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돈을 써? 대학생 쓰면 되지
문제: 공공기관이나 기업이 제출한 사업 제안서에 따라 사업을 수행하는 활동. 계획서 심사, 면접 등의 과정을 거쳐 선발된 경우에만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진행 주체는 사업 진행 과정에 대해 지속적인 평가와 감독을 받는다. 진행 주체와 상관없이 사업의 결과는 사업을 제안한 기관의 실적으로 남는다. 이는 무엇일까?
(1) 공모사업 (2) 용역사업 (3) 외주사업 (4) 설마 봉사?
자원봉사, ESG, 그리고 열정페이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올해 3월부터 ‘2024 서울 청년 기획봉사단’ 사업(이하 기획봉사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의 내용은 문제 속 내용과 완전히 동일하다. 청년들이 팀을 이뤄 현대홈쇼핑, 아모레퍼시픽, 서울신용보증재단을 포함한 16개의 기업과 공공기관이 제출한 사업 제안서에 맞춰 기획안을 제출한다. 사전 교육, 서류 심사, 면접을 거쳐 최종 선발된 청년들은 사회공헌 사업을 진행한다. 중간평가와 최종평가를 거쳐 사업이 종료되면, 청년들은 활동혜택으로 무려 활동 인증서와 봉사시간을 제공받는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청년들이 이 활동을 통해 “사회 진입과 일 경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다. 돈은 안 받지만 ‘일’을 경험해 볼 수 있다니! 청년들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 아닌가?
기획봉사단 사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무급 노동’이다. 사실상 공모사업과 동일한 형태로 진행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참여하는 청년들에게는 합당한 대가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약간의 실행금을 주긴 하지만, 인건비는 물론이고 장비 대여비, 교통비 등의 활동비로도 사용할 수 없어 참여자들은 오히려 자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봉사니까 당연히 돈이 주어져선 안 된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어째서 자발적으로 공익을 추구하는 활동은 오직 공짜 노동으로만 진행되어야 하는가? 환경, 생명, 인권의 가치를 짓밟아가면서까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하면서, 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는 엄격한 금전적 순수성을 요구하는가?
설령 봉사의 무보수성을 인정하더라도, 기획봉사단 사업이 순수한 봉사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작년에도 기획봉사단 사업을 진행했었는데, 언론보도는 물론 센터의 웹사이트와 블로그를 뒤져봐도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대신 기업의 봉사활동으로 둔갑한 보도나 기업이 사업을 진행한 청년들에게 ‘활동 인증서’를 수여했다는 보도만을 찾아볼 수 있다. 청년들의 무급 공익활동을 기업의 실적으로 가로챈 것이다.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을 용역 외주로 진행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무급 노동에 ‘봉사’라는 이름을 붙이며 합리화하려는 행태는 기만적이다.
싸다 싸! 대학생의 공짜노동
청년들의, 특히 대학생들의 무급노동은 이미 흔하다. 수많은 공공기관과 기업에서 운영하는 서포터즈, 기자단, 마케터, 봉사단 등의 대외활동은 대학생들의 무급노동을 당당히 요구하거나, 무급노동에 가까운 수준의 활동비만을 제공한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면 대개 블로그 포스팅 및 카드뉴스 등의 기사 작성, 홍보를 위한 영상 콘텐츠 제작, 기관 행사 및 박람회 부스 운영 등의 활동을 요구받게 된다. 활동을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은 절대 적지 않다. 대외활동을 위해 휴학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참여자가 얼마큼의 노동을 하든 간에, 그에 따른 보상은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적은 활동비를 제외하면 봉사시간과 수료증, 기업의 제품 제공 정도가 전부다.
사업 운영진 입장에서는 적은 비용으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으니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청년들은 왜 자발적으로 공짜노동을 하는가? 대학생들의 대외활동을 향한 관심도는 문자 그대로 ‘못 해서 안달’인 수준이다. 대기업이나 대형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서포터즈는 수십, 수백 대 일에 달하는 경쟁률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청년, 대학생 입장에서도 득이 되니까 참여하는 것 아닌가?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상황인데 뭐가 문제인가?
청년들이 자원해서까지 공짜 노동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취업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처럼 고소득, 고용 안정, 장기근속이 보장되는 영역은 ‘1차 노동시장’이라 불리며 노동시장의 상층을 이룬다. 반면에 중소기업 재직자나 기타 비정규직으로 이루어진 ‘2차 노동시장’은 소득이 낮고 고용상 지위가 불안정하며 재직 연수가 짧다는 특징을 갖는다. 문제는 두 영역 간의 격차는 매우 큰데 노동시장 간 이동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진입을 앞둔 청년들의 입장에서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된 이유다. 그러나 1차 노동시장 일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청년들은 극심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무급노동이라도 ‘사서 고생’해야 한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청년들에게 무급노동이 강제되고 있다.
일하다 죽었지만 산재는 아니다?
이는 청년만의, 또 급여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엔 이미 사회적 약자의 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인식이 가득하다. 최근 보도된 다음의 사례는 한국 사회의 편협한 노동 인식을 보여준다. 만 65세 이상 기초연금 수급자인 A씨는 2021년 경기도의 한 복지관을 통해 공공형 노인일자리 사업인 ‘공익형 지역사회 환경개선 봉사사업’에 참여했다. A씨는 이 사업에서 월 30시간 동안 지역 내 쓰레기 줍기 등의 활동을 한 뒤 약 27만 원을 받았다. 2022년 아파트 인근 도로 갓길에서 쓰레기를 줍던 A씨는 도로를 지나던 차량과 부딪쳤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곧 숨졌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복지관 소속 근로자가 아니라며 산재보상을 거부했다. A씨의 유족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부는 A씨의 노동은 근로 제공이 아니라 “지역사회 공익증진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봉사활동”이라며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재판부는 A씨가 한 “1일 3시간 범위 내 쓰레기 줍기 활동은 이윤 창출 등을 목적으로 한 근로제공으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 왜 ‘1일 3시간 범위 내 쓰레기 줍기 활동’은 노동이 아닌가? 왜 ‘이윤 창출 등’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노동이 아닌가? 재판부는 이어 “근로 제공과 그 대가로서의 임금 지급을 목적으로 체결된 계약”이 아니라 노인복지법에 따른 “노인의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한 공익사업의 일환”이라면서 “복지관으로부터 받은 1일 2만7000여원”도 “생계보조금 성격으로 국가 예산에서 지급된 것으로 근로 자체에 대한 대상적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노인들에게 쓰레기 줍기를 ‘시킨’ 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급된 돈도 노동에 대한 급여가 아니라 생계보조금 성격으로 주어진 것이라 노동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노동이 아니라 공익사업이므로, 급여가 아니라 생계보조금이므로 문제없는 것 아니냐고? 노동을 공익사업이라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생계보조금이라고 말장난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노동과 봉사를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재판부는 이윤 창출이 아닌 노인의 사회 참여 확대가 ‘목적’이기 때문에, 주어진 활동비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닌 생계보조금 ‘성격’이기 때문에 노동이 아닌 봉사라고 판단했다. 노동자성을 수행한 노동과 급여의 ‘목적’과 ‘성격’으로 판단하는 것은 난센스다. 대법원이 복수의 판례를 통해 세운 노동자성 판단 기준으로는 종속노동성 요소, 독립사업자성 요소, 보수의 근로대가성 요소가 꼽힌다.*** 사업 참여 노인은 복지관 등의 사업기관과 사업참여계약서를 작성한다. 이에 따라 정해진 기간, 보수, 장소, 업무내용, 업무규칙, 복무규정, 인사규정에 맞추어 업무를 수행한다(종속노동성 요소). 참여 노인은 타인을 고용할 수 없고, 사업기관이 제공한 비품과 원자재만을 사용해야 한다(독립사업자성 요소).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2020년에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참여 노인의 74.2%가 급여를 목적으로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한다(보수의 근로대가성 요소). 사법부의 과거 판례를 기준으로 살펴봐도 A씨의 업무를 봉사가 아닌 노동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목적과 성격을 바탕으로 억지스럽게 봉사와 노동을 구분 짓는 사법부의 판결은 약자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돈을 안 줘도 되는 사람은 없다
대학생 기획봉사단 사업과 노인 공공일자리 사업은 업무의 종류도, 수행 주체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리를 크게 신장시켰다. 물론 오늘날에도 노동권을 둘러싼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전반적인 여건이 상당히 개선되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노동권의 보장은 필연적으로 사용자의 책임(누군가는 이를 ‘비용’이라 오역한다)을 강화한다. 사회의 인권의식이 부족해 제대로 묻지 못했던 ‘당연한’ 책임이 떠오르자, 책임의 주체들은 이를 회피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가장 쉬운 해법은 자신이 사용하는 노동자들이 사실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니니 노동권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다. 돈도 안 줘도 되고, 안전도 신경 안 써도 되고, 근로시간이든 휴식이든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학생이나 노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자들의 노동은 언제나 부정당해왔다. 여성의 무급 가사·돌봄노동은 ‘집안 사정’이라서, 장애인의 저임금 노동은 ‘복지’라서, 고등학생의 저소득 노동은 ‘현장실습’이라서, 이주노동자의 차등적 최저임금은 ‘인구위기’라서 어쩔 수 없다며 노동 무시를 정당화해왔다. 기만적 수사를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차별이 드러난다. 특정한 ‘존재’라는 이유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차별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모두의 노동이 지닌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며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지금 바뀌지 않는다면 당신의 친구도, 당신의 가족도, 그리고 당신도 언제든지 차별받는 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권혜자·이혜연의 분석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대기업 정규직 초임 평균은 305만 원인 반면, 중소기업 비정규직 초임 평균은 138만 원으로 그 격차가 매우 컸다(권혜자·이혜연, <대기업집단 및 중견기업의 임금 프리미엄>, 《노동정책연구》, 19(1), 2019.).
또한 전병유 외의 분석에 따르면 2004~2006년에는 중소기업 근로자의 3.5%가 대기업으로 이직했으나 2013~2015년에는 이 수치가 2.2%로 줄어든다. 이는 노동시장 간 이동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전병유·황인도·박광용,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정책대응 : 해외사례 및 시사점>, 한국은행, 2018.).
** 한국고용정보원의 자료에 기반한 조귀동의 분석을 보면 1차 노동시장 일자리의 대부분을 점유하는 서울 4년제 대학 졸업자 상위 30%의 소득이 2014년을 기점으로 되려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동일 일자리의, 특히 1차 노동시장의 임금이 감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결국 일자리의 수 자체가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 생각의힘, 2020.)
*** 종속노동성은 특정 사용자에게 업무에 관한 지휘명령을 받아 업무를 진행하는지, 독립사업자성은 업무가 자영업자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수의 근로대가성은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한 것인지를 따지는 기준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법무법인 지평의 노동법 뉴스레터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