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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정의를 향한 민주주의의 여러 얼굴
기후정의를 향한 민주주의의 여러 얼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기후위기의 심각함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이어지는 기후변화가 있다’는 문항에 대한 긍정 95%, 인간 활동 때문에 기후변화가 발생했다고 믿는 비율 86%, 기후위기 대응이 미흡하다는 응답 73.5% 등의 수치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기에 대한 인식만큼 시민적 대안 도출을 해내지 못해서일까요? 전문가들의 문제일까요? 시민들을 대의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문제일까요?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원인이 정의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는 사회운동을 말합니다. ‘민주주의'는 기후정의와 떼려야 뗄 수 없이 함께 등장합니다.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필수적이라는 말인데, 이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일까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민주주의의 다양한 의미라는 차원에서 지난 일들을 살펴봄으로써,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실질적 대응의 방향을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복원해야 할 민주주의 기후정의운동에서의 민주주의의 의미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복원'입니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영향 속에서 ‘경제성장’이 사회의 지상명령이 되는 것은 기후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생산은 생존을 넘어 욕망과 축적을 위해 지속불가능한 방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가진 나라, 가진 자의 부를 늘릴 뿐이기 때문에 양극화와 불평등, 탄소배출에 따른 기후위기가 심화됩니다. 부유한 나라, 부유한 계급의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은 점점더 강해지고, 민주주의는 훼손되고 형식화됩니다.  이처럼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자본에 의한 정치·사회의 식민화에서 비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위기로 피해를 얻게 될 다수의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행사하는 민주주의를 복원, 혹은 실현하는 것이 기후정의의 목표가 됩니다.   시민행동으로서의 민주주의 두 번째는 ‘시민행동’입니다. 기후위기를 인식한 시민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및 비영리조직 등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는 다양한 시민행동이 또 다른 민주주의의 의미입니다. 2021년 9월 24일 5만여명이 참가한 ‘9.24 기후정의행진’이 최근의 시민직접행동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400여개 단체와 2,400여명의 추진 위원이 함께 만들어가는 조직위원회에 의하면 “기후정의행동은 정부와 기업의 녹색성장과 탄소중립 정책이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돈벌이 시장을 창출하는 것에 불과한 상황에 맞서, 기후정의를 기치로 기후위기를 초래한 현 체제에 맞서고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싸움”으로 정의됩니다.(9.24 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기후정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말은 시민행동이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의미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세 번째는 다양한 ‘캠페인’과 ‘공론장’입니다. 기후정의을 위한 수많은 캠페인들과 상호 토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국가 탄소중립기본계획'의 최소한의 기준을 책임있는 대상들에게 요구하는 ‘지역에너지넷’의 촉구 캠페인이 진행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물가와 기후위기의 대안으로서의 '1만원 교통패스' 도입을 추진하는 ‘1만원 교통패스연대’의 서명 캠페인, ‘청소년기후행동’의 기후소송 제기 등 다양한 캠페인이 이루어집니다. 시민과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어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도서관의 사례도 있습니다. 시민들은 우주개발의 환경에의 영향, 탈원전의 필요, 대중교통 확충의 필요, 탄소중립농업의 다양한 방법과 가능성, 탄소중립을 위한 녹색교통의 한 가능성으로서의 자전거 이용 활성화,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찬반, 일회용컵보증금제의 필요 등 다양한 기후위기 관련 이슈에 대해 서로 토의하며 정답 혹은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갑니다.  2022년 9월 24일 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기후정의행진 홈페이지 영상 갈무리) 거버넌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네 번째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거버넌스’입니다. 2019년 시민사회의 기후위기 비상선언, 2020년 국회와 지자체의 비상선언을 거쳐, 정부가 탄소중립 목표와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이 제정되고, <2050 탄소중립 녹색성장 위원회(탄중위)가 꾸려졌습니다. 2023년 3월 25일에는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발표습니다. (장윤석, 2023) 이는 사회적 논의를 통해 부족하나마 탄소중립이라는 법과 목표를 정립한 것입니다.  탄소중립기본법에 따르면 탄중위는 “청년, 노동자, 시민사회 등 각 사회계층의 대표성이 반영되도록 구성해야” 합니다.(들썩들썩떠들썩, 2023) 탄중위는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거버넌스 제도인 것입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의 탄중위를 둘러싼 시민사회의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탄중위가 기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체제의 유지를 위한 정부와 자본의 논의 틀이라는 비판, 사회적 합의와 숙의가 정부 책임의 외주화로 기능한다는 비판, 탄중위의 기준과 목표치에 대한 비판 등이 존재하며, 시민사회의 탄중위 불참 후 기후정의행동으로 가시화 되었습니다.(구준모, 2021)(오연재, 2021)  다른 한편으로는 숙의와 결합된 더 나은 사회적 대화, 즉 정부와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하는 거버넌스와 공론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됩니다. 한 예로 영국의 기후시민의회는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들의 모임으로 숙의 공론장을 거쳐 보고서를 제출하고, 그 보고서가 의회 정책 권고안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후정의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습니다.(들썩들썩떠들썩, 2023) 탄중위는 법으로 다양한 계층의 대표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국민참여분과의 설치는 시민의 목소리를 더욱 반영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거버넌스를 강조하는 입장에는 다양한 계층의 주장과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민주적 테이블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후정의의 진전이 어렵다는 전제가 작동합니다. 민간위원, 협의체, 시민회의, 공론장 등 다양한 층위를 포함하는 거버넌스 구성의 시도는 그 자체로 바림직한 것입니다. 다만 충분한 시간을 거쳐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권오현, 2023)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탄중위는 정권과 시민의 지지에 따라 제한적인 목표라도 설정하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추진하고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힘이 되거나, 형식화 된 정부 정책의 정당화 기제가 되거나 하는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민참여 제도가 됩니다. 탄중위를 둘러싼 대립하는 시각들은 나름의 이유와 독자적인 합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탄소중립’이라는 비전과 탄중위의 기준 및 목표가 제한적이라는 주장,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공론을 형성하고 제도화 하는 거버넌스의 필요에 대한 주장은 시공간적 맥락에 따라 옳은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때로 공허한 구호로 그치고, 후자는 때로 시민 없는 제도의 형식화로 귀결됩니다. 기후위기에 실질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기후정의로 나아가기 위한 시민적 압력, 그리고 그와 결합된 정치적 제도화를 이뤄야 합니다. ‘기후정의행동’과 ‘탄소중립 거버넌스’의 간극을 좁히는 집단적 실천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기후정의를 위한 체제의 전환이 어려운 양당정치체제 내에서라면, 특히 더 거버넌스 제도 안팎에서의 시민 활동을 활성화 해야 합니다. 2021년 9월 11~12일 개최된 ‘2050 탄소중립위원회 탄소중립시민회의 시민대토론회'(탄중위 유튜브 갈무리)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다섯 번째는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기후 위기에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치권이 제대로 대의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선거에서 정당이 받은 표와 의석수에서의 차이가 큰 불비례성, 공고한 양당체제, 그로 인해 시민들이 대의가 되지 않는 점이 문제입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하더라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되고 작동된다면, 양당제가 아니라 다당제로 이동 할 수 있다면, 기후위기에 대한 실질적 대응의 가능성은 높아지게 됩니다. 공정한 의석배분, 다양한 목소리의 반영, 정책의 질 향상, 지역구도 완화를 기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례대표제 국가들은 “환경정책에서 더 엄격”하고,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대체로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비례대표제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은 9.5%, 승자 독식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45.5%라는 수치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기후활동가 아빠, 2023)  민주주의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가?  이처럼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는 여러 얼굴들을 가지고 있고, 서로 대면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기후위기는 생산력을 중시하고 경제성장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개발 자본주의로 인해 심화됩니다. 시민의 집합적 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토대입니다. 기후정의를 위한 정치 제도화를 강제하기 위한 시민의 집단적인 압력 없이는 체제의 구조적 힘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해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고,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은 집단적인 역량을 강화합니다. 특히 2016년 촛불시위와 같이 시민의 거대한 직접행동은 국가와 자본에 의한 독점 권력을 극복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복원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 힘은 정치 제도 차원의 민주주의가 지금보다 더 나은 조건일 때 체제의 전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양당체제에서는 정치가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의 할 동기가 적습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더욱 잘 대의하는 제도정치적 조건을 마련할 때 기후정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민행동과 제도정치는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적인 두 차원입니다. 분리되어 있다면 시민행동은 휘발되고 제도정치는 형식화되기 쉽습니다. 때문에 이를 매개하고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시민참여의 제도화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다양한 주체를 대의하는 거버넌스 제도의 구성, 집단적인 시민들의 숙의 공론화를 구현하는 공론화 제도의 구성은, 시민행동이 제도화되고, 제도정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실질적인 힘입니다. 물론 거버넌스와 공론장 제도 또한 시민행동이 없을 때 형식화 될 수 있고, 제도정치적 조건이 부재할 때 시민행동의 하나로 환원되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한 차원으로 환원하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여러 차원을 일직선상에 놓고 생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연계된 힘을 발휘 할 수 있도록 할 때 기후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특정한 국면에 민주주의의 어떤 차원이 강조되어야 할 지는 시민의 숙의, 그리고 시민의 집합적 힘에 달려 있습니다.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제도정치 조건 하에서 다양한 시민 활동을 통해 역량강화된 시민들과 전문가 및 이해당사자들이 공론장에서 숙의하여 공론화 하고 거버넌스를 통해 목소리를 낼 때, 기후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기후정의를 위한 제도화, 더 나아가 체제 전환이 가능할 것입니다.  ✏️글 : 람시 /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이사, 캠페인즈팀 리더 / ramsci@parti.coop 이 글은 오마이뉴스, 빠띠 홈페이지,  빠띠 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팩트체커가 돼야 하는 이유
팩트체크는 우리에게 왜 필요할까 팩트체크의 중요성이 국내에 알려진 계기로 이른바 ‘가짜뉴스’를 빼놓을 수 없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허위조작정보와 오보 등이 확산되며 정보의 검증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팩트체크는 이른바 ‘가짜뉴스’를 척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팩트체크는 허위조작정보와 오보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정보를 마주하는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와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의 성장은 시민 누구나 정보의 생산자가 되고, 정보의 공유가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시대가 왔음을 보여준다. 언론이나 전문 교육 등에서 접할 수 있던 정보는 다양한 플랫폼의 성장을 통해 스마트폰만 있다면 어디서든 접할 수 있게 됐다. 누구든 정보를 평등하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플랫폼의 성장은 큰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다양한 플랫폼의 성장을 만났을 때 누구든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은 양날의 검으로 변신한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하게 등장했던 허위조작정보와 오보의 피해 역시 쉽고 빠르게 정보를 확산하는 기술의 역효과로 볼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확산되는 수많은 정보 중 어떤 정보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답을 주는 것이 팩트체크다. 이 글에서는 국내 팩트체크의 현황과 당신이 팩트체커가 돼야 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풀어보려 한다.   시민은 언론사 팩트체크 결과물의 ‘소비자’로 머물러야 할까 당신이 팩트체커가 돼야 하는 이유를 짚기 전에 국내 팩트체크 현황을 간략하게 먼저 다뤄보려 한다. ‘팩트체크’라는 용어의 확산은 JTBC의 저녁종합뉴스 <뉴스룸>과 함께 이뤄졌다. JTBC는 저녁종합뉴스에서 팩트체크 꼭지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며 ‘팩트체크도 뉴스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JTBC의 사례를 보며 다른 매체들이 팩트체크 보도를 작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치인의 발언을 비롯해 다양한 실생활 정보를 검증하며 팩트체크 전문매체를 지향하는 뉴스톱의 활약도 ‘팩트체크’를 사회에 알린 계기였다. 개별 언론사의 활약 외에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SNU팩트체크도 존재한다. SNU팩트체크는 JTBC, 뉴스톱 등 다양한 언론사와 제휴해 검증결과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포털사이트 다음이 뉴스 페이지에서 팩트체크 기사를 종합해 보여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눈치가 조금 빠른 독자라면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공통점을 찾았을 것이다. 바로 ‘언론사’가 쉼 없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뉴스, 커뮤니티, 유튜브 등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접하는 우리는 언론이 팩트체크 기사 쓸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까? 시민은 언제까지나 팩트체크 기사의 ‘소비자’로만 머물러야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정보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 검증됐는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허위조작정보와 오보 앞에서도 검증 여부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면 두려울 이유가 없다. 당신이 팩트체커가 돼야하는 이유와 모든 시민이 팩트체커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모든 시민은 팩트체커다 그렇다면 시민은 어떻게 팩트체커가 될 수 있을까? 모든 기술이 그렇듯이 팩트체크도 교육과 경험을 통해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역량과 기술을 펼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재단법인 팩트체크넷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민의 팩트체크 역량 강화와 시민 참여 팩트체크 활성화를 위해 2020년 11월 동명의 플랫폼을 오픈해 운영중이다.   팩트체크넷은 제휴 언론사 소속 언론인을 비롯해 환경, 데이터 등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팩트체커와 팩트체커 양성교육 이수자, 팩트체크 공모전 수상자 등으로 구성된 시민팩트체커를 합쳐 50여 명의 팩트체커가 활동 중이다. 이뿐만 아니라 플랫폼의 회원이라면 누구나 검증이 필요한 정보를 제안할 수 있고, 제안된 정보는 팩트체크넷에서 활동중인 팩트체커들이 검증하게 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나도 시민팩트체커로 활동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을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모든 시민은 팩트체커가 될 수 있고, 돼야 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역시 한 명의 시민이고, 모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 경험을 바탕으로 객관적 자료를 활용해 팩트체크를 진행할 수 있다. 또한 혼자서 하는 어려운 팩트체크를 넘어 함께 정보를 검증하는 협업 팩트체크 문화는 모든 시민이 팩트체커가 되는 것만큼 중요하다.   물론 팩트체크에 익숙하지 않은 시민이라면 교육을 통해 천천히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런 분들을 위해 팩트체크넷에서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팩트체크 프로젝트, 팩트체커 양성교육을 진행중이다. 프로젝트, 양성교육에서는 팩트체크 과정에 대해 배우고, 팩트체크 결과물을 전문 멘토의 자문을 거쳐 직접 작성해볼 수 있다.   다양한 허위조작정보에 맞서기 위해선 보다 많은 팩트체커가 필요하다. 허위조작정보의 다양한 해결책 중 가장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해결책은 바로 ‘당신이 팩트체커가 되는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작년에 충북시청자미디어센터 웹매거진에 보냈던 원고를 주섬주섬 꺼내봅니다. 시민 참여 오픈 팩트체크 플랫폼 팩트체크넷은 올해 초 운영을 중단하고, 재단법안 해산 절차에 돌입했는데요. 오픈 팩트체크 플랫폼 실험의 최종 결과와는 별개로 시민과 전문가의 협업을 통해 정보를 검증하는 과정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이 직접 정보를 검증하는 과정은 당연히 수년간 경험을 쌓아온 전문 언론인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민의 검증에는 전문 언론인이 생각하지 못한 관점과 접근방식도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민과 언론인을 포함한 전문가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민 참여 팩트체크 활동에 참가한 시민들은 "생각보다 팩트체크가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시민 참여 팩트체크는 '정보의 확산은 빠르지만 검증은 느리고, 그만큼 잘못된 정보가 빠르게 확산될 경우 피해가 커진다'는 걸 시민들이 느끼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모든 시민은 팩트체커가 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과 주장을 구분하고, 근거가 있는 발언인지 판단하고, 제시한 근거가 사실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건강한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선 검증된 정보를 바탕으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는 걸 직접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팩트체크넷은 운영이 종료되었지만 앞으로는 캠페인즈에서 많은 팩트체커가 등장하길 기대합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처럼 당분간은 언론과 팩트체크에 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해보려 합니다. 마음 속으로는 '매주 하나씩 써보자!'라고 다짐하고 있지만 아이패드에 적은 글감들을 꾸준히 완성시킬 수 있을지는 저도 못믿는 제 성실함에 달린 것 같네요. 산책 하면서, 샤워 하면서, 퇴근하며 지하철에서 뉴스를 보다가 당장 떠오른 5가지 물음표를 첫 시리즈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한국 언론의 언론 윤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정도가 되겠네요. 언론(보다 정확히는 저널리즘)과 팩트체크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캠페인즈에서 즐겁게 논의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
대한민국이 열린정부파트너십 의장국이어서 한국에서 열린 OGP 글로벌 서밋에 시민사회대표로 테이블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대부분의 나라에서 온 패널들이 포퓰리즘이든, 권위주의 때문이든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불과 2년 전의 나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입장이었기에 코드포코리아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은 코로나19 상황을 시민과 정부가 협력해서 해결한 경험을 해 왔다"고, "중학생들부터 갓 개발을 배운 대학생들, 지방정부나 기업이 정부가 공개한 데이터를 활용해 각자의 마스크앱을 만든 사례"를 예로 들며 "정말 짧은 3일 동안 몇백명의 사람들이 신이 나서 함께 작업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 경험을 통해 위기의 시대에 정부와 사회, 공동체에 대한 신뢰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과 효능감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축적할 수 있는지를 맛본 것 같다고, 어린 학생들부터 전문가들까지 마음껏 활동할 공간을 사회(특히 정부)가 성심껏 펼쳐놓는게 중요한 열린정부의 방향인 것 같단 취지의 이야길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나는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사회 시스템(특히 정부)에 대한 불신의 증가, 일반 시민과 비 시민(혹은 불량한 시민)의 갈라치기, 사회적 약자 혹은 이웃에 대한 공감의 부재와 공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미디어 환경까지. 개인적으로는 버터나이프크루, 탄소중립위원회, 팩트체크넷 등에서 직접 겪기도 하고, 이태원참사, 장애인이동권,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을 바라보는 시선 등에서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다. 여러 정치 세력이 들고 나는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지만,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모두가 시민이고, 가능한 모든 시민들이 함께 하며, 모든 시민들을 위해야 한다란 기본 가치와 약속과 책임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시민과 비시민을 가르고, 선택적으로 시민을 호명하며,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구성원들을 포용하기는 커녕 혐오하고 조롱하는 지금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우리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우리 스스로 침식시키는 것으로 보여 안타깝고 씁쓸하다. 아니, 어쩌면 우리 스스로 지금이라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고민하고 토론해야 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바깥에서 주어진 민주주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누가, 어떻게,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를 만들지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 생각의 차이가 드러날때 모든 공동체를 위한 정치인지, 좁은 범위의 자칭 시민을 위한 정치인지 구분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에 대해 형식을 넘어 더 깊게 본질을 고민하고 내재화해야 할 때가 온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들이 하듯이, 해외에서 온 이주자들에게 시민권을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제대로 논의할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그래야 이웃을 비국민으로 낙인찍고 학살한 아직 100년도 안 된 우리의 슬픈 과거사를 극복하고 진정한 동포가 될 수 있지 않겠나.
Do you hear the people sing?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캠페인즈에 글을 쓰기 전부터 정치에 관한 글은 많이 써왔다. 이번 시즌 주제가 정치라 잘됐다 싶었다.그런데 정치와 관련된 얘기를 하려하니 정치의 범위와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광범위했다. 그래서 이번글은 정말로 아무말이 될것 같지만 정말로 개인적인 얘기를 해보고싶다. 적확한 표현은 아닐 수 있겠으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라는 문구에 힘입어서 써보겠다.  몫이 없는 이들의 몫을 찾는 과정 정치에 관한 글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까, 국제정치를 전공한 친구가 위 문구를 알려줬다. 정치는  "몫이 없는 이들의 몫을 찾는 과정”이라고. 이 말은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가 한 말이다. 글을 쓰기 위해 나라는 개인에 있어 정치는 무엇을까?라는 질문과 더불어 여러가지 이야기거리들이 떠올라 적어두었는데, 결국은 위 문구를 들었을 때 한마디로 정리가 되었던 것 같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라는 것이 몫이 없는 제3자들의 것에서 몫이 없는 것을 깨달은 나(당사자)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지 않을까싶다.  어릴적부터 한국사, 세계사, 근현대사를 정말 좋아했고, 꽤 잘했다(?). 나중에서야 역사는 강자들,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역사를 배울때는 민족(공동체)들의 흥망성쇠이자 정치 이야기를 엿볼수 있어서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왕과 귀족들의 역사에서도 몫이 없는 이들이 몫을 찾는 과정은 수없이 많았다. 다만 내가 보다 관심있는 역사와 정치는 민중의 역사와 정치이다. 특히 대학교 교양시간에 배운 서양사강의와 인권사강의를 통해 알게된 정치는 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앞으로의 삶을 선택해나가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  인민주권, 보통선거권(21세 이하 남성의)을 골자로했던 ‘1793년 프랑스 헌법’이라든지, 산업혁명기 아동과 여성의 노동착취를 막기 위해서 입법된 영국의 ‘공장법’이라든지 정말로 몫이 없어서 생명에 위협을 받는 이들이 몫을 찾아가는 과정은 현재를 사는 나와같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숫자만 하나씩 밀려나가는 어제와 똑같은 지친 아침을  생각없이 체념한 듯이 맞이하고 있니 모두가 똑같은 표준의 시계 그대로 보며 맞춰나가며 이대로 너는 정말로 행복한 거니 매뉴얼대로 살아만 간다면 과연 꿈꿀 수 있을까 <비전, 유승준> 23년전 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를 일부 가져와봤다. 모두가 똑같은 표준의 시계에 그대로 보며 정해진 일정 속에, 매뉴얼 속에 나를 꾸겨 넣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정말로 행복한 삶이냐고 묻는다. 이 노래를 처음 접했던 10살의 꼬마는 32세에 이 가사를 다시 곱씹게 되었다. 그러고 나선 몫없는 이들이 몫을 찾아가는 과정(그 과정은 필수 투쟁이였고, 많은 피가 희생되었을)이 제3자들의 일에 그치는것이 아닌 나의 일이 되었다. 존재의 부정 29살이었던 2019년 한국사회에는 커다란 혼란이 있었는데 일명 ‘조국 사태’라고 불린다. 다른 내용은 차치하고, 조국 사태로 인해 내가 일하고 있는 시민사회영역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조국은 진보운동과 시민사회운동, 사회적경제 운동의 사상적 기반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던 인물이고 그 사상적 기반은 2020년 박원순 사태 때 완전히 박살나고 분해되었다. 일련의 사태를 겪고 난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많이 만나봤던 것은 아니였지만, 내가 느낀 것은 존재의 부정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하나의 사건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2021년 초에 발생한 정의당 김종철 대표의 성추행 사건이다.  당시 내게는 운동의 거의 모든 근거와 기반이 무너진 것 같았고, 그 누구도 그 어떤 정당도 나라는 개인의 입장과 처한 상황에 공감해주거나 싸워주지 않는것 같았다. 정치에 대한 기대감은 사라졌고, 보수나 진보나 다 똑같다는 정치 혐오만 가득해졌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했고, 소속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정치 집단도 믿을 수 없었고, 비빌 언덕은 사라져만 갔다. 몫없는 자들의 몫 찾기 2021년 정의당 사건은 마지막 한방에 가까웠고 조국 사태와 박원순 사태를 겪은 나는 한동안 무기력해져 있었다. 그러나 삶은 지속되어져야만 했고, 내 몫은 내가 찾고, 내가 쟁취해야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의 필요, 우리의 필요지만 누군가에게 채택되거나 주장되어지지 않는 필요들을 모으고 외치기 시작했다. 누구도 우리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해주거나 이해해주려하지 않았지만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들과 자원들,생각들이 큰일을 하기에는 부족 할지라도 작디 작은 우리의 현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외부에 알리고 연대할 사람들을 더 모으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으로부터 혁명,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말한 기나긴 혁명을 이뤄가는것을 시작해 나갔다. 이제까지는 누군가에 의해 정치적 도구로써 호명되어져왔다면, 이제는 스스로 내 이름을 부르는것, 나의 존재를 밝혀가며 몫을 찾아가는 것이 정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몫 찾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동료시민들의 지지와 연대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필요를 넘어 우리의 필요, 지역 공동체의 필요에 이르기까지 함께 고민하고 행동해갈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충족되지 않는 삶의 영역을 시민들의 연대와 사업으로 해결해 나가는 협동조합 혹은 사회적경제의 방식은 조금 더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경제가 가진 정치적,문화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금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글을 쓰면서 떠올랐던 노래들의 가사 말을 옮겨 적으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졸업, 브로콜리 너마저>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다만세, 소녀시대>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날을 헤매일까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교실이데아, 서태지와 아이들> 커다란 날개를 달아 다시 태어나 허무하게 남겨진 어제를 벗어나높이 날고 싶다면 작은 망설임은 걷어 차버려끝없는 미지를 향해 내딛어야 해 새롭게 시작되는 오늘에 누구도 나를 대신 살아 줄 수는 없는거야<비전, 유승준> 어쩌면 나의 정치는 노래 가사 말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아닐지? ?
여성가족부 김현숙 장관님께 - 최근의 결정에 대하여 -
아직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장관님의 성함이나 이력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뉴스를 통해 접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일국의 장관을 상대로 글을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지만, 김현숙 장관님의 최근 결정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버터나이프크루 2019년부터 여성가족부에서는 버터나이프크루라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성평등이라는 큰 의제 아래에서 복지와 안전부터 건강과 외모지상주의까지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온 버터나이프크루는 4기 출범식을 하고 단 5일만에 세금 도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강원도 강릉)의 전화 한통에 3년 가까이 진행되어온 정부 사업이 뒤집어져 버린 것입니다. 권 의원이 장관님께 전화를 했고, 그 전화 이후 여성가족부가 사업 전면 재검토 결정을 내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장관님은 이러한 사태에 아무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다시 장관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2022년 8월 18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님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민주당 한준호 의원이 "여가부를 폐지하는데 국회와 논의 없이 일방적으로 가능한가"라고 묻자, "정부조직법을 국회에 내면 국회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답하셨고, "부처를 폐지하겠다는 장관과 무슨 정책을 논하나. 여가부 폐지를 위해 장관에 임명됐나?"라는 말을 듣자 장관님은 "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MBC.2022.08.18.)  버터나이프크루에 대해서도 장관님은 “여가부가 아닌 위탁운영사 ‘빠띠’가 먼저 중단 통보를 했다”,  “해당 사업이 부적절해서 폐지한다”, “국민에 대한 사과는 필요하나, 참가자에 대한 사과는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여성가족부가 먼저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한 점을 무시하고, “(참가팀은) 내가 학교에서 본 평범한 2030세대와는 차이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대한민국의 모든 2030을 다 만나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청년을, 시민을 갈라치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한겨레.2022.08.19.)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의 기초 아래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김현숙 장관님, 당신은 행정부의 엄연한 한 축이며, 헌법이 국가의 의무로 강조하고 있는 여성의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 부서의 수장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한 사람의 전화 한 통에 이미 출범식까지 마친 정책 사업을 하루 아침에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장관님은 행정부의 일축을 담당하고 있는 장관의 직을 맡았다는 자존심도 없는 것입니까? 이것은 장관님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입니다. 역사에는 목적도 없고 정해진 방향도 없습니다. 수많은 인과관계의 조합 속에서 인간은 그 결과의 좋고나쁨에 관계없이, 늘 새로운 방향을 창조해 왔습니다. 여성가족부를 없애기 위해 장관이 되셨다는 장관님의 말 한 마디가 훗날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줄 지, 지금 당장이야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각 인간은 모두 그 인과관계에 대하여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장관님 같이 중요한 결정을 하시는 분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정부의 정책 사업을 혈세 낭비라 낙인 찍고서 삼권분립이라는 가치까지 짓밟으며 정책을 없애라고 장관에게 전화를 거는 국회의원의 말 한 마디에, 장관님의 승인 하에 출범식까지 마친, 그것도 3년이나 지속되어 온 사업을 없었던 일처럼 만들어 버리는 장관님의 행동은 한국의 정치를 넘어, 한국 사회, 더 나아가 한국 역사에 어떤 영향을 줄까, 장관님의 이름이 후에 어떻게 기록될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장관님의 시민단체에 대한 시각에 우려를 표합니다 또, 장관님께서는 과거에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고용복지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시고, 2015년 8월 고용부 차관 직속기구로 설치한 노동시장개혁 상황실이라는 비선 기구를 실질적으로 지휘하셨습니다. 장관님은 이 당시 박근혜 정권의 소위 노동개혁을 홍보하기도 하였고, 친정부 보수 시민단체의 시위를 직접 기획하고 지시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88억 9,000만 원의 예산을 사용하셨는데, 이는 고용부 소관 예산과 고용보험기금을 불법 전용한 것이었습니다. (한겨레.2022.03.17.) 검찰이 비록 이 사건을 무혐의로 처리했지만, 저는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장관님께서 시민단체를 보는 시각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민단체를 시민의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제시하는 단체가 아니라 막연하게 모임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장관님께서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그 어떤 업무를 맡으시더라도 결국 시민단체에 대해 똑같은 태도, 똑같은 결정을 보여 주시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국정과제1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에서 발췌. 권인숙 의원실 제공 경향신문.2022.04.27.> 장관님의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장관님께 부탁드립니다. 부디 당신의 말 한 마디가 우리 정치와 사회, 더 나아가 우리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렵게 피(血)로 만들어온 인권의 역사와 그 가치를 담은 정부 부서, 그리고 권력의 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모욕하고 뒤흔드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장관님께서 갖고 계신 시민단체에 대한 가치관도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시민단체란 다양한 형태를 통해 시민이 중심이 되어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코자 모인 조직이지, 목적 없이 그냥 모이는 모임도 아니고, 정부가 마음대로 지시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닙니다. 장관님께서는 버터나이프크루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에 대해서 다시 검토해 주시고, 행정부의 한 축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