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저널리즘에서 '어떤' 사실을 전달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전달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가 전달하는 사건보다는 구성과 표현방식에 초점을 맞춰서 봤는데요. 다소 위험한 지점이 있다고 보입니다. 지적해주신 부분을 비롯해서 사건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증거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 피해 상황을 재연을 통해 연출하는 방식은 반드시 필요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건의 공론화와 정보 확산의 필요성은 동의하지만 방식이 적절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처에서 장소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본다.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난민들,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며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운 농민들, 구조조정에 저항하며 연좌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 투쟁의 형식들은 어딘가 닮아 있다. 점거, 누워있기, 앉아 있기 아니면 장소를 원래 정해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계산대 위에서 잠을 자는 홈에버 노동자들)… 몸 자체가 여기서는 언어가 된다. 몸은 문제의 장소 위에 글자처럼 씌어진다. ‘나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우리가 수없이 입으로 말했을 때 당신들은 듣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글씨를 쓴다. 이 글씨를 읽어달라.’ 그러므로 장소에 대한 투쟁은 존재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사람, 장소, 환대'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르네요. 사실 우리는 이미 장소를 바탕으로 한 투쟁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찾아보니 전장연은 이동권 투쟁을 2006년부터 해왔네요.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지하철을 타는 게 쉽지 않고, 비장애인은 어플리케이션으로 호출하면 10분 내외로 도착하는 택시를 장애인들은 평균 30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전장연이 ‘어떻게’ 투쟁을 하는가보다 ‘왜’ 투쟁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겠죠.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을 비롯해 모든 집회와 시위에 ‘시민 불편’을 운운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들의 주장이 ‘나의 편의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사회가 문제해결을 요구했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전장연의 지하철’은 곧 ‘나 혹은 당신의 어딘가’가 될 것입니다. 전장연이 몸으로 쓴 글씨를 많은 사람이 함께 고민해야 할 때 같습니다.
남겨주신 댓글을 보다가 정리를 하면서 다 담지 못한 내용들을 조금 풀어보면 토론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남깁니다.
저는 도시가스와 같은 에너지 관련 분야는 1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정리하면서 꽤나 애를 먹었는데요. 자료를 찾다가 해외국가들은 천연가스 대란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자연스레 검색을 통해서 찾아봤는데요. 신기하게도 유럽국가들 중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사한 흐름이 보였습니다.
바로 '국유화'인데요. 프랑스는 작년 7월 여름에 전력공사 전면 국유화 작업에 돌입했습니다.(관련 내용을 다룬 연합뉴스 기사, 프랑스는 2000년대 중반 가스공사 EDF를 부분 민영화했는데 이를 다시 국유화 하는 과정입니다) 독일도 작년 12월 가스 수입업체 유니퍼를 국유화했습니다. (관련 내용을 다룬 한겨레 기사)
물론 프랑스의 경우 마크롱 정부가 원전 건설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국유화를 진행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독일의 사례도 파산 위기에 처한 기업을 구제금융으로 해결할 수 없자 국유화 절차에 들어간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두 국가가 연이어 에너지 관련 기업을 국유화 했다는 건 동일한 맥락이 있다고 보였습니다. 코로나19로 시작된 펜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예상이 불가능한 상황이 이어지는 시대에서 에너지는 시장경제의 방식에서 벗어나 공공재로서 다뤄져야 하고, 그 주도권을 정부가 가져야 다수의 국민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 안정적인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정부가 관리할 수 있는 공기업에서 '미수금'이라는 안정적인 제도를 갖춰놓았습니다. 덕분에 독일, 프랑스 등에 비해 에너지가 공공재로서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는데요. 다만 천연가스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않더라도 난방비로 인한 충격이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제도를 잘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 할 시기가 됐다고 보입니다. 적어도 정부가 미수금이 문제라고 주장하려면 미수금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 국민을 설득해야 하겠죠. 지금처럼 가격을 일방적으로 올려서 미수금을 온전히 국민에게 떠맡기는 방식이 아니라 에너지를 공공재로 인식하는 시선에서 대책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입니다. 대책과 함께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면 객관적인 자료로 인상 필요성을 설명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토론과 설득이 필요한 문제가 점점 더 늘어나는 기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