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6411의 목소리] 제3 외국어로 수어는 어떠세요

2024.11.19

91
5
노회찬재단은 6411 버스 속의 사람들처럼, 지치고 힘들 때 함께 비를 맞고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겠습니다.

제3 외국어로 수어는 어떠세요 (2024-11-18)

구본순 | 농·난청문화예술활동 강사

농·난청문화예술활동 강사들이 공공수어도서관에서 농·난청인들과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 제공


강의실 문을 열고 농인이 들어온다. 나는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가슴 앞에서 아래쪽으로 살짝 내린다. ‘안녕하세요’라는 수어(手語)다. 바로 이어 두 손을 약간 구부려 손끝이 양쪽 가슴에 향하도록 하고 상하로 엇갈리게 두어번 움직인다. ‘반갑다’는 인사다. 오늘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표현하는 ‘나만의 동화 쓰기’ 워크숍이 있는 날이다. 나는 농·청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청각장애인은 수어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청력에 손실이 있는 모든 사람을 일컫고, 농인(聾人)은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여 의사소통하는 사람을 말한다. 2016년 2월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수어는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한 언어로 인정되었다. 농인들도 모든 생활영역에서 자신의 모국어인 수어로 삶을 영위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예술교육이나 강의가 청인(聽人)에 의해 진행된다. 수어나 문자(속기록) 통역도 찾아보기 힘들고, 담당 기관에 통역을 요청해도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산도 책정되지 않았고, 전문 인력도 부족하다. 게다가 수어통역사가 투입된다 해도 해당 분야 전문가는 아니기에 강의의 내용과 뉘앙스를 온전히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한 요즘, 음성을 인식해 실시간 문자 자막으로 보여주는 서비스도 있지만, 수어에 익숙한 농인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한국어 자막을 다 이해하기 힘들다. 수어와 한국어는 언어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에게 한국어는 제2 외국어와 같다.

광고

나는 학창 시절부터 수어가 좋았다. 이미지로 그려지는 언어에 매력을 느꼈고 농인과 결혼했다. 농인들을 만나면서 치유의 에너지가 있는 예술을 나누고 싶었고, ‘풍경놀이터’라는 장애문화예술교육단체를 만들었다. 내가 경험한 예술을 농인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서 나는 음성 언어와 수어를 동시에 사용하여 강의를 진행한다. 입술 모양이나 불빛도 누군가에겐 언어가 될 수 있다. 나는 “여러분 수업 시작할게요. 저를 봐주세요” 말과 함께 강의실을 밝히고 있는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켠다. 소리가 아닌 눈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농인들에게 빛을 깜박여 수업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와 ‘수업’과 ‘시작’이란 수어 표현을 조합해 말을 건다.

강의할 때는 한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를 사용하고, 장문이 아닌 쉽고 명료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핵심 내용을 전할 때는 위아래 입술을 꾹 다물고 손과 팔에 힘을 주어 수어로 말한다. 사례를 제시할 때는 마치 동화구연을 하는 사람 같다.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수어 동작을 크게 한다. 비언어적 표현인 ‘비수지 기호’(非手指記號, non-manual signals)는 의미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컨대 ‘무섭다’를 말할 때는 양쪽 어깨를 구부린다. 의문문의 ‘물음표’는 눈썹을 올리고 눈을 크게 하고 턱을 당겨야 한다. 무표정으로 ‘즐겁다’를 할 때와 치아를 보이며 입꼬리를 위로 올려 ‘즐겁다’를 표현할 때, 감정의 정도는 다르게 표현된다. 수어는 온몸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투명한 언어다.

워크숍을 진행할 때면 사소한 활동 하나에도 강의실은 복작복작한다. 강사가 음성언어와 수어로 방법을 설명하고도, 수어통역사와 자원봉사자들은 부지런히 움직여 ‘지역방송’에 대응한다. 수강생별 맞춤형 수업이랄까. 글을 모르는 농인에게는 수어를 종이에 적어서 소통하고, 수어를 모르는 난청 어른에게는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다시 반복하여 말한다. 청각인지장애가 있는 이에게는 눈높이를 맞추어 쭈그리고 앉아 대화한다. 단일하지 않은 접근 과정이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내뱉지 않는다.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고 서로 기다려줄 뿐이다. 이런 수업 풍경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얼른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이 광경을 찍어둔다.

서로를 존중하며 예술을 나누는 장면이 우리가 사는 일상 곳곳으로 스미면 좋겠다. 소리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다름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제2, 제3 외국어로 청인들이 ‘수어’를 배워나가서, 수어를 가늘고 얇게 아는 사람들이 가득했으면 한다. 더 커지고 더 깊어지는 예술의 ‘품’을 꿈꾼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노동X6411의 목소리X꿋꿋프로젝트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공유하기

글에 적힌 수화를 읽으면서 바로 해봤어요!! 한국 사람들은 - 저를 포함해서 - 대화할 때 표정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가끔은 우리가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농인 부모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은 비장애인들이 사용하는 뇌의 부위 이외에 다른 부위를 사용해서 세계가 넓어진다는 책을 읽은 기억도 나네요! 언어를 늘려간다는 건 그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작년에 수어 수업 신청하고자 했는데 엄청난 경쟁률!!! 이 글을 읽으니 한 번 더 시도해보아야겠네요! 너무 기대돼요! ㅎㅎ

수어를 제3 외국어로 배우자는 제안이 참 멋지네요! 수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서, 문화와 감정을 전달하는 독특한 언어입니다. 청인들이 수어를 배우면 농인들과의 소통이 원활해질 뿐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만들어질 거예요. 수어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랍니다!

문자 통역 하는 분들과 최근 만날 일이 있어서 수어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글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반갑고, 좋네요!

"온몸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투명한 언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함께 예술을 나누고 기다려주는 모습이 참 따뜻하다고 느껴지네요.

저도 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늘, 다음 언어는 한국 수어를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덕분에 수어와 수어교육에 대해 좀 더 알게 됐습니다. 한국어와 언어 체계가 아예 다르면서도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어떤 구성원들의 1언어인 한국 수어에 더 관심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