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파킨슨병 산재 소송, 끝내 이겼다… 잔인했던 ‘7년’ [그녀의 우산 10화]
법원은 신호영(48, 가명) 씨의 손을 들어줬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그는 7년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산재 인정’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이 너무 야속했지. 내가 거짓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못 믿어서 대법원까지 간 거잖아.”(어머니 김정혜 씨, 가명) 근로복지공단은 피해자의 호소를 외면했다. 호영 씨의 산재 신청을 불승인한 근로복지공단. 그에 불복한 호영 씨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심 재판부는 산재를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했다.(관련기사 : <법원은 산재 인정, 공단은 불복 항소… “죽어야 끝날 일인가”>) 이어진 2심에서도 재판부는 산재를 인정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결국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고 갔다. 그렇게 이어진 싸움이 7년이었다. 대법원에서 지난달 28일 별도의 심리 없이 근로복지공단의 상소를 기각하면서 지난한 싸움이 끝났다. 호영 씨는 2002년 3월부터 2년간 LED 제품 생산 라인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하루 11시간씩 100℃가 넘는 고온으로 제품 열 테스트를 수행하거나, 화학물질이 가득한 용액에 웨이퍼를 넣고 빼는 작업 등을 했다. 심지어 하루 11시간에서 13시간씩 일했다. 주말에도 예외는 없었고, 주로 야간조로 투입됐다. 그에게 주어진 건 방진복과 얇은 마스크였다. 작업장에는 열을 식히는 장치나 국소배기장치도 없었다. 업무 효율을 높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온 건 2007년 6월이었다. 조금씩 뻣뻣하게 굳어가던 몸. 호영 씨는 2009년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치료약이 없는 불치병. 50대 전후로 발병한다는 병이 33살에 나타났다. 1심 판결은 지난해 6월 나왔다.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한 지 6년 만에 나온 첫 번째 판결. 당시에도 거동이 어려웠던 그에게 산재 인정과 요양급여, 간병급여 등이 시급히 필요했다. 근로복지공단도 1심 재판부의 판단을 받아들여 ‘항소를 포기하겠다’고 법무부에 밝혔다. 그러나 법무부는 ‘소송을 계속하라’고 지휘했다. 근로복지공단이 ‘항소 포기’ 의사를 밝히면 법무부가 받아들이는 게 관례였다. 2021년과 2022년에는 법무부가 항소 이행을 지시한 사례가 없었다. 하지만 2023년은 달랐다. 이수진 당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에 따르면, 그해에만 호영 씨를 포함해 ‘반대 사례’가 4건이나 있었다.(관련기사 : <파킨슨병 산재 또 승소… ‘법정고문’은 7년으로 족하다>) “그때 내가 회사 못 나오게(퇴사하지 못하게) 했어. 끝내 다니다가 이 병을 얻은 거잖아. 그게 참… 너무 후회가 되더라고.” 호영 씨에게 사과를 한 건 회사도, 근로복지공단도 아니었다. 나날이 악화되는 아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어머니 김정혜(72, 가명) 씨였다. 어느새 일흔이 넘은 노모는 인생의 ‘황금기’를 병상에서 보내는 아들을 간호했다. 지우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들이 힘들다고 이직을 고민할 때 다른 일 해 보라고 권하지 않았던 과거는 발목을 잡았다. 아들과 보내는 시간은 점차 늘어났다. 이제는 옆으로 넘어져도 호영 씨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고, 마음 편하게 잠든 것도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대법원 판결을 통해 산재가 인정된 지금은 한시름 덜지 않았을까. 반가운 마음으로 호영 씨에게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다. “죄송해요. 컨디션이 안 좋아서 11시 30분쯤에 전화해도 될까요.” 전화하기로 예정된 9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간. 호영 씨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법정 공방이 길어지면서 호영 씨의 몸 상태도 나날이 악화됐다. 증상을 완화시켜준다는 약도 7년이라는 시간 앞에 속절없었다. 오전 11시 30분이 돼서야 전화를 할 수 있었다. 호영 씨는 짧게 안부 인사만 나누고 핸드폰을 정혜 씨에게 넘겼다. 그를 대변하는 건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 “참 기분이 묘했죠. 끝을 봐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언젠가 되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대법원 선고가 있던 지난달 28일. 호영 씨 가족들은 오전부터 결과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심, 2심 재판부가 그랬던 것처럼 ‘산재 인정’ 결과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점심시간을 조금 넘기자 결과가 확인됐다. 심리불속행 기각. 재판부가 심리하지 않고 근로복지공단의 기각하겠다고 결정했다. “이제 한시름 덜겠구나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직 멀었더라고. ‘더 큰 산’을 넘어야 되더라고요.” 호영 씨의 가족이 다시 울상을 지은 건 산재 인정 이후의 절차 때문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은 호영 씨의 산재가 승인됐다며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향후 보상 절차에 대한 안내였다. 그 서류들을 준비하는 것도 역시나 일흔 넘은 노모의 일이었다. “(산재 행정소송 이후가) 절차적으로 복잡해요. 그런데 공단에서는 이거 신청해야 된다거나, 어떤 서류 필요하니 제출해라, 이런 안내도 거의 안 해줘요. 산재 인정받고 잘 모르는 분들은 신청도 못 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어요. 따로 안 챙겨주거든요.”(이종란 노무사) 불친절한 행정 서비스에 정혜 씨는 분통이 터졌다. 주치의한테 소견서를 받아야 했다. 호영 씨는 요양급여뿐만 아니라 장애급여, 간병급여 등이 필요했다. 이것들을 하나 신청할 때마다 의사 소견이 필요했다. 정혜 씨는 지난 17일 주치의로부터 소견서 작성을 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왔다. 이종란 노무사는 “산재 피해자에게 소견서 작성을 거부하는 주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겠죠. 8년 동안도 (산재 행정소송) 해봤는데, 계속 해봐야지.” 지난 시간은 정혜 씨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아야 바뀐다”고 설명했다. 정혜 씨는 지난해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인터뷰를 하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간병의 어려움과 근로복지공단의 부당한 항소 철회를 호소하는 글을 전하기도 했다. 아들의 산재 승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근로복지공단에 더는 시간을 끌지 말아달라고 외쳤지만, 끝장을 본 뒤에야 ‘산재 인정’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의 문턱은 높다.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중 박정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파주시을)은 호영 씨 사례를 언급하며, 근로복지공단에 태도 변화를 요구했다. 박 의원은 “사회 변화에 따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 늘어나고, 의학·과학의 연관성만 따지면 산재 노동자는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며, “법원의 (산재 인정)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에 (근로복지)공단도 그 기준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정혜 씨는 피 말리는 소송전을 이어가는 또 다른 산재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캄캄한 터널을 걷는 기분일 텐데, 언젠가는 ‘드디어 빠져 나왔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그런 기대와 용기를 가지고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싸워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피해자들한테 복지가 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생각해야 돼요. 그렇게 잔인하게 하지 말고 복지를 위해 일했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해야 할 ‘숙제’가 남은 정혜 씨는 다음을 기약했다. 모든 절차들을 마치면 반가운 소식을 안고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자도 그때 다시 축하를 전하겠다고 답했다. “계속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아픈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해주십시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술 때문에 19살 간이 녹았다? 당신들이 틀린 이유 [열아홉, 간이 녹았다 3화]
고등학교 3학년 김선우(가명) 씨는 반도체 공장으로 나갔다. 학교의 ‘1호 취업생’이었다. 반도체 후공정 업체인 스태츠칩팩코리아. 일터에는 화학물질이 가득했다. 그는 얇은 덴탈마스크와 방진복을 착용한 채 하루 9시간, 많게는 11시간 30분씩 작업장에 머물렀다. 24시간 가동되는 기계에 맞춰 생체리듬을 바꾸다 보면 밤낮이 바뀌기도 했다. 취업 14개월 만인 2021년 12월, 간이 녹아내렸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주치의는 ‘마지막 인사’를 하라며 가족들을 불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위독했던 상황. 겨우 만 열아홉이었다. 기적적으로 뇌사자의 간을 이식받았다. 몸 밖으로 나온 선우 씨의 간은 형체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났지만 더 큰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선우 씨는 2022년 9월 산재를 신청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당시 김선우 씨의 음주 습관으로 인한 상병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상황입니다.”(스태츠칩팩코리아 측 의견서) 회사는 선우 씨의 음주 습관을 지적했다. 이들이 근거로 제시한 건 ‘특수건강검진표’. 결과지에는 “절주 또는 금주가 필요하다”는 소견이 적혀 있었다. “제가 양산부산대병원에서 상담을 받았는데요. 교수님이 ‘20대 초반이 술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이 정도로 간이 상하지 않는다고, 절대 안 상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근데 회사가 그 얘기(음주습관 지적)를 하니까 너무 어이가 없더라고요.”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정기적으로 ‘특수건강진단’을 받는다. 선우 씨도 2021년 4월 특수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간 기능 검사, 빈혈 수치 등에서 이상 소견은 없었다. 다만, 음주력에 ‘주의’가 표기됐다. ‘일주일 1잔 하루 4잔’이라는 수치 때문. ‘주의’가 필요하다는 선우 씨의 음주 습관은 ‘1주 1회, 1회 소주 기준 0.5병’ 수준이었다.(관련기사 : <간이 녹아 사라진 ‘반도체 소년’… 회사는 “술 때문에”>) “결과지를 보면 혈청 지티피(ALT), 혈청 지오티(GOT), 감마지티피(γ-GTP) 모두 정상이어서 음주력은 있지만, 이로 인한 간에 영향은 없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감마지피티는 음주로 인한 간 영향 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혈액검사 지표로, 이 수치가 정상이라는 것은 음주로 인한 간 영향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송홍석 신천연합병원 내과 진료부장은, 선우 씨의 진료기록을 검토한 뒤 “알코올성 간질환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당시 간 기능 검사가 정상으로 나왔기 때문. 이어 “음주가 원인이었으면 (진료기록상) ‘알코올성 간 질환’이라고 명시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간을 녹일 수 있는 또 다른 원인에는 독성간염이 있다. 이는 한약, 양약, 건강기능식품 등과 같은 약제를 복용하다가 발생하는 간 기능 손상을 말한다. 동아대학교병원 입원기록에 따르면, 선우 씨는 과도하게 약물을 복용한 이력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급성간염이 일어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점, 회사에 근무하고 1년이 지나 상기 질환이 발생한 시간적 선후 관계를 고려할 때 피재자(김선우)의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 질환은 작업장에서 노출된 미상의 세척 용제에 의한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됨.” 선우 씨 주치의는 사업장을 의심했다. 입사 및 업무 중 특수검진을 할 때 특이사항 없이 건강했던 점, 가족력도 없고, 바이러스 간염 검사 결과가 음성이라는 점 등을 들어 외부 요인이 작용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라인에 있을 때는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 있기도 하거든요. 선우가 (2021년) 5월 말부터 의자에 앉아서 조는 걸 자주 봤어요. 제가 자주 깨워주기도 했는데, 그 뒤로 코피도 되게 자주 흘렸던 것 같고요.” 동료 이창민(가명) 씨는 선우 씨가 사경을 헤매고 있던 2022년 1월, 선우 씨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씨는 동일한 공정, 바로 옆 라인에서 근무했다. 선우 씨는 집에 돌아가면 쓰러지듯 잠들면서도, 내내 피로를 호소했다. 선우 씨는 반도체칩에 전자기판을 부착하는 칩 어태치(Chip Attach) 공정에 있었다. 4조 3교대 근무 형태. 6일 근무하고 이틀 쉬는 식이었다. 6일 중 하루 이상 연장 근무는 필수였다. 한 주에 약 51시간 30분을 일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한도인 ‘주 52시간’을 넘지 않게끔 맞춰진 시간이다. “역한 냄새. 약물이랑 아세톤 냄새가 나죠. 주유소보다는 조금 약한데, 맡으면 불쾌한 냄새예요. 퀴퀴한 냄새라고 해야 되나.” 선우 씨에게 주어진 건 방진복과 얇은 덴탈마스크, 천코팅장갑, 비닐장갑이었다. 입술 모양이 다 보이는 얇은 마스크를 뚫고 독한 냄새가 들어왔다. 기계에 묻은 화학물질을 씻어내다 보면 비닐 장갑이 찢어져 손이 젖기도 했다. 환경부가 운영하는 화학물질종합정보시스템에는 사업장에서 다루는 화학물질 정보가 공개돼 있다. 스태츠칩팩코리아에서 다루는 화학물질은 혼합물질을 포함해 모두 365가지. 이를 단일물질로 구분하면 111개에 달한다. 여기에는 구리, 주석, 은 등 간 독성을 유발하는 물질 26개도 포함된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반도체 공정 중 유해성이 낮은 후공정을 담당하고 있는 업체”라고 설명했다. 그 근거로 “작업환경측정 결과 측정대상 물질 유해인자 ‘불검출 또는 검출한계 미만’” 결과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작업환경측정 제도의 한계가 있다. 사업장에서 다루는 모든 화학물질을 대상으로 이뤄지지 않고, 일부 요인만을 대상으로 실시한다는 점. ‘작업환경측정 대상 유해인자’로 정해진 물질에 한해 노출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스태츠칩팩코리아에서 검사 대상이 된 화학물질은 111개 중 46개. 간 독성을 유발하는 물질 26개 중에서는 15개만 측정 대상이 됐다. 또한, 복합적으로 유해인자에 노출된 경우 신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선우 씨는 4조 3교대로 근무했다. 야간작업은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2급 발암물질이다. 동시에 다량의 화학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에 노출돼 있었다. 야간작업, 또는 각각의 유해인자에 대한 개별 인과관계를 연구한 결과는 존재한다. 반면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 자료는 부족하다. 그 때문에 업무상질병 여부를 판단할 때, 복합적인 유해인자가 질병에 미칠 영향을 보다 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례도 있다. “유해인자 노출기준은 해당 유해인자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여러 유해인자에 복합적으로 노출되거나 평균 근로시간 이상으로 장시간 근무하는 경우나, 작업강도가 높거나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등 작업환경의 유해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 등에는 유해요소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질병 발생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대법원 2017년 11월 14일 선고, 2016두1066) 근로복지공단이 ‘불승인’ 결정을 통보한 것은 지난 5월. 산재 신청으로부터 약 1년 8개월이 지난 때였다. ▲직업환경연구원 조사 결과, 독성 간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물질의 노출이 없었다 ▲작업환경측정 결과에서 측정대상 물질 유해인자 불검출 또는 검출한계 미만이었다 ▲사업장 측 진술상, 동일공정 근무자 중 유사 증상 발병자 또는 검진 결과 이상소견자는 발생한 적 없다는 점들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다만 판정위원 중 한 사람은 “작업 중 간독성 물질은 일부 있”었다면서도, “독성이나 노출량을 고려할 때 상병을 유발할 수준은 아닐 것”으로 판단하기도 했다. “(사업장) 조사하는 날 (연구원) 태도를 보고 마음의 준비는 했어요. 회사 설명만 듣고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고,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고.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도 (판정위원) 만장일치로 불승인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진 못해서 충격 먹었어요. 전원(불승인)은 말이 안 되죠.”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은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는 데 있다. 대법원은 이를 고려해, ‘현재의 의학 수준에서 인과관계를 규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직업 관련성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바 있다.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대법원 2017년 8월 29일 선고, 2015두3867) 선우 씨는 녹아버린 간 때문에 그 원인을 명확히 알아낼 길이 사라졌다. 대신 평생토록 약값과 치료비가 따라다닌다. 그는 2022년 5월 회사를 퇴직해야 했다.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떠넘겼다는 죄책감에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3년간 든 치료비와 약값만 약 2억 원. 평생 얼마나 더 들지는 알 수 없다. 앞서 선우 씨가 산재를 신청한 이유에는, 가족에게 짐 지운 돈 걱정을 줄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선우 씨는 지난 8월 행정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에 취소를 구하겠다는 취지다.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힘들어요. 결과가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희망고문이 제일 힘들죠. 그래도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서 이겨내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아직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자 산재 승인의 벽을 넘어야 했다. 무엇이 선우 씨의 간을 녹게 했는지 누구보다 알고 싶은 사람은, 바로 선우 씨 자신이다. 음주 습관이나 가족력, 약물 과복용은 원인은 아니었다. 작업장에 대한 의심은 있지만, 복합요인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다. 산재 불인정의 근거로 제시된 역학조사 결과나 작업측정보고서 역시 한계가 지적된다. 그는 지난해 12월 한 번 더 고비를 넘겼다. 당시 주치의는 재이식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위중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간 이식을 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 다행히 약물로 위기는 넘겼다. 다만 앞으로 몇 번의 위기를 더 넘겨야 할지, 또 몇 번의 재이식을 받아야 할지, 아니 재이식을 받을 수는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법원(판례)에서는 산재보상보험법에서 말하는 업무와 질병 간의 상당인과관계는 ‘의학적’ 인과관계가 아니고,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수준에서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규범적’ 인과관계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왔다. 그럼에도 (근로복지)공단은 협소한 의학적 판단기준으로 산재불승인을 남발하여온 것이다.”(이종란 노무사, 2024년 7월 ‘산재 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한 산재보험 개선 과제 토론회’ 자료집 중)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 8월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 8월 30일 기자는 인사팀 관계자, 안전팀 관계자, 임원급 관계자와 번갈아 소통했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 “당시 사내 공지로 헌혈 활동을 권하는 등 선우 씨를 도우려고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어 “(보도로 인해) 회사에 피해가 발생하면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안전팀 관계자는 약 40분간 안전관리 방침에 대해 설명했지만, 이후 비보도를 요청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셜록의 보도 이후, 지난달 11일 내용증명을 보냈다. 앞선 보도에서 “허위사실을 포함하여 당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선우 씨에게 음주 때문에 질병이 발생한 것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없고, 본건 직원이 손에 노출되었다고 주장하는 용액도 역학조사 당시 ‘물’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작업환경측정 및 역학조사 결과 안전하다는 판정을 받은 점, 매월 직원들을 상대로 안전교육을 실시하는 점, 사내 유사한 병명이 발생한 적도 없는 점”을 강조했다. 끝으로 “당사의 명예를 침해하는 위법한 보도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본건 기사를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처벌하지 않는 살인...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회사에 괴물이 산다 13화]
[지난 이야기]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상사 때문에 괴롭다고 대성통곡하던 동생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출퇴근 기록이 찍힌 교통카드 내역을 언니의 이메일로 보내놓고서. 그것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꼭 진실을 밝혀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언니 장향미(45) 씨는 동생의 죽음이 “동생의 문제만은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언니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 향미 씨는 동생이 떠나고 나서 세 달 동안 동생의 동료들을 만나면서, 동생의 과로자살은 회사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회사는 과로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향미 씨는 제일 먼저 증거보전신청을 하고 회사에 동생의 출퇴근 기록과 업무일지 등을 요구했다. 회사는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기록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증거보전신청 소송에서 향미 씨가 이기자, 그제야 기한 직전, 그것도 출근 기록이 아니라 동생의 컴퓨터 로그 기록(시스템 접속 기록)을 A4용지에 인쇄해서 보내왔다. 모두 966장이었다. ‘엿 먹으라’는 걸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컴퓨터 로그 기록으로는 출퇴근 시간을 파악할 수 없었다. 업무일지는 대부분 가린 채 제출했고, 면담 기록지와 야근식대와 같은 청구내역은 아예 제출하지 않았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회사가 가해자인데, 증거를 모두 가해자가 가지고 있다. ‘순순히’ 줄 리가 없다. 그렇다 해도 회사의 태도는 예상보다 더 괘씸했다. 인터뷰 내내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던 향미 씨 목소리가 화가 난 듯 점점 커졌다. “정말 웃긴 게, (회사가) 출퇴근 시간을 기록할 의무가 없어요. 회사가 당당한 것도 법적 의무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 회사가 2016년에 근로감독을 받은 적이 있더라고요. 동생이 떠난 뒤에도 또 똑같은 문제가 있었고요. 세 번이나 고발당했는데 처벌받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노동법은 안 지켜도 되는 거예요.” 향미 씨는 2018년 4월 대책위와 함께 피켓시위를 시작했고, 기자회견을 열어 동생의 억울한 죽음과 과로자살 문제를 알렸다. “제가 정의감에 불타서가 아니라요, 동생이 너무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동생이) 왜 죽었는지 꼭 밝혀야 제가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과로자살이라는 말이 언론에 나오고, 대책위와 매일같이 회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자, 회사는 그제야 동생의 과로죽음을 인정했다. 피켓을 든 지 네 달 만에, 동생이 떠난 지 반년이 지난 2018년 7월에야 회사는 공식사과를 했다. ‘면피용’ 사과조차 하지 않는 회사가 많다는 걸 알지만, 회사의 공식사과는 별 의미가 없었다. 대표는 ‘재발방지’ 같은 단어를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사과문을 읽었다. 방송에서 보던 모습, 확신에 차서 리더십을 보여주고 싶어하던 것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네 달 동안 피켓시위를 하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막상 대표의 공식사과에도 향미 씨는 무덤덤했다. “그런다고 동생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공식사과가 있은 후 다섯 달이 지난 2018년 12월,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신청을 위한 자료를 유가족이 직접 모아야 했다.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이 산재 피해 증거를 수집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07년에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 때문이다. 산재법에 따르면 증명책임은 업무상 재해를 주장하는 노동자에게 있다. 그러나 업무와 관련된 증거자료는 사용자에게 있다. 2013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걸 사용자가 입증하도록 한국의 산재법을 개정하라고 권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는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들을 제출하지 않았고, 향미 씨는 회사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절당했다. 동생의 유품을 받을 때도 직원들이 아무도 없는 휴일에, 건물 바깥에서 건네받아야 했다. 정보는 차단돼 있었고 접근조차 어려웠다. 증거를 직접 수집해 과로죽음을 입증해야 하는 건 가족들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가족들이 속상해할까봐 피해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 죽을 만큼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던 일들을 남은 가족들은 들어야 했다. 듣고 싶어도 못 듣는 경우도 많았다. 증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다. 증언 대신 비난이 더 많았다. 다른 과로자살 사건에서는, 입증책임 때문에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입증책임은 “말도 안 되는 잔인한 원칙”이지만 향미 씨는 증거를 모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생의 죽음은 묻힐 것이었다. 그 과정은 “엄청난 2차가해”라고, 향미 씨는 인터뷰 도중 거듭 얘기했다. “산재 신청하려고 하면 ‘돈 때문에 한다’고 (욕해요). 맞아요. 산재는 생존이 걸린 문제거든요. 그런데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사실 명예예요. 지금도 사람들은, 누가 자살했다고 하면 ‘나약해서 죽었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아는데, 가족의 죽음을 모욕적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면 너무 큰 상처가 돼요. ‘그렇게 될 때까지 가족들은 왜 몰랐냐’는 것도 상처죠. 가족들한테 말 안 하면 모를 수 있어요. 과로자살은 구조적인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예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요.” 향미 씨는 “운이 좋아” 다른 유가족에 비해 덜 어렵게 증거를 모을 수 있다고 했다. 동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출퇴근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교통카드 내역을 향미 씨 이메일로 보내뒀다. 또 퇴근 후에 집에서 일하느라 동생의 노트북에 업무 관련 기록이 남아 있던 덕에, 산재신청에 필요한 자료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퇴사한 동료 서른 명이 증언을 해줬고, 대책위가 크게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에도 ‘운이 좋다’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향미 씨는 산재 신청을 할 수 있었고, 승인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움을 뚫고” 산재 신청을 해도 승인률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운이 좋았다. 2022년 경찰청 자살 통계를 보면, ‘직장 또는 업무상의 문제’로 자살한 사람은 1년에 404명으로 전체 자살사건의 3%다. 그 중에서 재해보상을 신청한 사람은 36%, 신청한 사람 중 산재 승인을 받는 것은 52%뿐이다. 전문가들은 업무상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경찰청 통계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향미 씨도 경찰 조사 과정에서 동생의 죽음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렇게 은폐되는 과로자살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산재 신청 이후 승인되기까지는 10개월이 걸렸다. 긴 시간이었지만, 끝내 승인됐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과로와 직장 내 괴롭힘의 증거들이 적지 않았고, 회사도 공식사과를 한 뒤였다. 무엇보다 과로자살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었고, 대책위와 연대하는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동생이 떠난 뒤 산재 신청을 하면서 향미 씨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도록 일하는지, 일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 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이하 유가족모임)에 함께하면서, 유가족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가까이서 지켜봤다. 유가족모임은 과로죽음 유가족들이 산재법을 공부하고 심리치료 등을 함께하면서 2017년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의 산재 신청 과정을 지원할 뿐 아니라, 과로죽음이라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동생이 일했던 2년 반의 시간을 쫓다 보니, 동생을 죽인 건 회사였고 그 뒤에는 법과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과로죽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들이 바뀌지 않는 한 회사는 바뀔 리가 없고,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향미 씨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한노보연)과, 한국, 일본, 대만 세 나라의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만든 KWA(Karoshi Watch in Asia) 네트워크 모임에 참여하면서, ANROEV(아시아산재및환경피해자권리네트워크)에도 참가해 과로사 문제를 공유하고 알리는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을 하면서 일본에는 ‘과로사 방지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 1988년 ‘과로사 110번 전국네트워크’가 상담전화 110번을 개통해 유가족 상담을 시작하면서 과로사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났다.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2014년 ‘과로사 등 방지대책 추진법’(과로사 방지법)이 제정됐다. 법이 생겼다고 일본에서 과로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로사와 과로자살을 법률로 정의 내리고 과로사 방지대책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자, 과로죽음이 개인의 문제라는 국민들의 인식도 바뀌어갔다. 한국에는 과로사에 대한 정의가 없고, 따라서 관련 통계도 없다. 일 때문에 죽었다는 걸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입증을 한다 해도 산재 승인을 받기까지 기간이 너무 길었다.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제도들도 그대로였고, 동생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 대표는 재발 방지를 약속했고, 그 덕분에 노동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포괄임금제로 계약하고 임금을 체불하는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게 드러났다. 그래도 처벌받지 않는다. 일하다 죽은 사람이 생기면 그때만 잠깐 안타까워할 뿐, 사람 죽이는 제도와 구조는 그대로다. “법에 걸려도 처벌받지 않잖아요. 그럼 그걸 누가 지켜요? 기업 입장에서는 (법을 어기는 게) 훨씬 유리한데. 그러니까 노동법은 그냥, 그냥 만들어진 법이지 진짜로 지키라고 만든 법은 아닌 거죠. 몇 년 전부터 과로사 방지법 제정한다고 하는데, 뭐 근로기준법이라도 잘 지키면 좋겠어요. 이거라도 지키면 과로가 왜 생기겠습니까?” 일본의 ‘과로사 110번 전국네트워크’라는 단체에서 시작된 과로사 금지법 제정 운동은, 실제로 그 결실을 맺기까지 30년 가까이 걸렸다. 거기에는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의 오랜 노력이 있다는 걸, 포기하지 않고 연대했기에 ‘결국’ 제정됐다는 걸 향미 씨는 안다. 향미 씨는 유가족모임과 함께 2021년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 과로사·과로자살 사건에 부딪힌 가족, 동료, 친구를 위한 안내서>를 썼다. 산재 사망이 왜 생겨났는지를 밝히고 유가족을 위해 산재 과정과 필요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더는 과로죽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유가족들의 바람을 담았다. 해외의 관련 서적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2019년 ANROEV 컨퍼런스에서 만난 대만직업안전보건연대의 황이링 씨에게 <과로지도(過勞之島)>를 선물로 받고, 그 자리에서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향미 씨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고, 업무 때문에 종종 번역을 해왔다. 책은 <과로의 섬 – 죽도록 일하는 사회의 위험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2021년 국내에 출간됐다. 향미 씨는 ‘옮긴이 후기’에서 책을 번역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웠다. 대만의 직장 과로 문제가 한국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두 나라의 과로 문제는 소름 끼칠 만큼 똑같았다. (…) 한국과 꼭 닮은 대만의 과로사 실태를 다룬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한국 사회의 과로사 문제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싶었다.” 그는 한노보연 ‘업무 관련 정신질환 연구모임’ 회원으로 직장 내 정신건강 문제를 알리기 위해 활동했고, 지금도 유가족모임과 KWA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향미 씨는 동생의 죽음에 대해 표면적으로나마 회사의 사과를 받았고, 그 어렵다는 ‘업무관련 자살’로 산재 승인도 받았다. 어찌 보면 동생의 과로자살은 끝난 사건이고, 향미 씨가 유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향미 씨와 부모님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동생의 억울한 죽음, 그 빈자리를 어떻게 해도 메울 수 없다는 공허와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뉴스에서 과로사, 과로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향미 씨는 2018년으로 되돌아갔고, 그 고통이, 그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동생의 죽음을 또 겪는 것만 같았다. 동생의 과로자살이라는 사건이 마무리될 수 있으려면, 다시는 누군가가 일 때문에 죽는 일이 없어야만 할 것 같았다. 사실 향미 씨는 산재와 관련한 자료들을 다시 꺼내보는 것조차 힘들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런 향미 씨가 이렇게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KWA 모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것. “제 동생이 그렇게 죽은 다음에도 똑같은 문제가 매년 반복이 되는 걸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제 경우만 해결이 된다고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똑같은 사건이 나오면, (동생이 세상을 떠난) 그때 그 시간으로 저도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유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지, 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저는 보이잖아요. 그게 다시 재생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이걸 해결하고 싶은 거예요. 저도 그 시간을 상기하기 싫은데, 사회가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거잖아요.” 향미 씨도 부모님도, 절대 ‘괜찮아지는 일은 아닌’ 일을 겪었다. 아마도 평생을 괜찮아졌다고, 또 해결됐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그냥저냥 살아가게 될 것 같다. 다만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그래서 과로자살이라는 소식을 어디에서도 듣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그것이 과로죽음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바라는 가장 최소한의 해결이다. <끝> 취재 정윤영 르포작가 freakss@naver.com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밤 12시에 “벌써 퇴근했냐”… 회사가 동생을 살해했다 [회사에 괴물이 산다 12화]
한 세계가 사라졌다.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던 막내이자, 고양이 루시와 루니의 다정한 집사. 언니를 잘 따르던 착한 동생. 누구와도 잘 지내던 둥글둥글한 사람. 예쁜 걸 모으고 꾸미는 걸 좋아하던 사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꿈꾸며 모든 순간 성실했고, 무엇이든 열심이던 그런 사람. 민순이라는 귀한 세계가 어느 날 사라졌다. 고작 서른여섯의 나이였다. “내 앞날이 너무 깜깜해서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 민순 씨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민순이라는 세상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왜 사라져야만 했는지 물음으로써, 그 세계의 무게를 잊지 않음으로써, 사라진 세계는 여기 남아 있다. 장향미(45) 씨는 그날을 기억한다. 2017년 12월의 첫 주말, 이른 아침이었다. 동생은 그날도 야근을 하고 아침에 들어왔다. 야근은 거의 매일 있었고, 밤샘 근무를 하고 아침 일찍 집에 오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생은 꽤 지쳐 보였다. 그런 동생이 울기 시작했다. “떼굴떼굴 구르면서 펑펑”.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향미 씨는 동생을 진정시켜봤지만, 터진 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상사 때문에 괴롭다고 동생은 대성통곡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매일 야근을 하는 걸 보고 일이 많은 줄은, 그래서 힘든 줄은 알고 있었다. 향미 씨는 회사라는 데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다. 향미 씨 자신도 유명 게임업체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즈음 그 회사에서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향미 씨와 부모님은 동생에게 퇴사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자주 하고는 했다. 그래도 동생이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착하디 착한 동생이 그렇게 우는 걸 보니 향미 씨는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바로 관할 노동지청에 회사를 신고하고 근로감독을 요청했다. 노동부에서 연락이 온 건 일주일 뒤였다. 그 사이 동생은 과중한 업무와 상사의 비상식적인 업무 질책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탈진해가고 있었다. 향미 씨가 받은 답변은, 올해 근로감독 일정은 모두 끝났으니 내년 2월에 다른 신고업체와 ‘묶어서’ 근로감독을 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근로감독을 요청해도 안 하겠다는데, 그런 노동부에 더 할 말이 없었다. 향미 씨는 몇 개월 전 회사 앞에서 팸플릿을 받은 게 생각났다. 향미 씨 회사의 과로사 문제를 고발했던 시민단체에서 나눠준 홍보물이었다. 내년까지 근로감독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시민단체에 연락을 취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는 동생의 출퇴근 기록과, 같이 고발할 수 있는 동료들을 모아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줬다. 동생은 곤란해했다. 동료를 모으기도 어려울 것 같고, 출퇴근 기록도 없다고 했다. 향미 씨는 그게 좀 이상했다. “출입카드가 있잖아요. 그걸 찍고 들어가는데, 그 기록을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게 돼 있대요. 취업규칙도 없고요.” 회사를 고발하는 일에 나설 수 있는 직원이 얼마나 될까. 동생은 같이 고발할 동료들을 모으는 건 좀 힘들겠다면서도, 자기 혼자서라도 회사를 고발할 거라는 얘기를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동생은 부모님의 걱정에도 회사를 고발하려는 이유를 말했다. “(동생) 자신은 여태껏 그렇게 회사를 다녔지만, 자기 후배들, 지금 입사한 20대 초반의 신입들은 이제 이런 거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 마음으로 신고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어요. 엄마가 훌륭하다, 열심히 해보라고 얘기를 했고요.” 2018년 새해가 밝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경찰이 왔다. 집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조사가 끝나면 장례를 치를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의 조사라는 게,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가족들과 불화가 있었는지 물었고, 남자친구가 있는지, 금전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물었다. 향미 씨는 경찰에게 동생이 회사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고 했는데, 경찰은 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정신이 멍했다. 이틀 전 동생과 말다툼을 했는데, 그게 동생과의 마지막이었다. 향미 씨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시민단체 활동가가 달려왔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와 변호사, 노무사도 ‘웹디자이너 과로자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라는 이름으로 함께 왔다. 회사 사람들도 빈소를 찾아왔다. 가장 먼저 인사팀에서 왔다. 인사팀 직원들은 일손을 돕겠다며 빈소를 떠나지 않았고, 빈소에서 오고 가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회사 대표도 조문을 왔다. 유족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목인사만 하고 바로 떠났다. 동생의 상사였던 본부장과 팀장도 조문을 왔다. 두 사람이 동생을 괴롭힌 상사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인터뷰 도중 향미 씨는 두 사람 얘기를 하면서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팀 사람들 있는 데서 물어봤어요. 일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본부장이, 우리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하지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답을 했어요. 오히려, 제 동생하고 면담을 했는데 집에 일이 있어서 힘들어했던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출퇴근 시간을 기록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인사팀 직원이 대신 대답을 했어요. 우리 회사는 자율적인 업무를 존중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고요.” 향미 씨는 빈소에 온 동료들, 동생과 잘 지내던 사람들의 연락처를 모두 받아뒀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동료들을 만나고 다녔다. 동생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서른 명 정도 만났고, 대부분 이미 퇴사한 사람들이었다. 동료들은 ‘회사 다니면서 우울감을 느꼈다’고 말했고, ‘아침에 일어날 때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향미 씨는 동생의 죽음이 “동생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과로와 괴롭힘, 압박과 무기력, 우울과 탈진. 동생의 죽음은 문제의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과로죽음’이었다. 과로로 인한 죽음에는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과로사뿐 아니라, 과로자살도 포함된다. 동생은 2015년 5월, 한 유명 온라인 교육업체 디자인팀에 입사했다. 전에도 IT업체 디자이너로 일을 해왔던 터라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업계 1위로 창업 6년 만에 매출 4000억을 달성했고, 직원 수가 불과 10명에서 1200명으로 엄청나게 성장하던 곳이었다. 회사를 설명하는 ‘신화와 기적’이라는 수식어 뒤에는 직원들의 “뼈를 갈아 넣는” 희생이 있었고, 그만큼 노동강도가 높기로 악명이 높았다. 동생은 첫 출근을 앞두고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입사 4일째 새벽 4시에 퇴근을 했고, 그때부터 매일 야근이었다. 근로계약서 자체가 야근을 기반으로 작성됐다. 계약 연장근로만 매달 69시간에 야간근로 29시간. 주 5일 근무로 계산하면, 매일 3시간씩 더 일하고 매일 1시간씩 야근을 해야 하는 계약이었다. 실제로는 주말에도, 퇴근 후에도 일했다. 계약서에 적힌 시간을 항상 초과했다. 포괄임금제(근로시간과 상관없이 일정액의 수당이 포함된 월 급여를 지급하는 임금계약)라 시간외근로 수당도 없었다. 힘들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버티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이 많았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된다는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만 ‘미친 사람’이 되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전할 때마다 향미 씨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야근이 엄청 심했어요. 새벽에 들어오고, 아예 밤을 새우고 안 들어온 날도 있었고요. 퇴근해서도 업무 연락이 왔어요. 밤 12시에, 벌써 퇴근했냐고, 아침까지 확인하라고….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 하도 그러니까 ‘(나보고 회사를) 나가라는 건가?’ 그렇게 느낄 만큼 일을 많이 줬던 것 같아요.” 동생의 업무는 웹디자인. 기획이 생기면 디자인이 따라다녔다. 프로젝트가 없어지거나 기획이 바뀔 때마다 디자인도 함께 바뀌었고, 그 기획이라는 것도 수시로 바뀌었다.기획회의 때마다 디자인 시안을 ‘플랜A’부터 ‘플랜D’까지 만들었다. ‘까일(반려당할) 걸’ 알지만 아무렇게나 만들 수는 없었다. 밤을 새워 완성도를 높여 시안을 제출한다고 끝이 아니다. 그 과정은 본부장이나 대표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됐다.동생은 통상적인 디자이너 업무만 한 게 아니었다. 웹기획부터 상품 디자인 프로젝트, 팀관리 업무까지 수행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자존감을 갉아먹는 일이 됐다. 업무시간이랄 게 따로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기획에 따라 ‘초치기’로 일이 생겼다 엎어졌고, 일은 ‘컨펌(confirm, 승인)’을 받아야 끝이 났다. ‘자율출퇴근’이라는 말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컨펌을 받지 못하면 퇴근할 수 없다. 상사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결과물은 몇 번이나 까이고, 디자이너는 질책을 받는다. 동생이 ‘이런 거’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무한 대기와 컨펌 까이기’는 장시간 노동을 넘어 끝이 없는 무한노동이었다. 일이 아니라 벌을 받는 것 같아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밤새 일하고 무한정 컨펌을 기다리느라, 동생의 시간은 동생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그의 저서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말했다.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일상이 자기파괴적으로 변하고, 인간이 정신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라고. 친구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에 동생은 “완전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회사 일 말고 뭘 할 수가 없어요. 일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친구들도 이해를 잘 못했죠. 점점 고립되는 상황이었고, (일이) 자기 생활을 다 잠식해간다고 했어요. 집에 오면 방에 틀어박혀서 잠만 잤어요. 누구랑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어요.특히 월요일이 오는 걸 되게 불안해했어요. 일요일에는 저녁도 안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잠을 못 잤어요. 입사하고 살이 엄청 많이 빠졌는데, 점심시간에 밥 안 먹고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대요.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아요.” 주말 역시 회사의 것이었다. 온라인 교육업체인 회사는 수강생들의 시험 일정이 있는 주말이면, 수험생에게 홍보물을 나눠주는 응원이벤트에 참여하도록 했다. 말은 ‘자발적’이라지만, 인사평가에 20%나 반영이 되는 ‘업무’였다. 야근하고 새벽에 들어온 날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팀장은 업무와 상관없는 책을 읽어오라고 하고, 채식을 하는 동생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했다. 동생이 상사에게 어떤 말들을 들어왔고 어떤 요구를 받았는지, 괴롭힘은 업무일지에도 잘 드러났다. 업무일지가 아니라 반성문에 가까웠다. “머릿속에 온통 브랜드 생각뿐입니다. 지치지 않고 제대로 된 아웃풋(성과)을 내겠습니다.”"엉망으로 작업을 진행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는 이런 결과가 없도록 더욱노력하겠습니다.”“오늘 또 한 번 배우고 부끄러운 하루였습니다. 앞으로는 하나라도 발전된 아웃풋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동생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시키는 일을 다 했고, 무슨 일이든 허투루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책임감이 강했고 스스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것도, 또 ‘아픈 사람’인 것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상사의 지시에 동생은 늘 “넵넵. 알겠습니다.”로 답했고, 살인적인 업무량과 업무지시를 가장한 괴롭힘에도 “웃으면서 어떻게든” 일을 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야근을 해도” 일은 줄지 않았다. 쉬고 싶었다. 완치 진단을 받은 우울증이 도졌다. 공황장애까지 나타나 두 번이나 휴직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2017년 9월, 이번에도 휴직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한 달간 쉴 수 있게 됐다. “소모품처럼 쓰이는 것” 같다던 동생은 휴직 내내 방에만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쉬는 날이면 여행을 다니고 전시회에 가는 걸 좋아하던 동생이었다. 휴직기간 동안 동생이 회사 때문에 못했던 걸 했으면 했는데, 동생은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향미 씨가 집에만 있는 동생을 데리고 ‘호캉스’(호텔+바캉스,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며 보내는 휴가)를 하루 다녀온 게 전부였다. 동생이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만든 호텔이었고, 동생은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한 달을 쉬고 오자 일은 몇 배로 더 늘었다. 브랜딩 업무에, SNS에 올라가는 카드뉴스만 일주일에 서너 개. 상사는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며 카드뉴스를 매일 바꾸라고 요구했다. 팀에서 하는 업무들을 사실상 동생 혼자 맡아 했고, 몰아치는 업무에 동생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했다. 동료들은, 동생이 맡은 업무가 적어도 서너 명이 해야 할 분량의 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더 심해졌다. 시간이 없어 병원에 가기도 어려웠다. 예약하고도 제때 못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동생은 병원에 가지 못했고, 폭음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동생은 집 앞 편의점에서 몰래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했다. 술로 괴로움을 잊으려 했다는 걸, 폭음이 우울증의 한 증상이라는 걸, 과로 때문에 우울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향미 씨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고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누구라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술로, 약으로 달래가며 일해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벌을 받는 것 같은 ‘무한노동’은 여전했고, 본부장에게 “이렇게 할 거면 왜 시간을 줘야 하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처음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던 날, 동생은 그게 그렇게 억울했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게 동생 죽음의 ‘방아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던 향미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본부장이 잠 좀 자라고, 그래야 맑은 정신으로 일하지 않겠냐고 했대요. 거기서 폭발한 거예요. 저는 마음에도 급소가 있는 것 같아요. 급소를 맞았다면 즉사할 수 있다고 봐요. 급소가 아니더라도 상처를 계속 입으면 과다출혈로 죽기도 하잖아요.동생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자살하는 사람들도 죽는 거 두려워한다고. 그런데 그것보다 내일 아침이 오는 게 더 두렵기 때문에 죽는 거라고요. 저는 동생이 정말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상황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동생은 부모님이나 저를 정말 아끼고 사랑했고요,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정말 노력했던 것도 저는 알거든요. 살고 싶은 의지가 더 강한 애였어요.” 동생은 세상을 떠났다. 출퇴근 기록이 찍힌 교통카드 내역을 언니의 이메일로 보내놓고서. 그것은 무엇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꼭 진실을 밝혀달라는 동생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언니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 ☞ 다음 이야기 <처벌하지 않는 살인…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으로 이어집니다.취재 정윤영 르포작가 freakss@naver.com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간이 녹아 사라진 ‘반도체 소년’… 회사는 “술 때문에” [열아홉, 간이 녹았다 2화]
지난 5월 김선우(가명, 23) 씨는 한 통의 우편을 받았다. 발신자는 근로복지공단 경인지역본부. 앞서 제출한 ‘요양급여신청서’에 대한 회신이었다. 약 20개월 만에 돌아온 대답은 ‘불승인’이었다. 고등학생 때 반도체 공장에 취업하고, 1년 만에 간이 다 녹아버려 이식 수술을 받은 청년. 선우 씨의 기막힌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들처럼 대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차라리 돈을 빨리 벌고 싶었어요.” 선우 씨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고심했다. 통학 거리, 학업 분위기, 대학 진학률은 등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둔 건 오직 하나. ‘취업률’이었다. 빨리 돈을 벌어서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마이스터고등학교였다. 정식 명칭은 ‘산업수요 맞춤형 고등학교’로, 직업훈련을 통한 전문기술인 양성을 목표로 한다. 마이스터(Meister)는 ‘장인’이란 뜻. 학교에서 ‘장인’을 육성해 고졸 채용을 확대하겠다는 취지다.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이스터고는 높은 취업률을 자랑했다. 선우 씨가 입학하기 직전인 2017년에는 졸업자 119명 중 109명이 취업했다. 취업률 91.6%. 돈을 빨리 벌고 싶었던 선우 씨에게는 매력적인 수치였다. 그는 ‘고졸 장인’의 길을 택했다.그는 바람대로 경제활동을 일찍이 시작했다. 전교생 중 가장 먼저 회사로 출근한 ‘1호 취업생’.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 10월에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임직원만 3038명(잡코리아 2023년 12월 기준)에 달하는 대기업. NICE평가정보가 제공하는 기업신용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기타 반도체소자 제조업’ 분야 매출로 우리나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회사였다.선우 씨는 1년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4일간 교육을 받았다. 고가의 장비를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주의도 빼놓지 않았다.근무 형태는 새벽, 주간, 야간 4조 3교대. 6일 근무하고 이틀 쉬는 식이었다. 6일 중 하루 이상 연장근무는 필수였다. 그런 날은 작업장에 11시간 30분이나 머물렀다. 식사시간은 50분. 구내식당에서 빠르게 끼니를 때우고 라인으로 돌아오기도 빠듯했다. 이후에는 연장근무 전 30분 휴식을 취하는 게 전부였다.근로시간은 주 51시간 30분.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 한도인 ‘주 52시간’를 넘지 않게끔 맞춰진 시간이다. 24시간 가동되는 공장에 사람의 생체리듬을 맞춰 일했다. 연장근무를 하는 날이면 집에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뻗기 일쑤였다. 선우 씨가 맡은 건 칩 어태치(Chip Attach) 공정. 반도체칩에 전자기판을 연결하고 부착하는 등의 일이다. 이때 다량의 화학물질을 다루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솔더 페이스트(solder paste)였다. 여기에는 간독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리, 주석, 은 등이 포함된다. 그 때문에 작업장에는 늘 퀴퀴한 냄새와 타는 냄새, 아세톤 냄새로 가득했다. 선우 씨는 방진복과 얇은 덴탈마스크, 천코팅 장갑, 비닐장갑을 착용했다. 마스크는 입 모양이 다 보일 정도로 얇아 냄새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방진복이 화학물질로 오염되면 집에 가져가 세탁하는 것도 개인의 몫이었다. “블레이드라는 날카로운 날에 용액을 바르고 세척하는 작업을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회사에서 주는 게 천장갑, 비닐장갑이니까 비닐 찢기고 (용액에) 손도 젖고 했죠.” 화학물질 가득한 작업장과 불규칙한 노동시간. 선우 씨는 취업한 지 약 1년 2개월 만에 몸이 망가졌다. 간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의료진마저 선우 씨가 살 수 있을 거라 장담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선우 씨와 ‘마지막 인사’까지 나눴다. 다행히 선우 씨는 2022년 1월 간 이식 수술을 받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나이는 만 열아홉 살이었다. (관련기사: <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당시 병원은 급성간염을 동반한 독성간질환, 상세 불명의 무형성빈혈, 무과립구증을 진단했다. 적출된 간은 광범위한 출혈성 괴사 상태로, “완전히 녹아내려 형체가 없었다”. 손상 원인을 파악할 수조차 없는 수준.생사의 고비를 넘기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선우 씨는 회사 복귀 또는 퇴사라는 극단적인 갈림길 앞에 섰다. 몸이 좋지 않았던 선우 씨는 회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기자에게 “사직을 권고한 바 없다”고 해명했으나, 선우 씨 아버지가 기억하는 당시 상황은 달랐다.선우 씨가 죽음의 문턱에서 ‘병원 뺑뺑이’를 도는 동안 아버지는 회사에 병가 휴직을 신청했다. 사측으로부터 “6개월간 병가 휴직을 인정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기억했다. 덕분에 선우 씨는 2022년 1월 1일부터 병가 상태로 치료를 받았다.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그해 5월, “회사로 복귀하라”는 통보를 들었다.당시 선우 씨는 상처 부위가 제대로 아물지 않아 재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회사에 의사 소견서 등을 보냈으나, “다른 방법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회사가 무단결근 누적을 이유로 퇴사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산재를 신청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무단결근에서 병가로 기록을 정정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완치라는 건 없고, 평생 면역억제제 먹으면서 살아야 돼요. 심지어 앞으로 재이식(수술)이 한 번이 될지, 두 번, 세 번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계속 걱정이 되죠. 경제활동도 차차 해야 되는데….”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격이었다. 2023년 12월 28일 선우 씨에게 정말 고비가 찾아왔다. 몸이 이식받은 간을 거부하며 공격하고 있다는 것. 선우 씨의 면역체계는, 이식받은 ‘타인의 간’을 외부에서 들어온 위험요소로 인식하고 공격했다. 면역억제제를 사용해 공격 정도를 낮추면 간 수치가 나빠졌다.간 이식 수술을 받은 지 3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재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위기가 닥칠 거라곤 생각 못했다.선우 씨는 평생 3년마다 간을 새로 이식받으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혼란스러워했다. 다행히 한 달간 입원 끝에 적절한 약물 배합을 찾아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불안은 늘 곁을 맴돌았다.지난 3년간 든 약값과 치료비만 2억 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돈이 들지는 미지수다. 선우 씨가 언제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그 또한 불투명하다.선우 씨는 2022년 9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약값 부담이라도 덜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근로계약서, 급여명세서, 출근부 등 기초적인 자료와 작업환경과 유해요인 관련자료 등을 회사에 요청했다. 하지만 사측은 모두 제공을 거부했다. 공단을 통해 받으라는 답변.‘녹아버린 간’도 문제였다. 어떤 요인이 간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는지 의학적으로 더 따져볼 길이 사라진 셈이었다.선우 씨는 자기 자신이 어떤 화학물질을 다루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사업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발간하는 반도체 작업환경 연구보고서 등과,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은 ‘경험’뿐이었다.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특수건강진단’을 받는다. 선우 씨도 2021년 4월 특수건강진단을 받았다.특수건강진단표에 기재된 취급물질로는 간 독성 및 손상을 유발하는 주석, 구리, 이소프로필알콜(IPA) 등 화학물질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 질환은 작업장에서 노출된 미상의 세척 용제에 의한 가능성이 높다”는 주치의 평가 소견서를 덧붙였다. “제가 사용하던 용액에 ‘신체에 접촉하지 마세요’가 적혀 있었어요. 근데 회사는 인체에 무해하다고 주장하니까….” 선우 씨와 주치의는 그의 간 손상 원인이 ‘일 때문’이라 의심했지만, 회사는 다른 것을 의심했다. 바로 ‘술’이었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공식’ 의견서에 이렇게 적었다. “김선우 씨의 음주 습관으로 인한 상병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회사는 선우 씨의 특수건강진단 결과 ‘절주 또는 금주가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음을 근거로 들었다. 건강했던 20대 청년이 불과 1년 만에 간이 다 녹아버릴 정도가 되려면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셔야 할까. 선우 씨의 특수건강진단표에는 ‘일주일 1잔, 하루 4잔’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선우 씨는 빈혈 수치, 간장질환 수치 등은 모두 정상이었다. 발병 이후 초진 기록에도, 선우 씨의 음주 습관은 ‘주 1회 소주 1~2병’이라고 적혀 있다. “제가 산재 (신청) 준비하면서 대학병원에 상담을 받았어요.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20대 초반이 술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간이 이 정도로 상하지 않는다고. 외부 (원인의) 개입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절대 (이렇게까지) 상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회사가 하는 말이 너무 황당한 거예요.” 회사 관계자들은 선우 씨와 엄마 하영 씨 눈앞에서도 ‘술 때문’이란 주장을 입에 올렸다. 지난해 11월 직업환경연구원이 현장조사를 나갔을 때, 그때도 회사 관계자들로부터 “술을 많이 마셔서 아픈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선우 씨 가슴속의 상처를 후비는 말이었다. 그날 선우 씨는 연구원 2명과 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작업장에 들어갔다. 하영 씨는 ‘영업상 기밀 보안’을 이유로 공장 내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선우 씨는 분위기에 압도됐다. 연구원들은 회사 관계자들에게만 질문할 뿐, 선우 씨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선우 씨에게 그날은 마치 “회사의 변명을 듣기 위한 자리”인 것 같았다. “회사 관계자가 ‘용액이 손에 직접 닿을 일이 없다’고 말하면, 연구원이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는 식이에요. 제가 직접 겪은 건데, 저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요. 실제로는 비닐장갑이 찢어지면 손에 직접 닿아서 젖고 하거든요. 그때 느꼈어요. (이 조사는) 내 말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니고, 그냥 업무 하나를 처리하러 온 거구나.” 선우 씨는 그날 직감했다. ‘산재 승인이 안 되겠구나.’ 선우 씨는 그 뒤에 직업환경연구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현장 조사에서 하지 못한 말들을 적었다.산재 신청 이후 약 1년 8개월의 기다림 끝에 결과가 나왔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5월 ‘불승인’을 통보했다.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우선 “급성 간염을 동반한 독성 간질환은 확인되고, 개인적인 발병요인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하지만 위원 7인 중 6인은 “독성 간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물질의 노출이 없어 업무 관련성은 낮다”고 봤고, 1인은 “작업 중 간독성 물질이 일부 있으나, 독성이나 노출량을 고려할 때 상병을 유발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판단해 전원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소송으로 (산재 승인을) 다투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없잖아요.” 선우 씨는 지난 8월 산재 불승인 결과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몇 년이 걸릴지, 어떤 판결이 나올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소송이 진행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선우 씨와 가족들이 더 지치고 힘들어질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하지만 그 불확실한 미래에 한 번 더 희망을 걸었다. 열아홉 나이에 녹아버린 간. 그의 간을 사라지게 한 원인을 찾는 일도, 그의 남은 인생도 아직은 포기할 수 없기에.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달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달 30일 기자는 인사팀 관계자, 안전팀 관계자, 임원급 관계자와 번갈아 소통했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 “절차에 따랐고 오히려 선우 씨를 도우려고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덧붙여 “(셜록 보도로 인해) 회사에 피해가 발생하면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그리고 지난 2일 안전팀 관계자는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선우 씨에게)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며, “회사는 ‘김선우 씨에게 헌혈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사내에 공지해 도움을 줬다”고 강조했다.산재에 관한 사측의 의견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문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스태츠칩팩코리아는 보험가입자의견서에 “해당 작업은 회사 창립 후 수십 년간 이어온 공정이며 그동안 동일 상병 혹은 유사 상병이 발생된 적 없다”고 주장했다.이어 “김선우 씨의 음주 습관으로 인한 상병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상황”이며, 작업환경측정결과와 역학조사 결과 기록을 보면 유해인자에 대해 “불검출 또는 검출한계 미만”임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 [열아홉, 간이 녹았다 1화]
크리스마스 캐럴 대신 아우성이 울려 퍼지는 병원 응급실. 그 틈에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김선우(가명) 씨가 있었다. 그는 엄마 이하영(가명) 씨에게 몸을 지탱한 채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고 있었다. “당장 간 이식하지 않으면 아드님 죽을 수도 있어요.”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에도 날카로운 의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몸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2021년) 10월쯤이에요. 그때 부딪힌 적도 없는데 몸에 멍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제 성격이 워낙 덜렁대니까 그냥 어디 부딪혔겠지, 하고 넘어갔죠.” 선우 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20년 10월,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입사했다. 집은 울산, 회사는 인천에 있었다. 그는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화학물질 가득한 작업장. 3교대 근무. 열아홉 고등학생 선우 씨는 그해 모교의 ‘1호’ 취업생이라는 자부심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건 입사한 지 1년 만인 2021년 10월. 몸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 메스꺼워 구토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먹은 음식을 다 토해도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저 교대근무에 누적된 피로 탓이라고 여겼다. 코피를 쏟는 날도 있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지혈이 안 돼 회사 인근 이비인후과에서 코 혈관을 지졌다. 다음 달에도 코피가 쏟아졌다. 공장 안 화장실에 앉아, 반쯤 남은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다 뜯어 썼다. 그래도 코피가 멎지 않았다. 선우 씨를 찾는 파트장의 전화.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대답했지만, 빨리 복귀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지났다. 그제야 코피는 간신히 멎었다.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마저 닦아내고 자리로 복귀했다. 잠이 쏟아졌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었다. “선우야, 너 얼굴이 좀 누런 것 같다. 병원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결혼기념일을 맞아 울산 본가에 온 선우 씨에게 엄마 하영 씨가 말했다. 최근 한 달간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던 선우는 일 때문에 피곤할 뿐이라고 답했다. “엄마의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오랜만에 아들이 집에 와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까 이상해요. 너무 노래. 근데 선우도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하지, 애 아빠는 둔감하니까 그런 거 잘 모르겠다고 하지…. 그때 같이 병원 가자고 못했던 게 제일 후회돼요.” 몸이 지쳐도 주기적으로 통장에 찍히는 급여를 보면 ‘그래도 할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넘은 스무 살짜리 사회초년생은 요령 없이 버틸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난 12월 23일, 교대근무를 하던 동료도 선우 씨를 걱정했다. 황달이 있는 것 같으니 병원을 가보라는 말. 그저 피곤해서 낯빛이 안 좋다고 하기에는 눈자위까지 너무 노랗게 변했다. 밤 10시를 넘긴 시간. 회사 주변에 그 시간에 문을 여는 병원은 없었다. 선우 씨는 두 달째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새벽조, 주간조, 야간조 어디에 투입되든 눈뜨는 게 힘겨웠다. 이튿날 오전 병원에 가려 했지만, 늘어진 잠으로 갈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 누렇게 뜬 얼굴로 출근했다. 상사는 선우 씨의 안색을 살피더니 병원에 가라고 조퇴를 시켜줬다. 뜻밖의 배려. 평소 같으면 ‘열이 없으면 감기에 걸려도 출근하라’던 상사였다. 선우 씨는 그제야 병원을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가까운 내과로 향했다. 의사는 황달을 치료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며, 근처에 있는 인하대학교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피 검사를 마친 선우 씨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대학병원은 평일 오후에도 환자들로 북적였다. 순서가 되려면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간호사가 선우 씨 이름을 불렀다. 앞서 방문한 환자들을 뒤로하고 진료실로 먼저 들어갔다. “당장 입원 안 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바로 입원하세요.” 선우 씨는 그제야 심각성을 느꼈다. 의사는 일반인의 정상 간 수치(ALT)가 40IU/L 이하인데, 선우 씨의 간 수치가 2236U/L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혈소판도 말썽이었다. 당시 선우 씨의 혈소판 수치는 혈액 1㎕(마이크로리터)당 5000개. 정상인들의 혈소판 수치가 1㎕당 15~40만 개 사이인 것을 고려하면 현저히 부족한 수치였다. 코피가 한두 시간씩 멈추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엄마, 나 몸이 안 좋아서 병원 왔는데 당장 입원해야 될 것 같대.”“몸이 안 좋아? 입원해야 되는 거면 여기 내려와서 입원해도 되지 않아?” 전화로 다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은 현실감이 없었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 말곤 통증도 없었다. 간 수치가 정상의 약 56배 이상 나왔다는 것도, 혈소판 수치가 80배 적게 나왔다는 것도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몸이 많이 좋지 않은가 보다 할 뿐이었다. 엄마의 말에 선우 씨는 비행기를 타고 울산 본가로 갔다. “이 몸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울산대학교병원 의사는 혈액검사 결과지를 보고 질겁했다. 간 이식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수치였다. 의사의 말에 하영 씨는 눈앞이 노래졌다. 그렇다고 당장 입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사는 “아직 우리 병원은 간 이식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며, 부산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하영 씨는 옆에서 눈을 껌뻑이며 졸음을 참는 아들을 차에 태웠다.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도로는 북새통을 이뤘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거의 다 왔어, 선우야. 조금만 버텨. 괜찮지?” 평소 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꽉 막힌 도로 위에 두 시간을 넘게 갇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은 아들을 보면 조급해졌다. 초행길, 꽉 막힌 도로, 옆자리에는 쓰러져가는 아들까지. 운전대를 잡은 하영 씨의 손이 덜덜 떨렸다. 혹여나 아들이 눈을 감으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봐…. 부산에 진입해 가장 가까운 소방서를 찾았다. 하영 씨는 ‘미친듯이’ 뛰어 들어가 소리를 질렀다.  “제발 우리 애 좀 도와주세요!” 엄마의 외침에 구조대원들은 선우 씨를 구급차에 태웠다. 사이렌을 울리니 꽉 막혀 있던 도로에도 숨통이 트였다. 하영 씨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당시는 코로나19 위기대응 수위가 높던 때.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찾아가도 대기 환자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잘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휴가를 낸 의사들도 많았다. 하영 씨의 속이 타들어 갔다. 선우 씨는 구급차를 타고 세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겨우 병상에 누웠다. 그마저도 치료가 아닌 ‘응급조치’였다. 하영 씨는 서울로 가야 아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2021년 12월 27일 새벽 6시, 선우 씨를 사설 구급차에 태웠다. 서울에 있는 ‘빅5’ 병원 중 하나인 A 병원으로 향했다. “예약 안 하셨으면 진료받기 어려우세요. 오늘은 돌아가시고 예약하신 날 방문해주세요.” 기대와 달리 병원의 대처는 냉담했다. 하영 씨는 속이 뒤집혔다. ‘절차’대로 하라는 말. 혈액검사 결과지를 들이밀어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병원 인근 숙소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남는 방도 없었다. 택시에 선우 씨를 태우고 또 이동했다. 겨우 찾은 모텔 방에 아들을 눕혔다. 하영 씨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른바 ‘잘사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는 병원 없냐, 아는 의사 없냐, 제발 도와달라. 당장 아들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모자는 이튿날 ‘절차’대로 예약 진료를 받았다.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이번에는 남은 병실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병원에서는 해가 바뀌고 1월 10일이나 돼야 자리가 생길 거라고 했다. 서울 외곽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선우 씨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수소문한 끝에 한 곳을 찾아냈다. 경기 부천시에 있는 병원이었다. 선우 씨는 그곳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혈소판을 수혈받고, 코피가 흐르면 ‘땜질’을 했다. 치료가 아니라 ‘조치’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2021년 마지막 날, 드디어 대학병원 특실에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지옥 같던 ‘병원 뺑뺑이’는 8일 만에 막을 내렸다. 병원에서 맞는 새해. 그래도 이제는 치료에만 전념하면 좋아질 거라 여겼다. 하영 씨는 ‘이젠 다 잘될’ 거라며, 아들의 걱정까지 떠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님, 지금 선우 씨가 너무 위험해요. 피가 안 멈추고 간 수치가 너무 안 좋아요. 바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불안한 일상은 금세 무너졌다. 가족들은 울산의 집에서 서울의 병원까지, 350㎞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다. 당시 선우 씨는 간 이식 대기자 ‘0순위’였다. 장기 기증자가 나타나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이식받는 사람. 그만큼 상태는 위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장기 기증자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선우 씨는 간성혼수에 빠졌다. 혼수상태에 빠진 채 열흘이 지나자 주치의가 말했다. 염증 수치가 높아져 다른 장기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위독하다고. 몸에서 간을 먼저 떼어내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거예요.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포기해요. 그(간을 떼어낸 뒤) 4일 동안 기증자가 안 나타나면 우리 애는 그대로 죽는다는데. 도저히 안 된다고, 죽어도 못한다고 싸웠죠.” 병원에서는 선우 씨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주치의는 잠든 선우 씨에게 ‘마지막 배웅’을 하라며, 가족들에게 면회 기회를 주곤 했다. 하영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히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병원 가까운 절로 향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을 기증해줄) 뇌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게… 누군가 죽어야 우리 선우가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엄마니까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죠. 그게 스스로도 너무 괴로운 거예요.” 입원 20일 만에 기증자가 나타났다. 밤까지 기도를 올리던 하영 씨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반기는 건 병원의 낯선 공기였다. 의료진은 선우 씨의 이식 수술을 두고 찬반 토론을 했다. 의료진 10명 중 수술을 반대하는 사람은 8명. 수술 성공 확률이 30%로 너무 낮다는 이유였다.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은 다른 대기자에게 이식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엄마 하영 씨의 귀까지 전해졌다. 그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가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했다. 수술에 호의적인 의료진 두 명이 “그래도 아직 스물한 살이고 젊은데, 회복이 빠를 수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밀어붙였다. 가족들의 호소와 의료진들의 설득 덕분에 선우 씨는 2022년 1월 19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 수술대에 올랐다. 10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선우 씨의 간이 몸 밖으로 나왔다. 의료진은 “간이 완전히 녹아내려 형체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조직검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손상됐다. 간이 녹아버린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은 훗날 선우 씨 가족에게 또 한 번의 절망을 안겨주게 된다. 수술이 끝나고 긴 잠에서 깬 선우 씨. 수술 전 약 2주 동안의 기억이 사라졌다. 간 손상이 심해 뇌의 인지기능도 떨어졌다. 배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십자 모양의 수술 자국이 남았다. 커다란 흉터는 통증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제 청춘을 빼앗긴 기분이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 내가 아파야 하는 걸까. 저는 그냥 취업을 빨리 하고 싶었던 건데.”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을 알고 있던 선우 씨는 일찍 철이 들었다.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마이스터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등급생 중 ‘1호’로 서둘러 취업했다. 첫 월급을 받은 때부터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그 보람은 선우 씨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선우 씨는 수술 4개월 뒤인 2022년 5월 회사를 나왔다. 회사를 퇴사한 과정에 대해서는 선우 씨와 사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선우 씨는 “사직서와 같은 문서에 서명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고, 회사는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금 당장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데, 돈이 계속 나가니까 죄송하고 눈치 보이죠. 생활에 제약도 많고, 친구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회복하더라도 약값은 계속 평생 나가니까 그것 때문에 산재 신청을 한 건데, 만장일치로 기각됐더라고요.” 그해 9월에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답변을 듣기까지 1년 하고도 8개월이 더 걸렸다. 결과는 ‘불승인’. 2024년 5월에 나온 답이다. “산재 승인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판정위원) 전원 불승인이라고 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제가 사업장에 문제가 있다고 (근로복지공단에) 말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 의견은 하나도 반영이 안 돼 있고, 그냥 회사가 하는 말만 있더라고요.”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열아홉 고등학생 선우 씨는 1년 만에 간이 녹아내렸다. 평생 약을 복용해도 언제 또 건강이 악화될지, 재수술을 몇 번이나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반도체 소년’. 그는 가혹한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스태츠칩팩코리아의 반론을 듣고자 지난달 19일부터 약 30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지난달 30일 인사팀 직원과 연락이 닿았다. 그는 “사건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며 추후 연락 줄 것을 요청했지만, 3시간 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안내드리기 어렵다, (산재와 관련한 일은) 근로복지공단 쪽에 문의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다시 총무팀을 통해 연결된 안전팀 관계자는 “연중 2회 안전교육을 수행하고 있다”는 등 약 40분간 안전관리 방침에 대해 설명했지만, “자신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비보도를 요청했다. 또 한 번 인사팀 임원급 관계자에게 연락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단에 이견이 없다”며, “회사는 절차에 따랐을 뿐 특별히 근로자(김선우 씨)와 분쟁적인 이슈는 없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지난 2일 안전팀 관계자는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선우 씨에게) 사직을 권고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며, “회사는 ‘김선우 씨에게 헌혈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사내에 공지해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파킨슨병 산재’ 기어코 대법원까지 끌고간 대한민국[그녀의 우산 9화]
끝내 대법원까지 간다. 16년간의 투병. 이제 온몸이 굳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신호영(가명, 48) 씨의 사정은 얼마나 고려됐을까. 두 차례 패소 판결에도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은 뜻을 꺾지 않았다. 공단은 지난 13일 법원에 상고했다. 결국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가겠다는 것. 신 씨의 파킨슨병에 대해 ‘일터에서 생긴 병’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법원은 앞서 두 차례 공단이 신 씨에게 내린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소송을 시작한 지 4년째, 산재 승인을 신청한 지는 7년째다. 희망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금세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신 씨에게 이번 여름도 그랬다. 그는 과거 LED 개발과 생산 업무를 하다가 파킨슨병을 얻어 16년간 투병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두 번째 승소 판결은 지난달 25일 있었다. 거듭되는 법원의 전향적인 판단. 여기에 마음 편히 웃지 못하는 사람은 있었다. 다름 아닌 신 씨의 모친 김정혜(가명, 72) 씨였다. “대법원까지 안 갈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한 번 데인 적이 있으니까….” ‘한 번 데인 적’이 있다는 건, 공단이 1심 패소 이후 사건을 고등법원까지 끌고 간 일을 말한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번에도 공단은 상고 기한인 2주일에 거의 맞춰 13일 만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공단이 2019년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린 것까지 포함하면 세 차례 산재를 인정하지 않은 셈. 사건을 담당한 문은영 변호사는 지난 14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항소든 상고든 무조건 하는 게 아니라, 이유가 명확하게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원고(신 씨)가 1심, 2심을 다 이겼는데, (공단이) 대법원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예측하기가 어렵네요.” 공단 측 입장이 궁금했다. 지난 14일 문자메시지로 받은 답변. “유기화합물과 파킨슨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특히 LED제조업, 반도체 등에서 파킨슨병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한 선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규범적 법리적 추가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판단됨.” 공단은 계속해서 이러한 주장을 펼쳐왔다. 하지만 법원은 ‘발병원인이 뚜렷하게 규명되지 않은 질병 전반에 대해 상당인과관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명확한 인과관계가 아직 밝혀지지 못했어도 상당성이 있다면 산재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긴 세월 재판에 정신적으로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제 몸도 병이 많이 진행되어 저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 상태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간병하고 계신데, 연세가 많으시다보니 어머니도 한계점에 이르신 것 같습니다. 실 같은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붙잡고 버티고 있는 저의 삶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신호영 씨는 지난 13일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 반올림’의 보도자료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더 이상 산재 소송을 지연시키지 말아달라는 호소. 산재 신청 → 공단의 불승인 결정 → 신 씨, 행정소송 제기 → 1심 신 씨 승소 → 공단 항소 → 2심 신 씨 승소 → 공단 상고까지, 이미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1조는 ‘근로자를 위한 신속한 보상’이라는 법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단은 거듭 항소와 상고를 결정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 이번에 공단이 밝힌 입장 가운데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법무부의 지휘를 받아” 상고를 제기했다는 부분이다. 1심 패소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결정했던 배경에도 ‘법무부의 지휘’가 있었다. 지난해 10월 공단 관계자는 항소 결정의 배경에 대해 “행정소송의 최종 결정 권한을 지닌 법무부로부터 ‘의학적 판단을 다시 받아보자’며 항소를 제기해보라는 권고가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관련기사 : <법원은 산재 인정, 공단은 불복 항소… “죽어야 끝날 일인가”>) “고객의 눈높이에 맞게 공정, 적시, 감동 서비스를 제공하여 더 넓고, 더 두터운, 더 누리고,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나누는 일하는 모든 사람의 행복파트너가 되도록 전 임직원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에서는 공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2017년 시작된 산재 싸움. 그리고 2020년부터 이미 4년간 진행돼온 산재 소송. 공단의 상고 결정은 과연 신 씨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의 행복파트너”로서 “공정, 적시, 감동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한 일이었을까. 하루하루 지날수록 신 씨의 건강 상태는 그만큼 악화되고 있다. 그가 처음 소송에 나설 때만 해도 거동이 조금 불편했을 뿐, 소통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수십 년간 같이 살아온 어머니조차 그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대법원까지 간 산재 소송.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3주간 일곱번 ‘반성문’ 다시쓰기… 직장 내 괴롭힘 인정 [회사에 괴물이 산다 11화]
[지난 이야기] 보육교사 이정윤(가명)은 어린이집 원장에게 계속 사표를 쓰라고 강요당한다. 확인서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반성문’도 강요당했다. 하나의 사건으로 3주간 일곱 번 다시 쓴 적도 있다. 이정윤의 정신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스스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우울증으로 휴직을 요청했던 그에게 원장은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해고 사유는 크게 두 가지. ▲병가 기간이 끝나고도 출근하지 않고 무단결근을 했다는 것. 그리고 ▲적응장애와 우울증이 있어서 영유아를 돌보는 업무를 맡기기에 부적절하다는 것. 그런데 이유가 서로 충돌한다. 이정윤의 정신질병이 심각하지 않다고 간주해서 병가 연장을 반려해놓고, 또 동시에 그의 정신질병이 심각해서 보육 업무를 맡길 수 없다는 논리라니. “두 번째 그렇게 하고(자살충동) 나서 남편이 너무 슬퍼하는 걸 봤죠.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저는 반대로 생각해보지는 못했어요. 만약에 반대로 남편이 그렇게 죽어버렸다면…. 내가 너무 큰 상처를 준 거더라고요. 그럼 내가 마음을 한번 바꿔보자, 죽으려고 했던 그 에너지를 살려고 하는 용기로 한번 바꿔보자, 생각했어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조용히 죽는 길이 아니라 시끄럽게 사는 길을 택했다. ‘경기도 마을노무사’ 제도와 김요한 노무사(노무법인 노동을잇다)의 도움이 컸다. 함미영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다. 용기 내어 사실확인서를 써준 전 동료 교직원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을 수가 없다. 2023년 10월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성남지청은 원장의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했다. ▲지속적인 퇴사 강요 중 부적절한 표현 ▲부당한 확인서·시말서 작성을 여러 차례 강요 ▲민감한 개인정보(노조 가입 사실)의 공표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판단했다. 과태료도 부과됐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과태료 부과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2019년 이후 접수된 3만 9316건 중, 과태료 부과는 고작 1.3%(501건)에 불과하다. 지난 14일 고용노동부가 밝힌 ‘직장 내 괴롭힘 사건 처리 결과 현황’에 따른 수치다. 산재도 승인됐다. 근로복지공단은 올해 2월 1일, 이정윤의 적응장애 등을 ‘업무상질병’으로 판정했다. 약 한 달 뒤인 3월 11일에는 부당해고도 인정됐다. 경기지방노동위원회는 “해고금지 기간인 산재요양 기간 중 발생한 해고”이므로 “위법하며 부당하다”고 판정했다. 세 기관 모두 이정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어린이집 측은 세 가지 결정에 모두 불복했다. 직장 내 괴롭힘 과태료 처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하거나, 부당해고 인정에 대해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하는 등, 이의제기 절차에 들어갔다. 7월 5일 중앙노동위원회 날. 이정윤은 걱정이 컸다. 현장에서 원장을 만나면 어떡하나. 그 상황의 스트레스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날도 미리 진정제를 먹고, 공황발작에 대비해 응급약을 챙겼지만…. 심판위원들 앞에 이정윤이 자리했다. 그리고 바로 뒷자리에 남편이 앉았다. 혹시라도 이정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장 손을 뻗어 구할 수 있도록. 다행히 원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정윤은 미리 준비해간 한 장 반짜리 최후진술서를 직접 또박또박 읽었다. 눈물이 조금 나고 손이 약간 떨렸지만 참을 만했다. “‘힘들었던 일터로 왜 돌아가려 하느냐?’ 제가 요즘 받는 질문입니다. 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타의에 의한, 그것도 부당함에 의한 퇴사로 제가 사랑했던 일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현장으로 돌아가서 제가 사랑하는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가진 힘이 작다고 해서 포기하라고 강요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정윤 중앙노동위원회 최후진술 2024. 7. 5.) 판정 결과는 ‘초심유지’. 부당해고가 다시 한 번 인정됐다. 네 번째 승리다. 사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는 보육교사의 비율은 상당히 높다. 그중 이정윤과 같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결국 인정받는 경우가 흔치 않을 뿐이다. 2021년 직장갑질119 등이 진행한 ‘2021 보육교사 설문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71.5%(246명)가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가해자를 묻는 질문에는 78.0%(192명)가 ‘원장 등 어린이집 대표’라고 답했다. 괴롭힘이 발생했을 때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61.4%(121명)가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라 답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의료적 진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물어본 결과, 36.6%(126명)가 ‘필요했지만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보육교사 해고 사건 경험이 많은 김요한 노무사는 이정윤이 겪은 일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갑갑하고 답답했다”고 말했다. 많은 현장에서 본 “상투적인 수법”이란 거다. “보육교사가 근로조건이나 법 위반 문제를 지적하면, (사용자가) 그 교사를 몰아내기 위해 쓰는 레퍼토리거든요. 교사들에게 ‘이 중에 누구랑 같이 일하기 싫은지 적어내라’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형성하는 건 아주 오래된 얘기예요.”(김요한 노무사 전화인터뷰 2024. 6. 25.) 김 노무사는 “재원은 다 공적으로 운영되는데, 운영은 (원장) 개인에게 위탁을 줘서 마음껏 사적 전횡을 휘두를 수 있게 한다”는 제도적 문제도 지적했다. 엄연히 ‘국공립’ 어린이집이지만 위탁운영자일 뿐인 원장 개인이 인사 등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다. “제가 살아 있는 건 사실 남편 덕분이에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우울증은 이정윤을 소파 하나만 한 세계에 가둬버렸다. 특히 집에서 어린이집이 가깝기 때문에, 혹시나 외출을 했다가 학부모나 동료교사나, 최악의 경우 원장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웠다. 뭘 잘못해서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남편은 생업도 미루고 늘 이정윤의 곁을 지켰다. 남편은 그를 달래서 차에 태우고, 공원으로 카페로 데리고 나갔다. 일부러 집에서 적당히 멀고, 사람도 그리 붐비지 않는 카페만 찾아 다녔다. 지난 6월 21일 기자가 이정윤을 만난 경기 용인시의 한 카페도 그런 곳이었다. 평일 낮 대형 카페의 2층은 역시 한적했다. 인터뷰 도중 이정윤의 눈길이 때때로 계단 쪽을 향했다. 누군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릴 때였다. 그때마다 그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고, 올라오는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약속장소를 정할 때 그가 한 말이 생각났다. “만약에 카페에 갔는데 누구를 만나기라도 하면…. 저는 원장을 보거나 어떤 괴롭힘 상황에서만 공황발작이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비슷한 사람을 보거나 비슷한 상황이 되면 이게 이렇게(공황발작이) 딱 되더라고요.”(이정윤 전화 인터뷰 2024. 6. 15.) 지금도 이정윤은 시간마다 상황마다 다른 약들을 챙겨 먹어야 한다. 기자를 만난 날도 미리 진정제를 먹고 왔다. 인터뷰 중에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 그때의 고통이 다시 살아날까봐. “사실 공황장애라는 게 뭔지 잘 몰랐어요. 근데 겪어보니, 이게 제가 통제한다고 통제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괴롭힘과 상관없는 상황에서도 어떤 스위치가 탁 켜지면 그게(공황발작이) 딱 오더라고요. 굉장히 무섭더라고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아직도 고통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산재 요양기간은 10월까지 다시 연장된 상태다.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됐다. 산재도, 부당해고도 인정됐다.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과, 노동위원회가 이정윤이 당한 피해와 고통을 인정하고 그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어린이집의 복직 통보는 아직. 이제 남은 건 그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일뿐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뭘 걱정하는지도 잘 안다. 가끔 남편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거나, 다른 직업을 찾아보자고 했던 이유도 다 이정윤의 ‘마음건강’을 가장 먼저 걱정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이정윤에게는 어린이집으로 꼭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결국 (어린이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내가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가긴 가야죠. 나중에 그런 걸(이직이나 퇴사) 하더라도, 내 첫 번째 발걸음은 내 원래 일터로 돌아가는 거여야 해요.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일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그게 어디든 집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결국엔 제가 (어린이집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예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어디서부터인가 언제부터인가 뭔가 잘못돼서 길이 어긋났다면 일단은 처음에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게 먼저다. 그런 다음 새로운 길로 갈지언정. 그게 바로 잘못돼 있던 모든 것들을 끝맺는 마지막이자, 동시에 새로운 것들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카페 앞마당에 들꽃들이 피어 있다. 꽃무리를 향해 이정윤의 눈길이 간다. 발길도 자연스레 그쪽을 향한다. 어느새 손길을 뻗어 조심스레 꽃을 만진다. “원래 꽃을 참 좋아해요.” 그의 아담한 손이 눈에 들어온다. 일터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동료들과 신뢰를 나누고, 가족들과 편안한 일상을 누리는 날은 언제쯤 올까. 그 손에 돌려받아야 할 것이 아직 많다. 지난달 1일 A 원장은 기자와 한 통화에서, 변호사를 통해 입장을 듣길 바란다며 “상처 받은 분들이 많은데 조용히 극복하고 지내려 하니 시끄러워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틀 뒤 C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이정윤이 원장과 부원장을 상대로 낸 공동감금과 공동강요 혐의 고소건이 ‘불송치’로 종결됐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이정윤 측은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한 상태다. C 변호사는 ▲직장 내 괴롭힘 인정 ▲산재 승인 ▲부당해고 인정 등 세 가지 결정을 모두 반박했다. 우선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결정에 대해 “면피성 행정”이라 비판하고, “괴롭힘이라 할 만한 사안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개원 초기) 운영상 조금의 미숙함은 있을지언정 직장 내 괴롭힘은 있기 어려운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산재 판정 과정에서도 어린이집 측은 “(이정윤의 주장은)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거나 매우 과장된 것”(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 판정서 인용)이란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산재 승인에 대해 C 변호사는 “사용자(어린이집) 측에서 (부당함을) 다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고 주장했고, 부당해고 인정에 대해서는 “해고의 실질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되진 않으나 다만 절차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을 수는 있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해당 어린이집의 ‘진짜 주인’인 광주시 측 생각은 어떨까. 광주시청 국공립어린이집 담당자는 지난 6월 28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어린이집과 이정윤) 양쪽에 자료를 다 요구해둔 상태”라며, “자료를 입수한 뒤 각각 면담을 통해서 방향을 검토할 것”이라 밝혔다. 해당 어린이집의 위탁 만료일은 오는 10월 31일로, 재위탁 심사를 앞두고 있다. 담당자는 “(위탁)계약 해지 사유라 판단되면 계약해지나 재계약 불가도 가능하지만, 어쨌든 그건 따져봐야 할 문제”라며, “(법적) 결정이나 판결을 기다리면서 확인하는 중”이라 답했다. <끝>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갑질 당하고 우울증까지… 회사는 ‘해고’를 통보했다 [회사에 괴물이 산다 10화]
[지난 이야기] 보육교사 이정윤(가명)은 어린이집 원장에게 초과근무 문제 등 ‘바른말’을 했다가 미운털이 박힌다. 원장은 그가 ‘불편하다’며 계속 퇴사를 강요한다. 전 교사들에게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이정윤을 압박하기도 했다. ‘퇴사를 결정짓지 않으면 퇴근 못한다’고 잡아둔 날도 있었다. 이정윤은 공황발작이 시작됐다. 예전에 이정윤이 일하던 어린이집 원장은 그를 위해 추천서를 써줬다. 추천서 속에서 이정윤은 “밝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할 줄 알고”, “부모님과 소통할 때에도 배려와 공감의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유아의 개인적 발달과 어린이집 교육방향에 맞는 해결책을 모색”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이 일하기 불편한 사람’, ‘장점이 없는 사람’, ‘동료들도 모두 싫어하는 사람’이란 비난을 듣고 있다. 이 극단적인 온도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022년 2월 말, 원장은 보직 변경을 통보했다. 담임교사에서 보조교사로. 이정윤은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하고 그 사실을 원장에게 알렸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에 이정윤은 깜짝 놀랐다. 이정윤이 노조에 가입했다고, 원장이 지역 어린이집 원장단체 회장에게 알렸다는 거다. 이정윤은 한 달 전 보육교사 노조에 가입했다. 계속된 퇴사 압박을 혼자 버텨내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 개인정보보호법은 사상·신념, 노동조합·정당의 가입·탈퇴, 정치적 견해, 건강, 성생활 등에 관한 정보 등을 민감정보로 규정하고, 정보주체 동의 없이 이를 처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위반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도 있다. 보조교사 생활은 한 달간 이어졌다. 그리고 3월 말 이정윤은 다시 담임교사가 됐다. 노동위원회 구제신청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원장과 합의했기 때문이다. 저를 향해 많은 교사들이 말했습니다. “어린이집은 원장이 사장이다. 직원을 자르는 것은 사장 마음이다.” “어린이집 교사가 노조 가입이라니, 빨갱이다.” “선생님(이정윤) 때문에 다른 교사들이 불편하다.” 어느새 저는 어린이집에 있어서는 안 될 ‘악의 축’이 돼 있었습니다.(이정윤 중앙노동위원회 최후진술 2024. 7. 5.) 2022년 8월 22일, 원장이 이정윤과 또 다른 동료교사 한 사람을 교무실로 불렀다. 이번에는 사표가 아니라 경위서를 쓰라는 지시였다. 두 사람은 6월에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두 달이 넘게 지나서 경위서를 쓰라고 한 거였다. 다음 날 이정윤은 경위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2주쯤 더 지난 9월 6일. 원장은 다시 이정윤을 불러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확인서’라는 제목의 문서. 이미 경위서를 썼던 그 일, 약 3개월 전 말다툼에 관한 거였다. 이미 원장이 문구를 써둔 확인서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원장과 부원장은 서명을 하지 않으면 교무실에서 나갈 수 없다며 강요했다. 고함을 치고 책상을 두드리는 태도에 이정윤은 공포를 느꼈고, 결국 마지못해 서명을 했다. “이걸 받지 못하고는 선생님들 나갈 수가 없어요. 이 자리에서. 아니, 선생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쓰셔야 된다고요! 이거는 쓰실 수밖에 없어요.”(부원장 B 대화 녹취록 2022. 9. 6.)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경위서를 다시 써오라는 지시. 이번엔 ‘확인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정윤은 그날 확인서를 제출했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다시 써야 했다. 원장과 부원장은 고쳐 써야 할 곳, 삭제해야 할 곳을 직접 ‘첨삭’했다. 다시, 다시, 다시. 제출과 반려를 매일 반복했다. 8월 23일, 9월 6일, 9월 7일, 9월 8일, 9월 13일, 9월 14일, 무려 6차에 걸쳐 확인서(경위서)를 제출했다. 원장이 미리 문구를 써둔 확인서에 서명도 했으니, 하나의 사건으로 모두 일곱 번의 확인서를 제출한 셈이다. 원장이 요구한 건 경위서도 확인서도 아닌, 사실상 ‘반성문’과 다름없었다. ‘반성문 다시 쓰기’는 그 뒤에 또 있었다. 9월 16일, 이정윤이 돌보던 아이가 콧등이 쓸리는 일이 있었다. 연고를 바르고 나니 아이의 코는 이상 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부모에게도 알렸지만 괜찮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런데 사흘 뒤에 문제가 생겼다. 원장이 이정윤을 불러 호통을 치고, 이번에도 확인서를 쓰라고 지시했다. 역시나 계속해서 반려되고, 계속해서 다시 써야 했다. 9월 20일, 9월 21일, 9월 23일, 9월 27일, 10월 5일. 5차에 걸쳐 확인서를 다시 써서 제출했다. 같은 일은 다음 달에 또 일어났다. 11월 4일 원장은 이정윤을 불러 ‘시말서’를 쓰게 했다. 이번에는 하루 전 현장학습에서 짜증을 내며 “아이 씨”라고 상스러운 말을 했다는 게 이유. 이정윤은 그런 말은 안 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원장과 부원장은 ‘동료교사들이 들었다’며 이정윤을 몰아세웠다. 그날 이정윤은 1차 시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원장은, 원장 본인이 직접 문구를 쓴 시말서를 이정윤에게 내밀며, 서명하라고 했다. 억울하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상스러운 말을) 안 했다는 걸 증명해보라”고 다그치고, “교회 다닌다며? 정말 양심이라는 게 있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번에도 역시 ‘서명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다’고 윽박질렀다. “오늘 이거 지금 사인 안 하면 선생님(이정윤) 못 가.”“(서명)할 수 없으면 그냥 오늘 여기 계속 있는 거야. 집에 가지 말자, 우리.” (부원장 B 대화 녹취록 2022. 11. 4.) 실랑이는 약 두 시간이나 이어졌다. 날카로운 음성과 책상 두드리는 소리. 이정윤에게 또 공황발작이 시작됐다. 손발이 떨리고 꼬였다.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원장 : “그게 불미스러운 행동이 아니야? 어디다 대고서는 거짓말하고 있어?”이 : “거짓말 안 했습니다.”원장 : “어디다 대고 어거지 하고 있어!” (원장 A-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2. 11. 4.) 이정윤은 보육교사 노조의 지부장, 함미영에게 SOS를 쳤다. 함미영은 바로 어린이집으로 두 차례 전화를 걸었다. 그 뒤에야 이정윤은 교무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날 밤, 이정윤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내가 죽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에요. 그때는 아무 생각 안 들어요. 그저 너무 지치니까 이제 다 내려놓고 쉬고 싶다…. 제 존재를 계속 부정당했잖아요. 결국 ‘내가 사회 부적응자인가? 정말 내가 문제 있는 건가?’ 하면서 자신을 놓게 되더라고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반성문 다시 쓰기’가 또 시작됐다. 11월 11일 2차, 11월 21일 3차, 11월 25일 4차까지 제출했다. 2차부터는 시말서가 아니라 ‘확인서’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대법원은 “시말서가 단순히 사건의 경위를 보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사죄문 또는 반성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업무상 정당한 명령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대법원 2010. 1. 14. 선고 2009두6605 판결). 이정윤의 정신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도무지 잠을 자지 못하니, 일상을 버틸 수가 없었다. “사람이 잠을 너무 못 자니까 환청이 들리고 헛것이 보여요. 집 안에 있는데 웬 남자들이 서 있어요. 그림자가 보여요. 저희 집이 2층인데, 창문에 블라인드를 다 해놨거든요. 가끔 남편이 환기도 시키고 빛도 들어오게 한다고 블라인드를 걷으면, 제가 ‘여보, 저기(창 밖에) 원장이 서 있어!’ 그런 얘기를 자꾸 했어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2023년 3월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물류센터에서 새벽일을 하던 함미영이 ‘마지막 인사’ 메시지를 받은 바로 그날. 그날도 이정윤은 ‘내가 없어지면 다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충남 계룡시의 한 보육교사가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있었다. 유가족은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정윤은 숨진 보육교사가 꼭 자기 같았다. 이정윤은 사선에 서 있었다. 한 발짝 차이로 삶과 죽음이 나뉜 그날 밤. 함미영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이정윤의 집으로 출동해 그의 안전을 확보했다. 살아서 견딜 수도, 죽어서 끝낼 수도 없는 고통. 결국 입원을 결정했다. 이정윤은 2023년 3월 6일부터 17일까지 12일간 녹색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적응장애와 ‘상세불명 기원의’ 위장염 및 결장염. 온갖 검사를 다 해봤지만 신체적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정윤은 이른바 ‘반성문’ 사건으로 처음 죽음을 떠올린 2022년 11월부터 녹색병원으로 옮겨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부터 담당의사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의사) 선생님이 저랑 상담을 하시더니, 제 남편하고 통화하고 싶대요. 나중에 들었더니, (의사가) 폐쇄병동(보호병동) (입원을 권하는) 얘기를 했대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입원해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약을 먹고 잠드는 일밖에 없었다. 죽음조차 떠올릴 수 없는 지독한 무기력. 이정윤은 ‘적응장애’를 진단받았다. “일상생활 기능장애 동반되어 업무 수행이 어려울 것으로 사료”된다는 소견이 붙었다. 이어 ‘중증의 우울에피소드’ 진단이 더해졌다. 진단서에 적힌 치료기간은 계속 길어졌다. 3월 초 병원에 입원하면서 처음으로 냈던 무급 병가(휴직)를 두 차례 연장해야 했다. “우울증에 걸리면 ‘뭘 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없거든요. 아무것도 안 해요. 살림도 안 하고 운동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소파에 누워만 있어요. 제 생활반경이 딱 거실 소파밖에 안 됐어요. 가끔 속에서 천불이 나면 아이스크림을 정말 미친 사람처럼 퍼먹는 거야. 다른 식사는 아예 안 하고, 먹는 건 딱 아이스크림 하나였어요.”(이정윤 전화 인터뷰 2024. 6. 15.) 세 번째 휴직 연장을 요청한 때가 2023년 7월 4일. 다시 한번 “중증의 우울에피소드”를 진단받은 날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휴직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건을 붙였다. “녹색병원이 아닌 다른 종합병원에서 ‘취업치료가 어렵다’는 진단서를 발급해서 전달 주시면 (…)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원장 A 문자메시지 2023. 7. 5.) 당시 이정윤은 이미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한 상태였다. 그는 녹색병원도 종합병원이라며, 산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휴직처리 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더 이상 답변은 없었다. 그리고 같은 달 31일. 이정윤은 어린이집이 보낸 서류 한 장을 받아들었다. 해고통지서였다.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나가라는데 왜 버텨”… ‘싫은 사람’ 설문 후 퇴사 강요 [회사에 괴물이 산다 9화]
띵똥-.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그날 밤 함미영은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보육교사 노동조합의 ‘전’ 지부장. 잠시 어린이집 일을 쉬던 그는 이따금 물류센터에서 야간 알바를 했다. 3월 초, 이른 봄의 밤공기는 아직도 차가웠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창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 갑자기 울린 스마트폰 알림. 불길함이 확 끼쳤다. 이 시간에 오는 연락은 ‘한가한’ 일일 리가 없다. 바로 전화기를 꺼내들어 메시지를 읽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 안녕히 계세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보육교사 이정윤(48, 가명). 종종 함미영에게 어린이집에서 ‘당한’ 일들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던 사람. 메시지를 보고 함미영은 깜짝 놀랐다. 이정윤이 가끔 탄식처럼 내뱉던 ‘극단적인’ 말들이 떠올랐다. 설마. 함미영은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함미영은 바로 112를 눌렀다. 이정윤의 집으로 출동해달라 부탁했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눈을 뜬 채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경기 광주시의 한 국공립 어린이집. 이정윤의 일터다. 2019년 12월 개원한 이 어린이집에는 14명의 보육교사가 소속돼 있다(2024년 4월 기준). 이정윤과 같은 ‘개원멤버’들의 고생이 컸다. 개원 전 15일가량은 무보수로 일했다. 개원 업무와 어린이집 평가인증(평가제) 준비, ‘열린어린이집’ 준비까지 겹쳐 업무량은 살인적으로 늘었다. 어린이날 행사, 산타 행사, 물놀이 행사 등 어린이집 행사도 유난히 많았다. 법으로 정해진 하루 한 시간의 휴게시간을 제대로 못 쓰는 건 당연(?)했다. 대개는 저녁도 먹지 않고 야근을 했다. 밥 먹는 시간을 아껴서 조금이라도 더 일찍 집에 가려고. 하지만 너무 늦게까지 일이 이어지면, 사발면에 김밥을 먹으면서 일했다. 그도 아니면 일거리를 집에 가져가서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평일에 못다 한 일은 휴일에 나와서 끝내야 했다. 교사들은 지쳐갔다. 가족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교사들끼리는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정작 원장 앞에서는 말 한마디 하기 어려웠다. 이정윤은 달랐다. 입바른 소리는 늘 그의 몫이었다. ‘업무량을 줄여달라, 초과근무 수당을 달라’ 요구하는 그를, 원장은 눈엣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원장님이 이정윤 교사를 심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일하는 동료교사들은 부당함에 대한 요구를 하는 이정윤 교사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원장님과의 갈등을 보면서 이정윤 교사를 피하게 되고 (…) 다른 교사들의 경우 원장의 부당함에 뒷담화를 할지언정 원장의 눈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습니다.”(동료교직원 문원정(가명) 사실확인서 중) 그 사이 시청도 업무 과중과 초과근무 수당 미지급 문제를 알아차렸다. 2020년 6월 현장방문에서 문제가 지적됐고, 1년 뒤 지도점검에서 또 같은 문제가 지적됐다. 그에 따라 2021년 7월 어린이집은 약 1년 전부터 누적된 초과근무 수당 미지급분 약 400만 원을 뒤늦게 지급해야 했다. 초과근무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개원 초기 수당은 포함되지 못했다. 원장의 ‘불편한 심기’가 누구를 향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다른 교사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였다. 어린이집의 공기는 묘하게 변해갔다. 동료들 역시 이정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일이 많아서 힘들다’는 불만은 어느새 ‘이정윤 하나 때문에 어린이집이 시끄러워진다’는 비난으로 바뀌었다. 이정윤은 ‘모두의 적’이 됐다. “열악한 업무환경에 대해 함께 불만을 이야기했던 교사들은 원장님이 제게 가하는 행위를 보며 입을 다물었고 방관자가 됐습니다. (…) 공포의 학습효과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나를 따돌린 적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원장 눈 밖에 날 사람과 가까이 했다간 자신도 낙인찍힐 것 같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압니다.”(이정윤 중앙노동위원회 최후진술 2024. 7. 5.) 어느 날부터 원장은 ‘퇴사’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불편하게 계속 간다? 그러면 선생님(이정윤)하고 같이 못 갈 거고(고용할 수 없다는 뜻). 선생님에 대해서 뭐가 장점인지. 선생님이… 선생님이랑 같이 근무할 뭘 줘야 말이지? 어? 선생님이 뭘 잘했어요? 뭘 잘했어? 선생님이?”(원장 A 대화 녹취록 2020. 12. 16.) 사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건 2020년 12월이었다. 내년도 반 배정을 위한 교사 면담. 원장은 그에게 퇴사하라고 언성을 높였다. ‘불편하다, 장점을 알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어떤 핑계를 갖다 붙여도, 그저 ‘네가 마음에 안 드니까 눈치껏 알아서 나가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원장의 말은 이정윤의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정윤은 작은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매일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출퇴근 시간부터, 하루 종일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 모두 기록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무능한 사람이 아니야,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다. 그리고 원장과의 대화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원장의 퇴사 강요는 이때부터 약 14개월 동안, 녹음된 것만 해도 여덟 번이나 된다. 원장이 퇴사를 강요하면, 이정윤이 이유를 반문하며 항변하고, 마치 돌림노래처럼 반복됐다. 불 같은 압박, 아니면 얼음 같은 냉대였다. 이정윤은 ‘투명인간’이 됐다. 출퇴근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물론, 업무 보고에도 원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매일 모멸감이 쌓여갔다. “싫다고 이제. 같이하고 싶지 않아 한다고.”“그런데 왜 버티고 있냐고? 왜?” (원장 A 대화 녹취록 2021. 11. 30.) 한 해가 지나, 다시 연말. 2021년 12월 원장은 새로운 근거(?)를 내밀었다. 다른 교사들에게 ‘짝꿍교사(공동담임)를 같이 맡고 싶지 않은 사람’ 이름을 쓰라는 설문조사를 한 거다. 결과는 뻔했다. 원장은 설문조사 결과 이정윤의 이름이 나왔다며 또 퇴사를 요구했다. “이정윤 교사는 운영자인 원장님 입장에서는 불편한 교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원장님과 갈등이 생겨서 힘들어하는 이정윤 교사에게 몇몇 동료교사들이, 보육현장은 변하지 않으니 원장님 운영방침에 따르거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동료교직원 임은주(가명) 사실확인서 중) 무슨 ‘마피아게임’인가. 동료들의 손가락총에 따라 한 사람의 일자리를 뺏다니. 사실 해고할 명분이 확실하다면, 굳이 이정윤에게 사표를 쓰라고 강요할 필요도 없다. 원장이 교사 설문조사 결과까지 들고 나온 건, 오히려 그만큼 해고의 명분이 없다는 반증이다. 원장 : “(원을) 운영하는 건 나야! (…)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지!”이정윤(이하 이) : “근데 제가 왜 퇴사해야 되는지 이유를 명확히 얘기 안 해주시는데….”원장 : “아이, 진짜 이 사람이!” (원장 A-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1. 12. 8.) 퇴사가 아니면 보직 변경을 선택하라고 했다. 보직 변경은 담임교사에서 보조교사로 ‘강등’되는 걸 뜻했다. 급여상 불이익을 보는 건 당연. 이정윤은 퇴사도 보직 변경도 원치 않는다는 뜻을 계속 밝혔다. 원장은 점점 언성을 높이고, 손으로 책상을 내려치기도 했다. “그때 너무 비참했거든요. 어떻게 내가 싫다고 사람들한테 그런 설문조사를 받을 수 있지?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저렇게 함부로 할 수 있지? 정말 매일매일이 지옥이었어요. 괴롭힘 당하고 (공황 발작이 나타나면) 약을 털어 먹어요. 그런데 그걸 또 다 토해요. 그러면 빨리 (구토를 멈추는) 다른 약을 또 먹고…. 아이들한테 그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혹시라도 옷을 버릴까봐 (출근할 때) 항상 여벌옷을 갖고 다녔어요. 토하면서 (용쓰다가) 소변이라도 나올까봐 속옷까지 다 챙겨서…. 정말 비참하다….”(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이정윤은 2021년 6월부터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불면증과 공황장애 증상 때문이었다. 처음 ‘정신과’를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 아냐? 왜 혼자 못 이겨내?’ 하는 편견이 있었다. 그 고통이 자신의 일이 되기 전까지는. 거듭된 퇴사 강요와 따돌림을 겪으면서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혼자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었다. 일터를 떠날 수도 없었다. 약을 먹으며 ‘지옥’ 같은 날들을 견디는 수밖에. 새해가 다가올수록 원장의 퇴사 압박은 강도를 더해갔다. 아마도 새 학년도가 시작되기 전에 이정윤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새 교사를 채용하기 위함인 듯했다. “선생님(이정윤)이 운영자야? 어디 이야기를 하면 하나하나 듣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따져! (…) 항상 거기다 대고 꼬박꼬박 말대답 하고! 말대꾸 하고! 거기다가 꼬박꼬박 납득이 안 된다고 그러고! (…) 주임선생님. 들어와 봐요.”(원장 A 대화 녹취록 2021. 12. 30.) 원장은 동료교사까지 불러놓고 그 앞에서 계속 이정윤을 압박했다. 이정윤은 울음이 터졌다. “언제까지 그러실 건데요. 저 원장님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해요. 제가 (집에서) 잠이나 자는 줄 아세요? (…) 저는 저대로 살아야 되는데 어떡해요, 원장님. 도대체 뭘 얼마나 제가 잘못했다고. 하루아침에 지금 나가라는 거잖아요.”(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1. 12. 30.) 다음 날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2021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원장은 막 퇴근하려는 이정윤을 교무실에 앉혀놓고 또 한 번 퇴사를 강요했다. 책상을 두드리고 고함을 쳤다. 원장 : “선생님(이정윤)이 (의사)결정자야? 선생님이 원장이야! 왜 이렇게 버릇없어!” (…)이 : “제가 퇴사할 만한 어떤 중대한 잘못을….”원장 : “내가 얘기, 이 씨.” (원장 A-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1. 12. 31.) 압박이 계속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이정윤에게 ‘뭔가’가 느껴졌다. “저는 먼저 알아요. 딱 (공황발작) 증상이 올 때 전기처럼 뭔가 오는 느낌이 있어요. 저는 경련으로 먼저 오거든요. 손발이 이렇게 뒤틀린다고 해야 되나, 막 꼬여요. 제 의지하고 상관없이 손이 꼬이고 몸이 막 덜덜덜 떨리거든요.”(이정윤 인터뷰 2024. 6. 21.) 또 울음이 터졌다. 공황 증상도 시작됐다. 이정윤은 퇴근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이 : “원장님 저… 가고 싶어요. 저 지금 토할 것 같다고요. 지금 숨이 안 쉬어진다구요. 그만하세요, 좀, 원장님.”원장 : “물 한잔 마시러 갔다 와.”이 :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원장님, 됐어요. 저 갈 거예요. (…) 저 퇴근하고 싶어요. 저 퇴근할거예요. 저, 지금, 지금….”원장 : “난 결정짓고 가야 되겠어!” (원장 A-이정윤 대화 녹취록 2021. 12. 31.) 이정윤은 교무실을 뛰쳐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남편과 함께 바로 정신과 병원으로 향했다. 취재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사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파킨슨병 산재 또 승소… ‘법정고문’은 7년으로 족하다 [그녀의 우산 8화]
파킨슨병 진단을 숙명으로 인정하기엔 서른세 살은 너무 젊었다. 뇌신경계 파괴로 몸이 굳어가는 와중에 생각은 자꾸 20대 첫 직장 시절로 돌아갔다. 신호영(가명, 48세) 씨는 그때 그 공장에서 LED 제품을 만들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어렴풋이 생각했다. ‘혀마저 굳어가는 내 병은 그 공장에서 얻은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아닐까….’ 법원은 그 추측이 맞다고 다시 한 번 판단했다.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구회근 재판장)는 지난 7월 25일,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이 신호영 씨에게 내린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산재가 아니라는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을 뒤집은 또 한 번의 판결. 산재 신청 이후 7년 만이다. LED 생산 공장에 취업한 지 22년, 파킨슨병 진단받은 지 15년 만의 일이다. 신호영 씨는 어느덧 5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누구보다 이 소식을 기다렸을 호영 씨에게 7월 31일 전화를 걸었다. 앉는 것도 힘들어 거의 누워 생활한다는 신 씨 대신 그의 모친 김정혜(가명, 72세) 씨가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도 공단이 상고 안 할까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한 번 데인 적이 있으니까….” 근로복지공단이 다시 상고를 결정한다는 건, 사건이 대법원까지 간다는 의미다. 큰 기대가 없다는 다소 힘 빠지는 반응. 가만 들여다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번 2심 재판부의 판결은 환영할 만한 것이지만 사실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신 씨의 발병 원인과 업무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1심 재판부 역시 신호영 씨의 손을 들어줬다. 1심 판결의 핵심 요지를 보자. “비록 의학적으로는 현재까지 이 사건 상병(파킨슨병)의 명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 원고가 이 사건 각 사업장에서 근무할 당시에 다수의 유기용제 및 유기화합물에 직간접적-복합적으로 노출된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 내지 촉진되었다고 봄이 합리적이다.” (서울행정법원 2020구단51146 일부) 이 판결이 나온 때는 2023년 6월 7일, 싸움은 이때 끝나야 마땅했다. 판결 당시 이미 신 씨의 투병 생활은 16년째로, 거동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와 가족에게 산재 인정과 요양급여는 시급한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근로복지공단도 1심 판결을 받아들여 ‘항소를 포기하겠다’고 법무부에 밝혔었다는 점이다. 법정 다툼을 멈추고 신 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법무부가 ‘항소를 진행하라’고 지휘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은 현 국민의힘 대표인 한동훈이었다. 공단이 ‘항소 포기’를 밝히면 법무부도 이를 받아들이는 게 관례였다. 2021년과 2022년, 공단의 ‘항소 포기’ 의견에 법무부가 항소 이행을 지시한 사례는 없다. 하지만 이수진 당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에 따르면, 2023년에만 신 씨를 포함해 ‘반대 사례’가 네 건이나 나왔다. 어쨌든 공단은 자기 의지와 반대로 항소를 했다. 그것도 항소 기한 마감 날 늦은 오후에 말이다. 아들 신 씨를 간병하는 모친 김정혜 씨는 당시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항소도 마감 날짜에, 마감 시간에 딱 맞춰가지고 했는데, 얼마나 잔인합니까. 안쓰러운 사람들한테 (기계적으로) 항소한다는 건 진짜 피해자들을 죽이는 일이죠! (이름이 근로’복지’공단이라면서) 무슨 이런 ‘복지’가 있어요!” (김정혜 씨 인터뷰 2023. 10. 17.) 의지도 의미도 없는 항소. 공단 측은 항소이유서도 4개월 후인 10월 23일에야 접수했다. 신 씨의 안타까운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김정혜 씨는 “근로복지공단이 불쌍한 산재 피해자를 도와주지 못할망정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난해 10월 인터뷰에서 말했다. 당시 기준으로도, 산재 판정을 기다린 지 이미 6년째. 간병인을 들일 여력이 안 돼 일흔 넘은 노모가 간병을 도맡고 있었다. 신 씨가 공단에 산재를 신청한 때는 2017년. 공단의 불승인 결정 → 행정소송 제기 → 1심 승소까지 6년이나 걸렸다. 이번 2심 판결까지 따지면 7년 세월이다.(관련기사 : 법원은 산재 인정, 공단은 불복 항소… “죽어야 끝날 일인가”) 공단이 2심 판결마저 불복해 대법원으로 사건을 끌고 가면? 해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투병 중인 신 씨와 가족에겐 최악의 시나리오다. “몸이 성한 사람도 10년 가까이 재판을 하면 힘든데, 몸 아프고 생계도 막막한 사람들은 재판이 길어지면 어떻겠어요? 환자도 힘들고, 돌보는 나도 힘에 부치죠.” 김정혜 씨가 2심 승소에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다. 기자는 신호영 씨에게 심정을 직접 듣고 싶었으나 그의 건강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작년 10월에 만났을 때도 신 씨는 인터뷰 도중에 잠들기도 했다. 요즘은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혀마저 굳어가고 있다. 앉아 있는 것도 어려워 옆으로 고꾸라지는 일도 잦다. 넘어진 아들을 일으켜 세우는 건 모친 김정혜 씨의 몫이다. “옆으로 넘어져도 혼자 못 일어나요. 그러다 질식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제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죠.” 법원의 1·2심 판결은 신 씨에게만이 아니라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 세계 1위권의 첨단산업을 보유한 한국사회에 주는 의미가 크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의 말을 보자. “산재는 보통 피해자가 상병과 작업장의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되는데, 어떤 유해물질이 있는 작업환경에서 일했는지 노동자들은 잘 모르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이번 판결은 첨단산업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헌법상의 의무를 다한 판결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이종란 노무사 전화 인터뷰 2024년 7월 31일) 이어 이 노무사는 그는 “첨단산업 분야에서 직업병 관련 연구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고, 그 발전 속도가 빨라 취급 물질이 빈번하게 바뀌고 있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작업환경에 대한 조사와 안전관리 매뉴얼이 신설되는 등 조사부터 예방책까지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노무사의 평가대로 최근 법원의 판결은 산업발전 상황을 따라가는 모양새다. 대법원은 이미 판례로 첨단산업분야의 산재 판정 방향을 잡아놨다.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과 기능 등 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이른바 ‘희귀질환’ 또는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대법원 2017년 8월 29일 선고 2015두3867) 공은 다시 근로복지공단으로 넘어갔다. 신 씨 모친 김정혜 씨는 이런 당부를 했다. “이번에는 소송이 끝이 나서 겨우 버티고 있는 지금 상황이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냥 딱 ‘남들처럼만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해요. 돈 걱정 없이 치료에 전념하는 거, 간병인 몇 시간이라도 불러서 마음 편히 있는 거, 고등학교 올라간 손주 학원도 보내고 싶고, 며느리도 좀 숨 돌렸으면 좋겠고…” 산재 다툼만 7년. 이 싸움은 이쯤에서 끝날까 아니면 더 연장될까. 근로복지공단은 아직 상고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또 잔뜩 희망고문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상고를 신청할 수도 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 이 콘텐츠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동시 게재됩니다.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타투이스트, 발달 장애인 취업지원 센터장, 가족 돌봄 청년, 대리운전 기사...각자의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노회찬재단은 사회적 발언권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6411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모아왔습니다. 이들이 바라는 일터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우리의 더 나은 일과 삶을 위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꿋꿋 프로젝트> 두 번째 주제는 노동권으로, 노회찬재단과 함께 ‘6411의 목소리’를 전하고 여러분의 목소리를 모으려고 합니다. ① 6411의 목소리, 6411 디지털 리워드 뱃지 달기🎖 ‘6411의 목소리'를 읽고, 캠페인즈에 코멘트를 남겨주세요. 6411 디지털 리워드 뱃지를 드립니다! 🟢 참여 방법 1. 캠페인즈에 회원가입 하기 2. '6411의 목소리'를 읽고 코멘트 남기기 숨은 일터에서 나를 발견하다(코멘트 남기기)- 김도윤, 타투이스트 "타투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 차별없는 세상을 향한 목소리(코멘트 남기기)- 이은자, 발달장애인 취업지원센터장 “출근하는 발달장애 딸에게” ‘오늘도 무사히’, 한숨과 땀방울의 연대기(코멘트 남기기)- 김아롱, 가족 돌봄 청년 “저는 14년째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입니다” 권리를 향해 한 걸음씩(코멘트 남기기)- 이미영, 여성대리운전기사 “나는 10년차 여성 대리운전 기사다” 3. 6411 디지털 리워드 뱃지 받기🎖 7월 17일까지 캠페인즈에 로그인 후 코멘트를 달아주신 분들께 6411 디지털 리워드 뱃지를 드립니다. 코멘트 1개만 달아도 수령 가능합니다. ② 6411의 목소리, 국회에 제안과 의견 전달하기 📣 ‘6411의 목소리'를 읽고, 여러분의 제안과 의견을 데모스X에 남겨주세요. 남겨주신 이야기는 7월 17일 국회에서 열리는 특별강연 "국회로간 6411의 목소리" 현장에서 소개합니다. 🟢 더 자세한 참여 방법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배너를 클릭해주세요!
허울뿐인 K콘텐츠 전성시대, 늘어나는 임금체불
누적 120명 이상, 11억 원 이상.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임금체불 특별 신고센터로 확인된 방송 제작 현장의 임금 체불 현황입니다. 제작사의 무책임한 촬영 강행으로 피해 눈덩이, 제작중단의 경우 미지급 다반사입니다. 관련하여 대표적인 두 곳의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는 증언대회를 지난 11일에 진행했습니다. 접수된 건에서도 피해규모가 전부 확인된 것은 아니고, 당연히 접수되지 않은 사건도 있을 것임을 생각하면 피해규모는 훨씬 커집니다. 현장 증언에 나선 두 피해사례에서는 PD, 작가, 연출, 촬영, 조명, 분장, 의상, 배우 등 제작에 투입된 직군 전체에 걸쳐서 나타났고, 두 사건은 닮아있었습니다. 임금체불이 시작되었음에도, 지급할 것이라는 약속을 반복하며 제작을 강행하였고, 오히려 핵심 스태프에게 돈을 빌려가기도했습니다. 제작사의 거듭된 지급 약속과 콘텐츠가 완성되어야만 수익을 낼 수 있는 산업의 특성상, 임금 체불이 시작되었음에도 주어진 업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임금 미지급으로 당사자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임금체불에 대해서 해결해주어야 하는 노동당국은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노동청에서는 피해사례에서 노동자성이 강하게 인정되는 경우들이 분명 있음에도, 노동자성을 부정하였다. 이로 인하여 간이대지급금(소액체당금) 등 마땅히 작동해야 할 제도적 보호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이외에도 한빛센터에 접수된 사례를 살펴보면, 투자 유치 부진 등을 이유로 제작이 초기에 중단되면서 기획 단계에서의 임금 미지급, 중간에 제작이 중단되면서 일했던 부분에 대한 미지급, 제작이 완료되었음에도 제작사의 사정으로 미지급이 수개월 째 해결되지 않는 경우 등입니다. 이는 기획과 제작, 투자와 고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파편화된 제작환경과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의 대두로 커진 불확실성 등을 원인이겠습니다. 문제는 제작과정에서 경영의 실패를 스태프들에게 고스란히 전가하거나, 임금을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항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6월 말까지 임금체불 특별 신고센터 운영을 지속하고, 접수된 사례에 대해서는 법률적 지원과 공동 진정 진행, 그리고 노동행정과 임금체불, 방송제작 구조에 관련한 제도 개선 활동 등을 도모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임금체불 특별 신고센터 : https://bit.ly/wagecall 🧲 증언대회 보도자료 보기 : https://hanbit.center/news3/?idx=26920034&bmode=view 🎬미디어오늘 / "3개월간 오디션 프로 만들었는데.." K콘텐츠의 그늘, 임금체불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8642 📡 매일노동뉴스 / K-영상콘텐츠 그늘, 외주제작사 임금체불 '눈덩이'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1988 🎥참여와혁신 / 'K-콘텐츠' 만드는 방송노동자들, 임금체불로 핸드폰 요금도 못 내 http://www.laborpl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949 📺 미디어스 / K-콘텐츠의 이면, 반복되는 '임금체불' https://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9005  📸한겨레 / ‘K콘텐츠’의 허울, 임금체불 제작사가 스태프 돈까지 빌려간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144524.html
왜 돈을 써? 대학생 쓰면 되지
문제: 공공기관이나 기업이 제출한 사업 제안서에 따라 사업을 수행하는 활동. 계획서 심사, 면접 등의 과정을 거쳐 선발된 경우에만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진행 주체는 사업 진행 과정에 대해 지속적인 평가와 감독을 받는다. 진행 주체와 상관없이 사업의 결과는 사업을 제안한 기관의 실적으로 남는다. 이는 무엇일까? (1) 공모사업  (2) 용역사업  (3) 외주사업  (4) 설마 봉사? 자원봉사, ESG, 그리고 열정페이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올해 3월부터 ‘2024 서울 청년 기획봉사단’ 사업(이하 기획봉사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의 내용은 문제 속 내용과 완전히 동일하다. 청년들이 팀을 이뤄 현대홈쇼핑, 아모레퍼시픽, 서울신용보증재단을 포함한 16개의 기업과 공공기관이 제출한 사업 제안서에 맞춰 기획안을 제출한다. 사전 교육, 서류 심사, 면접을 거쳐 최종 선발된 청년들은 사회공헌 사업을 진행한다. 중간평가와 최종평가를 거쳐 사업이 종료되면, 청년들은 활동혜택으로 무려 활동 인증서와 봉사시간을 제공받는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청년들이 이 활동을 통해 “사회 진입과 일 경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다. 돈은 안 받지만 ‘일’을 경험해 볼 수 있다니! 청년들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 아닌가? 기획봉사단 사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무급 노동’이다. 사실상 공모사업과 동일한 형태로 진행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참여하는 청년들에게는 합당한 대가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약간의 실행금을 주긴 하지만, 인건비는 물론이고 장비 대여비, 교통비 등의 활동비로도 사용할 수 없어 참여자들은 오히려 자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봉사니까 당연히 돈이 주어져선 안 된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어째서 자발적으로 공익을 추구하는 활동은 오직 공짜 노동으로만 진행되어야 하는가? 환경, 생명, 인권의 가치를 짓밟아가면서까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하면서, 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는 엄격한 금전적 순수성을 요구하는가?  설령 봉사의 무보수성을 인정하더라도, 기획봉사단 사업이 순수한 봉사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서울시자원봉사센터는 작년에도 기획봉사단 사업을 진행했었는데, 언론보도는 물론 센터의 웹사이트와 블로그를 뒤져봐도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대신 기업의 봉사활동으로 둔갑한 보도나 기업이 사업을 진행한 청년들에게 ‘활동 인증서’를 수여했다는 보도만을 찾아볼 수 있다. 청년들의 무급 공익활동을 기업의 실적으로 가로챈 것이다.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을 용역 외주로 진행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무급 노동에 ‘봉사’라는 이름을 붙이며 합리화하려는 행태는 기만적이다.  싸다 싸! 대학생의 공짜노동 청년들의, 특히 대학생들의 무급노동은 이미 흔하다. 수많은 공공기관과 기업에서 운영하는 서포터즈, 기자단, 마케터, 봉사단 등의 대외활동은 대학생들의 무급노동을 당당히 요구하거나, 무급노동에 가까운 수준의 활동비만을 제공한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면 대개 블로그 포스팅 및 카드뉴스 등의 기사 작성, 홍보를 위한 영상 콘텐츠 제작, 기관 행사 및 박람회 부스 운영 등의 활동을 요구받게 된다. 활동을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은 절대 적지 않다. 대외활동을 위해 휴학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참여자가 얼마큼의 노동을 하든 간에, 그에 따른 보상은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적은 활동비를 제외하면 봉사시간과 수료증, 기업의 제품 제공 정도가 전부다.  사업 운영진 입장에서는 적은 비용으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으니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청년들은 왜 자발적으로 공짜노동을 하는가? 대학생들의 대외활동을 향한 관심도는 문자 그대로 ‘못 해서 안달’인 수준이다. 대기업이나 대형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서포터즈는 수십, 수백 대 일에 달하는 경쟁률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청년, 대학생 입장에서도 득이 되니까 참여하는 것 아닌가?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상황인데 뭐가 문제인가? 청년들이 자원해서까지 공짜 노동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취업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처럼 고소득, 고용 안정, 장기근속이 보장되는 영역은 ‘1차 노동시장’이라 불리며 노동시장의 상층을 이룬다. 반면에 중소기업 재직자나 기타 비정규직으로 이루어진 ‘2차 노동시장’은 소득이 낮고 고용상 지위가 불안정하며 재직 연수가 짧다는 특징을 갖는다. 문제는 두 영역 간의 격차는 매우 큰데 노동시장 간 이동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시장 진입을 앞둔 청년들의 입장에서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된 이유다. 그러나 1차 노동시장 일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청년들은 극심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무급노동이라도 ‘사서 고생’해야 한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청년들에게 무급노동이 강제되고 있다.  일하다 죽었지만 산재는 아니다? 이는 청년만의, 또 급여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엔 이미 사회적 약자의 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인식이 가득하다. 최근 보도된 다음의 사례는 한국 사회의 편협한 노동 인식을 보여준다. 만 65세 이상 기초연금 수급자인 A씨는 2021년 경기도의 한 복지관을 통해 공공형 노인일자리 사업인 ‘공익형 지역사회 환경개선 봉사사업’에 참여했다. A씨는 이 사업에서 월 30시간 동안 지역 내 쓰레기 줍기 등의 활동을 한 뒤 약 27만 원을 받았다. 2022년 아파트 인근 도로 갓길에서 쓰레기를 줍던 A씨는 도로를 지나던 차량과 부딪쳤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곧 숨졌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복지관 소속 근로자가 아니라며 산재보상을 거부했다. A씨의 유족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부는 A씨의 노동은 근로 제공이 아니라 “지역사회 공익증진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봉사활동”이라며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재판부는 A씨가 한 “1일 3시간 범위 내 쓰레기 줍기 활동은 이윤 창출 등을 목적으로 한 근로제공으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 왜 ‘1일 3시간 범위 내 쓰레기 줍기 활동’은 노동이 아닌가? 왜 ‘이윤 창출 등’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노동이 아닌가? 재판부는 이어 “근로 제공과 그 대가로서의 임금 지급을 목적으로 체결된 계약”이 아니라 노인복지법에 따른 “노인의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한 공익사업의 일환”이라면서 “복지관으로부터 받은 1일 2만7000여원”도 “생계보조금 성격으로 국가 예산에서 지급된 것으로 근로 자체에 대한 대상적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노인들에게 쓰레기 줍기를 ‘시킨’ 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급된 돈도 노동에 대한 급여가 아니라 생계보조금 성격으로 주어진 것이라 노동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노동이 아니라 공익사업이므로, 급여가 아니라 생계보조금이므로 문제없는 것 아니냐고? 노동을 공익사업이라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생계보조금이라고 말장난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노동과 봉사를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재판부는 이윤 창출이 아닌 노인의 사회 참여 확대가 ‘목적’이기 때문에, 주어진 활동비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닌 생계보조금 ‘성격’이기 때문에 노동이 아닌 봉사라고 판단했다. 노동자성을 수행한 노동과 급여의 ‘목적’과 ‘성격’으로 판단하는 것은 난센스다. 대법원이 복수의 판례를 통해 세운 노동자성 판단 기준으로는 종속노동성 요소, 독립사업자성 요소, 보수의 근로대가성 요소가 꼽힌다.*** 사업 참여 노인은 복지관 등의 사업기관과 사업참여계약서를 작성한다. 이에 따라 정해진 기간, 보수, 장소, 업무내용, 업무규칙, 복무규정, 인사규정에 맞추어 업무를 수행한다(종속노동성 요소). 참여 노인은 타인을 고용할 수 없고, 사업기관이 제공한 비품과 원자재만을 사용해야 한다(독립사업자성 요소).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2020년에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참여 노인의 74.2%가 급여를 목적으로 노인일자리사업에 참여한다(보수의 근로대가성 요소). 사법부의 과거 판례를 기준으로 살펴봐도 A씨의 업무를 봉사가 아닌 노동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목적과 성격을 바탕으로 억지스럽게 봉사와 노동을 구분 짓는 사법부의 판결은 약자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돈을 안 줘도 되는 사람은 없다 대학생 기획봉사단 사업과 노인 공공일자리 사업은 업무의 종류도, 수행 주체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리를 크게 신장시켰다. 물론 오늘날에도 노동권을 둘러싼 문제는 산적해 있지만, 전반적인 여건이 상당히 개선되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노동권의 보장은 필연적으로 사용자의 책임(누군가는 이를 ‘비용’이라 오역한다)을 강화한다. 사회의 인권의식이 부족해 제대로 묻지 못했던 ‘당연한’ 책임이 떠오르자, 책임의 주체들은 이를 회피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가장 쉬운 해법은 자신이 사용하는 노동자들이 사실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니니 노동권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다. 돈도 안 줘도 되고, 안전도 신경 안 써도 되고, 근로시간이든 휴식이든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학생이나 노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자들의 노동은 언제나 부정당해왔다. 여성의 무급 가사·돌봄노동은 ‘집안 사정’이라서, 장애인의 저임금 노동은 ‘복지’라서, 고등학생의 저소득 노동은 ‘현장실습’이라서, 이주노동자의 차등적 최저임금은 ‘인구위기’라서 어쩔 수 없다며 노동 무시를 정당화해왔다. 기만적 수사를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안에 숨어있는 차별이 드러난다. 특정한 ‘존재’라는 이유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차별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모두의 노동이 지닌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며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지금 바뀌지 않는다면 당신의 친구도, 당신의 가족도, 그리고 당신도 언제든지 차별받는 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 권혜자·이혜연의 분석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대기업 정규직 초임 평균은 305만 원인 반면, 중소기업 비정규직 초임 평균은 138만 원으로 그 격차가 매우 컸다(권혜자·이혜연, <대기업집단 및 중견기업의 임금 프리미엄>, 《노동정책연구》, 19(1), 2019.).   또한 전병유 외의 분석에 따르면 2004~2006년에는 중소기업 근로자의 3.5%가 대기업으로 이직했으나 2013~2015년에는 이 수치가 2.2%로 줄어든다. 이는 노동시장 간 이동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전병유·황인도·박광용,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정책대응 : 해외사례 및 시사점>, 한국은행, 2018.).  ** 한국고용정보원의 자료에 기반한 조귀동의 분석을 보면 1차 노동시장 일자리의 대부분을 점유하는 서울 4년제 대학 졸업자 상위 30%의 소득이 2014년을 기점으로 되려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동일 일자리의, 특히 1차 노동시장의 임금이 감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결국 일자리의 수 자체가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 생각의힘, 2020.)    *** 종속노동성은 특정 사용자에게 업무에 관한 지휘명령을 받아 업무를 진행하는지, 독립사업자성은 업무가 자영업자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수의 근로대가성은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한 것인지를 따지는 기준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법무법인 지평의 노동법 뉴스레터를 참고.
노동을 고민하는 활동가들 여기여기 붙어라 👍
지난 2월 25일, 노동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 두 명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시민단체 활동가 여섯 명을 초대했습니다! 망원의 성미산알루(무료로 공간을 내어주신 사장님 감사합니다🙏) 에 모여 '노동'과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3시간 내내 이어진 성토대회에 허덕이며 녹취록을 풀었습니다😂 한달동안 울고 웃으며 이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해보았는데요, 일부를 캠페인즈에도 소개합니다!  이 글에서는 볼 수 없는 기획의도와 기록 전문 한 눈에 확인하기👀 모든 구성원의 대화는 알록달록한 가명으로 기록했습니다. 🍎함께 하고 싶은 빨강 씨🍋 쎄한 노랑 씨 🍊 뻗치기 중인 주황 씨 🥦 어쩌구한 초록 씨 🫐 내려놓은 파랑 씨🥑 지켜보는 남색 씨🍇 날아가고 싶은 보라 씨 🤔 각 단체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파랑 | 저희 단체는 얼마 전 급성장했어요. 그래서 요즘 과도기인 것 같기도 해요. 지금은 팀장회의에서 사업이 결정이 되는 편이에요. 저희는 거기서 나온 결정에 맞춰 실무를 하고요. 저희 팀은 팀장님이 그래도 대표님에게 사업의 목적을 계속 묻고 그래서 결국 방향성을 알아내주셔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실무를 시작하기 전에 이 사업의 의미를 팀원들과 같이 얘기해서 만들어가고 시작하시죠. 하지만 조직에는 그렇지 않은 팀이 더 많아요. 그냥 팀장회의의 결정을 100% 수용해서 시작하죠. 그래서 방향성에 대한 맥락이 잘 공유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단체는 규모도 큰 편이고 팀도 많이 나눠져 있어서 일단 자기 팀에서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거예요. 그러면 팀들끼리 집행하는 활동과 결정에 차이가 생기기도 해요. 예를 들어 이 팀에서 내보낸 콘텐츠는 A 입장인데, 다른 팀 콘텐츠에서는 그거랑 미묘하게 다른 의견의 B 입장으로 나온다든지… 그럴 때 조정을 하는 시간이 있긴 한데, 그 조정 자리에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죠.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조직의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은 거예요. 🍋노랑 | ’파랑‘의 팀은 관련한 문제를 인식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직에 이야기 해보았나요? 🫐파랑 | 네. 운이 좋게도 제가 속한 팀이 조직의 상황을 꽤나 예민하게 보고, 그래서 문제 제기를 자주 하는 편이에요. 조직에서 ‘저 팀 무섭다’ 이런 얘기를 좀 듣기도 해요. (모두 야유) ‘이걸 왜 하느냐’고 질문을 하면 그게 되게 공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나봐요. 조직 내에서도 이 사업을 왜 해야 하는지 설명 못하면 안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한 참여형 사업들인 경우가 많잖아요. 내부조차 설득이 안 되는데 어떻게 진행할 수 있냐는 기본적인 질문이죠. 그래서 계속 점검하는 건데 그냥 ‘무섭다’고 피드백이 오니까 위축되기도 해요. 특히나 팀장 회의에서는 대표를 견제하는 사람이 많이 없는 것 같아요. 팀장들 중에 결정에 의문을 가지거나 점검하는 사람이 없어요. 내부에서 관련해서 문제 제기를 한 동료들이야 많았죠. ‘방향성을 잘 모르겠으니 더 설명해달라’ 라고 말하는 사람들, 물론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그 사람들은 이미 지쳐서 나가 떨어졌어요. 문제 제기했던 사람들만 자꾸 떠나게 돼요. 그런 사람들이 계속 못 남아 있게 만드는, 튕겨나가버리는 그런 조직 분위기가 있죠. 계속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걸 그냥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게 계속 반복이 되니까 되게 감정의 고립이 쌓이네요. 그래서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이 거버넌스를 만드는 거였어요. 개인이 얘기하게 하지 말고 논의 거버넌스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있어요. 🍎빨강 | 문제 제기를 자꾸 면담으로 풀려고 하는 것에 불편함이 있어요. 그 자리는 문서화 하는 시간도 아니고 하니까 변화와 책임이 부재하죠. 그래서 열린 회의자리에서 다시 한번 얘기를 꺼내기도 해요. 그럼 이런 말을 하면서 다시 면담으로 또 빼는 거죠. “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얘기해요? 이런 식으로 풀지 말고 나한테 면담 먼저 요청해야 되지 않나요?” 여러 명 있는 자리에서 몰리게 되는 상황에 대한 기피감이 있는 것 같아요. 🍊주황 | 그럴수록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집단행동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활동가로서 꼭 더 열린 자리에서 말하라고 제안하고 싶어요. 면담으로만 해결하면서 그렇게 계속 정보를 리더들만 알게 되는 거잖아요. 그 리더만 활동가들의 얘기를 다 알고, 활동가들 사이의 칸막이를 높이는 거잖아요. 여기서 나온 대화들이 어디까지 정확히 책임져지고 실행될 건지를 흐리는 거잖아요. ‘여기서 다 얘기했으니까 끝이야’라는 명분만 쌓아가거나… 저는 여기서 꼭 정치활동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활동가들끼리 이런 얘기들을 나누고, 우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끔 해야 되는 거죠. 우리들의 목소리를 더 분명히 하는 전략들을 좀 더 짜야 되지 않을까요? 모두 결정 단위에 대한 견제기구가 딱히 없는 것처럼 보이네요. 그럼 활동가 스스로 견제해야 될 것 같은데요. 사업도 좀 안 해버리고 이러면서, 진짜 이 운영진들이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고 그걸 통해 투쟁하는 방식으로 가는 게 일단 기본원칙이죠. 이 문제의식을 좀 명확히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구체적인 사례도 정립하고. 🍎빨강 | 우리가 다 같이 모여서 문제 제기한 경험과 사례, 선례… 뭐가 없으니까 매번 개인 의견으로 몰리고, 개인 면담으로 빼고… 사실 저 그래서 면담 왕이에요. (웃음) 이게 처음 한두 번 반복될 때는 맨날 면담 자리에서 울었는데 이젠 울지도 않게 되더군요. 🍋노랑 | 너무 공감해요. 면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이게 의미있게 문제 제기로 흘러가느냐, 그냥 개인의 투정으로 흘러가느냐가 결정되잖아요. 면담 상대가 어떤 감수성을 가졌는지, 어떤 리더십을 가졌는지에 따라서도 조직 소통방법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죠. 솔직히 이건 조직한테도 손해같거든요. 시민단체는 규모가 조금이나마 커지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작은 단위인 팀 소통으로 전환하는데, 운영진들이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주황 | 의식은 같이 갖고 있지만 문제 제기에 동참하지 않는 동료들의 경우, 그 문제 제기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는 않나요? 어쨌든 조직에 맞서는 거니까. 🍎빨강 | 그런 것도 조금 있어요. 우리는 운영진이 되게 권위적이고 몰아치는 타입이기도 해서요. 그런 자리가 사실상 너무 부담스럽고 어려운 동료들도 많은 거죠. 사실 운영진, 리더들한테 면담 요청 오면 개인 활동가들은 당연히 너무 부담되죠. 특히 연차가 적을수록 더더욱.이번에 퇴사하시는 분들이 사실 제일 많이 총대를 메고 제일 많이 얘기했던 사람이거든요. 끝내 퇴사하시는 걸 보고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라는 반성이 저뿐만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어요. 그리고 다른 팀에서 문제 제기를 할 때 쉽게 개입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죠. 워낙 따로 움직여서. 이게 늘 개개인의 문제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연대가 어려운 것 같아요. 🍊주황 | 반박할 수 있는 데이터들을 계속 쌓으면서 이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계속 조직 내에 살아있게끔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그때도 이랬지’ 하면서 사라진 문제가 되지 않고 해결을 위한 노력이 기억되게 하는. 우리도 오랫동안 혼자 싸우다가 퇴사하신 분처럼 되면 안 되잖아요. 이제 또 하나의 선례가 쌓여버렸으니까 ‘우리 이 꼴 나기 전에 한번 제대로 다시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여러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랑 | 시민단체들은 대부분 주적 같은 존재, 뭐 사람이든 권력이든 제도든, 그런 상대가 있잖아요. 그것과의 싸움에 몰입하다 보면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아니 자잘하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되기 쉬운 투쟁들이 엄청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의 외침이 조직의 외부활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고 혼자 자기검열하는 게 커지기도 하고요. 대부분 이 조직의 활동에 지지해서 들어오는 활동가들이 많으니까. 그런 생각들이 계속 우리를 옥죄지 않나 생각해요. 🤐지금의 노동, 괜찮으신가요? 🥦초록 | 이 단체는 개인 활동가들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너무 높아요. 동료들의 평균치가 높으니까 내가 거기에 다다르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감각들이 막 생기거든요. 밤, 주말에 일하는 거 너무 기본이고요, 주중 근무시간이 명확하지 않아서 그냥 막 아무때나 업무 메신저가 울려요. 그거에 대해 무시하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언제 올려도 바로 소통이 되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조직 분위기가 살짝 있는 것 같아요. 🍋노랑 | 사실 조직이 막 개인의 책임감을 강요하지 않는 건 맞아요. 그런데 또 활동가가 눈치 받지 않고 오롯이 자기만의 선택으로 과로를 하냐? 그건 당연히! 아니거든요. 가끔 운영진이 반복되는 과로를 개인의 몫으로 말하곤 하는데, 그걸 멈추게 하는 것도 조직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방관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도 책임이죠. 제가 일하는 곳이 그래도 꽤 오래된 조직이거든요. 그런데 ‘빨강’이 말씀하신 것처럼 규정이 정말 많이 없어요. 특히 개인 활동가의 안전한 노동 환경에 대한 건 거의 없어요.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야만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죠. 규정을 만드는 과정 속에 있다보면 사실 이걸 필요로 하는 동료들이 되게 많았구나 느끼게 돼요. 그런데도 한번도 제안된 적이 없었던 거예요. 이유를 여쭤봤는데 놀라운 답들을 주셨어요. ’이 단체를 믿으니까.’ 저 또한 이 단체를 너무나 믿지만요, 지금 정말 위험한 상황인 것 같아요. 이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버틸 만한 힘이 안 생긴다는 답도 들었는데요. 생각보다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어가게 되는 경우들이 엄청 많은 것 같더라고요. 저희는 다른 팀과의 소통이 조금 어려운 조직인데요. 개개인에게는 팀 문화가 곧 조직 그 자체로 느껴지게 돼요. 그렇게 조직에서 놓치는 것들이 생기는 거죠. 팀 안에서 괴로운 점이 생기면 풀 곳이 딱히 없거든요. 저는 문제 제기를 했을 때 가장 듣기 싫었던 대답 2개를 다 들었어요. ‘조직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선택이네요.’ '원래 이 판은 그렇게 굴러가요.’ 저는 이 말처럼 시민단체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제가 또 주섬주섬 개인적인 경험을 꺼내요. 그렇게 ‘원래‘처럼 비영리단체가 굴러가다가 누군가 상처를 받은 사례들이요. 분명 이 조직에서도 있었지만 외면해온 사례들이기도 하겠죠. 당신들이 조직을 너무 안전하다고 믿고 이상적으로 생각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심지어 내 경험까지 끌고 와서 설득해야 하는거죠. 나도 이 조직을 리더들만큼 아껴서 하는 제안이라는 걸 증명하는 행위를 굳이 해야 하는, 저한테는 가장 상처받는 순간들이죠. 🥦초록 | 그냥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하나의 마을이에요. 진짜 신뢰도 200%의 마을. 그게 부담스럽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낀 사람들은 그냥 하나둘씩 나가는 거죠. 🍊주황 | 그렇게 믿음으로만 가면은 결국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고, 그 후에야 ‘우리가 믿음으로 갔던 게 이렇게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구나를 알게 되면 상처받고 조직이 와해되고 이렇게 가는 길이잖아요. 뭔가 그렇게 되기 전에 뭔가 하는 게 진짜 중요할 것 같긴 하네요. 진짜 개선과제 많을 것 같은 조직인데요. 조직에 일체화되어 있지 않은 동료가 좀 많이 필요해 보이네요. 활동가로서 지속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정말 과로해선 안 돼요. 하다 죽어요. 진짜요. 근데 “조급해하지 마” 또는 “너 지금 잘하고 있고 당연히 이만큼 하는 게 너무 당연해”라고 말할 수 있는 상급자가 아마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러면 스스로라도 그 메타 상급자를 머릿속에 만들어가지고 얘기를 자기한테 해줘야 되거든요. 아니면 친구들끼리 얘기를 하면서 계속 그거를 실제로 안정시키는 작업들이 필요하고. ‘활동가’라는 어떤 사명감 때문에 과로가 부채질 되는 경향이 있단 말이에요. 좋은 중간 관리자를 만나면 이 얘기를 해줄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생각하면서 가야 해요. 이 기준선이 자꾸 높아지는 건 결국 조직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좀 이런 말 통하는 동료를 계속 찾아보는 게 되게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해요. 표준의 기준선을 높이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게 되네’라는 말, 되게 무서운 말이네요. 개별 활동가가 다 투쟁의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말고, 말 좀 통할 만한 동료들을 계속 찾아야 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진단이 내려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요즘 고민이 무엇인가요? 🍎빨강 | 요즘 상황이 상황인지라... 같이 일을 하면서 “우리 저기로 나아갑시다”여야 되는데 “망하지만 말자”라고 얘기하며 넘어가는 순간이 많아요. 배에 물이 막 들어오는데도, “괜찮아, 손으로 막아! 배 아직 안 가라앉았어!“ 🍋노랑 | 활동가들은 자기자신을 일반적인 노동자라고 감각하지 않는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린 의미있는 일 하고 있으니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 중 하나니까!’ 이런 사명감으로 과로와 이 이상한 체계들을 용서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시민단체가 겪는 외부 상황도 안 좋은 시기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주황 | 어떤 조직이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의 변화가 잘 일어나야 해요. 밖으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민단체는 특히나 이 얘기가 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에서 우리도 계속 배우고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아성찰이 계속 이루어져야 외부활동에도 좋은 작용이 되며 이어지기 마련인데, 왜 우리는 늘 이에 대한 고민과 토론을 제일 뒷순위에 둘까요. 서로를 믿는다는 이유로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는가… 이런 생각들과… 조직의 장기적인 플랜을 생각했을 때 너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으면 일부러 시간을 배정해서 ‘이건 우리 챙기고 갈게요’라고 할 수 있는 판단이라고 보거든요. 그거는 나는 당연히 이 업무 영역에서 포함시켜서 당연히 기본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뭔가 일의 영역은 판단하기에 따라 되게 다르고 ‘일을 어디까지는 하지 말자’도 사실 우리가 결정 내리기 마련인데 그 결정에서 늘 얘가 뒷전인 지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리더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생기죠. 🍎빨강 | 뭐랄까… 동료를 잃는 거 너무 슬프지 않아요? 나는 함께 마음을 나눈 사람들 떠나는 게 제일 속상해요. 🍊주황 | 이제 앞으로 장기적으로 동료를 안 잃기 위해서 행동해야지요. 그래서 꼭 지속가능성 있는 활동을 하길 바랍니다. 저도 지금 견디는 중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런 것에 좀 능한 것 같습니다. 저는 진짜 잘 쉬는 사람인 것 같아요. 활동가 버튼이라는 거, 끄면 또 꺼지더라고요. 이렇게 ’멈추는 것까지도 내 활동이다‘ 생각해요. 선언이야, 선언. 지금 내가 잘 먹고 잘 쉬는 것도 내 활동의 일환이다. 그래서 안식월 제도 같은 게 진짜 필요한 것 같아요. 일부러 고의적으로라도 활동을 끄도록. 🍎빨강 | 최근에 그런 말을 들었어요. 안식월이 대부분 3년차 이상부터 생기잖아요. 물론 개개별의 휴식의 목적도 있지만, 3년차면은 중간관리자이거나 조직에서 그만큼 중요한 실무 위치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 한달동안 부재해도 조직이 굴러갈 수 있는 연습을 하는 목적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노랑 | 너무 중요하네요. 저는 그만큼 연차가 안 쌓였는데도 이미 낸 휴가를 반납해야 했던 날들이 많았는데… 우리 조직 그 연습 너무 필요해요. 🍇보라 | 저는 일하면서 그런 질문을 못 던져봤던 것 같아요. ‘이거 왜 해야 되지?’ 나조차 꺼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게 좀 오늘 느꼈던 점이에요. 위에서 내려오면 그냥 했던 거지. ‘이걸 왜 해야 되고 우리가 뭘 위해서 이걸 하고 있지’가 안 잡혀 있기도 하고요. 저는 요즘은 고민했던 게 계약직과 정규직으로 일하는 차이예요. 왜 2년 이상 일하면 정규직 전환을 해줘야 되는지 이런 게 몸으로 납득이 되는 게 있었어요. 🍋노랑 | 조직이 비정규직 다루는, 특히 시민단체가 비정규직 활동가 다루는 태도는 진짜 너무 별로인 것 같아요. 그냥 일손 부족할 때 막 불렀다가 프로젝트 끝나자마자 손절, 이런 느낌이죠. 🍇보라 | 사업 목적에 대한 납득이 없으면 ‘여기서 뭘 배울 수 있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고, 그럼 내가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는가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조직이 명확히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게 너무 필요하다고 느껴요. 내가 어떻게 나아가고 싶은지의 확고함과 조직이 나아가고자 하는 거를 맞춰나가고 싶은데 조직의 방향성이 없으니 이조차 어려워요. 그게 또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뭔가 기획해서 제안을 역으로 하면 될 것 같긴 한데 그조차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인가에 대한 판단이 없어요. 그러니까 일을 벌려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이런 것도 좀 헷갈릴 때가 있어요. 내 의견을 반영해 줄 수 있는 회의 공간이 있으면 얘기를 하겠는데, 역량 발휘하고 싶은 욕구와 나의 위치가 일치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들어요. 저는 곧 계약이 만료되고, 조직에 변화를 만들고 싶어도 계약직이라는 신분이 뭔가 도전하기에 좀 어려운 거죠. 🫢우리의 활동이 건강하게 지속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주황 | 조직문화 진단을 의무화했으면 좋겠어요. 이행하지 않으면 패널티를 받는다든지 벌금을 내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성희롱 예방교육을 직장 의무교육에 포함하듯이 조직 문화에 대한 것도 의무교육으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노랑 | 동료들과 얘기를 많이 해야 되는 것 같아요. 같은 프로젝트를 하고 있더라도 당장 옆에 있는 동료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나랑 같은 고민을 누군가 하고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괜히 힘이 나는 경우가 있잖아요. 하나의 투쟁으로, 변화의 움직임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서로에 대한 돌봄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고요. 그래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네요. 조직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 대안을 찾아 요구하는 것은 저한테 그 다음 단계로 느껴져요. 🍇보라 | 동료와 친구 사이 이런 균형도 되게 어려운 주제인 것 같아요. 동료와 친해질 수 있는가.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는가. 🍋노랑 | 저한테는 그것도 진짜 최대 고민이었어요. 일에 대한 어려움이 사적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되게 쉽잖아요. 이걸 오픈할 정도의 관계가 되어야 결국 그 모든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록 | 저는 교육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완전 필요해요. 내가 이 조직을 위해서 배워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역량을 채워줄 수 있는 교육이 또는 기회가 제공 됐으면 하는 게 있어요. 뭔가 나랑 같이 나아지려고 하는구나 하는 느낌도 같이 받고요. 🫐파랑 | 전 노조가 생기면 좋겠어요. 요즘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물어요. “너네 노조 있어? 어떻게 운영돼?” 아까 ‘동료와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는 동료랑은 친구 안 하거든요. (웃음) 저는 동료는 어디까지나 동료라고 생각을 해요. 일터에서의 어려움을 얘기하는 건 친구가 아닌 동료끼리만 할 수 있는 얘기잖아요. 제가 자주 조직 관련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같은 불만이 있는 동료들이 저를 찾아오더라고요. 그렇게 뭔가 미묘한 네트워크 같은 게 생겨요. 이 네트워크를 조금 더 공식적인 기구로 만드는 것을 최대 목표로 가지고 있어요. 일단은 노조 관련 스터디부터 시작을 할까 해요. 동료들과 노동에 대해서 같이 비슷한 감각을 깨우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희 단체는 뭔가 끈끈함이 있는 조직은 아니라서 결국 모든 것이 자기 선택으로 치부되거든요. 그게 사실은 다 조직의 고도의 전략으로 짜여있는 느낌이 좀 들어가지고요. 한 활동가가 혼자 인사팀을 만나러 가거나 조직에 무언가를 얘기하거나 할 때 외롭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일단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형식적으로라도 그리고 최소한이라도 그런 면담에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던가… 그런 점이 체계화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주황 | 현재 사측과 투쟁 중인 00단체도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에 한 달 전부터 교육을 공부했대요. 자꾸 이런 조직 이야기가 후순위로 밀리고 그러다 보니까 바깥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들이 계속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오늘 집담회 같은 시도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디자인할 사람 필요하면 디자이너 채용하고 개발할 사람 필요하면 개발자 채용하는 것처럼, 사실상 시민단체에도 HR 전문가가 좀 더 많이 자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활동가들은 대부분 ‘내가 당장 필요하니까 내가 해당 역량 쌓아서 해결한다‘ 이렇게 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여요. 그리고 그런 전문가들이 있으려면 자본이 필요한데 그것도 어렵기도 하고… 하여튼 이런 노동 환경이 좀 당연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에서는 볼 수 없는 기획의도와 기록 전문 한 눈에 확인하기👀
"AI 때문에 나를 자른다고요?" 다가올 ‘AI 기술실업’에 맞서 지켜야 할 것은?
‘AI 기술실업’에 맞서 지켜야 할 것   고아침1) AI윤리레터2) 필진, AI 연구자   AI발 기술실업의 본격화 지난해 말 KB국민은행이 콜센터 협력업체를 줄이면서 상담사 240여 명이 해고 위기에 몰렸다.3) 인공지능(AI) 상담이 늘고 콜센터 콜수가 줄었다는 이유다. AI 시스템 도입에 따른 기술실업의 전개 방식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골자는 이렇다. 1) 기존 상담사 업무를 (일부) 자동화하는 AI 시스템을 도입한다. AI 시스템 위주로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고 상담원 연결은 어렵게끔 한다. 2) 콜 수가 줄어들었으므로 상담사 인력을 감축한다. 향후 AI 자동화가 예상되는 분야일수록 인력 충원을 삼간다. 3) 상담사의 상담 기록을 언어 데이터 삼아 AI 시스템을 개선한다. 상담사의 데이터 제공은 평가와 연동하여 거부하기 어렵게 한다.   AI 자동화를 매개로 하는 불안정노동 확산 속에서 노동자는 이중의 불이익을 당한다. 우선 자동화 도입의 영향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이 불안정해진다. 위 사례에서 상담사들은 노동조합과 여론의 압박 덕에 고용승계가 되었지만, 급여 조건이나 근무환경이 악화하였다.4) 한편, AI 시스템 구축에 활용되는 데이터를 노동자가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 수혜를 입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시스템을 도입한 고용주다. AI 시스템 오작동의 불편이 소비자 및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것은 덤이다.   생성형 AI 기술의 부상과 자동화 도입의 유행 속에서 기술실업도 잦아지고 있다. 언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생성형 AI 도입을 추진하는 가운데 올해 초 계약직 직원 약 10%를 해고했다.5) 드롭박스, IBM, 구글 등 테크업체들이 경쟁하듯 AI 도입을 명목으로 대량 해고를 감행하는 가운데, AI 기술을 만드는 노동 또한 위태로운 것은 마찬가지다.6)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은 호주 데이터 라벨링 업체 에펜에 ‘전략적 검토’를 이유로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7) 수천 명의 하청 근로자가 영향을 받으리라는 것이 알파벳 노동조합의 의견이다.   AI의 일자리 대체는 필연적인가? 인간에 준하거나 인간을 능가하는 AI가 등장하여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 기정사실인 듯한 분위기 속에서 기술실업 소식은 더욱 자주 들려올 것이다. 기술실업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흐름일까? 여기에는 AI 기술 발전에 대한 상당한 낙관론, 기술이 등장한 이상 노동력 대체는 불가피하다는 기술결정론적 가정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두 가정 모두 비판적 거리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2022년 한 승객은 에어캐나다 웹사이트에 적용된 챗봇에 할인 규정을 문의했다가 챗봇이 지어낸 잘못된 규정을 안내받아, 예정에 없던 비싼 비행깃삯을 냈다. 그는 민사 소송을 냈고, 항공사는 보상 명령을 받았다. 8) 생성형 AI에 기반한 자동화는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며, 언제 어디서 오류가 나타날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불확실한 기술을 믿고 기존 인력을 대체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일까. 에어캐나다는 결국 해당 챗봇을 웹사이트에서 제거했다. 위와 같은 오류는 생성형 AI 기술이 절대적 정확성보다는 통계적인 그럴싸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이른바 ‘환각 hallucination’ 현상이다. 기술 발전을 낙관하는 이들은 ‘앞으로 AI 환각 문제가 해결되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곧잘 구사하지만, 현재 기술 패러다임에서 그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데이터를 학습해 인간이 쓴 것 같은 글을 생성하거나 복잡한 자료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AI 기술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자동화’의 복음은 언제나 얼마간의 과장광고와 함께 찾아온다. 식당 키오스크나 소셜미디어 필터링 알고리즘처럼, 겉보기에 그럴싸한 자동화 기술이 실제로는 뒤에서 인간 노동의 보조를 받아야만 작동하는 ‘가짜 자동화’는 기술의 역사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다.9) 기술적 성취를 과대포장하고 인간의 노동을 비가시화하는 경향은 노동자의 지위를 약화하고 자본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현재의 AI 기술에서 ‘가짜 자동화’는 어떤 형태를 띨까? 우선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필요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라벨링하고, 모델 성능을 향상하기 위해 출력 데이터를 필터링하는 수많은 ‘유령 노동자’가 있다.10) 알파벳이 계약 해지한 에펜의 근로자도 여기에 해당하며, 이러한 노동은 남반구의 저임금 노동 인력에 의해 수행되곤 한다. AI 모델은 학습 시점의 데이터에 고정되기 때문에 최근 자료를 반영하려면 데이터 노동을 지속해서 필요로 한다. 더구나 요즘의 거대 생성 모델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컴퓨터 자원과 전력을 소모한다. 모델을 구축하는 데도, 모델을 사용하는 데도 막대한 에너지가 쓰이고 모델을 구동하는 데이터 센터가 소모하는 냉각수의 양도 만만치 않아, 생태적 영향 또한 요주의 대상이다. 11) 기술적 진전이 현재의 속도를 언제까지나 유지하리라 섣불리 확신하기 어려운 이유다.   소수만 이득 보는 기술실업, 그에 맞서는 새로운 흐름 AI 기술이 순탄히 발전하여 인간을 대체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더라도, 그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은 여러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기술실업 또한 저절로 발생하는 불가피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취하는 구체적 행동에 달려 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기술을 도입할 것인가? 모두의 상생과 공영을 위하는 쪽인가, 아니면 노동자의 몫을 없애 기업의 이익을 늘리는 쪽인가? 안타깝게도 현재 보이는 양상은 후자에 가깝다. 하지만 노동자에 적대적인 방향으로 AI 기술이 적용되는 현재의 흐름에 대항하는 움직임 또한 등장하고 있다. 소수 카르텔에게 이권을 가져다주고 다수에게 손해를 끼치는 기술에 저항하는, 일종의 신-러다이트 운동이다. 2023년 미국 작가조합(WGA)과 배우조합(SAGAFTRA)이 각각 진행한 파업은 애초 처우 개선을 두고 시작했으나, 갈수록 생성형 AI 기술이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12) 파업에 참여한 이들은 작가들의 대본이나 배우들의 움직임 등 노동의 결과물이 AI 학습 자료로 쓰이거나, 인간이 창작을 주도하는 대신 AI로 생성한 초안을 수정하는 보조적 역할로 밀려나는 처우 악화를 경계했다. 긴 파업 끝에 각 조합은 합의안을 통해 AI 기술 활용 시 준수해야 할 규범을 이끌어냈다. 작가조합의 합의안에는 AI 생성물에 크레딧을 부여하지 않고, 제작사가 작가에게 AI 사용을 강요할 수 없으며, 대본 등을 AI 학습 데이터로 사용할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3) 배우조합의 경우에는 AI 활용시 명시적 동의 및 알 권리 보장, 고용 축소를 목적으로 하는 AI 활용 금지, 기술 이슈에 관한 정기적 논의에 배우가 참여하는 등의 합의안을 도출했다.4)   프리랜서 노동자인 작가와 배우들이 AI를 매개로 노동권을 약화하고자 한 제작자연합을 상대로 벌인 투쟁은, 인간 노동자와 AI 사이의첫 본격적인 싸움이었던 셈이다. 이를 통해 도출된 구체적인 활용 방식에 관한 합의도 인상적이지만, AI를 업무에 활용하는 데 있어 노동자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을 남긴 중요한 선례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생성 AI 기업을 상대로 창작자들이 집단 소송을 제기하는 등 AI의 노동 위협에 대한 저항은 폭넓게 퍼져가는 모양새다. AI 도입이 단지 노동자를 희생양 삼아 비용 절감을 추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저항의 전선 또한 맹렬히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술 도입이 노동자의 권익을 약화하지 않도록 상생을 실천할 것, 그리고 도입 과정의 논의와 의사결정에 노동자가 참여할 것. 앞으로 마주할 ‘기술실업’의 전망 앞에서 우리 사회가 힘써 지켜야 할 사항들이다.   1) https://scalarvectortensor.net 2) https://ai-ethics.stibee.com 3) 주영재, 「업무만 가르치고 빠져라? AI발 해고 ‘올 것이 왔다’」, 『경향신문』, 2024. 1. 7.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1070900021. 4) 김온새봄, 「국민은행 콜센터노동자들 “AI로 업무강도 높아져···고용불안도 여전”」, 『참여와혁신』, 2024. 2. 14. https://www.laborpl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288 5) 김서현, 「편의로 소환한 AI에 자리 뺏긴 사람들」, 『메트로신문』, 2024. 1. 15. https://www.metroseoul.co.kr/article/20240115500614. 6) Lakshmi Varanasi, "Big Tech jobs are on the line after Google, IBM, and Dropbox say they're leaning into AI", Business Insider, 2023. 5. 6. https://www.businessinsider.com/dropbox-ibm-google-big-tech-companiesai-in-layoff-memos-2023-5 7) 조재용, 「"챗봇 할인 안내, 항공사 책임" 결정에…에어캐나다, 차액 보상」, 『연합뉴스』, 2024. 2. 16. https://www.yna.co.kr/view/AKR20240216053600009. 8) Astra Taylor, "The Automation Charade", Logic(s) 5, 2018. 8. 1. https://logicmag.io/failure/the-automation-charade/ 9) 이송희일, 「[이송희일의 견문발검] 챗GPT와 디지털 식민지」, 『미디어오늘』, 2023. 2.26.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715. 10) 곽노필, 「대화 한 번에 ‘생수 한 병씩’…챗GPT의 불편한 진실」, 『한겨레』, 2023. 5. 3. https://www.hani.co.kr/arti/science/technology/1090180.html. 11) 곽노필, 「대화 한 번에 ‘생수 한 병씩’…챗GPT의 불편한 진실」, 『한겨레』, 2023. 5. 3. https://www.hani.co.kr/arti/science/technology/1090180.html. 12) 박재령, 「끝맺은 할리우드 파업이 우리에게 남긴 것」, 『미디어오늘』, 2023. 11. 16.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842.
마이크 대신 잡은 피켓, 아나운서의 투쟁기록
  이산하 ubc울산방송 아나운서   2020년 11월 30일, 모든 악몽이 시작됐다. ‘혹시 결혼 계획은 있나?’, ‘(뉴스를 같이 진행하던) 기자 선배가 내려왔으니 같이 내려와야 그림이 좋다’, ‘뉴스를 안 하면 생활이 힘들지 않겠어?’ 이런 것들은 해고 사유가 될 수 없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5년 넘게 진심을 다해 일했던 회사를 떠나야 했던 이유조차 모른다. ‘해고’에 대한 나의 대답은 “왜요?”, 예스맨이었던 내가 회사에 처음 제기한 반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팀장의 괴롭힘이 시작됐다. ‘프리랜서에게 업무지시를 않겠다’, ‘누가 이산하 씨랑 친하냐’, ‘나는 말을 섞지 않겠다’, ‘품질이 떨어진다’라는 말도 들었다. 5년여간 매주 해왔던 취재 업무를 시키지 않았고, 동료 아나운서의 휴가로 인한 대타, 코로나 확진자 정보 등 업무 변경사항을 말해주지 않았다. 홈페이지 내 아나운서 소개란에서 삭제하고, 주말당직을 배제하려고도 했다. 이런 팀장의 괴롭힘을 호소했지만, 돌아온 건 또 다른 괴롭힘과 해고였다. 상무는 ‘딸 같아서 그렇다’고 퇴사를 종용했고, 재평가를 하겠다며 뜬금없이 ‘오독 개수를 세겠다’고 했다. 누군가는 정수기에서 물을 뜨고 있던 나를 치고 가기도 했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걸어 다니라고도 했다. 결국 개편을 이유로, 2021년 4월 2일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해고통지서는 당연히 받지 못했다.   2021년 11월 15일, 복직 첫 날 ubc울산방송에 2015년 12월 기상캐스터로 입사해,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상캐스터, 뉴스앵커, 취재기자, 라디오dj, 라디오뉴스, 리포터, 영어아나운서, 사내행사 진행, 주말당직 등 거의 모든 방송 업무를 수행했다.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도 나의 근로자성을 인정해 원직복직 명령을 내렸고, 회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출근해서 가장 먼저 마주한 현실은 소지품 검사였다. 주머니까지 확인했고, 모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노동위 판정은 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네가 직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막말과 함께 ‘4시간짜리’ 복직명령서를 줬다. 회사는 하루 4시간 단시간 근무에 계약기간을 1년으로 정하거나 ‘적격성이 부족하면 계약해지’ 등 독소조항이 담긴 차별계약서를 제시했다. 또 내가 가진 능력이나 회사가 갖는 기대치를 봤을 때 “최저 시급만 안 주면 된다”고 했고, 지금까지도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책정한 임금을 지급받고 있다. 처음 통장에 찍힌 금액이 140여만 원이었다. 압박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실제로 나랑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상무실로 불려가기도 했다.   9년째 작성하지 않은 근로계약서 2022년 12월, 행정법원으로부터 부당해고 확정판결을 받고도 제대로 된 근로계약조차 맺지 못한 채 여전히 끔찍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오히려 괴롭힘과 고립은 점점 더 심해지는 상황이다. 회사는 지난해 9월, 라디오뉴스를 폐지했고, 12월에는 하나 남았던 날씨 방송마저도 폐지했다. 그리고 1월 5일, 거듭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이전 업무와는 무관한 편집요원으로 일방적인 부당인사발령을 냈다. 여전히 6시간 단시간 근무일뿐만 아니라, 휴게시간은 30분이라 다른 직원들과의 식사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3년 전, 해고를 당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방송을 하지 못하는 명확한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무늬만 프리랜서일 때는 정규직처럼 온갖 방송 업무를 다 시키더니 근로자로 인정받은 지금 오히려 ‘회사에 너의 자리는 없다’고만 말한다. ‘자질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너랑 일하기 싫어한다’ 등의 말로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그리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노동부에 진정을 넣으라’는 뻔뻔한 태도와 ‘편집교육을 받지 않으면, 인사위원회를 열어 또 해고할 수 있다’는 보복성 갑질은 나를 거리에서 1인 시위하도록 내몰았다.   2024년 1월 15일, 회사 앞에서 시작된 1인 시위 회사의 과오를 밖으로 드러내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노동자를 부당하게 해고한 상황을 되돌리고 명확한 계약서를 쓰라’는 법적취지를 거스르고 시대에 역행하는 곳,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방송국이었다. 하지만 방송국은 ‘정의를 말하는 곳’이고, 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 방송 노동자들이 근로자성을 인정받자 방송국은 온갖 꼼수를 부리고 있다. 프로그램별로 진행자를 뽑거나 1년 계약직, 운이 좋으면 2년 계약직이 될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법원에서 근로자성을 인정받았지만, 회사는 ‘말려 죽이기’ 작전을 벌이고 있다. 3년 전 나를 괴롭혔던 팀장은 여전히 팀장 자리에 앉아 있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무뎌지지는 않는다. 부당한 상황에 문제를 제기했더니, 나는 아무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이 되었다. 정규직도 무기 계약직도 아닌 ‘애매한 신분’이라며 노조가입도 거절당했고, 비정규직 동료들은 내가 올린 SNS 게시물에 좋아요조차 누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왜 내가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 진실은 외면당한 채, ‘돈이 목적일 것이다’, ‘언론플레이다’ 프레임이 씌워진 채 나는 오늘도 버티고 있다. 온전한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차별 없이 일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 진실은 승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하는 곳은 진실을 말해야 하는 방송국이니까.
강원도형 최저임금제? 청년들 떠나는데 정신 못차린 강원도
들어는 보았나, 강원도형 최저임금제 누군가 저에게 최근 가장 어이없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고개를 들어 강원연구원을 보라고 할 것입니다. 지난 1월, 강원연구원에서 공개한 정책 자료에 ‘강원도형 최저임금제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여기서 ‘강원도형 최저임금제’는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보다 더 낮은 수준의 임금을 말합니다.   ‘만약 강원특별자치도(이하, 강원도)에 최저임금 지역별 차등제를 도입할 경우, 지역별 경제 상황에 맞춘 최적의 최저임금을 결정할 수 있다. 즉, 다른 지역 대비 낮은 최저임금 설정을 통해 기업들이 강원도 내로 이동할 유인이 발생하고, 이는 지역 내 인구 유입과 지역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강원연구원 정책자료 '정책톡톡' 2024-01  ‘기업천국’을 꿈꾸는 강원의 싱크탱크 해당 자료는 강원연구원 소속 양은모 연구원이 지난 2023년 9월 ‘기업천국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을 옮긴 것이었습니다. 기업에게 천국같은 강원특별자치도를 만들기 위해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세미나에서는 최저임금 뿐 아니라 전기요금, 상속세와 관련한 발제도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저임금 낮추면 기업 온다”…‘기업천국 노동지옥’ 강원?(24.01.17)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강원도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라면, 강원연구원의 정책자료를 꼼꼼히 읽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호기심에 읽어봐야겠다면 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읽는 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을 수 있으며, 화가 치밀어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위험이 있습니다. 심약자는 주의를 요합니다.🥲 <정책 자료 일부 요약> ‘최저임금의 무조건적이고 급격한 인상은 고용주의 고용 부담을 증가시켜 근로자들이 일할 기회를 상실하는 고용 참사를 야기’ ‘단순히 법정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대신 급격한 인상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논의가 증가’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률’과 ‘최저임금 미만율’ 때문에.. ‘높은 수준’의 최저임금 감당이 어려운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저임금 차등 적용 논의가 필요 ‘최저임금 지역별 차등제 도입으로 법정 최저임금 적용이 어려운 기업들뿐만 아니라,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월평균 임금이 오히려 감소하는 근로자들 보호 가능’ 위의 내용에 대해 조사해봤습니다.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인상되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 최저임금 인상률은 ‘급격’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가장 큰 폭으로 인상된 2018년에 비해 최근에는 그래프의 변화가 확연히 적죠. 2017년 대선에서 여러 후보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내걸었던 일이 무색할 만큼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저임금이 1만원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가는 많은 사람이 체감하는 것처럼 꾸준히 증가했는데도 말이죠. 생활을 영위하는 데 드는 지출이 커지는 데 비해 수입이 늘지 않으면 전체적으로 삶의 질이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수준 높은 정책이 필요해😮‍💨 강원연구원의 정책자료가 공개된 직후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1월 8일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강원자치도는 저임금, 소규모 사업장 등 열악한 일자리가 많아 노동 인구의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라며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김진태 강원도지사를 향해 “헛소리에 현혹될 시간에 강원도의 노동자들이 더 안전하고, 더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내놓길 바란다”라고 의견을 전했습니다. 계절처럼 돌아오는 논쟁 아예 우리 지역 임금을 깎자는 제안이 파격적이긴 하지만, 사실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것이 바로 최저임금 논쟁입니다. 지역별/업종별 최저임금 차등제는 지난 2023년 6월, 국회에 관련 법안이 발의되면서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도 노동계에서는 즉각 대응하며 우려를 표했고요. 최저임금을 지자체 별로 결정하게 하자는 의견도 이전부터 있었지만,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최저임금을 설정하기 위해 참고할 통계와 연구 자료부터 마땅치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노동계 일부에서는 경영계에서 자꾸 최저임금 차등제를 언급하는 것이 정말 차등제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저임금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이점을 얻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냥 너의 말이 웃긴다🙂 제 주변의 강원도 거주 청년들에게 강원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들려주자 그들은 실소부터 터뜨렸습니다. “그럼 강원도 왜 살아, 다른 데로 가란 거네.” 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안그래도 강원지역은 유입인구보다 유출인구가 많고 특히 청년층이 많이 빠져나가며 지역 소멸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만, 지역의 중장기 발전 정책에서 청년층 유입을 위한 유의미한 노력은 찾기 힘듭니다. 최저임금이 여러 경제, 사회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만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건 최저시급이 곧 최고시급인 일자리에서 경험을 쌓고 생계비를 벌어야 하는 청년세대일지 모릅니다. 지역 발전과 인구 유입을 필요로 하면서 청년들의 밥줄과도 같은 최저임금을 쉽게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은 청년 세대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요? 👀청년세대가 강원도를 떠나는 이유 누가 남겠는가 강원연구원의 자료에서는 다른 나라들도 지역별 차등 임금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외국 여러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는 지역별 차등 임금제는 최저임금 기준보다 더 높은 임금을 설정하도록 합니다. 안정적인 수익을 원하는 노동자의 유입을 유도하고, 오랫동안 일하며 숙련된 노동자들의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과 지역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죠. 다른 지역보다 지역민의 임금을 깎아서 기업을 유치하려는 목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습니다. 정책 자료에 적힌 ‘발생가능한 문제들에 대해 대책 마련 필요’ 라는 문구는 공허할 뿐입니다. 인구 유출과 지역 낙인효과에 대해 강원연구원은 모르지 않습니다.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기업을 위해 더 낮은 최저임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강원연구원은 강원도민의 생활수준과 기업 유치 중 무엇을 우선과제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경영계가 “소상공인의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차등화를 요구하는 것은 한국적 본말전도 현상이다. 기업이 살기 위해서 사람이 삶의 일부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최저임금은 모든 기업이 지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최저치이다. 청년 구직자 희망 꺾는 '최저임금 차등적용(23.06.15) 강원연구원은 기관의 설립 목적을 ‘지역단위의 정책개발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지역경제·사회발전에 기여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기업천국세미나’ 뿐 아니라 ‘도민천국세미나’ 같은 행사도 주기적으로 개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공공기관으로서 소임을 다 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현실을 직시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지역발전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 지역에 누가 남겠습니까.
[6411의 목소리] 마봉춘씨, 전화 한통으로 10년 인연을 정리하자고요?
[6411의 목소리] 마봉춘씨, 전화 한통으로 10년 인연을 정리하자고요?  (2022-06-01) 리리(필명) | 방송작가 방송작가유니온 조합원들이 2017년 11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작가도 노동자임을 강조하는 큐시트를 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신을 만나러 가던 어느 봄밤, 터널을 빠져나오던 내 차가 빗길에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어요.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에 눈을 질끈 감았고, 사방에서 터진 에어백이 가차 없이 내 몸을 강타했죠. 4차선 도로 양쪽 가드레일을 여러차례 들이받던 그때, ‘방송사 보도국 작가로 매일 여러 사건·사고를 접하던 내가 오늘은 직접 뉴스에 나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연거푸 부딪혀 소생 불가한 차에 의미 없이 시동을 걸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광고 사고를 목격한 다른 차량 운전자가 내게 다가오고, 다음엔 경찰이, 그다음엔 소방관이 다가왔어요.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마봉춘씨,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럴 수 없다고 했어요. 그 전 여름 정규직도 아닌데 휴가를 간다니까 ‘네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가면 어떡하냐’고, ‘네가 돌아왔을 때 책상이 없어졌으면 어떡하냐’고 되묻던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에요. 새벽 방송을 하면서부터 나는 매 순간 요일과 시간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5분을 포기하면 단신 기사 하나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고, 1분이면 원고를 들고 100m쯤 떨어진 스튜디오까지 뛰어갈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광고 광고 일주일 가운데 일요일 하루만큼은 알람을 꺼놓고 잘 수 있지만, ‘혹시라도 요일을 착각해 당신에게 가지 않는다면?’ 하는 상상은 너무나 두려웠어요. 언젠가 일요일을 월요일로 착각하고 당신에게 달려간 적이 있어요. 새벽에도 늘 깨어 있는 보도국에 아무도 없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요일임을 확인하자 난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어요. 그런데 마봉춘씨, 그거 알아요? 바보 같은 그런 행동은 나만 한 게 아니더라고요. 나와 한 팀이었던 ㄱ씨는 쉬는 날인지도 모르고 새벽 3시에 자다 말고 택시를 탔고, 리포터 ㅈ씨는 대낮에 새벽인 줄 알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대요. 나도, 그들도 마봉춘씨와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가끔은 제시간에 기사를 송고하지 못하는 악몽을 꿔 괴롭기도 했어요. 그렇게 나의 30대 전부를 마봉춘씨 당신과 함께했어요. ‘정규직보다 더 정규직 같다’는 당신의 뼈 있는 농담에 웃어넘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고, 성과금은 없어도 시청률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나의 노력이 보상받은 것 같아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죠. 그사이 수많은 동료가 마봉춘씨를 떠나갔어요. 누군가는 계약이 끝나서, 누군가는 개편으로 자리가 없어져서, 때때로 시청률 부진을 이유로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는 경우도 있었죠. 그때마다 마봉춘씨는 참 냉정했고 떠나는 사람은 담담했어요. 5년이나 일했지만 일주일 전에야 해고를 통보받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리포터를 지켜보며, 난 처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어요. 언젠가 해맑게 웃으며 그녀를 부탁하던 그녀의 어머니가 떠올랐거든요. 광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이번엔 내 차례가 됐어요. 수화기 너머로 당신은 말했죠.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생각지 못한 상황에 난 그저 당신의 말을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선심 쓰듯 ‘한달이나 유예기간을 줬으니 할 만큼 한 것’이라는 말, 10년 동안 쌓아온 인연이 끝나는 순간치고는 너무나 허탈했어요. 우리의 마지막 날, 마봉춘씨 당신은 내게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지자고 했지만 차마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2년이 지났네요. 난 여전히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고, 당신이 돌아오라고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여전히 날 아프게 하지만, 우리에게 좋았던 날도 난 기억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마봉춘씨, 사람들은 당신을 ‘만나면 좋은 친구’라고 하던데, 이제는 내게도 좋은 친구가 돼줄 순 없나요? *필자는 입사 10년차인 2020년 여름 <문화방송>(MBC) 쪽의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고 부당함을 호소하다가 이듬해 3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방송사 작가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방송은 중노위 결정을 따르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오는 7월14일 1심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6411의 목소리] 세탁·수선도 최선을 다하니 알아주는 이들이
[6411의 목소리] 세탁·수선도 최선을 다하니 알아주는 이들이  (2023-12-25) 이정숙 | 세탁소 운영 드라이클리닝 한 바지를 스팀다리미로 다리고 있는 필자. 필자 제공 17살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50년이 되었네요. 충남 보령시 대천에서 6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이모가 계신 전북 군산에서 중학교에 다니기 위해 혼자서 고향을 떠났어요. 야간 중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양재학원에 다녔는데, 3개월쯤 뒤 이종사촌 오빠가 일류 재단사로 일하던 군산에서 가장 큰 의상실에 취직했어요. 미싱사 선생님 밑에서 단을 꿰매고 끝마무리하는 하급 일부터 시작해 주머니와 옷깃에 싱(빳빳하게 만들기 위해 넣는 재료)을 붙이는 중급 일을 거쳐 모든 재료를 준비해서 미싱사를 돕는 상급 일까지, 4년 동안 일 배우고 중학교를 졸업했어요. 그 뒤 몸이 아파 일 그만두고 고향집에서 3개월 정도 요양하고 겨우 나았습니다. 광고 배운 게 의상 일이라, 다시 이종사촌 오빠가 군산에 차린 의상실에서 일하며 재단까지 배웠어요. 장사가 되지 않아 의상실이 문을 닫게 되자, 고모가 계신 서울로 올라와 다닐 만한 양장점을 물색했어요. 처음 다닌 양장점은 일이 너무 많아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새도 없었어요. 다시 병이 생겨 잠시 쉬다가 다른 양장점을 다녔는데, 재단만 할 줄 아는 주인 밑에 일하는 사람은 나뿐이라 여기서도 거의 모든 일을 해야 했지요. 그렇게 여러 의상실을 전전하다가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서 의상실을 열게 됐습니다. 그때가 22~23살 정도 됐을 거예요. 10년 넘게 의상실을 하면서 고향 부모님께 돈도 보내드리고, 동생들도 서울로 데려와 학교에 다니게 하면서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의상실을 접었어요. 하지만 몇년 뒤 다시 일을 시작했지요. 아이들 학비와 학원비를 벌어야 했거든요. 그렇게 수선을 겸한 세탁소 일을 시작해 20년 넘게 하고 있네요. 광고 광고 요즘 같은 겨울에는 패딩과 코트, 양복이 가장 많이 들어옵니다. 먼저 오염이 된 부분을 전처리하죠. 오염물질에 따라 각기 다른 약품을 이용해서요. 그 뒤에 물빨래할 것은 고급 세제로 손빨래를, 드라이클리닝 할 것은 클리닝용 기름을 써서 기계에 넣고 세탁해요. 와이셔츠와 바지는 4천원부터, 코트나 패딩, 이불은 1만5천원부터 세탁비가 매겨져요. 성수기는 겨울옷을 정리하는 봄입니다. 비성수기에 하루 5~10벌 들어오던 게 이때는 20벌 정도 들어옵니다. 보통 오전 10시 반 정도 출근해 저녁 8시까지 가게에 있어요. 이렇게 일해서 어느 정도 생활은 가능하지만, 돈을 모으는 건 불가능해요.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하는 거지요. 나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월세로 전체 수입의 50%가 나가고, 각종 약품, 세제, 옷걸이, 비닐 커버와 같은 재료비가 10~20%예요. 광고 한동네에서 20년 넘게 세탁소를 해왔으니 단골손님이 많지요. 하지만 주택재정비 공사로 이사한 사람이 많고, 코로나에 셀프빨래방까지 생기며 운영이 쉽지 않아요. 정장 대신 편한 옷을 입고 출근하는 이들이 많아져 세탁소에 옷 맡길 일은 더욱 줄어들었지요. 대신 맞벌이 가정은 시간이 없어 세탁소에 옷과 이불을 맡기는 경우는 많더군요. 옷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손님이 많은 게 제일 힘듭니다. 찾아가지 않은 옷으로 세탁소가 가득 차,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길만 겨우 남겨졌을 정도예요. 그런 분들은 유독 선금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크고, 길에서 만나면 찾으러 오겠다고 말해놓고도 안 오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길게는 7년 만에 찾아간 경우도 있어요. 예전에는 무조건 기다렸는데, 요즘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일부는 버리고 쓸 만한 것은 기부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좋은 일도 많았어요. 다른 세탁소에서 빼지 못한 청바지의 페인트 자국을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빼 드렸더니 손님이 무척 기뻐하는데, 아주 뿌듯했어요. 다른 세탁소에선 제거하지 못한 흰옷 얼룩을 빼 드렸더니, 고맙다며 수고비를 더 주고 가시는 분도 있었지요. 좋아하시는 손님을 보니 저도 너무 즐겁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 손님은 나중에 따님도 저희 세탁소에 옷을 맡기게 하셨어요. 성심성의껏 일하면 알아주시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면 인정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리: 강명효 ‘6411의 목소리’ 편집자문위원 노회찬재단  후원하기 http://hcroh.org/support/ '6411의 목소리'는 한겨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캠페인즈에도 게재됩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