 한다. 참사가 기록되지 않으면,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처럼 참사의 유령만 계속 떠돌 뿐이다. 참사를 기억하는 법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대표적인 건 추모시설을 건립하는 것이다. 추모시설을 통해 당시 우리가 어떤 참사를 겪었는지 상기하고, 다시는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고, 치유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참사 피해자 유족들은 고인을 추모하고, 다시는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당장 참사의 유족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 집 값을 떨어트리는 혐오시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혐오시설이라는 인식 외에도, 공간 부지 마련과 사업비 문제, 행정 절차의 지연 등으로 건립이 안 되기도 한다. 서울시 광화문 광정에 있던, ‘세월호 기억공간'도 행정적인 이유로 철거된 상태다. 다시금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자는 유족들의 외침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듯해서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건 우리나라에서만 어려운 건 아니다. 해외에서도 오랜기간 논의를 거쳐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 9∙11 테러 추모를 위해 세운 9∙11 추모 광장과 메모리얼 파크다.  9∙11테러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쌍둥이 빌딩에 두 개의 비행기가 자폭 테러를 한 사건을 말한다. 전 세계가 경악한 사건이다. 두 대의 비행기가 연이어 빌딩에 돌진하고, 쌍둥이 빌딩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게 전세계로 생중계 됐다. 2,996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이중 민간인은 2,977명, 테러 주범인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19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25,000명 이상이다. 2006년 3월 13일부터 착공을 시작한 이곳은 2011년 9월 11일 꼬박 10년만에 추모관이 만들어졌고, 2014년에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로 기억되는 9∙11테러 마저도 추모관 완공에 10년이 걸린 걸 보면, 어느 나라나 비극을 온전히 추모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 수 있다. 9∙11 메모리얼 파크에는 2개의 사각형 모양의 폭포가 있다. 그 폭포를 둘러싼 테두리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단순히 희생자만 있는 게 아니다. 희생자와 생전에 가까웠던 가족과 친구들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알파벳순이나 임의로 이름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족들에게 일일이 물어 희생자의 이름을 생전에 알던 동료, 친구, 가족의 이름과 나란히 새긴 것이다. 건축을 맡은 아리드는 이를 ‘의미 있는 이웃들'이라는 개념으로 말했다. 이렇게 조성 된 메모리얼 파크와 박물관은 가족 투어, 현장 학습, 공공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방문객들로 하여금 어떤 사건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기억하는 공간이 됐다. 혐오하는 사람도 없고, 혐오 시설이라는 인식도 없고, 집 값이 떨어졌다는 소식도 없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안전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하게 되었으며, 공항 반입 가능 물품 등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테러 이전에 허용되던 조그만 과도를 제한하는 등 물품 하나 하나를 신경쓰고,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깐깐하게 심사했다. 그 결과 뉴욕JFK 공항은 입국 심사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나 중진국이 아니다. 어엿한 선진국이다. 9∙11 테러가 발생했을 당시, 미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 그럼에도 테러가 발생했다는 건, 선진국이라고 하여 테러나 참사가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건, 참사를 받아들이고 다루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슬픔과 악몽, 위험과 재난, 참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고,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벌어진 참사에 의미를 담는 모습이 선진국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이런 모습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에 입장하게 되면 방문자들은 이런 문장을 맞이한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시간의 흐름 속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지울 수 없다)” 참사로 희생 된 사람들의 이름은 그 유족들에게 잊혀질 수 없고, 지울 수 없다. 당장의 유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참사가 있었다는 것과 그로 인한 희생자가 있었다는 것, 우리는 다시는 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고, 시스템을 정비하고, 변해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다가온다. 희생된 모든 사람들을 다시금 추모하면서, 부디 우리 사회가 그때의 참사를 다시 기억하고, 사회를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출처 : 9∙11 MEMORIAL & MUSEUM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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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의 '뻔뻔한' 사퇴가 남긴 과제
지난 5일 여성가족부(여가부)장관 후보자 임명 국회 청문회에서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김행 당시 여가부 장관 후보가 청문회장에서 돌연 퇴장한 것. 이후 청문회는 6일까지 연장됐지만, 김행 후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각종 논란 속에서, 지난 12일 자진 사퇴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김행 전 후보자를 둘러싼 각종 논란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청와대 재직 당시 주식 보유 문제를 둘러싼 이른바 '주식파킹' 의혹 해명 그리고 소셜 뉴스 기업 '위키트리'를 통해 자행한 혐오산업에 대한 반성이다.  소셜 뉴스 기업 '위키트리'는 김행 전 후보자의 정체성 그 자체다. 김 전 후보자는 위키트리의 공동 설립자로서 대주주이자 부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문제는 김 전 후보자의 위키트리의 운영 방식에 있다. 지난 5일 여가부장관 후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의 질의 과정에서 위키트리가 지금까지 자행해온 '혐오산업' 이력이 드러난 것이다.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기사 내용과는 상관없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른바 '낚시'기사를 양산해왔다. 무엇보다 여성 혐오적 뉴스 생산이 문제로 꼽혔다. 위키트리는 유명 연예인뿐만 아니라 성폭행 피해자 등 여성을 향한 혐오와 차별을 수익창출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대표적으로 위키트리는 과거 기사들에서 성폭행을 '몹쓸 짓' '파렴치한 짓'으로 표현했다. 또한 기사 내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의 원인이 있다는 뉘앙스의 기사로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자행했다. 또한 불필요한 성적 묘사로 여성과 피해자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위키트리의 뉴스 보도 방식에는 성범죄 보도에 대한 윤리기준뿐만 아니라 성평등에 관한 기본적인 인식과 감수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때문에 자극적인 혐오콘텐츠로 조회 수를 유도해 기업 매출을 올리기를 목표로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위키트리 혐오산업이 시작된 건 2018년 김 전 후보자가 위키트리 부회장직을 맡은 이후부터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 전 후보자는 위키트리 부회장직을 맡으며 트래픽 중심의 성과를 강요했다고 한다. 김 전 후보자가 운영을 맡은 시점인 2018년도부터 언론중재위원회의 위키트리 시정권고 수는 연간 두 자릿수로 늘었고,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시정권고 수는 총 98건으로 인터넷 기업 총 4084곳 중 전체 2위에 이른다. 김 전 후보자는 위키트리의 혐오산업이 구축되는 데 일조하고 방관해왔다.혐오산업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김 전 후보자는 사퇴하면서 '주식파킹' 의혹을 두고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회사를 운영했다"라며 "불법을 저지른 적은 결코 없다"라고 해명했다.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주식파킹 의혹뿐만 아니라 혐오산업 이력에 대해서도 지적받았다. 이에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부끄러움으로 하늘을 우러러볼 수도 없어야 마땅하다. 이런 인물이 여가부장관 후보로 지명됐다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여전히 참담하다. 여가부장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여가부란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와 권익증진을 중심으로 여성·가족 정책 및 청소년·아동 복지업무를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관이다. 위키트리의 혐오산업과 김행 전 후보자의 연관성을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도저히 여가부 장관 후보로 임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번 '김행 논란'은 현재 정부의 온라인 혐오산업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저조한지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더 이상 온라인 플랫폼 기업의 혐오산업을 방치해선 안된다.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외국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대상에게 혐오와 차별을 유발하는 콘텐츠로 수익을 창출하는 혐오산업 구조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공론장이 진정한 표현의 자유와 안전한 소통을 보장할 수 있도록. 약자성, 소수자성이 차별과 혐오의 방식으로 '돈'이 되지 않도록 혐오산업 규제법을 제정해야 한다.  함께 요구해요📢"온라인 플랫폼 혐오산업 규제법 마련하라" 해외 플랫폼이 진정한 표현의 자유와 소통이 보장되는 건강한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서명에 동참해 주세요. 혐오산업 규제에 뜻을 함께 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아 국회와 관련 정부기관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서명 기간 : 2023년 10월 20일까지, 1천명 서명 목표 요구 대상 :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의원들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련 정부기관 요구 내용 :  해외 소셜 플랫폼 기업의  혐오산업을 규제하는 법안을 제정하라 혐오콘텐츠 현황 파악을 위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라 유튜브, 메타, 엑스 등 해외 소셜 플랫폼 기업들에 국내 이용자 보호 방안을 요구하라 지금 서명에 참여하시고 주위에도 이 행동을 공유해주세요. 촉구 캠페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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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먹는 공룡’ chatGPT, 이대로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
최근 몇년 사이 오픈AI의 chatGPT(챗지피티), 구글 Bard(바드) 등 대형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을 활용한 인공지능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개인과 조직은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를 접목해 새로운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엉뚱한 결과와 잘못된 정보를 제공받는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건네는 답변에 관한 윤리, 논리, 학문적 비판 및 논란은 "인공지능" 캠페인즈 태그를 참고하면서, 이번 글에서는 인공지능을 학습시키고 대용량 데이터를 관리하는데 필요한 물 소비와 탄소 발자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들어가며 - 탄소 발자국이란?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은 개인, 기업 또는 제품 등이 일정 기간 동안 특정한 활동을 통해 대기로 방출한 이산화탄소(CO2)와 기타 온실가스의 양을 측정하는 용어입니다. 이산화탄소는 가장 흔한 온실가스로, 주로 화석 연료를 태우는 과정과 산림 파괴와 같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발생하며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난 20년 간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온실가스는 대기 상층에 열을 가두어 지구 온도를 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높은 농도의 온실가스는 곧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하고 해수면 상승, 녹아내리는 극지방 빙하, 폭염/가뭄/홍수와 같은 극단적인 기후 현상을 불러옵니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환경, 경제,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인간을 포함한 전지구적 생태계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후위기를 늦추고 회복하기 위해 에너지 효율적인 기술 도입, 재생에너지 보급, 탄소 배출 저감 방안 등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업과 정부 뿐만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에너지 절약, 대중교통 이용, 채식 실천, 제로웨이스트(쓰레기 없애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chatGPT가 탄소 배출이랑 무슨 상관이지? 쉼 없이 돌아가는 생산 공장, 도심을 꽉 채운 자동차 배기가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일상에서 매일 이용하는 온라인 검색, OTT 스트리밍, 인터넷 뱅킹, 이메일 사용, 심지어 전화 통화까지 모든 온라인 무선 활동에서 탄소 발자국이 발생합니다. 이는 전자기기와 각종 온라인 서비스를 사용할 때 와이파이, LTE, 5G 등 여러 네트워크를 통해 데이터센터를 반드시 거치기 때문입니다.  데이터센터에서는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작업을 처리하며 안전한 데이터 보관과 송수신을 위해 적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데이터센터의 서버를 냉각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전력 소모와 온실가스 배출이 동반됩니다.  “최근 발표된 스탠퍼드대 인공지능 인덱스 보고서에 따르면,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챗지피티(ChatGPT)의 기반인 거대언어모델(LLM) ‘지피티3’는 훈련 과정에서 1287MWh의 전기를 소비했다. 이로 인한 탄소 배출량 추정치는 502톤이다. 평균적인 세계인이 100년간 배출하는 양에 해당한다. 2020년 기준 한국인 1인당 탄소 배출량(11.6톤)의 43배다. (중략)미국 리버사이드 콜로라도대와 앨링턴 텍사스대 연구진은 ‘챗지피티(GPT)’와 한 번 대화를 하는 데 물 500㎖가 소비된다는 계산 결과를 사전출판논문 저장소 <아카이브>에 발표했다. 한 번 대화에서 질문과 답변을 25~50개 주고받는 걸 기준으로 한 계산이다.”  (한겨레, 2023-05-03)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친환경 경영(ESG)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빅 테크 기업에서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밝혔다. 친환경 경영은 이제 기업의 경쟁력 차원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시장은 친환경적이지 않은 산업이 판매에 제한을 받고 투자를 받기도 힘든 방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기업이 디지털 탄소발자국을 줄이도록 정책적 개선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동아사이언스, 2023.03.04) 함께 만드는 미래를 그려보기 캠페인즈에서 한편의 포스팅을 작성하기 위해 필요한 구글 검색, 기사와 연구 자료 클릭, 적절한 저작권 무료 이미지 찾기, 클라우드 서비스에서의 초안 편집, 캠페인즈 플랫폼 업로드 등 모든 시점에 네트워크와 데이터를 태우며 탄소를 배출합니다. 이 글이 여러분의 노트북과 스마트폰에 닿아 스크롤되는 순간 역시 그렇습니다. 저 역시 평소 현업에서 chatGPT를 적극 활용하며 업무에 실질적인 도움을 크게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끊임없이 물을 소비하고 탄소를 뿜어낸다는 사실을 알아도, 개개인이 한번 경험한 대형 인공지능 서비스를 거부하는 일, 콘텐츠가 넘치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멈추는 일, 연동이 편리한 클라우드를 탈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단순히 모든 생산과 소비를 멈출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연구자는, 기업은, 정부는 각각 어떤 책임과 자세를 가지면 좋을까요? 0과 1의 디지털 세상에서 탈(脫)기술이나 반(反)인공지능처럼 0으로 수렴하는 방향도 있겠지만, 현재 주어진 기술과 자원을 중심으로 1 너머의 대안을 찾을 수 있을지. 전 지구적 협력이 필요한 시대에 디지털 시민 광장에서 다양한 의견과 제안, 질문이 오가기를 바랍니다.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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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참사의 기억을 담습니다
10·29 이태원참사의 기억을 담습니다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10·29 이태원참사 기록보존활동, '이태원 기억 담기'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참사현장은 유가족들에게 트라우마 그 자체입니다. 참사의 공간은 애도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참사 이후, 많은 시민들이 참사현장을 찾고 있어요. 이태원역 1번 출구부터 해밀턴호텔 옆 골목을 따라 가벽까지 추모포스트잇과 추모물품이 가득했습니다. 지역 주민과 자원활동가는 작년 12월 말부터 2만 5천여 점의 조화를 비롯해 추모물품을 정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12월 23일, 유족과 지역주민, 지역상인, 시민대책회의가 함께 ‘희생자의 온전한 추모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장 및 대책 촉구 기자회견’을 연 후,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회가 공간을 관리해왔습니다. 수많은 메시지를 모두 수거하고 분류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2023년 3월 11일부터 문화연대는 피해자권리위원회와 함께 시민들이 참여하는 기록보존활동 '이태원 기억 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활동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찾아온 한 참여자는 야외 공간에 놓인 추모물들은 금방 훼손되기 쉽상인데, “조금만 방심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같은 추모 기록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한” 우리 활동에 딱 맞는 이름이라고 후기를 남기기도 했지요. △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참사 이후, 많은 시민들이 참사현장을 찾아 추모메시지와 추모물품을 남겨주었다. 기록보존활동 ‘이태원 기억 담기'는 크게 추모메시지 수거 작업, 추모메시지 분류 및 보존 작업, 현장 정비 활동, 추모메시지 공론화 활동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현장을 찾아 추모메시지를 수거해요. 많은 시민들이 남겨준 추모메시지를 보존하려는 게 첫번째 목적이고요. 가득 찬 벽에 새로운 추모메시지가 붙을 수 있게 여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게 두번째 목적입니다. 아카이빙 작업 시엔 몇 가지 규칙을 따라, 메시지를 1차 분류합니다. 그리고 장기보존을 위해 메시지를 고정하고, 제습제와 함께 서류상자에 보관합니다. 현장 정비 활동 시엔 음식, 술, 꽃 등 추모물품을 수거하고 주변을 청소합니다. 또, 추모메시지를 남길 수 있게 필요 물품(포스트잇, 펜, 테이프 등)도 마련해두죠. △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추모메시지를 수거하는 자원활동가들 △ 2023년 10월 현재까지 수거한 메시지는 십수만장에 달한다. 기록보존활동에는 연구자, 시인, 음악가, 대학생, 다큐멘터리 감독, 문화공간 운영자, 고등학교 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평소 다른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참여자도 있지만, 이 활동을 통해 참사가 주는 무력감을 이겨낸 참여자도 있어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활동가나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 참여자 뿐만 아니라, 주변 상인과 지나가는 시민도 이 공간에 책임감을 느끼며 함께 공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참사 현장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 상인은 자원활동가들이 찾을 때마다, 분류 작업할 공간을 내어주고 마실 음료도 선물해주셔요. 바람이 드셌던 어느 날에는 참사 현장을 지나가던 한 시민이 흩날리는 포스트잇을 모아 서울시청 앞 시민분향소까지 손수 가져다준 일도 있었어요. 국가의 방기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추모메시지와 사회적 애도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기억과 안전의 길'에는 참사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와 구조자, 그리고 희생자의 유가족과 지인을 비롯해 다양한 시민들이 방문하여 포스트잇에 추모의 말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추모메시지에는 추모와 애도를 비롯해 미안함, 자책감, 무력감,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뒤엉켜있어요. 희생자와 참사 현장에 대한 기억이 담겨있기도 하지요. 추모메시지를 작성한 사람들은 희생자가 겪었을 고통과 유가족의 상실에 공감하며, 타인의 삶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희생자의 사라진 미래를 안타까워하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반성하기고 국가의 책임을 묻기도 합니다. 잊지 않겠노라고 되뇌이고,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에 나서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메시지를 살펴보면,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관용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를 비롯해 "미안하다"는 말이 참 많습니다.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고, 정작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떠난 이들에게 사과하고 있죠. 왜 살아남은 우리만 사과해야 하는 걸까, 이런 메시지를 볼 때마다 슬픔과 동시에 분노를 느껴요. 아래에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구조자가 작성한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이 메시지들엔 참사 현장의 풍경을 비롯해 희생자의 마지막 기억과 생존자의 트라우마, 다짐이 담겨있어요. 특히 구조자들의 메시지에서 재난대응시스템의 공백, 그리고 이들이 느꼈던 무력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족, 지인을 비롯하여 희생자의 지인들이 그들을 호명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울립니다. 여기에는 생전에 함께하며 느꼈던 행복감과 희생자가 떠나며 겪게 된 상실감, 슬픔 등 세상 모든 진한 감정들이 녹아 있습니다. 비록 일부 미디어와 시민들이 희생자를 비난하고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운다 할지라도, 희생자들 역시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왔던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추모메시지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작성된 메시지도 2할 이상이나 됩니다. 이는 인도네시아, 미국, 일본, 중국, 우크라이나 등 다양한 국적을 지닌 사람들이 추모현장을 찾아 주고 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태원이 다양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었음을, 그리고 외국인 희생자도 이곳에 있었음을 기억하게 하지요. 안전사회를 위해,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록해야 합니다 사회적 애도를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은, 정리되지 않은 추모메시지만큼 쌓여 있습니다. 책임자들은 형식적인 사과만 늘어놓고 있으며, 국회에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됐지만 아직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지요.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록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함께 기억할지의 문제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사현장에 발걸음한 시민들이 남겨준 추모와 애도의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 안전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길 바랍니다. 글쓴이 _ 문화연대 박이현 활동가 | 앞산의 불을 끄는 일만큼, 너른 삶의 터를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 활동가. 잠든 감각을 깨우고, 마음과 마음을 잇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씨앗을 심고 있다.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을 비롯해, 기후위기에 대응하여 다양한 문화/예술 실천을 도모하는 한편 청소노동자의 스포츠권을 위해 운동으로 노동운동하고 있다. 이태원 기억 담기 | 매달 2회씩 정기적으로 모여 이태원역 1번출구 앞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추모메시지를 수거하고, 이를 아카이빙 및 공론화하는 활동을 진행하는 시민 모임. http://bit.ly/remember_1029에서 참가신청할 수 있다.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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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후속세대를 죽이는 R&D 예산 삭감 철회하라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학생위원회 성명서학문 후속세대를 죽이는 R&D 예산 삭감 철회하라 현 정부는 과학계 카르텔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국가 R&D예산을 전년 대비 5조2000억원 삭감하였다. 그 여파로 해당 예산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학문 후속세대는 연구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정책의 재고가 없다면, 향후 국가연구를 책임질 학문 후속세대들이 졸속정책의 제1 희생자가 될 것이다.R&D 예산 삭감으로 일어날 구체적인 피해는 아래와 같다.첫째, 박사후 연구원의 사회진출이 막힌다. 이미 정부 출연 연구원에서는 비정규직 인력인 박사후 연구원들을 권고사직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학 기관에서 박사후 연구원의 채용을 취소하는 사례가 급증하는 등, 박사 학위자의 고용 환경이 극도로 불안정해지고 있다. 그들은 평생을 닦아온 연구 역량을 발휘하지도 못한 채 과학기술계에 발붙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둘째, 기초연구 예산 삭감으로 연구 생태계가 무너진다. 연구 역량을 갖췄지만, 아직 연구를 수행할 수 없는 신인 연구자에게 연구 기회를 제공해 주는 생애 첫 연구과제와 순수 학문 연구가 안정적으로 이뤄지도록 지원해 주는 기본연구과제가 2024년에는 0건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비전임 연구자들이 유일하게 참여할 수 있는 창의 도전과제도 4,200여 건 중단될 예정이다. 이로써 신인연구자들의 연구 기회가 줄어들고, 연구의 다양성과 발전 가능성 축소로 미래 연구생태계의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셋째, 이미 계약을 맺고 진행 중인 연구 사업들이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한다. 1~6개년 단위로 현재 진행 중인 기초연구 사업 중 생애 첫 연구, 기본 연구, 리더 연구 사업의 예산이 29.3%~39.2%, 분야별로는 바이오, 반도체, 항공우주, 인공지능 등의 분야 연구 예산이 전년 대비 70~90% 삭감될 예정이다. 해당 연구과제의 연구재료비와 인건비 삭감을 피할 수 없으며, 다년간 투자해 온 연구 가치들이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넷째, 미래를 이끌어갈 대학원생들의 꿈이 좌절된다. 연구실들의 예산확보 차질은 곧바로 참여연구원 축소로 연결될 것이다. 출연연과 대학에서는 이미 다년차 대학원생들의 연구중단과 조기졸업 통보 사례가 발생하고 있으며, 신입생 모집 중단 사례 또한 발생하고 있다. 예산감축으로 인해연구 인력양성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 있으며, 연구분야로의 진로희망자들이 진로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이에 따라 학생위원회에서는 행정부와 국회에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하나, 근시안적 R&D 예산감축안을 재고하라하나, 기초연구 분야의 예산삭감을 철회하라.하나, 학문 후속세대의 안정적 연구환경과 고용 환경을 보장하라. 2023. 10. 13.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ESC 학생위원회성명서 동의 참여📢 성명서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은 동의에 참여해 주세요!
거버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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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Man Box)는 내 목젖에 있었어
<맨박스(Man Box)는 내 목젖에 있었어> by 남함페 정민 벌거 벗은 남자들 :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  • 이 프로젝트는 기존 남성 섹슈얼리티의 재탕이 아니라, 새로 쓰는 남성 섹슈얼리티다. • 편견과 왜곡, 위계와 대상화로 가득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해야 한다. • 그 자리를 더 나은 질문과 고민을 통과한 남성 섹슈얼리티의 탐구로 채워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의 내부고발, 실제적인 경험,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 이 글에는 인터넷 용어 또는 혐오 표현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차별과 혐오의 재생산이 아닌 비판에 그 목적이 있으며, 가급적 사용을 지양하려 노력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맨박스(Man Box):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주어지는 억압, 남자다움에 대한 강요로, 전통적인 남성 상에 맞춰 마초적으로 살아갈 것을 주문하거나, 타인(특히 여성, 성소수자)을 통제하거나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강화하도록 만드는 문화규범으로 나타난다. “주말에 한 번 만나면 되는 거 아냐?”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여느날과 다름없이 나는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의 첫 음성, “나 할 말 있어.” 그 말은 신호탄이었다. 이미 지난 인연들이 언젠가 꼭 한 번씩은 했던 말이자, 우리의 관계가 이전과 아주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갈 것임을 알리는 경적소리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도 소리도 아닌 대답으로 통화를 이어갔다.  60분의 통화시간, 벌 서는 기분으로 듣고만 있었다. 애인은 수 개월 쌓인 감정의 응어리를 빠른 속도로 쏟아내고 있었다. 언어는 날이 서있었고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올 것이 온 날, 나는 초조함 속에 짝다리를 짚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내가 네 우선 순위에 몇위쯤 있어? 한 10위쯤은 되니? 일, 활동, 스터디, 모임, 술자리, 출장, 네 개인시간에 다 내어주고 그 다음 자리쯤은 돼? 내가 보자고 할 때까지 너는 먼저 만나자는 말 한 번을 안 하잖아. 나는 만나자는 말도 ‘네가 바쁠 텐데’, ‘체력적으로 힘들 텐데’ 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쳐서 겨우 눈치보다 한 마디 꺼내는 건데, 그렇게 다 고려해서 물어봐도 항상 너는 어디가야 한데, 또 회의가 있데,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작업하는 게 생겼데, 나 완전 바보 된 것 같아. 우리 연애 왜 해? 우리 카톡도 전화도 그렇게 자주 안 하잖아. 나도 이거 겨우 이야기하는 거야. 내가 너무 속이 좁은가? 열심히 사는 애한테 괜히 뭐라고만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고 주저했어. 알아?”정적 끝에, 내가 되돌려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물론 이 말은 애인을 더 화나게 했고(그걸 왜 나한테 물어?), 통화는 곧 끊어졌다. “뭘 더 어쩌라고?”  목에 걸려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팠던 항변은 아래와 같았다. “그러니까,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주5일을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에도 스터디에 특강에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는 나에게 뭘 더 기대하는 건데? 어디 한 눈을 판 것도 아니고, 거짓말과 핑계로 둘러댄 적도 없어. 쉴틈 없는 와중에 꼬박 하루 내지 반나절은 너에게 온전히 바치는데, 내가 왜 너에게 그런 미움을 받아야 하는 거야? 혹시 주말 내내 같이 있자는 거니? 그럼 당장은 좋겠지만 나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게 돼. 그것은 곧 더 나은 커리어,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걸 포기하는 거고. 내가 잘 되는 건 곧 네가 잘 되는 것이기도 해. 당장 내가 돈이 있고, 능력이 있어야 너에게 옷 한 벌이라도 사주고, 때우는 식사가 아니라 밥도 제대로 된 걸 먹을 것 아냐? 우리, 언제까지 분식에 메가커피만 먹고 살 거냐고.”이쯤 되면 여러분도 알지 않는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기념일을 놓친 적 없고, 맛집과 좋은 카페를 훤히 꿰고 안내했으며, 항상 친절했고, 장을 보고 음식을 해먹일 줄 아는 애인이었다. 월급도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에 다녔고, 데이트 비용도 쓰면 더 썼지 섭섭하게 한 적은 없었고 말이다. 꾸밈노동 또한 잘했다. 츄리닝과 삼선슬리퍼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어디서 옷 못 입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한 마디로 ‘미루어보고 견주어봐도 손색없는’ 남자친구였다. 그런데 대체 왜, 나는 애인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갑자기 걸려온 60분짜리 폭탄에도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방법을 물었지 않은가.나의 구속일지통화 이후, 애인과 연락은 잠정 중단되었다. 억울함이 구름처럼 밀려왔지만, ‘그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상 나의 연애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니까. 나의 좋아하는 마음과 구애로 관계가 시작되고, 상대는 고민하다가 몇 번의 데이트 후 연애를 승낙한다. 평화로운 몇달이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 서운하다면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만남 도중 화를 내고, 간밤에 전화가 걸려온다. 그리고 헤어지거나 예전만 못한 사이가 된다. 나도 애인과 다투는 일이 즐거울리 없고,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상대가 나로 인해 서운하고 속상해하니 언제나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뭘 잘못한 건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본디 연애라는 게 구속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이거나, “우리 사회에 아직도 서로를 집착하고 못 잃어서 안달인 연애 문화나 연애 시나리오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씁쓸해 했다.그게 아니면  마치 응당 받고 누려야 할 것을 내가 주지 않아 괘씸하다는 듯이 말하는 애인이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나도 분명히 연애를 위해 잃고 감수하는 것들이 있고, 지켜야 할 선을 넘은 적도 없었다.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져야 할 책임을 다 짊어졌다. 그런데 이런 태도로 나오다니. ‘더 내놓으라’며 떼를 쓰는 애인이 대책없어 보이고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늘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이런 순간을 으레 예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 가서 할 말을 준비해둔 채 말이다. 이전 통화에서 꺼냈던 “미안해, 잘못했어”와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라는 말은 개중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둔 것이었다. 대실패였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자경(손석구 분)이 염미정(김지원 분)에게 했던 말이 처절하게 다가왔다. 염미정: "할 말 없나?"구자경: "할 말 있으면 니가 해.여자들은 꼭 맡겨 놓은 거 있는 것처럼 툭하면 뭘 달래.내가 너한테 빚졌냐?”염미정: "누가 다이아몬드 달래?"구자경: "다이아몬드가 더 쉬워. 추앙이 뭐냐? 난 몰라."JTBC, <나의 해방일지> 10화 中 그렇지 않은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하면 되고, 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면 되는데 왜 이러는 것인가. 그렇게 같은 실랑이, 동어 반복이 몇 번 더 이어진 후에, 이번 연애는 끝이 났다. 한 계절이 이리 지나간 것이다. 끝을 지은 이후에도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따금씩 열이 나기도 했고, 한숨을 푹푹 쉬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많은 감정이 일었지만 가장 굵직한 결은 억울함과 속상함이었다. 이렇게 끝날 관계가 아니라고 믿었기에 억울했고, 아무리 섭섭해도 그렇지, 지난 시간 내가 공들여 쏟았던 마음들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 속상했다. 낮이 밤인 것 같고, 밤이 아침인 것 같았던 며칠을 보내고도, 이 관계를 한층 더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함께한다는 것그 무렵, 마음을 환기하려 펼친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했다.  “여보 , 우리 주말 껴서 2박 3일 정도 도쿄와 하코네에 갔다 와요.” …“그래, 그러지 뭐, 당신 마음대로 해.”남편은 가정사의 결정과 선택을 모두 나에게 일임했다. 아내에게 전적인 선택권을 주면서 배려하는 것 같지만 달리 말하면 자신은 관심도 가지지 않겠다는 뜻이자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얘기와도 같았다.임경선, <나의 남자> 中 날카로운 칼에 베인듯 마음이 스산해졌다. 사위가 이토록 어두웠나 싶을 만큼 나는 일순간 고독해졌다. 다친 마음을 달래려고 꺼내든 독백체의 소설이 나를 사뭇 심각하게 만들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애인에게 선택권을 주고, 애인이 하자는 것을 따랐다. 애인이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애인이 원하지 않으면 곧장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헌신이자 역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소설 속 남편의 목소리와 무척 닮았다. “어, 그러자.”, “응, 네 마음대로 해.”, “하고 싶은대로 해.”는 내가 참 자주 쓰는 말이었다. 그래서 애인과 뭘 하며 만나면 좋을지 먼저 떠올리기 어려웠고, 애인을 따라나선 곳이 좋아도, 심지어 별로여도 특별한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애인이 하자는 것을 하기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애인과의 교제, 관계에 대한 무게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날 애인은 내게 이 무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누군가 연애는 함께하는 것이냐고 물을 때, 그렇지 않다고 답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럼 연애를 혼자 하냐?’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엇이 함께하는 것일까? 몸이 같은 곳에 있으면 함께하는 것일까? 같은 식기, 같은 화장실, 같은 침대를 쓰면 함께하는 것일까? 고백하건데 나는 이런 고민을 제대로 자문한 적이 없다. ‘내가’, ‘연애를’, ‘누구랑’, ‘하는지/안하는지’에 골몰했을 뿐, ‘어떻게 함께 만날지’ 떠올려보지 않았다. 나는 연애를 해도 주어가 ‘우리’로 좀체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연애가 시작되면 ‘나’의 역할과 기능, 능력 그리고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만 신경썼다. 내가 느꼈던 억울함은 역할에 충실했음에도 발생한 갈등 때문이고, 애인(아마도 내 삶의 모든 애인들)이 느꼈던 속상함과 화는 내가 연애가 시작된 이후로도 여전히 내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비롯됐음을 몰랐다. 목젖에서 마주친 맨박스(Man Box)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맨박스(Man Box)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실상 내가 이 연애에 문제가 없다고 안심한 근거는, 남자다움에 근거한 조건과 역할이 충족되었다고 착각한 것에 있었다. 남자다움의 조건은 더치페이 이상의 데이트 비용을 지불할 능력, 데이트 공간인 집의 소유, 애인에게 부족함 없는 학력, 지식, 문화자본, 사회적 관계의 충족을 의미했다. 남자다움의 역할은 데이트 시 적절한 행동의 수행과 많은 것을 가타부타 요구하지 않는 과묵함이었다. 그러니 나는 남자의 조건과 역할을 모두 달성함으로써 ‘좋은 남자’로 승인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연애에 문제는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맨박스, 남자다움의 억압은 단지 근육을 기르고 돈을 잘 버는 멋진 남자가 되라는 압력 이상의 영향을 미친다. 조건과 역할을 따지는 것에만 빠져, 상대와 좀처럼 상호작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애인이 섭섭함을 토로하면, 왜 섭섭해하는지에 부당함을 느끼고 섭섭할만한 이유를 탐색하는 게 아니라, 애인의 감정을 마주하고 그에 상응하는 나의 감정으로 되돌려주었어야 한다. 애인의 섭섭함 아래에는 나와 더 친밀해지고 싶은 욕구, 나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다는 동기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너무나 표면적으로, 피상적으로 애인의 감정을 쳐내기 바빴다. 나는 맨박스에 맞춰 사고하지 않는다고 자부했음에도 그랬다. 맨박스는 가슴 속  감정의 길목에, 그것을 언어로 실어 나르는 목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상대와 소통하지 말라고, 상대는 지금 너의 역할과 헌신을 무시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며. 60분의 통화시간-그날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도록 했다. 아마 애인이 그날의 전화에서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 바랐던 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나를 더 사랑해줘.내가 너에게 하나뿐인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싶어.사랑도 없고 특별함도 없다면 그냥 달콤한 거짓말이라도 해줘.무미건조했던 나는 말 한 마디를 못했다. 억울함과 부당함에 골몰했을 뿐,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제대로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끝내 듣지 못하는 사람과 계속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끝끝내 우리가 걷는 길의 풍경이 달라졌다. 당시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에 나는, 그동안 이 관계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감당하게 한 것을 미안하다고 답해야 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바빠서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네가 여전히 나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참신한 언어로 돌려주었어야 했다. 이러한 변화 가능성이 담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건너갔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시 애인의 말을 골똘히 번역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번역 할 필요가 없도록, 애인이 그때 나에게 저 말을 그대로 직언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답은 ‘아니다’였다. 당시의 나로서는 어떤 말을 듣더라도 부당한 처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게다가 저 번역된 말은, 누구라도 쉽게 발음할 수 있는 무게의 언어가 아니다. 나를 더 사랑하고 특별하게 대해달라는 말. 차마 직접 발화할 수는 없어도 너무 간절하게 원하는 말. 나는 기대도 하지 못해 표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말을 애인은 온 힘으로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위에 인용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소통을 시도하는 염미정에게 “추앙이 뭐냐? 난 몰라.”라고 답한 구자경, 이에 대한 염미정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들개한테 팔뚝 물어뜯기길 각오하는 놈이그 팔로 여자 안는 건 힘들어? 어금니 꽉 깨물고고통을 견디는 건 있어 보이고, 여자랑 알콩달콩 즐겁게사는 건 시시한가 보지? 뭐가 더 힘든 건데?들개한테 물어뜯기고 코 깨지는 거랑 좋아하는 여자편하게 해주는 거랑 뭐가 더 어려운 건데?”JTBC, <나의 해방일지> 10화 中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만나고 사귀려고 연애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연애가 하고 싶어서, 애인을 인형처럼 곁에만 두려고 만나는 게 아닐까? 진정으로 말을 걸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분명 나의 애인을 사랑했다. 내가 사귀었던 애인들 모두 마찬가지로 당시의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 마음만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사랑으로 대했는지 더는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나, 그것이 목젖에 가로막혀 바깥으로 표현될 수 없었다면, 그것을 진정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흔히들 사랑하면 다 잘 만나게 된다는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지만, 나는 더는 이 통념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맨박스는 단순히 남자다움에 갇혀 근육만 기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맨박스는 사람이 사랑을 매개로 진정 함께할 수 없도록 한다. 삶에서 이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성별고정관념으로 점철된 문화에 도전한다는 것은, 왜곡된 사랑을 부디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투쟁이다. 표현되어야 사랑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을 막는 억압이 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내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상대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는 맨박스여야 하지 않을까. 본 글은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 작성하여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에 동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얼룩소 9화 원문 주소 : https://alook.so/posts/1RtMnRv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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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국제교류 시리즈3] 세 여성들, 바둑 국제교류에 앞장서다(2)
바둑계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을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 지난 편에서는 <한국여성바둑연맹>의 이광순 회장, <대만바둑교육발전협회> 장샤오인 사무총장과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바둑 국제교류 시리즈2] 세 여성들, 바둑 국제교류에 앞장서다(1) - 백아인의 토론 | 캠페인즈 (campaigns.do) 이번에는 지난 편에 이어 장샤오인 사무총장과의 인터뷰와 <아시아바둑연맹> 김향희 사무총장과의 인터뷰를 다뤄보고자 한다.   <대만바둑교육발전협회> 장샤오인 사무총장 Q. 백아인(이하 동일) : 그러고 보니, 올해 8월 27일이 <대만바둑교육발전협회> 20주년 기념일이라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이 때문에 더욱 바쁜 한 해를 보내지 않았나 싶은데요.  A. 장샤오인 사무총장(이하 동일):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20주년 기념 행사가 대만에서 있었어요. 우리는 <한국 대학 바둑 연맹>을 초대하여 '제1회 대만-한국 대학 바둑 교류전'을 개최했습니다. 이로써 대만과 한국 대학간 바둑 교류가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교류할 예정이에요. Q. 대만-한국 대학 바둑 교류전 등 여러 바둑 국제 교류의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우리는 바둑을 통해서도 교류하지만, 바둑이 끝난 뒤에도 대화를 통해 서로의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만 바둑인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와 접촉할 기회가 생기고, 더불어 서로에게 발전을 가져다 줍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대만의 바둑 교육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나요?  A. 대만의 바둑 학생들은 대부분 취미로 바둑을 배웁니다. 부모님들은 자녀가 바둑을 통해 수학적 추리와 사고 능력, 감정과 심리의 통제 능력, 문제 해결 능력 등을 향상시키기를 바라지요. 진정으로 프로 바둑 선수로 발전하는 것은 소수 중의 소수입니다. 대만에서는 유치원의 재능 교육 과정에 대부분 바둑 수업이 포함되어 있어서, 어릴 때부터 흥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둑 교육의 효과는 부모님들이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Q. 바둑의 효과는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장샤오인 사무총장님께서 앞으로 바둑 국제 교류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A. 앞으로도 더 많은 대만 친구들을 한국에 데려오고 싶습니다. 성인 바둑 애호가들, 대학생들, 초등학생과 중학생, 고등학생들, 여성 바둑인들, 바둑 선생님들 등 모두요. 한국의 바둑 대회에 참가하거나, 바둑 선생님들 교류 강연회, 교육 방문단 등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또 대만 학생들을 충암 바둑 도장, 한종진 바둑 도장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하거나, 대만 대학생들을 명지대학교 바둑학과로 유학 혹은 교환학생으로 보내는 등 다양한 교류 협력을 하고 싶습니다.  또한 한국의 바둑인들, 선생님들, 학생들을 대만에 초대하여 대만의 바둑 대회, 교류 강연에 참여하도록 하거나, 명지대학교 바둑학과의 학생들을 대만에서 인턴십을 하도록 하는 등의 활동도 환영합니다.  Q.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정백희 선생님이 타이난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 그 활동이로군요.[바둑 국제교류 시리즈1] 타이완과 한국의 바둑 교육 교류 - 백아인의 토론 | 캠페인즈 (campaigns.do) 내년 <한국여성바둑연맹>과도 교류를 추진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A. 네, 내년 3월에 <한국여성바둑연맹>이 대만에 교류 방문할 예정이에요.  저는 한국 여성 바둑 연맹 명예 회원 1호로서 대만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입니다. 대만과 한국 교류 외에도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 활동도 계속 진행할 계획이에요. 이미 자주 이루어지고 있는 중국 교류, 일본 교류를 비롯하여, 앞으로는 유럽 바둑 대회, 미국 바둑 대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등의 바둑 활동에도 팀을 보낼 예정입니다. 대만과 세계의 교류 플랫폼을 계속 구축할 것입니다. Q. 대단히 큰 포부란 생각이 들면서도, 장샤오인 사무총장님이라면 다 이루실 거란 믿음이 갑니다. <한국여성바둑연맹> 명예회원 1호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한국에서도 여성들이 바둑을 두는 건 흔치 않은 풍경으로 여겨지거든요. 마지막으로 여성 바둑인들에게 혹시 하시고 싶은 말이나 당부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A. 저는 여러 번 <한국여성바둑연맹>의 활동에 참여했어요. 50대, 60대의 여성 선배들이 바둑을 이렇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매번 활동에 많은 여성 선배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고, 심지어 70대, 80대의 할머니들도 있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만에서는 바둑을 하는 여성들이 주로 학생들이고, 30대 이상의 여성들은 많지 않습니다. 한국에 여성 바둑 연맹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어요. 나중에 대만에서도 <대만여성바둑연맹>을 창립하고 싶어요. 더 많은 여성들이 바둑에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바둑을 여성들, 엄마들 사이의 최고의 여가 활동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여성들이 즐거이 바둑을 두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아시아바둑연맹Asian Go Federation> 김향희 사무총장 Q. 백아인(이하 동일): 안녕하세요. 바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 혹시나 처음 듣는 분들을 위해, 아시아바둑연맹(Asian Go Federation)과 사무총장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해 주시겠어요? A. 김향희 사무총장(이하 동일): 아시아바둑연맹은 아시아권의 한국 포함 14개 국가가 회원으로 있어요. 아시아 바둑발전에 관한 협의와 바둑 대회 등을 통해, 상호 정보 교환과 상호 교류 및 화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아시아 바둑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국제적인 활동이 많으신데 최근 어떤 일을 진행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올해 2023년 7월에 홍콩에서 열린 ‘4대양 배 홍콩 국제 대학생 바둑대회(Four Seas Cup Hongkong International University Student Weiqi Competition)’에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학생들을 인솔해서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8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 38회 청소년 바둑 챔피언십(38th World Youth Go Championship)’에 초등학생과 중학생 대표를 인솔했지요. Q. 김향희 사무총장님께선 의욕적이고 활동적이시기도 한데, 그 기반에는 언어 능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한국인이시니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중국어에도 능통하신데, 그 비결도 궁금합니다.  A. 제가 외국어를 배운 계기는 모두 바둑 때문이에요. 외국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대회에 참여하다보니 외국인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어져서 영어를 배웠고, 또 중국에 교류전을 다니다보니 중국어도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시작했지요. 목적이 뚜렷하니까 언어가 더 빨리 익혀졌던 것 같아요.  Q. 그래도 바둑 용어를 알기는 쉽지 않은데요.  A. 그건 고마운 인연이 있어요. 시드니 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셨던 고(故) 한상대 교수님께서  ‘바둑영어’ 교실을  여신 걸, 한 바둑 사이트에서 알게 되었고, 강좌에 참여해서 외국인 바둑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지요. 바둑을 통해  지금은 30여개국에 한 명 이상의 친구가 있어요. Q. 마치 바둑의 번외 역사를 듣는 것 같네요. 번외 질문이긴 한데, 김향희 사무총장님은 바둑을 어렸을 때부터 배우신 건가요?  A. 그렇지 않아요. 결혼 후 남편의 권유로 시작한 거라, 언어도 모두 그 이후에 습득한 거랍니다. 그때,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려고 TV를 켜면, 꼭 남편이 EBS바둑방송을 보려는 거예요. 그것으로 티격태격하다 보니, 남편이 ‘바둑도 재미있다. 한번 배워 보라’ 면서 ‘기초 바둑 첫걸음’이란 책을 주었죠. 그걸 보다가 , 2년 뒤 우연히 ‘부산일보’에서 ‘이색여성모임 참돌회’라는 기사를 보고, 그 모임에 가입하며 제대로 시작하게 된 것이죠.  Q. 그런데 지금은 바둑 고수잖아요? 도대체 비결이 뭔가요?  A. ‘한국여성바둑연맹’에 가입해서 같은 취미의 여성들과 만나 익히고, 또 바둑대회에 자주 참여하다 보면 실력이 늘게 돼요. 외국인 친구와 교류하고 싶어서 국제 대회에도 나가고, 국제 활동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 거죠.    Q.  바둑을 통해 친구도 사귀고 외국어도 배우고, 국제 활동까지. 각국 국제활동을 하시면서 바둑을 하는 바둑인들에 대해 느끼신 바가 있다면 공유해 주시겠어요? A. 재밌는 것은 세계 어디를 가나 바둑을 한 판만 두어도 평생 친구가 된다는 거예요. 그게 세계 어디든 말이에요. 바둑이 그만큼 강렬하게 서로를 끌어당기고 마음을 주고 받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아시아권 사람들은 누가 이기고 졌느냐, 승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바둑은 승부가 따라다니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해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한 판 한 판 얼마나 최선을 다해 두었느냐에 보다 초점을 둡니다. 그런 점에서 유럽 사람들의 태도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젠 AI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세계 사람들의 바둑 실력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AI가 사람을 능가하는 시대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 바둑의 승패에 연연하기보다 바둑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어떻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는 것이 의미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Q. 아시아권과 유럽권의 바둑에 대한 자세도 흥미롭네요. 앞으로도 활발히 바둑을 통한 국제교류를 주도해 주실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바둑교류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실까요? A. 올해 2023년 12월에 강원도 양양에서 ‘2023 아시아평화 학생바둑대회’가 열립니다. 이 대회에 5개국 이상의 국가 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해외 바둑협회 관계자들과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는 것이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학생바둑대회 후,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태국 국제 바둑 대회(Thailand International Go Tournament)’에 나갈 예정이에요.  또 아시아바둑연맹 회원국 중 아직 바둑 회원의 수가 적은 나라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나라에서 바둑 관련 세미나나 이벤트 행사 등을 개최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에요. 회원수도 많이 늘어나도록 돕고 싶고요.  앞으로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바둑으로 평생 친구가 되는 바둑인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인터뷰에 기꺼이 참여해주시고 좋은 말씀 해 주신 세 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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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후보자님들에게 전하는 말씀
선거운동을 위해 내걸었던 현수막을 자진해서 철거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쓰레기없는 선거운동을 원합니다! 안녕하세요. 지구를 지키는 배움터 원종준 공동대표입니다. 오늘은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일입니다. 이번 선거에 참여한 7명의 후보자님들, 모두 고생많으셨습니다. 그렇지만 후보자님들은 너무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셨습니다. 현수막만 생각해도 각 후보자들은 읍면동의 2배 이내로 현수막을 내걸 수 있습니다. 강서구에는 20개의 동이 있으니, 각 후보자들은 40개의 현수막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에서만 280개의 현수막이 쓰였을 것입니다. 이 추정치는 선거사무소에 게재되는 현수막 등은 제외한 수량입니다. 후보자님들은 이번 선거에서 배출된 280개의 현수막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셔야 합니다. 지구를 지키는 배움터는 지자체가 선거일후 현수막의 철거 업무를 온전히 떠맡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선거가 끝난 후 현수막은 공직선거법 제276조에 따라 후보자님들이 철거하셔야 합니다. 이는 권고사항이 아니라 위반할 경우 2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이 가능한 사항입니다. ※ 제276조(선거일후 선전물 등의 철거) 선거운동을 위하여 선전물이나 시설물을 첩부ㆍ게시 또는 설치한 자는 선거일후 지체없이 이를 철거하여야 한다. 그런데 작년 대선과 지선에 쓰인 대다수의 현수막들은 지자체가 철거하였습니다. 공직선거법의 '지체없이' 라는 조항이 명확하지 않아 이 문제를 공직선거 후보자들과 선거관리위원회가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수막 철거에 따른 행정력 낭비와 폐기물 처리는 지자체가 온전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환경 정책의 기본인 오염자 부담 원칙에 어긋납니다. 오염자 부담 원칙은 오염 행위에 따른 피해 복구 비용을 오염자가 부담하는 OECD 환경정책의 제1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쓰레기 종량제의 기본 원칙이기도 합니다. 공직 선거에 출마하신 후보자님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현수막을 사용하신 후보자님들은 현수막의 처리에도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더군다나 미철거된 선거 현수막으로 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불편을 초래한다면, 지역 주민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후보자님들의 다짐은 공허할 따름입니다. 지역 사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출마하셨다면 그동안 불편함을 감수했던 주민들을 위해 현수막의 처리에도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현수막 선거운동은 2050년 탄소중립 선언에 역행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의 '현수막의 온실가스 배출량 분석 자료'에 따르면 현수막 1장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6.28㎏ CO₂e(이산화탄소 환산량)입니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 사용된 현수막으로 인하여 약 1.75t CO₂e의 온실가스가 배출되었습니다. 국림산림과학원의 '주요 산림수종의 표준 탄소흡수량(ver. 1.2)'에 따르면 45년생 잣나무 124그루가 1년간 흡수해야 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입니다. 현수막 외에 벽보, 선거공보 등의 홍보물을 생각하면 실제 배출량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2050년 탄소중립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장기적으로 선거운동에 사용하는 홍보물을 점차 줄여야 합니다. 지구를 지키는 배움터 활동가들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후보자님들의 행보를 지켜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선거운동을 정착시키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행동할 것입니다. 이번 보궐선거에 출마하셨던 후보자님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지구를 지키는 배움터 2023.10.11
제로웨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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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2 - 이스라엘 수립 이후와 지금
캠페인즈팀 영상을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1 -분쟁의 역사와 기원’에서 이어집니다. 전쟁의 시작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과 국가 승인이 이루어지고 영국이 아랍 땅에서 물러나자 아랍 국가들은 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48년 5월 16일,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5개국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1차 중동전쟁이다. 초반에는 이스라엘이 전력면에서 밀렸지만 이스라엘이 20일 동안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지켜내자 그 다음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막강한 화력으로 중동국가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1949년까지 이어진 전쟁이 바로 1차 중동전쟁이다. 1차 중동전쟁을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56년에는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는 이유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1957년까지 이집트에 폭격을 가했다. 이것이 수에즈 전쟁, 또는 2차 중동전쟁이라고 한다. 아랍권에서는 이를 삼국침략이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 지역에 대한 폭격, 팔레스타인 내의 스파이를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벌어진 이스라엘의 학살은 아랍 사람들 사이에서 국수주의, 민족주의, 이슬람 극단주의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 때 미국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핵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영원히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서로 바다와 공중을 서로 봉쇄하면서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던 와중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시작으로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쿠웨이트 등에 기습 폭격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6월 10일까지 6일 동안 아랍인 2만 명을 죽였다. 이를 3차 중동전쟁이라고도 하고 6일 전쟁이라고도 한다. 3차 중동전쟁과 그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영토를 빼앗았는데 이집트에서도 이를 벼르고 있다가 1973년 10월, 유대교 명절 욤키푸르에 맞춰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를 4차 중동전쟁이라고 하고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짧은 기간에 소련은 이집트,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대리전 양상까지 만들어졌다. 결국 UN이 중재를 하면서 전쟁이 마무리되었는데 이스라엘도 이집트도 너무나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면 이 전쟁이 일어날 동안 팔레스타인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스라엘 국가 수립이 있기 전까지 팔레스타인 영토 안의 유대인 이주민과 비유대인 선주민 사이의 갈등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원래 팔레스타인 영토 안에서 유대인들이 살던 땅은 20% 미만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승인하면서 UN은 팔레스타인 땅의 반을 유대인에게 분할하는 결정을 내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던 곳에서 추방을 당하면서 불만과 품게 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때 예루살렘을 공동구역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었다. 유대인들은 UN의 결정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만들어 나갔다. 이런 와중에 중동전쟁이 벌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국과의 전쟁을 빌미로 삼아 팔레스타인 땅을 조금씩 잠식해 나갔다. 이스라엘 국가 수립부터 1차 중동 전쟁 시기에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난민이 되었는데 이를 나크바(대재앙)라 한다. 2023년 UN에서 처음으로 나크바의 날 행사를 진행했는데 이 때 미국은 UN 안에 반유대주의가 팽배하다며 참가를 거부했다.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이 점점 자신들의 거주지를 빼앗기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을 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며 이스라엘과 협상 혹은 투쟁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은 없음을 옛날부터 강경하게 밝혀왔고 강경함의 수위도 점점 심해졌다. 이스라엘의 강경함이 더욱 심해지자 팔레스타인 안에서도 온건한 방식이나 협상을 지지하는 입장은 점점 힘을 잃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끔은 같은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을 정도의- 폭력적인 방식의 독립 운동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 강경하고 폭력적인 방식을 택하는 악순환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해의식을 점점 더 키우면서 아직도 자신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지금의 사태 1 가뜩이나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이 코너에 몰려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에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 심해졌다. 조금 쉽게 그리고 거칠게 말하면 네타냐후는 반-노동 성향에 극단적인 종교/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예루살렘의 이슬람 사원에 폭도를 진압한다는 이유로 뜬금없이 무장경찰을 출동시킨다거나 팔레스타인이 홀로코스트에 관여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등의 행동으로 국내외에소 비난과 조롱을 받은 일도 많았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의 반-노동 성향이나 반-민주주의적 태도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 뻑하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잡겠다는 이유로 민간인 거주지역이나 병원, 학교 같은 곳에 폭격을 가하는 것도 문제다. 그가 보여주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이슬람 문화권 전체를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부패와 반-민주주의적 태도로 내부에도 적이 많은데 아랍 국가에 둘러쌓인 이스라엘에서 너무 주변국들을 신경쓰지 않는 태도도 이래저래 문제가 많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네타냐후는 반-팔레스타인과 ‘안보는 보수’ 이미지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023년 10월 7일 아침,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원래 모든 로켓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아이언 돔을 늘 자랑해 왔는데 이번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최소 2천 발 이상의 로켓이 발사되었다고 하는데 로켓 공격과 동시에 하마스는 트럭과 불도저, 패러글라이드까지 동원해서 가자지구 밖의 유대인 거주지로 밀고 들어왔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빼앗겼던 지역을 거의 다 탈환했다고 발표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중에서도 과격파에 속한다. 지금 이스라엘의 화력으로 하마스를 몰살시키지 못할 리는 없다. 그러나 전쟁이 전면전으로 가고 상황이 악화되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희생되면 이스라엘의 이미지가 악화될 것이다. 서방세계에 러브콜을 계속 보내는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이런 이미지가 생기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문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150명 정도의 포로를 잡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유 없이 구속, 구금된 팔레스타인 사람 5천 명과 포로 교환을 요구하고 있다. 네타냐후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니. 생각보다 하마스가 계획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는 점에서 전면적으로 붙었을 때 이스라엘이 생각만큼 빨리 끝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예측도이야기되고 있다. 또 하마스가 보여주는 태도를 보면 예전에 비해 팔레스타인 사람의 희생을 딱히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든다. 이스라엘이 막상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 죽이거나 하마스를 몰살시킨다고 해도 통신이나 전기, 가스는 커녕 수도조차 없어서 오염된 물로 생활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을 재건하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오랜기간 전쟁을 통해 가지게 된 군사강국, 정보강국의 이미지가 깨졌다는 것도 한 가지 기록할 만한 것이다. 아이언 돔과 모사드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군사강국 이미지와 네타냐후의 ‘안보는 보수’ 이미지가 재래식 로켓과 트럭에 의해 깨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만약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진압하고 사태를 진정시킨다고 해도 이전의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래저래 이스라엘 그리고 네타냐후에게는 안 좋은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예상 외로 이번 전쟁을 통해 첨단무기나 정보에만 의존해온 최근의 군사적 경향에 대한 반성이 각국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도 이 이야기가 나올까 두렵다.) 다른 나라들의 태도 1 미국에서는 유대인 셀럽들을 중심으로 해서 팔레스타인을 비난하는 말을 쏟아내는 분위기인데 미국 외의 지역에서는 이런 미국 셀럽들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강한 것 같다. 미국 정부에서는 일단 무기는 지원하지만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부분은 조금 더 지켜봐야 될 것 같다. 미국 국내의 정치, 경제 사정이 지금 썩 좋지도 않거니와 미국과 이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걸 생각하면 미국도 지금의 사태가 썩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참전을 할 경우, 혹은 미국의 무기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학살할 경우, 아랍 여러 국가들이 대놓고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해 반대 행동 같은 것은 안 하겠지만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 확대되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결코 좋은 일도 아니고 미국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이래저래 실리적으로 그리 좋은 결정이 아닐 게 분명하지만 사람일은 또 모르는 것이니.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여러 국가들의 경우, 팔레스타인 편을 든다고는 예전부터 말해왔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는 별로 참견을 안 하는 분위기다. 만약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니 팔레스타인을 돕겠다고 했다면 애초에 문제가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석유를 비롯한 자원의 가격이 계속 불안정했기 때문에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경제 살리기, 미래 경제 계획에 집중하는 분위기이고, 딱히 다른 나라 문제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하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이니 갑자기 제5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들 이상할 게 있겠냐 싶을 수도 있고, 수니파니 시아파니 이야기하며 옛 이슬람 이야기까지 꺼내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랍 여러 국가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경제 살리기, 미래 계획 세우기에 몰두하고 있고, 숙적이라고 하는 이집토도 오랜 시간을 두고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하고 있는 지금, 하마스의 군사행동을 아랍 국가들이 과연 반길까 싶은 느낌이 든다. 미국도, 사우디 아라비아도, 이집트도, 이란도, 지금의 사태를 썩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 입장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미국-이스라엘을 두고 전세계가 찬반으로 갈려 진영이 만들어지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인도주의라는 원칙을 천명하고, 비록 하마스가 먼저 공격해서 벌어진 사태이긴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동안 겪어온 차별과 억압을 이야기한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외교관계가 비정하다고는 하지만 의외로 원칙을 명확히 세우고 그것을 계속 고수하면 그것이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정세 파악과 기민한 대처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외교는 원칙이나 중요하게 지키는 가치가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이제 와서 가치를 따지기가 뭣하다면 전쟁에 대한 입장표명이라도 좀 천천히 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한국 외교부는 이미 팔레스타인에 대한 규탄 입장을 밝혔다(민중의소리.2023.10.08.). 2 최근 한국에서 새로 국방부 장관이 된 신원식은 힘에 의한 평화를 운운하고 있다. 압도적인 힘을 가져야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초강대국 미국도 온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데 한국이 어떻게 압도적인 힘을 가진다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애초에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이번 이스라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평화는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삼국지 같은 걸 좀 끊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합법적인 시위, 비폭력 투쟁 같은 것들이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이 자란 도련님들이나 할 생각이다. 협상 기회조차 박탈당한 약자에게 평화적인 비폭력 투쟁은 사치일 수 있다. 너무 과격하고 잔인한 방식이라는 말은 할 수 있어도 하마스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친 이스라엘 세력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 유아들을 참수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릴 동안 우리가 외면해온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들, 지난 10년 동안 사망한 2천 명 넘는 팔레스타인의 유아들은 무엇이 되는가? 2천 년 전에 자기 조상들이 살았다는 이유로 원래 살던 사람을 추방하고 죽이는 것을 외면해온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을까? 처절한 슬픔을 뒷전에 두고 방식이 잔인하고 과격하니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얼마나 알량한가! 협상을 거부당한 후 모든 것을 차단당하고 포위당해 생존 조차 겨우 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평화적인 방식을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온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 동안 왜 이스라엘에는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는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미국과 유럽 백인들이 중재해줘야만 평화로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투쟁 자체를 비난하거나 섣부른 양비론을 들이미는 태도는 배격해야 한다. (버니 샌더스의 트위터. 나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의 이스라엘에 대한 끔찍한 공격을 절대적으로 비난합니다. 이러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양측의 무고한 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끝나야 합니다. -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참 속 편한 소리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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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1 -분쟁의 역사와 기원
캠페인즈팀 영상을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사진출처 BBC코리아.2023.10.08.) 고대 역사 1 한국에서 고대는 늘 숭배의 대상이거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중간이 없고 극단적인 평가를 계속 오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구약성서 또한 그러하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성서의 내용을 극단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대한 반감으로 구약성서 자체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다. 구약성서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하여 그 후손인 요셉 시절부터 이집트에 가서 살다가 노예가 되고 또 탈출을 하고 광야에서 떠돌다가 정착해서 살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고고학적인 근거는 없으므로 이를 덮어놓고 믿는 것도 문제겠으나, 고고학적인 근거가 없거나 희박하다고 해서 고대의 문헌을 조롱거리로 삼는 태도도 사실 썩 좋은 태도는 아니다. 어차피 고대에 대한 자료는 한정적이고 우리는 그 부족함 안에서 이 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신화는 일종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탈과 이집트에서의 탈출에 대해 지금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 학자는 아무도 없고, 이집트 문명과의 큰 충돌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도로 발전한 이집트 문명이 서아시아 땅,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때의 충격이 그만큼 강렬했다고 해석하는 게 옳을 것이다. 12사사가 다스리던 시대를 지나(사사기) 사울 왕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연맹 정치 시대를 지나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왕조가 있고, 이후에 이스라엘 왕조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왕국으로 분열된다. 일종의 남북국 시대인데 고고학적으로 실존이 확인되는 것은 이때부터다. 이후에 바빌론 제국이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해 ‘예후드’라는 이름으로 편입했고(예레미야, 에스겔), 그 다음은 페르시아 왕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그 다음에는 알렉산더 대왕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화가 이 지역을 오래 지배했는데 그 동안 이 지역은 코엘레 시리아라 불렸다.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후계자를 명확히 지목하지 않고 ‘가장 강한 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알렉산더 대왕의 영토는 셋으로 분열된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코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가 제국을 나눠가졌는데 이 중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린 것은 셀레우코스 제국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이 약화, 분열되자 유대인들도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그 대표가 하슈모나이 왕국이다. 마카베오 가문이 주도한 독립운동이라서 마카베오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시대의 기록인 <마카베오서>는 개신교에서는 성서에 포함을 시키지 않고, 가톨릭에서는 성서에 포함을 시킨다. 그 다음은 로마가 이곳을 점령한다. 이 때의 나라 이름을 헤로데 왕국, 왕을 헤롯 왕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이름만 왕이지 식민지의 현지인 총독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신약성서의 배경 -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승천 - 이 바로 이 시대다. 유대인들은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에게 통치받는 것을 매우 기분 나쁜 일로 받아들였고 크고 작은 독립 운동을 벌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유대인들은 마지막에 신이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믿었다. 예루살렘의 성소에 로마 군인들이 들어갔을 때 유대인들은 산이나 나무, 성벽에 올라가 이제 저들이 신의 벼락을 맞고 죽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로마 군인들이 성소 안의 유물을 싹싹 긁어서 여유롭게 나오자 유대인들은 신이 자신들을 버렸다며 통곡을 했다. 이 이후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원후 100년 정도까지 유대인들의 역사다. 2 유대인들은 가깝게는 유럽에서부터 멀게는 중국까지 진출해서 살았는데 송나라의 수도 개봉부에도 유대인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청나라 때에도 외모는 중국인의 외모가 되었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1907년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개봉부 유대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유대인은 혈통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개념이기도 해서 유대교를 믿으면 유대인으로 친다. 이를 두고 유대인들이 특이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유라시아 중앙부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사고방식이다. 유라시아의 양 끝에 사는 동북아인들과 서유럽인들이 유독 고대부터 혈통을 강조해왔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유대인을 살던 지역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동부~중부 유럽에 걸쳐 살던 유대인을 아슈케나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갈)에 살던 유대인을 스파라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걸쳐 살던 유대인을 미즈라힘이라고 하는데, 전통과 예법이 거의 똑같기 때문에 스파라딤과 미즈라힘을 합쳐서 스파라딤이라고 퉁쳐서 부르기도 한다. 현대 유대인의 대부분은 아슈케나짐이다. 생물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아슈케나짐은 유대인 부계혈통에 동부, 중부 유럽에 살던 여러 민족의 모계가 합쳐져서 이어져오는 유대인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유명한 유대인들-알버트 아인슈타인, 프란츠 카프카,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등-이 아슈케나짐이다. 3 로마 시대 이후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탄압을 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이듯이 유대인은 고리대금업과 탐욕으로 상징되는 존재들이었지만 사실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가 강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중세 시대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가 근대로 넘어와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격의 혐오로 바뀌면서 1800년대 이후 동유럽, 중부 유럽 각지에서는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박해하는 여러 사회적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헤프헤프 폭동(Hep-Hep-Krawalle)이라 부른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자유주의 열풍이 반격을 당하며 유럽 전역의 내셔널리즘과 권위주의가 고조되었는데 그 여파로 피해를 본 집단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인 것이다. 독일부터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지방 전역에서 이 헤프헤프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 중에는 국가나 공공기관이 주도한 것도 많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도 많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을 떠나 언제는 독일로, 또 언제는 헝가리로, 또 언제는 우크라이나로 계속 옮겨다니며 살게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 대해 어떤 평론가들은 마조히즘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카프카의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이유 모를 불안과 공포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카프카의 극성스럽고 변덕스러운 부친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헤프헤프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카프카가 어렸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두들겨맞거나 집이나 점포가 방화범죄를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대인 박해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프랑스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의 필체가 간첩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사건으로 프랑스 전체가 반으로 갈려 싸우게 되었는데,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도 자신들의 억압을 폭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갈등의 기원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만의 정치적 결사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이 먼 옛날 살았다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우리만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유대민족주의를 시온주의, 시오니즘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Mt.Zion)에서 유래했는데 예루살렘의 상징 같은 것이다. 많은 경우 시나 노래에서 시온산은 핍박받는 이들이 돌아갈 곳을 상징한다. 1970~80년대를 풍미한 흑인 댄스 음악 그룹으로 우리에겐 <징기스칸>이나 <원웨이티켓>으로 유명한 보니엠(BoneyM)의 노래 중에 <바빌론 강(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복음성가로 불려온 시온산의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노래다. By the rivers of Babylon, 바빌론 강가에 there we sat down 우린 앉아 있었어 Yeah, we wept, 우린 울었어 when we remembered Zion 시온산을 떠올릴 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사회주의자 중에 모세 헤스(Moshe Hess, 1812~1875)라는 사람이 있었다. 모세 헤스의 사상을 노동시온주의라고 한다. 모세 헤스는 사회적 평등이 필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인 전제 위에서 사회주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 맑스나 맑시스트들은 그를 추상적이라고 비판했다.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도 헤스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그는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이 유럽인과 동화될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유대인은 자신의 민족성을 부정함으로써 다른 민족의 경멸을 불러왔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인종과 민족간의 투쟁의 역사이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860). 모세 헤스는 유대교는 위대한 신앙 재흥운동을 통해 부활해야 하며 그 어떤 유럽 철학/사상의 결합, 영합은 있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를 시온주의의 시작이라고 평가한다. 시온주의는 드레퓌스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자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가 처음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외국에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1897년 제1차 시오니즘 회의를 열고 이 회의를 헤르츨이 주재했기 때문에 지금도 헤르츨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1917년, 밸푸어 선언이 나왔다.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영국의 유대인 대표인 월터 로스차일드(Walter Rothschild, 1868~1937)에게 보낸 짧은 편지로 사실은 선언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처음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공인의 약속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1917년 11월 2일 로츠차일드 경, 폐하의 정부를 대표하여 내각에 제출되고 승인된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선언을 전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폐하께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국민의 집을 설립하는 것을 지지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팔레스타인 내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약속이 있기 전인 1915~1916년,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 1862~1949)이 아랍의 지방 호족 중 한 명인 후세인 빈 알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오스만제국이 붕괴되어도 그 지역 영토들의 자치독립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영국은 유대인들과도 아랍인들과도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밸푸어 선언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팔레스타인 이주를 시작했다. 갑자기 유대인들이 밀고 들어와서 땅을 사들이고 선주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론 아랍인들까지 이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스리슬쩍 이 문제에 발을 빼면서 알아서들 하시라는 식으로 모르쇠로 일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랍 땅에서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무력충돌까지 벌어졌을 때,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대혼란이 끝난 후, 미국과 서유럽 각국은 유대인들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게 된다. 1948년 5월 14일의 일이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기원하며 2 - 이스라엘 수립 이후와 지금‘으로 이어집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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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
참사, 이 단어를 국어사전에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나온다. 참사 : 비참하고 끔찍한 일 참사 : 비참하게 죽음 풀이하면 비참하고 끔찍한 일로 인한 인명피해와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최근 10년 들어 국민들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참사가 있다. 2014년 4월 16일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 2022년 10월 29일에 발생한 이태원 참사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304명의 사람이 죽었다. 299명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5명의 어른들이었다. 어른들 중에는 학생들을 끝까지 구하려다 빠져나오지 못한 비정규직 교사분들까지 있다. 이태원 참사에서는 총 158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그 중에는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명단 공개 논란이 있었지만, 유족의 동의를 받아 명단이 공개된 바 있다. 참사 유족들은 지난 9월에 길에서 두 번째 명절을 보냈다. 한편, 참사의 책임 소재는 아직도 다투고 있다.  또다른 참사를 막기 위해선, 왜 그 참사가 일어났는지, 막을 순 없었는지, 예방할 순 없었는지, 뼈가 으스러지는 그 참사를 겪고난 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뤄야 한다. 떠나간 사람들을 되살아나게 할 수 없다면, 그와 비슷한 또다른 참사가 나타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구조적 문제를 찾고, 그 구조를 바꾸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역할은 언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태원 참사 당시를 보면, 언론의 태도는 실망스럽다. 언론은 참사 원인을 개인에게 찾았다. 개인이 참사의 원인이라는 듯이. 토끼남을 찾아라, 정치 공방으로 어어지는 참사와 잇고 있는 언론 이태원 참사 당시, 토끼띠를 한 남자를 찾아라라는 기사가 많았다. 또끼띠를 한 사람이 앞 사람을 밀치자, 사람들이 줄줄이 쓰러졌고 그로 인해 참사가 발생했다는 이야기했다. 당사자는 마녀사냥이라고 말했고, 사고 당시 합정역에 있었다고 반박했다. 그 근거로 자세한 교통비 지출 내역까지 공개했다. 토끼띠 남으로 지목된 당사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와 억울하다는 입장을 말한 바 있다. 문제 원인이 어느 한 개인에게 ‘만' 있다면, 그 개인을 쫓고 추궁하고, 책임 소재를 묻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대개의 참사는 어느 한 개인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쌓여온 원인이 있고,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참사의 트리거가 어느 개인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원인이 그에게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참사 당시 언론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 분석하고, 알려서 책임자의 책임을 말해야 하는 이유다. 참사 당시 책임이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 많이 동원됐어도 일어났을 참사"라며 책임을 회피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압사 한 것을 두고 “압사? 뇌진탕 그런 게 있었겠지” “여기서 이렇게 많이 죽었다고?” 라며 참사를 추모하는 모습도,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려는 책임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을 했다. 이러한 막말은 정치 공방으로 이어졌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참사 영업이라는 말이 나오는 사이, 유족들 고통은 더더욱 심해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막을 순 없었는지, 대비책은 없는지를 다루는 기사는 찾기가 어렵다. 언론 역시 이런 정치 공방만을 주목해서 다루고 있다. 참사 당시에도 오히려 해외 언론들이 이에 대한 분석과 원인을 말하는 모양새였다. 해외가 더 분석하고, 알리는 참사 워싱턴 포스트는 이태원 참사 이후, 이 일이 왜 발생했는지 다루는 기사를 냈다. 해당 기사에서는 이태원 참사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시간대 별로 참사 상황을 분석했다. 또한, 당시 투입된 경찰 인력에 대한 내용과 함께 경찰의 수직적 구조로 인해 적절한 예방책을 마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한국 경찰의 수직적 조직 문화 때문에 적절한 예방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의 경찰 교육 전문가들은 법적 근거나 매뉴얼에 기반한 예방 의무가 불확실한 사건의 경우 일선 경찰이 나설 동기가 적다고 말했다. 또한 매뉴얼에 없는 내용을 예방 목적으로 제시하기 힘든 경직된 구조라고 꼬집었다.군중 전문가인 마틴 아모스 영국 노섬브리아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군중 압착이 이미 진행된 상황에서는, 사망자 규모를 줄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적었을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분석했다. “정부는 이런 일이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게 예방하는 데 최선을 다했어야 합니다.” 뉴욕타임스 역시 기사를 다뤘었다. 기사는 이대로 두면 사람이 죽을 거라는 경고가 몇 년 전부터 있었으며, 당시 용산경찰서가 서울경찰청에 인력 증원 요청을 했으나 집해로 인해 충원이 어렵다고 거절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용산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시위 집회가 있었는데, 집회 참석 인원은 4,700명이었다. 반면, 1마일 떨어진 이태원에는 13만 명이 모였다.  137명의 경찰 배치 인력 중 마약 전담 형사가 52명이었다는 내용, 그리고 단 한 명의 마약범도 잡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나마 마약 전담 형사들은 10시 48분에 구조에 투입됐고, 11시 1분에 대통령에게 참사 소식이 전해지고, 11시 20분에 행안부가 재난문자를 발송, 11시 40분에 집회 투입 경찰 인원이 현장에 투입됐다는 자세한 이야기를 내놨다. 무엇보다 주목 된 건 이들의 분석이 어느 국내 기사에서도 보지 못한 내용을 다뤘다는 점과 충분히 막을 수 있던 참사라는 것을 지목했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사고를 인도는 이렇게 다뤘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을 때, 인도 역시 이태원 참사를 다뤘다. 하지만, 더 주목해야 할 건 그 다음날 인도에서 발생한 사고다. 이태원 참사 하루 뒤인 10월 30일, 인도 구자라뜨 주 모르비(Morbi) 다리가 붕괴됐고, 이로 인해 140명 이상이 사망했다. 기사의 영상을 보면, 한 사람이 다리를 흔드는 걸 볼 수 있다. 그 뒤 다리가 무너진다. 연합뉴스는 해당 영상의 썸네일을 “한 청년이 몸을 흔들자 벌어지는 끔찍한 사고"라고 짓고 보도했다. 어느 한 사람이 몸을 흔든다고 해서 다리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부실한 다리였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발생한 참사였다. 참사의 원인을 개인에게 몰아가려는 ‘마녀사냥'이 제대로 보이는 썸네일이다. 우리나라 언론이 참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인도 언론은 어떨까? 그들도 참사를 한 개인에게 몰아가는 마냐사냥을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원인 분석을 하고, 해당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무는 방향으로 기사를 썼다. 기사에 따르면, 무너진 다리는 1877년에 지어졌고, 2022년에 7개월 간 다리 보수공사를 했다. 하지만, 안전 우려가 있어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데 주의가 필요했다.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일어나 결국 참사가 일어났고, 책임자로 지목된 담당 회사 Oreva는 그 책임을 인정했다. 이러한 책임 인정까지 인도 언론은 어째서 보수공사 한 다리가 무너지게 됐는지, 부실 공사는 없었는지, 40년 간 책임을 맡았던 Oreva와 다리가 있던 구자르뜨 주에서 장기 집권하던 BJP 정부와 거래가 있었던 건 아닌지 계속해서 보도했다. 원인을 개인에게 찾기 보다, 구조적인 진상 규명과 구조적 문제 파악에 초점을 맞춘 보도였다. 정치적 이슈화도, 개인의 마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과 시민의 역할은 언론이 원인을 분석하고, 구조적 문제를 찾아 지적해서 바뀐다고 해도 또다른 참사가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다. 어쩌면, 아니 반드시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차피 발생할 것이라며 안일하게 대응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대비하고 예방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 마녀사냥과 정치적 이슈로 몰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참사 원인을 규명하고 예방할 것인가. 진짜 언론이라면 나는 후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사와 재난을 다루는 언론이 부디, 다시는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진상 규명과 원인 분석, 문제 파악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 이태원 참사가 곧 있으면 1년을 맞이한다. 1년을 돌아보고 참사 이후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어떻게 바꼈는지, 다시 비슷한 상황에서도 동일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지, 언론은 그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시민의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론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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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국제교류 시리즈2] 세 여성들, 바둑 국제교류에 앞장서다(1)
<더 글로리>에서 당당하게 바둑을 두는 송혜교가 멋있었다면, 여기 출중한 실력에 여성 바둑계 뿐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몽골 등 전 세계를 누비며 바둑교류에 힘쓰는 여성들이 있다.  <한국여성바둑연맹> 이광순 회장은 전국 지부를 방문 후원하고 몽골, 일본, 대만 등 여러 국가와 교류를 통해 여성들이 더 많이 바둑을 접하고 사랑하도록 돕는다. <대만바둑교육발전협회> 장샤오인 사무총장은 대만과 한국을 오가며 또 유럽 등 전 세계를 다니며 바둑교류를 이끌고 있다. <아시아바둑연맹> 김향희 사무총장은 아시아권을 대표하여 여러 국가들과 또 유럽 및 아메리카 등 다양한 나라에서 바둑을 전파하고 있다.  바둑 국제교류 시리즈 두 번째와 세 번째 편은, 바둑의 국제교류를 이끄는 세 명의 여성들을 조명해 보았다.  <한국여성바둑연맹> 이광순 회장 Q. 백아인(이하 동일): 안녕하세요, 이광순 회장님.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알게 되는 분들을 위해 <한국여성바둑연맹>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이광순 회장 (이하 동일) : <한국여성바둑연맹>(이하 ‘연맹’) 은 “소통과 공감의 중심!”이라는 캐치프라이즈로 전국 32개 지부회원들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1974년 전신인 ‘한국여성기우회’로 발족했으니, 올해로 벌써  50년이 되고, 저는 제 33회 회장 이광순입니다.  Q. 연맹이 50년이나 된다니 역사가 꽤 오래되었군요. 어린이들은 바둑학원에 가고, 남자들은 기원 등 배울 수 있는 창구가 많은데, 여성들은 그렇진 못하잖아요.  A. 맞아요. 여성분들이 편하게 모여서 함께 배우고, 서로 친교도 쌓고, 리그전으로 실력도 쌓을 수 있는 공간이 흔치 않죠. 그래서 <한국여성바둑연맹>이 그런 쉼터가 되고 자기 계발, 혹은 취미를 공유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일환으로 ‘연맹’에서 각종 바둑대회, 교류전, 명사초청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바둑을 배우거나 바둑을 두고 싶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회원이 되어 강좌도 듣고 각종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지요. Q. 굉장히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네요. 생각해 보면 여성들이 바둑을 접하게 되는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회장님도 아마추어 바둑계 실력자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바둑을 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처음에는 아들이 7살 때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활동으로 바둑을 배워왔는데, 아이와 함께 대국을 해 줄 사람이 없어서 배우게 됐어요. 아이한테 바둑에 대한 흥미를 주는 겸해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제 취미가 되었고, 지금은 이렇게 연맹을 위해 일하고 있네요. Q. 아드님은 그럼 아직도 바둑을 즐기고 있나요?  A. 아들은 지금은 바둑을 배우지 않아요. 게다가 저한테 2점 접바둑을 두니까, 저보다 하수지요. (웃음) 바둑과 더 연이 이어진 건 저라고 할 수 있겠네요.  Q. (웃음) 아드님보다 더 성장하신 거네요. 상당한 고수신 거 같은데, 바둑을 따로 배우진 않으셨나요?  A. 바둑을 잘하고 싶어서 명지대 바둑학과 최고위과정에 다녔답니다. 그때 초지회(初志會)라는 바둑모임에서 스승이셨던 양상국 프로9단이 명지대 최고위과정이 있다고 더 공부해 보라고 추천해 주셨어요. 덕분에 바둑계 전반적인 사회생활과 인격형성에 도움을 받았어요.  그 기회가 없었다면 저도 연맹에서 활발히 활동하지 못했겠죠. 감사한 부분입니다.  Q. 명지대 최고위과정이 지금 활동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근데, 한국 뿐 아니라, 국제적인 활동도 기획 진행하셔서 놀랐어요. 작년 몽골에서 여성 아마추어 국제교류전을 치루었는데 그 진행과정 등을 알고 싶어요.  A.  <몽골국제바둑대축제>였죠. 작년 2022년 8월19일부터 24일까지 5박6일간 몽골 훈누캠프에서 회원 82명과 몽골현지인, 또 교민들 등 교류전을 하는 행사였어요.  바둑사의 레전드이신 조훈현 국수님도 오시고,  ‘몽골 바둑협회 회장’ ‘퉁갈락’을 명예회원으로 영입하기도 했고요. 또 우리 회원들은 직접 몽골인들과 대국을 했습니다. 바둑으로 대국을 한번 하면 평생친구가 되기 마련이죠.  Q. 대국을 한번 하면 평생친구가 된다고 하는 말씀이 크게 공감이 가네요. 그때 본 한국인과 몽골인들의 바둑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요.   A. 언어와 문화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지만, 바둑에 대한 열정도와 집념은 매우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실력이 좋은 어린이들도 참가해서 몽골 바둑의 미래가 밝다고 느꼈습니다. 몽골에서도 실력 향상을 위해 바둑 전문인들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의 바둑인들이 몽골에서 바둑으로 교류도 하고 교육 혹은 대회를 열어도 좋을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활동도 궁금한데요. 연맹에서 앞으로 진행할 국내 혹은 국제 교류를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올해 남은 기간 동안에도 ‘강릉난설헌배’, ‘섬섬여수 대축제’ 등 굵직한 행사가 기다리고 있어요. 작년엔 몽골이었다면 이젠 대만, 태국, 일본, 중국 등 세계 각국의 여성 바둑인들과 교류하고 서로 문화를 접하며 이해의 통로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바둑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A. 제 삶을 안정되게 보살펴주는 인생의 동반자예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하지요. 또 바둑의 전략과 전술이 실생활에도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무슨 일이 생길 때도 당황하지 않고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실수하지 않고 최선의 수를 찾으려고 하지요.  <대만바둑교육발전협회> 장샤오인(張曉茵) 사무총장  Q. 백아인(이하 동일) : 안녕하세요. 장샤오인 사무총장님, 활동이 굉장히 폭넓고 활발하신데, 일단 자기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A. 장샤오인 사무총장(이하 동일) : 안녕하세요. <대만바둑교육발전협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장샤오인입니다. 한국 친구들은 장효인이라고 불러요.  Q. 현재 사무총장으로 계신 <대만바둑교육발전협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가요? A. 주된 업무는 바둑 교육을 확산시키고, 바둑 선생님을 양성하거나, 바둑 교육 연구 강좌 개설, 국제 교류 활동 등을 진행해요. 작년부터 지금까지 20여 회 바둑 선생님 연구회를 개최했고, 200여 명의 선생님들이 참여했어요. 바둑 선생님들이 서로 교류하고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거죠. Q.  대만 바둑 교육을 위해 바둑 선생님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게 해 주는 협회라고 볼 수 있겠네요. 국제 교류 활동은 어떤 게 있을까요?  A. 대만과 중국 본토, 한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미국, 유럽 등을 포함한 활동이에요. 대만 학생들이 해외로 나가서 국제적인 시야를 확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각국의 바둑 친구들이 대만에 오는 것을 기꺼이 환영합니다.  Q. 장샤오인 사무총장님도 아마추어 바둑 고수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바둑을 접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A. 7살 때 친오빠인 장화이이(張懷一; 대만 프로3단)와 함께 바둑을 배우기 시작해, 11살 때 아마 1단이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바둑을 계속 놓지 않았죠. 2000년에는 제1회 대만 여자 바둑 오픈전 7위를 했고, 2001년에 제1회 대만 여자 바둑 초청전에 초대되었어요. 2002년에 아마 5단이 되면서 바둑교육 확산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2016년에는 중국의 기성 녜웨이핑(聶衛平) 9단의 문하생이 됐고요. 2021년에는 한국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바둑학과 강사로 재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바둑이 저를 기른 셈이 되었지요.  Q. 한국어도 능통하시고 한국과의 인연의 끈이 진한 것 같아요. 혹시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으실까요?   A. 처음 해외에 나온 게 한국이었어요. 어렸을 때 1992년 엄마 손에 이끌려 오빠와 한국에 와서 우쑹성(吳淞笙오송생) 9단에게 바둑을 배웠죠.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2014년, 2015년, 2016년에는 대만 대표단을 이끌고 한국에 와서 ‘국수산맥배 청소년 바둑제’와 ‘한중일대만 대학생 바둑대회’에 참가했어요. 명지대학교 바둑학과와도 교류가 빈번해서 2015년, 2016년, 2019년에는 남치형 교수, 김진환 교수, 정수현 교수를 초대해서, 우리 협회에서 주최한 바둑 국제 학술 연구회와 학생 바둑 단체전에 참여하도록 했어요. 2021년 3월에는 한국 명지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여성바둑연맹> 명예회원이 되었죠.  Q. 그런 깊고 오래된 인연이 있었네요. 장샤오인 사무총장님은 많은 국제활동도 하고 계신데, 최근 활동 중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나요? A. 올해 2023년 5월, <대만바둑교육발전협회> 장쟈오펀(張昭焚) 회장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게 최근 일 중 가장 기억에 남아요. 먼저 신안 바둑대회에 참가하고, 이세돌 바둑 기념관을 구경했지요.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충암 바둑 도장, 한국 기원과 한종진 바둑 도장도 방문하여 교류를 다졌습니다.  Q. 이 교류의 목적이나 의의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나요?  A. 함께 온 대만의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 많은 것을 배우고, 바둑 세계에 대해 눈을 크게 뜨게 되었어요. 이전에는 대만과 한국의 교류가 주로 프로 기사 대회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번 방문단은 대만과 한국의 아마추어 바둑 교류를 증진시켰다는 것이 의미있었습니다. 학생들과 아마추어 바둑애호가들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거죠. 또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서울특별시 바둑 협회와 친선 교류 협정을 맺었어요. 앞으로도 양국 교류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좋은 교류 플랫폼을 구축했다고 봅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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