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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과 기억교실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 세월호참사 10주기를 기억하기 위해, 4월 16일 오후 3시 안산 단원고 인근의 화랑유원지에서 세월호 기억식이 열렸다. 세월호 희생자 250명의 이름을 부르는 호명식을 시작으로, 304명 희생자에 대한 묵념과 추도사, 97년생 동갑내기의 기억편지, 기억 영상과 시 낭독, 노래 공연과 416합창단과 시민합창단의 합창 공연 등으로 이루어졌다.   세월호를 기억식이 거행되는 사이에 불현듯 사이렌이 울렸다. 안산에서는 매년 4월 16일 오후 4시 16시에 이렇게 사이렌이 울린다고 한다. 416을 기억하기 위한 취지였다. 그 짧은 사이렌과 묵념의 순간에 416 세월호참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사이렌 같은 사건이란 생각이 스쳤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우리들의 요구>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이행하라!  세월호참사 및 그 이후 발생한 국가폭력에 대해 국가책임 인정하고 사과하라! 대통령은 세월호참사 지우기 중단하라! 정부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권고 이행하라! 정부는 세월호참사 기억/추모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하라! 세월호참사 대통령 기록물, 국정원, 군 등 정부 기록물 모두 공개하라! 부재했던 재난 컨트롤타워, 피해자 사찰했던 정부기관, 국가책임자 처벌하라! 대통령은 진상규명 추가 조치, 성역 없는 추가 조사 이행하라!     (세월호 참사 102주기 기억식 팜플렛에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과 국가폭력 및 사찰, 대통령이 사라진 시간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불러세운다. 기억은 사진첩에 끼워지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다음번 또다른 희생이 생겨나지 않기 위해, 다음번 재난 컨트롤타워의 부재를 막기 위해 필요한 순간이다.  우리는 사이렌을 계속 울려야 한다.  왜냐하면 팽목항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세월호도 어디에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것은 이태원참사 등 다른 참사와도 맥이 통하고, 419 민주화운동과도 맥이 통한다. 세월호참사에 대한 기억은 사회적 기억으로서 의미가 깊다. 또한 세월호참사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은, 이 사회 어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재난참사 이후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를 설계하기 위해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 잘못된 조치를 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자들에게 어떻게 사법적, 사회적 책임을 물을 것인지는 여전히 남은 과제다.’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2014~2023년의 기록 <520번의 금요일> 중에서) 단원고 416 기억교실 기억식이 끝나고 근처에 10년 전 희생자였던 단원고 2학년 교실을 보존해 놓은 기억교실을 찾았다. 가는 길에 문 닫을까 걱정되어 택시를 탔다. 안산 택시들이 팽목항과 안산을 오가며 피해자 가족을 도왔다는 게 생각나 물어보니, 기사님은 쓰라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누구라도 그랬을 거라고. 그러면서 기억식에 대통령은 왔던가요? 하고 물었다.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기억교실 건물을 둘러싼 울타리에 걸린 “10년, 당신들을 기억하는 마음은 변함 없습니다.” 라는 플랜카드가 보였고, 노란 바람개비가 바람을 맞고 있었다.  기억교실에는 남자반 여자반으로 2, 3 층으로 나뉘어 있는 교실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노란 등받이와 방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자리를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반 전체에 서너 자리를 빼곤 모두 노란 자리로 뒤덮여 있어 가슴이 턱 막혀왔다. 교무실 역시 희생자 선생님들의 사진과 평소 쓰던 출석부 학생기록 수첩 등이 남아 있었다. 안내하던 한 여자분이 간곡히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한 아이의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세요.”  그제야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애썼다. 지금 살아 있었다면 27살의 청춘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었을 아이들. 나는 기억교실 안에서 부표처럼 떠 있었다. 한 책상 위에 낙서로 적혀 있는 글귀를 보았다.   단 한번 뿐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의 키워드는 ‘기억’ 뿐만이 아니었다. 기억과 약속, 그리고 책임이었다. 기억은 힘이 세다, 는 말처럼, 기억이 약속을 만들고, 약속을 통해 책임을 일구어 나가는 과정이 이제 10년을 맞이한 셈이다. 아직 이루지 못한 진실규명과 책임 처벌, 앞으로를 대비한 관련 법률과 제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인재(人災).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회적 참사.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들. 그것을 해낼 수 있어야지만 이 기억식의 의미는 뚜렷해질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노란 리본은 반짝거리고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아직 더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뜨겁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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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아이들을 보낸 지 벌써 10년입니다. 당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며 고시공부를 전전하는 25세 대학생이었던 제게 4월 16일은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노라 울면서 다짐하게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3년상을 치르듯 너희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찾겠노라 버둥댔고 2017년 4월, 의미는커녕 스스로의 삶 하나 건사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세월호 기억공간이 보이는 광화문 카페에 홀로 앉아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보낸 지 10년이 되었을 때에는 그래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무언가를 영정 앞에 내어놓고 싶었는데, 매서운 세월의 바람 앞에 속절없이 풍화되어 온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10년이 지난 지금, 그 간의 마음을 매듭짓고 새롭게 다짐을 기록하고자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1. 2014년 4월 16일 : 우리 모두의 실패  돈과 물질, 권력과 허세로부터 인간과 생명, 자유와 평등을 향한 새 기풍을 진작하지 않는다면 팽목의 통곡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다. 팽목은 이미 한국의 압축판이고, 세월호는 대한민국호의 다른 이름이다.-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 박명림 교수 한겨레 기고문 중 사실 그럴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위기상황인지, 얼마나 붕괴의 조짐들이 많이 보이는지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10대 시절 중고등학교를 보내며 교육구조가 얼마나 처참하고 그 구조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신음하는지를 보아왔고, 대학에 들어온 이후 여러 학문과 글,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삶의 경험들을 통해 무언가 잘못된 거 같고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은 사회의 단면들을 바라보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감각하는대로 정말 사회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으레 어른들이 이야기하듯 아직 10대의 순수함을 벗어나지 못한 청년의 시절에 바라보는 순진한 시선이었는지 스스로조차 잘 알지 못한 채.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외치기엔 자신이 없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나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건의 당일에는 그저 당황했던 거 같아요. 뉴스를 뒤덮은 수많은 속보들과 서로 맞지 않는 이야기들. ‘설마…’ 라는 말줄임표로 끝나던 생각이 시간이 흘러 ‘정말?’ 이라는 놀람의 물음표로 바뀌던 시간들. 하루이틀이 지나며 우려했던 그 일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이내 무너져내렸던 시간들. 긴급히 생겨난 여러 모임들에서 함께 이야기하며 울던 시간들. 점차 드러나는 여러 정황과 실체들… 제가 무너져 내렸던 자리는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구나’라는 자리였어요.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실려 있었던 화물들, 짐을 조금이라도 더 싣기 위해 줄여버렸던 평형수,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내고는 제일 먼저 도망쳐버린 리더십들, 침몰 당시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위기상황체계, 서로 다른 정보가 뒤섞이며 엇갈리는 언론,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지만 그 누구도 어찌하지 못하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 어느 누가 책임자이고 죄인이라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모든 프로세스 중에 현실과의 타협이 있었고 좀 더 이득을 취하고자 저지른 꼼수가 있었고 별 일 없을 거라며 눈 감던 관행이 있었고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안일함이 있었어요. 그것들이 만분의 일의 확률, 십만분의 일의 확률로 연결되었을 때에 배가 침몰하고 사람들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들을 사회와 공동체가 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으니깐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타협과 꼼수와 관행과 안일함이 사실 일상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어요. 운명의 주사위가 다른 숫자를 내보였다면 그것은 2014년 4월 16일의 진도 앞바다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사실 이미,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었고 죽음의 주사위를 던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낸 대가를 그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이 치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를 그리도 무너지게 했어요. 그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깨닫고 모르지 않았었는데. 가시화된 죽음을 목도하고 난 후에야 그것이 진실이었구나, 그리고 그 주사위를 막지 못하고 결국 굴리고 말았구나 라는 사실 앞에서 그들의 죽음에 저의 책임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생각했어요. 나와 우리의 안일함이 모이고 모여 이 주사위를 굴리게 만들어버린 것이니깐요.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10년. 10년 뒤에는 너희 앞에 부끄럽지 않을 나라와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결심이 말이죠. 그렇게 10년이 흘러, 오늘 다시 아이들 앞에서 되묻고 있네요. 정말 우리는 그런 나라와 사회를 만들었을까 하고 말이죠. #2. 2024년 4월 16일 : 우린 여전히, 배 안에 있다 2021년 어느 봄날 저녁, 청와대 앞 광장에서 커다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스텔라데이지호 이등항해사 허재용 씨의 어머니 이영문 씨였다. 그날은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하여 선원들이 실종된 지 4년이 되는 날로, 정부에 2차 심해수색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회에서 이영문 씨가 증언할 차례였다.73세 노모의 울음소리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침묵했고,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세상이 정적 속에 정지한 것 같았다.그때 정적을 깨며 누군가 이영문 씨를 향해 달려갔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을 위한 기도회에 참여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 창현 어머니였다. 그는 이영문 씨를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두 엄마가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 <포기할 수 없는 약속>, 416생명안전공원 예배팀 엮음 중 사실 2014년 당시만 해도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너무 컸던 거 같아요. 구하지 못해 미안하고 살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울면서 이야기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이후 2016년에 마주했던 사건들.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건을 지나면서,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의 실체가 점차 가시화되고 알지 못하던 여러 곳에서 사회적 모순이 죽음의 사건으로 공론화되는 것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아직, 배 안에 있구나 라는 사실을 말이죠. 죽음의 주사위는 여전히 굴려지고 있었고, 도처에서 신음과 울부짖음이 터져나오고 있었어요. 사건들이 터져나올 때마다 절망감이 스스로를 뒤덮었습니다. 사실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수 번 아니 수십 번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기회들을 모두 비껴나면서까지 사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은 마치 겹겹이 설치 해둔 창문들을 뚫고 들어오는 추위와 같았어요. 추위를 막고자 설치한 유리창들이 번번히 깨져 있었고, 바람은 그 깨진 유리창들 사이로 뚫고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죠. 추위야 그저 견디면 그만일텐데, 확률의 유리창들을 뚫고 엄습한 사건은 가장 연약한 사람부터 공격해 들어왔어요. 그건 그저 사고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겹겹이 형성한 시스템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였고 멈춘 시스템을 틈타 죽음의 주사위가 굴려지고 있다는 증거였어요. 자연의 위협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고, 사고의 위험을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그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사회의 시스템과 공동체의 규율이 붕괴될 때에 공동체의 가장 약한 사람부터 확률적으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드러난거죠. 하지만 그보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깨진 유리창들로 이루어진 사회 시스템을 보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는 사실이었어요. 그 시스템이라는 것은 비단 정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관여하는 개개인의 직업윤리와 공동체윤리마저도 붕괴된 현실을 살고 있으니깐요. 동시에 그런 윤리를 지키지 않은 개인에게만 탓을 하기에는 직업윤리와 공동체윤리를 지키면서는 도무지 살 수 없도록 설계된 사회였어요. 경쟁에 내몰리고 원칙이 비웃음 당하고 순수함이 순진함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 이 문제들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음이 점차 피부로 와닿아졌어요. 국가의 실책, 제도의 실패 등에 대해서 당연히 이야기하고 바꿔야 할 문제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 점차 깨달아지고 있었죠.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조금은 절망스러운 마음과 체념을 가지고 이번 10주년을 지나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3. 메타노이아metanoia : 마음의 전환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의 전환shift of mind, 즉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그리스인에게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근본적인 전환 또는 변화,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마음의 초월meta을 의미했다. 초기 기독교 영지주의 전통에서 ‘메타노이아’는 지고의 존재, 즉 신을 직접적으로 알고 깨우친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므로 ‘메타노이아’는 세례 요한 같은 초기 기독교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단어였으리라. 가톨릭 자료에서 ‘메타노이아’는 ‘회개’로 번역된다.- <학습하는 조직>, 피터 센게 지음 중 참사가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이 때에, 이 비극의 연쇄작용을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사회운동이 일어난다고 해서, 한 두 개의 정책이 세워지고 법률이 통과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의 종류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회의 특정 부분, 구조의 어떤 영역에 특이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깔려 있는 우리 스스로의,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겨누고 있는 무기들을 내려놓아야 할 거 같았어요. 박명림 교수님은 세월호 참사 당시에 기고하신 <통곡의 바다, 절망의 대한민국>에서 사회의 숨과 바람과 호흡의 방향, 정신과 영혼의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팽목의 통곡은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덮칠 것이라 예견하셨던 것 처럼 말이죠. 그러던 중 제가 발견하게 되었던 것은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개념이었어요. <학습하는 조직>이라는 책에서 시스템 사고의 권위자인 피터 센게 교수는 특정 조직이 위대한 팀으로 거듭나면서 조직에 속한 구성원들이 하게 되는 강렬한 경험과, 그 경험이 구성원 각자의 인생과 방향성 자체를 바꾸어놓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리고는 그 경험을 설명하는 단어를 찾던 중 ‘메타노이아’라는, ‘마음의 전환’이라는 단어에서 찾았어요. 사실 이 단어는 종교를 가진 분들이라면 더욱 친숙한, ‘회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단어죠. 종교를 가지지 않던 이가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방향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것이었죠. 이 개념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한국 사회가 참사의 연쇄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한국 사회의 ‘메타노이아’ 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각자가 타협과 꼼수와 관행과 안일함으로부터 원칙과 생명, 공동체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전환하는 것’. 그렇게 각자의 깨진 유리창들을 모두가 보수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만이 더 이상 죽음의 주사위가 구르지 않고 그 죽음의 확률을 함께 힘을 모아 막아내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피터 센게 교수는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메타노이아에 대해 증언하고 있었고 그것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킬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심하게 되었죠. 하지만 전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비단 참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의 하루하루, 순간순간 속에서 원칙보다 편의를, 전체의 순리보다 나 자신 혹은 내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기를 강요받죠. 그러려고 하지 않는 마음조차 무색하게 그로 인해 당장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와 손해가 막심하거든요.설령 누군가가 그러한 마음의 전환을 하기로 결심하더라도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한 1명의 변화는 그 사람의 생존과 그 사람이 속한 조직의 생존을 위협할 뿐이에요. 세상의 룰은 바뀌지 않았지만 홀로 그런 선택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사람들은 도리어 ‘이기적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순진하다’ 혹은 ‘이상적이다’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밖에 없을 거에요. 심지어 모두가 바뀌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 행동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니깐요. 우리는 여러 사건과 이야기 속에서 그 상황들을 지켜보고 왔었죠. 그럼에도 전 사회의 ‘메타노이아’가 아니고서는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던 저로서는 그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씨름했습니다. 조직을 넘어 생태계로 발전된 새로운 운동과 흐름에 대해 역사를 뒤적이기도 하고, 제도와 조직, 문화에 대해 씨름을 하면서 어떤 가능성의 단초들을 찾아나서고자 했어요. 하지만 긴 씨름의 끝에 제가 발견한 것은, 이미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시작되었고 이 질문의 시작이야말로 그 증거였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이었습니다. #4.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사건이 촉발하는 사회의 메타노이아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돌베개>, 장준하 지음 중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이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고(故)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인 <돌베개>에 나오는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선생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 때에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나라를 잃은 조상들과 다르게 우리 세대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그 마음이 척박한 여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과 ‘더 이상 어른들을 닮지 않겠다’는 세월호 세대 아이들의 말이 겹치게 읽혔습니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는 방식을 통해 계속해서 사회의 메타노이아를 경험해 온 나라였다는 사실을 말이죠. 1910년에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겪으면서 사회 전체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내 일어난 1919년의 3.1운동과 이후 벌어진 독립운동은 모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라를 다시 독립시키겠다는 열망이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일으킨 결과였습니다.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했죠. 그리고 우리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합니다. 다시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었죠. 하지만 이내 1950년 우리는 6.25 전쟁을 경험합니다. 전쟁은 또 다시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리고 광복과 독립의 정신을 계승할 새도 없이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고 맙니다. 기근과 가난 속에 태어난 세대는 전쟁의 충격 위에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산업화와 경제개발에 사회 전체가 몰두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19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 사이 1980년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다른 의미에서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군부독재 속에서의 억압 속에 살던 세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게 되고 1987년 6월 항쟁을 넘어 직선제 개헌을 통해 우리는 민주화를 이루게 되죠.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항상 이전 세대의 실패가 누적되고 축적되다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사건’을 경험하면서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경험해왔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 전체라고 하지만 모든 구성원이 그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회가 경험한 사건이 사회의 ‘메타노이아’를 일으키면서 사회 전체가 그 반작용의 활동에 몰두하게 되는 일들을 다름아닌 우리나라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겪어왔더라구요. 그리고 그 메타노이아를 촉발시킨 사건은 앞선 세대의 모순이 누적되어서 촉발한 비극이었습니다. 경술국치가 그러했고, 6.25전쟁이 그러했으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그러했죠. 그렇기에, 이 모든 사회의 메타노이아는 기본적으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헌신한 세대들의 발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아이러니이자 일종의 비극인 이유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 자체에 있습니다. ‘못난 조상’이라는 표현 자체에서 우리는 사회 전체에 있어 마음의 전환이 일어났지만 그 전환의 방향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또 다른 비극을 낳고야 말았다는 아이러니를 보게 됩니다. 나라를 잃은 설움은 앞선 세대로 하여금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했지만 독립 이후의 혼란과 나라 형성을 제때 하지 못한 아픔이 남았고, 그 아픔을 딛고자 경제성장에 몰두하던 세대는 군부독재를 허용하고 민주화를 놓치면서 국가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트라우마를 남기게 됩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하는 결심으로 일어난 세대는 기어이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민주국가를 만들었지만, 세월호 세대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말을 그들의 언어로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마주했던 2014년의 참사가 우리 세대의 ‘메타노이아’를 촉발시킨 사건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메타노이아는 안타깝게도, 과거의 역사가 그래왔듯이 이전 세대의 모순이 누적되고 축적되다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 전체의 ‘마음의 전환’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가진 ‘참사의 되풀이를 막기 위한 방법’에 대한 질문 자체조차 세월호 참사로부터 촉발된 제 마음 속의 ‘메타노이아’였던 것이 깨달아지게 된 것이었죠. #5. 상처 입은 세대 :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타자의 비판이 한갓 타자의 부정에 머물러 적극적 자기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이 자기 형성을 통한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공동의 적을 통해 결속된 우리는 그 적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남남으로 흩어지게 되고 지배 권력은 그렇게 원자화된 시민을 끊임없이 상호 경쟁으로 내몲으로써 자신의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된다.(…)다시 그런 봉기가 일어난다 한들, 그것이 단지 독재적인 통치 권력에 대한 부정과 반발에서 촉발된 것이라면,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는 매번 유사한 방식으로 봉기하고 적대적 권력을 타도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온전한 의미에서 나라를 형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김상봉 교수 씀 중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 전체의 메타노이아’를 발견했고 우리나라의 현대사 속에서 메타노이아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만,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이러한 참사를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주요한 원인이 다름아닌 이전 세대의 메타노이아 그 자체라는 것에 있습니다. 경술국치의 참혹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은 이 일을 촉발시킨 일제에 대한 저항과 항거였습니다. 동시에 경제성장을 향한 전국민의 노력도 전쟁의 트라우마를 딛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구요. 민주화운동 또한 국가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참혹함에 대한 충격이 가지는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사실 모든 세대의 모든 노력들, 그리고 모든 메타노이아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들어내는 자양분이 되어주었지만, 그 에너지들 자체가 ‘이전 세대가 가진 모순의 누적으로 치른 대가에 대한 트라우마’의 성격이 강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어느 세대 하나 없이 모두 상처입은 세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상처로 촉발된 마음의 전환은 그 자체로 큰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만한 힘을 보여주지만, 그 힘의 방향이 필연적으로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 혹은 극복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균형 있는 자기형성과 성장을 만들어내기보다, 사회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이전 세대의 모순에 대한 극복에 몰입되는 나머지 또 다른 측면에서의 모순을 눈감게 만들고 맙니다. 그것이 누적되고 축적되다보면 결국 다음 세대에게 트라우마를 안기는 또 다른 참사를 만들어내고 마는 것이죠. 김상봉 교수님은 최근 내신 저서 <영성 없는 진보>에서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에 대해 ‘타자의 부정에서 적극적 자기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현대사가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의 연속이었지만 그 가운데에서 트라우마를 딛고 적극적 자기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또 다시 2014년, 세월호 참사로 새롭게 사회 전체에 일어난 마음의 전환을 목도하지만, 그 깊은 곳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한계인 트라우마의 측면 또한 마주하게 됩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우리 세대로 하여금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분노어린 다짐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10년간 경험한 이러한 마음의 전환이 이전 세대에 대한 부정을 넘어 적극적 자기형성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 또한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모순이 축적되어 벌어지는 참사를 넘겨주는 ‘못난 조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6. 비판에서 형성으로 :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낸다는 것 “오로지 대학만 바라보고 공부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세월호를 보면서 어른들과 사회체계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어떤 어른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게 됐다. 한편으론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한다는 마음, 믿음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런 어른은 되지 않겠다"...세월호 10년, 97년생이 온다” (오마이뉴스 2024.04.16.) 중 97년생의 증언 나라 잃은 아픔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시대정신이 ‘독립운동’이라면, 전쟁으로 일어난 시대정신이 ‘경제성장’이었고, 국가의 폭력 앞에 일어난 시대정신은 ‘민주화’였음을 봅니다. 그런 우리 앞에 세월호가 웅변하고 있는 우리의 시대정신은 어쩌면 ‘주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막연한 신뢰를 바탕으로 앞선 세대, 앞선 리더십, 앞선 이들이 해오던 대로, 하라는 대로 따르던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의 결과를 우리는 보고야 말았으니깐요.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따라야 하는 시스템과 권위와 어른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리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을 봅니다. 실제로 이 새로운 세대는 분명하게 주체성의 경험들을 축적해가고 있습니다. 맨바닥에서부터 전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그러하고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서로의 필요를 위해 완전히 새롭게 생겨난 청년 단체들이 그러하고, 완전 새로운 판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아티스트들이 그러합니다. 동시에 이전의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직장인들이 그러하고 학생들이 그러합니다. 디지털 전환이 만든 새로운 공간 위에 같은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이 세대는 이전 세대에 의존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기에, 우리가 앞선 세대들이 해왔던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우리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직면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세대는 더 이상 ‘다음 세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지금의 시스템과 지금의 사회에 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변화를 직접 만들어야 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고 제3자인 누구에게, 어른인 누구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세대가 아닙니다. 우리 세대에서 정치인이 나오고 있고 우리가 직접 가정을 꾸리고 공동체를 구성하고, 우리 스스로가 사회를 형성하고 선택하며 동시에 직접 책임지는 자리에 서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믿지 말자“라는 데에서 더 나아가 ”각자의 깨진 유리창을 책임지고 서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라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앞선 세대에 대한 트라우마로 우리 사회가 쌓아온 모든 유산과 축적된 경험을 모두 불신하게 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모순을 만들어내는 선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기획한 세월호 세대에 대한 조사에서 나온 저 증언에 저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있다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세월호가 상처가 아닐 수 없고, 우리 안에 불신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불신을 넘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믿음의 연대를 회복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일상으로 녹아들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합니다. 거창한 정치나 시민운동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의 도움, 배려, 때로는 약자에 대한 도움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리창의 보수이자 치유의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에 다른 선택을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비판이자 대답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선택과 경험을 통해 성장해 나가겠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선택들의 대가 중 일부를 우리의 다음 세대가 치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또한 앞선 세대의 부채를 껴안으면서 이러한 사건 앞에 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앞선 세대의 대가를 치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또한 다음 세대가 어찌 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사회를 이용한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우리는 또 다른 참사를 낳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트라우마에 우리 스스로가 지배되어 우리의 동생들과 자녀들을 해치는 것에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의 주도적인 세대가 되었을 때에 우리의 다음 세대에 대한 고려가 있는 판단이 있어야 하고, 다음 세대를 우리보다 더 나은 세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판단과 선택들, 그리고 책임들이 이루어지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비극의 연쇄고리가 아닌,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사회가 진보하는 선순환의 연쇄고리를 만드는 첫 단추를 꿸 수 있을 것입니다. # 닫으며 : 위대한 세대가 되기를 소망하며 미국에는 ‘가장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세대가 있다. 1901~1927년 태생이다. 이 세대는 청년기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이겨냈고, 1950년대에는 미국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 개념을 널리 알린 〈나 홀로 볼링〉을 썼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질이 왜 갈수록 나빠지는지, 사회적 자본이 왜 갈수록 쪼그라드는지 추적했다. 답은 의외였다. 사회적 자본을 유난히 풍부하게 가졌던 윗세대가 퇴장했기 때문이다. 그게 전쟁을 겪은 세대, 그러니까 위대한 세대였다(퍼트넘은 1910~1940년생까지로 좀 더 넓게 잡는다). 이 세대는 후속 세대보다 공적 토론에 더 관심이 많고, 더 많이 투표하고, 시민적 결사와 공공업무에 더 많이 참여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돕고, 동료 시민들을 더 신뢰한다. 한마디로 더 나은 시민이다.위대한 세대는 가장 가혹한 전쟁의 자식들이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응집력을 극적으로 높이므로, 때로 전쟁은 더 나은 시민을 만드는 용광로다. 퍼트넘은 방대한 데이터를 검토한 후, 결론으로 이렇게 쓴다. “1945년(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다)에 절정에 달했던 국가 통합의 시대정신과 전시(戰時)에 불붙은 애국심이 시민정신을 강화했을 것이다.” 그 힘은 이 세대가 살아 있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만큼 오래갔다. 이들이 주도한 시대에 미국은 최전성기를 달렸다.-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갈림길에 선 한국 편> 천관율 기자 씀 중 천관율 기자님이 코로나 시기에 썼던 기사에서 나온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은 그 또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사로부터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퍼트넘에 따르면 이 메타노이아를 통해 위대한 세대는 공적 토론에 더 관심이 많고 공적 업무에 헌신하고 동료와 연대하는 ‘더 나은 시민’이 되었다고 기술합니다. 물론 이 세대가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앞선 세대의 트라우마까지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저희도 알 수 없고, 현재의 미국을 볼 때에도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대한 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또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를 하게 만듭니다. 사실 이 글에서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을 수 있는 중요한 일로 ‘앞선 세대에 대한 용서’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트라우마조차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세대가 겪은 상처에 대한 용서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어느 날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우리 또한 다음 세대에 대한 가해자가 되어 앞선 세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완전히 우리 안의 상처를 모두 회복한 후에, 상처로 인해 어찌할 수 없었던 지난 세대의 과오를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 세대가 우리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앞선 세대를 용서하고 다음 세대에게 좋은 어른이 되는 세대가 될 수 있다면, 우리 세대로부터 우리 나라의 온전한 치유와 성장이 일어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우리 또한, 미국조차 온전히 이루지 못한 ‘위대한 세대’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많이 성공했거나 가장 화려한 세대여서가 아니라, 정말 우리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후대 세대에게 롤 모델이 되고 기준이 되는 그런 세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떠나 보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그런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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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 : 가슴에 노란 리본, 마음에 새긴 약속
2016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참사가 어느덧 10주기를 맞이했다. 10주기 세월호 기억식은 안산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에서 진행되었다. 많은 시민, 유가족분들과 여러 인사들이 기억식에 참석해 주었다. 기억식 순서 식전 공연 이름을 불러주세요 추도사 기억 편지 기억 영상 상영 기억 공연 기억 합창 4.16 안전 문화 창작곡 수상자들의 공연으로 식전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이름을 불러주세요’가 이어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김동연 경기도지사, 이민근 안산시장,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 고 김수진 아빠 김종민님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은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면서 추도사가 시작되었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재해로부터 자유로운 바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달라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임, 인정, 사과, 재발방지, 의료지원 등 12가지 주요 건고에 대한민국은 응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했다. 늦어지고 있는 기억공원 건립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국민의 안전이 뒷전인 현재 대한민국을 지적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하겠다고 밝히며 추도사를 마쳤다.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님과 고 김수진 아빠 김종민님의 추도사에서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고 하지만, 10.29참사와 오송참사가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이 높을수록, 함께 힘을 모아 장벽과 부딪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추도사가 끝나고 난 뒤, 97년생 동갑내기 김지애님의 기억 편지 낭송이 있었다. 4.16참사를 겪은 후, 자신의 다짐과 생각을 별이 된 친구들에게 전했다. “하늘이 맑을 때 너희를 기억하고, 비가 올 때 너희를 기억하고, 별이 많은 날 너희를 기억하고, 꽃이 피면 너희를 기억하며 살아가려고 해. 너희 부모님들 곁에 서서 진실도 밝히고, 책임자도 끝끝내 찾아냈다고. 이제 이 땅에는 무책임한 정부로 인해서 벌어지는 참사는 없게 만들었다고 자랑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가수 박창근님의 ‘별되어 내리네’와 ‘미련’을 불러주셨다. 바로 이어서 배우 박원상님의 정호승 시 낭독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널 가슴에 묻으라고 한다 세상에! 너는 언제나 내 가슴에 살아 있는데 어떻게 가슴에 묻을 수 있겠느냐 엄마는 너를 가슴에 묻지 못한다 아빠도 너를 황량한 가슴의 들판에 묻지 못한다. - 왜 돌아오지 않느냐 정호승 - 마지막으로는 4.16합창단과 시민합창단의 기억 합창으로 기억식을 마무리했다. 기억 합창단의 마지막 노래로 ‘잊지 않을게’를 부르며, 합창단은 노란 비행기를 날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10년이 지날 미래에도 노란 비행기처럼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자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듯,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듯, 진실은 침몰하지 않듯, 세월호참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쁜 와중에도 200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4월은 따뜻하고 꽃이 피는 봄의 시작이지만, 304명이 별이 된 달이기도 하다.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 함께 하겠다는 말들이 많이 오갔고,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특별법 제정, 생명안전법 제정과 같은 요구도 잇따라 들렸던 기억식이었다. 기억식에서의 다짐과 약속이 기억식이 끝난 후에도 이어지면 좋겠다. 김지혜님의 편지 중, ‘나는 그저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나도 김지혜님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저 나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이렇듯이, 세월호참사, 이태원참사, 오송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다. ‘여전히 단단하지 않은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위해, 남을 위해, 미래를 위해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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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0년, 정치가 한 일
정치란 무엇일까요? 가장 보편적인 정의는 권력에 의한 자원의 분배입니다. 그 방식에서 권력의 가치관을 엿보게 됩니다. 정치 권력은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볼지 결정하고 지배적인 담론을 만들며, 그에 따른 자원 분배의 규칙을 만듭니다. 따라서, 세월호는 정치적인 사안입니다. 참사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들을 둘러싼 자원의 분배를 고려해 만들어집니다. 각자의 관점에서 담론과 규칙이 제시되고 시민들은 그것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지난 10년 간 그래왔습니다. 애증의 정치클럽에서는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세월호를 둘러싼 정치를 살펴봅니다. 10년 간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참사와 정치가 만날 때 드러난 권력의 문제를 얘기합니다. 10년 전에 있었던 일 선원과 해경의 책임회피로 골든타임을 놓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배가 기울자마자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은 살았고, 남아서 승객 유도 의무를 수행한 선원들은 사망했습니다. 해경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승객 퇴선 결정을 선장에게 미뤘고, 구조 작업에도 소극적이었죠. 한편 청와대의 책임은 가려졌습니다.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청와대가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현장의 영상이었습니다. 대통령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였죠. 당시 청와대와 해경의 연락 내역을 살펴보면 남아있는 승객의 구조 여부를 묻거나 즉각적인 구조를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날 오전 쉬고 있어 곧바로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건 발생 1시간 후에 보고를 확인했고, 이후의 7시간 동안에도 사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질문을 반복했고, 구조 논의는 미뤄졌습니다. 이후 청와대는 책임 회피에만 전력을 다했습니다. 참사 2주 뒤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이 재난 컨트롤타워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오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해 7월 비서실장 김기춘은 국정조사에서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는 사고 상황과 구조를 지휘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에는 ‘청와대(국가안보실)가 재난 대응에 대한 컨트롤타워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청와대는 이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뤄진 무단 변개였습니다. 정부는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라는 유병언에게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압수수색을 생중계하고 검거 상황에 대해 검찰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이례적으로 요란한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언론은 이에 응해 관련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세월호는 관리대상 정부는 세월호와 관련된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지방선거를 한달 앞두고 참사가 벌어졌고,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로 떨어졌습니다. 각계에서 비판 시국선언과 추모행사가 진행되자 정부는 ‘관리’에 나섰습니다. 세월호참사 시국선언 참여 교수 명단을 작성해 정부 위원회 위원 임명 과정에서 부정평가를 주었고, 문화예술인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습니다. 기무사와 국정원은 유가족을 불법 사찰했습니다. 유가족의 정치적 성향, 경제적 형편, 관심 사항 등을 파악했고, 이를 기반으로 유가족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려 했습니다. 관련해 일부 관계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기무사는 참사 일주일 뒤부터 유가족을 대상으로 한 ‘반정부 종북좌파’의 동정을 확인하겠다고 계획했고, 5월엔 세월호 피해자 대책위를 종북세력으로 규정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과 특검 요구가 본격화되자, 정치권은 유가족의 ‘순수성’을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별법에 “순수한 유가족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언론에선 유가족이 요구한 적 없는 보상금과 특례 문제가 부각되었습니다. 유가족들이 ‘정치적’이라고 비난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2014년 하반기부터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방해가 이어졌습니다.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 김재원은 특조위 설립 단계부터 “세금도둑”이라 비판했습니다. 설립 이후에는 청와대의 총괄로 관계 부처들이 역할을 나눠 방해 행위를 펼쳤습니다. 청와대에서 특조위를 축소하기 위한 시행령을 마련해 통과시켰고, 여당 추천위원들은 조직적인 행동으로 조사를 무력화했으며, 예산 압박도 계속됐습니다. 한겨레21 안영춘 기자는 세월호에 대한 정부여당의 대응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진상 조사 요구에 대한 국가의 탄압과 진상 조사에 대한 조직적 방해, 하위직만 수사하고 처벌하는 수사기관, 유가족에 대한 감시와 배·보상에 눈먼 존재로 낙인찍기는 촘촘히 엮여 있다.” 핵심은 정부의 책임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권력기관은 집권 세력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다는 목적 하에 일심동체로 움직였고, 유가족은 그 판의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0년 후에 달라진 일 그럼에도 유가족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조위가 해산되자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서 진상규명을 계속했고, 안전한 사회를 위한 제도적 개선을 말해왔습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 통과 1️⃣ 재난 컨트롤타워 명시 재난 예방, 대응, 수습을 총괄하는 국민안전처가 생겼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청와대가 컨트롤타워임을 부인했기에, 다른 컨트롤타워를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청와대가 컨트롤타워임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민안전처는 폐지하고,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와 행정안전부에 컨트롤타워 기능을 넘겼습니다. 2️⃣ 대응 체계 정비 대응 체계 혼선을 막기 위한 조치입니다. 긴급구조 활동을 할 땐 우선 소방서장의 지휘를 따르고, 이후 시·군·구 부단체장이 수습하게 했습니다. 경찰·소방·해경이 신속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재난안전통신망을 구축했습니다. 3️⃣ 재난 조사·평가 의무 정부가 재난 발생 원인과 대응 과정을 분석한 재난백서를 국회에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이외에도 학교 생존수영 교육 도입, 현장체험학습 매뉴얼 제정, 중대재해처벌법 신설 등의 제도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진상규명 앞서 설명한 청와대의 개입은 2018년 출범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서 밝혀낸 것입니다. 사참위는 재난 역사상 최초의 독립조사위원회로, 특조위 강제 해산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진상규명을 이어가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사참위의 진상규명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침몰의 직접적 원인을 밝히지 못했고, 조사 과정에서 음모론의 개입도 있었습니다. 수사권 없이 비협조적인 일부 기관을 상대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장은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이 진상규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꿨다고 평가했습니다. “진상규명이라는 것이 ‘위법하냐, 위법하지 않느냐’만을 가리는 조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도 세월호를 계기로 알게 됐다. 법 위반만 없으면 검찰은 기소할 수 없고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된다. 그러나 재난·참사가 일어나는 데는 구조의 문제, 행정상의 공백, 문화적 측면이 모두 작용한다. 이제는 가족분들 사이에서도 ‘법적인 부분만 따져선 안 됐던 거구나, 제도를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관행을 바꿔야 했던 부분이구나’라는 걸 이해하고 인정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책임을 묻는 것도 사법적 책임만큼이나 정치적 책임이나 도덕적 책임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형사처벌 세월호 참사 관련 형사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크게 1️⃣민간 업체의 침몰 원인 제공, 2️⃣ 해경의 구조 실패, 3️⃣ 유가족 사찰 등 2차가해 관련으로 나뉩니다. 선장과 청해진해운은 2016년 유죄가 확정됐고, 해경은 말단 인사 1명만이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해경 지휘부 9명은 무죄를 받았습니다. 유가족을 사찰한 기무사 간부는 지난해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10주기 당일에는 박근혜 정부 인사들의 특조위 설립·활동 방해 혐의가 일부 유죄로 확정됐습니다.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하지만 10년의 변화는 부족했습니다.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에서 세월호의 문제는 반복됐습니다. 여전히 컨트롤타워는 뒤늦게 작동했고, 재난안전통신망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행안부의 재난 원인 조사도 없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도, 책임자가 지키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됩니다. 책임질 의무를 넘어 책임을 실질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세월호 유가족들이 실질적 변화를 위해 요구하는 법안입니다. 안전권 명시: 기본법에 안전권을 명시해 국가와 기업의 책무를 강화합니다. 피해자 권리 보장: 현 재난기본법에 빠져있는 피해자 개념을 정의하고, 안전사고 시 피해자의 권리와 피해지원 원칙을 명시합니다. 진상규명: 상시적인 독립조사기구를 설치하고, 예산 및 인사의 독립성과 피해자 참여를 보장합니다. 안전영향평가: 국가 사업을 계획할 때 안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미리 분석하게 합니다. 또한 안전사고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핵심은 피해자 중심적 시스템의 마련입니다. 세월호 이후 벌어진 참사에서도 피해자들은 체계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응 기관 간의 협업 부실로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고, 생존자 병원 호송과 시신인계 등의 과정에서도 혼선이 발생했습니다. 법안은 2020년 발의됐지만 21대 국회에서 아직 처리되지 못했습니다. 22대 국회로 넘어가게 되면 법안은 자동 폐기됩니다. ✅사참위 권고이행 사참위 보고서는 최초로 피해자 관점의 재난 방지 권고안을 내기도 했습니다. 총 12개의 분야로 이뤄졌는데요. 416연대의 분석에 따르면 정부가 이행한 분야는 하나 뿐이었습니다. 해양재난 수색구조 체계 개선입니다. 국가의 책임인정과 사과, 피해자 사찰 및 조사방해 행위에 대한 추가 조사 및 감사, 재난 피해자의 알 권리 보장과 정보 제공·소통 방식 개선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재난 피해자의 인권침해 및 혐오 표현 확산 방지책 개선, 선사·선원 안전 운항 능력 제고 및 책임 강화, 여객선 등 선박 안전관리 체계 개선, 세월호참사 희생자 추모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 사회적 참사 기록 폐기 금지 및 공개·활용 방안은 부분적으로 이행됐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정치는 있었습니다. 피해자 관점의 참사 대처와 제도적 예방책을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와 안전을 위한 자원의 분배를 말하는 정치입니다. 유가족과 관련 단체에 색깔론을 씌우고, 정작 유가족 사이에선 언급된 적 없는 보조금을 쟁점으로 띄우며, ‘안전불감증’을 참사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실무자의 책임만 얘기한 것도 정치입니다. 여전히 참사는 정치적 사안입니다. KBS는 ‘4.10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방영을 취소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대회가 정치 집회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를 들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태원 유가족과 세월호 유가족은 총선을 앞두고 “생명안전 국회를 만들겠다 약속한 후보에게 투표해달라”고 함께 외쳤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은 분명 변화를 일으켰지만,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참사를 왜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냐”는 질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봅니다.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일까요.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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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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