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고민하는 활동가들 여기여기 붙어라 👍
지난 2월 25일, 노동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 두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시민단체 활동가 여섯 명을 초대했습니다! 망원의 성미산알루(무료로 공간을 내어주신 사장님 감사합니다🙏) 에 모여 '노동'과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3시간 내내 이어진 성토대회에 허덕이며 녹취록을 풀었습니다😂 한달동안 울고 웃으며 이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해보았는데요, 일부를 캠페인즈에도 소개합니다!  이 글에서는 볼 수 없는 기획의도와 기록 전문 한 눈에 확인하기👀 모든 구성원의 대화는 알록달록한 가명으로 기록했습니다. 🍎함께 하고 싶은 빨강 씨🍋 쎄한 노랑 씨 🍊 뻗치기 중인 주황 씨 🥦 어쩌구한 초록 씨 🫐 내려놓은 파랑 씨🥑 지켜보는 남색 씨🍇 날아가고 싶은 보라 씨 🤔 각 단체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파랑 | 저희 단체는 얼마 전 급성장했어요. 그래서 요즘 과도기인 것 같기도 해요. 지금은 팀장회의에서 사업이 결정이 되는 편이에요. 저희는 거기서 나온 결정에 맞춰 실무를 하고요. 저희 팀은 팀장님이 그래도 대표님에게 사업의 목적을 계속 묻고 그래서 결국 방향성을 알아내주셔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실무를 시작하기 전에 이 사업의 의미를 팀원들과 같이 얘기해서 만들어가고 시작하시죠. 하지만 조직에는 그렇지 않은 팀이 더 많아요. 그냥 팀장회의의 결정을 100% 수용해서 시작하죠. 그래서 방향성에 대한 맥락이 잘 공유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단체는 규모도 큰 편이고 팀도 많이 나눠져 있어서 일단 자기 팀에서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거예요. 그러면 팀들끼리 집행하는 활동과 결정에 차이가 생기기도 해요. 예를 들어 이 팀에서 내보낸 콘텐츠는 A 입장인데, 다른 팀 콘텐츠에서는 그거랑 미묘하게 다른 의견의 B 입장으로 나온다든지… 그럴 때 조정을 하는 시간이 있긴 한데, 그 조정 자리에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죠.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조직의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은 거예요. 🍋노랑 | ’파랑‘의 팀은 관련한 문제를 인식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직에 이야기 해보았나요? 🫐파랑 | 네. 운이 좋게도 제가 속한 팀이 조직의 상황을 꽤나 예민하게 보고, 그래서 문제 제기를 자주 하는 편이에요. 조직에서 ‘저 팀 무섭다’ 이런 얘기를 좀 듣기도 해요. (모두 야유) ‘이걸 왜 하느냐’고 질문을 하면 그게 되게 공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나봐요. 조직 내에서도 이 사업을 왜 해야 하는지 설명 못하면 안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한 참여형 사업들인 경우가 많잖아요. 내부조차 설득이 안 되는데 어떻게 진행할 수 있냐는 기본적인 질문이죠. 그래서 계속 점검하는 건데 그냥 ‘무섭다’고 피드백이 오니까 위축되기도 해요. 특히나 팀장 회의에서는 대표를 견제하는 사람이 많이 없는 것 같아요. 팀장들 중에 결정에 의문을 가지거나 점검하는 사람이 없어요. 내부에서 관련해서 문제 제기를 한 동료들이야 많았죠. ‘방향성을 잘 모르겠으니 더 설명해달라’ 라고 말하는 사람들, 물론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그 사람들은 이미 지쳐서 나가 떨어졌어요. 문제 제기했던 사람들만 자꾸 떠나게 돼요. 그런 사람들이 계속 못 남아 있게 만드는, 튕겨나가버리는 그런 조직 분위기가 있죠. 계속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걸 그냥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게 계속 반복이 되니까 되게 감정의 고립이 쌓이네요. 그래서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이 거버넌스를 만드는 거였어요. 개인이 얘기하게 하지 말고 논의 거버넌스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있어요. 🍎빨강 | 문제 제기를 자꾸 면담으로 풀려고 하는 것에 불편함이 있어요. 그 자리는 문서화 하는 시간도 아니고 하니까 변화와 책임이 부재하죠. 그래서 열린 회의자리에서 다시 한번 얘기를 꺼내기도 해요. 그럼 이런 말을 하면서 다시 면담으로 또 빼는 거죠. “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얘기해요? 이런 식으로 풀지 말고 나한테 면담 먼저 요청해야 되지 않나요?” 여러 명 있는 자리에서 몰리게 되는 상황에 대한 기피감이 있는 것 같아요. 🍊주황 | 그럴수록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집단행동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활동가로서 꼭 더 열린 자리에서 말하라고 제안하고 싶어요. 면담으로만 해결하면서 그렇게 계속 정보를 리더들만 알게 되는 거잖아요. 그 리더만 활동가들의 얘기를 다 알고, 활동가들 사이의 칸막이를 높이는 거잖아요. 여기서 나온 대화들이 어디까지 정확히 책임져지고 실행될 건지를 흐리는 거잖아요. ‘여기서 다 얘기했으니까 끝이야’라는 명분만 쌓아가거나… 저는 여기서 꼭 정치활동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활동가들끼리 이런 얘기들을 나누고, 우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끔 해야 되는 거죠. 우리들의 목소리를 더 분명히 하는 전략들을 좀 더 짜야 되지 않을까요? 모두 결정 단위에 대한 견제기구가 딱히 없는 것처럼 보이네요. 그럼 활동가 스스로 견제해야 될 것 같은데요. 사업도 좀 안 해버리고 이러면서, 진짜 이 운영진들이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고 그걸 통해 투쟁하는 방식으로 가는 게 일단 기본원칙이죠. 이 문제의식을 좀 명확히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구체적인 사례도 정립하고. 🍎빨강 | 우리가 다 같이 모여서 문제 제기한 경험과 사례, 선례… 뭐가 없으니까 매번 개인 의견으로 몰리고, 개인 면담으로 빼고… 사실 저 그래서 면담 왕이에요. (웃음) 이게 처음 한두 번 반복될 때는 맨날 면담 자리에서 울었는데 이젠 울지도 않게 되더군요. 🍋노랑 | 너무 공감해요. 면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이게 의미있게 문제 제기로 흘러가느냐, 그냥 개인의 투정으로 흘러가느냐가 결정되잖아요. 면담 상대가 어떤 감수성을 가졌는지, 어떤 리더십을 가졌는지에 따라서도 조직 소통방법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죠. 솔직히 이건 조직한테도 손해같거든요. 시민단체는 규모가 조금이나마 커지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작은 단위인 팀 소통으로 전환하는데, 운영진들이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주황 | 의식은 같이 갖고 있지만 문제 제기에 동참하지 않는 동료들의 경우, 그 문제 제기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는 않나요? 어쨌든 조직에 맞서는 거니까. 🍎빨강 | 그런 것도 조금 있어요. 우리는 운영진이 되게 권위적이고 몰아치는 타입이기도 해서요. 그런 자리가 사실상 너무 부담스럽고 어려운 동료들도 많은 거죠. 사실 운영진, 리더들한테 면담 요청 오면 개인 활동가들은 당연히 너무 부담되죠. 특히 연차가 적을수록 더더욱.이번에 퇴사하시는 분들이 사실 제일 많이 총대를 메고 제일 많이 얘기했던 사람이거든요. 끝내 퇴사하시는 걸 보고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라는 반성이 저뿐만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어요. 그리고 다른 팀에서 문제 제기를 할 때 쉽게 개입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죠. 워낙 따로 움직여서. 이게 늘 개개인의 문제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연대가 어려운 것 같아요. 🍊주황 | 반박할 수 있는 데이터들을 계속 쌓으면서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계속 조직 내에 살아있게끔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그때도 이랬지’ 하면서 사라진 문제가 되지 않고 해결을 위한 노력이 기억되게 하는. 우리도 오랫동안 혼자 싸우다가 퇴사하신 분처럼 되면 안 되잖아요. 이제 또 하나의 선례가 쌓여버렸으니까 ‘우리 이 꼴 나기 전에 한번 제대로 다시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여러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랑 | 시민단체들은 대부분 주적 같은 존재, 뭐 사람이든 권력이든 제도든, 그런 상대가 있잖아요. 그것과의 싸움에 몰입하다 보면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아니 자잘하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되기 쉬운 투쟁들이 엄청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의 외침이 조직의 외부활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고 혼자 자기검열하는 게 커지기도 하고요. 대부분 이 조직의 활동에 지지해서 들어오는 활동가들이 많으니까. 그런 생각들이 계속 우리를 옥죄지 않나 생각해요. 🤐지금의 노동, 괜찮으신가요? 🥦초록 | 이 단체는 개인 활동가들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너무 높아요. 동료들의 평균치가 높으니까 내가 거기에 다다르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감각들이 막 생기거든요. 밤, 주말에 일하는 거 너무 기본이고요, 주중 근무시간이 명확하지 않아서 그냥 막 아무때나 업무 메신저가 울려요. 그거에 대해 무시하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언제 올려도 바로 소통이 되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조직 분위기가 살짝 있는 것 같아요. 🍋노랑 | 사실 조직이 막 개인의 책임감을 강요하지 않는 건 맞아요. 그런데 또 활동가가 눈치 받지 않고 오롯이 자기만의 선택으로 과로를 하냐? 그건 당연히! 아니거든요. 가끔 운영진이 반복되는 과로를 개인의 몫으로 말하곤 하는데, 그걸 멈추게 하는 것도 조직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방관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도 책임이죠. 제가 일하는 곳이 그래도 꽤 오래된 조직이거든요. 그런데 ‘빨강’이 말씀하신 것처럼 규정이 정말 많이 없어요. 특히 개인 활동가의 안전한 노동 환경에 대한 건 거의 없어요.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야만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죠. 규정을 만드는 과정 속에 있다보면 사실 이걸 필요로 하는 동료들이 되게 많았구나 느끼게 돼요. 그런데도 한번도 제안된 적이 없었던 거예요. 이유를 여쭤봤는데 놀라운 답들을 주셨어요. ’이 단체를 믿으니까.’ 저 또한 이 단체를 너무나 믿지만요, 지금 정말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아요. 이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버틸 만한 힘이 안 생긴다는 답도 들었는데요. 생각보다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어가게 되는 경우들이 엄청 많은 것 같더라고요. 저희는 다른 팀과의 소통이 조금 어려운 조직인데요. 개개인에게는 팀 문화가 곧 조직 그 자체로 느껴지게 돼요. 그렇게 조직에서 놓치는 것들이 생기는 거죠. 팀 안에서 괴로운 점이 생기면 풀 곳이 딱히 없거든요. 저는 문제 제기를 했을 때 가장 듣기 싫었던 대답 2개를 다 들었어요. ‘조직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선택이네요.’ '원래 이 판은 그렇게 굴러가요.’ 저는 이 말처럼 시민단체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제가 또 주섬주섬 개인적인 경험을 꺼내요. 그렇게 ‘원래‘처럼 비영리단체가 굴러가다가 누군가 상처를 받은 사례들이요. 분명 이 조직에서도 있었지만 외면해온 사례들이기도 하겠죠. 당신들이 조직을 너무 안전하다고 믿고 이상적으로 생각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심지어 내 경험까지 끌고 와서 설득해야 하는거죠. 나도 이 조직을 리더들만큼 아껴서 하는 제안이라는 걸 증명하는 행위를 굳이 해야 하는, 저한테는 가장 상처받는 순간들이죠. 🥦초록 | 그냥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하나의 마을이에요. 진짜 신뢰도 200%의 마을. 그게 부담스럽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낀 사람들은 그냥 하나둘씩 나가는 거죠. 🍊주황 | 그렇게 믿음으로만 가면은 결국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고, 그 후에야 ‘우리가 믿음으로 갔던 게 이렇게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구나를 알게 되면 상처받고 조직이 와해되고 이렇게 가는 길이잖아요. 뭔가 그렇게 되기 전에 뭔가 하는 게 진짜 중요할 것 같긴 하네요. 진짜 개선과제 많을 것 같은 조직인데요. 조직에 일체화되어 있지 않은 동료가 좀 많이 필요해 보이네요. 활동가로서 지속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정말 과로해선 안 돼요. 하다 죽어요. 진짜요. 근데 “조급해하지 마” 또는 “너 지금 잘하고 있고 당연히 이만큼 하는 게 너무 당연해”라고 말할 수 있는 상급자가 아마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러면 스스로라도 그 메타 상급자를 머릿속에 만들어가지고 얘기를 자기한테 해줘야 되거든요. 아니면 친구들끼리 얘기를 하면서 계속 그거를 실제로 안정시키는 작업들이 필요하고. ‘활동가’라는 어떤 사명감 때문에 과로가 부채질 되는 경향이 있단 말이에요. 좋은 중간 관리자를 만나면 이 얘기를 해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생각하면서 가야 해요. 이 기준선이 자꾸 높아지는 건 결국 조직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좀 이런 말 통하는 동료를 계속 찾아보는 게 되게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해요. 표준의 기준선을 높이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게 되네’라는 말, 되게 무서운 말이네요. 개별 활동가가 다 투쟁의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말고, 말 좀 통할 만한 동료들을 계속 찾아야 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진단이 내려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요즘 고민이 무엇인가요? 🍎빨강 | 요즘 상황이 상황인지라... 같이 일을 하면서 “우리 저기로 나아갑시다”여야 되는데 “망하지만 말자”라고 얘기하며 넘어가는 순간이 많아요. 배에 물이 막 들어오는데도, “괜찮아, 손으로 막아! 배 아직 안 가라앉았어!“ 🍋노랑 | 활동가들은 자기자신을 일반적인 노동자라고 감각하지 않는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린 의미있는 일 하고 있으니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 중 하나니까!’ 이런 사명감으로 과로와 이 이상한 체계들을 용서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시민단체가 겪는 외부 상황도 안 좋은 시기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주황 | 어떤 조직이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의 변화가 잘 일어나야 해요. 밖으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민단체는 특히나 이 얘기가 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에서 우리도 계속 배우고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아성찰이 계속 이루어져야 외부활동에도 좋은 작용이 되며 이어지기 마련인데, 왜 우리는 늘 이에 대한 고민과 토론을 제일 뒷순위에 둘까요. 서로를 믿는다는 이유로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는가… 이런 생각들과… 조직의 장기적인 플랜을 생각했을 때 너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으면 일부러 시간을 배정해서 ‘이건 우리 챙기고 갈게요’라고 할 수 있는 판단이라고 보거든요. 그거는 나는 당연히 이 업무 영역에서 포함시켜서 당연히 기본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뭔가 일의 영역은 판단하기에 따라 되게 다르고 ‘일을 어디까지는 하지 말자’도 사실 우리가 결정 내리기 마련인데 그 결정에서 늘 얘가 뒷전인 지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리더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생기죠. 🍎빨강 | 뭐랄까… 동료를 잃는 거 너무 슬프지 않아요? 나는 함께 마음을 나눈 사람들 떠나는 게 제일 속상해요. 🍊주황 | 이제 앞으로 장기적으로 동료를 안 잃기 위해서 행동해야지요. 그래서 꼭 지속가능성 있는 활동을 하길 바랍니다. 저도 지금 견디는 중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런 것에 좀 능한 것 같습니다. 저는 진짜 잘 쉬는 사람인 것 같아요. 활동가 버튼이라는 거, 끄면 또 꺼지더라고요. 이렇게 ’멈추는 것까지도 내 활동이다‘ 생각해요. 선언이야, 선언. 지금 내가 잘 먹고 잘 쉬는 것도 내 활동의 일환이다. 그래서 안식월 제도 같은 게 진짜 필요한 것 같아요. 일부러 고의적으로라도 활동을 끄도록. 🍎빨강 | 최근에 그런 말을 들었어요. 안식월이 대부분 3년차 이상부터 생기잖아요. 물론 개개별의 휴식의 목적도 있지만, 3년차면은 중간관리자이거나 조직에서 그만큼 중요한 실무 위치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 한달동안 부재해도 조직이 굴러갈 수 있는 연습을 하는 목적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노랑 | 너무 중요하네요. 저는 그만큼 연차가 안 쌓였는데도 이미 낸 휴가를 반납해야 했던 날들이 많았는데… 우리 조직 그 연습 너무 필요해요. 🍇보라 | 저는 일하면서 그런 질문을 못 던져봤던 것 같아요. ‘이거 왜 해야 되지?’ 나조차 꺼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게 좀 오늘 느꼈던 점이에요. 위에서 내려오면 그냥 했던 거지. ‘이걸 왜 해야 되고 우리가 뭘 위해서 이걸 하고 있지’가 안 잡혀 있기도 하고요. 저는 요즘은 고민했던 게 계약직과 정규직으로 일하는 차이예요. 왜 2년 이상 일하면 정규직 전환을 해줘야 되는지 이런 게 몸으로 납득이 되는 게 있었어요. 🍋노랑 | 조직이 비정규직 다루는, 특히 시민단체가 비정규직 활동가 다루는 태도는 진짜 너무 별로인 것 같아요. 그냥 일손 부족할 때 막 불렀다가 프로젝트 끝나자마자 손절, 이런 느낌이죠. 🍇보라 | 사업 목적에 대한 납득이 없으면 ‘여기서 뭘 배울 수 있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고, 그럼 내가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는가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조직이 명확히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게 너무 필요하다고 느껴요. 내가 어떻게 나아가고 싶은지의 확고함과 조직이 나아가고자 하는 거를 맞춰나가고 싶은데 조직의 방향성이 없으니 이조차 어려워요. 그게 또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뭔가 기획해서 제안을 역으로 하면 될 것 같긴 한데 그조차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인가에 대한 판단이 없어요. 그러니까 일을 벌려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이런 것도 좀 헷갈릴 때가 있어요. 내 의견을 반영해 줄 수 있는 회의 공간이 있으면 얘기를 하겠는데, 역량 발휘하고 싶은 욕구와 나의 위치가 일치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들어요. 저는 곧 계약이 만료되고, 조직에 변화를 만들고 싶어도 계약직이라는 신분이 뭔가 도전하기에 좀 어려운 거죠. 🫢우리의 활동이 건강하게 지속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주황 | 조직문화 진단을 의무화했으면 좋겠어요. 이행하지 않으면 패널티를 받는다든지 벌금을 내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성희롱 예방교육을 직장 의무교육에 포함하듯이 조직 문화에 대한 것도 의무교육으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노랑 | 동료들과 얘기를 많이 해야 되는 것 같아요. 같은 프로젝트를 하고 있더라도 당장 옆에 있는 동료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나랑 같은 고민을 누군가 하고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괜히 힘이 나는 경우가 있잖아요. 하나의 투쟁으로, 변화의 움직임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서로에 대한 돌봄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고요. 그래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네요. 조직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 대안을 찾아 요구하는 것은 저한테 그 다음 단계로 느껴져요. 🍇보라 | 동료와 친구 사이 이런 균형도 되게 어려운 주제인 것 같아요. 동료와 친해질 수 있는가.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는가. 🍋노랑 | 저한테는 그것도 진짜 최대 고민이었어요. 일에 대한 어려움이 사적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되게 쉽잖아요. 이걸 오픈할 정도의 관계가 되어야 결국 그 모든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록 | 저는 교육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완전 필요해요. 내가 이 조직을 위해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역량을 채워줄 수 있는 교육이 또는 기회가 제공 됐으면 하는 게 있어요. 뭔가 나랑 같이 나아지려고 하는구나 하는 느낌도 같이 받고요. 🫐파랑 | 전 노조가 생기면 좋겠어요. 요즘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물어요. “너네 노조 있어? 어떻게 운영돼?” 아까 ‘동료와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는 동료랑은 친구 안 하거든요. (웃음) 저는 동료는 어디까지나 동료라고 생각을 해요. 일터에서의 어려움을 얘기하는 건 친구가 아닌 동료끼리만 할 수 있는 얘기잖아요. 제가 자주 조직 관련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같은 불만이 있는 동료들이 저를 찾아오더라고요. 그렇게 뭔가 미묘한 네트워크 같은 게 생겨요. 이 네트워크를 조금 더 공식적인 기구로 만드는 것을 최대 목표로 가지고 있어요. 일단은 노조 관련 스터디부터 시작을 할까 해요. 동료들과 노동에 대해서 같이 비슷한 감각을 깨우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희 단체는 뭔가 끈끈함이 있는 조직은 아니라서 결국 모든 것이 자기 선택으로 치부되거든요. 그게 사실은 다 조직의 고도의 전략으로 짜여있는 느낌이 좀 들어가지고요. 한 활동가가 혼자 인사팀을 만나러 가거나 조직에 무언가를 얘기하거나 할 때 외롭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일단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형식적으로라도 그리고 최소한이라도 그런 면담에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던가… 그런 점이 체계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주황 | 현재 사측과 투쟁 중인 00단체도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에 한 달 전부터 교육을 공부했대요. 자꾸 이런 조직 이야기가 후순위로 밀리고 그러다 보니까 바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들이 계속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오늘 집담회 같은 시도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디자인할 사람 필요하면 디자이너 채용하고 개발할 사람 필요하면 개발자 채용하는 것처럼, 사실상 시민단체에도 HR 전문가가 좀 더 많이 자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활동가들은 대부분 ‘내가 당장 필요하니까 내가 해당 역량 쌓아서 해결한다‘ 이렇게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여요. 그리고 그런 전문가들이 있으려면 자본이 필요한데 그것도 어렵기도 하고… 하여튼 이런 노동 환경이 좀 당연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에서는 볼 수 없는 기획의도와 기록 전문 한 눈에 확인하기👀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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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안전]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
*대체텍스트 있음 우리나라가 2014년부터 꾸준하게 유지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국제노동기본권 등급이다.  No guarantee of rights노동권 미보장 나라 5등급인 ‘No guarantee of rights’를 벗어난 적이 없다. 유일하게 5등급의 하위인 5+등급은 대부분 내전으로 법치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가 받는다. 사실상 우리는 최하위를 받은 것이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은 노동기본권 지표 보고서를 통해 등급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올해는 단체행동권 침해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Right to free speech and assembly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침해작년 6월 전국공공운수노조는 최저임금제와 같은 기본안전운임제 확대를 요구했다. 청와대 주변 시위 허용 방침 이틀 만에 경찰은 이들의 시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정부는 이들의 총파업을 막기 위해 개별 운전자들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는 긴급법을 발동시켰다.  Violent attacks on workers 노동자에 대한 폭력올해 1월 18일, 경찰과 국가정보원이 민주노총과 보건의료노조 사무실을 압수수색 했다. 단체가 아닌 개인 간부가 대상이었는데, 경찰 수백명이 동원되어 10시간동안 진행되었다.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해당 활동가들이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을 당해 하부망을 조직했다는 주장이었다. Right to civil liberties 자유에 대한 권리작년 5월 민주노총 윤택근 수석부위원장이 체포되었다.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였다. 기준이 모호했던 감염병관리법이 집회 자유의 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논란과도 이어진다. 국제운수노동자연맹은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위반이라며 직접 적극 개입하기도 했다.  Union busting 노조 급습작년 6월 전국은행연합회가 세 명의 한국금융산업노조 전직 간부를 해고했다. 2017년 단체교섭 원상회복을 요구하기 위해 한국금융투자협회 사무실을 항의 방문한 사건 때문이었다. 해당 노동자들은 이미 기소되어 징역형과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지만, 전국은행연합회는 재발 방지를 위해 이들을 해고한다고 밝혔다. Prosecution of union leaders for participating in strikes 파업에 참여한 노조 간부 기소작년 대우조선해양은 파업을 진행한 전국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를 상대로 470억 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해당 파업은 하청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이들은 10년 이상 경력이라도 계약직이란 이유로 최저임금만을 받으며 일해야 했다.  2015년 어느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광화문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의경 컨테이너 맞은편 좁은 도보. 낡은 돗자리 몇 개를 덧댄 바닥에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피해 돌아가려 길을 건너다 방향을 바꿔 그들의 돗자리로 다가갔다. 털썩 주저 앉으며 물었다.     “여기 왜 앉아 계시는지 궁금해요.” 무작정 곁으로 온 초면의 청년에게 찬 데 앉지 말라며 자신들의 방석을 전부 내어주시던 그들은 강원도 삼척에서 온 동양시멘트 하청노동자였다. 나는 이 돗자리에서 어디에서도 자세히 듣지 못한, 하지만 너무나 알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화 도중 한 행인이 “힘내십시오!” 한마디 건네며 지나쳤다. 그러자 한 분이 벌떡 일어나 그 행인에게 뛰어가서는 허리 숙여 감사인사를 하고 음료수 한 병을 건넸다.  이 장면을 오래도록 또렷이 기억하고자 한다. 그들이 요구한 건 시멘트 대기업의 몰락이 아니었다. 그저 중학생이 된 딸내미에게 떡볶이 사 먹으라 용돈을 주고, 내일 회사에서 잘리진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며 잠드는 밤을 바랐다. 이런 당연한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이란 보안직원을 앞세운 꽉 닫힌 본사 건물 앞 길바닥에서 먹고 자는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고 누군가의 작은 이해와 응원만으로도 힘을 내어 변화를 만드는 노동자의 움직임은 여전히 단단하다. 그들의 돗자리에 찾아가 앉지 않으면 듣지 못할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 청소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하자 파리 시민들은 치워지지 않은 쓰레기를 모아 시청 앞에 쌓아 올렸다. 이는 파업을 진행한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파업의 원인을 제공한 고용 측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한 유명한 일화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대학 청소노동자 파업 당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빗자루는 알고 있다> 중) 우리는 노동기본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들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거나 응원 한 마디를 건넨 적은 언제일까 떠올려본다. 늦어진 출근길에 욕설을 내뱉거나 찢어지는 스피커 음향에 귀를 틀어막진 않았는지. 그리고 상상한다. 치워지지 않은 쓰레기로 덮인 길거리를 마주한 우리는 과연 누구를 탓했을까? 2015년 동일한 주제와 제목으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그때도 여전히 나는 노동기본권 최하위 국가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5등급의 이유는 교직원노조의 법외노조 통보, 공무원노조 설립신고 반려, 철도파업에 대한 정부의 태도, 삼성의 무노조 정책이었다.  8년이 지나가는 오늘 반추하니, 놀랍게도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출발선 전이지만. 전국교직원노조는 법외노조 처분 위법 판결을 받았고 전국공무원노조는 9년만에 설립신고증을 교부 받았으며 삼성 임원진은 무노조 경영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우리의 일터가 수많은 투쟁으로 더 안전하게 바뀌고 있다. 그 작지만 거대한 변화의 가치를 잊지 않아야 한다. 다른 일터가 무사(無事)하지 않다면 나의 일터도 무사하지 않다. 그들의 일상이 위험하다면 우리의 일상도 위협받을 수 있다. 우리 모두 똑같은 권리를 가진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안전한 일터를 위해서는 쓰레기가 가득한 거리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를 비난하지 않는 시선이 필요하다. 쓰레기를 시청 앞으로 쌓아 올려 서로를 지지할 수 있는 일상 속 연대가 필요하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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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억] 기꺼이 걸려 멈춰 설 수 있는 기억
*대체텍스트 있음 내 오른쪽 발등에는 ‘0416’이 새겨져 있다. 재작년 발등뼈 골절로 병원을 찾았다. 물리치료사가 치료기를 연결하다가 내 발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남겼다. “제가 안산에서 왔거든요.” 목정원 작가는 동시대인의 가장 적합한 정의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죽음에 대한 기억을 설명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물리치료사는 4개의 숫자만 보고도 ‘세월호’를 떠올렸고, 나 또한 안산을 듣고 동일한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다. 그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침몰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아무도 배에 남은 304명의 안부는 알려주지 않았다. TV 속 세월호는 선박이 아닌 생명이었다. 생명이 물 속에 잠기고 있는 순간을 등교하면서 밥 먹으면서 잠에 들면서까지 목격했다. 시시각각 나오는 오보와 거짓정보에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울부짖는 유족의 곁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잔잔한 일상 속에서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소극적인 목격자, 딱 그만큼만 되고 싶었다. 진도로 가서 유족을 위로하고, 영정사진 앞에 좋아하던 간식을 건네며 함께 목격한 시민들에게 애도를 제안하는 그런 동시대인이 되고자 했을 뿐이었다. 팽목항의 매서운 파도에도 온기를 느끼던 몸은 광화문에 도착하자마자 매캐한 물에 젖어버렸다. 국화꽃은 경찰버스 바퀴에 짓밟혔다. 시민을 향한 편지는 내 손을 떠나자마자 거친 욕설과 함께 갈기갈기 찢겼다.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시절의 나는, 그저 사람들과 각자의 고통을 서로 수무하고 싶었다. 같이 기억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회는 괴상하리만큼 적극적으로 추모를 막아섰다.  2022년 10월 29일, 나는 평화로운 강릉 바다 앞이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밤바다를 마주한 채로 이태원 소식을 들었다. 정신없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정을 넘겨서까지 전부의 목소리를 확인한 후 복잡하고도 괴로운 안도를 느꼈다. 그제서야 내 앞의 바다가 다시 보였다.  곧바로 두려움이 나를 덮쳤다. 이는 지워진 기억을 의미했다. 잊혀지도록 강요받은 기억이 떠오르자 시간은 그 4월 16일로 되돌아갔다. 길 한복판에서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생명,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을 의심받는 남은 사람들, 치유하려는 움직임을 의심하는 사회, 감히 평화를 느낀 내게 몰려오는 자책감.  여전히 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늘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향으로 걷겠다며 '0416'을 새긴 내 발은 안산에 이어 이태원으로 향했다. 10.29 참사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쪽지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수없이 적혀있다. 참사가 늘어날 때마다 '우연히' 생존한 스스로에게 죄의 무게를 실어야만 했던 것이다.  충분한 애도를 망각하고 있었다. 사회는 추모의 방법이 최대한 간결하고 일상에 거슬리지 않게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사회적 참사의 추모란, 갑작스러운 상실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는 시선과 이 죽음들로부터 사회구조를 재해석하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서로의 동시대인이자 비극의 목격자인 우리는 '이 슬픔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 필수 교과목이 된 생존수영과 환승역마다 배치된 질서유지 전담 인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멈춤이 필요하다. 왜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되새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시 죄 없는 사과만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존경하는 친구가 내게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 프로젝트'에 대해 알려주었다. 슈톨퍼슈타인은 걸림돌을 뜻한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군터 뎀니히는 작은 황동판에 나치 희생자의 이름과 사망일을 새기고, 희생자들이 생활하던 유럽 길거리 곳곳에 설치했다. 이 걸림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바쁜 걸음을 방해하고, 평온한 일상에서 비극의 기억을 되살린다. 우리에게는 잠시 멈춰 서서 지난 참사를 되돌아 보는 충분한 추모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기꺼이 걸림돌에 걸릴 준비가 되었다. 캠페인즈 미디어를 통해 직접 캠페이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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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P짱은 내 친구'로 보는 동물권 교육
*대체텍스트 있음  영화 <P짱은 내 친구(School Days with a Pig)>를 아시나요? 2008년에 개봉했음에도 교육계에서는 여전히 자주 언급되는 영화입니다.  <P짱은 내 친구>는 일본의 한 초등학교 6학년 2반 교실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1년을 함께 보낸 ‘P짱’을 죽여야 하는가에 대해 열띠게 토론 중 입니다. P짱은 이 반에서 키우던 돼지입니다. 담임인 신입 교사 ‘호시’는 학생들이 직접 돼지를 키우고 잡아먹는 과정을 겪음으로 음식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고자 수업을 기획했습니다. 학생들은 장마철이 되면 비를 뚫고 달려가 P짱의 집을 고쳐주었습니다. 경찰이 탈출한 P짱을 그물로 잡아끌자 온몸을 던져 막아내며, 한 마음으로 이 돼지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졸업 전 P짱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할 때는 정반대의 생각으로 나뉘었어요. 육가공센터에 보내자는 학생과 이어 키워줄 사람을 구하자는 학생. 두 의견을 가진 학생들의 토론에서 동물권 교육에 대한 논쟁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P짱은 무엇을 위해 사는 거야? 잡아먹히기 위해 사는 거야?”  2020년 11월 경남어류양식협회가 집회에서 살아있는 물살이를 바닥에 던지는 퍼포먼스를 해 논란이 되었습니다. 당시 경찰의 동물보호법 위반 고소에 검찰은 ‘식용 목적으로 키워졌기 때문에 위반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현재 동물보호법의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 체계가 발달한 척추동물로 정의하며 어류도 포함한다. 하지만 식용 목적인 경우는 동물보호법 대상에서 제외된다.) 2021년 5-6월 SBS 뉴스는 온라인 기사를 통해 '활어를 내던진 행위'가 동물학대인지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동물학대라는 답은 53%, 아니라는 답은 47%로 팽팽한 접전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동물권에 대한 여론이 합의되지 않은 시기임을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인간은 목적에 따라 가치를 판단하여 동물을 반려동물과 식용동물로 나누고 있습니다. 가축화는 동물을 인간에게 더 유용하게 개량하기 위해 시작되었어요. 인간이 한 동물의 번식과 먹이 공급을 통제하여 용도에 맞춰 선택적으로 번식시키는 과정입니다.(<총균쇠> 중) 사육이 동물은 물론, 인간 생태계에서도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는 뜻과 같습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여전히 모순적입니다. 어떤 동물은 인간의 가족 구성원이 되지만 어떤 동물은 고기, 물건, 오락거리가 되지요. 6학년 2반 학생들은 돼지와의 생활을 통해 매 순간 생명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P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어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은 종을 차별하지 않고 생겨나는 소중한 인권 의식입니다. 이에 대한 학습 없이 활동을 진행한 것은 학생에게 트라우마 또는 편견이 생길 수도 있는 위험한 교수법이었습니다.  “생명의 길이는 누가 정하나요?” (- 아무도 정할 수 없는 거야.) “그런데 우리 모두 P짱의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한 세대가 전염병에 걸려 그 공간에 함께 살던 사람들 모두를 생매장하여 죽이다. 태어난 아가를 엄마로부터 빼앗아 작고 더러운 방에 감금하다.  이 끔찍한 범죄를 묘사하는 듯한 문장들을 읽고 어떤 감정이 드셨나요? ‘닭’ 대신 ‘사람’으로, ‘송아지’ 대신 ‘아가’로 바꿔 적은 문장입니다. 인간을 농장동물로 다시 대체하여 읽어봅니다. 이번에는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종차별주의란 어떤 종에 속한 개체가 다른 종 개체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종의 이익만 우선시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이는 물‘고기’나 ‘젖’소처럼 우리가 동물을 부르는 언어에서도 쉽게 드러납니다. 모든 동물권 교육은 종차별주의에 유의하여 기획되어야 합니다. 어린이 대상 교육에서는 어느 주제든 다른 종에 공감을 요구하는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환경 이슈에 ‘북극곰을 살리자’는 슬로건이 아직도 쓰일 만큼 어린이 세대는 동물의 쾌고감수능력을 비교적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편입니다.  영화 속 “체육 시간도 아니고 돼지랑 뛰어놀다가 다쳐야 하나요?”라고 항의하는 학부모들과 전학생 ‘하나’의 반응 차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품으로 뛰어든 P짱을 안아 그의 심장박동을 느낀 이후, 하나는 P짱과 진심어린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물을 뿌리며 괴롭히는 친구에게 P짱 대신 복수를 해주거나 답답한 집(사육장)을 탈출시켜 주기 위해 애쓰기도 했습니다. 지금 어린이, 청소년 세대가 주로 학습하는 동물권 교육은 동물에게 공감하는 활동에서 끝이 나곤 합니다. 동물원의 한계성 또는 동물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학대만을 설명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초기 인식 교육만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하나 공장식 축산이나 생츄어리 등에 대한 심화 개념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학습자료에서 언급하는 ‘동물’은 모든 종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의 발달과 교육 과정에 생태감수성은 필수적인 가치입니다. 생태활동가 김산하 박사 말씀처럼 ‘생태감수성은 생명, 삶에 대한 이해, 정서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P짱과 놀고 있는 학생들 뒤로 체육 선생님이 지나갑니다. 웃으며 “P짱이 먹음직스럽게 잘 컸구나”라고 말하지요. 학생들의 표정이 굳고 잠시 고요해집니다. 이 순간 느꼈을 당혹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감정인지 학생 스스로 알고 있었다면 그들만의 방식대로 회복하고 대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졸업 후 P짱의 거처를 위한 학생들의 토론에 정답이란 없었겠지요. 하지만 결론이 절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결론에는 한 생명에 대한 책임이 달려있고, 그걸 알고 있는 학생들은 이 시간을 매우 힘겨워했습니다. 결국 이 혼란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사람은 호시였습니다. 교사 또한 교육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기에 호시에게도 어려운 결정이었을 겁니다. 이 영화는 오사카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영화 장면 속 상처 받은 학생들의 표정이 달리 보입니다. 역시나 생태감수성이 부재한 호시의 수업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죽이는 거랑 먹는 건 달라. 죽이는 건 생명을 뺏는 거고 먹는 건 생명을 이어받는 거야.”  토론 중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합니다.   “다른 동물은 먹으면서 P짱만 불쌍하고 다른 동물들은 아무렇지 않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먹이사슬을 보면 육식동물의 종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 과하게 먹기 위해 다른 종을 사육, 유전자 변이까지 하는 개체는 인간뿐입니다. 지구에 사는 비인간 육상동물 중 67%가 사람이 먹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라지요. (방목지와 사료용 작물 재배지는 전 세계 농경지의 77%를 차지한다.) 지구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동물 절반 이상이 ‘인간’이라는 한 종을 위해 자라고 있습니다.  팬데믹 직후 도시는 사람의 발길이 끊겨 고요해졌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했던 그때 도시에 야생동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이 길항적 관계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던 단편적 사례였습니다. 사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인간과 야생동물이 함께 살아가지 않은 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야생동물이 나타나면 ‘무법자’ 등으로 표현하며 살생하거나 쫓아냅니다. 인간 외의 생명을 불허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일상의 조건이 만들어지는 듯 보입니다. 어느 동물들은 죽어서야만 인간과 만날 수 있습니다. ‘치느님’, ‘우울할 땐 고기 앞으로’ 등 쉽게 유머로 접근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 외의 생명을 주변부화합니다. 살면서 살아있는 돼지와 한 번도 연결되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 ‘돼지’란 그저 식탁에서만 볼 수 있는 먹거리일 뿐입니다. 동물과 직접 관계하고 마주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꼭 가축동물이거나 시골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동물일 필요는 없을 거예요.   영화 속 호시가 강조한 것처럼 인간의 재생산 활동에 ‘식食’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문에 수업 목표를 실행하기 위한 교재로 ‘돼지’를 택했습니다. 그가 의도한 대로 학생 ‘신야’는 “생선 살이 단단하다는 건 열심히 살아서 그런 거니 더 잘 먹어야 한다”며 편식하던 습관도 고쳤습니다. 하지만 호시는 학생들이 동물과의 교감으로 '육식'이라는 행위 자체를 힘들어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동물권 교육 중에는 육식을 비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과한 육식에 집착하며 특정 종을 먹이사슬 밖으로 빼내 사육하는 것이 아닌, 인간도 먹이 피라미드에 속한 종임을 인정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태계를 파악하는 것은 모든 생명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인간이 비인간동물의 재생산을 착취하여 고장 난 자연 생태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그로 인해 가속화된 기후위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회구조까지 알 수 있게 되지요. 동물권 교육은 동물과의 연결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의 유기적인 연대 또한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주제입니다. 호시의 새로운 수업 기획을 위해 우리에게 어떤 공론의 과정이 필요할까요?  + 동물권행동 카라는 현직 교사들이 연구진으로 참여한 학습지도안을 매년 무료 배포 중이다. 동물권 교육의 커리큘럼과 활동지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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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의 대화] 디지털 기술과 거리가 먼 청년 활동가들의 노동 담론 (슬런치팀)
*대체텍스트 있음 지난주 들썩들썩떠들썩 <함께 만드는 노동, 10일의 대화>의 대화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서울 곳곳에 무지개가 뜬 날, 한 비건 카페에 모여 안전한 시간을 가졌답니다. 대화모임 설명회에서 ‘밥상머리 대화모임’이라는 표현이 인상 깊어 저희도 맛있는 밥을 먹으며 편히 이야기를 나눴어요.  교육 기획자, 기후 캠페이너, 민주주의 활동가. 각기 다른 노동을 하는 청년이 모였습니다. 활동과 노동을 깊게 연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하지요. 우리가 바라보는 ‘디지털 시대의 노동’이 궁금했습니다.  ⏰ 일시 : 2023년 7월 1일 토요일 17:00-19:00☕ 장소 : 서울시 상수동🙂 사람 : 니나, 마공, 자야✏️ 방법 : 캠페인즈 글 사전 정독, 사전영상 함께 시청, 대화, 회고   이렇게 모이게 되었어요 다양한 주제의 뉴스레터를 많이 구독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분야에서 ‘AI’를 언급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우리는 만들어 내는 기술자도 아니고 주 사용자도 아니잖아요. AI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생각해 볼 계기가 없었는데, 이 대화모임을 통해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요.    교육의 관점으로도 디지털 시대의 노동이 무엇인지 찬찬히 사고하고 싶었어요. 기존 대안교육에서는 유난히 아날로그를 대안으로 여기고 있잖아요. 그래서 더 기술의 발전을 빠르게 따라잡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언제까지나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어요.  기술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 자체가 이미 노동자 간의 격차를 만들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대화를 나눴어요 디지털 시대의 '좋은 노동'이란 무엇일까? 좋은 노동의 조건에는 자아실현이 가장 중요해요. 빠띠 사전영상 중 인터뷰에서 ‘디지털 기술을 내 노동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학습하는 시간까지 근로의 연장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는데요. 이 제안이 당장 시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시대가 어떻게 전환되고 있는 건지 설명해 주는 이가 없으니 공감하지 못하는 노동자도 분명 많을 거예요. 아마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디지털 약자’로 정의되겠지요.  디지털 시대의 좋은 노동은 기술이 정의롭게 생산되었다는 전제가 필수예요. 사용자의 마땅한 권리를 위해 제작 과정과 윤리제도가 투명하게 공유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좋은 노동의 본질은 변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노동’ 앞에 ‘디지털 시대’가 붙으니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정의해야 할 것 같다는 조바심이 들기도 해요. 사실 노동운동에서 늘 요구하던 조건이네요. 시민사회는 아주 오래 전부터 노동의 충분한 대가와 안전한 환경, 사회적 정의를 외쳐왔어요. 당연하지만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이 기준은 어느 시대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질 거예요. 2. 디지털 기술은 기회일까? 위기일까? 디지털 시대에 고소득자는 자동화의 편리함을 느끼지만, 저소득자는 스스로가 대체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낀다는 글을 읽었어요. 계층 간에 디지털 전환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직무보다 계층별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은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는 구조로 발전했어요. 처음부터 약자를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지금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노동자는 매우 한정적이에요. 어느 정도 이상의 교육을 받아 이미 사회에서 주류로 정의된 사람들만 빠르고 쉽게 활용하고 있지요.  ChatGPT만 보더라도 이미 AI는 공공재가 아닌 하나의 상품이 되었어요. 그 상품을 자본가가 소비해서 노동의 영역으로 들여온 거죠. 변화가 빠를수록 기업가의 언어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AI를 ‘노동의 도구’로 활용한다고 포장하지만, 사실 그냥 ‘제품을 소비하는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기도 합니다.  3. 디지털 시대의 노동, 시민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AI로 노동권을 침해받는 노동자를 위해 그렇지 않은 노동자도 함께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며 파편화된 노동 형태가 많아졌는데, 그래서 더욱 노동조합이 필요합니다. 시민단체는 시민의 계층, 그리고 각 분야를 대표하고 대변합니다. 가장 열악한 곳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해요. 빠띠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민주주의를 혁신하는 단체잖아요. 계속해서 이 주제의 논의 자리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노동에 대한 지난날의 논의를 살펴 보며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해요. 시민들이 직접 ‘분배’와 ‘규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특히 우리 사회는 디지털 노동에 관련한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민사회가 기술의 보편화에 앞장서는 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적 영역을 통해 시민에게 디지털 기술을 자유롭게 제공하는 것이요. 하지만 기업은 항상 그것보다 더 나은 기술을 금방 또 생산할 거예요. 그래서 이건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없을 거라는 회의적인 마음도 들어요. 사회 체제 또는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공유해요 자야가 예전에 “AI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잘 활용하는 노동자로 대체되는 것이지, 기술이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마치 사람이 무형의 것과 싸우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결국 사람과 기술 뒤 사람의 싸움이라고. 이 말에 동의해요. 좋은 노동은 모두에게 기술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가 평등하게 주어졌을 때 함께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노동자의 맥락을 통해 설명되는 ‘기술을 정의롭게 활용하는 방법'이란 없는 것 같아요. 디지털 시대의 노동이라는 게 아주 새로운 논의처럼 들리지만, 기존의 논의와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새로 심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이미 내려진 서사인 거죠. 지금까지 노동 관련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점검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우리는 디지털 노동의 특성에 맞는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더 해야겠지요.  디지털 시대는 바꿀 수 없는 흐름입니다. 그 안에서 시민들이 정의롭고 민주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를 재정비하는 과제가 남아있어요. 그 앞에서 무기력해지지 않았으면 해요. 개별 노동자들은 당장의 삶이 있으니 일단 기술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민사회가 계속 거시적인 문제의식을 던져 주길 바라요. 디지털 노동에 대한 시민 역량 강화, 사회문제 연구, 제도 감시 등의 역할을 빠띠와 같은 시민단체가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다들 직업이 직업인지라 일상의 경험을 나누기보다 더 넓은 담론으로 이어졌어요. 참여자 모두 변화를 심각하게 느끼면서도 막상 이 주제에 대해 생각을 나눠보는 시간은 처음이더라고요. 서로의 이야기를 엮으며 단단하고 촘촘한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노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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