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1995년 서울, 삼풍 - 동아시아
기억을 정리한다는 것  나는 1996년에 태어났다. 이 사고가 있고 정확히 1년 정도가 지난 후에. 나는 이 사고를 눈으로 보고 겪지 못했다. 처음으로 이 사고에 대해 알아차린 일도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아차린 거였고.  도서관에서 건축과 관련된 책들을 찾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내가 이 책을 왜 집었더라,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옛날에 봤던 다큐멘터리가 우연히 떠올라서라고 생각한다. 10살 남짓하던 어린 나이에 부모님 옆에 누워서 늘 봤던 주말 저녁의 다큐멘터리. 무너진 삼풍백화점의 이야기와 당시 물건을 훔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돕던 시민들에 대한 이야기.  모든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 이 일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기억하는 이들, 당시 사회의 최전선에 있던 이들은 최전선에서 물러날 정도로 말이다. 옛날에는 이런 사고에 대해 다들 기억하고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자주 다큐멘터리나 방송이 만들어져 다뤄지고는 했었는데, 요즘 학생들은 이런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그런 짧은 생각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이 책을 집고 출납기로 다가갔던 거 같다. 잊었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자는 기분으로.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와보려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을까, 책을 만들고 싶은 지망생의 시선으로. 이 책이 사고 20년 후에 발간된 책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30년 후에 이 책을 읽고 있구나.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거나 크게 다쳤다. 사유는 후에 밝혀진 대로 설계변경, 시설물 이동으로 인한 최대 하중 초과. 이 사고를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후대에 기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그들이 낸 답은 목소리를 모으는 일이었다. 생존자와 당시 도움을 줬던 인물들, 그리고 피해 유가족의 목소리를 모아 책으로 내는 일.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각자의 목소리를 모으는 형태로 이어진다. 특정 질문에 대해 당시 생존자, 당시 구조자, 혹은 피해 유가족들이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는데 어떤 단체를 필두로 한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이기에 몸으로 와닿는 현실성이 극대화된다고 해야 할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생생히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현장이 각자의 시선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특이한 점은 말 그대로 각자의 시선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다. 당시 현장이 어수선했고 제대로 기틀이 잡히지 않은 채로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는 만큼 모두 어수선한 분위기를 각자의 시선에서 담고 있었다. 공무원의 행동들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분개하는 사람, 수많은 시선들이 얽히고 얽히면서 직소퍼즐 피스처럼 이어지고 현장을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개인의 시선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그림이 나온다. 어떻게 하면 이 사건을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견 충돌이 그 장소에서도 있었기에 20년이 지난 지금이 되어서도 그런 의견 충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괄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는 모두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었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는 이야기들. 우연히 지나가던, 그 근처에 살던, 생전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모두 그 자리에 모여 함께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갑자기 더 무너질지도 모르는 건물 아래에서.  최근 『자연스러운 건축』이란 책을 읽은 후에 바로 이 책을 읽었다. 『자연스러운 건축』에서는 콘크리트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처음 저자인 구마 겐고 본인의 자연 건축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할 때 우연히 콘크리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건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건축사에게 주는 으스스함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화의 정도를 표면에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내부에서 철근이 부식되고 있거나 혹은 콘크리트 자체의 강도에 문제가 생겨도 표면에서는 이것을 알아채기 힘들다. ~ 반대로 콘크리트의 으스스함은 그 내용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실제 이상의 압도적 강도를 가상하고 불안정성을 고정화하는 초월적인 힘을 기대하게 된다. - 『자연스러운 건축』21p 일부 발췌  콘크리트는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겉으로 갈라지기도 하지만 이걸 티내서까지 행동하지 않는다. 만약 티를 낸다면 그건 정말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서야 하는 마지막 단말마다. 그렇기에 콘크리트의 으스스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지킬 것처럼 단단하게 서있지만 반대로 전문적인 건축사, 안전 관리자가 아니고서는 그 건물의 속내와 상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에 삼풍백화점 이야기가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고는 했었다. LH 아파트 부실공사, 속칭 순살아파트 사건 때문이었다. 철근 누락, 이후 다른 아파트에서 발견된 철근 노출, 콘크리트 박락과 같은 문제점들이 재조명되면서 삼풍백화점의 공포가 떠오른 것이다. 이 모든 사고들은 사실 콘크리트라는 재료의 특성과 비슷하다. 몇 개 빼먹고, 좀 부실하게 만들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안에 쓰레기를 채워서 콘크리트를 굳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이야기는 수없이 듣지 않았는가? 공사장에서 나온 쓰레기를 처리하기 곤란해서 그냥 콘크리트랑 쓰레기를 같이 굳힌 다음 공사장에 쓰거나 주민들이 볼 수 없는 위치에 쓰레기를 가둬놓고 그냥 떠났다고.  사실 사고의 기억은 젊은 세대만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고가 발생한 후 30년, 우리는 아직도 비슷한 상황을 보고 있다. 23년, 순살아파트 사건 당시와 그 이전에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는가? 아파트에서 오래 살 거면 00년도에서 10년도 사이에 지어진 아파트에서 살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모두 삼풍백화점 사건의 영향을 받은 아파트라 법규를 철저히 지키면서 지어진 아파트기 때문에.  나는 건축이란 삶의 완성이자 건축사가 풀어낼 수 있는 예술적 지표라고 생각한다. 물론 필드에 있는 사람들은 문과적 시선의 헛소리라고 일축할지도 모르겠다. 전부 돈이고 빡빡한 일정, 그리고 한정된 예산과 자원 내에서 아파트를 지어야 하니까 무슨 예술이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는데 예술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고. 그래도 네모반듯한, 옆집 뒷집과 같은 형태의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는 누군가가 수년, 수십 년간 살 둥지가 된다. 그런 공간을 마련하는 기회 자체가 이미 예술의 한 영역이 아닐까.  그러니 이 사실을 생각해 주면 좋겠다. 타협과 편법은 다른 것이라고. 한정된 예산에 저급의 물감을 쓸 수는 있겠지만 물감을 쓰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산에 맞춰 재료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재료가 빠지는, 새들이 둥지를 믿지 못해 불안해하고 결국 떠나는 그림은 없으면 좋겠다. 벌써 30년이 지난 지금, 건축 기술은 그 당시보다 훨씬 발전했는데 아직도 건물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업계가 아직 30년 전 의식 수준에서 나아가지 못했다는 의미와 같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기에 담겨있다. 우리를 기억하고 제발 앞으로 나아가자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금 울렸고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 서있다. 40년 후에는 이런 목소리가 더이상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올까? 부디 그러기를 빈다.  어린 시절에는 기억을 정리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매일 같은 일상을 살았고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 속 특별함이란 그날 저녁에 나온 밥반찬, 친구들과 함께 올라갔던 뒷산, 쓸모없지만 즐거운 장난들이 전부였으니까.  많은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부터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충 20대 후반부터. 사실 20대 초반, 중반까지도 내 삶은 쳇바퀴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고 군에 입대하고, 매일 같은 일과를 보내다 가끔 나오는 맛있는 음식들에 감동하던 병사 시절, 출근하면 엔진을 고치고 집에 돌아가던, 그리고 퇴근 후에는 대학 수업을 듣기 위해 컴퓨터 앞에 늘 붙어있던 간부 시절. 말 그대로 일상이 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특별한 일들도 있었다. 주말이 오기 직전 저녁에 지인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던 일, 성당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일, 본가에서 가족들과 함께했던 일... 솔직히 당시에만 해도 이런 것들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상이 계속될 거니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기억하지 않아도 될 만큼 흔한 일들로.  최근 병사 시절 동기생들을 만났다. 서울은 아니고 저 멀리 광양에서. 이제 우리는 광양에서밖에 만날 수 없다. 포스코에 다니는 친구가 광양에 가족을 꾸리고 살고 있기 때문에 홀몸인 아저씨들이 광양에 사는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천릿길을 내려가주는 것이다. 뭐, 대전이나 대구에 살고 있는 놈들은 경기도에 사는 나에 비하면 천릿길은 아니고 삼백리 수준이려나.  점점 주변 지인들을 만나기 어려운 때가 오고 있다. 가족이 생기고 사는 곳이 멀어진다. 대구 패밀리가 불렸던 형님들은 이제 브라질, 울산, 경기도 그 어딘가에 각자 나눠져 살고 있고, 병사 시절 동기생은 경상도와 전라도 그 어딘가에서, 보드게임 패밀리조차 경기도와 서울, 외곽과 외곽으로 나눠져 큰맘 먹고 모이지 않는 이상 얼굴 보기도 힘들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기억은 한참 예전의 이야기로 점점 변해가고, 이제는 따로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기억해 낼 수 조차 없게 되어간다.  나는 내 성인의 기억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20년이 지난 후에 목소리를 정리했는데 그 사이 얼마나 많은 목소리들이 잊혀지고 소실되었을까. 사고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또 얼마나 많은 목소리들이 소실되었을까. 이제는 소실되는 기억들이 두렵다.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더라? 라는 질문에 1년, 2년이던가... 한참을 떠올리며 기억을 짚어가는 순간들이 두렵다. 아마 30대, 40대가 되면 더 심해지겠지. 내가 목소리를 남기는 것처럼 그들의 목소리도 남고 남아, 내 기억은 나만 가져가더라도 그들의 기억은 많은 이들이 가져가는 사회가 오면 좋겠다. 지난 서평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1995년 서울, 삼풍』이라는 책의 서평을 가져왔습니다. 최근에 『자연스러운 건축』을 읽고 구마 겐고에 대한 이야기를 좀 떠올렸는데, 우연히 콘크리트에 대한 그의 건축 철학이 담긴 글을 보고 이 책을 떠올리며 바로 읽게 되었네요. 내년이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부터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고가 6월에 발생했으니 이제 6개월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30년이 되겠네요. 당시로부터 우리의 인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당장 작년에 LH 아파트에 순살 아파트라는 이름이 붙고, 부산에서는 철근이 노출되는 사고가 있었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요. 저는 건축사와 건축 철학, 건축사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제 한때의 꿈이 건축사였던 것도 있고 건축에는 본인의 인생과 철학이 집대성된다는 개인적인 신념때문인데, 이런 아파트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더해지네요. 저는 이 책을 읽을때 조금 슬펐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고 사실적이어서 읽다가 마음이 아파 눈물이 좀 그렁거렸어요. 만약 이런 이야기가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은 읽어보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 모두의 목소리를 모은 책이다보니 어렵지 않게, 조금 슬프게 읽히실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에도 좋은 책을 가져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서평] 연필로 쓰기 - 문학동네
백전노장의 검은 아직 날카롭다.  날이 추워졌다. 이런 환절기에 감기가 들다니. 주말 하루이틀 약 좀 먹으면 떨어질 줄 알았더니 조금 좋아진 듯하다가 검도 한 번 다녀오고 그 기운이 심해져 컨디션이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  결국 깨면 밥 먹고 약 먹고, 깨면 밥 먹고 약 먹고 시간을 보내다 e북 리더기를 꺼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책이 『연필로 쓰기』. 생각해 보면 e북 리더기를 사고 가장 먼저 리디에서 e북으로 샀던 책이 이 책이었는데 아직까지 다 읽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이래놓고 그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되나.  김훈 작가에 대해서는 여러 추억이 있다. 딱 작년 이맘때쯤 같은데.  전역 전 12월에 휴가를 나와서는 또 감기에 걸려서 골골대고 있을 때. 그때 읽은 책도 김훈 작가의 책이었다, 『칼의 노래』. 왜 그 책을 다시 읽고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던 시기였고 그중 하나가 아버지의 책장을 언제나 지키던 『칼의 노래』였던 거 같다.  김훈 작가의 책은 아플 때 먹는 약인가? 지금도 이 글을 한참이나 콜록거리며 쓰고 있다. 음, 막상 콜록거리며 쓰고 있다고 하니 약은 아닌 거 같다. 그보다는 쓰러져도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되는, 전염되는 무사의 투혼인가. 『연필로 쓰기』는 19년에 나온 김훈 작가의 산문집이다. 애초에 소설가 김훈 이전에 에세이스트 김훈이 존재했고, 소설가 김훈의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지만 자전거 사랑꾼 김훈의 이야기는 좋아했던 독자들도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가끔씩 나타나는 소설가의 산문집마냥 엄청 놀라운 글은 아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의 글에는 삶과 역사가 담겨 있다. 한국 전쟁 시기에 포대에 담겨 대피했고,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고엽제로 죽은 동기가 있는 나이, 그는 벌써 일흔을 넘겼다. 이제 지울 수 없는 기운이 쫓아다닌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의 산문집에는 죽음의 기운이 늘 도사리고 있다. 자연, 삶,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는 하지만 자신이 홀홀거리는 할아버지라는 점도 언제나 꼬리처럼 따라 나온다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이런 백전노장의 자세로 글을 풀어내고 있음에도 문장에는 언제나 힘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달관한 듯 글을 쓰는 나보다도 훨씬 더. 나는 그런 그의 글을 사랑했다. 힘있게 써내려가는 문장, 강한 삐침으로 마무리된 붓글씨와 같은 문장, 단어 하나하나가 단단하게 휘둘러지는 문장. 솟구칠 때 고래는 머리로 아침햇살을 들이받았고, 잠길 때 고래 꼬리가 바다를 때려 물보라가 일었다. 솟구치고 또 잠기면서 고래떼는 달려오고 또 달려갔다. - 연필로 쓰기 중 일부 발췌  왜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을까. 나는 고래라는 동물이 힘과 생동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꼬리로 파도를 내려치고 또 가르며 물살을 만드는 고래, 하늘 끝에 닿을 듯 뛰어오르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고래, 그러고보니 예전 창덕궁 근처 카페에 들렀을 때 고래 엽서를 사고 싶어하는 나를 보고 카페 주인이 '고래는 왜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고래만큼 생동감 넘치는 동물을 보지 못해서, 내가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치 작가가 대신 해준 것처럼. 그의 글에서 생동감을 느꼈다. 힘을 느꼈다.  다뤄보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떠들면 끝이 없으니 한 이야기로 마무리해보려고 한다. 작가는 냉면을 먹으며 먼 이북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냉면 면을 길게 늘어놓으며 먼 이북부터 한국의 남단 끝까지, 부산까지 면을 길게 늘어 놓는다. 늘어 놓은 면을 넓게 돌리며 이제는 청와대로, 그리고는 평양의 집무실로 잇는다. 거기서 한강 둔치 어딘가, 김훈에게 잇고 축을 넘어 백석 시인과 고구려까지 면은 이어진다.  그는 하나의 단어로 공간과 시간을 넘나드는 문장가다. 책이 쓰여졌던 시절이 한참 북한과 분위기가 좋았던 시절이라 그럴까, 아니면 그가 초대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을 봐온 사람이라 그럴까. 이번 산문집에서 그의 시선은 집 앞 마당부터 이북까지 꽤나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럼에도 불온함, 어리숙함, 낯선 감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이미 그런 감각을 느낄 경력의 작가도 아니지만 시선이 퍽 담담하고 익숙해서, 마치 예전부터 이런 꿈같은 이야기를 늘 풀어내는 사람의 말처럼 덤덤히 이야기를 듣게 된다. 현실을 소설처럼, 소설을 현실처럼 쓴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이 나온 후로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백전노장의 검무를 잠시 엿봤다. 좋은 문장이 무엇인가. 아직 모르지만 좋은 문장을 쓰는 사람을 아는가? 나는 김훈이라 답할 것이다.  김훈 작가의 글에는 요즘에는 느끼기 힘든 정취와 멋이 있다. 단문, 단문, 토막으로 조리된 문장에는 특유의 육향이 진하게 배어 있고, 이 것들이 담긴 문단을 맛보면 매료될 수밖에 없는 작가 특유의 피니쉬를 느끼게 된다.  내가 그를 처음 안 계기는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법한 『칼의 노래』, 『현의 노래』와 같은 소설보다도 '몽당연필을 든 무사'라는 별명의 계기가 된 그 인터뷰 때문이었다. 그게 05년도 인터뷰였으니 벌써 20년인가. 원고지에 연필로 글을 쓰는 게 삶의 전부라는 그의 이야기에 어린 나는 왜 감동했는지. 당시에는 대다수가 노트에 글을 쓰는 시대였음에도 말이다.  연필로 쓰기, 내가 그 인내와 고통을 맛보게 된 때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5년이었다. 군에 입대한 나는 문명이라는 것으로부터 단절되었고 핸드폰이 없던 시기의 저계급 병사들이 으레 그렇듯 병사 권력의 상징이었던 사지방에서 눈을 돌린 채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게 바로 연필로 쓰기였다.  이후로 또 10년, 더 이상 연필로 노트에 글을 쓰지는 않는다. 당시 썼던 공군 병사 수첩. 동기, 후배들에게 받아 쓴 것까지 총 7권 정도 분량의 소설과 수필은 진급, 전속, 전역을 이어가는 와중에 소실되었고, 결국 데이터로만 남아 블로그에 지금은 숨겨놓은 비밀 글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를 알게 된 후로 20년, 사이 좋아했던 것들도 많았고 개중에 관심이 떨어진 것들도 많았는데 아직까지도 좋아한다는 걸 보면 예사 사랑이 아님을 스스로도 느끼고는 한다. 아니, 사랑이라기보다는 20년 전에는 그 별명 자체가 좋았고, 10년 전에는 삶의 방식이 좋았고, 지금은 그의 글을 존경하고 있으니 늘 다른 방향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려나. 안녕하세요! 서평을 가끔씩 올리는 카레맛곰돌이입니다. 이번에 가져온 서평은 제가 과거 이태원참사 캠페인 당시 쓴 서평과는 조금 궤가 다른 서평인데요. 앞으로도 사회 현상과 관련된 서평, 그게 아니어도 모두가 읽을만한 평범한 서평도 많이 가져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3
·
[이태원 참사] 4. 이태원은 모두에게 어떤 곳이 될까
4. 이태원은 모두에게 어떤 곳이 될까 캠페인을 끝내며 9월 27일, 글을 시작하기 전 이태원 거리에 카메라와 함께 답사를 나왔다. 금요일이기에 다소 사람이 몰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거리는 한산했고 내가 기억해온 활기 넘치는 상가가 가득했던 거리에는 임대인을 구하는 종이만이 남아 많은 이들에게 쓸쓸한 단상을 남기고 있었다. 사실 이태원은 코로나로 전국이 통제되었던 시절 전부터 꺾여가고 있었다. 문화거리를 불온한 이들이 배회하는 장소라고, 젊은이들이 일탈을 벌이는 장소라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물건이 유통되는 장소라고, 손가락질 하던 이들의 소원대로 거리의 상권은 다양한 이유로 무너졌다. 거리에 큰 상처를 남긴 첫 문제는 코로나였고, 다음으로 발생한 문제는 이태원 참사. 두 사건이 짧은 숨으로 연달아 발생하면서 많은 상인들의 숨통을 조였고 이제는 아무도 생기 넘치는 젊음의 거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태원을 떠올리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이태원은 살아날 수 있을까. 이 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거리의 미래를 상상해봤다. 역사에서 나와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참사 당시의 거리였다. 참사가 발생한 장소는 1번 출구에서 불과 몇 걸음 걸어가지 않아도 바로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을까. 역사와 바로 연결된 곳, 세계음식거리의 초입부에 속하는 골목, 짧게만 생각 해봐도 많은 인파가 있었으리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27일 당일, 유달리 거리 주변에서 순찰하는 경찰차들이 눈에 띄었다. 3번 출구 앞에 보이는 작은 파출소가 이 거리의 모든 치안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걸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날만큼은 파출소 인근을 기웃거리고 싶지 않았다. 길을 건너 3번 출구 근처로 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커피숍에 붙어있는 임대문의 딱지였다. 축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근방은 공실이 된 건물로 가득했다. 참사의 시간을 이겨내기에 2년의 시간은 아직 모자란 건지. 이 조용한 건물들을 보고 과거 평일 낮, 사람으로 가득한 이태원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거리의 페인팅을 싫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할렘가의 문화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런 자유로움이 거리의 특색을 만들어준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태원은 애초에 이런 도시였다. 이 건물은 3번 출구를 따라 내려가면 보이는 건물이다. 이태원 앤틱 가구거리 초입에 바로 보이는 건물, 이태원하면 문화, 술, 음식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겠지만 이태원에는 꽤 오래전부터 앤틱 가구거리가 있었다. 앤틱 가구거리도 예전처럼 활기가 넘치지는 않았지만 내가 갔던 날 축제가 있어서인지 상인들은 거리에 물건을 진열해놓고 오랜만에 밖에서 많은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리에 진열된 수많은 가구, 도기, 그림 액자, 그리고 이 물건들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 앤틱 가구라는 개념 자체가 인기가 없어진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닐까. 앤틱 가구거리를 둘러보고서는 이태원 시장에 잠깐 들렀다. 예전에는 여기 시장도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코스 중 하나였는데, 요즘에는 해방촌 신흥시장이 젊은 인구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가 되어서인지 유달리 한산해보였다. 옷을 구경하러 다니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거리에는 이 근방이 익숙한 현지인들만이 남았고 외부인의 발길은 끊겼다. 옷을 인터넷으로 가장 많이 사는 젊은 세대에게 건물 지하에 내려가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옷을 사라고 한다면, 아마 아무도 쉽게 하려고 하지 않겠지. 시장 밖 거리에서는 저마다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내가 갔던 당일에는 앤틱&빈티지 축제가, 방문했던 날로부터 며칠 후에는 세계문화음식거리에서 축제가, 그리고 10월 말에는 할로윈 축제가 열릴 것이다. 퍼레이드, 코스튬 파티, 다양한 음식과 음악까지 다들 그간의 불황을 잊고 즐거운 한때를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실이 되어버린 상가는 거리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간 서평을 쓰면서 2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과거를 추모하는 형태에서 새롭게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써왔다. 돌을 던지는 시민들도 바뀌어야 하고, 정부도 언론도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 이 말은 이태원을 향한 목소리도 다르지 않다. 작년 이맘때쯤 이태원 방문자 수가 코로나 이전의 80% 수준으로 회복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하지만 그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 말도 있었다. 이미지 회복은 아직이라는 말,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1년 전에도,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도 말이다. 유튜브에 이태원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이태원 참사 이후 거리에 대한 지적을 하는 내용의 영상들이 여럿 나온다. AED가 부족했다는 지적, 상권의 발달 형상과 안전장치 미흡에 대한 지적, 적은 통제 인원과 이에 대한 한계에 관한 지적까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이태원은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안전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다소 미온적으로 대처하거나 다소 무식한 접근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속칭 군대식으로 해결한다고 표현하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원흉을 없애는 방식 같은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고 이태원 거리에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축제를 금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안전한 거리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더욱이 모색하는 것이 정답 아닐까? 거리를 걷고, 축제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다 결국 이태원역 3번 출구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1번 출구로 가야했고, 나는 이 거리를 떠나기 전에 3번 출구 앞 파출소에 다시금 멈춰 섰다. 파출소 앞 주차장에는 경찰차가 멈춰있는 경우가 없었고 잠깐 들렀다가 나가는 차, 멈췄다가 출발하는 차로 입구부터 정신이 없었다. 이들은 얼마나 바쁜 삶을 살고 있을까. 이들이 이번 축제에도 안전한 이태원을 만들어줄까. 시민들에게는 즐거운 이태원, 활기찬 이태원도 물론 필요하지만 안전하다는 믿음을 주는 이태원이 지금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3번 출구로 들어가 1번 출구로 나가며 그날의 100m는 얼마나 멀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본다. 이 캠페인을 함께한 후 길과 거리에 관심이 생겨 서울의 거리와 관련된 책을 읽고, 또 강연을 듣고 있다. 최근에 들었던 강연은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서 들은 <<서울의 골목길에는 산이 보인다>>라는 책을 기반으로 한 서울의 골목길과 산에 대한 강연이었다. 나는 골목길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대로에 기업인들이 생각하는 거리가 그려진다면 골목길에는 시민들이 생각하는 거리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화가일수록 대로에는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 프렌차이즈가 놓이고 골목길에는 성공을 꿈꾸는 시민들의 가게가 놓인다. 최근 이태원에서 술집보다 카페의 성공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을 과하게 마시는 문화가 젊은 세대에서 없어지고 있는 점, 신흥시장의 부흥으로 인근 데이트코스라 부를 수 있는 카페들이 얻는 반사이익, 다양한 카페 문화 형성까지 아마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다양한 요소들로 거리가 새로운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상권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죽고 살며, 몰락과 발전을 반복한다. 이태원은 잠시 꺾였지만 다시금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공이다. 이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리의 이미지가 아닐까. 께름직한 이태원, 안전하지 못한 이태원이 아닌 과거를 이겨낸 새로운 이태원이라는 이미지, 안전한 이태원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평소부터 축제까지 앞으로도 안전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올해도 이태원 축제가 크게 열린다는데 이번 행사도 부디 안전하게 끝나기를.
·
[이태원 참사] 3. 돈이 되는 목소리와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
3. 돈이 되는 목소리와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고   어린 시절의 내게 신문과 뉴스는 사회를 비추지만 사회와 동떨어진 작은 외딴 섬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무언가를 조명하고 사회의 어두운 곳까지 알려야한다는 욕망으로, 그러니까 뭉뚱그려 말하는 저널리즘이라는 것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처럼 보였고, 실제로 돈이 되지 않을만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보내는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런 기자정신 아래에 만들어진 칼럼들을 꽤 좋아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달동네에 퍼진 재개발 소식에 등 떠밀리듯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과 그 길 좌우에 깔린 녹슨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하늘 끝까지 담아내는 사진. 당시 칼럼들은 발품을 팔아 쓰는 글이 많았고, 1년간 달동네를 오르내리면서 재개발 구역의 변화를 담아내는 기사도 있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변하는 건 없었다. 해봤자 녹슨 지붕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이고, 눈이 녹아내리고, 빗물이 흘러내리고, 단풍이 쌓이고, 다시금 눈이 쌓이는 정도. 24년, 지금은 돈이 되지 않는 기사는 기획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애초에 기획 기사를 위해 1년이나 준비를 한다니,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바삐 돌아가는 시대에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는 데스크가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뷰어십이 나오지도 않는 기사를 쓸 바엔 인터넷 게시물이나 긁어오는 게 더 낫다, 그렇게 판단하는 데스크는 더 많을 수도 있고. 실제로 요즘 뉴스에는 그런 칼럼보다 네이트판과 같은 많은 유저들이 모이는 사이트에서 많은 인기를 받은 자극적인 게시글을 그대로 옮겨 담는 수준의 기사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은 언제나 꾸준한 뷰어십과 관심을 얻는다. 사람들은 게시글이나 긁어오는 기자를 욕하면서도 꾸준히 그 기사를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뷰어십에 미친 –아니면 살기위한 투쟁을 벌이는- 언론사들은 이태원 참사 직후 어떤 기사를 내보냈을까. 사고 당시 자극적인 기사는 시민들의 알권리라는 명목 아래 거리에 살포되었다. 과연 이는 시민의 알권리를 위한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오늘은 평범한 신문 독자의 입장에서 보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는 사회 규범의 경계인 회색지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다. 잘못 밟으면 금지된 선을 넘을 거 같지만 조심만 한다면 아슬아슬하게 어디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을 거 같은 회색지대. 하지만 그 말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게도- 그 금기를 깨고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기를 원하는, 말하자면 사이다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저널리즘이 펜으로 타인을 찌르는 공격 행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이태원 참사 당시에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이 남용되었다. 먼저 참사 당시의 사고 상황을 언론사에서는 SNS 영상까지 포함해 여과 없이 흘려보냈고, 시민들은 사고 현장을 보면서 다양한 부의 감정을 키웠다. 분노인지, 안타까움인지, 슬픔인지 모르는 감정의 뭉치, 언론사는 이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이후 이 참사의 범인으로 예상되는 인물들, 혹은 범인을 색출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SNS 메시지를 사고가 발생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올리면서 부의 감정을 뷰어십으로, 그리고 분노의 감정으로 바꿔냈다. 가장 자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이를 돈으로 치환한 것이다. 이런 기사들 아래에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은 경찰을 향한 비난이었다. 저렇게 인물이 특정되는데 어째서 바로 찾지 않냐, 당장이라도 잡아와라, 얼굴 모자이크 하지 말고 올려라, 이게 바로 ‘시민의 알권리’ 아니냐. 나는 시민의 알권리라는 단어가 어떻게 오용되는지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대신 언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 저자의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이 책은 언론인으로 살고 있는 저자가 그간 언론인으로 살며 생각하고 느껴온 것들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시대가 겪고 있는 너무 많은 갈등, 일차원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사고들을 안일하게 접근했던 동료들과 자신, 그리고 이에 대한 후회,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도떼기시장마냥 전시하는 언론의 현 실태를 향한 비판. 필드에서 그가 느껴온 것들은 아마 수많은 신문 독자들이 때로는 무심코 지나갔을법한, 때로는 몸으로 느꼈음에도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에 대한 불편함으로 와닿았을법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첫 챕터를 펼치면 바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과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동영상, 동영상에 찍히는 수많은 리트윗들, 그리고 전염되는 감정들. 기자인 저자는 재난 보도 준칙을 떠올리지만 한편으로 이 재난 속 이야기를 담아내는 자신 또한 이들과 같은 방관자가 아닌가라는 무력함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모두가 이런 이야기에서 부의 감정을 얻는 것으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는 목소리를 낸다. 언론을 통해 슬퍼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언론을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로 사용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처럼 시민들이 참사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기사만이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자극적인 기사도 많았고, 때로는 재난 보도 준칙의 수준을 넘어선 기사도 있었다.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같은 저널리즘의 이상을 향해 나가고 있지는 않을 테니, 누군가는 데스크에게 돈이 될 만한 이야기를 쓰라고 압박당하고 있을 테니. 실제로 언론의 역할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고 언론만이 소유하고 있었던 파이를 언론인 척 하는, 혹은 언론의 틀만 가져온 자극적인 유튜브가 겸상하기 시작했다. 언론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레거시적인 시스템에서 미디어 기사로 방향을 틀어 이에 힘을 실었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역으로 언론인 척 하는 유튜브에 가까워졌다. 그들에게 형식을 보여주고 내용을 받아온 것이다. 나는 이런 저널의 행태가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24년 현재, 언론 산업이 과거처럼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고 언론사에 광고를 실을 바에 유튜브에 광고를 띄우는 광고주들이 늘어난 만큼 언론의 주력 수입원이었던 광고 역시 지금의 언론 규모를 지탱하지 못할 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재난에서만큼은 언론이 과거의 역할을 제대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정보를 위한 언론, 시민들에게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한 언론,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언론. 가장 뷰어십이 나오는 기사가 정치, 경제면이고 현대 사회에서 갑작스러운 이슈라고 해봤자 재난이 거의 주된 기삿거리임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극적인 기사만을 남발하고 부의 감정을 먹기 위한 행동만을 반복하면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쌓고, 또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표출하게 된다. 즉 저널리즘이 지키려고 했던 오랜 가치가 훼손된다는 이야기다. 이 글을 쓰던 때부터 며칠 전, 여의도에서 세계 불꽃축제가 열렸다.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는 기사가 올라왔고, 대교 위에 차를 세우는 사람들, 수많은 인파에 위험한 상황을 겪은 사람들, 다른 아파트에 무단으로 들어가 복도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까지 많은 인간군상을 담은 기사가 올라왔다. 그리고 댓글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백만 명이나 모이는 장소에 대체 왜 가는 거지? 그래놓고 죽으면 국가 탓 할 거 아닌가? 이태원 참사처럼.’ 언론과 국가가 잘못 굴린 펜은 아직까지 굴러가고 있다. 아마 당분간 계속 이런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에 왜 가냐는 이해심 없는 댓글과 함께 이태원 참사에 빗대어 욕하는 사람들. 이들의 방향성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2년이라는 기간을 앞이 아닌 대각선으로, 혹은 뒤로 걸어갔기에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금 우리가 보낸 허송세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이야기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통해 모두가 재고하는 계기를 만들고…. 분명 어려운 길이겠지만 그래도 그 길을 가려는 목소리가 늘어나면 좋겠다. 그게 저널의 역할이고 저널리즘이니까. 마지막 서평으로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 대한 서평을 가져와봤다. 이 책은 기자로 활동하는 저자의 족적과 삶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저널리즘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저자의 굵직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비단 이태원 참사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사고들, 해외에서 있었던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상황에서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나와 정세에 관심이 많은 독자일수록 흥미롭게 쫓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저널리즘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오월의봄 출판사에서 나온 <<저널리즘 선언>>도 같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언론사는 엘리트주의와 거리를 두는 방향성을 보이지만 엘리트와 공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고, 또 그들의 편을 들지 않는 게 정상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편을 들면서 살아야 한다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담겨있는데, 언론에 대한 이상향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독자로서의 괴리감을 차분하게 해석해준다는 점에서 같이 읽기 좋은 책으로 선정해봤다. 특히 저널리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최근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인물들, 그러니까 유색인종, 성소수자, 정치적 올바름과 개인적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에 대한 기자 개인의 입장과 언론의 입장을 두 책을 통해 비교하며 볼 수 있기에 가까이 두고 읽는다면 더 좋은 시너지를 낼 것이다. 준비한 서평은 이번 서평이 마지막이다. 다음에는 이 캠페인을 이어가면서 든 생각, 캠페인 후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조사를 위해 9월말에 다녀온 이태원은 내가 10년 전에 기억했던 이태원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꽤나 쓸쓸한 도시가 되었다. 그들은 이 참사의 아픔을 이겨내고 일어설 수 있을까. 마지막 사진은 골목 앞에 있는 조형물과 용산 구청의 안내 커버를 가져와봤다. 참사로부터 벌써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추모의 감정에 대해 반발 심리를 보이며 조형물을 더럽히려는 사람들, 그리고 이 조형물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감정을 뒤로하고 살아갈 만큼 현대인에게 2년의 시간은 짧지 않다. 아마 언젠가는 저 커버가 없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들도 언젠가는 성인이 될 거고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이 참사도 과거의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이 저 조형물을 봤을 때 이 거리에 이런 슬픈 역사가 있었구나, 참사 이후로 사회가 더 안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했구나, 어쨌든 사회는 좋은 곳으로 향하고 있구나. 우연히라도 생각하며 지나갈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
[이태원 참사] 2. 이제는 허상이 되어버린 ‘목소리가 큰 소수’
2. 이제는 허상이 되어버린 ‘목소리가 큰 소수’ <<인싸를 죽여라>>를 읽고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를 문화수도라고 자칭하던 시절, 그러니까 온갖 인터넷 밈과 유머 게시글을 양산하던 2010년도 초반에는 디시와 다른 커뮤니티 사이의 경계가 명확한 편이었다. 합성을 이용해 만든 재미있는 게시글(물론 그 와중에는 정치적이고 고인 모독 코드를 가진 게시글도 있었다)도 그들의 특이점이었지만 그보다 도드라지게 보이는 특징은 익명성, 반말, 루저를 자처하는 이용자들, 언더그라운드 성향이었다. 이런 특징은 당시 존재하던 네이버, 다음의 카페와 블로그, 이글루스, 루리웹같은 친목도모, 존댓말, 상호존중을 기본 규칙으로 세운 사이트와는 다소 거리가 먼 새로운 인터넷 문화이었으니 당연히 그만큼 이용자들을 향한 사회의 반발도 따라왔고. 실제로 언론에서는 꾸준히 디시의 이용자 성향과 게시글 특징에 대한 저격성 기사를 올렸다. 존중이 보이지 않는 인터넷 문화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법한 게시글에 대한 기사. 하지만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하던 유저들은 기사에 대해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그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일 뿐이다. 대다수의 유저들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그 이후로 꾸준히 활용되는 문구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언제나 나오는 이야기, ‘목소리가 큰 소수’가 탄생한 것이다.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2020년도 초반, 이제 디시의 유저 코드는 디시만의 코드가 아니게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성향, 루저를 넘어서 베타를 자처하는 이용자들, 반말과 욕설, 비단 디시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X(전 트위터), 네이버 뉴스 댓글까지, 그들만의 저급한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모습은 어디를 가도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평균적인 코드가 되었다.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지금도 그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인가? 참사 피해자를 향해 돌을 던진 이들은 목소리가 큰 소수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책은 미국의 2010년도 중반 인터넷 문화, 인터넷 내 대안 우파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리버럴 성향의 캔슬컬처에 대한 전반적인 문화비평서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을 가져온 이유는 내용이 한국의 과거 인터넷 문화와 비슷하고 오히려 지금은 이 책에 적힌 내용들보다 현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더욱 더 극단적인 성향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쪽 진영의 사상을 표방하는 사이트가 아니어도 전반적으로 보이는 성향들, 그러니까 베타를 자처하는 모습과 인터넷 냉소주의가 만연해졌음이 한국의 상황을 대입했을 때 특히 몸에 와닿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고. 인터넷 냉소주의는 지금의 인터넷 문화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향한 무관심, 이를 넘어선 불행을 향해 보이는 조소, 익명성에 기댄 정제되지 않은 발언,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해서 시켰냐는 말의 줄임말) 문화. 이런 인터넷 냉소주의는 언제나 사고의 순간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고는 했다. ‘누가 그 장소에 가서 놀라고 했냐.’ ‘오늘 같은 날 이성 만나보자고 저런 동네에 모인 사람들이 잘못한 거 아니냐.’ ‘저기에 모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문란한 사람들인데 잘 죽은 거 아니냐.’ 이 모든 말이 이태원 참사 피해자를 향해 다양한 커뮤니티의 수많은 익명이란 가면을 쓴 이용자들이 던진 말이었다. 사실 그들이 이런 돌을 던질 거라는 점은 예상할 수 있었다. 베타 성향을 자처하는 인터넷 이용자들 기준에서 그들은 알파에 가까운 인물들이었으니까, 언더그라운드와는 궤가 다른 파티 문화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사고 이후 일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만한 행동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들이 보낸 분노의 방향성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분노한다면 죽은 이들이 아닌 살아서 문제가 될 행동을 한 이들에게 분노해야 하는데 죽은 이들도 살아있었다면 저런 행동을 했겠지, 하며 뭉뚱그려 분노한다니. 물론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선한 사람들이며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돌을 맞을 이유도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으니 돌을 던져도 된다는 식의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국가도, 사회도, 언론도, 이런 부분에 대해 메시지를 정제해달라는 목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기는 어렵기에 더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그들은 선량한 동료시민이고 착한 이들이다.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돌을 던지지 말라.’는 공감하는 척에 가까운 목소리 내기라는 방법을. 인터넷을 오래 하던 유저들도 최근에는 이런 냉소주의적 문화 흐름에 대해 피로하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오글거린다’는 말에 사람들이 낭만적으로 글을 쓰는 모습이 사라졌고, ‘설명충’이라는 말에 지식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누칼협’이라는 말에 행동하고 책임지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알빠인가?’라는 말에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긁혔냐?’는 말에 타인을 변호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말. ‘목소리가 큰 소수’가 인터넷을 대표한다는 말은 이제는 옛 말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모든 익명의 유저들이 ‘목소리가 큰 소수’라는 허수아비에 숨어 돌을 던지는 시대가 되었다. 호남과 영남이 반목하는 시대가 끝나자 청년세대와 중장년세대가 반목하고, 남성과 여성이 반목하고, 알파와 베타가 반목하는 시대가 왔다. 지금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 진정으로 목소리가 큰 소수가 존재하는지. 사실 우리는 목소리가 큰 소수라는 허울 뒤에 숨은 다수가 아닌지. 이 책을 읽고 간단하게 이런 해석을 내릴 수도 있다. 인터넷 이용자들의 전반적인 우경화, 남성 커뮤니티의 대안 우파화. 하지만 나는 이런 단순한 결론은 내리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24년 현재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우경화보다는 좌우 양극단으로 나뉘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 성별 중심의 커뮤니티뿐 아닌 이성이 혼재된 커뮤니티까지, 진영에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인터넷 냉소주의가 넘쳐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이태원 참사 2주기, 나는 과거의 사고와 더불어 미래에 있을 사건들을 위해 이제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내줬으면 한다. 착한 피해자들을 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닌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피해자들을 넘겨짚지 말라. 진짜 나쁜 인물들은 따로 있지 않은가.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르는 돌이 무서워 숨지 않게 그들에게 무분별한 돌을 던지지 말아 달라. 그리고 익명의 가면에 숨어 타인에게 돌을 던지는 인터넷 문화를 개선해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두 번째 서평으로는 <<인싸를 죽여라>>라는 인터넷 문화 비평서를 들고 와봤다. 사실 이 책은 독서 커뮤니티에서 꽤 좋은 호응을 받음에도 섣불리 손이 가지 않는 도서, 제목부터 표지까지 너무나도 인터넷 커뮤니티가 떠올라서 손이 가지 않는 도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초월번역은 많은 이들이 칭찬할 정도기도 하고. 이번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문화와 전반적인 인터넷 냉소주의에 대해 다뤄보려고 했다. 사실 쉬운 주제가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색을 담고 싶지 않아서 목소리가 똑바로 담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에 관련된 서평에서는 최대한 정치적 목소리가 아닌 시민으로서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기에 최대한 중립을 잡으며 달렸다고 생각한다. 나도 꽤 오랜 시간 인터넷을 해왔고, 커뮤니티 활동을 해왔지만 최근 이런 냉소주의 문화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나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자칭 현실주의자들을 향한 회의감은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이들이 나의 동료고 선배일까, 내 후배일까, 사회에서 만나는 또 다른 가면을 쓴 인물일까. 그런 고민이 들게 만드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 나는 저런 인물이 되지 않아야지 다짐하며 늘 자세를 바로잡게 된다. 참사 2주기에는 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면 좋겠다. 추모의 목소리만큼 문제가 되는 사회 문화, 피해자가 숨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 그간 우리가 봐온 사고의 정리와 앞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미래를 향한 목소리.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시선을 보내주는 이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내가 띄운 작은 풍등도 다른 이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하나의 별이 되기를 바라고. 이번에 가져온 사진은 SNS로 참사를 접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익숙하고 너무나 슬픈 구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해밀턴 호텔 골목을 반대편 거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참사 당시 많은 환자들이 이 거리에 누워있었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소방관과 구급대원, 그리고 그 옆에 구경이 난 것처럼 서있는 사람들까지 당시 사진에는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거리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이제는 정적만이 남은 거리를 찍고 싶다는 생각에 사람이 없는 시간대의 골목 앞 거리를 찍어봤다. 사고를 구경하는 이들, 다음에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 대한 서평을 가져오려고 한다. 고통을 마치 구경거리처럼 전시하는 저널과 기자로서의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대답이 담긴 책인데 수많은 사건을 다뤘던 저자의 책이 아마 이 이태원 참사 2주기 서평의 마지막으로 가장 적절한 책이 아닐까 싶어 고르게 되었다. 가장 첫 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당시 사고 상황에서 언론이 행했던 고통 전시회를 보고 회의감을 느끼고는 했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저자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앞으로 저널리즘은 어떻게 사고를 접근해야만 하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책이 되면 좋겠다.
·
[이태원 참사] 1. 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1. 착한 낙인, 나쁜 낙인, 피해자를 괴롭히는 낙인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고  스티그마 효과에 대해 알고 있는가.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행위, 모습으로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속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낙인이라는 키워드는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과 같은 미디어매체에서 거론되지는 않아도 하나의 클리셰처럼 사용되는 요소다. 한 아이의 행실과 평판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고, 그 아이가 사회구성원으로 함께하지 못하고 겉돌게 되다가, 실제로는 나쁜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탈선을 하게 되는 이야기, 혹은 탈선을 하려는 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다시금 사회구성원이 되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쁜 낙인만 존재하는가. 착한 낙인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착한 낙인이라고 표현하니까 말이 조금 이상해져서 단어를 풀어보겠다. 집단을 옹호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묶은 좋은 말이 오히려 거북한 시선을 만들거나, 집단 내부에서도 그 표현을 거부하는 경우가 생기지는 않는가.  생각해보면 나는 어린 시절에 ‘A와 같이 노는 학생들은 전부 착해.’라는 말을 듣는 걸 정말 싫어했다. 나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속여보자고 복도 중앙에 돈이랑 유사하게 생긴 상품권을 뿌려놓고 구석에 숨어서 구경을 하던 아이들이었고 학교 뒤뜰에 있는 벌집에 신발주머니를 던지는 학생이었는데. 학원을 몰래 빠져나와 PC방에 가던 아이였고, 새벽에 기숙사 담벼락을 타고 나와 당구 치러 가던 학생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싫어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착한 무리의 착한 학생’이라는 꼬리표는 끊임없이 따라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개처럼 살고 개처럼 행동한다고, 입이 꽤 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말조심하는 편이라고. 나는 내게 찍힌 좋은(사실은 좋아 보이는) 낙인을 부정하기 위해 오히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과연 모두가 그럴 수 있을까.  이태원에는 뿌리 깊은 낙인이 박혀있다. 문란한 이들이 모이는 장소, 질 나쁜 외국인들이나 모이는 장소, 마약의 근원지, 한국 에이즈 발원지. 사실 이는 이태원이라는 지역의 문화 특성을 나쁘게 재해석한 이야기다. 이태원은 서울시 관광특구 1호였다. 다양한 외국인들이 모일 수 있도록 국가단위로 유도를 했던 관광지였고, 실제로 이를 기반으로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발전했다. 다양한 이들이 모이는 만큼 밤문화도 발전했고 클럽, 술, 음식 문화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같이 섞이면서 다문화 사회, 성소수자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에 대한 국가 단위, 언론 단위의 낙인이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로 heterosexism(이성애적 차별주의)이 심화되는데 국가, 언론이 박차를 가했다는 이야기다. 한국 에이즈 문제의 중심지는 이태원이며 성소수자들이 이태원에 모이게 되면서 사회에 문제가 될법한 물건들을 가져오고 범죄를 조장한다. 개신교 기반의 단체는 이런 불분명한 통계자료를 기반으로 기사를 꾸준히 올리며 지역을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태원에 가서 논다는 사실 자체를 타인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사회가 되었다.  내가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태원을 향한 사회의 시선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지리멸렬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이와 접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의 장애, 차별부터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 피해자들의 이야기라는 진주를 ‘낙인’이라는 실로 꿰어내고 공감이 아닌 대답을 찾는 응답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방식은 근래에 보이는 고통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는 책 치고는 특별한 전개 방식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책에서는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대전제를 세우며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공감한다는 말은 이제 인터넷 냉소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표현이 되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고통을 안다고 감히 네가 고통을 아는 체하냐. 이제는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학자로서 이성으로 접근한다. 고통 받는 이들과 고통 주는 사회 문화, 그리고 미래를 향한 고민.  세월호 사건 당시 자신을 ‘인터넷 냉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학생들에게 던진 돌이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그 학생들은 놀러가다 사고가 나서 죽은 건데 어째서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지원해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형태를 한 돌이었다.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이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도 큰 지탄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륜적으로 아이들에게 던질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수년의 시간이 지났고 피해자의 집단이 바뀌었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발생했을 때 이번에는 많은 이들이, 과거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지탄하던 사람들까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냉소주의가 2010년도 중반에 비해 크게 심화된 점도 있었고 사회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서는 과거부터 뿌리 깊게 박힌 낙인이 있었다.  이태원에 놀러간 이들은 문란한 이들, 인터넷문화를 대표하는 베타메일과는 다른 알파메일들, 사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성소수자들과 다문화 가정들, 모든 혐오가 과거부터 쌓여온 낙인의 한 획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돌은 많았다. 그들을 향한 추모탑이 세워질 때 옆에 혐오로 돌탑을 세워도 될 만큼 많았다. 그리고 이런 혐오를 막기 위해 무분별하게 던져진 긍정의 키워드는 그들의 투석 행위를 가속시켰다. ‘그들은 문란하지 않고 문화를 즐기는 착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딸이었다.’ 이 착한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는 사건 당시 구급차 인근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이들의 영상과 더불어 큰 파급력을 일으켰고 인터넷 냉소주의자들은 피해자를, 더 나아가 잠재적 피해자를 모두 비웃었다. 놀러가서 죽은 게 뭐가 자랑이냐고, 이제는 놀러가서 죽어놓고, 사건이 난 이후 다른 곳에서 춤추다가 집에 가놓고서는 보상금까지 타려고 하냐고.  국가, 언론이 찍은 나쁜 낙인과 피해자들을 옹호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고통에 잘못 공감한 –혹은 척한- 이들의 착한 낙인 덕분에 피해자들은 입을 열기를 포기했다. 수년간 반복해서 찍어온 이 깊은 낙인을 피해자 한 명의 입으로는 지워낼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이 낙인을 지울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이 낙인을 계속 찍고 있을까. 선한 낙인과 나쁜 낙인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잠재적 피해자, 2차, 3차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사회로 나올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확실한 것은 지금은 저자의 방식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점이다. 고통을 향한 공감이 아닌 응답으로.  올해 초, 오랜만에 중학교 시절 후배를 만났다. 성년이 된 이후로 쭉 군 생활을 했다보니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전역하면서 다시 경기도로 오게 되었으니 예전처럼 자주 보고 지내자는 의미에서의 연락이었다. 오랜만에 본 후배는 예전보다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다. 조금의 고민이 있고, 조금의 압박감이 있고, 조금의 불안함이 있는 그런 얼굴. 그 후로 우리는 두어 번 더 커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고, 후배는 긴 고민 끝에 내게 커밍아웃했다. 그때 나는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반응했고(그렇게 했다고 믿고 싶다), 이 몇 번 내가 먼저 연락했으니 다음에는 언제든 네 쪽에서 먼저 연락하라는 말을 꺼냈다. 상관없으니 다음에 또 놀자고.  이후로 후배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누나와 다시 연락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면서 그를 향한 집안의 분위기를 어렴풋하게 느끼고는 있다. 나와 연락을 한 이후에 집을 나가 자취하고 있다던가, 집안에서 붕 떠버린 위치에 있다던가.  나는 아직도 그가 내게 연락을 먼저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저녁 커피나 한잔 하자고 부르기를 바라고 있다. 안타깝지만 내가 그를 기다려도 사회는 그를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그들을 향한 시선도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으니까.  참사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어떤 사회가 만들어져야 할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장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일단 내 후배를 위한 시선이 둥글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 후배를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축제 문화에 대한 시선도 둥글어지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둥글어지고….  첫 책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라는 책을 가져와봤다. 다음 서평으로 계획 중인 도서는 <<인싸를 죽여라>>다. 2010년도 중반 온라인 극우주의와 혐오, 조롱, 인터넷 냉소주의에 대한 이야기. 최대한 좌, 우 정치적인 이야기는 배제하고 돌을 던지는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들에 대해 풀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사진은 참사 당시 SNS 상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을 찍어봤다. 당시 이 자리에 있었던, 혹은 이 자리의 바깥 거리에 있었던 피해자들 중 목소리를 내고 싶음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지금 이 황량한 골목은 얼마나 변해있을까. 사진을 찍으며 상상해봤다.
·
2
·
[이태원 참사] 0. 어쩌면 우리는 너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0. 어쩌면 우리는 너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2019년 10월 25일 밤, 속칭 대구패밀리라 부르는 글쓰기 모임 지인들과 동성로에서 만났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할로윈 같은 행사가 있으면 다들 어렴풋하게 알고 준비를 할 법도 한데 모두 이쪽으로는 연이 없는지 아무 생각 없이 현대백화점 앞에 모였고, 예상치 못한 엄청난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동성로 말고 안지랑에서 곱창에 소주나 먹자. 지나가는 간호사 좀비와 정장 드라큘라를 본 형님은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구석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선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눈치를 보였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랑에서 곱창에, 평화시장서 치킨에, 거리를 걸으면서 맥주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 숙취에 괴로워하고…. 출근한 월요일, 후배 여럿이 지난밤 축제 거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붐비는 클럽과 아리따운 여성들, 그리고 사람으로 가득한 위험한 거리. 지난밤 그들의 추억과 별개로 과도한 인파에 위험했다는 뉴스가 잠깐 올라왔다 내려가고는 했다. 우린 그때도 사고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었다. 2022년 10월 28일, 부대에서 할로윈 행사 참여의 위험성에 대한 공문을 내렸고 젊은 간부들의 과도한 행사 참여를 금하기 위해 위수지역을 철저히 지키라는 추가 공문이 내려왔다. 내 근무지는 대구에서 서산으로 바뀌었고, 서산 부대는 서울의 접경지라 그런지 이런 이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우리 부대는 코로나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고. 이미 이십 대의 끝자락, 스무 살 초반에도 즐기지 않았던 축제를 이 나이가 돼서 즐길 이유도 없었고 당시 비상대기도 공교롭게 나였다. 사고 전일, 그리고 당일까지도 나는 부대를 지키고 있었고 이 축제를 즐기는 이전 부대의 후배들, 그리고 새 부대의 후배들과 간간히 연락을 하며 축제의 열기를 대신 느꼈다. 29일, 사고가 발생했고 어제까지 우스갯소리로 연락하던 후배들은 이제 살아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그 장소에 있었는지 찾아야 할 대상이 되었다. 가끔 저널리즘에 관련된 책을 읽는다. 한때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리고 뉴스와 정치, 한 사람의 발언이 무겁게 소비되는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제는 알아야 하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 인용저널리즘에 대한 레포트를 써서 대학에 제출한 적이 있었다. 한참 대선으로 국가가 뜨거웠던 시절, 유튜브의 아무개 씨, 정치평론가 아무개 씨의 목소리를 “ ”(따옴표)로 대신해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따옴표 저널리즘’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말도 다소 올드한 말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는 따옴표 저널리즘보다도, 아마 ‘릴스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사회가 되었기에. 이태원 참사는 사실상 릴스 저널리즘의 대표 격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사건이었다. 뉴스에서는 부족한 현장 상황 정보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고, 이런 정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릴스, 유튜브에 있는 영상을 끌어다가 TV에서 생중계를 했다. 그리고 SNS 익명의 목소리라는 거대한 방패 아래에 무분별한 혐오와 공격의 메시지는 덤으로 내보냈고. 영상에선 참사 사고의 사망자들, 부상자들의 모습이 모자이크 없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TV 앞의 많은 시청자들이 이 사고의 정신적 피해자가 되었다. 그 후에 있던 ‘누군가 밀었다’, ‘누군가가 범인이다’와 같은 정제되지 않은 메시지의 남발부터 사건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이를 정치의 더러운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자칭 사회평론가들의 발언까지. 과연 언론은 참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과연 이게 21세기의 저널리즘일까. 그날 언론의 현실에 대한 참담함을 느꼈다. 언론이 무분별한 메시지를 보내는 당시 부대에서는 사고자가 있지는 않은지, 다른 부대 후배 중 사고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조사를 해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의 SNS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용산에서 놀고 있음, 동성로에서 술 마시는 중, 여기는 서울 어디 클럽. 후배들의 소식은 속속들이 발견되었고 한숨을 돌린 우리는 릴스를 우연히 넘기다 다른 영상들을 보게 되었다. 사고 현장에서 CPR을 하면서 제발 찍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소방관, 인근에서 춤추는 주취객, 사람들을 빨리 대피시키기 위해 차 위에서 인원을 인솔하는 어떤 젊은 사람, 그리고 번쩍이는 인근 클럽과 술집…. 나는 이 사고를 떠올릴 때마다 대구 부대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 후배를 떠올린다. 이성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때로는 과음, 지각으로 개인적인 행실에 대해서는 지적을 받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 좋고 일에 몰두하는 후배.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싶어 하면서 선배들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연차가 차면서 책임감도 보이는 후배. 그 후배는 할로윈이면 거리로 나가 이 문화를 즐기고는 했다. 그리고 그 주 주말이 끝난 월요일이면 전날의 열기를 하나의 무용담처럼 풀어내기도 했다. 나는 그 후배가 처음에는 싫었다. 너무 가벼워 보이는 남자여서, 책임감이 부족해 보이는 남자여서, 언제라도 일을 대충 할 것만 같은 인상의 남자여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그는 멋진 남자였고 멋진 군인이었다. 유쾌한 사람이었고 친절한 후배였다. 나는 그의 당당함을 부러워했고 그와 같이 퍽 즐거운 군 생활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이 참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그리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가 너를 잃었을지도 몰라. 이런 행사는 문란한 행사고 평소 행실이 나쁜 사람들이 가서 당한 일인데 무슨 문제냐? 이런 이야기를 SNS에 거리낌 없이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린 멋진 후배이자 유쾌한 동생, 그리고 진짜 군인 하나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사라진다면 인간적인 슬픔, 비통함, 그리고 대단한 인재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타까웠을 거라고. 그 후배와는 이제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대구를 떠난 지 벌써 3년이 흘렀고 그 친구도 내가 전역한다고 말한 전후로 전역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전역하고 사회인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디서든 그 후배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후배가 앞으로도 이런 축제에 계속 참여할 거라는 점도 알고 있고. 그렇기에 앞으로는 이런 축제에 안전을, 모두에게 행복한 장소가 되기를 빌며 살뿐이다. 2025년의 나는 할로윈 축제 기간에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때는 새로운 일을 시작한 후라고 생각한다. 군대도, 코로나도, 행사에서 논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는 나는 늦은 나이여도 거리에 몸을 던질까. 아니, 아마도 집에서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그때는 슬픈 이야기보다는 기쁜 이야기를, 할로윈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를, 거리의 행복한 이야기를 쓰며 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해당 글은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정리를 시작하는 글이다. 평소 서평을 꾸준히 써왔기에 이번에도 서평 3편을 통해 이태원 참사의 기억을 되짚고 간단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 되짚기, 서평을 통해 나아가기, 또다른 내일을 보낼 나, 모든 일들을 시작하기 위해 최근 이태원에 다녀왔다.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보이는 표지판, 여기가 사실 모든 기억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다녀온 이태원은 조금 쓸쓸한 곳이었다. 서평과 모든 글이 끝날 때면 아마 2주기가 돌아오지 않을까. 그때는 이 쓸쓸함에 방점을 찍었기를.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