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⓸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⓸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사회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 식성부터 성격까지 자신을 꼭 빼닮았던 딸에게 다정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된다는 아버지는 딸을 위해 투사가 되었다.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위로도 받는다.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정민 위원장의 이야기.        -2년의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활동을 돌아보면 늘 주축에 위원장님이 계셨어요.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서 여러 투쟁에서도 앞장서시고 언론 인터뷰도 맡아오셨죠. 이전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별로 없었어요. 그냥 뉴스만 보고, 정치에 관심도 없었고요. 그런데 이걸 겪으면서 깊숙하게 블랙홀처럼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너무 많은 것들을 겪고 알게 됐어요. 어느 순간 두렵기도 하더라고요. 사안마다 이전과 전혀 다른 각도로 보게 되니까요. 차라리 모를 때가 나은데, 알고서 쳐다보면 너무 괴로운 거야. -위원장님의 다른 인터뷰를 보니까 참사 당시 사업을 준비하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퇴직하고 2년째 되는 시점이었어요. 사업을 준비하다가 어느 정도 다 갖춰져서 23년부터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모든 게 다 무너져버린 거죠. 의미를 부여할 게 없는 거예요. 돈을 벌어서 뭐 할 거야?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아이를 키우면 아이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게 돼요. 그게 부모거든요. 그런데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요. 너무 허망하죠. 사람들이 돈 보고 이런 활동을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이야기할 때 제가 굉장히 분노를 해요. 내가 내 아이 키우면서 들어간 돈이 얼만 줄 알아? 감히 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내가 얼마를 받을 건데? 정말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심리적인 상실감 뿐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환산해요? 그렇게 내 사업은 다 접고 포기 하게 됐죠.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하던 사업이 있었어요. 그건 못 없애겠는 거예요. 캐릭터 사업을 했는데, 특허도 내놓고 많은 준비를 했단 말이에요. 그걸 없애는 순간 아이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업체 대표를 제가 인수인계 받아서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아이가 만들어 둔 상품도 엄청 많은데 한 번씩 찾아와주시는 분들에게 무료 나눔하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위안과 위로를 삼아요. -주영 씨가 아버지를 굉장히 든든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제가 무뚝뚝해서 아이한테 위로의 말이나 따뜻한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는 굉장히 활동적이고 본인 스스로 주도해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볼 때마다 나랑 너무 닮았다는 느낌이 너무 많이 들었죠. 식성부터 생각하는 거나 모든 것들이요. 그래서 많이 다퉜어요. 성향이 같으면 나의 단점이 보이거든요. 많이 부딪히기도 하고 많이 싸우기도 했죠. 아이가 가고 난 뒤에 친구들을 만나서 식사 자리를 몇 번 가졌어요. 보통의 아빠들이 그렇게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작에 친구들 불러서 같이 밥도 먹고 이름도 알고 뭐 이렇게 하면 참 좋았겠다 싶어서 후회가 되더라고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요.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상담사 역할을 했대요. 친구들이 힘들 때 인생 상담도 해주고, 들어주고. 아이에 대해 새로 알게 된 부분이 참 많아요. 내가 좀 더 세심하고 배려 있게 관찰하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가 많이 됐던 것 같아요. 자녀의 꿈을 마음껏 지지하지 못해 미안했던 아버지 아이가 직장 생활 접고 사업 하겠다고 했을 때 세상 물정도 모르고 무슨 사업을 한다고 그러냐 했어요. 너 굉장히 후회할 거다. 책임 질 것이 많고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여러 번 만류 했죠. 설득이 안 될 것은 알지만 ‘너 내가 예전에 힘들다 이야기했지?’ 이런 합리화를 시키기 위한 밑밥이었던 거죠. 그렇게 실패를 단정 짓고 이야기를 했어요. 나한테 말한 게 있으니 힘들다고 이야기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면서 계속 무시했어요. 누구 한 명이라도 좀 져주고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아이가 가고 난 뒤에 정리 하면서 보니까 힘들어했던 흔적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아빠가 돼가지고 딸하고 신경전만 펼치고.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인들한테 자녀들하고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를 많이 하라고 얘기해요. 자식을 보내고 그런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고 한심한 건가 깨닫는다. 너 힘들지? 너 힘들 거야. 그래도 이제 가족들이 있으니까 괜찮아. 이런 위로의 말을 한마디라도 해줄 수 있으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한테는 엄청나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참사 이후 마음이 지치는 순간도 종종 마주하실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지친 마음을 다루고 계세요?  처음에 심리상담센터에서 전화가 왔었어요. 심리 상담사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저한테 ‘지금 어떠세요?’ 묻는 거예요. ‘괜찮아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게 끝이었어요. 그 뒤부터는 전화를 안 받았어요. 심리 상담을 받는 다른 가족 분들도 있어요. 아직도 잠을 못 이루고 수면제 같은 거 처방받는 분도 있고 사람마다 달라요. 트라우마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자원봉사 상담사를 만나봤더니 참 좋았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분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한 1시간을 같이 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참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트라우마는 어느 순간 ‘탁’ 하고 왔다가 사라져요. 한 번씩 기억이 떠오르면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스럽고, 화도 냈다가 막 울기도 하고. 별의별 희한한 감정이 밀려온단 말이에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져요, 이런 흐름이 주기적으로 오는 게 트라우마의 특징인데, 지금 아무 이상 없다니까 이상 없는 줄 알면 어떻게 심리 상담을 하겠어요. 결국은 공감을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공감하고 있구나 느끼면 그때부터 치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떤 심리 상담사하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유가족들끼리 앉아서 이야기할 때 훨씬 나은 치유가 된다고 느껴요. 유가족과 많은 대화를 하고 있고 그 속에서 공감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요. -보면 시민단체 등 여러 사회운동 하시는 분들이 받으시는 압박이나 부담이 굉장히 큰 것 같더라구요. 위원장님도 대표자로서 느끼실 무게가 결코 가볍진 않으실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가족들하고 다른 부분이 있어요. 앞장서서 이 일을 하다 보니까 다른 가족보다는 훨씬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있어요. 제가 단단하지 않으면 못 하거든요. 못 끌고 나가거든요.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스스로가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습관이 자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더라고요.   -인터넷에 위원장님을 검색해보니까 직업에 사회활동가라고 뜬 걸 봤어요. 순간 그걸 보고 위원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요? (웃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집회에서 발언했는데 어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유가족이 아니야, 저 사람은 활동가야, 그런데 유가족처럼 행세하고 있어.’ 이런 댓글들이 있다는 걸 들었어요. 어처구니 없어가지고. 하하. 도대체 뭘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 막 웃었거든요. 저는 ‘깜’이 안 되죠. (웃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해 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일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대책위 상황실이나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들을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워요. 저는 제 일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데, 그 분들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하잖아요. 존경스럽고 대단하게 인정을 받아야 될 분들이에요. 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 없거든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전에 일본의 아카시시 불꽃놀이 압사사고 유가족들이 우리와 연대하기 위해서 찾아왔었어요. 그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 하나가 시민단체였어요. 일본은 그게 없대요.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할 수밖에 없대요. 누군가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국 오니까 정말 많은 단체들이 도와주고 지원하는 거 보고 너무 부러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우리나라는 시민단체가 참 잘 작동되는 것 같아요. 시너지를 많이 얻고 또 그렇게 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도 저런 시민운동가, 활동가가 되어야지 하는 사람도 생겨나고요. 스스로에게 이익은 되지 않아도 내가 이걸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과 자기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저는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어떤 끈끈한 무언가. 이웃에 대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거요. 오지랖이 넓은 민족? (웃음) 그런 게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유가족협의회 대표를 맡겠다고 결심하시기까지도 큰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다들 나하고 똑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불안하고 노출되는 게 싫으니까. 뒤에서 서포트하는 역할만 하겠다 해서 (처음에는) 부대표를 맡았어요. 처음엔 거절을 했었어요. 왜냐면 제 어머니가 이 일들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계시거든요.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고 알게 되면 안 된다. 나는 초상을 두 번 치러야 하니 절대 안 된다고 극구 사양을 했었는데 그땐 나서서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죠. 가족들끼리도 앉아서 이야기를 했어요. 저희 애 엄마나 아들이 뭘 망설이냐 무조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 아이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게 더 우습지 않느냐고 해서 그렇게 결심한 거죠. 오히려 야단을 맞았어요. 왜 주저 하냐고. 한 번은 어쩌다가 어머니가 뉴스를 본 거예요. ‘저기 나오는 사람이 엄청 많이 닮았네.’ 하고 말했는데. 누나가 ‘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닮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왜 뉴스에 나오겠어? 뉴스에 나올 일이 없는데.’ 했었죠. (웃음) 1기 운영진 임기가 끝나고 2기에 들어서면서 공식적으로 대표를 뽑는데, 이제 책임을 져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등 떠밀려가고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는데 사실 너무 힘들더라고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요? 생전 없던 병이 생기더라고요. 다리부터 시작해서 붉은 반점이 생겨서 올라왔어요. 병원에 가봤더니 자가 면역에 이상이 생겼대요. 외부로 드러나는 것들은 괜찮은데 내부로 나타나면 그때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큰일 난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의사가 충분히 쉬면 가라앉을 거라고 해서 작년 10월 1주기 행사를 끝내놓고 쉬었어요. 쉬니까 싹 사라지더라고요. 1주기 땐 여기저기 불려 다녀서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언론이나 각종 행사 등 정말 숨 쉴 틈이 없었어요. 그때 하루에 두 건, 세 건씩 인터뷰 하러 다니니까. 저는 살면서 병원에 입원한 적 한 번도 없는 굉장히 건강한 체질이라고 생각 했는데 몸이 망가지더라고요. 특별법 통과 이후에는 임기도 끝났고, 이제 도저히 못하겠다. 그만해야 되겠다 했더니 주위에서 질타를 하는 거예요. 특조위 출발하는데 지금 무책임하게 그만두면 어떡하냐 무조건 책임을 지셔라. 힘들어도 지금까지 해왔으면 끝장을 봐야 될 거 아니냐. 지금 포기해버리면 어떡하냐.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등 떠밀더니 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스트레스 받고 이러니까 이제 안 해도 된다. 고민했죠.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왜 이 일을 시작 했느냐, 내가 왜 힘든 고행을 겪어가면서까지 이걸 하려고 했던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내 아이를 위해서. 다른 거 다 제쳐놓고 그냥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부모로서 해야 될 일을 한 거예요. 내가 유가협 대표로서 일을 한 게 아니다 거기에 의미 부여 해선 안 된다. 나는 어떤 대표나 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내 아이의 아빠로서 부모로서 내가 이 역할을 하면 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마음이요. 앞으로도 내 아이를 위해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우리 아이가 불명예에서 벗어났을 때, 그때 그만둬도 되겠다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가족들은 안 그랬어요. 투표를 하는데 우리 가족은 반대표를 찍었대요. 아군이 아니고 적이구나 싶었죠. (웃음)   -역사를 보면 대형 참사가 일어난 이후에 대책이 마련되고 관련 법안들이 만들어져요. 항상 유족들의 목소리와 노력이 큰 변화를 이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에 이러저러한 법들은 다 피해자들이 만들어놓은 법들이에요. 안전과 관련된 법들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죠. 왜 대한민국의 모든 참사 관련 법안들은 피해자들이 나서서 이렇게 몸으로 던지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가. 그게 참 안타깝고 답답하죠. -지난 2년 동안 여러 활동을 해오셨어요. 이태원 참사와 유가족 분들의 여러 활동들로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안전해졌다고 느끼시나요? 아마 많은 사람들은 못 느낄 수 있지만 저는 확실히 느껴요. 원래 강서 쪽 지하철이 어마어마하게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막 끼어서 탄다. 숨이 막힐 정도로 꾸역꾸역 탔었는데, 참사 이후 인원이 다 찬 것 같으면 안 타는 거예요. 그 변화가 있었다는 걸 제가 듣고 그래도 사람들 인식이 심어져 있구나. 그래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최근 열린 여의도 불꽃 축제에서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잖아요. 경찰 병력이 2500명 이상이 투입이 됐고, 주최 측 인력까지 합하면 인파 관리 인력이 만 명 정도가 됐어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인식이 잠재되어 있지 않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들이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참사 이후 주는 영향은 크다고 생각을 해요. 일반 사람들은 못 느끼겠죠. 당연히 그러려니 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제 눈에는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하나하나 바뀌어갈 거라고 믿어요.   -말씀처럼 하나하나 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위원장 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아직 남은 과제들이 많은데,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신다면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이태원참사를 기억하는 분들께 한 말씀 부탁 드릴게요. 시민들께 한 가지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은 왜곡된 정보와 싸워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람은 글을 보고 판단해요. 왜곡된 정보만 있으면 그것만 보고 판단하게 될 수밖에 없거든요. 같이 목소리를 내주시는 분들이 잘못된 정보와 싸워주고 제대로 된 정보를 전파할 수 있게 노력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어요. 진실한 부분과 거짓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거든요. 진실의 목소리를 많이 내 주십사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끝. 
·
1
·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⓷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 인터뷰  ⓷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 공동취재: 최혜정 김한별   유족들은 때때로 무인도에 갇혀있는 것 같았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공허한 외침으로 느껴질 때, 그들을 일으키고 힘을 북돋은 것은 시민들의 연대와 서로를 향한 공감이었다. 2년 동안 곁에서 든든히 함께해준 사람들 덕분에 유족들은 지치지 않고 더욱 강해졌다. 유가족들이 느낀 뜨거운 연대의 순간들.     -지난 2년 동안 유족들이 거리에 나가있는 모습을 많이 봐왔어요. 곳곳에서 투쟁하셨는데 그 시간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까요? 활동하면서 느낀 건데 몸을 많이 던질수록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더라고요. 더 격렬하게 몸을 던져야만 그만큼 관심을 가져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심이 적어지고. 그런 마음에 오체투지, 3보 1배, 단식, 삭발 등 많은 활동을 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울광장으로 분향소를 이전했을 때예요. 참사 직후 녹사평에 분향소가 설치됐는데, 그때는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집에 있으면 못 견디니까 슬픈 마음만 갖고 거기서 지내다시피 했죠. 분향소 옆에서는 보수단체가 마이크 들고 우리를 괴롭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됐어요. 저 사람들은 우리 애들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가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지? 대한민국의 사회에 대해 점점 눈을 떠가는 시점이었죠. 49제 이후 녹사평 분향소에 시민들 발걸음이 점점 떨어지는 걸 느끼게 됐어요. 좀 더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많이 알리고 이야기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어요. 그 때 분향소 이전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참사 100일 추모제를 하는 날 녹사평에서 행진을 하면서 분향소도 옮기는 것으로 결정했죠. 다들 광화문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거기가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했어요. 여기서도 이렇게 시달리는데 사람 더 많은 광화문 가서 시달릴 생각하니 엄청 괴로운 거예요. 그게 너무 힘들어가지고 후보지를 찾으러 나갔어요. 어디가 좋을까 하다가 세종문화회관 그 뒤편에 공간이 있더라고요. 거기가 도로에서 안으로 더 들어가 있어서 약간 외지면서도 너무 좋은 거야.   -외진 곳이 오히려 좋으셨군요. 공격당할까봐요. 그때는 사람들한테 알리는 것 보다 우리가 안전하게 있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너무 상처를 많이 받으니까 못 견디겠다는 마음이 많이 들어가지고. 게다가 그 앞에는 집회 신고를 낼 수 없대서 더 좋았죠. (웃음) 그렇게 서울시에 협조 요청을 했는데 펄쩍 뛰더라고요.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치다가 새 공간을 제안했어요. 녹사평역 지하 4층. 원하면 오세훈 시장이 와서 브리핑도 해 주겠다고요. 그 때가 추모제 열리기 며칠 전이었거든요.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그래도 제가 혼자 한 번 가봤어요. 지하라 내려가는 시간도 엄청 걸려요. 그런 건 뭐 다 좋았어요. 영정 걸어둘 수 있는 공간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쭉 보고 있는데 갑자기 지하철이 지나갔어요. 순간 이내 그 공간이 막 흔들리는 거예요. 너무 화가 났죠. 아이들 영정을 걸어둬야 하는데 이렇게 흔들리는 곳을 제안 할 수 있느냐. 그 이후부터 서울시하고는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그리고 이후 우리가 분향소로 정해둔 (세종문화회관 옆) 공간에 화분 같은 걸 엄청 갖다 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분향소 설치를 못하게요. 광화문에도 100일 추모제를 하려고 돈 많이 들여서 무대를 만들어놨는데 거기에 경찰 병력과 차벽을 엄청나게 동원 시켜놔서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서울시에 괜히 이야기했구나 후회가 물밀듯이 왔죠. 진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무조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우리는 뒤가 없었으니까 분향소 설치를 못하면 그냥 거기서 죽자. 뒤가 절벽이라도 일단 가자고 결정 했어요. 그래도 막연하게 있을 순 없으니까 후보지를 한 세 군데 정해서 상황을 봐가면서 들어갈 수 있는 후보지에 들어가자고 했고, 그 계획은 딱 다섯 사람만 알고 있었어요. 말이 새어 나가면 경찰이든 또 와서 막아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건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한다. 100일 추모 행사 당일, 영정 들고 녹사평에서 서울역까지 와서 잠깐 쉬는데 시민대책회의에서 전화가 왔어요. 서울시청에 경찰 인력이 적은 거 같다. 잘하면 서울시청 광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결정을 해달라고 연락이 온 거죠. 우리가 지금 이것저것 따지고 할 처지도 아니니 가능성만 있으면 합시다, 했죠. 우리가 광장에 들어가는 것은 다른 유족이나 행진하는 시민들 아무도 생각을 못했고요. 경찰들도 광화문에 밀집해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엄청 불안하더라고요. 그러다 서울시청에 도착한 순간, 선두 차량에서 마이크에 대고 우리 대책회의 이미현 실장님이 ‘여기에 분향소를 설치합니다. 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외쳤어요. 다들 얼떨떨해 했죠. 이게 무슨 소리야? 막 우왕좌왕했어요. 그러다가 몇 명이 트럭에서 천막을 꺼내고 ‘지금 우리가 분향소를 설치할 겁니다. 시민 여러분들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소리 치니까 그제서야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경찰들도 깜짝 놀라가지고 달려와서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시민들이 전부 다 밀려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대치가 되고 몸싸움이 일었어요. 행진에 함께한 많은 시민들이 달라붙고, 그렇게 천막을 내리고 한쪽에 겨우 설치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 와중에 유가족과 시민들이 인간 방패가 되어서 경찰들이 못 들어오게 했죠. -조마조마하면서 그 장면을 봤던 기억이 나요. 영상이랑 사진이 SNS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해졌거든요. 시청에서도 철거 인력을 파견했어요. 그런 와중에서 시민들께서 아무도 가지 않고 그걸 지켜주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데 우리 유가족 중 한 분이 경찰들을 향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인파가 밀집된 상황에서 아이들을 잃었는데, 우리 아이 또래인 너희들도 이런 걸로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좀 비켜줬으면 좋겠다. 그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경찰 몇 명이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그러다가 경찰 한 명도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이건 안 된다. 이건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유가족들의 눈을 보고 판단한 거예요.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 물러나더라고요. 이후 분향소에 아이들 영정을 놓으니 그 이후에는 경찰들도 손을 못 댔죠. 그 고비를 넘기면서 시민들께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많이 가졌어요. 유가족들이 녹사평 분향소에서 굉장히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는데, 그때 완전히 에너지를 얻었죠. 왜냐하면 삭발하거나 오체투지 하거나 3보 1배는 그냥 제가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시민들이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단 말이에요. 연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마치 우리가 무인도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무인도에서 아무리 외치고 소리지른다 한들 뭔 소용이 있겠어요. 막 살려달라고 아우성쳐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느끼는 순간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우리 편이 이렇게 많구나 깨닫는 순간 사고가 완전히 달라져버리는 거죠. 그 전까지는 정말 연약하고 누가 툭 던지면 상처 받아서 구석가서 울고 막 이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부터 이제 싸워도 충분히 견딜 수 있겠구나 하면서 버티고 훨씬 강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마 정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힘과 에너지로 계속 싸워나갈 것 같아요. -유가족 분들끼리 더 끈끈해질 수 있는 계기도 되었을 것 같아요.  많이 끈끈해졌죠. 그때 유가족들이 시민들과의 연대의 힘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이 싸움을 해나갈 수 있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더욱 끈끈해지게 됐죠. 사실 우리들의 공통점은 유가족이라는 것 하나밖에 없거든요. 어떻게 보면 모래알 같기도 하죠. 이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제 오랜 친구들이 다 떠나갔어요. 그들도 이 참사를 이해 못해요. 그런데 서로에 대한 친분도, 정보도 없는 유가족들은 계속 만나고 이야기하잖아요. 깊이 오래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서로 공감하고 있다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서로 서로 포기를 해버리거나 돌아서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제가 사진으로만 본 이 (희생자) 아이들이 왜 엄청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친숙할까 싶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 속 아이들을 보면 부모들의 얼굴이 겹쳐보이는 거예요. (웃음) 이게 참 희한하더라고. 그래서 친분이 뭐가 필요해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필요가 뭐 있어? 아무 필요 없어. 그냥 당신하고 나하고 이런 인연으로 같이 마주하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지. 다른 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아무리 심리치료 심리 상담을 해도 치유가 안 되는데, 유가족이 서로 대화하고 이야기하면 치유가 돼요.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거든요. 세월호나 다른 참사 유가족들과 만나도 똑같아요. 그 분들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고 공감하기 때문에 만났을 때 오래 만난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워요. 지금 세월호, 오송 참사, 대구 지하철, 삼풍 백화점, 성수대교 참사 등 대한민국의 각 참사 피해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분들도 많은 활동을 하시고 행사 때마다 같이 연대해서 목소리도 내고 있는데 그러면서 더욱 크게 느껴요.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소통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요.   -10월 5일 남산 둘레길 걷기 행사에서 떠나기 전에 호주에 계신 유가족 분하고 현장에 모인 분들이 영상통화를 하시더라구요. 그게 참 인상 깊었어요. 이태원 참사의 경우 외국인 희생자가 26명이나 돼요. 그런데 외국인 유족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알기 어려워요. 정부에서도 알려주는 것이 없고요.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가 정보를 주고 뭔가 하려고 노력하죠. 1주기 행사 때 이란에 있는 유가족들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했었는데 대사관에서 이유 없이 비자를 안 내줘서 못 온 일이 있었어요. 그 때 너무 안타까워서 1주기 행사 때 외국인 유가족 분들이랑 영상 통화를 했었어요. 줌을 열어서 같이 영상으로 이야기했었는데 참 좋더라고요. 올해 2주기에도 할 예정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지난 5일에도 우리가 시민들이랑 둘레길 걷기 행사를 한다고 하니 호주에 있는 유족분들이 인사를 하고 싶다고 요청이 왔었어요. 환경이나 국적이 다 다르지만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러셨을 것 같아요. 한국에는 유가족들이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그분들은 자기 나라에서 홀로 계셔야 하니까요. 그렇죠. 여기 와서 내 동지를 만난 느낌을 가지니까. 우리 분향소에 있을 때 해외 유가족들도 많이 오셨었어요. 한 가족은 우리가 행사할 때 입는 보라 조끼, 보라 잠바를 나눠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같이 입고 집회에 나가고, 유가족들과 만나서 허그하고 여러 가지 함께 하고 돌아갔는데 가서도 메일을 보내와요. 너무 좋았다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느끼는 공감과 연대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이야기했던 시민들과 함께하는 둘레길 걷기 행사가 작년에 이어 지난 10월 5일에 2주기를 맞아 또 다시 열렸어요.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셨고, 밝고 따뜻한 분위기여서 참 좋더라구요. 작년하고 분위기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작년 10월에는 맑은 날에 밖에서 걷는 게 힘들었어요. 그 때는 많이 힘들 때라 왜 여기서 이걸 하고 있지 왜 걷고 있지 별의 별 생각들이 많았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다르더라고요. 함께하는 사람들도 훨씬 많아졌어요. 저도 조금 놀랐는데 유가족들도 활발하게 웃고 시민들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았고요. 그래서 아마 시민들도 편하지 않았을까. 같이 어울리고 함께하는 것이 좋더라고요. 지난 2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동안에 유가족들도 이전보다는 편안해진 것 같아요.     -그 외에도 올 해 2주기 행사를 많이 준비하셨어요.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행사가 있으실까요? 우선 오늘부터 (9일) 매주 수요일에 별들의 집에서 함께 보라 팔찌와 리본을 만드는 행사가 열려요. 그리고 12일, 19일 주말에는 우리가 2주기 추모제와 10월 이태원 참사를 기억해 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포스터를 붙이면서 서울 둘레길을 시민들과 함께 걷습니다. 함께 연대해 줬던 시민단체나 또는 청년단체, 정당 분들을 초청을 해서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연대와 공감의 시간도 가지고요. 저희가 그동안 받기만 해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가지고요. 24일에는 2주기 159분 콘서트, 26일에는 시청 광장 시민 추모대회를 열고, 29일에는 국회에서 추모제를 엽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 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가 있어요. 청년들과의 나눔 행사인데요.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굉장히 힘들잖아요. 힘든 청년들이 이태원에서 압사를 당하고, 전세 사기로 돈 잃고.. 우리 사회가 청년들을 위해서 해주는 게 하나도 없다고 봐요. 너무나 힘들게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이들을 잃었지만 모든 유가족들이 부모의 마음으로 청년들을 위로해 주고 같이 공감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대역 근처에 카페를 하나 빌렸어요. 음료랑 유가족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 나눔 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청년들하고 나누고 연대하고 공감하면서 서로서로 위로받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올 해 10월에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서 처음 기획한 행사인데 반응이 괜찮으면 해마다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청 광장 분향소에서 ‘별들의 집’으로 오신 게 6월 16일이었어요. 시청 광장 분향소가 애도의 공간이었다면, 별들의 집은 어떤 공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기억과 소통의 공간이에요. 시민들과도 소통하고 유가족끼리도 소통하고요. 우리가 가족끼리 여기서 월에 한 번씩 간담회를 하거든요. 다 모여서 소통도 하고. 애초에 참사 이후 우리가 정부에 요청했던 게 이거였어요. 기억의 공간과 소통의 공간을 좀 마련해달라. 만약에 이 공간이 진작 만들어졌다면 우리가 분향소를 안 만들었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가족들이 모여서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도 필요했었다는 거죠. -이 곳 부림빌딩의 ‘별들의 집’은 11월 2일이 지나면 옮겨야 한다고 들었어요. 이 건물이 재개발 예정이라 무조건 이전을 해야 해요. 이곳이 몇 개월 밖에 못 쓰는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온 이유가 있어요. 특별법이 통과됐으니 야외 분향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고, 이제 우리는 특조위 활동이나 여러 가지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실내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우리한테 굉장히 중요했거든요. 아마 이번 주 토요일에 가족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결정을 할 거예요. 어디로 옮기는 게 좋을지.   -평소 일상을 살면서 잊고 있다가 참사 관련된 키워드를 보면 맞다, 이태원 참사가 있었지,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분들도 많으시고요. 그런 분들이 어떻게 유가족들에게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연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어요. 오늘 행사처럼 이렇게 와서 같이 팔찌 만들기를 한다든지 같이 한다던지, 기억 공간에 와서 아이들 사진을 한번 보고 또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하나 남기고 간다던지 이런 게 다 연대의 마음이고 하나하나 굉장히 소중해요. 그것까지도 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뉴스 기사에 댓글이라도 하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남겨주시는 것도 굉장히 커요. 제가 녹사평 분향소에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슬픔에만 빠져있었어요. 그 때 시민 분들이 와서 같이 애도하면서 저의 손을 잡고 ‘함께하겠습니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함께하겠다는 이야기가 너무 큰 위로가 됐어요. 저는 생전 처음 들었어요. ‘함께하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그 말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이태원참사 2주기>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위원장을 만나다 ① 2년이 지났지만…참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② 참사 향한 ‘2차 가해’...곳곳에서 쏟아지는 화살③ 공감과 연대로 더욱 강해진 우리④ 딸을 위해 투사가 된 아버지  *순으로 연재됩니다.
·
[이태원참사] 2년 전 10월 29일을 기억하고 행동하기
 2년 전 생일날엔 유독 밤에 연락이 많이 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뭔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생일이지만 기분이 나지 않아서 다음 날 있을 영어 시험을 핑계로 집에 있었던 날, 그래도 시험 전 날인데 모의고사라도 한 번 풀어봐야지 하면서 책상 앞에 앉아는 있지만 정작 눈은 랩탑 모니터 속 넷플릭스를 향해 있던 그 때. 연달아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에 그제서야 이 황당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  생일이니까 다들 내가 당연히 놀러 나갈 줄 알았던 것 같다. 또 이태원에서 약속잡는 걸 좋아했으니까 혹시나 참사 당일 현장에 있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상황 파악을 하고 밤새 기사를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실감을 잘 못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이 얼마나 말이 안 되고 참담한 일인지.  참사 다음 날 시험장에 유독 빈자리가 많았는데, 문제 푸는 내내 그 자리들이 신경쓰였다. 혹시 저 자리에 앉았어야 할 이가 어제 이태원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거면 어떡하지. 시험 끝나고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뒤통수를 보는데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거나, 취업준비를 하거나, 국가자격증을 따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로 보는 시험이라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많아봤자 30대였다. 그렇게 쏟아지는 사람들 중에서 혹시 누군가 어제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다면 어떡하나, 어제 나처럼 기사를 보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진 않았을까, 그렇게 허망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 날 입은 옷도, 날씨도 다 기억 날 정도로 2년 전 그 날이 기억나는 게 신기하단 생각을 하면서 마치 세월호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날, 맨투맨 티를 입고 나왔다가 너무 더워서 어깨 위에 걸쳐놓고 걸어다녔던 날, 낮에 중학교 동창 시형이네 아줌마가 하시는 문방구에 갔었다. 아줌마랑 뉴스 속보를 보면서 사람들 다 구조됐다던데 하는 얘기도 나눴었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보라는 기사가 떴고, 이후 말도 안 되는 팽목항 영상들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사건도 세월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처럼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크게 온 감정은 무력감. 이만치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원인 파악도 안되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도 이뤄지지 않는 걸 보면서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놀러갔다 죽었다.’ 기성 세대로서 어린 친구들을 지켜주지는 못할 망정 온갖 교묘한 말로 여론을 호도하고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정녕 이 사회의 주류라면 내가 이 곳에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만약 2년 전 이태원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가 하루하루 고되게 살다 그 날 하루 겨우 숨 돌리려 이태원을 찾았던 거라면? 그게 죄인가? 아니, 이태원의 밤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죄인가? 쏟아지는 인파로 늘 북적이는 할로윈 이태원인데 왜 그 해에만 유독 통제가 안 되었을까? 왜 공적 통제가 그 즈음에만 허술했던 걸까? 다양한 변수들을 찾고 추려서 원인을 알아야내야만 하지 않을까? 그걸 끝까지 파헤쳐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남은 이들을 위해서? 눈물 분노 응징의 3단계를 거치는 것 말고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혼자 밥벌이 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이 사회에 조금의 책임감을 가지는 게 성인 된 도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이런 작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지랖이라거나 현생 살라거나 하는 무책임하고 힘빠지는 말들만 돌아왔다. 그런 말을 하는 인간들과는 당최 상종을 하고 싶어지지 않고, 그래서 이런 얘길 아예 꺼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근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이 땅을 영영 떠날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여길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하지 않나, 그게 남은 이들의 책무가 아닐까 싶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마는 참사 이후 내 생일만 되면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분명 그 날 나도 이태원에 있을 수 있었다. 아마 그 즈음 지치지 않았다면 분명 밤에 놀러 나갔을거다. 올 해 10월 29일에도 많은 이들로부터 축하를 받을텐데 벌써부터 여러 복잡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이런 막연히 미안하고 무력한 마음을 갖는 것 외에 뭐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우연한 기회에 이태원 참사를 주제로 한 모임에 나가게 됐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모두 이태원 참사에 대한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왠지 마음의 빗장을 풀고 편안히 있어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머릿수 하나 정도 보태는 소심한 마음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뭔갈 해볼 수 있을까도 싶다.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더 이상 혼자 하는 고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은 든든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