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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어공주>는 <원작 인어공주>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인어공주는 과도한 PC?] 글의 댓글에 달리는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읽어보면 PC와 미디어 상업예술의 관계가 한층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이미 여러곳에서 이번 <인어공주>의 영화적 요소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PC에 굉장히 친화적이고 지지하는 트위터 이용자분들 중 몇몇도 배우가 아닌 감독을 비판하기도 하더군요.
저 역시 작품에 PC요소를 입힐 때 무엇보다 감독 및 연출진과 배우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영화는 아니지만,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2>가 큰실패를 겪은 이유 역시 연출의 실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라오어2와 라오어3으로 파트를 나눠서 플레이어의 감정이입을 제대로 관리했으면 어땠을지...)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인어공주> 영화가 ‘아쉬웠다’라던가, ‘흥행에 실패했다’라고 말할 자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자유를 누리면서 동시에 책임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콘텐츠로서 <인어공주>는 분명 원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향후 어떤 인종, 실력의 배우가 연기하든 ‘원작’으로서의 <인어공주>는 영원히 보존되면 보존되지 다른 버전의 <인어공주>에 의해 삭제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원작을 ‘훼손’하는 게 애초에 아닌 셈입니다. 단지 ‘원작의 다른 버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아이들이 원작을 찾는다구요.’라는 글을 보았습니다만, 바로 그때, ‘아이들’과 ‘우리(성인)’를 분리할 단계가 된 성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원작으로서의 <인어공주>가 분명히 있고, 그럼에도 이번에 ‘다른’ <인어공주>를 디즈니에서 왜 제작해 상영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게 성인들의 역할이 아닐까요? 이번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이런 맥락에서 ‘어두운 피부’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러니 배우의 실력이나 감독의 연출을 아쉬워할 때 ‘흑인 배우’를 끌어들였다는 부분을 탓하는 건 애초 영화의 제작 목표를 오인하거나 부인한 결과로밖에 안 비출 것 같아 우려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만약 백인 금발 남성이 홍길동을 연기하든, 중국인이 슈퍼맨을 연기하든, 이미 인터넷이 널리 퍼진 현대 사회에서 누구도 ‘원작’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원작’을 잊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원작을 훼손했다고 주장하기는 곤란합니다. 원작은 원작대로 영원히 영광의 자리에 남을 테니까요. 그 어느 ‘아류작’도 ‘원작’을 존경했으면 존경했지 삭제시키고자 제작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흑인이 캐스팅된 그것 하나만으로 박수를 치실 필요도, 영화의 모든 라인과 연출이 망가진 이유를 흑인 배우 캐스팅에 전부 갖다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이 <다른 버전>의 영화는 원작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에 <다른> 버전을 제작해보았을 뿐이니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박수를 치실 필요가 없고, ‘다르다’는 이유로 영화의 여러 흠을 비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글이 길어지는데, 이번 <다른 인어공주>를 비판할 때 그 기준을 <원작 인어공주>로 삼으시는 것 자체가 영화의 기획 의도와는 어긋나는 논지의 비판입니다. 못 만들었다면 그냥 배우의 실력과 감독 및 연출진의 실력 탓입니다. 애초 '원작의 다른 버전'을 기획했으니 '원작과는 다른 인종'이라서-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영화의 기획 의도를 오인하지 않는다면요).
흑인 인권을 옹호하는 글에 항상 달리는 댓글이 있습니다. 정작 흑인들도 한국인들을 향한 혐오를 남발한다는 게 그 내용이죠. 실제로 많은 뉴스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코로나19 이후 아시안 혐오가 증가하고 있는 건 분명 문제입니다.
하지만 ‘흑인도 아시안을 혐오하니 우리도 흑인 존중할 이유가 없다-’라는 결론은 지나치게 섣부른 선택이거니와, 결국은 백인만이 승리하는 논리로 빠지게 됩니다.
기득권 바깥에 사는 사람들 간의 갈등은 점차 심해지는 와중에 세계화는 더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의 가속과 함께 어쩌면 우리는 보다 이른 시기 내 이웃으로 흑인이나 동남아인들을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상호존중의 담론을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담론의 형성에는 무엇보다 미디어의 힘이 큽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원작의 다른 버전>들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훗날 아이들이 ‘다름에 대한 존중과 거부감 사이를 다루는 방법’을 익히게 됩니다. 그것을 다루지 못했을 때 피해는 고스란히 미래 세대(아이들)가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PC와 미디어 상업예술의 진흥은 미래세대의 '돌봄'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그러니 ‘기업’의 책임은 미래세대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디금부터라도 ‘다름’에 대한 존중의 담론을 형성해나가는 것에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디어 '상업'예술에서 '상업'의 측면, 즉 소비자가 돈을 내고 소비하는 측면을 감안해 이번 주제와 연결하자면, 우리는 '보다 올바르고, 따라서 더 안전한 미래'를 만드려는 기업에 투자해야 합니다. 상업예술의 '상업'에는 이런 측면도 있으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을 애매한 글이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원작의 다른 버전>은 <원작>을 해칠 의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해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애초 기획 의도를 왜곡해 퍼뜨리는 담론의 탓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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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페이너분들께 도움을 요청하는 글. -외국인 가사노동자와 관련하여-
안녕하십니까. 항상 캠페이너분들의 여러 글을 보며 감탄하지만 덧붙여드리거나 공유해드릴 지식이 부족해 늘 댓글은 별로 달지 않는 캠페인즈 유저 개똥_민들레입니다.
오늘 저는 다음의 뉴스를 보고 속이 차올라 후다닥 글을 썼습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돌봄-저출산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간 이슈된 정책 논란들을 조합해 비판하고 돌봄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내용의 글을 쓰던 도중 어떤 고민에 부딪혔고 그 고민에 대해 반박을 해내지 못해 대신 이같은 도움을 구인하는 글을 써봅니다. (혼자 자료를 찾는 게 맞겠지만 한 번 패배하니까 도무지 그럴 의지가 안 서는군요).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고용을 한국의 저출산 대책으로 쓰겠다는 조정훈 의원의 주장을 저출산에 효과 없음으로 반박하거나, 국제적 상황서 말도 안 되는 결례를 범하는(특히 최저임금을 안 준다는 것이) 발상이라거나, 여성의 노동권을 위하는 척하며 여성의 가족화 권리를 외면하기에 문제라던가- 그런 식의 반박은 만들 수 있겠는데.
“그럼 최저임금 잘 주고, 4대 보험 등 노동 조건 잘 챙겨주고, 한국인 여성도 그걸 원하고 외국인 여성도 가사도우미로서의 자신을 세계시장에서 자신의 사용 가능한 노동력으로 쓰고자 하며 노동기간이 끝나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하고, 거기에 학대가 없도록 국가적·사회적 차원의 감시와 예방책에 최선을 다한다면 문제없겠네?”라는 재반박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러한 재반박의 실현 가능성 없음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어떤 대안에 대해 실현 가능성을 문제 삼는다는 건 그것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뜻이므로 정의나 윤리적 차원의 비판으로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제3세계 담론 등 이른바 '값싼 노동력'을 끌어들여 국제적 차원의 정의를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정의 담론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생활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음이 우려됩니다. ‘가졌고, 여유가 있는 자’가 정의나 도덕을 논하며 ‘가지지 못하고 여유가 없는 자’의 노동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진정한 정의인가- 이런 뉘앙스의 우려인데, 이 우려를 스스로 반박하지 못하는 게 방금 오후부터 너무 답답하네요.
답답하다는 건 그것을 반박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건데, 이 반박의 필요를 확신하는 제 근거가 무엇일지, 만약 이게 자동적인 PC(정치적 올바름) 반응이 아니라면 제가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다다를 수가 없어 답답합니다.
이 고민을 여성에 대한 억압 정치의 세계화 차원으로 넓혀서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 외국인 남성 가사도우미는 괜찮은 것이냐-”라는 반박에 또 넘어졌습니다.
어떤 제도의 금지를 ‘~하기 때문에(제재, 처벌)’와 ‘~하기 위해서는(우회, 다른 길, 더 나은 사회)’로 구분했을 때, 지금 제 고민은 전자의 차원에 머물러 있기는 합니다. 다시 말해, 이 고민의 답을 문장으로 뱉었을 때, “외국인 가사노동자의 도입은 ~하기 때문에 안 된다!”인데, 대체 뭐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지 스스로 답을 내릴 수가 없네요.
+여기서 '가족화'란 다음의 인용문 참고(김윤태 엮음, 송다영, 2016)
“여성의 노동자화를 보장하는 것과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 가족화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것은 사회권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노동시장에서 노동을 하지 않고도 적정한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사회권이라면 임신·출산·양육의 시기에 절대적으로 아동을 돌봐야 할 때 ‘유급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또는 자유)’가 바로 사회권의 핵심이다. 따라서 가족 구성원을 돌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가족권이 노동권과 함께 동반되어야 하겠다. 육아휴직의 제도화, 실질적 소득대체율 보장, 기타 돌봄을 위한 가족휴직 제도화 등이 그것이다. 성 평등 복지국가에서 성 통합적 정책의 핵심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가족을 돌볼 수 있는(또는 가족과 개인의 안녕과 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는) 자유가 성별에 관계없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p319~p320
물론 내일이면 다시 기력을 찾아 여러 논문이나 자료를 찾아보겠지만, 지금 당장은 하도 패배감이 심해서....
다른 캠페이너분들의 지혜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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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살해 후 자살한 끔찍한 악마들'을 위한 변명
글의 가독성을 위해 높임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무능력한 부모를 잘못 만난 탓으로 죄 없는 어린이가 희생당했다고 비난하는 당시 기사들의 '희생자'담론은 가족 집단동반자살의 원인을 부모의 죄로 사고하는 도덕적 결정론을 초월하지 못한다. 가부장에게 순진무구한 어린이를 잔인하게 죽인 죄인이라는 화살을 돌리는 것은 결국 부권적 개발논리의 허점을 묻지 못하고 가족내부의 폭력성으로 원인을 두는 순환론의 반복에 봉사한다. 희생자담론은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탈정치화한다. 이것은 이웃의 자살을 방조한 세태에 화살을 돌리는 태도와 유사한 한계를 갖는다. 암묵적으로 (가족단위의) 각자도생을 '책임감의 정당화'로써 전제하는 형식의 연민은 동정에 가까울 뿐이며 윤리성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이정숙, 2017; p361)
"이 사건에 대해 박완서는 에세이를 남겼는데, TV뉴스로 보도된 사건에서 범인이 죽기 전에 소리 내어 한바탕 울었다는 점을 들면서 처자식까지 죽인 비정성을 간단히 극악무도하다고만 단정할 수 없는 사회의 부조리를 겨냥했다.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시 하지 말자는 생각은 모든 서구식 사고방식이 그렇듯이 듣기 좋고 합리적"이지만 우리 사회의 실상이 그런 사고방식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실정에서, 사형수의 자식으로 살아갈 아이들의 혐란한 인생을 그려보았을 때 총을 쏜 것이 그 나름의 부정(父精)이었을 거라는 견해이다. 그리고 그의 심성이 극한으로 몰린 것은 근명과 성실로는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고질적인 가난 때문임을 짚었다."(이정숙, 2017; p364)
오늘 쓸 글은 쓰기에 있어 다른 글보다 고민이 크다. 가정의 달인 5월에만 잇달아 발생한 이른바 '자녀 살해 후 자살'에 대한 현재 주요 담론에 (어찌보면) 역행하는 논지의 글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 역시 진정한 의미의 가족동반자살은 적어도 아동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설사 아동은 아동 나름대로 학교에서 교우관계도 안 좋고, 너무 이른 미디어 유해물을 접해 온 결과 삶이라는 것에 아동 나름의(?) 회의감이 들어 자살의 뜻을 부모와 일치했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책임은 아동의 그같은 죽음욕구가 형성된 과정을 쫒고 아동을 그같은 욕구로부터 잠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녀 살해 후 자살'의 일부 원인에 '가정 문제'나 '가족 갈등'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그들 모두가 '경제적 원인'으로 '내몰려 자살한' 이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최아라, 2022).
그런 이유로 '자녀 살해 후 자살'에서 "아동에겐 아무런 선택권도 없었다-"라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 집단동반자살'이란 표현과 그 사건에 대한 일반대중의 '온정주의적'인 시각을 금기시하는 현상은 우려스럽다고 생각한다.
늘 그렇듯 많이 부족한 글이 될 것이다. 특히 많은 '자녀 살해 후 자살'은 그 '가해부모'가 자살에 성공한 경우가 많아 그들의 입장을 추론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객관적'으로 표시되는 여러 지표들이 있겠지만, '객관적' 지표들은 그들의 '주관적' 세계를 보여주는데 한계가 있다.
이 글은 한 줄기로 매끄럽게 주제를 논하기보단 단편적인 여러 목차로 이 글이 담고있는 어떤 우려를 최대한 설명해보고자 했다. 필자의 어떤 글보다도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목차
1. "아동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지 말라"는 명령
1-1. '자녀의 성공'은 어떤 경로를 통해 상상되는가?
2. "내가 죽으면 우리 자녀는 어디로 가나요?"
3. '실패에 대한 책임'과 '질타의 소비'를 통한 '성공신화'에의 굳건한 봉사
4. 맺으며
1. "아동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지 말라"는 명령
이 명령의 내용은 얼핏 보기에 심플하고, 또 너무도 당연하다. 특히 이같은 명령은 "내 자식 훈육을 위해 내가 몇 대 좀 때리겠다는데 왜 말려!"로 대표되는 체벌적 훈육을 문제 삼을 때 핵심이 되는 명령이다. 이같은 체벌은 아동의 '신체, 정신'적 안녕을 가질 권리를 침해하기에 근절될 필요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같은 체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아동에 대한 '신체, 정신'적 안녕을 침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대한민국으로 대표되는 '입시 지옥'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미 한참 전인 2009년에 처음 찍어낸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마라]에는 "항상 자녀의 주위를 맴돌며 보살핀다고 해서 '헬리콥터 맘'이라 불리는 중산층 엄마들은 아이를 피트니스 센터에 보내고, [r] 발음을 잘하기 위해 혀 밑을 자르고, 일찍이 성형수술을 시키는 등 아이의 신체 자본 역시 관리한다."(엄기호, 2009; p60)라는 지적이 있었다.
혀 밑을 자르는 사례는 차마 믿을 수 없지만, 그 맥락에 대해서는 모두가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대한민국 부모가 아동을 고문하길 좋아하는 사디스트는 아닐 테고, 부모 역시 이러는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은 분명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로 대표되는, 무한경쟁사회에서 자기 자식이 생존해낼 수 있도록 부모 나름의 '원조'라고 생각된다.
자녀가 성장해 사회에서 성공하느냐 마느냐, 아니 비록 '성공'이 아니더라도 '생존'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책임'이 온전히 한 '가족 단위'에 전가된 무한경쟁사회에서 부모는 자녀의 '삶(놀기, 더 먹기 등)'을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소유물'에 둘 필요를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식새끼를 '사람되게'하는 책임"이 부모에게 전가된 우리 사회에서 자녀의 실패는 곧 부모의 실패이게 된다.
정리하자면 A)'자기 자녀'가 우리사회에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생존하기 위해서)는 B)부모의 지원(강제)이 필요한데, C)그 필요한 부모의 지원이 불가능하거나 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빈곤, 가난, 차별, 계층 억압) D)'부모의 실패'가 곧 '자녀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바, E)이런 상황에서 "자녀를 부모와 독립된 인격체로 보라!"는 명령이 현실적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부모의 세계에서 자녀를 자신과 독립된 (운명적)인격체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자녀를 두고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곧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유기하는 것에 다를바 아니다. 적어도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러하다.
학교폭력이 만연하고,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부산의 돌려차기남까지 끈질기게 이어지는 여성혐오, 노동자의 끼임사고와 그럼에도 그치지 않는 산업재해, 그 시정에 대한 비웃음, 학교폭력 등. 이같은 현실 앞에서 "자녀를 그러한 삶에 홀로 노출시키는 것과 데려감으로써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그들'의 입장에서 '부모된 도리'는 무엇일까?
1-1. '자녀의 성공'은 어떤 경로를 통해 상상되는가?
그런데 부모가 피치못해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면서까지 바라는 '자녀의 성공'이란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부모는 어떤 경로를 통해 '자녀의 성공'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 상상의 근거나 재료는 누구에 의해 제공되는가?
이렇게 질문을 펼쳐놓았으나 필자는 대답할 수 없다. 얼핏 신자유주의를 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신자유주의가 엄습하지 않았던 전근대 사회에서조차 '횟초리'로 표상되는, 자녀의 '인간됨'을 목표로 하는 훈육은 있어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자녀의 성공'을 부모가 무엇으로 상상하고, 또 어떻게 상상했는지를 논하려면 좀 더 큰 개념을 가져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나 필자는 부족하여 그러한 논의를 이끌어낼 능력이 안 된다. 해서, 목차 1-1은 질문의 형태로 남겨두고자 한다.
다만, 현재로 한정해 얘기해보자면, 입시지옥의 대척점으로 상징되는 '대안교육' 담론을 논의로 끌어올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레 적어본다. 예컨대 대안교육을 폄하하는 이들의 문장이나 표현을 통해 그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지를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대안교육에 들어선 이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2. "내가 죽으면 우리 자녀는 어디로 가나요?"
'책임있는 부모'가 자기네 자녀를 살해하지 않고 자기들만 자살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남겨진(버려진) 자녀는 어디로 가는가?
통상 부모를 잃은 미성년 자녀는 '위탁' 또는 '입양'의 기로에 놓인다.
아동의 친척이 남겨진 아동을 맡아 키우는 걸 상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해법은 우선 여전히 문제를 '가족'의 영역에 남겨두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친척은 이미 아동과 최소 3촌(寸) 사이인지라 거리감이 있으며, 친척이 자기네 자녀를 갖고 있는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빈곤한 부모'의 친척은 높은 확률로 1) 역시 빈곤하거나, 2) 빈곤에 허덕였던 부모를 내버려두었거나, 3)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 정도로 (물적, 심리적) 거리가 긴 친척일 것이다. 이들에게 자녀가 위탁된들 '그들' 부모로서는 자녀를 불행의 구렁텅이에 버려두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필자가 알기로는 친척에게 남겨진 아동을 위탁해야 할 법적인 의무조차 없다.
"'가정위탁보호제도'는 원가정의 역할을 대신할 대리보호가정에 요보호 아동의 건강한 발달과 성장을 위임하는 공적 계약이며, 이를 가정외보호(out-of-homecare)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가정외보호 형태는 아동양육시설, 아동공동생활가정(그룹홈), 가정위탁으로 나뉜다."(박혜지 외, 2020; p66)
"가정위탁은 크게 아동과 혈연관계가 없는 일반가정위탁, 조부모가 양육하는 대리양육가정위탁, 조부모를 제외한 8촌 이내의 혈족이 돌보는 친인척가정위탁, 2세 이하 또는 학대 피해나 경계선 지능 아동 등 전문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아동을 돌보는 전문가정위탁, 긴급보호조치가 필요한 아동을 돌보는 일시가정위탁보호로 나뉜다."(https://www.newspim.com/news/v...)
"가정위탁은 소규모 가정 내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단체생활을 하는 시설위탁보다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복지부의 아동보호 기본방향도 시설보호보다는 가정위탁 등 가정보호 조치가 원칙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여전히 시설보호가 압도적이다. ... 가정위탁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선 위탁가정 확대가 먼저 이뤄져야 하지만 위탁가정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모집 자체가 쉽지 않다. ... 보호아동을 24시간 내내 돌봐야 하는 위탁가정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 육아비용은 더 불어날 수밖에 없다."(https://www.newspim.com/news/v...)
가정위탁이 그렇다면 시설보호는 어떠한가?
시설 안에서의 경험은 어느 정도 운에 맡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아동의 심리적 고통은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건 시설에서 아동이 나와야 하는 순간, 즉 그들이 '보호종료아동'이 되는 순간에 있다. 비록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자산형성을 장려하는 중앙정부 차원의 제도인 '디딤씨앗통장'이 있지만, "후원자의 후원금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여 운영되는 한계가 존재한다."(김규리 외, 2021; p29)
경제적 자립을 넘어 "자립준비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잇따라 발생한 가운데 ... 심리적 자립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https://m.khan.co.kr/national/...)는 지적은 여전히 심리적으로도 많은 지원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읽다보면 느껴지겠지만 목차2의 글은 필자가 논문이나 인터넷 뉴스를 '훑어보아' 정리한 자료로서, 그 내용의 정확성 등을 의심할 여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내용을 훑은 이가 필자가 아닌 '자살로 내몰린 부모'라면, 그 내용이 불안정하거니와 내용의 분위기도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공공이 대놓고 "안심하고 자녀분을 남기고 자살하세요! 남겨진 자녀는 우리가 이러이러한 과정을 통해 안전하고 행복하게 키워드리겠습니다!"라고 광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자살을 고민 중인 부모가 공공기관에 전화로 남겨진 자신의 자녀가 어떻게 될지 문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살을 국가의 실패로 바라보는 현상황에서 그들은 통치 권력에 포섭되고 싶지 않을 거니까.
즉, 부모에게 있어 남겨진 자녀가 가게 될 어떤 곳도 희망적인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곧 부모에게 있어 자녀의 행복한 삶을 상상할 근거가 부재하다는 것이고, 차라리 '지옥'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걱정되는 우려의 근거들만 잔뜩임을 가리킨다.
2023년 4월 12일 고영인, 인재근 의원과 세이브더칠드런 등이 공동주최한 "'개인의 비극' 너머 대안을 묻다"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은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은 남은 자녀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보았"다(https://www.sc.or.kr/news/stor...)라고 말하는 점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해야 한다.
3. '실패에 대한 책임'과 '질타의 소비'를 통한 '성공신화'에의 굳건한 봉사
'자녀 살해 후 자살'이란 용어는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용어가 '아동 살해 가해자'인 부모를 향해 "얼마나 힘들었으면-"하고 '온정주의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막고자 제안된 용어다. 위 국제 심포지엄 참가자들 중 일부는 "온정주의와 연결되지 않도록 자녀 살해 후 생존(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주면 좋겠다."(https://www.womennews.co.kr/ne...)고 의견을 냈다고 한다.
'처벌'이란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가리킨다. 처벌이 존재함을 공포하는 것으로 다른 이들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경고의 기능도 겸한다.
상습적 아동학대나 음주, 방임, 또는 가족갈등 등을 원인으로 하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이 아닌 경제적 빈곤 등을 원인으로 하는 자녀 살해 후 자살에서 '잘못'은 곧 '경제적 실패'이다. (필자는 앞의 요인들도 결코 경제적 어려움과 연관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건 생존의 과정에서의 역기능이 아닐까?)
이같은 '경제적 실패'가 '사건'의 형태로 사회에 드러나면 사회구성원이 공유하고(기대고) 있는 '체제'에 의문이 가해진다. "과연 지금의 체제는 잘 작동하고 있는가?" 이 의문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려야 한다. 이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담론'이라면, 담론의 주조자는 언론이라 할 수 있다.
언론, 특히 신문은 기사의 작성에 있어 작성자의 의도가 개입된다. 작성자의 의도를 반영한 언어로 기사가 작성되고, 그 기사가 대중 사이에 공유되며, 특정 사안에 대한 대중적 차원의 담론이 형성된다. 성소수자 집회를 다루는 기사에서 작성자의 의도로 '에이즈의 확산!'이라던가 하는 언어가 강조되거나 장애인 탈시설 시위를 두고 '일반시민을 볼모로...'와 같은 언어가 대표적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언론은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언어를 지양하고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언어를 지향하는 것으로 '가해자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필자는 이 점이 우려스럽다.
이렇게 체제의 결함 또는 모순에 의해 발생한 사건에서 가해자를 개인으로 한정 지어 그 개인에게 대중이 질타하는 것을 '성숙한 시민의 태도'로 생각하는 현상이 확산될수록, 체제를 의심하지 않고 싶어하는(불안을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개인들이 '실패한 개인'을 향한 질타에 참여해 질타를 소비할수록, 제1가해자라 할 수 있는 체제는 손 안 쓰고 코 푸는 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이런 차원의 우려에서, 필자는 개인을 악마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 악마가 조주빈이나 조두순이라 하더라도, 필자는 악마들의 서사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맺으며
변명이지만, 3번 목차의 내용이 좀 마음에 안 든다. 사실 글을 쓰던 도중 필자의 실수로 내용이 전부 삭제되고는 되돌려지지 않아 다시 쓴 결과 내용이 논리적 정합성이나 타당성과 신뢰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시간에 쫓겨 쓰는지라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캠페인즈에도 <임시저장> 기능이 생겼으면 한다... (실수로 ctrl+z를 누르니 글이 태반이 싹 날아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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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의 해결책 중 하나로 '가족단위의 돌봄'을 뛰어넘는 돌봄 체계의 필요를 주장하고 싶다.
'아파트'로 대표되는 이웃과 이웃 간의 단절은 당장 부모가 죽으면 남겨진 자녀를 누가 돌볼지, 아니 애초에 자녀가 남겨졌음을 누가 발견이라도 해낼지 우려하게 만든다. 비단 아동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장애인이나 노인도 이에 속한다.
돌봄의 책임이 온전히 '가족'에게 있지 않아 가족이 무너지더라도 누군가 다른 이가 아동에 대한 돌봄을 '기꺼이' 이어나갈 수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용어가 진정으로 의미있는 언어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돌봄의 책임이 온전히 가족에게 있다면, 그래서 부모가 자녀의 독립된 인격체를 상상하기 어렵다면, '가족동반자살'이란 용어는 결국 설득력 있는 언어가 아닐까? 어차피 자녀가 실패하든, 부모가 실패하든, '가족'이 실패하는 것은 똑같기 때문에.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의견 주시면 더더욱 감사합니다.
-참고 및 인용
1.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엄기호, 2009
2.[1960-70년대 '가족 집단동반자살'을 둘러싼 징후적 불안의 문제], 이정숙, 2017
3.[1950~60년대 한국사회 경제구조 변화와 가족동반자살], 정승화, ?
4.[가정위탁보호가 종료된 청소년들의 자립과정 경험에 대한 질적연구], 박혜지, 이정화, 2020
5.[아동양육시설 보호종료아동이 경험한 디딤씨앗통장의 의미에 관한 질적 사례연구], 김규리,김용회,한창근, 2021.
6.[자녀살해 후 자살에 관한 연구 : 주요일간지를 중심으로], 최아라, 2022
7. 그외 링크로 삽입한 뉴스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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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녀들은 '우울증 갤러리'에 모였을까 - 인터넷을 통한 인간관계 형성의 욕구
글의 가독성을 위해 높임말을 쓰지 않고 작성합니다.
2023년 4월 16일 오후 2시경 고등학생 A양이 강남 한복판서 SNS라이브를 틀어둔 채 투신자살을 감행했다. 고인은 사망했다.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질타와 함께 그 배경에 주목했다. 고인의 자살 배경에 어느 특정 단체, 이른바 '신대방팸'이라는 그룹이 있다- 이들 사이에서 마약과 술, 담배, 그리고 성착취가 만연하고 있었다는 전황이 의심된다- 등. 각종의 제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그들이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미성년자들을 '유인'해 성착취, 이른바 '그루밍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지적이 여러 SNS 유저들로부터 제기된다. 이들 신대방팸은 '또 다른 n번방'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이 사건을 아는 자들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거기에 그치는 지적이 아쉽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의 핵심은 신대방팸의 그루밍 성폭력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경찰의 수사를 받아야 하며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면 체포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첫째로, 설령 저들이 '또 다른 n번방'이라 불릴 정도로 극악무도한 자들이라 한들 그들의 악마성에 대한 고발만이 향후 있을 또 다른 유사 범죄에 대한 예방책으로 작동하기는 힘들다는 점, 둘째로, 신대방팸의 피해 여성과 n번방의 피해 여성은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 셋째로, 이 사건의 본질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과제를 앞으로도 우리가 무시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으로 비웃는다면 그 문제는 더할나위 없이 커져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길이 작동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오늘의 토론글을 준비했다.
-목차
1. 우울증 갤러리와 신대방팸 피해자들에 대해
2. 형성한(된) 현실의 인간관계의 실패(실망, 배신, 봉변, 폭행)
3.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의 발버둥
4. 맺으며
1. 우울증 갤러리와 신대방팸 피해자들에 대해
우선 가장 먼저 얘기할 점은, 이들은 n번방 피해자들처럼 어떤 속임수에 의해 범죄자와 연결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n번방 범죄자들의 경우 피해자를 협박관계에 놓기 까지의 수단은 크게 세 가지로 1) 경찰 사칭 수법, 2) 해킹 수법, 3) 알바 모집 사기 수법이다(https://femiwiki.com/w/N%EB%B2...). 각 수법의 상세한 방법은 출처를 따라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세 수법의 공통점은 피해자와 범죄자 사이에 '친밀성'이 없으며 어떤 형태로든 피해자의 '약점'을 잡아 '협박' 관계를 만드려는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은 협박을 당하기 전까지 범죄자를 알지도 못했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면 싶었지 범죄자와의 관계를 결코 우호적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신대방팸을 비롯한 이른바 '디시인사이드 : 우울증 갤러리'(이하 울갤)의 여성들은 다르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은 상당 수가 '자발적으로' 그 커뮤니티에 들어갔고, 그들 중 일부에게(특히 미성년자에게) 신대방팸을 비롯한 여러 남성들이 접근한 결과, 범죄가 발생했다.
이곳 '울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중 하나다.
(가린 건 유저의 닉네임)
울갤에서 활동하는 모든 유저를 '울갤러'러 라고 부르며, 이들 울갤러들은 보통 특별한 방향성이 없는 글을 비주기적으로 올린다. 남자 울갤러는 '남갤러', 여자 울갤러는 '여갤러'라고 불린다. 간혹 '게이들아'라는 호칭도 있으나 이건 실제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건 아니다.
글의 내용은 실제로 자신의 우울을 호소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남자/여자 섹스파트너를 찾는 글이나 아무런 내용도 없는 글(이른바 '뻘글')을 쓰기도 하는 둥 그 글의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 글보다는 제목과는 상관 없는 '짤(이미지)'을 올리는 게시글도 있다. 특히 이 짤 형태의 게시글과 관련해 박가분은 "이러한 '증여'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과 집단적 정체성을 재확인하기도 한다"라고 했다(2013, p62; 강조는 필자). 앞에서 더 전개하겠지만 이 '존재감과 집단적 정체성의 재확인'은 오늘 토론글에서의 중요한 코드다.
울갤러들 중 고정된 닉네임을 가진 이들을 '고닉'이라 부르며 그렇지 않은 이들은 'ㅇㅇ'라는 통일된 닉네임으로 글을 쓰게 된다.
'고닉'들의 반복적인 활동은 익명성이 전제되었던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 완전한 익명성을 가지지 않는 '특정인'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고닉'과 '고닉' 간의 활동, 예컨대 단순한 대화부터 오프라인 만남 약속(번개)까지의 활동은 곧 '특정인'과 '특정인'간의 행동이 되며, 이는 그 장소만 인터넷으로 할 뿐 실제 현실사회에서의 인간상호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실제로 울갤에서는 특정 고닉을 지목하거나 호명하는 내용의 글들을 심심치 않게, 아니 사실 굉장히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위 이미지 '5937413'번 글이 그 예시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익명 울갤러들 사이에서 '고닉'으로 포착되고 호명되기 위해서는 그 고닉 당사자가 오랜 기간 또는 자주 울갤에서 활동해야만 한다. 다른 이로부터 00대학교 00학과 김철수로 호명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김철수라는 인물이 00대학교 00학과에 자주 등장 및 교류 또는 최소한 여러 번의 노출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울갤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주 고닉을 단 채 긴 기간에 걸쳐 다른 고닉들과 교류하며 활동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엔 이번 신대방팸 피해자들도 포함된다.
윗 글이 전부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봐야 한다. "데폭(데이트 폭력)", "강제촬영", "사귀다가", "임신'시켜놓고'", "동거", "바람피고" 등이 필자가 지목하는 키워드다.
즉, 울갤에서 고닉들은 단지 짤방이나 뻘글을 쓰는 활동을 넘어 다른 고닉들과 실제 현실사회에서의 관계로 연장해 진입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신대방팸 피해자들과 n번방 피해자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전자의 피해자들은 범죄자에게 '약점' 또는 '덜미'를 잡혀 '협박'을 당해 성착취를 당한 게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에서 '실패', '봉변', '폭행'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울갤의 여성 피해자들은 다른 고닉과의 관계를 현실관계로까지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며, 그 시도로 형성된 현실관계에서 폭행이나 착취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울갤 여성 피해자들의 피해 형태나 다른 일반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데이트 폭력과 같은 피해 형태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전자는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라는 게 사실상 유일한 차이다. 이름부터가 '우울증 갤러리' 아닌가.
바로 이 점에 주목해 몇몇 이들은 이번 범죄를 '그루밍 성폭력'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들 견해에 대해 상당 부분 참고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전체에 대해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그루밍 성폭력의 개념을 먼저 빠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2. 형성한(된) 현실의 인간관계의 실패(실망, 배신, 봉변, 폭행)
"'그루밍'에는 의사소통과 사회화 과정이 포함된다. 이것은 범죄자가 성학대를 목적으로 피해자를 준비시키기 위해 신뢰를 얻으려는 의도로, 아동 또는 청소년과 상호작용하고 관심사와 취미를 공유하고 이들에게 정신적 지지와 공감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Davidson and Martellozzo, 2008 ; 출처:엘레나 마르텔로조, 2019, p146)
"양형자문단(2007)에 따르면, 성적 그루밍은 범죄자가 성학대를 목적으로 피해 아동을 준비시키기 위해 상호작용하는 동안의 사회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는 심각한 약탈적 범죄이다."(2003년 <성범죄법> ; 출처:엘레나 마르텔로조, 2019,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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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루밍 성폭력이란 범죄자가 피해자를 향해 성학대 또는 성착취를 위해 피해자를 "준비시키고" "신뢰를 얻고자" 노력하는 일련의 노력을 통한 성폭력이다.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특히 아동)들이 범죄자의 범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인정함에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보호하려는 행동을 보이는 건 그의 기획으로 형성된 신뢰관계를 쉽게 떨쳐내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루밍 성폭력은 비단 온라인에서 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웬디 C. 오티즈(2019)의 [기억의 발굴 (Excavation)]은 실제 오프라인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을 회고해 출판한 책이다.
그루밍 성폭력의 개념은 상당 부분 울갤에서 일어나는 전반의 성폭력에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신뢰를 얻으려는 의도'와 '상호작용' 과정은 일단 여성으로 '인증'된 여갤러와 댓글을 통해 끊임없이 교류하는 과정이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갤러들과 교류하는 모든 남갤러들이 그루밍의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면 그건 아닐 수 있겠지만 이 사건에서 그들의 '의도성'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그렇다.
여갤러로부터 성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이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심지어 (문제가 되는 발언일 수도 있지만) 여갤러 본인도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일종의 교환가치로 활용했다손치더라도, 그 본질은 인간관계의 실패(실망, 배신, 봉변, 폭행)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의도성의 여부는 형벌의 영역에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 현상 자체에서는 크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 게 필자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1. 울갤의 여(남)갤러들은 울갤에서의 관계를 통해 현실의 인간관계의 충족을 원했고, 2. 활동 끝에 현실의 인간관계를 형성했으나, 3. 형성한/된 현실의 인간관계가 부정적 결말로 귀결되어 각종의 폭행이나 범죄의 피해자(가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위 의견은 절대로 피해의 책임성 일부를 여갤러들에게 넘기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단지 울갤러들에게는(또한 모든 우울한 sns이용자들, ex) 우울러, 자해러) 울갤을 비롯한 sns를 통한 현실의 인간관계 형성 욕구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싶을 뿐이다.
3.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의 발버둥
그렇다면 왜 이들은 현실이 아닌 sns를 통해 현실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싶어할까? 뒤집어 말하면,
왜 이들은 현실을 통해 현실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싶지 않아 할까?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개념을 주장해보고 싶다.
이때 '삶에 대한 기대'란 가난이나 폭행과 같은 사회위험으로부터 벗어날 기대 내지 억만장자가 되는 미래의 어떤 상태나 목표를 뜻하는 게 아니다. 내가 가난하더라도, 내가 다른 이로부터 폭행을 당하더라도 상관 없으니 '굳이' 살아내고 싶은 힘을 제공하는 어떤 동력(動力)에 가까운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삶에 대한 의지' 또는 '삶의 의지력' 정도로 표현해도 좋겠으나 그러자면 자칫 '버텨내는 힘' 만으로 해석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힘에 '삶에 대한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섞어서 '삶에 대한 기대'라는 개념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왜 그들이 현실의 인간관계로까지 연장하고 싶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필자가 볼 때 울갤러를 포함한 많은 우울한 sns이용자들(이하 우울러들)은, 마치 정치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은 서로가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현실에서 삶에 대한 기대(동력의 의미로써, 또는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내는 데 힘듦을 경험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관계를 끊자니 사람은 누구나 관계의 욕구를 가지지 않는가? 그래서 울갤과 같이 '삶에 대한 세계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리라 기대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발적으로' 진입해 어떻게든 그 안으로부터 현실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앞서 말한 '존재와 집단적 정체성의 재확인'의 필요도 여기에 적용하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가 경험한 바, 트위터와 같은 SNS에 자신의 자해 사진을 전시하는 많은 '자해러'들은 자신의 자해 사진을 비주기적으로나마 전시한다. 필자는 그 전시의 이유가 자신이 여전히 자해를 한다는 그 사실을 증명하려는 어떤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증명의 필요는 자신과 비슷한 '삶에 대한 세계관'을 가진 자들과의 소속감을 잃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 아닐까. "나는 아직 우울하다"- "나는 아직 당신들과 같은 세상에 있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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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범위를 더 크게 확대해보자면, 사실 모든 사람들의 sns 등 인터넷을 통한 인간관계 형성의 욕구는 과거와는 달리 자신의 선호에 딱 들어맞는 이를 인터넷에서는 정보를 탐색 및 검토하고 사전에 확인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한다. 무릇 여기 <캠페인즈>도 상호 채팅의 기능이 없을 뿐이지 '토론'을 통한 인간관계의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단지 울갤은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일 뿐.
4. 맺으며
이제 본 토론글이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필자는 이 글의 처음에 "이 사건의 본질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과제를 앞으로도 우리가 무시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으로 비웃는다면 그 문제는 더할나위 없이 커져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길이 작동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 본 글의 내용과 함께 해당 우려를 목차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욕구는 역으로 현실로부터의 인간관계 형성에 문제를 줄 수 있다.
B)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만의 추구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또는 극단적 세계관을 고정시킬 수 있다.
C)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 추구'조차의' 실패는 개인의 인간관계 형성의 완전실패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이는 자살위험을 극대화할 수 있다.
D)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수행에서 특히 여성은 범죄에 보다 더 취약하다.
E)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 시도의 결과로 발생한 피해의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기 쉽다.
이상으로 목차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시도를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천정환(2014)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는 비교적 흔한 '실연자살'은 조선시대에는 실연자살이라는 언어로 표상된 흔적을 찾기 힘들며 '연애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실연자살자'들이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지금 책이 없어서 page까지는 기억이...) 이처럼 4월 16일의 A양이나 다른 인터넷 우울러들의 자살사건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즉,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시도를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탄생한 자연스런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토론글의 카테고리를 '새로운 이슈 제안'이 아닌 '돌봄, 복지 사각지대 해소'로 붙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다. 즉, 인간관계 형성의 시도와 '돌봄'을 같은 맥락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왜냐면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욕구는 일단 현실로부터의 인간관계 형성의 실패를 전제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에 돌봄 제도의 역할이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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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능력이 부족해 글이 매끄럽지 못하다.
이 글은 다음에 있을 현대사회와 인간관계 형성의 문제, 또는 소속감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발판 작업이다. 다음 글에서는 실제 우리 사회에 어떤 인간관계 형성의 수단들이 제도적, 비제도적으로 존재하는지를 찾아보고 만약 그곳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해결을 지향하는 실천적 태도로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토론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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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의견 주시면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출처
1. 박가분(2013), [일간베스트의 사상]
2. 엘레나 마르텔로조(2019),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
3. 천전환(2014), [자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