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이 가능한 국가 일본: 우경화에 대한 소고(小考)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세계에 많은 불안을 던져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해 독일이 군비를 증가하면서 사실상 재무장을 선언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고 (MBC.2022.06.04.), 이를 계기로 혹시 중국도 타이완과 전쟁을 벌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졌습니다. 일본은 북한의 핵실험을 자위대를 ‘반격이 가능’하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보통국가화, 지금의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전환려는 시도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는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자위대(지에-타이)
일본국헌법 제9조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이라 할 수 있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영구히 이것을 포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해공군 및 그 외의 전력을 보지保持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第九条 日本国民は、正義と秩序を基調とする国際平和を誠実に希求し、国権の発動たる戦争と、武力による威嚇又は武力の行使は、国際紛争を解決する手段としては、永久にこれを放棄する。
2 前項の目的を達するため、陸海空軍その他の戦力は、これを保持しない。国の交戦権は、これを認めない。(일본 중의원 - 일본국헌법)
2차세계대전 직후, 일본을 지배했던 연합국 최고사령부(GHQ)는 일본의 체질을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도록 법을 개정하고, 노동조합을 승인하고 노동쟁의를 인정했으며, 농지를 개혁하고, 재벌을 해체했습니다. 그리고 1947년, 지금 일본의 헌법인 <평화헌법(平和憲法)>을 제정해 일본의 재무장을 법으로 막으려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 이후 국제 정세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1947년에는 독일이 동서로 나뉘어졌고, 1948년에는 조선이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옮겨가고(국부천대)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습니다. 이른바 냉전의 시작입니다. 이때부터 GHQ의 점령정책은 비군사화/민주화에서 반공/경제부흥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자본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삼아 중국이 태평양을 바로 건너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반공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GHQ의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한반도로 안심하고 건너가기 위해 일본을 방위할 전력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그해 7월 8일에 만든 것이 경찰예비대(警察予備隊)입니다. 또, 1948년부터는 그 전에 공직에서 추방했던 전범들을 다시 공직으로 불러들이고 소위 좌익이라 분류되는 사람들을 학교, 관공서 등에서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국전쟁을 위한 군수물자와 자본이 일본으로 쏟아지면서 일본 경제는 부흥을 맞이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조선특수(朝鮮特需, 쵸-센토쿠슈)라고 합니다. 일본의 경제발전과 우경화의 발판은 이때 마련되었습니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보안대(保安隊, 호안타이)로 이름을 고쳤다가 1954년 자위대(自衛隊, 지에-타이)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일본의 군대 아닌 군대, 자위대 탄생의 역사입니다.
안보투쟁과 시바 료타로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미국과 일본은 일본에서 GHQ와 미군을 철수하고 행정권을 일본 정부에게 인수하기로 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 미군은 철수하지만,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가 미일안전보장조약(소위 ‘안보조약’)을 체결, 주일미군이 탄생하게 됩니다.
일본 안에서는 일본의 야당과 좌익 세력, 반전 세력, 반미 세력을 중심으로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집니다. 안보조약을 둘러싸고 다양한 세력이 이에 반대하며 벌어진 반정부 혹은 반미 기조의 일련의 시위를 안보투쟁(安保闘争)이라고 합니다. 요시다 시게루 이후 총리가 된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가 이 시위를 야쿠자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시위는 점점 격화되었습니다. 이에 키시 노부스케는 재빠르게 조약을 체결한 후 자리에서 물러나 버립니다. 조약이 이미 체결되고 조약을 주도한 키시 총리가 물러나면서 시위의 규모는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키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1899~1965)와 자민당 정부가 경제 발전을 국정의 핵심으로 삼고 국면을 전환하면서 자민당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정치권(야당)과 시위전선이 분열되게 됩니다. 또 학생 시위가 점점 극렬화되면서 학생 운동 내에서 비행기 납치, 테러, 서로간의 살인 등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것이 부각되어 보도되면서 학생 운동에 대한 관심도 매우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1923~1996)가 있습니다. 일본 역사 소설계를 풍미했던 시바 료타로는 인물 중심으로 내용을 서술하면서 그 인물에 대해 깊이 빠져들게 하는 다양한 자료 소개와 필력을 통해 일본 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 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본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들어봤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같은 인물은 사실 역사적으로 엄청 큰 역할을 한 것도 아니고 사후에 잊혀졌던 사람이지만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龍馬が行く)』를 통해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전후 일본에서 지식인들 중에는 일본은 왜 전쟁을 일으켜 일본과 아시아에 재앙을 가져왔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일본 민중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전쟁에 대해서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바 료타로의 두 편의 소설이 매우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메이지 유신의 과정을 그린 『나는 듯이(翔ぶが如く, 1975~76)』와 러일전쟁을 그린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 1969~1972)』. 이 두 편의 소설은 이후 일본 대중 사이에서 ‘쇼와 천황은 문제가 있지만 메이지, 다이쇼 천황은 훌륭했다’, ‘천황은 전쟁에 잘못이 없고 군부가 잘못한 것이다’, ‘45년 이전은 나빴고 45년 이후는 선하다’라는 식의 역사 인식을 퍼트리게 됩니다. 미국이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이런 역사 인식의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천황에 대한 전쟁 책임을 묻지 않은 미국, 미국에 의한 일본 지배, 일본 주도의 전쟁 속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일본의 대중, 대중문화를 통한 새로운 역사 해석 등은 일본 안에서 미국에 대한 뒤틀린 인식과 근현대사 인식을 불러일으킵니다.
우경화?
일본은 전쟁 전에도 매우 잘 살았고 1945년을 전후로 자기들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잠시 경제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1950년대 이후 다시 경제를 복원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1956년 일본 정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더이상 전후戰後가 아니다(もはや戦後ではない).”
이 말의 원래 뜻은 경제적인 의미에서 전쟁 피해를 복구했다는 뜻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비정상적인 어둠의 시대를 끝내고, 혹은 그것과는 이제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것이며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단절은 일본 문화를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자신과 자기 주변에 집중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새로운 일본이 탄생하는 과정입니다.
1950년대 이후의 가파른 경제적 성장 속에서 역사나 정치 같은 거시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자신과 자기 주변에 집중하는 풍조가 지배하던 일본에서 갑자기 국민을 외치며 등장한 고이즈미 쥰이치로(小泉純一郎)와 아베 신조오(安倍晋三).
이렇게 생각하면 일본이 최근들어 우경화되었는가 라는 질문은 다소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애초에 좌나 우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그 당사자들이 어떤 특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외국에 대한 보도는 지나치게 한국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 대한 보도도 마찬가지고요. 어느 정도는 역사적인 경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대부분은 한국이 보고 싶은 보도만을 하고 한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술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반격이 가능한 국가
일본은 북한을 핑계 삼아 재무장을 하겠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어디까지나 핑계고, 사실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로 인한 안보 공백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요.
최근 일본이 안보문서를 수정해 일본을 ‘반격이 가능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제이크 설리번 미국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은 이렇습니다.
"일본은 새로운 국가안보전략, 국가방위전략 및 방위력 정비계획 프로그램의 채택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을 강화하고 방어하기 위한 대담하고 역사적인 조치를 취했다"
"방위비 투자를 대폭 늘리겠다는 일본의 목표도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현대화할 것"
"새로운 전략은 기시다 총리의 국제 평화와 핵 비확산에 대한 깊은 의지를 강화하고,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이자 G7 개최국으로서 2023년 일본의 리더십 발휘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러시아가 잔혹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준 걸 포함해 세계 전역에서 보여준 기시다 총리와 일본의 리더십에 감사한다"
"우리와 우리 파트너들이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게 될 일본의 역사적인 새 국가 안보 전략에 대해 기시다 총리와 일본 국민들에게 축하한다" (SBS.2022.12.17.)
애초에 일본의 소위 재무장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 혹은 자국우선주의가 국제 사회에서 큰 파장을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 2000년대에 들어선 후 조지 W.부시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대통령들은 모두 이런 기조를 가지고 아시아 문제를 다뤄왔다고 생각합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그것을 대놓고 과격하게 말했을 뿐이고, 나머지 정권들이 크게 달랐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지금 조 바이든 정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앞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동북아시아 전략을 복잡하게 계산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안보 공백을 불식시키고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하기 위해 자위대의 권한을 증가시키려 합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사이, 시진핑은 자신의 권력을 늘리며 자신의 (위험한?)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봅니다.
물론 미시적으로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거시적으로는 하나의 보편적인 원칙을 정권에 상관없이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거의 유일한 외교 정책의 원칙은 이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외교적 전술을 구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권에 상관 없이 제국주의와 침략, 전쟁, 반인권적 언행에 대해 반대한다는 원칙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무 원칙 없이 정권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외교 전술과 외교 정책이 바뀐다면 그 누구도 한국의 말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