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전장연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와 민주주의의 위기

202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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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민 활동의 확산으로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나아갑니다.
▲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가 지난 1월 19일 오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장애인 권리예산을 촉구하는 지하철행동을 벌이고 있다.
▲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가 지난 1월 19일 오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장애인 권리예산을 촉구하는 지하철행동을 벌이고 있다.(오마이뉴스, 사진 클릭)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 방법이 문제?

이제는 국민 모두가 알게 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투쟁은 아직 계속 되고 있습니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통해 최근에 많은 이들이 전장연을 알게 됐지만, 이 투쟁은 그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2001년 장애인 노부부가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다 추락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고, 장애인 단체들은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선로를 점거했습니다. 이 날은 '중증장애인이 장애운동 역사의 전면에 선 날'이라고 평가받는 날입니다(한겨레21 2022.4.11). 전장연의 현재의 투쟁은 어떤 면에서 그때의 절절한 요구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2021년 12월 3일부터 진행해 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는 휠체어에 탑승한 시위 참가자들이 평일 출근 시간대에 서울 지하철에 탑승하여, 지나는 역마다 반복적으로 타고 내리는 방법으로 시위가 진행됩니다.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말, '시민들을 볼모로 잡지 말라'는 말을 들을게 뻔한데, 왜 이런 방식의 시위를 택했을까요? 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시민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지적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관계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바로 관심이다. (장애인이) 사회와 분리되어 20년이고 30년이고 살아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불쌍한 시각으로 볼 뿐이다. 이런 풍조가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받는 비난조차 우리는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비난이 이 문제를 바라보게 되는 일종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북저널리즘, 2022년 5월 보도)
"다른 방법도 당연히 있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이미 수많은 그 다른 방법을 했다는 게 중요하죠. 합법적으로 하라고 해서 공문을 보내고 면담을 요청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다섯 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지낸 21년은 배신의 세월인 거죠."(한겨레21 2022.4.11)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시쳇말을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와 사회가 20여년간 외면해 온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고, 더 나아가 관련 정책들을 제도화 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전장연이 지하철 시위라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살펴봤지만, 시위의 '방법'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장연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 장애인 탈시설 지원, 장애인 교육 보장, 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 등을 요구하며, 서울시와 면담 등 대화를 나누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비마이너 2023.2.4.).

전장연이 이러한 요구들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시위 방법만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 된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지하철, 버스, 택시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권리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지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장애인들의 시설 입소와 탈시설, 그리고 교육의 권리에 대해 논의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예산 반영에 대해 논의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 공감, 연대, 신뢰의 부재 속에서 시민조차 될 수 없는 이들

우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부재'라는 사회적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사고를 자신에 옮겨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감이 주로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의 일로 여겨진다면,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공감은 '사회적 공감'일 것입니다. 장애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려 하지 않으면서 한국사회에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의 방법에만 집중하여 비난하고 있는 상황은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충분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시민들의 사회적 공감에 기초한 '연대의식'의 창출이야말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힘의 형성을 의미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시민조차 되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회적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시민'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자유민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민의 권리는 소수자를 제외한 다수자의 권리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무고한 시민의 피해'와 '장애인의 이동권'의 이분법적 대비는 그 증거입니다. 장애인은 '비시민'으로 여겨지는 셈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은 모든 이를 포괄하지 못하는 허울뿐인 억압의 단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는 지켜지지 않고 깨어지는 약속들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의견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민주사회의 기본적인 권리의 실행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됩니다. 비시민의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그것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모든 이들의 실천을 통해 지금보다 더 많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라는 신뢰의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는 합법적인 법의 틀 내에서 정부와 정치권과의 대화라는 방법을 충분히 거친 후에도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제도를 신뢰 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입니다. 시민들이, 사회적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전문가, 정치인 등과 함께 공론으로 벼려내어 정부가 제도화 할 수 있는 '신뢰의 제도화'를 이루어낼 때 지금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시민주도의 공론장, 커뮤니티,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전장연의 이동권 투쟁이라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 장애인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연대의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신뢰를 형성해내기 위한 첫걸음은, 들리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시민주도의 공론장입니다.

수많은 매체에서 관련 이슈를 다루지만, 시민들의 토의를 통한 공론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좋은 글들과 그에 대한 지지와 토론들이 오갈 것입니다. 하지만 휘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경우에 진영으로 나뉘어 일방적인 비난이고 오고 갈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일방향적인 메세지의 발신이나 일시적인 토의에 그치지 않는 실질적인 공론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민들의 공론장에서, 시민들의 상호간의 토의와 그에 따른 공론의 형성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만들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양한 사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 예로 캠페인즈의 '장애인 권리' 이슈 페이지에서는 장애인의 권리에 대해 캠페인, 투표, 토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토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우리 주변의 '장애인 권리' 이슈, 캠페인즈에서 함께 이야기 나눠요' 참조).

캠페인즈와 같은 플랫폼에서의 일상적인 토의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서 함께 머리를 맞대어 이야기를 나누는  '들썩들썩떠들썩 :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 축제' '이동권 보장, 함께 나누어야 할 이야기' 같은 공론장 행사도 다양한 방식으로 많이 열릴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커뮤니티들에 의해 따로 또 같이 다양한 협력 프로젝트들이나 공동행동들이 이뤄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오마이뉴스, 2023.2.18 참조).

이러한 다양한 방식의 시민행동과 공론장 활동의 힘에 기초하여 정책의 제도화까지 이어질 수 있는 시민협력의 거버넌스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함께 역량강화되어 연대하고 민주주의는 지금보다 좀더 잘 작동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글은 빠띠의 블로그, 홈페이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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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부재'라는 사회적 위기

점점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사라져가는데요, 조금 더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사회의 갈등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슈에 신뢰를 깨는 무언가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이번 이슈를 통해 어떤 단위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처에서 장소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본다.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난민들,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며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운 농민들, 구조조정에 저항하며 연좌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 투쟁의 형식들은 어딘가 닮아 있다. 점거, 누워있기, 앉아 있기 아니면 장소를 원래 정해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계산대 위에서 잠을 자는 홈에버 노동자들)… 몸 자체가 여기서는 언어가 된다. 몸은 문제의 장소 위에 글자처럼 씌어진다. ‘나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우리가 수없이 입으로 말했을 때 당신들은 듣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글씨를 쓴다. 이 글씨를 읽어달라.’ 그러므로 장소에 대한 투쟁은 존재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사람, 장소, 환대'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르네요. 사실 우리는 이미 장소를 바탕으로 한 투쟁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찾아보니 전장연은 이동권 투쟁을 2006년부터 해왔네요.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지하철을 타는 게 쉽지 않고, 비장애인은 어플리케이션으로 호출하면 10분 내외로 도착하는 택시를 장애인들은 평균 30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전장연이 ‘어떻게’ 투쟁을 하는가보다 ‘왜’ 투쟁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겠죠.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을 비롯해 모든 집회와 시위에 ‘시민 불편’을 운운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들의 주장이 ‘나의 편의를 방해한다’는 이유로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사회가 문제해결을 요구했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전장연의 지하철’은 곧 ‘나 혹은 당신의 어딘가’가 될 것입니다. 전장연이 몸으로 쓴 글씨를 많은 사람이 함께 고민해야 할 때 같습니다.

"시민조차 될 수 없는 이들"이라는 말이 무척 가슴 아픕니다. 한국 사회가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공론장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많이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