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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해경 지휘부 무죄 확정, 도대체 책임은 누가 지나요?
지난 2일 세월호 참사 당시 초기 대응을 잘못해 구조에 실패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해경 지휘부들에게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9년 만의 일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래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쉬운 대응으로 인해 최악의 인재로 이어진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15일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청해진해운 소속)가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해 304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인 세월호 참사. 이 사고로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4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이 탑승해,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커서 더욱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사건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급격한 변침(變針, 선박 진행 방향을 변경)으로 인해 침몰이 시작되었는데, 구조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고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대처를 하지 못하고 대응시간 지연되었으며,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 해경의 소극적 구조, 정부의 뒷북 대처 등으로 인해 최악의 인재로 이어졌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4·16 세월호 참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밝혀진 것도 없고, 책임자도 없는 세월호 참사
참사 이후 지금까지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2014년 당시 검찰은 사고 원인, 구조 실패, 청해진해운 비리, 해운업계 비리와 관련해 총 399명을 입건하고 154명을 구속했습니다. 이 중 구조 실패와 관련해서는 진도VTS센터장, 현장에 출동한 123정장 등 17명을 입건하고 5명을 구속하는 데 그치면서 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최소화 하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15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1기 특조위)가 출범하였으나, 3년 6개월간의 활동 끝에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활동을 끝냈습니다. (조선일보,220610)
2020년 해경 지휘부 11명이 기소되었으나, 법원은 세 차례의 판단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로써 국가는 구조실패 책임을 사실성 떨쳐냈으며 지금까지 구조실패의 책임으로 인해 기소된 해경은 모두 12명이었으나, 2015년 징역 3년이 확정된 것은 당시 현장지휘관이었던 김경일 정장만 유일합니다. (한겨레, 231102)
이에대해 유가족 단체인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이날 대법원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묵념하고 "국가가 어떤 지시도 구조 계획도 세우지 않아 생명이 무고하게 희생되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선례를 사법부가 남기고 말았다"고 밝혔습니다. (연합뉴스, 231102)
책임 회피가 아닌, 책임지는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지난 2일 대법원 선고 이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울분도 많지만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마저 무너져 버렸는데요.
이미현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은 지난 2일 대법원 선고 직후에 "여전히 좁은 시각으로만 해석하고 면죄부를 주는 사법부와 행정부, 입법부 때문에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가 벌어진 것"이라며 "사법부는 법을 만들고 집행해온 이들의 잘못을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를 걷어찼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연합뉴스, 231102)
두 사건 모두 국가의 아쉬운 대처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점이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데요. 이태원 참사는 예상되는 상황에 대한 매뉴얼이나 안전요원 배치 등이 전혀 없었고, 사후 조치에 대해서도 중대본을 바로 설치하지 않았으며, 신고자가 많이 있었음에도 아쉬운 대처로 이어졌습니다. (광주일보, 231027) 오송 참사는 언론 보도를 통해 제방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인근 주민의 119 신고가 있었음에도 별다른 조치가 없었고, 112는 엉뚱한 곳에 출동했으며, 금강홍수통제소의 경보 발령과 교통 통제 통보에도 흥덕구청은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KBS뉴스, 230719)
국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 같은데, 국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비슷한 참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세월호 참사의 책임 규명에 대하여 오랜 기간 지켜본 유족들에게는 9년 전과 지금이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게 더욱 큰 상실감으로 다가올 것 것 같습니다. 도대체 유족들의 울분은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상황들에 대해서 국가는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고 진상 규명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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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탕’ 논란의 다섯번째 국민연금 개혁안, 어떤 내용일까? 📝💸
국민연금이란?
노후에 필요한 소득 보장을 위해 소득이 있을 때 꾸준히 납입하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회보장형 보험입니다.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과 더불어 사회안전망 역할과 목적을 가집니다. 나이가 들어 일을 계속하기 어렵거나 예상치 못한 사고, 질병, 장애를 마주했을 때 매월 연금을 지급하여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국민연금의 특징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사회보험제도와 같이 모든 국민이 가입 대상자이며 강제성이 있습니다.
강제 적용을 하지 않는다면 선택적으로 연금에 가입하거나 개인의 판단에 따라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을 수도 있어, 소득 활동을 하는 모든 국민의 연대와 공동 부담을 전제합니다.
소득 재분배로 사회 통합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동일한 세대의 고소득 계층에서 저소득 계층으로, 미래 세대가 현재의 노인 세대를 지원하는 두 가지 방식을 모두 포함합니다.
지금까지의 개혁안과 변천사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제도는 1889년 독일에서 최초로 시작되었고 현재 170여개 국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1월 1일, 근로자가 10인 이상 근무하는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단계적으로 대상을 확대하여 1999년 4월 1일에는 전 국민이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22년 12월 말 기준, 국민연금 수급자는 643만 명을 넘어섰고 가입자도 2,250만 명”입니다. (국민연금공단)
국민연금 제도가 올해로 36년 차를 향하는 동안 정부는 다섯 차례의 크고 작은 개혁안을 발표해왔습니다. 저출생과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며 국민연금의 소진 예상 시기가 앞당겨지고, 이를 대비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과 우려가 커진 것입니다. 현재 보험료율은 25년째 9%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2041년부터 적자가 시작되어 2055년에는 국민연금 기금이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재정추계전문위원회는 예측했습니다. (정책브리핑, 2023-01-27)
지난 10월 27일, 국민연금정책과에서 발표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의 주요 핵심은 아래와 같습니다.
세대별 보험료율 차등 인상
자동안정화 장치 도입
확정기여방식(DC) 전환
각각 순서대로 들여다보면, 연금 지급 시기가 가까워진 중장년층의 보험료율은 더 빠르게, 상대적으로 기간이 길게 남은 청년층은 더 느리게 인상한다는 계획입니다. 자동안정화 장치는 사회 경제적 상황에 맞게 보험료율, 연금 수령액, 수급을 시작하는 연령 등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방안입니다. 점점 더 예측이 어려워지는 미래 시대와 외부 요인에 의한 불확실성에 탄력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마지막으로 확정기여방식(DC)은 기존에 내는 돈과 받는 돈을 미리 정해두는 확정급여방식(DB)과 비교하여 나중에 자신이 낸 보험료에 이자를 더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재정이 악화되어도 최소한 직접 낸 보험료에 대해서는 이자를 포함해 연금으로 보장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번 개혁안, 적절할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험료율과 자금 계획, 지급 방식 등 숫자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도 이번 개혁안에서 방향성 외 구체적인 수치를 찾아보기 어려워 알맹이 없는 개혁안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국민연금 개혁은 여야, 국민 개개인 모두에게 민감한 문제이기에 지난 네 번의 개혁안에서도 명확한 합의점이 도출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이번 개혁안의 방향성대로면 중장년층의 부담이 지나치게 커져 세대 갈등이 심화될 것을 예상하기도 합니다. 또한 DC형이 도입되면 재정이 어려워져도 내가 낸 돈만큼 받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연금액이 줄어 노후 소득을 보장한다는 취지가 훼손될 수 있습니다. (YTN, 2023-10-29)
이렇듯 지난하고 복잡한 맥락 속에 연금 개혁은 결국 내년 4월 총선 이후로 미뤄질 전망입니다. 시기가 시기다보니 여야 모두 여론과 표심을 의식해 개혁에 소극적인 상황입니다.
국민연금 제도와 이번 개혁안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가요?
아쉬운 점, 동의하는 부분, 기대하는 새로운 방향성 등 댓글을 통해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국민연금과 기타 사회보장 제도가 꼭 필요한 개혁의 시기를 놓치지 않고, 국민 모두의 안전망이 될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인 논의와 합의가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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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해야 할 권리, 생명안전기본법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교통 시설을 이용하다가, 길을 걷다가, 일을 하다가, 친구를 만나다가, 수학 여행을 가다가, 갑자기 죽는다.
각종 통계와 재난참사 피해규모를 들여다보면 이는 더 자명해진다.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이는 하루에 6여명. 1년에 2000명이 넘는다. 이태원 참사에서 사망한 사람은 159명, 세월호참사에서 사망한 사람은 304명이다. 정부가 인정한 가습기 살균제참사로 사망한 사람은 1,825명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대구지하철화재참사, 삼풍백화점참사, 성수대교 붕괴참사, 씨랜드 참사 등 수많은 재난참사의 피해규모를 보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계속해서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사회에서 일상이 안전하다고 느끼며,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발생하는 산업재해와 계속해서 반복되는 재난참사에 무뎌지지 않는 것 또한 그렇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비관주의에 빠진다. 각자도생을 생각한다. 각종 산업재해와 재난참사로 인한 죽음에 무감각해진다.
이 참상을 넘어, 그 무엇보다도 생명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회를 꿈꾸며 시민사회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안전한 사회로 변화할 수 있도록, 법 제도적 토대를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서 생명안전기본법에 대해 논의했다.
생명안전기본법은 사람의 생명과 신체가 함부로 손상되지 않고 안전하게 살 권리가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법적으로 명시하고 국가에게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음을 명확하게 하며, 이 안전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 지방자치단체, 기업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명시한 기본법이다.
이 법안에 따르면, 국가는 각종 정책 등을 수행할 때에 안전영향평가제도에 따라 해당 정책이 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여 그 결과를 중요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시민들이 재난과 사고의 예방 및 대처 방안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도록 시민 모임을 구성하고, 그 모임에 사고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며 시민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국가, 지방자치단체, 기업은 안전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여야 한다. 안전사고 발생 가능성을 은폐하지 못하게 하며, 모두가 위험에 대해 알 권리를 누려야 한다.
국가는 사고가 나기 전에 사고에 취약한 장애인, 노인, 환자, 어린이, 여성, 외국인 노동자 등의 안전약자에게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약자의 특성을 고려하여 별도의 안전 관련 정보 전달, 지원 대책, 대피 계획을 마련 하여야 한다.
만약 사고가 발생하면, 국가는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안전권을 침해당한 이들이 피해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그리고 재발방지대책을 세우기 위해 구조적인 원인을 들여다보고 사고대응이 적절했는지를 따져보는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이 법안은 안전 관련 현행법과는 관점이 다르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재해 구호법 등등 안전 관련 현행법은 정부와 지자체가 재난 상황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법이다. 자연재해 발생시 이재민 보호와 지원 절차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법이기도 하다.
해당 현행법에는 사고 예방에 관한 부분, 안전에 대해 알 권리에 관한 부분, 국민의 안전할 권리에 관한 부분, 피해자의 권리에 관한 부분, 사고에 대한 독립적 조사에 관한 부분은 들어 있지 않다.
이제까지 산업재해 피해자들이 본인의 산업재해가 어떻게 왜 발생했는지 알고 싶다고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이유, 재난참사 피해자들이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해당 재난 참사 특별법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이유도 관련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안전기본법은 안전할 권리를 명시하며, 국민과 피해자를 권리의 주체로, 국가를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주체로 명확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이전 법과는 큰 차이가 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곧바로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안전기본법은 생명과 안전이 기본적인 권리이고 중요한 가치임을 법적으로 명확하게 하고 국가가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의 법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되기를,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생명을 존중하는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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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잘 지내고 있다고
안방에서 뉴스를 보던 엄마가 알려줬다.
“이태원에서 사고 났대”
작년 10월 29일 밤,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는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로부터 사고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뉴스를 찾아보았다. 아마 처음 접한 피해자의 수는 한 자릿수였던 것 같다. 사람이 정말 많이 모였구나 하고는 뉴스를 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를 다시 틀었을 때 피해자의 수는 두 자릿수로 바뀌어 있었다. 경악스럽다기보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제야 실시간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실내도 아닌 도로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괜한 걱정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자 주변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무사한지 확인했다. 다음날 아침, 사망자 수만 세 자리였다.
1년이 지난 지금. 이태원에서의 일을 나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너무 큰 충격이었던 탓인 걸까, 사실 작년 10월 29일을 잘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이태원에서의 일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잘 와닿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지치고 무기력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약 10년 전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의 기괴함을 슬픔과 분노로 마음 어딘가에 두고 있다면 이태원 참사는 기괴함만 남아있다. 그 기괴함이 나는 아직 얼떨떨하다. 기괴함과 얼떨떨함 사이 어딘가에서 보라색 리본은 어색하기까지 하다. 나에게 1년 전 이태원 참사는 기괴하고 얼떨떨하며 어색한 지금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인한 문제 회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노력 속에서 다시 나타나는 ‘참사’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의식하지 못하는 절망감 아닐까. 대체 우리는 이 절망감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우리는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1년 전 이태원 참사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기괴한 일을 마주할 용기, 얼떨떨함에서 벗어날 용기, 어색해하지 않을 용기 모두. 그리고 얼떨떨함으로만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슬픔과 분노의 과정을 거쳐, 떠난 이들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안전한 사회가 되길 바라는 이들과 함께이길 바란다. 나는 이 용기를 가지겠다는 다짐부터 시작해야 된다.
1주기 전날, 참사로 친구를 떠나보낸 지인이 유가족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고 알려줬다.
"잘 지내시나요?"
잘 지내냐고 묻는 말. 내가 가늠할 수 없는 1년이 담긴 안부였다. 어떤 안부는 정말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에게 그런 안부가 온다면 잘 지낸다고 답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었을 때도 잘 지낸다고 했으면 좋겠다.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잘 지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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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삭제된 공간의 기억- 왜 우리는 다시 묻고 있는가
사람들이 모이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였다. IT 강국답게 소셜 네트워크로 이태원에 모여서 할로윈을 즐기는 것은 한국 전체를 들뜨게 했다. 다중(多衆)이 주는 광장의 에너지를 우린 무려 3년이나 누리지 못했었다. 코로나19가 준 공포, 환자가 죄인처럼 취급되는 두려움 속에서 밖으로 한 발짝 나가기가 어려웠다. 개인정보를 다 포기하면서까지 국가가 국민 안전을 위해 일해 주기를, 동시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그 속에서 손님이 현저히 줄어든 상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출근 대신 재택근무로 방에서 화상회의를 했다.
2022년 후반 정부 규제가 차차 풀리기 시작했다. 백신을 서너 차례 맞았고, 한 번쯤은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 자가격리되는 경험도 생겨났다. 신종코로나에 의해 사망할 거란 공포를 인간의 지적 연구가 정복했다는 자신감과 함께, 코로나19가 감기 정도로 가벼운 병이 되었다. 암흑기가 끝나가는 시점. 전환점이 될 날이 바로 10월 29일, 30일 할로윈데이였다.
할로윈은 일반적인 날이면서 일반적인 날이 아니었다. 본래 켈트족에 연원을 둔 할로윈은 아시아권에서는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알려진 명절이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할로윈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젊은 층은 달랐다. 유치원 때부터 코스튬 분장을 했고, 영어조기교육으로 할로윈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할로윈은 10월 31일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의 문이 열리는 날, 유령이나 귀신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좋은 유령도 있지만 악령도 있기에 유령처럼 분장을 하고 뒤섞여 악령은 쫓아낸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그날은 기성세대가 터치하지 않는 젊은 층만이 즐기는 코스프레 축제의 의미였다. 광장으로 모일 찬스. 이태원의 서구적 분위기, 자유롭게 코스프레를 해도 자유롭게 술을 마셔도 같이 즐기는 축제의 느낌.
좁은 경사로에서의 질식
그러나 모든 것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29일 토요일에서 30일 일요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해밀튼 호텔 옆 좁은 골목길, 올라가려는 이와 내려오려는 이의 장난스런 대결이 몸대결로 번졌다. 1번 출구로 빠져나와 이태원 세계음식거리로 가려던 사람과,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1번 출구 쪽으로 내려오던 사람들. 순식간에 몇백 명의 인파가 몰린 5.5평 공간, 앞 사람 얼굴이나 뒤통수도 확인하기 어렵게 비좁은 틈에 끼어 있었다.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경사로를 따라 축제는 광란으로 변했고, 환호는 비명으로, 이태원 사거리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교차로가 되었다.
질식이, 깔린 사람들의 장기 파손이, 복부 팽창과 기절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15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경찰들은 늦었고, 예상하지 못했고,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다. 외부로 나가는 목구멍에 걸린 사람들. 심정지 상태를 언론과 소셜 네트워크가 가감 없이 열어젖혔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이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침몰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코로나19로부터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자긍심에서, 축제에 통제 인력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참담함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쉬쉬했다. 어떤 이는 그저 압사 사고라 했고, 어떤 이는 참사라고 했고, 어떤 이는 젊은이들이 “놀다가 죽었다”며 씁쓸해 했고, 어떤 이는 나와는 무관한 먼 세계의 일처럼 받아들였다. 어떤 이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까 저어했다. 이태원 도로를 중심으로 해서 해밀턴 호텔 쪽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고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있었고, 그 건너편은 일상이 일어나는 한가하고 북적한 삶의 냄새를 끓이며 죽음의 냄새를 가까스로 닦아내고 있었다.
국가 애도 삭제 기간
정부는 서둘러 합동 분향소를 만들고, 국가 애도 기간을 정했다. 그 기간이 폭력적이란 생각은 못했다. 다만 세월호 사건에서 비롯된 것인지, 서둘러 사람들은 그 시간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적어도 괴로움을 축소 시키고 싶어했다. 정부는 이태원에서 죽은 젊은이들의 시체를 옮기고 거리를 삭제했다. 일반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에 올린 그 날의 사진과 동영상들을 삭제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고통스러움 탓이었다. 누르고 누른 감정들을 쏟아낼 길이 없는 사람들이 이태원역 1번 출구로 모여들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정말 150여명이나 사망에 이를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다 들어차기도 빠듯한 공간에. 심각한 얼굴의 사람들과 카메라를 높이 쳐든 기자들. 아직 장식이 채 지워지지 않은 할로윈 호박들. 상점에서는 청소하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도 각자 재빠르게 청소하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의 고통을 방관으로 닦아내려 했고, 사망자인 피해자들은 단지 빗나간 청춘들처럼 긁어내려 했다. 가장 큰 청소는 침묵이었다.
고통스러운 일이라서, 젊은 층들만의 일이라서, 도대체 이해가 안 가서, 침묵했다. 정부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유가족들이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침묵했다. 누구도 이 일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태원에 대한 언어가 사라지면서 기억도 금세 사라지는 듯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사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는 그 좁은 골목에서 아직 이렇다 할 반응도 대응도 없이, 연기처럼 소실되었다. ‘이태원’ ‘할로윈’은 금기가 된 듯하다. 다만 언어가 삭제된 것으로, 그 공간이 삭제되고, 그 사건이 삭제되었다. 결국 기억이 삭제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어디서부터 이 이야기를 다시 다루어야 할까.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죽은 이들은 자신의 영정 사진을 올리는 것조차 저어하고, 그곳에 있었던 것조차 숨기려 하고, 옆에서 죽어간 친구 때문에 자살자도 생겨나는데, 우리는 유령들의 행진이므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왜 이태원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가. 왜 그들은 이태원에 모일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왜 이태원을 모른 척하고 있는가. 아직 마음 아픈 곡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삭제된 공간은 재생되기 어려운 기억일까, 생각해 본다.
1주년이 된 참사, 왜 아직도 물을 수가 없나
이제 10.29 참사로 명명된 이 사건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지나간 기억의 편린으로 흩어지길 기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잊은 듯하다. 우리는 이것이 자연재해도 우연히 일어난 사고도 아니라는 걸 이제 안다. 더 많은 경찰인력을 동원했어야 하는 그때, 단지 마약이 아니라 질서 통제를 위해 힘쓰고, 신고가 들어왔을 때 단순한 불평으로 듣지 않았어야 하는 그때,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세월호, 코로나19로 우리에겐 국가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국가는 단지 경제공동체만이 아니라 자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질 줄 아는 공동체여야 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한국은 선진국보다 더 나은 안전 체제와 의료체제를 갖춘 나라로 평가되었고, 국민들은 기꺼이 개인정보를 희생하면서 국가의 지시에 따랐다. 한국은 선진국이라는 의식도 차차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10.29 참사로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질문조차 미궁의 구덩이 속에 질식사시켜버렸다. 국가는 이 문제가 마치 없는 문제처럼, 국가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치부해버렸다.
우리가 10.29 참사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
자, 그럼 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또다시 책임자도 매뉴얼도 없는 사회에 노출되어야 하는가. 세월호보다 더 통제가 가능했던 10.29 참사조차 그 피해자의 잘못 정도로 지나쳐가는 국가에서 우리가 안전을 바라는 것은 어폐가 아닌가. 진상규명은 단지 책임자 논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유사한 일이 일어났을 때 두 번 다시 동일한 문제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책임자도 그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제 3의, 제 4의 참사에 우리가 무방비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다시 묻고 있다. “국가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는 달리 묻자면, “국가는 과연 어떻게 했어야 했나”, 의 질문이고, “유사한 사태에 대한 대책을 지금 당장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10.29 참사를 다시 복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진상규명이야말로 이 참사의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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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이태원을 가지 않는 게 해결 방법은 아닐 겁니다.
잊고 살았던 이태원 참사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달력을 보니 작년 10월 29일은 토요일이었더라고요. 주변인들 사이에 알아주는 집순이인 저는 그날도 집에서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른 저녁잠을 한숨 자고 늦은 밤 느지막이 깨어 핸드폰을 켜보니, 속보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압사. 사람들이 서로에게 깔려 죽는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는 걸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습니다. 어릴 적 위기 탈출 넘버원에서나 봤던 경우가 실제로 일어나다니. 너무 당황스러운 내용에 현실 감각이 없어졌다가, 회사 메신저 방에서 다들 괜찮은지 묻는 국장님의 메시지와 혹시나 하는 걱정에 연락한 친구들의 카톡, 그리고 실제 이태원에 있었던 지인들의 실시간 스토리 공유를 동시에 겪고 나서야 실제 상황이라는 감각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끔찍했던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암묵적으로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놀러 가기 껄끄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친구의 전시를 축하하러 오랜만에 들른 이태원은 이전과는 다른 조용하고 허전한 분위기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2023년 10월 29일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누구도 할로윈을 기념해 즐겼다는 내용의 소식을 올리지 않았어요. 그저 지나가는 주말인 것처럼 소소한 본인들의 일상을 공유할 뿐, 그 어디서도 ‘할로윈’과 ‘이태원’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영화 속 캐릭터 분장이나 파티룸을 예약해 친구들과 만난다는 내용조차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할로윈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하더라도, 끔찍한 참사가 연상되는 장소와 이벤트를 굳이 다시 입 밖에 꺼낼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조용하게 할로윈을 보내는 것이 예의고 미덕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요, 그것이 곧 해결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작년의 사고는 사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당장 오늘 출퇴근 길만 생각해도 지하철 인파에 양팔만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으로 수십 분을 버텼으니 말입니다. 이태원 참사는 이태원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할로윈 데이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태원을 가지 않는 것이 해결 방법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그 일을 계속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잊지 않았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는 것. 그리고 지금도 아슬아슬한 상황이 어딘가에서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리는 것. 안타깝지만 세상엔 이태원 참사만큼이나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야속하게도 계속해서 말하지 않으면 금방 다른 것들에 밀려나기 쉬우니까요. 세상에서도, 우리 기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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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참사로 탄생한 이름
제목 : [함께 기억] 참사로 탄생한 이름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대학생이던 나는 대학교 강당에서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단에선 교수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설교는 12시 30분에 끝났다. 다음 수업이 1시 15분인 터라, 내 점심시간은 45분 밖에 되지 않았다. 설교가 끝나면 제일 먼저 강당을 나가 점심을 먹고, 도서관 소파에 누워서 어제 못 잔 잠을 자려고 했다. 설교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고, 교수가 한 말에 눈을 떴다.
“지금,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학생들이 갇혀 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핸드폰을 잘 확인하지 않는 나는 그제서야 핸드폰을 꺼내 뉴스를 확인했다. 진도 앞 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기사였다. 다행히 안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구조됐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다행이다 생각하고 핸드폰을 덮었다. 불과 몇 시간 뒤, 앞선 전원 구조 소식이 오보라는 기사를 접했다. 수 백명의 학생들이 배 안에 갇혀 있으며, 구조가 시급하다는 기사가 연신 올라왔다. 구조하고 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는 기사만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도 구조하고 있다는 소식은 나오지 않았다.
상식이란 ‘정상적인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하는 지식’을 말한다. 가장 먼저 도망친 세월호 선장, 수 백 명의 죽음을 오보하는 언론, 7시간 만에 등장하는 대통령,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던데, 라는 말. 내게 이 모든 게 상식 밖의 일이었다.
선원들을 우선 해야 되는 게 선장 아닌가? 언론은 도대체 뭘 보고 기사를 쓰길래 수 백 명의 목숨을 구조했다는 오보를 냈을까?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 보고를 받지 않았나? 보고가 되지 않은 건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 발언이 아니라, 어떻게든 구해라 라는 말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상황에 대비하고 대응하라고 정부가 있고, 부처가 있고, 시스템이 있는 거 아닌가?
이 모든 상황에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은 “세상이 이상하다"였다. 그 순간 언론에서 비추는 모습이 과연 진짜일까 의심이 들었고, 나는 내 눈으로 직접 그 상황을 봐야겠다 싶었다. 다음 주가 중간고사였지만, 아랑 곳 않고 진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한량없다' 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식 잃은, 아니 정확히 당시에는 아직 자식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부모들을 보면서 뼈에 새겨지게 느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이유는, 유족들의 모습을 담을 적절한 단어가 뭔지 알 수 없어서였고, 비통해 하는 그 분들의 모습을 어줍잖은 단어로 품을 수도, 그 마음을 모두 헤아리고 이해할 수도 없어서 였다. 당장 서울로 올라가면 가족이 있고, 침대가 있는 방에 누울 수 있는 내가 무슨 말과 마음으로 그들의 비통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비통함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여전히 그 분들의 모습과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단어를 알지 못한다.
물 흐르는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까지. 세상 만물의 소리를 담을 수 있고, 가장 과학적인 언어가 ‘훈민정음' 한글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로, 억울한 것이 있으면 직접 한글로 써서 임금인 자신에게 항소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라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어떤 억울함도 표현하고 품을 수 있는 한글이지만, 한 가지 없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식 잃은 부모'다.
부모 잃은 자식을 일컬어 ‘고아孤兒’라고 하고, 남편 잃은 아내를 ‘과부寡婦’, 아내 잃은 남편을 ‘환부鰥夫’라고 한다. 하지만 자식 잃은 부모를 칭하는 단어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잃은 것은 세상을 잃은 것이고, 자기 자신을 잃은 것과 같다. 자신 보다 귀한 자식을 잃은 사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 비통함은 감히 말할 수 없다. 그 어떤 억울함도 호소하면 들어준다고 말한 세종대왕이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만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애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고, 그 단어를 만들지 않은 게 아닐까.
연극 <먼데서 오는 여자>에 이런 대사가 있다고 한다. “추모하고 애도하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추모하고 애도하고 기억하게 해달라고 싸우다가 10년이 흘렀습니다."
세월호 침몰이 있은 후, 유족들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처럼 그들의 억울함을 들어주는 정부는 없었다. 못 들어준 것이 아니라 안 들어줬다. 오히려 그 슬픔이 사회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듯이 외면했다. 유족들은 계속해서 진상 규명을 외쳤고, 함께 기억하자고, 기억해 달라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를 만들자고 싸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억울함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를 또다시 마주했다. 이번에도 정부의 시스템은 발휘되지 않았고, 책임 없다는 말과, 참사가 아닌 사고이며, 경찰 더 투입됐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정부를 보고 있다. 2014년 4월 16일의 부모님들처럼, 2022년 10월 29일의 부모님과 형제, 자매, 남매. 친구들과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들은 또다시는 ‘한량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참사가 있는 곳에 가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을 지언정,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은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참사를 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라도 참사 현장에 가서 현장을 본다. 그리고 ‘나’라는 작은 사람에게라도 그 ‘햔량없는' 고통이 분담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량'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참사로 탄생한 이름이다. ‘나’라는 사람의 한계와 그릇은 명확하지만, 이 작은 한계와 그릇으로 고통과 억울함이 나눠질 수 있다면, 또 그 사람들이 모이고 모이면 유족들의 고통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참사를 통해 있어선 안 될 이름들이 생겨났다. 세월호 아이들, 세월호 세대, 세월호 유족, 이태원 참사 유족, 이태원 참사 피해자 등이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외에도 국내에는 크고 작은 참사들이 발생했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조금 잊혀진 성수대교 붕괴 참사와 삼풍 백화점 참사 등이 있다.
참사를 통해, 세상에 있지 말았어야 할 이 이름들이 생겨났다. 우리가 그 이름을 잊어버리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 이름을 잊는 날은 참사의 원인이 된 시스템의 부재와 정비, 책임자들의 사과가 있을 때가 그들의 이름이 잊힐 수 있을 때가 될 것 같다. 그때까지는 우리에게 그 참사가 있었다는 걸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내가 갈 수 있다면, 참사의 현장을 언제고 마주하고 싶다.
글을 쓰고 있는 10월 29일, 사고 현장인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골목과 추모식이 있다는 서울광장을 다녀왔다. 불과 30초면 다 걸을 수 있는 그 골목에서 수백명이 압사했다는 게 다시금 믿기지 않았고, 수 많은 사람이 모인 광장에 책임자들이 나오지 않은 게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세월호 이후 8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한게 없어 보이고 오히려 퇴보한 듯한 상황이 안타까웠다.
나는 여전히 유족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조차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인故人’을 추모하고, 글을 쓰는 것 뿐이라는 점이 부끄럽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 분들의 고통과 억울함, 비참함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유족들의 이야기를 책임자가 듣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유족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책임을 물어주면 된다고 믿는다. 부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억울함이 조속히 풀어졌으면 좋겠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간절히 바란다. 참사로 희생된 분들과 그 유족분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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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왕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조롱한 적이 있다?
[팩트체크] 온라인에서 확산된 태국 국왕이 국적기 구매를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를 모욕했다는 영상이 사실인지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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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우리의 무게감
최근에 동료 활동가로부터,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간담회에 참여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진행자였던 중년의 활동가가 참여자들에게, 윤석열 대통령, 이상민 행안부장관 등 보기를 몇 개 던지며 제일 잘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선택해서 손을 들어달라고 했다. 책임져야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누가 제일 문제였는지를 분명히하는 작업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선 질문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래서 대통령이 제일 문제가 많다고 선택되면 대통령을 탄핵하면 되고, 장관이 제일 문제였다고 뽑히면 장관을 탄핵하면 되는 것인지, 사회적 참사를 온전히 잘 다뤄보고자 모인 자리에 썩 맞는 질문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폭우로 인해 반지하주택과 지하차도에서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며 재난, 특히 기후위기에 얼마나 우리 사회가 취약한지가 드러났다. 신림역과 서현역에의 묻지마 칼부림 소식, 관악구의 등산로 성폭행 살인 뉴스의 충격이 잊혀지지 않는다. 국가 정책과 보증 아래 대출을 받고 입주한 전세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해서 연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정치와 행정 시스템의 붕괴 속에 이태원 거리에서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다. 이 모든 일들이 1년 남짓 사이에 벌이진 일이다. 연거푸 이어지는 비극 속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국가도 사회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채워지고 만다. 각자도생의 생존방법만을 고민하고 만다.
이태원 참사를 이태원 참사만 떼어내서 생각하지 않게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시스템의 무력함을 실감하며, 희생자 및 피해자의 규모가 크든 작든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반지하에 거주하든, 전세집을 계약하든, 비가 오는 날 운전을 하든, 축제 때 거리를 걸어다니든, 누구도 특별할 것 없고 잘못도 잘 한 것도 없고, 죽어야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하루 빨리 특별법의 통과와 함께 진상규명이 적절히 이뤄져서 책임자가 응당 잘못한 지점을 처벌받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사회적 참사를 개별적으로 뜯어내 장관 한 명 탄핵하며 끝내지 말고,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생명과 안전의 사안 중 하나로 계속 다뤄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회적 참사는 사회적 참사로 기억하며 무겁게 다루고, 이태원은 우리에게 그간 그랬던 것처럼 신나게 노는 공간으로 두고 싶다. 작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놀까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지하철 타기 번거로워서 을지로에서 멈춰 살 수 있었던 나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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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이 사고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재작년 할로윈 때 이태원에 있었습니다.작년까지 사고 현장을 오고 가며 출퇴근을 했었고혹시 사고의 현장에 전 직장 동료들이나 아는 사람이 있었을 까봐 조마조마하며 연락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사고의 당사자가 우연히 출퇴근을 하는 제가 되었거나저의 가까운 지인들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할로윈은 젊은 세대 축제의 상징이죠.할로윈 하면 이태원이 수식어로 따라올 만큼유명한 장소이기도 하고요.
사고가 난 이래로는할로윈은 왜 하필 그 좁은 이태원에서 모이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작년 사고에 무엇을 했나 일기장과 sns를 뒤져보았어요.
압사 사고가 난 날은 집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고다음날 주일 아침 중고등부 선생님을 통해 카톡으로 뉴스를 공유받았어요.교회에서 확인하면서 이게 실화인가?
만우절 거짓말 같은 줄 알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설마 하던 일이 진짜 라는 걸 인식하게 되었어요.
압사라는 단어도 저에겐 생소하고이런 사고에 대한 경험이 없었으니까이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인가 멍해졌어요.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압사를 당한 고인과 부상자들에게 송구스럽지만저는 이 이슈가 나올 때여러 부분을 비관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이 압사사고가 과연 세월호처럼 삼풍백화점의 붕괴처럼 성수대교의 붕괴처럼 바라봐야할 사고인가한동안 생각했습니다.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저는 학부모들과 대화를 나누며추모의 물결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언론매체에 언제까지 화두가 될 것인가 라는 의견을 나누었어요.
조심스럽게 쓰는 이 글은무조건적인 비난 이후 저를 되돌아보고자그리고 이 사고를 어떻게 인식해야할까1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사건을 다양한 시각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다양한 분들의 의견을 통해저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정리한 지금까지의 생각은사고를 통해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경찰과 공무원 등 관련 조직 내부 일처리 과정의 폐해,미흡한 안전교육 시스템 입니다.
안타깝지만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참사는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하지만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며하나 하나 개선해 나가며 사고가 재발되지 않기를, 후대에 물려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흡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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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토록 참혹한 날들 속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구호 앞에 서면 왠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하나의 소리가 크게 들릴 때 그 밖의 작은 소리는 소거되기 쉬우므로. 물론 그날의 일이 왜 발생했는지 아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그러니까, 왜 대비도 대응도 못했는지 밝혀야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누군가 의무를 내던진 이유를 추궁할 때 그 책임에 무게가 실리기 마련이고, 죽음의 과정을 이해하는 건 망자를 그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참사를 해결하는 전부일까. 말 그대로 ‘참혹한 일’이 ‘참사’의 정의라면, 나에게는 그날 이후 펼쳐진 모든 날들이 참혹했다. 때문에 두 가지 구호로만 소화하기에 참사는 훨씬 거대한 것이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 보자.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단톡방 알림이 울렸다. “얘들아 이태원 뭐냐...” 항상 업무가 바빴던 친구가 핼러윈을 즐기는 줄 착각하고, 나는 ‘ㅋ’을 연발하며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금세 그 행간이 다르게 읽혀 SNS에 접속하니, 충격적인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도무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싶어 오밤중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쫓기듯 잠을 청했는데, 다시 일어날 때쯤에는 사상자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 있었다. 그 아득한 현실에 얼이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주변의 반응에 더욱 기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래서 핼러윈을 싫어하는 거야.” “너는 저런 데 안 다녀서 다행이다.”
일상은 속절없이 흐른다. 먼저, 그날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른거렸다. 그 다음에는 현장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혹은 나처럼 멀리서 소식을 접했을 사람들이. 가슴팍에서 많은 게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한 모습들이 못내 기이하게 다가왔다. 과연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이 필요 없는 사회도, 말하지 못하는 사회도 끔찍하기 매한가지인데. 국가애도기간을 거치는 동안에는 숱한 행사와 공연이 중단되었다. 그런가 하면, 온라인에서는 “놀러 가서 죽은 것”이라며 참사의 사회적 해결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만연했다. 그리고 그 사이, 159번째 희생자 이재현씨가 친구들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참사로서 편견과 혐오의 문제
그날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긴 사람들에 대한 혐오는 여전하다. 누군가의 고통은 그렇게 가중된다는 점에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때, 그 혐오는 핼러윈과 이태원을 향한 편견에서 기인한다. 핼러윈을 모르는 사람에게 핼러윈은 ‘외국 귀신 놀이’에 불과하다. 이태원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태원은 ‘미군기지가 위치한 위험한 지역’, ‘젊은 애들 노는 문란한 지역’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크게 강화된 시선 역시 작용한다. 언론에서는 코로나 확산 진원지로 이태원의 성소수자를 선정적으로 지목한 바 있고, 사람들은 밀집 경험을 민폐로서 감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게, 거길 왜 갔냐” 같은 비난은 그런 토양에서 자란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1차 추모제의 제목은 그랬다. 그러고 보면, 분향소를 방문해 희생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기사를 통해 유가족의 사연을 새길 수도,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에 동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거기서 그치는 걸까. 나는 저마다 기억하는 전부를 증언해야 한다고 여긴다. 언젠가 참여했던 집담회에서 그런 고백을 들은 적 있다. “저에게 이태원은 마치 외국 어딘가처럼 와닿지 않는 측면이 있어요.” 용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날의 현장은 직관적이었지만, 사실 누군가에게는 상상조차 어렵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렇다면, 핼러윈과 이태원이 베일에 싸이지 않도록 기억의 파편을 잘 모아야 한다.
나아가 앞으로 어떤 기억을 만들지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날 이후 나는 일부러 이태원에 자주 들른다. 다가오는 핼러윈에도 놀러갈 작정이다. 더는 들을 수 없는 증언을 미지로 남기는 대신 그에 근접한 기억을 새로 쌓기 위해서. 그렇게나마 그날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긴 사람들과 연결된 기억 속에 묶이고 싶다. 그런데 일주기를 앞두고, 곳곳에서 핼러윈 지우기에 여념이 없다. 놀이공원은 핼러윈을 벌써 다른 테마로 대체했고, 유통업계는 핼러윈을 건너뛰고 크리스마스를 준비 중이다. 심지어 마포구는 ‘핼러윈 금지’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그 외침이 무색하게, 일각에서는 기억에 대해 아주 완강히 거부한다.
‘죄책감’과 ‘답답함’을 넘어
나는 지난 5월부터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 기록단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활동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세운 취지는 명확하다. 무엇보다 이태원을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이태원은 어떤 의미인지, 그날 이후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듣고 싶었다. 본격적인 인터뷰 진행에 앞서 7명의 기록단을 모집했다. 특징적인 건 대부분 동네 버스 정류장에 붙은 포스터를 확인하고 신청했다는 것. 녹사평, 이태원, 해방촌 일대를 지나고 있었고, 이미 그 근처에서 거주하거나 노동하고 있었다. 주로 이태원에 관한 개인적인 인연을 간직했을 뿐 관련 활동 경험도 거의 없었다. 종사하는 분야도 천차만별이다.
그렇게 모인 마음들을 통해 참사에 관한 커다란 갈증을 실감했다. 특히 두 가지 감정이 도드라졌다. 먼저, 살아남은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매년 붐비던 골목을 알던 사람은 그 위험을 인지하고도 예방하지 않은 자신을 탓한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줄도 모른 채 축제를 즐기던 사람은 그날 무심히 웃고 떠들던 자신을 탓한다. 현장을 목격한 뒤 겨우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구조에 망설이던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죄책감을 적절히 해소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개인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감정을 덜어내지 못한 채 심화되거나 끝내 그 원인이 되는 참사를 외면하고 만다. 공동체 회복에 기여할 방법이 없으므로.
한편, 답답함도 가득하다. 그날 각자가 잃어버린 세계란 희생자들의 총합을 한참 넘어선다. 하지만 그 상실이 낳은 공포와 슬픔, 혼란, 분노 등을 나눌만한 장이 현재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고 보면, 기록단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서로를 발견하는 것만으로 치유 받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다들 좀처럼 말을 꺼내기 힘든 여건에 놓여 있다. 그 기이한 침묵 속에서 개인의 상처만 곪는다. 모든 게 조심스러워 입을 열기를 주저하게 되고, 그 어떤 표현도 와닿지 않은 탓에 고립에 처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불충분한 구호에 다양한 마음을 우겨넣는 사회,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타인의 이야기를 함부로 재단하는 사회가 벽처럼 서 있다.
그날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
기록단은 9명의 인터뷰이를 만나 증언처럼 이야기를 들었다. 가령, 이태원의 핼러윈은 온 가족이 기다리는 온 동네 축제다. 핼러윈이면 집집마다 사탕 바구니가 걸린다. 지역 주민인 부부 민희씨와 원기씨는 매년 아이들 손을 잡고 이태원 일대를 구경하는 재미에 빠진다. 무엇보다 삼대 째 이태원에 거주하는 원기씨의 경우, 그날 이후 행여 유년의 추억이 사라질까 염려가 가득하다. 그 다음, 상인 범조씨는 매출이 돌아오더라도 가게를 정리할 참이다. 코로나에 이어 연달아 침체된 상권 속에서 생계의 불안정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태원을 찾는 사람들이 한때 자신이 경험했던 즐거움을 계속 누릴 수 있길 바라는 그의 마음도 위태롭다.
일찍이 이태원을 선망했던 샤인씨는 어쩐지 악착같다. 마치 당위처럼 “괜찮아야 했다”라고 강조한다. 퀴어 아티스트로서, 이곳이 아니면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고 위기의식을 느낀다. 샤인씨는 자유와 환대의 광장 이태원을 아끼는데, 동시에 그런 자유와 환대가 가능하기까지 필요했던 배움 역시 강조한다. 상대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하는 만큼 나도 상대를 그렇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태원을 즐겨 찾던 승연씨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낯을 많이 가리는 승연씨는 이태원을 통해 변해 가는 자신을 보았다. 특히 난생처음 핼러윈 코스튬을 시도하며 한결 자유로워진 자신을. 그날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의 일부가 이렇다.
한편, 클럽 DJ들은 그날 이후 고민에 빠졌다. 예정된 파티를 진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대신 추모의 뜻을 담아 ‘이태원 스트롱’이라는 슬로건을 떠올렸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노래로, 춤을 추는 사람은 춤으로, 디제잉을 하는 사람은 디제잉으로 그날을 기억할 수 있다고.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일상과 애도는 분리되어 있고, 그만큼 사람들은 자칫 피로감에 빠진다. H씨는 아프리카 장례를 예시로, 보영씨는 애니메이션 <코코>를 예시로, 솔아씨는 퀴어퍼레이드를 예시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경계를 허물고 함께 어울리는 풍경을 상상했다. 나는 참사란 걸 그렇게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까, 묻고 싶다. 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다뤄지는 참사의 범위가 너무 좁게 느껴진다. 그날 이후 나의 친구들은 저마다 다른 청년들의 죽음을 떠올리기도 했다. 신당역에서 살해된 여성, 구의역에서 사망한 노동자, 연쇄적으로 사라진 성소수자 지인들, 그리고 언젠가 생의 끝자락에 서 있던 자신까지. 어쩌면 두서없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횡설수설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들은 꼭 그렇게 그날 이후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듣지 않고자 하는 힘이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침묵, 편견과 혐오, 죄책감과 답답함, 상실, 일상과 애도 등 전부 참사의 영향권 아래 있다. 해결 역시 그만큼 거대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