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주한 질문'들']폐허의 응시-심층적응 정치의 구상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천했던 노회찬 5주기를 맞이해 기후위기, 디지털 전환, 불평등 심화 등 복합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질문’들을 나누며,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진보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행사는 노회찬재단 공식유튜브 채널로 생중계됩니다👉심포지엄 안내 보러가기 http://hcroh.org/notice/462/
폐허의 응시, 심층적응 정치의 구상:
붕괴 후 정치의 ‘이미지’ 생성을 위한 단속적(斷續的) 사유의 조각들(1)
김윤철
<요약: ‘心內含言’>
나는 그닥 멀지 않게 다가서 있는 미래의 정치가 을씨년스럽고 괴기스러움마저 깃든 폐허 위에서 시작될 거라고 ‘공상’한다. 그 폐허는 ‘내가 이미 적응하고 있지 못한 세계’의 지배자들이 삶의 안식과 평화와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일련의 행동을 멈추지 않은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유토피아 모멘트’를 지워버린 ‘실존을 위한 탐욕의 회로망’을 맴도는 ‘자산증식주의자’들의 등장과 확산과 동조 속에 현실이 되었다. 그 회로망을 누비는 자들의 이름은 ‘유일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다.
폐허로 가는 길목에서 부르주아지는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 자산의 증식과 계급적 유일성은 삶의 안식-평화-생태계 파괴의 범위와 강도와 지속성에 달려 있다. 우리는 폐허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치의 붕괴를 목격했다. 정치마저 탐욕의 회로망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지어 권력이 아니라 물질적 자산의 증식을 향해서. 정치를 위엄 있게 만들었던 용기-포부-현명함-희생-숭고함-명예 등을 향한 영혼과 정신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그래서 정치의 붕괴는 복원 혹은 정상화의 여지를 잃었다. 정치를 이룬 주체 관념 제도 행태 등은 다 부서져 사라졌거나 조각조각 잔해들만 남겨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 폐허에서의 정치를 ‘붕괴의 불가피성을 선뜻 나서서 포용하는 심층적응’(론)에 기대어 구상할 것을 제안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나 자신에게. 그 폐허에서도 살아있을지 알 수 없으나, 만에 하나 살아있다면 적응해야만 하기에. 폐허에서의 정치는 ‘모름’에서 출발한다. 우선 넋을 놓고 맥없이 그저 바라봐야 한다. 페허에 다가가며 사랑을 잃고 몸과 마음을 다쳐 슬픔과 우울과 절망에 젖어 있는 채로. 얼마동안 그래야 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누가 그 ‘불가지의 침묵’을 먼저 나서서 깨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멸을 떠올릴 쯤 ‘탈구-틈-이단’이 눈에 들어온다. 영멸에서 벗어날 혹은 유예할 길이 서서히 떠오른다. 응시의 시간을 거쳐야만 다다르는 자기 구원의 찰라. 자체로 형체를 갖추고 역할 하는 것들의 부재, 폐허의 속성이다.
그러나 보인다. ‘잇고 덧대면’ 기괴하지만 폐허를 살릴 사물의 질서가. 폐허 이전의 모든 시공간적 감각과 지식들과 경험들이 다발을 이루어 다가온다. 폐허 속 사유의 질서를 생성한다. 심층적응의 정치는 일단 살아남았다면, 살아가길 의지한다면 그렇게 폐허를 응시하며 잇기와 덧대기, 다발 묶기를 수행하면서 사물과 사유의 질서를 발견하고 드러내고 세워내는 실천이다. 폐허로 가는 도정인 지금, 시작해보면 어떨지?
1. 폐허-응시에서 시작하는 이유
의미
폐허(廢墟)
위기가 가닿은 붕괴 후의 세계-이전의 상태.
그냥 허물어져 내린 게 아니라 ‘파괴’를 통해 무너짐.
시간이 멈추고 장소성이 사라진 곳. 그 어느 곳도 아닌 단지 잔해들만이 널려 있는 곳이 된다.
멈춘 시간 이후의 시간이 열릴 수도 있으나 실제 열릴지는 알 수 없다. 살아있고 남아있다면, 그리고 살아갈 방도를 찾는다면 다시금 자신의 이름을 단 장소가 될 수 있으나 그 역시 알 수 없다.
응시
붕괴 후 낯선 세계 이전 상태-폐허-와의 조우 양식.
멍하게 서있다 우연히 시선이 가닿은 잔해 더미를 바라본다. 초점이 모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응시의 시간이 열리면 새로운 질서가 움틀지도 모른다.
응시의 시간이 열리면 의지가 발현될 수도 있다. 초점을 지우고 시선을 거두면 폐허는 그저 영멸의 공간으로 남는다.
왜 폐허-응시?
복합위기론의 진부함, 보수성, 모호함의 해소 요청 (단, 붕괴의 총체성 내장 암시)
인간-사회-자연에 걸친 위기의 총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위기론의 하나 혹은 그 반복으로 여겨짐. 위기는 기성 질서-체제의 위태로움과 그것의 해소 극복에 주안점을 둠. 새로운 세계로의 지평 확장을 제약. 복합위기론의 총체성을 드러내면서도 기성 체제와의 단절성을 포착하기 위해 ‘끝’을 감지할-시공간적 감각의 지평을 변조할-담론의 필요.
붕괴의 총체성 표현-전혀 다른 시공간적 지평이 열릴(?) 세계의 끝 혹은 시작의 형상화-필요.
현재의 위기와 대응(정치) 추세의 특성: 붕괴의 불가피성 예측
정치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를 폐허의 연상(聯想)에서 시작하는 것은 전 세계 인구 10%를 죽일 수 있는 지구적 재앙위험으로 간주되는 기후비상사태에서 연유. 그 위험의 핵심 요소가 정치이기 때문이기도 함.
벤야민의 진보관-역사관(‘파괴의 폭풍’)과 그것의 이미지화를 차용한 것이기도. 다만 이제는 그 폭풍이 더이상 불지 않아, 천사는 그 폐허 위로 떨어져 묻힐 거라고 가정한다. 이제 그 폐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민주정’의 구현 혹은 그것을 위한 정치레짐(정권)의 교체 차원에서 조망하는 것의 무효함. 형해화된 민주정 제도와 게임 규칙들. 지구적 재앙위험을 방치하거나 소극적이고 변형적으로-물질적 성장주의의 또다른 계기, 특히 자산증식(기후테마주 등등)의 기회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대응하는 기제로 작동. 그것을 정상적인 (자유)민주정으로 간주.
시공간 감각이 선거주기와 정당 및 유권자 편성구도로 제한되어있다. 정치적 부족주의(진영, 파벌 중시 성향)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의 왜곡. 숙고 숙의의 차단. 자율성의 침식.
붕괴로 치닫는 복합위기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와 삶의 처지 표현
우울증이 지배적 병리현상이 된 현실. ‘홀로-과잉주체’화.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개인’이라는 호명 하에 홀로 부담해야하는 처지.
붕괴의 위협에 대해 무감각.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제 코가 석자”). ‘쉼이 없어 자기 마음(息)’을 헤아리지 못한다. 쉼의 레저산업화. 소외의 절정.
붕괴-폐허를 ‘짐작’하면서도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간다. 대면의 회피-두려움. 탈주의 용기 결단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일상적 구조에의 긴박. 그냥 지금 여기서, 하던 대로 살아가기에 국한된 삶의 경계 –너머의 시공간적 지평 확장 봉쇄.
빈자, 타인종 등에 대한 분노는 무감각-무관심의 반대 측면. 주로 극우포퓰리즘의 정치적 동원을 매개로 한 소외감의 격정적 표출 양태.
그런 중 ‘구매력 보유층’의 일상에서는 매끈하고 근사한 완성품(명품) 소비로 국한된 자유(‘가짜 자유’)가 횡행. 소비는 단지 경제행위가 아니라, 또 과시를 위한 베블런적 효과 작용만도 아닌, 소외감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마약 작용이기도 하다. 이 틈을 타 자본은 편의를 증진하지만,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찬, 그것을 더 욕망하고 지향하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지름신’에 묶여 있다. ‘보기 좋은’ 외모와 육체(성)에 대한 집착과 몰두에 기댄 관종문화의 유행도 건강-행복-웰빙-워라벨 담론의 상품화와 함께 그러한 선상에 있다. 모두 ‘돈과 상품 구입’ 한 길로 귀결된다(‘쇼퍼 홀릭’의 삶).
자기 밖의, 체제 밖의, (기성) 정치 밖의, 다른 것, 자신과 다르지만 같은 타자에 대한 시선 두기(마음 나눔)의 사라짐
응시, 폐허에서, 살아있다면 / 살아야 한다면 / 떠나려면 / 재건하려면 — 우선해야 할 실천. 잔해, 잔재, 부스러기, 조각들에 시선 두어야 한다. 응시, 전혀 다른 이질적 사물의, 사유의 질서 세우기 기초.
그러나 붕괴-폐허로 가는 도정에서, 매끈하고 근사한 것에 대해서만 눈길 주기. 더욱 더 안으로, 안으로 향하는 시선. 치열해진 진입 경쟁-공정 논란이 타자 배제의 방식으로 거세진 이유. 응시의 역량과 마음의 결핍은 붕괴 폐허 이전에 우리들끼리 싸우다 죽게 만들 수 있다. 워낙 알뜰해 처량하고 추한 삶의 귀결=인간 실격.
2. 폐허로 귀결된(될) 정치 붕괴의 양상과 동학(動學), 그 의미(한국적 맥락)
노회찬 사후 ‘지난 5년’: 공교롭게도 붕괴를 향한 이행기
촛불-광장의 소멸: ‘중산층 행동주의’에 기초한 ‘마지노선민주주의’의 향연마저 종결
2016-2017년 촛불집회: 한국 민주주의의 ‘라스트 댄스’
형식-절차의 정상적 운용에 의존해 (국가)권력의 사익추구에 대해서만 문제 삼고 분출되는 대중운동적 에너지. 사회경제적 쟁점과 갈등은 개인-시장의 몫. 비자유적 자유-굶어죽을 자유의 수용
※ 마지노선 민주주의: 마지노선은 일상에서는 ‘최후방어선’의 의미로 주로 쓰이지만 보다 중요한 군사적·정치적 의미는 엄한 데다 전선 쳐놓고 멍 때리다가 결국 다 내줘 패망한다는 어리석은 짓의 대명사. 그런 의미에서 마지노선 민주주의는 한국 정치적 맥락에서는 민주주의의 핵심 본질인 ‘민(民)’의 물질적 자원배분 결정권 신장의 문제는 방치하고, 형식-절차 지키기에만 열을 올리다 결국 민주주의의 파탄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
사익추구 정치의 기회구조 형성과 급부상: 정치의 결정적 붕괴
몰역사적/탈사회적 (사이비) 이념 및 양대 진영 갈등의 심화양대 정당이 주도하는 정치과정에서 보수, 진보(반공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등과 연결-중첩되어있는) 언표는 상대를 타자화하고 적대감을 부추기며 자신을 세워내는 정략적 용어일 뿐. 정치적·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같은, 또 그것이 등장해 쓰이게 된 역사적 시대 상황과 관련 없이 구사되는. 또 연대성과 통합성에 기초해 존립할 수 있는 ‘사회’와 분리되어있다. ‘보수답지 않은 보수’, ‘진보답지 않은 진보’가 보수와 진보의 정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와 오류 가능성 인정과 물질주의 가치에 대한 비판적 정신의 중시와 전통의 고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행을 전제로 한 귀족적 품격의 구현을 찾아볼 수 없는 보수. 약자 우선과 희생과 헌신, 탈물질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지식과 담론의 추구와 체현의 면모가 사라진 진보. 경쟁과 갈등은 격화되어있고, 서로 누구와 싸우는지는 분명한데, 왜 싸우는지가 불분명한 정치. 문제는 그런 중에도 자기 이익-특히 금융자산증식과 자녀의 주류 진입-은 알뜰하게 챙긴다는 것. 붕괴를 결코 막을 수 없다. 갈등조정에 필요한 권위, 그리고 리더십 발휘에 필수적인 신뢰, 모든 것이 이미 붕괴되어있기에.
‘유한계급’의 타자에 대한 가학적 유흥 놀이로서의 정치
경제적 소비만이 아닌, 정치마저 자기 과시의 기제가 된 현실.
경쟁 우위와 승패를 제외한 고민과 고통을 동반하는 의제와 담론의 회피, 외면-노동배제의 지속.
공동체성 구현의 도덕적/윤리적 가치와 관련 행동이 자기 증명을 위한 상품 소비로 전락.
정치의 예능화-미디어 의존의 정치적 충원 구조와 양식의 전면화-보통사람들의 삶과 괴리된 인식과 경험의 보유자 주도의 정치-매끈한 외모와 화려한 경력 보유의 정치계급 등장-팬(덤)이 주도하는 정치 문화의 전면화.
슬픔-우울-절망-애도의 정념에 바탕한 정치지도자의 부재. 영웅이 아닌 스타만 원한다.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정치담론의 완전 증발. 심지어 코로나19 국면에서조차.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담론을 지탱할 사회적 기반의 부재 및 취약함 드러남.
영끌-영끝 현상의 발흥
‘부르주아 유일계급사회’ 고착의 일면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를 위해 금융(가상화폐 포함)-부동산 자산의 보유에 집착하게 되었다. 물질주의 가치의 전일적 지배. 계급균열의 삭제.
대안세계 상상을 위한 시공간적 감각의 제거, 유토피아 모멘트 창출 가능성의 완전 봉쇄
사회경제적 삶의 향유와 지속 원리가 지금과 같은 걸라는 가정의 지배-변화 가능성의 삭제(변화 비용의 공통 부담 가능성과 필요성의 삭제)
서울-강남의 지리공간적 성역화. 그곳에 들어가야만 산다는 공식의 지배.
(허구적) 세댸균열 장착의 매개체
최종대부자인 부모가 속한 기성 세대와 싸움? 기본적으로 싸움이 성사될 수 없는. 기성세대와 지향가치와 이념도 ‘물질주의 추종’으로 동일. 탈물질-반권위주의 성향이 뚜렷했던 68혁명 때의 세대갈등과 전혀 다름.
산업화-민주화 과정의 지고 지난한 역사성 삭제.
※ 왜 기성 정치와 사회질서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이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세대, 그리고 그들 중 주로 지도부 경험을 가진 혹은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극히 일부의 이름, ‘386세대’와 연결지어져야 하는 것일까? 투옥과 고문과 죽음을 당한 이들, 그리고 민주화 이후 각박해진 일상적 생계의 장에서 가족과 일에 헌신하며 묵묵히 자기 삶을 사는 다수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과잉주체의 삶에 복속, 시민의 죽음과 정치의 죽음사회연대 기반과 관계망의 완전 부식과 소멸
비/탈자본주의적 타자에 대한 배척 공격
K-담론의 확산과 자유(주의) 가치-동맹의 공세K-담론은 붕괴-폐허로 가는 추세의 은폐 혹은 자각치 못함 혹은 정당성 확보 필요의 발로. 혹은 고통을 지우기 위한 마약성 진통제
그러나 지표와 라이프스타일 상 객관적 현실에 기초. 확산의 물적 토대. 변화된 한국의 현실로 담담히 받아들일 것. 오히려 정치전략 모색의 출발점으로 삼기.
다만 세계 정치-경제 체제의 지배적 위계구조를 감안할 때, 지속 가능한 현실일까? 오히려 그 엄혹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더욱 활성화.
자유(주의) 가치-동맹의 ‘때 아닌(?)’ 공세
전통적인 한국통치계급의 정당성 확보 기제인 분단-남북 체제 우위의 지위 확보에 따라 ‘자유대한’을 굳이 강조할 이유의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왜? 붕괴 가능성 감지의 차단. 붕괴로 치닫는 체제에서의 탈출구 봉쇄. 자유지상천국인 여기서 살다 죽자.
북한의 안정화, 남북관계 진전의 가능성 소멸(북중러 vs 미일한 구도의 견고함) 가능성
다자구도 형성 및 균형자 역할 경로의 현실적 포기=분단 후 반공친미 국가로의 복귀, 그것의 (재)정당화 필요.
‘부르주아 한국’의 최종공식 선언. 한국판 역사의 종말론.
민주-개혁 실천에의 경력 미비에 따른 콤플렉스 해소. 무사상-무이념의 공백 채우기.
국제질서의 군사화-세계대전 예행 전쟁-핵무장론-방산산업(K-방산) 전략화의 본격 개시
기후재앙에 앞서 붕괴의 보다 직접적인 계기로의 형성 가능성 존재
붕괴마저 이윤 증식의 계기로 삼기
지속발전의 활로 없음. 그러나 붕괴에서 활로 찾음.
한국 자본주의 라스트 댄스의 무대
방산비리 공약과 담론의 소멸
탈인간(AI)-탈지구-우주개발 담론/정책의 본격 전개
붕괴 폐허의 예견-지배계급의 탈주 프로젝트(?)
방산업과 함께 붕괴 전 이윤증식 극대화 통한 탈주비용 확보 전략심층적응전략의 ‘지배계급 버전’
3. 심층적응 정치의 구상(構想)
정의(定義)의 요소
붕괴의 불가피성 수용
붕괴 후 시공간의 불가역성 인식
포용-초월적(‘포-월’) 선택의 행동규범화-전략화
‘선(先) 관념’
정치는 이미 없다
사회에 대해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정치는 쇠퇴, 소멸. 인류세-신유물론에 대해 ‘정치 지우기’ 경향을 비판하는 것은 학문적-논리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 우리 사는 세계에서 정치는 이미 사회적인 것으로 덮여 씌워져 있다. 정치를 민주주의, 제도(선거 의회 정당) 등에 국한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고, 다룰 수 없다.
투표와 선거의 결과는 지극히 일시적이고 정세적이다. 지속될 정치적 신념과 책임을 부과한 것의 결과가 아니다. 선거 승자의 통치 재량을 더 이상 승인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전략적 변덕의 발휘 기회가 있는 상품의 소비 같다.
이미 만연해있는 포퓰리즘의 의미. 정치의 사회적인 것으로의 포획. 혹은 사회의 정치 포섭. 긍부정을 떠나 지울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이미 주어진 조건이다.
기존의 제도-관념 형태의 복원 및 구현 중심의 접근은 더 이상 소용없다
제도 형체 그 자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가령 제대로 된 정당 조직의 형식 갖추기에 에너지를 투여할 필요가 없다. 정치는 미리 갖춰진 조직 형식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세계가 아니다. 무엇보다 형식을 갖춰 대응할 자원도 시간도 없다. 소위 자본주의 황금기가 그랬던 것처럼 정당-의회-선거 제도에 기초해 민주주의 정치가 안정기를 구가했던 것은-그렇다고 여겨졌던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1960년대에 이르는 이십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 후 정당-의회정치는 늘 ‘위기론’에 시달려왔다. 자본주의가 일반적 위기론에 시달려왔던 것처럼.
망가진 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 된다.
관념에 부합하는 질서를 세울 수 없다. 문제가 요구하는 질서를 세워야 한다.
정치는 문명의 파괴-건설을 위한 실천이어야 한다
정치가 의의를 갖는 이유. 정치가 필요한 때는 문명 질서를 파괴하거나 세우는 대변동의 시대다. 지금이 그 때다.
문명은 세계관에 기초한다. 정치는 세계관을 세우기 위한 이념-담론을 가져야 한다. 누가? 새로운 문명을 세우려는 자들이. 대변동을 거쳐 새로운 문명이 세워져야만 살 수 있는 자들이. 그들이 하나의 거대한 인구집단을 형성해야 한다. 지금, 그 인구집단은 어디에 있는 누구인가?
이념은 가치관에 기초한다. 붕괴-폐허로 귀결될 정치가 중시하는 가치관에서 벗어난, 즉 작별을 고하는 가치관. 탈물질주의에서 시작해야 한다.
계급 지배-피지배의 문제 설정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은폐-엄폐를 넘어 삭제된 계급균열, 그리고 지배-피지배 관계 체제의 구축과 유지, 재생산 기제와 실천으로서의 정치는 복원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배-피지배의 폐지를 도모할 수 있다. 지배-피지배의 관계는 외면하고 무시할수록 강화된다.
문명 파괴-건설의 향방은 지배-피지배 계급 간 힘의 관계에 달려 있다. 정치가 좋아지는 단 한가지 경우는 피지배 계급의 힘이 지배계급을 위협할 때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여전히-두려워하는 단 한 가지 이유다.
지금, 계급도, 피지배계급의 힘도 모두 정치를 사유하는 문제 영역의 밖에 놓여 있다. 이를 사유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
기후재앙을 둘러싼 인류세-자본세 논의의 엇갈리는 지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류세 논의의 지배체제에 대한 문제의식 공백, 자본세의 붕괴 위험성 해소에 필요한 보편적 접근의 미약함 둘 다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계급지배-피지배의 문제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한다. 답은 부정적이다.
정치는 탈경계적 실천이다
탈경계적 실천을 통해서만 답을 구할 수 있다.
이분법적 대당 구도의 해체와 융합적 넘나들기가 필요하다. 낡음-새로움, 국가-사회, 정치-사회운동, 공-사, 제도-비제도, 개인-집단, 보수-진보, 이성-야만, 과학-비과학 등 이분법적 대당구도와 경계 허물기.
통합의 층위와 차원을 만들기 위해 이질적인 것들, 이종적인 것들의 잇기, 덧대기의 불가피함, 방법적 유효성 포착하기.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의 구분과 경계는 무의미하다. 계보학과 고증학 수행이 아닌 이상, 융합. 융합. 융합. 개벽 사상으로서의 동학과 유불선의 통합에 주목할 것.
전략적 실천 항목
타협: 지금의 질서가 아닌 앞으로의 세계에의 적응 시작하기
전혀 다른 시간 감각 만들기.
붕괴력의 도입과 실시(인류세 담론의 미시전략화).
회복: 슬픔과 우울과 절망의 감정을 표현하기
새로운 시대의 소리와 몸짓의 창출.
슬픔과 우울과 절망의 감정을 노래와 춤으로 만들어내기.
복원: 탈구-틈-이단의 관계망 구축과 서사 창출하기준거틀의 마련과 강화
포기: 생경함과 기괴함의 미학 드러내기
새로운 사물의 질서-사유의 질서 생성.
잔해-잔재-부스러기-조각들의 잇기와 덧대기를 통해 새로운 형체 만들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