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다시 만날 세계
12/22 한남동 대통령 관저 부근, 집회 막바지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따라 불렀다. 가사를 흥얼거리다 집회의 순간을 정리해보았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 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중략)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가사 중 12/21일 동짓날 남태령. 그 곳에서 긴 밤 지새운 이들을 떠올린다. 영하 6도, 사방에 어둠으로 가득하고 경찰차 바리케이트가 쳐진 날이다. 이 곳에 고립된 시민들은 날이 밝기까지 긴 밤을 지샜다. 이대로 꼼짝없이 고립되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찰나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일제히 남태령고개로 넘어와 집회에 자리했다. 28시간 뒤, 물러나지 않을 것 같던 경찰차 바리케이트는 시민들의 힘으로 물러갔다. 동학농민이 넘지 못한 우금치를 후대가 넘은 순간이자 시민들의 승리를 눈으로 목도한 순간이기도 하다. 트랙터를 몬 농민들은 남태령을 지나 대통령 관저 부근 한남동으로 향했다. 시민들의 호위와 응원을 받으며 끝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광장에 모인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농민, 동물권, 장애인, 어린이, 참사유가족, 노인 등. 다시 만날 세계를 만나기까지 가사처럼 숱한 슬픔을 지나온 이들이다. 윤석열 정부 이후 이들이 나아갈 미래의 벽은 막막하여 빛을 볼 수 없었다. 지나가지 않을 깊은 어둠을 마주했다. 그보다 차가운 현실정치의 냉담함을 오롯이 홀몸으로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아랑곳않고 함께 연대했다. 먹을 것으로, 발언으로, 후원으로, 손난로로, 자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서로를 돌보았다. 보이지 않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추위는 견딜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촛불을 넘어 꺼지지 않는 LED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추위에 아랑곳 않고 다시 광장에 모였다. 아니 모인 곳 어디든 광장이 되어 계엄령으로 무너진 민주주의의 본질을 회복했다.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고개 그리고 한남동 관저 어디든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목소리 외쳤다.  산 자는 죽은 자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내는 이들이다. 산 자는 목격한 이들이고 역사를 만들어간다.  불평등에 억눌린 여성들의 분노와 연대를. 성소수자가 섰던 시청광장을 극우개신교에게 내어주며 차별을 보인 서울시청의 폭력을. 20년 넘는 시간동안 이동권 투쟁을 하며 변화의 물결을 이어오던 전장연을. 세월호 폭우로 숨진 세 모녀를 이태원과 아리셀 그리고 채상병 등 참사를 겪은 유족들에게 사과없이 거부권을 남발한 채 등한시하던 윤석열의 타자화를. 서울로 넘어오던 농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찰들을. 기후위기의 악당이 되었음에도 이를 등한시하던 정부의 소홀함을 산 자는 광장을 통해 목격하고 역사를 이어나갔다. 나 역시 이들을 보며 지역농민들의 목소리에 소홀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물, 전기, 가스를 비롯농산물 등 지역의 자원을 착취하는 서울 중심주의를 돌아보고, 이주노동자와 원주민의 문화나 언어 차이에 이질감에 불쾌를 표하던 때를 반성하게 된다. 어쩌면 변화는 나와 나를 마주한 세계를 돌아볼 때 출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옆에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응원봉을 들고 다만세를 따라부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50대가 20대였던 시절에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금의 20대가 따라 부르고 20대를 지나 50대가 된 이들이 응원봉을 들고 다만세를 따라 부르는 모습은 생경하면서도 이미 다시 만난 세계에 접어든 것 같았다.  나이에 권위를 부여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이로만 여겼던 중년도 변화의 물결에 따라가고 있음을 보았다. 작은 변화는 아주 가까이서 일어나고 있었다. 광장은 다시의 장이겠다.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세대의 벽이 허물어지고, 의제를 만나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잃었던 기회를 얻고 광장에서 ‘다시‘ 만난 이들 은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엄혹한 사회의 전언을 부수고 다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고로 이 시대에 광장이 꼭 필요하다. 기회를 잃은 이들이 다시 기회를 갖고 발언하기 위해, 연대하기 위해선 광장이 필요하다. 단, 그저 광장에 있었다는 만족감에 머물러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이 자리에 내려오고 차기 대선 후보가 대통령 자리에 앉았을지라도 세상은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8년 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이후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의 민주주의의 괴리가 일어났다. 탄핵에 쏠려 정치,경제,노동, 기후위기,이주노동자, 어린이, 여성,소수자 등의 의제가 일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광장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수 천명이 모이지 않아도, 꼭 물리적 광장이 아닐지라도 적은 수로나 온라인에서도 광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님을 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기에 우린 가능성을 염두한다. 가능성이란 빈 틈으로 의견을 주고받고 틈을 메우는 시도가 광장에서 이뤄지기에. 감정적인 혐오를 지양하고 오늘날 집회에서 낸 목소리를 더욱 의제로 빌드-업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시민들의 관심과 목소리를 내려는 동력이 필요한 이유다. 아울러 다시 만난 세계는 앞으로 다시 만날 세계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은 다시 만날 세계가 다시 절망으로 빠지지 않도록, 시민은 지금도 변화한다는 사실을 염두하며 상처입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길 바란다.  우리는 탄핵 이후의 삶을 그려야 할 것이다. 희미한 빛을 쫓아가 기회는 자신이 품은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때 마주할 때 생긴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10/17) 후기 with 고통 구경하는 사회
*후기를 작성하다가 제게 많은 영향을 준 책 『고통 구경하는 사회』(김인정 저, 웨일북,2023)가 생각났습니다.  이 책을 토대로 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 후기와 언론의 역할과 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되짚는 방향으로 후기를 맺고자 합니다. 모두에게 초면인 고통 10.29 이태원 참사(이하 ‘이태원 참사’)는 인재였다. 복합적인 요인이 엮였다. 경찰의 통제가 미미했고, 희생자 중 외국인들도 있어 외교 문제도 얽혀있다. 하지만 책임자의 부재, 미흡한 대처로 인한 참사의 확대는 책임자에게 있다는 사실은 변함 없다. 그러나 이 곳에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한 이들은 참사 당일까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코로나를 제외한 시기에 으레 이태원은 할로윈 행사로 북적거렸으며 더러는 민페와 부정적인 시선을 지닌 채 기피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의 ‘상민’ 님이 발제를 했을 때, 저마다의 기억하는 이태원의 모습은 달랐음을 보았다. 이주민의 입장에서  상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음악가가 기억하는 이태원은 너무 달랐다. 포용과 환대의 공간(이주민) 할로윈 주만 되면 길거리에 고주망태되는 이들과 버려지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애증의 공간(상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날 한 시에 참사가 빚어졌다. 더러는 이태원에 간 이들에게 손찌검했다. ‘놀다 죽은 이들’ 이라며 죽은 이들을 쉽게 조롱했다.  이태원 희생자들을 두고 ‘놀다 죽은 이들’, ‘민폐’ 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뭘까. 혐오 장치가 강화된 이유를 최성용 사회연구자의 발제에서 알 수 있었다. 자의적 기준으로 희생자들을 푸코의 이론을 빌려 죽게 내버려두었다. 국가 및 행정기관은 책임을 지지 않았고, 이태원 참사를 ‘사고’로 축소시켰다. 이태원이라는 평소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긴 단어에 풍속이라는 자의적 기준으로 이들을 ‘놀다 죽었다’ 로 타자화 했다. 놀다 죽었건, 혹은 그러지 않았건. 이미 비극은 일어났다.  2023년 기준 1㎢당 15,533명(출처:지표누리) 의 빽빽한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서울은 어딜가더라도 사람에 둘러싸여 피로하지 않던가. 특히 행사가 몰리는 연말이나 할로윈같은 특별한 날엔 타지역에서 서울로 인파가 몰려 그 밀도는 배가 될 것임을 모를 이는 없을 터.  10만 명 인파가 몰릴 것도 예측했지만 참사 당일 경찰 배치 및 인력도 137명에 그쳤다. 경찰이나 용산시는 충분히 인원 예측을 했고 그에 따른 인력 배치와 전략도 예상 했다. 그런데 결과는? 대응에 실패했다. 사전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왜 2022년에 참사가 빚어졌느냐는 의문이다. 이태원이 유흥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어도 해마다 이태원 할로윈 행사를 열었고 죽어서 돌아간 이는 없었다. 그런데 2022년 10월 29일 저녁, 서울 한복판 길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왜? (심지어 희생자들 중에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집계되지 못한 분들도 계신다) 개인은 무얼 할 수 있나요? 뚜렷한 답은 없지만 죄책감에 매몰되어선 안된다. 29쪽 저널리즘은 목격 자체를 전달한다. 사진과 영상은 때로 너무나 직접적이라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하여 보는 사람을 목격자의 자리로 끌어온다. 행동을 촉구하는 한편 그에 따른 죄의식이나 부채 의식, 때론 지켜보는 우리는 무고한 사람이라는 면죄부 역시 함께 전달하거나 위임한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참사 당일 언론 보도는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들도 이 상황은 초면이어서 그랬던 걸까. 언론사는 SNS에 올라온 참사 사진과 영상은 2차 가해와 트라우마를 야기할 수 있어 올리는 것을 지양했다. 그게 옳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희생자를 영상과 사진을 통해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유족들의 증언이 맞물리며 보도 윤리를 고민하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참사 이후, 정부의 소극적인 대책에 사람들이 진상 규명을 촉구하라고 했을 때다. 증거가 없어 진상규명이 어려웠고 정부를 설득할 힘을 잃고 견제할 수도 없었다. 이를 두고 이태원 참사 미규명 진실을 다룬 뉴스타파 홍주환 기자는 ‘공공의 목적 달성과 피해자에 대한 위로나 애도가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고 말한다.  공공의 목적을 위해 보도한 것이 과연 모두를 위할 수 있나, 불가능한 영역 아닐까. 보도 윤리라는 모호한 정의에 보도는 축소되고 진상규명 역시 어려웠다. 특별법과 진상규명을 유족들이 원하지만, 정부를 압박할 증거자료가 부족하다. 연례 행사처럼 추모하고 기억하자고 말하지만 자칫 막연한 감정에 그쳐버릴 수 있다. 그 사이에 놓인 개인은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위 책 37쪽) 던 존 버거의 말을 상기한다. 참사 앞에서 ‘무얼 할 수 있나요?’ 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꺼냈어도 뚜렷한 답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은 개인의 경험 테두리 안에서 지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참사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기 힘든 이유   1.본질을 잊어버린 보도 15쪽 머뭇거림으로 가득 찬 취재였지만 ,일단 인터뷰와 화면을 확보한 다음부터는 모든 게 다급했다. 모든 주요 방송사가 관련 뉴스 특보를 경쟁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무엇을 가릴지에 대해 논의를 하기도 전에 앞다투어 보도하기 바빴다. 결과적으로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미디어에 노출되었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조선희 저널리즘 연구 활동가는 뉴스 제작의 문제적 관행을 지적한다. [속보], [단독] 이라는 타이틀 경쟁으로 현장의 사실과 핵심 사실보다 누구보다 빠르게 또 정부의 발표에 기댔으니까. 문제는 비극이 언론에서 드러날 때마다 알아야할 것들이 많아진다. 혹은 언론사는 다르지만 타이틀과 내용이 똑같은 기사를 읽으며 피로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나도 이 참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라기 보다 쟁정에 휩쓸린 피로감이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보다 기억할 게 많아 기억하기 힘겨워보였다. 하지만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지면과 화면에 잘 옮겨진 타인의 고통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위 책 96쪽) 는 맹점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참사를 지속적으로 기억하기 힘든 이유   2.공감 피로 '잊지 않을게.' 하며 감정을 소환하고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크고 작은 참사가 빈번해지고 있는 시대다. 일반 시민들이 모두가 참사의 작동을 심도있게 파악할 수 없지만 내가 지켜본 바, 참사 양상은 아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참사 ->피해자 추모-> 책임자 소환-> 여야 간 쟁정 소모 -> 책임자 진상규명 부재 -> 책임자 무혐의  굴레를 끊어내려고 참사 유족들이 손을 맞잡고 국회로 나와 시위하고 목소리 높였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관계자는 책임을 회피했다. 혐오세력은 죽음을 정치로 이용하지 마라고 조롱했다. 이중으로 지쳐가는 건 유족들이었다. 굴레에서 파생된 보도 역시 너무 많아 공감 피로를 호소하는 시민들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본질은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책임자를 비롯한 여야간 책임인데 이건 옳다 그르다는 식의 댓글 전투처럼 소모전이 장기화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사이 2주기를 맞이했다. 달라진 건 딱히 없었고, 전 서울경찰청장은 1심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저널리스트 제시 싱어는 저서 『사고는 없다』,위즈덤하우스(2024) 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언급한다. 123쪽 노스이스턴대학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디스테노는 대규모 사고가 유발하는 충격과 공포의 규모 자체가 그것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를 ‘공감 피로’ 라고 부른다. “한 사건이 일으키는 비극의 규모는 커지는 반면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수준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제시 싱어, 『사고는 없다』,위즈덤하우스(2024) 우리의 응시는 어떻게 변화의 동력이 되는가_저널리즘과 개인의 역할 153쪽 나와 닮은 것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발휘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세상에 충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중략) 무엇에서 촉발되었건  불완전한 사회가 대중적 감정이 뿜어내는 힘을 기반으로 무거운 몸을 조금씩 들썩이며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어쨌든 괜찮은걸까?(중략) 각자와 닮은 것에 한정된 연민을 연료로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재어본다. 260쪽 파편으로 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 정도다.  256쪽 상실과 슬픔, 우울과 기억은 애도와 정교하게 얽혀있는 단어다. 우리는 각자의 삶 안에서 사적인 애도의 순간을 맞이한다. 모두가 태어남과 죽음을 몸 안에 품고 있고, 인간의 생몰에는 시차가 있다. 상실은 그 시차 안에서 발생하는 보편적인 경험이기도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흔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간직 되어 왔다. 애도는 그리하여 고독이나 고립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한 개인의 고유성 안에 자리 잡는다.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애도와 추모엔 상실과 슬픔이 깔려있고 저마다의 추억 역시 얽힌 맥락의 언어다. 생사가 나란히 마주하는 곳이고 그것은 한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저자의 표현처럼 추모가 ‘내밀하고 개인적인 경험’ 으로 간직된 것 같다. 슬픔은 묻어야만 하고 어쩔 수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가라고 재촉하는 사회의 분위기와 맞물려 애도를 성숙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것 같달까.  이번 이태원 참사 기억 시민회의에서 회복/기억/언론/인식 4가지 섹션을 나누어 각 섹션 별로 신청한 참여자들과 발제자 그리고 퍼실리테이터와 함께 4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식 섹션에서 '참사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SNS에서 삭제해야 했나' 라는 질문에 한 참여자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면 트라우마가 되지만, 사회로 돌리면 사태의 심각성을 같이 인식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울러 유족들 중에서 방송에 나온 사진 외에 본 적이 없어 당사자의 아버지로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언론 섹션에서는 '사회적 참사를 다루는 언론 보도가 공동체 회복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란 질문에 피해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같은 관점, 진정성을 만들어가는 과정. 피해자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사회적 참사 보도에서 언론의 역할'의 질문에는 실제로 해결되지 않은 현황을 계속해서 알리고, 참사 자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추모하는 것의 중요성을 나눴다. 기억 섹션에서는 '사고 당사자가 아닌 '나' 는 피해자 인가라는 질문에 참사를 목격한 우리 모두 피해자일 수 있지만, 미래를 이야기하는 스스로를 당사자로 이야기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다만,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명명함과 동시에 가해자가 누구인가 규명하고 책임 지우는 일의 동반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태원의 부정적인 시선을 치유와 회복의 공간으로 나아가고, 지역의 의미가 회복됨과 동시에 참사 책임을 명확하게 밝히는 작업이 필요함을 이야기 나눴다. 회복 섹션에서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모두가 참사 피해자라면, 어떻게 함께 치유할 수 있는가' 란 질문에서 직면하고 정치에서 문제 해결의 문제에서 벗어나 이용만 하는 것 같아 시민 피로감이 크다. 계속 토론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다. '일상과 추모는 분리되어야 하나' 는 질문에선 참여자 모두 일상과 분리될 수 없으며, 추모가 슬프고 힘들어도 아물고 회복하는 과정이 있으니 일상에서도 추모할 수 있어야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눴다. 나에게 이번 시민 회의에서 참사 이후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라는 질문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 나와 다른 배경에서 나고 자란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 것 만으로도 생각을 공유한 것 만으로도 해결되지 못한 지점에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널리즘은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한다. 한 사람을 보다 나은 생각과 세상을 향하도록 안내한다.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인 만큼(위 책 120쪽)’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면서도 관심을 놓아선 안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아울러 저널리즘은 나와 다른 이를 향한 끊임없는 관심이 지향하고 인간은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고 공동체의 연대를 위해 애쓰는(위 책 215쪽) 존재임을 각인시키는 역할도 한다.  무언가로 각자의 경험을 나누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개인의 감정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자각한다. 아울러 이런 목소리가 모여 성숙한 애도의 자세, 서로 생각이 다른 이들이 만나 나은 사회를 그려볼 수 있는 계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졌을지언정, 나와 닮은 점은 분명히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린 그들과 이어져 있다는 공명을 잊어선 안된다. 참사 후 파편처럼 일상이 조각난 이들의 마음을 이어붙이기 위해서. 이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서.  끝으로 이 구절로 후기를 맺고자 한다. 36쪽 그러므로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여력이 된다면 포기하지 말고 움직이기를. 행동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시급한 진단의 효용과 오용을 잊지 않은 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기를. -김인정,『고통 구경하는 사회』
[함께 기억] 당신에게 세월호란
당신에게 세월호란? -현(hyun) 질문자 : 현 장소: 니트생활자 사무실 *인터뷰이: S, H(닉네임으로 작성했습니다)  *인터뷰이는 니트컴퍼니 모임 닛커넥트 에서 만난 멤버들로, 2시간 가량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니트컴퍼니 : 무업 청년들이 모인 가상회사로, 해마다 상/하반기 기수를 모집하고 있으며 온라인/오프라인에서 업무 인증과 주간 회의, 전시 등의 활동을 합니다. Q1. 10년 전 4월 16일, 그 날 여러분은 어떤걸 하고 있었나요? S: 미국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주변 지인들로부터 세월호 참사에 관한 연락을 받았고, 도서관에서 내내 기사에 대해 찾아봤다. 토론 시간마다 세월호가 소환됐다. 언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외국인들 앞에서 나는 한국인으로서,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H: 그 날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첫 날이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퇴근 길에 참사 소식을 듣게 되었고, 한 주가 우울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참사를 목도할 수 밖에 없어서 충격이 컸다. Q2. 어떤 것을 기억해왔나요?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S: 유학 시절 기숙사 화재경보기 알람이 울렸을 때, 모두 1층으로 내려가는데 나는 안전불감증이라 알람이 꺼질 때까지 귀를 막고 잠을 잤다. 그 정도로 안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호를 겪고 나서 내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요즘은 건널목에서도 멀리 떨어져서 기다릴 만큼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걱정한다.  H: 말도 안 되는 참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참사 원인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여러 참사를 지나며 생겨난 리본을 4개나 봤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리본을 달게 될지 무섭다. S: 이태원 참사 때 주변에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참사 소식을 접했다. 그날, 밤새도록 SNS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 참사 현장을 봤다. 근처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살아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Q3.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H: 국민을 지켜야 할 국가가 없구나, 각자도생 사회구나,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구나, 어른들의 탐욕으로 아이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참사로구나. 수장이라는 표현이 세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이 단어만큼 세월호를 잘 표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416재단에서 만든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가 문을 열어 개소 강좌를 듣고 왔다. 김일란 영상감독, 홍은전 기록활동가, 그리고 김승섭 교수님이 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올해가 세월호 10주기라 책도 많이 나오고 영화도 많이 나올 테니 관심을 갖고 함께 해달라고 하셨다. S: 요새 친구들이 출산을 앞두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도 지켜주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한다. 축하한다는 반응조차 나오지 않는다.   Q4. 세월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월호를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S: 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 또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정치가 묻을 수 없다.  H: 앞서 들었던 김승섭 교수님 강연에서 해주신 말씀으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했던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저희 오빠가 죽은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꼭 용기를 내주세요" 이 말을 듣고 교수님이 책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세월호를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 담지 못한 인터뷰 비하인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여과없이 참사 현장을 전하는 SNS의 보도윤리에 대해 이야기 나눴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겐 일상 곳곳이 참사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남성 위계에 의한 여성 피해자의 사망사건과 더불어 여전히 이름도 직업도 알 수 없는 여성들의 죽음이 가려지는 이유와 문제도 짚어보았습니다. 참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느냐를 떠올린 시간이었습니다. 작년 사회적으로 충격을 준 신림역• 서현역 칼부림, 동작역 침수사고는 큰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덮어둔지라 언제 사고로 이어질 지 몰라 두려웠습니다. 해결되지 않고 넘어간다면 안전한 사회는 멀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전을 원한다면 참사를 기억하라’   작년 이태원 참사 1주기 기억식에 나온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선 책임을 좌시해선 안될 것입니다.
[함께 기억]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타자화 될 수 없는 참사  -인연은 이어져 돌아온다- hyun "잠수부 자격증 있는 장병. 지휘통제실로.“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지휘통제실에서 나온 방송을 잊지 못한다. 2014년 4월 16일, 육군 훈련소 가입소 기간 사흘 째 되던 날인 오전 6시. “지휘통제실에서 전파합니다. 잠수 자격증이 있는 장병이 있으면 지휘통제실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육군에서 숱한 자격증들 중에 왜 하필 잠수부 자격증을 찾는걸까. 그 의문은 훈련소 연대로 넘어갈 때 알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맞이한 첫 주말 종교행사 날이었다.  연무대 교회는 1주차 훈련병부터 5주차 훈련병 모두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 1주차에 막 접어든 나는 4~5주차 전부터 온 선임(?) 훈련병들과 함께 있었다.  선임 훈련병에게 있어 우린 괴롭히기 좋은 대상이었다. ‘우리는 갈게! 너희들 각개!((훈련소 수료 후 자대로 가니까 너네들은 남아서 각개 전투(훈련소 5주차 마지막 주에 실시하는 훈련)나 해라는 의미)’ 라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연무대 교회의 꽃 ‘실로암’ 찬양에 맞춰 이들은 ‘각개전투!’ 외치며 자극하기 바빴다. 이 곳만의 환영방식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게 있던 찰나 군종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 훈련병들을 향해 호통을 치셨다.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웃고 떠드는거야!”  무슨 시기이기에 이토록 그는 분개한걸까. 요 며칠 동안 꼬리표처럼 붙은 잠수부 자격증의 정체에 혼란스러워질 때 즈음 그는 스크린으로 영상을 띄우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산에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했는데 웃을 때가 아니다.“  세상과 단절 된 지 1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접한 소식은 충격이었다. 스크린에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탄 배가 진도 앞바다에 침몰하여 400여 명이 실종되었고, 잠수부들은 실종자 수색에 들어갔다. 기자는 눈시울 붉히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고 택시와 버스기사들은 유가족들을 진도까지 실어나르는 장면이 스쳤다. 입대한 지 불과 이틀 사이에 배에 탄 470여 명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목사는 “제발 0.0001% 라도 기적이 있다면 이들이 전원 구조되길 바랍니다.” 라며 애통한 심경으로 기도와 함께  “부디,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오라.” 는 말로 예배를 마쳤다.  안산을 포함한 대한민국은 애도의 분위기였다. 자대배치받고 간 교회에서도 기도제목 말미가 세월호 무사구조로 맺곤 했다. 하지만 사회와 군대 사이 해소할 수 없는 단절감이 존재했다. 군대는 ‘정치적 중립' 이라는 이유로 애도가 들어설 틈도 없거니와 그런 이야기도 꺼낼 수도 없었다. 바쁜 일과도 한몫했다. 선•후임 심지어 나조차 당장 주어진 일상과 휴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세월호는 관심에서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이윤에 눈 먼 기업과 컨트롤 타워의 부재가 빚은 참사" 그러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날이면 혼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답답함만 커졌던 것 같다. ‘배가 왜 침몰했고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나님은 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나?’  원망의 마음도 따라서 커졌다. 파편처럼 끊긴 기억은 휴가 때 읽은 책 한 권으로 선명하게 그려나갈 수 있었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2015) 중 세월호의 최대 화물 적재량은 2500t. 객실 증설을 위해 개조하여 선박의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복원성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윤에 눈 멀어 생명을 버린기업과 비상사태에 부재한 국가가 빚은 참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도 침몰 사실에 충격만 받았다. 반복되는 일상이 물밀듯 밀려오니 또 다시 세월호 생각은 진전되지 않고 가라앉았다. 자대에 정착한 지 1년이 3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후임이 들어왔다. 그의 고향은 안산. 세월호에 탔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대였던 그와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으나, 고향에서 전해진 슬픔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멀게만 느껴진 안산이 가까이 스민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할 때 안됐나? 안산 출신 후임과 대학 동기의 죽음을 통해 슬픔은 외면할 수 없어"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세월호의 아픔은 그치지 않았다. 인양해야할 진실은 곳곳에 남아있다. 더러는 이제 그만하라며 날선 비난과 피로감을 호소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죽음을 결코 외면해야할까. 한 사람의 죽음은 가능성이 소멸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그와 관계된 세계도 줄줄이 무너지는 비극이다. 그 고통이 국가의 외면으로, 이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는 타자화로 이어진다면, 세상은 지옥이 되지 않을까. 나와 무관하다 여겼던 것들이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체감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2023년 12월 토요일 아침. 대학교 동기의 비보를 접했다. 대학원 학비를 벌려고 여름방학 중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창호 작업 중 6층 높이에서 추락사한(이 또한 안전 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채 빚어진 참사였다) 대학교 동기의 소식을 그와 인연도, 연고도 없던 지인에게서 접할 줄은 몰랐다. 슬픔은 결코 나와 먼 일이 아님을 절감했다. 죽음은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인연의 고리는 어떻게든 닿아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동기의 죽음을 접한 이후 변화가 필요했다. 살아가면서 인연은 어떻게 맞닿을 지 아무도 모르기에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했다. 내가 만난 누군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칠 인연이 될 지도 모르니까.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은 연결되고 이들과 함께 시대를 관통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