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휴일도 주야간도 없다…연예인 매니저는 ‘고생’이 당연할까
휴일도 주야간도 없다…연예인 매니저는 ‘고생’이 당연할까 (2024-07-08) 서강빈(가명) | 연예인 매니저 게티이미지뱅크 “고생 많으셨어요.” “매일 저희를 위해 고생해주셔서 감사해요.” 연예인 매니저는 항상 인사를 받는다, 고생했다고. 이건 인사치레가 아니다. 사실이 그러하다. 매니저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가장 노동강도가 높고 그 ‘고생’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직종이다. 나는 그 ‘고생’스러운 연예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대학을 졸업하고 지인의 소개로 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매니저 일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연예인도 보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시작했고,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인재’로 키워주겠다는 회사의 말을 믿고 매니저 업무를 시작했다. 그 ‘인재’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매니저의 업무는 아티스트 관리와 스케줄 조율, 스케줄 동행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업무 영역은 아주 광범위해진다. 이를테면 ‘아티스트 관리’라는 범주 내에는 이미지 관리, 에스엔에스(SNS) 모니터링, 아티스트 요청 사항 취합 및 보고, 멘탈 관리, 팬 관리 등이 포함되고, ‘스케줄 조율’에는 아티스트의 스케줄은 물론 회사 임원 스케줄링과 신인 오디션 스케줄링, 제작 스태프 스케줄링을 취합해 조율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일과 휴식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눈떠서 잠이 들 때까지의 시간이 업무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일을 아티스트의 스케줄에 맞춰 소화하다 보면 업무 강도가 살인적이라 느껴질 때도 있다. 한번은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새벽 2~3시에 일어나 출근을 한 적이 있다. 촬영은 다음 날 새벽 2~3시까지 이어졌고 다음 날 스케줄을 위해 인근 숙소에서 3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방송국으로 가서 다음 스케줄을 진행했다. 그렇게 24시간 근무에 이어 다음 날까지 근무를 해야 했지만, 별도의 휴가 없이 다음 날 또 그다음 날에도 일해야 했다. 휴일도 없고, 주말도 없고, 주야간도 없으며 24시간 아무 때나 걸려오는 전화는 모두 받아야 하는 것이 매니저의 일이다. 광고 매니저로 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친구들과의 관계는 끊어지다시피 했고, 오랜 기간 만나오던 애인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불규칙한 수면 패턴과 불균형한 식사로 인한 건강과 체력 문제였다. 업무 특성상 밤낮없이 일정을 소화해내야 하고 식사 시간도 일정치 않아 소화기 계통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부족한 잠 때문에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로 이어질 뻔한 일도 잦아졌다. 다행히 사고는 피했지만, 일이 공포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매니저는 과중한 노동이 당연한 듯 여겨지는 직종임에도 급여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다. 업계에 정해진 급여 기준이 없어 회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최저임금 수준으로 책정되고, 시간외 근무수당이나 휴일 야간 근무수당은 없다. 드물게 유류비나 식대마저 제대로 지원되지 않는 회사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일을 하면 할수록 급여가 마이너스가 되기도 한다. 또한 업계에 관행처럼 남아 있는 ‘열정 페이’와 저연차 매니저의 고생은 당연한 일로 여기는 ‘오래된 인식’은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최근 들어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변화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전보다 분명 좋아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가령 매니저와 아티스트의 일상을 다루는 한 티브이(TV)프로그램을 통해 매니저라는 직업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회사마다 중구난방이던 노동 환경과 구조가 일정 부분 평준화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대형 매니지먼트 회사의 경우이고 그 밖엔 여전히 살인적인 업무 강도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는 매니저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분명하다. 얼마 전부터 보직이 바뀌면서 그나마 처우와 근무 환경이 나아졌다. 나의 부서이동으로 자연스레 막내 매니저가 사라진 회사에서는 또다시 ‘열정적으로 일할 매니저’를 찾고 있다. 매니저라 쓰고 ‘고생’이라 말하는 그 자리에 또 누가 오게 될까. 누가 오더라도 소모품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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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는 10년차 여성 대리운전 기사다
나는 10년차 여성 대리운전 기사다 (2023-06-14) 이미영 | 대리운전 노동자·카부기상호공제회 공동대표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대리기사 모임인 카부기상호공제회원들의 모습. 이미영 제공 익숙한 알람소리에 눈을 뜬다. 오전 11시. 자리에서 일어나 씻자마자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는다. 내가 일하는 트리콜 대리운전은 정장 입고 사진을 찍어 올려야 대리콜 프로그램에 로그인된다. 로그인해두고 식사와 청소 등을 마치고 오후 1~2시쯤 집을 나선다. 경남 김해 집에서 20~30분 거리에 골프장이 세개 있는데, 낮콜 대기를 위해 골프장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1994년 홀로서기를 시작한 뒤 횟집, 학원, 식품재료 배달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빚도 갚고 아들 뒷바라지를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생활정보지를 뒤지며 일할 곳을 찾던 중 대리운전을 알게 됐다. ‘막장 일’이라며 말리는 이도 있었지만, 운전 실력 자신 있겠다 못할 게 뭐 있나 싶었다. 그렇게 내 나이 마흔일곱 2011년 8월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광고 일을 시작하고 한달 만에 몸무게가 5㎏ 줄었다. 처음 타보는 차, 특히 외제차 운전은 조심스러웠다. 가장 큰 어려움은 지리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한번은 초행길인데 비는 오고 내비는 잘 안 터졌다. 할 수 없이 택시를 세워 따라갈 테니 목적지까지 가달라고 했다. 도착하니 택시비 8000원. 만원짜리 콜에 택시비까지 줘야 하는데 손님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객님 안 일어나시면 경찰서 가겠습니다.”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려 하니 그제야 일어났다. 돈이 없단다. 20분쯤 뒤 집에서 요금을 가져다줬다. 여성 대리운전 기사라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폐를 건네며 “이 돈 줄 테니 자러 갑시다”라거나, 뒷좌석에서 내 어깨와 겨드랑이 쪽에 손을 대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번만 더 그러시면 경찰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까워 실제 경찰서에 가본 적은 없다. 속상해서 울기도 했다. 왜 막장 직업이라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됐다. 광고 광고 동료기사들에게 털어놨더니 “그 자리에서 경찰 불렀어야지…. 두둑이 받아야지”란 반응들이었다. 그 무서웠던 상황을 위로해준 동료는 없었다. 무섭고 치욕스러웠던 그 순간이 그들에겐 술안주 삼는 가십거리였다. 누군가 호루라기와 작은 플래시를 갖고 다니라고 말해줬다. 그때부터 내 열쇠고리에는 호루라기와 작은 플래시가 늘 달려 있다. 물론 나쁜 손님들만 만났던 건 아니다. 수고한다며 택시비 하라고 더 챙겨주던 분들도 있었다.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며 지인들과 소원해졌고 점차 세상과 단절돼 갔다. 손님들의 갑질과 만행까지 겹쳐 위염, 족저근막염, 불면증이 생겼다. 심신이 지쳐서 2017년 대리운전을 그만뒀다. 빚 갚고, 부모님을 모셔야 했기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지인 회사 경리, 학원 차 운행, 요양병원 식당 일 등 투잡, 쓰리잡을 뛰었다. 하루 12시간을 넘게 일하며 빚도 꽤 갚았다. 광고 2021년 10월 다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바뀌어 여성기사 희롱, 갑질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선납 주급이 인상돼 있었다. 콜당 수수료는 요금의 20%인데, 주급 수수료 20만3500원을 회사에 선납해야 한다. 이 돈을 미리 넣어야 배차 받을 수 있다. 여기에 매달 보험료가 12만원이고, 김해에서 부산까지 자정~새벽 4시 기사들을 태우고 두번 왕복하는 합류차 사용료 3000원, 회사 프로그램 사용료 1000원도 매일 낸다. 현재 대리운전비는 기본거리 1만4천원~1만6천원, 김해에서 부산까지는 2만5천원부터 시작된다. 콜을 잘 받으면 하루에 5콜~6콜, 못 탈 때는 2콜도 받는다. 월·화는 콜이 없는 편이고 수·목이 많다.(요즘은 불금이 아니라 불목이다) 경제가 어렵다더니 지난해 연말께부터 확실히 콜이 줄었다. 그렇게 쉬는 날 없이 밤새워 일해서 버는 돈은 한달에 350만~400만원 정도다. 지난해 1월부터 콜당 고용보험료를 낸다. 특고(특수형태근로종사자) 프리랜서로 5월엔 종합소득세 신고도 했다. 최근엔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대리기사들 모임인 카부기상호공제회에 가입한 게 큰 변화다. 부울경 대리기사 약 2만명 가운데 카부기 밴드 회원이 6천명, 그중에 카부기공제회원이 370명이다. 다달이 회비 1만3천원을 내고, 회원들이 다치거나 사고를 당하면 서로 돕는다. 지난해 3월 가입해 운영위원을 하다가 올해 초엔 공동대표까지 하게 됐다. 특히 여성회원 24명은 지난해 11월부터 ‘여자만세’ 카톡방을 만들어 소통한다. 대리경력 3개월에서 23년차까지 모여 둘도 없는 동료 언니, 동생 하고 지낸다. 서로 격려하고 상담도 해주고, 외곽지 픽업에 화장실 정보까지 나눈다. 언제나 외롭게 일하다 서로 염려해주며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게 돼 세상 밖으로 나온 듯하다. 당당한 10년차 여성 대리기사로 말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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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저는 14년째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입니다
저는 14년째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입니다 (2022-10-19) 이레(가명) | 가족돌봄 청년 게티이미지뱅크 아침 7시, 눈을 뜨자마자 엄마의 소변으로 가득 찬 주머니를 비운다. 혼자서는 발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엄마가 밤새 욕창이 생겼을까 서둘러 자세를 바꿔준다. 엄마의 몸을 이쪽저쪽으로 잡아당겨서 정렬을 맞춰 앉혀주면 온몸에 땀이 흐른다. 8시가 되면 엄마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죽과 반찬을 꺼내 떠먹여드리고 나면 활동지원사가 온다. 10시, 내가 먹을 아침을 챙겨서 부랴부랴 집을 나온다. 곧 지나갈 오전 시간이 아까워 다급하게 학교 도서관을 찾아 과제와 논문 작성 등을 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광고 공부하기 위해 일단 책상에 앉으면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함이 몰려온다. 밤늦게까지 엄마가 잠들지 못하거나 중간에 깨는 일이 반복되기도 한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 7일을 쉬는 날 없이 엄마를 돌보다 보면 충분히 잠잘 수 없기에 피로가 쌓이고, 이렇게 누적된 피로는 공부하거나 무언가에 집중해야 할 때 방해가 된다. 할 일을 꾸역꾸역 마치고 늦은 오후 시장에 들러 감자, 호박, 버섯 등 반찬거리를 산다. 시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은 50~60대 가정주부다.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정신없이 살면서 꾹꾹 눌러놓았던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다른 애들처럼 공부하거나 일해야 할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광고 광고 오후 5시, 활동지원사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귀가하면 엄마 돌보기가 다시 시작된다. 종일 공부와 과제를 하며 지친 몸을 씻고 쉬고 싶지만, 엄마 기저귀를 챙기고 자세를 바꿔가면서 자정까지 바삐 움직여야 한다. 엄마가 잠들면 그제야 나도 누울 수 있다. 2009년 9월, 내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엄마는 사고로 경추 3, 4번이 손상돼 사지가 마비됐다.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고 여러 재활병원을 전전했다. 재활병원 특성상 3~6개월이 지나면 더는 입원할 수 없어 2012년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왔다. 사고 전 몸이 성치 않아 사회생활이 어려운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졌던 엄마의 강인한 모습은 사라졌고, 몸도 마음도 약해졌다. 그렇게 엄마의 손과 발이 돼 지내온 지 10년이 흘렀다. 광고 고등학교 때 병원에서 본 간호사 선생님들은 그야말로 백의의 천사였다. 수많은 간호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을 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간호학과에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그렇게 평일에는 공부에 집중하고, 주말에는 병원에서 엄마를 병간호하며 운 좋게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동기들처럼 대학병원 정규직 간호사로 취업도 했다. 최대한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으며 일과 돌봄을 병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전문 간병인이 아닌 가정주부들이 대부분인 활동지원사는 밤 근무가 어려웠고,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활동보조 시간에도 한계가 있었다. 현 장애인 활동지원 제도에서는 혼자 대소변 처리가 어려운 중증장애인에게 24시간의 활동보조 급여를 제공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직계가족 등 보호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은 하루 7시간 남짓이었다. 현실적으로 평균 8시간을 근무하는 직장생활은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도저히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입사를 포기했다. 그때부터 엄마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파트타임 잡을 찾기 시작했고, 중간에 일을 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경력을 쌓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잠깐 용돈벌이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가 아프고 난 이후 내 삶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1순위는 엄마 돌봄이었다. 학업과 취업, 진로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대학 동기들은 이미 6~7년차 어엿한 간호사로 자리잡고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결혼, 출산 등 인생의 과업들을 차근차근 밟고 있는 것 같다. 사는 데 있어 점점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친구들을 만나 간병 스트레스를 털어놔도 온전히 이해받기란 쉽지 않았다. 그럴수록 고독감과 외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광고 종종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긴 간병 이후 이 세상에 오롯이 나만 남겨진 삶은 어떨까?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갈까? 마음껏 꿈꾸고 도전하며 시행착오도 거친다는 청년기를 엄마 간병으로 흘려보내는 지금의 상황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엄마를 돌보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걸까. 이 기나긴 터널의 끝에 힘들었지만 특별했고 의미 있었던 순간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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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출근하는 발달장애 딸에게
출근하는 발달장애 딸에게 (2022-11-30) 이은자 | 강서퍼스트잡지원센터 센터장 지난 6월17일 한 장애인 노동자가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전국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제도화 촉구 결의대회에서 ‘뜨개질 수업을 받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매일 아침 너와 집을 나서는 순간이 엄마의 하루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지. 함께 출근한 지 1년이 다 돼 가는구나. 중증장애로 특수학교를 마친 네가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직장에 다니며 하루 4시간씩 일을 하게 되다니! “오늘 회사 가서 뭐했어요?” “일해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요즘 우리 일상이 됐구나. 네가 직장에서 편백방향제를 만드는 걸 보면 엄마는 참 대견하단다. 방향제 주머니에 편백나무 큐브조각 50개를 넣고 묶어야 하는데 숫자세기가 어려우니, 50개 칸이 있는 바둑판 모양 판에 편백나무 큐브를 하나하나 모두 채운 뒤 주머니에 옮겨 담더구나. 동료들은 그 방향제 주머니를 상자에 담고 그 위에 회사 스티커를 붙여 완성품을 만들고. 너와 네 동료가 만드는 편백 방향제들이 렌터카회사에 납품된다 하니, 고객들에게 매일 기분 좋은 향기를 전달할 거야. 광고 지현아 알고 있니? 엄마는 네가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장애인 노동을 공부하게 됐어. 발달장애인이 일하고 싶어도 현재 제도 안에서는 직업을 찾을 수가 없겠더라. 그래서 엄마가 직접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발달장애인의 직업생활을 돕는 강서퍼스트잡지원센터를 만들게 된 거란다. 너와 같은 발달장애인을 기업과 연결하고, 정식 취업 전에 기업에서 실전처럼 경험하고 훈련하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지 벌써 4년이 흘렀네. 이런 과정을 거치면 기업은 채용 전에 함께 근무하면서 장애인의 업무능력이나 비장애 동료들과의 관계형성 등을 살펴볼 수 있고, 장애인 당사자는 출퇴근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업무는 적성과 능력에 맞는지 등을 가늠해 볼 수 있지.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이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 서툴잖아.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또는 근무하기 어려운 환경이나 업무에 관해 정확한 의사 표현이 힘들잖아. 그래서 훈련할 때는 정부에서 파견한, 발달장애를 잘 이해하는 ‘근로지원인’이 함께 해 기업들도 부담을 덜 수 있단다. 광고 광고 얼마 전 퍼스트잡지원센터를 통해 취업한 친구들이 한달에 한번씩 모여 회식하는 자리에서 욱정씨를 만났단다. 욱정씨는 자동차서비스센터에서 환경미화 직원으로 4년째 근무하는데 새벽에 출근하면서도 한번도 지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단다. 한번 정해진 규칙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어 청소를 꼼꼼하게 하니 동료직원과 손님들에게 늘 인기 만점이라고 해. 욱정씨가 훈련하기 전에 엄마는 현장에 먼저 가서 일터 분위기를 살피고, 업무도 해보면서 동선을 파악했단다. 욱정씨와 함께 훈련하는 날에는 욱정씨가 잘하는 업무와 훈련이 필요한 업무를 체크하고 미리 정한 동선대로 청소하는 훈련을 했어. 어려운 업무를 설명할 때는 엄마가 먼저 해보고 욱정씨가 따라 하도록 했는데, 참 잘 따라하며 어려움 없이 업무를 익혔단다. 직원들 근무시간에 최대한 불편을 주지 않도록 점심시간을 조정하고 업무순서를 정하는 과정을 두달 정도 거친 뒤 욱정씨는 지금까지 무리없이 일하고 있단다. 광고 너와 같은 학교를 졸업한 네 친구 효상이는 물류센터에서 근무하고 있어. 상품을 보관하는 바구니를 접거나 펴서 차곡차곡 쌓아 정리하고, 바구니를 기계에 넣어 세척하고, 깨끗해진 바구니를 다시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일정한 패턴이 있는 걸 좋아하는 효상이에게는 일터가 곧 놀이터가 됐다고 해. 요즘 엄마는 네가 다니고 있는 회사 근처에 있는 도시형 스마트팜 기업과 손잡고 너희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개발 중이야. 농작물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포장하는 일인데 일정한 규칙과 패턴이 있어 발달장애인에게 적합한 업무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엄마는 그동안 널 키우면서, 네 친구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발달장애인의 특성과 강점이 노동현장에서 잘 어우러지도록 더 애써볼 작정이야. 엄마의 바람은 네가 일하는 곳에서, 또 지역사회에서 사람들과 연대하며 때로는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거야.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기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하고, 장애라는 특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는 손을 내밀어 줘야 하지. 엄마는 너와 네 친구들이 이런 것을 자연스럽게 배웠으면 한단다. 힘들고 괴로운 시절이 올 수도 있지만 모든 날, 모든 시간이 행복할 수만은 없는 게 삶이고 인생인 것 같아. 사랑하는 딸 지현아. 장애가 네 삶의 장애물이 아닌 특별함으로 네 곁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기를 엄마는 늘 기도한단다. 여느 평범한 20대 청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너를 엄마는 벅차고 흐뭇한 마음으로 언제나 지켜볼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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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두 개의 운동을 할 권리가 필요하다
두 개의 운동을 할 권리가 필요하다 (2024-06-23) 변재원 | 지체장애인·인권활동가 나는 장애인이다. 기댈 것 없이 설 수 없고, 목발 없이 걸을 수 없고, 방석 없이 앉을 수 없는 장애인. 무엇 없이 서지도, 앉지도, 걷지도 못하는 위태로운 존재다. 오랜 시간 무기력했던 몸이 사회운동을 계기로 활력을 찾았다. 나쁜 장애인으로 유명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를 만나 얼떨결에 활동가가 되면서부터였다. 활동가들은 정거장 앞에 서 있는 장애인들을 태우지 않은 채 떠나는 버스와 기차를 끝없이 마주하며 이동할 권리를 외쳤다. 그러나 철갑을 둘러싼 차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내 몸의 통증은 점점 커졌다. 결국 장애인 동지들을 거리에 둔 채 무리에서 먼저 이탈하고 말았다. 몸과 마음은 금세 주눅 들었고 오랜 시간 괴로웠다. 광고 회복이 필요했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거리에서의 운동’을 당분간 멈추고 ‘체육관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신체 운동을 하려 해도 수많은 체육시설은 적극적으로 장애인 손님을 꺼리고 있었다. 회원으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내가 헬스장에 그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는 사람임을 한참 동안 증명해야 했다. 동지들과 버스를 탈 권리를 외칠 때는 부끄럽지 않았지만, 혼자서 체육관에 입장할 권리를 외칠 때는 착잡했고 수모를 느꼈다. 손님, 헬스장 이용하다 다치시면 어떡하게요. 조심히 안 다치게 운동할 수 있어요. 샤워는 어떻게 하시게요. 혼자서 할 수 있어요. 라커룸 사용은요. 탈의실 의자에 앉아 스스로 옷 갈아입을 수 있어요. 그래도 위험할 텐데요. 안 위험해요. 이런 식의 끝없는 우려 섞인 실랑이를 반복해야 간신히 입장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주변 장애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소중한 운동장으로부터 쫓겨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광고 광고 옥신각신 끝에 운동을 시작하게 된 첫날이었다. 움직이다 넘어지거나 다치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타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안은 채였다. 한참 서성이다 구석에 놓인 로잉머신 좌석에 앉아보았다. 장애를 가진 불청객이라 생각하니 누군가를 붙잡고 기구 작동법을 물어보는 것도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온통 눈치 보이는 낯선 공간 안에서 배움 없이 다룰 수 있는 기구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키를 당긴다. 키를 놓는다. 두 동작을 슬렁슬렁 어색하게 반복하였다. 얼마 전까지 거리에서 시끄럽다 핀잔 듣던 장애인은 이 체육관에서는 가장 조용한 존재였다. 그렇게 하루, 열흘, 한달, 반년. 체육관을 들락날락하며 집채만한 몸들 사이에서 작고 휘어진 나의 몸을 가꾸었다. 그사이 체육관의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해갔다. 나는 그곳에서 내 몸의 변화보다 사람들의 변화를 더 크게 인식했다. 언젠가부터 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이렇게 자세를 잡으면 다쳐요” 하며 운동 자세를 교정하는 조언을 듣게 되었고, “오늘도 운동을 왔네? 요즘 열심이야”라고 덕담하는 친절한 아저씨 친구도 만났다. 나를 어색해하던 데스크 직원은 “68번 사물함은 높지 않죠?”라고 물으며 키 작은 장애인이 닿을 만한 낮은 위치의 사물함을 배정해주었다. 어느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운동하는 일상이 체육관의 새로운 문화로 자연스럽게 정착하고 있었다. 광고 소박한 공간에서 함께 땀 흘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의 기쁨. 지난 5년간의 ‘사회 운동’과 ‘신체 운동’이 일러준 값진 교훈이다. 함께 어울리며 애써 투명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 때의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두 운동을 통해 나는 더 이상 장애로 인한 몸과 처지를 비관적으로 생각하거나 부끄럽다 여기지 않는다. 사회를 바꾸고, 나를 가꾸자. ‘신체 운동’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사회 운동’은 너를 사랑하는 법을 감각하고 꿈꿀 수 있게 한다. 두 운동을 함께 할 때 우리는 가장 개인적인 문제와 가장 사회적인 문제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라 모두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의 ‘이동권’을 지키기 위해 600일 넘게 지하철 아래를 향하던 장애인 활동가가 꼬박꼬박 저녁마다 운동기구 앞에서 나를 위한 ‘운동권’을 지켜가듯, 나를 향한 운동과 우리를 향한 운동이 함께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두 운동장에서 몸 부딪히며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차별 없이 사랑하고 진솔하게 이해하는 모습은 일상이 될 것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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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다국적 노숙인들, 그 가장자리를 찾는 상담원
다국적 노숙인들, 그 가장자리를 찾는 상담원 (2024-06-16) 김용극 | 홈리스 아웃리치 상담활동가 일본인 홈리스에게 외국인으로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H6s필자 제공 햇수로 7년째이다. 나는 ‘홈리스’를 상대로 거리에서 상담 활동을 한다. 거리의 노숙인은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는 탓에 적극적으로 먼저 찾아가 도움을 주는 아웃리치(outreach) 봉사활동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들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관련 업무를 하는 분들과 노숙인의 간격을 체감상 좁혀나가는 매개 노동이 필요하다. 아웃리치 상담원들이 공식적으로 하는 일은 거리에서의 위기 상황 발견 및 조치, 시에서 제공하는 복지서비스나 노숙인종합지원센터 이용과 관련된 정보 안내 등이다. 아웃리치 상담 활동가는 다양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서울역 인근은 특히 그렇다. 그곳엔 비단 우리 국적의 노숙인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출신의 노숙인이 제법 많다. 소위 ‘코리안 드림’이라는 꿈을 안고 한국에 찾아온 이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녹록지 않은 현실과 싸우다 이슬 피할 곳조차 찾지 못해 노숙 현장으로 내몰린다. 광고 상담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즈음, 재일동포 출신의 여성 홈리스를 만났다. 한국어로 소통이 되지 않는 분이었다. 일천하지만 일본어 회화가 가능했던 내가 통역 및 상담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재외국민 신분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원하고 있었다. 70대의 고령이었고, 여권을 비롯해 본인을 증명할 어떤 신분증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으로 되돌아가기 싫어서 찢어버렸다고 했다. 귀국을 거듭 권유했지만, 끝내 거절하였다. 자기증명을 훼손하기까지 수많은 고통이 그녀를 관통하였을 것이다. 본인 결심대로 영주귀국 절차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도움으로 지문을 찍어 신분 확인을 했고, 찢어버린 여권은 분실신고했다. 신분증 재발급을 위해 주민센터를 오가고, 외교부 여권과를 드나들며 제반 서류 작성을 도왔다. 임시 주소지를 노숙인종합지원센터 쪽으로 옮기고 기초생활수급자 지정을 위해 주민센터 상담 통역을 하였다. 다행히 영주귀국이 확정되었다. 수급자로 지정된 뒤에는 주민센터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을 통해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최근에는 일본 국적의 한 남성 노숙인을 만났다. 한류의 영향이었을까. 그는 한국 생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언어 소통이 되지 않은 탓에 무언가를 시도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귀화하지 않은 순수 일본인이었으므로 인도적 차원의 지원 외에 제도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그분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일본대사관을 통해 귀국을 권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울 방법이 없다고. 안타까워하며 상담하는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 세금 한푼 안 내는 외국인 노숙자를 왜 그렇게 도우려고 해요?” 나는 그 말에 내가 가진 믿음을 들어 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저 나그네 같은 존재들이었을 테니까요.” 광고 광고 외국 국적의 홈리스들은 이 땅에 온 나그네 중 나그네라고 할 수 있다. 거리에서 발견된 위기 상황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는 것은 아웃리치 상담 활동가에게는 직무유기와 같다. 국적을 막론하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을 알아보고, 이에 관한 정보를 동원해 도와야 한다. 결국 이 일본인 남성 홈리스는 귀국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찾겠다며 나와의 인연을 일단락 지었다. 그의 선택을 지지하며 상담을 끝마칠 수밖에 없었다. 7년여간의 활동 속에서 수없이 많은 홈리스의 삶과 죽음을 목도해왔다. 그 다난한 삶과 조용한 죽음 속에는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 삶에 대한 의지, 살아가고자 했던 열망이 숨겨져 있다. 홈리스 현장의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는 나 같은 아웃리치 상담원들은 거리의 일터로 나서며, 그 의지와 열망이 밀려난 가장자리를 찾아서 활동한다. 그곳에서 만난 분들에게 삶을 향한 충동들을 발견하며, 이를 다시 세상에 나아가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는다. 광고 밝은 곳이 아닌 어두운 곳으로, 주인공이 아닌 나그네들이 사는 곳으로, 국적과 성별, 건강과 나이가 다른 이들이 끝내 밀려난 곳으로, 나는 또 다른 나그네를 찾아 나선다. 가장자리의 가장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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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예술인 산재보험은 ‘규제 암덩어리’가 아니다
예술인 산재보험은 ‘규제 암덩어리’가 아니다 (2024-06-09) 지원준 | 독립 피디 촬영 중 사자가 덤벼들자 급하게 나무 위로 피신하는 고 박환성 피디. 현지 코디가 찍은 사진. 박환성 피디 페이스북 갈무리 나는 고소공포증이 상당히 심한 편이다. 그래서 생업과 관련이 없다면 절대 등산을 하지 않는다. 정상에 올라서 시원함이 아니라 공포감을 느낄 정도다. 지금은 사라진 ‘브이제이(VJ) 특공대’라는 방송을 맡고 있었던 2002년 겨울. 영종대교 관리자들을 촬영하러 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여분의 추락방지 안전블록이 없어 나는 맨몸으로 올라야 했다. 지금이야 관리업체에서 안전장비 없이는 못 올라간다고 버티겠지만 20년 전에 그런 인식이 있었겠는가? 현수교 기둥 내부의 통로를 한참 타고 올라가 드디어 영종대교 꼭대기에 머리를 내밀게 됐는데,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카메라를 들고 일어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일어나면 날아간다.’ 다행히 촬영은 무사히 마쳤지만, 그때 시작된 고소공포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독립 피디(PD)’가 뭐 하는 직업인데 저러나 궁금하실 테다. 방송계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연출자를 떠올리시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외주제작 현장에서 주로 일하지만, 방송사 내부에도 상당수의 독립 피디들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안 가는 곳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위험한 곳도 다니게 되고 사건·사고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분이 소위 프리랜서라, 그 위협에 대한 안전관리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광고 개인적으로 가장 어처구니없는 장면은, 동료 피디가 분쟁지역 촬영 중 전선을 향해 기동 중인 티(T)-72 전차를 배경으로, 방탄모도 방탄조끼도 없이 스탠딩을 한 장면이다. 당시 그는 방송사 내부의 프리랜서였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방송사 관계자가 ‘알아서 하라’고 했단다. 분쟁지역뿐만이 아니다. 2005년, 대지진을 촬영하기 위해 신문 기자들과 같이 파키스탄에 간 적이 있다. 현지 도착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10여명의 기자들이 다 사라지고 집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마음에 나가보니 모두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당에 서 있었다. 1명이 다가와 신기한 듯 건네는 첫마디. “어떻게 안 깨고 계속 잘 수가 있죠?” 볼펜 기자였던 다른 취재진은 도착 당일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다 꿀잠을 잤지만, 나는 파괴된 도로 상황 등을 촬영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 피로에 곯아떨어져, 사람들이 자다 말고 도망 나갈 정도의 강력한 지진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로 사용한 집이 버텨 주었기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행운이 언제나 미소 지을 리는 없고, 안타깝게도 재해와 마주친 동료들 역시 너무나 많다. 한 동료는 히말라야 촬영을 갔다가 조난을 당해 발가락을 절단해야만 했고, 또 다른 동료는 고릴라에게 공격당해 오른팔을 절단할 뻔한 지경까지 갔었다. 이 둘은 어찌 됐건 살아 돌아왔기에, 우여곡절 끝에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촬영 중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고 박환성, 김광일 피디는 산재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광고 광고 독립 피디들은 왜 여태까지 산재 적용이 안 되고 있을까. 프리랜서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이 아예 없는 걸까?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수신료를 징수하는 한국방송(KBS)이 수신료를 이용해 사내 프리랜서들에게 예술인 산재보험을 들어주고, 외주 제작사에도 예술인 산재보험을 들어줄 수 있는 추가 비용을 보태주면 된다. 다큐멘터리의 경우라면 편당 20만원 정도의 돈으로 피디뿐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의 산재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현장에서 쉽게 보편화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한국방송은 ‘외주제작 인력 문제는 외주 제작사의 책임’이고, ‘내부의 프리랜서들은 업무를 위탁받아 독립적인 사업을 영위하는 자(프리랜서의 법률적 정의)들이니 산재보험에 가입할 의무가 없다’고 대답해 왔다. 예술인 산재보험 의무화 논의는 ‘암 덩어리 규제’라고 대답하니,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마저 내팽개치는 집단이 과연 수신료를 징수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광고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동료들 중 누군가가 똑같은 위험을 마주하고 있다. 분쟁이나 재난지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누군가는 밤샘 촬영을 하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운전대를 잡고 있다. 예술인 산재보험도 없이.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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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기후변화에, 날씨 눈치에…꿀벌만큼 바쁜 양봉가
기후변화에, 날씨 눈치에…꿀벌만큼 바쁜 양봉가 (2024-06-02) 이순이 | 양봉가 남편이 이동 간 곳에서 벌통 내검을 하며 꿀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살펴보고 있다. 필자 제공  “꽃이 안 피었으니 할 일이 없겠네.” “꿀 다 땄으니 요즘은 한가하겠네.” 양봉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이다. 참 모르시는 말씀. 양봉가는 5~6월 두달 동안 꿀을 뜨기 위해 열달은 꿀벌을 돌보며 바쁘게 일한다. 양봉을 하다 보니 일곱 요일의 개념은 없어지고 해요일과 바람요일 그리고 비요일로만 구분한다. 공휴일도 주말도 없이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바쁘게 일한다. 바람요일은 벌통들이나 자재들이 들썩거리고 날아가고 부서지니 봉장을 둘러보며 비상대기하는 날이고 비요일이 되어야 쉴 수 있다. 비요일에 바람이 불면 비 맞으며 사고 수습을 하는 최악의 날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꿀벌들이 월동하는 동안에 농한기의 여유를 누리기는 한다. 하지만 월동기에도 아침이면 보온 덮개를 걷어 꿀벌 나들문을 개방해 주고, 해가 지면 바닥까지 푹 뒤집어씌워야 한다. 월동 기간에도 바람요일은 비상이다. 보온 덮개가 바람을 품고 들뜨면서 한이불 덮은 벌통들이 줄지어 넘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광고 참외 하우스에 수정용 꿀벌을 납품하면서부터는 농한기도 한달 줄어들었다. 1월부터 꿀벌을 키우다 보니 4월이면 꿀벌 군사 수가 넘쳐나면서 분봉 나갈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부랴부랴 2단, 3단으로 벌통을 올려 벌통 안의 공간을 넓혀 주고 일주일에 한번씩 내검(내부 관찰)을 한다. 남편과 나는 가장 먼저 먹이가 충분한지 확인하고, 여왕벌의 유무를 확인한다. “여왕벌 여기 있어”라는 말이 가장 반갑다. 벌통 안이 안정돼 있다는 뜻이고, 여왕벌을 잘 모셔 두었으니 그녀가 다칠 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가끔은 여왕벌이 벌집 판인 소비 사이에 끼여 죽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두 손으로 책장을 펼쳐 잡듯 소비를 한 장씩 들고 샅샅이 뒤져서 새 여왕벌을 준비한 왕대(여왕벌이 될 알을 받아 벌이 될 때까지 기르는 벌집)를 베어낸다. 여왕벌이 사라진 벌통엔 표시해 두었다가 왕대를 꽂아 준다. 비요일과 바람요일이 계속돼 내검을 못 하는 경우에는 새 여왕벌이 태어나면 옛 여왕벌이 군사의 반을 이끌고 분봉을 나가 버린다. 사고로 여왕벌이 사라진 벌통에는 일벌들이 무정란을 낳기 시작해서 소비가 수벌 집으로 가득 찰 수도 있다.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 늦어도 열흘 안에 한번씩 벌통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 광고 광고 10년 넘게 그렇게 일하다 보니 손가락 관절과 허리가 남아나지를 않는다. 남편은 꾸부정하게 걷기 시작했고 복대를 차고 일을 한다. 나는 아침이면 아픈 손가락을 주무르면서 봉장으로 나간다. 여왕을 찾거나 산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소비를 들고 하도 들여다봐서 목 디스크도 걱정되는 상황이다. 아프거나 말거나 아까시꽃이 피는 5월이 되었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며 새벽 꿀 뜨기와 야간 이동 그리고 더 자주 내검을 하는 강행군을 감수하며 꿀 많이 뜨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아까시꽃이 어디까지 올라오는지 확인하느라 전국 곳곳에 있는 양봉가들과 날마다 통화를 하고 에스엔에스(SNS)로도 확인한다. 아뿔싸! 전국에 하루이틀 차이로 거의 동시에 꽃이 피고 있다. 게다가 비, 비, 비…. 1차지인 경산에 아까시꽃이 버선발을 내밀고 있으니 어서 오라는데 비 소식이 있다. 비가 내리면 외역봉(일벌)의 날개가 젖어 돌아오지 못하고 밖에서 죽을 수도 있어 이동을 포기했다. 2차지인 안동에 벌통 일부를 이동하려 하는데 3일 동안 비 소식이 잡혀 있다. 봄벌 키우며 먹인 설탕꿀(사양꿀)을 빼내는 정리 채밀을 다 해둔 터라 비가 3일 연속 내리면 꿀벌들이 굶을 수 있다. 빗줄기가 가늘 때 얼른 벌통 안에 비상식량을 넣어 주고 비 맞으며 피어 있는 아까시꽃을 쳐다만 보고 있다. 저렇게 비를 맞고 있다가 갑자기 해가 뜨고 기온이 높아지면 그대로 말라 버리는 수가 있으니 걱정이 태산이다. 아무래도 안동으로의 이동도 포기해야 할 듯하다. 광고 비 때문에 1, 2차지에서 꿀을 뜨지 못했으니 3차지는 전국의 벌쟁이들로 득시글거릴 게 분명하다. 거리도 무시하고 서로가 빤히 보이는 곳에 벌통을 늘어놓을 테지,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꿀을 얼마나 뜨는지 엿볼 테지. 60여통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상대가 200여통을 가지고 들어왔다면 얼른 벌을 빼는 게 상책이다. 대군 쪽으로 꿀벌들이 몰려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적응하랴 날씨 눈치 보랴, 그래도 이동할 채비를 해 두고 긴장하고 있는데 무심한 비는 주책없이 주룩거린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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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화면을 해설해 드립니다, 자막 아니고요
화면을 해설해 드립니다, 자막 아니고요 (2024-05-26) 홍미정 | 화면해설작가 영화 ‘올빼미’의 화면해설 작업을 하고 있다. 필자 제공 얼마 전, 집안 경조사 때나 가끔 보는 이종사촌 동생을 만났다. 누나는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제대로 설명할까 대충 둘러댈까 잠시 망설였다. “난 화면해설작가야. 텔레비전(TV) 드라마 볼 때 ‘에이(A)가 커피를 마신다’ 이런 식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을 설명해 주는 거 들어 본 적 있어? 시각장애인은 대사만 들을 수 있고 동작은 볼 수가 없잖아. 화면에 나오는 장소나 등장인물의 동작 같은 걸 설명해 주는 게 화면해설이야.” 광고 “아, 맞아. 어쩌다 보면 그런 거 나오더라. 그거 어떻게 끄는 거야? 뭘 계속 떠들더라고.” 동생의 말이 반은 농담이었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기에 서운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화면해설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는데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고 있던 사람이 ‘화면 밑에 나오는 자막 같은 걸 쓰는 거야?’ 할 때 허탈하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자막을 읽는단 말인가. 광고 광고 올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이 국내에 도입된 지 25주년이 되는 해다. 짧지 않은 역사라고 생각되지만 시각장애인 가족이나 지인이 없는 이들에게 화면해설은 미지의 영역이다. ‘화면해설’이란 시각장애인을 위해 영상 속 장면의 전환이나 등장인물의 표정, 몸짓 그리고 대사 없이 처리되는 상황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 화면을 해설하는 원고를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 ‘화면해설작가’다. 우리의 글은 성우들의 목소리에 실려 시각장애인들에게 전달된다. 같이 사는 가족도, 오래된 친구도 화면해설이 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해서 2년 전에는 이 일을 시작한 지 만 10년이 된 작가 다섯명이 10주년을 기념하며 화면해설작가의 세계를 알리는 ‘눈에 선하게’(사이드웨이, 2022)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광고 ‘눈에 보이는 대로 쓰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하고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 앞에 보이는 풍경을 말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곧바로 이해할 것이다. 저 그림 같은 풍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눈으로 보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지만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에 난해한 상황은 부지기수다. 멜로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키스를 할 듯 말 듯 쳐다보기만 하며 3분 이상 시간을 끈다면 그 3분 동안의 상황을 계속 설명해야 한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짙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장면이 거듭 반복된다 해도 매번 ‘짙푸른 바다가 펼쳐진다’라고 해설할 수는 없으니 여러 형용사를 동원해서 가능한 한 상세하게 해설 원고를 써야 한다. 별다른 상황의 변화 없이 긴 영상이 이어지는 화면을 해설하기도 어렵지만 반대로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벌어지는 상황도 난감하다. 화면해설은 원영상의 내레이션이나 등장인물의 대사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예능 프로그램은 화면해설 하기 어려운 장르 중 하나다.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이 많다 보니 대본이 따로 없어서 등장인물들의 말을 화면해설작가가 따로 기록해야 한다. 최근엔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프로그램 덕분에 시간을 덜게 됐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일일이 받아쓰기를 해야 했다. 출연자들이 특정 동작을 하면서 계속 말을 하고, 화면엔 자막이 뜨는데 갑자기 폭소가 터진다면 동작과 자막을 해설하는 동시에 왜 웃음이 터졌는지도 해설해야 한다.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의 빠른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말이다. 비시각장애인 시청자는 화면을 보며 바로 웃었는데 시각장애인은 긴 해설을 듣고 20~30초 후에나 웃음을 터트렸다면 제대로 된 화면해설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 상황에 딱 맞는 해설을 쓰기 위해 같은 화면을 몇번씩 돌려보다 보면 단 5분짜리 영상의 화면해설원고를 쓰는 데 두세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광고 일에 애정이 있다 보니 더 잘 쓰고 싶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렇게 애쓰다가 건강이 상하기도 한다. 실제로 10년 이상 된 작가들은 너무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보니 대부분 목, 어깨, 허리 등에 한가지 이상씩 질환이 있다. “화면해설이 없는 방송도 본 적이 있는데 화면해설을 듣고 나서 이렇게 재미있는 프로그램인지 새삼 알았습니다. 다음 회차를 기대하게 하는 해설이네요.” 이런 시각장애인의 격려에 힘을 얻어 지금 이 장면에서 제일 중요한 정보가 어떤 것일지, 그것을 해설하는 데 가장 적절한 표현은 무엇일지 찾고, 쓰고, 고치고, 또 쓰는 지난한 작업으로 다시금 들어선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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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는 몸으로 일한다
나는 몸으로 일한다 (2024-05-19) 김정임 | 물류업 종사자 직원들이 물류 창고에서 발송할 책을 찾고 있다. 필자 제공 우리 회사는 몸으로 일하는 곳이다. 거래처의 물건을 위탁 관리하며 출고 주문이 오면 물건을 찾아서 포장한 뒤 서점으로 배달하거나 개인 택배 발송을 하는 물류센터이다. 파주의 특성답게 주 종목이 책이고, 수험서 택배 발송이 주 업무이자 수입원이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읽는, 지식의 보고이자 마음의 울림을 주는 책이 우리 현장에서는 그냥 물건일 뿐이다. 크고 두껍고 무거우면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오는 짐덩어리 물건이다. 그런데 “도서 물류업을 해요” 하고 나를 소개하면 왠지 “필통 보관업을 해요” “쓰레기통을 보관하지요”보다 뭔가 나은 걸 하는 듯한 우쭐한 기분이 든다. 광고 이른 아침 사장님이 가장 먼저 회사에 나와 문을 열고 주변 정리를 하면 오전 여덟시부터 직원들이 출근한다. 사무실 프린터에서 주문서와 택배 송장이 쉼 없이 쏟아져 나오며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제작된 도서를 실은 큰 차가 수시로 회사 마당에 도착하면, 지게차가 오가며 물건을 내리고 들인다. 늘 안전사고에 주의해야 한다. 사람 몸을 다치지 않게 신경 써야 한다. 주문서대로 물건을 찾아서 스캔 검수 후 포장하는 일은 단순하지만 조금만 주의력이 흩어지면 택배 송장을 바꿔 부착하는 등의 실수로 이어진다. 출고 작업량은 상황별, 이슈별, 시즌별 다양한 변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불규칙하다. 그날의 출고 주문은 그날 모두 마쳐야 한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룰 수가 없다. 거래처의 물건을 위탁 관리하며 발송하는 물류센터의 업무 특성이다. 고객사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마감을 해내는 책임감과 직원들의 업무 숙련도 그리고 팀워크다. 인공지능(AI)도 로봇도 대체할 수 없는, 오직 사람의 몸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광고 광고 책을 스캔하고 상자 포장을 하다 보면 책 먼지, 상자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쓴다. 먼지뿐만 아니라, 몸으로 일하기 때문에 팔, 다리, 허리, 온몸이 쑤시고 아픈 건 당연지사다. 작업을 마치고 장갑을 벗어 온몸을 툭툭 치면서 먼지를 털다가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다.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부모님은 평생 시골살이를 하시면서 과수원 농사, 텃밭을 일구셨다. 농사라는 게 말 그대로 오롯이 자기 몸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들일을 마치고 집에 오시면 현관 밖에서 장갑이나 수건으로 온몸의 먼지를 털어내셨다. 집 안에서 숙제를 하다가도 툭툭 옷 터는 소리가 나면 밖을 내다보곤 했다. 툭툭 먼지 터는 소리. 내가 온몸으로 일하고 있다는 그 소리에 마음 한곳이 저릿해진다. 엄마에게 나는 당신의 꿈이자 기쁨이었다.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기쁨을 드리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기보다는 엄마의 기쁨을 위해 공부하는 딸, 남이 볼 때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했다. 시골 살림에 비싼 4년제 사립대학 등록금을 대주셨지만, 대학에 가서 나는 흔들리고 방황하며 여기저기 기웃대기만 했다. 졸업 후에는 그저 그런 직장들을 다니다가 서른살에 결혼했다. 남편은 고등학교 졸업 뒤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온몸으로 일해온 사람이었다. 인생에 대해 자신이 없고 불안했던 나는 확신 있고 추진력 있는 그에게 끌렸다. 광고 5년 전 남편은 20년 직장 경험을 살려 파주 외곽의 공기 좋은 시골에서 물류 사업을 시작했다. 몸으로 일하는 만큼 직원들이 불편한 건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염려하며 일하고 있다. 온몸으로 일하다 보면 당당하고 정직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을 때가 많다. “열심히 살고 있어요, 정말 행복해요”라고 말씀드려도,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이나 여기저기 아파하며 끙끙대는 내 모습을 보면 부모님은 속상해하실지도 모르겠다. 우리 딸은 나처럼 옷에 먼지 묻는 일을 하지 않기를 기대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가끔은 마음 한편이 저리기도 하다. 어쩌면 길었던 이십대의 방황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나의 자격지심일 것이다. 부모님은 늘 그렇듯 그저 자식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기도하실 텐데 말이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산을 관리해주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안전하게 보내주는 나의 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몸에 훈장처럼 근육통을 안고 사는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즐거운 현장을 가꾸기 위해 오늘도 나는 달린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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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밤 9시는 칼퇴, 11시는 되어야 야근…저기요, 노동부 장관님?
밤 9시는 칼퇴, 11시는 되어야 야근…저기요, 노동부 장관님? (2022-08-03) 신명재 |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 수석부지회장 2018월 6월 어느 늦은 밤, 경기도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의 한 게임 회사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안녕하세요. 저는 11년차 게임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입니다. 최근 ‘첨단산업은 노동시간을 더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장관님 발표를 보고 가슴이 답답해져 몇 자 적어 봅니다. 아마 2011년이었을 거예요. 제가 처음 게임회사에 들어온 해가요. 그때만 해도 전자오락이나 만드는 괴짜 회사 이미지였는데 요즘엔 4차 산업과 메타버스, 스마트함의 대명사가 되었죠. 하지만 시대 인식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마치 우아한 백조가 물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발을 버둥거리는 것처럼 말이죠. 광고 제가 본 게임회사 직원들의 현실은 오후 9시는 ‘칼퇴’, 11시는 되어야 ‘야근’이라고 말하는 그런 곳이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모두가 그랬어요. 야근수당 같은 건 없었죠. 그렇게 밤에도 늘 회사에 불이 밝으니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잡이 배’라는 별명이 생겼나 봐요. 저도 한번은 일이 너무 많아서 한달이 넘게 택시만 타고 다닌 적이 있었어요. (저는 운이 좋아 회사에서 새벽에 출퇴근하면 택시비가 지원됐어요.) 그날도 어김없이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데 문자가 하나 와 있더군요. 바로 월급 입금 문자였어요. 여태 지난달 월급을 1원도 쓰지 못했는데 다시 한달이 지나 월급을 받은 거죠. 기분이 묘했어요.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살고 있나?!’ 싶어 ‘현타’라는 게 오더군요.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저 같은 엔지니어들은 매주 새벽 3~4시에 시작하는 정기 점검/업데이트를 해야 해요. 사람들이 잠을 자느라 접속률이 가장 낮을 때인 새벽이 게임 노동자들에게는 바쁘게 일해야 하는 노동시간인 거죠. 새벽부터 네트워크, 서버, 디비 등 각 직무별 순서대로 작업하는데, 누구 한명이라도 빠지면 그날 작업 전체를 취소해야 해요. 그럼 고객님과 한 업데이트 약속을 못 지키게 돼 큰일이 나죠. 그래서 그 전날은 불안감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해요. 30분 자다 깨고, 30분 자다 깨고를 반복하다 새벽에 집을 나서게 되죠.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게임은 24시간 쉬지 않잖아요? 그러니 ‘장애’가 나지 않도록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어딜 가든, 심지어 휴가 때도 노트북은 필수품이죠. 광고 광고 불과 몇 년 전이네요. 구로에서 ‘과로’로 생을 달리한 동료 기사를 본 게요. 모두들 ‘어쩌다 이런 일이’가 아니라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반응이었어요. 그리고 어쩌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모두를 덮쳤죠. 그 뒤로 몇 번 더 비슷한 일이 있고는 ‘주 52시간제’가 시작되었어요. 심지어 몇 곳은 노조도 생기며 우리도 앞으로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봤죠. 게다가 노조가 생긴 곳은 ‘포괄임금제’가 없어지면서 처음으로 ‘야근수당’이란 것도 받아봤고요. 아직도 첫 야근수당을 받은 그날 15년차 개발자가 한 말씀이 기억나요. ‘내 야근의 값어치가 이렇게 컸구나. 난 15년 동안 뭘 했던 거냐?’ 그 말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물론, 아직 스타트업이나 규모가 작은 곳은 제가 겪었던 과거에서 많이 좋아지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조금씩 바뀌는 분위기는 만들어졌네요. 이제 겨우 조금 숨통이 틔고 좋아지려는 찰나에 “노동시간이 부족하다, 유연화를 해야 한다”는 장관님의 말씀은 우리 업계 노동자 모두를 화나게 했어요. 왜냐하면 그건 그나마 천천히 좋아지고 있는 이 상황을 다시 예전으로 돌리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죠. 자연히 트라우마가 된 ‘과로사’ 공포도 떠올랐고요. 맞아요. 사실 우리는 동료를 또 잃을까 무서워요. 광고 그거 아세요? 이제 게임업계 평균연령이 예전 같지 않아요. 30, 40대가 주축이 되어가고 있죠. 이제 좋은 게임 하나만 바라보며 나를 갈아 넣던 청년에서 누군가의 배우자, 아빠, 엄마가 되기도 했죠. 이분들이 최소한 내 아이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 퇴근해서 아이와 소중한 시간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건, 첨단산업을 육성하고 국가 경제 순위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사는 저 같은 국민의 행복이 최우선되는 것이 아닐까요?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당장 생각이 안 나시면 우리와 이야기하며 더 좋은 방법을 찾으면 어떨까요? 우리는 일을 하는 노동자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기도 하니까요. 어려운 시기에 고민이 많으시겠지만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보셨으면 해요. 노동조합 출신이시니 누구보다 더 잘 아실 거라 믿어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일 조금만 하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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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장애인콜택시 운전원’ 복지는 누가 책임지나
‘장애인콜택시 운전원’ 복지는 누가 책임지나 (2024-05-12) 이재혁(가명) | 교통약자 특별교통수단 운전원 장애인의 하차를 도와주고 있는 운전원.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흔히 장애인콜택시라고 부르는, 교통약자 특별교통수단 운전원이다. 휠체어 탑승이 가능하도록 개조된 차량을 몰며, 몸이 불편한 노약자와 장애인 이용객의 이동을 돕는다. 교통약자 특별교통수단은 전국 시, 군, 구 모든 지역에서 365일 24시간 연중 휴일 없이 운영된다. 2022년 1월, 이 일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마을버스 운전원으로 근무했다. 특별교통수단은 ‘운전’이라는 것을 빼면 마을버스와 많은 것이 달랐다. 우선 이용객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깝고 안전한 장소에 정차한 뒤 승하차를 직접 도와야 한다. 휠체어 고정과 이용객의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출발하겠습니다.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출발한다. 동시에 미터기를 작동한다. 버스를 운행할 때는 해 보지 않은 일이다. ■ 서비스는 끝이 없다 광고 이용객이 호출하는 위치는 천차만별이다. 골목골목 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곳, 어느 시장 장날에 꽉 막힌 도로 복판에서 부르고, 애초 콜센터에 접수된 목적지와 다른 곳으로 가자고도 한다. 종종 주정차를 할 수 없는 교차로나 횡단보도 인근, 정체되고 있는 도로에서 호출하기도 하는데, 안전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운행 원칙상 운전원들은 곤란을 겪는다. 이용객들이 자주 방문하는 ‘○’의원이 있다. 그 앞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입구 가까운 곳은 늘 차량이 많고, 따라서 그곳에서 승하차를 하게 되면 사고 위험이 크고, 도로 지체·정체를 유발하게 돼 시민들에게 욕을 먹기 일쑤다. 지하 주차장이 있긴 하지만 공간이 협소해 덩치가 큰 특별교통수단 차량은 돌아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 더 안전한 곳에서 승하차하겠다고 양해를 구하면 열이면 아홉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만 이상하게 왜 그러냐고. 다른 기사들은 다 해준다고.” 얼마 전 신입 운전원이 그 건물 주차장에 들어갔다가 결국 접촉사고를 내 차량 수리비 일부를 부담해야 했다. ■ 감정노동은 덤이다 광고 광고 몸이 힘든 것은 그나마 낫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시작할 때 가졌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보람이 하루하루 깎여 나가게 된다. 이용객의 요구는 다양하다. 대형 자명종 시계를 싣고 가 달라, 고구마·감자 박스를 실어 달라, 장을 봤으니 장바구니를 좀 실어라, 가는 길에 친구를 태워서 가자, 은행에 들러 가자, 편의점에서 물 좀 사서 가자, 목적지가 지하에 있으니 좀 업어다 달라 등등…. 어디까지 운전원이 해야 하는 서비스인 걸까. 비나 눈이 내리거나, 휠체어 탑승이 끝난 뒤에는 차량 내부를 바로바로 청소해야 하고, 물, 커피, 음료 등을 쏟거나 여기저기 쓰레기를 두고 내려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쌓인 감정들은 고스란히 운전원들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끼친다. 근무한 지 1년이 넘어가면 많은 운전원이 감정노동으로 인한 우울증, 번아웃, 수면 장애 등을 겪는다. 나 또한 근무 3년차가 되면서 소화기 계통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달 3년 근무 끝에 사직서를 제출한 동료를 만나서 퇴사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나도 살아야지. 더는 참는 것이 힘들다.” ■ 아무도 모르는 열악한 처우 광고 특별교통수단 이용객은 해마다 는다. 운전원 1명이 감당해야 할 이용객 수도 점점 늘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상시로 주행 중에 배차가 이루어진다. ‘주행 중 배차’는 여러 문제를 야기시킨다. 우선 배차 알림이 내비게이션 화면을 정지시키기 때문에 운행 중에 기기 조작을 할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사고의 위험 요인이 된다. 또 운전원들에게는 업무 독촉과 다름없다. 배차 호출이 뜨면 이용객의 대기시간을 줄이기 위해 한시라도 더 빨리 고객 이동과 하차 지원을 하고, 차량을 이동해야 한다. 서두르다 보면 휠체어 리프트에 손이 끼이거나 베여서 다치기도 하고, 겨울철에는 미끄러지기도 한다. 호출이 쏟아질 때면 중간 휴게시간 챙길 여유마저 없다. 혼잡한 도로 위에서 하는 일이라 화장실 이용도 쉽지 않을뿐더러 화장실 가느라 늦어지면 항의와 민원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비뇨기계 질환도 직업병이 됐다.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2005년 1월27일 공포되고, 2006년 1월28일부터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교통약자의 이동권 확대와 권리 증진을 위해 법안은 꾸준히 개정·시행되어 왔다. 그러는 동안 운전원 처우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다. 교통약자들을 위한 복지 혜택인 특별교통수단 운전원으로 일하면서 생각해본다. 나의 복지는 누가 책임지고 있나.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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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2023-10-08) 고현석 | 영어 번역가 번역은 옮김보다는 만듦에 가깝다. 하지만 번역자는 뭔가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대우와는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H6s픽사베이 번역 일을 처음 시작하고 하루에 꽤 많은 시간을 작업에 할애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당시 매우 어렵게 얻은 일거리를 붙잡고 하루 12시간 넘게 번역에 매달렸다. 그렇게 몇년 동안 일하면서 나름 노하우도 생기고 번역료도 어느 정도 받게 됐지만, 이젠 허리 통증 등 몸이 안 좋아져 장시간 작업하기 힘들다. 초기의 절반쯤이나 일할까. 나는 주로 과학 단행본을 번역한다. 처음에는 긴 호흡의 글과 싸움하는 게 쉽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신문사와 뉴스통신사에서 일하면서 짧은 글을 쓰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은 원저자의 문장을 매우 충실하게 우리말로 옮겨야 하는, 매우 지루한 작업이다. 가끔 원저자가 잘못된 내용을 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원문을 뜯어고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약간 고민하다 결국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뒤 편집자와 나중에 상의하기로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광고 늘 마감에 쫓기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외국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긴다는 것이 애초 가능한 일인지 하는 생각을 쓸데없이 많이 하게 된다. 어떤 날은 어떻게 번역해도 문장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Absence of evidence is not evidence of absence.” 내게 번뇌를 일으키게 만드는 전형적인 문장이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 영어 문장을 직역에 가까운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옮길 것인지, 조금 풀어서 “증거가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길 것인지 며칠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풀어서 번역하면 이해는 쉽지만 원저자의 글맛을 살리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런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다. 몇년 번역 일을 하면서 요령이 생겼거나, 무감각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광고 광고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문제들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생계형 번역가인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수입, 즉 번역료와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수십권 책을 번역하면서 계약서에 명시된 날짜에 번역료를 받은 경우는 몇번 안 된다. 지급일에 입금을 기다리다 출판사에 연락하면 담당 편집자는 매우 미안해하면서 다음 달 또는 그다음 달에 반드시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출판사와의 관계에서 을인 처지이기에 다음에 주겠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담당자에게 밉보이면 차후에 내게 일거리를 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번역 단가 문제도 크다. 내 경우 초보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된 몇년 전에 받던 번역료와 지금 받는 번역료가 거의 같다. 심지어 1990년대와 비교해도 거의 같은 수준이다. 번역료 책정에는 물가상승 요인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번역 단가를 올리기 위한 협상은 위험하다. 그러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경험을 한두번 하며 웬만해선 출판사가 제시하는 단가에 맞추는 것이 결국 이득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광고 가끔 원서를 검토해달라는 의뢰를 받곤 한다. 출판사에서 책이 얼마나 시장성이 있을지 판단하는 데 참고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번역자에게는 계륵 같은 일이다. 책 전체를 읽고 출판사가 원하는 양식대로 정리해야 하므로 원서 검토에 걸리는 시간은 동일 매수의 번역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보다 길다. 그럼에도 며칠 시간이 필요한 검토 의뢰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검토비 명목으로 주는 10만~20만원보다도 출판이 결정될 경우 자신이 번역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몇년 동안 번역 일을 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은 언제 이 일을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프리랜서가 그렇듯이 번역가도 일거리가 더는 들어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산다. 그럴 때마다 이번 책만 마감하고 차분하게 미래를 생각해 보자고 결심하지만,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책을 번역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곤 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문장도 어떤 번역가의 손을 거쳤으리라. 그 번역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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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오늘도 무사히, 나는 퇴근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나는 퇴근하고 싶습니다” (2022-07-27) 백재민 건설노동자 서울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긴 20일 오후 건설노동자들이 서울 강동구 한 건설현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찬물로 땀을 씻어내고 있다. 연합뉴스 새벽 6시. 일출과 함께 하늘 빛깔이 불그스름할 즈음, 작업복을 챙겨 입고 인력사무소로 향할 때면 참새들만이 무던한 하루의 시작을 반겨준다. 새벽 댓바람부터 인력사무소 입구는 사무소장의 ‘간택’을 기다리는 막일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막일을 하려면 먼저 인력사무소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품삯은 인력사무소가 원금인 10만원의 20%를 떼어간 뒤 나머지 7만~8만원 정도를 받는다. 내가 사는 경북 포항은 다른 지역들보다 임금이 적은 편이다. 인력사무소장은 ‘쓸 만한’ 사람들을 선택해 추린다. 여기서 ‘쓸 만한’ 사람들이란, 장기근속할 것 같은, 힘 좀 쓸 것 같은 사람을 뜻한다. 새벽부터 사무소장의 간택을 기다리던 사람 중에는 선택을 받지 못해 허탕만 치고 돌아가는 이들도 많다. 그들 중에는 힘없는 노인이 많다. 광고 현장 형태는 제각각인데, 내가 작업했던 현장은 제철소나 항만 같은 곳이었다. 현장에 도착하면, 간단한 작업 지시를 받고 바로 작업을 개시한다. 고된 노동이 두렵다가도 작업을 시작하면 몸이 어느덧 적응한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면 같은 그룹 안에서도 서열이 나뉜다. 인력사무소에 일을 맡긴 사쪽은 관리직 직원을 끼워넣어 일용직들을 감독하게 한다. 그러면 일용직들은 관리직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깐깐한 관리직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그날은 두배로 고생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용직 사이에서도 ‘짬밥’에 따라 서열이 생긴다. 막일을 오랫동안, 꾸준히 했을수록 에이스 대접을 받는다. 다양하고 위험한 작업을 오랫동안 섭렵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받는 것이다. 정오쯤, 점심시간이 찾아오면 또 다른 하청업체에서 조리한 도시락을 일용직들의 손에 쥐여준다. 그러면 너 나 할 거 없이 땅바닥에 둥그러니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다. 수많은 노동자가 길거리나 땅바닥에서 식사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관리직들은 식당에서 식사하니, 일용직들만이 남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식사를 한다. 작업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점심시간이야말로 막일꾼들의 세계가 계급사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광고 광고 그렇게 점심을 먹고 작업을 재개하면 너 나 할 거 없이 다들 늘어진다. 그 시간이 되면 관리직들은 눈치 봐가며 일용직들에게 휴식 시간을 준다. 그때 연장 쥔 손으로 땀을 닦아가며 마시는 물은 천상의 맛이다. 그 뒤 작업을 정리하고, 오후 4시쯤 일이 끝나면 먼지를 털어내고 관리직들 몰래 함께 담배를 태운다. 이때는 알 수 없는 ‘동료애’가 싹트며, 노동의 참맛을 함께 나눈다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고된 노동을 하루이틀 함께 하다 보면 처음 만난 동료들과도 가까워지게 된다. 함께 일했던 이들은 용돈벌이 삼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막일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이었다. 정규직들이 싫어하는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배정받아 일하다 보면 부러지고 깨지는 부상은 물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는 이들도 생겨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부상과 죽음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현장에 투입되기 전에 안전교육을 받게 돼 있지만, 막상 사고가 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산재보험이 있긴 하지만, 일용직이라는 이유로 급여가 깎이기도 하고 그마저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광고 나의 부친 역시 막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부친은 얼마 전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인력사무소와 원청이 산재 책임을 부친 개인에게 떠넘겼고, 혈혈단신으로 살아가는 부친은 졸지에 생존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또 어느 날은 인력사무소에 나가보니 함께 일하던 정씨 아재가 보이지 않았다. 주말 빼고선 매일같이 인력사무소로 나오던 정씨 아재였다. “정씨 아재가 안 보이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하고 다른 아재들에게 물으니, 잠시 침묵 뒤 기가 차는 답변이 돌아왔다. “항만에서 화물 싣다가 죽어버렸다….” “회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하고 재차 물었지만, 아재들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일용직 막일꾼의 삶은 생존과 온전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한 삶이다. 공휴일이든 주말이든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과로사는 물론 언제 어디서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만연하다. 출근하면서도 ‘오늘은 무사히 퇴근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이유다. 점심 뒤 현장 한 귀퉁이에서 20~30분 눈 붙이는 짧은 시간, 휴게실 푹신한 소파에서 ‘단잠’을 자는 몽환을 꿈꾼다. 우리의 작업 현장이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현장이 되기를….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안녕을 생각하는 작업 현장, 아직은 먼 미래일까.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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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나는 지역에서 혁명을 꿈꾼다
나는 지역에서 혁명을 꿈꾼다 (2024-04-28) 조혁민 | 두루미책방 대표 지난달 22~23일 열린 ‘국제회관 디아이티(DIT·Do It Together) 워크숍’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새로 이사한 국제회관 공간에 들어갈 책장을 만들었다. 필자 제공 2008년 12월 말, 나는 이웃으로부터 폐기물처리장에 있는 재활용선별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루 8시간 주 6일 근무에 급여는 120만원. 2009년 1월2일 첫 출근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로 지나가는 재활용 폐기물 가운데, 정해진 재활용품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캔을 선별해내는 일을 맡았다. 충남의 제일 끝자락 금산은 인구 5만의 작은 지역이다. 공기가 맑고, 별이 잘 보이는 이곳에 사는 청년은 농사가 아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던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2005)을 읽으며 혁명가를 꿈꾸었다. 혁명적인 삶,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기 위해 모부님과 나는 대안학교를 찾았다. 그러다 금산간디학교 고등과정 비인가 대안학교를 알게 되었다. 형과 나는 차례로 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학교에 다니며 사랑과 자발성을 기반으로 한 여러 종류의 공동체 실험을 경험했다. 일주일에 한번 학교 구성원들과의 전체회의로 약속과 규칙을 결정하고 소외된 의견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다양한 시선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내 삶의 혁명을 시작했다. 광고 내가 바라본 금산은 도시만큼이나 다양한 사람과 가치가 충돌하는 곳이었다. 이주민들, 특히 비인가 대안학교 졸업생에 대한 지역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늘 곧 떠날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그런데도 나는 금산이라는 지역에서 문화 활동을 계속했다. 친구들과 함께 글을 쓰고 공부했으며 연극, 버스킹, 축제와 같은 문화 행사를 기획하며 삶을 꾸려갔다. 하지만 주변의 여러 청년은 밥벌이 때문에 지역을 떠나야 했다. 지역에서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밥벌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8년 12월, 졸업생 청년들과 간디학교 선생님이 모여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 들락날락(들락날락협동조합)을 세웠다. 들락날락협동조합을 세우고 처음 맡은 일은 축제 기획이었다. 금빛시장 상인들과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지역 축제 ‘금산월장’을 열었다. 이를 통해 많은 주민을 만나게 됐다. 상인들과 매주 회의를 했고, 축제 참여자들에게 설문해 문제점을 고쳐나갔다. 축제가 매회 진행될수록 우리를 바라보던 지역민의 시선은 불신에서 믿음으로 변해갔다.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문화예술 활동을 하며 먹고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역에서의 정주를 상상했다. 우리는 금산 지역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광고 광고 금산은 각종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하다. 나와 또래 청년들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머무를 수 있는 공간도 충분치 않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금산 청년들의 아지트가 된 두루미책방이다. 책방에서는 우리가 원하고 지역민이 원하는 프로그램이 열린다. 다수가 원하는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소수가 원하더라도 지역과 우리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지역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청년과 청소년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광고 서울을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이야기, 시와 소설을 읽는 낭독회, 주로 대도시에서 열리는 음악 공연,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과 철학 강의, 여성의 이야기와 여성의 글쓰기, 지역에서 쉼을 얻어 갈 수 있는 북스테이 프로그램 등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잇고, 엮어내는 활동을 진행 중이다. 지역에서 산다고 해서 문화적 욕구가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문화예술을 찾아 나선다. 도시에 가서 강연을 듣고 콘서트를 다닌다. 당연히 수도권 사람들보다 더 큰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지역 삶의 지속가능성을 점점 잃게 된다. 그렇기에 작은 지역에서의 문화예술 활동이 중요하며 나와 같은 문화예술가들의 밥벌이 실험은 큰 의미가 된다. 코로나로 잠시 읍 단위 거점이 아닌 면 단위 거점으로 활동을 진행해오다 올해 다시 새로운 실험을 위해 금빛시장에 있는 낡은 건물인 국제회관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실험을 진행하며 지역에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부딪히는 여러 가치를 받아들이고, 때론 싸우며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역을 상상한다. 이 실험의 끝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계속해서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며 더 다양한 가치들을 지역에 정착시키려 한다. 더 많은 청년이 지역에서의 삶을 실험하고 자신의 욕구를 실현해나갈 기회의 장을 만들어가고 싶다. 우리의 실험은 우리의 삶을 넘어 사회와 지역의 혁명이 될 것이다. 나는 지역에서 혁명을 꿈꾼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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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재활용품에 반려동물 사체, 주삿바늘…우리 노동은 쓰레기 아니다
재활용품에 반려동물 사체, 주삿바늘…우리 노동은 쓰레기 아니다 (2024-04-22) 익명 | 재활용선별노동자 2021년 2월 서울의 한 재활용 선별시설에서 직원들이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8년 12월 말, 나는 이웃으로부터 폐기물처리장에 있는 재활용선별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루 8시간 주 6일 근무에 급여는 120만원. 2009년 1월2일 첫 출근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로 지나가는 재활용 폐기물 가운데, 정해진 재활용품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캔을 선별해내는 일을 맡았다. 손 씻을 수도시설이 없다고 했다 첫날 긴장한 채로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손을 씻어야 해 세면장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는데, 수도 시설이 없다고 했다. 화장실도 재래식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점심 식사 후에는 따로 앉아 쉴 곳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내 차에서 점심시간을 보내야 했다. 난감했지만, 차츰 개선되겠지, 생각했다. 그땐 몰랐다. 이런 상황이 1년이 지나도 변함없으리란 것을. 오후 1시, 다시 작업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6시 퇴근까지는 잠시 쉴 틈도 없이 일해야 했다. 중간에 화장실 갈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광고 한자리에서 서서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선별작업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선별할 물건을 놓친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생각지도 못한 온갖 생활 쓰레기들을 직접 만져가며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섞여 들어오는 각종 음식물 쓰레기에 반려동물 사체, 깨진 유리병, 심지어는 피 묻은 의료용 거즈나 주삿바늘까지 일일이 손으로 만져가며 일한다. 자주 다치고, 무릎이나 어깨 등 근골격계 질환 한두 가지 생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됐다. 시간이 가고 일이 익숙해질 즈음 여름이 왔다.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벌레가 들끓기 시작하고 악취가 심해졌다. 그것도 익숙해지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선별작업 노동자 2명이 해고되었다. 한 사람은 재활용품을 집에 갖고 간다고, 또 한 사람은 유언비어를 유포해서라고 했다. 작업자들은 이제 해고의 두려움까지 생겼다. 광고 광고 문자로 받은 해고 통보 그해 12월이 되자 재계약이란 말이 나왔다. 그동안 별 탈 없이 일해왔던 나는 당연히 재계약이 될 줄 알았다. 12월31일 퇴근 시간이 되자 회사 대표가 말했다. 재계약 여부는 개인 휴대전화 문자로 알려줄 것이라고. 퇴근 후 ‘재계약 불가’라는 통보 문자를 받았다. 영문도 모르고 해고된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2010년 1월2일, 회사로 쫓아가 재계약이 안 된 이유를 물었고, 대표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알고 있는 막연한 지식으로 회사 측이 사전 통보 없이 해고했으니 3개월치 급여를 내놓으라고 했다. 대표는 정당한 계약 해지여서 그럴 의무가 없다고 했다. 허탈하고 분한 마음에 시청과 고용노동청을 찾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회사 측과 같았다. 정당한 계약 해지란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고, 누구를 위한 고용노동청이란 말인가. 광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보던 남편이 노동조합에 문의해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노동조합에 가 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당장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함께 해고된 동료 4명과 함께 복직 투쟁을 했다. 그렇게 75일간의 투쟁 끝에 우리는 2010년 3월25일 복직 통보를 받았다. 해고 뒤 약 3개월 만이었다. 복직하고 보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수도도 놓여 있고, 비록 비닐하우스지만 휴게실도 생겼다. 이후 여러 명이 노조에 가입했고, 조합원이 늘면서 단체교섭도 시작했다. 휴식 시간과 휴가도 확보했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투쟁 2015년 재활용 선별시설에 새 공장이 세워졌다.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곳이라고 했다. 자동화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손이 닿지 않을 순 없다. 이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선작업과 후작업은 사람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동화라는 말이 그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려 버렸고, 매번 바뀌는 새로운 업체들은 우리 임금을 깎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투쟁과 복직의 연속, 그 투쟁들은 더 나은 조건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생존의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지금도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한다. 이 일을 시작한 지도 어언 15년이 지났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변하지 않은 건 재활용 선별작업 노동자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의 노동으로 선별된 재활용 쓰레기는 가치 있는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지만, 우리의 노동은 여전히 매립장에 쓰레기들과 함께 매몰되고 있을 뿐이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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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정부가 허락한 병원 노예, 간호조무사 실습생
정부가 허락한 병원 노예, 간호조무사 실습생 (2023-10-16) 임정은 | 간호조무사·민주노총 서비스연맹 특성화고노동조합 운영위원 지난 8월30일 국회 소통관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이 간호조무사 실습생 최저임금 청구 소송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 제공 저는 2022년 9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해 10개월째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조무사입니다. 간호조무사가 되기 위해서는 740시간 이론수업과 780시간 의료기관 실습을 거쳐 시험을 보고 합격해야 합니다. 환자의 생명, 건강과 관련된 일을 하는 만큼 이런 과정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780시간 실습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 아니라, 온갖 잡일과 허드렛일, 심부름 등으로 채워진다는 점입니다. 병원의 부족한 인력을 메꾸는 일을 하는데 ‘실습’이란 이유로 임금도, 노동법의 보호도 받지 못합니다. 광고 저는 정형외과 병원에서 약 5개월 동안 실습했습니다. 주로 환자 대기실 의자 청소, 진료실 문 열어주기, 환자 혈압 및 체온 재기, 원무과로 환자 안내 등 단순 업무를 했습니다. 그러다 실습생 관리 담당자인 간호부장이 갑자기 자기공명영상(MRI) 부서에서 실습하라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환자들 자기공명영상 검사 안내를 했는데, 한달 뒤 신규 직원이 채용되더니 제 업무를 하더군요. 저는 또 다른 부서로 옮겨졌고요. 자기공명영상 부서 직원을 구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간호조무사 실습생에게 업무를 맡겼던 것입니다. 제가 운이 없었던 걸까요? 아닙니다. 실습생 대부분 단순 허드렛일로 시간을 보내는데, 심지어 빨래, 직원 커피나 우체국 심부름, 병원 에어컨 청소를 하며 시간을 채우기도 합니다. 일부 병원은 간호조무사 학원에 연락해 ‘우리 병원에 실습생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답니다. 광고 광고 지난해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에서 간호조무사 실습생 603명을 대상으로 병원실습 실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업무가 주요 실습 내용에 있는지 묻는 말에 71.3%가 ‘그렇다’라고 응답했습니다. 부당한 업무로는 잡무, 허드렛일이 71.9%로 가장 많았고, 병원 직원 개인 심부름(49.1%), 청소(41.2%)가 뒤를 이었습니다. 병원 특성상 감염 등 산업재해를 당할 우려가 크지만, 간호조무사 실습생은 노동자가 아니기에 다쳐도 산재 적용을 받지 못합니다. 환자 혈당을 체크하다가 주삿바늘에 찔려도 개인 돈으로 검사를 진행하라고 하거나 방역 마스크 하나 던져주고 감염병실에서 혈압을 재라고 시켰던 사례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습생이 결핵에 걸리거나 감염돼도 병원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광고 보건복지부의 방관 아래 병원들이 간호조무사 실습 제도를 통해 인력난을 해결하는 사이 실습생은 그저 혼자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매년 간호조무사 시험에 응시하는 이는 약 4만명에 이릅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렇듯 무임금으로 노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8월 말, 실습병원 병원장을 상대로 임금청구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임금청구는 저의 780시간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근로자성 여부를 형식이 아니라 실질에 비추어 종속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형식은 ‘자격 취득을 위한 실습’이지만, 실제로 병원에서 지시하는 노동을 했다면 노동자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2016년 고용노동부는 실습생, 수습생, 수련생 등이 교육 없이 단순 노동력으로 활용되는 문제를 막기 위해 ‘일경험 수련생에 대한 법적 지위 판단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직무교육 프로그램 없이 업무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업무를 지시하는 등의 방식으로 일경험 수련생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경우’, ‘교육·훈련 내용이 지나치게 단순·반복적이어서 처음부터 노동력의 활용에 그 주된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경우’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수련생이 사실상 근로를 제공한다면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간호조무사 실습생은 노동자로 인정돼야 합니다. 저의 소송이 간호조무사 실습생들의 권리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첫 시작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송으로 다른 간호조무사 실습생분들도 용기와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간호조무사 실습생 노동착취 문제가 알려지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기를, 실습생의 노동 사각지대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간호조무사 실습생은 정부가 허락한 병원의 노예가 아닙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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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일본에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려면
일본에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려면 (2024-04-15) 이동석 | 재일동포 지난해 10월29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필자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과 함께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 고교무상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김창섭 제공 나는 1952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다. 일본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8살에 조선 사람임을 자각하게 됐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조선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재일동포 동급생과 일본학교 내에 ‘조선문화연구회’를 만들고 그때까지 썼던 일본 이름을 버리고 조선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조선문화연구회에서 조선 고등학교 학생하고 교류하며 일본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포 학생들의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 사람으로 살려면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1971년 처음으로 서울에 왔고, 1973년 한국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에 입학했다. 1975년 11월 보안사 요원이 하숙집에 와서 영장 없이 나를 연행했다. 40일간 보안사에 감금된 채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당하고 나는 ‘간첩’이 됐다.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배우고 싶어서 가입했던 조선문화연구회에서 총련계 사람을 만나 이야기했다는 게 ‘간첩’이 된 주요 혐의였다. 재일동포 17명이 구속된 이른바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다. 나는 5년형을 받아 대전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됐다. 그러한 나를 지원해주고 격려해준 건 일본 사람들이 조직한 ‘구원회’였다. 구원회 사람은 재판을 방청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울에 몇번이나 왔고 대전에도 여러 차례 면회를 왔다. 광고 나는 구원회가 없었더라면 건강한 정신으로 못 있었을 것이다. 내가 석방되어 1981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전두환 독재정권하에서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구속된 재일동포의 가족을 만나서 격려하고 구원회와 함께 지원 운동을 했다. 내가 많은 사람의 지원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던 나는 한국의 양심수가 거의 석방된 1990년대 후반에 ‘재일고려노동자연맹’(고려노련)에 가입했다. 고려노련은 우리나라에 뿌리가 있는 재일동포라면 남북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었다. 그 조합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노동차별 개선, 한국 노동자 지원과 교류를 위해 활동했다. 비록 감시를 받긴 했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에 올 수 있게 됐고, 일본과 한국 노동자의 교류 과정에서 통역을 맡아 여러 번 한국에 왔다. 광고 광고 2005년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생겼으나 일본에 사는 우리가 그 존재를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국가권력으로부터 고문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오래 한 재일한국인 양심수는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를 믿지 못했고 처음에는 진상규명 신청을 망설이는 분위기였다. 나도 그랬으나 진실화해위는 한국의 민주화 투쟁의 성과라고 생각해서 2011년에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그 뒤 법원이 재심에서 ‘고문으로 강요한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2015년 무죄가 확정되었고 배상금도 받았다. 배상금은 국가 잘못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돈을 줄 테니 더는 국가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대학에 재입학하기로 했다. 2017년 외국어대학에 들어가 나보다 젊은 교수님한테서 배우면서 2020년 2월에 졸업했다. 대학 생활 동안 좋은 한국 사람을 많이 알게 되어 졸업 후에도 한국에서 살고 싶어졌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에서 살면서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을 지원하고, 한국 내 난민 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등에 관심이 있어 모임이나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 식민지하의 아픔을 경험했고, 해방 후 4·3 사건으로 많은 난민이 생겨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한국인도 노동자로 외국에 일하러 간 역사가 있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이나 난민을 대하는 한국 정부나 국민의 태도를 보면 너무 안타깝다. 한국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해 수정하고, 외국인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을 보장해야만 ‘위안부’나 ‘징용공(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또 재일동포 차별을 없애라고 외칠 수 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 활동을 하는 이유는 잘못한 역사는 고쳐야 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 책임이 한국인으로 사는 내게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 서서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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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휠체어로 지하철타기, 뭐가 문제냐구요?
휠체어로 지하철타기, 뭐가 문제냐구요? (2022-07-20) 황시운 | 소설가 휠체어 생활자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를 힘겹게 건너고 있다. 백소아 기자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산책하듯 전시를 관람한 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려울 게 없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 간단하고 평범한 일정을 실행할 용기를 내기까지 장장 11년이나 걸렸다. 2011년 봄에 일어난 추락사고로 척수가 손상되면서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리고 척수손상 후유증으로 신경병증성 통증을 앓게 됐다. 사고 이후 내 인생은 그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산책과 미술관을 좋아하던 나는 더는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휠체어 생활자가 됐고, 경제적으로 한없이 무능력해졌으며, 온종일 하반신이 불에 타거나 살갗을 사포로 갈아내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광고 하루아침에 몸의 절반을 잃고 휠체어를 타게 된 내게 세상은 불친절하기만 했다. 문밖으로 나서면 온갖 턱과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고, 믿었던 사회안전망은 성기고 약해서 나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마약성 진통제로도 잡히지 않는 끔찍한 통증은 번번이 내 발목을 잡았다. 세상이 내게 등을 돌렸다고 믿었다. 그리고 내게 등 돌린 세상을 피해 긴 세월 좁은 방 안에 숨어 웅크리고 있었다. 다시 산책하고 미술관에도 가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봄. 낯선 도시의 골목을 걷고 또 걷는 꿈을 꾸기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꿈이 거듭될수록 바람은 점점 더 간절해졌다. 친구에게 반복되는 꿈과 그로 인해 갖게 된 바람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인덕원역에서 친구와 만나 함께 승강기를 타고 지하철 승강장까지 내려갔다. 인덕원역은 승강기를 통해 지상에서 지하 승강장까지 어려움 없이 내려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수많은 장애인이 이 당연한 편리를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 뼈아프게 투쟁해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강기를 탈 때 잠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친구와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지하철 이용이 생각했던 것보다 편리하다는 얘기를 나눴다. 이런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휠체어를 타고 서울로 미술관 나들이를 다닐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하며 용기를 북돋워줬다. 광고 광고 지하철이 도착했고 우리는 휠체어 표식이 있는 승강장을 통해 별 어려움 없이 지하철에 올랐다. 늘 그랬듯 사람들이 흘끔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불쾌하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앞으로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잔뜩 신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동안 왜 못하고 있었나,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하차할 역에 도착해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지하철을 탈 때와 달리, 내가 타고 있는 수전동 휠체어가 통과하기에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거리가 너무 멀었다. 걷는 사람들에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건너면 그만일 틈이, 휠체어를 탄 내게는 앞바퀴가 빠져버릴 것이 분명할 만큼 넓었다. 휠체어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의 틈에 끼는 것만도 위험했고, 그 과정에서 휠체어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2차 장애를 입을 수도 있었다. 나도 친구도 어쩌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지하철 문이 닫혔다.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버렸다는 사실에 불안이 몰려왔다. 다행히 나보다 침착하고 요령있는 친구는 지하철이 다음 역에 도착하자 내 휠체어를 뒤로 기울여 앞바퀴를 든 다음 휠체어를 밀어 지하철에서 내리도록 도와줬다. 어쩌다 보니 한 정거장을 더 와서 내리게 된 우리는 승강기를 찾아 긴 승강장을 한참 헤맨 끝에야 건너편 승강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잠시 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도착했다. 이번에도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거리는 너무 멀었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휠체어를 뒤로 기울였다. 지하철 안 사람들이 나와 친구를 흘끔거렸다. 이번에는 불쾌했고 화도 났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다음 역에서 마찬가지 방식으로 친구가 도와줘 하차할 수 있었다. 휠체어 표시돼 있는 장애인용 승강장이었지만, 자력 휠체어 승하차는 불가능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미술관에 도착했을 땐, 전시회 관람이고 뭐고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린 뒤였다. 광고 친구 덕분에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지만, 나 혼자서는 건너기 힘든 간극과 마주할 때마다 한껏 의기소침해졌다. 겨우 10여㎝ 틈이, 여차하면 내 삶을 집어삼키고 말 크레바스라도 되는 양 절망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후에 나보다 오래 장애를 가진 채 살아온 선배 장애인은 승하차 역마다 미리 연락해서 타고 내릴 때 역무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해줬다. 하지만 매번 하차할 역에 시간 맞춰 전화해 승강장으로 역무원을 불러 내리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누구도 소리 내 거절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세상은 늘 수많은 턱과 장애물을 둬 끊임없이 거절의 메시지를 던졌다. 휠체어를 타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주해야 했던 턱과 장애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휠체어 생활자가 된 뒤 나는 매 순간 세상의 거절과 마주한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거절들에 밀려 점점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시도한 11년 만의 지하철 타기를 통해 세상이 여전히 내게 등 돌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내게 등을 돌린 세상에서 언제쯤 다시 산책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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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 서울 마지막 산업단지, 문래동 기계공의 하루
서울 마지막 산업단지, 문래동 기계공의 하루 (2024-04-08) 전희순 | 1인 소공장 운영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대부분의 공장은 10~20평 정도 되는 오래된 주택에 금속가공에 필요한 기계와 장비를 들여놓고 일을 한다. 윤주성 사진작가 아침 출근길, 일터 앞 슈퍼마켓을 지나려는데 골목이 시끄럽습니다. 얼핏 보니 영화나 드라마 촬영 중인가 봅니다. 몇년 전부터 문래동에서 가끔 마주치는 풍경입니다. 어떤 촬영을 하는지 호기심이 살짝 생기지만 출근이 늦은 관계로 궁금증을 뒤로하고 일터를 향해 걸음을 재촉합니다. 일터에 좀 늦게 도착했습니다. 지각입니다만, 늦었다고 눈치 주는 사람은 없네요. 혼자 일하는 사업장이라 그렇습니다. 문래동에 있는 공장 대부분은 1인 기업이거나 가족과 함께 일하는 소규모 사업장입니다. 10평에서 20평 정도 되는 오래된 주택에 금속가공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계와 장비를 들여놓고 일을 합니다. 광고 아무리 작은 부품이라도 완성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합니다. 문래동은 각 공정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공장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업체들끼리 잘 연결된 네트워크 덕분에 소재부터 최종 완성품에 이르는 과정이 원스톱으로 가능합니다. 경기가 한창 좋았을 때는 3천여개의 사업장이 문래동 일대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1230여개의 기계금속 관련 사업장이 문래동에 있다고 합니다. 기계 전원을 올리고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기계를 예열하는 동안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오늘 작업할 도면을 살펴봅니다. 도면의 형상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 작업 방법과 가공 순서를 정합니다. 가공 공정마다 어떤 공구를 쓸지, 재료를 고정하기 위한 지그(jig, 보조용 기구)도 어떤 게 좋을지 정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면을 한번 더 들여다봅니다. 도면의 지시 사항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작업하다 낭패를 당한 경험 때문입니다. 평소 성격과 상관없이 일을 대할 때는 차분하고 꼼꼼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가 뒤따르니까요. 광고 광고 준비가 끝났으면 프로그램을 짜고 기계를 세팅합니다. 제가 다루는 기계는 엔시(NC)공작기계입니다. 가공물과 공구를 세팅하고 프로그램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가공해주는 기계입니다. 수동 공작기계에서 하기 어려운, 정밀하고 복잡한 형상을 가공할 수 있습니다. 철공 일을 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기계 앞에서는 늘 긴장합니다. 아무리 숙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칫 실수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혼자 일하는 중에 사고를 당하면 당장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더 큰 일입니다. 광고 이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합니다. 사실, 준비만 잘해놓으면 그다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작업공정을 잘 관리하고 그것에 맞게 정해진 노동을 하면 됩니다. 오후에는 필요한 재료와 공구를 사기 위해 밖으로 나섰습니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많이 변해버린 풍경과 마주칩니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공장이 있던 자리는 음식점과 카페, 술집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방송과 온라인 매체를 통해 자주 소개되더니 어느새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네요. 오래되고 낡은 공장이 있는 거리가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갔나 봅니다. 우리의 뜻과 상관없는 이런 변화는 참 곤혹스럽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었으니까요. 여기에 재개발 이슈까지 더해져 공장들이 빠른 속도로 밀려나는 중입니다. 예술인들이 문래동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런 변화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비록 불편하긴 했지만,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잘 지내고 있었거든요. 어차피 낮은 철공인, 밤은 예술인의 시간이었으니 부딪칠 일도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술인들과 협업을 한다면 침체된 철공단지에 활기를 주지 않을까도 기대했습니다만, 현실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네요. 이 도시에서 작은 공장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문래동 공인들이 가진 기술적인 자산가치가 세월과 함께 없어질 것 같습니다. 문래동과 같은 처지에 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일본 도쿄 오타구의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문래동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마을공장을 이전시키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남은 공장들이 마을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공장들은 지역사회와 환경 개선에 공헌하고 마을은 그런 공장들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상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은 공장이 가진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마냥 부럽기만 합니다. 광고 이제 퇴근입니다. 아침에 늦게 와놓고 일찍 가려니 너무 좋습니다. 골목 사이로 비치는 노을이 몽글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정든 퇴근길입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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