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로 지하철타기, 뭐가 문제냐구요? (2022-07-20)
황시운 | 소설가
휠체어 생활자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를 힘겹게 건너고 있다. 백소아 기자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산책하듯 전시를 관람한 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려울 게 없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 간단하고 평범한 일정을 실행할 용기를 내기까지 장장 11년이나 걸렸다.
2011년 봄에 일어난 추락사고로 척수가 손상되면서 하반신이 마비됐다. 그리고 척수손상 후유증으로 신경병증성 통증을 앓게 됐다. 사고 이후 내 인생은 그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산책과 미술관을 좋아하던 나는 더는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휠체어 생활자가 됐고, 경제적으로 한없이 무능력해졌으며, 온종일 하반신이 불에 타거나 살갗을 사포로 갈아내는 것 같은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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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몸의 절반을 잃고 휠체어를 타게 된 내게 세상은 불친절하기만 했다. 문밖으로 나서면 온갖 턱과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고, 믿었던 사회안전망은 성기고 약해서 나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했다. 게다가 마약성 진통제로도 잡히지 않는 끔찍한 통증은 번번이 내 발목을 잡았다. 세상이 내게 등을 돌렸다고 믿었다. 그리고 내게 등 돌린 세상을 피해 긴 세월 좁은 방 안에 숨어 웅크리고 있었다. 다시 산책하고 미술관에도 가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봄. 낯선 도시의 골목을 걷고 또 걷는 꿈을 꾸기 시작한 뒤의 일이었다. 꿈이 거듭될수록 바람은 점점 더 간절해졌다. 친구에게 반복되는 꿈과 그로 인해 갖게 된 바람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인덕원역에서 친구와 만나 함께 승강기를 타고 지하철 승강장까지 내려갔다. 인덕원역은 승강기를 통해 지상에서 지하 승강장까지 어려움 없이 내려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수많은 장애인이 이 당연한 편리를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 뼈아프게 투쟁해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강기를 탈 때 잠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친구와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지하철 이용이 생각했던 것보다 편리하다는 얘기를 나눴다. 이런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휠체어를 타고 서울로 미술관 나들이를 다닐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하며 용기를 북돋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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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이 도착했고 우리는 휠체어 표식이 있는 승강장을 통해 별 어려움 없이 지하철에 올랐다. 늘 그랬듯 사람들이 흘끔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불쾌하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앞으로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잔뜩 신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동안 왜 못하고 있었나,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하차할 역에 도착해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지하철을 탈 때와 달리, 내가 타고 있는 수전동 휠체어가 통과하기에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거리가 너무 멀었다. 걷는 사람들에겐 발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건너면 그만일 틈이, 휠체어를 탄 내게는 앞바퀴가 빠져버릴 것이 분명할 만큼 넓었다. 휠체어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의 틈에 끼는 것만도 위험했고, 그 과정에서 휠체어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2차 장애를 입을 수도 있었다. 나도 친구도 어쩌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지하철 문이 닫혔다.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버렸다는 사실에 불안이 몰려왔다. 다행히 나보다 침착하고 요령있는 친구는 지하철이 다음 역에 도착하자 내 휠체어를 뒤로 기울여 앞바퀴를 든 다음 휠체어를 밀어 지하철에서 내리도록 도와줬다. 어쩌다 보니 한 정거장을 더 와서 내리게 된 우리는 승강기를 찾아 긴 승강장을 한참 헤맨 끝에야 건너편 승강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잠시 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도착했다. 이번에도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거리는 너무 멀었다. 친구는 다시 한 번 내 휠체어를 뒤로 기울였다. 지하철 안 사람들이 나와 친구를 흘끔거렸다. 이번에는 불쾌했고 화도 났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다음 역에서 마찬가지 방식으로 친구가 도와줘 하차할 수 있었다. 휠체어 표시돼 있는 장애인용 승강장이었지만, 자력 휠체어 승하차는 불가능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미술관에 도착했을 땐, 전시회 관람이고 뭐고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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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덕분에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지만, 나 혼자서는 건너기 힘든 간극과 마주할 때마다 한껏 의기소침해졌다. 겨우 10여㎝ 틈이, 여차하면 내 삶을 집어삼키고 말 크레바스라도 되는 양 절망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후에 나보다 오래 장애를 가진 채 살아온 선배 장애인은 승하차 역마다 미리 연락해서 타고 내릴 때 역무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해줬다. 하지만 매번 하차할 역에 시간 맞춰 전화해 승강장으로 역무원을 불러 내리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누구도 소리 내 거절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세상은 늘 수많은 턱과 장애물을 둬 끊임없이 거절의 메시지를 던졌다. 휠체어를 타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주해야 했던 턱과 장애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휠체어 생활자가 된 뒤 나는 매 순간 세상의 거절과 마주한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거절들에 밀려 점점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내 딴에는 용기를 내서 시도한 11년 만의 지하철 타기를 통해 세상이 여전히 내게 등 돌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내게 등을 돌린 세상에서 언제쯤 다시 산책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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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코멘트
2지인의 아버지께서 사고로 수술을 하신 후 목발 혹은 휠체어를 평생 사용하시게 되었는데 이후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2022년 글이지만 2024년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느껴집니다.
배려와 지원이 절실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