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소네트 2024> 연극
<셰익스피어 소네트 2024> 연극 06.23.24 이번 연도 첫 연극으로 <셰익스피어 소네트 2024>를 보게 되었다. 벌써 일 년의 반이 지난 시점에서의 첫 연극이라니, 시간이 참 빨리 간다. 오랜만에 연극을 보러 가서 설레는 마음 가득 앉고 안산으로 갔다. 연극을 예매하면서도 신기했던 건, 걸어가면서 연극이 진행된다는 점과 연극의 시작과 끝이 다르다는 점이다. 보통 연극은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기 때문에 걸어가는 방식이 독특하게 다가왔다. 또 실내 공연장이 아닌, 야외를 장소로 삼았다는 점도 새로웠다. 일기예보에는 비가 75% 확률로 온다는 소식에 걱정과 기대로 뒤섞인 상태로 안산을 향해 갔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 구름을 조금만 눌러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고잔역에서 천천히 걸어가, 출발 장소인 안산산업역사박물관 입구에 도착했다. 처음에 도착했을 때 살짝 당황스러웠다. 정말 이 나무 밑에서 모이는 게 맞겠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이 아무도 안 오길래 더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메시지에 보낸 사진과 같은 장소였고, 작은 노란 천막이 있어서 그곳에서 기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연극은 한 명 또는 두 명을 위한 연극이었다. 동행할 배우 한 분과 관객은 한 명에서 두 명이라니. 이런 연극은 진짜 처음이다. 연극은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시작해 안산올림픽기념관 체육관에서 끝났다. 배우님은 연기를 하시기보다는 나레이션으로 상황을 묘사하고 설명해 주셨다. 연극은 생명안전공원이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월호참사 5주기에 생명안전공원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세월호참사 9주기에는 안산시민들의 반대가 컸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지금 세월호참사 10주기에는 생명안전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연극을 진행해 주신 배우님은 생명안전공원은 애도할 수 있는 공간, 슬퍼해도 괜찮은 공간, 느끼는 감정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모두를 위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또 한꺼번에 사라진 304명을 증명하고 실재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공원의 가장 중요한 장소를 ‘봉안당’이라 한다.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다. 대부분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만, 죽음도 삶의 일부이다. 삶의 일부인 죽음을 우리는 떼어놓고 있지만, 어쩌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간단한 공원의 설명이 끝나고 우리는 배우분을 따라 길을 걸었다.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를 영상으로 담아보았는데, 영상첨부가 안 되어서... 아쉽게 올리지는 못했어요...) 걷다 보니, 메아리처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한 스피커에서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리고, 애타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리고 있다. 다양한 감정과 톤으로 이름을 부르는 걸 들으니,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꼈다. 이름이 불리고 있다는 것. 그건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이 공원이 이들을 존재하게 해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왜 304명의 이름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이 계속 들었다. 풀밭 속에서 걷다가, 강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가족들이 함께 산책하러 나오기도, 애인과 운동하러 나오기도, 반려견과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호등도 지나고, 학교도 지나고, 아파트도 지나 체육관에 도착했다. 일상이 무대인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체육관이다. 텅 빈 체육관에는 책상과 의자뿐이다. 책상에는 시와 간단한 안내가 붙여져 있고, 시가 스피커로 낭송된다. 낭송이 끝난 다음에는 연극을 관람하는 우리가 읽어야 했다. 그다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 시를 읽는 게 스피커로 틀어졌다. 도돌이표 노래하듯, 계속 반복되고 마지막에는 낭송하는 우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람자는 연극에서 배제되어 있기 마련인데, 관람자 또한 연극에 포함이 되는 게 색달랐다. 시의 내용은 배우자가 처음에 생명안전공원을 설명했었을 때 쓴 표현이 들어간다. 시의 제목은 나무이고, 내용은 모두의 복음자리이던 나무가 베이게 되는 것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담겨 있다. 시는 모두에게 이로웠던 나무를 베어 넘기려는 나무꾼과 그러한 나무꾼을 말리지 않는 우리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한다. 마지막에는 추억을 지키기 위해서는 밑동만 남았을지언정, 끌어안으라고 한다 나에게 이 시에서 가리키는 나무는 304명의 희생자 같았다. 누군가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누군가와 함께 웃고 웃었을 사람들이었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지만, 그들을 추억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끌어안고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이 생명안전공원이라고 들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사, 죽음, 어둠, 그림자를 멀리하고 불미스럽다고 여긴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일부라는 것. 결국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연극은 1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연극치고는 짧았지만, 큰 여운이 남는 연극이다. 색다른 장소와 장치의 역할과 의미가 궁금해지고, 시가 계속 맴돈다. 연극 소개는 이 링크를 타고 가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ieum.or.kr/user/show/view.do?idx=1377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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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국제 심포지움] 세월호참사 10년, 진실 책임 생명 안전을 말하다
[4.16 국제 심포지움] 세월호참사 10년, 진실 책임 생명 안전을 말하다 국제 심포지움 개최 4.16재단, 세월호참사 10주기위원회, 참여사회연구소는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아 6월 20부터 21일간 4.16 국제심포지움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움은 국내외 재난참사 이후의 양상을 비롯하여 세월호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과 사회의 변화 등을 살펴보고 생명과 안전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자리이다. 시민과 함께 걸어온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갈 시간을 함께 계획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국제 심포지움 1일차 일정 6.20 (목) - 개회 박승렬 4.16재단 이사장, 세월호참사 10주기위원회 공동상임위원장 김종기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세월호참사 10주기위원회 공동상임위원장 오혜란 4.16연대 공동대표 - 기조발제 재난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 더글러스 러미스 오키나와 국제대학 교수, 래디컬 데모크라시 저자 박래군 4.16재단 운영위원장 - 세션 1 재난 참사 피해자의 권리보장 현황과 과제 유해정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센터장 박희정 인권기록센터 ‘사이’ 기록활동가 김민환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부교수 시모무라 세이지 아카시 육교 압사 참사 유가족 앤 에이어 힐즈버러 참사 생존자, 집단 트라우마 센터 공동센터장 - 세션 2 애도와 기억의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 정원옥 문화과학사 문화사회연구소 대표이사 이태호 세월호참사 10주기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옐레나 왓킨스 911테러 참사 유가족, 집단 트라우마 센터 공동센터장 강희숙 조선대학교글로벌인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문학연구원 재난이문학연구사업단장 4.16 국제 심포지움 중 1일차 오후 1시부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었다. 기조발제는 세월호참사 10년 후와 안전을 외면하는 국가를 넘기 위하여라는 주제로 두 발제자의 발표가 진행되었다. 기조발제에서 더글러스 러미스님의 말씀 중 “We have a life to live in equal”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점심식사 시간을 가진 뒤, 세션 1과 세션 2가 진행되었다. 세션 1은 재난 참사 피해자의 권리보장 현황과 과제에 대해 발제했다. 총 5발제 중 2발제는 국외 재난 참사, 3발제는 국내 재난 참사로 다양한 사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첫 번째로는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센터장 유해정님의 세월호참사 피해자 운동과 재난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발제가 진행되었다. 유해정님은 세월호참사 전과 후로 대한민국의 재난참사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세월호참사 전에는 개개인 혹은 지역으로 범위가 작았다면, 세월호참사 이후에는 전국민적 범위로 커졌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가장 큰 이유로는 생중계로 전달되었다는 점을 짚으셨다. 재난참사가 전국민적인 트라우마로 커지면서 재난참사를 바라보고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실종자가 아닌 미수습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국가가 수습을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해지역이라는 단어가 생성되기도 했고, 피해구제가 아닌 피해자권리보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전국적인 움직임은 재난피해자권리센터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는 세월호참사를 넘어서서, 국내 9 재난참사 피해자와 함께하고 있다. 현재까지 센터에서는 피해자 권리 개념화, 피해자 권리 매뉴얼 작성, 재난피해자 지원, 재난피해자권리인식교육 등 다양한 곳에서 활약을 보인다.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시작되긴 했지만, 아직 보장받지 못하는 권리들이 있고, 8번째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후퇴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앞으로 보장받지 못한 피해자 권리와 퇴보하고 있는 현상을 되돌리기 위해서 힘을 쓴다고 하셨다. 세월호참사 이후부터 기록활동을 하게 된 인권기록센터 ‘사이’ 기록활동가 박희정님이 두 번째로 발제했다. 박희정님은 10년간 세월호 유가족들의 활동을 정리하고 활동으로 인한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활동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 시민과 피해자 세월호참사 초반에는 서명운동, 진실버스, 도보행진으로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은 시민과 대면하면서 시민-유가족의 결속력이 높아졌다. 특히 광화문 세월호 농성 천막을 중심으로 결속력은 급속하게 단단해졌다. - 문화예술활동과 피해자 문화예술활동은 다양한 벽들을 허무는데 기여했다. 416공방은 함께 만들고 대화를 하면서 유가족들이 마음을 열고, 다시 사회로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만들었다. 또한 대화는 생존자가족과 유가족간의 관계가 개선하기도 했다. 노란리본연극단과 416합창으로 시민들을 만나게 되면서 피해자다움 즉, 피해자는 슬퍼야하고 우울해야하고 화나 있어야는 선입견을 깼다. 416목공협동조합은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기 위한 목공품을 만들고 판매하면서 참사를 기억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꿈숲학교, 전시회 등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 기록하는 피해자 참사 초기부터 정부는 세월호참사에 대한 기록을 없애려는 행동들을 해왔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자료실을 만들어서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기록들을 보관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록을 보관하기 위해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쌓아놓는 기록이 아닌 읽히는 기록”을 만들고 싶다는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재난피해자의 기록이 담긴 책, 「502번의 금요일」이 출판되기도 했다.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부교수 김민환님은 기억공간의 달라진 형태와 생명안전공원의 형성 과정에 대해 발표해주셨다. 세월호참사 전의 기억공간은 정해진 장소에서 일시적으로 기억한다는 의미와 가까웠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기억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전과 같은 방식의 기억공간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많은 고비를 거쳐야 했다. 부지 선정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세월호 추모공원 건립 계획이 확정되어서, 추모공원에 대한 워크샵이 진행되었다. 워크샵에서는 추모공원에 대한 시민 지침서를 만들었고, 거의 대부분의 의견이 반영이 되었다. 건립 계획은 확정되었지만, 안산시와 약속한 10주기 건립이 지켜지지 않았다. 김민환님은 생명안전공원 건립이 잘 이루어지길 바라며, 계속 힘을 쏟는다고 하셨다. 세션 1의 마지막 두 발제는 국외 재난참사 유가족과 생존자의 이야기다. 아카시 참사 유가족 시모무라 세이지님과 힐즈버러 참사 생존자 앤 에이어님이 이번 국제 심포지움을 위해 먼 발걸음을 해주셨다. 시모무라 세이지님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재난참사에 대한 대한민국의 활동에 놀라셨다고 한다. 지역 콘서트나 강의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유족들이 모여서 추모식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는 ‘기억의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국에서의 활동을 많이 본받아야겠다고 밝히셨다. 시모무라 세이지님은 유족지원과 피해자지원을 위해서 오랫동안 싸워, 유족지원센터를 만들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주셨다. 정부에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된 상태에서 유족지원이 가능하게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또한 그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1년간 유족지원에 대한 유가족들의 의견을 취합해 반영했다. 유족지원센터가 건립이 되었지만, 해결할 문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계속 싸우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발제를 끝내기에 앞서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강조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말씀하셨다. 앤 에이어님은 힐즈버러 참사가 영국에서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지에 대한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힐즈버러 참사는 이태원 참사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태원 참사처럼 참사피해자의 잘못으로 비난받았고,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었다. 다행히 20주기 추모제에 참여한 의원의 관심을 계기로 참사의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앤 에이어님은 세 가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1. Be careful what we wish for. Because truth did not make me better. 2. Truth does not bring justice, but without truth there is nothing. 3. Truth is precious for wide well being of society. 진실은 밝혀졌지만, 진실이 바로 정의를 실현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실이 없다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 전반의 안전을 위해서는 진실이 꼭 필요하다고 하셨다. 앤 에이어님은 집단 트라우마 센터 공동센터 공동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듯 피해자권리에 대한 투쟁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이다. 5분의 발제가 끝난 후 토론 및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 세션 2가 진행되었다. 세션 2는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애도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로 진행되었다. 911테러 참사 유가족 옐레나 왓킨스님은 온라인으로 발표를 진행했다. 옐레나 왓킨스님은 외국인 유가족으로 정보가 부족해서 참사 당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렇게 옐레나 왓킨스님은 영국 내에 유가족 모임을 진행하게 되었고, 공동체 재난 대응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옐레나 왓킨스님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기념관 및 박물관에 유족 물품과 사진을 기부했다고 한다. 그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지만,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했다고 의사를 밝혔다. 옐레나 왓킨스님은 집단 트라우마 센터 공동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문화과학사 문화사회연구소 대표이사 정원옥님의 발제가 있었다. 정원옥님은 비당사자 운동이 세월호참사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처음 일어났다고 한다.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사회운동의 주변부에 있던 이들이 중심이 되었고 정치에 무관심했던 평범한 사람들이 주체가 되었다. 반면에 혐오 발언이라는 현상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하셨다. 정원옥님은 혐오에 맞서기 위해서는 당사자성을 넓혀야 한다고 했고, 애도와 정동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동 : 감정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인 것이라는 이론 /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이론 마지막으로 이태호님과 강희숙님의 발제가 있었다. 재난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리베카 솔닛의 해석으로 재난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난으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 1일차 4.16 국제 심포지움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1일차와 2일차 국제 심포지움은 유튜브 생방송으로도 진행이 되었으니, 아래 첨부된 영상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이번 국제 심포지움을 계기로 앞으로도 더 많은 장이 있기를 바란다. 4.16 국제 심포지움 1일차   4.16 국제 심포지움 2일차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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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기 효순미선 추모제 : 2002년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하나요?
효순미선 사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 2002년은 월드컵으로 한창 대한민국이 뜨겁게 달아있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불평등한 한미관계로 중학생들이 압사되었던 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2002년 6월 13일,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이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신나는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커다란 미군 장갑차가 효순이 미선이 쪽으로 다가왔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걷고 있던 길은 폭이 아주 좁아 장갑차가 지나가기에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갑차는 그 길을 지나갔고, 그대로 두 학생은 현장에서 순식간에 장갑차에 의해 압사되었다. 놀랍게도 가해미군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미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갔다. 국민들은 누구도 이 무죄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밖으로 나와 행진했다. 당시 사람들은 탱크라도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수 십만명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함께 행진을 한 2002년이었다. 이 사건이 왜 불평등한 한미관계까지 연결되는 걸까?  SOFA에 따르면, 미군은 전속적 관할권을 가지고 있다. 미군과 관련된 범죄가 일어날 경우, 미국 법률에 의해서 처벌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효순미선사건도 마찬가지로, 미 군사법정에서 군사재판이 열렸다. 또한 군사재판은 모두 미국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구조이다. 결국 재판은 과실사고로 무죄판결로 끝났다. 분명 미군의 잘못임에도 사과와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과 한국간의 불평등한 SOFA이고, 더 나아가 불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2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슬프게도 달라진 건 없다.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와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매 주기마다 효순미선 추모제를 효순미선평화공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효순미선을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써 불평등한 관계를 생명중심의 관계로 변하는데 힘을 쓰고 있다. 또한 평화공원 옆에 기록관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22주기 효순미선 추모제 추모제에는 각 시민단체를 비롯한 종교계와 청소년이 참석하여 150여명이 함께 추모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추모제에서는 평화공원사업위 권정호 변호사님의 추모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그를 이어서 미국 평화재향군인회 회원 두 분의 심정과 생각을 나누었다. 엘리 애덤스는 베트남전쟁 당시 파병되었던 군인으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했고  그 이후로 평화운동을 시작하셨다. 또 앨런 바필드는 1980년에 평택 캠프 험프스에서 복무하며, 광주항쟁 당시 주한미군에 대한 증언을 하셨다. 각자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셨고,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 바라며, 효순이와 미선이를 기억하겠다고 하셨다. 발언뿐만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공연들도 있었다. 밴드 두번째 달과 가수 하림의 공연이 있었다. 가수 하림은 5.18 피해자의 유족으로 이 자리에 함께 오게 되었다고 한다. 두번째 달은 아름다운 선율을 담은 '서쪽하늘에'를 연주했고, 가수 하림은 '위로'라는 곡을 불렀다.  마지막 순서로는 청소년의 발언과 합창이 있었다. 숲나학교 학생 진영인과 산마을학교 학생 박현의 발언이 있었다. 두 학교 모두 기록관 건립을 위해 반딧불이로 활동하고 있다. 숲나학교 학생들의 합창으로 이번 22주기 효순미선추모제를 마무리했다. 담쟁이라는 곡으로, 담을 넘자라는 문장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곡의 문장처럼, 어렵고 힘든 이 여정을 함께 기억하고 행동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관련 뉴스를 참고하시면 더 많은 정보들을 알 수 있습니다. 효순·미선 22주기 추모제…“한반도 평화 실현, 촛불정신 완성하는 길” (naver.com) 22년 전 효순∙미선 기억하십니까…기록관 건립 추진 [만리재사진첩] (naver.com)
한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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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래디컬 데모크라시」 : 참사에는 어떤 민주주의가 필요할까?
「래디컬 데모크라시」 : 참사에는 어떤 민주주의가 필요할까? 북토크 2024년 5월 22일 (수) 19-21시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던 5월을 맞아,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재난피해자권리센터에서 북토크를 진행했다. 이번 연도에 출판된 한국판 「래디컬 데모크라시」를 중심으로 재난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래디컬 데모크라시」의 역자 하승우 선생님과 진행자 유해정 선생님과 함께 북토크를 진행했다. 「래디컬 데모크라시」는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로 많이 알려진 더글러스 러미스의 저서다. 책이 나온 지는 28년 만에 한국어판이 나오게 되었다. 책의 수요가 많지 않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북 펀딩을 통해 2000만 원 목표 금액을 달성하여 「래디컬 데모크라시」 한국어판이 나올 수 있었다. 요즘은 200만 원도 도달하기 싶지 않은데, 어마어마한 결과이다. 28년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북토크 1부에서는 유해정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질문들을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고, 2부는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1부와 2부 모두 Q&A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주요 Q&A를 담아 보았다. (하승우 선생님과 유해정 선생님의 이야기를 토대로 적었지만, 워딩이 다를 수 있다는 점 유의 부탁드립니다.) Q. 「래디컬 데모크라시」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한국에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이 저서가 유명하나 보니, 그 외에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주세요. A. 더글러스 러미스는 훌륭한 지식인입니다. 정치학을 전공했고, 반전운동 평화운동에 앞장서서 행동하는 지식인입니다. 민주주의 이론을 배우기 위해서 필리핀을 간 그의 행동이 굉장히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배우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민중이 활동하는 곳, 옛것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가야 했기에, 여러 나라 중 필리핀을 선택했습니다. Q. 래디컬 데모크라시란 무엇인가요? (개념적으로) A. 더글러스 러미스 선생님은 민주주의를 ‘state’로 봅니다. 민주주의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개념과 제도 같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출렁거리는 불안정한 상태로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건 민중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결정권을 가진다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정권을 가진 민중이 누구냐도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가진 민중이 권력을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포퓰리즘과 같은 형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공공성을 가진 민중들이 같이 결정을 내리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출렁거리는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출렁거리는 상태를 언제든 만들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책이 출판된 지 28년이 지났는데도 의미가 있나요? A. 여전히 울림이 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가 바뀌지 않아서 그런지 책이 말하는 이야기가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성장 이데올로기에 빠져있기 때문에, 무한한 발전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장은 파괴와 공존합니다. 이 책의 핵심은 결국 성장이 무엇을 파괴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됨을 바로잡으려면 타협이 아닌, 뿌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책의 말처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Q. 「래디컬 데모크라시」에서 하승우 선생님이 꼽은 문장들이 세 개가 있더라고요. 왜 이 문장들을 뽑았는지 이야기해주세요. 근대화와 발전은 결코 빈곤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대화와 발전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관계를 합리화(rationalization) 하는 것을 뜻한다. 164pg 민주주의는 어떤 존재일 수 있다는 말로 민주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행해질 수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370pg “당신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폐기물이 2만 5천 년 동안 위험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누가 관리하나요?” “물론 미국 정부죠.” “당신은 2만 5천 년 동안 지속된 정부가 있었는지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안내인은 싸늘한 눈빛을 보내며 대답을 거부했다. 239pg A. 첫 번째 문장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많이들 근대화를 동전과 같이, 앞면은 발전이고, 뒷면은 빈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앞면과 뒷면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면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동일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발전과 빈곤이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써 민주주의가 가능해집니다. 두 번째 문장은 민주주의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한나 아렌트도 말하듯이, 민주주의에는 인간이 행하는 것입니다. 참여를 통해서 민주주의가 만들어져 갑니다. 그 외의 것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내용은 더글러스 러미스 선생님 친구와 나눈 내용입니다. 짧은 대화를 통해서 전문가·국가와 시민의 관계성을 볼 수 있습니다. 시민들이 폐기물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폐기물로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국가에 말하면, 전문가들은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엔 그 강도가 너무 약하다고 주장합니다. 전문가의 말들은 이 고통을 개인의 책임과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끔 만듭니다. 그렇게 시민들은 대상화됩니다. 실제 피해를 겪지 않는 전문가 집단이 주요 결정권을 가지게 되는 셈입니다. 재난도 이와 같은 형태로 보입니다. 조사위가 만들어져도, 실제 피해자는 배제가 됩니다. 또한 시스템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파악할 수 없어서, 피해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수 있는 곳이 없어집니다. + 마지막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어제 10.29 희생자 유가족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한 아버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10.29 참사가 일어났을 때 아버님이 기자들과 사람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나요?’라고 물었을 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자신을 향한 시선은 냉랭하고 차가웠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선들과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가해자는 아닌가, 사회의 무리를 내가 만들었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유해정 선생님의 생각) Q. 책에서 스리마일섬의 핵 사고 후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이야기가 적혀 있어서, 현재 스리마일섬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에 인터넷에 찾아보았습니다. 현재로는 스리마을섬에 핵발전소가 운영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반대하던 시민들이 결국에는 찬성을 하게 된 것인데, 왜 이러한 상태가 되었는지 궁금했어요. A. 전에는 나의 자손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해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지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쓸모없는 공간인데, 적절한 선에서 타협해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한 것 같습니다. 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땅이 의미 있는 공간으로 남아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공간이라는 “공동 감각”을 불러일으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수가 가지고 있는 감각에 따라서 상황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공동 감각은 같이 모여서 이야기할 때와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할 때 시작됩니다. 그렇게 범위를 넓히고, 밖으로 이야기가 나아갈 때 출렁이는 상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기자회견과 언론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계속 사용해 왔는데, 이것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들을 찾아가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사람들과 어떻게 접촉할 것인지, 사람들과 어떤 매개로 소통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사회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Q. 재난과 민주주의의 연관성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A. 성장을 위해서는 안전과 생명을 포기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을 놓치게 되는 것이죠. 제가 이 책에서 또 좋아하는 문장이 있는데요. 바로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연애나 친구를 사귈 때는 빠르게 만나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관계를 맺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가. 이 책의 내용처럼 효율성은 어쩌면 학습된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기계를 멈춰야 하는데, 우리는 인간을 교체합니다. 감각적으로는 기계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감각이 작동을 못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에게는 작업중지권이 있다고 해도 사용할 수 없다면, 노동자는 작업중지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기계를 멈추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통제할 권한이 노동자에게 없는 이 현실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곳에 있는 관리자 또는 사람들이 통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재난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정치, 언론, 환경, 교육 등 다양한 논의들이 이야기되는 시간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퇴보되고 있는 시점에서, 민주주의란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를 알아가는 시간으로써 의미가 있었다. 어떠한 민주주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알아가고 싶다면, 래디컬 데모크라시라는 책을 추천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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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에서 10.29이태원참사까지> 재난피해자 권리보장을 위한 정책포럼
이번 정책포럼은 재난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해 기획된 연속포럼의 첫 번째 포럼이다. 1부 ‘재난보도와 사회적 과제’와 2부 ‘진상규명과 국가의 역할’로 진행되었다. 여섯 분의 발제자는 10년간 재난 참사를 대하는 국가 및 언론의 태도와 재난피해자 권리 보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짚고,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나아야가야 할지에 대한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장시간 진행되는 포럼임에도 많은 분들께서 참여하였다.   본격적인 정책포럼에 앞서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박진님,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이정민님과, 4.16재단 이사장 박승렬님의 인사말이 있었다.   1부 재난보도와 사회적 과제 1부에서는 재난보도에 관해 심도 있는 담론이 진행되었다. 총 세 분의 발제가 진행되었고, 마지막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발제 1 : 세월호 10주기, 언론은 무엇을 보도하고 있나?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소장 김언경님은 4.16 언론 보도 분석의 실태조사를 설명하고 비평하였다. 김언경님은 뉴스 분석 서비스 빅카인즈를 이용해 언론 보도 분석을 진행했다. 4.16참사 보도량 분석, 세월호 10주기 특집 보도와 사안별 보도 비평으로 나누어서 설명해주었다. 4.16참사 보도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추세지만, 세월호 주기가 되면 다시 보도량이 증가하는 걸 알 수 있고 한다.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주요 언론사는 특집 보도를 내놨다. MBC는 4월 16일부터 9건의 보도를 세월호 10주기에 할애하며 적극성을 보이는 걸 알 수 있다고 하셨다. SBS는 세월호참사 관련 댓글을 빅데이터로 분석하여 여전히 세월호참사에 대한 혐오표현이 끊이질 않는 상황에 대해 다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김언경님은 SBS의 댓글을 통한 혐오표현 지적이 독보였다고 한다. 악성 댓글을 통해서 2차 피해가 생겨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끔 하기 때문에 더 많이 다루면 좋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KBS는 다른 방송사들과 비교했을 때 세월호 10주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해상 안전불감증’을 부각하는 보도를 다루면서 세월호참사를 국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느껴지게끔 한다고 지적하셨다. 김언경님은 세월호 10주기 보도자료의 내용에 대한 아쉬움도 자아내셨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권고사항과 생명안전기본법과 관련된 보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불어 반복되고 있는 사회적 참사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지원 특별법 개정에 대한 부실한 보도를 지적하셨다. 마지막으로 김언경님께서는 KBS의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불방을 예로 들며, 방송장악의 폭력적인 현실을 비판하며 마무리하였다. 발제 2 : 미디어를 통한 간접외상에 대한 탐색적 연구 연세대학교대학원 상담코칭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영주님의 발표가 두 번째로 이어졌다. 이영주님은 이태원참사 뉴스 노출에 대한 탐색적 연구를 통해 간접외상을 겪는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정서적, 인지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더불어 간접외상의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는 요인들을 밝혀내고 그 결과를 통해 정신건강에 도움을 줄 방안을 탐색할 예정이라고 하셨다. 연구자로써 간접 외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잘못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한다. 이 연구를 통해서 뉴스에서 일어나는 재난 관련 뉴스의 노출이 심리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밝혀주는 토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셨다. 이영주님은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에 대한 위로’라는 키워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89문항의 설문조사와 심층적 설문조사를 통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밝혔다. 이번 년도에 연구를 완성하여 국제포럼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발제 3 : 언론의 세월호참사 보도에서 이태원참사 보도까지  1부 마지막 순서로 세월호참사 현장기자였던 시사IN 기자 김은지님의 발제가 있었다. 김은지님은 세월호참사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와 어떤 변화가 더 필요한지 설명해주셨다. 세월호참사 보도의 문제를 5가지로 나열하였다. 사실 확인이 부족한 받아쓰기식 보도, 비윤리적이고 자극적·선정적인 보도, 권력편향적 보도, 본질희석식 보도와 기사회하지 않은 누락된 보도 혹은 의미가 축소된 보도로 분류하여 설명하셨다. 피해자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고, 특조위 세금도둑·폭식투쟁·탈맥락화 보도들은 세월호참사의 피해자들을 고립시켰다고 지적했다. 또한 해프닝성 보도도 계속해서 피해자와 시민들의 연대를 막았다고 하셨다. 다행히 세월호참사 이후 재난보도준칙이 제정이 되어, 현장기자에게 무리한 취재나 제작을 요구하는 걸 막을 수 있었고, 현장 기자가 데스크의 지시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소개했다. 이태원참사보도는 세월호참사보도에 비해 나아진 면이 있지만, 결코 좋은 상태라고 판단할 수 없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김은지님은 사회적 참사 보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사회적 참사는 사건 당일만으로 한정지을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와 유족이 공동체와 계속해서 연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바뀌지 않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하는 것이 사회적 참사를 보도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2부 진상규명과 국가의 역할 2부에서도 세 분의 발제자들의 발제가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언론보도에 대해 논의했다면, 2부는 재난피해자 권리보장이 사회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고, 어떠한 부분들을 중요하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발제 4 : 4.16 세월호참사 특별법에서 10.29 이태원참사 특별법까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 전수진님의 발제로 2부가 시작되었다. 전수진님은 10년간의 특별법안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후, 세월호참사 특별법과 이태원참사 특별법을 비교하고, 이태원참사 특별법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았다. 10년간의 특별법안 과정을 보면, 4.16사회적참사 특조위 활동이 중단되고 한 달 뒤 바로 이태원참사가 일어났다. 너무나도 유사한 참사가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특조위과정에서 예방에 대해서 더 집중해야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셨다. 세월호참사 특별법과 이태원참사 특별법은 거의 유사하지만, 이태원참사 특별법안을 보면 세월호참사와 비교했을 때 권한이 더 줄어들었다는 점의 차이가 있다. 변호사 전수진님은 이태원참사 특별법 초안 내용과 달라진 부분에 아쉬움을 자아내었지만, 기억이 잊혀지기 전에 진상규명과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이태원참사와 관련된 정보는 계속 삭제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변호사 전수진님은 이태원 특별법의 아쉬움은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는 바이지만, 계속 이것을 비판하는데에 머물 수는 없다고 하셨다. 이제는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조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집중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이제부터 시작이고, 진정한 애도와 추모의 시작이다.   발제 5 : 행정독주는 어떻게 재난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가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임기홍님의 발제가 이어졌다. 임기홍님은 재난피해자들의 권리 침해 현상을 민주주의 퇴보(행정독주)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하셨다. 한국에서는 21세기 이후 행정독주 현상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로인해 재난피해자의 권리는 직접적으로 침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서 밝혀냈다. 임기홍님은 과거와 다른 참사에 대한 국가의 특징을 국가의 강화된 개입으로 보았다. 개입이 강화되면서 시민사회는 억압되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추모와 애도에 대한 제한들이 행정독주를 잘 보여준다. 사회적 추모와 애도는 사회적 지지의 토대이고, 피해자들의 정당한 권리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절차라고 짚으셨다. 국가의 개입 중 담론 생산도 포함된다. 담론을 생산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셨다. 시민들에게 참사를 국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행정독주는 유가족을 배제시킨다. 이태원참사 당시에 일어난 일만 보아도 유가족을 배제시킨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고 사망자라는 표현, 마약 검사, 시신훼손 등 유가족을 전면적으로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결국 행정독주로 국가는 연대를 단절시키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행정독주와 민주주의 퇴보를 막기 위해서는 행정권력을 제한해야 하고 민주주의의 가치와 신념에 주목해야 한다고 하셨다.   발제 6 : 재난, 국가, 사회 그리고 재난피해자 마지막 발제로는 이재민사랑본부 공동대표 김겸훈님께서 진행하셨다. 김겸훈님은 재난에 대해서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예방하고 준비해야하는지와 재난 발생 시 어떠한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다. 재난을 막을 수는 없지만, 예상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그렇기에 재난에 대해서 끊임없는 학습을 해야 하고, 지속적인 축적과 검증 과정을 통해서 지식을 체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재난이 발생할 때에는 모두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난거버너스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셨다. 재난이 모두의 문제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재난에 관해서 모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재난이 나의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고 하셨다.   여섯 발제까지 재난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한 첫 번째 포럼이 마무리되었다. 6 발제 모두 풍부했고, 질의응답 시간에도 많은 질문들이 오가는 장이었다. 앞으로 진행될 포럼이 기대가 되며, 방송와 국가의 앞으로의 행보에 더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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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식 : 가슴에 노란 리본, 마음에 새긴 약속
2016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참사가 어느덧 10주기를 맞이했다. 10주기 세월호 기억식은 안산 화랑유원지 제3주차장에서 진행되었다. 많은 시민, 유가족분들과 여러 인사들이 기억식에 참석해 주었다. 기억식 순서 식전 공연 이름을 불러주세요 추도사 기억 편지 기억 영상 상영 기억 공연 기억 합창 4.16 안전 문화 창작곡 수상자들의 공연으로 식전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이름을 불러주세요’가 이어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김동연 경기도지사, 이민근 안산시장,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 고 김수진 아빠 김종민님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은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면서 추도사가 시작되었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재해로부터 자유로운 바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달라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임, 인정, 사과, 재발방지, 의료지원 등 12가지 주요 건고에 대한민국은 응답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했다. 늦어지고 있는 기억공원 건립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국민의 안전이 뒷전인 현재 대한민국을 지적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함께하겠다고 밝히며 추도사를 마쳤다. 김광준 4.16재단 이사장님과 고 김수진 아빠 김종민님의 추도사에서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고 하지만, 10.29참사와 오송참사가 잇따라 일어났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이 높을수록, 함께 힘을 모아 장벽과 부딪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추도사가 끝나고 난 뒤, 97년생 동갑내기 김지애님의 기억 편지 낭송이 있었다. 4.16참사를 겪은 후, 자신의 다짐과 생각을 별이 된 친구들에게 전했다. “하늘이 맑을 때 너희를 기억하고, 비가 올 때 너희를 기억하고, 별이 많은 날 너희를 기억하고, 꽃이 피면 너희를 기억하며 살아가려고 해. 너희 부모님들 곁에 서서 진실도 밝히고, 책임자도 끝끝내 찾아냈다고. 이제 이 땅에는 무책임한 정부로 인해서 벌어지는 참사는 없게 만들었다고 자랑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가수 박창근님의 ‘별되어 내리네’와 ‘미련’을 불러주셨다. 바로 이어서 배우 박원상님의 정호승 시 낭독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널 가슴에 묻으라고 한다 세상에! 너는 언제나 내 가슴에 살아 있는데 어떻게 가슴에 묻을 수 있겠느냐 엄마는 너를 가슴에 묻지 못한다 아빠도 너를 황량한 가슴의 들판에 묻지 못한다. - 왜 돌아오지 않느냐 정호승 - 마지막으로는 4.16합창단과 시민합창단의 기억 합창으로 기억식을 마무리했다. 기억 합창단의 마지막 노래로 ‘잊지 않을게’를 부르며, 합창단은 노란 비행기를 날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10년이 지날 미래에도 노란 비행기처럼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자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듯,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듯, 진실은 침몰하지 않듯, 세월호참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쁜 와중에도 200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4월은 따뜻하고 꽃이 피는 봄의 시작이지만, 304명이 별이 된 달이기도 하다.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 함께 하겠다는 말들이 많이 오갔고,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특별법 제정, 생명안전법 제정과 같은 요구도 잇따라 들렸던 기억식이었다. 기억식에서의 다짐과 약속이 기억식이 끝난 후에도 이어지면 좋겠다. 김지혜님의 편지 중, ‘나는 그저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나도 김지혜님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저 나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이렇듯이, 세월호참사, 이태원참사, 오송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다. ‘여전히 단단하지 않은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위해, 남을 위해, 미래를 위해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4.16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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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평화] 평화를 위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중
국제 분쟁이 일어나고 일상 속 변화를 실감한 순간이 있나요? 어떤 순간인가요? 나는 생일을 맞이해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서 깼다. 애타게 생일을 기다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일은 내가 태어난 날인만큼 소중하고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22년 나의 생일을 나는 차마 즐겁게 보낼 수 없었다. 생일 전날 새벽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뒤부터였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나의 생일날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정도가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쓸모없어 보였고, 점점 무기력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충격도 한순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혼자 걱정만 한다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로, 내 일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로서, 나의 활동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2주 동안 기숙사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제는 집보다 학교가 더 익숙하고 친밀하다. 그렇지만, 또 그만큼 외부 활동을 많이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안에서 나름대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갈 길을 만들어 갔다. 전쟁이 일어난 후, 학교 내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앉아서만 지켜볼 수 없었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학생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깊이 엉켜있는 역사를 공부했고, 서방권 나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이 다루었다. 그 뒤, 다른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전쟁으로 인해 나타나는 참혹함과 불행함을 벽보에 붙여 알렸다. 외부 활동을 꾸준히 하기는 어려웠지만, 해바라기와 촛불을 들고 반전시위에 학생들과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 일상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갔다. 그렇게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어느덧 학교 내 반전 NGO에서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저희 NGO 소식이 궁금하시면! 관심이 있으시면! 🥰 인스타그램 : lets__peace / 이메일 : lets_peace@naver.com) 지금 평화가 가장 필요한 국제 분쟁 지역은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세계지도를 보면 조각 케이크처럼 아주 반듯하게 잘린 지역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이 그러하다. 하지만 아프리카가 처음부터 반듯한 국경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항해시대를 시작으로 수많은 서방권 국가가 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들은 금과 은을 얻기 위해 광산을 캤고, 끝이 보이질 않는 플랜테이션을 만들었으며, 아프리카 부족민들을 짐승 취급했다.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서방권 국가들의 무분별한 약탈과 만행을 저지른 시대가 대항해시대다. 그 당시 국부의 가치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보유하는지에 있었다. 그렇기에 유럽 열강들은 금과 은을 더 많이 얻기 위한 땅따먹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프리카 대륙이 국부를 늘리는 땅따먹기에 불과했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갈라진 땅처럼 조각조각 부서졌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부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유럽 열강들은 그들의 편의로 그은 국경선 안에 서로 다른 부족들을 강제로 거주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이 가지고 온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이념은 더 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켰다.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대륙은 분쟁 속에 있다. 외부의 세력에 의해 갈라진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할까. 부족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과 싸움은 계속 일어날 것이고, 갑작스러운 해방은 나라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조각난 땅 위의 삶은 굉장히 불안하고 무서울 수밖에 없다. 몇백 년간의 지배가 현재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이다. 너무나도 슬픈 건, 이러한 분쟁을 만든 나라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꼬여버린 실타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게 참 슬프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들은 다른 외부 세력으로 인해 땅이 갈라진 채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중 하나다. 그러한 나라들에 평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국제분쟁을 멈추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국제 분쟁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갈등이 전쟁을 낳는다. 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과정이 존재한다. 가족 간의 갈등이, 마을의 갈등으로 번지고, 그것은 나라 안의 갈등으로, 결국 나라 간 혹은 나라 안의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과정이 빨리 일어나기도 하지만, 몇백 년간의 길고 긴 싸움 끝에 터지는 것이 전쟁이다. 그러한 전쟁을 우리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며,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처음에 나는 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좌절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전쟁이 참혹한 결과를 불러일으켜도 막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어떤 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내 고민을 수업 때 털어놓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평화 시에 서로 간의 교류와 외교를 잘해야지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교류하려고 하고, 외교를 하려고 하니 해결이 되지 않는 거지.” 너무 와닿는 말이었다. 왜 우리는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만, 극한의 상황까지 가야지만, 그제야 행동하는 걸까.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민간인 차원에서도. 그렇기에 작은 실천도, 매우 소중하다. 우리 안의 평화를, 내 주변의 평화부터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쟁은 거대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작은 눈덩이가 커지고, 커져서 괴물이 된 것이 전쟁일 뿐이다. 작은 눈덩이가 산에서 굴러가는 걸 막는다면, 우리는 전쟁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당연히 시위 한 번이, 발언 한 번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모이고 모이면,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굵직한 사건들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굵직한 사건이 될 수 있는 건, 역사로 남을 수 있는 건 그전에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은 실천이 무의미하지 않다는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걸 계속 명심해야 한다.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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