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6411의 목소리] 20년차 독서지도사가 만난 가장 어려운 책은?

202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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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은 6411 버스 속의 사람들처럼, 지치고 힘들 때 함께 비를 맞고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겠습니다.

20년차 독서지도사가 만난 가장 어려운 책은? (2025-01-13)

독서지도사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이 책을 미리 못 읽어 와서 죄송하다며 건네준 그림. 필자 제공

이원희 | 독서지도사

‘책을 좋아한다.’ ‘책 읽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을 좋아한다.’ ‘아이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배우기를 좋아한다.’ ‘내 아이를 돌보며 일을 하고 싶다.’ ‘내 아이들을 책과 함께 키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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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이라면 직업으로 독서지도사가 딱 맞다. 나 역시 그렇다. 큰아이가 첫돌이 지났을 무렵, 독서지도사 자격증 과정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아, 이거다. 나한테 딱 맞는데’ 하는 생각에 무작정 자격증 과정을 밟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민간 자격증을 따고 바로 일을 시작한 게 꼭 20년 전 일이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이상은 아이들과 책 읽고 토론하며 그들의 사고력 증진과 독서 생활화에 이바지하고, 돈도 벌고 내 아이도 책으로 훌륭하게 키워내는 슈퍼 워킹맘. 하지만 현실은 몇년간 필독서 구매 비용과 수업 자료 잉크값도 안 나오는 수입에, 수업에서도 내 아이는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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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지도사는 대체로 개인사업자로, 집이 곧 사업장인 1인 기업이다. 자기가 속한 지역의 특수성, 영업력, 홍보력, 지도력에 따라 성공 여부가 천차만별인 세계가 사교육 분야지만, 독서 교육은 특히나 정착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물론 방문 과외 형태도 있고, 상가로 나와 운영하는 교습소 형태도 있지만, 사정은 대개 비슷하다.

20년 전 파주에서 독서지도를 시작할 때는 상황이 더욱 열악했다. 처음 몇년은 도서관과 지역아동센터, 보육원 등에서 하는 봉사활동이 더 많았다. 그러니 이렇다 할 안정적인 수입이 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보육원 아이들과 20년 가까이 책으로 만나고 있다.

독서지도사로서 또 하나 마주한 현실은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서지도사 조건에 ‘배우기를 좋아한다’를 넣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끊임없는 공부’는 독서지도사에게 가장 현실적인 생존 조건이다. 아이들과 매달 문학, 비문학 분야 책을 읽는데, 비문학 책은 역사, 철학, 사회, 과학, 예술, 법, 기술, 컴퓨터 등 거의 전 학문 분야를 망라한다. 아동·청소년 도서라고 만만하게 볼 수준이 아니다. 독서지도사로 일한 20년 가운데 10년은 계속 무언가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정작 독서지도사로서 만난 가장 어려운 책은 아이들이었다. 책을 안 읽어 오는 아주 일반적인 문제부터 책상 밑에 드러눕는 아이,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힘들다 재미없다고 투덜대는 아이, 말 안 하는 아이, 글 안 쓰겠다는 아이 등을 많이 만난다. 그럴 때마다 독서지도사로서 부족한 능력과 자질을 자탄했다.

교과 지식이 아닌 생각을 키워주는 수업이라 진심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싶었고, 온몸으로 말하는 아이들의 언어를 번역하고 싶었다. 난독증이나 학습 장애, 자폐 스펙트럼 장애 등으로 독서가 힘든 아이들을 만날 때는 더욱 안타까웠다. 그래서 치유적 독서에 관심을 두고 독서치료사 과정을 또 공부했다. 이 공부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 나를 이해하고 내 문제를 알게 되니 수업이 한층 여유롭고 편안해졌다.

내가 변하니 아이들도 변했다. 아니 아이들은 그대로인데, 내가 그들을 바로 보게 되었다. 발표나 연설을 거부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스스로 회장 선거에 나가 연설을 하고 회장이 되었다며 자랑했다. 수업 시간에는 글쓰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정작 학교 글쓰기 대회에서는 상을 타 왔다. 책 읽기를 싫어하던 아이가 꿈이 독서지도사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작은 변화에 매일 크게 감사하고 작게 보람을 느낀다. 독서가 만능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책이 아이의 마음을 읽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놀이 도구가 되고, 또 어느 날은 읽기·말하기 도구, 글쓰기·그리기 도구, 치유의 도구가 된다. 독서지도사는 이 도구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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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지도사는 영원히 미완성형 교사인 것 같다. 20년을 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책이다. 세상에 읽을 책은 많고 많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알아야 할, 알고 싶은 지식은 넘친다. 그래서 독서지도사들도 매일매일 공부하고, 매일매일 큰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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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지도사, 책만큼이나 어려운 직업! 20년 동안 아이들과 책으로 소통하며 겪은 현실과 보람을 담은 이야기. 이 직업은 그냥 책 읽기를 넘어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 마법 같은 일! 매일 공부하고, 매일 성장하는 모습이 멋지지 않나요? 아이들 변화 하나하나가 보람이고, 독서가 단순한 읽기가 아닌 마음을 읽는 도구가 된다는 점이 진짜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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