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광장에서의 양가감정] 나도 '우리' 안에 포함될 수 있나요?

20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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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호기심 가득 독일어문학•사회복지 학부생 &.&

🎶 추천곡 🎶 black eyed peas <where is the love>

'그냥 사람들'의 논의되지 못한 삶들

지난해 역대급 세수 펑크를 기록했다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매번 역대급을 달고 나와 이젠 익숙해진 걸까. 여야 모두 감세로 뜻을 모았다. 올해 7월, 정부는 ‘2024년 세법 개정안’을 발표했고 그 중 상속세 개편이 핵심이었다. 상속재산에서 공제하는 액수를 늘리고, 세율과 과표구간을 조정하여 ‘중산층’의 상속 부담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개편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이들은 초고액 자산가들이었다. 개편된 내용에 따르면 상속재산이 100억  원 이상인 고액 자산가들의 혜택이 늘어났다. 100억원 이상인 경우 세금이 23% 줄었고, 200억 원 상속 시에는 효과가 점점 더 커졌다. 상속세 개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전체 피상속인의 6.3%, 약 1,200명 -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약 0.00002% - 에 불과하다.

국회에 국민을 대변해 입법자로 나선 사람들과 나라의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의 논의 테이블에는, 초고액 자산가들 혹은 그들을 위한 의제가 놓여있다. 중산층을 위한다는 껍데기 속 본질은, 초고액 자산가들을 위함이다. 상속세와 관련된 논의는 국민의 99.99%의 ‘그냥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었다. 반면 딥페이크, N번방 등은 어떠한가. - 20대 여성에서 가장 와 닿는 이슈를 가져왔을 뿐 범죄나 사회 문제의 경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님을 알아주시길 -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건이며, 피해자의 규모조차 파악이 어려운 딥페이크 범죄는 오히려 예산이 삭감되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새로운 사회문제를 매번 접한다. 와 이 이슈 정말 역대급으로 심각하다. 관심 가져야겠다.’ 그리고 다른 이슈를 만나면 또다시 나는 와 이 이슈 정말 역대급으로 심각하다. 관심 가져야겠다.’ 그리고 다른 이슈를 만나면 '와 이 이슈 정말 역대급으로 심각하다. 관심 가져야겠다.’ 그리고 또 다른 이슈를 만나면…. 이와 같은 상황의 무한 반복. 매번 역대급을 갱신하는 사회에, 내가 모르는 또 역대급 최악이 있는 사회에 역겨움을 느낀다. 이와 같은 ‘그냥 사람들’의 이야기는 논의조차 되기 어렵다. 당연하게도 ‘그사세’의 공론장에는 올라가기도 어렵다. 여전히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의제들은 널리고 널렸다.



시민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계엄 선포된 이후 나는 친구들과 함께 광장에 나갔다. 친구, 친구의 친구, 그의 친구, 또 그의 친구들이 모였다. 미리 만나 버려진 종이박스에 각자가 원하는 구호를 담았다. 학교 앞 현수막 전문점에서 깃발도 만들었다. 학생들이 모였기에 학교의 특색을 담으면서도, 그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특별하지 않은 학생임을 담고 싶었다. 누구든 배제되지 않는 단어를 찾기 위해 1시간이 넘도록 회의가 이어졌고 우리는 ‘그냥 학생들’이라는 문구를 달고 광장으로 나아갔다. 가는 길에 만난 수능을 본 고3 학생과 그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떡을 나눠주셨고, 학교 깃발을 보고 선배님들과 학우분들을 만나 응원의 이야기도 들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그냥 학생들’에 많은 호응을 해주셨다. “그냥 학생들이래~ 맞지, 그냥 학생일 수도 있네~” 모두들 ‘그냥 시민’으로서  광장에 모였다.

질서정연했고 민주적이었고 선진적이었다.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고, 노래에 맞추어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무드등, LED 촛불, 크리스마스 트리등, 응원봉 등 다양해진 촛불들에 민주주의가 물씬 느껴졌다. 옆 사람이 찬 바닥에 그냥 앉으니 자신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가방에서 꺼내 준 고등학생들, 조심히 지나가라며 밝은 웃음으로 교통 정리를 해주는 경찰들, 밀집도가 높아지자 자발적으로 간격을 벌리는 시민들. 계엄이라는 수단을 들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권위주의에 맞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장 선두에서 등불을 밝혔다.

이후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윤석열 퇴진으로 한마음이 된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고 박수쳤다. 한 페미니스트가 나와,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 윤석열이 성차별주의자임을 규탄하자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누군가는 침묵으로, 누군가는 눈짓으로,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어 페미니스트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음을 드러냈다. 민주주의의 한가운데에서 또다시 권위주의가 자행했다. ‘시민이 승리’라는 구호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시민이 존재하는 자리였다. 그사세에서만 일어나는 ‘논의되지 못함’의 행태는 광장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학생사회에서의 광장

시국선언문 서론 : 대한민국이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오늘 우리의 위기는 정권의 무능이나 정책의 실패를 논할 단계를 넘어섰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마주한 것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와 민주주의의 붕괴 위험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떤 정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민주주의의 퇴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처한 누란의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 중앙대학교 교수들은 비장한 심정으로 시국선언에 나선다.

계엄이 선포되기 2주 전, 캠퍼스 중앙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외벽에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이 붙었다. (제목 :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려하는 중앙대학교 교수들의 시국선언문) 시국선언문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내지 말라는 학생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한편, 이 시국선언문이 붙은 중앙도서관 바로 앞에는 ‘의혈탑’이 자리 잡고 있다. 4•19 혁명 당시 중앙대 학생 5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1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6명의 선배를 기리고 그들이 지킨 민주주의를 위해 의혈탑을 세웠다. 비단 중앙대학교만의 일은 아닐 테다. 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다쳤고 그들로 인해 민주주의를 바로 설 수 있었다. 학생사회는 항상 선두이자 핵심이었다.

계엄이 선포된 후 학교 곳곳에 대자보들이 붙었다. 학생 개인이 손으로 쓴 손자보부터 학과 차원에서 쓴 대자보, 동아리에서 쓴 대자보, 교수들이 쓴 대자보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졌다. 이와 동시에 수업 때 계엄에 대해 언급한 교수들을 신고하는 일도 일어났다. 학내 커뮤니티에는 대자보 목소리를 응원하는 학생들과 이를 비판 혹은 비난하는 학생들이 동시에 존재했다. 학생사회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강해지자, 총학생회는 재적 중인 모든 학생들이 모이는 ‘학생총회’를 개최했다.

학생사회는 얼어가고 있는 걸까. 학생총회의 정족수는 재학 인원 중 10%인 2,500명, 결국 절반밖에 모이지 못해 학생총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총회 이후에 진행하고자 했던 학생들의 자유발언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여의도 광장에서 들었던 불편한 감정이 이어지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핫팩과 친구들의 온기에 의지하며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학생사회에서만큼은 탄핵 이후의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가 무엇인지,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광장이 우리에겐 필요했다. 그리고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박다안 학우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학내 청소노동자의 이야기로 시작한 발언은, 민주주의 사회를 이륙하기 위한 우리의 다짐으로 끝맺었다. 탄핵만이 우리의 목표가 아님을, 탄핵 이후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한 반응처럼, 학생들의 비난이 난무했다. 탄핵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청소노동자 얘기는 존재할 수 없었다.



박다안 학우의 자유발언 전문



광장에서의 양가감정

각양각색의 깃발들, 직접 만들어 개인의 색채가 가득 담긴 피켓들과 개성이 가득 담긴 촛불(의 대체재)의 다양성에서 안도감과 아름다움을 느꼈지만, ‘탄핵’이 아니면 다른 주제에 대해서 말하자는 그 공기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광장에서 탄핵을 외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생각이 많아졌다. 6년 전에도 광화문에 나가 ‘박근혜 하야’를 외쳤던 사람들이 이곳에서도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탄핵 이후의 국면을 이야기해야 한다. 민주주의 재건은 별개의 일이며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광장에서 탄핵 이후에 변해야 할 제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별안간 나는 ‘탄핵 반대 지지자’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탄핵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룰이 존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모여 한목소리로 소리를 내는 것이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윤석열 퇴진’이라는 두 단어로 모든 게 간결해지는 것이 언짢았다. 그 속에 논의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기에 불편했다. 윤석열을 뽑은 것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정계에 입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흔쾌히 받아준 것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선거로, 우리의 권력으로 만들어낸 그가 우리에게 계엄으로 위협을 가했다. 그 권력을 바로 다잡아야 하는 것도 우리이며, 이전과 같은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하는 것도 우리다. 논의해야만 하는 것은 퇴진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전반이다. 그들에게서만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위헌적인 계엄 선포에 맞서 민주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자부심도 느꼈지만, ‘촛불’에 담긴 평화로워야 한다는 메시지는 불편했다. 악을 평화로,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상적이기도 하다. 허나 광장의 현장에서는 흐트러진 질서를 용납하지 못했기도 하다. 학생총회에서 학생들의 자유발언 때 학생의 말투로 비난을 가한 자들이 존재했다. 학과에 누가 되었다며 사과하라는 담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광장에서, 우리는 반드시 평화롭고 질서 있고 선진적이어야 했다. 광장을 대표하는 그들만의 기준으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살다, 평일 저녁 혹은 주말에 나오는 것이 애달팠다. 하지만, 이 정도 마지노선에만 움직이는 사람들에 싫증도 났다. 최악만은 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살이가 힘들어 세상일에 관심 갖지 않는 것에 한편으론 이해도 하지만, 이것이 반복되고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이상적인 사회를 합의하기 위해 광장에서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반복되는 정치 사태, 이제는 지겹지 않은가. 최악만을 피하고자 하는 이에겐 ‘더 나은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우리’ 안에 포함될 수 있나요?

‘시민이 승리’라는 단어를 외치며 정치적 효능감을 느꼈지만, 시민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떠올리며 회의감도 들었다.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라는 말에, 과연 우리는 모두를 담아내고 있었는가? 모든 영역에서 차별하지 않는 ‘우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자신을 노래방 도우미라고 소개한 시민의 발언이 요 며칠 계속 맴돈다. “나도 ‘우리’ 안에 들어갈 수 있나요?”라고 외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노동의 많은 영역을 이주민들이 책임지고 있음에도, 시위의 현장에서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줄어들지 않는다. 친구에게 ‘물살이*’라는 단어를 배운 이후로 ‘국민이 개돼지입니까?’라는 말에 자꾸 멈칫한다.

*물살이 : 돼지는 ‘돼지고기’와 ‘돼지’가 엄연히 다른 존재로서 자리한다. ‘고기’라는 단어에는 ‘식용하는 동물의 살’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반면 물고기는 식용이라는 기준에 따라 변하는 단어가 아니다. 물에 사는 수많은 어류를 모두 물고기라고 지칭한다. 이것에서 시작된 종평등 언어.

나는 버려진 박스를 재사용하였고, 친구는 현장에서 받은 피켓을 버리지 않고 매주 재사용하다보니 일부 훼손되어 있기도 했다. 현장에서 쉽게 버려지는 피켓들에 내 마음만 이리 초조한 것인지...

나는 이번 광장에서 기쁨과 안도의 눈물도 흘렸고 분노와 애달픔의 눈물도 흘렸다. 양가감정을 안고 매주 광장으로 나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 위치했지만, 외로움을 느꼈다. 6년 전 혹은 더 이전보다 작금의 광장이 더 민주적이라는 것도 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민주적으로 투쟁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더 나아졌다 하여, 더 낫다고 하여 안도하고 싶지 않다. 나는 차별과 배제 없는 완전해진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도 이 감정을 안고 광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여의도에서의 ‘우리’가 확장된 모습과 남태령에서의 계층을 망라한 연대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수(질서)적인 형태로 진보되는 사회를 마주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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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된 비시민들이 목소리를 내어 시민이 되어가는 과정이 민주주의가 심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광장은 그 공간이 열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가 비시민이 여전히 배제되는 87년체제의 보수적인 원복이 될지, 비시민이 시민주체가 되는 87년체 너머로 나아가는 길일지는 이제부터 하는 일들에 달려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해주신 양가감정이 저도 느꼈던 감정이라 많이 공감되었어요.
어떤 모습의 사람이든, 자기다운 모습으로 광장에 설 수 있기를, 광장이 모두를 하나의 색으로 칠하기보다는 저마다의 빛을 존중해주기를 바랍니다. 탄핵의 광장을 생각하며 탄핵 이후를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 감사해요.

불로츠나야 비회원

탄핵을 넘어 우리라는 단어에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 지치지 않기를 바라요 🦾

광장에서 외치는 민주주의는 뜨겁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배제와 침묵이 일어나는 건 아이러니.
‘우리’라는 이름 안에 누가 포함되고, 누가 제외되는 걸까?
광장이 열려 있다면서도 특정 주제만 말할 수 있는 이 분위기,
진짜 민주주의가 맞나 싶다.

다양성을 외치면서 다른 목소리는 밀어내는 이중잣대, 이제는 바꿔야 하지 않을까?
탄핵 이후의 민주주의, 더 넓은 ‘우리’를 만들 수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그래야 진짜 광장이 될 테니까. 🙌

논의해야만 하는 것은 퇴진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전반이다. 그들에게서만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누리 교수님께서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를테면 광장에서 같은 학교 학생과 선생이 함께 윤석열 퇴진을 외치지만 학교로 돌아갔을 때 선생이 권위주의로 학생을 짓누른다면? 민주주의가 일상으로 스미지 못하고 겉도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8년 전 경험했습니다. 반성과 성찰보다 팬덤 민주주의로 나뉘어진 문제를요. 반성과 성찰이 비록 더디게 이뤄지더라도 나아가되 후퇴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광장에서 버려지는 피켓만큼이나 정당들이 민심의 반응을 소모품처럼 버리지 않으려면, 윤석열/한덕수 탄핵이라는 이름에 가리워진 일상 민주주의, 농민, 장애인, 동물권,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 권리를 적극적으로 듣고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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