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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기 효순미선 추모제 : 2002년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하나요?

202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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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학생

효순미선 사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

2002년은 월드컵으로 한창 대한민국이 뜨겁게 달아있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불평등한 한미관계로 중학생들이 압사되었던 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2002년 6월 13일,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이던 효순이와 미선이는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신나는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커다란 미군 장갑차가 효순이 미선이 쪽으로 다가왔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걷고 있던 길은 폭이 아주 좁아 장갑차가 지나가기에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갑차는 그 길을 지나갔고, 그대로 두 학생은 현장에서 순식간에 장갑차에 의해 압사되었다. 놀랍게도 가해미군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미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갔다. 국민들은 누구도 이 무죄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밖으로 나와 행진했다. 당시 사람들은 탱크라도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수 십만명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함께 행진을 한 2002년이었다.

이 사건이 왜 불평등한 한미관계까지 연결되는 걸까? 

SOFA에 따르면, 미군은 전속적 관할권을 가지고 있다. 미군과 관련된 범죄가 일어날 경우, 미국 법률에 의해서 처벌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효순미선사건도 마찬가지로, 미 군사법정에서 군사재판이 열렸다. 또한 군사재판은 모두 미국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구조이다. 결국 재판은 과실사고로 무죄판결로 끝났다. 분명 미군의 잘못임에도 사과와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과 한국간의 불평등한 SOFA이고, 더 나아가 불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22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슬프게도 달라진 건 없다.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와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매 주기마다 효순미선 추모제를 효순미선평화공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효순미선을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써 불평등한 관계를 생명중심의 관계로 변하는데 힘을 쓰고 있다. 또한 평화공원 옆에 기록관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22주기 효순미선 추모제

추모제에는 각 시민단체를 비롯한 종교계와 청소년이 참석하여 150여명이 함께 추모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추모제에서는 평화공원사업위 권정호 변호사님의 추모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그를 이어서 미국 평화재향군인회 회원 두 분의 심정과 생각을 나누었다. 엘리 애덤스는 베트남전쟁 당시 파병되었던 군인으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했고  그 이후로 평화운동을 시작하셨다. 또 앨런 바필드는 1980년에 평택 캠프 험프스에서 복무하며, 광주항쟁 당시 주한미군에 대한 증언을 하셨다. 각자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셨고, 더 이상의 희생이 없기를 바라며, 효순이와 미선이를 기억하겠다고 하셨다.

백소아 기자

발언뿐만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공연들도 있었다. 밴드 두번째 달과 가수 하림의 공연이 있었다. 가수 하림은 5.18 피해자의 유족으로 이 자리에 함께 오게 되었다고 한다. 두번째 달은 아름다운 선율을 담은 '서쪽하늘에'를 연주했고, 가수 하림은 '위로'라는 곡을 불렀다. 

마지막 순서로는 청소년의 발언과 합창이 있었다. 숲나학교 학생 진영인과 산마을학교 학생 박현의 발언이 있었다. 두 학교 모두 기록관 건립을 위해 반딧불이로 활동하고 있다. 숲나학교 학생들의 합창으로 이번 22주기 효순미선추모제를 마무리했다. 담쟁이라는 곡으로, 담을 넘자라는 문장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곡의 문장처럼, 어렵고 힘든 이 여정을 함께 기억하고 행동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관련 뉴스를 참고하시면 더 많은 정보들을 알 수 있습니다.

효순·미선 22주기 추모제…“한반도 평화 실현, 촛불정신 완성하는 길” (naver.com)

22년 전 효순∙미선 기억하십니까…기록관 건립 추진 [만리재사진첩]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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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당시의 그 일은 역사적으로는 한국의 저항 방식으로서의 '촛불집회'가 등장하게 된 계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기도 합니다. 이십대 초반으로 사회를 배워가던 과정에서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벌써 22년이 지났네요.

제가 군 복무를 하던 때 생각이 나네요. 부대가 전차와 장갑차를 몰고 훈련지로 이동하고 있었는데요. 감속해서 운전하라는 무전이 왔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그 구간이 효순미선 사건이 났던 곳이라서 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사고가 난 곳에는 작은 플랜카드 몇개만 붙어있었습니다.
벌써 22년이 되었고, 해결되지 못한 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걸 다시금 알게 되었네요.

한국에게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 존재일까요? 반대로 미국에겐 한국이 어떤 존재일까요? 외교적 관점에선 각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유달리 한국에선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국의 이익, 권리를 매우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22년 전에 있었던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촛불집회'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였습니다. 잘못됨을 알리고 싶고 바로잡고 싶은 분노와 함께 추모하는 슬픔까지, 시민들이 촛불로 외쳤던 것 같아요. 당시 어렸는데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기억하고 이야기 전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