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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주기, 공감과 연대의 세상을 꿈꾸며
10년 전, 그 날의 나는?   2014년 4월 군대를 전역하니 23살이었습니다. 8월에 학교를 복학해도 됐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부모부터 주위에서는 전부 1년 늦게 학교를 들어가는 게 아주 큰 일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면 다양한 경험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휴학을 했습니다. 무작정 신문배달, 편의점, 택배, 공장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음악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드럼과 작곡을 배우면서 행복했습니다. 첫 사회 생활이라 힘들기도 했지만, 다시 오지 않을 젊은 시절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14. 4. 16일 그날도 아침일찍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누우며 자려고 하는 순간 버스 TV에서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제 삶 살아가기도 바빴던 저에게는 세월호 참사의 사건이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사고가 일어났구나’정도였습니다. 이후에 TV와 언론 보도에 사망자와 유가족들의 모습과 진상규명을 외치는 모습이 계속 나와 그때 조금 심각성을 느꼈습니다. ‘아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하고 인식은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슬플지,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아픔이 얼마나 큰지는 애석하게도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조차도 제 것,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시대가 그런 거 일수도 있지만, 세상이 점점 자기 일이 아니면 큰 관심이 없는 개인주의화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때 조금이라도 유가족들의 아픔을 공감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 참사 피해자가 과연 나였으면 어땠을까?’라는 마음이 그때는 왜 들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서 노란 리본을 메든, 후원금을 전달하든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30대가 되어서 어느 한 계기는 아니지만, 점점 주변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아픈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으로 성장해서 다행이고 나름 뿌듯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기를   세월호 참사 가족 중 한 딸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님을 인터뷰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딸의 영정 사진을 보며 딸을 기억하고 우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많이 슬펐습니다. 부모에겐 자식이 세상의 전부 일텐데, 한 순간에 딸을 잃어버린 슬픔이 얼마나 클지 쉽게 가늠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치의 예고도 없이 떠나버린 딸이 야속하기도 하고 그리울 것도 같은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공감되어 한편으로 많이 슬프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우리 삶에는 아직도 여러 곳에서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하는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가나 정부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나 피해자들의 보상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혐오와 갖은 욕설로 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전부였던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아픔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이 그들을 위해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일 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보며 20,30대를 살아가는 저로서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떠나버린 아이들도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고 이루고 싶은 꿈이 많았을까요. 세월호 10주기를 맞이하여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는 안전망과 피해자 보상, 진상규명에 대해 다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아픔과 슬픔이 나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의 일로 생각하며 도와주고 위로해야 합니다.     공감과 연대로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여러 장점도 있지만, 너무 빠르게 성장한 부작용이 점점 우리 사회에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경제적 빈부격차, 혐오, 성차별, 저출산, 일자리 문제, 인간성 상실, 정신적 질환, 전쟁과 평화, 환경 문제 등등 여러 문제가 많이 나타나 고통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 되기 위해서는 정부나 국가 뿐만 아니라 우리 시민들이 함께 연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미 일어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위로하며 정부와 국가에 의견을 내고 호소해야 합니다. 일어난 모든 사건은 남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건입니다. 함께 고민하고 저항하며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우리 자신의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연대와 공감의 정신이 어느때 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10주년, 다시 한 번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떠올리며 글을 마칩니다. 하루 빨리 유가족들의 슬픔이 사라지고 마음 한 켠에 여유와 행복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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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인연은 이어져 돌아온다- hyun "잠수부 자격증 있는 장병. 지휘통제실로.“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지휘통제실에서 나온 방송을 잊지 못한다. 2014년 4월 16일, 육군 훈련소 가입소 기간 사흘 째 되던 날인 오전 6시. “지휘통제실에서 전파합니다. 잠수 자격증이 있는 장병이 있으면 지휘통제실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육군에서 숱한 자격증들 중에 왜 하필 잠수부 자격증을 찾는걸까. 그 의문은 훈련소 연대로 넘어갈 때 알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맞이한 첫 주말 종교행사 날이었다.  연무대 교회는 1주차 훈련병부터 5주차 훈련병 모두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 1주차에 막 접어든 나는 4~5주차 전부터 온 선임(?) 훈련병들과 함께 있었다.  선임 훈련병에게 있어 우린 괴롭히기 좋은 대상이었다. ‘우리는 갈게! 너희들 각개!((훈련소 수료 후 자대로 가니까 너네들은 남아서 각개 전투(훈련소 5주차 마지막 주에 실시하는 훈련)나 해라는 의미)’ 라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연무대 교회의 꽃 ‘실로암’ 찬양에 맞춰 이들은 ‘각개전투!’ 외치며 자극하기 바빴다. 이 곳만의 환영방식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게 있던 찰나 군종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 훈련병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다.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웃고 떠드는거야!”  무슨 시기이기에 이토록 그는 분개한걸까. 요 며칠 동안 꼬리표처럼 붙은 잠수부 자격증의 정체에 혼란스러워질 때 즈음 그는 스크린으로 영상을 띄우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산에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했는데 웃을 때가 아니다.“  세상과 단절 된 지 1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접한 소식은 충격이었다. 스크린에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하여 400여 명이 실종되었고, 잠수부들은 실종자 수색에 들어갔다. 기자는 눈시울 붉히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고 택시와 버스기사들은 유가족들을 진도까지 실어나르는 장면이 스쳤다. 입대한 지 불과 이틀 사이에 배에 탄 470여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목사는 “제발 0.0001% 라도 기적이 있다면 이들이 전원 구조되길 바랍니다.” 라며 애통한 심경으로 기도와 함께  “부디,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오라.” 는 말로 예배를 마쳤다.  안산을 포함한 대한민국은 애도의 분위기였다. 자대배치받고 간 교회에서도 기도제목 말미가 세월호 무사구조로 맺곤 했다. 하지만 사회와 군대 사이 해소할 수 없는 단절감이 존재했다. 군대는 ‘정치적 중립' 이라는 이유로 애도가 들어설 틈도 없거니와 그런 이야기도 꺼낼 수도 없었다. 바쁜 일과도 한몫했다. 선•후임 심지어 나조차 당장 주어진 일상과 휴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세월호는 관심에서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이윤에 눈 먼 기업과 컨트롤 타워의 부재가 빚은 참사" 그러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날이면 혼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답답함만 커졌던 것 같다. ‘배가 왜 침몰했고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님은 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나?’  원망의 마음도 따라서 커졌다. 파편처럼 끊긴 기억은 휴가 때 읽은 책 한 권으로 선명하게 그려나갈 수 있었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2015) 중 세월호의 최대 화물 적재량은 2500t. 객실 증설을 위해 개조하여 선박의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복원성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윤에 눈 멀어 생명을 버린기업과 비상사태에 부재한 국가가 빚은 참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도 침몰 사실에 충격만 받았다. 반복되는 일상이 물밀듯 밀려오니 또 다시 세월호 생각은 진전되지 않고 가라앉았다. 자대에 정착한 지 1년이 3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후임이 들어왔다. 그의 고향은 안산. 세월호에 탔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던 그와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으나, 고향에서 전해진 슬픔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멀게만 느껴진 안산이 가까이 스민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할 때 안됐나? 안산 출신 후임과 대학 동기의 죽음을 통해 슬픔은 외면할 수 없어"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세월호의 아픔은 그치지 않았다. 인양해야할 진실은 곳곳에 남아있다. 더러는 이제 그만하라며 날선 비난과 피로감을 호소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죽음을 결코 외면해야할까. 한 사람의 죽음은 가능성이 소멸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그와 관계된 세계도 줄줄이 무너지는 비극이다. 그 고통이 국가의 외면으로, 이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는 타자화로 이어진다면, 세상은 지옥이 되지 않을까. 나와 무관하다 여겼던 것들이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체감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2023년 12월 토요일 아침. 대학교 동기의 비보를 접했다. 대학원 학비를 벌려고 여름방학 중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창호 작업 중 6층 높이에서 추락사한(이 또한 안전 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채 빚어진 참사였다) 대학교 동기의 소식을 그와 인연도, 연고도 없던 지인에게서 접할 줄은 몰랐다. 슬픔은 결코 나와 먼 일이 아님을 절감했다. 죽음은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인연의 고리는 어떻게든 닿아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동기의 죽음을 접한 이후 변화가 필요했다. 살아가면서 인연은 어떻게 맞닿을 지 아무도 모르기에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했다. 내가 만난 누군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칠 인연이 될 지도 모르니까.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은 연결되고 이들과 함께 시대를 관통하기에.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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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사회적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는 이들에게
돌무덤이 있는 풍경 나의 풍경에는 몇 개의 돌무덤이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돌무덤,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돌무덤, 빵 공장 노동자의 돌무덤,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돌무덤이다. 거대한 바위와 크고 작은 돌들로 지어진 무덤들은 문득 기억처럼 그곳에 있다. 익숙한 이 기억에 가끔 가까이 다가가  매만지고 바라보며 현재 내가 서있는 풍경을 돌아본다.  돌아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구태여 선언할 필요도 없이 세월호 참사는 이미 일상의 작은 조각이다. 나를 형성하는 요소이기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돌무덤이 지어지던 역사 속, 나는 단원고등학교 희생자들과 같은 고등학생이자 목격자였다. 세월호 참사 목도의 경험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정치화하지 말라’는 정치인들의 말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내가 속한 세대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청년들이 놀다가, 일하다가 참사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이 이토록 도처에 있던가. 참사가 유난히 각인되는 이유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아무리 예방을 강조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참사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교통사고’에 비유를 들면서. 그러나 이 죽음에는 ‘안전’의 개념을 허술하게 다룬 구조적 배경이 깔려있고, 죽음의 대상이 스스로의 안전을 ‘구조’ 속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전을 책임져야 했던, 책임질 수 있었던 인물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 어떤 참사도 책임자들에게 처벌과 사죄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구조 속 최고 책임주체인  정치세력은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10년째 말이다.  정치인들의 방어기제에 무색하게, 이번 세월호 참사 10주기의 6일 전인 4월 10일, 22대 국회 총선이 있다. KBS는 4월 18일에 방영 예정이었던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를 “총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방영할 수 없다”라고 제작진에 통보했다. 참사의 최고 책임자인 국가는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하면 참사를 시민들의 의식 속에서 소거하고, 본질을 이동시킬 수 있는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 전략 중 하나가 ‘정치화하지 말라’는 단언이다. 참사 책임자에 대한 비판적 발언에 앞서 ‘내가 사회적 비극을 나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인가’하는 검열하도록 만든다.  ‘정치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맥락에서 ‘정치화’는 ‘단순 사고’로 치부할 수 있는 사건을 특정 정당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정치화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단순 사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 이 ‘사고’가 사회적 참사인지,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풍경에는 돌무덤이 없다. 혹은 지워버리거나 보지 않으려 회피하는 것이다. 회피와 부인은 ‘권력’이다.  회피하는 권력은 응당 두려움에 떨기를 그러나 돌무덤들이 있는 풍경 속의 우리는 ‘살아내고’ 있다. 무덤, 희생자, 유가족과 동거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생존 해내기’다. 살아내는 것은 정치 그 자체다. 책임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개인들이 각자도생으로 살아내는데, 어찌 이것을 정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사의 문제 해결을 위한 대표적 요구인 진상규명과 후속 조치로서의 책임자 처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정치며, 즉 살아내는 방식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3년 6개월가량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냈다. 조사기간이 충분치 않아서인지, 조사에 있어서 비협조와 방해 요인이 많아서인지 석연치 않은 결론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년이 흐른 지금까지 말이다.  언제 어디서든 세월호는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참사를 기억하는 마음은 굳은 돌이 되어 무덤에 쌓인다. 10년이 부족하다면, 20년 30년이라도 얼마고 돌을 쌓으리라. 돌무덤 풍경 속 나는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서 이야기할 것이다. 참사를 ‘정치화’하지 말라고 말하는 이들이여, 돌무덤을 쌓는 우리를 응당 두려워하라. 또한 나의 풍경을 공유하는 이들아, 우리 부디 함께 생존해 내자.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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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10년 전보다 덜 무능하고, 덜 비겁한 사회인가요?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그 사이 세월호는 흐릿해졌다. 교과서로 배운 사람도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억이 흐려지고, 모른다고 슬퍼할 건 아니다. 나무랄 일도 아니다. 기억하고 나무라는 사람도 세상의 모든 참사를 기억하고 아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나 역시도 내가 어릴 적에 발생한 참사는 잘 모른다. 성수 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모두 교과서로 배웠지만, 그걸로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교과서에 담겼다고 사회가 그걸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두 번의 붕괴는 건설사의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고는 2022년 광주에서 발생했다. HDC 산업 개발이 만든 아파트가 건설 도중 부서진 것이다. 건설사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만약, 성수 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원인을 제대로 기억하고, 예방하고, 내재화했다면 광주의 사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모두 교과서에 기록해야 하는 참사다. 그 참사를 계속해서 후대에 알려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어디서 알려줘야 할까, 뭐라고 알려줘야 할까.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 세대의 무능함을 답습하지 않게 하려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성현(가명)은 세월호 참사 당시 8살이었다. 올해 18살이 됐다. 세월호 참사 때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같은 나이다. 세월호 참사를 모르는 성현을 만나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성현은 인터뷰 도중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요? 제가 살아갈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요?” — Q. 인터뷰에 참여한 이유가 궁금하다 해줄 수 있느냐고 하셔서 참여했다. (웃음).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다. 대화하고 싶었다. 부모님 말고, 학교 선생님 말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하고 싶었다. 그게 다다. Q. 인터뷰 주제가 편안한 주제는 아니다. 안다. 세월호 아닌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300명이 죽은 참사가 편안해서도 안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 사회에 있던 가장 큰 참사 중 하나가 아닌가. Q. 세월호를 묻기 전에, 어떤 참사들을 알고 있나 이태원 참사가 내게 가장 가깝고, 알고 있는 참사다. 가장 최근이기도 하고, 유튜브와 SNS에 참사 현장이 많이 공유됐었다. 직접 이태원에서 본 건 아니지만, 영상 속에서나마 그 비극이 느껴졌다. 한동안 그 잔상이 떠다니기도 했다. 참사를 직접 겪으면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이 안 된다. Q. 사실 세월호 참사 자체를 안다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안다기보단 배웠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릴 적에 참사를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한다. 2014년에 8살, 지금은 18살이다. 8살 때 뭘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유튜브나 SNS나 발달한 게 많으니까, 알고리즘에 걸리면 계속 나와서 알긴 하는데. 그렇다고 깊이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Q. 당시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 내에 안전교육이 강화된 것으로 안다. 실제로도 그랬는지. 강화된 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그게 원래 것이다. 세월호 참사 전 사람들이라야 변화를 알겠지만, 우리는 그게 원본이었다. 그래서 말하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중고등학교를 떠올려 보면 안전교육을 한 것 같다. 비디오 시청이나 야외 교육 등을. 그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 내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전학을 많이 다녀서 기억이 왜곡된 걸 수도 있다. Q. 학교 내 안전 의식은 많이 늘어났을 것 같은데, 사회적으로 그런 의식이 증가했었다. 세월호 참사로 떠난 학생들이 과연 안전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건가 묻고 싶다. 내가 알기엔 세월호 학생들은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정말 가만히 있었던 걸로 안다. 말을 너무 잘 들었다고 들었다. 학생들을 죽을 상황에 가둬둔 건 어른들 아닌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었던 학생들의 문을 두드린 건, 어른들이 아니라 바닷물이었다. 정확히 모르지만, 그랬을 것 같다. 진짜 사람이 문을 열었을 땐, 이미 몇 년이 지난 뒤였을 것이고. 이게 과연 학생들이 안전교육이 안 되어 있어서 발생한 건가? 오히려 어른들이 안전교육을 안 받아서 생긴 사고 아닌가 묻고  싶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은 건 어른들 아닌가. Q. 세월호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했다. 그때마다 내 생각을 많이 물어보셨다. 이태원 참사 이후 더욱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전까지는 부모님도 말씀을 안 하셨다. 이태원 참사 현장을 보고 함께 돌아온 후, 부모님께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알고 보니 두 분다 세월호 관련 봉사활동도 하셨다고 그랬다. 그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Q. 부모님은 세월호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 뉴스에서 하는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다. 예를 들어 어디서 발생했다, 언제 발생했다, 몇 명이 사망했다 등 이미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때 본인들이 느낀 게 무엇인지를 많이 말씀하셨다.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고, 이런 걸 느꼈어. 아빠는 이런 게 비참했고, 이런 점에 분노했었어. 그래서 이런 걸 했어.” 라고. 그 끝에 항상 내 생각을 물어보셨다. “부모의 감정과 생각을 알 필요도 없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 네 생각이 뭔지 고민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Q. 부모님께서 생각 자체를 강조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께서 강조하셨던 게 있었다. 세월호 학생들이 어른들 말을 너무 잘 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과연 내 자식에게 말 잘 들으라고 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고 부모인가를 대뇌였다고 하셨다. 자식들에게 부모의 말 들어야지 라고 말했을 때, 내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필요한 말인지, 옳은 말인지 생각하고 말했었나 돌아봤다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그 말을 학생들이 얼마나 신뢰했을지 생각해보면 너무 안타깝다고 하셨다. 대부분의 어른이 “부모 말 잘 들어야지,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지”라고 하는데, 그 말이 학생들을 배 안에 가둬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셨다. 또 그 안에서 자신의 구명조끼를 도리어 나눠주며,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데 헌신한 선생님들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무능한 어른의 비겁함 때문에 구할 수 있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떠났다고 하셨다. 세상엔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너무 많은데,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능인지 비겁함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설령 부모의 생각이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네 생각이 뭔지 고민하고, 부모든 선생이든 그 누구든 간에 “제 생각은 다르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게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 때문에, 또 다른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셨다. Q. 부모님 말씀에 동의하는지 세상 모든 어른을 만나본 게 아니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부모님, 친척들이 전부다. 그래서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세월호 당시 어른들이 무능하고 비겁했다는 건 알겠다. 나도 곧 어른이다. 몇 년 지나면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갈 거다. 그때 나는 당시의 어른들보다 덜 무능하고, 덜 비겁했으면 좋겠다. Q. 세월호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학생들이 있었고, 외면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학생들 잘못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 10년이 지났다. 10년 동안 사회가 그대로라면, 그건 정말 어른들이 무능한 거로 생각한다. 묻고 싶다. 아직도 무능하고 비겁한 어른들이 많나? 내가 살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 Q.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다가온다. 어른들은 기억하자고 한다. 학생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떻게 다가오는지.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기억하자는 말이 뭘 기억하자는 건가 싶다. 그냥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자는 건지, 아니면 다른 게 있는 건지. 세월호 사고가 있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싶었다. 우리 집이 제사를 지낸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다. 제삿날에 제사상에 절은 하지만,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른다.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다. 그런 제사가 내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부모님한테만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런 말을 하니까 부모님도 “네 말이 맞다.”라고 하셨다. 개인적으로 어른들의 구호나 외침이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기억하자, 기억하자, 근데 뭘? 이라고 느낀다. 물론 이건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기억을 알기엔, 내가 그 참사의 슬픔과 분위기를 전혀 느껴보지 못했다. 제사 이야기를 다시 말하면, 부모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이 너무나도 애틋하고, 돌아가셨을 때 분명 슬펐겠지만, 아무 기억이 없는 내게는 사실 와 닿지 않는다. 그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서 부모님이 계신다 정도지. 그 외에는 사실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분명 슬픈 일이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누구의 문제다라기 보다는, 그냥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되는 현상 같다. Q. 진로는 정했는지 고민이다. 하고 싶은 게 많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정할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공부가 너무 싫다. (웃음) 공부 안 해도 원하는 걸 할 수는 없는 건가 싶다. 왜 모든 걸 공부로만 정하는지 모르겠다. — 인터뷰가 끝나고 성현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성현은 족발이라고 말했다. 족발이랑 매운 족발, 막국수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알겠다고 하니, 성현은 동생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말했고, 30분 정도가 지나자 성현의 동생이 왔다. 셋이 함께 근처 족발집에 가서 족발을 먹었다. 후식으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에 대한 구호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도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를 모른다. 참사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유족들의 슬픔을 느껴보지 못했다. 지금 내게 성수 대교를 기억하자, 삼풍백화점을 기억하자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뭘 기억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보다는 성현의 부모님이 그랬듯, 스스로 생각하라고 말해야 하는 것 같다. 참사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을 분명히 알려주되, 거기서 끝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기억하자는 말을 잠시 떠올려봤다. 그 말을 듣고 무엇을 기억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참사 유족들의 감정인지, 참사 자체인지, 참사 원인인지, 참사 때 느낀 감정과 생각을 토대로 한 다짐인지, 그 생각들로 내린 결론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았다. 성현의 생각에 세월호 참사는 “무능한 어른들의 비겁함.”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조금 더 나아졌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입을 막는 자(者)들이 있는 게 떠올랐다. 성현의 말이 계속 곱씹어진다. “세상에 아직도 비겁하고 무능한 어른들이 많은가요? 제가 살 사회가 그런 사회인가요?”.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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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10번의 4월, 앞으로의 기억
4월 16일의 기억 여러분은 그동안 지나온 9번의 4월 16일을 어떤 날로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가슴 아픈 사고가 뉴스에 나오던 날로, 제주도에 가족이 도착해야 했던 날로 기억하고 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요. 저는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안산에서 생일을 맞아 케이크를 앞에 두고 초를 불고 있었고, 아빠는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보고 계셨으며, 엄마는 초를 끈 저에게 박수를 치고 계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이후, 이사 오기 전까지 제 생일마다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 가는 날이면 꼭 노란리본 현수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여러분은 ‘슈톨퍼스타인(Stolpersteine)'을 알고 계신가요? 독일의 설치작가이자 행위예술가인 군터 뎀니히가 지난 1993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예술 프로젝트인데, 유럽의 거리 곳곳에 동판으로 걸림돌을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슈톨퍼스타인은 ‘장애물, 걸림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지난해 기준으로 베를린 시내에만 7천여개를 설치했고,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우크라이나 등 유럽과 전 세계 20개국에 6만개가 넘는 동판을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희생자들이 생활하던 곳에 설치하여 일부러 ‘걸려 넘어지도록’ 하는 프로젝트로 동판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생년월일, 사망한 수용소를 표기하여 잠시 멈추고 바닥을 보며 그들을 기억 한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걸림돌 덕분에 역사를 되새기며 죽은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희생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의 기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추모를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이라고, 기억을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이라고 명시해 놓았습니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모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일상 속에서 떠올리는 것이겠습니다. 기억하겠다는 말 한마디, 거리에 걸리는 리본은 언론의 오보, 진상 규명과 같이 참사에 대한 사실과 남은 과제들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지만 정작 그 학생들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름이 모두 묶여 “죽은 학생들”로 불리는 순간, 그 이름은 그 안에서 녹아 사라지고, 우리가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 그 이름은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걸림돌에 걸린 것처럼 잠시 멈춰 이름들을 생각하며 추모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연속된 참사 세월호 참사 이후에 시스템을 보완했다고, 또 누군가는 참사를 막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며 어쩔 수 없다 얘기합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계속되는 크고 작은 참사는 결국 세월호 이후에도 우리 정부의 시스템과 대처가 미흡하고 부족했다는 것을 책임 넘기기에 급급한 정부 대신 얘기합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는 모두 정부와 지자체의 초기 대처 미흡으로 인해 피해가 커졌고, 후에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세월호는 정부에게 안전사회라는 질문을 던졌고, 대답하지 못한 채로 사람들이 죽었으며, 아직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10주기를 맞으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누군가는 거리에서, 누군가는 학교에서, 또 누군가는 일터에서 집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세월호뿐만 아니라 안타깝게 떠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간단히 메신저 프로필에 리본을 달아놓았을 수도 있고, 또 가방에 리본을 달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매주 집회에 참가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책가방에 리본을 달아놓고, 친구들에게 리본과 배지를 나눠주고, 휴대전화에도 스티커를 붙여놓으며 그 날을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세월호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월호보다는 환경을 위해 날마다 집회에 참여하러 서울로 올라가기 바빴습니다. 그러다 2023년 “923기후정의행진” 행사에서 시민합창단으로 참여하였을 때 지휘자님의 소개로 416합창단 기획공연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연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형언할 수는 없지만, 416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는 너무나도 따스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공연을 보며 훌쩍거리고, 울던 눈으로 소리치듯 노래 부르던 기억은 제 머리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기억입니다. 공연을 관람하다가 우리 합창단 차례가 오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일어서 무대로 나가던 때, 416합창단에게 준비한 노래, 차례에 나와 있지 않았던 〈잊지 않을께〉를 훌쩍이며 소리치듯 부를 때, 노래가 끝나고 자리로 들어오자 옆에 계시던 분의 감사인사를 들었을 때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동안 4월 16일에는 식탁 앞에서 케이크를 먹었지만, 이번에는 노래하려 합니다. 노란 리본을 달고 다시 한번 시민합창단에 서고자 합니다. 초등학교 때 했던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잊으라.” “이제 다 끝났으니 잊으라.”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억하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우리는 아직 배의 침몰 원인조차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실을 위해 싸웁니다. 우리는 책임을 위해 싸웁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싸웁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싸웁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위해 싸웁니다. 저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지는 세상이 올 때 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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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내 생일 4월 16일,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로 바뀐 결말 벌써 10년 전이다. 당시 대학생들은 직장인이 됐다. 벌서 선임, 대리, 과장을 단 사람도 있다. ‘무명(가명)’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학생은 불합리한 사회를 바꿔보겠다며 기자가 됐다.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한 글로 뾰족한 세상, 둥글게 깍아 보겠다 다짐했다. 그 다짐을 계속 다듬으며 어느새 선배 소리를 듣는 기자가 됐다. 소설을 좋아했던 무명은 자신이 읽은 소설을 각색해 자신만의 작품으로 만들곤 했다. 같은 배경의 주인공이 다른 사건을 마주치며 다른 결말을 맞게 했다. 이유를 묻자 “작가의 결말이 너무 후져보였다.”라며 “작품 주인공에겐 내가 생각한 사건과 결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무명의 노트는 단편소설로 채워졌다. 자연스레 소설가를 꿈꿨고, 국문학을 전공했다. 한글로 쓰인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명의 말로 “멍청한 생각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소설가를 꿈꿨던 대학생이, 세월호 참사 후 기자가 된 이야기다. 인생도 소설이라면, 무명에게 세월호는 예정된 결말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책 안 팔려서 전전긍긍하고, 이야기가 안 풀려 머리 뜯다가 탈모로 울 줄 알았다.”던 무명은 전혀 다른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내 주변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질문하는 즐거움은 기자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월호 참사로 삶의 경로를 바꾼, 무명과의 인터뷰다. Q. 본명을 말할 수 있을지 못 한다. (웃음). 나 기자다. 외부에 이름 내놓고 글 쓰는 사람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름보다 매체를 보겠지만. 내 이름 넣었다가, 혹시라도 선/후배가 보면 어쩌냐. 나인 거 알면 “이거 선배 아니예요? 이거 너 아니냐?”라고 물어볼텐데. 창피하다. 안 된다. 참아달라. (웃음) Q. 알겠다. 그럼 사진은 가능할지? 이름을 가리는데, 얼굴을 까라고? (웃음) 유재석이 유두래곤으로 나온다고, 유두래곤인 게 아니다. 비가 비룡으로 나온다고 비가 아닌 게 아니다. 이효리가 린다G로 나온다고 이효리가 아닌 게 아니다. 이름 바꿔도 가수 후배들은 뛰어와서 90도로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인사할 것이다. (웃음). 얼굴 나오면 난 진짜 끝장이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초등학교 동창도 알아볼 거다. “어? 걔다.” 이러면서. Q. 인터뷰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 아닌지? 그건 모르는 거다. 어느 매체에 올라가든 글은 확산된다. 인터넷 커뮤니티 글도 공유되지 않냐. 설령 그 커뮤니티 안에서 돌고 돈다고 해도, 공개된 글은 공유된다. 그 수가 많냐 적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게 발목을 안 잡으려면 좋은 글을 써야 하는 거고, 정신차리고 써야한다.  요즘 정치 뉴스를 봐라, 정치인들 공천하는데 10년 전에 SNS에 쓴 글 때문에 잘리지 않나. 과거 발언으로 잘리기도 하고. 이 인터뷰도 무시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름이랑 얼굴 안 내보내는 거다. (웃음). 그냥 무명이라고 하자. 이름없고, 얼굴없는 기자. Ⓒ한량 Q. 기자로서 요즘 가장 중대한 사안은 뭔가. 기자면 세상사에 궁금증이 기본 아닌가. 궁금해야 질문도 할 수 있는 거고. 그게 기본이면 난 기본이 안 됐다. (웃음). 일적으로는 출입처 사안이 가장 중요하다. 재미없는 사안들이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건, 요즘 기업들 주주총회 시즌이다. 관심있는 기업이 몇 군데 있어서 주총 결과를 보고 있다. 정부에서 벨류업 프로그램 내놓는다고 하는데, 실효성이 있을지도 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누가 후보가 되는지와 어떤 정책을 내놓는지 등이다. 그런데 서로 비방하는 모습밖에 없어서 보기가 싫다. 기사 쓰는 사람은 신났을 거다. 제목 달기 좋은 말을 정치인들이 쏟아 내니까. 의대 증원도 중요한 이슈고.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다가오는 내 생일이다. Q. 생일은 공개할 수 있는 정보인가? 그렇다. (웃음). 사실 제일 중요한 내용아닌가? 오늘 인터뷰에서? (웃음). 4월 16일, 내 생일이다. 그리고 세월호 10주기다. 벌써 10년이다. 시간이 빠르다. Q. 10년 전 생일에 뭘 했는지 기억하는지. 기억한다. 생일이라 신났었다. 학교도 안갔다. (웃음). 생일을 학교에서 보내기 싫었다. 저녁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그걸 기다리며 집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채널을 무심코 넘기는데, 채널마다 배가 누워있었다. 원래 뉴스를 잘 안봤는데, 유독 그날은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예능이 재미없어서 그랬을 거다. 넷플릭스도 없고, 유튜브도 활성화되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본 뉴스 자막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월호, 진도 팽목항 앞 바다에서 침몰 중' 무슨 말인가 싶어 뉴스를 계속 봤다.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배가 침몰하고 있다. 앞선 전원 구조는 오보다. 배 안에 사람들이 있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이 대다수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가다가 사고가 났다. 내 기억에 그날 모든 뉴스는 세월호로 도배됐다.  일면식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안산, 처음 들어본 단원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결국 친구들에게 연락해 약속을 취소했다.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Q.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모든 프로그램이 세월호 참사 고통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었다. 예능에서는 검은 옷에 노란 리본을 달며 무사 귀환을 바란다고 하기도 했고, 일부 예능은 정규 편성을 취소했었다. 생일의 연장선으로 답하면 “내가 즐거워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생일 약속도 취소 했었다. 친구들한테 들어보니 학교 교수님들도 수업 시간에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혹시나 ‘모르는 학생들이 있을까봐 알려준다’ 라면서. 또 질문처럼 예능 방송도 결방했었다. 당시 대학교 축제도 모두 취소하는 분위기였고, 기업들도 행사를 취소하거나, 규모를 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도 참사가 많았지만, 세월호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당시 이런 사회 분위기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Q.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 활동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참사 이후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런 목소리에 내 힘을 보태고 싶었다. 진상 규명을 위한 서명 운동에 서명해 달라고 해서 해주고, 노란 리본 제작이랑 나눔 봉사 활동을 하고, 기부하기도 했다. 대학교에서도 노란 리본을 만들어서 나눠주기도 하고, 직접 서명을 받기도 했다. 힘 없는 대학생이지만, 없는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당시 세월호 진실규명 활동에 후원 요청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자발적이었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부할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다. 진실규명 활동 후원 요청 글을 쓰고 학교 선/후배에게 돌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성과가 있었나? 큰 성과는 없었다. 여기서 성과란 실제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줄어들고, 유족의 외침과 바람이 이루어졌는가다. 이루어졌다면 내 활동도 성과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슬픔이 줄지도, 유족의 외침과 바람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 활동이라도 있었기에, 이정도까지 온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효과 자체는 미미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 자신에게는 변화가 있었다. 소설가를 접고, 기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Q. 기자가 돼야겠다 생각한 이유는 소설을 계속 쓰는데 상복이 없었다. 지원하는 문학상마다 떨어졌다. (웃음) 그때부터 “아, 내 글이 소설용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책 안 팔려서 전전긍긍하고, 이야기가 안 풀려 머리 뜯다가 탈모로 울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조차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웃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세월호 활동이 겹쳤다. 앞서 말한 후원 요청 글을 쓴 것이다. 소설을 쓰면 매번 보여드리는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때도 글을 보여드렸다. 피드백 좀 달라고. 그걸 보고 교수님이 “기자를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를 물으니, “넌 인간 감정 묘사로 설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실에 기반해 행간에 힘을 주고, 짧게 치고 가는 스타일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악필은 누구나 읽기 싫어 한다. 쓰는 사람도 읽기 싫어 한다. 명필이 읽기도 좋다. 명필을 쓸 줄 아는데, 왜 악필을 고집하냐. 손에 안 맞는 글 쓰지 말고, 손에 맞는 글을 써라.”라고 하셨다. Q. 갑자기 혼난 것 같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가? 애정이야 있었겠지만, 난 당시 기분 나빴다. “내 글이 그정도로 쓰레기라고?”. 그 말 듣고 화장실 가서 울었다. (웃음). 난 정말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네가 쓰면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거니까 쓰지 말라는 거 아니냐. (웃음). 진짜 분해서 울었다. 입상이라도 했으면, 반박이라도 하지.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말 분했다. 기자를 하라는 말과 함께, 세월호 글에도 피드백 주셨다. 글을 수정해서 선후배들에게 나눠줬다. 버려도 되는데, 읽어만 달라면서 줬다. 성과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 글을 보고 기부했다는 선후배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내 글이 성과를 낸 순간이었다. 내 글 때문인지, 내가 아는 사람이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바라던 일을 내 글로 할 수 있던 게 기뻤다. 그때부터 더 열심히 써서 나눠줬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자에 대한 생각이 피어난 것 같다. 내 글로 정말, 세상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슬픔을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내 글로 누군가가 슬퍼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불합리한 사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기자가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예정에 없던 사건과 변화였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내가 후원 요청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교수에게 찾아가서 피드백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수가 기자를 하라고도 안 했을 거고. 무엇보다 내 글로 무언가 변화가 만들어지는 경험을 못 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내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고, 내가 예정했던 삶을 바꿨다. Q. 기자가 돼서 그때 뜻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지 쉽지 않다. (웃음). 원래 세상에 쉬운 건 없다. 쓰고 싶은 것만 쓰려면 블로거를 해야 한다. 기자는 지면에 쓴다. 지면은 언론사 공간이지, 내 공간이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걸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수습 기자 때의 다짐은 늘 기억하고 있다. Q. 다짐이 뭐였는지? “모진 세상 연필깍이 삼아서, 뾰족한 글을 쓰겠다.”였다. 그렇게 글로 모진 부분을 하나씩 깍으며 둥글게 만들고 싶었다. 물론 연필은 늘 부러진다. 아마 계속 부러질거다. 그래도 부러지면 깎으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잘 못지 킬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일이 다가오면, 그때 다짐을 더욱 기억하자고 생각한다. Q. 생일이어서 물어보지만, 세월호 이후 생일을 맞이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나? 몇 년간은 생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생일보다는 세월호가 더 컸다. 생일보다는 누군가의 기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누군가의 생일은 항상 누군가의 기일이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상을 떠난 건, 세월호에 있던 사람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병원에서, 가정에서 사고로, 병으로, 혹은 스스로 눈을 감는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지금도 누군가는 병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언론에 나오지 않는 사고가 많다. 그 안에 다친 사람과 장애를 입는 사람도 많다. 그 모든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식이 태어나는 날 부모는 세상을 가진 것 같다고 느낀다고 한다. 그런 소중한 날이 죄책감으로 물들어선 안 된다. 유족도 그걸 바라진 않을 거다. 기뻐할 건 기뻐하고, 기억할 건 기억하면 된다. Q.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한다. 어떻게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사고 자체만 기억해선 안 된다. 우리에게 참사가 있었다, 그 참사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304명이다, 구조 과정에서도 순직한 분들이 있다, 참사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했다, 진도 팽목항에서 배가 좌초됐다, 이건 기억이 아니다. 사건 기록이지.  이걸 기억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머리에 있다고해서 기억이 되는 건 아니다. 참사로 기억해야 하는 건,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고, 왜 그런 감정이 들었고, 또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이 바뀌어야 사회가 바뀐다. 10주기에는 10년 전 내가 세월호 참사에서 느낀 게 무엇이고,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 돌아보고 그 감정과 다짐대로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세월호를 통해 기억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 질문으로 이번 생일은 뭘 할 건지 아직 계획은 없다. 파티를 하진 않을 거다. (웃음) 그래도 즐기면서 보낼 거다. 내 생일 4월 16일이 누군가에겐 슬픈 날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날이다. 내가 태어난 날이자, 지금의 내 모습이 있게 해 준 날이다. 아까 답변한 대로 기뻐할 건 기뻐해야 한다. 내 생일 4월 16일을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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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하나의 작은 기억이 큰 기적을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큰 흔적을 남겼다. 2014년 4월 15일 인천을 출발하여,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안전하고 질서있게 나갈 수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고 잠자코 기다리던 사람들, 특히 고등학생들. 반면 자신들만 살겠다고 무책임하게 배를 빠져나간 선장. 부모들과 가족들은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 배는 기울어지고, 304명이 조용히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언론은 모두 구조되었다고 했다가, 실종자가 많다고 했다가, 눈길 끌기 식의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은 사고 관련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진 10시 15분부터 중대본을 방문한 오후 5시15분까지 약 7시간 반동안 행적이 불문했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수학여행을 떠나던 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라 그 충격이 더 컸다. 세계적으로 SNS를 통해 비통함과 안타까움을 전하고, 사람들은 합동 분향소를 찾아가 분향하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국가는 어디 있는가?  세월호 참사가 내게 던진 질문은 ‘국가’였다. ‘국가’가 뭐지? 단순한 경제공동체? 이념공동체? 이날부터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단체’로 여겨졌다. 과거 경찰국가니, 복지국가니를 떠나,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내던지거나 방치하지 말아야 하는 게 국가가 아닐까. 이 추상적인 ‘국가’란 개념이 머릿속에서 부서지고 붙여지고 다시 분쇄되길 반복했다. ‘국가’란 세월호 참사에 뒤늦게 등장한 무심한 ‘대통령’ 일까.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고 저들끼리 빠져나간 선장과 선원 들이 ‘국가’였을까. 멀거니 바라만 보던 해경들이었을까.  우리는 더이상 책임자가 말하는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가만히 있다가 가만히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국가나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은 채, 제 목숨만 제 이익만 챙길 수 있다는 걸 겪은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은 액자 속의 아이들  내 기억 속에 한국은 집단 우울증 상태였다. 전체적 무기력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승객보다 제 목숨이 더 중요했던 무책임한 선장에 대한 허탈감, 바라만 보던 해경들과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있었을까 싶은 대통령 명령만 기다리던 머저리들. 그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합동 분향소에라도 가서 그 무력감을 서로 위로하는 일 뿐.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먼저 임시로 합동 분향소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을 가 중앙역에서 내렸다. 안산은 내게 제 2의 고향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약 10년간 지냈던 곳.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이 아직 살고 있었고, 사람 한 두 명만 건너면, 모두 희생자들과 연결되었다. 안산 중앙역에 내려서 ‘서울예대’의 마크가 그려진 빨간 대형버스를 탔던 기억이 난다. 학생 등하교를 하던 버스가 지금 분향소를 오가는 버스로 쓰이고 있다는 게 묘한 상징처럼 두통이 났다. 사람들은 침울한 얼굴로 검은 옷을 입고 국화를 들고 줄지어 버스에 올랐다. 죽음을 향해 가는 듯했다.  당도한 임시 합동분향소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 넓은 벽 가득 검은 액자들이 빽빽히 걸려 있었다. 모두 교복을 입은, 한결같이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숨이 턱 막혔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우리가 잃은 건 무엇이지? 단순한 목숨이 아니라, 이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였다.  그만해, 라는 폭력  우리가 충분히 희생자들을 위해 뭔가를 했던가. 수습도 제대로 안 되고, 업계 유착과 비리, 제대로 교육되지 않은 후진국형 사고. 밝혀지지 않은 대통령의 7시간. 기어코 생사가 확인되지도 유해가 수습되지도 못한 사람들. 학생들 뿐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 애쓰던 선생님들과 다른 사람들. 유족들의 통곡과 비통함.  그런 가운데, 어떤 이들은 유족들을 비웃고, 그만 좀 하라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더 큰 충격이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진실 규명을 위해 단식을 하자, 그 옆에서 그들을 조롱하며 짜장면을 먹던 기이한 사람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기억은, 진실에 대한 요구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기억은 없앨 수 없고, 특히 끔찍한 기억은, 해결책이, 수습이 완결되지 않는 한 잊혀질 수 없다. 아니, 잊혀져서도 안 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되새겨야 한다.  10년이 흘렀다. 10년 전 사진첩에서 발견한 노란 리본 이미지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그때 우리는 기적이 누구보다도 필요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 마음 아픈 이를 함께 위로하는 마음. 어쩌면 그때 이미 우리는 기적을 만날 수도 있었다. 10년 후에 우리가 찾는 것은 세월호에 대한 기억, 희생자들의 이야기 뿐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가져오는 “기적”을 아직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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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세월호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노란리본을 줍는게 고작이구나" 4월 16일이 또다시 찾아온다. 계절은 언제나 돌아오니 좋지만, 세월호는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매년 돌아오는 이 날과 그 날의 기억은 별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4월 16일은 몇 가지 감정과 장면을 떠올리게한다. 처음 감정은 분노였다. “뭐 저런 선장이 있나, 뭐 저런 언론이 있나, 뭐 이런 정부가 있나”. 그런 감정은 점점 수그러들었고, 이윽고는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끊임없이 방송되는 뉴스는 갇힌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끝내 입밖으로 내뱉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모든 관계 없는 장면에서 세월호가 보였다. 과거 정글의 법칙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배우 봉태규가 추위에 떠는 장면이 나왔다. 물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물이 너무 차가워 벌벌 떠는 장면이었다. 본 방송이었는지, 재방송이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재방송이었을 것이다. 연관도 없는 그 장면을 보고 “아 애들도 저렇게 추웠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추웠겠지, 떨었겠지, 무서워겠지. 물이 다리로 허리로 얼굴로 계속 차올랐을텐데, 물을 좋아하던 애도 있었을텐데 그 물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죽음이 다가오는 게 그렇게 눈으로 보였겠지, 밖으로 나간다면 누구한테 가장 먼저 가고 싶었을까, 뭐가 가장 먹고 싶었을까, 밖으로 나갔을 때 뭐가 혹은 누가 있기를 바랐을까, 얼마나 나가고 싶었을까.” 그런 생각들은 “나라면 저기서 뭘 할 수 있었을까?” 로 이어졌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로 끝났다. 실제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참 초라했다. 그 당시 읽은 어느 글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노란리본 나눔 부스에서 리본 나눔 봉사활동을 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서명 부탁한다는 요청에 내 이름과 싸인을 남겼다. 노란리본 나눔 봉사를 할 때다. 한 분이 내 리본을 받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 분 손에는 내가 준 노란리본과 1회용 플라스틱 컵이 들려있었다. 그 분은 쓰레기통에 1회용 플라스틱 컵을 버렸다. 그리고 내가 준 노란리본도 함께 버렸다. 원해서 버렸는지, 모르고 버렸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모르고 버렸다고 생각한다. 버릴려고 했으면, 애초에 받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당시 노란리본은 지하철 역 앞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마냥 받고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수로 버린 걸 안 뒤로 다시 돌아와 “실수로 버렸어요. 다시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쓰레기통을 뒤져 노란리본을 찾고 내 주머니에 넣었다. 일부러 버렸든, 모르고 버렸든 노란리본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싫었다. 봉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노란리본은 끊어져 있었다. 끊어진 걸 버릴까 하다가, 접착제를 가져와 붙였다. 그 리본은 내 방 서랍에 꽤 오랜 기간 보관되어 있다. 누군가는 봉사활동을 하고, 싸인 한 걸 보고 그것마저도 잘한 것이다 말할지도 모른다. 당시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겨우 이런 거구나 싶었다. 노란리본을 주고, 버려진 걸 줍고, 끊어진 걸 억지로 붙여서 보관하는 게 전부구나 싶었다. 이 생각에 나 자신이 참 초라했다.  이처럼 내게 세월호 참사는 분노로 시작해 무기력함과 초라함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내 기억도 조금 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요 기억(記憶)의 한자는 ‘記:기록할 기'에 ‘憶:생각할 억' 이다. 즉, 기억이란 기록하고 생각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세월호를 [함께 기억]하며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이 질문의 힌트를 세월호 유족의 말에서 얻었다. “2016년 4월 세월호 생존학생과 참사로 세상을 떠난 학생들의 형제자매가 증언을 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때 참사로 오빠를 잃은 한 여학생이 소극장에서 관객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저희 오빠가 죽은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꼭 용기를 내주세요."”* 세월호 참사로 오빠를 잃은 여학생의 말처럼, 세월호 참사 10주기에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기록하면서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선명한 기억보다 흐릿한 잉크가 낫다. 세월이 지나면 기억은 흐려지지만, 남아 있는 기록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계속 상기시켜 줄 것이다. 물론 기록이 행동을 담보하지 않는다. 항상 옳은 행동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옳음이 누군가에겐 그름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건 다르다. 무엇이 옳은지 안다면, 그것이 최소 내 행동의 잣대가 될 것이다. 그 잣대에 맞는 행동이 쌓인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에게 있어 옳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유족의 바람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게될 것이다. 옳은 일의 표현 방식에는 맞고, 틀리고가 없다. 나는 쓰기를 선택했다. 쓰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 어쩌면 내 가치관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니까 더욱 그런 것 같다. 내 생각과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한 사회가 됐다. 그렇다면, 나는 이번 기회에 용기를 내보자고 말하고 싶다. 써보자. 잘 쓸 필요 없다. 짧아도 된다. 글의 길고 짧음이 생각의 길고 짧음을 말할 수 없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가, 생각의 좋음과 나쁨을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함께 기억하며, 자신들을 돌아보면 좋겠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겨보면 좋겠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기록하고, 행동으로 옮겨보자고 다짐하는 계기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김승섭/ 난다/ 2022) p.13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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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해경 지휘부 무죄 확정, 도대체 책임은 누가 지나요?
지난 2일 세월호 참사 당시 초기 대응을 잘못해 구조에 실패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해경 지휘부들에게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9년 만의 일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래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쉬운 대응으로 인해 최악의 인재로 이어진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15일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청해진해운 소속)가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해 304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인 세월호 참사. 이 사고로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4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이 탑승해,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커서 더욱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사건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급격한 변침(變針, 선박 진행 방향을 변경)으로 인해 침몰이 시작되었는데, 구조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고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대처를 하지 못하고 대응시간 지연되었으며,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 해경의 소극적 구조, 정부의 뒷북 대처 등으로 인해 최악의 인재로 이어졌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4·16 세월호 참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밝혀진 것도 없고, 책임자도 없는 세월호 참사 참사 이후 지금까지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2014년 당시 검찰은 사고 원인, 구조 실패, 청해진해운 비리, 해운업계 비리와 관련해 총 399명을 입건하고 154명을 구속했습니다. 이 중 구조 실패와 관련해서는 진도VTS센터장, 현장에 출동한 123정장 등 17명을 입건하고 5명을 구속하는 데 그치면서 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최소화 하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5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1기 특조위)가 출범하였으나, 3년 6개월간의 활동 끝에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활동을 끝냈습니다. (조선일보,220610) 2020년 해경 지휘부 11명이 기소되었으나, 법원은 세 차례의 판단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로써 국가는 구조실패 책임을 사실성 떨쳐냈으며 지금까지 구조실패의 책임으로 인해 기소된 해경은 모두 12명이었으나, 2015년 징역 3년이 확정된 것은 당시 현장지휘관이었던 김경일 정장만 유일합니다. (한겨레, 231102) 이에대해 유가족 단체인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이날 대법원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묵념하고 "국가가 어떤 지시도 구조 계획도 세우지 않아 생명이 무고하게 희생되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선례를 사법부가 남기고 말았다"고 밝혔습니다. (연합뉴스, 231102) 책임 회피가 아닌, 책임지는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지난 2일 대법원 선고 이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울분도 많지만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마저 무너져 버렸는데요.  이미현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은 지난 2일 대법원 선고 직후에 "여전히 좁은 시각으로만 해석하고 면죄부를 주는 사법부와 행정부, 입법부 때문에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가 벌어진 것"이라며 "사법부는 법을 만들고 집행해온 이들의 잘못을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를 걷어찼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연합뉴스, 231102) 두 사건 모두 국가의 아쉬운 대처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점이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데요. 이태원 참사는 예상되는 상황에 대한 매뉴얼이나 안전요원 배치 등이 전혀 없었고, 사후 조치에 대해서도 중대본을 바로 설치하지 않았으며, 신고자가 많이 있었음에도 아쉬운 대처로 이어졌습니다. (광주일보, 231027) 오송 참사는 언론 보도를 통해 제방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인근 주민의 119 신고가 있었음에도 별다른 조치가 없었고, 112는 엉뚱한 곳에 출동했으며, 금강홍수통제소의 경보 발령과 교통 통제 통보에도 흥덕구청은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KBS뉴스, 230719) 국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 같은데, 국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비슷한 참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세월호 참사의 책임 규명에 대하여 오랜 기간 지켜본 유족들에게는 9년 전과 지금이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게 더욱 큰 상실감으로 다가올 것 것 같습니다. 도대체 유족들의 울분은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상황들에 대해서 국가는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고 진상 규명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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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해야 할 권리, 생명안전기본법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교통 시설을 이용하다가, 길을 걷다가, 일을 하다가, 친구를 만나다가, 수학 여행을 가다가, 갑자기 죽는다. 각종 통계와 재난참사 피해규모를 들여다보면 이는 더 자명해진다.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이는 하루에 6여명. 1년에 2000명이 넘는다. 이태원 참사에서 사망한 사람은 159명, 세월호참사에서 사망한 사람은 304명이다. 정부가 인정한 가습기 살균제참사로 사망한 사람은 1,825명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대구지하철화재참사, 삼풍백화점참사, 성수대교 붕괴참사, 씨랜드 참사 등 수많은 재난참사의 피해규모를 보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계속해서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사회에서 일상이 안전하다고 느끼며,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발생하는 산업재해와 계속해서 반복되는 재난참사에 무뎌지지 않는 것 또한 그렇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비관주의에 빠진다. 각자도생을 생각한다. 각종 산업재해와 재난참사로 인한 죽음에 무감각해진다.   이 참상을 넘어, 그 무엇보다도 생명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회를 꿈꾸며 시민사회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안전한 사회로 변화할 수 있도록, 법 제도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서 생명안전기본법에 대해 논의했다.   생명안전기본법은 사람의 생명과 신체가 함부로 손상되지 않고 안전하게 살 권리가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법적으로 명시하고 국가에게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음을 명확하게 하며, 이 안전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 지방자치단체, 기업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명시한 기본법이다. 이 법안에 따르면, 국가는 각종 정책 등을 수행할 때에 안전영향평가제도에 따라 해당 정책이 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여 그 결과를 중요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시민들이 재난과 사고의 예방 및 대처 방안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도록 시민 모임을 구성하고, 그 모임에 사고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며 시민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국가, 지방자치단체, 기업은 안전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여야 한다. 안전사고 발생 가능성을 은폐하지 못하게 하며, 모두가 위험에 대해 알 권리를 누려야 한다. 국가는 사고가 나기 전에 사고에 취약한 장애인, 노인, 환자, 어린이, 여성, 외국인 노동자 등의 안전약자에게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약자의 특성을 고려하여 별도의 안전 관련 정보 전달, 지원 대책, 대피 계획을 마련 하여야 한다. 만약 사고가 발생하면, 국가는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안전권을 침해당한 이들이 피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그리고 재발방지대책을 세우기 위해 구조적인 원인을 들여다보고 사고대응이 적절했는지를 따져보는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이 법안은 안전 관련 현행법과는 관점이 다르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재해 구호법 등등 안전 관련 현행법은 정부와 지자체가 재난 상황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법이다. 자연재해 발생시 이재민 보호와 지원 절차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법이기도 하다. 해당 현행법에는 사고 예방에 관한 부분, 안전에 대해 알 권리에 관한 부분, 국민의 안전할 권리에 관한 부분, 피해자의 권리에 관한 부분, 사고에 대한 독립적 조사에 관한 부분은 들어 있지 않다. 이제까지 산업재해 피해자들이 본인의 산업재해가 어떻게 왜 발생했는지 알고 싶다고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이유, 재난참사 피해자들이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해당 재난 참사 특별법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이유도 관련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안전기본법은 안전할 권리를 명시하며, 국민과 피해자를 권리의 주체로, 국가를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주체로 명확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이전 법과는 큰 차이가 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곧바로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안전기본법은 생명과 안전이 기본적인 권리이고 중요한 가치임을 법적으로 명확하게 하고 국가가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의 법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되기를,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생명을 존중하는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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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기꺼이 걸려 멈춰 설 수 있는 기억
*대체텍스트 있음 내 오른쪽 발등에는 ‘0416’이 새겨져 있다. 재작년 발등뼈 골절로 병원을 찾았다. 물리치료사가 치료기를 연결하다가 내 발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남겼다. “제가 안산에서 왔거든요.” 목정원 작가는 동시대인의 가장 적합한 정의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죽음에 대한 기억을 설명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물리치료사는 4개의 숫자만 보고도 ‘세월호’를 떠올렸고, 나 또한 안산을 듣고 동일한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다. 그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침몰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무도 배에 남은 304명의 안부는 알려주지 않았다. TV 속 세월호는 선박이 아닌 생명이었다. 생명이 물 속에 잠기고 있는 순간을 등교하면서 밥 먹으면서 잠에 들면서까지 목격했다. 시시각각 나오는 오보와 거짓정보에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울부짖는 유족의 곁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잔잔한 일상 속에서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소극적인 목격자, 딱 그만큼만 되고 싶었다. 진도로 가서 유족을 위로하고, 영정사진 앞에 좋아하던 간식을 건네며 함께 목격한 시민들에게 애도를 제안하는 그런 동시대인이 되고자 했을 뿐이었다. 팽목항의 매서운 파도에도 온기를 느끼던 몸은 광화문에 도착하자마자 매캐한 물에 젖어버렸다. 국화꽃은 경찰버스 바퀴에 짓밟혔다. 시민을 향한 편지는 내 손을 떠나자마자 거친 욕설과 함께 갈기갈기 찢겼다.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시절의 나는, 그저 사람들과 각자의 고통을 서로 수무하고 싶었다. 같이 기억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회는 괴상하리만큼 적극적으로 추모를 막아섰다.  2022년 10월 29일, 나는 평화로운 강릉 바다 앞이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밤바다를 마주한 채로 이태원 소식을 들었다. 정신없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정을 넘겨서까지 전부의 목소리를 확인한 후 복잡하고도 괴로운 안도를 느꼈다. 그제서야 내 앞의 바다가 다시 보였다.  곧바로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이는 지워진 기억을 의미했다. 잊혀지도록 강요받은 기억이 떠오르자 시간은 그 4월 16일로 되돌아갔다. 길 한복판에서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생명,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을 의심받는 남은 사람들, 치유하려는 움직임을 의심하는 사회, 감히 평화를 느낀 내게 몰려오는 자책감.  여전히 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늘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향으로 걷겠다며 '0416'을 새긴 내 발은 안산에 이어 이태원으로 향했다. 10.29 참사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쪽지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수없이 적혀있다. 참사가 늘어날 때마다 '우연히' 생존한 스스로에게 죄의 무게를 실어야만 했던 것이다.  충분한 애도를 망각하고 있었다. 사회는 추모의 방법이 최대한 간결하고 일상에 거슬리지 않게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사회적 참사의 추모란, 갑작스러운 상실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는 시선과 이 죽음들로부터 사회구조를 재해석하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서로의 동시대인이자 비극의 목격자인 우리는 '이 슬픔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 필수 교과목이 된 생존수영과 환승역마다 배치된 질서유지 전담 인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멈춤이 필요하다. 왜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되새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시 죄 없는 사과만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존경하는 친구가 내게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 프로젝트'에 대해 알려주었다. 슈톨퍼슈타인은 걸림돌을 뜻한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군터 뎀니히는 작은 황동판에 나치 희생자의 이름과 사망일을 새기고, 희생자들이 생활하던 유럽 길거리 곳곳에 설치했다. 이 걸림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바쁜 걸음을 방해하고, 평온한 일상에서 비극의 기억을 되살린다. 우리에게는 잠시 멈춰 서서 지난 참사를 되돌아 보는 충분한 추모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기꺼이 걸림돌에 걸릴 준비가 되었다.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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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참사 재발방지와 생명안전기본법
(사)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처장(단원고2-9 진윤희엄마)김순길 나는 왜 생명안전기본법을 제안했나? 우리는 10년 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반복되는 참사가 없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고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전국 곳곳에서 소중한 생명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국가만을 믿고 평범하게 살고 있던 나에게 세월호 참사로 우리 가족의 행복이었던딸 아이를 보낸 후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수학여행 잘 다녀오겠다고 웃으며 문 밖을 나섰던 아이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음이 되어 내 품에 안겨야만 했는지..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세월호 부모들은 분노와 울분에 몸부림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거리에 나섰고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활동해오면서 우리 피해 가족들은 수많은 혐오와 모독하는 발언들로 또 다시 2차 가해를 입었습니다. 특혜논란, 자식팔아먹는, 세금도둑, 정치집단, 가난한동네, 종북몰이 등으로 피해자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했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말들로 피해자 인권을 침해당해왔습니다. 정부는 생명존중의 가치를 우선으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고 피해자들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통 받은 피해자들이 더 이상 거리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설치하여 구조적인 원인을 들여다보고 참사에 대한 대응이 적절했는지를 조사해야 합니다. 또한, 그에 맞는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이 만든 ‘사단법인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가족협의회’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설립했고 가족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10여년 간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사회로 향하는 길은 아직 멀기만 한 것 같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그리고 길을 가다가 일상 생활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사회가 안전한 사회가 되는 길은 무엇이 있을까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고민했습니다. 또한, 죄를 짓고도 생명에 대한 무게만큼의 처벌이 아닌 법이 제대로 없다는 이유로 처벌에서 빠져나가는 자들을 무겁게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자고 많은 시간 노력했습니다. 우리 세월호 피해 가족들도 생명과 가치가 존중되는 법,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는 법인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해 시민동행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위험사회라는 것을 온 국민이 인식한 참사가 세월호 참사라는 것이 생명안전 기본법을 만드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정부의 대처 방안만 담고 있을 뿐 생명안전의 가치는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합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이 되어 우리가 겪은 참사를 누군가는 겪지 않기를 바라고 시민의 안전권과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며 재발방지를 위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누구나 안전한 일상에서 생활하고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안전기본법은 왜 필요한가? 생명안전 기본법은 시민 모두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재난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 사고가 나지 않도록 예방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 하고 수습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며 사고 원인과 대응의 문제점을 조사 개선하여 유사문제의 재발방지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태원참사 159명, 세월호참사 304명, 가습기살균제참사 1825명이 목숨을 잃었고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붕괴참사, 대구지하철화재참사,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등 대형재난도 계속 발생합니다. 이런 참사가 지속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안전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부와 공무원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참사는 운 나쁜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참사를 겪은 우리 모두가 확인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 이유로 지속되는 재난참사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한 법, 생명안전 기본법에는 안전권, 피해자의권리보장, 안전 약자 보호,독립적 조사 기구, 위험에 대해 알권리, 안전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권, 안전 영향 평가제도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저에게 생명안전기본법은 내 아이, 내 가족, 내 이웃, 우리 모두입니다. 너, 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이 반드시 국회를 통과해서 국민의 생명과안전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가 생명안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는 참혹한 현장을 온 국민은 목격했고, 국가의 부재를 확인한 유가족과 시민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를 향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쳤습니다. 우리 유가족과 시민들은 수많은 경찰병력에 에워싸이고 차벽에 막히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맞으며 싸워야 했습니다. 선량한 시민들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말도 안 되는 살인행위들이었고, 결국엔 물대포에 맞은 한분이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 했습니다. 이후의 정권이 바뀌면서 집회현장들에서 물대포와 캡사이신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국가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월호참사와 이태원참사, 오송지하차도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언제 어느 때든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전사고는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기후위기등 위험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 사회에서 안전한 사회,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로 가기위한 노력들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하는대로 재난 참사들을 지워버리고 참사들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방해하는 행위들을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재난참사를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재난 참사로 인한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위험과 안전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과 누구의 잘못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구조적인 원인에 주목하고 안전의 주체에 피해자와 시민들이 참여를 확장하는 노력들을 해야 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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