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무관심의 광장: 2024년 12월 14일에 생각한 다시 만날 세계
 지난 14일 토요일, 삼 일 간 지내던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들러 짐을 챙긴 후 두 번째 토요일 집회에 갔다. 허리에 약한 통증이 남아있었다. 이틀 전, 고속도로에서 택시에 탑승한 채로 120km로 달려오던 차에 들이받혔다. 2박을 꼬박 입원하고, 허리가 좀 나아질 기미가 보이자 바로 집회에 가기로 한 것이다.    서강대의 ‘집회 참가단’ 오픈채팅방에는 약 60여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사람이 많은 여의도역 스타벅스 인근에서 깃발을 올렸다. 또 카톡이 먹통이다. 깃발을 보고 찾아온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과 인파를 따라 여의도 광장 중심부로 조금씩 걸어나갔다.    경찰들은 사고 예방을 위해 시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있었다. 경찰의 표정과 몸짓은 분명 ‘막기 위한 것’이 아닌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전 날, 나는 차마 시각장애인 친구에게 같이 여의도로 가자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 같은 전맹은 레어템이니 소중히 대하라는 친구에게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함께 오라고 말하고 같이 이동할 자신이 없었다.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은 국회 밖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국회로 돌아와 표결에 참여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주저하고 있다.      운 좋게 여의도공원 벤치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이랑의 노랫소리도 멀리서 들려왔다. 친구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잠시 화장실을 들르고 담배를 태우러 사람들 사이에 골목처럼 나 있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저기 비탈길까지 꽉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원래의 목적은 잊어버리고 넋을 놓고 일대를 둘러보았다.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사람의 수만큼 다양함이 보였다. 각양각색의 깃발들, 나는 거기서 민주주의의 화려한 무지개를 보았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해학을 찾는 사람들의 깃발과 누군가의 응원봉, 외치고 싶은 말을 적어온 피켓, 사랑하는 강아지의 사진을 붙여놓은 팻말을 보았다. 내 손으로 들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한 노란 빛깔의 정의당 깃발도 많이 보았다.    ‘이들은 왜 여기에 나왔을까.’ 서울시의 ‘서울 생활인구 데이터’에 따르면 최소 50만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들이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최소 오십 만 가지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목놓아 둘러보았다.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보이는 곳을.      괜히 끝을 보고싶어 더 멀리 걸어나갔지만, 인파의 경계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간이 화장실에 들르고 다시 서강대 학생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비어있던 사람들 사이의 샛길은 인파로 가득 차 아주 조금씩만 움직일 수 있었다. 30분에 걸쳐 겨우 가방을 두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 뉴스 생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만의 입은 적막을 닫고 귀만 열어두었다.     “가(可), 이백 네 표.”    ‘환호성’이었다. 수십만의 사람들은 표정을 활짝 피고 소리질렀다.    그리고 이틀 전 업로드 된 한 진보정당의 영상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 국회의장이 등장한다. 2020년 국회의원 선거 후보 토론회 영상이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저 역시 기독교인으로 동성애에 반대하고 ‘그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 ‘땅땅, 땅’하는 소리와 함께 국회에서 의사봉을 두들겼다.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멜로디로 시작하는 그 노래.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    다시 만난 세계.    그 때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울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슬픈 시간이 흩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슬픔이 커져갔다. 헤매임의 끝이 아닌 시작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뻐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만날 수 없는 세계의 희미한 빛 만을 볼 수 있음을 너무나도 분명히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피켓을 들었다.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윤석열 탄핵 오세운 OUT’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주황색 피켓이었다.      고인이 된 학교 선배의 노래 ‘그대에게’가 흘러나올 때에도 나는 피켓을 일부러, 더 높이 들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라도 더 이 피켓을 읽어주었으면 했다.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광장에 나온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눈치챌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일부러 더 높이 뛰었다. 탈진할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내가 손에 든 ‘장애인’이라는 문구 때문에 위축되어있었다.    며칠 전 보았던 현 거대 야당 대표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박경석 선생님 이런 행사하는데 와가지고 그렇게 하면, 그게 호소력이 있겠어요? 더 미움만 받지.”      한참 뒤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버스도 택시도 잡을 수 없어서 여의도 공원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갔다. 저 뒤에서 마이크를 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1 야당 대표의 목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저 뒤에서 울려왔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민주도 흔들리고 공화도 뿌리내리지 못한 이곳 대한민국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다채로운 사람들을. 앞을 보지 못하는 국회의원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보다 헌법을 수호하려 했음을. 그리고 나는 들었다. 집회에서 탄핵 구호를 외칠 때마다 끝에 “투쟁-.”이라고 애써 덧붙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발언 준비 전 차별적인 발언에 맞서 당당하게 무대 위에서 외치는 여성의 용기를. 냉혹한 무관심을 돌파하는 사람들을.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도 무엇이 나아졌는지 당최 알지를 못하겠다. 주식시장이 곤두박질치고 미국 대선은 불안정성을 가중시키며 여전히 전쟁이 진행중이다. 대학의 총학생회장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퇴진을 외친다고 말하고, 내가 사실상 선본장의 역할을 맡았던 한 대학에서 소위 ‘운동권’으로 분류되어버린 선본은 14.5%를 득표했다. 비상계엄에 대응하여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동시에 또다시 내 이름에는 ‘정의당’과 ‘운동권’이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익숙해졌지만 늘 새로운 악플은 계속해서 달렸으며, 학생 ‘일동’이라는 표현에는 서강대를 대표하는 이름을 짓지 말라는 훈계조의 익명 댓글들이 달렸다. 무구한 역사. 7년 전보다 더 차가워진 반응을 피부로 느꼈다. 패배해온 수많은 기억과 그 일부였던 자신의 무능 또한 잊지 않기로 했다.    믿는다고 다 이뤄지진 않지만, 믿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한 줄기 빛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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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된 자들이 만든 광장, 새 민주주의로 향할까 🕯️
꺼진뉴스 다시보자 vol. 20 이번 호는 2024년 폴라리스 레터의 마지막 호입니다. 꺼뉴다보 20호에서 소개하는 모든 기사들은 12.3 내란 사태를 다룹니다. 연말이 연말 같지 않고, 연초가 연초 같지 않습니다. 내란이 철저히 준비된 과정과 그 엄중성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으며, 사태를 무마하기 위한 시도들에 대응하고 새로운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무기한의 과제를 맞게 되었습니다. 2024년과 2025년에 걸친 이 겨울은 참 이상야릇한 미완의 시간으로 남을 듯합니다. 과제의 무게와 장기성을 고려하여, 읽기와 리터러시의 필요를 놓치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12.3 내란 사태의 타임라인을 잘 정리한 두 링크를 꺼뉴다보 20호와 함께 공유합니다. 한겨레가 정리한 12.3 내란 모의, 집행 타임라인과 독립언론네트워크가 아카이브하고 있는 12.3 내란 사태 이후 정국 전개입니다. 뉴스 외에는 그 좋아하던 것들조차도 보지 않게 되었다는 지금과 앞으로에 도움이 될 기록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주항공 7C2216편 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부상자들의 회복과 명백한 진상규명 및 수습을 기원합니다. 1. 사건과 구조: ‘극우 유튜버’처럼…왜 대통령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사로잡혔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2월 12일 담화에서 비상계엄을 결심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선관위에 대한 국정원의 보안 점검을 꼽았다. 극우 유튜버의 부정선거 음모론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재료를 대통령도 언급했다. 그러나 이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라기보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확산하는 데 권력의 의지가 투영된 흔적에 가깝다.✍🏻 이효상 기자, <경향신문> 12월 12일 대국민 담화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준 극우 유튜브에 심취한 노인과 같은 모습에 충격을 받으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당일 담화에서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명분으로 선거관리위원회 해킹, 시스템 부실 의혹을 골자로 하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높은 비중을 할애하여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경향신문>의 기사는 부정선거를 증명하고자 대통령실과 국정원이 선거관리위원회에 가해온 외압과 부정선거 음모론의 불가능성을 소상하게 밝힙니다. 윤 대통령은 음모론에 빠져 사리분별을 못하는, 그런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국가기관, 여당, 극우 유튜버와 사업자들과 조직적으로 음모론을 생산하고 관철하려 시도한 핵심 이해관계자입니다. 계엄 시도 무산 후에도 ‘계엄 당일 민주당 지지자들에 막혀 국회 출입을 못했다’는 나경원 의원, 남태령 트랙터 시위에 대해 ‘폭력적 난동으로 몽둥이가 답’이라 한 윤상현 의원의 발언과 같이 내란을 무마하기 위한 여론공작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와 선동에 대해 촉각을 세우는 동시에, 망가진 언론 지형과 자유를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노력들에 대한 논의도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경향신문의 기사와 곁들여 윤 대통령과 여당, 극우 유튜버들의 음모론과 여론 장악 시도에 대한 몇가지 읽을거리들을 함께 부칩니다. 한겨레21은 윤석열 대통령의 12.12 담화 내용과 극우 유튜버 방송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한 윤 정권의 극우 유튜버 의존 및 공생 관계를 다룹니다. 뉴스타파는 윤 대통령의 후보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부정선거 음모론 생산과 여론 공작에 관여하고 있는 조직의 실체와, 여당 유력 정치인들의 관여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5개 언론사가 합작한 언론장악 카르텔 추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명박-박근혜 시절 불법 지원으로 성장한 보수단체가 윤 정권의 여론 공세에 함께하고 있음을 밝힌 한겨레의 보도도 함께 읽어보세요. 뉴스 보러 가기 🔥 2. 오피니언: 87년 체제 너머 저 낮은 곳, 응답하라 정치야 2024년 윤석열 탄핵집회의 양상은 비슷하되 다르다. 무엇보다 구성원이 달라졌다. 민주화 투쟁을 경험한 기성세대의 참여는 여전했지만, 이번에는 촛불 대신 아이돌 응원봉을 든 젊은이가, 여성이 시위대의 다수를 차지했다. 성소수자의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꼈고 장애인도, 외국인도 드물지 않았다. 수많은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가 함께했으리라. 중산층 시민이라는 범주로는 포괄되지 않는 이들, 87년 체제가 제대로 대변하지 않는 이들이다. 삶의 위기가 이들을 광장으로 불러냈다. 정치가 응답할 차례다.✍🏻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21> 지난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불과 11일 전 내란 사태로 위기에 처했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힘으로 회복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윤석열의 수사 불참석, 국민의힘의 미온적 대응 등 풀어야 할 과제는 많습니다. 한겨레21 칼럼은 2024년 윤석열 탄핵집회의 구성원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삶의 위기가 이들을 불러냈다고” 말하며, 촛불시위의 계보를 설명하기 위해 1987년 체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87년 체제는 군부독재에 맞선 6월 항쟁의 승리로 만들어졌지만, 당시 민중과 재야 (민중운동, 시민사회)를 배제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 소선거구제를 골자로 하는 제도는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하고 양당 독점 정치로 이어졌습니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진전됐지만,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배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이어져 왔습니다. 칼럼은 87년 체제가 이런 한계를 안고 반복되는 정치적 위기와 국민적 실망 속에서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번 탄핵과 광장의 목소리는 그 연장선에 있다고 말합니다. 기존의 체제가 대변하지 못했던 젊은 세대, 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광장으로 나섰고, 그들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근본적인 체제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탄핵 이후 올 민주주의는 더 포용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할테지요. 개헌 논의와 정치개혁, 그리고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체제 구축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87년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도래하길 바라면서, 칼럼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뉴스 보러 가기 🔥 3. 인터뷰: 장혜영·박지현 “2030 여성 새로운 정치 만들어갈 주체… ‘나중에’ 정치 멈춰라” "20대 남성들이 왜 계엄 사태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나오지 않았는가는 기본적인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는 데 실패한 것이다. 또, 반대로 2030 여성들이 많이 나왔으니까 여성들이 훌륭하다는 방식의 이야기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그 평가의 주체는 20대 여성 자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층이 그때그때 자기의 입맛에 맞게 어떤 때는 20대 여성을 칭찬하고, 어떤 때는 20대 남성을 호명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윤석열 탄핵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윤석열 탄핵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신다인 기자, <여성신문> ‘여성들이 정말 많이 나왔네’ 탄핵소추안 가결 촉구를 위한 집회가 이어지던 12월 초엔 어렴풋한 짐작이었습니다. 집회가 거듭되며 짐작은 데이터로 증명됐습니다. 2030 여성은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 주체로 우뚝 섰습니다. 추운 겨울 여성들은 망설임 없이 광장으로 나섰고, 약자와 연대했습니다. 매번 여성을 지우고 외면해 왔던 정치권도 2030 여성을 호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과 의심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과연 차기 대선에서 정치권이 광장을 지켰던 여성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인가 의문이 남습니다. 단순히 청년 여성들이 집회에 많이 나왔다는 사실보다 여성들의 정치적 에너지가 무엇을 성취할 것인지 주목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성신문은 두 청년 여성정치인에게 정치권이 2030여성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지 물었습니다. 장혜영 전 정의당 국회의원과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입니다. 이들은 정치권이 젊은 여성들을 기특해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2030 여성이 여느 때보다 주목받는 현 상황에 대한 해석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지점을 충실히 담아냈습니다. ‘응원봉을 쥔 손이 의사봉을 쥘 수 있게‘ 하려면 어떤 구조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 짚은 2편까지 이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뉴스 보러 가기 🔥 에디터가 남긴 편지 매번 연말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지만, 올해의 12월은 정말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12월 3일 이후 우리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환호합니다. 여느 때보다 뉴스에 집중하고, 주말엔 방한용품으로 무장한 채 광장으로 나섭니다. 가만히 있어도 피로가 몇 배로 누적되는 요즘 무엇보다 힘이 되는 건 시민 간의 연대입니다. 폴라리스에도 그런 따뜻한 마음을 전달해 주신 독자분들이 계시는데요. 이번 에디터 레터에서는 이슈 딥다이브 9호 <이주노동자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가?>를 읽은 한 독자분이 남겨주신 글을 공유해 드리려 합니다. 정성스러운 피드백을 남겨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2024.12.30. 에디터 모래🏖️ 드림 만든 사람들: 푸릇 🌿, 산호 🐠, 모래 🏖️ 지난 토요일 탄핵 찬성 집회를 마무리하고 돌아가던 중, 같은 시간에 광화문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서 참여자 수 과대추산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 것 같다는 말이 SNS에 돌았었습니다. 동남아계로 추정되는 외국인들이 목에 탄핵 반대 팻말을 걸고 인파 속에 있는 사진과 함께요. 당연히 가짜뉴스(e.g., 사진 자체가 조작되었거나, 자발적으로 시위에 나왔을 경우 등)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이 평소에 처한 삶을 생각하면 이런 단기 알바가 제법 매력적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돈도 주고,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고, 주말에 진행되며, 위험하지도 않으니까요. 전에 어떤 책에서 '우리는 이주 노동자들을 무시하지만, 이주 노동자들이야말로 그들이 나고 자란 곳에서는 가장 진취적이고 현명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국의 경제적 지위, 타국에 나갔을 때의 비용과 효익 그리고 자신이 활용 가능한 제도까지 모두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남겠다 하는 의지와 실행력이 필요하지요. 아무리 그 과정에 브로커가 있다 한들, 결정은 본인 스스로 내린 것 아니겠나요. 자신의 삶을 개혁하고 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이 사람들이 과연 이 시위에서 사진이 찍히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지, 이 시위의 맥락을 이해하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치는 흐름이기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단번에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자국에서 있을 때에 비해 정보를 접하는 인프라가 열악할 수밖에 없죠. 한국의 언론사들이 익숙하지도 않고, 일상표현이 아니라 정제된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자국에 한국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는 언론이 없다면, 이들은 자의적으로 판단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결코 우민이 아니었을 이들이 언어적 장벽과 타국의 정치적 맥락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우민으로 이용되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이 안전한 환경, 법적인 보호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고 목소리를 낼 권리마저 잃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사랑보다 혐오가 쉽고, 변화보다 관성이 쉽지요. 외부인으로서 한 사회에 녹아들기까지의 하루하루는 사실상 수많은 편견과 배척에 대한 투쟁의 과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와중에 경제 상황도 좋지 않아 보통의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지니 이들에게는 추운 겨울이 얼마나 더 지속될 지 걱정도 됩니다. 트럼프의 정치 연설 법칙 중 하나가 최대한 쉽고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나, 정치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사람들을 지지층으로 흡수하는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레토릭을 사용하는 글은 해석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게 피로감을 유발한다고 해요.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이들이 교육 수준이나 정치적 관심도가 낮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 텍스트는 무조건 쉽고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안 그래도 혐오를 기반으로 한 정서는 통합되기 쉬운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마저 쉬우니 얼마나 파급력이 크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국가의 극우주의 정당들이 저 방법을 택하고는 하지요. 국가를 막론하고 극우 세력이 전에 비해 득세하고, 자국우선주의가 강화되는 현 시점, 이주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행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이들의 생존,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위해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적는 내내 나도 이주 노동자에 대한 편견이 가득해서 이런 말을 하고있는 것은 아닌지 수도 없이 읽어보게 됩니다. 아무리 제가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아봤자 저는 한국인이고 해외에서 살아본 경험이라고는 제도와 기관의 보호를 받는 교환학생으로서의 반년이 전부거든요. 당사자성이 없는 일에 대해 말은 얹는 것은 늘 조심스러워집니다.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구요. 실제 이주노동자들이 보면 허황된 소리고 위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잔인하게도 현실에서 소수자 당사자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쉽게 무시되고 짓밟히기 때문입니다. 흑인 인권 운동 시기에도 흑인 운동가보다는 백인 운동가가 더 조명되었고, 여성주의에 대해 논할 때도 여성 운동가들은 조롱당하고 위협당하지만 남성 운동가의 발언은 주목을 받죠. 그래서 공감과 사회적 합의, 연대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저도 다른 안건들에 대해서는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이 일에 관해서만은 주류이기에 연대하고 싶어 몇 자 적었습니다. 늘 정성 담긴 뉴스레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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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위한 기록 - 더 나은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가지며
'옳음'이란 무엇일까? 여의도에 다녀왔다. 오늘은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기존 일정을 취소하고 여의도로 출발했다. 여의도의 풍경은 광화문과 비슷했다. 한 쪽에서는 탄핵을 이야기하고, 한 쪽에서는 지지를 선언한다. 탄핵을 말하는 사람만큼 지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50~60대였고, 저녁 늦지 않게 해산했지만 매번 상반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민이 찾아온다. '옳음'이란 무엇일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기존 생각이 강화되는 오늘, 옳음이란 무엇일까. 몇 년마다 반복되는 질문이다.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할까?'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그렇다 와 그럴까 사이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진리'란 우리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진리라 부른다. 알 수 없지만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진리를 찾는다. 개인의 생각이 모여 사회의 방향을 정하고, 사회의 방향은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의 모습과 가까워진다. 때로는 오히려 멀어질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뒤로, 위로 아래로 반복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우리는 영원히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개인의 상황과 기존의 경험과 현재의 마주함 속에서 절대적 옳음을 고민한다. 우리가 영원히 다다를 수 없겠지만, 그렇기에 옳음을 고민하고, 이상향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번에도 그렇게 우리는 나아간다. 각자의 상황과 책임 동일한 상황이지만, 모두 다른 생각을 한다. 혼자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기에, 나의 위치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이 생겨난다. 회사에서 사원/대리/과장/임원/대표의 입장이 다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있다. 회사로 치면 회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지만,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고, 범죄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선이 있다. 정치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고,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는 행동이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생각하는 '옳음'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고민한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과 전략은 다를 수 있다. 정치인이 속한 당의 전략에 따라 방법이 달라질 수 있지만 바뀌지 않는 단 한 가지는 '국민을 위한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고민해야 한다. "주변 시민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그냥 간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투표에 참여하고 찬성 표를 던진 국민의 힘 김예지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의 책무를 먼저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속한 당의 당론과 관계없이 지금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말하는지를 듣고 반영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내가 가진 지지층만을 바라보며 그 외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이 가결되면 정권이 바뀌고, 바뀐 정권이 자연스럽게 다음 선거의 흐름에 영향을 주고,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기에 탄핵에 반대한다. 철저한 개인의 욕심이다. 개인의 욕심을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치인이라면 그렇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당론에 반대되는 의견이라도 오히려 과감하게 앞으로 나가 찬성을 이야기하면 시민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당에서 미움을 받더라도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다면 자리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김예지 의원은 이번 일을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고, 이 기세를 몰아 다음 의원직도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윤상현 "탄핵 반대해도 1년 지나면 다 찍어주더라" 기존의 경험과 사례가 있기에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전 박근혜 탄핵 때도 먼저 탄핵에 찬성하고 앞장섰던 의원들 중 현재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탄핵에 반대해도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동일한 사람을 찍어주는 경우도 빈번하다. 변화를 만들기 위해 일어났지만 생각보다 변화는 빠르지 않다. I 변화의 시작 - 3.5%의 시작 하지만 때로 변화는 굉장히 빠르게 찾아온다. 뉴스가 계속 나오고, 시민들이 여의도에 모였지만 가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박근혜 탄핵 때도 가결되기까지는 거의 두 달의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는 경험이 있고, 사건의 심각성이 다르기에 더 시간은 단축되겠지만 한 달 정도는 걸리겠다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3.5% 법칙: 소수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BBC News 코리아 3.5% 법칙이 있다. 사회 변화의 원동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구의 3.5%가 저항 운동에 참여하면 정치적 변화가 보장된다는 의미다. 시민들의 운동으로 인해 정권이 바뀌거나, 1년 이내에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를 조사했을 때, 인구의 3.5%가 참여할 경우 실패한 사회 운동이 없다는 결과가 있다. 또한, 비폭력 사회 운동이 폭력적 사회 운동에 비해 4배 많은 참여 수를 보인다는 연구도 함께 나타난다. 3.5%는 사회 전체에서 보면 굉장히 소수다. 하지만 3.5%의 적극적인 참여자들이 있다는 의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동의하고, 지지한다는 의미다. 3이라는 숫자가 자주 보인다. 세 사람이 모이면 그때부터 집단이 형성되고, 주장에 힘이 실린다는 심리학적인 현상부터, 삼인성호라는 과거 고사성어, 삼세판이라는 우리 사회의 통념 등 삶 속에 3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일 때, 우리는 힘이 생기고 변화를 만들 수 있다. I 뻔하지만 기본으로 - 시민의 힘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다양한 연령, 성별이 각자의 응원봉을 들고 소녀시대의 노래를 불렀다. 남녀노소가 아니라 젠더노소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날 만큼 각자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목소리를 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도 중요하겠지만 그만큼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는지도 중요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내는 한 목소리. 광장의 역할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속내는 조금씩 다르다. 탄핵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고, 어떻게 해야 좋은 방향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은 하지만 딱히 뚜렷한 대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탄핵되면 당연히 이재명이 대통령 되고 정부도 문재인 정부 때나 비슷하겠지' 이런 식으로 우리 스스로가 상상을 제한해 버리는 순간, 실제로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기대는 자기 실현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완전히 새롭게 열려 있는 광장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서 진짜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대통령제가 문제라면 어떤 방식으로 보완해야 되는지 이런 얘기들을 차분하고 끈질기게 해나가야 된다. [인터뷰]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 - 프레시안 어느 순간 내일을 향한 기대감이 줄어들었을까? 반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소통하고 함께 하자고 말했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도 했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광장에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울고, 웃는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나아간다. 더 나은 내일이 있다고 분명히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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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양재IC, 2024년 남태령
2016년 11월, 그때도 '전봉준투쟁단'은 서울로 트랙터 상경을 시도했다. 그때는 양재IC 부근에서 막혔다. 28명이 연행됐고, 3명이 다쳤다. 광화문 집회에선 '존경하는 시민' 운운하며 무기력으로 일관하던 경찰이, 양재IC의 농민은 때려잡았다. 그때는 농민들을 위해 달려나간 시민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8년 지난 12월, 오늘 전봉준투쟁단이 다시 막혔다. 이번엔 남태령역. 하지만 이번엔 응원봉 시민들이 달려나갔다. 시민들이 지켜보니 경찰도 무리한 진압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못 가고 있는 입장이지만... 운동권들은 경복궁에 집중했고, 남태령역에는 운동권 조직이 많지 않아 보인다. 2030 여성 시민들에겐 운동적 관성이 없다. 이것저것 재지 않는다. 연대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일단 달려나간다. 농민단체의 무엇에 동의할 수 없어 연대를 꺼리는 식의, 그런 '전술적 판단'을 이들은 하지 않는다. 시민을 무작정 상찬하는 건 내 취향에 안 맞는 일이지만, 운동권의 관성을 직시케 하는 이들의 행동력은 상찬하는 수밖엔 없다. 늘 대중을 염원하면서 막상 대중이 몰려나오면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우리 안의 비관주의를 직시해야 한다. 농민들의 안위가 걱정되면서, 시민들의 연대에 엄청나게 감동했다. 8년. 우리의 세계는 이만큼 달라졌다. 8년 동안 대중에게 각 부문의 가치를 환기하고 설득하기 위해 애써온 사람들의 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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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대첩을 보며 활동가의 역할을 생각하기
남태령 대첩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집회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흔한 논리를 시민들이 나서서 부수는 모습. SNS 등에서는 전장연 시위와 민주노총의 파업에까지 연결되어, 집회나 시위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막는 탄압이 시민들의 불편의 원인이며, 이에 대해 앞으로는 집회 측이 아니라 경찰에게 항의하겠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그 흔한 ‘불법집회’ 프레임에 대해서도, 민주주의 국가에 불법집회가 어딨냐며 응수한다. 사실 운동권들이 흔히 공격당하는 레파토리를 대중운동의 장에서 시민들이 나서서 부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는 시민들이 나서서 단체에게 ’깃발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종북 빨갱이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에 대해 스스로 검열하는 정서가 시민들 사이에서도 작동했었다. 그러나 2016년 탄핵집회에서는 ’배후를 색출하라‘는 이야기에 시민들이 너도나도 깃발을 만들어 들고 나왔다. ’내가 배후다‘라고 외치며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고나오는 항의행동은, 종북 빨갱이, 전문 시위꾼들을 배후로 삼는 전통적인 공격 프레임을 전면으로 조롱하며 무화시키는 기발한 기획이었다. 이번에는 불편함은 시위의 주체들 때문이 아니라, 시위를 보장하지 않는 경찰과 정부의 문제라고 시민들이 나서서 이야기하고 있다. 또 하나의 프레임을 부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변화들이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흔히 시민들을 주체성 없고 정체없는 집단으로 쉽게 상정하곤 하지만, 사실 다이나믹한 한국의 집회시위 역사에서 시민들 또한 운동의 경험이 축적되고 있다. 시민들은 이전의 운동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반성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 운동 내부에서는 부술 수 없는 논리들이 대중운동의 장에서는 부숴진다. ‘대중’이 발화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시민들은 ‘순수한 대중’이라는 이미지조차도 전략적으로 활용할 줄 안다.  나는 대중운동이 분출하는 장에서만 가능한 진일보가 있다고 믿는다. 물론 시위에서 나오는 급진성이 대중운동이 끝난 이후로도 일상적으로 꾸준히 전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운동의 장에서만 가능한 진일보라는 것이 분명히 있고, 그런 것들은 회귀하지 않는다. 2008년에는 ‘배후세력’ 프레임이 먹혀들어갔지만, 2016년에 ‘배후세력 색출’이라는 프레임이 파괴된 뒤, 2024년에는 그 프레임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처럼. 그런 부분들에 주목한다면, 대중운동의 장에서 활동가들이 해야 할 역할들이 좀 더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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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의 양가감정] 나도 '우리' 안에 포함될 수 있나요?
🎶 추천곡 🎶 black eyed peas <where is the love> '그냥 사람들'의 논의되지 못한 삶들 지난해 역대급 세수 펑크를 기록했다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매번 역대급을 달고 나와 이젠 익숙해진 걸까. 여야 모두 감세로 뜻을 모았다. 올해 7월, 정부는 ‘2024년 세법 개정안’을 발표했고 그 중 상속세 개편이 핵심이었다. 상속재산에서 공제하는 액수를 늘리고, 세율과 과표구간을 조정하여 ‘중산층’의 상속 부담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개편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이들은 초고액 자산가들이었다. 개편된 내용에 따르면 상속재산이 100억  원 이상인 고액 자산가들의 혜택이 늘어났다. 100억원 이상인 경우 세금이 23% 줄었고, 200억 원 상속 시에는 효과가 점점 더 커졌다. 상속세 개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전체 피상속인의 6.3%, 약 1,200명 -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약 0.00002% - 에 불과하다. 국회에 국민을 대변해 입법자로 나선 사람들과 나라의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의 논의 테이블에는, 초고액 자산가들 혹은 그들을 위한 의제가 놓여있다. 중산층을 위한다는 껍데기 속 본질은, 초고액 자산가들을 위함이다. 상속세와 관련된 논의는 국민의 99.99%의 ‘그냥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었다. 반면 딥페이크, N번방 등은 어떠한가. - 20대 여성에서 가장 와 닿는 이슈를 가져왔을 뿐 범죄나 사회 문제의 경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님을 알아주시길 -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건이며, 피해자의 규모조차 파악이 어려운 딥페이크 범죄는 오히려 예산이 삭감되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새로운 사회문제를 매번 접한다. ‘와 이 이슈 정말 역대급으로 심각하다. 관심 가져야겠다.’ 그리고 다른 이슈를 만나면 또다시 나는 ‘와 이 이슈 정말 역대급으로 심각하다. 관심 가져야겠다.’ 그리고 다른 이슈를 만나면 ‘'와 이 이슈 정말 역대급으로 심각하다. 관심 가져야겠다.’ 그리고 또 다른 이슈를 만나면…. 이와 같은 상황의 무한 반복. 매번 역대급을 갱신하는 사회에, 내가 모르는 또 역대급 최악이 있는 사회에 역겨움을 느낀다. 이와 같은 ‘그냥 사람들’의 이야기는 논의조차 되기 어렵다. 당연하게도 ‘그사세’의 공론장에는 올라가기도 어렵다. 여전히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의제들은 널리고 널렸다. 시민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계엄 선포된 이후 나는 친구들과 함께 광장에 나갔다. 친구, 친구의 친구, 그의 친구, 또 그의 친구들이 모였다. 미리 만나 버려진 종이박스에 각자가 원하는 구호를 담았다. 학교 앞 현수막 전문점에서 깃발도 만들었다. 학생들이 모였기에 학교의 특색을 담으면서도, 그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특별하지 않은 학생임을 담고 싶었다. 누구든 배제되지 않는 단어를 찾기 위해 1시간이 넘도록 회의가 이어졌고 우리는 ‘그냥 학생들’이라는 문구를 달고 광장으로 나아갔다. 가는 길에 만난 수능을 본 고3 학생과 그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떡을 나눠주셨고, 학교 깃발을 보고 선배님들과 학우분들을 만나 응원의 이야기도 들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그냥 학생들’에 많은 호응을 해주셨다. “그냥 학생들이래~ 맞지, 그냥 학생일 수도 있네~” 모두들 ‘그냥 시민’으로서  광장에 모였다. 질서정연했고 민주적이었고 선진적이었다.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고, 노래에 맞추어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무드등, LED 촛불, 크리스마스 트리등, 응원봉 등 다양해진 촛불들에 민주주의가 물씬 느껴졌다. 옆 사람이 찬 바닥에 그냥 앉으니 자신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가방에서 꺼내 준 고등학생들, 조심히 지나가라며 밝은 웃음으로 교통 정리를 해주는 경찰들, 밀집도가 높아지자 자발적으로 간격을 벌리는 시민들. 계엄이라는 수단을 들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권위주의에 맞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장 선두에서 등불을 밝혔다. 이후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윤석열 퇴진으로 한마음이 된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고 박수쳤다. 한 페미니스트가 나와,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 윤석열이 성차별주의자임을 규탄하자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누군가는 침묵으로, 누군가는 눈짓으로,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어 페미니스트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음을 드러냈다. 민주주의의 한가운데에서 또다시 권위주의가 자행했다. ‘시민이 승리’라는 구호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시민이 존재하는 자리였다. 그사세에서만 일어나는 ‘논의되지 못함’의 행태는 광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학생사회에서의 광장 계엄이 선포되기 2주 전, 캠퍼스 중앙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외벽에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이 붙었다. (제목 :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려하는 중앙대학교 교수들의 시국선언문) 시국선언문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지 말라는 학생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한편, 이 시국선언문이 붙은 중앙도서관 바로 앞에는 ‘의혈탑’이 자리 잡고 있다. 4•19 혁명 당시 중앙대 학생 5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1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6명의 선배를 기리고 그들이 지킨 민주주의를 위해 의혈탑을 세웠다. 비단 중앙대학교만의 일은 아닐 테다. 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다쳤고 그들로 인해 민주주의를 바로 설 수 있었다. 학생사회는 항상 선두이자 핵심이었다. 계엄이 선포된 후 학교 곳곳에 대자보들이 붙었다. 학생 개인이 손으로 쓴 손자보부터 학과 차원에서 쓴 대자보, 동아리에서 쓴 대자보, 교수들이 쓴 대자보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이와 동시에 수업 때 계엄에 대해 언급한 교수들을 신고하는 일도 일어났다. 학내 커뮤니티에는 대자보 목소리를 응원하는 학생들과 이를 비판 혹은 비난하는 학생들이 동시에 존재했다. 학생사회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강해지자, 총학생회는 재적 중인 모든 학생들이 모이는 ‘학생총회’를 개최했다. 학생사회는 얼어가고 있는 걸까. 학생총회의 정족수는 재학 인원 중 10%인 2,500명, 결국 절반밖에 모이지 못해 학생총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총회 이후에 진행하고자 했던 학생들의 자유발언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여의도 광장에서 들었던 불편한 감정이 이어지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핫팩과 친구들의 온기에 의지하며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학생사회에서만큼은 탄핵 이후의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가 무엇인지,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광장이 우리에겐 필요했다. 그리고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박다안 학우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학내 청소노동자의 이야기로 시작한 발언은, 민주주의 사회를 이륙하기 위한 우리의 다짐으로 끝맺었다. 탄핵만이 우리의 목표가 아님을, 탄핵 이후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반응처럼, 학생들의 비난이 난무했다. 탄핵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청소노동자 얘기는 존재할 수 없었다. 박다안 학우의 자유발언 전문 광장에서의 양가감정 각양각색의 깃발들, 직접 만들어 개인의 색채가 가득 담긴 피켓들과 개성이 가득 담긴 촛불(의 대체재)의 다양성에서 안도감과 아름다움을 느꼈지만, ‘탄핵’이 아니면 다른 주제에 대해서 말하자는 그 공기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광장에서 탄핵을 외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생각이 많아졌다. 6년 전에도 광화문에 나가 ‘박근혜 하야’를 외쳤던 사람들이 이곳에서도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탄핵 이후의 국면을 이야기해야 한다. 민주주의 재건은 별개의 일이며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광장에서 탄핵 이후에 변해야 할 제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별안간 나는 ‘탄핵 반대 지지자’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탄핵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룰이 존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모여 한목소리로 소리를 내는 것이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윤석열 퇴진’이라는 두 단어로 모든 게 간결해지는 것이 언짢았다. 그 속에 논의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기에 불편했다. 윤석열을 뽑은 것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정계에 입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흔쾌히 받아준 것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선거로, 우리의 권력으로 만들어낸 그가 우리에게 계엄으로 위협을 가했다. 그 권력을 바로 다잡아야 하는 것도 우리이며, 이전과 같은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하는 것도 우리다. 논의해야만 하는 것은 퇴진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전반이다. 그들에게서만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위헌적인 계엄 선포에 맞서 민주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자부심도 느꼈지만, ‘촛불’에 담긴 평화로워야 한다는 메시지는 불편했다. 악을 평화로,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상적이기도 하다. 허나 광장의 현장에서는 흐트러진 질서를 용납하지 못했기도 하다. 학생총회에서 학생들의 자유발언 때 학생의 말투로 비난을 가한 자들이 존재했다. 학과에 누가 되었다며 사과하라는 담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광장에서, 우리는 반드시 평화롭고 질서 있고 선진적이어야 했다. 광장을 대표하는 그들만의 기준으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살다, 평일 저녁 혹은 주말에 나오는 것이 애달팠다. 하지만, 이 정도 마지노선에만 움직이는 사람들에 싫증도 났다. 최악만은 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살이가 힘들어 세상일에 관심 갖지 않는 것에 한편으론 이해도 하지만, 이것이 반복되고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이상적인 사회를 합의하기 위해 광장에서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반복되는 정치 사태, 이제는 지겹지 않은가. 최악만을 피하고자 하는 이에겐 ‘더 나은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우리’ 안에 포함될 수 있나요? ‘시민이 승리’라는 단어를 외치며 정치적 효능감을 느꼈지만, 시민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떠올리며 회의감도 들었다.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라는 말에, 과연 우리는 모두를 담아내고 있었는가? 모든 영역에서 차별하지 않는 ‘우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자신을 노래방 도우미라고 소개한 시민의 발언이 요 며칠 계속 맴돈다. “나도 ‘우리’ 안에 들어갈 수 있나요?”라고 외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노동의 많은 영역을 이주민들이 책임지고 있음에도, 시위의 현장에서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줄어들지 않는다. 친구에게 ‘물살이*’라는 단어를 배운 이후로 ‘국민이 개돼지입니까?’라는 말에 자꾸 멈칫한다. *물살이 : 돼지는 ‘돼지고기’와 ‘돼지’가 엄연히 다른 존재로서 자리한다. ‘고기’라는 단어에는 ‘식용하는 동물의 살’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반면 물고기는 식용이라는 기준에 따라 변하는 단어가 아니다. 물에 사는 수많은 어류를 모두 물고기라고 지칭한다. 이것에서 시작된 종평등 언어. 나는 이번 광장에서 기쁨과 안도의 눈물도 흘렸고 분노와 애달픔의 눈물도 흘렸다. 양가감정을 안고 매주 광장으로 나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 위치했지만, 외로움을 느꼈다. 6년 전 혹은 더 이전보다 작금의 광장이 더 민주적이라는 것도 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민주적으로 투쟁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더 나아졌다 하여, 더 낫다고 하여 안도하고 싶지 않다. 나는 차별과 배제 없는 완전해진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도 이 감정을 안고 광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의도에서의 ‘우리’가 확장된 모습과 남태령에서의 계층을 망라한 연대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수(질서)적인 형태로 진보되는 사회를 마주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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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계, 다시 만날 세계
12/22 한남동 대통령 관저 부근, 집회 막바지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따라 불렀다. 가사를 흥얼거리다 집회의 순간을 정리해보았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 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중략)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가사 중 12/21일 동짓날 남태령. 그 곳에서 긴 밤 지새운 이들을 떠올린다. 영하 6도, 사방에 어둠으로 가득하고 경찰차 바리케이트가 쳐진 날이다. 이 곳에 고립된 시민들은 날이 밝기까지 긴 밤을 지샜다. 이대로 꼼짝없이 고립되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찰나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일제히 남태령고개로 넘어와 집회에 자리했다. 28시간 뒤, 물러나지 않을 것 같던 경찰차 바리케이트는 시민들의 힘으로 물러갔다. 동학농민이 넘지 못한 우금치를 후대가 넘은 순간이자 시민들의 승리를 눈으로 목도한 순간이기도 하다. 트랙터를 몬 농민들은 남태령을 지나 대통령 관저 부근 한남동으로 향했다. 시민들의 호위와 응원을 받으며 끝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광장에 모인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농민, 동물권, 장애인, 어린이, 참사유가족, 노인 등. 다시 만날 세계를 만나기까지 가사처럼 숱한 슬픔을 지나온 이들이다. 윤석열 정부 이후 이들이 나아갈 미래의 벽은 막막하여 빛을 볼 수 없었다. 지나가지 않을 깊은 어둠을 마주했다. 그보다 차가운 현실정치의 냉담함을 오롯이 홀몸으로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아랑곳않고 함께 연대했다. 먹을 것으로, 발언으로, 후원으로, 손난로로, 자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서로를 돌보았다. 보이지 않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추위는 견딜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촛불을 넘어 꺼지지 않는 LED 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추위에 아랑곳 않고 다시 광장에 모였다. 아니 모인 곳 어디든 광장이 되어 계엄령으로 무너진 민주주의의 본질을 회복했다.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고개 그리고 한남동 관저 어디든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목소리 외쳤다.  산 자는 죽은 자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내는 이들이다. 산 자는 목격한 이들이고 역사를 만들어간다.  불평등에 억눌린 여성들의 분노와 연대를. 성소수자가 섰던 시청광장을 극우개신교에게 내어주며 차별을 보인 서울시청의 폭력을. 20년 넘는 시간동안 이동권 투쟁을 하며 변화의 물결을 이어오던 전장연을. 세월호 폭우로 숨진 세 모녀를 이태원과 아리셀 그리고 채상병 등 참사를 겪은 유족들에게 사과없이 거부권을 남발한 채 등한시하던 윤석열의 타자화를. 서울로 넘어오던 농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찰들을. 기후위기의 악당이 되었음에도 이를 등한시하던 정부의 소홀함을 산 자는 광장을 통해 목격하고 역사를 이어나갔다. 나 역시 이들을 보며 지역농민들의 목소리에 소홀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물, 전기, 가스를 비롯농산물 등 지역의 자원을 착취하는 서울 중심주의를 돌아보고, 이주노동자와 원주민의 문화나 언어 차이에 이질감에 불쾌를 표하던 때를 반성하게 된다. 어쩌면 변화는 나와 나를 마주한 세계를 돌아볼 때 출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옆에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응원봉을 들고 다만세를 따라부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50대가 20대였던 시절에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금의 20대가 따라 부르고 20대를 지나 50대가 된 이들이 응원봉을 들고 다만세를 따라 부르는 모습은 생경하면서도 이미 다시 만난 세계에 접어든 것 같았다.  나이에 권위를 부여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이로만 여겼던 중년도 변화의 물결에 따라가고 있음을 보았다. 작은 변화는 아주 가까이서 일어나고 있었다. 광장은 다시의 장이겠다.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세대의 벽이 허물어지고, 의제를 만나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잃었던 기회를 얻고 광장에서 ‘다시‘ 만난 이들 은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엄혹한 사회의 전언을 부수고 다시,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고로 이 시대에 광장이 꼭 필요하다. 기회를 잃은 이들이 다시 기회를 갖고 발언하기 위해, 연대하기 위해선 광장이 필요하다. 단, 그저 광장에 있었다는 만족감에 머물러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이 자리에 내려오고 차기 대선 후보가 대통령 자리에 앉았을지라도 세상은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8년 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이후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의 민주주의의 괴리가 일어났다. 탄핵에 쏠려 정치,경제,노동, 기후위기,이주노동자, 어린이, 여성,소수자 등의 의제가 일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일상 속에서 광장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수 천명이 모이지 않아도, 꼭 물리적 광장이 아닐지라도 적은 수로나 온라인에서도 광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님을 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기에 우린 가능성을 염두한다. 가능성이란 빈 틈으로 의견을 주고받고 틈을 메우는 시도가 광장에서 이뤄지기에. 감정적인 혐오를 지양하고 오늘날 집회에서 낸 목소리를 더욱 의제로 빌드-업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시민들의 관심과 목소리를 내려는 동력이 필요한 이유다. 아울러 다시 만난 세계는 앞으로 다시 만날 세계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은 다시 만날 세계가 다시 절망으로 빠지지 않도록, 시민은 지금도 변화한다는 사실을 염두하며 상처입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길 바란다.  우리는 탄핵 이후의 삶을 그려야 할 것이다. 희미한 빛을 쫓아가 기회는 자신이 품은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때 마주할 때 생긴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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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을 든 시민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열었다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화염병이 촛불로, 촛불이 응원봉으로 변하기까지 40년이 지났다. 격렬한 저항의 시대를 지나 평화로운 시위가 자리 잡았고, 이는 다양한 시민 참여로 발전했다. 이 모두가 시민이 만들어낸 성과이자 역사이다. 6공화국의 과제와 한계 :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면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시민이 광장에서 계엄군을 설득하고 탄핵을 이뤄내는 광경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시민이 서로 따뜻한 커피와 식사를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온 이들을 위해 버스를 대절하며, K-팝 음악에 맞춰 춤추고 구호를 외치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광경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내재화한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한 지도자들이 오랜 준비 끝에 추진한 계엄조차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만을 경험한 젊은 세대는 계엄 자체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공화국의 성적표는 실망스럽다. 6공화국의 대통령들 가운데 3명이 탄핵 소추를 당했고, 이 중 2명은 탄핵이 인용되었으며, 2명은 감옥에 갔다. 가족이 감옥에 간 사례도 2건이나 된다. 군인, 정치인, 기업인, 변호사, 검사라는 대통령의 출신을 보면 우리 사회가 여전히 4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87년 이전을 살아온 정치, 경제, 관료 엘리트 집단 간 갈등은 진보와 보수라는 구도로 포장되어 국민을 갈라치지만, 이는 국민의 일상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제왕적 대통령의 자의적 권력 행사는 사회, 경제, 안보,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요인으로까지 증명되었다. 시민 중심 민주주의로의 전환 : 시민의회 민주주의의 여정에서 1987년에 독재자의 권력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에게 넘어간 것은 커다란 변화이자 성취였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주의를 내재화한 국민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한 단계 더 발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2016년 첫 번째 탄핵의 상징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었다면, 2024년 두 번째 탄핵의 상징은 다채로운 응원봉이었다.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여러 역경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힘을 믿고 다양성을 포용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이제 국민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도화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행정과 의회의 권력은 시민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8년 전 촛불 시위 이후 잠시 열렸던 시민 참여와 협력의 공간을 다시 확대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정권 교체로 중단되었던 정부, 지자체, 마을, 시민사회 등 사회 곳곳에서 시민 공론장과 공론화, 시민 참여 플랫폼과 민관 협치의 장을 다시 열고 더욱 성숙시켜야 한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대화하는 단계를 넘어, 이를 정책과 사업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론화 사업과 같은 프로그램의 높은 비용과 형식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역 및 의제별로 상시 운영되는 시민의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구 구성을 반영해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 주요 현안과 미래 과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숙의하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시민의회는 다양한 방식과 기간으로 운영되며, 행정과 의회를 견제하고 협력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며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시민의회를 통해 공개하는 정보와 숙의를 통해 발견한 다양한 관점은 우리 사회를 더욱 성숙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더불어 계엄과 탄핵의 순간에 국민이 가졌던 의문을 해소해야 한다. 군인들이 국회의 창을 깨고 본회의장으로 난입한 순간 어떤 국민은 "왜 국민이 스스로 계엄을 해제할 수 없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본회의장에서 탄핵을 의결하려던 때 나타나지 않는 국민의힘 의원을 보며 "왜 국민은 저들에게만 의결을 맡겨야 하는가? 그리고 왜 국민의 뜻에 반하는 국회의원을 지켜만 봐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국회의 순간이 끝나고 헌재의 시간이 왔다고 모두가 이야기하던 순간에 "왜 헌재의 결정을 다시 기다려야 하며 국민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가?"라는 의문도 생긴다. 이 의문의 답도 우리는 다시 찾아야 한다. 다채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과제 또한, 사회를 분열시키는 플랫폼과 알고리즘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시민이 계엄을 막아내고 탄핵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을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인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첫 국가로 만들었다. 허위 정보와 혐오 발언을 확산하는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은 미얀마에서 소수민족의 대학살을 초래하기도 했다. 혐오와 여론 조작에 취약한 플랫폼이 분노를 증폭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상황을 막으면서도, 시민이 서로 연결되어 협력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사회 현안에 대해 시민의 목소리를 모으고, 대화의 장을 여는 공간, 시민이 이슈를 모으고 팩트체크를 하며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안전한 대화가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는 안전하고 믿을 수 있고 영향력 있는 시민 광장으로서의 플랫폼이 절실하다. 사회 통합을 위한 노력도 필수적이다. '국민'과 '비국민'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갈라치는 세력을 단호히 처단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대화하고 협력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가 직면한 사회, 경제, 국제, 기후 위기와 같은 거대한 문제는 시민의 참여와 협력 없이는 극복할 수 없다. 혐오와 갈등, 무관심과 각자도생을 극복하고, 신뢰와 협력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시민의 힘으로 우리 사회에 축적해야 한다. 시민이 만드는 민주주의의 미래 촛불이 흑백이라면, 응원봉은 다채롭다. 민주주의를 내재화하고 미래를 살아가는 시민의 열망 속에서, 우리는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기회를 맞이했다. 한편, 지금은 비인간과 결합한 신인류를 상상하는 기술 엘리트들의 세상을 막고, 존중과 포용, 신뢰와 협력으로 이루어진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판가름하는 문명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이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응원봉을 든 시민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며, 동시에 시민 스스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 기회는 발전한 자본주의, 제도화된 민주주의, 자의적인 법치주의의 한계를 경험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시민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다. 연결하고 협력하는 시민이 나서서 멋진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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