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건물 민주주의’를 넘어: 한국정치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혁신
1. ‘87년 체제의 명암’: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하여
1987년의 민주화 이후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2024년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사이 일곱 차례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어지면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기반한 대의 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되고 한국은 어느덧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 이후 한국은 빠르게 신자유주의적 불평등 체제로 변모하였고, 정치적 평등 원칙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치가 이러한 경향을 역전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이를 증폭하는 역설적 현상이 지속되었다. 특히, 1987년 체제가 채택한 5년 단임의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제와 1988년 총선부터 적용된 소선거구제 중심 의회 선거제도의 결합은 한국 민주주의를 유례없이 강한 다수제적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로 진화시켰다.
그 결과 민주화 이후 한국은 단 1표만 더 얻어도 모든 권력을 차지하는 승자독식(winner-takes-all) 정치를 민주주의의 근본 규범으로 내면화하면서 대립적 진영 정치와 정치 양극화가 계속 심화됐다. 주기적 선거를 계기로 ‘환희’와 ‘실망’의 사이클이 무한 반복되는 가운데 소셜 미디어 시대의 민주주의는 모두가 포퓰리스트처럼 행동하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40년이 다 되도록 우리는 대한민국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정초적(foundational) 개혁과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미완의 민주주의와 지체된 복지국가를 살고 있다. 표준적인 대의 민주주의 너머를 상상하는 민주적 혁신 실험은 미시적, 고립적 접근에 머물고 있으며, 그마저도 정권이 교체되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회귀하는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대가 요구하는 열린, 포용적 민주주의 시민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2.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전환적 위기와 도전들
대의제 민주주의의 규범적 가치와 제도적 질서가 점차 공허해지고 정치적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의 도전이 거세지는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선거-의회-정당 중심의 표준적인 대의민주주의 기제가 더 이상 잘 작동하지 않고 있다. 특히, 다양한 사회적 집단과 이익을 대표, 중재하며 공동체 차원의 집합적 의견 형성과 의지 형성을 주도하는 핵심 주체인 정당이 안팎으로 도전받고 있다. 더 교육받고 더 많은 정보를 손에 쥔 ‘비판적 시민들’은 선거 참여를 넘어 더 많은, 더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동시에, 적극적 시민들과 수동적 시민들 간에 새로운 격차와 불평등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 기후위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불평등 체제의 재심화, AI 혁명과 노동의 변환 등 난제들(wicked problems)이 분출하고 있지만 기성 정당과 대표 기구들은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하며 위기를 증폭시킨다. 전통적 좌우 구분을 넘어서는 다양한 정치적 균열이 분출하면서 새로운 사회계약의 필요가 커졌지만, 젠더·세대·인종 등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한계도 뚜렷해지는 모습이다. 소셜미디어 기반 시민정치는 정보 공유와 투명성 증대의 이면에 정치적 극단화와 파편화를 부추기는 양면성을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정당과 대의 기구들의 역할에 기반한 고전적 – 표준적 또는 ‘교과서’적 민주주의 모델은 더 이상 우리의 정치 시스템을 충분히 묘사하지 못한다(Papadopoulus 2013: 3)”는 것이다. 현대 대의 민주주의가 기반한 정치적 대표(political representation)의 개념, 원리, 제도, 실행 방식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3. 민주적 혁신의 이론과 실천: 대표+참여/숙의/직접 민주주의 그리고 대안적 시민성 체제
민주적 혁신(Democratic Innovations)이란 “시민 참여를 확대, 심화함으로써 전통적인 대의제 정치를 쇄신, 재구성하기 위한 제도, 과정, 운동(김주형, 서현수, 2021)”을 가리킨다. 20세기 후반 이래 참여 민주주의와 숙의 민주주의에 기반한 다양한 혁신 실험들이 전개돼 왔다. 잘 알려진 참여예산제, 21세기 타운홀미팅 등 열린 민회, 그리고 무작위 추첨 원리에 기반해 구성된 시민들의 의사소통적 토의를 통해 합당한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다양한 숙의적 미니공중들(mini-publics)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자주 실험되는 공론조사, 그리고 최근 전세계적 관심을 모으는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 모델은 숙의적 미니공중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직접 민주주의 기제인 시민발의(citizens’ initiatives)와 시민투표(referendums)도 민주적 혁신의 중요한 유형이다.
민주적 혁신 기제들이 표준적인 대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대표의 개념과 기제들은 앞으로 더욱 쌍방향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새롭게 재구성되어 갈 것이다. 이에 더해 참여, 숙의, 직접 민주주의에 기반한 민주적 혁신 기제들은 새로운 정치적 다이내믹을 불러일으키며 열린, 포용적 정치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개념적으로도 대표(representation), 참여(participation), 숙의(deliberation)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들로 반드시 배타적이기보다 상보적 속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아일랜드 시민의회, 핀란드 시민발의제, 미국 시민발의리뷰 등 최근 높은 관심을 받는 혁신 사례들은 대표, 참여, 숙의 기제들을 적절히 연계한 하이브리드 모델에 가깝다는 점이 중요한 통찰을 준다.
나아가, 민주적 혁신의 실험과 제도화 과정은 정부 주도의 top-down 방식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시민 자력화(citizen empowerment)를 지향할 필요가 있으며, 대의제 정치과정과의 연계와 동시에 시민사회와 공론장 그리고 전체 공중(maxi-public)과의 연결이 중요하다. 정치이론가 라퐁트(Lafont)는 이를 ‘참여적 숙의 민주주의(participatory deliberative democracy)’로 명명하며, 필자는 ‘역동적 민주주의(dynamic democracy)’ 전망으로 제시한다.
4. 한국 정치와 대의제 민주주의 혁신의 길: 역동적 민주주의를 향하여
역동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 혁신 과제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기존 대의 민주주의 제도의 혁신적 재구성: 승자독식 민주주의를 넘어 권력공유 원칙에 기반한 합의 민주주의를 향한 제도 개혁 - 헌법개혁, 선거제도 개혁, 의회 개혁, 참정권 개혁, 지방자치 거버넌스 개혁 등
민주적 혁신 실험의 체계적 실시 및 제도화: 온라인국민청원, 공론화위원회 실험 등의 체계적 평가와 재설계 + 시민발의, 시민투표 등 적절한 형태의 직접민주주의 기제 도입 등
대표 + 참여/숙의/직접 민주주의 기제의 역동적 결합: 아일랜드 시민의회, 미 오리건주 시민발의리뷰, 핀란드 시민발의제 등 적극 참조
국가 + 지역 차원의 <민주주의 정책 프로그램> 및 지속적 추진체계 구축: ‘민주주의 정책 프로그램 & 행동계획’/ 의회 ‘민주주의·시민정치위원회’/ 상설 ‘시민의회’ 제도화/ 민주주의 온라인 포털 플랫폼 구축 등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적극적 사회정책 실행: 2040 역동적 민주주의와 지속가능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사회적 합의 도출(새로운 사회계약)
*이 글은 <노회찬 6주기 추모 심포지움> 발표자료를 요약한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심포지움 자료집을 참조하시기 바란다(아래 링크에서 다운로드 가능).
--> http://hcroh.org/notice/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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