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가독성을 위해 높임말을 쓰지 않고 작성합니다.
2023년 4월 16일 오후 2시경 고등학생 A양이 강남 한복판서 SNS라이브를 틀어둔 채 투신자살을 감행했다. 고인은 사망했다.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질타와 함께 그 배경에 주목했다. 고인의 자살 배경에 어느 특정 단체, 이른바 '신대방팸'이라는 그룹이 있다- 이들 사이에서 마약과 술, 담배, 그리고 성착취가 만연하고 있었다는 전황이 의심된다- 등. 각종의 제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출처 : https://m.khan.co.kr/national/... ; 밑줄은 필자)
특히 그들이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미성년자들을 '유인'해 성착취, 이른바 '그루밍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지적이 여러 SNS 유저들로부터 제기된다. 이들 신대방팸은 '또 다른 n번방'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이 사건을 아는 자들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거기에 그치는 지적이 아쉽다.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의 핵심은 신대방팸의 그루밍 성폭력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경찰의 수사를 받아야 하며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면 체포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첫째로, 설령 저들이 '또 다른 n번방'이라 불릴 정도로 극악무도한 자들이라 한들 그들의 악마성에 대한 고발만이 향후 있을 또 다른 유사 범죄에 대한 예방책으로 작동하기는 힘들다는 점, 둘째로, 신대방팸의 피해 여성과 n번방의 피해 여성은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 셋째로, 이 사건의 본질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과제를 앞으로도 우리가 무시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으로 비웃는다면 그 문제는 더할나위 없이 커져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길이 작동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오늘의 토론글을 준비했다.
-목차
1. 우울증 갤러리와 신대방팸 피해자들에 대해
2. 형성한(된) 현실의 인간관계의 실패(실망, 배신, 봉변, 폭행)
3.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의 발버둥
4. 맺으며
1. 우울증 갤러리와 신대방팸 피해자들에 대해
우선 가장 먼저 얘기할 점은, 이들은 n번방 피해자들처럼 어떤 속임수에 의해 범죄자와 연결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n번방 범죄자들의 경우 피해자를 협박관계에 놓기 까지의 수단은 크게 세 가지로 1) 경찰 사칭 수법, 2) 해킹 수법, 3) 알바 모집 사기 수법이다(https://femiwiki.com/w/N%EB%B2...). 각 수법의 상세한 방법은 출처를 따라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세 수법의 공통점은 피해자와 범죄자 사이에 '친밀성'이 없으며 어떤 형태로든 피해자의 '약점'을 잡아 '협박' 관계를 만드려는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은 협박을 당하기 전까지 범죄자를 알지도 못했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면 싶었지 범죄자와의 관계를 결코 우호적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신대방팸을 비롯한 이른바 '디시인사이드 : 우울증 갤러리'(이하 울갤)의 여성들은 다르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은 상당 수가 '자발적으로' 그 커뮤니티에 들어갔고, 그들 중 일부에게(특히 미성년자에게) 신대방팸을 비롯한 여러 남성들이 접근한 결과, 범죄가 발생했다.
이곳 '울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중 하나다.
(가린 건 유저의 닉네임)
울갤에서 활동하는 모든 유저를 '울갤러'러 라고 부르며, 이들 울갤러들은 보통 특별한 방향성이 없는 글을 비주기적으로 올린다. 남자 울갤러는 '남갤러', 여자 울갤러는 '여갤러'라고 불린다. 간혹 '게이들아'라는 호칭도 있으나 이건 실제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건 아니다.
글의 내용은 실제로 자신의 우울을 호소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남자/여자 섹스파트너를 찾는 글이나 아무런 내용도 없는 글(이른바 '뻘글')을 쓰기도 하는 둥 그 글의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 글보다는 제목과는 상관 없는 '짤(이미지)'을 올리는 게시글도 있다. 특히 이 짤 형태의 게시글과 관련해 박가분은 "이러한 '증여'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과 집단적 정체성을 재확인하기도 한다"라고 했다(2013, p62; 강조는 필자). 앞에서 더 전개하겠지만 이 '존재감과 집단적 정체성의 재확인'은 오늘 토론글에서의 중요한 코드다.
울갤러들 중 고정된 닉네임을 가진 이들을 '고닉'이라 부르며 그렇지 않은 이들은 'ㅇㅇ'라는 통일된 닉네임으로 글을 쓰게 된다.
'고닉'들의 반복적인 활동은 익명성이 전제되었던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 완전한 익명성을 가지지 않는 '특정인'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고닉'과 '고닉' 간의 활동, 예컨대 단순한 대화부터 오프라인 만남 약속(번개)까지의 활동은 곧 '특정인'과 '특정인'간의 행동이 되며, 이는 그 장소만 인터넷으로 할 뿐 실제 현실사회에서의 인간상호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실제로 울갤에서는 특정 고닉을 지목하거나 호명하는 내용의 글들을 심심치 않게, 아니 사실 굉장히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위 이미지 '5937413'번 글이 그 예시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익명 울갤러들 사이에서 '고닉'으로 포착되고 호명되기 위해서는 그 고닉 당사자가 오랜 기간 또는 자주 울갤에서 활동해야만 한다. 다른 이로부터 00대학교 00학과 김철수로 호명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김철수라는 인물이 00대학교 00학과에 자주 등장 및 교류 또는 최소한 여러 번의 노출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울갤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주 고닉을 단 채 긴 기간에 걸쳐 다른 고닉들과 교류하며 활동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엔 이번 신대방팸 피해자들도 포함된다.
(3번째 줄을 보면 '고닉'이라는 단어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https://principlesofknowledge....).
(위 글의 모든 사망자가 신대방팸 피해자는 아니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출처 : https://principlesofknowledge....)
윗 글이 전부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봐야 한다. "데폭(데이트 폭력)", "강제촬영", "사귀다가", "임신'시켜놓고'", "동거", "바람피고" 등이 필자가 지목하는 키워드다.
즉, 울갤에서 고닉들은 단지 짤방이나 뻘글을 쓰는 활동을 넘어 다른 고닉들과 실제 현실사회에서의 관계로 연장해 진입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신대방팸 피해자들과 n번방 피해자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전자의 피해자들은 범죄자에게 '약점' 또는 '덜미'를 잡혀 '협박'을 당해 성착취를 당한 게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에서 '실패', '봉변', '폭행'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울갤의 여성 피해자들은 다른 고닉과의 관계를 현실관계로까지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며, 그 시도로 형성된 현실관계에서 폭행이나 착취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울갤 여성 피해자들의 피해 형태나 다른 일반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데이트 폭력과 같은 피해 형태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전자는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라는 게 사실상 유일한 차이다. 이름부터가 '우울증 갤러리' 아닌가.
바로 이 점에 주목해 몇몇 이들은 이번 범죄를 '그루밍 성폭력'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들 견해에 대해 상당 부분 참고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전체에 대해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그루밍 성폭력의 개념을 먼저 빠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2. 형성한(된) 현실의 인간관계의 실패(실망, 배신, 봉변, 폭행)
"'그루밍'에는 의사소통과 사회화 과정이 포함된다. 이것은 범죄자가 성학대를 목적으로 피해자를 준비시키기 위해 신뢰를 얻으려는 의도로, 아동 또는 청소년과 상호작용하고 관심사와 취미를 공유하고 이들에게 정신적 지지와 공감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Davidson and Martellozzo, 2008 ; 출처:엘레나 마르텔로조, 2019, p146)
"양형자문단(2007)에 따르면, 성적 그루밍은 범죄자가 성학대를 목적으로 피해 아동을 준비시키기 위해 상호작용하는 동안의 사회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는 심각한 약탈적 범죄이다."(2003년 <성범죄법> ; 출처:엘레나 마르텔로조, 2019,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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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루밍 성폭력이란 범죄자가 피해자를 향해 성학대 또는 성착취를 위해 피해자를 "준비시키고" "신뢰를 얻고자" 노력하는 일련의 노력을 통한 성폭력이다.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특히 아동)들이 범죄자의 범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인정함에도 떨어지지 않고 그를 보호하려는 행동을 보이는 건 그의 기획으로 형성된 신뢰관계를 쉽게 떨쳐내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루밍 성폭력은 비단 온라인에서 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웬디 C. 오티즈(2019)의 [기억의 발굴 (Excavation)]은 실제 오프라인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을 회고해 출판한 책이다.
그루밍 성폭력의 개념은 상당 부분 울갤에서 일어나는 전반의 성폭력에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신뢰를 얻으려는 의도'와 '상호작용' 과정은 일단 여성으로 '인증'된 여갤러와 댓글을 통해 끊임없이 교류하는 과정이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갤러들과 교류하는 모든 남갤러들이 그루밍의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면 그건 아닐 수 있겠지만 이 사건에서 그들의 '의도성'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그렇다.
여갤러로부터 성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이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심지어 (문제가 되는 발언일 수도 있지만) 여갤러 본인도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일종의 교환가치로 활용했다손치더라도, 그 본질은 인간관계의 실패(실망, 배신, 봉변, 폭행)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의도성의 여부는 형벌의 영역에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 현상 자체에서는 크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 게 필자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1. 울갤의 여(남)갤러들은 울갤에서의 관계를 통해 현실의 인간관계의 충족을 원했고, 2. 활동 끝에 현실의 인간관계를 형성했으나, 3. 형성한/된 현실의 인간관계가 부정적 결말로 귀결되어 각종의 폭행이나 범죄의 피해자(가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위 의견은 절대로 피해의 책임성 일부를 여갤러들에게 넘기고자 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단지 울갤러들에게는(또한 모든 우울한 sns이용자들, ex) 우울러, 자해러) 울갤을 비롯한 sns를 통한 현실의 인간관계 형성 욕구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싶을 뿐이다.
3.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의 발버둥
그렇다면 왜 이들은 현실이 아닌 sns를 통해 현실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싶어할까? 뒤집어 말하면,
왜 이들은 현실을 통해 현실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싶지 않아 할까?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개념을 주장해보고 싶다.
이때 '삶에 대한 기대'란 가난이나 폭행과 같은 사회위험으로부터 벗어날 기대 내지 억만장자가 되는 미래의 어떤 상태나 목표를 뜻하는 게 아니다. 내가 가난하더라도, 내가 다른 이로부터 폭행을 당하더라도 상관 없으니 '굳이' 살아내고 싶은 힘을 제공하는 어떤 동력(動力)에 가까운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삶에 대한 의지' 또는 '삶의 의지력' 정도로 표현해도 좋겠으나 그러자면 자칫 '버텨내는 힘' 만으로 해석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힘에 '삶에 대한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섞어서 '삶에 대한 기대'라는 개념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왜 그들이 현실의 인간관계로까지 연장하고 싶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필자가 볼 때 울갤러를 포함한 많은 우울한 sns이용자들(이하 우울러들)은, 마치 정치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은 서로가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현실에서 삶에 대한 기대(동력의 의미로써, 또는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내는 데 힘듦을 경험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간관계를 끊자니 사람은 누구나 관계의 욕구를 가지지 않는가? 그래서 울갤과 같이 '삶에 대한 세계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리라 기대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발적으로' 진입해 어떻게든 그 안으로부터 현실의 인간관계를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앞서 말한 '존재와 집단적 정체성의 재확인'의 필요도 여기에 적용하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가 경험한 바, 트위터와 같은 SNS에 자신의 자해 사진을 전시하는 많은 '자해러'들은 자신의 자해 사진을 비주기적으로나마 전시한다. 필자는 그 전시의 이유가 자신이 여전히 자해를 한다는 그 사실을 증명하려는 어떤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증명의 필요는 자신과 비슷한 '삶에 대한 세계관'을 가진 자들과의 소속감을 잃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 아닐까. "나는 아직 우울하다"- "나는 아직 당신들과 같은 세상에 있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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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범위를 더 크게 확대해보자면, 사실 모든 사람들의 sns 등 인터넷을 통한 인간관계 형성의 욕구는 과거와는 달리 자신의 선호에 딱 들어맞는 이를 인터넷에서는 정보를 탐색 및 검토하고 사전에 확인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한다. 무릇 여기 <캠페인즈>도 상호 채팅의 기능이 없을 뿐이지 '토론'을 통한 인간관계의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단지 울갤은 '삶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일 뿐.
4. 맺으며
이제 본 토론글이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필자는 이 글의 처음에 "이 사건의 본질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과제를 앞으로도 우리가 무시하거나 심지어 냉소적으로 비웃는다면 그 문제는 더할나위 없이 커져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길이 작동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 본 글의 내용과 함께 해당 우려를 목차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욕구는 역으로 현실로부터의 인간관계 형성에 문제를 줄 수 있다.
B)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만의 추구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또는 극단적 세계관을 고정시킬 수 있다.
C)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 추구'조차의' 실패는 개인의 인간관계 형성의 완전실패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이는 자살위험을 극대화할 수 있다.
D)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수행에서 특히 여성은 범죄에 보다 더 취약하다.
E)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 시도의 결과로 발생한 피해의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기 쉽다.
이상으로 목차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시도를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천정환(2014)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는 비교적 흔한 '실연자살'은 조선시대에는 실연자살이라는 언어로 표상된 흔적을 찾기 힘들며 '연애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실연자살자'들이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지금 책이 없어서 page까지는 기억이...) 이처럼 4월 16일의 A양이나 다른 인터넷 우울러들의 자살사건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즉,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시도를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탄생한 자연스런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토론글의 카테고리를 '새로운 이슈 제안'이 아닌 '돌봄, 복지 사각지대 해소'로 붙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다. 즉, 인간관계 형성의 시도와 '돌봄'을 같은 맥락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왜냐면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욕구는 일단 현실로부터의 인간관계 형성의 실패를 전제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에 돌봄 제도의 역할이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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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능력이 부족해 글이 매끄럽지 못하다.
이 글은 다음에 있을 현대사회와 인간관계 형성의 문제, 또는 소속감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한 발판 작업이다. 다음 글에서는 실제 우리 사회에 어떤 인간관계 형성의 수단들이 제도적, 비제도적으로 존재하는지를 찾아보고 만약 그곳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해결을 지향하는 실천적 태도로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토론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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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중한 의견 주시면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출처
1. 박가분(2013), [일간베스트의 사상]
2. 엘레나 마르텔로조(2019),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
3. 천전환(2014), [자살론]
코멘트
9자살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정말 '죽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살 수가 없어서' 자살을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삶 속에 인터넷이 깊이 들어왔는데 인터넷과 우리의 삶에 대한 논의는 얼마나 해보았는가 라는 반성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글쓴이의 프로필에 '책을 좋아하지만 술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쓰여있어서 글을 읽어보게 되었네요. 동질감 같은 게 들어서라고 할까요. 인간관계의 실패를 보듬을 수 있는 제도적 비제도적 장치가 무엇이 있을지 궁금한 마음으로 다음 글을 기다리겠습니다.
언론에서 깊이 다루고 있지 않은 이면을 일부 보게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극단적 선택에 대해서는 이제 '사회적' 요인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은 선언에 그치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울증'은 주로 개인과 결부되어 다뤄지는 것 같고, 우울증과 극단적 선택 사이의 높은 상관성으로 인해 극단적 선택이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되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울증 또한 사회구조적 조건과 그 영향에 따라 크게 늘어나거나 해결 가능성이 달라지거나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은 사회가 외면해 온 '영역'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다시 묻히는 듯 하기도 하지만.. 외면 할 수 없는 사회문제인만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논의해보면 좋겠습니다.
미국은 응급실에 정신건강의가 반드시 상주하는 주가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야말로 다른 사고보다 더 사망과 연결되기 쉬운 병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을 감정의 기복쯤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그들의 힘듦을 인정하고 지지해줘야 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글 내용과 관련된 뉴스 영상을 봤네요...
'복지 사각지대' 이슈로 선택한 맥락을 알려 주셨는데요. 그 부분에 주목하게 되네요. 충격적인 일로 기사가 나지만, 이 정도로 이면을 알려주는 기사나 취재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건은 아직 여러 측면에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사건과는 별개로 작성자님이 제기하는 사회적인 외로움과 그로 인한 우울함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인터넷 공간에서의 알맞춤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중요한 것임은 알 것 같습니다. 사회문제는 하나의 틀로 단순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회구조, 끝없이 변화하는 사회적 조건들, 그 속에서의 개인과 집단들이 겪는 심리적 조건들, 그 안에서의 행위들. 우리 사회는 잘 대응하고 있는 걸까요? 고민이 깊어집니다.
우울증과 우울증 갤러리,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인 인간관계 형성 시도를 다양한 관점에서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하지만 우리는 인터넷을 통한 알맞춤 인간관계 형성의 시도를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 문장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본인의 욕구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을 안전하게 보전하고 충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공동체와 제도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루밍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이번에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요, 우울증이 점차 심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이런 일들에 대한 인지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겠네요..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은 사회적 질병 혹은 재난이 아닐까 고민한 적이 있는데요.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다가 발견한 관련 기사(링크)와 이 토론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우울증 갤러리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어떤 범죄에 해당하는가를 따지고, 범죄를 예방-해결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돌봄 차원에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