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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참사에 어울리는 저널리즘
“참사 당일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단 10분을 요구하고 싶어요.”   모 신문 편집국 내부에서 10·29 이태원 참사 관련 회고를 했을 때 나온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회부 사건팀 부팀장(vice·바이스)이 전했고, 이 말을 직접한 사람은 그의 후배 기자였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소속 기자들은 가장 먼저 현장에 뛰어드는 편집국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각 언론사에서 가장 연차 어린 기자들이 배치되는 부서이기도 합니다. 그가 10분을 요구한 이유는, 취재 현장으로 나가기 전 함께 재난보도준칙을 읽고 왜 우리는 이 취재를 해야 하는가를 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재난보도준칙은 세월호 참사 이후인 2014년 9월, 한국신문협회·한국방송협회·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한국기자협회·한국신문윤리위원회 등 국내 대표적인 언론현업인단체가 모여 만든 일종의 취재·보도 가이드라인입니다. 언론인 스스로 필요하다고, 지켜야한다고 정해놓은 규범이므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취재 전 다같이 재난보도준칙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이태원 참사 초반에 드러났던 보도문제, 즉 혼란스러운 초기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거나 무차별적인 취재 경쟁을 벌이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현장에 배치된 기자들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가이드라인대로 행동하기는 무척 어렵고, 특히 연차 어린 기자들이 배치된다면 이들이 처음 경험하는 현장에서 가이드라인대로 취재하고 보도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재난보도 상황에서 작동하는 문제적 ‘보도관행’ 그런 점에서 우리는, 뉴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적 '관행'이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경희(2019)는 세월호 참사 당시 기자들이 반복한 ‘잘못된 관행’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물론 기자 개개인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뉴스를 만드는 일은 여러 가지 선택지를 선택하는 상황, 즉 갈등구조 속 반복되는 선택행위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특히 재난사고의 경우,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어떤 소재에 주목하고 어떤 취재원을 만날 것인지, 사회적 참사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정부와 국회 등에서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면 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사안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갈등구조는 깊어지고, 언론인·언론사·언론조직 등이 어떤 관행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해당 연구 결과, 재난현장 취재과정에서 4가지, 보도과정에서 5가지의 갈등구조와 그 속에서 선택된 관행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취재과정에서는 △‘재난 현장’과 ‘정부 발표’ 사이 △‘피해자 인권’과 ‘뉴스거리’ 사이 △‘현장 자율 취재’와 ‘본사(데스크) 지시 취재’ 사이 △‘타사와의 취재 경쟁’과 ‘타사와의 협력 취재’ 사이에서 기자들은 갈등합니다. 그 속에서 △정부 발표는 신뢰하지만 피해자는 비신뢰하는 관행 △피해자 인권보다는 뉴스거리, 특히 영상 중심으로 취재하면서 비윤리적 취재를 하게 되는 관행 △현장 상황을 잘 모르는 데스크의 지시를 일단은 따르는 톱다운 방식의 취재 관행 △비협력적 취재 관행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보도과정에서는 △‘현장 보고’와 ‘정부 발표’ 사이 △‘피해자 중심 보도’와 ‘권력자 중심 보도’ 사이 △‘핵심 사실 보도’와 ‘기계적 중립 보도’ 사이 △‘정확한 보도’와 ‘신속한 보도’ 사이 △‘선정적 구성’과 ‘절제된 구성’ 사이에서의 갈등구조가 드러납니다. 세월호 보도에서 대부분의 데스크는 △현장 보고보다 정부 발표를 보도하기를 선택했고 △피해자의 요구나 주장보다는 권력자의 행보나 언행을 보도했으며 △재난사고의 원인과 재난 대응체제에 대한 문제점을 밝혀내는 보도보다는 이것이 정부나 행정 관리자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되는 것을 고려하여 ‘중립성’이라는 저널리즘 원칙을 따라 보도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매체 환경의 영향으로 △신속한 보도와 △선정적 구성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행들은 한국 저널리즘의 고유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뉴스거리를 정부나 공권력의 발표에 의존해온 방식, 타사와 협업 취재보다는 기자 개인기를 통한 특종과 단독에 더 집중하는 문화, 정파성에 대한 두려움과 중립성 신화에 대한 과도한 의존(사회 비판 보도를 정파적 보도로 여기고, 정파적 보도는 편파적이고 중립적이지 못한 보도라고 해석하는 관점), 속보와 같은 정보의 빠른 전달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보는 관점 등이 중첩되어 참사·재난보도에서의 문제 상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에서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위험커뮤니케이션 상황 하에서 위험을 인지하고 있는 ‘전문가’와 위험을 인지해야 할 ‘대중’ 사이를 언론이 잘 매개해야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러한 취재관행은 개선될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 질문 : 언론은 무엇인가요? 재난 상황에서 제대로 보도해줄 언론을 기대하는 우리들은, 언론이 이런 문제적 보도관행을 갖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며 실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더 근본적으로, 언론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은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것들을 기대하나요? 일반 시민들·대중들에게 언론은 무엇인가요? 기대가 좌절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언론과 언론인들이 생각하는 언론에 차이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지만 기자들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역할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2022년 열린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다시 본 재난보도준칙’이라는 토론회에서 한 기자가 이같이 말했습니다.   “(재난보도)준칙 제13조에 유언비어 방지 부분(모든 정보는 출처를 공개하고 실명으로 보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확인되지 않거나 불확실한 정보는 보도를 자제함으로써 유언비어의 발생이나 확산을 막아야 한다)이 있는데 이 대전제에 반대할 기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현장에서 나의 일이 됐을 때 솔직히 장담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당시 마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든가 연예인이 있어서 사람들이 몰렸다는 목격담이 있었는데, 수사기관 등 당국이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는 이상 이런 내용을 일체 전하면 안 되는 건가란 생각을 했다. 왜냐면 당시 현장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내용을 전하는 게 현장성을 지키는 제1의 기준일 수도 있는 것이라 그렇다면 어디까지 현장을 전해야 하는 건가 고민이 들었다.”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제1의 기준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고, 그것은 상황마다, 시기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현장 정보 전달’을 언론의 역할 1순위에 놓게 되면 언론의 또 다른 역할들은 2순위, 3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떠올려봅시다. OO일보 사회부 사건팀 소속 신입 기자는 2022년 10월 29일 왜 해밀톤 호텔로 갔어야 할까요? (1)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시, 그 중심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발생한 ‘사고’가 무엇이고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취재하여 알리기 위해서일까요? (2) 들어보니 엄청난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이고 그렇다면 이는 대중의 주목과 관심을 끌 수 있는 뉴스거리이니 취재해야하는 것일까요? (3) 벌어진 ‘사고’에 대해 공권력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사고’를 ‘사회재난’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하기 위해서일까요? 대체 그는 왜 거기로 가야했을까요?   언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기자·언론사의 취재·보도 과정 또한 하나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과정이라고 본다면, 언론의 취재 과정과 목적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관점을 그대로 적용해서 설명해볼 수 있습니다. (1) 먼저 사건사고를 알리기 위해서 취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커뮤니케이션을 ‘정해진 양의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전달모델·transmission). 이는 기본적으로 미디어(언론)에 대해서, 정보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 즉 정보와 거리와 사람을 통제control하는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이것이 이태원 참사에서의 보도 문제를 일으킨 원인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관점으로 언론의 역할을 바라본다면 분명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2) 대중이 궁금해 하는 뉴스거리를 발굴하기 위해 취재해야 한다는 개념은 어떨까요. 이는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을 ‘주의를 끄는 것’으로 생각합니다(공시모델·publicity). 즉, 언론(매스미디어)은 대중의 눈길을 끌고, 감성을 자극하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물론 언론은 후술할 ‘규범 이론’의 적용을 받는 편이므로 공시모델로 완벽히 설명되진 않지만, 단순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관점(전달모델)보다는 가치중립적인 면모를 띄며, 우리가 미디어(언론)에 대해 ‘이들은 광고주에게 대중의 주목(attention)을 팔아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고 설명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3) 언론, 저널리즘은 일반적으로 위의 관점보다는 ‘규범 이론’으로 설명됩니다. 규범 이론이란, 언론의 이상적인 구조와 운영 방법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가치와 원칙을 정하고 – 예를 들면 ‘언론 운영을 규제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미디어에 대한 직접 규제는 정당하다’, ‘정부 규제도 언론 자유도 모두 필요하다’와 같은 내용 – 이런 것들과 연관해서 언론의 책무가 정해집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정부 규제를 요구하는 압력이 늘어나면서, 미디어 경영자들은 규제를 정부에 맡기기 보다는 공중의 필요에 맡기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언론에 감시견 역할이 부여되고, 언론이 입법·사법·행정에 이은 제4부Fourth Estate로 그려지게 됩니다.   이태원 참사와 미디어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이 두 가지에 어떠한 직접적 연관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론인 스스로와 언론사가 이태원 참사를 포함한 취재 현장에 ‘왜’, ‘무엇을 취재하기 위해’ 가야하는지 생각할 때 필요한 근본적 사상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언론의 역할을 떠올리고 그들을 분석하고 평가할 때 쓰일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현장에서 느낀 내용을 전달하겠다’는 기자의 다짐은 언론을 정보 전달자로 한정하는 관점입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를 전달함으로서 사회 다양한 요소를 통제하는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쥐어줄 것인가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설명하는 또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뉴스가 전달되거나 제공된다는 인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동체에 어떠한 기능을 하는지, 즉 어떤 의미를 생성해내며, 공동체가 공통으로 갖게 되는 행동이나 공유하게 되는 신념은 무엇이 있는지 고민하는 관점입니다. 오늘 읽었던 뉴스가 나에게 어떤 정보를 주었는지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많은 한국 사람들이 출근길에서 뉴스를 읽는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행동인지,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일련의 보도행태에서 우리는 어떤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는지 같은 것을 고민하는 것입니다(의례적 관점·a ritual view of communication).   기자가 고민으로 언급한 것처럼, 참사 초기 ‘마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목격담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MBC에서는 뉴스특보를 진행하던 도중 ‘단순 압사 사고가 아니라 약이 돌았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시민 인터뷰를 그대로 내보내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목격담을 전하는 것이 부적절했던 이유는, 해당 현장에서 나온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실제로 현장에서 이런 목격담이 떠돌았던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태원 참사를 구성하게 될 여러 의미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사가 발생했던 이태원이라는 지역을 떠올려볼 때, 이태원이 한국 사회에 의미해 온 장소성이 있습니다. 박상은(2023)은 이태원 참사가 어떻게 의미 구성이 되었는지 살펴보면서, 왜 이태원 핼러윈 축제는 관리의 대상이 아니었는지(즉, 안전 대책이 설계되지 못했던 행사였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2010년대 들어 이태원의 지역 성격이 바뀌는 상황에서 도시계획은 여기에 발맞추지 못했고, 덩달아 이태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이 작용하면서 핼러윈 축제는 지자체의 관리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장소성은 참사 이전부터 작동해왔다는 점입니다.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공간, 그러나 위험하고 문란한 공간이라는 사회적 시선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며 참사의 의미를 왜곡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태원 참사를 어떠한 의미로 구성할 것인가. 그리고 여기서 한국 언론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 언론이 이것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마약 목격담을 전달해야 한다’는 감각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재난과 참사에 어울리는 저널리즘을 구성하기 결국 우리는 재난과 참사에 어울리는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과제까지 떠안게 되었습니다. 이태원 참사에서 남아있는 진상규명은 무엇이고, 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그러나 울리히 벡(Beck, 1986)이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에서 말한 대로, 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가 겪을 위험은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계속 커질 것이라면, 위험과 대중 사이를 매개할 언론이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하는지 고민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아주 새롭게 이뤄져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었다는 재난보도준칙을 다시 봅시다. 내로라하는 언론인들이 만들었다는 이 가이드라인엔 이미 해답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일례로 제8조(통제지역 취재) ‘병원, 피난처, 수사기관 등 출입을 통제하는 곳에서의 취재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관계기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라는 조항이나, 제18조(피해자 보호) ‘취재 보도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 등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사람들의 의견이나 희망사항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예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등의 규정이 있습니다. 새로운 뉴스거리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캐물으며 공격적으로 취재하는 기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적 혼란이나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재난으로부터 공동체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이 또한 기자의 역할이자 참사에 어울리는 저널리즘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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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언론은 어떻게 해야 했고,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독립언론 뉴스타파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이태원 참사'를 마주했다. 이후 계속 이태원 참사를 취재했고, 이제 곧 2주기다. 그사이 여러 일이 일어났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최근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리고 참사의 책임자들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누구는 유죄를 받았고, 무죄가 나오기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진상규명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사회적 참사는 복잡다단하다. 단순히 '특정 개인을 책임지게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러 공공기관의 기형적 관행과 사람들의 욕망, 그리고 비효율적 시스템이 얽혀 있다. 언론은 이를 밝혀내야 한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완벽하지 않다. 특조위가 규명해내지 못할 수도 있는 부분을 언론은 보완해야 한다.  나는 지난 몇달 간 '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 기획기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태원 참사의 10가지 진상규명 과제를 골랐고, 이를 규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썼다. 10가지 과제를 뽑기 위해, 또 이를 특조위가 조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증명하기 위해 국회 국정조사, 수사, 재판 자료를 훑었다. 별도로 확보한 여러 영상과 사진, 문서 등도 검토했다.  취재를 하며 생각했다. "나에겐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언론은 왜 이런 자료들을 모아놓지 않았고, 또 보도하지 않았을까."  특히나 아쉬웠던 부분은 참사 당시 모습을 담은 영상의 부족이었다. 나는 여러 자료를 통해, 참사 직후 경찰의 현장 교통통제 실패가 구조지연을 야기했고, 이로 인해 피해 규모가 더 커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가져왔고, 기사를 썼다. (관련 기사 : [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 ⑥ '교통 통제 실패' 그리고 놓쳐버린 골든타임) 하지만 기사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그래서, 구조가 빨랐다면 '누구를 살릴 수 있었는지'였다. 나는 그것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희생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참사 직후 언론보다 빨랐던 것은 시민의 휴대전화였다. 여러 시민은 자신이 찍은 모습들을 SNS에 올렸고, 소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곧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참혹한 영상은 삭제돼야 한다는 여론과 정책적 결정이 있었다. 이로 인해 언론은 더 이상 SNS의 영상을 수집하거나 보도하는 걸 금기시해야 했다. 그 결과, 현재 찾을 수 있는 참사 관련 SNS 영상은 매우 한정적이다.  확인해 보니, 참사 현장 영상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것은 기이하게도 미국 언론이었다. 해당 언론은 이태원 참사 직후, 매우 적극적으로 시민들이 촬영한 영상을 수집했다. 그 결과, 미국에서 지난해 <CRUSH>라는 다큐멘터리가 개봉했다.  참사 현장 영상은 삭제돼야 하고, 수면 아래 묻혀야 한다는 것. 참사 직후,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이 무엇보다 중요한 지금 시점에 와 생각해 보면, 나는 나의 판단을 후회한다.  우리는 희생자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버티다 죽었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희생자들의 사망 진단서에는 "30일 오전 12시 00분 사망 (추정)", "29일 오후 10시 15분 사망 (추정)"이라고만 적혀 있다. 만약, 참사 당일현장 영상이 대량 수집돼 있었다면, 그래서 여러 각도에서 참사 골목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분석해볼 수 있었다면, 어떨까. 난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유가족은 요새도 SNS를 돌아다니고, 또 여러 방송사에 문의하며 영상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노력 중이다. 앞서 설명한 미국 언론에도 연락해 '제발 시민들이 찍은 참사 당일 영상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현장에 도착한 11시 20분은 이미 골든타임이 지난 후였다"고.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11시 20분 이후에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희생자가 있었고, 그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담긴 영상이 있는 상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민 장관의 저 말을 반박할 수단이 없다, 지금은.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오히려 언론은 그런 영상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보도했어야 하지 않았나, 이름부터 참혹한 참사를 왜 참혹하게 보도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러지 않기로 한 약속이 과연 진상규명에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는가.  앞서 설명했듯, 현장 영상의 사례는 일부분일 뿐이다. 결국 우리 사회와 언론은 어떤 합의점을 도출해야 한다. 과연, 사회적 참사의 해결에 도움이 보도는 무엇인가? 또 그것의 불편함을 우리는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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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OT 후기
들어가며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의 한 골목, 우리는 또 다시 많은 이웃을 잃었다. 그런데 이 참사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10.29 이태원참사, 이태원참사, 10.29 참사, 핼러윈 참사, 이태원 압사 사고 등. 이름을 붙인 이들마다의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이 다르다. 10.29 이태원참사 2주기를 맞아, 나는 어떻게 참사를 상상하는지 떠올려보았다. 20대 초반이었던 나에게 그날은, 놀아야 하는 날이었다. 마스크와 인원수 제한, 운영시간 축소 등 다양한 방역 지침으로 내 3년의 대학 생활은 날아갔다. 흔히들 간다던 MT도, 친구들과 떠나는 우정 여행도, 미루고 또 미루고 또 미뤘다. 그리고 드디어 방역 지침 대부분이 권고 사항으로 축소되었다. 때마침 중간고사도 3일 전인 26일에 끝났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친구들이랑 놀아야 했다. 오랜 기간 사회적 거리두기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미 내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피드엔 이태원 구석구석에서 행복해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한가득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 이태원에 갈 준비를 마쳤다. “야 오늘 이태원 사람 X많아 ㅋㅋㅋㅋ” 먼저 가 있던 친구들에게 메시지가 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곳도 마땅치 않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향을 틀어 근처 용산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김없이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계속해서 넘긴다. 그리고 곧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졌다. 주로 나의 위치를 묻는 내용들이었다. 모두가 자는 불 꺼진 우리 집에 나는 거실에 혼자 나와 티비를 본다. 실시간으로 뉴스가 보도된다.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나도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이태원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나는 그날 이후 여전히 사람이 많은 곳을 쉽게 가지 못한다. 출퇴근 시간엔 아빠에게 부탁해 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여력이 없을 땐 택시로 움직였다. 피치 못 하게 대중교통을 타야 한다면 시간대를 피해 미리 가거나 늦게 갔다. 옆 사람과의 간격이 점차 가까워지면 극도로 불안해졌다.  이상했다. 나는 그 장소에 있지도 않았는데.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을까? 나와 같이 아픈 마음을 갖고 있을까? 아파하는 게 맞는 걸까? 비판이 두려워 앞장서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2주기가 가까워지니 맞닥뜨릴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캠페인즈에서 진행하는 “이태원 참사,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첫 시작은 9월 11일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진행된 오리엔테이션. 함께 글을 쓴 사람들과 만나 소개와 소감을 나누고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 강연을 들었다. 최성용 연구자의 강연 :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 참사를 ‘상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의 참사는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참사를 있는 그대로의 명확한 사실이나 사고로 파악한다. 이에 최성용 연구자는, 사람들이 참사를 상상하고 해석하는 것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 특히 이태원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함께 나누었다. [위로부터 상상하기] 책임의 주체 혹은 책임의 목적 및 결과는 무엇인가? 국가적 재난이 생겼을 때, 우리는 늘 책임의 소재를 찾는다. 이태원 참사에도 같은 방식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행정안전부 이상민 장관의 사후 대처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2022년 말에 진행되었던 국회 국정조사에서도 사후 대처를 기준으로 장관의 부족함을 지적했다. 책임의 주체를 좇아 사후 대처의 과정과 결과만을 따졌다. 하지만 사전 대비가 아닌 사후 대처에만 집중한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놓치기 쉽다. 구조적인 문제는 사후 대처가 아닌, 사전 예방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찾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상황에서 책임의 주체를 찾는 것이 이후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예방하는 것보다 중요할까? 이 외에 다른 질문도 던질 수 있다. 법이 없는 경우, 다시 말해 불법이 아닌 경우에서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고위 장관 개인과 관료 시스템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같은가? 국가와 경찰과 지자체의 책임은 같은가? 진상규명의 목적은 무엇인가? 법적 처벌을 위한 진상 규명을 해야 하는가?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차원의 진상 규명은 무엇이 다를까? 국회 내에서 혹은 제도권 내에서 진상 규명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보상금의 관한 쟁점으로 참사를 축소한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10월 31일 행정안전부는 보상금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참사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보상금의 관점으로 축소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게 위로금 2,000만 원, 장례비 최대 1,500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구체적인 액수를 내걸었다. 이러한 축소의 결과는 부정적인 여론으로 즉각 나타났다. 이태원 참사에 세금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당시 장관은 “경찰이나 소방 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용산 구청장 또한 축제가 아닌 ‘현상’으로 참사를 한정 지었다. 정부가 참사를 보상 액수로 제한하고 축소한 결과,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한 번 더 고통에 휩싸이고 고립되었다. 일방적으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내걸었을 때, 무엇이 휘발되는가? 시민언론 민들레는 홈페이지를 통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을 게시했다. 희생자들을 그늘 속에 묻히게 하지 않겠다며 온전한 추모를 진행하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다른 인적 사항과 특징들 없이, 이름 자체만으로 진정한 애도를 할 수 있을까? 어떤 사연과 맥락을 가진 개별의 사람들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을 통해 추모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참사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를 부르는 명칭은 지금까지도 제각각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태원 ‘사고’라고 칭한다. 어떤 기준으로 참사와 사고를 구분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적다면 사고인가? 참사가 되지 못한 사고들이 오히려 사각지대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닐까? 한국심리학회 트라우마 학회 연구소에서는 이를 두고, 이태원을 제외하고 ‘10.29 참사’를 제안했다. 장소를 언급하는 순간, 그곳에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다는 의미였다.  [아래로부터 상상하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유언비어와 사진들을 옮긴 것에 대해 비난할 수 있을까? 2차적 증언자로서의 언론들의 역할은 없었을까? 이태원 참사 직후, 갖가지 유언비어들과 이미지들이 여럿 생성되었다. 화재가 났다, 마약이 성행했다는 등. 하지만 이것이 악의를 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 현장에서는 상황을 설명하려는 담론들이 유언비어의 형태로 퍼졌다. 목격자들이 상상 밖의 일을 마주했을 때, 오히려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사진을 나르거나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퍼뜨릴 수 있다. 문제는 그 이미지와 유언비어들을 보고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데 활용한 다른 시민들이나 언론들이다.  녹사평 시민분향소에 있던 포스트잇들의 언어는 어디로 갔을까? 참사 이후 녹사평역에 시민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2월 5일, 서울 시청 앞에 시민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 붙인 포스트잇들의 메시지는 꽤나 다르다는 걸 볼 수 있다. 예컨대 녹사평역에서는 희생자들과 자신의 유대관계를 언급하며 자신의 슬픔과 애도를 표현하는 메시지들이 많았다. 반면 서울 시청의 분향소에는 주로 특별법 제정이나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의 내용들이 대다수였다. 결국 참사에 대한 애도로부터 정치적 언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제한 채로 정치적 언어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정치적 언어가 되지 못한 채 골목에 붙어있던 수많은 포스트잇에 담긴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또 다른 피해자는 누구일까? 오후 10시, 참사 발생 골목 및 그 근처에서 사용된 핸드폰 내역을 보면, 약 1만 4천 명 정도가 골목 주위에 밀집되어 있었다. 이태원 전체로 보았을 때엔 약 3만 5천 명 정도가 밀집했다. 이 숫자는 내국인만 조사했기에 외국인까지 포함하면 더 큰 숫자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실제 공적으로 출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혹은 할 수 있는 피해자는 극소수다. 유가족가족주의적 애도는 한국 사회 운동의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슬픔을 드러내는 것을 억압하고 슬픔을 축소했던 우리의 현대사들을 볼 수 있다. 최근까지도 국가는 유가족들의 상실과 슬픔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는 유가족들의 적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사가 일어나자마자 팽목항으로 달려가, 당시에 무수히 생성되던 오보들을 적극적으로 정정했다. 그들은 유가족인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이 배 안에 갇혀있는 걸 지켜봐야 했던 목격자이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는 실제 축제에 함께 참여하여 가족들을 잃기도 했다. 공적 출연의 동기가 부재한 생존자좁은 의미에서 159명의 희생자가 있고, 196명의 부상자가 있다. 이 부상자를 생존자라고 보았을 때, 트라우마가 없고 공적으로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와 관련된 활동의 동기를 느끼지 못하는 생존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피해자의 한 모습이다. 부상자/목격자/구조자 등, 결국 참사에 연루된 수많은 피해자가 어디에 위치해 있었냐에 따라, 그들은 각각 다르게 감각한다. 죄책감이나 트라우마 등으로 그들을 대변할 수 없다. 또한 외국인/이주민/성소수자들 등은 공적 출연을 꺼리기도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없다. 이태원 지역의 식당 종업원이태원 지역의 상인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있다. 참사 당일, 사실상 고용주가 아니라 대부분 종업원이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참사 이후 많은 종업원이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 또한 피해자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이태원에서 놀다가 죽었다’ 이태원의 장소성은? 많은 이들이 참사가 아닌 ‘사고’로 명명한다. 놀다가 죽었다, 는 단순한 언어로 표현했다. 이는 풍기문란통제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풍기문란통제는 과거 일본에서서 사회통제의 한 방식이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며 이 통제방식이 그대로 조선에 작동하게 된다. 국가는 그들의 기준으로 ‘문란함’을 규정했고, 제도 혹은 장치로서 사회를 통제했다. 하지만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했기에 문란함의 기준은 모호했다. 이에 따라 법을 집행하는 사람 혹은 행정기구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해방 이후에 기지촌이 되는 이태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후 매년 언론들은 이태원을 풍기문란한 곳으로 재현했고, 이태원은 ‘위험한 곳’으로 자리 잡았다. 나가며 10.29 이태원참사의 2주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1주기엔 어떻게 보냈는지 다시금 떠올렸다.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이태원에 방문하기도 두려웠다. 활동가들이 올린 글들을 보며 ‘내가 언제쯤 이전처럼 이태원에 갈 수 있을까’ 떠올렸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이제 나는 차츰 마주할 용기가 생겼나 보다. 이태원참사와 관련된 메시지들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바라본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10.29 이태원참사의 현장에 있지 않은 나는, 거짓말처럼 현장의 두려움을 아직까지도 느낀다. 마치 내가 생생히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느낀다. 혹시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어딜가든 두리번거리며 쉽게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눈물이 고이고 함께하지 못함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이번 강연을 들으며 ‘나도 피해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각자의 위치에서 동일하지 않지만 개별적인 두려움으로 피해를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부상자로서, 목격자로서, 유가족으로서, 이웃으로서, 구조자로서, 나와 같은 또 다른 목격자로서.  정부는 참사에 대한 애도를 축소하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했다. 한편 각각의 두려움을 겪은 사람들의 개별적인 경험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목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목소리를 왜곡하거나 무시하진 않았을까? 혹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언어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다가오는 2주기까지 광의적인 피해자들의 감정과 목소리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10.29 이태원참사에 대해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고 나누며 온 마음으로 추모하는 2주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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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 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1. 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고  스티그마 효과에 대해 알고 있는가.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행위, 모습으로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속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낙인이라는 키워드는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과 같은 미디어매체에서 거론되지는 않아도 하나의 클리셰처럼 사용되는 요소다. 한 아이의 행실과 평판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고, 그 아이가 사회구성원으로 함께하지 못하고 겉돌게 되다가, 실제로는 나쁜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탈선을 하게 되는 이야기, 혹은 탈선을 하려는 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금 사회구성원이 되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쁜 낙인만 존재하는가. 착한 낙인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착한 낙인이라고 표현하니까 말이 조금 이상해져서 단어를 풀어보겠다. 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묶은 좋은 말이 오히려 거북한 시선을 만들거나, 집단 내부에서도 그 표현을 거부하는 경우가 생기지는 않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에 ‘A와 같이 노는 학생들은 전부 착해.’라는 말을 듣는 걸 정말 싫어했다. 나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속여보자고 복도 중앙에 돈이랑 유사하게 생긴 상품권을 뿌려놓고 구석에 숨어서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었고 학교 뒤뜰에 있는 벌집에 신발주머니를 던지는 학생이었는데. 학원을 몰래 빠져나와 PC방에 가던 아이였고, 새벽에 기숙사 담벼락을 타고 나와 당구 치러 가던 학생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싫어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착한 무리의 착한 학생’이라는 꼬리표는 끊임없이 따라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개처럼 살고 개처럼 행동한다고, 입이 꽤 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말조심하는 편이라고. 나는 내게 찍힌 좋은(사실은 좋아 보이는) 낙인을 부정하기 위해 오히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과연 모두가 그럴 수 있을까.  이태원에는 뿌리 깊은 낙인이 박혀있다. 문란한 이들이 모이는 장소, 질 나쁜 외국인들이나 모이는 장소, 마약의 근원지, 한국 에이즈 발원지. 사실 이는 이태원이라는 지역의 문화 특성을 나쁘게 재해석한 이야기다. 이태원은 서울시 관광특구 1호였다. 다양한 외국인들이 모일 수 있도록 국가단위로 유도를 했던 관광지였고, 실제로 이를 기반으로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발전했다. 다양한 이들이 모이는 만큼 밤문화도 발전했고 클럽, 술, 음식 문화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같이 섞이면서 다문화 사회, 성소수자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국가 단위, 언론 단위의 낙인이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로 heterosexism(이성애적 차별주의)이 심화되는데 국가, 언론이 박차를 가했다는 이야기다. 한국 에이즈 문제의 중심지는 이태원이며 성소수자들이 이태원에 모이게 되면서 사회에 문제가 될법한 물건들을 가져오고 범죄를 조장한다. 개신교 기반의 단체는 이런 불분명한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기사를 꾸준히 올리며 지역을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태원에 가서 논다는 사실 자체를 타인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사회가 되었다.  내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태원을 향한 사회의 시선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지리멸렬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이와 접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장애, 차별부터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 피해자들의 이야기라는 진주를 ‘낙인’이라는 실로 꿰어내고 공감이 아닌 대답을 찾는 응답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방식은 근래에 보이는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는 책 치고는 특별한 전개 방식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책에서는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대전제를 세우며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공감한다는 말은 이제 인터넷 냉소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표현이 되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고통을 안다고 감히 네가 고통을 아는 체하냐. 이제는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학자로서 이성으로 접근한다. 고통 받는 이들과 고통 주는 사회 문화, 그리고 미래를 향한 고민.  세월호 사건 당시 자신을 ‘인터넷 냉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던진 돌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그 학생들은 놀러가다 사고가 나서 죽은 건데 어째서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지원해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형태를 한 돌이었다.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이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도 큰 지탄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륜적으로 아이들에게 던질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지났고 피해자의 집단이 바뀌었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발생했을 때 이번에는 많은 이들이, 과거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지탄하던 사람들까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냉소주의가 2010년도 중반에 비해 크게 심화된 점도 있었고 사회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서는 과거부터 뿌리 깊게 박힌 낙인이 있었다.  이태원에 놀러간 이들은 문란한 이들, 인터넷문화를 대표하는 베타메일과는 다른 알파메일들,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성소수자들과 다문화 가정들, 모든 혐오가 과거부터 쌓여온 낙인의 한 획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돌은 많았다. 그들을 향한 추모탑이 세워질 때 옆에 혐오로 돌탑을 세워도 될 만큼 많았다. 그리고 이런 혐오를 막기 위해 무분별하게 던져진 긍정의 키워드는 그들의 투석 행위를 가속시켰다. ‘그들은 문란하지 않고 문화를 즐기는 착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었다.’ 이 착한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는 사건 당시 구급차 인근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이들의 영상과 더불어 큰 파급력을 일으켰고 인터넷 냉소주의자들은 피해자를, 더 나아가 잠재적 피해자를 모두 비웃었다. 놀러가서 죽은 게 뭐가 자랑이냐고, 이제는 놀러가서 죽어놓고, 사건이 난 이후 다른 곳에서 춤추다가 집에 가놓고서는 보상금까지 타려고 하냐고.  국가, 언론이 찍은 나쁜 낙인과 피해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고통에 잘못 공감한 –혹은 척한- 이들의 착한 낙인 덕분에 피해자들은 입을 열기를 포기했다. 수년간 반복해서 찍어온 이 깊은 낙인을 피해자 한 명의 입으로는 지워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이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이 낙인을 계속 찍고 있을까. 선한 낙인과 나쁜 낙인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잠재적 피해자, 2차, 3차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사회로 나올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확실한 것은 지금은 저자의 방식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점이다. 고통을 향한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올해 초, 오랜만에 중학교 시절 후배를 만났다. 성년이 된 이후로 쭉 군 생활을 했다보니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전역하면서 다시 경기도로 오게 되었으니 예전처럼 자주 보고 지내자는 의미에서의 연락이었다. 오랜만에 본 후배는 예전보다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다. 조금의 고민이 있고, 조금의 압박감이 있고, 조금의 불안함이 있는 그런 얼굴. 그 후로 우리는 두어 번 더 커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고, 후배는 긴 고민 끝에 내게 커밍아웃했다. 그때 나는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반응했고(그렇게 했다고 믿고 싶다), 이 몇 번 내가 먼저 연락했으니 다음에는 언제든 네 쪽에서 먼저 연락하라는 말을 꺼냈다. 상관없으니 다음에 또 놀자고.  이후로 후배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누나와 다시 연락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그를 향한 집안의 분위기를 어렴풋하게 느끼고는 있다. 나와 연락을 한 이후에 집을 나가 자취하고 있다던가, 집안에서 붕 떠버린 위치에 있다던가.  나는 아직도 그가 내게 연락을 먼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커피나 한잔 하자고 부르기를 바라고 있다. 안타깝지만 내가 그를 기다려도 사회는 그를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그들을 향한 시선도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으니까.  참사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어떤 사회가 만들어져야 할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장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일단 내 후배를 위한 시선이 둥글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 후배를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축제 문화에 대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둥글어지고….  첫 책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라는 책을 가져와봤다. 다음 서평으로 계획 중인 도서는 <<인싸를 죽여라>>다. 2010년도 중반 온라인 극우주의와 혐오, 조롱, 인터넷 냉소주의에 대한 이야기. 최대한 좌, 우 정치적인 이야기는 배제하고 돌을 던지는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들에 대해 풀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사진은 참사 당시 SNS 상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을 찍어봤다.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혹은 이 자리의 바깥 거리에 있었던 피해자들 중 목소리를 내고 싶음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지금 이 황량한 골목은 얼마나 변해있을까. 사진을 찍으며 상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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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지난 2년의 시간, 당신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나는 평소에 서울시청 앞 광장을 자주 지나다닌다. 서점을 갈 때나 청계천을 걸을 때, 성당에 갈 때도 산책할 겸 탁 트여있는 광장을 한 바퀴 빙 둘러서 가곤 한다. 지난 시간, 그곳에 참사 합동 분향소가 마련돼 있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인터뷰를 이유로 참사 유가족 분들과 생존자 분들을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그래서 분향소 앞을 지날 때면 언젠가 만났던 분들이 계신지, 그들이 나의 얼굴을 잘 기억 못하실지언정 인사라도 드릴까하여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보라색 옷을 입은 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는 건 버릇이 됐었다.  그런데, 하나 솔직하게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그렇게나 많이 분향소 앞을 지나갔는데, 단 한 번도 분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영정이 마련되지 않은 분향소에서 분향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많은 영정 사진들이 놓여있는 분향소는 똑바로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그 앞을 지날 때면 고개가 자동적으로 푹 숙여졌고 땅만 보면서 걸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몇 발자국만 가면 바로 분향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힘들었다. 마주하기 힘들면 길을 돌아갔으면 될 것인데, 그건 또 싫었다.   영정 앞에 꽃 한 송이를 못 올리고 향로에 향을 한번 못 피웠지만. 나는 그 앞을 지나고 싶었다. 대신 그때마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추모를 하곤 했다. 영정들 앞을 지날 땐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위한 기도를 했다. 형식을 제대로 못 갖추었지만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직도 이런 나의 행동과 감정을 세분화해서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다. 그저 그 앞에선 자꾸 눈물이 나곤 했고,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이태원 참사, 우리는 잊지 않았다  지난 5월 초,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순간, 내 입에선 “드디어...” 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머릿속에선 유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참사 이후 약 1년 6개월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들은 지금 어떤 마음이실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참사가 발생한 날부터 내가 언론을 통해 보았거나 직, 간접적으로 보고 느낀 것을 다시 떠올려봤다. 참사 당일의 그 충격적인 장면, 수많은 희생자들,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눈물, 울분과 분노, 고통, 기나긴 투쟁의 시간. 정부 기관과 정치권에서 벌어진 공방까지. 이 기억들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참사에 대한 감정을 한번쯤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참사를 주제로 글을 하나 썼었다. 그리고 글벗 친구들에게 공유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 자리에 모인 날, 우리는 참사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누군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 날의 기억이 나는 바람에 눈물이 나서 힘들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남 일 같지 않고 아직까지 가슴이 먹힌다고 했다. 누군가는 생각에 잠겨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년 반 가량 지난 시점이었지만, 모두가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참사가 벌어진 뒤 처음 뉴스를 보았던 그 순간을. 잠 못 들고 밤새 TV만 지켜본 그 순간을. 그때 자신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도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잠시 희미해져 있었을 뿐이지, 다들 잊지 않고 있었다. 바로 내 곁에 있는 가족, 친구, 지인의 일이 아니었을지라도. 우리가 가진 슬픔의 무게가 그때나 지금이나 동등하게 무거움을 확인했다.  우리 뿐 일까. 다른 이들은 어떨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동안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슬픔을 달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혹여 사는 것이 바빠서,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레 기억이 희미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도 어쩌면 우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사회의 시선에 대하여   나는 일 때문에 뉴스 기사를 많이 읽는다. 그리고 기사를 읽고 나서 항상 밑에 달린 댓글을 훑어본다. 이것을 보면 여론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기도 하니까.  처음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을 즈음, 기사마다 애도, 추모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렸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매섭고 차가운 비난과 혐오가 섞인 악성 댓글의 비중만 더 높아져갔다.  ‘남의 나라 귀신놀이가 뭐가 좋다고..’ ‘놀다 죽었는데 왜’ (댓글들을 다들 많이 접해보았을 테니, 이 정도까지만 적겠다. 댓글을 굳이 그대로 다 옮겨 적고 싶지 않다.) 희생자와 생존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조롱과 희롱 섞인 말들은 읽는 나조차 괴롭게 했다. 청춘들이 핼로윈을 즐기러 간 것이 나쁜 것인가. 나도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핼로윈 파티를 즐긴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발생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땐 괜찮았는데 이 날은 왜 그랬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문제가 뭐였는지에 대해서 악플 쓰기 전에 생각은 해 보았을까.  유족을 향한 악성댓글도 마찬가지였다. 아픈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말이 너무 많았다. 이들의 움직임을 정치적 행동이라 단정 지으며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족들이 왜 국회에 가고,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렇게 긴 시간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알까. 그들의 눈을 마주 보고 심정을 이해하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우리 사회 일부가 너무 냉담하고 매정하다고 느낀다. 아픈 가슴에 자꾸 비수를 꽂는 것. ‘남의 일이고 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참사나 대형사고가 발생했을 때마다 항상 유족들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슬픔과 울분, 고통이 담긴 목소리. 외면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외쳐왔던 목소리들. 이 목소리들은 우리 사회가 좀 더 안전할 수 있게, 나와 당신이 좀 더 안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목소리와 우리가 전혀 관계없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내 일이 아니다, 내가 알 바 아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모두 같지 않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부디 이들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들은 거두어주시면 좋겠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조금 더 따뜻해지면 좋겠다. 첫발 뗀 특조위에게 바란다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9월 23일 출범했다. 글을 쓰는 바로 오늘이다. ‘지각 출범’이라는 딱지 붙어 버린 늦고도 아주 늦은 출범이다. 지난 5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공포된 지 30일 째인 6월 20일까지 특조위 구성이 끝났어야 했는데, 넉 달이란 시간을 넘겼다. 이것도 유족의 간곡한 호소문이 전달된 후에야 진행되었다. 왜 항상 그들을 끝까지 내몰고 나서야 일이 추진되는 것일까. 국가의 의무가 무엇인지, 이들에게 갖추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특조위원들과 유가족들의 만남이 있었다고 한다. 기사를 통해 전해진 이야기를 보니, 일부 유족들은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눈물에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 담겨있었겠나.  1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특조위가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라는 숙제를 잘 해내주기를 바란다. “희생자와 유족들의 원이 풀릴 수 있도록 하겠다.” 고 송기춘 위원장이 말했다. 그 약속이 반드시 지켜지기를 바란다. 글을 마무리하며  시간이라는 것은 참 빠르게 지나간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2년 가까이 됐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참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잊혀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억은 잠시 희미해졌을 뿐이지 지워지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이 글을 쓰면서 유족들의 모습이 많이 생각났다. 고립되고 외면당하면서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힘겨웠을지, 어떤 마음으로 버티어 왔을지 생각해 보니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났다. 그들에게 너무 외로워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다.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곁에서 많이 이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사실이니까.  또, 나는 처음에 자기 고백을 했는데, 글을 써 내려가면서 계속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조만간 ‘별들의 집’을 찾을 예정이다. 그곳에서 빚진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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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10.29 이태원 참사에 어떻게 연대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각자의 자리에서 10.29 이태원 참사에 어떻게 연대하고 계신가요?    근 몇 년간 산업재해로 돌아가신 노동자의 이야기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다는 소식 그리고 높아져만 가는 2030 청년세대의 자살률 등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부고 소식에 뉴스를 보다가 한숨만 푹 내쉬었던 시간이 늘었다. 기득권 정치는 권력을 취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과 삶을 거부했다. 이렇게 우리는 희망이 사치처럼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간이 지속 될수록 타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는 나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고 벅찬지에 대해 이해하기도 어려운 순간이 늘어난다. 그렇게 내 일상이 지속적으로 어려워지는 순간이 쌓이면 사람과 사람사이 끈끈한 연대가 줄어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찾기보다 내 안으로만 파고들기 쉬운 환경과 일상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 2년간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해 녹사평역, 시청역을 거쳐 현재 부림빌딩의 별들의 집으로 가기까지 연대의 시간을 보내며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갈수록 세상살이가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것들이 늘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더불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연대하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1) 첫 만남   참사가 발생한 2022년 10월 29일 하루 뒤인 30일부터 일주일간 국가 애도기간이 선포되었다. 영정 없는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가 설치 되었다. 그 일주일동안 국가는 유가족이 모이는 것을 방해했고, 그에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모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입에 참사가 아닌 사고로, 희생자가 아닌 사망자로 오르내리게 만들어 사회적 참사의 본질을 흐리고 의미를 압축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국가가 나서서 자행한 일주일이었다. 이렇게는 둘 수 없어서 2022년 12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모이고 녹사평역에 영정이 있는 '진짜' 분향소를 함께 만들었다.   분향소 설치 이전에 필요했던 과정은 희생자들의 영정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영정 만들기는 분향소 설치 전날 매우 늦은 밤에 진행되었는데, 그때 영정 속 10.29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과 처음 마주했다. 액자에 희생자의 사진을, 사진이 없는 희생자의 액자에는 국화꽃 사진을 넣었다. 나는 주로 검은 리본을 둘러 고정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영정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의 일이었다. 영정 안에 들어가는 사진 밑단에는 희생자의 생년월일이 있다. 영정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리본을 두르면서 희생자 대부분이 나와 또래라는 것과 희생자 대부분의 시간이 2022년 10월 29일-31일 사이에 멈춰져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액자 속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와 슬픔, 미안함을 삭히면서 영정을 완성했다.   바로 다음날이 되어 분향소 설치를 시작했다. 손이 찢어지게 시린 날이었는데 나무토막 하나, 영정이 올라가는 단 하나, 하다못해 주변에 쓰레기 청소까지 우리같은 시민들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는 분향소였다. 꽤 긴 시간 추위를 이겨가며 분향소가 완성되었고 영정을 올려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정은 이미 분향소를 만들기 전에 녹사평역 인근 실내 장소에 도착해있었다. 유가족분들이 희생자의 영정을 분향소에 올리기 전에 영정 정리가 다시 필요해서 일을 돕고 있었는데, 처음 뵙는 한 분이 장소로 들어오셨다. 희생자들의 영정이 모여있던 곳이라 처음보는 사람을 경계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여서 짧은 침묵이 있었다. 처음 뵙는 그 분은 '제가 유가족인데요. 사진을 바꿔야 해서 왔어요.'라고 말씀해주셨고 그때 10.29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분들을 처음 만났다. '생각해보니 영정이 여기 모여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텐데. 자신을 유가족이라고 소개하는 그 순간에 그 분의 마음은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짧았던 경계심이 풀리며 뒤늦게 진한 죄송스러움과 함께 밀려왔다.   그날 저녁, 해가 저물고 녹사평역 분향소에 영정이 올라갔다. 유가족분들은 영정 속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분향소에 내려놓고 울음을 토하시며 외치셨다. 성역없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하라고, 우리 가족들 대통령 당신에게 한 표 던졌다고, 그러니 국민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라고 외치셨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하다. 그 순간에 영정 정리 때부터 참아온 눈물이 뒤늦게 몰려와서 나도 같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한겨레 '49재를 앞두고 영정사진이 놓였다, 이제야...[만리재사진첩]'(2022.12.14.)   2) 홍삼캔디 두알 오마이뉴스 '시민분향소... 159명 얼굴과 마주하니 "마음 더 흔들려"'(2023.02.04.)   녹사평역 분향소에서 시청역 분향소로 이전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천막처럼 보이는 것'만 봐도 경찰이 따라 붙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고, 뉴스에서는 기습설치라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국가가 책임져 추모 공간을 마련하고 성역없이 진상규명을 진행하면 되었을 텐데. 무튼 어렵게 시청역으로 이전해 자리를 잡고 시청역 분향소에서 지킴이로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10.29 이태원 참사의 본질을 흐리려는 방해 세력과 화면에서만 보던 유명 정치인도 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사람들은 혼자 분향소를 찾아오신 이름 모를 시민분들이었다. 어떤 사연이 있으신지 한참을 울고 계셨던 분, 1시간이 넘도록 분향소에 머물러 기도하시는 분, 보태 쓰라며 지폐를 쥐어주고 가시는 분들(이렇게 받은 돈은 전부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후원금으로 송금됩니다), 주변에서 뛰어 놀다가 분향소로 와서 여기가 어떤 곳이냐고 물었던 어린 아이들까지. 분향소에서 1-2시간만 있다 보면 분향소가 단순히 추모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분향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회적 참사를 알려내고 추모하고, 서로에게 위로와 안부를 전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기억에 남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어 그 분의 이야기를 전해보려고 한다.   시청역 분향소에서 노란 조끼를 입고 분향소 지킴이를 하고 있었다. 분향소 바닥에 떨어져있던 국화 이파리들, 자잘한 쓰레기를 줍고 향이 있던 곳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청소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뒤에 할아버지가 오신 기척도 못 느꼈다. 향 가루를 쓸고 뒤를 돌아보니 계시는 할아버지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할아버지께서 추모의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분향소의 가장자리로 가있었다. 할아버지는 가만히 자리에서 영정을 천천히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큰 절을 두 번 하셨다. 다리가 불편하신 것 같아 도와드릴까도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추모하려는 시간과 방식을 굳이 나서서 방해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애써 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절을 하시고 일어나 모자를 벗어 나에게도 인사를 해주셨고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로 답변 드렸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한참 뒤적거리셨다. 그러고는 오셔서 홍삼캔디 두알을 손에 쥐어주며 '춥지?' 한마디 묻고는 사라지셨다. 날이 흐렸지만 추운 날씨는 아니었는데. 할아버지가 떠나시고 분향소에 서있으면서 할아버지가 춥냐고 물어봐주셨던 질문을 여러 번 곱씹었다. 그냥 지나가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춥지?'하고 물어보셨던 질문이 외롭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질문 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여기 있어서 고맙다는 말처럼 느껴져서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홍삼캔디를 좋아하지 않아서 먹지는 못했지만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 안쪽 주머니에 행운의 부적처럼 항상 넣어두고 지금도 가지고 다닌다. 받았던 홍삼캔디 두알을 보면서 '오늘도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함께하는 사람들이 어디든 있겠구나.'하고 마음 따뜻해지는 순간이 일상에 자리 잡게 되었다.   3) 낮은 곳으로   '연대 :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책임짐.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윤이형 작가의 소설 [붕대 감기]에서 연대는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상처받을 준비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의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보는 것,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내 안으로 옮겨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요즘 가방에 귀여운 키링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람들의 가방에 달린 키링을 보는 재미가 있는데 그 안에서 노란색 리본과 보라색 리본을 만나면 정말 반갑다. 가방에 리본을 달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이름 모를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 순간에 리본을 달고 있는 사람과 은밀히 연대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낮은 곳으로'는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구절이 유명한 이정하 시인의 시다. 읽다보니 내가 나를 비워내 당신의 무엇이든 담길 수 있도록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우리가 서있을 더 낮은 곳은 어딜까. 국가가 책임지지 않고 되려 거부하면서 유가족분들이 삭발을 하던 순간일까? 아니면 길가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오체투지와 천막 농성, 단식을 하던 그 순간일까? 생각해보니 더 낮은 곳은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유가족분들과 시민들은 국가의 부재를 서로의 존재로, 두터운 연대로 채워왔으니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이곳이 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2년간 서로를 위해 마음을 비워내고 가방에 리본을 달아보고 분향소로 향했던 발걸음이 쌓이고 쌓여 함께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달려왔다. 더 넓고 넓게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고자 노력해왔던 시간이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연대 하고 있는지 묻고 싶고,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는 말과 어떤 형태의 연대도 괜찮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오늘 하루는 안녕한지, 긴긴 시간 춥지는 않았는지 안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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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0. 어쩌면 우리는 너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0. 어쩌면 우리는 너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10월 25일 밤, 속칭 대구패밀리라 부르는 글쓰기 모임 지인들과 동성로에서 만났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할로윈 같은 행사가 있으면 다들 어렴풋하게 알고 준비를 할 법도 한데 모두 이쪽으로는 연이 없는지 아무 생각 없이 현대백화점 앞에 모였고, 예상치 못한 엄청난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동성로 말고 안지랑에서 곱창에 소주나 먹자. 지나가는 간호사 좀비와 정장 드라큘라를 본 형님은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구석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선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눈치를 보였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랑에서 곱창에, 평화시장서 치킨에, 거리를 걸으면서 맥주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 숙취에 괴로워하고…. 출근한 월요일, 후배 여럿이 지난밤 축제 거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붐비는 클럽과 아리따운 여성들, 그리고 사람으로 가득한 위험한 거리. 지난밤 그들의 추억과 별개로 과도한 인파에 위험했다는 뉴스가 잠깐 올라왔다 내려가고는 했다. 우린 그때도 사고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2022년 10월 28일, 부대에서 할로윈 행사 참여의 위험성에 대한 공문을 내렸고 젊은 간부들의 과도한 행사 참여를 금하기 위해 위수지역을 철저히 지키라는 추가 공문이 내려왔다. 내 근무지는 대구에서 서산으로 바뀌었고, 서산 부대는 서울의 접경지라 그런지 이런 이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우리 부대는 코로나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고. 이미 이십 대의 끝자락, 스무 살 초반에도 즐기지 않았던 축제를 이 나이가 돼서 즐길 이유도 없었고 당시 비상대기도 공교롭게 나였다. 사고 전일, 그리고 당일까지도 나는 부대를 지키고 있었고 이 축제를 즐기는 이전 부대의 후배들, 그리고 새 부대의 후배들과 간간히 연락을 하며 축제의 열기를 대신 느꼈다. 29일, 사고가 발생했고 어제까지 우스갯소리로 연락하던 후배들은 이제 살아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그 장소에 있었는지 찾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가끔 저널리즘에 관련된 책을 읽는다. 한때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리고 뉴스와 정치, 한 사람의 발언이 무겁게 소비되는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제는 알아야 하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 인용저널리즘에 대한 레포트를 써서 대학에 제출한 적이 있었다. 한참 대선으로 국가가 뜨거웠던 시절, 유튜브의 아무개 씨, 정치평론가 아무개 씨의 목소리를 “ ”(따옴표)로 대신해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따옴표 저널리즘’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말도 다소 올드한 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는 따옴표 저널리즘보다도, 아마 ‘릴스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사회가 되었기에. 이태원 참사는 사실상 릴스 저널리즘의 대표 격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사건이었다. 뉴스에서는 부족한 현장 상황 정보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고, 이런 정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릴스, 유튜브에 있는 영상을 끌어다가 TV에서 생중계를 했다. 그리고 SNS 익명의 목소리라는 거대한 방패 아래에 무분별한 혐오와 공격의 메시지는 덤으로 내보냈고. 영상에선 참사 사고의 사망자들, 부상자들의 모습이 모자이크 없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TV 앞의 많은 시청자들이 이 사고의 정신적 피해자가 되었다. 그 후에 있던 ‘누군가 밀었다’, ‘누군가가 범인이다’와 같은 정제되지 않은 메시지의 남발부터 사건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이를 정치의 더러운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자칭 사회평론가들의 발언까지. 과연 언론은 참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과연 이게 21세기의 저널리즘일까. 그날 언론의 현실에 대한 참담함을 느꼈다. 언론이 무분별한 메시지를 보내는 당시 부대에서는 사고자가 있지는 않은지, 다른 부대 후배 중 사고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조사를 해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의 SNS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용산에서 놀고 있음, 동성로에서 술 마시는 중, 여기는 서울 어디 클럽. 후배들의 소식은 속속들이 발견되었고 한숨을 돌린 우리는 릴스를 우연히 넘기다 다른 영상들을 보게 되었다. 사고 현장에서 CPR을 하면서 제발 찍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소방관, 인근에서 춤추는 주취객, 사람들을 빨리 대피시키기 위해 차 위에서 인원을 인솔하는 어떤 젊은 사람, 그리고 번쩍이는 인근 클럽과 술집…. 나는 이 사고를 떠올릴 때마다 대구 부대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 후배를 떠올린다. 이성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때로는 과음, 지각으로 개인적인 행실에 대해서는 지적을 받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 좋고 일에 몰두하는 후배.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싶어 하면서 선배들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연차가 차면서 책임감도 보이는 후배. 그 후배는 할로윈이면 거리로 나가 이 문화를 즐기고는 했다. 그리고 그 주 주말이 끝난 월요일이면 전날의 열기를 하나의 무용담처럼 풀어내기도 했다. 나는 그 후배가 처음에는 싫었다. 너무 가벼워 보이는 남자여서, 책임감이 부족해 보이는 남자여서, 언제라도 일을 대충 할 것만 같은 인상의 남자여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그는 멋진 남자였고 멋진 군인이었다. 유쾌한 사람이었고 친절한 후배였다. 나는 그의 당당함을 부러워했고 그와 같이 퍽 즐거운 군 생활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이 참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가 너를 잃었을지도 몰라. 이런 행사는 문란한 행사고 평소 행실이 나쁜 사람들이 가서 당한 일인데 무슨 문제냐? 이런 이야기를 SNS에 거리낌 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린 멋진 후배이자 유쾌한 동생, 그리고 진짜 군인 하나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사라진다면 인간적인 슬픔, 비통함, 그리고 대단한 인재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타까웠을 거라고. 그 후배와는 이제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대구를 떠난 지 벌써 3년이 흘렀고 그 친구도 내가 전역한다고 말한 전후로 전역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전역하고 사회인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디서든 그 후배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후배가 앞으로도 이런 축제에 계속 참여할 거라는 점도 알고 있고. 그렇기에 앞으로는 이런 축제에 안전을, 모두에게 행복한 장소가 되기를 빌며 살뿐이다. 2025년의 나는 할로윈 축제 기간에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때는 새로운 일을 시작한 후라고 생각한다. 군대도, 코로나도, 행사에서 논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는 나는 늦은 나이여도 거리에 몸을 던질까. 아니, 아마도 집에서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그때는 슬픈 이야기보다는 기쁜 이야기를, 할로윈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를, 거리의 행복한 이야기를 쓰며 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해당 글은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정리를 시작하는 글이다. 평소 서평을 꾸준히 써왔기에 이번에도 서평 3편을 통해 이태원 참사의 기억을 되짚고 간단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 되짚기, 서평을 통해 나아가기, 또다른 내일을 보낼 나, 모든 일들을 시작하기 위해 최근 이태원에 다녀왔다.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보이는 표지판, 여기가 사실 모든 기억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다녀온 이태원은 조금 쓸쓸한 곳이었다. 서평과 모든 글이 끝날 때면 아마 2주기가 돌아오지 않을까. 그때는 이 쓸쓸함에 방점을 찍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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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2)
기억 담기 모임 참여 (23.10.07.) - 듣는 자리 이태원역 1번 출구. 우측으로 돌면, 좁고 경사진 골목이 나온다. 한쪽 벽면에는 시민들의 마음이 담긴 포스트잇이 한창 붙어 있었고, 문화연대에서는 매번 현장을 정비하며 포스트잇을 수거해 분류 보관했다. 일 년 전, 나는 자원 봉사자로 참여해 그 작업을 함께했다. 연휴 전후로 단장한 추모 공간에는 오색빛 메시지가 가득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실, 포스트잇에 쓰인 내용을 잘 읽지 못했다. 어쩐지 남의 일기장을 들추어 보는 것만 같아 그 마음이 편치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신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 주목했다. 이미 현장이 익숙한 활동가는 바로 앞 편의점부터 방문했다. 따로 챙겨주기 전에 음료를 계산했지만, 사장님은 아랑곳 않고 몇 병을 덤으로 얹어 주었다. 오래된 포스트잇을 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자칫 귀퉁이가 찢어지면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뗀 것은 빈자리로 옮겨졌다. 점성이 낮은 테이프가 비치되어 있었고, 무언가 훼손되지 않도록 애쓰는 마음이 거기 살아 숨쉬었다. 고개만 돌려도 구석에 적힌 혐오를 지우려 물티슈를 박박 문지르는 고생이 눈에 띄었다. 새로 추모 공간이 조성될 때까지 그런 작업이 이어져 왔다. 사무실로 이동해 참사 초기의 포스트잇을 정리했다. 유가족 혹은 지인의 메시지, 생존자 혹은 구조자의 메시지, 번역이 필요한 메시지, 그 외 메시지 등의 기준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판단이 어려운 경우뿐만 아니라 인상 깊은 이야기가 보이면 서로 나눴다. 나는 역시나 그걸 잘 읽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몇 개 아로새겼다. 일 년이 지난 지금, 기억 담기 모임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분향소 지킴이 연대 (22.12. ~ 23.6.) - 분향소 단상  참사 이후, 한동안 시민 분향소를 찾아 지킴이 활동을 자원했다. 매주 일요일 두 시간 남짓, 그 근방을 지나는 시민들을 맞이하며 국화를 전하거나 서명을 받는 게 주된 역할이었다. 앉을 수 있는 의자가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서 있는 게 편했다. 때 맞춰 교대하는 봉사자와 유가족을 지켜보고 있자니, 몸도 마음도 겸손해졌다. 또한, 그곳을 방문하는 모두에게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 발길을 옮기지 못해 머뭇대는 모습이 흔했는데, 전해 듣기로는 비교적 인적이 드문 새벽 홀로 오열하다 떠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영정 속에 잠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슬픔에 잠긴 누군가를 위해 예를 다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분향소에서는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면전에 대고 훼방을 놓는 사람들은 꾸준히 많았다. 가령,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고는 "돈 때문에 그러는 거지?"라고 뱉는 식의 무례함들. 하지만 그보다는 헌화하는 행렬이 길었다. 언젠가 다국어로 적힌 홍보물이 설치되자 외국인의 관심 또한 늘었다. 거기 적힌 내용을 읽는 표정은 어찌나 진중하던지. 물론 너무 인접해 희생자 사진을 찍는다면, 정중한 몸짓으로 난색을 표해야 했다. 그럼 대부분 "okay"하며 카메라를 내린 채 뒤로 물러섰는데, 한 번은 "he is my cousin"이라며 양해를 구하는 일도 있어 아차 싶기도 했다. 회화에 능하지 못한 나는 그 순간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그 이상의 위로를 건네지 못한 게 여전히 아쉽게 남아 있다. 어린이들은 왕성한 호기심으로 보호자를 잡아끌었다. "여기 뭐하는 데야?" 궁금해하거나 "한 번 가 볼래!" 내지르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보호자들은 쉽게 당황했지만, 사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오히려 안타까웠던 건, 그 야단법석이 제지 당할 때. 이곳은 배움의 장이 될 수도 있는데, 황급히 자리를 뜨고 마는 게 조금은 미웠다. 그래서인지, 분향소에 시선이 꽂힌 어린이에게 조심스레 흰 꽃을 쥐어 주는 보호자를 목격하면 기분이 들떴다. 동시에 고민하기를, 그토록 순진무구한 눈빛 앞에서 과연 나는 이 참사에 대해 무어라 설명해야 했을까. 곳곳에 쓰인 '기억', '애도', '안전' 같은 단어를 두고도 금세 머릿속이 하얘졌다. 밑도 끝도 없이 파고들수록 내가 외워 온 뜻은 백지장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분향소가 서울 시청 앞 광장으로 이동한 뒤로는, 전국 각지에서 추모객이 들렀다. 하루는 시설 보수를 위해 운영을 잠시 멈췄는데,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쉬워하는 어르신을 응대하기도 했다. "일부러 기차 타고 왔는데…" 그는 나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고, 내일부터 재개할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만하는 줄 알았잖아!" 이어지는 호탕한 웃음에 나도 따라 미소 지을 수밖에. 어쩌면 그런 일화를 쌓는 재미로 지킴이 활동을 이어 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꼭 외딴섬 같은 공간에 연대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했다. 혹은 지금 참사에 관해 확인하고 학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나에게는 그게 참 어려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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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0에서 1로, 망설임에서 연대로
2022년 어느 날의 카페, 내가 앉은 자리에서 멀찍이 세 명이 앉아있었다. 이태원 참사 후 몇 주가 지난 때였다. 그들의 대화가 의도치 않게 들렸다. '세월호처럼 장사를 하려고 한다'는 말. 나는 2015년경부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했고 세월호를 취재하던 피디님과 일하게 되면서 세월호와 관련된 띄엄띄엄 서로 연결되지 않는 현장들에 계속해서 찾아갔다. 단원고에서 목포에서 광화문에서 유가족을 만났다. 세월호 인양선 바로 앞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인양선에 타지 못한 유가족들과 인근을 맴돌기도 했다. 배를 집어삼킨 바다는 새카맣고 거칠었다. 나는 그 시절을 떳떳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유가족들과 자주 만나면서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들을 위로가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나는 내 위로의 방법이 어설플 거라 걱정했다. 작은 실수라도 할까봐 잔뜩 몸을 사렸다. 영상에 필요한 질문만 하고, 카메라를 켜지 않을 때면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관찰했다. 가끔 유가족들이 주는 음식과 관심에는 가능한 큰 미소와 함께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손님의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카메라는 항상 그들과 멀었다. 목포에서 세월호 인양이 진행될 때가 기억난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나의 마지막 세월호 관련 촬영이었다. 목포신항, 철조망이 처져있는 구역에서 파란색 컨테이너를 두 개 놓고 유가족들이 모여 인양선에서 들려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유가족들과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었다. 날씨가 쌀쌀했고 바닷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유가족 아버지 한 분이 나를 보며 말했다. - 이쪽으로 와. 그렇게 하지 말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따뜻한 곳으로 다가와 가까이 앉으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엉덩이를 들어 조금 더 다가갔으나 끝내 섞여 앉지는 못했다. 이런 마음으로. 이런 몸으로는 무엇도 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자. 그렇게 결심하고 세월호와 점점 멀어졌고, 2017년 말에는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세월호 현장에 더는 가지 않게 되었다. 다시 2022년 카페에서 나는 생각했다. 저들은 저렇게 쉽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왜 참사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이 나에게 질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일을 했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을 뿐 애도를 한 적은 없는 것 같다고. 불현듯 떠오른 기억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포로 내려갔다. 세월호가 인양되어 지상에 놓여지고는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 네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 세월호의 위치를 찾아 헤매다가 파란색 컨테이너 두 개를 발견했다. 위치가 반대쪽으로 옮겨졌을 뿐 과거에 보았던 그때의 컨테이너였다. 철조망에는 여전히 노란색 리본들이 매달려 있었다. 멀리 보이는 세월호 선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이 들끓었다. 저렇게 큰 배였구나. 바닥에 쓰러져 있던 붉은 영역과 불법 중축된 객실, 큰 프로펠러, 세월이라고 쓰여있는 낡은 글씨. 많은 게 지난 것 같아도 그리 변한 것 같지 않기도 했다. 세월호에 비하면 이태원 참사는 나에게서 거리가 더 멀었다. 이태원을 평소에 잘 찾지 않았고, 할로윈이라는 문화도 낯설었다. 참사 당시 나는 집에 있었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같이 게임을 하는 익명의 상대방들이 채팅으로 말했다. 지금 이태원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을 눈으로 담아두고 계속 게임을 했다. 게임을 끝내고 나서야 웹에 접속해 뉴스를 봤고,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지금 어디에 있냐고. 그러나 2014년부터 이어진 마음들, 세월호부터 이태원까지, 그간 떠돌던 마음들은 조금씩 연결되었다. 나는 이제 조금이나마 애도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애도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 모든 위로의 시도는 실패할 거라는 것. 내 위로는 정확한 위로와는 분명한 격차가 존재하리라. 중요한 건 정확함 그 자체가 아니라 정확함의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차를 인정하며 좁혀나가려는 시도, 그렇게 가닿으려는 노력,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기였다. 나는 그렇게 불확실한 애도를 다시 시도한다. 재난을 기억하자는 말이 어느덧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세월호 참사는 10주기를 지났고 이태원 참사도 2주기를 앞두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죽음이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새롭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 또한 또 다른 되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인간의 뇌는 가혹하리만치 지루한 것을 금방 잊는다. 정말 중요하고, 아름답고, 새로웠던 것들도 잊혀진다. 지고지순한 연인관계도 지루해지면 끝이 난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루해지고 잊혀지는 것들에 맞서며 무언가를 기억하고 되풀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수차례, 수백번 혹은 수천년동안 반복되었던 것일지라도 그렇게 다시 이야기하고, 쓰고, 말하고, 중얼거리고, 건네는 동안 지루한 것이 새로운 것이 된다. 다시 기억이 된다. 304낭독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한 작가 분이 오랜만에 유가족을 만나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 저희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그분은 이렇게 답했다. - 저희가 뭘 하고 있는지 지켜봐 주세요. 내가 해야할 일은 단지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태도로. 0에서 1로. 침묵에서 발화로. 무에서 유로. 정확한 위로에 다가가기.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나아가기. 그럼 다짐을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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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타인과 나,나와 타인
누군가 그녀에게 가장 좋았던 시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등학교 시절이라 답할 것이다. 종종 그녀는 그런 상상의 질문을 떠올리고 답을 내보았는데 그것은 고등학교 시절 이후부터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고등학교 시절을 어떠했는가.  그녀는 용산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교실 창문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지금은 한강이 보이는 위치에 급식실이 들어와 더는 보이지 않지만- 사실상 너무도 낭만적인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학교가 끝나고는 친구들과 가까운 이태원으로 달려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당시 이태원은 가장 최신의 패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고, 나이키와 뉴발란스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고, 매장에 안 나오는 라인도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었다. 한때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입을 옷이 맘에 안 들면 집에 다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을 정도 였으니 그런 친구가 이태원을 얼마나 수없이 갔을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옷을 사기 위해, 운동화를 구경하기 위해, 토요일이기 때문에, 심심해서 그렇게 이태원을 갔다. 그녀는 커서 이태원에서 꽤 오랜 시간 일을 했다. 매일 이태원을 출근하고, 그 길을 걸어다니고, 퇴근 후 친구도 만나서 맥주도 한 잔하고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때도 종종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것은 그녀 스스로에게 값진 행복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녀에게 힘이 되었다. 의도치 않게 문득 떠오르는 어떤 기억에서 그녀는 행복했고, 그래서 고마웠고, 그래서 웃었다. 그렇게 웃으며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출근길의 고단함도 조금은 줄어드는 거 같았다.  ‘이태원에서 심정지 00명’ 그것은 참으로 거짓말 같았고 그래서 실감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당시 그녀는 집에서 그녀가 좋아하던 프로그램에 심취해 있었고 그래서 그 글자를 보았을 때, 실은 ‘심정지 00명’이라는 글자보다 ‘이태원’이라는 글자에 눈길이 더 갔을지 모른다고 후에 생각했다. 그녀 마음 속 깊은 추억의 근거지인 그곳이 왜 뉴스 속보에 나오는지, 지금 그녀가 그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가려했던 것도 아니고, 그녀가 아는 누군가가 그곳에 갔을 가능성도 낮다고 생각했지만 눈길이 오래 머물렀던 것은 그곳이 그녀에게 그저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심정지라고 방송에 나올 정도라면 모두가 당연하게 구조되고 당연하게 치료를 받고 회복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내 보던 프로그램으로 다시 마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다음날 아침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몇 년 전에는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모두가 그곳을 찍고 있고, 뉴스에 나오고 있고 우리가 그 배를 보고 있으니 당연히 모두가 구조될 거라 믿었지만 그 누구도 구조되지 못했던 몇 년 전처럼 그 이태원의 거리에서도 구조될 수 있었던 이들은 너무도 적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거기엔 가까운 곳에 경찰서가 있는데, 뛰어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소방서가 있었는데, 차로 조금만 가면 큰 병원도 있는데 왜 이런 일은 반복되는가. 전혀 실감할 수 없는 그날을 아무리 생각하고, 정보를 뒤져보고, 읽고 보아도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이상하다 느껴질 만큼 그날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빛나는 기억의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랜 시간이었다. 그녀는 뭔가 해야 했는데 그래서 그들을 ‘기억’하기로 했다. 거기에 있던, 그곳에서 쓰러진 이들은 기억해보기로 했다. 그들과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음에 써가며 읽고 또 읽었다. 그곳에서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는 유가족, 친구, 연인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그 글들을 읽다보니 처음에 그들은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녀이기도 하고, 그녀의 언니이기도 하고, 그녀의 친구이자 그녀의 가족이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앞날을 위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응원하며 하루하루를 채우던 그들의 모든 모습이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깨닫고 그제 서야 그곳에 있던 이들을 위해, 소중한 이를 그곳에서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울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겨우 그들을 ‘애도’하는 한 걸음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이태원’만큼이나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뭔가 하고 싶었고,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이렇게 흘러 보내지 않고 무언가를 해야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 믿기로 한 것이다. 몇 년 전 바다에 가라앉던 배를 바라보기만 하고 안타까워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버린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이 시간들 속에서 그녀가 느끼고 고민하고 생각한 것들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 혼자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지만, 그렇게 더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으로 무언가를 해낸다면 분명 다음은 조금 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 글을 쓰며, 또 다음 글을 준비하고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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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24년 이태원 2주기, 잘 지내고 계신가요?
    1.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란    22년 10월 30일 일요일 새벽 4시 30분. 평소와 다르게 알람 없이 1시간 일찍 눈이 떠졌다. 이날은 아침 6시 출근이었다. 그래서 전날 9시에 평소보다 일찍 취침했다. 일어난 김에 눈을 비비고 산책이나 갈까하며 폰을 봤는데 웬 부재중 전화가 30통이나 와있었다. 마지막 전화는 엄마로부터 1시간 전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큰일이 났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엄마는 흥분된 목소리로 ‘야! 너 어디야! 이태원 간거 아니지? 정말 다행이다!’하며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별일 없는데..’라고 말하며 부모님을 안심시킨 후 전화를 끊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이태원’, ‘압사사고’ 등의 이야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흥분된 목소리에서 뭔가 큰일이 난 것임은 분명했다.  그날 새벽의 인터넷은 온통 이태원 참사 이야기뿐이었다. 많은 사건 사고를 봐왔지만 ‘압사사고’라는 건 태어나 처음봤다. 무려 159명이 사망한 너무나 큰 대형 참사였다. 사진으로 본 이태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태원의 엄청난 인파와 압사사고로 인한 심정지 환자들을 심폐소생술하는 의료진과 시민들의 모습이 너무나 참혹하고 안타까웠다. 이후 사망자들의 부모들이 속속 이태원에 도착하여 울부짖는 모습을 봤다. 한순간에 이 세상의 전부였던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할까. 놀러간다는 아들, 딸의 목소리가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그제야 부모님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통화해보니 엄마는 통화가 계속 안 되자 고향인 창원에서 차를 타고 올라오려고 하셨다고 한다. 혹시나 이태원에 갔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30통의 전화를 걸며,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르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과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웠을 부모님께 죄송스러웠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집을 나서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 뒤로 부모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 헌신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젊은 20~30대라고 한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청춘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부모들의 마음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참사 피해자의 부모라면, 과연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식을 둔 부모님의 마음을 처음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출근하는 내내 정신이 없었고 마음이 아팠다. 또한 지금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유가족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기도하며 직장에 도착했다. ‘힘들겠지만, 부디 잘 견뎌주기를’라고.                                        <  이태원 합동 분향소, 사진 출처 - 23.02.05 네이버포토 뉴스 > 2. 살아서도 죽어서도 마음 편할일 없는    이태원 참사 사건이 발생하고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사망자들을 향한 여러 말들이었다. ‘놀러가서 죽었는데 왜 추모를 해?’, '세월호 때랑 마찬가지로 장사하는거 아니냐?', ‘놀러간 애들 왜 보상해줘야 되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도 아닌데, 왜 희생자로 표현해야 되나?’ 등의 비난이 난무했다. 모든 국민이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애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잃은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다. 위로는 못해 줄 망정 비난은 삼가해야 되는 게 아닌가. 2차 가해를 가하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차올랐다. 만약에 내가 저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었다면 참을 수 있을까? 지금 마음은 결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까지 우리 사회가 양극화된 사고와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부가 해주는 보상이든 경제적 지원이든 뭐가 됐든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가족들의 아픔을 감싸주고 위로하며, 생존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치료와 사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정부는 사고 직후 바로 다음날 바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어떠한 질문도 요구도 받지 않겠다는 자세로 보였다. 이후 장례식비(천오백만원)와 위로금(천만원) 등을 지원한다고 구체적으로 발표했다. 그 후 국민들의 비난과 오해는 더 거세졌고 ‘죽은 자식들을 핑계로 돈 뜯어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은 더 강하게 증폭됐다. 사망자들과 유가족, 생존자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제대로 된 애도와 위로, 치료와 보상을 받기도 전에 많은 비난과 질책을 받아야 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 했길래?그로 인해 더욱더 고립과 단절되는 생존자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누구 하나 진심어린 위로와 도움 없이 그들은 결국 스스로 정부와 세상을 상대로 진상규명과 대처를 위한 긴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3.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정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사회    이태원 사건에 관한 뉴스와 다큐를 면밀히 살펴보니 이 사건은 분명한 고위공직자들의 실수로 인해 일어난 사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로나로 2년 만에 열리는 이태원 거리에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경고가 3~5일부터 계속 나왔다. 그러나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와 용산구청장, 경찰청장 등의 고위공직자들은 ‘사람이 좀 더 많이 모일 뿐, 언제나 안전했다’라는 말로 방관 했다. 22년 10월 29일 당일 6시부터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오후 6시 30분부터 밤 10시 11분까지 총 11건의 압사를 언급한 112 신고가 접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질서 정리 및 통제를 위한 경찰기동대 파견은 없었다.  저녁 10시 15분. 압사사고가 터저자 정부와 경찰은 그때부터 부랴부랴 기동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대통령부터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서장, 용산구청장 등 고위공직자들은 모두 사건이 터진 뒤에 심각성을 인지하고 11시 넘어 현장에 도착했다. 무방비, 무능력 대응의 정부에 젊고 젊은 청춘 159명이 사망했다. 많은 인력이 필요 없이 일방통행만 했어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 이렇게 좁은 골목에 많은 사람이 모일 거라고 언론, 뉴스 등에서 수차례 경고했지만, 왜 미리 경찰을 배치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정부와 경찰들은 사전에 뭘 했고 왜 대비책을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는가.  이태원 참사 이후 다음날 그들은 언론 브리핑에서 미리 인력을 배치했고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대통령, 행정안전부, 경찰청장, 용산구청장 등 어느 누구도 진심어린 사과를 한 사람은 없었다. 위로금과 장례비 등의 금전적인 보상만 있을 뿐, 그들은 이후 현장 방문도, 유가족도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국민을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돌봐야 할 대통령은 이태원 사망자 49제에도 참석하지 않고 크리스마스 행사에 갔다고 한다. 유가족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대통령의 진심어린 사과와 정부의 책임있는 자세가 아닐까. 그러나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재난 상황 속에서 고위층들의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정책과 대비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입는 사례들이 앞으로 더욱더 많아질 것 같아 두렵다. 국민으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안전한 사회는 더 이상 오지 않는 걸까? 그리고 그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더 나아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 국민들은 어떤 노력을 해야나가야 할까?     4. 참사 2주년, 부디 잘 지내시기를  다가오는 24년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 2주년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이태원 참사의 문제가 뚜렷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력 끝에 특별법은 만들어졌지만 책임자의 사퇴는 물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정부의 무관심과 사람들의 비난속에서 생존자들은 점점 더 세상밖으로 나오기를 꺼려하고 있다. 유가족은 한 생명이 떠난 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이 나라의 잘못된 대응과 책임회피가 그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이태원 참사를 돌이켜보며 나의 삶에서 중요한게 무엇인지, 또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걸어갈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본다. 또한 그동안의 여러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것도 반성했다. 나는 언제 약자의 편에 한 번이라도 서준적이 있었던가. 아니, 조그만 위로라도 건낸적이 있었던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크다. 또한 당장에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는 것에 무기력함이 들기도 한다.  이태원 2주기, 그때의 참사를 떠올리며 유가족들이 겪었을 아픔을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고통. 제대로된 사과와 위로받지 못한 아픔과 서러움. 온갖 비난과 욕설을 들어야 했던 비통함과 억울함. 아직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실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부디 이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셨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어두컴컴한 새벽이 가고 아침이 오듯, 유가족에게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과 마음 한편에 안정과 평화와 오는 동시에 떠난 청춘들이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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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1)
집담회 기획 (22.12.22.) - 말 걸기, 물꼬 트기 "얘들아 이태원 뭐냐..." 그날 저녁, 친구에게 메시지를 받은 나는 무심코 'ㅋ'을 연타하며 답장을 보냈다. 늘상 일이 바빴던 친구이기에, 오래간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 친구가 놀러가서 아주 신이 났구나.'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그 행간이 다르게 읽혀 혹시나 하는 마음에 SNS에 접속하니 충격적인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도무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싶어 오밤중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내 생각을 멈추고자 쫓기듯 잠을 청했고, 다시 깰 때쯤에는 사상자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 있었다. 한동안 얼이 빠진 채로 방 안 곳곳을 서성였다.Q1) 이튿날 아침, 친구들은 서로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괜찮냐고 물었고, 또한 괜찮다고 답했다. 물론 그래서 정말 괜찮았던 건 아니다. 이미 참사를 둘러싼 반응들에 기진한 상태였다. 한 지인은 현장 사진을 공유하며 "내가 이래서 핼러윈을 싫어하는 거야"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또 다른 지인은 전화로 "너는 저런 데 안 다녀서 다행이다" 걱정스레 덧붙였다. 아직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지 않냐고, 그런 항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다들 혼란한 와중이라 그러겠거니 이해를 우선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주변 피해가 없다며 쉽게 한시름 놓던 자신이 부끄러운 탓도 있었다.Q2) 참사 직후 내가 겪었던 것들이란 그렇다. 슬픔과 분노보다 무력감과 소외감이 훨씬 깊었다. 먼저, '왜'라는 의문을 가질수록 무력감에 휩싸였다. 우리 사회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망가졌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그 해결도 요원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속절없이 흐르는 일상에 소외감이 들었다. 모두 이 정도 비극쯤은 금세 잊고 지내는 건지 지나치게 조용한 풍경이 이상스러울 때가 많았다. 정치권과 시민 사회는 기민하게 대응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은 여전했다. 정권의 책임을 묻는 것 이상의 고민과 국가가 가로막은 애도를 나누기엔, 어쩐지 전부 아쉽게 다가왔다.Q3) 그해 겨울, 수시로 이태원역을 찾았다. 하루는 피켓을 들고 "프리허그"를 외치는 외국인 모녀를 보았는데, 내가 그런 캠페인에 더 이상 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몹시 당황했다. 동시에 방문객들에게 일일이 국화꽃을 쥐여 주는 상인의 모습을 숭고하게 바라보았다. 그만큼 복잡한 심정이 뒤따랐고, 어쩌면 꼭 복잡하게 참사를 해석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초등학교 동창을 잃은 친구와의 동행이었다. 골목 주위를 걷다 정류장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몇 대의 버스를 떠나보냈다. 아무래도 소화하지 못한 말뿐이라 두서는 없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Q4) 흔히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연결이 어떻게 가능한지 몰라 곧잘 헤맨다. 그 무렵, 나는 갈피를 잡고 싶어 일정이 되는 대로 관련 행사에 참석했다. 대개는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반복되는 여성들의 죽음을 연상했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염려된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해외에서 소식을 접하고 추모 공간을 꾸렸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유가족과 생존자의 회복을 돕고 싶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혼자 하던 속앓이를 털어놓으며 치유될 수 있음을,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을 수 있음을 실감했던 것 같다.Q5) 집담회를 직접 기획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데서 출발하고 싶었다. 다만, 전문가의 조언도 유념했다. 허심탄회한 모임은 위험할 수 있다고. 저마다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기 마련이기에, 그런 바람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상처가 덧난다고. 때문에 얼마간 주제를 좁힐 필요가 있어 참석자들과 공유할 몇 가지 질문을 미리 정했다. 또한 그에 대해 내가 먼저 대답해 보았다.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로 말을 걸고 물꼬를 트고 싶었는데, 사실 이 글이 그 당시 그렇게 쓰인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데 여전히 유효하지 않나 싶어 조금 고쳐 남겨 본다.Q6) 질문들 Q1) 어디서 어떻게 참사 소식을 접했나요?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들었나요?Q2)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위로 혹은 상처가 되었던 순간이 있었나요?Q3)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느꼈나요? 무엇이 고민되었나요?Q4) 어떻게 추모하고 애도했나요? 그 방식을 어떻게 이어 가면 좋을까요?Q5) 어떤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어떤 이야기까지 들어 보았나요?Q6) 지금 당장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혹은 어떤 실천을 해 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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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메모리얼과 세월호 기억교실, 이태원 참사, 아픔을 기억하는 명징한 방법
미국 뉴욕의 경제 중심 월가(Wall Street)에는 꼭 가 봐야 하는 곳이 있다. 즐거운 곳은 아니다. 오히려 가슴 아픈 곳. 바로 9/11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WTC) 메모리얼 & 뮤지엄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은 가장 공포스러운 곳이 되었다. 미국 경제의 상징건물이었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거짓말처럼 차례로 무너졌다. 납치된 항공기가 쌍둥이 빌딩을 뚫고 무너뜨리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이 세기의 대폭발 테러는 90여 개국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지금 이곳에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안에는 WTC의 마지막 기둥과 파편, 당시 희생자들이 지나갔을 계단의 일부와 건물의 한 면 등이 테러의 상흔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참사의 흔적인 먼지가루들이 시간이 멈춘 듯 보존된 상점의 옷 위에 여전히 가라앉아 있다.  9/11 메모리얼 & 뮤지엄 안에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게 된 구역이 있다. 당시 사건을 재현한 역사관이다. 이곳에서는 아픔을 세세히 기억하고 명징히 드러내 밝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느낄 수 있다.  9/11 사건이 터진 8시부터 분단위로 세계무역센터의 상황, 대통령 및 정부 대응, 경찰 대응, 소방관 대응 등 전과정이 디테일하고도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날의 언론보도, 뉴스 상황, 주변인들의 반응 등의 영상들은 우리가 바로 그 날에 들어간 듯 생생하게 녹화되었다.  유치원에 참여 중이던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사건 소식을 접하고 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부터, 일사천리로 대응이 진행되는 과정과 뉴욕 및 주변 도시 각지에서 경찰과 소방관, 응급 의료진들이 모여든 지도까지. 뿐만 아니라, 신고가 들어온 시각과 당시 전화로 신고하고 대응하는 음성 녹음도 그대로 들을 수 있다. 벽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들면 관람자가 직접 그 다급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항공기가 첫번째 건물을 통과해 폭파되고, 두번째 항공기가 두번째 건물을 통과한 뒤,  각 건물의 몇번째 층 희생자가 전화를 걸었는지, 또 그 목소리도 확인 가능하며, 건물이 무너진 뒤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혹은 목숨을 잃은 영웅들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무엇보다 충격을 금치 못하는 생존자들의 증언도 하나도 남김없이 주워 담았다.  다른 한편으로 납치된 항공기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영상, 음성 등 모든 자료들이 총동원되었다. 테러범이 공항 출입을 하는 CCTV 영상 기록. 테러범들이 조종실을 침입하여 나누던 대화도 녹음된 음성과 번역된 문자로 귀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일촉즉발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채로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메세지나 음성 녹음을 남긴 항공기 안의 희생자들의 목소리와 문자 내용도 확인하게 된다.  “비행기에 조금 문제가 생겼어. 별 일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랑해. 다른 가족들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해 줘.”  “비행기가 납치된 것 같아. 여보, 사랑해. 아들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해 줘.” 그날의 행적은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놓았다. 불탄 소방차, 희생자의 구두, 가방 등. 몇 시 몇 분 몇 초라는 시각까지도. 당시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위한 멘탈 치료도 이루어진 걸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끝일까. 기억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두번 다시 동일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다음일 것이다.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은 당시 사건 기록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후 정부가 어떻게 사건을 규명하고, 무너진 세계무역센터를 다시 일으켜 세웠는지, 또 기업들은 어떻게 사회적 재난에 기부로 마음을 보탰는지 보게 된다. 사건의 원인 규명 과정, 재건 과정, 새로이 지어가는 세계무역센터의 타임랩스 영상.  지나는 길 한쪽 벽에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금언이 적혀 있다.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없을 것이다. - 베르길리우스” 이 문구는 묘하게 기시감을 준다. 바로 얼마 전 10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참사 기억식, 4월 16일에 이와 비슷한 문구를 똑같이 되새겨 본 적이 있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미국의 재난에 대응하는 방법, 기억하는 방법을 보자니 세월호 참사의 기억관 및 기억교실이 사뭇 안타깝게 느껴진다. 당시의 상황 및 원인 규명, 정부, 해경, 언론의 대응, 희생자들의 유품이나 가족들의 아픔 등.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드러난 게 없고, 드러내려 하지 않고, 심지어 대통령이 그 시각 무엇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국가 재난 사건에서, 단지 책임자를 찾자는 것 이상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소소하다 못해 참담하다. 희생자들의 가족들만이 세월호 참사 기록단을 만들고 운영하며, 그 날을 기억하려 애쓴다. 국가도, 기업도, 사회도 그 기억을 되새기기 위해 과연 얼마나 노력했을까. 몇 해 뒤 일어난 이태원 참사 역시, 그 연장선 상에서 변화가 없음을 보여준다. 아직도 참사의 대응에 대한 논란만 존재할 뿐이다. (연합뉴스_ 장보인 기자_"기동대 있었다면 이태원참사 피해 최소화" 경찰들 진술) 심지어 2024년 6월 문을 연 이태원 참사 임시 추모 공간 ‘별들의 집’ 도 11월에는 재개발로 인해 자리를 비워야 한다. (뉴시스 홍연우 기자 ‘시한부’ 이태원 참사 추모 공간, 석달 후엔 어디로 가야하나) 사회적 재난의 기억들이, 매 순간 잊혀지고 반복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망각으로 가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어떻게 예방 혹은 재건해야 할지, 여전히 망연자실한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가슴 아픈 기억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고 사회적으로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 참사 가족단이 이룩한 것들도 우리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기억 교실이 남아 있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 가족을 위로할 수 있고, 법률들을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재건했는지 더불어 기록하고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매번 일어나는 재난에 늘 같은 방식으로 흐지부지 지나쳐 버린다면, 우린 그 참사에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그 희생자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지점에서 9/11 메모리얼과 뮤지엄의 기억 재생 방법과 그 대처는 우리의 아픔과 참사를 기록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줄지도 모른다. 반복되어선 안되는 역사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말처럼 결코 시간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서는 안된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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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어떻게 ‘참사 공화국’이 되었나
대한민국은 어떻게 ‘참사 공화국’이 되었나 참사들로 보는 국가와 정부의 역할과 재난에 대한 접근법 이야기 대한민국, ‘참사 공화국’ 작금의 대한민국은 사실 ‘참사 공화국’ 이라고 해야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 정도로 참사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이고, 국가와 정부는 그럴 때마다 그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요즘 들어 크고작은 사고와 사건이 줄지어 일어나고, ‘참사’라고 불러야 하는 규모의 재난들 또한 적지않게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참사가 일어났다. 문민정부 시절 일어난 서해 페리호 참사, 박근혜 정부 당시 일어난 세월호 참사, 문재인 정부 시절 일어난 광주 참사, 그리고 작금의 윤석열 정부 들어 일어난 10.29 이태원 참사와 바로 직전에 일어난 화성 참사까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참사’로 얼룩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하인리히 법칙’ 이라는 법칙이 있다. ‘1:29:300의 법칙’ 이라고도 불리는데, 1개의 참사가 일어나기 이전에 29건의 큰 사고가 일어나고, 그 이전에 300건의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는, 역으로 이야기하면 300개의 작은 사고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29건의 큰 사고가 일어나고,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큰 참사로 이어진다는 법칙이다. 이 하인리히 법칙은 2014년 4월 16일, 304명이 목숨을 잃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정부가 규제를 완화하고 크고 작은 해운사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1993년 일어난 서해 페리호 사건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다시 수많은 해운사고들을 방조한, 그리고 규제를 완화한 결과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형 해운사고는 대개 20년을 주기로 일어난다는, ‘대형 해운사고 20년 주기의 법칙’까지 더해져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의 부재를 규탄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1993년 서해 페리호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참사는 20년 조금 넘는 간격을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참사의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는 서해 페리호 참사의 반복이라는 언급들도 등장했다. 참사에 무심한 국가와 정부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또 수많은 참사들이 일어났다. 2021년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철거중인 건물이 쓰러져 버스를 덮친 광주 참사, 2022년 159명이 목숨을 잃은 10.29 이태원 참사, 그리고 지난 6월 24일 화성의 배터리 제조 공장 아리셀에서 일어난 화재가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 참사까지,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 참사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갔다. 특히 2020년대 들어 참사라고 할 수 있는 사건만 3건이 일어났다. 심지어 이번 화성 참사는 재난 발생 이틀 전인 22일에도 해당 공장에서 리튬 배터리가 폭발해 화재가 발생했으나, 사측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입단속을 시켰다는 정황이 나왔다. 그 말은 한국 사회와 국가, 정부가 크고 작은 사고와 사건들에 대해 무심하고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각기 참사들은 한국 사회의 치부를 찔렀다. 먼저 세월호 참사가 정부 주도의 해운산업에 대한 규제완화와 불법에 대한 눈감아주기, 사고 상황에서 국가의 부재를 폭로했다면, 광주 참사는 철거와 재개발에서 일어나는 불법과 부실공사 등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가 컨트롤 타워의 부재, 치안의 부재, 공권력의 사유화 등을 알렸고, 이번에 일어난 화성 참사는 재난이 예상됨에도 무시한 것, 사고 상황에서 매뉴얼의 부재와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는지에 대해 폭로했다. 이러한 참사가 전하는 메시지들을 모아보면, 재난 상황에서 컨트롤 타워의 부재와 불법에 대한 눈감아주기, 규제 완화 등으로 종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한번 종합해보면 국가의 부재라고 할 수 있는 ‘부작위성(unterlassung)’, 그리고 재난의 책임을 국가나 정부가 지지 않는다는 ‘외부화(out-sourcing)’ 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부작위성은 재난이 일어날 수 있거나, 재난이 일어난 상황에서 국가가 책임을 방조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에서 국가는 이미 사고 위험성이 있는 상황에서 불량 선박인 세월호의 출항을 허가했고, 재난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재난의 컨트롤 타워인 박근혜 정부는 7시간 동안 부재했고,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했다”는 말로 책임을 해경에게 전가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서 공권력은 그 날 재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이태원 대신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에 대부분이 배치되어 있었고, 윤석열 정부와 경찰은 책임을 애써 피해갔다. 그리고 재난 상황에서 책임자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외부화는 세월호 참사 당시의 박근혜 정부와 이태원 참사 당시의 윤석열 정부가 보인 모습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로 말이다. 재난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는 두 참사 모두에서 존재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뒷수습을 하는 모양새만 보였다. 박근혜 정부는 해경에게, 윤석열 정부는 재난의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사실상 그 아젠다에서 도망을 쳤다. 사령탑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국가 공권력은 우왕좌왕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바빴고, 그 책임은 재난, 즉 참사로 이어졌다. 둘 다, 아니 사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참사들은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고,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재난들이었다. 국가와 정부가 했어야 할 일 - 진상 규명 규제를 강화하고, 불법을 눈감아주지 않고, 적절하게 치안을 배치하고, 국가가 적극적이었다면, 그리고 재난 예방에 대한 교육이 충실히 이루어지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 다른 참사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이러한 참사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참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후에 사후약방문이나마 이루어진 재난은 기껏해야 광주 참사정도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광주 참사도 사후약방문이라도 하라는 사회적 목소리 때문에 겨우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고,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사후약방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정조사는 유명무실했고 겨우 제정된 특별법은 시행령으로 누더기가 되었다. 이태원 참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심지어 아직도 특조위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았다. 참사의 진상 규명을 두고, 참사와 그 사회적 여파를 축소하려는 이들은 주로 ‘사고-보상 프레임’을 사용한다. 사고-보상 프레임은 “사고가 일어났고, 피해자들은 보상을 바란다” 라고 재난을 축소해버린다. 이 프레임은 참사가 “왜 일어났는가?”와 “어떻게 일어났는가?” 라는 말을 봉쇄시켜 버린다. 국가와 정부의 실패를 개인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세월호 참사에서는 “죽은 자식을 팔아먹는다” 나 “이미 보상을 받아놓고 더 달라고 한다”며 참사의 피해자들과 유가족을 폄하했고, 논쟁의 여지를 봉쇄해 버렸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놀러 갔다 죽었는데 국가와 정부 탓을 한다”(이 말은 세월호 참사부터 유구하게 쓰인 말이다) 는 말로 재난을 일축하려고 했다. 참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고-보상 프레임’을 넘어 ‘사건-규명 프레임’으로 재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고, 재난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으로 사건 현장을 만든 것을 넘어 사회의 문제점들이 모여서 터진 ‘총체적 사건’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박명림은 “사태의 궁극적인 진실을 남김없이 ‘알 권리’, 즉 진실권은 정의와 인간 존엄을 위한 기본 권리이며, 치료를 받을 권리 또한 사태의 진실을 정의롭게 판정할 수 있는 진실권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참사로 이름붙여진 사건들에서 제대로 ‘알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고, 사회 구성원들은 공통의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정부는 공권력을 이용해 자신과 다른 성향을 가진 사회 구성원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전쟁정치(war politics)’를 사용했다.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가 제안한 전쟁정치 개념은, 국가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국민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마치 적을 다루듯이 하는 것을 일컫는데, 크게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에서 박근혜 정부와 윤석열 정부는 유가족들과 그에 연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규정, 치안 공권력을 통해 마치 ‘토벌’하려고 했다.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배상 대신 그들을 경찰로 포위하고 물대포와 최루액을 퍼부었고, 윤석열 정부도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을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citoyen)’ 으로 대하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의 분향소에는 늘 허리춤에 최루액을 꼽은 경찰들이 서성였고, 늘 유가족들과 분향소에 오는 사람들을 예의주시하곤 했다. 마치 ‘언제 범죄를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 처럼 대한 것이다. 책임전가의 결과는 심판 특히 이태원 참사라는 전적이 있는 윤석열 정부는 이번에 일어난 화성 참사로 인해 다시 한 번 도마에 오를 것이다. 아니 올라야만 한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 정책, 산업안전 및 보건 정책, 이주민 정책, 규제 정책 등을 질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질타를 통해 성역 없는 비판을 받아야만 하고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진상 규명을 통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트라우마를 해결할 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는 윤석열 정부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숙제이고, 빠르게 돌아가는 참사의 시계를 멈출, 적어도 느리게 돌려놓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사고-보상 프레임’과 ‘전쟁정치’로 참사의 피해자들과 사회 구성원들을 무책임하게 대한다면, 또 ‘조금 있으면 조용해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 참사를 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또다시 언제 어디서 일어날 지 모르는 참사에 노출될 것이고, 국민들은 국가와 정부를 더욱 더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희생된 참사 앞에 부도덕하고 불성실하게 나선다면, 그리고 또다시 편가르기를 한다면 그것은 국가와 정부 차원에서 저지르는 ‘내란음모’ 라고 밖에 볼 수 없고, 구성원들이 ‘저항권’을 언제든지 발동해도 이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참사 공화국’이라는 오명은 한국 사회의 평판을 저하시키고, 그러한 나라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용납하기 쉽지 않은 모욕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정부의 실정 때문에 구성원들이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은 그 자체로 ‘내란’ 이다. 책임전가의 결과는 정권 심판이 될 것이다.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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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추모] 221119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지난 11월 19일 토요일 오후 5시, 녹사평역 3번 출구 인근 이태원광장에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녹사평역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같은 시간의 (숭례문부터) ) 시청역에서의 일에 대해 공유드리고자 합니다.  숭례문 앞 태평로에서는 촛불승리전환행동의 주최로 경찰 추산 3만여 명, 주최 측 추산 20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습니다.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전광훈 목사, 자유통일당 등 보수단체 주최로 주최측 추산 3만여 명이 모여 맞불집회를 개최했다. "김건희 특검, 윤석열 퇴진"과 "이재명, 문재인을 구속하라"라는 이상한(?) 이항대립의 구호가 광화문과 시청 일대를 가득 채웠습니다.(프레시안, 2022.11.19) 시청역 7번 출구 앞에서 숭례문쪽을 바라보며, 집회 분위기를 살펴봤습니다. 숭례문부터 시청까지 거의 모든 도로를 시민들이 꽉 채워 앉아 있었습니다. 저 멀리 숭례문이 보입니다. 거대한 전광판들과  엄청난 크기의 음향 기기들이 맨앞 무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목소리들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008년 촛불, 2016년 촛불 이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모인 적은 처음일 것 같습니다. 중앙무대의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민생파탄 정치보복 평화파괴 친일매국 윤석열 퇴진",  “주가조작 허위경력 상습사기 김건희 특검!”이 적히 피켓을 들고 정권 퇴진과 김건희 특검을 외쳤습니다. 중간중간 “퇴진이 추모다”라는 피켓도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하며, ‘피해자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촛불행동 대표의 말을 포함해서, 이태원 참사는 이 집회에서 중요하게 이야기되었습니다. 연단에서 한 시민은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의 책임이라는 것은 책임 있는 사람에게만 딱딱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참사 당일 평화롭기 그지없었던 집회에 경찰을 총동원해서 감시했다”며, “경찰이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또 한 시민은 “그날의 참상은 어느 집 자식이었더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한겨레. 2022.11.19) 10차 이상 이어져 온 퇴진운동의 분위기가 이미 무르익었던 것인지, 이태원 참사가 퇴진행동의 급격한 확산에 핵심 계기로 작동했는지 딱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아마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대응은 정권 퇴진 운동으로 환원 되느냐, 그와 구별되는 구체적 대응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지느냐의 물음에 직면한 듯 보입니다.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며 퇴진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퇴진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이 이태원 참사의 대응에 함께 연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도 절대 아닙니다. 퇴진운동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연대는, 오히려 꼭 필요한 고마운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입니다. 다만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응이 퇴진을 위한 땔깜으로 소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이태원 참사의 원인이 규명되고 책임자가 처벌되고, 사회적으로 기억되고, 대응체계가 마련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시간 반 전 녹사평역 3번 출구 인근으로 되돌아 가보겠습니다.   이태원 광장 맞은 편, 언덕에 추모 플래카드가 걸려 있네요.  참여연대 주최로 ‘10.29 이태원 참사 시민추모촛불'이 열렸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참여연대 홈페이지)  어둠이 내리기 전, 시민추모촛불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추모촛불'은 “성역없는 진상규명. 책임자를 처벌하라”, “이태원참사, 국가 책임이다. 재발방지 대책 마련하라”를 핵심 구호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발언들이 이어지고, 추모 공연이 이어지는 사이에 어둠이 내렸습니다. "참사가 정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사이, '추모하겠다' 이야기하며 마음을 나눠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박성현 4.16재단 나눔사업1팀 팀장의 발언이 숭례문 퇴진행동과 떨어져 작게나마 이루어지는 추모촛불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파하는 분들의 마음을 보듬고, 2차 가해를 막고, 피해자의 마음으로 접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158명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이태원의 주민들, 현장에서 대처한 소방관과 경찰관, 참사의 생존자들까지도 어떤면에서 피해자라는 이야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날 집회는 이태원 참사 당일 112에 첫 신고 전화가 접수된 시간인 '6시 34분'에 촛불을 일시 소등하며 끝났습니다.(프레시안. 2022.11.19) 3일 후, 2022년 11월 22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 입장발표’ 기자회견이 이루어졌습니다. 흐느낌과 절규 속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유족의 메세지와 정부의 대응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상세한 내용은 기자회견 전체 영상 확인) 이날 유족들은 6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하였습니다.(한겨레, 2022.11.22) 참사 책임이 정부·지자체·경찰에게 있다는 정부 입장 발표 및 대통령의 진정한 사과 성역 없는 책임 규명 피해자 참여를 보장하는 진상 규명 참사 피해자의 소통 보장, 인도적 조치 등 적극적 지원 희생자에 대한 기억과 추모를 위한 조처 2차 가해 방지를 위한 정부의 공식 입장 표명 및 구체적 대책 마련 책임 규명과 사회적 기억·추모,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피해당사자의 참여 보장에 대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나온 셈입니다. 퇴진행동을 주도 해 온 ‘촛불행동'에서는 “10.29 참사 유가족 대책본부를 꾸리”자며, “유가족분들의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제안한 상황입니다.(촛불행동 페북 페이지) 숭례문의 20만 퇴진행동 가운데에 이루어진 녹사평의 100명의 시민추모촛불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퇴진 구호로 환원되지 않는 이태원 참사의 원인·책임 규명 및 사회적 기억·추모, 안전사회를 위한 대안 체계의 마련 등이 이제 가시화 된 피해자·유족 당사자의 직접적·주도적 참여와 함께 이어져 가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는 퇴진행동 참가자들의 이태원 참사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마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대가 잘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녹사평역 옆 이태원 광장에서 숭례문으로 이동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며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역 방향의 길을 봅니다. 불은 밝지만 쓸쓸한 느낌이 듭니다. 221105 [이태원 참사 추모]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221112 [이태원 참사 추모]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9 [이태원 참사 추모]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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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추모] 221117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7 수정 보완) 지난 11월 12일 토요일 오후 5시,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생각이 듭니다. 일단 현장 사진부터 공유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여 있었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비가 마구 쏟아져도 많은 분들이 집회에 함께 하셨습니다. 옅은 어둠과 전광판 빛과 비가 현장을 사이버펑크틱(?)하게 만들어주고 있네요.    삼각지역 바로 옆 도로 한 차선을 시민들이 길게 채우고 있고, 대형 전광판이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는 광경이 이색적이었습니다. 좁은 길에 길게 모여 집회를 할 경우, 맨앞의 무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아 답답할 수 있는데, 대형 전광판과 음향시설을 통해 모든 분들이 집회에 좀더 집중해서 참여 할 수 있도록 준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각지역 옆은 동시에 대통령 집무실 인근 도로인 셈인데, 표지판에 바로 옆이 이태원역이라고 적혀 있는 모습이, 이번 참사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뉴스타파의 기사(영상) ‘참사 그 날의 경찰, 이태원보다 대통령실이 중요했던 이유’에 보면, 용산경찰서가 참사 현장 인근의 대통령실 집무실 경호에만 집중했던 것이 참사가 벌어지도록 한원 원인을 이루는 중요한 요인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퇴진이 추모다’, ‘퇴진이 평화다' 구호가 적힌 피켓들이 눈 앞의 광경을 가득 채웁니다. 지난 11월 5일 집회에서는 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에 집중했는데요, 11월 7일 집회에서는 ‘퇴진' 구호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중고생들도 참여하여 맨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같은 날 광화문에서 정권 퇴진 집회를 하고 왔다고 하네요.  집회 맨 앞 무대의 플래카드에는 “이태원 참사 책임자 처벌! 윤석열 퇴진! 14차 촛불대행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촛불행동’에서 주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핵심 구호는 "퇴진이 추모다"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의 큰 집회는 두 번째인데, ‘14차'라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태원 참사 전부터 정권 퇴진을 외치는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고, 참사 이후 11월 5일에는 추모에 집중하는 집회로 변경하여 진행하였고(퇴진 구호 자제), 이 날에는 다시 전면에 ‘퇴진’을 내건 것으로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에 정부 차원의 책임이 있다는 점이 점점 드러나고 있지만, '이태원 참사 이후의 대응이 당장 퇴진 구호로 이어져야 하는 것인지', '기존의 퇴진 집회에 이태원 참사가 힘을 보태는 수단으로 환원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와 같은 생각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현장에서의 느낌으로는 그랬습니다. ‘퇴진이 추모다'라는 간명한 핵심 구호는 '본질을 꿰뚫는 힘의 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태원 참사과 관련된 수많은 목소리들과 필요한 논의들을 사상시키고 정권 퇴진으로 환원하는 중심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다만 글을 쓰는 시점에서 촛불행동 페이스북 페이지에 들어가보니, “김건희 특검! 윤석열 퇴진! 11월 전국집중촛불”이라는 이름으로 11월 19일 시청역 인근에서 ‘15차 촛불대행진’을 진행한다고 하네요. 정권 퇴진을 위해 이루어지던 연속 집회 진행 과정에서 13, 14차가 이태원 참사 관련 이슈를 다룬 것으로 봐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권 퇴진을 위해 행동하시던 분들이,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분들을 위해 잠시 자원을 들이고 시간을 내어 행동해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고, 또 새롭게 벌어지게 될 지, 그리고 그 행동의 방향이 어떠 할 지 궁금해집니다. '10.29 이태원참사 청년추모행동'이 매주 목요일 저녁 6시34분, 이태원역에서 침묵시위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이 글이 쓰여진 바로 다음 일정은 11월 17일 목요일 오후 6시 34분일 것 같습니다. 여러 정당의 청년들, 그리고 청년단체들이 모여서 진행하는 이 행동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정부, 그리고 정치가 그 일에 소흘하거나 잘못된 대처를 한다면 시민들이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하여 신경 써야 할 부분, 논의되고 있는 부분들 중 몇 가지를 공유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이슈와 관련하여 생각할 거리들을 옅볼 수 있는 기사 링크를 덧붙입니다. 무엇보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규명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관련 기사 링크)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할 때, 그 책임의 범위와 성격 등이 확인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선 현장의 실무자에게만 과하게 책임을 묻고 있다는 비판 속에서 대통령실, 행정안전부, 서울시 등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링크 1, 2) '민들레'와 '더탐사'라는 매체가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는데, 유족에 동의를 구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공개가 맞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누가 논의해서 해야 했던 것인지, 언론이 지켜야 할 윤리를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닌지 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관련 기사 링크) 참사로 인한 '사회적 트라우마'는 어떻게 극복하고, 참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은 어떻게 남겨야 하는 걸까요? 이와 관련한 논의도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참사를 '이태원 참사'로 불러야 할 지, '10.29 참사'로 불러야 할지에 대한 논쟁도 이와 관련이 있는 핵심 이슈중 하나일 것입니다.(관련 기사 링크 1, 2)   우리가 현재 항상 위험 여부를 신경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위험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면, ‘안전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인 대안 마련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관련 기사 링크 1, 2)   우리가 '10.29 이태원 참사'에 관심을 기울여,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게 하고, 사회적 트라우마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대응하고, 사회적 기억으로 잘 남길 수 있도록 조치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시민덕성을 함양하고, 그와 관련된 정부 차원의 안전을 위한 대안적인 체계를 마련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221105 [이태원 참사 추모]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221112 [이태원 참사 추모]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9 [이태원 참사 추모]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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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추모] 221105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지난 11월 5일 토요일,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추모중이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국화꽃으로 추모의 마음을, 포스트잇 글로 추모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해밀턴호텔 옆의 좁은 골목 참사 현장은 추모를 위해 찾은 시민들에게 황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고 위험한 곳에 왜 갔냐', '참사를 정치화 하지말라', '국가 책임으로 돌리지 말라', '추모만 하라' 등의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안부, 경찰청, 용산구청 등 관계 기관에 참사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특히 참사 발생 4시간도 전부터 신고가 계속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예방과 대비 차원에서의 미비함을 넘어 실시간으로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합니다.(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신 이태원파출소 경찰분들이나 출동한 소방서 대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압사당할 듯.. 너무 소름 끼쳐요".. 4시간 전부터 112신고 녹취록 파문 (2022.11.1/ MBC) [자막뉴스] "이태원 소장입니다 지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답변은 없었다 (MBC뉴스) ‘극도 혼잡’ 대응 매뉴얼 법에 있었다…‘유명무실’ 지적 [9시 뉴스] / KBS 2022.11.01. "책임론 정국, 초침은 간다"…이상민, 참사 나흘째 '사과' / JTBC 정치부회의 [단독] "인파 몰려 사고 우려" 일선 경찰서의 보고…왜 누락됐나 / SBS [이태원 참사] 용산구, 대비 적절했나…2차례 회의서 인원 대책 빠져 [단독] 보고서 삭제 지시 거부하자 다른 직원 시켜 삭제 / SBS [자막뉴스] 119로 온 한 통의 전화...발표와는 달랐던 참사 당일 / YTN 압사할 때, 경찰은 불과 5㎞ 거리에 줄지어 있었다 전 용산서장·구청장 등 6명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 입건 / KBS 2022.11.07. [자막뉴스] "작성 자체를..." 용산경찰서 내부서 수상한 정황 포착 / YTN 참사 희생자의 대부분은 청년들이었습니다. 17개 청년단체가 함께 하는 '이태원참사 청년 추모행동(준)은 “6시 34분, 우리에게 국가는 없었다”며 '이태원 참사 청년 추모행진: 국화행진'을 진행하며 추모하고 애도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이태원 참사가 국가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참사'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가가 그 책임을 충분히 지지 않으려 한다면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번 참사를 당사자의 문제로 여긴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애도기간 마지막 날 '추모 물결'…청년들 침묵 행진 / JTBC 뉴스룸   같은 날 11월 5일 오후 5시부터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 주최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시민 촛불집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집회에는 종교계, 참사 현장 목격자, 세월호 참사 유족 등이 참석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 퇴진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희생자 추모를 주 목적으로 하여 진행되었고, 참사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였습니다.(2022.11.5 한겨레)  [영상] “다시는 불행한 가족 만들지 않겠다고…” 촛불의 눈물 참사가 벌어지고, 그것이 정부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참사'로 드러날 경우,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원인과 관련된 책임을 지우도록 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안전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를 강제하기 위한 시민들의 참여, 즉 직접행동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충분히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어느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이어질테고, 2022년 11월 5일은 그 출발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21105 [이태원 참사 추모]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221112 [이태원 참사 추모]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9 [이태원 참사 추모]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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