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할래? 노동할래?
활동과 노동 사이 ‘활동가’는 가장 좁게는 어떤 일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쓰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와 달리 ‘운동가’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독재나 자본과 맞서 싸우는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라는 호칭과 구별되는 활동가라는 호칭이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어 자주 쓰이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현실에서 활동가는 우선 사회운동가, 시민단체 상근자를 지칭한다. 하지만 그 이상을 포함한다. 사회운동가라는 표현이 일정정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대체 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사용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주로 정치와 관련된 전통적 사회운동과 구별되는 새롭고 다양한 운동들을 포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의견이다. 이러한 관점은 협동조합 활동가, 마을활동가, 사회적기업가, 사회혁신가, 소셜디자이너 등 소위 ‘제3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괄하여 활동가라 지칭하고 있다. ‘활동’은 사회운동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지니면서도 개인적 삶의 재생산이 가능한 일을 통해 국가와 자본의 실패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 전반을 표현하게 되었다. 시민사회단체 대신 NGO, NGO 대신 NPO라는 개념을 점점더 쓰게 되는 것도 유사한 맥락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가의 등장 맥락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노동의 위기 속에서 활동이 부각 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현재 새롭게 나타나 활동을 벌이고 있는 청년 활동가 집단들은 장기화된 청년실업이라는 구조적 조건에 대응하는 청년주체들의 활동들 속에서 등장했다. 서울시와 청년유니온의 사회적 교섭 이후 서울시 청년기본조례가 제정되는 등 여러 과정을 거쳐 발전해 온 서울시 청년정책중 중요한 한 부분인 ‘뉴딜일자리’ 정책을 통해 형성된 청년활동가들이 핵심적인 사례일 것이다. 꼭 청년 범주가 아니어도 여러 중간지원조직을 포함하여 제3영역과 관련되어 늘어난 활동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관점에서의 ‘활동가’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구조적 차원의 노동 배제 혹은 소외된 노동으로의 복속’ 너머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활동’이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성은 ‘의미 있는 일’, ‘사회적 가치의 실현’, ‘대의의 추구’, ‘자아실현’ 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바람이 환상으로의 도피에 그치는 것으로 귀결 될지, 새로운 사회를 추동하는 잠재적 가능성의 현실화가 될 지는 열려 있는 문제다.  반면에 기존의 시민사회단체 상근자이건 새롭게 등장한 활동가이건 활동가들에게서 ‘노동’이라는 단어가 재소환 된다. 활동을 위해서는 신념과 열정, 헌신과 봉사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삶을 좀먹어 갔고, 그것은 점점 견디기 힘든 것이 되었다.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삶을 조금씩이라도 윤택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활동가가 아니라 ‘노동자’임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노동권을 가지고 노동법의 적용을 받는 임금 노동자로 말이다. 이들은 활동을 노동으로 인정받고자 했고 이에 따라 사회적 차원의 노동권을 보장받고자 했다. 2017년에 참여연대에 조합원 37명의 노동조합이 생겨나게 된 것이 상징적인 사례이다. 이 관점에서의 ‘노동자’ 개념은 ‘불안정한 삶에서의 불안한 자아실현’ 너머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 역시 ‘의미 있는 일’, ‘사회적 가치의 실현’, ‘대의의 추구’, ‘자아실현’를 오래도록 안정적으로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바람이 노동과 구별되는 활동을 소거하여 다른 노동들과 다름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될지, 활동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될 지는 열려 있는 문제다. ‘노동자가 아닌 활동가’, ‘활동가가 아닌 노동자’는 의외로 유사한 지향성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 활동과 노동에 대한 그간의 논의에서 활동가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내적 동기와 외적 보상 두 측면에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활동이 더 이상 하고 싶은 무언가가 아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면 그만둘 수밖에 없고, 내적 동기가 있다 하더라도 일정 이상의 외적 보상이 따라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만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닌 활동가’, ‘활동가가 아닌 노동자’, 활동과 노동 사이에서의 진동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사회적 전환을 추동하는 가치 지향의 활동들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고민 속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제기되는 활동과 노동을 포괄하는 개념들이 있다.  사회연구자 류연미는 “노동과 운동이 공존하는 행위, 환원하면 먹고 살 수 있으면서도 사회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행위, 그리고 때로는 노동이나 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소규모 공동체를 바탕으로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들”이 ‘활동’ 내지는 ‘사회적 활동’이라 규정한다. 이영롱·명수민은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라는 책에서 실무를 수행하거나 유무형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여 임금을 받는 ‘(경제적) 노동’, 사회를 바꾸려는 집합적 실천으로서의 ‘(정치적) 운동’, 가치지향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유지하거나 구축하고자 하는 ‘(사회적) 활동’이 복합되어 있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어떤 개념을 받아들이건 소외된 노동 너머 사회적 변동을 추구하는 활동이라는 지향성과 안정적인 삶의 재생산이라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결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의 인식을 대체로 공유하며 좀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활동가들이 일하고 있는 조직들은 많은 경우 활동가로 하여금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임금을 지급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다. 특히 작은 규모의 조직인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인건비를 충분히 지급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 시간 등 노동조건들이 악화되거나 개선의 여지를 가질 수 없게 된다. 명망가에 기대고 있는 경우 명망가 개인의 영향 아래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벌이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생겨날 것이다. 프로젝트이건 인건비 지원이건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다면 국가의 영향 아래에서 국가를 비판하는 활동을 자유롭게 벌이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생겨날 것이다. 조직 자체의 영리 활동 강화도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겠지만 영리 활동 자체가 ‘활동’ 없는 임노동의 강화로 이어지기 쉽다.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대답은 회원의 회비 충원을 통한 건강한 재정구조의 형성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경제와 노동의 위기 속에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쉽지 않다. 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큰 조직의 경우에는 ‘소외된 노동을 넘어서는 안정적인 활동’에 대한 고민에 집중할 수 있지만, 자원이 부족한 작은 조직의 경우에는 조직의 자원 확보라는 고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임노동과 구별되는 ‘활동’이라는 것이 강제된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임금과 노동조건이 충분하지 못한 조건에서 만약 타협을 할 수 있다면 그 대체재는 무엇일까? 활동가의 성장, 자존감과 자율성, 협력와 연대 나는 활동가의 자존감 독려와 자율성 확보, 그리고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일을 하는 조직적 실천에 활동가 개인을 동일시하라는 간접적인 사회적 가치 실현 방식은 일정 부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활동가 개개인의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다. 활동가 개인이 점점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 듯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조직의 가치와 활동가 개인의 가치 사이에서의 간극은 항상 존재한다. 활동가 개인의 가치를 실현하는 자아실현이 그 활동가의 자존감 확립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조직의 비전이 이를 위한 하나의 핵심 요소로 위치될 수 있도록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간극이 벌어지게 되면 점점 활동은 어려워진다. 벌어진 간극을 견디게 해주는 요인은 대개 높은 임금이나 좋은 노동조건이다. 문제는 이러한 간극을 좁히기 위한 매개로서의 자율성이 활동가에게 보장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합의 된 틀 내에서 활동가 개인이 자율성을 가지고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활동가 개인의 성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역량을 강화하여 전문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더 나은 활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율성은 활동가의 성장에 대한 독려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 조직의 비전과 가치에 따라 함께 활동하는 것이 활동가의 성장과 직결된다는 것을 설득하고 증명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성장이야말로 활동과 노동이 공유하는 최고의 보상 중 하나일 것이다.   간극을 좁히는 매개는 자존감과 자율성, 성장뿐만이 아니다. 조직의 구성원들의 협력체계 형성 및 연대감 형성이 필수적이다.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개인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귀결되기 쉽다. 대부분의 중요한 일은 혼자 할 수 없으며 함께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안타깝게도 다른 구성원들의 자율성에 대한 무시, 때로는 방해로 해석되어 작동하기도 한다. 때문에 주어진 조건들을 공유하는 가운데 소통을 통한 합의, 타협과 조정 등의 과정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구성원들의 협력체계와 그에 기반한 연대감이 형성되면, 그리고 그러한 틀 내에서의 자율성이 보장되면 활동가들은 제약된 물적 조건 속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물적 조건의 개선을 통한 노동조건의 개선 가능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조직의 가치나 비전 그 자체를 바꾸거나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들은 많은 경우에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실패의 가능성도 높고 고통스럽지만 끊임없이 시도되어야만 한다.   이 글은 4년 전, 2019년 4월 한 토론회에서 발표했던 글의 일부를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위성정당으로 인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좌절 이후 진보정치의 과제
선거제도 개혁은 끝없이 소환해야 할 문제의식인 것 같습니다. 최근 "국회의원 정원, 늘려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논의가 이루어지고, 4월 1일, '[해보자! 시민대토론] “국회의원 수, 늘려? 말어?” – 국회의원 적정 정수 논의를 위한 시민 패널 토론 '공론장 행사가 열리는 것을 보니, 다시 '비례대표제'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2024정치개혁공동행동'이 2월 22일에 진행한 '“선거제 개편,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야하나?” 선거법 발의안 분석 및 평가 토론회'에서도 이야기가 되었네요. (아래의 글은 2020년 총선 이후 작성했던 메모입니다.) # 연동형비례대표제의 도입은 보수양당정치체제로 인해 배제되고 몫 없는 사람들의 실질적 대의가 어려운 조건을 타개하기 위한 제도 변형의 시도였다.  #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에 의한 민주적인 다당제로 진전하고자 하는 힘은 미래통합당(현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 창당에 의한 양당정치체제의 회귀의 힘으로 인해 2020 총선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 비례위성정당에 대한 인정은 ‘우리 편이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진영론 정치’와 맞닿아 있다. # 비례위성정당의 성공은 양당정치체제로의 회귀를 의미하며,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깊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은 것이다.  # 제도정치현실주의에 입각한 선거실리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고, 이는 비례위성정당의 성립에 기여하는 동시에 소수진보정당에 여러 의미로 유해한 것이 되었다. 제도정치현실주의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인식 속에서 민주주의 제도로서의 의회, 선거 등의 범주를 정치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사회운동이나 시민참여 등은 민주주의의 외부나 부차적인 것으로, 사회구조의 변형은 이상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선거실리주의는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이 정치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관점이다. 선거실리주의는 제도정치현실주의 극단적인 한 형태인 셈이다. # 선거실리주의에서는 선거 승리가 모든 것을 정당화 한다. 내부적인 성찰은 없다. 승리와 패배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 민주주의의 훼손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연동형비례대표제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위성정당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통합당은 위성정당을 추진함으로써 반민주적인 선택을 했고, 이를 용인한 선관위 역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물론 꼼수에 대한 꼼수 대응을 한 민주당 역시 그 다음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물론 특정한 선거제도 자체가 민주주의를 항상 담보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논의의 초점은 한국의 시공간적 맥락에서 오랜 시간을 걸려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제도 변형의 정치적 실천이 선거실리주의적 진영론 정치로 인해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에 있다. # 몇몇 진보정당들의 비례위성정당에로의 참여 시도는 양당정치체제를 대체하는 제3의 대안적 가능성으로서의 독자적 정치세력이라는 자신들의 위치성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다. 당원들의 내부적 반발로 인한 내파, 혹은 동력 약화의 힘이 작동했을 것이다. 진보정당들의 위성정당에의 참여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당 차원에서의 제도정치현실주의적 압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당의 리더 및 후보들의 ‘선거실리주의’라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선거를 통한 국회의원의 당선 그 자체는 대의민주주의에의 실질적 참여를 전제로 한다면 불가피할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의 가치/정체성/방향과 대립되는 선거지상주의는 당의 근간을 흔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안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소수진보정당에게서 더욱 그러하다. 선거를 통한 당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선거 전략들은 당내의 민주적 절차를 적절하게 거쳐야만 필요불가결한 제도정치현실주의로 위치되어 힘을 얻거나, 당의 내홍을 최소화 할 수 있다. # 민주당은 양당정치체제의 보수-진보 이분법에서 자신을 진보로 위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양당과 구별되는 진보정당의 성장에 적대적이다. 진보정당이 민주진보연합의 하위 파트너일 때에만 (거짓) 자율성이 용인된다. 민주당은 제3의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이라는 싹들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지난 총선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정의당의 의원수 최소화, 다른 소수진보정당들의 존립 근거의 약화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시민사회, 몇몇 소수진보정당들의 참여 등의 외부적 조건에서 책임을 분산시키면서 선거실리주의적 경향의 실질적 발현으로서의 비례위성정당을 가능한 한 정당화시키면서 출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일정부분 명분을 얻었다는 점에서 수혜자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양당정치체제로의 실질적 회귀라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 연동형비례대표제가 도입 된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이 큰 수혜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거대 양당의 비례위성정당의 등장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례위성정당의 비참여 및 독자노선은 민주당 2중대가 아닌 제3의 대안정치세력으로서의 위치성을 확고히 하는 정당한 선택이었다. 다른 소수진보정당들이 안타깝게도 대체로 참여 노선을 지향했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선거실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승리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인해 가장 큰 수혜가 기대되는 상황에다가 제도 추진의 핵심주체였기 때문에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할 수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당이 앞으로 제3의 대안정치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민주진보연합 노선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면 실리도 명분도 얻지 못하고 이도저도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봤을 때 여전히 그런 갈팡질팡의 상황인 것 같다.   #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진동하는 층과, 진보정당들 사이에서 진동하는 진보정치 적극 지지층이라는 각기 다른 방향이 있을 것이다. 정의당의 경우에는 전자의 방향에서 민주진보연합노선을 주로 택했었다.(문재인 정부의 개혁 성공을 위해 정의당을 지지해달라는 발언이나 "민주 20 대 정의 30 비율로 전략적 정당투표 해달라"는 요청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상식’(으로 알려진 것)에 기반하여 무정형의 대중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대의민주주의적 대중정당론과 조응하는 제도정치현실주의에 입각한 선거실리주의 전략이다. 이러한 인식은 민주당과 정의당 사이에 있는 유권자들의 인식을 단일선상에 놓고 평면화 하여 단순하게 인식하는 실증주의적 관점이다. 양당정치체제에서의 선거실리주의가 현실정치의 거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된다면 이러한 부당한 도식화는 분명히 현실적으로 큰 힘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유일한 사실인 것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그 큰 힘은 사회를 거의 변화시키지 못하는 자기충족적인 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진보연합으로 종속되지 않고, 양당정치체제 내에서의 선거실리주의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피억압 대중에게 광범하게 호소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를 창안해 내는 것이 바로 진보정치의 중요한 일부이자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주의라고 평가하더라도 말이다. # 무정형의 유권자 혹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다수의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말이 된다. 다른 층위에서 적극 지지층 혹은 활동가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으로 인해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진동하는 활동가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위한 실천이 필요하다. 이는 대안적인 정치적 실천을 실제로 벌여나갈 수 있는 진보정치 정치인 및 활동가들의 임파워먼트를 의미한다.  # 양당정치체제를 넘어서는 제3의 대안정치세력으로서의 진보정당을 지향한다면, 메시지, 즉 비전과 대안,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 변화에 대한 담대한 제안들이 있어야 한다. 이는 기존의 프레임으로는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판을 새로 조직할 수 있는 ‘판갈이’, ‘무상의료! 무상급식’ 등이 상징적 사례들이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탄소중립'을 위한 ‘그린뉴딜’, LH,대장동 사례에서와 같은 개발 카르텔 문제의 해결, 젠더 문제의 해결 등을 위한 사회의 구조 및 제도 변형과 관련되어야 할 것이다.  # 독자노선은 ‘제도정치 차원에서 현실성이 없다’는 경험주의적 비판과 ‘현실노선은 변형해야 할 구조로의 종속 및 재생산 경향이 있다’는 구조주의적 비판 사이에서 ‘현실적인 독자노선’이 되어야 한다. 즉 양당정치체제와 구별되면서도 제도정치에서의 실질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를 창안하고 현실화해야 한다. 이 힘든 길이 진보정치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진보정치의 관점에서 제도정치현실주의는 선거실리주의로 환원되어 이해해서는 안 되며, ‘제도정치를 경유하여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조 및 제도의 변형을 실질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정치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현실주의 노선의 정립’으로 이해해야 한다. 제도정치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관점은 중요하지만, 사회운동과 대중운동, 시민참여의 증대,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리게 하고 임파워하는 것,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인 제3의 정치성을 제도정치화 하는 등의 정치적 실천, 즉 현실적이지 않다고 외면받고 있지만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사회운동정치/시민정치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 양당정치와 구별되는 진보정치의 중요성은 그곳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거에서의 실질적 성과는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부로 위치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실리주의는 수단이 목적으로 전도 된 것이다.
선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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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니트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방향에 대한 소고
‘니트’는 “Not currently engaged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로, 의무 교육을 끝낸 뒤에도 진학도 취직도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니트 청년은 2020년 기준 37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고 니트가 늘어나는 것은, 경제 성장이 둔화되거나 경제 위기가 발생하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 차원의 양극화 또한 중요한 원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강의 기적 속에서 유일하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 된 부국이라는 자화자찬 이면의 니트가 증가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분배 혹은 재분배’, 평등한 관계 형성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이에 더해 부동산의 소유에 의한 부의 양극화 또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분석을 하든 구조적인 문제의 급진적 변형은 ‘노사정 대타협’과 같은 큰 정치적 지형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의 차원을 넘어선다.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의 연결, 그리고 시민의 지지와 압력의 결합 등 복합적인 정치적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1)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과 모순되지 않는 관점에서 문제들을 완화하는 소극적인(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정책을 추진하거나, (2) 국가 전체 차원의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의 맹아를 보여 줄 수 적극적인/실험적인 정책들을 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실행하고자 하는 정책이 구조적 차원의 문제의 해결 방향성과 상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정책의 경우 단기적으로는 정책 대상에 도움이 되지만 구조적 차원의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서울시의 사례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사회적 경제 영역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정책들, 청년 일자리와 관련해서는 사회적 경제 영역과 밀접하게 연관된 뉴딜 일자리 사업을 실행하는 등, 구조적 차원의 문제 해결을 위한 맹아를 보여주는 실험적인 정책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면이 있다. 꼭 이 사례가 아니더라도 후자와 같은 식의 정책들에 힘을 쏟는 것은 구체적인 실천들을 모아 총체적인 정치적 비전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는 주로 양적 차원에서의 평가들과 조응하며, 후자는 질적 차원에서의 평가들과 조응한다.   성장-대량소비와 관련되는 자본-노동의 모델들이 만약에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혁명이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한계에 봉착한 것이라면(4차산업혁명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이야기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성의 공동체 사회, 욕망이 아닌 필요에 입각한 생산 및 소비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추구하거나, 사회적 경제의 발전이라는 비전에 입각하여, 공공영역에서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일련의 청년 집단들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실험이 될 수 있다. 어떻게 해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성장-대량소비라는 기준으로서의 ‘질 좋은 일자리’의 창출보다는, 사회의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노동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관점에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확보하기 쉽지 않은 더 많은 부가 일자리를 만들까? 부는 이미 많다. 부가 선순환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끝없는 경제성장은 환경을 파괴하고 그것은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자본주의 외부로 나아가 대안공동체를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방)정부의 정책에 입각하여 사회적 경제 영역의 발전시키는 차원에서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 혹은 완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자립성’이라는 기준을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다면 청년들로 하여금 또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좋은 집과 많은 소비’가 아니라 ‘함께 모여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행복’의 가능성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노동시장에서의 경쟁 완화, 청년 니트의 감소와 연관될 수 있다. 그리고 쉽지 않겠지만 그러한 가치들이 국가 차원에서의 문화 변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더욱 자립성이 높아지고 경쟁이 완화되는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공성과 대안공동체를 지향하는 방향성은 특히 ‘지역’이라는 범주와 친화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더욱 지방정부 차원에서 실험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 같다.  청년 니트는 대체로 학교와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청년으로 정의된다. 청년 니트는 헬조선에서 마상을 입고 적극적인 사회적 삶을 뒤로하고 고립에 처한 존재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들은 대체로 적극성, 주도성을 지닌 대상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쉽기 때문에 청년 니트의 ‘발굴’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이게 되는 것 같다. 돌아다니면서 강제로 끌어내지 않는 이상 ‘발굴’은 쉽지 않다. 안정된 집, 결혼 및 육아,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돈 많이 버는 직장이라는 ‘정상 루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압박은 많은 청년들을 강제로 니트로 만들어 버린다. ‘비정상’은 곧 소외이고 불행이 되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모든 청년들의 정상 루트로의 진입이라는 생각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정책 실험을 통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추진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롭게 믿고 기댈만한 것이라면, 청년 니트들이 다시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중요한 제도가 될 것이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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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정치, 당사자 운동을 넘어 대안적 사회 전환의 정치로
‘청년정치’에서 ‘청년’이 강조되는 것이 청년의 ‘당사자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암묵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는 기존의 공론의 영역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도록 해야 한다는 자발적인 주체성의 발현으로 등장한다. 이는 전문가 엘리트에 의한 대의가 충분치 않다는 조건과 관련된다. 대표적인 예로 청년당사자운동에서 청년유니온은 제도정치, 그리고 노동자를 대의하는 민주노총에서조차 청년불안정노동을 대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피자집 30분 배달제 폐지, 커피전문점 주휴수당 지급, 편의점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등 청년노동과 관련된 이슈들을 제기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뒀었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다거나 당사자가 객관적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식의 과잉된 당사자중심주의가 아니라면, 당사자의 목소리는 중요하다. 정치의 영역에서 당사자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다. 당사자는 자신이 처한 문제의 사회구조적 위치성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날것으로든 심화된 인식으로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거나 비판적인 지식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권력의 강고함,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당사자에 대한 특성, 사회구조적 위치성 등에 대해서 비당사자들이 이야기를 할 수 없거나 지지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성이 전혀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사자들을 대상화하는 것이고 동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청년팔이) 반면 당사자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자신만의 고정된 인식을 객관적 진리라고 말한다면 당사자라고 호명된 개인들의 내부에서의 차이와 다른 경험들과 의견들에 대한 무시와 배제 속에서 특정 개인, 특정 집단의 과잉대표와 권위주의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모여 공동의 인식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당사자들의 문제의식(특수성)이 더 나은 사회로의 전환의 중요한 일부임(보편성)을 설득하여 비당사자들의 지지,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열린 당사자성을 전제로 사회구조적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당사자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공동의 인식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는 '당사자 정치'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청년정치는 청년을 이용하는 정치는 아니며, 청년을 위한 정치이다. 청년을 위한 정치이긴 하지만 청년만을 위한 정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청년에 의한 정치를 포함해야만 한다. 청년에 의한 정치는 단순히 연령 차원이나 단순히 양적인 차원의 의미여서도 곤란한다. 청년정치는 청년에 의한 정치이되 청년들의 임파워먼트를 위한 정치여야 한다. 청년정치는 청년 자신들의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하되,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보편적인 문제의 일부로 위치시켜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청년만이 아닌 모두를 위해 더 나은 한국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여야 한다.
[이태원 참사 추모] 221119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지난 11월 19일 토요일 오후 5시, 녹사평역 3번 출구 인근 이태원광장에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녹사평역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같은 시간의 (숭례문부터) ) 시청역에서의 일에 대해 공유드리고자 합니다.  숭례문 앞 태평로에서는 촛불승리전환행동의 주최로 경찰 추산 3만여 명, 주최 측 추산 20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습니다.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전광훈 목사, 자유통일당 등 보수단체 주최로 주최측 추산 3만여 명이 모여 맞불집회를 개최했다. "김건희 특검, 윤석열 퇴진"과 "이재명, 문재인을 구속하라"라는 이상한(?) 이항대립의 구호가 광화문과 시청 일대를 가득 채웠습니다.(프레시안, 2022.11.19) 시청역 7번 출구 앞에서 숭례문쪽을 바라보며, 집회 분위기를 살펴봤습니다. 숭례문부터 시청까지 거의 모든 도로를 시민들이 꽉 채워 앉아 있었습니다. 저 멀리 숭례문이 보입니다. 거대한 전광판들과  엄청난 크기의 음향 기기들이 맨앞 무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목소리들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2008년 촛불, 2016년 촛불 이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모인 적은 처음일 것 같습니다. 중앙무대의 사회자의 요청에 따라 “민생파탄 정치보복 평화파괴 친일매국 윤석열 퇴진",  “주가조작 허위경력 상습사기 김건희 특검!”이 적히 피켓을 들고 정권 퇴진과 김건희 특검을 외쳤습니다. 중간중간 “퇴진이 추모다”라는 피켓도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하며, ‘피해자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촛불행동 대표의 말을 포함해서, 이태원 참사는 이 집회에서 중요하게 이야기되었습니다. 연단에서 한 시민은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의 책임이라는 것은 책임 있는 사람에게만 딱딱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참사 당일 평화롭기 그지없었던 집회에 경찰을 총동원해서 감시했다”며, “경찰이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또 한 시민은 “그날의 참상은 어느 집 자식이었더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한겨레. 2022.11.19) 10차 이상 이어져 온 퇴진운동의 분위기가 이미 무르익었던 것인지, 이태원 참사가 퇴진행동의 급격한 확산에 핵심 계기로 작동했는지 딱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아마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대응은 정권 퇴진 운동으로 환원 되느냐, 그와 구별되는 구체적 대응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지느냐의 물음에 직면한 듯 보입니다. 정부의 책임을 지적하며 퇴진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퇴진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이 이태원 참사의 대응에 함께 연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도 절대 아닙니다. 퇴진운동의 이태원 참사에 대한 연대는, 오히려 꼭 필요한 고마운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입니다. 다만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응이 퇴진을 위한 땔깜으로 소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이태원 참사의 원인이 규명되고 책임자가 처벌되고, 사회적으로 기억되고, 대응체계가 마련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 유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시간 반 전 녹사평역 3번 출구 인근으로 되돌아 가보겠습니다.   이태원 광장 맞은 편, 언덕에 추모 플래카드가 걸려 있네요.  참여연대 주최로 ‘10.29 이태원 참사 시민추모촛불'이 열렸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참여연대 홈페이지)  어둠이 내리기 전, 시민추모촛불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추모촛불'은 “성역없는 진상규명. 책임자를 처벌하라”, “이태원참사, 국가 책임이다. 재발방지 대책 마련하라”를 핵심 구호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발언들이 이어지고, 추모 공연이 이어지는 사이에 어둠이 내렸습니다. "참사가 정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사이, '추모하겠다' 이야기하며 마음을 나눠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박성현 4.16재단 나눔사업1팀 팀장의 발언이 숭례문 퇴진행동과 떨어져 작게나마 이루어지는 추모촛불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파하는 분들의 마음을 보듬고, 2차 가해를 막고, 피해자의 마음으로 접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158명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이태원의 주민들, 현장에서 대처한 소방관과 경찰관, 참사의 생존자들까지도 어떤면에서 피해자라는 이야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날 집회는 이태원 참사 당일 112에 첫 신고 전화가 접수된 시간인 '6시 34분'에 촛불을 일시 소등하며 끝났습니다.(프레시안. 2022.11.19) 3일 후, 2022년 11월 22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 입장발표’ 기자회견이 이루어졌습니다. 흐느낌과 절규 속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유족의 메세지와 정부의 대응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상세한 내용은 기자회견 전체 영상 확인) 이날 유족들은 6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하였습니다.(한겨레, 2022.11.22) 참사 책임이 정부·지자체·경찰에게 있다는 정부 입장 발표 및 대통령의 진정한 사과 성역 없는 책임 규명 피해자 참여를 보장하는 진상 규명 참사 피해자의 소통 보장, 인도적 조치 등 적극적 지원 희생자에 대한 기억과 추모를 위한 조처 2차 가해 방지를 위한 정부의 공식 입장 표명 및 구체적 대책 마련 책임 규명과 사회적 기억·추모,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피해당사자의 참여 보장에 대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나온 셈입니다. 퇴진행동을 주도 해 온 ‘촛불행동'에서는 “10.29 참사 유가족 대책본부를 꾸리”자며, “유가족분들의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제안한 상황입니다.(촛불행동 페북 페이지) 숭례문의 20만 퇴진행동 가운데에 이루어진 녹사평의 100명의 시민추모촛불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퇴진 구호로 환원되지 않는 이태원 참사의 원인·책임 규명 및 사회적 기억·추모, 안전사회를 위한 대안 체계의 마련 등이 이제 가시화 된 피해자·유족 당사자의 직접적·주도적 참여와 함께 이어져 가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는 퇴진행동 참가자들의 이태원 참사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마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대가 잘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녹사평역 옆 이태원 광장에서 숭례문으로 이동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며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역 방향의 길을 봅니다. 불은 밝지만 쓸쓸한 느낌이 듭니다. 221105 [이태원 참사 추모]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221112 [이태원 참사 추모]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9 [이태원 참사 추모]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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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추모] 221117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7 수정 보완) 지난 11월 12일 토요일 오후 5시,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생각이 듭니다. 일단 현장 사진부터 공유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여 있었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비가 마구 쏟아져도 많은 분들이 집회에 함께 하셨습니다. 옅은 어둠과 전광판 빛과 비가 현장을 사이버펑크틱(?)하게 만들어주고 있네요.    삼각지역 바로 옆 도로 한 차선을 시민들이 길게 채우고 있고, 대형 전광판이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는 광경이 이색적이었습니다. 좁은 길에 길게 모여 집회를 할 경우, 맨앞의 무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아 답답할 수 있는데, 대형 전광판과 음향시설을 통해 모든 분들이 집회에 좀더 집중해서 참여 할 수 있도록 준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각지역 옆은 동시에 대통령 집무실 인근 도로인 셈인데, 표지판에 바로 옆이 이태원역이라고 적혀 있는 모습이, 이번 참사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뉴스타파의 기사(영상) ‘참사 그 날의 경찰, 이태원보다 대통령실이 중요했던 이유’에 보면, 용산경찰서가 참사 현장 인근의 대통령실 집무실 경호에만 집중했던 것이 참사가 벌어지도록 한원 원인을 이루는 중요한 요인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퇴진이 추모다’, ‘퇴진이 평화다' 구호가 적힌 피켓들이 눈 앞의 광경을 가득 채웁니다. 지난 11월 5일 집회에서는 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에 집중했는데요, 11월 7일 집회에서는 ‘퇴진' 구호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중고생들도 참여하여 맨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같은 날 광화문에서 정권 퇴진 집회를 하고 왔다고 하네요.  집회 맨 앞 무대의 플래카드에는 “이태원 참사 책임자 처벌! 윤석열 퇴진! 14차 촛불대행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촛불행동’에서 주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핵심 구호는 "퇴진이 추모다"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의 큰 집회는 두 번째인데, ‘14차'라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태원 참사 전부터 정권 퇴진을 외치는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고, 참사 이후 11월 5일에는 추모에 집중하는 집회로 변경하여 진행하였고(퇴진 구호 자제), 이 날에는 다시 전면에 ‘퇴진’을 내건 것으로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에 정부 차원의 책임이 있다는 점이 점점 드러나고 있지만, '이태원 참사 이후의 대응이 당장 퇴진 구호로 이어져야 하는 것인지', '기존의 퇴진 집회에 이태원 참사가 힘을 보태는 수단으로 환원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와 같은 생각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현장에서의 느낌으로는 그랬습니다. ‘퇴진이 추모다'라는 간명한 핵심 구호는 '본질을 꿰뚫는 힘의 발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태원 참사과 관련된 수많은 목소리들과 필요한 논의들을 사상시키고 정권 퇴진으로 환원하는 중심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다만 글을 쓰는 시점에서 촛불행동 페이스북 페이지에 들어가보니, “김건희 특검! 윤석열 퇴진! 11월 전국집중촛불”이라는 이름으로 11월 19일 시청역 인근에서 ‘15차 촛불대행진’을 진행한다고 하네요. 정권 퇴진을 위해 이루어지던 연속 집회 진행 과정에서 13, 14차가 이태원 참사 관련 이슈를 다룬 것으로 봐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권 퇴진을 위해 행동하시던 분들이,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분들을 위해 잠시 자원을 들이고 시간을 내어 행동해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고, 또 새롭게 벌어지게 될 지, 그리고 그 행동의 방향이 어떠 할 지 궁금해집니다. '10.29 이태원참사 청년추모행동'이 매주 목요일 저녁 6시34분, 이태원역에서 침묵시위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이 글이 쓰여진 바로 다음 일정은 11월 17일 목요일 오후 6시 34분일 것 같습니다. 여러 정당의 청년들, 그리고 청년단체들이 모여서 진행하는 이 행동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정부, 그리고 정치가 그 일에 소흘하거나 잘못된 대처를 한다면 시민들이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하여 신경 써야 할 부분, 논의되고 있는 부분들 중 몇 가지를 공유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이슈와 관련하여 생각할 거리들을 옅볼 수 있는 기사 링크를 덧붙입니다. 무엇보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규명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관련 기사 링크)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할 때, 그 책임의 범위와 성격 등이 확인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선 현장의 실무자에게만 과하게 책임을 묻고 있다는 비판 속에서 대통령실, 행정안전부, 서울시 등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관련 기사 링크 1, 2) '민들레'와 '더탐사'라는 매체가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는데, 유족에 동의를 구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공개가 맞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누가 논의해서 해야 했던 것인지, 언론이 지켜야 할 윤리를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닌지 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관련 기사 링크) 참사로 인한 '사회적 트라우마'는 어떻게 극복하고, 참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은 어떻게 남겨야 하는 걸까요? 이와 관련한 논의도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참사를 '이태원 참사'로 불러야 할 지, '10.29 참사'로 불러야 할지에 대한 논쟁도 이와 관련이 있는 핵심 이슈중 하나일 것입니다.(관련 기사 링크 1, 2)   우리가 현재 항상 위험 여부를 신경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위험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면, ‘안전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인 대안 마련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관련 기사 링크 1, 2)   우리가 '10.29 이태원 참사'에 관심을 기울여,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게 하고, 사회적 트라우마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대응하고, 사회적 기억으로 잘 남길 수 있도록 조치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시민덕성을 함양하고, 그와 관련된 정부 차원의 안전을 위한 대안적인 체계를 마련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221105 [이태원 참사 추모]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221112 [이태원 참사 추모]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9 [이태원 참사 추모]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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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추모] 221105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지난 11월 5일 토요일,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추모중이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국화꽃으로 추모의 마음을, 포스트잇 글로 추모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해밀턴호텔 옆의 좁은 골목 참사 현장은 추모를 위해 찾은 시민들에게 황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고 위험한 곳에 왜 갔냐', '참사를 정치화 하지말라', '국가 책임으로 돌리지 말라', '추모만 하라' 등의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안부, 경찰청, 용산구청 등 관계 기관에 참사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특히 참사 발생 4시간도 전부터 신고가 계속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예방과 대비 차원에서의 미비함을 넘어 실시간으로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합니다.(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신 이태원파출소 경찰분들이나 출동한 소방서 대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압사당할 듯.. 너무 소름 끼쳐요".. 4시간 전부터 112신고 녹취록 파문 (2022.11.1/ MBC) [자막뉴스] "이태원 소장입니다 지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답변은 없었다 (MBC뉴스) ‘극도 혼잡’ 대응 매뉴얼 법에 있었다…‘유명무실’ 지적 [9시 뉴스] / KBS 2022.11.01. "책임론 정국, 초침은 간다"…이상민, 참사 나흘째 '사과' / JTBC 정치부회의 [단독] "인파 몰려 사고 우려" 일선 경찰서의 보고…왜 누락됐나 / SBS [이태원 참사] 용산구, 대비 적절했나…2차례 회의서 인원 대책 빠져 [단독] 보고서 삭제 지시 거부하자 다른 직원 시켜 삭제 / SBS [자막뉴스] 119로 온 한 통의 전화...발표와는 달랐던 참사 당일 / YTN 압사할 때, 경찰은 불과 5㎞ 거리에 줄지어 있었다 전 용산서장·구청장 등 6명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 입건 / KBS 2022.11.07. [자막뉴스] "작성 자체를..." 용산경찰서 내부서 수상한 정황 포착 / YTN 참사 희생자의 대부분은 청년들이었습니다. 17개 청년단체가 함께 하는 '이태원참사 청년 추모행동(준)은 “6시 34분, 우리에게 국가는 없었다”며 '이태원 참사 청년 추모행진: 국화행진'을 진행하며 추모하고 애도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이태원 참사가 국가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참사'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가가 그 책임을 충분히 지지 않으려 한다면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번 참사를 당사자의 문제로 여긴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애도기간 마지막 날 '추모 물결'…청년들 침묵 행진 / JTBC 뉴스룸   같은 날 11월 5일 오후 5시부터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 주최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시민 촛불집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집회에는 종교계, 참사 현장 목격자, 세월호 참사 유족 등이 참석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 퇴진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희생자 추모를 주 목적으로 하여 진행되었고, 참사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였습니다.(2022.11.5 한겨레)  [영상] “다시는 불행한 가족 만들지 않겠다고…” 촛불의 눈물 참사가 벌어지고, 그것이 정부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참사'로 드러날 경우,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원인과 관련된 책임을 지우도록 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안전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를 강제하기 위한 시민들의 참여, 즉 직접행동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충분히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어느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이어질테고, 2022년 11월 5일은 그 출발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21105 [이태원 참사 추모]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다녀 왔습니다. 221112 [이태원 참사 추모] 삼각지역 1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 221119 [이태원 참사 추모] 녹사평역 3번 출구에 다녀왔습니다.(그리고 시청역 7번 출구)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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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자살: 희망 없이 절망하는 자들의 죽음. 배제당하거나 착취당하거나.
청년의 자살: 희망 없이 절망하는 자들의 죽음. 배제당하거나 착취당하거나.   “‘청년 노조’ 같은 저항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봉건시대의 부르주아나 산업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그런 건 없어. 우리에게 사회의 X같음을 고발할 방법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뿐이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바로 그 직후의 자살이어야만 해.” 소설 <표백>에서 혁명, 변혁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이념 없이 원자화되어서, 실패는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표백세대’로 명명된 청년들 중 한 명이 했음직한 말을 재구성해 본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걸까? 일단 현대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 청년들이 피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출발하려 한다.   몇 년째 2,30대 젊은 층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2011년 기준으로 20대 사망자 중 40% 이상이 자살로 죽었고, 이는 2위 운수사고(15%), 3위 암(10%)를 합친 것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20대의 7.5%가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심지어 최근 경남에서의 조사에서는 10명 중 3명이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아는 ‘진리’처럼 되버렸지만 OECD 국가들 중 1위이다. “일정한 집단군의 자살행렬”이 “사회가 처한 재생산의 위기와 삶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김명희, 2012)이라면, 청년이 흔히 공동체(그렇게 부를만한 뭔가가 있다면!)의 ‘미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청년의 자살은 사회의 위기의 핵심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의 죽음은 사회의 위기이고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통계청 2010년 분석에 따르면 자살 충동 및 이유는 1위 경제적 어려움 30%, 2위 외로움과 고독, 3위 직장문제, 4위 가정불화이다. 청년의 자살 관련 기사들에서 제시하는 자살의 원인들을 단순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경제위기(로 인한 어려움), 높은 등록금과 그로 인한 학자금 대출, 생활고, 아르바이트, 취업 스트레스, 우울증.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원인들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경제위기는 가장 사회의 기초에 근접한 일반적으로 구조적인 조건이라면, 등록금, 학자금 대출, 아르바이트, 실업은 경제위기와 높은 연관이 있는 한국사회의 청년들의 특수한 제도적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고는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고 표현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이러한 조건들로 인해 나타나거나 강화되는 개인들의 심리의 차원에서의 문제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구조적 조건들 하에서는 안정된 일자리로의 취업이나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성공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낙담과 좌절, 죄책감, 불안을 높이며 결국 우울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계점으로의 도달로서의 절망의 표현이 자살인 셈이다. “더 이상 희망도 꿈도 없어. 용서해. 차라리 살아있는 고통보다 죽는 것이 편할 것 같아.” 여러 명이서 함께 동반자살한 청년들 중 한 명이 유서에 남긴 말이다.   흔히 이루어지는 사회구조 분석을 간략하게 서술해보겠다. 급격한 경제적 변동이 중요한 요인이며 높은 실업률과 비정규직 증가는 현 시대의 경제 위기로 인한 결과이면서 자살률을 높이는 조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1997년 IMF사태 이후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청년층의 자살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즉 추상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경제구조가 자살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청년세대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강화로 인해 더욱 공고화된다. 직업, 보수 등 물질이 행복의 척도가 되고, 무한경쟁/적자생존 논리가 전면화 됨으로 인해 현 시대의 청년은 경쟁에서의 승리와 자아실현을 동일시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청년백수나 비정규직은 패배자, 즉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히게 된다. 경제위기의 사회적 위험에 처했을 때 벗어날 수 있 대안은 부재한다. 그것은 한낱 개인의 노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안의 부재에 대한 ‘인식’은 자살의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뒤르켐식으로 재구성하면 산업사회의 시장의 무정부성, 즉 시장실패로 인한 적절한 도덕적 규제가 부재하는 아노미적 상황으로 보고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 늘어난다고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기적 자살은 “집합적 활동의 결합에 따른 의미 상실”로써 통합이 불충분하여 인간이 존재 근거를 찾지 못하는 것이며,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의 열망에 대한 규제의 결함”으로써 사회 통제의 부재에서 발생한다(김명희, 2012). 이러한 통찰이 뒤르켐이 근대 초기 자유방임주의의 모순을 포착한 것이라 본다면 현대의 신자유주의 또한 일정정도 공통점을 지닌다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자화된 개인들의 연대-없음은 아노미 상황이라는 식의 단순한 등식은 뭔가 께름칙하다.   청년이라는 관점에서 청년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더 파헤쳐 보자. 한국사회 청년들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핵심이 사회적 성공으로서의 번듯한 직장으로의 ‘취업’이라는 점에서 이를 기준으로 하여 청년들이 어떻게 서열화 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청년이 성인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수능으로 상징되는 무한경쟁 교육 시스템에서 또래 청(소)년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혹은 패배하여 대학을 기준으로 그 틀 안에서 서열화 된다. sky-인서울대학교-지방국립대-지잡대-전문대-고졸 따위의 기준들. 대학에 가서 스펙으로 상징되는 무한경쟁 시스템에서 또래 청년들과의 경쟁에서 승리 혹은 패배하여 직장을 기준으로 서열화 된다. 백수-취업준비생-알바-비정규직-정규직-대기업 정규직 따위의 기준들. 이러한 기준들은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청년들의 현실적 서열화를 표현해주고 있다. 서열화의 최하층에 위치하게 되면 대부분 삶의 재생산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서의 서열 기준의 최상층에 위치하더라도 만족하기 어렵다. 인간은 끝없는 욕망을 가진 존재라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희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 청년이라는 집단 전체가 배제된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이라는 정체성이 처해진 조건으로 인해 상당수의 청년들이 청년이란 이유로 배제된 자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고, 이는 연대의 부재, 혹은 연대의 파열을 의미한다. 세분화된 서열화는 이러한 파편화의 경향을 강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보자.   *청년 1: 2011년 12월 12일 공무원 시험에 여러번 떨어진 취업준비생이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 *청년 2: 2011년 12월 11일 항공사 승무원 입사 실패 후 옷 매장 차렸으나 경영이 잘 되지 않아 자살 *청년 3: 2013년 초 120만원 월급 받는 직장을 구함으로 인해 기초생활수급자격을 잃어 알콜 중독증 어머니 치료비와 고등학생 동생 학비를 지원 받지 못하게 되고 고령의 할머니를 포함하여 네 가족이 살던 국민임대아파트에서도 쫓겨나게 되자 자살을 시도했다. 이러한 상황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all or nothing’ 식의 복지제도의 한계 *청년 4: 2013년 편의점주 1월 15일 자살. 1997년 IMF 때 부도 맞은 아버지가 1억의 빚을 남기고 떠남. 아르바이트. 삼성중공업 비정규직 1년, 삼성중공업 협력업체 계약직 2년, 정리해고 때 퇴사. 취업 안 됨. 아파트 담보로 편의점 점주 됨. 집 담보로 3000만원 빌려 시작. 본사 납입금, 일매출 송금제, 계약 해지 통보 등의 압박 속에서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자살  *청년 5: 2010년 1월 대기업 삼성전자에 들어갔다. 근로계약서에는 8시간 3교대, 주 5일 근무로 되어있었지만 실제로는 12~14시간 근무, 2교대였고 설비 이상시 20페이지 리포트 써내라는 지시도 있었다. 피부염이 생겼고 우울증이 진단을 받았다. 2011년 1월 결국 기숙사에서 자살. 며칠전 여직원 자살. 자살이 더 있었으나 쉬쉬했다는 증언 있음. *청년 6: 2013년 3월 19일 자살. 37세 울산시 중구 9급 사회복지직 공무원은 빠르면 밤 11시, 늦으면 새벽 2시에 퇴근했고 주말에도 나와 일했다. 최근 2주간은 아내와 자녀와 같이 지내지 못하고 본가에서 출퇴근. 1월 31일 용인에서도 29세 사회복지직 공무원 자살, 2월 26일 성남에서 32세 사회복지직 공무원 자살. “두 명의 자살을 약하고 못나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진심을 보여주고 싶다”고 유서에 씀. 청년 1과 2는 취업에 실패했다. 청년 3은 취업했으나 그것으로 인해 제도가 그의 삶의 재생산을 불가능하도록 조건지었다. 청년 4는 불안정한 취업에서 밀려나 재진입에 실패하고 편의점 점주가 되나 불공정한 룰에 고통 받다가 자살했다. 청년 5와 6은 각각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으로 취업했으나 살인적인 노동 강도 속에서 고통 받다가 자살했다. 청년 1~6의 배치는 대체로 앞서의 서열화에 조응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서열의 층위에서 청년들의 자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취업이라는 기준에서 서열화에 양적/질적 차이가 있더라도 ‘공통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점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은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되고 있다. 그렇다고 청년들을 자살로 이끄는 원인으로서의 ‘공통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청년들의 자살은 어떻게 유형화 할 수 있는가?   뒤르켐은 자살의 성질이 아닌 원인을 통해 자살을 분류하였다. 이들을 자살로 몬 것은 뒤르켐에 따르면 강제적이고 외재적인 어떤 사회적 사실일 것이다. 이들을 자살로 몬 사회구조적 원인은 ‘강제된 분업’이다. 강제된 분업이란 “적절한 도덕적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들 사이의 계약관계는 강압적 권력의 강요나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김명희, 2012). 뒤르켐은 강제된 분업에 의한 자살을 ‘숙명론적 자살’이라 한다. 뒤르켐은 이를 “지나친 규제로 인한 자살이며, 강압적인 규율에 의해서 미래가 무자비하게 제한되고, 욕망이 난폭하게 제압되는 사람들에 의한 자살”로 정의하고 “육체적 및 정신적 압제로 인한 모든 자살”이 이에 속한다고 언급했다. 김명희는 뒤르켐이 아노미적 분업에 의한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만을 근대사회의 지배적 자살로 여긴 것을 비판하며 과도한 규제가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내재하고 사회의 아노미와 함께 작동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숙명론적 자살은 착취적 구조와 제도적 규범의 억압에 대해 종속된 정신적 상태, 즉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의 박탈과 관련이 있다. 또한 숙명론적 자살은 전쟁이나 고문 등 불가항력적 규율로의 속박 상태와 물리적 강제를 수반하지 않는 ‘경제적 강제’로 구분할 수 있다. 김명희는 이러한 관점에서 군대에서의 자살, 쌍용차 노동자의 자살, 매향리와 강정마을 주민의 자살, 가족동반자살 등, 한국사회에서의 일련의 자살들을 정치를 전쟁하듯 운영하는 ‘전쟁정치’에 대한 대응이나 비규제적 시장화의 폭력성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숙명론적 자살인 것으로 분석한다(김명희, 2012).   이러한 관점에서 청년들의 자살은 ‘경제적 강제’로 인한 숙명론적 자살, 비규제적 시장화의 폭력성에 의한 숙명론적 자살로 위치지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학벌과 직업적 서열화들의 고착화와 그 틀로의 진입 자체의 어려움의 고착화가 강제된 분업이고 경제적 강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청년들에게는 이중의 어려움이 있다. 진입 자체의 어려움과 내부의 피할 수 없는 서열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배제되는 자들과 서열화 되어 착취당하는 자들의 차이일 따름이다. 이중의 치킨 게임인 셈이다. 또한 이는 청년들의 자살의 원인이 청년들의 개인적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는 경제사회구조와 청년들과 관련된 특정 제도들 즉 과도한 등록금, 비정규직, 실업의 구조화 등에 있다는 앞서의 설명과도 일관된다. 흔히 지적되는 우울증은 그것의 개인적 표현일 뿐이며, 그것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자살의 책임을 개인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 위기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문제가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청년들을 둘러싸고 ‘강제된 분업’, 잘못된 규제와 규율을 바꾸어 적절한 도덕적 통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뒤르켐이 상정했던 초기 산업사회/자본주의의 도덕적 통제의 부재가 많은 변화를 거쳐 오면서 현대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통제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적절한’ 도덕적 통제의 규제 대신 거짓 자유의 고착화로 인한 비자유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제의 고착화 내지는 전면화로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의 청년들에게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은 내면화되어 전면화 되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자본주의 국가 자체가 강제된 분업을 필연적으로 필요로 하고, 심지어 그것을 핵심적인 동학으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함의한다. 경제적 자유를 내세우며 국가의 최소화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강력한 국가에 대한 의존은 많이 알려져 있는 바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를 위해 많은 것을 노동 유연화, 민영화 등등의 이름으로 특정한 분업 형태를 강제한다. 한국 사회의 청년들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형태의 시민의 죽음, 사회의 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다시 청년에게로 돌아 가보자.   한국사회의 청년에게 ‘취업’은 삶 (재)생산에 핵심적 요소일 수밖에 없다. 청년이 ‘배제’되었다거나, ‘자리 없다’고 할 때 그 기준은 일단 취업과 관련된다. 누군가의 언급처럼 노인을 ‘자리 없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면, 노인은 자리를 이미 차지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실감’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청년은 자리를 차지해야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삶 그 자체’의 차원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자리는 부족하고 있는 자리들도 앉으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부실한 것들이 많다. 많은 청년들의 삶은 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것의 극단적인 표현이 ‘자살’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청년들은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그리고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 청년 6의 유언 중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나는 인간이기에, 뜨거운 피와 따뜻한 삶이 도는 하나의 인격체이기에 최소한의 존중과 대우를 원하는 것이다. 공공조직의 제일 말단에서 온갖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 하는 일개 부속품으로서 하루하루를 견딘다는 건 머리 일곱 개 달린 괴물과의 사투보다 더 치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