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
내년 핼러윈에 이태원에 간다는 사람… 어떻게 보시나요?
16강 진출로 온 나라가 뜨겁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응원했습니다. 브라질전이 열리는 새벽 4시에도 붉은악마는 거리 응원을 한다고 합니다. 바깥 기온이 영하 3도일 것이라는 기상 예보도 거리 응원의 열정은 막지 못했습니다. 거리 응원을 새삼 낯설게 만들었던 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연합뉴스, 22.11.21.)
위 캡처는 조별 리그가 진행되던 11월 말에 거리 응원에 관한 기사에 달린 일부 댓글입니다. 군중 응원에 대한 걱정과 경계심이 보입니다.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는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목격하면서 생긴 것뿐만 아니라 ‘밀집’ 자체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함합니다.
트라우마는 원래 그렇습니다. 사고뿐만 아니라 사고가 난 장소와 배경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사고가 나면 학교를, 물에서 사고가 나면 물을 꺼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고를 간접적으로 접한 사람도 비슷한 ‘대리 외상’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고는 일상에서 벌어지고, 트라우마는 사고와 관계된 것들을 두렵게 만듦으로써 일상에서 유리시킵니다. 일상의 일부 혹은 전체가 파괴되고 무너집니다. 트라우마는 일상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꼭 치유되어야 하는 상처입니다.
이태원 참사가 일상에서 유리시키고 있는 것은 ‘밀집’입니다. ‘밀집’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정쟁에 대한 거부감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차치합니다.) 다시는 밀집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합니다. 사람이 많아 밀집이 불가피한 한국, 특히 서울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을 되도록 하지 말라는 댓글들도 그런 의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 밀집을 마냥 불가피한 위험으로만 이해해도 좋을까요. 밀집은 불가피할 때가 아니면 쳐다도 보면 안되는 지뢰밭과 같을까요, 아니면 조심하면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요리칼과 같을까요.
밀집은 입체적인 현상입니다. 도시의 불가피한 위험이기도 하지만 흥겹고 즐거운 행사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월드컵 응원, 콘서트 감상, 꽃놀이, 축제 참가 등이 그렇습니다.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하기 좋아하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보입니다. 2022년 11월 26일, CBS에서 연 토크콘서트 〈마음을 연결하다〉에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 씨가 출연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나 부모님들이나 참여하려고 나온 세대들이나, 아무도 잘못한 게 없다”라며 “내년에도 다시 여기(이태원)에 와서 원래대로 나의 일상대로 즐겨야겠다”라고 했습니다. 뉴스로 소식이 전해지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서울신문, 22.11.29./네이버/다음)
‘사고 나도 당신 책임’ ‘남 탓 말라’라는 말이 보입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 하지 마라’와 일맥상통합니다. 참사를 통해 밀집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게 명확해진 지금, 출퇴근길의 혼잡이 아닌 ‘없어도 되는 밀집’을 좋게 볼 수 없고, 사고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고가 났던 바로 그곳에 간다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도, 간접적 피해를 입은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인식도 보입니다.
물론 현장에 직접 걸어간 것은 개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책임’이란 말을 붙이기 어려운 건 죽을 각오를 하고 간 사람은 없기 때문, 죽을 각오를 하고 가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치거나 죽어도 밀집 장소에 간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할 때, 밀집 장소에 가는 행위는 제 발로 지뢰밭으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몰상식한 행동으로 포장됩니다. ‘밀집 장소’는 일상에서 악마화되고 밀집 장소를 찾는 일은 ‘죽을지도 모를 데로 가는 일’로 죄악시됩니다. ‘안전하게 모여 놀자’가 아니라 ‘모여서 놀지 말자’만 남게 됩니다.
모이지 않는 것도 사고를 막는 방법 중 하나겠지만, 안전 대책을 세우기보다 모여 노는 행사 자체를 금기시하는 건 사회적 유희를 크게 잘라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더 큰 문제는 트라우마 치유가 설 자리를 잃고 질책과 분노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일상은 회복되지 못하고 트라우마는 방치됩니다. 노조의 대규모 집회나 파업으로 인한 지하철 과밀에 관해 문제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논의보다 ‘사람이 죽으면 너희 책임’이라는 분노를 더 찾기 쉬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트라우마 치유의 목적은 일상 회복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더라도 다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요리칼에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요리칼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A’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게 되더라도 다시 ‘A’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삶에서 ‘A’를 지우든 말든 그 선택권은 당사자에게 주고, ‘A 없는 삶’만을 남기면 안된다는 데 트라우마 치유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 ‘개인 책임’을 이야기하며 트라우마를 덧나게 하는 사회, 어쩌면 그 집단적 분노야말로 외면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사회적 트라우마입니다.
월드컵 거리 응원에 관해서도 밀집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수그러드는 듯합니다. 밀집 트라우마에 관한 다소간의 치유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10월은 오고 이태원은 같은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즐거움을 잘라내기보다는 안전 대책을 갖추면서 트라우마를 정성껏 치유하고, 미래의 핼러윈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655
희생자 명단 보도, 필요한 이야기였을까
'아일란 쿠르디'의 시체가 발견된 건 2015년 9월 2일, 튀르키예 서부의 유명 휴양지 보드룸(Bodrum)이었습니다. 세 살이었던 쿠르디는 내전을 피해 시리아를 떠난 난민이었습니다. 튀르키예를 거쳐 유럽으로 가던 길에 엄마, 형, 다른 난민들과 보트에 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트가 뒤집혔습니다. 보트에 탔던 모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쿠르디의 몸은 해변으로 떠내려 왔습니다. 그 모습이 SNS에 게재됐습니다.
슬픔과 충격이 세계로 번졌습니다. 그걸로 전쟁이 끝난 것도, 각국의 난민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난민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한다는 공감이 늘었습니다. 사고 후 EU에선 난민 분산수용이 합의됐습니다. 4년이 지난 2019년에는 독일의 한 난민 구호단체가 지중해에서 쓰이던 난민 구조선 이름을 '아일란 쿠르디 호'로 바꿨습니다. 쿠르디의 이야기는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사람들에게 남았습니다.
"인류가 이야기를 통해 수천 년간 설명하고 납득시켜온 것이 그것입니다. 인간이 균형을 잃었을 때 어떻게 그것을 되돌리고자 하는지에 관한 것이죠."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닥터'로 통하는 로버트 맥기(Robert Mckee)의 말입니다. 어떤 이야기는 떠돌다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이 듣고 곱씹는 과정에 생각과 교훈이 되어 남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로 잘못을 반성하고 위기에 대비하며 삶의 안정과 균형을 유지합니다.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면 세상도 움직입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이 공개되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명단에서 이야기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최소한의 이름만이라도 공개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와 책임 규명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주장은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숫자가 글자로 바뀌었을 뿐, 실명과 익명이 어지럽게 혼재된 페이지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예전엔 명단 공개를 했지 않느냐는데, 지금 사람들은 과거보다 유족 보호를 더 유념합니다. NYT 등도 실명 보도를 하지 않느냐는데, 그들도 동의 없이 마음대로 보도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야기 없는 명단을 보니 오히려 유족들의 이야기는 어떨지 걱정됐습니다. 저 이름 주인의 유가족은 동의를 했을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어떡하나, 누군가 유가족 행세를 하며 이름을 내렸다는데 그 이름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을까, 이름이 장난질에 이용된 사람과 유가족은 슬프진 않을까. 다시 읽어 본 공개의 변에서는 애도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개를 위한 이야기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세 달 전 고향 스리랑카에서 결혼한 모하마드 지나드(27)는 임신한 아내와 한국에서 함께 사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입사 제의도 받아 10월 31일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29일 밤, 친구 집에 맡겨둔 짐을 찾기 위해 이태원을 찾았다. 그리고 사고에 휩쓸렸다. (BBC, 2022.11.3.)
“대형참사를 먼저 겪은 가족들로서 그분들(이태원 참사의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죠. 숨진 가족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거든요. 그건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것일 테고 그러려면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어요. 근데 또 참사가 벌어졌으니 ‘상주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고 반성하게 되네요 .”(윤석기) 국가 안전관리체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동안,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반성하고 고민하는 일은 참사의 상주들이 떠안고 있었다. (한겨레. 2022.11.10.)
참사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평범한 만큼 소중하고 고귀한 삶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 삶이 상상치 못했던 참사를 마주하게 됐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남은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떠난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 일, 그곳에 있던 건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산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는 일이 애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캐내기 위해 2014년 서해에서 그랬듯 유족에게 마구 달려들어선 안됩니다. 조심스러운 접근과 당사자의 동의 하에 취재되고 보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을 추모하고, 잘잘못을 반성하고, 남은 삶의 균형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애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숫자 몇 개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글자 몇 개도 아니며,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