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나의 첫 번째 핼러윈
나의 첫 번째 핼러윈 (23.10.28.) 이른 저녁, 친구들과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우리는 상가 건물 지하에 있는 작은 연습실을 빌려 짐을 풀었다. 그러고는 각자 챙겨 온 소품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분장을 시작했다. 재민과 인영은 호박 모양의 종이 가면을 조립해 뒤집어썼고, 지오는 '프리다칼로'처럼 양 눈썹을 한 줄로 이어 두껍게 그렸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성용은 커다란 쇼핑백에서 마법사 모자와 반짝이는 재질의 망토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나는 빨간색 후드 집업으로 갈아입어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에 나오는 '미구엘'을 흉내냈는데, 동규가 빌려준 통기타까지 둘러매자 꽤 그럴듯한 모습이 되었다.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거울을 보며 사진을 찍기도 잠시, 막상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이태원의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했다. 해밀톤 호텔 앞 교차로에서는 교통을 관리하는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거리 곳곳에 배치된 경찰은 행인보다 그 숫자가 많아 보였고, 주요 길목마다 설치된 철제 펜스는 우측 통행을 강제했다. 간혹 걸음을 늦추다가는 서둘러 움직여 달라는 핀잔을 들었으니, 사람들과 눈을 맞추거나 대화를 나누기란 몹시 어려웠다. 그 광경을 두고 한 친구는 이렇게 평했다. 꼭 선생님 앞에서 노는 느낌이라고. 또한, 그 일대 전봇대에는 전부 흰색 국화가 걸려 있어 별수 없이 움츠러들기도 했다. 혹시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구는 걸까. 속으로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예년처럼 코스프레를 하고 온 무리를 발견하며 얼마간 안도할 수 있었다.  사실, 일주기를 앞두고 나는 제법 비장하게 약속했다. 올해 핼러윈은 이태원에서 즐길 거라고, 코스튬을 통해 내가 가진 생각을 표현할 거라고. 처음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오기가 앞섰다. 그런데 마을 미디어 용산FM과 함께 기록단 활동을 운영하고 나서는 호기심과 책임감 또한 더해졌다. 녹취록을 읽다 보면, 내심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길래. 나도 한 번 그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던 한편, 인터뷰이 각자의 이야기가 그날 이태원에 머문 사람들을 비추는 증언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니까, 일 년 뒤 같은 자리에서 핼러윈을 즐기는 것으로나마 당신들과 연결되고 싶었다. 나아가 참사 이후를 살아가는 모두가 여기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랐다. 축제의 방식으로 애도를 상상하기 '미구엘' 분장을 선택한 까닭은 오롯이 보영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이태원에 거주하는 보영은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를 떠올렸다. <코코>는 멕시코 명절인 '죽은 자들의 날'을 배경으로 한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세계에 방문하고, 산 자들은 죽은 자들과 같이 어울리며 축제를 벌인다. 언뜻 핼러윈과 닮았지만, 죽은 자들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환대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마찬가지로, 엄숙하기보다 흥겹게 일주기를 보내고 싶은 게 보영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코코>는 '기억'의 중요성을 각별하게 다룬다. 산 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잊힐 때,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마저 영영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용기를 내서 압사가 발생한 골목까지 다다르자, 희생자들을 기리는 물결이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근방에 머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리 제작한 도장을 찍어주었다. 핼러윈을 나타내는 호박 랜턴 이미지 아래 'REMEMBER ME REMEMBER ITAEWON'이라는 글귀를 각인한 도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날 급하게 이런 뜻을 개인 SNS 계정에 공유했더니, 흔쾌히 호응해 준 친구들이 있었다. 태린과 윤호는 그렇게 동행했고, 민경과 윤석과 시연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힘을 보탰다. 뿐만 아니라, 새훈은 따로 사람들 얼굴에 그림을 그려 주고 다녔다. 기록단에 참여한 나연과 다예의 경우, 그 현장을 담겠다며 목에 카메라를 걸고 내내 플래시를 터뜨리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우리는 주현을 만났다. 참사 생존자이기도 한 주현은 똑같이 <코코>를 염두에 두었다. 머리에 메리골드를 본뜬 꽃장식을 더했고, 팔에는 검정색 가죽장갑으로 멋을 냈다. 두 볼에 비즈까지 붙인 주현을 보는 순간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토록 노련하고 화려한 모습과 비교해 나의 '미구엘'은 얼마나 초라하던지.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반갑게 인사하고는 해밀톤 호텔 뒤쪽으로 행진했다. 내가 칠 줄 모르는 기타를 어설프게 튕기는 동안 주현은 보라색 리본과 팔찌를 주변에 건넸다. 그러자 사람들은 화답하듯 손을 뻗는가 하면, 이미 받았다고 자신의 팔목을 자랑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저마다 환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구태여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Remember me, though I..." 난생처음 핼러윈을 즐기며 나는 지난 인터뷰들을 상기했다. 낯을 가리는 승연씨는 코스튬을 통해 자유로워졌는데, 나 역시 홀린듯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자신을 발견했다. 민희씨와 원기씨의 경험담도 비로소 와닿았다. 이태원에는 새로운 풍경들이 가득했다. 각양각색의 차림 속에서 샤인씨처럼 드랙을 한 사람도 있었다. 외국인들과 "해피 핼러윈"을 주고받을 적에는 모하메드씨를 떠올렸다. 시끌벅적한 클럽과 라운지 바를 지나칠 적에는 문득 DJ seesea와 범조씨가 궁금했다. 이 시각,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어느새 다음을 기약하고 있었다. DJ H씨의 제안처럼, 더 많은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놀자 호들갑을 떨고 싶어졌다.  시간은 이내 자정을 넘겼다. 우리는 기념으로 네 컷 사진을 남기고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때 보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사실, 보영은 올해 핼러윈에 반드시 가겠다고 다짐해 왔다. 그런데 일주기가 다가올수록 점점 복잡한 심경이 밀려들었다. 통제된 도로 위에서 그 현장을 목격했던 공포가 여전했을 뿐더러, 썰렁한 이태원을 마주할까 봐 지레 속상했다. 아쉬운 대로 그날 탔던 차에 올라타 오밤중 한 바퀴 돌고 있다고 알렸다. "지금 어디에요?" 운명인지 우연인지 꽤 가까운 위치에 있어 우리는 자칫 엇갈리지 않도록 조바심을 내며 뛰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신호 대기 중인 차량 한 대의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틈으로 활짝 웃는 보영이 보였다. 벅찬 마음으로 술집으로 향한 우리는 가볍게 떠들다 진지해지기를 반복했다. 럭비공처럼 튀는 수다는 곧 내년 핼러윈 계획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때는 어떤 옷 입지?" "좌판 깔고 뭐라도 해야 하나?" "미리 모여서 분장 같이 할까?" 서서히 취기가 올라 가게 문밖을 나서니, 새벽녘 하늘에 별들이 은하수처럼 걸려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까 전의 골목으로 돌아갔다. 희생자들을 위해 절을 올린 뒤, 한쪽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마침 바로 앞 편의점에 사장님이 근무하고 계셔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주현에게도 그 사실을 전했다. 그렇게 둘은 <코코> 분장을 하고서 사장님께 안부를 물었고, 그것을 끝으로 각자 택시를 잡아 유령처럼 헤어졌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핼러윈, 일주기를 하루 앞둔 23년 10월 28일의 이야기다. 나는 그만큼 연결된 감각으로 참사를 기억한다. 물론, 아직 마음이 허락하지 않거나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해 놀기를 주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기록단 활동에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아무렴 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쓴 주된 목적도 이태원의 핼러윈을 대신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참사 이후를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뿐 도무지 놀기 힘든 당신을 책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 이태원 일대를 나란히 걷는 동안 주현과 나는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코코>의 OST를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그 가사를 아래 옮겨 적는다. 잘 놀고 왔다. "Remember me, though I have to say goodbye (나를 기억해줘, 내가 작별 인사를 해야 하지만) / Remember me, don't let it make you cry (나를 기억해줘, 울지마) / For even if I'm far away, I hold you in my heart (내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에 널 품고 있어) / I sing a secret song to you each night we are apart (우리가 떨어져 있는 매일 밤마다 나는 너에게 비밀스러운 노래를 불러) / Remember me, though I have to travel far (나를 기억해줘, 내가 멀리 여행을 가야 하지만 ) / Remember me, each time you hear a sad guitar (나를 기억해줘, 네가 슬픈 기타 소리를 들을 때마다) / Know that I'm with you the only way that I can be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너와 함께 있음을 알아줘) / Until you're in my arms again (네가 다시 나의 품에 안길 때까지) / Remember me (나를 기억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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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지역 사회에서 바라본 이태원 참사
지역 사회에서 바라본 이태원 참사-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 기록단 활동을 중심으로 (23.04. ~ 23.11.) 기록단 ① 배경 - 이태원을 둘러싼 오랜 시선 질문을 던져 본다. 만약 이태원이 아니었다면, 일각의 반응이 달랐을까? 적어도 그 심한 정도가 덜하지 않았을까? 참사 이후 그날 이태원에 머무른 사람들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놀러 가서 죽은 것"이라며 그 책임을 희생자들에게 돌리기 부지기수였고, 그런 모욕은 이태원을 둘러싼 오랜 시선에 기대 확산되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이태원은 이미 너무 위험하고 문란하고 이상한 동네다. 과거 기지촌이 형성된 이래로, 말 그대로 '퀴어'한 존재들이 모여들었으므로. 또한 펜데믹을 거치면서 강화된 성소수자 혐오부터 밀집 경험을 민페로 여기는 감각까지 헤아리면, 지금 이태원에 덧씌워진 편견은 몹시 복합적이다. ② 문제 – 불온한 이태원과 참사 피해 '안전'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레 높아졌다. 압사가 발생한 골목을 두고, 왜 그 위험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데 실패했는지 사람들은 추궁한다. 나아가 일상에 도사린 문제들을 하나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 질문과 각성을 통해 사회는 나아지겠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다. 이태원이 불온하게 그려질수록 참사 피해 역시 그 불온함에 갇혀 해석되기 마련이다. 그날 이태원에 들렀던 사람들 대부분이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고, 같은 자리에서 생활을 이어 가는 주민들 또한 입을 열기를 주저한다. 와중에 빠르게 선포된 국가애도기간이 슬픔의 형식을 제한함으로써 참사에 관해 말할 기회는 일찍 닫히고 말았다. ③ 취지 – 이태원에 얽힌 마음을 듣기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은 그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국가도, 사회도, 타인도 신뢰할 수 없는 탓에 참사를 겪은 개인은 불안한 가운데 놓여 있다. 이태원에서 노는 발길은 한동안 줄었는데, 그건 주변 상권의 침체 그 이상을 뜻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서로를 확인하는 대신 낙인을 먼저 의식했는지 모른다. 따라서 누구든 이태원에서 다시 놀 수 있을 때 비로소 회복이나 해결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작게나마 물꼬를 트기 위해 이야기를 수집하고 싶었다. 각자 품은 사연을 새기다 보면, 참사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지 않을까. 뒤집어 강조하면, 이태원에 얽힌 마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서야 참사는 영영 미지로 남는다. ④ 기획 – 지역에서 잘할 수 있는 작업 나의 경우, 언젠가 그런 고백을 들은 적 있다. “저에게 이태원은 마치 외국 어딘가 같아서 참사가 와닿지 않았어요.” 반면, 용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참사는 꽤 직관적이었다. 추모를 위해 이태원에 들른 지인이 있으면 한동안 가이드 겸 도슨트 역할이 되어 주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지역에서 보다 잘할 수 있는 작업이 있지 않을까. 기획의 방향도 그 위치를 고려해 정했다. 첫째, 제도 정치나 사법, 행정의 관점, 그리고 희생자 유가족 중심의 애도 그 바깥의 이야기를 발굴하자. 둘째, 오늘날 이태원을 표상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참사 경험을 조명하자. 셋째, 지역의 회복과 안전 사회에 대한 방안을 아래로부터 도출하자.  ⑤ 운영 - 마을 공동체 미디어의 역할 활동을 주관한 마을 미디어 용산FM은 주민들과 함께 방송을 만들어 왔다. 주민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 제작 전반에 참여하기를 도왔다. 기록단 운영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기록단은 이태원 일대를 답사하고 구술 기록 워크숍을 수강했다. 질문지 구성과 인터뷰이 섭외, 인터뷰 진행, 기사 작성 등 전 과정을 주도하면서 활동의 의미도 스스로 정립할 수 있었다. 여건이 되는 경우 기록단이 직접 카메라를 잡기도 했다. 과연 그 방식이 지역 사회의 아픔을 다루는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듣는 일만큼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 또한 중요하다. ⑥ 구성 – 정류장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기록단에는 일곱 명이 모였다. 기록 활동가부터 퇴직교사, 스타트업 대표, 사진작가, 대학원생, 디자이너, 다큐멘터리 감독까지. 인상 깊었던 건, 대부분 동네 버스 정류장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신청했다는 점이다. 녹사평, 이태원, 해방촌 등을 지나고 있었고, 이미 근방에 거주하거나 노동하고 있었다. 주로 개인적인 인연이 계기로 작용했을 뿐, 관련 활동을 해 본 경험도 드물었다. 그렇게 모인 마음들을 통해 참사에 관한 갈증이 얼마나 큰지 엿본다. 나중에 기사 원고를 적에는 형식을 통일하기보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도록 제약을 최소화했다. 또한 기록단을 역으로 인터뷰해 처음 계획에 없었던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다. ⑦ 죄책감 – 책임감으로 승화하지 못한 한편, 살아남은 사람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발 디딜 틈 없던 골목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위험을 인지하고도 예방하지 않은 자신을 탓한다. 누군가 죽어 가는 줄도 모른 채 축제를 즐긴 사람은 그날 웃고 떠든 자신을 탓한다. 현장을 목격한 뒤 빠져나온 사람은 구조에 나서기 망설인 자신을 탓한다. 아비규환 속에서 CPR에 임한 사람은 한 명이라도 더 살리지 못한 자신을 탓한다. 그리고 사람들. 또 한 번 반복된 참사 앞에 선 사람들은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죄책감을 책임감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만한 계기는 흔치 않다. 참사를 외면하는 식으로 고통을 떨쳐 내기도 쉽다. ⑧ 답답함 – 상실을 나눌 만한 장의 부재 답답함도 가득하다. 그날 사람들이 잃어버린 세계는 희생자들의 총합을 넘어선다. 하지만 그 상실을 나눌 만한 장은 한참 모자라다. 모든 게 조심스러워 말을 꺼내기를 저어하는 사람도 있고,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함구하는 사람도 있다. 들어맞는 표현을 떠올리느라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기대와 다른 응답이 돌아올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참사가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면 모두에게 치유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데, 정작 그 상처를 서로 내보일 수 있는 관계를 찾기란 참 어렵다. 그보다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야 마는 풍경이 차라리 익숙하다. 그사이, 상처는 안으로 곪을 수밖에 없는 걸까.  2. 인터뷰 ① 섭외 – 이태원과 연결된 인터뷰이 김혜영, 신정임, 노호태, 신솔아, 심나연, 홍다예. 기록단은 아홉 명의 인터뷰이를 섭외했다. 혜영씨는 이태원 떠들썩한 복판에 사는 보영씨의 마음을, 정임씨는 매년 가족 단위로 핼러윈을 즐기던 민희씨와 원기씨의 마음을, 호태씨는 단골 칵테일 바를 운영하는 범조씨의 마음을, 솔아씨는 이태원 클럽씬에서 음악을 트는 DJ의 마음을, 나연씨와 다예씨는 드랙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샤인씨와 이태원에서 놀기 좋아하던 승연씨의 마음을, 보영씨는 다문화 공동체를 찾아온 모하메드씨의 마음을 각각 들었다. 과연 당신에게 이태원이란 어떤 의미인지, 참사 이후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 아래는 그 대답의 일부다. ② 윤보영 – 애증의 사정을 아는 주민들 이태원역 근방에는 클럽과 술집만 들어선 게 아니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산다. 보영씨는 이태원 대로변에 거주한다. 주말이 지나면, 거리에서 쓰레기와 널브러진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똥오줌까지도. 핼러윈 때는 항상 휴가를 사용해 일찍 귀가했다. 하지만 그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이태원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의 공간은 내가 어떤 존재이든 포용해 줄 것만 같다. 그 애증의 사정을 아는 주민들은 희생자들에 대해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물론, 같은 주민이더라도 연령에 따라 거주 위치에 따라 가족 구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③ 김원기/임민희 - 온 동네 잔치로서의 핼러윈 용산에서 나고 자란 원기씨에게 핼러윈의 의미는 남다르다. 어릴 적부터 용산 미군기지 장교들의 숙소였던 외인아파트 가까이에서 외국 문화를 접해 왔다. "Give me a chocolate!"를 외치며 이웃집을 방문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편 민희씨에 따르면, 이태원의 핼러윈은 온 동네 잔치다. 주택가 곳곳 호박 장식과 사탕 바구니가 걸리고, 어린이집과 공원에서 행사가 열린다. 아이들은 가족 단위로 거리를 구경하며 다양한 세계를 익힌다. 그렇듯 이태원의 핼러윈은 고유하고 다채롭다. 클럽이나 술집에서만 기념하는 것도, 청년들만 즐기는 것도, 유흥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흔히 폄하되듯 ‘외국 귀신 놀이’에 불과하지 않다.  ④ 곽범조 – 매출이 보여주지 않는 회복 칵테일 바를 운영하는 범조씨의 경우, 이전만큼 손님들이 돌아오더라도 장사를 접을 참이다. 참사를 직접 겪은 충격뿐만 아니라 코로나 때부터 이어진 생계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개인이 통제하기 어려운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말 그대로 방도가 없다. 그런 감각은 단기적인 지표로 포착되지 않는데, 마찬가지로 매출 중심으로 회복을 논한다면 많은 곤란을 놓치기 쉽다. 가령, 범조씨가 이태원에 자리 잡은 데에는 한 시절 자신이 즐겨 찾던 놀이터를 물려주고 싶은 바람도 있다. 지역의 특색이란 그렇게 재생산되기에, 회복도 그 역사에 대한 이해 위에서 가능하다. 다른 어디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이태원의 모습이 있다. ⑤ 선샤인 – 자유를 익히는 공간, 이태원 퀴어 아티스트 샤인씨에게 이태원은 선망의 공간이었다. 그 정제되지 않은 매력에 일찍이 빠졌다. 이태원에서는 상대방의 배경을 묻는 일이 드물다. 그저 “너 재밌다. 나랑 놀자”로 통한다. 옷차림에 대해서도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시상식에서처럼 입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 개의치 않음을 통해 불특정 다수가 자신을 옹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속력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이태원에서는 편견을 드러내는 일이 훨씬 눈초리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이태원에 오기도 하지만, 이태원에서 자유를 익히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동안 학습된 편견을 점점 깨 나가는 것이다. ⑥ 정승연 – 핼러윈 코스튬을 통한 일탈 낯가림이 심한 승연씨에게 이태원의 핼러윈은 곧 일탈의 기회가 되었다. 캐릭터 분장이 부끄럽기도 잠시, 이태원에서만큼은 금세 자신감이 솟았다. 나중에는 낯선 이에게 먼저 다가갈 만큼 적극적이 되는데, 그건 아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덕분일 것이다. 평상시 이태원이 간직한 분위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범조씨는 강남과 이태원을 이렇게 비교했다. 강남은 퇴근 후 집에 들러서 다시 세팅하고 가는 곳이라면, 이태원은 그냥 바로 가도 상관없는 곳이라고. 승연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태원에서는 다른 어디에서보다 자기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틀에 박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⑦ DJ – 추모 방식의 또 다른 가능성 이태원에는 음악이 흐른다. 씬이 형성되어 있어 무수한 클럽에서 음악을 틀며 각기 다른 매력을 자랑한다. DJ H씨는 애정하는 클럽의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참사 이후 이태원에서는 ‘이태원 스트롱’이라는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보스턴 마라톤 참사 때 등장한 ‘보스턴 스트롱’이라는 구호를 본뜬 것이다.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면서 많은 공연과 전시가 중단되었지만, DJ들은 이전부터 예정된 파티를 그대로 진행했다.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로, 춤추는 사람은 춤으로, 음악 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건 그렇게도 가능하다. 이태원에서 계속 놀겠다는 다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⑧ 모하메드 – 한국어로 도착한 재난 문자 이태원 일대를 걷다 보면 다양한 음식점, 빅 사이즈 옷가게, 환전소 등이 눈에 띈다. 보영씨는 흔히 보이는 케밥집에 대한 호기심으로 외국인 인터뷰이 섭외를 희망했다. 외국인이라는 큰 범주 안에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모하메드씨는 참사 소식을 접하고 깜짝 카메라인 줄 알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어로 도착한 재난 문자에 대한 아쉬움을 술회했다. 앞서 곽범조씨는 외국인 손님의 경우 내국인과 다르게 참사 한 달 뒤부터서야 발길이 끊겼다고 전했다. 외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차별적인 지원이 보도되기도 했다. 과연 이태원의 외국인은 지금 이 순간 참사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을까. 3. 함의들 ① 골목 – 이토록 다양한 피해의 층위 참사가 발생한 골목은 외딴섬이 아니다. 누구든 쉽게 드나들 수 있고, 그만큼 쉽게 휘말릴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다. 지하철역 출구와도 인접해 있다. 따라서 희생자와 생존자, 구조자, 목격자 사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밀집된 인파 속에서 어린 자녀의 손을 붙잡고 겨우 빠져 나왔던 원기씨와 민희씨 부부는 생각한다. 만약 그대로 떠밀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를 잃을 뻔한 상황에 아찔해지는 한편, 그날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들의 생사가 걱정이다. 보영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도로 위에서 차량에 갇힌 채 현장에 노출되었던 보영씨는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바닥에 누워 있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② 당사자 – 참사의 영향 아래 놓인 사람 참사는 그날 이태원에 머무른 사람들을 관통한다. 나아가, 직간접적으로 소식을 접한 모두가 참사의 영향 아래 놓인다. 이태원의 핼러윈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DJ H씨는 일상에 도사리던 죽음을 체감하고, 모하메드씨는 분향소에 걸린 앳된 면면을 보며 미안해한다. 자신과 당신, 둘의 운명을 가른 데에는 한 끗 차이밖에 없으므로. '나' 역시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공포가 새겨졌지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당사자를 폭넓게 상상해야 한다'는 정임씨의 뜻과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나연씨의 뜻은 그런 점에서 통한다. ③ 편견 - “왜냐면 내가 많이 변했거든요.” 모르는 영역은 곧잘 편견으로 채워진다. 특히 이태원과 핼러윈을 둘러싼 혐오는 참사를 해석하는 데 강력하게 작용한다. 일각에서는 "거길 왜 갔냐"라며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보영씨는 지적한다. 이태원과 핼러윈을 몸소 경험해 본 주민들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그만한 이해가 드물어 침묵에 잠기는 건 오히려 주민들 쪽이다. 누군가의 고통은 또 다시 가중된다는 점에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당연스럽게도 기록단조차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만, 인터뷰를 통해 변화해 나가기도 했다. 사람들이 과연 바뀔지 묻는 질문에 혜영씨는 확신했다. "왜냐면 내가 많이 변했거든요." ④ 피해 – 그날 이후 잃어버린 무언가 이태원은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기에 회복을 고민해야 한다. 과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헤아려야 한다. 가령, 삼대 째 이태원에 거주하는 원기씨에게 핼러윈의 의미는 각별하다. 유년 시절부터 함께해 온 만큼 아득한 추억이 거기 쌓여 있다. 그 문화가 위태로워질수록 원기씨의 뿌리도 흔들린다. 또한 드랙퀸 활동을 하는 샤인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로서 샤인씨가 느끼는 연대감은 여기 모인 이방인들을 아우른다. 이태원의 위기를 두고, 샤인씨는 왠지 악착같다. 그렇듯 참사의 여파는 실존 깊숙이 미치고, 이태원의 침체는 지역 사회에 치명적이다. ⑤ 정치 – 양극화된 정치 현실 속 침묵  '정치적인 것'에 대한 경계심이 도드라졌다. 그런 이유로 인터뷰이 섭외에 실패하기도 했으며, 인터뷰이의 염려를 거듭 덜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의 필요성을 부정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그 반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 참사에 대해 입을 열 때 사람들이 지는 부담을 고려해야 한다. 솔아씨는 양극화된 정치 현실에서 의견 표출이 얼마나 두려운지 공감한다. 나연씨는 거리마다 나부끼는 정당 형수막이 마치 기사 댓글 창 같다고 한 지인의 평을 떠올린다. 중간쯤에 있는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는 승연씨는 인터뷰 말미 한숨 쉬듯이 답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한 거니까 잘 들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⑥ 애도 – 일상과 분리된 추모의 한계 일상과 추모는 분리되어야 하는 걸까. 추모는 꼭 무겁고 엄숙해야 할까. 한동안 영업을 중단했던 범조씨는 압사가 발생했던 골목 앞을 일부러 지나면서도 국화를 놓거나 포스트잇을 붙이지는 못한다. 일주일에 몇 번씩 이태원에서 약속을 잡던 승연씨는 '애도'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고백한다. 둘 다 안타까움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더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게 있기 때문이다. 이에 DJ H씨는 고인의 마지막을 흥겹게 지키는 아프리카 장례를 예시로 든다. 보영씨는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를 떠올리며 산 자와 죽은 자가 어울리는 하루를 상상한다. 솔아씨와 샤인씨는 이태원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를 제안한다. ⑦ 불신 – 사회를 향한 불신의 누적 물론 이런 의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참사 그 자체가 해결되어야 한다. DJ Seesea씨는 삶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음을 호소한다. 책임 있는 자의 적절한 사과나 반성이 뒤따른 적이 없기에, 개인적인 치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를 향한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다. 한편, 대부분의 기록단이 이태원 참사를 통해 세월호 참사를 연상한다. 더불어 이듬해 이어진 오송 참사와 서이초 사건 등을 언급하며 무너진 신뢰에 대해 고심한다. 참사 당시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겼던 호태씨가 ‘믿음’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한 것도 비슷한 취지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무수한 상처들이 아물지 않은 채로 나날이 누적되고 있다. ⑧ 지역 – 여전히 미지로 남은 이야기 기록단은 이미 지역에서 형성한 관계를 바탕으로 인터뷰이를 섭외했다. 물론, 여전히 미지로 남은 이야기가 가득하다. 같은 주민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연을 품고, 상인들 역시 업종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상이하게 겪는다. 외국인과 이주민의 생활도 천차만별이다. 청소년과 노인의 경우도 다름없다. 그러고 보면, 보영씨는 참사 직후 당근마켓 어플에 게시된 내용들을 기억한다. "슬프다", "미안하다",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막막하다" 그리고 댓글로 자신의 상담 경험을 공유했다. 아쉽지만, 모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기록단 활동이 더 많은 연결을 위한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며 맺는다.  4. 고민들 ① 핼러윈 – 참사 일주기의 과잉된 반응들 참사 일주기를 앞두고 정부·지자체가 내놓은 핼러윈 대책은 문제적이다. "오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원기씨의 바람이 무색하게, 이태원 거리 곳곳에 배치된 경찰은 행인보다 그 숫자가 많아 보였다. 또한, 주요 길목마다 설치된 철제 펜스는 우측 통행을 강제했다. 걸음을 늦추다가는 서둘러 움직이라는 핀잔을 들었으니, 사람들과 눈을 맞추거나 대화를 나누기란 어려웠다. 과연 그런 통제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걸까. 그토록 과잉된 조치는 위험을 관리하기보다 위화감을 조성할 뿐이다. 한편, 마포구에서는 ‘핼러윈 금지’ 현수막이 붙기도 했다. 놀이공원이나 식품 업계에서는 핼러윈 마케팅을 다른 방식으로 대체했다. ② 이야기 – 도무지 듣지 않고자 하는 사회 어떤 이야기는 수면 위로 넘실댄다. 반면, 어떤 이야기는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다. 익숙한 틀에 들어맞지 않는 목소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누락되는데, 누군가의 삶도 그렇게 고립된다. 핼러윈 다음 날,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는 이태원 참사 일주기 추모 대회가 열렸다. 주현씨는 생존자로서 무대에 올랐지만, 그 자리를 지배하는 정서와 구호를 읽으며 많은 것을 덜어내야 했다. '참사'가 '참혹한 일'을 뜻한다면, 나에게는 온통 참혹한 일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참사를 설명하기 위해 갈피가 될 만한 조각들을 내보이는데, 그런 이야기는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듣지 않고자 하는 힘이 사회에 만연하다. ③ 분향소 – 확인하고, 학습하고, 교감하는 분향소에서는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면전에 대고 훼방을 놓는 사람들은 꾸준히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헌화하는 행렬이 길었다. 언젠가 다국어로 적힌 홍보물이 설치되자 외국인의 관심이 늘었고, 어린이들은 항상 왕성한 호기심으로 보호자를 잡아끌었다. 그 앞에서 나는 이 참사에 대해 무어라 설명해야 했을까. 곳곳에 쓰인 '기억', '애도', '안전' 같은 단어를 두고도 금세 머릿속이 하얘졌다. 또한 분향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추모객이 들렀다. 외딴섬 같은 그 공간에 연대하면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했다. 혹은 참사에 관해 확인하고 학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④ 기록 – 참사 피해를 기록할 때의 원칙 기록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근거한다. 녹취록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그 행간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몇 가지 태도를 유념했다. 가령 많은 피해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피해가 고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나름의 방식으로 참사가 야기한 문제에 대응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 피해가 아무리 클지언정 그것이 한 개인을 이루는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삶의 일부로서 어떤 맥락 위에 놓이는지 살펴야 한다. 이태원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움직임과 문화에 주목해야 공평하되, 그 풍경을 마냥 아름답게 담는 게 정답은 아니다. 이태원 안에서조차 구역에 따라 그 분위기는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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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2)
기억 담기 모임 참여 (23.10.07.) - 듣는 자리 이태원역 1번 출구. 우측으로 돌면, 좁고 경사진 골목이 나온다. 한쪽 벽면에는 시민들의 마음이 담긴 포스트잇이 한창 붙어 있었고, 문화연대에서는 매번 현장을 정비하며 포스트잇을 수거해 분류 보관했다. 일 년 전, 나는 자원 봉사자로 참여해 그 작업을 함께했다. 연휴 전후로 단장한 추모 공간에는 오색빛 메시지가 가득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실, 포스트잇에 쓰인 내용을 잘 읽지 못했다. 어쩐지 남의 일기장을 들추어 보는 것만 같아 그 마음이 편치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신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 주목했다. 이미 현장이 익숙한 활동가는 바로 앞 편의점부터 방문했다. 따로 챙겨주기 전에 음료를 계산했지만, 사장님은 아랑곳 않고 몇 병을 덤으로 얹어 주었다. 오래된 포스트잇을 떼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자칫 귀퉁이가 찢어지면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뗀 것은 빈자리로 옮겨졌다. 점성이 낮은 테이프가 비치되어 있었고, 무언가 훼손되지 않도록 애쓰는 마음이 거기 살아 숨쉬었다. 고개만 돌려도 구석에 적힌 혐오를 지우려 물티슈를 박박 문지르는 고생이 눈에 띄었다. 새로 추모 공간이 조성될 때까지 그런 작업이 이어져 왔다. 사무실로 이동해 참사 초기의 포스트잇을 정리했다. 유가족 혹은 지인의 메시지, 생존자 혹은 구조자의 메시지, 번역이 필요한 메시지, 그 외 메시지 등의 기준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판단이 어려운 경우뿐만 아니라 인상 깊은 이야기가 보이면 서로 나눴다. 나는 역시나 그걸 잘 읽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몇 개 아로새겼다. 일 년이 지난 지금, 기억 담기 모임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분향소 지킴이 연대 (22.12. ~ 23.6.) - 분향소 단상  참사 이후, 한동안 시민 분향소를 찾아 지킴이 활동을 자원했다. 매주 일요일 두 시간 남짓, 그 근방을 지나는 시민들을 맞이하며 국화를 전하거나 서명을 받는 게 주된 역할이었다. 앉을 수 있는 의자가 한구석에 마련되어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서 있는 게 편했다. 때 맞춰 교대하는 봉사자와 유가족을 지켜보고 있자니, 몸도 마음도 겸손해졌다. 또한, 그곳을 방문하는 모두에게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 발길을 옮기지 못해 머뭇대는 모습이 흔했는데, 전해 듣기로는 비교적 인적이 드문 새벽 홀로 오열하다 떠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영정 속에 잠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슬픔에 잠긴 누군가를 위해 예를 다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분향소에서는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면전에 대고 훼방을 놓는 사람들은 꾸준히 많았다. 가령,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고는 "돈 때문에 그러는 거지?"라고 뱉는 식의 무례함들. 하지만 그보다는 헌화하는 행렬이 길었다. 언젠가 다국어로 적힌 홍보물이 설치되자 외국인의 관심 또한 늘었다. 거기 적힌 내용을 읽는 표정은 어찌나 진중하던지. 물론 너무 인접해 희생자 사진을 찍는다면, 정중한 몸짓으로 난색을 표해야 했다. 그럼 대부분 "okay"하며 카메라를 내린 채 뒤로 물러섰는데, 한 번은 "he is my cousin"이라며 양해를 구하는 일도 있어 아차 싶기도 했다. 회화에 능하지 못한 나는 그 순간 미안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일 뿐이었다. 그 이상의 위로를 건네지 못한 게 여전히 아쉽게 남아 있다. 어린이들은 왕성한 호기심으로 보호자를 잡아끌었다. "여기 뭐하는 데야?" 궁금해하거나 "한 번 가 볼래!" 내지르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보호자들은 쉽게 당황했지만, 사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오히려 안타까웠던 건, 그 야단법석이 제지 당할 때. 이곳은 배움의 장이 될 수도 있는데, 황급히 자리를 뜨고 마는 게 조금은 미웠다. 그래서인지, 분향소에 시선이 꽂힌 어린이에게 조심스레 흰 꽃을 쥐어 주는 보호자를 목격하면 기분이 들떴다. 동시에 고민하기를, 그토록 순진무구한 눈빛 앞에서 과연 나는 이 참사에 대해 무어라 설명해야 했을까. 곳곳에 쓰인 '기억', '애도', '안전' 같은 단어를 두고도 금세 머릿속이 하얘졌다. 밑도 끝도 없이 파고들수록 내가 외워 온 뜻은 백지장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분향소가 서울 시청 앞 광장으로 이동한 뒤로는, 전국 각지에서 추모객이 들렀다. 하루는 시설 보수를 위해 운영을 잠시 멈췄는데,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쉬워하는 어르신을 응대하기도 했다. "일부러 기차 타고 왔는데…" 그는 나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고, 내일부터 재개할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만하는 줄 알았잖아!" 이어지는 호탕한 웃음에 나도 따라 미소 지을 수밖에. 어쩌면 그런 일화를 쌓는 재미로 지킴이 활동을 이어 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꼭 외딴섬 같은 공간에 연대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했다. 혹은 지금 참사에 관해 확인하고 학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나에게는 그게 참 어려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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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1)
집담회 기획 (22.12.22.) - 말 걸기, 물꼬 트기 "얘들아 이태원 뭐냐..." 그날 저녁, 친구에게 메시지를 받은 나는 무심코 'ㅋ'을 연타하며 답장을 보냈다. 늘상 일이 바빴던 친구이기에, 오래간만에 여유를 즐기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 친구가 놀러가서 아주 신이 났구나.'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그 행간이 다르게 읽혀 혹시나 하는 마음에 SNS에 접속하니 충격적인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도무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싶어 오밤중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내 생각을 멈추고자 쫓기듯 잠을 청했고, 다시 깰 때쯤에는 사상자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 있었다. 한동안 얼이 빠진 채로 방 안 곳곳을 서성였다.Q1) 이튿날 아침, 친구들은 서로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괜찮냐고 물었고, 또한 괜찮다고 답했다. 물론 그래서 정말 괜찮았던 건 아니다. 이미 참사를 둘러싼 반응들에 기진한 상태였다. 한 지인은 현장 사진을 공유하며 "내가 이래서 핼러윈을 싫어하는 거야"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또 다른 지인은 전화로 "너는 저런 데 안 다녀서 다행이다" 걱정스레 덧붙였다. 아직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지 않냐고, 그런 항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다들 혼란한 와중이라 그러겠거니 이해를 우선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주변 피해가 없다며 쉽게 한시름 놓던 자신이 부끄러운 탓도 있었다.Q2) 참사 직후 내가 겪었던 것들이란 그렇다. 슬픔과 분노보다 무력감과 소외감이 훨씬 깊었다. 먼저, '왜'라는 의문을 가질수록 무력감에 휩싸였다. 우리 사회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망가졌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그 해결도 요원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속절없이 흐르는 일상에 소외감이 들었다. 모두 이 정도 비극쯤은 금세 잊고 지내는 건지 지나치게 조용한 풍경이 이상스러울 때가 많았다. 정치권과 시민 사회는 기민하게 대응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은 여전했다. 정권의 책임을 묻는 것 이상의 고민과 국가가 가로막은 애도를 나누기엔, 어쩐지 전부 아쉽게 다가왔다.Q3) 그해 겨울, 수시로 이태원역을 찾았다. 하루는 피켓을 들고 "프리허그"를 외치는 외국인 모녀를 보았는데, 내가 그런 캠페인에 더 이상 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몹시 당황했다. 동시에 방문객들에게 일일이 국화꽃을 쥐여 주는 상인의 모습을 숭고하게 바라보았다. 그만큼 복잡한 심정이 뒤따랐고, 어쩌면 꼭 복잡하게 참사를 해석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초등학교 동창을 잃은 친구와의 동행이었다. 골목 주위를 걷다 정류장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몇 대의 버스를 떠나보냈다. 아무래도 소화하지 못한 말뿐이라 두서는 없었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Q4) 흔히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연결이 어떻게 가능한지 몰라 곧잘 헤맨다. 그 무렵, 나는 갈피를 잡고 싶어 일정이 되는 대로 관련 행사에 참석했다. 대개는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반복되는 여성들의 죽음을 연상했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염려된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해외에서 소식을 접하고 추모 공간을 꾸렸다는 목소리도 있었고, 유가족과 생존자의 회복을 돕고 싶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혼자 하던 속앓이를 털어놓으며 치유될 수 있음을,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뢰를 쌓을 수 있음을 실감했던 것 같다.Q5) 집담회를 직접 기획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데서 출발하고 싶었다. 다만, 전문가의 조언도 유념했다. 허심탄회한 모임은 위험할 수 있다고. 저마다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기 마련이기에, 그런 바람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상처가 덧난다고. 때문에 얼마간 주제를 좁힐 필요가 있어 참석자들과 공유할 몇 가지 질문을 미리 정했다. 또한 그에 대해 내가 먼저 대답해 보았다.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로 말을 걸고 물꼬를 트고 싶었는데, 사실 이 글이 그 당시 그렇게 쓰인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데 여전히 유효하지 않나 싶어 조금 고쳐 남겨 본다.Q6) 질문들 Q1) 어디서 어떻게 참사 소식을 접했나요?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들었나요?Q2)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위로 혹은 상처가 되었던 순간이 있었나요?Q3)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느꼈나요? 무엇이 고민되었나요?Q4) 어떻게 추모하고 애도했나요? 그 방식을 어떻게 이어 가면 좋을까요?Q5) 어떤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어떤 이야기까지 들어 보았나요?Q6) 지금 당장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혹은 어떤 실천을 해 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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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토록 참혹한 날들 속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구호 앞에 서면 왠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하나의 소리가 크게 들릴 때 그 밖의 작은 소리는 소거되기 쉬우므로. 물론 그날의 일이 왜 발생했는지 아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그러니까, 왜 대비도 대응도 못했는지 밝혀야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누군가 의무를 내던진 이유를 추궁할 때 그 책임에 무게가 실리기 마련이고, 죽음의 과정을 이해하는 건 망자를 그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게 참사를 해결하는 전부일까. 말 그대로 ‘참혹한 일’이 ‘참사’의 정의라면, 나에게는 그날 이후 펼쳐진 모든 날들이 참혹했다. 때문에 두 가지 구호로만 소화하기에 참사는 훨씬 거대한 것이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 보자. 저녁 식사를 마칠 무렵, 단톡방 알림이 울렸다. “얘들아 이태원 뭐냐...” 항상 업무가 바빴던 친구가 핼러윈을 즐기는 줄 착각하고, 나는 ‘ㅋ’을 연발하며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금세 그 행간이 다르게 읽혀 SNS에 접속하니, 충격적인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도무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싶어 오밤중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쫓기듯 잠을 청했는데, 다시 일어날 때쯤에는 사상자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 있었다. 그 아득한 현실에 얼이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주변의 반응에 더욱 기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래서 핼러윈을 싫어하는 거야.” “너는 저런 데 안 다녀서 다행이다.” 일상은 속절없이 흐른다. 먼저, 그날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른거렸다. 그 다음에는 현장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혹은 나처럼 멀리서 소식을 접했을 사람들이. 가슴팍에서 많은 게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한 모습들이 못내 기이하게 다가왔다. 과연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이 필요 없는 사회도, 말하지 못하는 사회도 끔찍하기 매한가지인데. 국가애도기간을 거치는 동안에는 숱한 행사와 공연이 중단되었다. 그런가 하면, 온라인에서는 “놀러 가서 죽은 것”이라며 참사의 사회적 해결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만연했다. 그리고 그 사이, 159번째 희생자 이재현씨가 친구들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참사로서 편견과 혐오의 문제 그날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긴 사람들에 대한 혐오는 여전하다. 누군가의 고통은 그렇게 가중된다는 점에서 참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때, 그 혐오는 핼러윈과 이태원을 향한 편견에서 기인한다. 핼러윈을 모르는 사람에게 핼러윈은 ‘외국 귀신 놀이’에 불과하다. 이태원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태원은 ‘미군기지가 위치한 위험한 지역’, ‘젊은 애들 노는 문란한 지역’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크게 강화된 시선 역시 작용한다. 언론에서는 코로나 확산 진원지로 이태원의 성소수자를 선정적으로 지목한 바 있고, 사람들은 밀집 경험을 민폐로서 감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게, 거길 왜 갔냐” 같은 비난은 그런 토양에서 자란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1차 추모제의 제목은 그랬다. 그러고 보면, 분향소를 방문해 희생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기사를 통해 유가족의 사연을 새길 수도,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에 동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거기서 그치는 걸까. 나는 저마다 기억하는 전부를 증언해야 한다고 여긴다. 언젠가 참여했던 집담회에서 그런 고백을 들은 적 있다. “저에게 이태원은 마치 외국 어딘가처럼 와닿지 않는 측면이 있어요.” 용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날의 현장은 직관적이었지만, 사실 누군가에게는 상상조차 어렵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렇다면, 핼러윈과 이태원이 베일에 싸이지 않도록 기억의 파편을 잘 모아야 한다. 나아가 앞으로 어떤 기억을 만들지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날 이후 나는 일부러 이태원에 자주 들른다. 다가오는 핼러윈에도 놀러갈 작정이다. 더는 들을 수 없는 증언을 미지로 남기는 대신 그에 근접한 기억을 새로 쌓기 위해서. 그렇게나마 그날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긴 사람들과 연결된 기억 속에 묶이고 싶다. 그런데 일주기를 앞두고, 곳곳에서 핼러윈 지우기에 여념이 없다. 놀이공원은 핼러윈을 벌써 다른 테마로 대체했고, 유통업계는 핼러윈을 건너뛰고 크리스마스를 준비 중이다. 심지어 마포구는 ‘핼러윈 금지’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그 외침이 무색하게, 일각에서는 기억에 대해 아주 완강히 거부한다.  ‘죄책감’과 ‘답답함’을 넘어 나는 지난 5월부터 <다시 놀고 싶다, 이태원> 기록단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 활동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세운 취지는 명확하다. 무엇보다 이태원을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이태원은 어떤 의미인지, 그날 이후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듣고 싶었다. 본격적인 인터뷰 진행에 앞서 7명의 기록단을 모집했다. 특징적인 건 대부분 동네 버스 정류장에 붙은 포스터를 확인하고 신청했다는 것. 녹사평, 이태원, 해방촌 일대를 지나고 있었고, 이미 그 근처에서 거주하거나 노동하고 있었다. 주로 이태원에 관한 개인적인 인연을 간직했을 뿐 관련 활동 경험도 거의 없었다. 종사하는 분야도 천차만별이다. 그렇게 모인 마음들을 통해 참사에 관한 커다란 갈증을 실감했다. 특히 두 가지 감정이 도드라졌다. 먼저, 살아남은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매년 붐비던 골목을 알던 사람은 그 위험을 인지하고도 예방하지 않은 자신을 탓한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줄도 모른 채 축제를 즐기던 사람은 그날 무심히 웃고 떠들던 자신을 탓한다. 현장을 목격한 뒤 겨우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구조에 망설이던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런 죄책감을 적절히 해소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개인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감정을 덜어내지 못한 채 심화되거나 끝내 그 원인이 되는 참사를 외면하고 만다. 공동체 회복에 기여할 방법이 없으므로. 한편, 답답함도 가득하다. 그날 각자가 잃어버린 세계란 희생자들의 총합을 한참 넘어선다. 하지만 그 상실이 낳은 공포와 슬픔, 혼란, 분노 등을 나눌만한 장이 현재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고 보면, 기록단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서로를 발견하는 것만으로 치유 받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었구나.’ 다들 좀처럼 말을 꺼내기 힘든 여건에 놓여 있다. 그 기이한 침묵 속에서 개인의 상처만 곪는다. 모든 게 조심스러워 입을 열기를 주저하게 되고, 그 어떤 표현도 와닿지 않은 탓에 고립에 처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불충분한 구호에 다양한 마음을 우겨넣는 사회,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타인의 이야기를 함부로 재단하는 사회가 벽처럼 서 있다. 그날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 기록단은 9명의 인터뷰이를 만나 증언처럼 이야기를 들었다. 가령, 이태원의 핼러윈은 온 가족이 기다리는 온 동네 축제다. 핼러윈이면 집집마다 사탕 바구니가 걸린다. 지역 주민인 부부 민희씨와 원기씨는 매년 아이들 손을 잡고 이태원 일대를 구경하는 재미에 빠진다. 무엇보다 삼대 째 이태원에 거주하는 원기씨의 경우, 그날 이후 행여 유년의 추억이 사라질까 염려가 가득하다. 그 다음, 상인 범조씨는 매출이 돌아오더라도 가게를 정리할 참이다. 코로나에 이어 연달아 침체된 상권 속에서 생계의 불안정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태원을 찾는 사람들이 한때 자신이 경험했던 즐거움을 계속 누릴 수 있길 바라는 그의 마음도 위태롭다. 일찍이 이태원을 선망했던 샤인씨는 어쩐지 악착같다. 마치 당위처럼 “괜찮아야 했다”라고 강조한다. 퀴어 아티스트로서, 이곳이 아니면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고 위기의식을 느낀다. 샤인씨는 자유와 환대의 광장 이태원을 아끼는데, 동시에 그런 자유와 환대가 가능하기까지 필요했던 배움 역시 강조한다. 상대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하는 만큼 나도 상대를 그렇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태원을 즐겨 찾던 승연씨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낯을 많이 가리는 승연씨는 이태원을 통해 변해 가는 자신을 보았다. 특히 난생처음 핼러윈 코스튬을 시도하며 한결 자유로워진 자신을. 그날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의 일부가 이렇다. 한편, 클럽 DJ들은 그날 이후 고민에 빠졌다. 예정된 파티를 진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대신 추모의 뜻을 담아 ‘이태원 스트롱’이라는 슬로건을 떠올렸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노래로, 춤을 추는 사람은 춤으로, 디제잉을 하는 사람은 디제잉으로 그날을 기억할 수 있다고.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가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일상과 애도는 분리되어 있고, 그만큼 사람들은 자칫 피로감에 빠진다. H씨는 아프리카 장례를 예시로, 보영씨는 애니메이션 <코코>를 예시로, 솔아씨는 퀴어퍼레이드를 예시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경계를 허물고 함께 어울리는 풍경을 상상했다. 나는 참사란 걸 그렇게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까, 묻고 싶다. 이것은 참사가 아니란 말인가. 다뤄지는 참사의 범위가 너무 좁게 느껴진다. 그날 이후 나의 친구들은 저마다 다른 청년들의 죽음을 떠올리기도 했다. 신당역에서 살해된 여성, 구의역에서 사망한 노동자, 연쇄적으로 사라진 성소수자 지인들, 그리고 언젠가 생의 끝자락에 서 있던 자신까지. 어쩌면 두서없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횡설수설한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들은 꼭 그렇게 그날 이후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듣지 않고자 하는 힘이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침묵, 편견과 혐오, 죄책감과 답답함, 상실, 일상과 애도 등 전부 참사의 영향권 아래 있다. 해결 역시 그만큼 거대해야 하지 않을까.
10.29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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