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이태원 참사,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OT 후기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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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호기심 가득 독일어문학•사회복지 학부생 &.&


들어가며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의 한 골목, 우리는 또 다시 많은 이웃을 잃었다. 그런데 이 참사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10.29 이태원참사, 이태원참사, 10.29 참사, 핼러윈 참사, 이태원 압사 사고 등. 이름을 붙인 이들마다의 참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이 다르다. 10.29 이태원참사 2주기를 맞아, 나는 어떻게 참사를 상상하는지 떠올려보았다. 20대 초반이었던 나에게 그날은, 놀아야 하는 날이었다.

마스크와 인원수 제한, 운영시간 축소 등 다양한 방역 지침으로 내 3년의 대학 생활은 날아갔다. 흔히들 간다던 MT도, 친구들과 떠나는 우정 여행도, 미루고 또 미루고 또 미뤘다. 그리고 드디어 방역 지침 대부분이 권고 사항으로 축소되었다. 때마침 중간고사도 3일 전인 26일에 끝났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친구들이랑 놀아야 했다. 오랜 기간 사회적 거리두기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미 내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피드엔 이태원 구석구석에서 행복해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한가득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 이태원에 갈 준비를 마쳤다. “야 오늘 이태원 사람 X많아 ㅋㅋㅋㅋ” 먼저 가 있던 친구들에게 메시지가 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곳도 마땅치 않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방향을 틀어 근처 용산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김없이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계속해서 넘긴다. 그리고 곧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졌다. 주로 나의 위치를 묻는 내용들이었다.

모두가 자는 불 꺼진 우리 집에 나는 거실에 혼자 나와 티비를 본다. 실시간으로 뉴스가 보도된다.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나도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이태원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나는 그날 이후 여전히 사람이 많은 곳을 쉽게 가지 못한다. 출퇴근 시간엔 아빠에게 부탁해 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여력이 없을 땐 택시로 움직였다. 피치 못 하게 대중교통을 타야 한다면 시간대를 피해 미리 가거나 늦게 갔다. 옆 사람과의 간격이 점차 가까워지면 극도로 불안해졌다. 

이상했다. 나는 그 장소에 있지도 않았는데.

[이태원 참사,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오리엔테이션 현장 사진

[이태원 참사,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 오리엔테이션 현장 사진.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을까? 나와 같이 아픈 마음을 갖고 있을까? 아파하는 게 맞는 걸까? 비판이 두려워 앞장서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2주기가 가까워지니 맞닥뜨릴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캠페인즈에서 진행하는 “이태원 참사,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요?”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첫 시작은 9월 11일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진행된 오리엔테이션. 함께 글을 쓴 사람들과 만나 소개와 소감을 나누고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 강연을 들었다.



최성용 연구자의 강연 :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

강연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대하여' 현장 사진

강연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 현장 사진.

참사를 ‘상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의 참사는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다. 우리는 참사를 있는 그대로의 명확한 사실이나 사고로 파악한다. 이에 최성용 연구자는, 사람들이 참사를 상상하고 해석하는 것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 특히 이태원 참사를 상상하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함께 나누었다.


[위로부터 상상하기]

  • 책임의 주체 혹은 책임의 목적 및 결과는 무엇인가?

국가적 재난이 생겼을 때, 우리는 늘 책임의 소재를 찾는다. 이태원 참사에도 같은 방식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행정안전부 이상민 장관의 사후 대처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2022년 말에 진행되었던 국회 국정조사에서도 사후 대처를 기준으로 장관의 부족함을 지적했다. 책임의 주체를 좇아 사후 대처의 과정과 결과만을 따졌다. 하지만 사전 대비가 아닌 사후 대처에만 집중한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놓치기 쉽다. 구조적인 문제는 사후 대처가 아닌, 사전 예방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찾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상황에서 책임의 주체를 찾는 것이 이후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예방하는 것보다 중요할까? 이 외에 다른 질문도 던질 수 있다.

  • 법이 없는 경우, 다시 말해 불법이 아닌 경우에서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 고위 장관 개인과 관료 시스템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같은가?
  • 국가와 경찰과 지자체의 책임은 같은가?
  • 진상규명의 목적은 무엇인가?
  • 법적 처벌을 위한 진상 규명을 해야 하는가?
  •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차원의 진상 규명은 무엇이 다를까?
  • 국회 내에서 혹은 제도권 내에서 진상 규명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 보상금의 관한 쟁점으로 참사를 축소한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10월 31일 행정안전부는 보상금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참사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보상금의 관점으로 축소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게 위로금 2,000만 원, 장례비 최대 1,500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구체적인 액수를 내걸었다. 이러한 축소의 결과는 부정적인 여론으로 즉각 나타났다. 이태원 참사에 세금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당시 장관은 “경찰이나 소방 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용산 구청장 또한 축제가 아닌 ‘현상’으로 참사를 한정 지었다. 정부가 참사를 보상 액수로 제한하고 축소한 결과,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한 번 더 고통에 휩싸이고 고립되었다.


  • 일방적으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내걸었을 때, 무엇이 휘발되는가?

시민언론 민들레는 홈페이지를 통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을 게시했다. 희생자들을 그늘 속에 묻히게 하지 않겠다며 온전한 추모를 진행하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다른 인적 사항과 특징들 없이, 이름 자체만으로 진정한 애도를 할 수 있을까? 어떤 사연과 맥락을 가진 개별의 사람들인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을 통해 추모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 참사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를 부르는 명칭은 지금까지도 제각각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태원 ‘사고’라고 칭한다. 어떤 기준으로 참사와 사고를 구분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적다면 사고인가? 참사가 되지 못한 사고들이 오히려 사각지대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닐까? 한국심리학회 트라우마 학회 연구소에서는 이를 두고, 이태원을 제외하고 ‘10.29 참사’를 제안했다. 장소를 언급하는 순간, 그곳에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다는 의미였다. 


[아래로부터 상상하기]

  •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유언비어와 사진들을 옮긴 것에 대해 비난할 수 있을까?
  • 2차적 증언자로서의 언론들의 역할은 없었을까?

이태원 참사 직후, 갖가지 유언비어들과 이미지들이 여럿 생성되었다. 화재가 났다, 마약이 성행했다는 등. 하지만 이것이 악의를 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 현장에서는 상황을 설명하려는 담론들이 유언비어의 형태로 퍼졌다. 목격자들이 상상 밖의 일을 마주했을 때, 오히려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사진을 나르거나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퍼뜨릴 수 있다. 문제는 그 이미지와 유언비어들을 보고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데 활용한 다른 시민들이나 언론들이다. 


  • 녹사평 시민분향소에 있던 포스트잇들의 언어는 어디로 갔을까?

참사 이후 녹사평역에 시민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2월 5일, 서울 시청 앞에 시민분향소가 설치되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 붙인 포스트잇들의 메시지는 꽤나 다르다는 걸 볼 수 있다. 예컨대 녹사평역에서는 희생자들과 자신의 유대관계를 언급하며 자신의 슬픔과 애도를 표현하는 메시지들이 많았다. 반면 서울 시청의 분향소에는 주로 특별법 제정이나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의 내용들이 대다수였다. 결국 참사에 대한 애도로부터 정치적 언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제한 채로 정치적 언어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정치적 언어가 되지 못한 채 골목에 붙어있던 수많은 포스트잇에 담긴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가야 할까?


  • 또 다른 피해자는 누구일까?

오후 10시, 참사 발생 골목 및 그 근처에서 사용된 핸드폰 내역을 보면, 약 1만 4천 명 정도가 골목 주위에 밀집되어 있었다. 이태원 전체로 보았을 때엔 약 3만 5천 명 정도가 밀집했다. 이 숫자는 내국인만 조사했기에 외국인까지 포함하면 더 큰 숫자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실제 공적으로 출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혹은 할 수 있는 피해자는 극소수다.

  1. 유가족
    가족주의적 애도는 한국 사회 운동의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슬픔을 드러내는 것을 억압하고 슬픔을 축소했던 우리의 현대사들을 볼 수 있다. 최근까지도 국가는 유가족들의 상실과 슬픔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는 유가족들의 적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사가 일어나자마자 팽목항으로 달려가, 당시에 무수히 생성되던 오보들을 적극적으로 정정했다. 그들은 유가족인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이 배 안에 갇혀있는 걸 지켜봐야 했던 목격자이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는 실제 축제에 함께 참여하여 가족들을 잃기도 했다.
  2. 공적 출연의 동기가 부재한 생존자
    좁은 의미에서 159명의 희생자가 있고, 196명의 부상자가 있다. 이 부상자를 생존자라고 보았을 때, 트라우마가 없고 공적으로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와 관련된 활동의 동기를 느끼지 못하는 생존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피해자의 한 모습이다. 부상자/목격자/구조자 등, 결국 참사에 연루된 수많은 피해자가 어디에 위치해 있었냐에 따라, 그들은 각각 다르게 감각한다. 죄책감이나 트라우마 등으로 그들을 대변할 수 없다. 또한 외국인/이주민/성소수자들 등은 공적 출연을 꺼리기도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없다.
  3. 이태원 지역의 식당 종업원
    이태원 지역의 상인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있다. 참사 당일, 사실상 고용주가 아니라 대부분 종업원이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참사 이후 많은 종업원이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 또한 피해자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

  • ‘이태원에서 놀다가 죽었다’ 이태원의 장소성은?

많은 이들이 참사가 아닌 ‘사고’로 명명한다. 놀다가 죽었다, 는 단순한 언어로 표현했다. 이는 풍기문란통제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풍기문란통제는 과거 일본에서서 사회통제의 한 방식이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며 이 통제방식이 그대로 조선에 작동하게 된다. 국가는 그들의 기준으로 ‘문란함’을 규정했고, 제도 혹은 장치로서 사회를 통제했다. 하지만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했기에 문란함의 기준은 모호했다. 이에 따라 법을 집행하는 사람 혹은 행정기구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해방 이후에 기지촌이 되는 이태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후 매년 언론들은 이태원을 풍기문란한 곳으로 재현했고, 이태원은 ‘위험한 곳’으로 자리 잡았다.



나가며

10.29 이태원참사의 2주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1주기엔 어떻게 보냈는지 다시금 떠올렸다.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이태원에 방문하기도 두려웠다. 활동가들이 올린 글들을 보며 ‘내가 언제쯤 이전처럼 이태원에 갈 수 있을까’ 떠올렸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이제 나는 차츰 마주할 용기가 생겼나 보다. 이태원참사와 관련된 메시지들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바라본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10.29 이태원참사의 현장에 있지 않은 나는, 거짓말처럼 현장의 두려움을 아직까지도 느낀다. 마치 내가 생생히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느낀다. 혹시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어딜가든 두리번거리며 쉽게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눈물이 고이고 함께하지 못함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이번 강연을 들으며 ‘나도 피해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각자의 위치에서 동일하지 않지만 개별적인 두려움으로 피해를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부상자로서, 목격자로서, 유가족으로서, 이웃으로서, 구조자로서, 나와 같은 또 다른 목격자로서. 

강연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의 PT 자료 중 한 페이지.

강연 '참사를 상상하는 방법에 관하여'의 PT 자료 중 한 페이지.

정부는 참사에 대한 애도를 축소하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했다. 한편 각각의 두려움을 겪은 사람들의 개별적인 경험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목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목소리를 왜곡하거나 무시하진 않았을까? 혹은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언어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다가오는 2주기까지 광의적인 피해자들의 감정과 목소리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10.29 이태원참사에 대해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고 나누며 온 마음으로 추모하는 2주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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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태원 참사 당일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참사 이후 전철 파업 날 전철 안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와서 버틸 공간이 없어지자 숨이 쉬어지지 않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던 경험이 있어 크게 공감이 됩니다. 저도 글쓴이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참사 당시 돌아가신 분들과 부상을 입은 분들만 피해자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사로 인해 고인이 되신 분들을 온전히 추모하고, 이와 비슷한 참사가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기억하며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참사든 희생자들을 기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